제목 ; 낙성무제 - 용대운 著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序 1 장 주루풍운(酒樓風雲) 2 장 살인중첩(殺人重疊) 3 장 중주쌍사(中州雙邪) 4 장 황의라마 5 장 당이선생(唐二先生) 6 장 분뢰일전(分雷一電) 7 장 남장미녀(男裝美女) 8 장 해천쌍로(海天雙老) 9 장 기문진식(奇門陣式) 10 장 절세소부(絶世少婦) 11 장 일대신투(一代神偸) 12 장 남궁검문(南宮劍門)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이 작품은 1986년 습작 시절에 쓴 원고로서, 당시에는 출판 시장이 극도의 불경기여서 전혀 출간되리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는데 어느 날 대본소에 가보니 <낙 성무제(落星武帝)>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책이 나와 있었다. 얼마 후 출판사에 연락을 해보니 출판사는 이미 간판을 내린 후여서 혼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작품을 쓴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는 고료라고 하기에도 낯간지러운 푼돈이었고, 그 후 그 출판사에서 책을 한 질도 받지 못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 작품 전에 쓴 또 하나의 습작품은 아예 출판된 제목조차 알지 못해 지금까지 구경도 하 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때 언뜻 듣기로, 미비한 후반부를 다른 사람이 수정하여 책이 나왔 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당시의 열악한 무협 시장을 생각해 보면 나 혼자만의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었으나, 지금 생 각해도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본 저자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작품을 찾아 내 자신의 필명 으로 책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본 작품은 습작 시절의 작품답게 군데군데 어설픈 장면들이 눈에 띈다. 특히 문장이 형편없 어서, 이번에 작품을 손질할 때도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이런 정도의 문장력으로 용케 출간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미비한 문장을 뜯어고치고, 미흡한 장면들을 집중적으로 수정, 보완 했으나 아직도 고칠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하나 이 이상의 수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가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흡하고 어설픈 솜씨지만, 그래도 습작 시절에 용기를 잃지 않고 쓴 것이라 나름대로의 의 미와 애착을 느끼고 있다. 지금 읽어 보면 80년대 당시 국내 무협의 전형(典型)에서 크게 벗 어나지 않는 포맷과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그 후의 내 작품 활동에 어떤 형식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장보도(藏寶圖)로 인해 거대한 풍운(風雲)이 일기 시작한 강호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비의 청년고수, 석중옥(石重玉)!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수많은 고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종횡무영도(縱橫無影盜) 한백(寒魄)의 장보고(藏寶庫)에 얽힌 사연은? 그리고...... 끝도 모르게 계속되는 혈풍(血風)의 배후에 도사린 최후의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한 자루 철검(鐵劍)으로 강호의 거마(巨魔)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음모와 배신으로 얼룩진 강호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주인공, 석중옥의 행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독자제현의 건승을 빈다. 신년지절(新年之節) 용화소축(龍華小築)에서 용대운(龍大雲) 배상(拜上). 序 환우삼마(環宇三魔)! 무림인들에게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죽음! 그렇다. 그들은 항상 죽음을 몰고 다녔다. 피와 공포(恐怖)와 죽음을...... 단 삼(三) 인(人)이었지만, 그들은 수백, 수천의 마두(魔頭)들보다도 더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앞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허름한 백의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단 일(一) 도(刀)에 환우삼마 는 피로 점철된 자신들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백의중년인의 도에 쓰러지면서, 환우삼마의 첫째인 천마(天魔) 위천양(韋天陽)은 사력을 다해 물었다. "다,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 위천양은 자신들의 죽음이 결코 억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 었다. "도왕(刀王) 여절파(呂絶破)!" 백의인의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구유천자(九幽天子) 한백령(寒白靈)!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제일인(魔道第一人)이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가공할 마공 (魔功)을 지닌 희대의 마인(魔人)이었다. 그는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로 불렸고, 온 천하의 마도인(魔道人)들을 모아 구유마방(九幽 魔幇)이라는 가공할 집단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구유마방이 한줌의 잿더미로 변해 버린 것이다. 구유천자를 비롯한 천여 명의 마도인들이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불귀(不歸)의 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람들은 이 엄청난 일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왕 여절파......!" 그렇다. 바로 그였던 것이다. * * * 도왕(刀王) 여절파(呂絶破)! 무림 이천년사 이래, 그와 같은 도(刀)의 절대자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도로 이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했고, 무림인으로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했다. "도왕 여절파! 그분은 사람이 아닌 인세(人世)의 신(神)이시다!" "아암! 그렇고말고...... 그분은 무림출도(武林出道) 이래 단 이(二) 초(招) 이상을 펼쳐 본 적 이 없으시지." "그분이야말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 할 만하네." "천하무적이라...... 그 말은 약간 성급한걸." "아니...... 그럼 그분의 무공에 필적할 만한 무공이 있단 말인가?" "잊었는가? 천년 전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었던 혈왕(血王) 위 혼(魏魂)을......" "아, 그러고 보니 백년 전에 고금제일검객(古今第一劍客)이셨던 검왕(劍王) 절대검자(絶代劍 子)의 무공도 결코 도왕에 못지않군." "그렇지. 혈왕 위혼과 검왕 절대검자의 무공이 있는 한 도왕 여절파를 천하무적이라고 말할 수 없네." -혈왕과 검왕의 무공이 있는 한 도왕을 천하무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도왕 여절파의 모습은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 자루 뇌도(雷刀)를 휘두르며 천하를 주 름잡았던 여절파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쉴새없는 세월은 어느새 백년이 흘러 버렸다. 백년이...... 제 1 장 주루풍운(酒樓風雲) 중조산(中條山). 중조산은 산서성(山西省) 남단에 위치한 가파른 산이었다. 산신(山神)은 길신(吉神) 태봉(泰逢).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이 옛날에는 서악(西嶽) 화산(華山)과 맞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황하(黃河)가 흐르지 못하고 범람하게 되자 강신(江神) 거령(巨靈)이 두 산을 갈라 놓아 그 사이로 황하가 흐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중조산과 화산에는 아직도 그 거대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손자국을 고장 (高掌)이라고 했다. 그런 전설이야 어쨌든, 중조산의 깊은 계곡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 져 중조산은 온통 푸르름으로 뒤덮였다. 노호령(怒虎嶺). 노호령은 중조산에서도 가파르기로 유명한 산마루였다. 때는 정오. 찌는 듯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비좁고 꼬불꼬불한 노호령의 고갯길에 한 인영이 나타났 다. 일신에 누런 황의를 걸친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황의장한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급한 걸음으로 고갯길을 올라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불안한 모습이었다. 고갯마루. 바람만 불어도 무너져 내릴 듯한 낡고 초라한 주점 하나가 나타났다. '주(酒)'라고 쓰여진 빛 바랜 붉은 깃발이 한쪽에서 펄럭이고 있는 광경이 왠지 모르게 조금은 을씨년스러워 보 였다. 황의장한은 약간 망설이다가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뽀얗게 내린 주점 안에는 서너 개의 낡고 더러운 탁자가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었다. 황의장한은 주점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섬전 같은 눈빛으로 주점 안을 쓸어보았다. 그곳에는 그보다 먼저 온 세 사람의 손님이 있었다. 서동(書童)인 듯한 열네 살 가량의 소년 과 그의 주인인 듯한 흑의서생(黑衣書生) 하나,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구석 자리에 낡은 청삼(靑衫)을 걸친 평범한 용모의 오순 늙은이가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황의장한은 살피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 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곧 그들이 자 신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인물들임을 알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가장 우측의 빈 탁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장! 여기 잘 구운 오리고기 한 마리와 죽엽청(竹葉淸) 두 병만 주시오." 주점 안은 매우 조용했다. 황의장한보다 먼저 온 세 사람은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고, 주방 안에서는 가벼운 칼 질 소리와 구수한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내리쬐는 한낮의 폭양(暴陽)이 내다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향긋한 냄새와 함께 뚱뚱한 주점의 주인이 먹음직스럽게 구운 오리고기와 술 두 병을 들고 황의장한에게 다가왔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콰당! 낡을 대로 낡은 주점의 문이 박살나며 문가에 홍영(紅影)이 어른거렸다. 황의장한이 깜짝 놀라 보니 어느 사이엔가 장내에는 두 명의 인물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들의 복장은 몹시 특이했다. 붉은 피풍...... 붉은 장삼...... 머리에 두른 것도 혈건(血巾)이었고, 심지어는 발에도 혈단화(血短靴)를 신고 있었다. 그뿐이랴? 두 인물은 얼굴마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만일 우측 인물의 턱밑에 검은 점이 찍혀 있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절대로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온몸이 핏빛 일색인 것과는 달리 그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것이 보는 이로 하 여금 왠지 모르게 소름 끼치도록 했다. 그들은 독사처럼 예리한 눈으로 장내를 쓸어보았다. 이어, 그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황의장한의 얼굴에 꽂혔다. 시체처럼 하얀 그들의 얼굴에 흰 선이 그어졌다. 가슴 떨리도록 차가운 웃음이었다. "신행무영(神行無影) 황비룡(黃飛龍)! 어디까지 도망쳤나 했더니 기껏 여기에 있었군." 그들의 입이 거의 동시에 열리며 똑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황의장한의 안색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처참하게 구겨져 있 었다. 그러다가 이 말을 듣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혀, 혈전쌍살(血電雙殺)! 두, 두 분께서 이 황 모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황비룡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처량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신행무영 황비룡이라면 그래도 하남성(河南省) 일대에서는 재빠른 신법(身法)과 날카로운 손속으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고수인데 이들 두 홍의인을 보자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혈전쌍살은 장강이북(長江以北)에서는 거의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하고 있는 희대의 살성(殺星)이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쌍둥이로,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잔인한 살수(殺手)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좌측에 서 있던 대살(大殺) 필무덕(畢無德)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황비룡! 긴말할 것 없다. 빨리 물건을 내놓아라." 그 뒤를 이어 얼굴에 점이 찍힌 이살(二殺) 필무인(畢無仁)이 입을 열었다. "만일 이 말이 끝날 때까지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바로 그때였다. 얼굴에 진땀을 흘리며 떨고 있던 황비룡의 몸이 비호처럼 뚫린 우측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스-윽! 과연 신행무영이란 외호가 말해 주듯 놀라운 신법이었다. 하나 그 순간, "살(殺)......!" 혈전쌍살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지며 두 줄기의 붉은 혈광(血光)이 허공에 번뜩였다. 쐐-액! "크-아-악-!" 참혹한 비명이 터지며 혈화(血花)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중인들의 눈이 경악과 공포로 크게 부릅떠졌다. 놀랍게도 창문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가던 황비룡이 가슴과 배에 각기 일(一) 검(劍)씩을 맞 고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가슴과 배가 쩍 갈라져 그 사이로 비릿한 비린내와 함께 내장이 내비치고 있었다. 황비룡은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죽은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으으......"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뚱보주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청삼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혈전쌍살의 손에는 어느 틈에 꺼내 들었는지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핏빛 장검이 한 자루씩 쥐여져 있었다. "가소로운 놈!" "감히 우리의 손을 벗어나려 하다니......" 혈전쌍살은 싸늘히 중얼거리며 황비룡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 그들은 황비룡의 몸을 뒤집어 그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대살 필무덕이 황비룡의 품에서 작은 금갑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군!" 그는 금갑을 탐욕스런 눈으로 보며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그와 이살 필무인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우리들이 물건을 가졌다는 것을 다른 자들이 알면 곤란하지." 이살 필무인은 의미 심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죽은 자는 입을 열 수 없는 법이오." 그들의 말에 포함된 의미를 알아차리고 중인들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죽은 자는 보물도 가질 수 없는 법이지." 냉랭한 음성과 함께 주루 안으로 날아드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칙칙한 회의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눈빛이 극도로 무심했고, 얄팍한 입술에 칼날같이 날카롭게 솟은 매부리코, 바람이 불면 금시라도 날아갈 듯한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니고 있 었다. 더구나 허리춤에 길다란 기형검(奇形劍)을 차고 있어 더욱 말라 보였다. 혈전쌍살의 눈빛이 흉악해졌다. "웬 놈이냐?" 회의중년인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죽은 자에게서 보물을 가져 갈 사람!" "이 빌어먹을 놈이......!" 이살 필무인이 싸늘히 외치며 혈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번-쩍! 돌연 장내에 한 줄기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섬광은 너무도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져 중인들은 자신들이 허깨비를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 이살 필무인은 이상한 자세로 몸이 굳어 있었다. 검을 반쯤 뽑다 만 자세.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내를 주시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회의중년인은 약간 낮추었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찰칵! 맑은 음향과 함께 그의 손이 허리에 머물렀다. 회의중년인의 허리에는 기형검 하나가 달랑 매여 있었다. 의아해 하던 중인들의 안색이 갑자기 대변했다. 이살 필무인의 목에서 검붉은 반점이 나타난 것을 본 것이다. 그 반점은 점점 커지더니 피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채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랍게도 회의중년인 은 이미 필무인의 목을 베고 검을 검집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털썩! 이살 필무인의 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통나무같이 나뒹굴었다. 대살 필무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평생 이와 같이 가공할 쾌검(快劍)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시체같이 창백한 그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귀...... 귀하는 뉘시오?" 회의중년인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순간 대살 필무덕의 눈이 번쩍 빛났다. 회의중년인은 원래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오른손잡이인 것이다. 한데 물건을 달라고 오른손을 내밀었으니...... 생각은 길고 행동은 짧았다. "이-놈!" 대살 필무덕은 벼락같이 선제 공격을 했다. 파파파-팟! 번개 같은 검광이 가공할 속도로 회의중년인을 덮쳤다. 회의중년인의 몸이 약간 기우뚱했다. 순간 그의 손에서 소리도 없이 검광이 불을 뿜었다. 째쨍!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필무덕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크으...... 이, 이럴 수가...... 그 자세에서...... 어, 어떻게.. 그의 가슴에는 부러진 자신의 검이 박혀 있었다. "나의 분광(分光)이란 외호는 그냥 붙은 게 아니지." 회의중년인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동시에, 찰칵! 그의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대살 필무덕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부, 분광...... 너, 너는 분광쾌검(分光快劍)...... 마, 마운(馬雲)이구나......!" 쿵! 말을 끝마치기도 전, 그의 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실로 찰나간에 공포 스런 살명(殺名)을 떨치던 혈전쌍살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회의중년인의 쾌검은 그야말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천하제일쾌(天下第一快)! 그의 쾌검은 가히 천하제일쾌검으로 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분광쾌검 마운! 그는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쾌검수(快劍手)였다. 그는 백년래 강 호에서 최고의 쾌검수로 명성을 떨쳤다. 오 년 전, 천하를 피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천중칠살(天中七煞)이 그의 가공할 쾌검 에 단 삼 초 만에 도륙이 난 이후, 무림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가 천하제일쾌검수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광쾌검 마운은 천천히 대살 필무덕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대살 필무덕의 몸에서 예의 금갑을 꺼내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고개를 돌려 중인들을 한차례 쓸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색 투명했으나 뚱보주인과 청삼노인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름이 오싹 끼침을 느끼고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마운은 그들이 무림인이 아님을 알았는지 시선을 돌려 주점을 벗어났다. 휙-! 그의 몸은 번개같이 노호령의 숲속으로 사라졌다. "사, 살인이다!"맛?..... 하,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죽다니......" 그제서야 뚱보주인과 청삼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주점 밖으로 달려갔다. 삽시간에 주점은 썰렁하게 텅 비어 버렸다. 아니, 아직 손님은 있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흑의서생과 그의 서동인 듯한 백의소년은 처음의 위치 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백의소년은 몹시도 귀여웠다. 나이는 대략 십사오 세쯤 되었으며, 또렷한 이목구비에 살결은 여인의 것보다 하얗고 보드라웠다. 더구나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모습은 너무도 깜찍스 럽고 영악해 보였다. 백의소년은 흑백(黑白)이 분명한 두 눈을 또르르 굴리며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다. 한데 놀랍게도 이 피비린내나는 일장의 혈투(血鬪)에 백의소년은 조금도 경악이나 공포 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백의소년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초롱한 눈을 돌려 옆에 앉아 있는 흑의서생을 바라보았다. 흑의서생(黑衣書生). 이토록 푹푹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짙은 흑의를 걸친 흑의서생은 한눈에 보아도 몹시 이상했다.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동여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렇게나 매어진 탓에 앞머리가 헝클어 져 얼굴이 반쯤 가리어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는 깨끗하였으나 별로 고급스러운 옷 같지는 않아 보였다. 거기에다, 분명 서 생임에도 불구하고 우측 허리에는 시커멓게 녹슨 장검 한 자루를 아무렇게나 달랑 차고 있 었으니...... 어찌 보면 영락없는 낙척문사(落拓文士) 같았다. 더욱더 기이한 것은 그의 검이 우측 허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만일 검법을 익혔다면 좌수검(左手劍)을 익혔음이 분명했다. 본래 좌수검은 음독궤이함을 그 생명으로 하고 있으나, 그 성질상 절정(絶頂)에 이르기는 거 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무림에서는 좌수검을 쓰는 자들을 방문좌도(傍門左道)로 규정 짓고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당금 무림에서는 좌수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남들의 시선 을 의식하여 허리가 아닌 등에 차고 다니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백의소년이 흑의서생을 바라보고 귀여운 눈망울을 번쩍이자, "소명(少明)! 이제 그만 가자."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감각하기만 했던 흑의서생이 나직하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말꼬리가 뭉글어지지 않고 분명하게 맺어져 듣기에 편안한 느 낌을 주었다. 더구나 말투가 약간 느릿느릿하고 어조가 완만해서 권태롭고 무심하게 들릴 만한데도 오히려 이상한 생명력(生命力)과 역동감(力動感)을 느낄 수 있는 묘한 음색이었다. "예, 공자님!" 백의소년은 흑의서생의 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흑의서생은 성큼성큼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앉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일어서니 무척 훤칠한 키였다. 흑의서생과 백의소년이 막 주점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여...... 여보시오......" 어디선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음성이 들려 오지 않는가! 흑의서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곳. 이미 죽은 줄 알았던 황비룡이 기를 쓰고 고개를 들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 백의소년은 탄성을 지르며 흑의서생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빠르게 황비룡에게로 달려갔다. 흑의서생은 그것을 보고 약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그곳으로 다가갔 다. 황비룡의 눈은 이미 생기(生氣)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 다. 흑의서생은 한눈에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알아차렸다. "으으으...... 나,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소?" 힘겹게 말을 내뱉는 황비룡의 입에서 잘려진 내장이 시커먼 선혈에 섞여 쏟아져 나왔다. 흑의서생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힐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백의소년을 바라보았다. 백의소년은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황비룡을 보고 있었다. 흑의서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고 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황비룡은 꺼져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바지 오른쪽을 뒤져 보시오." 흑의서생은 머뭇거리지 않고 허리를 굽혀 그의 우측 바지춤을 더듬어 보았다. 무언가가 만져졌다. "으으...... 자, 작은 은낭(銀囊)이 있을 것이오. 그, 그것을 금릉(金陵)의...... 임가장(林家莊)에 가져다 주시오." 황비룡이 쥐어짜듯 말했다. 과연, 흑의서생이 그의 바지춤에서 꺼낸 것은 보기에도 값나가 보이는 은색 주머니였다. 이 안에 있는 것이 혈전쌍살과 분광쾌검이 노리던 원래의 물건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흑의서생은 담담한 눈으로 은색 주머니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것을 금릉의 임가장에 전해 주기만 하면 되오?" "그, 그렇소...... 이 일에는 여러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제발 부탁......" 황비룡의 말은 그만 끊기고 말았다. 죽은 것이다. 흑의서생은 잠시 은색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싸늘히 식어 가는 시신을 응시하다가 결심을 굳힌 듯 은색 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에 넣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산발한 머리로 뒤덮여 있는지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 다. 하나,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눈빛에는 기이한 반짝임이 일렁거리고 있었 다. "소명, 이 녀석! 너 때문에 귀찮은 일을 맡았구나."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으며 흑의서생은 백의소년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점을 벗 어났다. 백의소년은 황비룡의 시체를 흘긋 돌아보다가 이내 흑의서생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세 구의 시체만이 뜨거운 대낮에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제 2 장 살인중첩(殺人重疊) 녹음이 우거진 노호령의 소로를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두 인영이 있었다. 바로 흑의서생과 백의소년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흑의서생의 뒤를 졸졸 따라 내려오고 있었 고, 흑의서생은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흑의서생의 걸음은 무척 특이했다. 사람들은 의당 하루에 몇 리씩 걸음을 옮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걷는 걸음마다 보폭(步幅)이 일정하지는 않다. 물론 습관에 따라 보폭이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약간 넓고 때로는 약간 좁기도 하다. 더구나 산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 흑의서생의 보폭은 너무도 일정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규칙적인 발걸음이었다. 그것은 이 흑의서생이 어떤 일에도 마음 이 흔들리지 않는 절대부동(絶對不動)의 정력(定力)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 다. 흑의서생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백의소년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때 돌연 그들의 앞에 시커먼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흑의서생은 담담한 시선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시선에 기광이 번쩍거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온몸에 벌집처럼 수많은 암기(暗器)들이 꽂혀 있는 남자의 시체였다. 그의 몸에는 너무나 빽빽히 암기가 꽂혀 있는지라 입고 있는 본래의 옷 색깔조차도 제대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 흑의서생이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시체는 바로 분광쾌검 마운이었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실로 놀라운 쾌검으로 혈전쌍살을 도륙냈던 그가 아닌가? 그런데 그토록 눈 부신 쾌검(快劍)을 자랑하던 그가 이런 곳에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다니,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예리한 광채가 번뜩이는 기형검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분광참홍검(分光斬虹劍)! 이미 십여 년 간이나 제일쾌검으로 명성을 떨쳐 왔던 이 검은 중간이 부러져 있었다. 마운 은 손이 부서져라고 부러진 분광참홍검을 움켜잡고 있었다. "아!" 백의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시체의 끔찍한 모습에 크게 놀란 듯했다. 시체의 얼굴은 이미 푸르뎅뎅하게 굳어 있었다. 백의소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색혈, 색혈각(索血角), 준자표(俊子 ), 연미추혼사(燕尾追魂絲), 백호정(白虎釘), 혈봉망(血蜂 茫), 봉미침(鳳尾針)...... 게다가 은잠(銀簪)과 철련자(鐵蓮子)까지...... 온 천하의 암기가 이 사 람의 몸에 다 모였군요. 공자님! 정말 천하에 이렇게 재수없는 사람도 있을까요?" 귀엽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흑의서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소명! 그래도 이자는 죽기 전만 해도강호에서 가장 빠른 쾌검으로 불렸었다." "휴...... 공자님,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도 죽었는데......" 백의소년은 제법 탄식까지 터뜨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래...... 아무리 빨라도 죽으면 소용없지." 백의소년은 분광쾌검 마운의 시체를 다시 한 번 흘끗 바라보며 종알거렸다. "정말 보기에도 끔찍하군요. 누가 이 사람을 죽였을까요? 이렇게 많은 암기가 꽂혀 있는 걸 로 보아 한두 사람의 짓 같지는 않은데요." "그 반대다. 그자는 이 많은 암기를 단 일(一) 수(手)로 한꺼번에 쏟아 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었을 테니까......" "한꺼번에...... 이 많은 암기를......?" 백의소년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지, 꼭 한 사람!" "그게 누군데요?" 흑의서생은 묵묵히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 사람!" 백의소년은 화들짝 놀라 흑의서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삼 장여 떨어진 바위 옆에는 한 구의 시체가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었다. "누, 누군가요, 저 사람이?" "천수나타(千手羅陀) 혁일심(赫一心)!" "굉장한 고수인가요?" 흑의서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를 바라보았다. "음...... 그의 광풍만화표(狂風萬花 )는 무림일절(武林一絶)로 알려져 있지." 그 시체는 육십대 후반의 얼굴이 추악하고 등이 낙타처럼 굽은 늙은이였다. 그는 깡마른 몸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주름진 한 손에는 커다란 주머니를 꼭 쥐고 있었다. 그 주머니가 바로 그의 성명암기인 만화표낭(萬花 囊)이었다. 강북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암기의 달인(達人)이 너무도 허망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혁일심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일까? 그 해답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목에 실로 기이한 물건 하나가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은빛을 뿌려 내는 작은 물건! 그것은 시중에서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은전(銀錢)이었다. 하나, 그것이 바로 천수나타 혁일심의 목에 박혀 있으니 조금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백의소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동안 은전을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토록 대단한 사람이 왜 이렇게 싱겁게 죽어 있을까요?" "나는 무림에 한 구의 노랫가락이 전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노래인데요?" "천수막강부당일전(千手莫强不當一錢)!" "천수는 비록 강하지만 일전을 당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 흑의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수란 천수나타 혁일심을 나타내는 것이고, 일전이란......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은전추혼 (銀錢追魂) 당인(唐仁)을 가리키는 것이지." 백의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 냈다. "아! 그렇다면 저 사람의 목에 박힌 은전은 당인의 것이군요." "그렇다. 그가 아니고서야 누가 혁일심보다 더 뛰어난 암기수법을 펼칠 수 있겠느냐?" 흑의서생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그 쓸모없는 금갑이 여러 사람을 해치는구나." 소로(小路)는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이 또 하나의 시체를 발견한 것은 언덕의 중턱에 이르는 지점이었다. 그것은 삼십대 후반의,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른 작은 몸집을 지닌 회의사내였다. 회의사내는 머리에 흰색 두건을 매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단 하나의 상처 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 득의의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또 시체군요, 공자님! 이 사람은 누굴까요?" 흑의서생은 무심한 시선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흰색 두건을 매는 것은 사천당문의 오랜 습관이다. 그러니 이자는 은전추혼 당인일 것이다. 천수나타 혁일심에게서 금갑을 탈취해 가다가 더 무서운 적수를 만난 것이겠지." 백의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는 죽어 있는 모양이 좀 이상한데요?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으니......" "그것은 흉수가 그를 죽일 때까지도 그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것은 더욱 이상한데요, 공자님?" "무엇이 말이냐?" "공자님께서는 당인이 굉장한 고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고수가 자신이 남에게 죽음을 당할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것은 흉수의 경공(輕功)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흑의서생은 당인의 시체를 뒤집었다. "봐라!" 과연, 당인의 뒤통수에는 깨알만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에선 피가 솟아나오고 있 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흰색 두건이 붉게 물든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묘한 섬뜩함 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 백의소년은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공자님! 이 사람을 죽인 흉수는 신법(身法)의 대가(大家)이겠군요." "뿐만 아니라 그는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살수(殺手)란다!" 흑의서생은 당인의 뒤통수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이것은 파홍지(破虹指)라는 마도(魔道)의 절정지공(絶頂指功)이다. 당금 무림에서 신법이 탁 월하고 파홍지를 장기로 쓰는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가 누군데요?" "무영귀수(無影鬼手) 나립(羅立)!" 나립의 시신은 다 쓰러져 가는 황폐한 사당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뱀이 기어간 듯한 상처가 여기저기 거의 백여 개나 그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 상처 부위에는 하나같이 시커멓게 탄 도흔(刀痕)이 있었다. 전신에 크고 작은 백여 개의 칼자국을 남긴 채 쓰러져 있는 나립의 시신은 도저히 강호무림 에 살명(殺名)을 떨치던 절정고수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백의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립은 너무도 처참하게 죽어 있었던 것이다. "공자님! 이 사람은 마치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난도질한 듯한 모습인데요?" 흑의서생은 무심한 시선으로 나립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가공할 수법이야. 이자는 한 번에 백스물여덟 번의 칼질을 했군." 백의소년은 흑백이 분명한, 동그란 눈을 힘껏 부릅떴다. "아니, 그럼 이 사람도 한 인물의 손에 죽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의 몸에 나 있는 도흔을 잘 봐라.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 면 무언가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백의소년은 흑의서생의 말에 나립의 시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과연, 나립의 전신에 어지럽게 나 있는 백여 개의 도흔은 어떤 일정한 공통점이 있지 않은 가? 그것은 모든 도흔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진 것이란 점이었다. "더구나 그 도흔은 검게 타 있지 않느냐? 그것은 그자의 도에서 뿜어 나오는 극양(極陽)의 열기에 의한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지요?" 돌연, 흑의서생의 심유한 두 눈에서 질식할 듯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 그 광망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다시 원래의 고요하고 깊이 가라앉은 절대무심의 정적 을 되찾았다. "우리는 곧 그를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의소년은 귀여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흑의서생은 그런 백의소년이 귀여운 듯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런 일은 너가 조금만 유의를 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봐라! 나립의 발 아래 무엇이 있는 지를." 백의소년은 급히 나립의 발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는 조그만 금갑이 열린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금갑 안에는 주먹만한 돌멩이가 가득했다. 백의소년은 한눈에 그것이 혈전쌍살이 황비룡의 몸에서 빼앗은 것임을 알아보았다. "아!" 그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할 때, "나립을 죽인 자는 금갑 안에 든 물건이 자신이 노리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속 은 것을 알고 다시 황비룡이 쓰러진 곳으로 갔을 것이고 곧 우리가 그 물건을 가져 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그가 곧 우리를 찾겠군요?" 바로 그 순간, "벌써 찾았다, 꼬마야!"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사당 밖에서 들려 왔다. 백의소년은 깜짝 놀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당 밖. 언제 나타났을까? 장대한 체구에 구레나룻이 위맹한 청의대한이 우뚝 서 있었다. 마치 노(櫓) 같은 엄청난 크 기의 장도(長刀)를 비껴 든 그 모습은 가히 하늘에서 내려온 천장(天將)을 방불케 했다. 하나 흑의서생은 마치 그의 출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 다. "당신이 전뢰도(電雷刀) 염평(閻平)이오?" 청의장한은 의외로 침착한 흑의서생의 태도에 흠칫 놀란 듯했다. "그렇소. 본인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뜻밖이구려." 그의 음성은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굉량한 것이었다. 흑의서생의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물처럼 고요한 두 눈이 조용히 빛났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소. 천하에서 이토록 극양한 도법은 전뢰십삼풍(電雷十三風)밖에 없으 니." 염평의 눈에서 기광이 어른거렸다. "본인의 도법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력도 알겠구려." "약간......" "그렇다면 말하기가 쉽겠군. 황비룡에게서 받은 물건만 내놓으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그 냥 보내 주겠소." 염평은 위압스런 태도로 말했다. 문득, 흑의서생의 무심한 동공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귀하는 자신의 도법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려." "그렇소." 흑의서생은 빙긋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오." "무엇이 안타깝다는 말이오?" "원래 자신감이 지나치면 왕왕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기 쉬운 법이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엄청난 인물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염평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고리눈 같은 두 눈에서 활활 불길이 타올랐다. "제법 입이 날카롭군. 하나 손도 그렇게 날카로울까?" 염평은 차게 웃으며 서서히 칼자루를 잡아 갔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흑의서생의 검이 오른 쪽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해 급히 물었다. "귀, 귀하는 혹시 단천검객(斷天劍客) 비몽(費蒙)이 아니오?" 어찌나 놀랐는지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흑의서생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염평은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는지 안심한 듯 다시 긴장되었던 몸을 천천히 폈다. "무림에서 좌수검으로 유명한 사람은 단천검객 비몽밖에 없지. 나는 괜히 귀하의 허풍에 말 려들 뻔했구려." 그가 아는 한, 당금 무림에서 단천검객 비몽을 제외하고는 좌수검으로 자신을 당할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그는 눈앞의 흑의서생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그의 품에 있는 물건이 자신 의 수중으로 들어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흑의서생은 그의 생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의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명! 너는 세상에서 사람을 제일 슬프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의 난데없는 물음에 백의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것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다." "아!" 그제야 백의소년은 흑의서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았어요.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보물(寶物)에 눈이 먼 사람들이지요." "그렇다. 너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느냐?" 백의소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잽싸게 대답했다. "있어요." "너는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느냐?" 백의소년은 깜찍하게 웃으며 염평을 슬쩍 쳐다보았다. "바로 이곳에서요."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염평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서서 히 끓어오르는 노화를 참지 못하고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누구인가? 천하제일의 도문(刀門)이라는 구도회(九刀會)의 천지혈(天地血) 삼당(三 堂) 중 혈당(血堂)의 당주(堂主)가 아닌가! 구도회! 구도회는 당금 천하를 석권하고 있는 일부이회삼문(一府二會三門)의 강호육패(江湖六覇) 중 이회(二會)의 하나였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도객(刀客)들의 모임! 천하제일도문(天下第一刀門)! 아홉 명의 회주(會主)를 필두로 무시무시한 도(刀)의 실력자들이 모여 이룩한 전설적인 집 단인 것이다. 도(刀)를 배운 사람들은 구도회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지상의 영광으로 여겼다. 아홉 명의 회주는 물론이고 구도회의 인물 중 누구 하나 절정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전뢰도 염평은 그 막강한 구도회에서도 삼당의 하나를 맡고 있는 막강한 고수인 것이다. "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우롱을 하다니......" 그의 말이 거칠어지더니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뻗어 나왔다. 하나 흑의서생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의소년을 향해서 담담한 음성을 내뱉었다. "소명! 너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 탐욕(貪慾)은 왕왕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백의소년은 제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공자님. 저는 절대로 저 사람처럼 재물에 눈이 멀지는 않을 게요." 염평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육시를 낼 놈들이......" 그는 분노에 찬 노호성을 지르며 흑의서생을 향해 덮쳐 들었다. 꽈르르릉-! 그의 손이 번뜩였다 싶은 순간, 위맹한 도세(刀勢)가 폭포가 쏟아지듯 흑의서생과 백의소년 을 덮쳤다. 가공할 도광(刀光)이 천지를 뒤덮는 듯했다. 더구나 그 도세 속에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와 금시라도 흑의서생을 태워 버릴 듯하지 않은가? 주위 십여 장 이내가 완전히 초열지옥(焦熱地獄)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런데도 흑의서생은커녕 백의소년조차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다음 순간, 우르르릉- 우르르르르- 벼락이 치는 듯 은은한 우렛소리와 함께 질풍 같은 공세가 뻗쳐 왔다. 그 공격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여 한 번 손을 움직인 것 같은데 이미 삼십여 번의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로 너무도 가공할 광경이 아닌가! 염평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사방이 온통 흑의서생의 공세에 뒤덮임을 본 것이다. 꽝! 꽈-꽝! 벼락치는 굉음과 함께,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장중을 뒤흔들었다.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거의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훌훌 허공을 타고 날아가더니 십여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염평이었다. 그의 몸은 거의 피떡이 되어 그 형상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주위에는 부러진 그의 전뢰보도(電雷寶刀)가 조각조각 널브러져 있었다. 실로 너무도 빠르고 엄청난 공세가 아닐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무림의 초절정고수 인 전뢰도 염평이 혈구(血球)가 되어 날아가다니...... 흑의서생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이 우수로 백의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무나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소명! 어떠냐, 내 분뢰구환수(奔雷九環手)가?" 백의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최고예요, 공자님!" 흑의서생은 백의소년의 사과같이 발그레한 뺨을 툭툭 건드렸다. 문득, 백의소년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흑의서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참, 공자님! 대체 그 물건이 뭐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기를 쓰고 뺏으려 할까요?" "글쎄...... 구도회에서조차 노리는 것이라면 보통 물건이 아닌데...... 하나, 그것은 우리와 아 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임가장에 물건만 전해 주면 이 일과는 손을 끊게 되는 것이다." 백의소년은 황비룡이 건네 준 물건이 무엇인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는 약간 맥빠진 음성으로 대답하며 흑의서생의 뒤를 따라갔다. "예! 어차피 우리는 다른 일이 있으니까......" 제 3 장 중주쌍사(中州雙邪) 그것은 조그만 주루였다. 노호령의 험한 고갯길이 거의 끝나 가는 관도와 이어진 부근에 위치한 그 주루는 금방이라 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흙으로 빚어 올린 토담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고, 주루 앞에 걸린 깃발은 땟국이 주르르 흘러 쓰여 있는 '주(酒)'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 경이었다. 석양(夕陽).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도 한결 가시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주노이(周老二)는 주루 입구의 나무의자에 앉아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지겹게도 덥더니 이젠 좀 살 것 같구나." 주노이의 시선이 흘끗 주루의 안을 향했다. 기름때에 절은 나무탁자가 몇 개 놓여 있는 그곳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주루의 한구석, 작은 창문이 뚫린 쪽에 상인(商人)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던 주노이의 두 눈이 돌연 화등잔만해졌다. 석양의 붉은 노을을 받으며, 어느 사이엔가 장승 같은 인영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귀엽게 생긴 백의소년을 뒤에 거느리고 묵묵히 선 그는 주위의 모든 풍경과 썩 잘 어울려 보였다. 그는 홀연히 나타났지만, 이제 그가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면 조화있는 풍경은 깨지 고 말 것 같았다. 봉두난발의 흑의서생, 그는 약간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술을 파오, 주인장?" 동시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백의소년도 눈을 반짝였다. "맛있는 완자탕도요?" 주노이는 쭈글쭈글한 웃음과 함께 황급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이죠. 헤헤...... 그리 좋은 술이라곤 할 수 없지만 목을 축이는 데는 그만이죠...... 그리 고 저희 집엔 꿩고기로 만든 맛좋은 완자탕도 있습죠." 흑의서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노이의 옆을 스쳐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그는 주루 한 가운데에 있는 탁자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헤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당신이 알아서 갖다 주시오." 흑의서생의 뒤를 이어 백의소년이 귀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완자탕도 잊지 마세요." "헤헤...... 잘 알았습니다. 귀여운 도련님......" 허리가 꺾여지도록 절을 한 주노이는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흑의서생은 시선을 들어 주루를 훑어보았다. 썰렁한 주루 안에는 두 명의 상인이 음식을 먹 는 소리만 고적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얼마 후, 한 투박한 손이 흑의서생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손은 마디가 거칠고 울퉁불퉁했으 며,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등에도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어 오랫동안 험한 고생을 한 사람의 손이었다. 손은 지금 음식 쟁반을 잡고 있었다. 이어 약간의 소채(小菜)와 술병, 그리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완자탕을 탁자에 올려놓고 손은 거두어졌다. 손의 임자는 주노이였다. 주노이는 흑의서생의 탁자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간사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헤헤...... 맛있게 드십시오." 흑의서생은 목이 몹시도 마른 듯했다. 하기야 이렇게 푹푹 찌는 무더위 속을 걸어왔으니 누구든 목이 타지 않겠는가? 그는 술을 한잔 따라 번개같이 마시며 그 맛을 음미했다. 이어 그는 점점 더 빨리 술을 따라 거푸 들이키더니 나중에는 아예 병째 입으로 가져 가 단 숨에 벌컥벌컥 다 마셔 버렸다. 옆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주노이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주노이는 흑의서생이 술을 너무 급히 먹다가 숨이 막힐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쿨룩! 쿨룩!" 그토록 급하게 술을 들이키던 흑의서생은 사레가 들렸는지 요란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이것을 보고 있던 백의소년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며 종알거렸다. "공자님도...... 술하고 여자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음미하는 게 좋다고 매일 말씀하시면서 무 슨 술을 그리 급히 마십니까?" 흑의서생은 한참 동안이나 기침을 하더니 곧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명! 하지만 때로는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란다." 한쪽에서 이 기이한 주종(主從)을 바라보고 있던 두 상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데 문득 두 사람 중 우측에 앉은 약간 마른 상인이 술을 마시다 말고 의아한 듯 입을 열 었다. "이보게, 장노삼(張老三). 한데 자네의 얼굴이 왜 그렇게 시커먼가?" 이 말에 그의 앞에서 정신없이 술을 들이키던 뚱뚱한 상인이 약간 멍청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혁이(赫二)? 내 얼굴이 시커멓다니......" 그는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의 손도 시커멓게 변해 가는 것이 아 닌가! "어, 왜 이렇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던 장노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혁이, 자네의 얼굴은 왜 또 그렇게 검어졌는가?" "내가?" 혁이가 의아한 듯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채 있었다. 묵묵히 그들을 바라본 흑의서생의 눈에서 기광이 뿌려졌다. 장노삼과 혁이의 얼굴이 먹물을 바른 듯 시커멓게 변해 가는 것을 본 것이다. 동시에,"이...... 이상한데...... 왜 이렇게...... 모...... 몸이......" "으...... 도...... 독(毒)이...... 다!" 그들은 더듬거리다가 입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쿵! 쿵! "케...... 에...... 엑!" "크으으......!" 그들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바둥거리다가 삽시간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실로 너무도 찰나간의 일인지라 백의소년과 흑의서생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고, 공자님! 저, 저 사람들......" 백의소년이 놀라 더듬거릴 때, "음...... 무서운 화혈참혼독(化血斬魂毒)이군." 상인들의 몸이 순식간에 한줌의 물로 변해 가는 것을 보고 있던 흑의서생이 무겁게 탄식을 토해 냈다. "화혈참혼독은 무림삼대절독(武林三大絶毒)의 하나로 백여 년 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인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과연 대단하군. 화혈참혼독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어디선가 득의 만면해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흑의서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그들을 바라보는 인물, 그는 바로 이곳 주루의 주인인 주노이가 아닌가! 그는 자상하게 웃으며 흑의서생에게로 다가왔다. "자네도 화혈참혼독이 담긴 술을 마신 이상 일(一) 각(刻)도 되기 전에 저런 꼴이 될 것이 네." 과연, 흑의서생의 얼굴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겁게 탄식했다. "우리는 초면인데 왜 내게 이런 독을 썼는지 모르겠소." "다 이유가 있지." 주노이는 웃으며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순간, 비쩍 마르고 얼굴에 세 가닥의 수염을 달고 있는 늙은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몹시 평범했다. 하나 눈빛이 날카롭고 입술이 유난히 얇은 것으로 보아 보통의 심기(心機)를 지닌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백의소년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아! 저 사람은 노호령의 주막에서 우리 옆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던 청삼노인이 아니에 요?" 과연, 주노이는 얼마 전 산 위에서 혈전쌍살에게 놀라 도망친 청삼노인이었다. 그는 얄팍한 입술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제법 영리한 꼬마로군. 하나 걱정하지 마라. 잠시 후면 너도 네 주인을 따라가게 될 테 니......" 그의 어조는 비록 나직하고 점잖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잔인하고도 흉악한 것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다시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뚱뚱한 몸집과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얼마나 살이 쪘는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나 거의 감긴 듯 살짝 찢어진 눈에서는 소름이 끼칠 만큼 예리한 광막이 번뜩이고 있어 그가 평범한 뚱뚱보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흑의서생은 한눈에 그 뚱뚱보가 조금 전 청삼노인과 함께 도망쳤던 뚱보주인임을 알아보았 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서로 한패였구려." 주방에서 걸어나오던 뚱보대한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흐흐...... 그렇다. 사실 우리는 저 위에서 황비룡을 독살시키고 물건을 빼앗으려고 했지. 하 나 그때 혈전쌍살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후퇴했던 것이다." 그가 웃자 가뜩이나 작은 눈이 감겨져 가느다란 실을 연상케 했다. 뚱뚱보는 입을 쩍 벌려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계속 웃었다. "흐흐...... 우리는 산밑에 내려와 네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한데 네놈이 전뢰도 염 평을 일수(一手)에 죽이는 것을 보고 웬만한 독으로는 안 통하겠다 싶어 내가 아끼고 아꼈 던 화혈참혼독을 사용한 것이다." 청삼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화혈참혼독은 무색무미(無色無味)하기 때문에 제아무리 절정고수라 할지라도 알아차릴 수가 없지 않나?" 그의 음성은 비록 자상했으나, 아무도 그가 자상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흑의서생의 안색은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해 갔다. 흑의서생은 약간 힘겨운 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제야 나도 당신들이 누구인지 알겠구려." "헤헤......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고?" "강호에 두 명의 살인귀(殺人鬼)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당신들은 바로 중주쌍사(中州雙邪) 가 아니오?" 청삼노인과 뚱뚱보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흐흐...... 제법이군...... 우리들을 알아보다니......" 뚱뚱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다. 이 어르신이 바로 오독저두(五毒猪頭) 손결(孫潔)이시다." 청삼노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강호 동도들은 노부를 자면랑심(慈面狼心) 원충(袁沖)이라고 부른다네." 중주쌍사! 그들은 잔악한 독심(毒心)과 독술(毒術)로 무림에 흉명을 떨치고 있는 흉인(兇人)들로서 북 육성(北六省)에서는 지옥의 사신(死神)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 중 오독저두 손결은 가공할 독술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해치우듯하는 독마(毒魔)였 다. 일전에 그는 자신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북(江北)의 신검장(神劍莊)을 하룻밤 사이에 독으로 몰살시킨 적도 있었다. 자면랑심 원충은 인자하게 생긴 얼굴 뒤에 사악하기 그지없는 심기와 간계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잔인한 흉심(兇心)과 독계(毒計)에 비명 횡사한 무림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오독저두 손결보다도 더욱더 악명을 떨치는 희대의 흉인이었다. 흑의서생은 다시 한 번 무겁게 탄식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귀하들은 내 뒤를 훤히 밟아 오고 있었구려." "흐흐...... 물론이지." 오독저두 손결이 뚱뚱한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한데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냐? 전뢰도 염평 같은 고수를 일격에 죽인 것으로 보아 무명소 배 같지는 않은데......" 흑의서생은 이미 살기를 포기한 듯 고분고분 대답해 주었다. "나는 석중옥(石重玉)이라는 사람이고...... 저 아이는 위지명(慰遲明)이라 하오." 오독저두 손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소." 흑의서생이 치밀어 오르는 독기를 견디기 힘든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냐?" "대체 황비룡이 내게 준 물건이 무엇이오? 무슨 보물이기에 여러 사람들이 그토록 악착같이 노린단 말이오?" 오독저두 손결이 흉소를 터뜨리며 두꺼비 같은 입술을 열었다. "흐흐...... 곧 죽을 놈이 그런 걸 알아서 무엇하랴만...... 소원이라면 말해 주지." 그는 개기름이 번질번질한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것은 빙백마혼주(氷魄魔魂珠)다!" "빙백마혼주?" 흑의서생, 석중옥이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설산파(雪山派)의 지보(至寶)라는 그 빙백마혼주란 말이오?" "흐흣...... 그렇다." "한데...... 약간 이상하구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빙백마혼주가 비록 천하의 기보(奇寶)라고는 하나 그것에서 뿜어 나오는 한기(寒氣) 때문에 음공(陰功)을 익히는 자 외에는 별로 필요도 없는 것인데...... 당신들은 무슨 개세(蓋世)의 음 공이라도 익혔단 말이오? 아니면 빙백마혼주에 아무도 모르는 또 다른 효능이라도 있다는 것이오?" 오독저두 손결은 여유 만만하게 뚱뚱한 몸을 흔들었다. "흐흐...... 그러고 보니 네놈은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무슨 소식 말이오?" "흐흐...... 당금 무림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는 종횡무영도(縱橫無影盜)의 장보도(藏寶圖) 사건도 모른단 말이냐?" "종횡무영도? 아니, 그럼 한백(寒魄)의 장보도가 세상에 나타났단 말이오?" 석중옥의 흑발 사이로 두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종횡무영도(縱橫無影盜) 한백(寒魄)! 실로 놀라운 이름이 아닌가? 그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고금제일신투(古今第一神偸)였다. 그는 그야말로 천하의 모든 것을 제 것인 양 털고 다녔었다. 백년 전, 각파의 비전무공비급(秘傳武功秘 )은 물론 온갖 기보들이 그의 출현과 아울러 귀신 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천하의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다! 그는 광오한 외침을 토하며 환우지간( 宇之間)을 거의 독보천하(獨步天下)했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무림에서 신비스럽게 사라져 천하를 경악시켰지 않은가? 그로 인해 무림에 얼마나 많은 전설이 생겨났던가! -종횡무영도의 종적을 찾는 자는 그가 훔친 모든 것을 얻으리라! -그것은 능히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군림(君臨)할 수 있으리......! 그런데...... 그런데 그 종횡무영도의 장보도가 나타나다니...... 석중옥은 계속해서 오독저두 손결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그 종횡무영도의 장보도와 빙백마혼주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단 말이오?" "후훗...... 상관이 있다 뿐이냐? 빙백마혼주를 가진 사람은 종횡무영도의 보물 중 오분지 일 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손결은 마음이 느긋해져서 석중옥이 죽기 전에 마지막 아량을 베풀기라도 하려는 듯 입술에 침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원래 남궁검문(南宮劍門)에서 비롯되었다." * * * 남궁검문! 남궁검문은 당금 천하의 최강세력인 강호육패(江湖六覇) 중의 하나로, 일부이회삼문(一府二 會三門) 중 사천당문(四川唐門), 비환유문(飛環劉門)과 더불어 삼문으로 불리는 절대의 명가 (名家)였다. 또한 남궁검문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검문(天下第一劍門)이었다. 그들의 비전검법인 제 왕검형(帝王劍形)은 백년 무림사상 최강의 검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당금(當今)의 가주(家主)인 신검(神劍) 남궁뢰(南宮雷)는 일명 환우제일검( 宇第一劍) 으로까지 불리는 절대의 검객이었다. 한데, 당대 제일검수(第一劍手)로 알려진 신검 남궁뢰가 어느 날 우연히 황산(黃山)을 지나 다가 어느 이름 모를 고동(古洞)에서 우연히 한 구의 백골(白骨)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백골의 손에 낡은 양피지가 쥐여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이 바로 종횡무영도 한백이 남 긴 장보도였던 것이다. 남궁뢰는 이 엄청난 기연(奇緣)에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보았 다. 하나 종횡무영도의 장보도에 적혀 있는 곳은 천험(天險)의 절지(絶地)일 뿐 아니라 실로 가공할 기관매복으로 뒤덮여 있어, 도저히 그 자신만의 힘으로는 뚫고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남궁뢰는 다시 남궁검문으로 돌아와 무림에 엄청난 선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 천험의 절지와 기관매복을 뚫을 수 있는 세 가지 물건 중 어느 하나라도 자신에게 가져 오는 사람에게는 종횡무영도의 장보고(藏寶庫)에 함께 데려감은 물론이고, 그 엄청난 보물의 오분지 일을 떼어 준다고 공약한 것이다. 그 세 가지 물건이란 다름 아닌 참홍뢰도 (斬虹雷刀)와 열화굉천뢰(熱火轟天雷), 그리고 바로 빙백마혼주였다. 보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고금제일도(古今第一盜)인 종횡 무영도의 기보(奇寶)와 무공비급인 바에야...... 그 즉시 이 삼대기보(三大奇寶)를 빼앗으려는 일대(一大) 혈풍(血風)이 무림에 몰아쳤다. -삼대기보를 뺏어라! -삼대기보 중, 하나만 가져도 종횡무영도의 엄청난 보물 중 오분지 일을 얻을 수 있다! 보물에 눈이 먼 무림인들이 너도나도 강호로 뛰쳐 나왔고, 곳곳에 피의 선풍이 불어닥쳤다. 빙백마혼주도 원래는 설산파의 진산기보였는데, 남궁뢰가 삼대기보를 공포한 다음날에 원인 모를 혈겁을 당해 설산파는 초토화(焦土化)되어 버렸고 빙백마혼주도 신비스럽게 실종되었 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다시 중조산의 노호령에 나타난 것이니...... * * * 문득 오독저두 손결의 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석중옥이 긴 탄식을 토해 냈다. "휴-! 아깝구나, 아까워." 손결은 어리둥절한 듯 조그만 눈을 크게 떴다. "너는 또 무엇이 아깝단 말이냐?" "그렇지 않소? 나는 일세(一世)의 기연(奇緣)을 품속에 넣고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했고 결국 당신들에게 넘겨주니......" 이 말을 들은 오독저두 손결은 통쾌한 듯 뚱뚱한 배를 퉁퉁 두들겼다. "흐흐흐...... 이것을 두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이...... 하-흑!" 갑자기 오독저두 손결은 두 눈을 허옇게 부릅뜨고 자면랑심 원충을 돌아보았다. "네...... 네가......" 그는 손을 들어 자면랑심 원충을 잡으려다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명문혈(命門穴)에는 어느새 큼직한 구멍이 뚫린 채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 나오 고 있었다. "이득은 주인이 본다고 하지." 자면랑심 원충은 선혈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하나 석중옥의 눈에는 그의 웃음이 천하에서 가장 추악한 것으로 느껴졌다. "자네는 확실히 저두일세. 내가 미쳤나? 오분지 일도 억울한데, 그것을 자네와 나누어 갖 게......" 자면랑심 원충은 득의 양양하여 손결의 시체를 발로 툭 찼다. 이것을 본 석중옥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 "손결은 죽어 마땅하오. 그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원충의 세모꼴 눈이 사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상한 미소가 어려 있었으나 눈가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는 당신의 '낭심'이라는 외호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어야 했소." 원충의 얼굴이 서서히 살기로 굳어졌다. "맞는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그의 뒤를 따라가서 자세히 일러주게." 그는 앞으로 걸어와서 석중옥의 품을 뒤지려고 허리를 굽혔다. 그의 눈에는 석중옥이 이미 시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꽝! "으-악!" 자면랑심 원충이 비명을 토해 내며 폭풍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오공(五孔)으로 검붉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사납게 내팽개쳐졌다. 쿵! "크으으...... 이, 이럴 수가......?" 그의 입에서는 내장 부스러기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하나 그는 온몸을 찢는 듯한 고통보다 더한 경악에 사로잡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아! 먹물을 바른 듯 시커먼 얼굴로 쓰러질 듯하던 석중옥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 오며 그가 태연히 일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주...... 중독된 게 아니었구나!"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으...... 어, 어찌 이럴 수가......? 화...... 화혈참혼독은 금강불괴(金剛不壞)라도 견디지...... 못하는 것인데......" 자면랑심 원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석중옥은 백의소년 위지명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디에도 중독은커녕 다친 곳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화혈참혼독을 비롯한 무림삼대절독(武林三大絶毒)은 확실히 금강불괴라도 견딜 수 없지." "그,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애초에 화혈참혼독 따위엔 중독되지도 않았거든. 술을 마신 척하며 기침을 하면서 다 시 다 내뱉어 버렸소." 자면랑심 원충의 얼굴은 이미 생기가 꺼져 가고 있었다. 석중옥의 일장(一掌)은 그의 오장육 부를 완전히 박살내 버린 것이다. 하나 그는 심중의 의문을 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듯 사력을 다해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당신이 음식을 날라 올 때 당신의 손을 보았지. 손등에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더군. 일반인 들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손등까지 굳은살이 생기지는 않소. 오직 무림고수들만이 그렇지." "......!" "특히 철사장(鐵砂掌) 같은 외문장공(外門掌功)을 연마한 사람들이 그렇소. 아까 당신이 손 결을 죽일 때 보니까 확실히 당신은 철사장을 연마했더군." 그는 자면랑심 원충을 뒤로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람 같은 한마디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외진 주루의 점원이 무림고수라니, 이상하지 않소?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음식에 수작 을 부렸을 거라고 짐작했지." 자면랑심 원충은 그 말을 듣자 세모눈을 크게 뜨더니 푹 고개를 떨구었다. 제 4 장 황의라마 서서히 어둠이 짙어 가는 중조산 경내에 두 인영이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흑의서생과 백의소년. 봉두난발에 훤칠한 키의 흑의서생은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러니 백의소년이 위지명인 것은 자명한 일. 위지명은 석중옥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그는 앞서 걷고 있는 석중옥을 향해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는 멈추곤 하였다. 문득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걷고 있던 석중옥이 그를 돌아다보며 빙긋 웃었다. "녀석, 왜 물어 보지 않느냐?" 위지명은 흠칫 놀라 총기가 일렁이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물어 보나마나 대답을 해주시지 않을 게 뻔한데요?"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럼 제가 물어 보면 대답을 해주시겠단 말씀이에요?" 석중옥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매달았다. "그렇다." 이 말에 위지명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의아심을 느꼈다. "공자님께선 이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이번 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정말이세요?" 위지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중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나 안타깝게도 석중옥의 얼굴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녀석!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라. 언젠가는 너도 내가 왜 이번 일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지 알 게 될 것이다." 석중옥은 위지명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쥐어박으며 말했다. 위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명랑하게 웃었다. "그럼 묻겠어요. 신검 남궁뢰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지요?" "그렇다." "남궁검문 또한 결코 평범한 집단이 아니에요." 석중옥은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색치 않고 빙긋 웃으며 계속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비단 평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궁검문은 삼문 중에서도 제일로 치는 곳이지." 위지명은 그제야 깜찍하게 눈을 반짝이며 물어 보았다. "남궁검문이 그렇게 대단하고 남궁뢰 또한 보통 인물이 아닌데 왜 자신이 직접 삼대기보를 찾지 않고 무림에 공포를 해서 번거로움을 자초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 위지명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 눈을 귀엽게 떴다. "빙백마혼주를 제외한 다른 두 가지는 사실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도 확실치 않은 전설 상(傳說上)의 기보들이지. 그런 것을 혼자 찾으려 하다가는 아마 남궁뢰가 늙어 죽을 때까지 돌아다녀도 구경조차 못 할 게다." 석중옥은 묵묵히 전면을 주시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더구나 빙백마혼주가 비록 설산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체면에 어찌 그것을 강 제로 뺏을 수 있겠느냐? 결국 남궁뢰는 생각을 굴리다 못해 그런 편법(便法)을 이용한 것이 다." "아......! 그럼 그 참홍뢰도와 열화굉천뢰라는 것은 아주 엄청난 물건이겠군요." "그렇다. 참홍뢰도는 우내육대중보(宇內六大重寶)의 하나로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물건이 지." "우내육대중보요?" "그렇다. 그것은 무림인들이 꿈에도 갖고 싶어하는 전설상의 신병(神兵)들이다." 석중옥은 우내육대중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 * * 우내육대중보(宇內六大重寶)! 그것은 상고(上古)에서 현금(現今)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만들어진 병기 중 가장 무서운 위 력을 지닌 무기들이었다. 그 가공할 위력을 어찌 필설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일명 무적육병(無敵六兵)이라고도 하는 이 우내육대중보는 그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번천지복(飜天地覆)할 신병들이었다. 공손철검(公孫鐵劍)! 외견상으로는 거무튀튀하고 볼품없는 초라한 철검이었다. 하나 이 검이야말로 만병지왕(萬兵之王)이며 우내육대중보의 수위(首位)에 올라 있는 절대 (絶對)의 신검(神劍)이었다. 아직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천하의 무엇으로도 공손철검에 대항할 수는 없다고 전해진 다. 참홍뢰도(斬虹雷刀)! 이것은 전설상의 마중제일병(魔中第一兵)이었다. 공포의 뇌광(雷光)이 번뜩이는 순간, 그 안 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저주받은 마도(魔刀)인 것이다. 파천필(破天筆)! 그지없이 은은하고 그윽한 혈홍(血虹)빛 광채로 된 하나의 필(筆)이었다. 하나 이것이 진한 홍하(紅霞)와 함께 용틀임을 하는 날, 온 천하인들은 전율과 공포로 경악 하고 말리라. 풍운무적편(風雲無敵鞭)! 하나의 길고 검은 채찍이다. 그 무엇이든 스치기만 해도 부숴 버리는 가공할 위력이 있으며, 한번 휘두르면 태양이라도 사라지고 만다고 알려져 있었다. 건곤이화창(乾坤離火槍)! 한 자루의 평범한 창(槍)이지만 한번 노하면 주위가 모조리 불바다로 변하고 만다. 설사 쇳 덩이라도 건곤이화창의 열기 앞에서는 녹아 버리고 만다고 한다. 번천폭풍기(飜天暴風旗)! 길이가 무려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깃발이다. 이 번천폭풍기가 한번 펄럭이는 날에는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말리다. 우내육대중보는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들이라면 누구나가 꿈에서도 그리는 보물 중의 보물 이었다. 하나 지난 백 년간, 이 여섯 개의 신병들은 강호 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 * * "우내육대중보는 모두 하나같이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병기들이지. 하나 그것들은 좀처럼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만일 참홍뢰도가 무림에 나타난다면 커다란 혈풍이 일어날 것이다." 위지명은 흥미 진진한 듯 넋을 잃고 석중옥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계속 귀여운 입을 종알거렸다. "그럼 열화굉천뢰는요?" 순간, 갑자기 석중옥의 안색이 약간 찌푸려졌다. "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참홍뢰도가 나타난 것까지만 해도 괜찮겠는데 만약 이 열화 굉천뢰까지 나타난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위지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과! 그렇게 무서운 물건이에요?" "그렇다. 무림사상(武林史上) 최고의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이지. 알려진 바로는 이것이 터 지면 반경 오십 장 이내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백 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가 몰살한다고 한 다." 위지명은 입을 딱 벌렸다. "와...... 엄청나군요." "그 열화굉천뢰는 이백 년 전에 신화자(神火子) 요굉(姚宏)이 세 개를 만든 후 무림에 거의 절대적인 공포로 존재하고 있다. 당시 요굉은 열화굉천뢰 한 개로 자신에게 덤벼들던 백여 명의 고수들을 폭사(暴死)시킨 적이 있지. 그 후로 열화굉천뢰의 위력을 시험해 보려는 사람 은 없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눈을 빛냈다. "열화굉천뢰는 없어져야 마땅할 마물(魔物)이다. 이번에 한백의 장보도 때문에 다시 무림에 나타난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을 하며 걷고 있던 석중옥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갑자기 느껴지지 않으면서 느닷없이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 던 것이다. '이거 소나기가 올 것 같은데......' 그의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 후두둑! 후두둑! 바람이 거세지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어서 피해야겠군." 석중옥은 위지명의 팔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진동하더니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꽈르르릉-! 번쩍-! 꽈광! 콰아아-! 동시에, 쏴아아아-!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거짓말 같은 자연의 변화였다. 석중옥은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어찌나 빠른지 그저 희끗한 그림자만 나타내 고 있었다. 오륙십 장 떨어진 숲속에 하나의 퇴락한 담장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그곳은 버려진 지 오래된 하나의 폐찰(廢刹)이었다. 그 폐찰은 엉망진창으로 낡고 훼손되어 있었으나, 지금의 석중옥으로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그는 우선 가장 튼튼해 보이는 대웅전(大雄殿)으로 몸을 날려 들어갔다. 가장 튼튼해 보인다 고 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도 역시 비가 새고 있었다. 쏴아아-! 쏴쏴-아아아-! 폭우 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있어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떠내려 보낼 듯했다. 문득 석중옥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위지명은 이 대웅전 안에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 달았다. 대웅전 안은 반경이 오륙 장 정도 되었는데 그 안에는 이미 한 인물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내색치 않고 태연히 있었 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몸집이 큰 황의라마(黃衣喇 )였다. 중원에서 라마승을 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위지명은 라마승을 생전 처음 보는 터였다. 자세히 보니 그는 왕방울 같은 눈에 사자 코, 큰 입에 얼굴빛은 돼지고기 빛깔처럼 시뻘겋 고 푸르죽죽했다. 황의라마의 앞에는 거무스름한 빛깔을 띤 커다란 목탁이 놓여져 있었다. 황의라마는 위지명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지그시 내 리감고 있었다. 석중옥은 한눈에 이 황의라마가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깨달았다. 하나 석중옥은 그가 자신들에게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음을 보고 자신도 위지명을 끌고 한쪽 구석에 가 앉았다. 위지명은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석중옥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가만히 있었다. 쏴아아- 밖에서는 계속 장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한데 문득 위지명은 황의라마가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 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후, 미친 듯이 퍼붓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날씨는 쾌청해 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황의라마는 일어설 기색이 없었다. 위지명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혹시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굴까? 더구나 이상한 것은 석중옥조차 전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위지명은 궁금 한 것을 참지 못하고 석중옥에게 입을 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어느새 나타났는지, 대웅전 입구로 한 인영이 들어서고 있지 않은가! 눈부신 백의를 차려입은 이십대 청년이었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그는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위지명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목구비가 청수하게 생겼고, 피부는 불그스름하면서도 하얗다. 눈초리는 길고 눈동자 는 맑아 한눈에 보아도 총기있는 청년 같았다. 위지명은 그가 무척 깔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입고 있는 옷은 물론이고 신발에도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도 정성을 다해 뒤로 빗어 넘긴 것이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는 석중옥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나 위지명은 한 가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조금 전에 비가 온 탓에 밖의 땅은 흙탕물로 가득했다. 한데, 그 백의청년은 분명 그 질퍽한 흙탕물 속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몸에는 물론이고 신발에조차 조그만 오물 하나 묻어 있 지 않다는 것이다. 백의청년은 번개같이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때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던 황의라마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커다란 목탁 을 오른손에 든 채 백의청년을 향해 걸어왔다. 백의청년은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았다. 황의라마는 그의 앞에 우뚝 서서 입을 열었다. "귀하가 바로 백쾌당(百快黨)의 만상공자(萬象公子)요?" 그의 한어(漢語)는 무척이나 유창했다. 백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본인이 백쾌당의 대외(對外) 책임을 맡고 있는 만상공자요." 그의 말은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백쾌당(百快黨)! 백쾌당은 전문적인 청부단체(請負團體)였다. 그들은 모든 일의 청부를 맡았다. 사람을 찾는 일, 물건을 운반하는 일, 사람을 보호하는 일...... 심지어는 살인청부(殺人請負)까지도 서슴지 않고 수행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이 무림에 나타난 지는 채 십 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동안 단 한 번도 청부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비록 강호육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강호육패의 어떤 방파(幇派)보다도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나, 그들의 조직(組織)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림에 알려진 백쾌당의 유일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만상공자! 그가 백쾌당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하나만 보 아도 백쾌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가공할 무공과 엄청난 지략, 그리고 온통 신비(神秘)로 점철된 인물이 바로 만상공자인 것이 다. 황의라마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반갑소. 본 승은 오찰극(烏察克)이라 하오." 만상공자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소생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사대존자(四大尊子) 중에 무공이 고강하고 지모가 탁 월한 존자 한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귀승께서 바로 그 황룡존자(黃龍尊子)가 아니시오?" 황의라마는 약간 흠칫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소. 소승이 바로 황룡존자요." 이 말에 석중옥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포달랍궁! 그곳은 다름 아닌 서역(西域) 밀종(密宗)의 대본산(大本山)이 아닌가! 그곳에 있는 라마들은 고수 아닌 자가 없고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고심막측하기 그지없다 고 한다. 더구나 사대존자라면 포달랍궁에서도 달라이 대법왕(大法王)을 수호하고 있는 엄청 난 신분의 고수들이었다. 한데 그 사대존자 중의 한 사람이 중원에 나타나다니...... 대체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황룡존자 오찰극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데 일전에 소승이 귀당에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소?" "하하...... 귀궁의 반역자인 단리종요(段里宗遼)의 행방 말씀이오?" "그렇소." "본 백쾌당은 아직까지 맡은 일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소. 더구나 사람을 찾는 일은 본 당 의 특기이니 그 일은 당연히 해결되었소." 황룡존자 오찰극은 반색을 지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소?" 하나 만상공자는 싱긋 웃으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본 당의 규칙은 선불(先拂)을 원칙으로 하고 있소." "물건부터 보자는 말이오?" 만상공자는 계속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찰극은 잠시 망설였으나 백쾌당의 신용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을 들었는지라 할 수 없이 품속에서 작은 옥갑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만상공자에게 던져 주었다. 만상공자는 천천히 옥갑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휘 황찬란한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안에는 열 개의 진귀한 묘안석(猫眼石)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좋소." 만상공자는 이내 옥갑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단리종요는 오 년 전 중원(中原)으로 들어와 이름과 신분을 바꾸었소." "......!" "지금 그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소. 중원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알고 있을 정도요." "대체 그는 어디에 있소?" 오찰극이 궁금함을 참기 어려운 듯 성급하게 물었다. "그는 오 년 전 단신으로 녹림(綠林)으로 쳐들어가 당시 녹림의 총표파자(總 巴子)였던 흑풍 마자(黑風魔子)를 죽이고 녹림을 장악했소." 이 말에 오찰극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그가 지금 녹림의 총표파자가 되어 있단 말이오?" "그렇소. 당금의 녹림맹주(綠林盟主)인 녹림마군자(綠林魔君子) 단요종(端遼宗)이 바로 단리 종요의 화신(化身)이오." 오찰극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녹림마군자 단요종. 그는 오 년 전, 무림에 혜성같이 나타나 일대거마(一代巨魔)였던 흑풍마자를 죽이고 녹림맹 주가 된 일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당시의 일은 일대(一大) 쾌사(快事)로써 사람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었다. 더구나 녹림마군자 단요종은 강직한 성품과 기개로써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 던 호걸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서장의 포달랍궁의 반도(叛徒)라니...... 오찰극의 안색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요종이 녹림맹주인 이상 그를 자 신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상공자도 이 사실을 짐작했던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대사 혼자의 힘으로 그를 잡기는 힘들 테니 본 공자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오." 오찰극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만상공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승이 알기로 백쾌당에서는 무슨 청부든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들었소." "그렇소. 조건만 맞는다면 본 당에서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소." 오찰극의 얼굴에 일말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혹시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일도 할 수 있소?" "물론이오." 오찰극은 희색이 만면하여 황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단요종을 납치해 주시오. 사례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 만상공자는 그제야 그의 속셈을 안 듯 빙그레 웃었다. "그를 죽이지 않고 납치만 해오란 말씀이오?" "바로 그렇소." 만상공자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단요종이 비록 녹림맹주라고는 하나 본 당에서는 들어온 청부를 거절한 적이 없소. 하나 청부를 맡기 전에 가격을 결정해야겠소." 그 말을 듣고 오찰극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이 일을 맡아 주시겠다니 우선 소승이 대법왕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 고 가격은 얼마라도 좋으니 어서 말씀해 주시오." 어느새 말투마저 공손하게 변했다. 만상공자는 오찰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어떤 것이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소?" 오찰극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소승은 아직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실언(失言)을 내뱉은 적이 없소이다." 이때, 그 동안 이 광경을 묵묵히 보고 있던 석중옥이 나직이 탄식을 터뜨렸다. "과연 만상공자는 소문처럼 무서운 사람이군." 이 말에 위지명은 그 동안 참았던 말문을 열듯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이미 오찰극을 함정에 빠뜨렸다." 그러나 위지명은 어리둥절해 하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석중옥은 빙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렇다면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아라." 이때 만상공자가 입을 열었다. "청부를 맡는 대신 선사의 그 목탁(木鐸)을 내게 주시오. 소생은 그 목탁이 몹시도 갖고 싶 소이다." 듣고 보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하잘것없는 목탁과 무림의 초절정고수인 녹림마군자 단요종의 몸을 바꾸겠다니...... 위지명은 만상공자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더욱 뜻밖의 일은 오찰극의 태도였다. 곧 기뻐 날뛰며 교환 조건에 응할 줄 알았던 오찰극이 돌연 얼굴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도 사람을 웃기는군요? 변변치 않은 목탁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달라고 하십니까? 소 승이 대법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팔보옥첩(八寶玉牒)을 대가로 내놓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팔보옥첩을 꺼내려 했다. 팔보옥첩은 포달랍궁의 진산보물로, 공적(功積)이 뛰어난 라마에게 달라이 대법왕이 친히 하 사하는 기진이보(奇珍異寶)였다. 더욱이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백독불침(百毒不侵)이 된다고 하는 신물(神物) 중의 신물이었다. 그런 팔보옥첩을 보잘것없는 목탁 대신 내놓겠다니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더욱더 이상한 것은 이러한 보물을 주겠다는데도 만상공자가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는 것이다. 그는 손을 들어 오찰극이 보물을 꺼내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팔보옥첩으로 말하자면 대사께서 대법왕으로부터 친히 하사받은 물건인데 어찌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소? 그리고 본 공자는 남의 귀중한 물건을 탐내지 않소이다. 본 공자는 다만 그 목탁을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겠소." 이렇게 되자 위지명은 더욱 의혹을 참지 못하고 석중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 목탁은 무슨 진기한 물건 같지도 않은데...... 어째서 저 뚱보라마가 저토 록 망설이는 걸까요?" 석중옥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것은 비록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목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라마들에게 있어서 는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다." "왜 그렇지요?" "그것은 라마들이 대법왕으로부터 선사받은, 그들의 제이(第二)의 생명(生命)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지. 말하자면 목탁은 관인(官印)과 마찬가지이다. 포달랍궁의 라마들은 누구라도 그 목탁을 잃어버리거나 깨뜨려 버렸을 때는 그들의 생명 또한 끝장이 나는 것이다." 위지명은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목탁에 살고 목탁과 함께 죽는 것이군요?" "그렇다. 목탁을 갖지 않고 포달랍궁으로 돌아가면 그들은 교중(敎中)의 신분을 잃게 된다. 자칫하면 반교(叛敎)라는 누명을 쓰고 목숨마저 잃게 되지. 그러니 그가 어찌 그것을 남에게 주겠느냐?" "그러고 보니 저 만상공자도 대단한 사람이군요. 말 몇 마디로 상대방을 꼼짝도 못하게 만 들었으니 말이에요." 석중옥은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오찰극을 바라보았다. 오찰극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마 포달랍궁의 비밀을 만상공자에게 말 할 수도 없고 해서 혼자 깊은 시름에 젖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공자의 그와 같은 조건에는 응할 수 없소. 공자께선 다른 조건을 말해 보시오." 만상공자는 시치미를 딱 떼고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내가 알기로 단요종은 귀궁에서 제일기보(第一奇寶)인 탈명금마경(奪明金魔鏡)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그깟 목탁 하나가 탈명금마경보다도 더 중요하단 말 이오?" 이 말에 오찰극은 대경 실색했다. "고, 공자가 어찌 그 사실을......" 그것은 포달랍궁 최대의 비밀이었다. 탈명금마경(奪明金魔鏡)! 이것은 하나의 작은 거울이었다. 하나 이것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이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포달 랍궁 최대의 기보(奇寶)이며, 가공할 마병(魔兵)이었기 때문이다. 탈명금마경의 비밀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공포적인 위력을 의심하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오찰극은 침통한 음성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과연 백쾌당의 만상공자가 강호의 대소사(大小事)에 관한 한 무불통지(無不通知)라는 소문 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구려. 하나, 소승에게는 부득이한 고충이 있소이다. 공자는 하필이 면 소승에게 어려운 청(請)을 하시오? 그러지 말고 팔보옥첩과......" 만상공자는 그 말을 듣자 약간 쌀쌀하게 말했다. "소생은 남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이다. 선사께서 교환 조건에 응하실 생각이 없다면 당장 이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말을 마치자 그는 돌아서서 신형을 옮기려 했다. "잠깐만!" 오찰극이 당황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러고는 약간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귀하의 뜻은 소승의 목탁을 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부를 받지 않겠다는 계략을 꾸 미는 데 있는 것 같구려." "소생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소? 본 당에서는 아직까지 들어온 청부를 사양한 적이 없소. 하나 피차간에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 선사께서는 지레 짐작을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라오." 오찰극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귀하는 기어코 목탁을 받을 작정이오?" "그런 말은 더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만상공자의 말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위지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석중옥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보아하니 그 단요종이라는 사람은 굉장한 고수인가 보군요?" 석중옥은 그를 쳐다보았다. "녀석, 또 무슨 말을 묻고 싶은 게냐?" 위지명은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을 떼구루루 굴리며 귀엽게 웃었다.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백쾌당에서조차 그를 건드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 에요." 석중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쾌당에서 꺼려하는 것은 단요종이 아니다." "예?" "백쾌당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친구들이다." "그의 친구들이라뇨?" "단요종은 무림에서 의리(義理)가 대단한 호걸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니 그에게 어찌 친구 가 없겠느냐?" 석중옥은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은 백쾌당에서조차 겁내고 있는 인물이지." 위지명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누굽니까, 그 대단한 친구가?" "예로부터 강호에 전해지는 두 마디 말이 있는데, 들어 보았느냐?" 석중옥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인데요?" "천금일낙(千金一諾) 강수서류(江水西流)라는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앞말은 그 사람의 신용(信用)을 나타내고 뒷말은 그 사람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위지명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강물의 방향도 변경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 까?" "그렇다." "그가 누군데요?" "묵운편 사마진평!" 위지명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는 천하제일의 호한(豪漢), 사마진평 말입니 까?" "그렇다." 그제서야 위지명은 백쾌당이 단요종을 건드리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묵운편(墨雲鞭) 사마진평(司馬眞平)! 당금 무림에서 누가 그를 모르겠는가? 한 자루 거무튀튀한 채찍을 휘두르며 천하를 주름잡는 일대(一大)의 고수(高手)를...... 사마진평은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인 칠대명인(七大名人) 중의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철담협골(鐵膽俠骨)로 더욱 유명 했다. 때문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그와 사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사마진평이니 백쾌당에서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 5 장 당이선생(唐二先生) 오찰극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만상공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린 놈아! 네가 바로 백쾌당의 만상공자냐?"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중인들이 흠칫 놀라는 순간, 휘-익! 장내로 떨어져 내리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일로일소(一老一少). 그들은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늙은 노파와 이제 갓 피어난 듯 아리따운 미녀였다. 노파는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데다가 머리는 허옇게 세었으며, 입은 찌그러지고 이빨이 빠져 몹시 보기 흉했다. 게다가 허리는 구부러져 마치 꼽추같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하나의 용 두괴장(龍頭拐杖)이 쥐여져 있었다. 미녀는 눈부신 백의를 날렵하게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칠흑같이 검고 윤이 흐르는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 고,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살색은 백옥같이 희었다. 바람이 그녀의 긴 옷자락을 펄럭일 때마다 그윽한 향기가 사방에서 풍겼다. 그야말로 어쩌 다가 천상(天上)의 옥녀(玉女)가 길을 잘못 들어 인간 세계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만 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만상공자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선......" 노파가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어린것아! 우리는 비환유문에서 왔다." 그녀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환유문(飛環劉門)! 바로 강호육패 중 삼문의 하나가 아닌가? 그들은 대대로 강남무림(江南武林)에서 맹주(盟主)의 역할을 해온 막강한 가문이었다. 더구 나 그들의 비전(秘傳)인 탈혼칠비환(奪魂七飛環)은 독특하면서 그 위력이 실로 가공한 절학 (絶學) 중의 절학이어서 무림인들의 두려움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한데, 오늘 이 별볼일없어 보이는 폐찰 안에 비환유문의 인물들이 나타나다니...... 만상공자는 그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들 중 백의미녀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남의 철비연(鐵飛燕)은 아름답고도 차가워 쉽게 접근할 수 없다고 하던데 오늘 직접 만 나 뵙게 되다니...... 소생은 운이 트인 것 같소." 백의미녀는 그 말에 생긋 웃었다. 하나 그녀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호호...... 과연 만상공자답군요. 소녀를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그녀의 웃음은 차라리 냉소에 가까웠다. 과연 철비연이란 외호가 무색하리만큼 차가운 여인 이었다. 철비연(鐵飛燕) 유백령(劉白玲)은 세칭 강남제일미(江南第一美)로 불리는 미녀 중의 미녀였 다. 그녀는 비환유문의 문주(門主)인 탈혼무적환(奪魂無敵環) 유종(劉鐘)의 천금(千金)일 뿐 아 니라,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름다운 용모와 고강한 무공으로 강남의 청년협사(靑年俠士)들 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하나 마음이 차고 수단이 매서워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만상공자는 철비연 유백령의 냉랭한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하...... 유 소저의 옥용(玉容)을 대하고 보니 소생은 오늘 안계(眼界)를 크게 넓힌 것 같 소이다." 만상공자가 유백령에게만 관심을 기울일 뿐,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자 유백령의 옆에 있던 노파는 발연히 대로했다. 그녀는 용두괴장으로 땅바닥을 찍으며 사납게 외쳤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놈이 감히 노신(老身)을 우습게 보다니...... 네놈의 사부 가 누구이기에 이리도 건방지단 말이냐?" 순간, 팍! 노파가 별로 힘을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용두괴장이 단번에 땅속으로 석 자나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만상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체 저 할망구가 누구이기에 저토록 엄청난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두(竇) 모모(姆姆)! 진정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그에게 볼일이 있으니 잠시만 참도록 해요." 유백령이 노파의 팔을 잡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상공자는 노파의 용두괴장을 자세히 보고 있다가 유백령의 말에서 노파의 성이 희성(稀 姓)인 '두(竇)'씨임을 알게 되자 문득 느낀 것이 있어 가볍게 전신을 떨었다. "혹시...... 선배님께서 날수파파(辣手婆婆) 두추의(竇秋依)......?"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흥! 알긴 아는구나. 노신이 오늘 아가씨를 모시는 몸이 아니었으면 네놈은 명년 오늘이 기 일(忌日)이 되었을 것이다." 만상공자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느끼고 크게 놀라 급히 장읍을 했다. "소생이 미처 노선배를 몰라뵙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그의 태도는 어느새 공손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날수파파(辣手婆婆) 두추의(竇秋依)라면 오십 년 전에 이미 절정의 명성을 떨치던 전대(前 代)의 고수가 아닌가? 공력이 하늘에 다다르고 손속이 너무 날카로워서 당시 무림에서는 사 신(死神)보다도 더한 살명(殺名)을 날리기도 했었다. '날수파파 같은 고수가 한낮 시중꾼으로 있다니...... 과연 비환유문의 명성은 명불허전이로 군.' 만상공자는 새삼 비환유문의 존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공자께선 그분을 찾았나요?" 유백령이 별안간 만상공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난데없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어리둥절해졌다. 하나 만상공자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와 두추의가 그를 만나려고 이 외진 폐찰 까지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응왕 위중악 말이오?" "그래요." "비록 대응왕이 무림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는 십 년이 넘었지만 본 당에서는 이미 그의 종적을 발견했소." 만상공자의 어조에는 자신이 가득 차 있었다. 유백령의 싸늘한 얼굴에 일말의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대응왕(大鷹王) 위중악(葦重鄂)! 그는 준남(準南) 응조문(鷹爪門)의 창시자였다. 그의 삼십육초(三十六招) 대응조력(大鷹爪力)은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로 손꼽혀 오던 희 대의 절기였다. 그는 선천적으로 가공할 신력(神力)을 타고난 데다 공력(功力)이 엄청나서 그가 일단 대응조력을 시전하기만 하면 아무도 감히 받아 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애석하게도 그는 십 년 전부터 무림에서 신비스럽게 사라져 버렸고, 응조문 또한 그의 후인(後人)들이 그와 같은 웅후한 공력을 터득하지 못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 았다. 한데 유백령이 무슨 이유에서 대응왕 위중악을 찾는 것일까? 그것은 위중악이 탈혼무적환 유종의 누이동생인 유삼고(劉三姑)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즉, 위중악은 유백령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것이다. 유백령은 만상공자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갑자기 두추의를 바라보았다. "모모, 그것을 주세요." 두추의는 품속에서 작은 금갑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백령은 그것을 다시 만상공자에게 던져 주었다. "받아 보세요. 이것은 귀당에서 요구한 물건이에요." 만상공자는 금갑을 받아 열어 보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틀림없는 설연실(雪蓮實)이군요." 이어 그는 금갑을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응왕의 행방을 알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소. 하나 나는 소저께서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고 생각하오." 그 말에 유백령과 두추의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두추의가 용두괴장을 금시라도 휘두를 듯 살기 등등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린 녀석! 네놈은 물건을 받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려느냐?" 유백령은 급히 눈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이어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만상공자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백쾌당이 신용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공자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만상공자는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소저께선 총명하기 그지없소. 소생의 말뜻은 그의 행방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저께서 크게 실망하실 것 같아서......" 유백령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그럼 그분께서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유백령의 얼굴이 냉랭하게 굳어졌다. "공자께선 지금 소녀를 놀리고 있나요?" 만상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할 수 없다는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말하겠소. 대응왕은...... 지금 북망산(北邙山)에 있소이다." 이 말에 유백령과 두추의의 안색이 더 이상 싸늘해질 수 없을 만큼 차갑게 굳어졌다. 만상공자는 그들이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이었다. "대응왕은 낙양(洛陽) 북망산의 낙혼봉(落魂峯) 서쪽 봉우리에서 살고 있소." 그제서야 유백령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나 놀라움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모부가 정말 북망산에 있다는 말이에요?" 만상공자는 난처한 듯 그답지 않게 약간 더듬거렸다. "그렇소. 그는 그곳에서...... 묘지기를 하고 있었소." 유백령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뭐, 뭐라고요?" "대응왕은 북망산에서 묘(墓)를 지키고 있었소." 유백령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대응왕은 비단 응조문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불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였 다. 강남무림(江南武林)에서는 지금도 그를 그리워하는 무림인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형편 이었다. 그런 천하의 대응왕이 한낱 묘지기가 되어 있다니...... "나, 나는 믿지 못하겠어요." 한참 후에야 그녀는 더듬거리듯 말했다. 만상공자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본 당 고수들의 소식을 듣고 본인이 직접 가서 확인을 했으니......" 유백령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누구의 묘를 지키고 있던가요?" "그것은 알 수가 없었소. 그냥 여느 평범한 묘와 비슷한 작은 분묘였소." 유백령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그의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만상공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응왕은 대체 무엇 때문에 십 년씩이나 묘를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비환유문과 응조문에 아무런 연락조차 취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대응왕이 지키고 있는 묘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천하의 그 무엇이 대응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파(門派)와 사랑하는 아내까지 돌보지 않고 십 년씩이나 북망산에서 썩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녀가 뜻밖의 사실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더 볼 것 없습니다, 아씨! 저 어린 녀석이 아무렇게나 지어 낸 것이 분명합니다. 위(葦) 대 협(大俠)께서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없어요." 두추의가 흉폭하게 외치며 금시라도 손을 쓸 듯 만상공자를 노려보았다. 유백령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모모! 백쾌당은 결코 이런 일로 신용을 잃을 방파(幇派)가 아니에요. 만상공자도 쓸데없는 허언(虛言)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요." "하지만......" "그만두세요, 모모......" 두추의는 할 수 없이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하나 그녀의 시선은 잡아먹을 듯이 만상공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젠 노부의 차례인가?" 대웅전의 한쪽 구석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동시에, 스으으...... 마치 환상처럼 한 노인이 구석의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모두 대경 실색했다. 아니, 너무 놀라 오히려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저 노인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수 아닌 자가 없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노인이 구석 의 칙칙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치 못했다. 사람이라면, 특히 무림의 고수라면 누구나가 일종의 기(氣)를 지니고 있다. 무공이 높을수록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의 기운이 강렬하여 무림인이라면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만 봐도 상 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이 노인에게는 그런 기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신이 마치 어둠에 동화된 듯 주위와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허리가 유난히 길고 또한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으며, 몸에는 이 미 허옇게 빛깔이 바랜 남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옆구리에는 긴 담뱃대가 꽂혀 있었다. 노인의 용모는 매우 평범했다. 이런 평범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이상하게도 이 평범한 얼굴 의 노인은 다른 사람에게 일종의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비록 노인의 얼굴은 아무런 특징도 없이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얼굴을 한번 본 사람이 라면 평생 잊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위지명은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가까스로 그 이유를 알아 냈다. 그 이유는 원래 이 노인이 매우 예리한 눈동자와 특이한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 인의 눈은 날카로운 비수(匕首)와 같았고, 그의 입술은 유난히 얇고 작았다. 그 두 가지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평범한 노인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노인은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천천히 만상공자에게로 다가왔다. 한데, 만상공자의 태도 또한 이상했다. 원래 그는 지금까지 황룡존자나 날수파파 두추의와 같은 고수들과 말을 나누면서도 약간 오만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도 공손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조심스러워하는 기색까지 엿보였다. 위지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이 노인은 너무도 평범하여 별다른 내력(來歷)을 지닌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황룡존자나 두추의 같은 대단한 고수라고는 더욱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만상공자의 태도가 이토록 달라지다니...... '저 노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한데 그런 위지명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노인은 만상공자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노부의 고양이를 찾았는가?" 이 말에 위지명은 물론이고 중인들도 모두 멍청해졌다. 그럼 노인은 고양이를 찾기 위해 백쾌당에 부탁을 했단 말인가? 아무리 백쾌당이 천하의 어떤 청부든 거절하지 않는다지만, 세상에 자신이 잃어버린 고양이 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수로 이 넓은 천지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찾는단 말인가? 중인들은 백쾌당이 이 일만은 해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나, 세상에는 왕왕 남들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뜻밖에도 만상공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찾아 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백쾌당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설마 잃어버린 고양이까지 찾아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중인들은 백쾌당의 폭넓은 수완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평범한 고양이라면 아무리 백쾌당이라도 찾을 수 없지. 하나 그것이 특수한 고양이라면 얘 기는 달라지겠지." 중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나 하려는 듯, 어디선가 담담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 가! 목소리의 임자는 뜻밖에도 석중옥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위지명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급히 물어 보았다. "공자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석중옥은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느 고양이라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이 백묘설아(白猫雪兒)라면 찾을 수 있다 는 말이다." 위지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묘설아요?" "그리고 그것의 목에 사람의 넋을 뺏는 혼령(魂鈴)이라도 달려 있다면 더욱 찾기가 쉬워지 겠지." 석중옥은 위지명을 향해 싱긋 웃었다.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새하얀 이가 반짝였다. "왜냐하면 그런 고양이는 천하에 오직 한 마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말에 중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백전아(白電兒)!" 그들의 안색에는 비단 경악의 빛이 가득할 뿐 아니라, 은은한 공포의 기색까지 어려 있었다. 백전아(白電兒)! 이것은 희대(稀代)의 영물(靈物)이라는 백묘설아(白猫雪兒)의 일종이었다. 백묘설아는 비록 체구는 작지만 호랑이를 산 채로 찢어 죽이고, 늑대를 잡아먹고 산다는 가 공할 괴력을 지닌 영금(靈禽)이었다. 더구나 몸이 비호(飛虎)보다도 날쌔어 하루 사이에 천 리를 달린다는 신물이었다. 백전아는 이 백묘설아 중 인세(人世)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것은 한번 듣기만 해도 사람의 혼(魂)을 앗아 간다는 마물(魔物)인 아홉 개의 혼 령을 목에 달고 있어 어떤 무시무시한 사람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동물이었다. 위지명은 귀여운 두 눈을 크게 뜨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그럼 공자께선 저 노인을 아세요?" "그렇다." 바로 그때, 노인이 석중옥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노부와 만난 적이 있는가?" "없는 것 같소." "없는 것 같다니......?" "내 기억에는 분명히 없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노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순간, 노인의 눈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하나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노 인은 다시 예의 나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총명한 사람 같으니 자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히 전에 만난 적이 없을 걸세."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다시 예의 느릿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노부를 알아보았나?" 석중옥은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양이 때문이오. 세상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백쾌당에 까지 찾아갈 사람은 노인장뿐일 것이오." 노인은 한동안 물끄러미 석중옥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았네. 백전아는 노부가 몹시 아끼는 것이지." 이어, 그는 만상공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백전아는 지금 어디에 있나?" 만상공자는 눈을 빛내며 의미 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전에 먼저 어르신네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어르신네께서 찾고 계신 것이 단순히 백전아인지, 아니면 백전아의 목에 걸린 혼섬구령(魂 閃九鈴)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순간, 노인의 눈에서 질식할 듯한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만상공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렷하게 말했다. "어르신네께서 찾고 계신 것이 백전아인지 혼섬구령인지에 따라 그 찾는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다시 예의 무심한 태도로 돌아왔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물론 크게 달라집니다. 어르신네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백전아일 때는 황금 만 냥으로도 충 분하지만 만약 그것이 혼섬구령일 때는......" 갑자기 만상공자의 입술이 소리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곧 만상공자가 노인을 향 해 전음(傳音)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상공자는 한참 동안을 무엇인가 계속 말했다. 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담뱃대만을 빨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지껄이고 난 후, 만상공자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노인은 계속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어 아무도 그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담뱃대의 재를 툭툭 털어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부가 원하는 것은 혼섬구령일세." 그 말을 듣자 만상공자는 활짝 웃었다. "하하하...... 소생은 어르신네께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백전아를 훔쳐 간 자는 누구인가?"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지만 중인들은 왠지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의 어조에서 가공할 살기(殺氣)를 느낀 것이다. 만상공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는 천하제일도(天下第一盜)입니다." 노인의 눈이 다시 매섭게 반짝였다. "무흔풍 한쾌 말인가?" "그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감히 어르신네의 백전아를 훔쳐 가겠습니까?" 만상공자는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듯 태연히 말했다. 무흔풍(無痕風) 한쾌(韓快)!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신투(神偸)이며, 종횡무영도 한백 이후 최고의 투도(偸道) 의 대가(大家)였다. 외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신법(身法)은 강호제일로 알려졌으며, 온갖 기행(奇行)과 투 술(偸術)로써 무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절정의 고수였다. "한쾌는 훔친 백전아를 서역(西域)을 오가는 상인(商人)들에게 팔아 버렸고 혼섬구령은 품속 에 계속 가지고 다닙니다." 노인은 특유의 나른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도둑이 갈 데라고는 뻔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죠." 만상공자의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도 노인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남궁검문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금 무림의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이 거의 모두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으니 한쾌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요. 어르신네께서 그곳으로 가시면 한쾌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담뱃대를 빨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는 유백령을 바라보았다. "얘야, 이리로 오너라." 유백령은 잠시 망설였으나 할 수 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두추의가 바짝 긴장하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노인은 담뱃대를 손으로 탁탁 치며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선배님의 명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당이선생이 아니십니까?" 그녀의 음성은 비록 공손했으나, 그 안에는 은은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이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노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당이선생(唐二先生)! 그는 강호육패의 하나인 사천당문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문의 가주(家主)인 천수마군(千手魔君) 당익형(唐翼衡)의 동생이었다. 하나, 무림에서는 당익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당이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 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담뱃대에서 펼쳐지는 육혼십이간(戮魂十二竿)이 얼마나 가공할 무공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나 그보다는 백전아의 목에 매달려 있는 혼섬구령이 그의 손에 쥐여졌을 때 더욱더 무섭 다는 것을,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의 마음씨가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록 무림에 모습을 나타낸 적은 드물었지만, 그의 명성은 오히려 사천당문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림에서 낡은 남포를 입고 머리에 흰색 두건을 매고 담뱃대를 든 노인을 만나게 되면 그가 당이선생이든 아니든 모두 멀찌감치로 피하며 경원(敬遠)했다. 만에 하나 고의든 실수이든 당이선생의 비위를 건드리게 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 닥칠지를 너무 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이선생은 천천히 담뱃대의 재를 털었다. "유(劉) 가주(家主)는 잘 계시느냐?" 유백령은 공손히 고개를 수그렸다. "덕분에 평안히 계십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당이선생을 바라보았다. 티없이 맑게 반짝이는 눈빛이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한데...... 선배님께선 저의 부친을 알고 계십니까?" 당이선생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전에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단다. 그런데 그에게 미안한 짓을 해야겠군." 말을 채 끝내기도 전, 그의 담뱃대가 허공에 한 줄기 흑선(黑線)을 그렸다. 쐐-액! 흑선은 번개같이 유백령과 두추의의 전신을 휘감았다. 파팟! 찰나지간, 유백령과 두추의는 혈도를 점혈(點穴)당해 버렸다. 실로 너무도 창졸간에 벌어진 일인 데다 담뱃대가 날아오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그녀들은 피하기는커녕 영문도 모르 고 제압당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 "이, 이런......" 그녀들이 경악과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 때, "이제 자네와 나의 계약은 끝났네." 당이선생은 만상공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만상공자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하...... 과연 어르신네는 신용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제서야 유백령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았다. "이, 이제 보니......" 놀랍게도 만상공자가 조금 전 혼섬구령을 찾는 대가로 당이선생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그녀 들이었던 것이다. 혼섬구령은 당이선생의 독문암기(獨門暗器)였다. 하나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과 친분 이 있는 사람의 딸인 유백령을 잡아 넘기다니, 과연 악독한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유백령 은 비로소 당이선생에 대한 무림의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 은 것이었다. 당이선생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태연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없다면 노부는 그만 가보겠네." "그러십시오." 당이선생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흔적을 남기지 말게." 그는 바람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위지명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악독한 늙은이가 있다니......" 그는 연신 입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석중옥의 눈치를 슬쩍 살펴보았다. 석중옥이 나서서 그녀들을 구해 주기를 몹시 바라는 모양이었다. 석중옥은 그의 의중을 알고 그의 머리를 건드렸다. "걱정 마라, 녀석아! 우리가 고이 가려 해도 그는 아마 우리를 보내 주지 않으려 할 것이 다." 과연, 만상공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석중옥과 위지명을 힐끔 쳐다보다가 돌연 황룡존자를 향 해 고개를 돌렸다. "선사께선 아직도 본 당에 청부하기를 원하시오?" 황룡존자 오찰극은 흠칫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만상공자는 즉시 석중옥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을 없애 주시오. 그러면 청부를 수락하겠소." 황룡존자 오찰극은 뜻밖의 말에 안색을 찌푸렸다.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중옥에게로 몸을 돌렸다. "알았소." 석중옥은 위지명을 향해 빙긋 웃으며 어떠냐는 듯 쳐다보았다. 제 6 장 분뢰일전(分雷一電) 오찰극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어 그는 석중옥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귀하는 그의 말을 들었소?" 석중옥은 모르는 척 되물었다. "누구의 말을 말이오?" 오찰극은 잠깐 망설였으나 곧 눈을 반짝였다. "만상공자의 말 말이오." "아! 물론 들었소." 석중옥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오찰극이 오히려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귀하는 하고 싶은 말도 없소?" "나는 단지 한 마디만 말하고 싶소." "그게 무엇이오?" "남을 해치려는 자는 자신이 먼저 당하게 되는 법이오." 오찰극의 눈빛이 흉악해졌다. "귀하는 제법 입이 날카롭구려." "남들도 그러더군. 하나 그들은 내 입보다 나의 손이 더 날카롭다는 것을 모르고 있소." 오찰극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神光)이 폭사해 나왔다. 그는 서서히 손을 들어 목탁을 그의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 그의 어투는 어느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하나 석중옥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위지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명! 배고프지 않느냐?" 위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엽게 웃었다. "고파요, 공자님. 조금 전에 먹은 음식이 벌써 다 내려갔는걸요." 오찰극의 눈썹이 솟구치는 노화로 머리 끝까지 치켜 올라갔다.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석중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몸은 그야말로 번개보다도 더 빨랐다. 게다가 그의 손에 들린 목탁이 반원형으로 움직이자 한 줄기 막강한 기운과 함께 나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오찰극의 목탁이 일으키는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밀종(密宗)의 헌원무극해(軒轅無極解)로군." 석중옥은 그것을 한번 힐끔 보고는 태연히 중얼거렸다. 팍! 동시에 그의 어깨가 기우뚱하며 그의 몸이 어느새 오찰극의 뒤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오찰극은 대경 실색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설마 석중옥의 신법(身法)이 이리도 빠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헌원무극해는 포달랍궁에서도 십대절학(十大絶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으로, 오찰극이 처음 부터 이와 같은 절학을 쓴 것도 상대가 혹시라도 실력을 숨긴 고수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 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방의 무공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것임을 알고 전력을 기울였다. 웅웅......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옷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며 손바닥이 시뻘겋게 변 했다. 석중옥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대라인(大羅印)!" 오찰극이 흠칫 놀랐다. "흐흐...... 과연 안목이 놀라운 놈이군. 대라인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그러면 이것이 얼마 나 무서운 것인지도 알고 있겠지?" 대라인(大羅印)! 이것은 밀종의 최고절학(最高絶學)이었다. 그 가공할 파괴력은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것이었다. 하나 그 위력만큼이나 익히기도 어려워, 내공(內功)이 이(二) 갑자(甲子) 이상이 되기 전에 는 감히 시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절기 중의 절기여서 포달랍궁에서도 익힌 사람이 손 에 꼽을 정도였다. "흐흐흐...... 본 궁의 최고절학(最高絶學)에 의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피로 물든 듯한 오찰극의 쌍수(雙手)가 번개같이 휘둘러졌다. 순간, 꽈르르르릉- 우르르릉- 꽈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천지(天地)가 온통 혈광(血光)에 잠기는 듯 시뻘겋게 물들어 갔 다. 바로 그때 석중옥이 우수의 중지(中指)를 가볍게 튕겨 내었다. 순간, 쐐애애액! 파파파...... 마치 얼음이 갈라지듯 예리한 섬광 한 가닥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오찰극의 대라인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오찰극은 혼비백산하여 전력을 다해 쌍수로 섬광을 막으려 했다. 하나, 파파파팍! 목탁이 박살나고 그의 양손이 걸레 조각처럼 터지며, 핏줄기가 자욱하게 뿜어 나왔다. "크-아-악!" 끔직한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놀랍게도 섬광이 그의 양손을 꿰뚫고 복부에 커다란 구 멍을 낸 채 그의 몸을 완전히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이를 어찌 일개 지풍(指風)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가공할 위세에 한쪽에 서 있던 만상공자의 안색마저 흑빛으로 변해버렸다. 오찰극은 경악과 공포, 분노로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채 우뚝 서 있었다. "크으...... 이, 이놈! 과, 과연 대단하...... 다. 하나, 곧 본 고수들이...... 네, 네놈을 찾아 본좌 의 복수를 할 것...... 이다......" 그는 배에서 검붉은 피를 질퍽하게 뿜어 내며 석중옥을 노려보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쿵! 실로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장(西藏) 일대에서는 거의 천신(天神)처럼 군림하던 포달랍궁의 황룡존자가 중원의 외진 곳에서 너무도 어이없게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석중옥은 만상공자를 향해 빙긋 웃었다. "뜻밖이오?" 만상공자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는 즉시 굳었던 안색을 풀며 침착하게 말했다. "확실히 뜻밖이구려." 이어, 그는 무의식적으로 혈도가 제압되어 있는 유백령과 두추의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귀하가 사용한 것은 혹시 천하무림에 산재한 열두 가지 무적지공(無敵指功) 중 하나인 붕 천지(崩天指)가 아니오?" 석중옥은 유백령과 두추의의 곁으로 다가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귀하의 안목은 놀랍구려. 이것이 바로 붕천지요." 그러면서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만상공자와 유백령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만상공자는 그녀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우뚝 멈춰 섰다. 그제서야 그는 눈앞의 이 신비한 흑의서생이 자신에 못지않게 영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원래 그는 그녀들의 몸을 인질(人質)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나 그는 조금도 내색치 않고 태연히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붕천지는 실전(失傳)된 지 이미 백 년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놀랍구려. 실례지만 귀 하의 존성 대명을 알 수 없겠소?" "별말씀을...... 대명이랄 것까지는 없고, 나는 석중옥이란 사람이오." 만상공자는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하...... 나는 무림에 나타난 적이 없으니 귀하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오." 만상공자는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돌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귀하가 오늘 본 일을 모두 잊기를 바라고 있소." 석중옥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본 일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소." 만상공자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나 그는 다시 한 번 참고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이 아니오. 단지 도박과 모험을 싫어하기 때문이오." 석중옥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극히 좋은 버릇이오. 그저 당신이 그런 마음만 계속 간직한다면 귀하는 꼭 오래 살 게 될 것이오." 한편, 혈도를 제압당한 채 한쪽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유백령과 두추의는 제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두추의는 지금까지도 당이선생에게 암습을 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씩씩거리고 있었지 만, 유백령은 자신들이 제압당한 사실보다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더 관심이 쏠 렸다. 특히 그녀는 이 기이한 흑의서생이 보면 볼수록 신비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때는 별다른 기도를 풍기거나 특징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차츰 지켜볼수록 그 특유 의 묘한 매력이 풍겨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그의 무공이 고강하고 정체가 신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투나 행동, 심지어는 미세한 몸짓에서마저 일대종사(一代宗師)와도 같은 당당함과 듬 직함이 느껴졌다. 또한 흐트러진 흑발 때문에 그의 용모는 알아볼 수 없지만, 때때로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담담하면서도 차고 맑은 눈빛은 그녀의 마음에 기이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 었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실로 난생처음 느껴 보는 남성의 강한 체취였다. 절로 그녀의 눈은 야릇한 이채를 일렁이며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만상공자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눈치를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무릇 남자라면 누구나가 미인(美人)의 환심을 사기를 원한다. 특히 경쟁심을 느낄 만한 상대 가 있을 때는 더욱 미녀의 시선이 자신만을 보아 주기를 원하게 되는 법이다. 그는 비록 전 혀 다른 목적으로 그녀를 납치하려 했었지만,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젊은 남자인 이상 속으로 묘한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귀하가 권하는 술을 사양하고 굳이 벌주(罰酒)를 마시겠다니 하는 수 없구려." 순간, 소리도 없이 그의 신형이 석중옥을 덮쳐 왔다. 동시에 눈부신 백광(白光)이 그의 몸에 서 폭사해 나갔다. 그 백광은 삽시간에 석중옥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뿜어 나오는 백광의 기세와 속도는 가히 살인적인 것이어서 유백령을 비롯한 두추의의 안색 마저도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그녀들은 만상공자의 이름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그의 무공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단 한 수(手)를 본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만상공자에 대한 소문이 결코 과장 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석중옥은 태연한 자세로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슬쩍 장난처럼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장난 같은 의미없는 행동처럼 보였다. 하나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쐐애애액-! 무서운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손에서 난데없이 빛살 같은 섬광이 쪼개져 나왔다. 파파파팟-! 그 섬광은 석중옥의 전신을 뒤덮었던 백색 강기( 氣)를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쪼개며 벼 락같이 만상공자에게 덮쳐 갔다. "으헉!" 만상공자의 입에서 다급한 헛소리가 나왔다. 순간, 싸-악! 경미한 음향이 들렸다. 만상공자가 서 있던 곳의 벽(壁)이 마치 벼락에 맞은 듯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다. 만상공자는 처음의 위치에서 우측으로 이 장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만상공자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이 온통 시커멓게 타버리자 경악을 금치 못했 다. 조금 전 그는 절정의 이형신법(移形身法)으로 아슬아슬하게 그 무서운 섬광을 피했던 것 이다. "나의 백룡강인(白龍 印)은 무쇠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인데 단숨에 파괴되다니......" 그 순간, "귀하의 몸도 단숨에 태워 버릴 수 있지." 냉혹한 일갈이 그를 혼비백산케 했다. 쐐애애액-! 또다시 예의 칼날 같은 섬광이 뇌전처럼 만상공자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섬광은 무섭도록 빨랐다. '피해도 팔다리 하나는 잘려져 나가고 말 것이다.' 만상공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또한 보기 드문 기재(奇才)였던 것이다. 그는 섬광을 일별(一瞥)하는 순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했다. 위-윙! 그의 몸에서 하얀 기류가 회오리치듯 벼락같이 일어났다. 그의 온몸은 분칠을 한 듯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무상백무권(無上白霧拳)!" 동시에 그의 쌍권(雙拳)이 벼락치듯 허공을 갈랐다. 콰콰콰-! 가공할 강기가 우레와 같이 무섭게 일어났다. 쾅! 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무서운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섬광과 권풍(拳風)이 맞부딪 치자 쇳소리가 터진 것이다. "윽!"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만상공자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뒤로 삼 장여나 주르르 밀려나며 대 웅전의 벽에 부딪혔다. 콰-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웅전의 거대한 담벼락이 만상공자의 몸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장난 감처럼 터져 나가는 것이었다. 만상공자의 안색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으...... 이럴 수가...... 도대체 그것이 무슨 무공이기에 무상백무권을 뚫고 백무탄강기(白霧彈 氣)로 호신한 내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단 말이냐!' 그의 가슴에는 불에 그을린 듯한 시커먼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정녕 만상공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백무탄강기는 도검(刀劍)을 막 을 수 있고, 무상백무권의 가공스러움은 강철이라도 박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단 일(一) 수(手)에 그 모두를 뚫고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당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금 천하에 자신을 단 이(二) 초(招) 만에 격퇴 시킬 만한 인물이 존재함을 믿을 수 없었다. 설사 전대(前代)의 절정기인(絶頂奇人)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귀, 귀하는 누구요?" 그는 석중옥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석중옥의 행동은 너무나 침착해서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석중옥이라는 무명소졸이라고 하지 않았소?" 스-윽! 담담한 음성과 함께 석중옥은 유령과 같이 만상공자의 앞에 도달했다. 그 순간 만상공자는 기척도 없는 무서운 경력(勁力)이 자신을 덮쳐 옴을 깨닫고 혼비백산했 다. 그는 강호에 출도(出道)한 이후 석중옥과 같은 고수를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 경력의 위세는 질풍 노도와 같아서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분뢰일전(奔雷一電)!" 순간, 파앗! 그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백광이 섬전처럼 피어올랐다. 아니, 피어올랐다고 느낀 순간, 버-언쩍! 눈부신 섬광이 사방으로 폭사해 올랐다. 채챙!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한 인영이 피를 폭포수같이 토해 내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실 끊어 진 연과 같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누구도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한데 언뜻 보기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날아가던 그 인영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시 무 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 맺힌 음성이 아득히 들려 왔다. "두고 보자! 내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씻고야...... 말..... 리라!" 그 음성은 만상공자의 것이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조금 전 피를 토하며 날아가던 인영이 만상공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석중옥은 묵묵히 대웅전의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 지, 그의 왼손이 허리 부근에 가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누구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나 언뜻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눈에는 야릇한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위지명은 자신도 모르게 찔끔하여 입을 열었다. "공자님!" 그제야 석중옥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음...... 소명! 무슨 일이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석중옥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나는 낙화섬수(落花閃手)만으로 그를 충분히 제압할 줄 알았다. 한데 검(劍)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구나." 석중옥이 처음에 만상공자에게 펼쳤던 섬광은 낙화섬수라는 불세출의 절학(絶學)이었다. 한 데 만상공자의 마지막 일초가 의외로 날카로워서 그는 부득불 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인들은 어느 누구도 그가 검을 쓴 것을 보지 못했다. 보기는커녕, 그가 검에 손을 댔다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방금 전에 그가 검을 쓴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무림 역사상 가장 빠른 쾌검(快劍)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위지명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데 공자님께선 왜 그를 죽이지 않으셨지요?" 위지명은 석중옥이 좀처럼 검을 쓰지 않지만 한번 검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석중옥이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어찌 만상공자가 살아날 수 있었겠는가! 석중옥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가 누구의 제자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지." 위지명은 더욱 의혹 어린 얼굴이 되었다. "그가 누구의 제자인데요?" 하나 석중옥은 싱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유백령과 두추의에게 다가가 그들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몸이 자유로워지자 유백령은 예쁘게 웃으며 석중옥을 향해 고개를 수그렸다. "공자! 도와 주셔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석중옥은 조용히 머리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별말씀을...... 그보다 소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유백령은 고운 아미를 상큼히 치켜 뜨며 말했다. "무슨 부탁인지 말씀만 하세요. 힘이 닿는 대로 도와 드릴 테니......" "다름이 아니라 오늘의 일을 당분간 아무에게도 발설치 말아 달라는 것이오." "무엇 때문이죠?" "오늘의 일을 유(劉) 가주(家主)께서 아시면 필히 백쾌당과 사천당문에 시비곡절을 따지실 거요. 당금 무림은 가뜩이나 한백의 장보도로 인해 어지러워지고 있는데 비환유문이 그들과 다툼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한다면 분명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 오." 유백령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약간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제가 오늘의 이 수모를 그냥 참고 견디기만 하란 말씀이세요?" "불초는 다만 소저께서 잠시만 유 가주께 말씀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뿐이오. 소저의 복수는 차차 해도 늦지는 않으니 섣불리 말을 꺼내 소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유백령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으나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환유문의 문주인 탈혼무적환 유종은 성질이 급하기로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더구 나 그는 유백령을 장중보옥(掌中寶玉)인 양 아끼고 있는 터였다. 그가 만약 이번 일을 알게 된다면 그의 성격에 물불을 안 가리고 백쾌당과 사천당문을 공격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나 백쾌당이나 사천당문은 모두 당금 천하의 최강세력 중 하나였다. 아무리 비환유문이 강호육패 중의 하나라 해도 둘 중 어느 한 문파도 쉽사리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당한 것이 너무도 억울한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하나, 석중옥! 이 무심한 사내는 그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포권을 했다. "그럼 나는 소저께서 승낙하신 것으로 믿겠소이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치기도 전, 스-윽! 그의 훤칠한 신형은 위지명과 함께 번개같이 폐찰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경악할 신법이었다. "과연 대단한 신법이군." 여태껏 가만히 있던 두추의가 감탄했다. 그녀는 평생을 강호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살아 왔지만 아직 석중옥과 같은 고수는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녀는 직접 보지 않고는 그와 같은 고수 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토록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까?" 두추의는 유백령이 아무 말도 않고 있음을 알자 의아함을 느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유백령의 안색이 매우 괴이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은은한 분노와 야릇한 호기심, 묘 한 설레임 등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두추의의 가슴이 가볍게 요동쳤다. '아니, 그 신비한 흑의서생이 아가씨의 마음에 혹시라도 무슨 파문을 던져 놓았단 말인가?' 사실 유백령의 지금 심정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앞에서 이토록 무심하게 행동한 사람은 오로지 석중옥이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남자라면 겨우 시중꾼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오만 한 그녀의 가슴에 석중옥의 존재는 매우 특이하게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흥! 네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두고 보자." 유백령의 입에서 영문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의 모습도 그곳에서 사라져 갔다. 제 7 장 남장미녀(男裝美女) 금릉(金陵)! 금릉의 옛이름은 응천(應天)이라고 한다. 명(明) 초기의 수도로, 명이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후 달리 남경(南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물이 번창하고 명승지가 많아 천하의 온 갖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줄지어 찾아들고 있는 강남제일(江南第一)의 성도(省都)였다. 더욱이 오궁(吳宮)이 있었던 덕분에 유적도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진회하(秦淮河) 양안(兩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이곳을 새로이 개 척하였다. 냇가 옆의 수각(水閣)에서는 예술가들이 온갖 기예를 뽐냈고, 하상(河上)에는 등 선(燈船)과 유람선들이 붐비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회하는 풍류를 즐기는 왕손공자(王孫公子)와 풍류문사(風流文士)들이 줄지어 찾 아들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강산(江山)의 기려(奇麗)함이 어울리자 폐허가 되어 가는 금릉을 번 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빈루(迎賓樓). 영빈루는 금릉성 안의 동대가상(東大街上)에 위치하고 있는 이름난 술집이었다. 그 요리가 천하일품이었고, 색(色)과 향(香)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멀리 장안(長安)에까지 소문이 파다 했다. 또한, 점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기 그지없었고 술맛이 좋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영빈루는 항상 흥청거리며 빈자리가 없었으니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때는 정오경. 한낮의 뜨거운 폭양(暴陽)을 받으며 한 흑의서생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흑의서생은 훤칠한 키에 흑두건(黑頭巾)을 매고 있었다. 하나 머리는 산발해서 잔뜩 흐트러 져 있었고, 허리에는 낡을 대로 낡은 철검(鐵劍)을 차고 있어 실로 묘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몹시 퇴폐적인 모습 같기도 했다. 하나 그 눈동자만은 싱싱한 활력(活力)에 차 있었다. 그는 바로 석중옥이었다. 한데,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위지명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석중옥은 담담한 눈빛으로 주루 안을 쓰윽 살펴보았다. 누상(樓上)에는 손님이 가득 차 있어 서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릴 때, "헤헤...... 손님! 미안하지만 합석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점소이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그를 안내했다. 점소이가 안내한 곳은 준미하게 생긴 백의소년의 맞은편 자리였다. 백의미소년은 점소이가 자기 자리로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점소이는 재빨리 그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엷은 미소를 띤 채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곳에는 자리가 없으니 합석을 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점소이는 백의미소년에게 큰절을 올렸다. 백의미소년은 원래 그것을 사양할 생각이었다. 하나 그는 석중옥을 한번 흘긋 보는 순간,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제법 대범한 듯이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중옥은 힐끔 백의미소년의 술과 안주를 훑어보고는 점소이가 묻기도 전에 주문했다. "이것과 똑같은 것으로 일인분 가져 오시오." 그의 목소리는 굵고도 나직했으나 듣는 사람에게는 몹시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그런 것이었 다. 종업원은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몸을 돌려 재빨리 물러났다. 석중옥은 백의미소년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의미소년의 생김새는 매우 예뻤다. 웃지 않았는데도 두 뺨에는 살짝 보조개가 보였고, 맑고도 생기발랄함이 가득 차 있는 커 다란 눈동자는 무엇을 보든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정말 남자라면 보기 드 문 미남자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여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석중옥은 백의미소년의 전신을 한번 훑어보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석중옥은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첫눈에 백의미소년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 다. 남장(男裝)을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몹시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석중옥은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백의미소년은 고개를 나직하게 숙이고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그 서늘한 눈을 들어 석중옥을 힐끔 올려다보곤 했다. 하나 석중옥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흥!" 백의미소년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석중옥은 그녀가 있는 쪽으로는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았고, 입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자 백의미소년의 안색은 더욱 냉랭하게 굳어졌다. 바로 그때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 왔다. 점소이가 음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이보게, 잠깐!" 그 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석중옥이 문득 그를 불러 세웠다. 점소이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신지요, 상공?" 석중옥은 품속에서 약간의 은자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네." 점소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잽싸게 은자를 받아 들며 무엇이든 물어 보라는 듯 아첨의 미소를 지었다. "자네, 혹시 이 근처에 임가장(林家莊)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순간, 점소이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번개같이 주위를 둘러보았 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고...... 공자께선 무슨 일로 임가장을 찾으십니까?" 점소이가 겁에 질린 작은 목소리로 급히 물었다. 석중옥은 점소이의 태도에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볼일이 있다네. 한데 임가장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점소이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고는 약간 망설이는 투로 말했다. "음성을 낮추십시오. 임가장은 흉가(凶家)가 된 지 오래입니다." "흉가라니...... 그곳에서 귀신이라도 나온단 말인가?" 석중옥은 무심결에 물었는데, 의외로 점소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자 석중옥은 도리어 의아해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비록 나직했으나 그들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장미소녀의 귀에는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장미소녀도 그들의 대화가 흥미를 끄는 듯 고운 아미를 상큼히 치켜 뜨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귀신이라니...... 정말 귀신이 나온단 말인가?" 석중옥은 될 수 있는 대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점소이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점소이의 표정은 비단 진지할 뿐 아니라 정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공자께선 믿지 못하실지 모르겠지만...... 임가장에는 정말 귀신이 나옵니다." "언제부터 귀신이 나오기 시작했나?" "대략 석 달 전쯤 됩니다. 번창하던 임가장이 갑자기 폐허(廢墟)가 되었고...... 어느 날부터인 가 그곳에서는 귀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장미소녀는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나 점소이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한지라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직접 그곳에 가서 확인을 해본 사람이 있나?" 점소이의 얼굴에 다시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서 확인을 했죠. 그런데 누가 가든, 일단 임가장 안에만 들어서면 제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죠. 그래서 밤새 그곳을 헤매다가 아무런 이유 도 없이 정신을 잃고는 했죠." 점소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깨어났을 때는 나무에 매달려 있든가...... 아니면 몇 리 떨어진 시궁창에 누워 있곤 했죠. 그리고 옷이 전부 벗겨져 있지 않으면 입 안에 흙이 들어가 있곤 했습니다. 그 후론 아무도 접근을 못 했죠." 석중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알겠네. 임가장은 어디에 있나?" 점소이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밖 동쪽으로 약 삼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석중옥은 빙긋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맙네." 점소이는 허리를 굽히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석중옥은 다시 천천히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남장미소녀는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으나, 그가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자 눈을 치켜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나 석중옥은 그것을 못 본 척했다. "흥!" 다시 남장미소녀의 입에서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석중옥은 묵묵부답, 더욱 빨리 식사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주루를 빠져 나온 후 석중옥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의혹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임가장을 찾으려는 이유는, 물론 신행무영 황비룡의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중조 산에서 황비룡은 그에게 빙백마혼주를 임가장에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한 후 숨을 거두지 않 았는가! 그런데 임가장이 귀신들이 출몰하는 흉가가 되어 있다니...... 그는 점소이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다고 귀신이 있다고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고 있었다. 이제 석중옥은 자신이 맡은 일이 몹시도 번거롭고 위태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그 렇다고 황비룡의 부탁을 들어준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인생(人生)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때로는 운수(運數)가 나쁘기도 하고, 때로는 행운(幸運)을 잡기도 한다. 행운을 잡았을 때 석중옥은 크게 득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운수가 나빴을 때도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그는 인적이 별로 없는 긴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거의 골목을 빠져 나왔을 때였다. 휘-익! 길 옆 지붕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지극히 가볍고 빨라 경공(輕 功)이 대단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내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과연, 그가 골목을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 한 사람이 이미 골목 밖 버드나무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웃지 않아도 보조개가 보이는 그 남장미소녀였다. 그녀는 지금 웃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손을 허리에 끼고, 다른 쪽 손엔 시커먼 채찍을 쥔 채 석중옥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석중옥은 웃지 않았다. 그는 아예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 듯 곧장 앞으로 걸 어갔다. 그는 지금 상태로도 번잡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귀찮은 일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 다. 더구나 상대가 남자도 아닌 여자라면 더욱더 아무런 일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항상 여자와 붙어 다니는 법이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지금 이 아가씨는 남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눈이 조금만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이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석중옥이 그녀를 아예 무시하고 자기 갈 길을 계속 간 것은 현명한 방법이긴 했으나, 그것 은 곧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가 시치미를 떼고 몇 걸음을 떼어 놓기도 전에 돌연 백영이 번쩍이더니 그녀가 오른손에 채찍을 쥐고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남장미소녀는 맑고 큰 눈동자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대뜸 엉뚱한 질문을 했다. "나는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인가요?" 그녀는 물론 그런 투명인간은 아니었다. 석중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혹시 앞 못 보는 장님인가요?" 석중옥은 물론 장님이 아니었다. 남장미소녀의 눈동자는 계속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 다. "그럼 당신은 왜 나를 쳐다보지 않는 거죠?" 마침내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모르기 때문이오." 그 이유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떤 여인이라 할지라도 이런 무안을 당하게 되 면 곧 고개를 돌려 떠날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예외였다. 그녀는 도리어 웃었다. "몰라도 상관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아는 사람이 있나요? 쑥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나는 절대 당신이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탓하지 않을 거예요."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채찍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했다. "내 성은 노(盧)이고 이름은 연홍(蓮紅)이에요. 한 송이 붉은 연꽃이란 뜻이죠."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이 여자 같다고 해서 내가 여자처럼 호락호락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이 큰 착각을 하는 거예요. 나는 보기보다 아주 거칠고 사나운 성질을 가졌어요. 특히 화가 나면 아주 무섭죠."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성질이 사납다고 말하는 여인이니 어련하겠는가! 석중옥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연홍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밝힌 남장미소녀는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할말이 이미 끝났는데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없죠?" 석중옥에게 지금 소원이 있다면 이 여자와 더 이상의 시비를 벌이지 않고 이대로 조용히 떠 나는 것뿐이었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단지 초면(初面)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오." 말을 끝내는 즉시 그는 등을 돌렸다. 노연홍은 사리가 밝지는 않았지만 경공(輕功)만큼은 일류임에 틀림없었다. 석중옥이 몸을 돌 리자마자 그녀는 이미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났으니 구면(舊面)이 되는 셈이죠? 그러니 당신도 나한테 이름을 밝히세요.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배워 왔는지도 밝히세요." 알고 보니 그녀는 사리에 밝지 않은 것도 아니며 얼굴 가죽이 두꺼운 것도 아니었다. 그녀 는 석중옥의 이름과 사문(師門)의 내력을 알아 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무엇 때문에 생면부지인 젊은 남자의 신상 내력을 알려고 애쓰는 것일까? 석중옥은 한참 깊은 생각을 하다가 비로소 대꾸했다. "나도 그것을 밝혀 주고 싶소. 하지만 당신에게는 말을 못 하겠소." 노연홍은 즉시 물었다. "왜요? 당신은 초면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 습관이라도 있나요?" 석중옥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행길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소." 노연홍은 이제 웃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펄쩍 뛰었다.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허공에서 채찍을 떨쳐 냈다. 쐐-액! 그녀의 웃음은 달콤했지만, 출수(出手)는 번개 같았다. 만약 석중옥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면 그녀의 채찍 아래 벌써 누워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채찍은 그만큼 날카롭고도 매서웠다. 그녀는 쉬지 않고 그것을 계속 떨쳐 냈다. 하나, 불운하게도 그녀의 상대는 다름 아닌 석중옥이었다. 파파파파팍! 그녀의 채찍은 놀랍도록 빨랐지만, 석중옥이 몸을 피하는 속도는 더욱 빨랐다. 때문에 독사 같은 채찍은 아예 그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이것을 본 노연홍은 내심 크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할아버지께서 친히 만드신 선풍대라편(旋風大羅鞭)을 이리 도 쉽게 피해 낸단 말인가!' 사실 그녀가 석중옥에게 시비를 건 이유는 그가 영빈루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 얄미워 그에게 쓴맛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속에는 그녀도 알지 못할 여인의 야릇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쓴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면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말고도 더 좋은 다른 방법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녀는 지금 진짜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석중옥이 태연 자약한 태도로 자신의 채찍을 피하자 약이 바짝 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고 더욱 사력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다. 쉬- 쉬- 쉭! 매서운 경풍이 주위를 질풍 노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하나 석중옥은 시종 여유 만만하게 빗발치는 듯한 공세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단지 피할 뿐 반격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무공 내력을 밝히려고 하듯이 그도 또한 그녀의 무공 내력에 대해 알아볼 생 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엉뚱한 미소녀의 무공은 뜻밖에도 몹시 복잡했던 것이다. 채찍을 휘두르는 솜씨는 어찌 보면 아미(峨嵋)의 난파풍검법(亂波風劍法)을 편법(鞭法)으로 바꾼 것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무당(武當)의 삼십육불진법(三十六拂塵法)에서 변형된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또 달리 보면 홍교(紅敎)의 보수화우일천식(寶樹花雨一千式)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고, 하동(河東) 철가(鐵家)의 독문무공인 화운십삼필(火雲十三筆)의 변화도 엿보 이는 듯했다. 그야말로 불도속(佛道俗)의 다양한 무공초식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석중옥으로서도 도저 히 그녀의 무공 내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대신 잡다한 무공을 배운 탓인지 공력이 정순(精純)하지 못한 면도 있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호흡이 차츰 거칠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색도 더불어 창백해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손을 거두고 그 자리에 돌처럼 서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석중옥은 그녀가 지쳐 있는 틈을 타서 출수할 뜻은 없었다. 그는 단지 얼른 이곳을 떠 나고 싶을 뿐이었다. 한데 그가 떠나기도 전에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으-음!" 노연홍이 돌연 수중의 채찍을 떨어뜨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녀의 호흡은 갈수록 더 거칠어졌다. 더구나 안색 또한 더욱 창백해져 마치 심각한 내상 (內傷)이라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석중옥은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린 적이 없지 않은가! 노연홍은 그를 주시하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눈치였으나,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별안간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번 쓰러진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석중옥은 비록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저히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쓰러진 곳으로 걸어갔다. 이어,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호흡 소리를 들어 보았다. 호흡 소리는 매우 미약했다. 그 는 다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이마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보았다. 손도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심지어 손끝까지도 시릴 정 도였다. 게다가 맥박은 거의 뛰지도 않을 정도로 약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갓 잡아 올린 잉어처럼 생생하게 팔딱거리고 있던 그녀가 왜 갑자기 벼 락맞은 고목처럼 축 늘어져 버린 것일까? 석중옥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데 그가 막 두 걸음도 채 걷기 전에 등뒤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예리한 경풍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이런 나쁜 자식! 사람이 쓰러졌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가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곧 숨이 끊어질 것 같던 노연홍이 어느새 일어나 그를 향해 채찍을 휘 둘렀던 것이다. 석중옥은 뒤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훌쩍 몸을 날려 너무도 가볍게 그녀의 채찍을 피해 멀 찌감치 물러섰다. 그가 흘끗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는 고운 눈썹을 머리 끝까지 솟구친 채 얼굴을 붉게 물들 이며 그를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어찌나 노화가 솟구쳤는지 두 눈에 글썽글썽 눈물 까지 고여 있었다. "정말...... 못된 심보로군요. 당신 눈에는 내가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단 말인가요?" 석중옥은 그녀의 눈에서 금세 눈물이 떨어질 듯하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가 당신보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하라고 했소?" 조금 전에 그녀는 실력으로 석중옥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짐짓 몸에 병이 있는 것 처럼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낌새를 알아차린 석중옥이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 려 했으니 그녀로서는 분명 창피막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녀는 창피함보다는 서럽고 억울한 감정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갑자기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정말 조금도 양보해 주지 않는군요. 당신 같은 악질은 정말 처음이에요!" 석중옥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양보를 해줘야 한단 말이오?" 노연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악을 쓰듯 외쳤다. "당신은 내가 여자인지 뻔히 알고 있었잖아요!" "여자에게는 무조건 양보해 줘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소?" 노연홍은 말이 막히자 화가 치밀어 올라 가뜩이나 붉게 물들었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할 정 도였다. 그녀는 갑자기 펄쩍 뛰며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 같은 무뢰배에게 이런 무시를 당하다니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리겠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천령개(天靈蓋)를 맹렬히 내리쳤다. 석중옥은 설마 그녀가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갔다. 순간, 자신의 두개골을 향해 내리쳐 가던 노연홍의 우수가 번개같이 선회해 석중옥의 가슴 을 후려갈겼다. 팡! 석중옥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호호호!" 그때 노연홍은 어느새 근처의 담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담장 위에서 석중옥을 바라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호호...... 그래도 눈앞에서 여자가 죽는다니까 겨우 관심을 보이는군요. 앞으로는 절대 연약 한 여인에게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담장 밑으로 사라져 갔다. 석중옥은 내심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맞은 일장(一掌)이었지만, 그의 공력이 워낙 심후하고 그녀 또한 악의(惡意)가 없었는지 별다른 위력이 담겨 있지 않 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하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변화 무쌍한 그녀의 성질에는 그도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이유로 석중옥에게 시비를 걸어 왔던 것일까? 석중옥은 한동안 묵묵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제 8 장 해천쌍로(海天雙老) 명효릉(明孝陵)! 명효릉은 금릉의 동쪽에 위치한 종산(鍾山)에 면해 있는 거대한 능(陵)이었다. 이곳은 명 (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障)의 무덤으로, 수많은 후인(後人)들의 성묘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명소였다. 더구나 주위의 풍경이 수려하기 그지없어 많은 금릉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행건정(行建亭). 행건정은 명효릉 앞에 있는 조그만 찻집이었다. 주위의 경치가 좋고 차맛이 훌륭하여, 금릉 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는 오후경. 지는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행건정으로 들어서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글을 읽는 서생답지 않게 봉두난발을 한 흑의서생이었다. 더구나 허리에는 달랑 철검을 차고 있어 보는 이들을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흑의서생은 행건정에 들어서서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공자님!" 좌측 창가에 있던 백의소년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십사오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금동(金童) 같은 소년이었다. 흑의서생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는 백의소년의 앞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지시한 일은 했느냐?" 백의소년은 다름 아닌 위지명이었다. 그는 석중옥의 부탁을 받고 잠시 다른 곳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여운 눈망울을 떼구루루 굴렸다. "네, 공자님의 말씀대로 장묘(將墓)의 한가운데에 '수(壽)'라고 쓰여진 노란 깃발을 꽂았어 요." 장묘는 이곳에서 일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묘였다. 석중옥은 무슨 일로 위지명을 그곳에 보내 깃발을 꽂게 했을까? 위지명 자신도 그 일이 궁금한 듯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공자님! 대체 무엇 때문에 저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키셨습니까?" 석중옥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녀석,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이다." 위지명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거렸다. 마침 그때 점원이 따끈한 차를 가져 왔다. 석중옥은 천천히 그것을 마셨다. 위지명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총명해 보이 는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보였던지 석중옥의 무심한 동공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녀석,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위지명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급히 물었다. "공자님, 혹시 그 깃발은 사람을 찾는 표식 같은 게 아닙니까?" 석중옥이 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녀석, 제법이군. 그런 것까지 짐작해 내다니......" 그는 대견스러운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 그 깃발은 어떤 사람을 찾으려고 내건 것이다." "어떤 사람인데요?" 그의 조그마한 얼굴이 기대에 가득 차 있음을 본 석중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사부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들이다." "노신선(老神仙)과요?" 위지명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가 알기로는 석중옥의 사부인 노신선께서는 배분(輩分)이 엄청나게 높을 뿐 아니라 나이 가 많아, 당금은 물론 전대(前代)의 인물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굽니까?" 석중옥은 다시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만나서 물어 보아라!"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위지명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장묘(將墓)! 장묘는 명효릉에서 일 리 가량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명 태조 주원장을 호위하던 장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묘였다. 장묘의 꼭대기 부근. '수(壽)'라고 쓰인 노란 깃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석중옥과 위지명은 일(一) 각(刻)쯤 걸어 장묘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위지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하나 석중옥은 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지명은 흠칫 놀라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누가 와 있단 말이에요?" 석중옥은 대답하지 않고 좌측의 숲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셈이오?" 순간, "크하하하......" "놀라운 아이로군. 노부 등이 이미 와 있는 것을 알아 내다니......" 우렁찬 광소가 터지며 두 개의 인영이 숲속에서 날아왔다. 휘익! 그들의 신법은 실로 가공스러워 단번에 삼십여 장을 날아 석중옥의 앞에 내려서는 것이 아 닌가! 위지명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타난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킥!"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나타난 인물들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던 것이다. 좌측의 노인. 세상에 이리도 뚱뚱한 사람이 있을까? 키는 오(五) 척(尺)을 간신히 넘을까말까 한 단신인 데다가, 얼마나 살이 쪘는지 흡사 굴러 다니는 공 같아 보였다. 배는 임산부처럼 볼록 튀어나왔고 팔다리는 물론 얼굴마저도 뒤룩 뒤룩 살이 잔뜩 쪄 숨쉬기조차 거북해 보였다. 게다가 부풀은 호빵 같은 얼굴에는 몇 가닥의 새하얀 수염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연신 비비 꼬는 모습이 영락없이 저팔계를 연상케 했다. 우측의 인물은 또 어떤가? 그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할 정도로 마른 노인이었다. 칠 척이 넘는 장대 같은 키에 몸은 비 루먹은 말보다도 더욱 말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저항감이 들게 할 정도였다. 더구나 좌측의 뚱뚱한 노인과 같이 서 있으니 더욱 말라 보였다. 그래도 꼴에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해대는데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이러니 위지명이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석중옥 또한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빙그레 웃음을 매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보고 웃자, 두 노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측의 비쩍 마른 노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들이 왜 우리를 보고 웃는 거지?" 좌측의 뚱뚱한 노인이 즉시 말을 받았다. "우리를 보고 웃는 게 아니란다, 마른 멸치." "그러면......?" "그들은 앙상하게 마른 너의 가소로운 꼴을 생전 처음 보았을 텐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 느냐? 크하하하......" 뚱보노인은 말을 마치며 자신도 통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비쩍 마른 노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래 봐야 마른 나무껍질에 금이 몇 개 더 그어 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마른 노인은 뚱보노인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박장 대소하자 싸늘히 외쳤다. "이 뚱보돼지야, 그들은 제법 총기가 있어 보이는데 어찌 노부의 신선 같은 모습을 보고 웃 겠느냐? 아마도 너 뚱보돼지의 가공할 비곗살을 보고 웃는 것일 게다. 허허허허......" 그도 또한 말을 마치자마자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마를대로 마른 앙상한 가시 같은 노인이 신선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크하하하하......" "허허허허허......" 뚱보노인과 마른 노인은 마치 내기라도 하듯이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쉴새없이 웃어 젖혔다. 그러다가, "......!" "......!"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 았다. "마른 멸치, 네가 감히 노부보고 가공할 비곗살이라고......!" "뚱보돼지, 네놈이 노부를 가소롭다고......!" 그들은 서로의 안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으르렁거렸다. 그들의 연속되는 기이한 행동에 위지명은 어안이 벙벙했다. 석중옥은 한쪽에 서서 입가에 신선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두 노인의 얼굴이 동시에 석중옥과 위지명을 향했다. "우리를 보고 먼저 웃은 놈들은 바로 저놈들이다." "그래. 그리고 저 작은 꼬마놈은 더욱 요란하게 웃었다." 그들은 살기 등등하게 석중옥과 위지명을 노려보았다. 위지명은 어이가 없고 당황하여 얼굴 이 새빨개졌다. 뚱보노인은 마른 노인을 바라보며 살이 뒤룩뒤룩한 몸집을 흔들었다. "이봐, 마른 멸치!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들을 놀린 놈들을 그냥 놔둔 적이 없었지?" 비쩍 마른 노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 어른을 공경하는 습관이 들도록 고쳐 주곤 했지." 뚱보노인은 불룩 나온 배를 탐스럽게 쓰다듬으며 기분좋은 듯 말했다. "그럼 자네가 흑의를 입은 저 키 큰 녀석을 맡게. 나는 키가 작으니 조그만 꼬마놈을 맡겠 네." 마른 노인이 점잖게 손을 내두르며 크게 선심을 쓴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야. 저 키가 큰 놈은 나보다야 풍채가 좋은 자네가 적격일 걸세. 나는 대신 몸이 비리 비리하니 약골로 보이는 저 꼬마녀석을 혼내 주겠네." "아닐세. 아무리 보아도 키가 큰 녀석은 힘이 세게 생겼으니 나보다 실력이 좋은 자네가 맡 는 게 나을 것이네." 마른 노인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실력이야 나보다 자네가 훨씬 좋지 않나?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키 큰 놈을 맡게. 나같이 비쩍 마른 가소로운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뚱보노인은 천만의 말이라는 듯 급히 손을 휘둘렀다. "아니라니까. 나는 비록 자네보다 뚱뚱하긴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가공할 비곗살에 지나지 않 네. 어찌 자네의 근육으로 뭉쳐진 날씬한 몸매에 비하겠나? 그러니 자네가 저 큰 녀석 을......" "이봐, 뚱보돼지! 내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리는 약골이란 건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저 흑의를 입은 녀석은 보기에도 제법 힘깨나 쓰게 생겼는데, 만약 내가 그를 건드렸 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겠나? 자네는 체구가 당당하니 그가 함부로 하지 못할 걸세." 뚱보노인은 단추구멍 같은 눈을 부릅떴다. "마른 멸치! 몇 번이나 말을 해야 알아듣겠나? 저 녀석은 자네의 훤칠한 키만 보면 겁이 나 서 감히 덤벼들지 못할 걸세. 그에 비하면 노부의 왜소한 키로는 놀림감밖에 안 되니 자네 가 그를 맡아서 훈계해 주도록 하게." 마른 노인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뚱보돼지, 너는 내가 저놈을 상대하다가 뼈가 부러지는 꼴을 꼭 봐야겠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마른 멸치! 너야말로 노부가 저 녀석에게 얻어맞아 배가 터지는 꼴 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니냐?" "뚱보돼지! 네 몸뚱어리는 가공할 비곗살로 뒤덮여 있으니 그에게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을 게 분명하다." "마른 멸치! 너야말로 그 장작개비 같은 뼈다귀는 아무리 맞아도 끄떡없을걸." 마른 노인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뚱보돼지! 말을 삼가라. 노부의 신선 같은 풍채를 장작개비에 비유하다니......" "마른 멸치! 네놈이야말로 아가리를 잘 놀려라. 전부터 네놈이 노부의 당당한 체구를 부러워 하고 있는 줄은 잘 알고 있거늘......" "뭐라고? 이 땅꼬마 같은 뚱뚱보가......" "이 빌어먹을 말라 빠진 가시 같은 게......" 그들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위지명은 그들의 모습에 한편으론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의아하기도 했다. 그는 천 하에 이토록 괴상망측한 노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을 때였다. "두 분께선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시게 되었소?" 묵묵히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석중옥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두 노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듯 말을 멈추었다. 하나 그보다 두 노인은 석중옥의 무공에 크게 놀란 듯했다. '보기보단 대단한 녀석이군.' '보통 꼬마가 아닌 것 같은데...... 잘못하다간 오늘 큰 망신을 당하게 생겼군.' 그들은 움찔하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주수기(主壽旗)를 꽂은 사람인가?" 뚱보노인이 제법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귀하들이 바로 해천쌍로(海天雙老)요?" 귀하란 말에 두 노인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들은 모두 전대(前代)의 기인(奇人)들이 었다. 그러니 어찌 이런 건방진 말투를 들어 보았겠는가? 비쩍 마른 노인이 한기가 펄펄 날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부들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감히 그런 말투를 쓰다니...... 어린 녀석이 실로 광망하구나!" 그의 음성에는 강한 자부심과 질책의 뜻이 서려 있었다. 한데, 해천쌍로라니...... 그럼 이들이 바로 육십 년 전 온갖 기행(奇行)으로 강호천지(江湖天地)를 부르르 떨게 한 바로 그 해천쌍로란 말인가? 해천쌍로(海天雙老)! 실로 놀라운 이름이 아닌가! 육십 년 전, 혜성처럼 무림에 나타나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풍진강호를 진동시켰던 두 기인 이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다다라 적수를 만나지 못했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과 해학으로 전무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다시피 했었다. 더구나 그들은 너무도 특이한 외모와 언행으로 강호에 숱한 전설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뚱뚱한 노인은 반옹(珊翁) 곡현(曲玄)이라 했고, 비쩍 마른 노인은 고수(枯 ) 곽창(郭昌)이었 다. 한데, 그들이 다시 육십 년 만에 무림에 나타나다니...... 천하가 경동할 일이었다. 하나, 석중옥은 이들의 엄청난 위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을 보자 해천쌍로의 안색이 더욱 냉랭해졌다. 반옹 곡현이 보다못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주수기를 꽂은 것으로 보아 천룡문(天龍門)의 문하(門下)인 듯한데 설마 노부들의 신분을 모른단 말이냐?" 하나 석중옥은 싱긋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두 분께선 천룡문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계시오?" 해천쌍로의 얼굴이 의혹과 분노로 벌게졌다. 고수 곽창이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네놈은 정말 모르느냐?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한단 말이냐?" 석중옥은 태연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두 분이 나를 이긴다면 말해 주겠소." 반옹 곡현이 보다못해 발연히 대로했다. "어린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경우가 없구나. 어디, 네놈이 누구의 제자이기에 그토록 오만한지 한번 보자!" 말을 끝내기도 전, 쐐-액! 그의 우수가 갈고리처럼 변해 석중옥의 맥문(脈門)을 잡아 왔다. 그 속도는 가공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하나 그 순간, 석중옥의 몸은 한 줄기 검은 연기가 되어 그의 공세를 벗어났다. 그 가공할 실력에 반옹 곡현은 물론이고 고수 곽창도 흠칫 놀랐다. "이놈, 그것이 무슨 신법이냐?" 석중옥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귀하 혼자로는 아마 어려울 거요. 그러니 두 분이 함께 덤비시오." 해천쌍로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벌겋게 상기되었다. "이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나. 어디 이번에는 노부의 쇄비수(碎臂手) 맛 좀 봐라." 고수 곽창이 깡마른 손을 휘두르며 덮쳐 왔다. 쇄비수는 곽창의 성명절기로서,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으스러뜨리는 가공할 위력 때문에 어 지간한 일에는 결코 쓰지 않는 절학이었다. 한데 그가 쇄비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얼마나 노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파파팟! 쇄비수의 막강한 공세가 폭포수처럼 석중옥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흡사 철로 만든 손인 듯, 거무튀튀하게 변한 곽창의 쇄비수 장력(掌力)은 보는 이들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였다. 쇄비수의 가공할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반옹 곡현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 외쳤다. "마른 멸치! 그 녀석은 아직 나이도 어리니 손에 사정을 두게." 이 말을 듣자 고수 곽창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급히 손에서 삼(三) 성(成) 가량의 진력을 빼내었다. 비록 칠(七) 성(成) 공력(功力)의 쇄비수라지만 그 위력은 엄청나 직접 맞 으면 설사 무쇠로 된 인간이라도 으스러질 정도였다. 한데 석중옥은 그 가공할 공세를 보고도 피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뒷짐을 지고 태연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해천쌍로의 얼굴이 다시 대변했다. 그 순간, 꽈-광! 곽창의 가공할 쇄비수 장력은 석중옥의 가슴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우욱!" 신음성이 터지며 비틀거리고 물러나는 한 인영이 있었다. 찰나 중인들의 안색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놀랍게도 물러선 인영은 다름 아닌 고수 곽창이 아닌가! 곽창의 깡마른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이...... 이것은 대천강신공(大天 神功)!" 그의 음성에는 비단 경악이 충만할 뿐 아니라 은은한 두려움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말을 듣자 반옹 곡현의 뚱뚱한 얼굴도 새파랗게 굳어졌다. "마른 멸치...... 틀, 틀림없는 대천강신공이냐?" 곽창은 진지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하다. 뚱보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노부의 쇄비수가 이리도 쉽게 격퇴당하겠느 냐?"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귀...... 귀하의 정체는 무엇이오?" 어느새 그들의 말투는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석중옥은 태연한 기색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 개의 작은 옥패(玉佩)였다. 크기는 어른의 손바닥만한 것이었는데, 전면에는 구름 을 타고 승천하는 용(龍)의 모양이 음각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백발의 노인이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천...... 천룡무상령(天龍無上令)!" "그, 그럼 귀하는......?" 해천쌍로의 얼굴이 격동으로 가득 찼다. 석중옥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옥패를 손에 쥔 채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영패를 보고도 대례(大禮)치 않으시오?" 순간, "천룡쌍위(天龍雙衛)가 문주(門主)를 뵈옵니다." 해천쌍로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엎드려 대례를 올렸다. 아! 실로 믿지 못할 일이었다. 천하를 떨쳐 울리던 일대기인(一代奇人)들인 해천쌍로가 일개 청년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영패를 거두며 조용하나 위엄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께선 일어나시오." 해천쌍로, 아니 천룡쌍위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반옹 곡현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수그렸다. "문주님을 미처 알아뵙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석중옥은 무심한 음성을 토해 냈다. "모르고 한 것은 죄가 되지 않소. 두 분은 그만 예를 거두시오." 곡현과 곽창은 그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곽창은 석중옥을 바라보며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신선께서는 안녕히 계십니까?" 그의 음성에는 흠모와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에 드셨는지라 아직도 정정하시오." 곡현은 조심스런 태도로 물었다. "한데 문주님께서는 노신선의 몇째 제자이십니까?" "넷째요." 곡현은 다시 약간 머뭇거리다가 어색한 듯이 물었다. "문주님께서는 언제 노신선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으셨는지......" 석중옥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빙긋 웃었다. "당신들은 언제 천룡애(天龍崖)를 마지막으로 떠났소?" 곡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삼십여 년쯤 됩니다." "그러니 나를 몰라보는 것이오. 나는 십오 년 전에 사부님의 문하에 들어왔소." 그제야 곡현과 곽창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노복(老僕)들은 그것도 모르고 잠시 문주님의 신분에 의심을 가졌었습니다." 천하의 해천쌍로가 노복이라고 자칭하다니...... 천하인들이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되면 자신들의 귀를 믿지 못할 것이다. 하나 한편으로 해천쌍로는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의아심을 참을 길이 없었다. 노신선은 극히 엄격하여 결코 문중(門中)의 대통(大統)을 수제자가 아닌 넷째 제자에게 맡길 리가 없 기 때문이었다. 석중옥은 태연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언제 다시 무림에 나타났소?" 곡현이 뚱뚱한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십 년 전입니다."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어른거렸다. "천심장(天心莊)의 혈겁(血劫)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노복들은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십 년간 천하를 이 잡듯 뒤졌습니다." 비쩍 마른 얼굴을 찌푸리며 곽창이 얼른 대답했다. 천심장의 혈겁! 그것은 십 년 전 온 천하를 의혹과 공포의 전율로 몰아넣었던 일대의 참사(慘事)였다. 당시 무림에는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숭앙을 받던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단천거사(斷天居士) 위지송(慰遲松)이었다. 위지송은 그야말로 무공과 인품에서 당시 무림의 제일인자로 누구나가 인정해 마지않던 불 가일세(不可一世)의 고수였다. 더구나 그의 거처인 천심장(天心莊)은 그를 흠모하여 따르는 수많은 기인고수들이 머물러 있어 능히 강호제일의 세력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천심장이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혈겁(血劫)을 당해 그를 비롯한 이백여 식 솔들이 모두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단천거사 위지송은 그 공력의 깊이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날 뿐 아니라 덕망이 높고 인품이 고귀하여 온 천하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었다. 한데 그의 천심장이 하룻밤 사이에 초토(焦土)가 되어 버렸으니...... 그 일로 무림이 발칵 뒤집혀서 당시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한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발 벗고 나섰으나, 아무도 그 일의 원인과 흉수(兇手)를 밝혀 내지 못했었다. 한데 대체 무슨 일로 해천쌍로가 그 참사를 조사하고 있단 말인가? 석중옥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선 그 혈겁의 원흉(元兇)을 밝혀 내셨소?" 해천쌍로는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수그렸다. "흉수의 종적이 워낙 신비한 데다가 당시 그 혈겁에는 거의 전무림의 고수들이 참여하다시 피 했는지라......" 그때, 한쪽에 서서 이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위지명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입술 을 꼭 다문 채 그들의 말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런 그를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해천쌍로에게 말했다. "알겠소. 그 일은 내가 조사할 테니 대신 당신들은 다른 일을 맡아 주시오." "무엇입니까?" 곡현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항상 얼굴에 익살기가 사라지지 않던 그가 제법 진지한 태도로 나오자 몹시 우스워 보였다. 하나 위지명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비통과 울분이 가득했다. 석중옥은 그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은 당금 천하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일을 알고 있소?" 곡현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문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혹시 한백(寒魄)의 장보도 사건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소."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두 분 노인께선 장보도 사건의 발상지인 남궁검문을 조사해 주시오." 이 말에 해천쌍로는 움찔하여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에 무슨 의문이라도......?" "얼마 후면 두 분도 알게 될 것이오. 며칠 내로 나도 그곳으로 갈 테니 두 분 노인장께서는 먼저 남궁검문으로 가서 신검(神劍) 남궁뢰(南宮雷)의 동태를 주의 깊게 관찰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해천쌍로는 고개를 수그렸다. 석중옥은 위지명을 바라보았다. "소명! 너도 저분들을 따라가거라." 위지명은 움찔하여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고...... 공자님!" 석중옥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녀석...... 나도 곧 갈 테니 이분 노인들과 먼저 그곳에 가 있거라." "하, 하지만......" 위지명은 섭섭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녀석, 아직도 어리광이냐? 얼마 후면 곧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석중옥이 자상하게 말하자, 위지명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현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문주님! 이 아이는......?"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셋째 사형의 아들이오." 그 말에 곡현과 곽창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그럼 이 소년이 위지송 셋째 공자님의 아들이란 말입니까?" "십 년 전의 혈겁 때 천심장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알려졌었는데......" 해천쌍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데......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십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던 단천거사 위지송이 석중옥의 셋째 사형이었다니...... 더구나 위지명이 그의 아들이라니, 더욱 믿지 못할 일이었다. 석중옥은 씁쓰레하게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당시 이 아이는 병(病)을 치료하기 위해 천룡애에 와 있었소. 그래서 그 때 혈겁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오." 곡현과 곽창은 다시 한 번 위지명을 바라보았다. 위지명은 귀여운 눈을 글썽이며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꼭 다문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였다. 곡현은 그를 자세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셋째 공자님을 꼭 빼닮았군요." 위지명은 이 말에 두 눈을 반짝였다. "저의 아버님을 아세요?" 곡현은 자상하게 웃었다. "알다 뿐이냐? 그분은 노부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분이셨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지." 곽창도 비쩍 마른 몸을 흔들며 인자하게 웃었다. "위 공자님은 세 분 사형제(師兄弟) 중에서도 노신선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셨지." 위지명은 그들의 말에 기쁜 듯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켰다. 어린아이다운 순진스럽기 그지없 는 모습이었다. 석중옥은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녀석!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구나." 석중옥은 해천쌍로가 위지명을 잘 돌보리라 믿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해천쌍로는 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문주." "허허허...... 이 꼬마녀석은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이 신주 모시듯 잘 받들어 모실 테니......" 위지명도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손을 흔들었다. "공자님,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석중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순간, 팍! 그의 신형은 마치 허깨비와 같이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신법이 아닌가! 이 가공할 신법을 본 해천쌍로의 두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과연 굉장하구나!" 곡현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노신선께서 저분을 문주로 삼으신 것이 틀린 일은 아니었군." 곽창도 고개를 끄덕이며 석중옥이 사라져 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비록 견식이 높고 무공이 고강하였지만, 석중옥과 같은 신법의 소유자는 본 적이 없 었다. 그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휴...... 마른 멸치야! 이제 그만 우리도 가자꾸나." 그들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장내를 벗어났다. 제 9 장 기문진식(奇門陣式) 금릉성의 동문대로(東門大路)를 따라 성밖을 삼 리쯤 벗어나면 한 채의 거대하고도 황량한 장원이 나타난다. 임가장(林家莊)! 몇 달 전만 해도 번창하고 화려했을 임가장의 넓은 담장은 먼지와 이끼로 뒤덮여 퇴락해 보 였고, 을씨년스러운 한풍만이 몰아치고 있었다. 황혼 무렵. 석중옥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음산해 보이는 임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흐린 날의 황혼(黃昏)은 언제나 짧다.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음산 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석중옥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임가장의 넓은 뜰을 지나 천천히 후원(後院)으로 걸어갔다. 곳곳에 부서진 기왓장과 돌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정원은 어둠과 폐허에 잠겨 스산하기만 했다. 예전의 영화(榮華)는 찾아볼 길이 없고, 음산 함과 황량함이 장원을 뒤덮고 있었다. 후원 쪽에는 도화림(桃花林)이 있고, 그 너머로 몇 개의 누각이 지붕만 내보이고 있었다. 석 중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도화림을 향해 다가갔다. 도화는 이미 꽃이 지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흥!" 어디선가 일성의 냉소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어둠침침한 밤에, 음산하기만 한 넓은 뜰에서...... 설사 귀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갑 자기 이런 냉소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예 그런 냉소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냉소는 도화림 속에서 들려 온 것 같았다. 석중옥은 태연하게 도화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흐흐흐......" 냉소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때로는 동쪽에서, 때로는 서쪽에서, 때로는 나뭇가지 위에서 들려 왔다. 그런데도 석중옥은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때, 스-윽! 한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축 늘어져 내려와 석중옥의 목덜미를 향해 싸늘한 입 김을 불어댔다. 석중옥은 그래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비단 놀라 기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순간, 휘-익! 오히려 검은 그림자가 참지 못하겠는지 나뭇가지 위에서 석중옥의 머리로 날아왔다. 검은 그림자는 허공에서 한 번 회전을 하더니 사뿐히 석중옥의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석중옥 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양손을 허리에 대고 노려보고 있는 인영. 비록 화를 내고 있을 터였지만 인영의 얼굴에는 여전히 두 개의 보조개가 깊이 패어 있었다. 석중옥은 자세히 볼 것도 없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노연홍이었던 것이다. 그는 설마 노연홍이 거머리처럼 자기를 찾아 이곳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경 우를 무시하고 또한 사람을 골탕먹이는 재주를 많이 지닌, 이 깜찍한 아가씨와 실랑이를 벌 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또다시 그를 귀찮게 굴었다. "당신은 정말 두렵지 않나요?" 석중옥은 그녀와 어떠한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으나 설사 자신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녀가 결코 자신을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속에서 한숨 부터 흘러나왔다. 그는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노연홍은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을 깜박거렸다. "귀신 말이에요." "낭자는 귀신이 아닌데 내가 왜 두려워하겠소?" "하지만 이곳에는 분명히 귀신이 출몰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솔직히 말하면 귀신은 그렇게 두렵지 않소." 노연홍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터뜨렸다. "오! 당신은 보기보다 배짱이 있군요." "하지만 사람은 두렵소." "사람이 두렵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석중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욱 두려울 때도 있소."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돌연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었다. "당신은 지금 나를 빗대서 말하는 거예요?" 석중옥은 그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시선은 그녀의 뒤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연홍은 막 화를 내려다 그의 눈빛이 이상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힐끔 뒤를 돌아보았 다. 그녀의 등뒤에는 어둠에 잠긴 도화림만이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연홍은 다시 석중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당신은 정말 실없는 사람이군요. 그런 수작으로 나를 속이려 하다니......" 하나 석중옥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그녀의 등뒤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여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여전히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이봐요, 대체 무얼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석중옥은 그녀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미동도 않은 채 여전히 어둠 속의 어느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막 발작하려는 순간에야 비로소 석중옥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상하군." 그녀는 화를 내려다 간신히 억눌러 참고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석중옥은 그녀의 등뒤에 펼쳐진 도화림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저 나무는 분명 조금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입구에서 보았던 것인데 어떻게 저기 있는지 모르겠군." 노연홍은 그의 말에 흥미가 일어 그가 응시하고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도화림은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유달리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한쪽에 우뚝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다른 나무와는 달리 아직도 하얀 도화가 곳곳에 피어 있어 조금만 유심히 보면 쉽게 눈에 두드러져 보였다. 노연홍은 잠시 그 나무를 보고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도 아까 이 장원에 들어올 때 후원 입구에서 이 나무를 본 것 같아요." "그러니 이상하지 않소? 이곳은 후원 입구에서 한참 걸어 들어온 곳인데 말이오." 그제서야 노연홍은 석중옥의 말뜻을 깨닫고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비슷한 나무일지도 모르잖아요?" "나도 처음에는 그런 게 아닌가 했소.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오." 석중옥은 도화림 뒤편을 가리켰다. "저쪽에 언뜻 보이는 누각의 지붕도 조금 이상하오." "뭐가 이상한데요?" "거리상으로 보아 지금쯤 우리는 도화림을 지나 저 누각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해 있어야 하 오. 그런데 후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누각이 보이는 위치와 거리가 조금도 변하 지 않았소." 노연홍은 도화림 너머로 보이는 누각의 지붕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서야 석중옥의 말이 틀리 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그녀도 후원의 입구에서 한참 동안 걸어 들어온 기억이 나는 데, 지금 보니 도화림 건너의 누각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임가장이 제아무리 크고 번창했다 하더라도 후원이 이렇게 넓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미혹에 찬 얼굴로 누각과 석중옥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휘익! 갑자기 무언가 새하얀 것이 도화림 저쪽에서 나타나더니 허공을 가로질러 반대편 숲속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앗?"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하나 그것은 어느 사이엔가 도화림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허깨비를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새하얀 물체는 아무리 보아도 사람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신법(身法)이 뛰어난 절세의 고수라 할지라도 그 넓은 도화림을 단숨에 가로질러 날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놀라는 거요?" 석중옥이 의아한 듯 묻자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정체 불명의 물체가 날아간 곳을 가리켰 다. "당신은...... 보지 못했나요?" "무얼 말이오?" "저쪽에서 어떤 물체가 날아와 이쪽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물체라니?"사람 같기도 하고...... 무슨 마대자루 같기도 하고......" 그녀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석중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이오?" 석중옥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자 노연홍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입을 삐죽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물체가 날아간 곳을 가리키며 조잘거렸다. "내가 분명히 봤단 말이에요. 저쪽에서 물체가 솟구치더니......"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동시에 몸이 굳어지고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기 시 작했다. 조금 전에 사라졌던 허연 물체가 다시 솟구쳐 오르더니 검은 하늘을 유성처럼 가로지르며 반대편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저, 저......"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석중옥이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허연 물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로 정체 불명의 물체를 보았으나 그녀는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어떤 형태를 지닌 것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본 것은 단 지 한 줄기의 허연 그림자뿐이었다. 길쭉한 그림자! 그 허연 그림자는 너무도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 버려 그녀는 그것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도저히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두려워졌다. 금시라도 도화림의 숲속에서 또다시 그 물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이대로 이곳을 떠나 버리고 싶었다. 하나 그녀는 석중옥을 돌아보며 억지로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도 이번에는 똑똑히 보았지요?" 석중옥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내가 뭘 보았다는 말이오?" 이번에는 그녀가 멍청해졌다. 그 물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무림의 고수 라면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석중옥은 그 물체의 출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몰라도 이번에 나타난 것은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석중옥도 주시하 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못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석중옥이 보고도 못 본 체하여 자신을 겁주려 한다고 생각하자 눈이 샐쭉하게 찢어 졌다. "흥!" 그녀는 차게 코웃음을 치고는 속상하다는 듯 고운 아미를 상큼히 치켜 뜨며 발로 땅을 박차 누각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데 그녀의 몸이 채 허공으로 솟구치기도 전에 석중옥이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 그녀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남의 말은 믿지도 않으면서 왜 부르는 거예요?" 뒤를 돌아본 그녀의 안색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석중옥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함을 본 것이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시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하나 이내 입술을 삐쭉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흥! 남이야 움직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한데 그녀가 무심코 도화림을 향해 두 발짝을 떼어 놓은 순간, 휘이이...... 돌연 어디선가 괴이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주위의 경관이 일변하는 것이 아닌가? 울창했던 도화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그녀의 눈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나타났 다. "앗!" 그녀는 사색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긴 도화림과 그 너머로 누각의 지붕이 빤히 바라다보이 는 임가장의 후원이었는데,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끝도 모를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 리고 있는, 칼날처럼 뾰쪽한 벼랑 위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하나 그녀의 눈앞에 펼쳐 진 광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진저리를 쳤다. 휘이잉......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뾰족한 바위가 끝없이 늘어선 절벽의 모습이 마치 검은 입을 딱 벌린 채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악마의 얼굴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이, 이게 어찌 된......" 그녀는 놀라고 당황하여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진 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금 전만 해도 그녀의 뒤에서 일 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던 석중옥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에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바닷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파도가 금시라도 그녀의 몸을 집어삼킬 듯 몰아쳐 오고 있는 광경은 놀랍다 못해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콰콰콰...... 그 순간에도 시퍼런 물살을 꿈틀거리는 거대한 파도는 그녀를 향해 그야말로 질풍 노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대경 실색한 그녀는 무심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다가 자신의 뒤에 만길 낭떠러지가 있었음을 기억해 내고 사색이 되어 급히 걸음을 멈 추었다. 하나 그때는 이미 그녀의 발은 낭떠러지의 텅 빈 허공 위를 밟은 후였다. "아악!" 그녀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데 그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의당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칼날처럼 솟아 있는 까마득한 벼랑 아래의 암석에 산산이 짓이겨 져 있어야 할 그녀의 몸이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자신의 몸이 떨어지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 순간, 장내의 모습은 또다시 일변했다. 절벽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모래바람 이 부는 광활한 사막(沙漠)이었다. 그녀는 거듭되는 격변에 놀라 아예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쿠콰콰콰...... 모래가 가득 섞인 거친 바람이 그녀를 향해 폭풍처럼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그 용권풍(龍圈風)의 높이는 수십 장에 달하는 것이어서 일단 그 안에 휩쓸리기만 하면 제 아무리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해도 모래에 묻혀 살아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불쑥 하나의 손이 튀어나와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는 것 이 아닌가! "악!" 그녀는 그야말로 기절할 듯 놀라 황급히 그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나 그 손은 무서운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그녀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 손에 담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맥없이 주르르 끌려갔다. "이, 이거 놔!" 그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쳤다. 그때 그녀의 귀에 낯익은 음성 하나가 들려 왔다. "이제 됐소." 그 음성에 퍼뜩 놀라 앞을 바라본 노연홍은 다시 한 번 해연히 놀랐다.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몰아닥치던 용권풍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또한 천길 낭 떠러지도, 거대한 파도와 광활한 사막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녀의 눈에는 처음에 보았던 어둠 속의 도화림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망연자실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자신의 손목을 움켜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의 임자는 다름 아닌 석중옥이었다. 석중옥은 그녀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그제서야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손을 놓아 주었다. "이해하시오. 낭자를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소." 노연홍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그녀는 다시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제가 본 건 환각(幻覺)이었나요?" 석중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는 이미 짐작한 것이 있었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무슨 기문진식(奇門陣式) 같은 게 펼쳐져 있었군요." "낭자의 말이 옳소." 석중옥은 방금 전에 그녀가 몸을 날렸던 도화림을 가리켰다. "이 소로의 양 옆에 있는 도화림에 진식이 펼쳐져 있었소. 그래서 길을 벗어나게 되면 자연 히 진식에 빠져 환각을 보게 되었던 거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법(陣法)이라면 나도 조금 알고 있는데...... 이렇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놀랍게 변하는 진 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요. 정말 이곳에 진식이 펼쳐져 있나요?"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오." "하나가 아니라니요?" "후원에서 이곳까지 우리가 줄곧 걸어왔던 길도 하나의 진식이오. 이곳은 연환로(連環路)이 기 때문에 우리는 줄곧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거요."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 길 자체도 진식이라고요?" "그렇소. 그것도 연환로의 일종(一種) 중에서도 가장 절묘하다고 알려진 무궁연환로(無窮連 環路)요.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를 맴돌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지쳐 쓰러지고 마는 놀라운 절진(絶陣)이오. 게다가......" 그의 시선이 힐끔 도화림을 향했다. "저 도화림에 펼쳐진 것은 한걸음 걸을 때마다 사경(死境)에 처하게 만든다는 보보중첩경인 관(步步重疊驚人關)이 분명하오. 당신이 도화림 속을 헤맬 때 보니 한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몹시 놀라던데, 내 말이 맞지 않소?" 그녀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 무서웠어요." "게다가 도화림 너머의 누각들도 심상치 않아 보이오. 내 짐작이 맞다면 이 임가장의 후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식일 것이오." 그녀는 후원 전체가 진식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조금 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일 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무궁연환로나 보보중첩경인관은 모두 사람을 놀라게는 할지언 정 해치거나 죽이지는 않는 진식들이오. 그러니 이 진식을 펼친 자는 단지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을 기절시켜 쫓아 보낼 생각인 듯싶소." "그래서 이곳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 거로군요."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조금 전에 나는 저쪽에서 반대편 쪽으로 날아가는 흰 물체를 보았는데 그것도 진식의 변화 에 의한 것이었군요." "아마 그럴 거요. 그때 낭자가 서 있던 곳이 무궁연환로와 보보중첩경인관이 펼쳐지는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에 양 진(陣)의 영향을 모두 받아 눈의 초점이 흔들렸던 거요."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성했거나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새삼스런 눈으로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당신은 제법 아는 게 많군요." 이어 그녀는 그의 팔에 달라붙기라도 하려는 듯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말해 봐요. 당신은 이 진식을 뚫고 나갈 수 있나요?" "보보중첩경인관은 몰라도, 무궁연환로는 주위의 경관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눈의 착시(錯視) 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뚫고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소." 그녀는 반색을 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어서 가요. 저 누각에 가서 누가 이런 못된 장난을 했는지 알아보기로 해요." 그녀는 석중옥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석중옥은 그녀가 설마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녀 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자, 이렇게 해보시오." 그녀는 그가 앞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몸을 돌리자 어리둥절했다. "왜 그래요?" "무궁연환로를 벗어나려면 앞이 아닌 뒤로 걸어가야 하오. 그래야 착시를 없애고 바른 길로 갈 수 있소." 그는 뒤를 향해 선 채 뒷걸음질을 쳐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자신도 곧 그의 뒤를 따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발 아래만 내려다보면서 열심히 뒷걸음질쳤다. 과연, 얼마쯤 걸어가니 길이 점점 좁아지면서 우측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앞을 보고 걸어갔다면 우측으로 난 작은 길을 보지 못한 채 계속 좌측으로만 걸어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결코 무궁연환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똑바로 걸어도 되오." 우측 길로 접어들자 석중옥은 뒷걸음질치던 몸을 바로 세워 앞을 향했다. 그녀도 급히 그를 따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들의 몸은 어느새 도화림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제 10 장 절세소부(絶世少婦) 도화림을 벗어나자 몇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나타났다. 도화림 너머로 지붕만 살짝 보 였던 거각들이 분명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탓인지, 누각에는 하나같이 먼지가 뽀 얗게 쌓여 있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다가갔다. 한데 그 순간, "흐흐흐흐......" 어디선가 음침하기 그지없는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심야에 황량한 흉가(凶家)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 소리...... 제아무리 철석간장을 가진 인물이라도 소름이 오싹 끼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나 석중옥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의 뒤를 따라오던 노연홍이 겁에 질려 그의 뒤로 바짝 다가왔다. "이, 이봐요...... 이, 이게 무슨 소리지요?"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 있는 누각으로 다가갔다. 노연홍은 화가 나서 입이 샐쭉해졌으나,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서 혼자 있기는 정말 싫었는 지라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바로 그 순간, 삐- 걱! 그들이 다가가던 누각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노연홍은 그만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문이 열리며 그 앞에 귀영(鬼影)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흐흐흐......" 길게 늘어선 귀신의 그림자는 허공에 매달린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노연홍은 너무나 겁이 나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저게 귀신이에요, 사람이에요?" 석중옥은 그녀를 힐끔 돌아다보았다. "보면 모르겠소? 그는 물론 사람이오." 석중옥의 너무도 태연한 말에 노연홍은 다시 한 번 놀라며 나타난 귀영을 유심히 바라보았 다. 과연, 그 귀영은 전신에 회포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산발하긴 했으나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코, 그리고 입이 분명하게 보이고 있지 않는 가? 하나, 괴인의 얼굴을 자세히 본 노연홍은 두려움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몸을 떨 었다. 괴인의 낯빛은 무덤에서 갓 튀어나온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유달리 붉어서 마치 피 칠 을 한 것 같았다. 게다가 두 눈이 푸르스름한 안광에 휩싸여 귀신의 몰골보다 더욱 으스스 하게 보였던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괴인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으스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석중옥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사람이오." 괴인의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뿜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안광이 더욱 짙어졌다. "누가 그런 것을 물어 보았느냐? 너희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느냐?" "물론 걸어서 왔소." 괴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잠시 석중옥을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여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밤에 좀 쉬어 가려고 들렀소." 석중옥이 계속 태연하게 대답하자 괴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무엄한 놈이로군.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이곳은 주인이 없는 흉가가 아니오? 그러니 우리가 하루쯤 묵어 간다고 한들 안 될 것 있 겠소?" 바로 그때 석중옥의 뒤에서 싸늘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호호......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머물려 하다니......" 노연홍은 깜짝 놀라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의 뒤에는 하얀 소복(素服)을 입은 여자 하나가 우뚝 선 채 그들을 쏘 아보고 있지 않는가! 소복여인의 얼굴은 상당히 예쁜 편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피부가 백설보다 고와서 절 세의 미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왼쪽 이마에서 아래턱에 이르기까지 끔찍한 흉터 두 개가 길게 그어져 있었 다. 그 두 줄기의 흉터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 하얀 소복을 입고 서 있는 흉터 자국의 여인의 모습은, 정녕 괴기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노연홍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구역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졌다. 이곳까지 오면서 겪은 괴이한 일도 그랬지만, 막상 누각에 오자 나타난 이들 두 남녀(男女) 는 그녀로 하여금 두렵고 공포스러운 마음이 들게 하고 있었다. 노연홍이 바들바들 떨고 있자 소복여인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우리를 보고 너무 겁먹을 필요 없다. 잠시 후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녀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노연홍은 고개를 저었다. "모...... 몰라요. 왜 그렇죠?" 소복여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지." 그 말을 듣자 노연홍은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녀의 음성과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묘하게 겹쳐서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 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대로 몸을 돌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문득 석중옥이 노연홍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들이 두렵소?" 노연홍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우리 어서 이곳을 떠나요."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단 한 마디만 하면 이들은 우리를 절대로 해치지 않을 거요." 이 말을 들은 노연홍은 물론이고 소복여인과 괴인도 궁금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는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네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너희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장담을 한 단 말이냐?" 회포괴인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석중옥은 그를 주시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황비룡의 부탁을 받고 왔소." 이 한마디는 과연 놀라운 효과를 보였다. 회포괴인과 소복여인은 대경 실색하여 안색이 대변했다. 회포괴인이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 너는 지금 뭐라고 했느냐?" "황비룡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 했소."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빛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소복여인이 시치미를 떼고 되물었다.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찾아왔군. 알겠소, 나는 이만 가보겠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회포괴인과 소복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분을 안으로 모셔 오세요." 돌연 누각 안에서 영롱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놀랍게도 옥구슬이 구르는 듯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노연홍은 설마 누각 안에 사람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깜짝 놀랐다. 하지만 석중 옥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소복여인은 석중옥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소복여인과 회포괴인은 앞장서서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석중옥은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노연홍이 그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그들을 따라갈 생각이에요?" "그렇소." 노연홍은 다급하고도 겁이 나서 울상이 되었다. "당신은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 나는 아니에요." 석중옥은 태연히 되물었다. "그들이 귀신도 아닌데 당신은 왜 그들을 무서워한단 말이오?" 노연홍은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 전에 그 여자의 말도 못 들었어요? 그들은 틀림없이 우리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그녀의 말은 단지 당신을 놀린 것에 불과하오. 그들은 무림에 출도한 이래 아직 무고한 사 람을 단 한 명도 죽여 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오." 노연홍은 그만 멍해졌다. "아니, 그럼 당신은 저들이 누구인지 안단 말이에요?" "그렇소. 비록 그들은 귀신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들이지만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소." 노연홍은 반신반의하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아는 것도 많군요. 그들이 대체 누구지요?" "내가 만약 그들의 이름을 밝히면 당신은 금방 알게 될 거요." 노연홍은 궁금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나서 재촉했다. "어서 말해 주세요." "당신은 혹시 무림에 금슬(琴瑟)이 남달리 좋은 한 쌍의 부부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노연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림에 금슬 좋은 부부가 어디 한두 쌍인가요?" "하지만 그들처럼 사이가 좋은 부부는 결코 흔치 않소. 당신은 저 여인의 얼굴에 나 있는 흉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고 있소?" "몰라요." "그건 그녀가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것이오." 노연홍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에요? 그녀는 무척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던데 왜 그런 짓을......?" "그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별로 잘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나중에 혹시라도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걱정하는 것을 알고, 그녀가 남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스 스로 자신의 용모를 훼손했던 것이오." 노연홍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답게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말 대단한 여자로군요. 여자라면 누구나가 자신의 용모를 목숨처럼 아끼고 있을 텐데...... 그 무뚝뚝하고 시체처럼 생긴 괴인이 그녀가 그처럼 사랑한다는 그 남자인가요?" "그렇소." "그건 아무리 봐도 그 여자가 너무 손해를 보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소. 그 남자는 그녀를 위해 더욱 커다란 걸 희생했소." "그게 뭔데요?" "원래 남자의 집안은 강호무림에서 유명한 명문세가(名門世家)였소. 게다가 남자는 그 세가 의 장손으로 그 가문을 이을 위치에 있었소. 한데 남자의 집안에서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하 자 그는 스스로 가문을 뛰쳐 나와 그 뒤로 결코 돌아가지 않았소." 노연홍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가문에서 영원히 제적(除籍)당하고 가주의 지위는 물론 가문에서 배운 무 공마저 모두 빼앗겨 버렸소. 하나, 그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소."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그는 무공을 펼칠 줄 모르는 폐인(廢人)이 되었단 말인가요?" "그는 무공이 폐쇄된 후 처음부터 다시 무공을 익혔소. 물론 가문의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 을 말이오. 그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결국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잃었던 내공 (內功)을 되찾고 강호의 절정고수가 될 수 있었소." 그녀는 그 이야기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 남자의 희생은 그녀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릇 강호인(江湖人)에게 무공이란 곧 생명과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명문세가의 가주라는 지위마저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직 사랑을 위해 무공을 페쇄당하는 고통마저 감수했으니, 그 것은 어찌 보면 여인이 용모를 훼손한 것보다 더욱 커다란 희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들뜬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제 나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어요. 그들은 일월쌍려(日月雙侶)지요?"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들이오." 그제서야 노연홍은 회포괴인과 소복여인이 비록 용모는 흉악하기 그지없으나 강호무림에서 무공이 높고 금슬이 좋기로 누구나가 첫손꼽는 절세고수들임을 알게 되었다. 일월쌍려(日月雙侶)!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듯이, 강호무림에도 해와 달 같은 한 쌍의 부부가 있었다. 일군(日君) 우문당(宇文當)! 월랑(月娘) 도옥교(都玉嬌)! 우문당은 날 때부터 기재(奇才)로, 강북(江北) 우문세가(宇文世家)에서 가장 촉망받던 인물 이었다. 비록 지금은 우문세가에서 파문당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으나, 그의 무공만큼은 우문세가의 당대 가주보다도 오히려 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도옥교 또한 십여 년 전에는 강호의 뭇청년고수들을 사로잡았던 절세미녀였다. 그녀의 환심 을 사기 위해 수많은 고수들이 줄지어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흉악한 용모의 우문당을 선택 해 많은 사람들을 한숨짓게 만들었다. 그들의 일화는 오래 전부터 강호무림에 널리 퍼져 하나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 다. 예전에 노연홍은 그들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듣고 남몰래 흐느껴 운 적도 있었다. 이제 실제로 그 소문의 주인공들을 직접 보게 되니 그녀의 가슴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감회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걸어가는 우문당과 도옥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 렸다. "다른 건 몰라도 우문당은 정말 소문처럼 무섭게 생겼구나." 앞서가던 도옥교가 그녀의 음성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록 이 사람의 용모는 흉악하지만 마음만큼은 다른 어떤 남자들보다 준수해요.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남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요." 노연홍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안해요." 도옥교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 전과 비슷한 미소였으나 이상하게도 그때만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당신은 느낀 것을 사실대로 말했으니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단지 나는 당신도 앞으로 남자를 고를 때 얼굴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에 요." 그 말에 노연홍은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홍시처럼 변해 버렸다. 그녀가 이미 자신이 남장여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하면서 자신과 석중옥을 은근히 응시하는 그녀의 눈길에서, 꼭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궤뚫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때 그들은 누각 안에 있는 넓은 대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노연홍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청 안을 둘러보았다. 대청 안에는 의외로 먼지가 하나도 없어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태사의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복면을 한 궁장여인(宮裝女人)이 그린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비록 복면을 하여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팔등신의 몸매에 은은히 흐르는 미태(美態)는 실로 가슴 떨리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우문당과 도옥교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녀의 뒤에 시립했다. 석 중옥과 노연홍은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복면궁장여인의 시선이 석중옥을 향했다. 이어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황비룡의 부탁을 받고 오셨다고요?" 조금 전에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서 듣게 되니 그녀의 음성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영롱하고 고와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는 진한 매력을 담 고 있었다. 노연홍은 비록 많은 여자를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여태껏 눈앞의 이 복면궁장여인처럼 매 력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 그윽하면서도 울림이 영롱해서 같은 여자인 그녀가 들어도 묘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석중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복면궁장여인의 눈이 복면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였다. "황비룡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는 죽었소." 그의 짧은 말에 복면궁장녀와 우문당, 도옥교의 안색이 대변했다. 복면궁장녀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황비룡이 죽기 전에 그에게서 부탁을 받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이오." 순간 복면궁장녀는 고개를 번쩍 쳐들며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무슨 부탁을 했나요?" 석중옥은 품속에서 한 개의 은낭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임가장에 전해 달라는 것이었소."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은낭을 복면궁장녀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은......?" 은낭을 받아 든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석중옥은 태연히 몸을 돌렸다. 순간 은낭을 열어 본 궁장여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급히 석중옥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무슨 일이시오?" 복면궁장녀는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공자께선 혹시 이 은낭 속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럼 이 물건이 당금 무림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소." 복면궁장녀의 두 눈은 별빛을 연상케 할 만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보물(寶物)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한데 공자께서 이것의 가치를 알고도 저에게 전 해 주시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에요." 문득 석중옥은 정색을 하고, 나직하나 힘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비록 정인군자(正人君子)는 아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의 부탁마저 저버릴 정도의 소인 배는 더욱 아니오. 나는 단지 부탁을 받았기에 그것을 이행한 것뿐이오." 복면궁장녀는 서늘한 봉목(鳳目)으로 석중옥을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소첩이 좁은 소견으로 공자의 도량을 곡해했군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석중옥을 바라보며 복면을 벗었다. 복면이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대략 이십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미부(美婦)의 얼굴이었다. 결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절세미인(絶世美人)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나, 평범해 보이는 이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노라면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매력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성결하리만큼 맑고 깨끗하게 빛나는 눈은 그 누구라도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듯 깊었 고, 오똑 솟은 콧날에서는 천상(天上)의 것으로 느껴지는 고귀한 인품이 느껴졌다. 게다가 물기 젖은 촉촉한 입술을 보노라면 남자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품고 싶은 욕망을 느낄 것 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보면 욕념(慾念)보다는 함부로 속되이 행동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느껴지 는 것은, 전신에서 풍기는 그녀 특유의 기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중옥과 노연홍은 복면궁장녀가 설마 이토록 아름다운 미부일 줄은 몰랐던지라 흠칫했다. 궁장미부는 석중옥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이것은 제게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을 공자께서 전해 주셨으니...... 임소군 (林昭君)은 공자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석중옥은 내심 당황하여 그녀를 제지했다. 하나, 궁장미부 임소군은 끝끝내 절을 하고야 말았다. 석중옥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이러지 마시오, 부인! 소생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임소군은 정중히 절을 한 후 몸을 일으키며 생긋 웃었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웃자 한없이 고고하고 위엄있게만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온통 화사하고 요염한 아름 다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단 한 번의 웃음으로 사람의 얼굴이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 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웃음 하나로 음산하기 이를 데 없던 대청이 온통 환한 빛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 이 들 정도였다. 성스럽고도 농염한 분위기의 미부, 임소군! 그녀에게는 이십대 후반에 접어든 여인의 풍만 함과 성숙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녀는 석중옥을 향해 아름답게 웃으며 공손히 말했다. "당금 무림의 어느 누가 빙백마혼주의 엄청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어요?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공자가 진실한 군자이시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간 노연홍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비, 빙백마혼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찬 음성을 발하며 석중옥의 팔을 급히 잡았다. "종횡무영도 한백의 장보도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그 삼대기보 중의 빙백마혼주란 말인가 요?" "그렇소." 노연홍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보물을 그녀에게 그냥 주었단 말이에요?" 석중옥이 그녀의 말을 약간 수정했다. "그냥 준 게 아니고 전해 준 거요." 노연홍은 그를 고운 눈으로 흘겨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남들은 그것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판국인데 생면부지의 남에게 주다니......" 그녀는 비록 남장(男裝)을 했지만 목소리에는 여인 특유의 고성이 섞여 있었다. 그제야 임소군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우연히 만난 사람입니다." 석중옥의 이 무정한 말에 노연홍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졌다. "우연히 만났다니...... 겨우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오?" 석중옥이 태연히 되묻자 노연홍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사실 그녀가 억지를 부려 여기까지 따라왔을 뿐, 그녀와 석중옥은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녀는 달리 할 말이 없자 그녀 특유의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요! 내 손목을 마음대로 만졌으면서도 마치 남처럼 대 하다니......"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석중옥을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어디 두고 봐요. 내게 이런 모욕을 주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흥!" 그녀는 차게 외치며 번개같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날아갔다. 휘-잉! 그녀의 신형은 너무도 빨랐는지라 임소군을 비롯한 우문당과 도옥교는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억지를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지라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문득, 임소군은 기광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석중옥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서늘한 봉목에 별빛같이 반짝이는 눈망울이 석중옥의 흑발로 뒤덮인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너무도 대담한 시선에 내심 가는 한숨이 나왔다. 그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여인의 이런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임소군은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공자의 존명대성은......?" "나는 석중옥이란 사람입니다." "아! 이제 보니 석 공자이셨군요." 임소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사실은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께선 저희 임가장이 왜 이런 흉가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석중옥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소문의 진위(眞僞)가 몹시도 궁금했던 참이외다. 부인께선 그 일의 진상을 말씀해 주실 수 없겠소?" 갑자기 임소군의 얼굴에 한 줄기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우문당과 도옥교의 얼굴에도 하나같이 비분 강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일은 워낙 중대하고 엄청난 일이지만 석 공자께선 이미 외인(外人)이 아니시니 말씀드 리지요." 이어 임소군의 입에서 엄청난 사연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임가장의 장주는 강호에서 철담협골(鐵膽俠骨)로 유명한 철필귀견수(鐵筆鬼見愁) 임광 요(林廣瑤)였다. 철필귀견수 임광요는 한 자루 철필로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수십 년간 종횡하던 일대의 협 한(俠漢)이었다. 더구나 그의 철혈이십사필(鐵血二十四筆)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절기 중의 절기였다. 임가장은 철필귀견수 임광요가 말년에 은거한 곳으로, 일찍 남편을 여읜 그의 친딸, 임소군 이 함께 기거했다. 오 년 전, 임소군은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협객 도룡검객(屠龍劍客) 유수광(柳首光)과 혼인을 했다. 하나 그가 의문의 급사(急死)를 당해 졸지에 청상 과부가 되어 임가장으로 돌 아와 있었던 것이다. 임광요는 명망이 높고 신의가 대단해, 임가장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나날을 보내 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님이 밖에 나가셔서 근 보름이나 연락이 없으셨어요. 저와 장 (莊) 안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걱정스러워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아버님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답니다." 임소군은 차분한 어조로 그 당시의 일을 설명했다. "그런데......" 임광요가 실종된 지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임광요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의 전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나...... 남궁검문(南宮劍門)...... 마...... 막아야...... 이 한마디 말만 남기고 그는 의식 불명의 상태로 빠져 들고 말았다. 임소군을 비롯한 임가장의 인물들은 대경 실색하여 그를 치료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하나 그의 상처가 너무도 심한지라 도무지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일은 그날 밤에 일어났어요." 임소군은 그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붉게 상기시켰다. "아버님이 돌아오신 그날 밤에 한 떼의 복면인들이 임가장을 습격해 왔어요." 흑의복면인들의 무공은 가공할 정도로 고강했고, 손속이 잔인무도하기 그지없어 임가장의 식솔(食率)들은 어린아이 하나 남지 않고 몰살해 버리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임소군은 죽을힘을 다해 의식 불명의 임광요를 데리고 지하에 있는 밀실로 대피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득 석중옥은 무심한 시선에 기광을 번뜩이며 임소군을 향해 물었다. "부인께선 혹시 그날 밤 임가장을 습격했던 인물들의 정체를 알고 계시오?" 임소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들은 모두 복면을 한 데다 사용했던 무기까지도 가지각색인지라 도저히 어 느 부류의 인물들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무공이 가지각색이라 함은......" "그들 중에는 마도인(魔道人)뿐만 아니라 정파(正派)측 인물들도 혼합되어 있었던 것 같아 요." 석중옥의 눈에서 섬전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틀림없이 정파측 인물들도 있었습니까?" "물론이에요. 저는 비록 절세의 무공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들이 펼치는 무공내력 을 알아볼 정도의 눈은 있어요. 그 당시 혈겁(血劫)에 참가했던 인물들은 마치 각지에서 선 발한 인물들처럼 각양각색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해요." 석중옥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임소군은 생각에 잠겨 있는 석중옥을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당시 그들의 정체에 의심을 품고 평소에 아버님과 친했던 인사들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던 거예요." "부인께선 그럼 그들 중 잘 아는 사람도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중 몇몇 사람은 음성이나 행동이 몹시도 눈에 익었어요." 석중옥은 이번 일이 너무도 공교롭다고 생각했다. 임가장이 혈겁을 당한 상황이 자신의 사 형인 단천거사 위지송의 천심장이 혈겁을 당했을 때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이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으면......? 임소군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공자께선 그들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석중옥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임소군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밀실로 피신한 후 사오 일 가량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임가장은 초토 화되어 멸문(滅門)한 후였어요." 그녀의 음성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어요. 아버님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시지를 못했 고...... 임가장이 혈겁을 당한 것이 아버님과 무슨 관계가 있으리란 막연한 추측 외에는 전혀 아무런 단서도 없었으니......" 그녀는 그 당시의 암담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일전에 아버님께 도움을 받았던 신행무영 황비룡과 우문당, 도옥교 부 부를 찾아갔지요. 이들은 아버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쾌히 저를 도와 주겠다고 응낙했 답니다. 그때 마침 한백의 장보도에 관한 소문이 무림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존께선 지금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까?" 임소군의 아름다운 얼굴에 다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래요. 아버님께선 그날 이후 계속 혼수 상태를 유지하고 계세요. 백방으로 약을 써보았지 만 워낙 상태가 중하셔서인지 도무지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그때 한백의 장보도에 관한 소 문을 들었어요." 바로 그때였다. "한백의 장보도와 부인의 부친을 치료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난데없이 대청 밖에서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임소군을 비롯한 우문당과 도옥교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청 밖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대청 밖에서 들어오던 인영이 그것을 보고 예쁘게 입을 삐죽거렸다. "흥! 당신이 나를 귀찮아해도 상관없어요. 이곳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하며 중인들 앞으로 다가온 인영, 그녀는 웃지 않아도 보조개가 패는 노연 홍이었다. "당신은 가지 않았군요." 임소군이 뜻밖이라는 듯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노연홍은 그녀를 향해 귀여운 웃음을 보냈다. "호호...... 이런 중대한 비사(秘史)가 있는데 내가 어찌 그냥 가겠어요? 비록 저자에게 약간 의 무시는 당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도량이 넓은 내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아무리 밖으로 나가려 해도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 무궁연환로 인가 하는 길에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설마 그렇다고 이렇게 힘들게 돌아온 나를 무정하게 쫓아 내지는 않겠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애교있게 눈을 찡긋했다. 임소군은 그녀의 천진한 태도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감이 들었다. "호호호......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동생을 그냥 보내 염려가 되었어요. 그곳을 나가는 법 은 내가 조금 후에 알려 줄게요." 노연홍은 그녀가 자신을 동생이라고 칭하자 아리따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워올렸다. "호호...... 언니는 참으로 자상하군요. 소매는 노연홍이라고 해요." "아, 홍매로군! 반가워요. 나는 임소군이에요." 임소군이 빙긋 웃으며 다정히 말했다. "이제 보니 임 언니였군요." 두 여인은 금시 의기 투합하여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석중옥은 이들이 오랫동안 사귄 자매인 양 언니 동생 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실소를 터뜨렸 다. 확실히 여인이란 남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다. 노연홍은 일부러 석중옥을 본체만체하고 임소군을 향해 다정히 물었다. "한데 한백의 장보도가 백부님을 치료하는 데 무슨 도움이라도 되나요?"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임광요를 백부라고 불렀다. 임소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버님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靈藥)은 오직 한백의 장보고에만 있지. 그래서 황비룡 은 장보도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것이고......" "그게 뭐기에 유독 한백의 장보고에만 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구천옥지액(九泉玉芝液)이야." "구...... 천옥지액?" 노연홍의 눈이 토끼눈처럼 커졌다. 구천옥지액! 그것은 도가(道家)의 무가지보(無價至寶)라고 일컬어지는 공청석유(空淸石乳)를 능가하는 절 세의 영약이었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일반인에게 국한된 것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구천옥지액 한 방울에는 실로 십 년의 공력이 깃들여 있었으며, 천하의 모든 독을 해독(解 毒)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몇 방울 이상 복용하면 반로환동(返老還童), 탈태환골(脫胎 換骨)하여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설에만 전할 뿐, 그것을 본 사람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정녕 구천옥지액이 한백의 장보고에 있나요?" 노연홍이 신음했다. "그래, 그것은 원래 형산파(衡山派)의 지보(至寶)였는데 석년에 한백이 훔쳐 자신의 장보고 에 보관하고 있었어." 노연홍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소군을 바라보았다. "임 언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죠?" "나는 그 동안 틈틈이 의학(醫學)과 강호 정세에 대해서 연구해 왔어. 한백이 구천옥지액을 훔쳤다는 것도 그 때문에 알게 되었지." 그녀는 비록 겸손하게 말했지만, 노연홍은 그녀의 재지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설치한 절진도 혹시 언니의 솜씨가 아닌가요?" 임소군은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자꾸 외지인들이 들락거리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발각될까 봐 임시로 조금 손을 본 거야." 석중옥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궁연환로와 보보중첩경인관은 백년래 무림에서 나타나지 않던 절진 중의 절진인데 대단 치 않다니요. 그런 절진을 이렇게 별로 크지 않은 장원의 후원에 설치하신 부인의 실력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때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우문당이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인께선 이미 사교구류(四敎九流),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포함한 천하의 모든 학문에 달통 해 계시오." 그 뒤를 이어 도옥교가 요염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디 그뿐이에요? 의술(醫術)과 독술(毒術)에서도 가히 천하제일의 경지를 이루었고 기문진 식(奇門陣式)과 기관매복(機關埋伏), 용병술에까지 정통하신,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기녀(奇 女)라 할 만합니다." 임소군은 그들이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라 내심 당황했다. 그녀의 얼 굴에 절로 엷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때 무의식적인지 그녀의 시선이 슬쩍 석중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석중옥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노연홍이 감탄했다는 듯이 탄성을 발하며 활짝 웃었다. "아! 역시 언니는 대단한 사람이군요." 임소군은 그녀를 곱게 흘겨보았다. "정말...... 동생까지도 나를 놀릴 거야?"호호...... 제가 보기에도 언니의 기파는 놀라운데요, 뭘......" 노연홍은 문득 표정을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그래서 언니는 빙백마혼주를 가지고 남궁검문에 가서 구천옥지액을 요구할 생각이군요?" 순간 임소군의 얼굴에도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임가장이 혈겁을 당한 직후에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백 의 장보도 사건이 터졌고...... 아버님께서 의식 불명이 되시기 전 남궁검문을 막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것에 크게 의문을 느끼고 있어. 남궁검문에 직접 가서 이번 일을 조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 그래서 더욱이 장보고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삼보가 필요했던 거 야." 임소군의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노연홍은 약삭빠르게 그 말의 진의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심 놀라며 급히 물었다. "그럼 언니는 혈겁의 배후로 남궁검문을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하고 아차 했다. 남궁검문은 비단 삼문 중에 으뜸일 뿐 아니라, 수백 년간 백도(白道)의 기둥 역할을 해온 찬 란한 역사를 지닌 명문거파였다. 더구나 당금의 가주(家主)인 신검 남궁뢰는 성품이 강직하 고 명성이 자자한 일대(一代)의 대협(大俠)이 아닌가! 임소군은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 듯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남궁검문이 의심스럽다는 말이 아니야. 단지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이상 이번 일이 남궁검문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 것뿐이야." "......!" "남궁검문이 원흉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이번 일에 어떤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 다고 생각해." 노연홍은 그녀의 명석한 판단에 내심 감탄했다. 가문의 원수를 찾는 와중에도 이성(理性)을 잃지 않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임소군의 명석 한 두뇌에 새삼 더욱 감탄해 마지않았다. 석중옥은 조용히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인께선 이곳에서 귀신행각을 벌인 것입니까?" "그래요. 아버님께선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시고...... 우리는 또 황비룡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는 임가장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임가장을 멸문시킨 흉수(兇手)들이 다시 올까 두렵지 않았소?" "그 점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하나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그들도 우리가 설마 임가 장에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예요."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대범함과 치밀함을 함께 갖춘 기녀라 할 만했다. "부인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자님 덕분에 빙백마혼주를 찾았으니 남궁검문으로 갈 예정이에요. 거기서 그들의 동정 을 조사해 임가장의 혈겁에 대한 의문을 풀고 구천옥지액을 얻어 부친을 치료할 생각입니 다." 노연홍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쉽지 않을 텐데요." 임소군은 각오가 서린 얼굴로 말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난 죽음도 각오하고 있어. 하지만 진인사(盡人事) 대천명(待天命)이라 는 말이 있듯이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야." 노연홍의 얼굴에는 감탄의 빛이 가득했다. "과연...... 언니의 기파는 부러울 정도예요. 좋아요. 소매가 비록 큰 힘은 못 되지만 전력을 다해 언니를 도와 드리겠어요." 이 말에 임소군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마워, 홍매! 나는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그녀의 서늘한 두 눈에는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빛이 가득했다. 우문당과 도옥교도 진정 어린 눈길로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일시 장내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조금도 변치 않는 태도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석중옥이었다. 묵묵히 흑발 사이로 무심한 눈을 번쩍이는 그의 심중을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제 11 장 일대신투(一代神偸) 소주(蘇州)! 강소성(江蘇省) 남단에 위치한 도시로, 주위에 태호(太湖), 전산호(殿山湖), 양등호(羊燈湖)를 끼고 있는 수중(水中) 도시(都市)였다. 사통팔달의 수로(水路)와 운하(運河)가 발달하여 문물이 풍성할 뿐 아니라, 그 경관이 천하 제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上在天堂], 땅에는 소항이 있다[下在蘇抗]! 라는 말이 전해 올 정도로 소주는 중원의 명소로 유명한 풍류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소주 땅은 온 천하 풍운의 중심지가 되어 온통 들끓고 있었으니...... 소주성 안팎의 크고 작은 객잔(客棧)과 다관(茶館), 주루(酒樓)는 무림인들로 붐벼 발 들여 놓을 틈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소주 인근의 사찰까지도 몰려드는 무림인들로 꽉차 빈 방이 없었다. 그야말로 소주는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왜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이곳에 남궁검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백의 장보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무림인들이 너도 나도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웅(群雄)들은 하나같이 혹시 운이 좋으면 한백의 기보들 중 한두 가지라 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문 밖 돌다리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남루(江南樓)라는 주 루가 있다. 이곳은 소주에서도 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하기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이 며칠간 강남루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한시도 좌석이 텅 빈 때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강 남루는 삼층(三層)이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으나, 그 삼층까지도 발들여 놓을 틈조차 없었다. 강남루 삼층누각의 한쪽 구석. 흑의서생 하나가 홀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남루한 의복에 머리는 산발하여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태는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허무한 듯 무심한 눈빛, 훤칠한 키에 백옥같이 하얀 피부. 특히 오른쪽 허리춤에 비껴 찬 녹슨 철검이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는 바로 임가장을 벗어나 단신으로 남궁검문이 있는 소주까지 온 석중옥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나올 때 노연홍의 화난 모습과 임소군의 서운해 하는 얼굴을 생각하면서 내 심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그녀들과 함께 행동하자면 자연히 제약이 많은지라 부득불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채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던 그는 문득 자신의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 를 들었다. 그 앞에는 강남루의 점원이 서 있었다. 강남루는 일개 점원조차도 다른 주루와 같은 비굴함 이 없이 예의바르고 품위가 있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합석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리가 다 차서 여기밖에는......" 점원이 고개를 숙이며 뒤를 가리켰다. 석중옥은 그가 가리키던 곳을 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 다. "고맙네, 젊은이."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리며 한 명의 노인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호리호리한 작은 체구에 갈색 장삼을 입은, 칠팔십 가량 된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하관이 유난히 길고 입술이 두꺼워서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했다. 한데 노인의 손은 의외로 여인의 것처럼 작고 새하얗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손가락이 길고 도 보드라워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누구도 이런 늙수그레하고 볼품없는 노인의 손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믿지 않을 터였다. 막 여아홍(女兒紅) 한잔을 비우고 있던 석중옥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의노인은 석중옥의 첫인상에 호감을 느낀 듯했다. "자네도 이번에 한백의 장보도 때문에 남궁검문으로 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갈의노인은 태연하게 입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음...... 그 일은 무림인이라면 확실히 누구나가 탐을 낼 만하지. 하나,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네. 자네도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 말인즉 '너 따위가 어찌 보물을 얻을 수 있겠느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닌가? 누구라도 초면인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화를 벌컥 낼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갈의노인은 더 이상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강남루는 병장기를 든 무림인들로 인해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갈의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흐뭇한지 연신 사방을 둘러보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흐흐...... 보물 덩어리들이 마구 굴러다니는구나. 남궁 늙은이 덕분에 오랜만에 노부가 횡재 를 하게 생겼군. 흐흐......" 문득 사방을 둘러보던 갈의노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이제 막 누각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한 인물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뚱뚱한 체구에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금의(錦衣)를 걸쳤고, 게슴츠레한 눈에는 거만한 기 색이 가득했다. 금의중년인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눈을 씻고 봐도 빈자리는커녕 합석 을 할 만한 곳도 없는 것이다. 금의중년인은 거만한 시선으로 여기저기를 훑어보다가 눈을 번쩍 빛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품위없게 생긴 갈의노인 하나가 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갈의노인의 앞 에는 흑의서생이 앉아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주춤거리다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늙은이, 나를 불렀나?" 지독하게 거만한 말투였다. 한데 막상 그를 향해 손짓을 했던 갈의노인은 본 체도 않고 열심히 음식만 먹고 있지 않는 가? 금의중년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늙은이, 무슨 일로 나를 불렀나?" 갈의노인은 여전히 묵묵부답, 웬 개가 짖느냐는 듯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입맛을 다시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허...... 이 연자탕은 정말 맛있군그래...... 후루룩...... 쩝쩝......" 금의중년인의 눈초리가 쭉 찢어졌다. "이봐, 늙은이......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그는 갈의노인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갈의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지금 누구에게 말을 걸었는가?" 갈의노인은 의아한 듯 고개까지 갸우뚱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금의중년인은 어이가 없고 약이 올라 차게 말했다. "늙은이에게 물었다." "노부에게 말을 걸었다고?" "그렇다." "노부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금의중년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며 갈의노인을 노려보았다.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나를 불렀냐고 물어 보았다." "노부가 자네를 불렀다고?" "그렇다." "노부가 왜 자네를 불렀는가?" 금의중년인은 더욱 약이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썩어빠진 늙은이야,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하나 갈의노인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점잖게 말했다. "자네는 왜 화를 내고 그러는가? 보아하니 오늘 집에서 마누라와 한바탕 한 모양인데 그 화 풀이를 노부에게 하면 쓰나? 노부는 자네를 부른 적이 없으니 그만 가보게." 금의중년인은 눈을 부릅떴다. "이 원숭이 같은 늙은이가......! 이 어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인 줄 아나?" 갈의노인은 돌연 정색을 하고 물었다. "누가 어른이란 말인가?" 금의중년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어른이시다." "자네가......?" "그렇다." 갈의노인은 나직하게 탄식을 터뜨렸다. "저렇게 큰 사람이 아직도 말을 완전히 배우지 못했다니......자네는 세상에서 사람을 제일 슬 프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른다." "모른다면 노부가 알려 주지. 그것은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이라 큰소리를 치는 것이네." 금의중년인은 눈을 흉악하게 빛내며 갈의노인을 노려보았다. "내가 늙은이를 슬프게 만들었다면 어쩔 테냐?" 문득 갈의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부는 늙어 힘이 없는데 어찌 젊고 건장한 자네와 싸우겠는가? 자네가 가지 않는다면 노 부가 물러가겠네." 말을 마치기도 전, 갈의노인은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 누각을 벗어났다. 한바탕의 흥미 진진 한 격투를 기대했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맥이 풀려 고개를 돌렸다. 금의중년인도 갈의노인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오히려 멍해졌다. 그는 갈의노인의 뒤를 따라가 본때를 보여 줄까 하다가 그냥 갈의노인이 떠난 자리에 앉아 버렸다. '별 싱거운 늙은이도 다 보겠네. 난 또 무슨 대단한 내력을 가진 자인 줄 알고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했더니......' 금의중년인은 만면에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석중옥은 피식 실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금 전 갈의노인이 금의중 년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갈 때 갈의노인의 손이 그의 품속을 번개같이 들락거린 것을 본 것 이다. 한데, 그 손속이 어찌나 빠르고 영활했던지 석중옥과 같은 고수도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다 면 낌새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석중옥은 천천히 강남루를 벗어났다. 갈의노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한데, "풋!" 석중옥은 막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갈의노인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남문대로를 걸어가며 연신 지나가는 사람들의 품에서 이것저 것을 꺼냈다 집어넣었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깨를 으쓱대며 걸어가고 있는 한 검객의 등뒤에서 검을 뽑아 보더니 다시 꽂아 넣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상대는 눈치조차 못 채고 있었다. 석중옥은 내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갈의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숱한 사람들의 품속을 마음대로 헤집 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혼잡한 대로를 벗어나 인적이 별로 없는 작은 골목길 로 접어들었다. 석중옥도 태연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골목길로 접어든 갈의노인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석중옥의 걸음도 점점 빨라져 갔다. 갈의노인은 인적이 없는 골목길을 요리조리 정신없이 걸어갔다. 말이 걷는 것이지, 보통 사 람들이 뛰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빨랐다. 그러다가 문득 갈의노인은 몸을 우뚝 멈추고 번개같이 신형을 돌렸다. "웬 놈이 감히 노부의 뒤를 따라오는 것이냐?" 석중옥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갈의노인은 자신의 뒤를 밟은 자가 다름 아닌 주루에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흑의서생임 을 알자 흠칫했다. "흐음...... 자네로군. 한데 무슨 일로 노부의 뒤를 밟고 있나?"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었다. "조금 전에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노인장의 금옥양언(金玉良言)을 들었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소? 불초는 노인장이 너무 큰 욕심을 내다가 크게 당할까 염려가 됩니다." 갈의노인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하하...... 노인장께서 불초의 품에서 가져 간 그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나 제게는 몹시 중요한 것이오. 그러니 제가 화를 내기 전에 돌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 오." 갈의노인의 눈에서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만지작 거렸다. "허허허...... 보기보다는 대단한 젊은이로군. 아직까지 노부의 솜씨를 제대로 발견한 사람이 없었는데." "......" "알겠네. 자네가 여기까지 따라온 정성을 생각해서 물건을 돌려주기로 하지." 그는 마치 자신이 큰 선심이라도 쓰는 양 점잖게 말했다. 갈의노인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금원보(金元寶)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것이 자네 것인가?" "아니오." 갈의노인은 금원보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다른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도 진귀한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작은 단검이었다. "그럼 이것인가 보군." "그것도 아니오." 갈의노인은 다시 품속에서 한 아름의 전표(錢票)를 꺼냈다. 천하에서 가장 신용이 좋다는 산 해전장(山海錢莊)의 상표가 적힌 전표였다. "그럼 이것인가?" "아니오." 그는 이번에는 묘강(苗疆)의 특산인 묘안석(猫眼石)을 꺼냈다. "이것이 틀림없겠지?" "그것도 아니오." 석중옥이 계속 고개를 젓자 갈의노인은 아예 품속에서 한 아름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석중옥은 그의 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보자 내심 어이가 없었다. 금은보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옥합(玉盒), 기이하게 생긴 옥배(玉杯), 언뜻 보기에도 값비 싸게 보이는 용이 양각된 금패(金佩)...... 끝도 없었다. 심지어는 옥차(玉叉)를 비롯한 여인들의 장신구까지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아 닌가! 갈의노인은 물건들을 자신의 앞에 수북이 꺼내 놓으며 자못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것들 중 자네의 것을 골라 보게나." 석중옥은 한편으론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솜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갈의노인이 꺼내 놓은 물건들 중 자신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석중옥은 갈의노인을 노려보며 약간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들 중에는 없소." 갈의노인은 의외라는 듯 생쥐 같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그럴 리가 있나...... 오늘 노부가 수확한 물건은 이것들이 전부이거늘......" "......"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갈의노인은 움찔하여 급히 말했다. "아! 이제 알았네. 알고 보니 여기에 하나를 더 숨겨 놓았던 걸 잊어버리고......" 갈의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자신의 바지춤에서 주섬주섬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 었다. "이것이 자네 것인가 보군." 그가 꺼낸 것은 옥패(玉佩)였다. 앞면에는 천룡(天龍)이 승천(昇天)하는 모양이 음각되어 있 고, 뒷면에는 계피학발의 노인이 단정히 앉아 있는 모양이 양각된 특이한 옥패. 그것은 바로 천룡무상령이었다. 대체 그것을 갈의노인이 언제 석중옥의 품에서 빼갔단 말인가?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갈의노인은 그것을 줄 생각은 않고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음! 보아하니 별달리 특별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재료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고...... 조각은 조잡하기 그지없는데......" 석중옥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갈의노인은 계속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톡톡 두드려 보기도 하고 이빨로 가볍게 깨물어 보기 도 했다. 심지어는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는 것이 아닌가!킁...... 킁! 냄새도 별다른 게 없는 데...... 이게 어째서 자네에게는 소중하단 말인가?" "노인장이 그 물건의 내력을 알면 아마 까무러치고 말 것이오." 갈의노인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래, 이 물건의 내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수 없소." "하하하...... 그래, 이까짓 물건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돌려주지." 갈의노인은 껄껄 웃더니 손에 든 천룡무상령을 석중옥에게 던졌다. 그 순간, 쉬-익! 매서운 소성이 터지며 옥패가 석중옥의 안면을 노리고 격사되었다. 석중옥은 태연히 대꾸했다. "물건을 가져 갔으면 공손히 가져 오는 게 도리가 아니겠소?" 다음 순간 석중옥의 우수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러자 빛살같이 날아오던 옥패의 기세가 멈칫해졌다. 동시에 쳐든 오른손의 식지가 전광석화와 같이 튕겨졌다. 쉬-익! 멈칫하던 옥패가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갈의노인에게 쏘아졌다. 갈의노인의 눈에서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법 한가락하는 놈이었군." 갈의노인은 탄성을 토해 내며 날아오는 옥패를 잡으려 했다. 순간, 휘-익! 가벼운 소성이 터지며 옥패가 빙글 선회하면서 갈의노인의 등뒤 척중혈(脊中穴)을 노리고 쏘아 갔다. 이러한 변화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으로,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한 수 (手)였다. "아이고, 큰일났구나!" 갈의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손을 회수하는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비틀었다. 휘- 휙! 그러자 옥패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며 석중옥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석중옥은 태연히 옥패를 잡아 품속에 집어넣었다. 장난기 어려 있던 갈의노인의 안색은 놀람으로 인해 완전히 굳어졌다. 갈의노인은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네가 조금 전에 시전한 것은 소림(少林)의 탄지신통(彈指神通)이 아니냐? 네놈은 소림의 문 하냐?" 석중옥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이 어찌 나의 사문(師門)이 될 자격이 있겠소?" 갈의노인의 눈이 쭈욱 찢어졌다. "이런 제기랄! 네놈이 도대체 누구의 제자이기에 이리도 광오한가 보자!" 갈의노인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석중옥에게로 덮쳐 왔다. 한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그의 손이 석중옥의 가슴에 이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빙글...... 석중옥의 신형은 팽이처럼 유연하게,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섰다. 동시에 춤 을 추듯 왼쪽 다리를 슬쩍 뻗어 공격했다. "으헛? 공동(山空山同)의 선풍각(旋風脚)......!" 갈의노인은 다급히 중얼거리며 일 척 가량 물러나면서 석중옥의 공격을 해소시키는 동시에 다시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때 석중옥의 신형은 허공으로 솟았다가 갈의노 인에게 떨어져 내리며 그의 완맥을 잡아 오고 있었다. 갈의노인의 눈이 다시 커졌다. "곤륜(崑崙)의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구나!" 그는 짧게 외치며 몸을 반 바퀴 가량 돌리면서 번개같이 몸을 솟구쳐 오히려 석중옥의 목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그 순간, 석중옥도 번개같이 손을 철회하며 왼손을 허공으로 가볍게 뻗 었다. 파-앗-! 파라라라......락! 검은 소맷자락이 찢어질듯 나부끼며 여인의 섬섬옥수보다 매끄럽고 더 큰 손이 절묘 무쌍하 게 갈의노인을 찍어 갔다. 그의 변초(變招)는 너무도 신속하여 갈의노인이 피할 엄두도 내기 전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콰-앙! 쾅!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갈의노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르르 물러나고 말았다. 갈의노인은 조그만 두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경악의 빛이 역력했다. "이...... 이것은 아미(峨嵋)의 여래신수(如來神手)가 분명한데......" 그의 충격은 이미 극에 달했다.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중원무학(中原武學)의 중추요, 맥(脈)을 이루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절정무공들이 약관의 청년의 몸에서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조금 전 받아 본 바로 는 그의 내공은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심후한 것 같지 않은가? 갈의노인은 정녕 무림에 이와 같은 고수가 나타났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외치듯 말했다. "이 녀석아...... 너의 사문은 무엇이냐?" 석중옥은 무뚝뚝할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말해도 노인장은 모를 것이오." "흥! 요즘 젊은 녀석들은 모두 이렇게 건방지단 말이야. 좋아! 말하고 싶지 않다면 관두게." 그의 어조는 어느새 처음의 점잖은 말투로 변해 있었다. "한데 자네의 무공으로 보아 이름없는 무명소졸 같지는 않은데...... 이름이 뭔가?" "나는 석중옥이라 하오." "석중옥?" 갈의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이와 같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석중옥은 갈의노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빙긋이 웃음지었다. "나는 이번이 강호초출(江湖初出)이니 노인장은 아마도 알지 못할 것이오." "이제 보니 풋내기였군. 그런데 자네는 정말로 남궁검문으로 갈 생각인가?" "그렇소. 왜, 노인장께서도 한백의 장보도에 관심이 있으시오?" 갈의노인은 괴이하게 웃었다. "흐흐흐...... 노부는 보물이 있는 곳을 쇠신이 닳도록 찾아 다니는 사람인데 보물이 넝쿨째 주렁주렁 달려 있는 판에 관심이 없을 리가 있겠나?" 문득 석중옥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장은 요즘 한창 바쁠 텐데, 어느 여가에 한백의 장보도까지 손대려 하는 거요?" 순간, 갈의노인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안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천당문의 당이선생이 눈에 불을 켜고 노인장을 찾아 다니는 판국인데 남궁검문까지 갈 여유가 있겠소?" 갈의노인의 초라한 얼굴에 갑자기 신광(神光)이 어리기 시작했다. "자네는 노부를 아는가?" "노인장은 잘 모르지만 노인장의 그 새하얀 옥수(玉手)에 대한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소. 노인장은 당대 제일의 신투(神偸)라는 무흔풍(無痕風) 한쾌(韓快)가 아니시오?" 석중옥의 말에 갈의노인은 뜻밖인 듯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석중옥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오늘 노부가 호되게 당하는군그래. 그렇다네. 노부가 바로 천하의 모든 것을 내 것처럼 쓰 는 한쾌 나으리일세." 아......! 설마 이 눈앞의 볼품없는 늙은이가 바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신투라는 무흔풍 한쾌일 줄 이야...... 무흔풍 한쾌는 한번 노린 물건은 놓친 적이 없고, 얼마 전에는 강호의 대살성(大殺星)인 당 이선생의 영물인 백전아까지 훔쳐 강호를 경악시킨 일대의 괴도(怪盜)였다. 한데 그에게는 한 가지 신체적인 특징이 있었다. 바로 그의 손이 여인의 것보다도 더 하얗고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추레하고 볼품없는 그의 꾀죄죄한 몸에 어떻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옥수가 달려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무림인들에게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었다. 그 새하얀 옥수 때문에 그에게는 옥 수도(玉手盜)라는 또 하나의 고상한 외호까지 붙게 되었으니...... 한쾌는 문득 한 생각에 미친 듯 급히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당이 늙은이가 노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석중옥은 차분하고도 간략하게 중조산의 폐찰 안에서의 일을 이야기 했다. 말을 듣고 있던 한쾌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군...... 당이 늙은이는 성질이 지랄 같아서 한번 노리는 사 람은 끝까지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 텐데......" "그런 줄 알면서 노인장께선 왜 당이선생의 백전아를 훔치셨소?" 한쾌는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급히 손을 내저었다. "말도 말게! 어디 노부가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했겠나? 다 그 빌어먹을 계집애 때문이지." "계집이라니요?" "오행수(五行 ) 조담(趙潭) 늙은이의 말썽꾸러기 외동딸인 조아앵(趙娥鸚) 말일세." 한쾌의 얼굴엔 지겹다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오행수 조담은 당금 강호의 최절정무인(最絶頂武人)인 칠대명인(七大名人) 중의 한 사람이 었다. 그는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무공이 가히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달해 모두들 두려워해 마지않는 절정의 고수였다. 하나 그와 무흔풍 한쾌는 천하에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였다. 오행수 조담은 늘그막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을 끔찍이도 귀여워했다. 때문인지 조담 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조아앵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말괄량이로 자라났다. 모든 사 람들이 그녀에게는 두 손을 다 들고 말 정도로 고집이 세고 사고뭉치였다. 하나 한쾌는 자신의 친우(親友)인 조담의 외동딸이라 꽤나 귀여워해 주었었다. 한데...... "그런데 어느 날이었네." 한쾌는 생각만 해도 약이 오른다는 듯 두꺼운 입술을 쑥 내밀었다. "그 계집은 유달리 보석(寶石)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노부보고 황궁(皇宮)에 들 어가서 사라서옥을 훔쳐다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사라서옥(沙羅瑞玉)! 이것은 무림에서 전설로만 전해지는 희귀한 보주(寶珠)였다. 이것을 몸에 지니면 비단 천하의 어떤 독(毒)에도 중독되지 않을 뿐 아니라, 피사(避邪)와 피열(避熱), 피한(避寒)의 효과까지 있어 더위와 추위를 느끼지 않는 한서불침지신(寒暑不侵 之身)이 된다. 게다가 여인에게는 용모를 늙지 않게 하는 주안(駐顔)의 효력까지 있어 그야 말로 인세(人世)의 무상지보(無上至寶)라 할 만했다. 그것은 천하에 단 하나, 황제(皇帝)의 용상(龍床)에만 박혀 있었다. "고 계집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가져다 달라고 마구 보채는 게 아닌가? 내가 미쳤나, 황궁까지 들어가 그것을 훔쳐 오게......? 만일 그랬다간 백만 황군(皇軍)에 쫓겨 죽을 때까지 똥줄 빠지게 도망만 다녀야 할 걸세." 석중옥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듯하자 한쾌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더욱 신나게 떠들 어댔다. "노부는 당연히 그 계집의 부탁을 거절했지. 그랬더니 글쎄 그 여우같은 계집애가 나를 보 고 늙으니까 담도 너무 작아졌다고 놀리지 않겠나?" 한쾌는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마구 떠들어댔다. "나는 홧김에 내가 한번 맘을 먹으면 당이 늙은이가 애지중지하는 그 하얀 고양이도 훔쳐 올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 으이구! 그랬더니 그 꼬마 계집애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글쎄 나보고 그것을 증명해 보라는 거야. 빌어먹을......" 한쾌는 자신의 입이 원수라는 듯 손으로 입을 탁 쳤다. "에구...... 그저 요놈의 주둥아리가 방정이지......" "그래서 백전아를 훔친 것이오?" 석중옥은 내심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한쾌는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말일세...... 고 쥐방울만한 계집애가 어찌나 약을 올리던지 그만......" 한쾌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노부 체면에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고 해서 그냥 홧김에 해 치웠지." 석중옥은 입가에 실소를 매달며 물었다. "그래서 백전아는 어찌했소?" "음...... 그것이 그만......" 한쾌의 얼굴에 더욱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그 계집애한테 당한 일이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도 억울하고 약이 올라 홧김에 마구 술을 먹다가 그만...... 술 값이 모자라서 어떤 상인에게 백 냥을 받고 팔아 버렸다네." 석중옥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멍청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백전아가 어떤 동물인가? 천하에서 단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진귀한 영물(靈物) 중의 영물 인 백묘설아(白猫雪兒)가 아닌가? 한데 이런 희대의 영물인 백전아를 모자라는 술 값 대신에 단돈 백 냥에 팔아 넘겼다니...... 만약 당이선생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내친김에 더 물어 보았다. "그럼 혼섬구령은......?" "아! 그 고양이의 목에 달린 예쁜 방울 아홉 개 말인가?" 한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말했다. "노부가 쭉 지니고 있었는데 조아앵, 고 계집애가 어찌나 달라고 졸라대던지 그만 줘버렸 네." 석중옥은 좀처럼 웃음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웃자 붉은 입술 사이로 내비치는 새하얀 이빨이 몹시도 매력적이었다. "이제 당이선생이 노인장을 찾아와서 백전아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그것이라면 염려 말게. 히히......" 한쾌는 석중옥을 향해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당이 늙은이가 노부를 찾아오면 그때는...... 노부의 장기를 이용해야지." "장기라니......?" 한쾌는 뒷짐을 지고 아주 여유 작작하게 말했다. "자네는 노부의 외호도 모르는가?" 그의 외호는 무흔풍이 아닌가? 그것은 그의 신투술(神偸術)이 그만큼 뛰어나기도 하지만, 다 른 한편으론 그의 신법(身法)이 강호제일이라 할만큼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석중옥이 어찌 그의 말뜻을 모르겠는가? "그럼 그를 보기만 하면 무조건 도망 다니겠다는 말이오?" 석중옥이 어이가 없어 멍청히 물었다. "도망이라니...... 어찌 노부 체면에 도망을 가겠나? 다만 잠시 상봉을 않겠다는 말이지." 석중옥은 그의 익살에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언제까지 그렇게 상봉을 늦출 거요?" 한쾌는 웃음띤 얼굴에 정색을 했다. "당이 늙은이가 비록 성질이 음흉하고 포악하긴 하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지." "그게 뭐요?" "그는 아주 욕심이 많다네." "그게 좋은 점이오?" 한쾌는 의외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은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지." 석중옥은 총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한쾌의 말을 알아들었다. "알겠소. 그러니까 당이선생이 아무리 백전아와 혼섬구령을 아끼고 있어도 그것들보다 더 귀중한 물건을 내주면 더 이상 노인장을 귀찮게 굴지 않을 거란 말이군요." "그렇지."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총기있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노인장은 한백의 장보도로 그를 유혹하려는 것이군요?" 한쾌의 쥐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자네와는 정말 이야기하기가 편하군그래. 한마디만 하면 척척 알아들으니 말일세. 바로 맞 추었다네. 당이 늙은이가 제아무리 성질이 지랄 같다고 해도 장보고의 보물을 찾는 데야 나 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걸세."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쾌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들어왔다. 당이선생 같은 무서운 인물을 건드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석중옥은 한쾌의 비쩍 마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이제 남궁검문으로 가실 생각이오?" 한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진지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그렇네. 어떤가, 자네도 한백의 장보도에 흥미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 잠시 합작을 하는 것 이?" "장보고의 보물을 찾을 때까지 합작을 하잔 말이오?" "그렇다네." 석중옥은 내심 그의 소탈하고 해학적인 성격에 호감을 느끼고 있던 터인지라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한쾌는 흥이 나는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하하하! 과연 자네는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 말이 나온 김에 우리 가면서 이야기하세." 한쾌는 석중옥의 손을 움켜잡은 채 날아올랐다. 그의 몸은 너무도 표홀해서 석중옥은 자신의 손에 잡힌 그의 체중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 도였다. 이처럼 몸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무흔풍의 경공(輕功)이 고금제일에 육박한다더니...... 명불허전이로군......!' 석중옥이 감탄을 하는 순간, 휘-익! 그들의 형체는 이미 골목의 담장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12 장 남궁검문(南宮劍門) 와글와글...... 북적북적...... 온 천하의 사람들은 다 모여들고 있는 걸까? 소주로 이어진 관도(官道)를 비롯해서, 주위 백여 리 일대의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은 모 조리 발길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가지각색의 옷차림에 천차만별의 사람들. 행선지는 오직 하나. 남궁검문(南宮劍門)! 바로 그곳을 향하고 있는 발길들이었다. 한백의 장보도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남궁검문 이다. 한데, 최근에 알려져 퍼지기 시작한 또 다른 소문이 온 천하를 또 한 차례 거센 흥분의 도 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들었어?" "뭘?" "남궁검문에서 한백의 장보도를 노리고 몰려드는 군웅(群雄)들의 성화에 견디다 못해 이번 에 무림대회(武林大會)를 선포한 것을......" "뭐? 아니, 그게 사실인가?" "이런 답답한 친구 봤나! 아니, 아직까지 그 소문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금시초문일세." "잘 듣게. 이 귀가 꽉 막힌 친구야. 천하의 고수(高手)란 고수는 이번에 모두 남궁검문으로 몰려들고 있지 않겠나? 그들은 장보도와 삼대기보를 노리고 있다네. 결국 이들의 성화에 견 디다 못한 신검 남궁뢰는 몰려드는 군웅을 상대로 비무대회(比武大會)를 열기로 했다네." "무엇 때문인가?" "원래 한백의 보물을 찾아 떠날 사람들은 삼대기보(三大奇寶)의 주인들과 남궁검문의 고수 들이었다네. 한데 의외로 군웅들이 많이 몰려들어 자신들의 신변조차 위험스러워지자 남궁 뢰가 편법(便法)을 쓴 것이지. 즉, 몰려든 군웅들끼리 비무대회를 열어 그 중 강한 몇 명의 고수를 선발하기로 했다네." "아! 그래서 그들에게 신검 남궁뢰를 위시한 다른 인물들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군." "그렇다네. 덕분에 그들은 삼대기보 없이도 보물을 찾아 같이 떠날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비무대회의 참가 자격은 어찌 되는가?" "그건 아무런 제한이 없네. 왜, 자네도 참가해 보려고?" "글쎄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쳇! 꿈도 꾸지 말게. 자네나 나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네." "왜?"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파의 칠대명인(七大名人)과 사파의 구대흉인(九大兇人) 등 정사십육대 고수(正邪十六大高手)를 비롯한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거의 모두 참가할 거라는데, 우리 같 은 사람들이 어디 얼굴이나 들이밀 수 있겠는가?" "그래? 그럼 어서 가세나." "아니, 어딜 간다는 말인가?" "허! 이제 보니 자네도 앞뒤가 꽉 막혔구먼. 그런 고수들이 모두 나와 실력을 겨루는데 얼마 나 볼 만하겠는가?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지 않나?" "과연 그렇군. 어서 가세나!" * * * 남궁검문은 소주의 동문대로(東門大路)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여 평은 됨직한 거대한 세 가(世家)의 주위는 울창한 대나무숲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한낮의 폭양이 숲으로 둘러싸인 남궁검문을 감싸고 있는 정오 무렵. 남궁검문으로 향하는 동문대로에 두 인물이 나타났다. 작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갈의노인과 훤칠한 키의 흑의서생, 그들은 다름 아닌 한쾌와 석중옥이었다. 너비가 오 장여나 되는 널찍한 동문대로는 남궁검문으로 몰려드는 군웅들로 인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태양혈(太陽穴)이 볼록한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하나 개 중에는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어 황급히 달려온 일반인들도 상당히 되었다. 석중옥과 한쾌는 꽉 미어지다시피 한 동문대로를 인파에 휩쓸려 걸어가고 있었다. 한쾌는 몰려가는 중인들의 물결을 보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어중이떠중이 쓸모없는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가는구나." 그는 먼지로 자욱한 동문대로를 걸어가며 내내 투덜댔다. 석중옥은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조용히 빛냈다. "이들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오, 한 노인. 천하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도 한백의 보물에 대한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판에 여타 인물들이야 오죽하겠소?" "제기랄!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중원천지(中原天地)의 모든 시장바닥을 합친 것보 다 더 시끌벅적하니, 이거야......" 석중옥은 그저 입가에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문득 투덜대며 걸어가던 한쾌의 눈에 기광이 어른거렸다. "자네는 저 번지르르하게 생긴 놈이 누구인지 아는가?" 석중옥은 한쾌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약 오륙 장 떨어진 곳, 뭇무리에 둘러싸인 채 여유 만만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 는 한 인물이 있었다. 일신에는 엷은 색의 비단남의를 걸쳤고 이마에는 주옥(朱玉)을 박은 영웅건(英雄巾)을 둘렀 는데, 밝게 웃으며 드러난 치아가 건강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나 할까? 우측 가슴에 새긴 금빛 칼의 문양이 그의 훤칠한 풍채에 위풍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쾌는 그 금도(金刀) 문양을 찢어 버릴 듯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바로 만상공자와 함께 무림사공자(武林四公子)에 속해 있는 금도공자 전붕비라 네." 금도공자(金刀公子) 전붕비(田鵬飛)! 무림사공자의 일인(一人)이며, 신기(神技)에 이른 자하도법(紫霞刀法)으로 미래의 무림을 영 도해 나갈 젊은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석중옥은 그의 뛰어난 풍모에 내심 감탄을 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빌어먹을...... 저 죽지도 않는 인간 백정도 이곳에 오다니......" 한쾌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석중옥은 한쾌가 바라보는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삼 장여 떨어진 곳에,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흉신악살(兇神惡殺)같이 생긴 인 물 하나가 주위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걸어가고 있었다. 눈처럼 흰 백발(白髮)에 붉은 동안(童顔), 그리고 엷은 혈광(血光)이 이글거리는 섬뜩한 혈 안(血眼)의 소유자. 석중옥은 주위의 사람들이 감히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 꼈다. "저자가 누구요?" "누구긴 누구겠나? 저 시뻘건 눈깔만 보면 알 텐데......" "그럼......?"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렇다네. 저 늙은이가 바로 혈목잔부 도잔이라네." 혈목잔부(血目殘夫) 도잔(屠殘)은 삼십 년간 광동(廣東) 일대를 휩쓸던 공포의 대마존(大魔 尊)이었다. 취미가 사람의 심장을 모으는 것이라고 알려진 일대 흉마로, 경우도 없이 우선 기분이 안 좋으면 사람부터 때려잡고 만다고 해서 광동에서는 우는 아이도 그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한쾌는 그의 모습을 흘겨보며 몹시 기분이 나쁜 듯 말했다. "보물이 좋긴 좋은가 보군. 저 인간 백정도 유혹당할 정도이니......" 그때 석중옥은 혈목잔부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언뜻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금의경장 차림에 등뒤에 검을 맨, 극히 뛰어난 미모의 소녀인데, 다리를 약간 절룩 거리는 것으로 보아 절름발이가 분명했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가량. 전체적으로 싸늘하고도 고결한 분위기를 풍겨 내는 모습이었 다. 그 옆 사람은 성성한 백발에 피부가 시커먼 칠순 가량의 노파였다. 한데 이 노파의 체구는 도대체 상하(上下)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뚱뚱했다. 그 체구에 걸친 옷은 우습게도 알록달록한 오색(五色)의 채의(彩衣)였으니...... 더구나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은 진한 화장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는 모 습이었다. 석중옥의 시선이 이 기이한 두 여인에게 가 있자, 한쾌가 그의 팔을 툭 치며 나직한 목소리 로 말했다. "이보게! 자네는 저 괴상망측한 할망구가 누구인지 아는가?" 석중옥은 그의 안색이 제법 심각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쾌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할망구는 전낭자(癲娘子) 호파파(胡婆婆)라고 하네." "전낭자 호파파......?" 석중옥은 그 이름이 너무도 괴상망측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전낭자는 저 할망구의 외호(外號)이고 호파파는 이름이라네." 석중옥은 어이가 없고 우스워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전낭자'란 곧 미치광이 처녀라는 말이었다. 한쾌는 쥐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저래봬도 무공은 가공할 정도로 고강하다네.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지. 한번은 자 신을 미친 할망구라고 놀렸다고 하룻밤에 백여 명을 도살한 적도 있다네." "......!" "그 옆의 절름발이 계집애는 호파파의 제자인데 이름이...... 곽무지라고 하던가? 아무튼 제 사부를 닮아 상당히 괴팍한 계집이라네. 듣기로는 신법이 노부 뺨친다고 하더군." 곽무지(郭無止)! 이 또한 여자 이름치고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더구나 저렇듯 아름다운 소녀의 이름으로는 더욱 그랬다. 하나 석중옥은 그 절름발이 소녀가 당대제일의 신법(身法)의 대가(大家)인 무흔풍 한쾌에 버금가는 경공을 지녔다는 말에 내심 깜짝 놀랐다. 그때 한쾌가 두 눈을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저 할망구가 왜 전낭자라고 불리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석중옥은 그가 또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하려는가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쾌는 주위에서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워 들었다. 그는 석중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리 고는 그 돌멩이를 호파파 뒤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스-윽! 돌멩이는 천천히 허공을 날아가다가 갑자기 커다랗게 회전을 하며 호파파의 뒷머리를 향해 폭사되었다. 석중옥은 한쾌의 이 회선비기(廻旋飛技)에 나직하게 감탄했다. 순간, 팍! "아이고!" 돌멩이는 점잖게 걸어가던 호파파의 뒤통수에 여지없이 격중되고 말았다. 호파파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통수를 감싸안았다. 이어,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일그러졌다. "어떤 똥물에 튀겨 죽일 놈이 감히 본 낭자에게 돌을 던지는 거냐?" 그녀의 입에서 벼락같은 폭갈이 터지자 주위에서 걸어가던 무림인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 았다. 호파파는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돌멩이가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돌을 던졌지?" 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던 한 인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는 숯가루를 바른 듯 시커먼 얼굴에 장대한 체구의 사내였다. 얼굴에는 무수한 상처가 이 리저리 어지럽게 나 있으며, 제법 험상궂게 생긴 인물이었다. 섬서(陝西) 지방에서 제법 흉 명을 떨치고 있는 흑면야차(黑面夜叉) 혁련광(赫連光)이란 자였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그는 난데없이 괴상하게 생긴 할망구가 자신을 향해 욕을 하자 어 이가 없었다. 하나, 그는 호파파의 위명을 잘 알고 있었는지라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호파파는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며 벽력같은 노갈을 터뜨렸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 네놈의 시커먼 상판을 보니까 여자깨나 밝히게 생겼구나. 네놈이 본 낭자에게 음흉한 속셈을 품고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리라!" 혁련광은 그녀의 억지에 내심 울화통이 치밀었으나, 그녀의 흉악한 성격을 귀가 따갑게 들 어 온 터라 내심 끙끙 앓고 있었다. "아, 아니올시다......" "이 시커먼 낮도깨비 같은 놈아! 네놈이 수십 년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순결한 본 낭 자의 존귀한 머리통에 바윗돌을 던져?" 돌연, 번쩍-! 그녀의 신형이 번개같이 혁련광에게로 쏘아져 갔다. 실로 너무도 빠른 신법인지라 혁련광은 피하기는커녕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호파파는 혁련광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땅바닥에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처박았다. 쿵! "아이쿠!" "이 시커먼 놈의 자식!" 호파파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사정없이 문질렀다. "으...... 으음...... 으......" 혁련광은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하며 미친 듯이 사지를 바둥거렸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움켜 쥔 호파파의 손은 꼼짝도 안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혁련광의 체구가 장대하다고는 하나 호파파의 몸집은 그보다 더 컸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채의를 입은 거대한 체구의 호파파가 거의 솥뚜껑만한 큼직한 손으로 얼굴이 시커먼 혁련광의 머리를 잡고 흔드는 광경이란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석중옥은 그 광경을 보자 어처구니도 없고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마침 주위를 둘러보던 절름발이 소녀, 곽무지의 시선에 석중옥의 모습이 들어왔다. 곽 무지는 눈빛을 이채롭게 반짝이며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희미하게 웃는 그의 새하얀 이빨이 살짝 내비치는 모습이 무척 특이 하고 강렬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석중옥도 마침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석중옥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도 곽무지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흑삼을 입고 허리춤에는 철검을 찬 채 머리를 헝클어뜨려 얼굴을 가린 그의 모습에 흥 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 헝클어진 흑발 아래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 도 들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년아! 눈깔을 어느 놈팽이에게 주고 있는 게냐?" 언제 또 보았을까? 돌연 터져 나온 호파파의 일갈에 곽무지는 흠칫 시선을 거두었다. "어서 가자. 이 개떡같은 시장바닥을 계속 가다가는 본 낭자의 복창이 터져 버리겠다." 호파파는 그렇게 말하면서 혁련광의 머리통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쿵! "아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혁련광의 몸이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호파파의 발길질이 다시 그의 엉 덩이에 사정없이 작렬했다. 퍼-억! "어이쿠!" 섬서 일대에서는 그래도 상당한 악명을 떨치고 있던 혁련광은 망신스런 모습으로 저만큼 멀 리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강호의 고수인 혁련광을 어린아이처럼 마음대로 주무르는 호 파파의 솜씨는 과연 소문에 조금도 뒤지지 않은 것이었다. "버르장머리없는 색한(色漢) 같으니라구......" 호파파는 침을 탁 뱉으며 바람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가자!" 하나 곽무지는 주춤거리며 다시 석중옥이 있는 곳을 힐끔 돌아보았다. 호파파는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버럭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년아! 저 까마귀 같은 놈이 네 기둥서방이라도 된단 말이냐? 왜 그렇게 쳐다 봐?" 곽무지는 움찔 놀라 황급히 석중옥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때 석중옥을 보고 있던 호파파의 눈에 그의 옆에서 히죽 웃고 있는 꾀죄죄한 갈의노인이 들어왔다. 순간 그녀의 눈이 쭈욱 찢어졌다. "저, 저 한가 늙은이도 이곳에 오다니......" 문득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저 한가 늙은이가......?" 한쾌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길에 자신도 모르게 찔끔하여 석중옥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 했다. "석 노제, 나중에 남궁검문에서 보세나...... 노부는 이만 실례해야겠네......" 다음 순간, 휙! 한쾌의 모습은 어느새 중인들 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앗?" 호파파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과, 과연 저 도둑 늙은이가 장난을 친 게로구나...... 게 서라! 이 생쥐 같은 한가야!" 그제서야 호파파는 사실을 짐작하고 분기 탱천, 입에 게거품을 물고 그를 쫓아갔다. "이 시궁창에 빠져 죽을 한가 도둑놈아! 네놈이 감히 본 낭자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아느 냐?" "으히히히...... 호 낭자! 낭자의 대갈통은 과연 잘 여물어 단단하기 그지없더구려. 하지만 지 금은 노부가 너무 바쁘니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한쾌의 웃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 왔다. 곽무지는 다시 한차례 석중옥을 힐끔 보더니 곧 몸을 돌려 호파파의 뒤를 따라갔다. 석중옥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어느새, 남궁검문의 널찍한 대문이 그의 눈앞에 다가왔다. 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대문의 앞에는 다섯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각 탁자 마다 두 명의 백의인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한데 석중옥이 막 그곳으로 가려 할 때였다. "석 공자님이 아니세요?" 한소리 영롱한 옥음(玉音)과 함께 한 여인이 불쑥 그의 옆에 나타났다. 석중옥은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두 눈에 기광을 번뜩였다. "유(劉) 소저(少姐)였구려." 백의여인! 차고도 오만한 얼굴에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여인 은, 다름 아닌 철비연 유백령이었다. 석중옥은 일전에 중조산의 폐찰에서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녀의 뒤에는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용두괴장을 든 날수파파 두추의와 유백령에 버금 가는 미모를 자랑하는 남삼소녀(藍衫少女)였다. 유백령은 냉엄한 얼굴에 약간의 붉은빛을 띠었다. "일전에는 석 공자님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갑작스레 떠나시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조차 드 리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군요. 그때는 미안했어요." 그녀의 말은 실로 교묘하여, 겉으로는 비록 사과를 하는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왜 그 당시 그리도 급히 떠났느냐는 질책의 빛이 역력했다. 석중옥이 어떤 사람인데 그 기색을 모르겠는가? 그는 가볍게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양해하시오. 그 당시에는 급한 일이 있었는지라......" 유백령은 그런 그를 밉지 않은 듯 흘겨보았다. 석중옥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추의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옆의 남삼미소녀에게로 돌아갔다. 백옥(白玉)같이 새하얀 피부에 청순한 용모의 미소녀였다. 짙은 남삼을 입고 있어서인지 그 녀의 피부는 더한층 고와 보였고, 청초한 기운이 가득했다. 남삼미소녀는 석중옥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홍조를 가득 피워올렸다. 그제야 유백령은 그녀의 생각이 났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인사하세요. 이쪽은 바로 남궁검문의 가주이신 남궁 대협의 따님인 남의옥봉(藍衣玉鳳) 남궁혜(南宮慧) 낭자예요." 이어 그녀는 남삼미소녀를 돌아보며 석중옥을 소개했다. "혜매(慧妹), 일전에 내가 말했던 석 공자님이셔." 남삼미소녀, 남궁혜는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남궁혜라고 해요." "뵙게 되어서 반갑소. 석중옥이라 하오." 인사를 하면서도 석중옥은 그녀에 대한 강호의 소문이 결코 와전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 았다. 신검 남궁뢰에게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뛰어나기 그지없는 용봉지재(龍鳳之才)들로서, 무림인들은 남궁가(南宮家) 에 검룡(劍龍)과 옥봉(玉鳳)이 있다고 부러워했다. 검룡이란 무림사공자 중 제일로 손꼽히는 철검공자(鐵劍公子) 남궁유룡(南宮遊龍)을 말하고, 옥봉이란 바로 이 남의옥봉 남궁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남궁혜는 성격이 온순하고 천성이 자비로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는 터였다. 석중옥이 그녀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하하하...... 두 분 소저! 여기에 계셨구려." 낭랑한 웃음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유백령과 남궁혜는 흠칫 놀라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타난 인영은 약 이십여 세의 젊은 홍의공자(紅衣公子)인데, 매우 영준한 용모를 지니고 있 었다. 그의 영준한 용모는 뭇소녀들의 방심(芳心)을 울리기에 족한 것이었으나, 다만 약간 창백한 가운데 미간(眉間)에 한 줄기의 살기가 은은히 나타나고 있음이 흠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광이 비수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음을 볼 때 그의 무공이 이미 상승(上乘)에 이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데 그의 모습을 본 남궁혜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더구나 유백령의 안색은 찬 서리 가 내릴 만큼 싸늘해졌다. "흥! 내가 소문주(少門主)에게 따지러 가지 않은 것을 감지덕지해야 하거늘...... 무슨 낯으로 왔나요?" 유백령이 싸늘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홍의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일전에 둘째 숙부께서 소저께 하신 행동은 정말 그분의 본심이 아니었소. 유 소저께서 그 만 이해해 주시오." 유백령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석중옥은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때 홍의공자가 석중옥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남궁혜가 알아차리고 말했다. "두 분은 초면이시겠죠? 이분은 사천당문의 소문주이신 혈전공자 당욱 공자이시고...... 이분 은 석중옥 공자이십니다." 석중옥은 그제야 어째서 유백령의 안색이 그리도 싸늘해졌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일전에 당이선생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당이선생은 바로 눈앞에 있는 홍의공자의 숙부였던 것이다. 혈전공자(血錢公子) 당욱(唐旭)! 무림사공자의 일인이며, 중조산에서 죽은 은전추혼 당인의 동생이었다. 하나 그의 무공은 은전추혼 당인보다 훨씬 더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심성은 당이 선생과 같이 매우 교활하고도 악독해 암수(暗手)에 아주 능한 인물이었다. 석중옥은 예의 담담한 태도로 고개만 까닥거렸다. 이것은 이미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 고 있던 혈전공자 당욱에게 매우 건방지고 거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놈의 자식, 본때를 보여 줘야지 하늘 높은 것을 알겠군.' 당욱은 내심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보니 석 형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당욱은 포권을 하면서 암암리에 잠경(潛勁)을 발출했다. 유백령은 혈전공자 당욱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내심 코웃음쳤다. 그녀는 이미 석중옥의 가공 할 무공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석중옥은 한 가닥 잠경이 자신에게 몰아쳐 옴을 느끼고 냉소를 머금었다. "별말씀을...... 그보다 당 형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 었소이다." 순간, 팍! 한 줄기 경풍이 두 사람 가운데서 일어났다. 동시에 당욱은 항거할 수 없는 강대한 힘에 못 이겨 기혈이 솟구침을 느끼고 대경 실색했 다. 그는 크게 놀라서 다급히 진력을 돋워 밀려나려는 몸을 지탱했다. 한데 그때 뻗쳐 오던 강대한 잠경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밀려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던 당욱은 미처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한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당욱의 약간 창백하던 얼굴빛은 완전히 돼지간처럼 변해 버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석중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석중옥이 설마 이처럼 막대하고 정심한 공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노강호(老江湖)들에 버금가는 침착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하하...... 소제가 고인(高人)을 몰라보고 실례했구려. 소제는 석 형과 같은 절세의 고수를 알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우리 잘 사귀어 봅시다." 능수능란한 그의 말에 석중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장내의 분 위기는 이상하게 변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하하...... 당 형! 유 소저! 여기에 계셨구려.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찾고 있었소이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황의(黃衣)를 입은 당당한 체구의 청년이었다. 관옥(冠玉) 같은 얼굴에 눈썹은 귀 근처 까지 뻗어 있었고, 우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은 그야말로 천하의 미장부였다. 거기에다 전광 같이 번뜩이는 그의 두 눈은 금상첨화였다. "오라버니!" 그가 나타나자 남의옥봉 남궁혜가 반색을 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당욱은 즉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하하...... 남궁 형! 정말 오랜만이오. 이러다가는 얼굴마저 잊어버리겠소." 황의서생은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하하...... 그러게 말이오. 삼 년 전 사천당문에서 만난 이래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정말 반갑소이다." 석중옥은 그들의 말에서 황의서생이 남궁검문의 소문주이자, 무림사공자의 제일인자(第一人 者)로 손꼽히는 철검공자 남궁유룡임을 알 수 있었다. 남궁유룡! 그는 과연 소문대로 뛰어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남궁유룡은 호쾌해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유백령을 의미 심장하게 바라보았다. "하하하...... 유 소저께선 더욱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 아닙니까?" 유백령은 내심을 찔린 듯 얼굴을 약간 붉히며 받아넘겼다. "호호...... 남궁 공자님도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그보다는 강남의 미녀(美女)들이 남궁 공자님 때문에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데, 그게 정말이에요?" "하하하...... 유 소저의 입심은 아직도 여전하시군요. 잘못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 일찌감치 손을 들겠소이다." 유쾌하게 농담을 하던 남궁유룡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유백령을 바라보았다. "유 소저! 그런데 이분은......?" 석중옥은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해 보였다. "처음 뵙겠소. 불초는 석중옥이라 하오." 남궁유룡은 마주 답례하고 난 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자의 기태는 언뜻 보아도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한데 어찌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단 말인가?' 유백령은 즉시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석중옥이 강호초출임을 밝혔다. 남궁유룡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유룡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싱긋 웃었 다. "하하하...... 이렇게 문가에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미 백(白) 소저 (少姐)도 와 계시오." 백 소저라는 말에 유백령과 남궁혜가 기쁜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여의부(如意府)의 백 언니도 와 있단 말이에요?" 남궁유룡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인들을 이끌고 남궁검문으로 들어갔다. 후원(後院). 석중옥은 남궁검문에서 몰려온 무림인들을 위해 마련한 객방(客房)에 누워 있었다. 남궁검문은 보기보다 무척 넓었다. 더구나 이번에 장보도로 인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몰려올 것에 대비한 터인지라 크고 작은 천막과 누각이 그야말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가히 보(堡) 내(內)에 작은 도시가 생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울창한 대나무숲 사이로 끝없 이 이어진 막사는 보는 이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석중옥은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이리로 들어온 것이다. 유백령은 약간 서운했으나 남궁유룡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운함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중 대사를 앞둔 남궁유룡의 입장에서는 내력(來歷)도 확실치 않은 그를 남궁검문의 내실까지 안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이것이 오히려 더 마음 편했다. 객방은 크게 네 곳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구파일방(九派一幇)과 강호육패(江湖六覇)의 인물들이 거처하는 천방(天房)! 무림의 정파명숙(正派名宿)들이 거처하는 지방(地房)! 사파(邪派)의 절정고수들이 거처하는 현방(玄房)! 그리고 그 외의 잡다한 인물들이 거처하는 황방(黃房)! 이번에 남궁검문에 온 사람의 수는 대략 오륙천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황방에 거처하는 인물들은 약 삼천 가량이나 되었다. 석중옥은 당연히 황방에 머물게 되었다. <황방(黃房) 천이백육십호(千二百六十號)> 석중옥이 머물고 있는 객방의 문에는 이와 같이 적힌 작은 푯말이 걸려 있었다. 석중옥은 묵묵히 팔베개를 한 채 침상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흑발 사이로 빛나는 무 심한 그의 눈빛만이 촛불에 아롱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석중옥의 무심한 동공에 기광이 번뜩였다. "누가 왔소? 들어오시는 게 어떻겠소?" "허허허......" 밖에서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두 줄기 인영이 방안에 나타났다. 석중옥은 태연히 일어나 앉으며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았다. "공자님!" 한 줄기 반가운 음성과 함께 자그마한 백영이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눈 가득 총기를 반짝이며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킨 소년, 그는 바로 위지명이었다. 석중옥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녀석......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어리광만 늘었구나." 하나 그의 음성에는 진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위지명과 함께 나타난 인영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방문을 간신히 통과할 정도로 뚱뚱한 노인은 바로 해천쌍로 중의 반옹 곡현이었다. 그는 뚱 뚱한 몸을 힘겹게 굽히며 석중옥에게 인사를 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문주?" "반갑소. 한데 고수 곽 노인은 어디 갔소?" 곡현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워올렸다. "그 말라깽이 늙은이는 잠시 다른 곳에 가 있느라 이곳에 없습니다." "어디에 갔소?" "마른 멸치는 철기보(鐵旗堡)에 있습니다." "철기보......? 소주(蘇州)의 철기보 말이오?" 석중옥이 뜻밖인 듯 되물었다. 철기보는 이곳에서 약 오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보였다. 보주는 철기진건곤(鐵旗震乾坤) 양비웅(楊飛雄)이었다. 그는 비록 무림의 초절정고수는 아니 지만 그래도 꽤 명망이 있는 강호명숙의 하나였다. "한데 무슨 일로 곽 노인이 철기보에 갔소?" "예, 그 철기보가 약 두 달 전에 신비스럽게 멸문(滅門)당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 상황이 과 거 천심장의 혈겁과 너무도 흡사하여......" "흡사하다니......?" "철기보의 식솔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참변을 당한 것이나...... 또 상처로 보아 철기보를 멸망 시킨 무리들이 각지에서 선발한 인물처럼 각양각색이었다는 점들이......" 순간 석중옥의 눈에서 섬전 같은 기광이 뿜어 나왔다. 그 강렬한 눈빛에 곡현 같은 고수도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석중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곡현의 말대로라면 철기보는 임가장과 너무도 똑같은 상태에서 멸문당한 것이 아닌가! 시 기적으로나 상황이 너무도 흡사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멸문당한 것일까? 석중옥이 이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저...... 그리고 삼보의 주인들이 모두 나타났어요." 위지명이 석중옥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삼보라니......? 한백의 장보고를 찾는 데 필요하다는 그 삼대기보 말이냐?" "예, 빙백마혼주와 참홍뢰도, 그리고 열화굉천뢰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왔어요." 석중옥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대기보는 비단 희귀할 뿐 아니라, 빙백마혼주를 제외한 다른 두 가지는 근 백여 년 간 무 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한데 이번에 한백의 장보도로 인해 모두 나타나다니...... 그는 그 중 빙백마혼주는 이미 임소군에게 있음을 알고 있는 터. 그렇다면 다른 두 가지는......? 위지명은 귀여운 두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리며 총기있게 말했다. "삼보 중 빙백마혼주는 어떤 복면을 한 여자가 가져 왔어요. 그리고 참홍뢰도는 구도회(九 刀會)에서, 열화굉천뢰는 천지회(天地會) 인물들이 가져 왔어요." 구도회! 천지회! 그들은 모두 강호육패 중 하나인 초강문파들이 아닌가! 구도회는 천하제일의 도문(刀門)으로 유명했고, 천지회는 마도제일방파(魔道第一幇派)로 손 꼽혔다. 천지회는 특히 강호육패 중 최강이라는 여의부와 함께 정사제일(正邪第一)의 문파로 공인된 집단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회주는 우내쌍사(宇內雙邪)로 불리는 천패(天覇) 섭붕(葉崩)과 지살(地煞) 전 쾌(展快)였다. 섭붕과 전쾌는 마도제일의 고수인 구대흉인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초절정고수들로서, 가 히 당금의 마도(魔道)에서는 제일가는 고수들이라고 할 만한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들 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위세는 가히 천하를 뒤덮을 만한 것이었다. 곡현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신검 남궁뢰가 지금 이곳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노부가 여기에 온 지 벌써 삼사 일이 됩니다만 아직 그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도 남궁뢰의 행방을 아는 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곡현은 강호무림에서는 누구나가 숭앙해 마지않는 전대(前代)의 명숙(名宿)인 해천쌍로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궁검문에서도 극빈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남궁검문의 내부 정세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중옥은 잠시 침음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가 어디에 갔단 말이오?" "글쎄요...... 노부의 추측입니다만 혹시 한 발 먼저 한백의 장보고를 향해 떠난 것이 아닐까 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소. 그렇다면 이번 비무대회의 책임자는 누구요?" "예, 그것은 남궁검문의 총관(總官)인 철혈검존(鐵血劍尊) 남궁황(南宮荒)이 맡기로 되어 있 습니다." 철혈검존 남궁황은 신검 남궁뢰의 사촌동생으로, 그에 못지않은 검의 달인(達人)이었다. 석중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음인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반옹 곡현이 제법 신중히 말문을 열었다. "문주님! 한데 이 남궁검문에 무슨 의혹이라도......?" 문득 석중옥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위지명을 슬쩍 바라보았다. 위지명은 총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석중옥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것을 본 위지명과 곡현의 얼굴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말은 원래 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남궁검문이 당년의 천심장 혈겁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소." 이 말에 혹시나 하던 위지명과 곡현의 얼굴이 크게 변했다. 그때 석중옥은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십 년 전 천심장이 멸문한 이유는 바로 한백의 장보도 때문이었소." "아! 그, 그렇다면......" 곡현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위지명은 몸을 가볍게 떨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당시 위지(慰遲) 사형(師兄)은 사부님께 한백의 장보도를 발견했다고 연락을 했었소. 한데 그 직후에 천심장은 혈겁을 당했고 한백의 장보도도 신비스럽게 실종되어 버린 것이오." 곡현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뿜어 나왔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직 속단은 금물이오. 하지만 의혹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소." "그래서 노부들에게 이곳을 조사하라고 하셨군요?" "그렇소. 나는 중조산에서 한백의 장보도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소. 그래서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태를 주시하게 된 것이오." 위지명은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석중옥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조급해 할 필요 없다. 모든 내막은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위지명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꼭 천심장 혈겁의 범인은 밝혀질 거예요." 석중옥은 가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어 그의 시선은 곡현에게로 돌려졌다. "곡 노인께선 이곳에 와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소?" "글쎄요...... 신검 남궁뢰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것 외에는 별로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 습니다." "나는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했소."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석중옥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곡 노인께선 지금 남궁검문 안에 세워진 객방이 몇 개나 되는지 아시오?" 곡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한...... 삼천쯤......" "그 이상일 거요. 그럼 그와 같은 준비를 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최소한 서너 달은 걸릴 것입니다."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조용히 빛냈다. "그것도 수백 명의 인부를 동원해야 간신히 가능한 일이오. 그런데 남궁뢰가 한백의 장보도 를 얻었다고 알려진 시기는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았소." 그제야 곡현은 석중옥의 말을 알아듣고 눈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남궁뢰는 무림인들이 한백의 장보도를 노리고 이곳으로 몰려들 것을 예측했단 말 입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남궁뢰는 이런 상황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한백의 장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무림에 공표했을까요?" "그는 무림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거요. 다시 말하자면 무림인들의 이목 을 이쪽으로 온통 쏠리게 해야만 했던 것이오." "예엣?" 곡현과 위지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한백의 장보고는 이미 열렸을 것이오." 곡현은 아연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그렇다면...... 대체 남궁뢰는 왜 이와 같은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이오." 곡현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미 심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문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하셨겠군요?"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하나 곡현은 그 웃음을 보자 몹시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웃음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자신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위지명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장보도 사건이 남궁뢰의 음모가 확실하다면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경각심을 일 깨워 주는 것이 어떨까요?" 곡현이 귀여운 듯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붉게 상기된 뺨을 쓰다듬었다. "녀석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강호라는 곳의 생리(生理)는, 기보가 나타나면 사 리를 판단하기보다 먼저 손을 쓰고 보는 게 보통이다. 잘못하면 우리가 보물을 독차지하려 고 한다는 누명을 뒤집어쓸 우려만 있을 뿐이다." "......" "게다가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지 않느냐?" 석중옥은 위지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곡현을 향해 말했다. "어쩌면 남궁뢰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구에게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심장의 혈겁이 벌어진 지 벌써 십 년이 지났소. 한데 남궁뢰가 당시의 흉수였다면 십 년 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겠소?" 곡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천심장 혈겁의 진정한 원흉은 따로 있겠군요?"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오. 좀더 자세한 것은 남궁뢰를 찾아보면 알게 될 거요." 이어 석중옥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곡 노인은 곽 노인과 함께 계속 남궁검문의 귀빈으로 있으시오. 나는 소명과 함께 비무대 회를 통해 남궁뢰에게 접근할 테니......" "알겠습니다." 석중옥과 곡현은 밤늦도록 밀담을 나누었다. 그 밀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하늘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 제1권 끝 > 13 장 비무대회(比武大會) 14 장 천하호한(天下豪漢) 15 장 홍포구존(紅布九尊) 16 장 천외삼기(天外三奇) 17 장 간담상조(肝膽相照) 18 장 기관도해(機關圖解) 19 장 문무겸전(文武兼全) 20 장 쌍혈겁도(雙血劫刀) 21 장 천하구도(天下九刀) 22 장 장보도해(藏寶圖解) 23 장 지하동부(地下洞府) 24 장 마물출현(魔物出現) 제 13 장 비무대회(比武大會) 칠월(七月) 십일(十日). 남궁검문의 거대한 담장 너머로 뽀얗게 여명(黎明)이 스며드는 것으로 칠월 십일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하나 이 아침을 태고(太古)의 정적과 고요로 생각한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 아직 여명이 트기도 전인 새벽 묘시(卯時)경부터 남궁검문은 몰려드는 인파로 초만원을 이 루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내쏟는 소음은 중원의 모든 시장바닥을 합친 것보다도 더 시끄러 웠다. 비무대회(比武大會)! 드디어 그 첫날이 밝은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목욕 재계하고 백포(白布)로 검(劍)을 닦은 무인(武人)들은 햇살이 문턱을 비 추자 하나둘 경건히 몸을 일으켜 대회장인 연무광장으로 향했다. 연무광장은 남궁검문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직경 이십여 장의 거대하 고 화려한 비무대(比武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몇천이고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좌대(座臺)가 네 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동쪽에는 천방에 속한 인물들이, 서남북으로 각기 지, 현, 황방의 인물들이 따로따로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비무대의 정면은 공증인석(公證人席)으로, 그곳은 바로 오늘의 대회를 주관하는 남궁검문의 고수들과 참관인(參觀人)들이 앉는 곳이었다. 사상 최대 규모라는 이번 비무대회는 시작되기도 전부터 갖은 소문이 난무했다. 우선 비공식적인 것이기는 하나 이번 비무대회의 참가자만 해도 무려 일천(一千)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대회의 진행 시간은 아무리 못 걸려도 달포 가량이나 소요된다고 하니...... 비무 방식도 특이했다. 참가자는 누구든지 비무대 위에 올라가 다섯 명의 도전자를 물리쳐야 비로소 일차관문(一次 關門)을 통과하는 것이다. 만일 북을 열 번 울릴 때까지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을 시는 일차 관문에 통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차관문은 십오 일간 개최되며, 그 동안에 선발된 고수들이 최종적으로 무공을 겨뤄 우승 자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림에서 열리는 대소(大小) 비무대회에는 각 문파의 젊은 고수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할 뿐, 노장고수들은 참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로서는 나와서 이겨 봐야 그 렇고, 만에 하나라도 진다면 그것은 커다란 망신이니 자연 그런 대회를 기피해 왔던 것이다. 하나 남궁검문에서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 내건 조건이 무림에 상세히 알려지자 급변하기 에 이르렀다. 우승자 및 비무대회의 서열 팔위까지의 고수들에게는 비단 한백의 장보고에 동행할 수 있는 권리는 물론이고, 각기 서열에 따라 한백의 엄청난 보물들 중 세 가지씩을 골라 가질 수 있 는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무림이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젊은 신진층 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산(深山)에 은거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있던 기 인(奇人)들까지 속속들이 무림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망라된 전무후무한 참가 진 용이 갖추어진 것이다. 대회는 사시(巳時) 정각에 열린다고 했다. 아직 개회 시간을 한 시진이나 앞둔 시각인데도 장내는 입추의 여지 없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석중옥과 위지명은 황방의 인물들이 자리잡은 북쪽 차일에 앉아 있었다. "정말 굉장하군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곳에 모인 것 같아요." 위지명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중옥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결과야 어떻게 되든 천하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남궁뢰의 계획은 일단 성공 한 것 같군." 그때 위지명이 무엇을 보았는지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아! 저기 보세요, 공자님! 저 사람은 정말 신기하게 생겼군요." 석중옥은 위지명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약 오 장쯤 떨어진 곳에는 실로 기이하게 생긴 인물 하나가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호떡을 먹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삼(短衫)을 걸친 그 인물은 정말 너무도 괴이하게 생겨먹었다. 이 세상에 색(色)은 모두 몇 가지나 될까? 그것은 이 노인의 옷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옷은 과연 뭘까? 바로 이 노인의 옷이야말로 의복(衣服) 변천의 산 증인(證人)이라고 할 만했다. 도대체 그 짧은 단삼을 얼마나 기웠던지 본래의 색이 무엇인지는 두 눈을 까뒤집고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머리는 성성한 백발(白髮)이었다. 한데, 얼굴은 소년의 그것처럼 발그레하게 홍조가 도는 동안이었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한 절세미남이 아닌가! 은빛 눈썹과 그 아래 가늘게 눈웃음이 흐르는 듯한 깊은 눈을 지녀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분위기를 풍겨 내는 노인이었다. 그의 옆에서 입맛을 다시며 호떡을 먹고 있는 사람은 이제 갓 십삼사 세쯤 되어 보이는 어 린 소녀였다. 귀여운 요정이랄까? 얼굴의 반은 차지할 듯싶은 크고 검은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탐 스런 두 볼에는 보조개가 깊게 패어 있었다. 소녀는 보기에도 먹음 직한 뜨거운 호떡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녀는 무언가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느끼고 귀여운 얼굴을 돌렸다. 순간, 소녀와 위지명의 눈이 딱 마주쳤다. 소녀는 깜찍하게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위지명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지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풋!" 소녀는 그의 순진한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석중옥도 이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음을 매달았다. 위지명은 더욱 멋쩍어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위지명은 문득 한 쌍의 작고 귀여운 발이 자신의 눈 앞에 우뚝 멈춤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라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앞에 앙증맞은 두 손을 허리에 턱 대고 있는 인 영은 다름 아닌 조금 전에 호떡을 먹던 바로 그 소녀가 아닌가? 소녀는 그를 바라보며 귀엽게 웃었다. "얘! 너 왜 아까 날 봤니?" 위지명은 그녀가 설마 이토록 대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라 당황해 하며 얼굴을 다시 붉혔다. "......!" "호떡이 먹고 싶어서 그랬니?" "......!" "넌 이름이 뭐니?" 위지명의 준수한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나, 난 위지명이야." 소녀는 그런 그를 짓궂게 쳐다보았다. "넌 무슨 남자애가 그렇게 부끄럼이 많니? 어쨌든 반갑다." 소녀는 호떡을 먹던 손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위지명은 어쩔 줄 몰라 석중옥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하나 석중옥은 모른 척하며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위지명이 쩔쩔매자 손을 내밀고 있던 소녀의 커다란 눈이 샐쭉하게 찢어졌다. 소녀는 볼이 잔뜩 부어 그를 노려보았다. "왜, 내 손이 더러워서 그래?" 위지명은 더욱 당황하여 그만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말았다. "아얏!"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위지명은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이 새빨개진 채 허둥댔다. "미, 미안......" "넌 무슨 애가 그렇게도 손 힘이 좋으니? 너하고 두 번만 악수했다간 아앵(娥鸚)의 손이 박 살나겠다." 주위에서 듣고 있던 무림인들이 킥킥거렸다. 소녀는 더욱 새빨개진 위지명의 얼굴을 보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아앵아! 장난은 그만두고 이리로 오너라. 곧 대회가 시작될 모양이다." 단삼의 노인이 소녀를 손짓해 불렀다. 소녀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위지명을 바라보며 볼우물이 패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만나...... 아빠가 부르셔......" 위지명은 얼씨구나 좋다 하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휙! 소녀의 몸이 번개같이 단삼노인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본 석중옥의 눈에 번뜩 이채가 일렁였다. 소녀의 신법이 무림의 어느 일류고수 못지않게 영활했던 것이다. 단삼노인은 석중옥과 위지명을 흘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나 그 순간, 석중옥 은 그의 눈에서 칼날 같은 예리한 빛이 스치고 지나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 돌연, 둥둥둥......! 주위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시에 압도되는 커다란 북 소리가 장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 다. 즉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한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중앙에 위치한 비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두에는 백색(白色) 무복(武服)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열두 명의 백의무사들이 두 줄로 걷 고 있었고, 그들의 뒤로 눈에 확 띄는 한 쌍의 남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일남일녀. 남자는 중원에 뜬 해처럼 수려했고, 여인은 십오야(十五夜)의 달처럼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고귀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선 금동옥녀(金童玉女)와도 같았다. 즉시 장내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검룡과 옥봉이다!" "무림사공자 중 제일이라는 철검공자 남궁유룡과 천하절색인 남의옥봉 남궁혜로군!" "와아아-!" 남궁유룡은 수려하게 웃으며 장내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했고, 남궁혜는 가볍게 얼굴을 붉 히며 조용히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그들의 뒤로 네 명의 인물들이 천천히 담소하며 따라 나왔다. 황삼을 걸친 오순의 노인과 뚱뚱하고 마른 괴이한 행색의 두 노인, 그리고 중년의 백의문사 (白衣文士)였다. 그들이 나타나자 좌중에 다시 가벼운 소요가 일어났다. "저 왼쪽의 황의노인이 바로 오늘 비무대회의 주관인인 남궁뢰의 동생, 철혈검존 남궁황이 아닌가?" "그의 옆에 있는 두 노인들을 보게. 수십 년간 강호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해천쌍로 두 분이 아닌가?" "한데 제일 오른쪽의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인가? 언뜻 보기에도 철혈검존과 해천쌍로보다 더 위엄있어 보이는데......" 철혈검존 남궁황은 엷은 황삼을 걸친 채 호탕하게 웃고 있었고, 해천쌍로 곡현과 곽창, 두 기인은 예의 익살스런 모습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단아한 백삼 차림의 중년인은 부드러우면서도 여유있는 걸음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 란히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백의문사는 일견하기에도 대단히 준수한 얼굴이었으며, 한 손에는 푸른 빛이 감도는 섭선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고귀한 광택이 서기(瑞氣)처럼 흐르고 있 었고, 두 눈은 감히 마주 대할 수 없을 만큼 신비스런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백의문사의 손에 들린 섭선을 주시하며 위지명이 입을 열었다. "저 백의문사는 정말 멋있게 생겼군요. 공자님은 혹시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석중옥의 눈에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적지 않은 사람을 보고 또 보았다. 하나 지금처럼 마음이 흔들린 적은 일찍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백의중년인의 모습이 남달리 준수하고 고귀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 흐르고 있는 무형(無形)의 기도(氣度) 때문이었다. 언뜻 대해(大海)의 유유함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지더니만, 또다시 보자니 태산(泰山) 의 장중함도 서려 있는 저 기도! 바로 그때였다. "앗? 저분은 천하제일인이신 여의노사(如意老師) 백철군(白鐵君), 백 대협이시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신음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순간 장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처럼 변해 버렸다. "백 대협! 그럼 저분이 바로 여의부의 부주(府主)인 여의노사 백철군 대협(大俠)...... 바로 그 분이란 말인가?" "와아......!" 엄청난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화와 전설(傳說)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앞으로 몰려들었다. 위지명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정신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의노사(如意老師) 백철군(白鐵君)! 천하인들에게 이 이름이 주는 의미는 곧 믿음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천하의 어느 누구도 백철군을 부를 때는 꼭 대협(大俠)이란 말을 붙 인다. -그는 믿을 수 있다. -그는 철인(鐵人)이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이 시대의 초인(超人)이다. 언뜻 보면 중년 같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고희(古稀)를 넘어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며, 강호제일의 문파인 여의부의 부 주인 동시에 정파 최고의 고수인 칠대명인의 수좌(首座)에 올라 있는 일세의 대협! 이것이 바로 천하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였다. 한데 그런 그가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곳 남궁검문의 비무장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신검 남궁뢰가 그를 이번 비무대회의 공증인으로 정중히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떠나갈 듯한 함성 소리는 백철군 등이 비무대 앞에 자리한 공증인석에 도착하자 차츰 가라 앉기 시작했다. 남궁황은 해천쌍로와 백철군을 중앙의자에 안내하고 자신은 단상에 우뚝 몸을 세웠다. 이어 장내에 모인 수많은 군웅들을 한차례 쓸어보고 난 뒤, 그의 입에서 우렁찬 사자후(獅子吼)가 흘러나왔다. "다망한 중에도 본 남궁검문에 왕림하여 주신 강호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오! 본인은 남궁검문의 총관을 맡고 있는 철혈검존 남궁황이며, 금번 해천쌍로 노선배와 여의부의 백철 군, 백 대협과 더불어 감히 비무대회의 공증인을 자처하게 되었소."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중인들의 귀에 마치 벽력처럼 꽝꽝 울리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의 공력이 얼마나 정심(精深)한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미 강호제위께서 알고 계신 바와 같이 누구든 대 위에 올라 연속 다섯 판을 이기거나 북 이 열 번 울릴 때까지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일차관문을 통과한 것으로 하겠소. 십오 일간 일차대회를 열여 선발된 고수들이 도태전으로 최종 본선을 겨루는 것이 본 대회의 규 정이오. 부디 각 제위의 건승을 빌겠소." 그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곧 이어, 둥! 둥! 둥! "와아아아......!" "와아...... 드디어 시작이다!" 폭발할 듯한 환호와 어마어마한 꽹과리, 피리 소리와 함께 드디어 무림사상 가장 성대한 규 모의 비무대회가 그 막을 올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 한 줄기 흑영이 번개같이 비무대 위에 나타났다. 정말 어지간히 성질도 급한 자 같았다. 남궁황이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 인영은 비무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포권을 해보였 다. "불초는 산동(山東)의 제남(濟南)에서 온 쾌구쾌수(快口快手) 오팔(吳八)이라 하외다. 본인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뭇군웅들을 제치고 첫 번째로 오르 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제위들께서는 아무쪼록 소생을 어 여삐 보아 무사히 일차관문을 통과할 수 있게끔 협조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의 말은 어찌나 빨랐던지, 중인들은 아무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흑의장삼을 걸친 비쩍 마른 중년인, 자칭 쾌구쾌수라는 괴상한 별호의 오팔은 혼자서 신나 게 떠들어댔다. "그럼 아무도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전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북을 울리도록 하겠습니 다. 고수(鼓手)! 북을 울리게!" 그는 북을 치는 고수를 향해 성화를 했다. 고수는 엉겁결에 북을 두드렸다. 둥! 중인들은 그때까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다. 둥! 둥! 둥! 창졸지간에 북이 네 번이나 울렸다. 바로 그 순간, "멈춰라-!" 중인들이 운집한 남쪽 차일에서 한 줄기 황영이 솟구쳤다. 이어 대 위에 황의를 입은, 험상궂게 생긴 황의장한이 나타났다. 그를 보는 순간, "악, 악화봉(惡花蜂) 여문(余文)! 네, 네놈이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오팔이란 자가 악을 쓰듯 외쳤다. 황의장한은 얼굴 가득 징그런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오팔! 너 따위가 감히 수작을 부려 일차관문을 통과하려 하다니...... 지나가던 개 가 보고 웃을 일이다." 오팔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악화봉! 네놈이 죄없는 부녀자 수십 명을 간살(姦殺)한 사실은 산동 지방에서 모르 는 사람이 없거늘 무슨 염치로 이토록 많은 중인들 앞에 나타났단 말이냐? 냉큼 물러가서 목을 길게 내놓고 죄 값을 받을 준비나 하고 있거라!" 오팔이 침을 사방으로 튀기며 마구 떠들어대자, 악화봉 여문은 분기 탱천하여 오팔을 노려 보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오팔, 네놈이 이 많은 군웅들 앞에서 감히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나를 모함하다니...... 도저 히 용서할 수 없다." 중인들의 안색이 잔뜩 찌푸려졌다. 신성한 비무대회장에서 이런 행동을 하다니...... 이들은 비무대회장을 자신들의 안방으로 착각이라도 한 게 아닐까? 휙! 분노를 참지 못한 악화봉 여문이 먼저 오팔의 옆구리를 향해 맹렬한 일권(一拳)을 찔러댔다. "받아라! 이 수다쟁이 녀석아!" 오팔은 급히 좌측으로 피하며 냅다 발길질을 했다. "빌어먹을 색마(色魔) 녀석아! 본인의 원앙퇴(鴛鴦腿) 맛을 봐라!" 이어 그들은 엎치락뒤치락 결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육합권(六合拳), 태극권(太極拳) 등의 최하급 무예가 난무하고, 상스러운 욕이 비무대를 종횡으로 누비고 있었다. 장내는 완전히 폭소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래, 찔러라. 오팔! 바로 그거다." "피해, 피해. 이 멍청한 놈아!" 오팔의 태극권이 악화봉 여문의 허리에 멋지게 명중되었다. 하나 그 순간, 악화봉 여문의 오른발이 오팔의 명치를 사정없이 쑤셔박고 있었으니...... 퍽! 팍! "어이쿠......" "으헉!" 두 사람은 동시에 상대의 가격을 받고 쓰러져 버렸다. "와하하......" "푸하하......" 중인들은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다. 백의무사 두 명이 쓴웃음을 지으며 비무대 위로 올라가 두 사람을 끌어내렸다. 하나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시작된 비무대회는 갈수록 쟁쟁한 고수들이 나타남으로 해서 한 층 더 열기를 띠게 되었다. 이름없는 무명(無名)의 고수들이 강호상에 위명이 쩌렁한 고수들 을 격퇴시키는가 하면, 그 동안 무림에서 사라졌던 비장(秘藏)의 신공(神功)들이 대회 첫날 부터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위지명은 손뼉을 쳐가며 열심히 비무대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따가운 시선 하나가 그의 얼굴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조금 전에 호떡을 먹던 소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소녀는 위지명이 자신을 보자 생긋 웃었다. 위지명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쯧쯧...... 무슨 계집애가 그리도 뻔뻔스러우냐? 남자 놈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드는데도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익살맞은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소녀의 귀여운 눈이 날카롭게 찢어지며 소리가 들린 곳을 매섭게 흘겨 보았다. 순간, "도둑 할아버지!" 그녀의 찌푸려졌던 아미가 펴지며 반가움에 가득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누런 이를 드러낸 노인 하나가 히죽 웃고 있었다. 비쩍 마 른 체격에 갈의를 걸친, 가소롭게 생긴 쥐눈의 노인은 바로 무흔풍 한쾌가 아닌가! 한쾌는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의미 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요 꼬마 계집애야! 그래, 저 아이가 네 마음에 쏙 드느냐?" 소녀의 성격이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하나, 이렇게 노골적인 말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부끄럽고도 약이 올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흥! 도둑 할아버지는 나이도 많은 분이 그런 실없는 농담이나 하시다니...... 부끄럽지도 않 으세요?" 한쾌는 실낱같이 가느다란 눈으로 피식 웃었다. "꼬마 계집애야! 화가 났느냐?" 소녀는 꼬마 계집애라는 호칭에 귀여운 입술을 더욱 삐죽 내민 채 뾰로통한 얼굴로 아무 말 이 없었다. 여자는 화가 났을 때나 어리광을 부릴 때가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 뾰로통하니 화가 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소녀야말로 그 말을 여실히 증명해 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한쾌는 그 모습이 자못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요것아! 그래 진짜로 화가 났느냐?" 소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톡 쏘았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저를 그렇게 업신여기시다니......" "히히히...... 계집애야, 너야말로 말을 골라서 해라. 노부가 어떻게 너를 업신여겼단 말이냐?" "몰라서 물어요? 조금 전에 어떻게 그런 말을......" 소녀는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얼굴이 빨개지더니 발로 바닥을 찼다. "싫어요. 아무튼 도둑 할아버지는 너무 심술궂어요." "으히히히......" 한쾌는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괴이하게 웃었다. "그래 노부가 잘못했단 말이냐?" "물론이죠!" "그럼 너는 저 꼬마 놈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소녀의 자그맣고 사랑스런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소녀가 막 뭐라고 투덜대려 할 때, "한가야! 그래 잘 있었느냐?" 누더기 같은 단삼을 걸친 노인이 한쾌에게 다가왔다. 한쾌는 싱겁게 히죽 웃었다. "노부야 항상 그렇지 않나? 웬 미친 할망구랑 한동안 숨박꼭질을 했더니 다리가 다 뻐근하 구먼." 석중옥은 한쾌의 익살스런 말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한쾌도 그를 바라보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반갑군, 석 노제! 이곳에 있는 걸 모르고 한참을 찾아 다녔지 뭔가?" 석중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삼노인의 눈에서 조금 전과 같은 섬광이 어른거렸다. "아는 젊은이인가?" "길에서 만났지. 괜찮은 청년이라네." 한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단삼노인은 그가 농담으로라도 좀처럼 다른 사람을 칭찬할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 반갑네. 나는 조담(趙潭)이라고 하네."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빛났다. "이제 보니 오행수(五行 ) 조 노선배이셨군요. 석중옥이라고 합니다." 단삼의 노인! 이 괴상하게 생긴 노인이 바로 칠대명인 중에서 가장 괴팍하다는 오행수 조담일 줄이야...... 조담은 백발동안을 돌려 소녀를 불렀다. "아앵아! 이리 와서 아저씨께 인사하거라." 소녀는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핏, 남녀가 칠 세면 유별한데 다 큰 처녀의 방명(芳名)을 함부로 밝히는 법이 어디 있어 요?" 한쾌는 그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히히히...... 앵아, 이 꼬마 아가씨야! 석 노제는 너 같은 꼬마계집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 을 테니 이름을 밝힌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소녀, 조아앵의 커다란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그녀는 화가 나서 한쾌를 노려보았으나 차마 발작하지 못하고 귀여운 입만 삐죽거렸다. 그녀는 시선을 석중옥에게 돌렸다. "석 아저씨...... 정말로 앵아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난 앵아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지." 조아앵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그녀는 그것 보라는 듯 한쾌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하하하......" "껄껄껄......" 중인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위지명도 큰 소리로 따라 웃었다. 순간 조아앵이 그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아얏!" 조아앵은 그를 예쁘게 흘겨보았다. "남들은 다 웃어도 넌 웃어서는 안 돼." 위지명은 총기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조아앵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건...... 흥! 아무튼 넌 웃으면 안 돼!" 위지명은 그녀의 억지에 웃을 수도 없고 안 웃을 수도 없어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다시 중인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좀처럼 웃음을 보이지 않던 석중옥조차 이를 드러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소명이 이제야 임자를 만났군!" 위지명의 준수한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제 야 조아앵도 피식 웃으며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제 14 장 천하호한(天下豪漢) 비무대회의 열기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졌고, 갈수록 고강한 고수들이 속속 나타났다. 하나 좀처럼 일차관문 을 통과하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저녁 가까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지금 비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산서성(山西省) 제일의 고수인 금마수사(禁魔秀士) 마공필(馬 孔畢)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사승(四勝)을 거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마지막 도전자를 기 다리고 있었다. '이제 한 놈이다. 한 놈만 더 물리치면...... 흐흐......' 각진 턱에 예리한 눈을 가진 마공필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흐흐흐......" 도저히 인간의 웃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공필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본 것이다. 허공을 너풀너풀 날아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혈의(血衣)의 노인을...... "혈, 혈목잔부 도잔......"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눈처럼 흰 백발에 핏빛 혈광이 이글거리는 혈안의 소유자! 그는 바로 공포의 대살성인 혈목잔부 도잔이었다. '제, 제기랄...... 재수 옴 붙었구나...... 저 인간 백정이 하필이면 나에게 도전해 오다니......' 마공필의 얼굴은 떫은 감을 씹은 듯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거의 삼십여 장을 날아온 도잔이 이것을 보고 흉악하게 웃었다. "크크크! 어린 녀석아! 네놈은 스스로 자결을 할 테냐, 아니면 노부가 친히 손을 쓰랴?" 그의 음성은 마치 까마귀가 울어대는 듯 역겹기조차 했다. 하나 마공필은 감히 얼굴조차 찌푸리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노, 노선배께서 친히 왕림하셨으니 물론 후배 된 도리로 물러감이 예의이나...... 자리가 자 리인 만큼 후배도......" 순간, "그래? 건방진 녀석! 어디 그럼 노부의 손 맛 좀 봐라!" 도잔이 흉신악귀같이 웃으며 깡마른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의 우수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이내 붉은 핏빛을 띠기 시작했다. 바로 그의 가공할 살수 (殺手)인 혈옥마수(血玉魔手)인 것이다. 마공필의 안색이 공포로 새파랗게 질렸다. "꿀꺽!"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쥔 검자루에 힘을 바짝 돋우었다. '제기랄...... 이렇게 된 바에야 이판사판이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바로 그때, 쐐애-액! 혈목잔부 도잔의 장삼 한가운데로부터 마치 번개같은 혈광(血光) 한 줄기가 번쩍 솟구쳐 나왔다. 파파팟! 온 천지가 일시에 핏빛으로 뒤덮인 듯했다. 마공필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나, "크-아아악!" 그는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가 자신의 가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토해 냈다.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산서성에서는 누구나가 첫손꼽는 고수인 금마수사 마공필이 한 줄기 피떡이 되어 날아오름을 본 것이다. 매캐한 비린내가 비무대 위에 퍼졌다. 중인들은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모두 눈을 돌리고 말 았다. "크크크...... 하룻강아지 같은 놈! 감히 주제를 모르고 노부에게 덤벼들다니......" 혈목잔부 도잔은 징그럽게 웃으며 핏덩이로 변해 버린 마공필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중인들은 그의 비정함에 내심 치를 떨었다. 아울러 혈목잔부 도잔이 이번 비무대회에서 최 초로 일차관문을 통과하는 주인공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네가 바로 혈목잔부 도잔이냐?" 어디선가 듣는 이의 폐부를 진동시키는 굉량한 음성이 들려 왔다. 혈목잔부 도잔의 혈안(血眼)이 살기로 번뜩거렸다. "어떤 잡종이 감히 노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냐?" 그는 두 눈을 흉광으로 이글거리며 냉혹하게 소리쳤다. "바로 나다." 한 인영이 천천히 비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는 빛 바랜 흑의 차림의, 서른두서너 살 정도 돼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흑의중년인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결코 평범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길고 시커먼 눈썹, 적당한 높이로 우뚝 솟은 콧날, 각진 턱에서 풍겨 나오는 냉철하고도 강 인한 기질은 이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품인가 싶을 정도였다. 또한 태산이 솟아오른 듯 위풍당당한 구 척의 체구에 두 눈은 바닷속처럼 심유하기 그지없 었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휴...... 혈목잔부도 이젠 끝이로구나." 한쾌가 갑자기 나직한 탄식을 토해 냈다. 이것을 본 위지명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할아버지, 저 사람이 누구인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조담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란다." "누군데요?" 조담은 짤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묵운편(墨雲鞭) 사마진평(司馬眞平)!" 그렇다! 바로 이 중년인이야말로 천하제일호한(天下第一豪漢)이라는 묵운편 사마진평, 바로 그였던 것이다. 혈목잔부 도잔이 그를 바라보며 냉혹한 일갈을 터뜨렸다. "네놈은 누구인데 감히 노부에게 도전을 한단 말이냐?" 사마진평은 그 말에는 대꾸도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이 년 전에 섬서 지방을 지나다가 금의(錦衣)를 입은 중년문사를 죽인 적이 있지?" "너?" 혈목잔부 도잔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오만한 이는 본 적이 없었다. "미친놈! 아예 죽으려고 환장했군. 그렇다면 어쩔 테냐?" 순간, 사마진평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신광(神光)이 꿈틀거리며 피어올랐다. "너에게 죽은 그는 바로 나의 친구였다. 그의 묘소(墓所)에서 난 반드시 복수를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지.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 신의(信義)! 그것은 그의 생활 신조 중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목잔부 도잔은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며 비웃듯 말했다. "오냐, 네놈이 그토록 친구를 아낀다면 내가 너를 그놈의 곁으로 보내 주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 번쩍! 그의 가공할 혈옥마수가 핏빛 광채를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다. 하나 사마진평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혈목잔부는 자신의 장공(掌功)이 헛되이 허공을 가름을 느끼며 흠칫 놀라 급히 신형을 돌렸 다. 사마진평은 어느새 그의 뒤에 가서 혈목잔부 도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해서 어찌 보면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사람 같았다. "나는 먼저 그를 죽인 네 팔을 잘라 버리겠다. 그 다음에는 너의 숨통을 한 자 한 자 조여 주겠다." "미친놈......" 혈목잔부 도잔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아직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가슴이 떨려 옴을 느꼈다. 하나 그는 그것을 잊으려는 듯 포악하게 외치며 사마진평에게 덤벼들었다. "애송이 놈, 죽어라!" 가공할 혈옥마수가 다시 핏빛 혈광을 내뿜었다. 그 순간, "왼쪽 팔부터 먼저 할까?" 사마진평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옆으로 슬쩍 한걸음 비켜 섰다. 슥......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하던 혈옥마수가 간일발의 차이로 사마진평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 갔다. 그와 함께 전혀 무방비 상태의 혈목잔부의 뒷모습이 사마진평의 눈 속으로 적나라하 게 쏘아져 들어왔다. "너 따위에게 나의 친구를 잃다니......" 순간 사마진평의 우수가 환상처럼 허공을 갈랐다. 퍽! "으아악!" 왼팔이 통째로 뜯어지며 혈목잔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 단 한 수! 사마진평이 보여 준 그 한 수의 빠름을 도대체 어떻게 말로 형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결단 코 인간이 전개했다고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빠름이었다. 혈목잔부 도잔의 눈은 찢어질 듯 홉떠졌다. "너, 너는 누구냐?" 묻는 순간 그는 보았다. 엄지와 무명지가 괴이하게 구부러진 채 가운데 삼지(三指)가 칼끝처럼 세워져 자신을 향해 쏘아 오는 것을...... "다, 단봉조양(丹鳳朝陽)! 너는...... 묵운편 사마진평이구나!" 그는 비로소 상대를 알아보았으나 그로 인해 그만 피할 여유를 잃고 말았다. 뿌드득! "으악!" 그는 오른팔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피! 뽑혀진 왼팔과 오른팔에서 뿜어지는 핏줄기가 둥그런 호선을 그리며 땅바닥으로 이어졌다. 혈목잔부 도잔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양팔을 졸지에 잃어버린 채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은 한마디로 참담, 바로 그것이었다. 사마진평은 빙그레 웃었다. "혈목잔부는 두려움을 모르는 흉신악귀라고 하던데 그런 것만도 아니었군." "......" 혈목잔부 도잔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고통 중에도 몸을 떨었다. 공포(恐怖)!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토록 무서운 것인지 혈목잔부도 미처 몰랐었다. 한번 공포가 마음을 지배하자 그것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 사마진평...... 나, 나를 꼭 죽여야겠느냐?" 혈목잔부 도잔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혈목잔부는 단지 죽음의 공포에 떠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마진평은 피식 웃었다. "난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성미다." "으......" "내가 친구의 무덤 앞에서 복수를 맹세했을 때 넌 이미 죽은목숨이었다." "나, 나는 정말 그가 너의 친구인 줄은 몰랐다......" 사마진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우수를 괴이하게 오므려 가슴 높이로 들어올렸다. "너답지 않군. 잘 보아 두어라! 이것이 바로 붕소십방(鵬掃十方)이다." "아......!" 혈목잔부 도잔은 절망 어린 탄식을 토해 내더니 돌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양팔이 잘린 채 허공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고 있는 혈목잔부 도잔의 모습은 어딘지 모 르게 쓸쓸하고 공허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좋다! 내 구천(九泉)에 가면 묵운편 사마진평, 그대를 만난 오늘을 가장 재수없는 날이라 기억해 두마! 크하하하하핫......" 광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크윽!" 혈목잔부는 스스로 자신의 심맥(心脈)을 절단하고 말았다. 쿵! 그의 육중한 몸은 차디찬 시체가 되어 비무대의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혈목잔부! 부디 저승에서는 올바른 사람이 되거라." 탄식과 더불어 사마진평은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중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는 것도 잊은 듯 모두 경악과 외경(畏敬)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명 또한 두 눈 가득히 흠모의 빛을 띠며 말했다. "아! 정말 그는 소문대로 대단한 사람이군요. 천금일낙 강수서류의 전설은 거짓이 아니었군 요." 한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는 남에게 하나의 원한을 졌으면 열 배로 갚고 한 번 은혜를 입으면 백 배로 보상하지.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英雄)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데 그는 묵운편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채찍을 쓰지 않지요?"翅?..... 그것은 이렇다. 실상 그가 십 년 전 무림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그는 허리에 검은 채찍을 차고 있 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더군. 그러고도 아직까지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니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지." "아!"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의 굉장한 위력을 발출했으니 만약 채찍까지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위력을 나타낼 것이라 하여 그에게 묵운편 이란 별호를 붙여 주게 된 것이다." "아! 정말 굉장하군요." 위지명은 감탄을 연발하면서 다시 한 번 사마진평을 바라보았다. 조담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와 나를 똑같이 무림의 칠대명인으로 부르지만 무공으로 따지자면 노부에게 너무 과분한 칭호다. 그의 무공은 노부를 훨씬 능가하지." "아!" "칠대명인 중 여의부주인 여의노사 백철군, 백 대협과 신검 남궁뢰, 그리고 묵운편 사마진평 은 사실 다른 네 인물보다 한 단계 위의 고수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허명(虛名)에 불과 할 뿐이다." 한쾌가 익살맞은 얼굴에 제법 진지한 표정을 띠었다. "험! 노부는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어 비록 견문이 넓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강호에서 다섯 사람의 무공만은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지." 위지명이 궁금한 듯 급히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석중옥도 흥미를 느꼈는지 한쾌를 바라보았다. "첫째가 바로 여의부의 주인이자 당금의 천하제일인인 백 대협이지." "아!" "백 대협께선 인품이 중후하시고 도량이 넓으셔서 좀처럼 자신의 무공을 내보이지는 않지만 가히 당금의 무적고수(無敵高手)라 할 만하시다." 위지명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인물은 바로 저 묵운편 사마진평이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진학(眞學)을 펼쳐 보 인 적이 없지만, 그의 수공(手功)으로 보아 그가 만약 묵운편을 쓴다면 절대로 백 대협의 아 래가 아닐 것이다." "세 번째는요?" "음! 세 번째는 신비로 점철된 백쾌당(百快黨)의 당주(黨主)를 들 수 있지." "아! 백쾌당!" 위지명은 물론 조아앵도 뜻밖인 듯 탄성을 발했다. "도둑 할아버지...... 그가 그토록 대단한 인물인가요?" 한쾌는 싱겁게 웃었다. "대단한 건 둘째 치고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정체를 모르니 그의 무공 또한 알 수가 없지 않느냐?" "에이...... 난 또 뭐라고......" "으헤헤헤...... 요 꼬마 계집애야! 그렇지만 당금 백쾌당의 세력이나 힘으로 보아 그들의 수 뇌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대단한 인물인지도 모르지." 조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사실 당금 무림에서 백 대협의 여의부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백쾌당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그들의 우두머리가 어찌 대단하지 않겠느냐?" 한쾌는 제법 진지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네 번째 인물은 구대흉인(九大兇人) 중의 제일인자인 혈천노조(血天老祖) 구양중(歐陽重) 노마(老魔)이다." "혈천노조 구양중?" 순간, 석중옥의 눈빛에 한 줄기 괴이한 기광이 번뜩였다. 하나 그것은 너무도 빨리 스쳐 지 나갔는지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쾌는 흥이 나는지 입술에 살짝 침을 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파의 구대흉인은 정파의 칠대명인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가공할 고수들이다. 그 중 에서도 특히 구양노마(歐陽老魔)는 백철군 대협에 능히 비견될 만한 불세출의 대마두(大魔 頭)이다." "아!" "그는 십 년 전부터 무림의 일에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하나 그의 둘째 제자인 독조(毒 爪) 형곤(荊坤)이 같은 구대흉인에 속해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가 있지. 내가 듣기로는 그의 대제자인 고천악(古天岳)은 형곤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강 한 인물이라는구나." 위지명은 거듭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런 대단한 인물이 왜 아직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것은 고천악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로 그는 혈천 노조 구양노마의 곁에서 일 리 이상 떨어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위지명과 조아앵은 한쾌의 말에 그저 넋을 잃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새삼 무림의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고천악만 해도 강호무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데 그런 인물이 구대흉인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독조 형곤의 대사형일 뿐 아니라 그보다 최소한 두 배는 고강한 고수라니...... 그렇다면 그들의 사부인 혈천노조 구양중은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그때 지금껏 묵묵히 있던 석중옥이 입을 열었다. "한 노인께선 혹시 혈천노조의 제자가 전부 몇 명인지 알고 계시오?" 한쾌는 지금까지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나 관심도 보이지 않던 석중옥이 난데없이 엉뚱 한 물음을 던지자 내심 의아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알고 있기로는 고천악과 형곤, 두 사람뿐이네." "고천악의 나이는 몇 살 가량 됐습니까?"蚌?..... 한 사십쯤 됐을걸...... 한데 무슨 일인가? 그 를 본 적이라도 있나?" 석중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한쾌는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석중옥이 더 이상 대답하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도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위지명이 주위의 공기가 약간 어색함을 느끼고 총기있게 물어 왔다. "그럼 다섯 번째 인물은 누구예요?" 한쾌는 그런 위지명이 귀엽다는 듯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누구일 것 같으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는 가깝다면 아주 가깝고 멀다면 하늘 멀리 있는 사람이지." "엥? 그렇다면......" 위지명과 조아앵은 놀라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한쾌는 히죽 웃으며 그의 머리통을 톡 건드렸다. "녀석아! 그는 바로 석 노제이다." 석중옥은 움찔했다. 하나 그는 곧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한 노인께선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한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노부가 비록 장난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실없이 허언(虛言)만 일삼는 사람은 아니 네. 자네는 확실히 노부가 처음 보는 뛰어난 젊은이일세. 무공도 그렇지만 내력 또한 아주 신비스럽거든. 자네의 사문은 도대체 어디인가?" "......" 석중옥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위지명이 따라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헤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공자님이야말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무공을 지니신 분 이세요." 위지명의 말에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그들 중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한쾌조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중옥 이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위지명이 어떤 아이인데 이 눈치를 모르겠는가?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노신선께서도 강호에서 공자님의 무공을 삼(三) 초(招) 이상 당할 사람이 없다 고 말씀하셨어요." 석중옥이 급히 눈짓으로 위지명을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순간 한쾌는 눈을 빛내며 급히 물었다. "꼬마야! 노신선이 누구냐?" 위지명은 아차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저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요." 한쾌가 아무리 타일러도 위지명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아앵이 나섰다. "소명, 그러지 말고 노신선이 어느 분인지 말해." "안 돼!" "그럼 나에게만 살짝 말해 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안 된다니까." 위지명은 요지부동이었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다른 건 다 돼도 이건 안 돼!" "정말이야?" "그래." 순간 조아앵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좋아! 앞으로 너하곤 다시는 말하지 않겠어." 조아앵은 싸늘하게 말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위지명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나 그렇다 고 노신선의 정체를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것을 본 한쾌와 조담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대체 그의 사문이 무엇이기에 저 아이가 저토록 입을 다물고 있을까?' 그들은 비록 궁금했으나 이런 일로 화를 낼 정도로 속이 좁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쾌가 껄껄 웃으며 조아앵을 달랬다. "히히...... 계집애야! 아서라.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저 꼬마 놈이 정말 화가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조아앵은 그래도 뾰로통해서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위지명의 얼굴은 아주 울상이 되었다. "아, 아앵! 나는......" "흥! 너하곤 일없어." 조아앵은 입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위지명은 어쩔 줄을 몰라 손만 비비고 있었다. 이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 중인들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허허허......" 그제야 조아앵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둥! 둥! 둥! 열 번의 북 소리가 울리며 묵운편 사마진평이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차관문을 통과했 음을 알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이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의 어떤 미친 작자가 감히 사마진평에게 도 전해 올 수 있단 말인가? 조아앵과 위지명은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그때 휴회 시간을 알리는 북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오늘의 비무대회는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오늘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묵운편 사마진평, 한 사람뿐이었다. 하나 그는 불가일세의 고수인지라 중인들은 어느 누구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시끄럽게 떠들며 비무대회장을 벗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사마진평에 관한 것 들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 준 놀라운 신위(神威)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 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제 15 장 홍포구존(紅布九尊) 석중옥과 위지명은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자신들의 거처인 황방 천이백육십호로 향하고 있 었다. 그들이 후원을 막 지날 때였다. "하하하......!" "호호호......!" 맑은 웃음 소리와 함께 한 떼의 남녀들이 그들의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남삼녀(二男三女). 임풍옥수(臨風玉樹)와도 같은 준수한 청년 두 명과 절세의 미모를 자랑 하는 세 명의 아리따운 낭자들이었다. 각기 황의와 청의를 입은 두 청년은 철검공자 남궁유룡과 혈전공자 당욱이었다. 그리고 세 명의 여인은 다름 아닌 철비연 유백령과 남의옥봉 남궁혜, 그리고 백의를 걸친 미녀였다. 한데 백의미녀를 보는 순간, 석중옥과 위지명은 굳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백의미녀의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칠흑 같은 머리칼은 폭포수처럼 등뒤에 늘어져 있었으며 전신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이 넘쳐 흘렀다. 그녀의 전신을 휘감으며 늘어진 백의는 마치 하강한 선녀의 옷자락을 방불케 하며 펄럭였 고, 그 백의만큼이나 하얀 피부가 이리저리 굴곡을 이루며 형성해 낸 용모와 몸매...... 도대체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성결하도록 정갈한 이마 아래, 곱디고운 능선을 그리는 아미(蛾眉), 맑고 영롱하며 서늘한 눈망울, 옥석(玉石)의 조각인 양 모양 좋은 콧날, 촉촉이 물기 머금은 입술......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이었다. 석중옥은 지금까지 노연홍, 임소군, 유백령, 남궁혜 등 적지 않은 미녀들을 보아 왔지만 그 녀만한 아름다움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이남삼녀가 모두 뛰어났지만 오직 그녀만이 홀로 걷는 듯 돋보였다. 석중옥이 여태껏 본 여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임소군이었다. 하나 미(美)만을 논한다면 백의미녀는 능히 임소군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기 장점이 있었다. 임소군에게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귀한 기질과 국화와도 같은 여인의 농염함이 있 다. 그에 비해 백의미녀에게는 폭발하는 듯한 아름다움과 함께 싱싱한 젊음이 느껴졌다. 석중옥은 내심 가슴이 진동함을 느꼈다. 하나 그는 역시 천고(千古)의 기재(奇才)답게 곧 자 신의 실태를 깨닫고 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런! 나답지 않군. 한낱 여인의 미태(美態)에 정신을 잃다니......' 그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위지명을 바라보았다. 위지명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녀석! 뭘 보고 있는 거냐?" 그제야 위지명은 퍼뜩 정신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에요." 석중옥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석 공자님!" 바로 그때, 반가워하는 여인의 옥음이 들려 왔다. 유백령이 석중옥을 발견하고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석중옥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셨소, 유 소저?" 유백령은 얼굴을 요염하게 붉히며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석 공자께선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시겠어요?" "글쎄...... 생각 중이오." 유백령은 잘되었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석 공자께서 참가하신다면 충분히 최종전(最終戰)에 선발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남궁유룡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척을 했다. "석 형! 안녕하시오?" 석중옥도 마주 인사를 했다. 남궁혜는 얼굴 가득 노을 같은 홍조를 띠며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호호...... 혜매는 너무 수줍움울 타서 탈이야......" 유백령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당욱은 거만하게 고개만 까닥거릴 뿐이었다. "오랜만이오."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본 당욱의 눈이 쭈욱 찢어지며 두 눈 가득 살기가 빛났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진 것을 느낀 남궁유룡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소생이 석 형께 한 분의 절세미인을 소개해 드리겠소. 인사하시오. 여의부의 천금 (千金)이신 백상아(白霜娥), 백 낭자시오." 그 말을 듣고서야 석중옥은 그녀의 미모가 왜 그렇게 뛰어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백상아의 별호는 천중일미(天中一美)였다. 하늘 아래 다시없는 미인이란 뜻이었다. 그녀는 여의노사 백철군의 외동딸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미인(天下第一美人)이었다. 그리고 오늘, 석중옥은 여인으로서 이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그녀에 대한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백의미녀, 백상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석중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소생은 석중옥이라 하오." 석중옥의 음성에는 별다른 억양의 고저가 없었다. 어찌 보면 무뚝뚝할 정도로 담담한 태도 였다. "반가워요. 백상아라고 해요." 백상아의 얼굴에 한 줄기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평생, 이와 같은 특이한 기질을 풍기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고, 허름한 흑의에 오른쪽 허리에는 녹슨 철검 한 자루를 달랑 매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 몹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 다. 그것은 그녀 혼자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유백령과 남궁혜 등 지금까지 석중옥을 만난 많은 여인들이 그의 특이한 기질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느낌이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석중옥은 담담히 목례를 했다. "다른 볼일이 없다면 본인은 이만 실례하겠소." 이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위지명이 뒤를 돌아보며 그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갔다. 중인들은 모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모두가 멍청한 가운데 혈전공자 당욱이 분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저자의 정체가 뭐기에 저토록 오만하단 말이오?" 유백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니 어디 당 공자가 한번 알아봐 주시겠어요?" 당욱은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내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무슨 관심이 그토록 많소?" "그의 정체보다는 그의 마음이 소중한 것일 거예요. 더구나 석 공자께서는 소녀의 위기를 한 번 구해 주신 데다가 군자(君子)의 풍모가 있으니까요." 혈전공자는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유백령의 말은 매우 교묘하게 그를 면전에 두고 깔본 것이었다. 그렇다고 따지고 든다면 그 것은 그야말로 소인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이 되어 혼자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백상아는 멀어져 가는 석중옥의 훤칠한 뒷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남궁유룡의 심유한 눈에서도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비무대회 둘째 날, 석중옥은 한쾌 등과 만나 북쪽 차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무대회는 첫째 날보다 더 격렬해졌다. 어제 등장했던 삼류급 무사들은 이제 거의 등장치 않고, 그야말로 강호무림의 절정고수들만 이 나타나 실력을 겨루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열띤 경쟁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성원도 훨씬 더 극심했다. "와아-!" "와아- 와-!" 지금 비무대 위에 있는 인물은 엷은 비단남의를 미풍에 펄럭이며 우뚝 서 있는, 준수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무림사공자 중의 일인인 금도공자 전붕비였다. 그의 가 슴에 새겨진 금도 문양이 찬란한 햇빛을 받아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사승(四勝)을 거둔 후였다. 파면혈수(破面血手) 유무흔(柳無痕), 목편자(木鞭子) 풍림(馮臨), 광풍독행(狂風獨行) 천가휘 (千嘉輝), 혈월도(血月刀) 서문제(徐門堤) ......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물리치고 이제 일차관문의 마지막 고비를 남기고 있는 것이 다. 마지막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일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당당한 것이었다. 둥! 둥! 둥! 도전자를 기다리는 북 소리가 세 번 울려 퍼질 때였다. "크하하하하......" 미친 듯한 광소가 터지며 남쪽 차일에서 한 인영이 폭사해 나왔다. 그 인영의 신법은 너무도 특이했다. 무릎 관절을 조금도 구부리지 않고 상체와 하체를 꼿꼿 이 편 채 거의 삼십여 장을 날아온 것이다. 흡사 강시( 屍)가 걷는 듯한 이 괴이한 경공신법에 장내에서 한바탕의 소동이 일어났다. "아...... 고목신군(枯木神君)이다." "성숙해(星宿海)에 있다는 저 노마두가 죽지도 않고 나타나다니......" "과연 금도공자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나타난 인영은 한마디로 괴인 중의 괴인이었다.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나무인간 같다고나 할까...... 일신의 옷은 싯누런 황의였고, 얼굴이며 팔과 목 등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모조리 나무 껍질을 보는 듯했다. 만약 괴괴하게 빛나는 두 눈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목상(木像)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은, 그런 모습의 괴인이었다. 그가 바로 성숙해 일대를 주름잡는 희대의 살성(殺星), 고목신군(枯木神君) 우천(宇踐)인 것 이다. 고목신군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흉소를 띠며 전붕비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애송이 놈! 살고 싶다면 어서 무릎을 꿇고 패배를 시인한 다음 물러가거라." 전붕비는 준수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고작 그런 말을 하러 이곳에 왔소?" 순간, 고목신군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진 나뭇조각같이 변해 버렸다. "죽일놈!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전붕비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항상 싸우기 전에 그렇게 떠드는 버릇이 있소?" 고목신군은 말로는 도저히 그를 당해 낼 수 없음을 느꼈음인지 눈을 흉악하게 빛내며 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흐흐흐...... 네놈이 본좌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렇소. 당신이 저승에 간다면 틀림없이 나와 다른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거요." 전붕비의 얼굴에는 추호도 두려운 빛이 없이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얼굴에는 햇살 같은 미소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훤칠한 키에서는 자 신만만한 산악 같은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쉽게 볼 놈이 아니군...... 하나 본좌에게 걸린 이상 네놈도 끝장이다......' 고목신군 또한 성숙해를 주름잡는 절정고수!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자 치솟았던 혈 기를 일시에 다스리며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것은 실로 순간의 일이었다. 고목신군은 전붕비의 빈정거림에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전붕비는 내심 감탄했다. '과연 성숙해를 삼십 년간이나 석권한 것이 허명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군.' 하나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다시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그렇게 썩은 나무토막처럼 서 있을 거요?" "흐흐...... 애송이 놈! 시시한 격장지계(擊將之計)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곧 노부가 절세신공 (絶世神功)의 참맛을 보여 주마." 고목신군은 한차례 발을 구르고 자세를 갖추었다. 순간, 후우웅...... 사위의 공기가 무섭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고목신군의 전신에서 가히 패도(覇道) 무쌍(無雙)한 기운이 발산되는 것이었다. 전붕비는 지금까지의 장난스런 태도를 버리고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전신은 온통 허점투성이였다. 하나 그런 자세는 오히려 고목신군으로 하여금 쉽사리 공격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 한동안 팽팽한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장내는 무서운 긴장을 함유한 적막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타아앗!" 한 순간, 고목신군이 괴이하게 양팔을 비틀며 쌍장을 격출했다. 꽈르르- 뇌성이 치는 듯한 파공성이 일며 가공할 경기가 쏘아 갔다. 고목신군의 성명절기(聲名絶技)인 고목신강(枯木神 )이었다. 전붕비는 두 눈을 번뜩이더니 강력하게 쌍장을 내뻗어 고목신군의 경기를 맞받아 갔다. 우-우-웅! 두 경기가 충돌하면서 엄청난 기화를 피워올렸다. 콰콰- 쾅! 천번지복(天蒜地覆)의 대폭음이 일었다. 위-이-잉! 사위의 기류가 무섭게 회오리치며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 가운데, 쿵쿵...... 고목신군은 엄청난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상당한 깊이의 족인(足印)을 남기며 두 걸음 물러 섰다. 반면 전붕비는 상체를 휘청거렸을 뿐 촌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와아아!"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공력의 고하(高下) 결과, 뜻밖에도 전붕비가 우세한 것이다. 하나 고목신군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더니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쌍장을 뻗었다. 꽈르르-! 폭풍처럼 몰아치는 경기. 순간 전붕비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찰나, 스슥! 그는 어느새 장력(掌力)의 전권(戰圈)을 벗어나 십 장 높이에 신형을 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십지(十指)가 섬전처럼 튕겨졌다. "비파산지(琵琶散指)!" 십여 가닥의 가공할 강기가 쏘아져 나갔다. 고목신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전신의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을목강기(乙木 氣)!" 순간, 허공에서 전붕비의 낭랑한 소성이 울렸다. "하하하...... 비파산지는 호신강기 파해기공(破解氣功)의 최고봉이다. 따금한 맛을 보여 주 지!" 파파파! 괴이한 타격음이 일며 고목신군의 비쩍 마른 몸이 서너 차례 격렬하게 진동했다. "윽......" 그의 안색에서 실낱 같은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바로 이 순간, 을목신강의 무서움이 발휘되었다. 우두두둑! 곧 쓰러지려는 듯 위태롭던 고목신군의 신형이 실로 기이하게 덩굴처럼 뒤틀리더니 이어 관 절과 관절이 모두 거꾸로 꺾이며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급격히 경기가 폭출되었다. 위이이-이이-잉! 그것은 나선형의 강기였다. 휩쓸리면 쇳덩이라 해도 날아갈 것같이 무시무시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끝없이 일어났다. 전붕비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번쩍였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목신군이 격출한 나선형 경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파파파-! 허공에서 현란한 불꽃이 튀어올랐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극히 찰나지간, 정지할 듯 멈칫하던 전붕비의 신형이 곧 가공할 속도 로 나선형 경기 속을 꿰뚫었다. 파-아-앙! 거의 동시에 그의 우수가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쌔애액-! '헉!' 전혀 의외였으리라. 고목신군이 전붕비의 상궤(常軌)를 완전히 벗어난 역습에 놀라 급히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윽!" 어느새 목에 닿아 있는 싸늘한 감촉, 그것은 전붕비의 수도(手刀)였다. 그의 손은 푸르스름 한 빛을 띠고 있어 청옥(靑玉)으로 깎아 만든 듯이 아름다워 보였다. 하나 고목신군에게는 그 푸르스름한 손이 더없이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전붕비는 고목신군의 목에 손을 댄 채 엷게 웃고 있었다. "고목신군! 지금은 그대가 패배를 시인해야 될 때인 것 같은데......" "......!" 고목신군의 나무껍질 같은 안색이 검붉게 상기되었다. 중인들은 아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설마 청해(靑海) 일대에서 염라 대왕보다 도 살명이 자자한 고목신군이 이토록 간단히 패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나 조금 전 그들이 본 전붕비의 무공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눈부신 것이었다. 한데 이때였다. "크아악!" 돌연 고목신군이 처절한 비명과 피화살을 동시에 내뿜으며 무참히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전붕비의 무릎이 그의 복부를 강타해 버린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목신군은 패배를 인정하기는커녕 전붕비가 손을 거두는 틈 을 타 무서운 암습을 가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간격은 불과 일보(一步)도 채 안 될 지척지 간이어서 고목신군은 자신의 암습이 성공하리라고 자신했으리라. 하나 전붕비는 그의 눈빛에 스치는 살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단전(丹田)을 향해 차 올라오는 고목신군의 다리를 발바닥으로 막은 다음, 그 탄력을 이용하여 무릎으로 고목신군의 복부를 내질러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신준구제(神駿驅蹄)라는 극히 평범하고 간단한 초식이었으나, 전붕비에게서 전개되자 가히 개세(蓋世) 무쌍(無雙)의 위력을 발휘했다. 쿠쿵...... "으으!" 고목신군은 십여 장 밖에서 나뒹굴었다. 그는 곧바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와아아!" "최고다! 전붕비!"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린 중인들이 폭죽 같은 환호를 터뜨렸다. "야아-!" 위지명과 조아앵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신이 나서 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잘생긴 전붕비 가 이기기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전붕비는 최초로 다섯 명의 도전자를 물리치고 일차관문을 통과한 인물이 되었다. 한쾌가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제법인데...... 얼굴만 번지르르한 줄 알았더니 무공이 굉장한데 그래. 한데 저놈이 고 목신군을 제압할 때 사용한 무공이 무엇인 줄 아나?" 조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푸르스름한 청광(靑光)을 띤 것으로 보아 화산(華山)의 죽엽수(竹葉手) 같기도 하 고...... 강기막을 찢는 그 위력으로 보아 무당(武當)의 십단금(十段錦) 같기도 한데...... 도무지 모르겠구먼." 바로 그때, "그것은 쇄옥수(碎玉手)라는 기공입니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석중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쾌와 조담의 눈이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쇄옥수?" "이미 절전(絶傳)된 지 이백 년이 지난 것으로, 강기( 氣)를 두부처럼 베어 버리는 가공할 무공이지요." 석중옥은 비록 그들의 의문은 풀어 주었으나,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 켰다. "자네는 저 금도공자의 신분 내력을 알고 있나?" 한쾌가 쥐눈을 반짝 빛내며 급히 물었다. 석중옥은 약간 망설였으나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누구의 문하인가?" "그건 말할 수 없군요." 이 말에 한쾌와 조담은 맥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금도공자 전붕비는 내력이 신비해 무림에서는 아무도 그의 사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 데 석중옥이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할 수가 없다니...... "제기랄...... 자네는 무슨 비밀이 그리도 많은가?"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는 두 분 노인에게 말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 그게 언젠가? 혹시 노부의 장례식 날이 아닌가?" 한쾌가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석중옥은 고소를 머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데 자네는 그의 사문을 어떻게 알고 있나?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조담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그의 무공을 보고 내력을 짐작했을 뿐입니다." "젠장...... 노부는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는데 자네는 한번 보면 척이라...... 이거 약올라서 살 겠나?" 한쾌는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연신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노부도 앞으로는 누가 물어 보면 일체 대답을 안 해야겠네. 그래야 신비스럽 게 보일 게 아닌가?" 조아앵이 눈을 장난스럽게 빛냈다. "그게 정말이에요, 도둑 할아버지?" "그렇다, 이 꼬마 계집애야. 그러니 너도 이젠 노부에게서 무엇을 얻어 들을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한쾌는 침까지 튀겨 가며 자신의 각오를 다졌다. 조아앵은 귀여운 아미를 상큼히 찌푸리며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어떡하지, 그럼......? 도둑 할아버지에게 꼭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한쾌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계집애야! 그게 무엇이냐?" "말하면 뭐 해요? 어차피 할아버지는 알려 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조담이 옆에서 나섰다. "아앵아! 그게 뭐냐? 내게 가르쳐 주면 안 되겠니?" 조아앵은 두 가닥으로 머리를 땋아 내린 작고 귀여운 얼굴을 옆으로 내저었다. "안 돼요. 말해도 다른 사람은 모를 거예요. 오직 도둑 할아버지만이 대답해 주실 수 있는 건데......" 한쾌의 얼굴에 조바심이 가득했다. 그는 입이 간지러운 듯 자신의 입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하나 그렇다고 자신이 조금 전 철석같이 큰소리를 쳐놓고 이제 와서 그것이 무어냐고 물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조아앵...... 저 꼬마 계집애가 궁금해 하는 것이 뭘까? 답답해서 미치겠구나......' 그는 조아앵이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석중옥과 조담은 이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 조아앵은 그들을 뾰로통하니 쳐다보며 귀여운 입을 삐죽거렸다. "무엇이 우스워요? 나는 지금 궁금한 것을 물어 볼 사람이 없어 답답해 죽겠는데......" '요 여우 같은 계집애야! 답답해 죽을 사람은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나!' 그때 위지명이 결정적인 말을 했다. "할 수 없다, 아앵아! 저쪽에 내려가서 말을 해줄 만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 "응. 어쩔 수 없지, 뭐! 도둑 할아버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아무리 물어 봐도 말 해 주지 않을 거야......" 조아앵은 위지명을 따라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아이쿠! 내가 졌다, 졌어!" 한쾌가 손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을 막았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조아앵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한쾌는 그녀가 너무도 얄미워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나 그는 짐짓 점잖은 웃음을 지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헛헛...... 앵아야! 조금 전에 노부가 한 말은......" "본심이 아니었다, 이거죠?" "그, 그래...... 과연 너는 똑똑하기 그지없는 아이구나. 노부가 잠시 장난을 쳐본 것에 불과하 다. 그러니......" "그러니 나보고 무엇이 궁금한지 물어 보라, 그 말씀이지요?" 조아앵은 생글생글거리며 말했다. 한쾌는 속에서 부글부글 열이 끓어올랐으나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너는 노부의 마음을 잘 아는구나. 헛헛헛......" 하나 그의 웃음은 어색하기 그지없어 보는 이의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하하하......" "호호호......" 조아앵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탐스런 입술을 놀려댔다. "앞으로는 그런 지키지도 못할 말은 하지 마세요. 도둑 할아버지는 손을 쓰고 입을 놀리는 게 가장 큰 낙(樂)이잖아요?" 한쾌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으이구! 알았다, 이 꾀보 아가씨야! 그래, 네가 묻고 싶은 게 뭐냐?" 조담과 석중옥도 흥미가 일어 그녀의 입을 주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오늘 아침에 저는 남들보다 약간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도 아시다시 피 저는 원래 남들보다 부지런하잖아요?" '그건 부지런한 게 아니라 네년이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서 조 늙은이 몰래 이곳저곳을 기 웃거린 거겠지, 이 계집애야!' 한쾌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만면에 춘풍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앵아가 부지런한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 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것을 칭 찬하더구나." "맞아요, 할아버지! 그러니 할아버지도 도둑질만 하시지 말고 저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 책이라도 좀 하세요." 조아앵이 종알거리자 한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간 알밤이라도 한 대 올릴 것 같아서였다. '으이구! 내가 너 때문에 마른다. 너 때문에......' 한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아앵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제가 막 현방(玄房)의 근처를 지날 때였어요. 전 아주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보게 되었어 요." 한쾌는 조금 전의 울분은 씻은듯이 잊어버리고 급히 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긴 작자들이었느냐?" "아이, 참! 제가 말할 때는 끼여들지 마세요. 어차피 차근차근 말할 테니......" "그, 그래......" 중인들은 한쾌가 조아앵에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조아앵은 한쾌의 약을 올리려고 작정을 했는지 그가 조금만 뭐라 해도 영락없이 트집을 잡 았다. "도둑 할아버지, 제 곁에서 좀 떨어지세요. 침이 자꾸 제 머리에 튀잖아요." "오, 오냐......" "할아버지......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세요. 무서워서 나오던 말이 도로 들어가 버리잖아 요. 좀 웃으세요." "그, 그러지...... 힛힛힛......" "할아버지, 웃음이 그게 뭐예요? 징그러워 죽겠어요. 좀더 품위와 체통을 지키세요." "아, 알았다." 투덜투덜...... 토달토달...... 그녀의 주문은 끝이 없었고 한쾌는 자신이 심장 마비로 죽지 않는 것이 신통할 지경이었다. '아이구...... 저 여우 같은 계집애가 전생에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한쾌의 얼을 쏙 뺀 후에야 조아앵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그자들의 생김새를 말할 테니 그들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세요." "알았다......" "그들은 아주 살벌하게 생겼어요. 모두 아홉 사람인데...... 전신에는 붉은 피풍을 걸치고 머 리에도 붉은 혈건(血巾)을 둘렀어요. 그뿐이 아니라 안색이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하기 지없 었고...... 또...... 음......! 각기 다른 무기를 쓰고 있었어요." 한쾌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들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 "아무튼 각기 달랐어요. 어떤 사람은 창(槍)을 들고 있었고 른 사람은 부(斧)...... 또 필 (筆)...... 극(戟)...... 선(扇).... 검(劍)...... 도(刀)...... 하여간 이 정도예요." 한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혹시 그들이......' 그는 급히 조아앵에게 물어 보았다. "혹시 그들의 가슴에 검은 꽃이 새겨져 있지 않았더냐?" 조아앵은 그의 어조가 예상외로 심각한 것을 알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검은 꽃......? 그래요, 이제 생각하니 그들은 가슴에 흑화(黑花)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 었어요. 꼭 장미 같은......" "음......" 한쾌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조담이 급히 물었다. "한 늙은이...... 그렇다면......" 한쾌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네. 그들은 홍포구존일세." "아! 그 희대의 살성들이 다시 나타나다니......" 조담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아앵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할아버지, 홍포구존이 누구기에 그러세요?" "음...... 그들은 실로 무서운 인물들이다. 무림에 나타나지 않은 지 벌써 십여 년이 됐지." 홍포구존(紅布九尊)! 그들은 석년에 단지 이름만으로도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던 가공할 살수(殺手)들이었다. 그들은 가히 죽음의 대명사라 할 만했다. 무림인들에게 홍포구존이 주는 의미는 곧 죽음이 었다. 이들에게 지목된 자는 죽음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이들의 살수를 벗어 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살수의 신화(神話)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그 동안 신비스럽게 사라져 많은 무림인들을 안도케 했던 그들이 결국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당년에 그들의 손에 죽어 간 무림고수만도 수백 명이 넘었다. 당시 여의노사 백 대협께서 그들의 혈겁을 보다못해 그들을 척살(擲殺)하러 나섰고, 그들은 그 소문을 듣고 무림에서 자 취를 감추어 버렸지. 한데 그들이 다시 이곳에 나타나다니...... 설마 누구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구나." 한쾌의 음성에는 심각한 빛이 역력했다. 조아앵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어요. 연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정말 무시무 시하게 생겼더라구요." 한쾌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뜩이나 한백의 장보도로 인해 살벌해진 무림에 그런 살인마(殺人魔)들까지 다시 나타나 다니...... 큰일이로군." 그의 어조에는 진실로 무림을 걱정하는 빛이 가득했다. 비록 장난이 많고 익살과 해학으로 세상을 사는 그였으나, 무림을 사랑하고 아끼는 의협심 (義俠心)만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석중옥은 그런 그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좋았다. 가식없는 그의 웃음이 마음에 든 것이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네 이놈! 감히 본 낭자가 올라왔는데도 내려가지 않고 서 있는단 말이냐?" 온 비무대가 떠나갈 듯한 엄청난 고함이 들려 왔다. 석중옥을 비롯한 중인들은 깜짝 놀라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비무대 위, 실로 해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시커먼 얼굴에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뚱뚱한 체격의 노파 하나가 한 중년인의 멱살을 잡 고 호통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오색의 채의를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한 뚱보노파! 바로 전낭자 호파파가 아닌가! 그녀에게 멱살을 잡힌 중년인은 호남(湖南)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흑살장(黑煞掌) 주패(周覇)란 자였다. 호파파는 침까지 튀겨 가며 주패의 멱살을 움켜쥐고 마구 떠들어댔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감히 본 낭자의 옥용을 보고도 비무를 하겠다고 나서다니...... 네 놈은 혹시 눈깔이 삔 것 아니냐?" 그러면서 그녀는 주패의 눈을 진짜로 쿡쿡 찔러 보는 것이 아닌가! "크윽!" 주패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으나 호파파의 손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날도둑같이 생긴 놈! 네놈의 상판을 보니까 일전에 본 낭자에게 수작을 부리다 도망친 그 도둑고양이같이 생겼구나.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녀는 주패의 몸을 마치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천방지축 같은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가공할 무공 앞에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주패라면 그래도 한가락하는 고수인데 그녀의 손에서는 어린아이 처럼 꼼짝도 못하고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쾌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에서 침을 튀겼다. "저 미친 뚱뚱보 할망구가 노망이 났나? 감히 노부보고 도둑고양이라니...... 그러는 넌 뚱보 돼지다, 이 미친 할망구야......!" 중인들은 한쾌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호파파는 한참 조패를 가지고 놀다가 그를 발로 냅다 차서 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앞으로는 본 낭자를 보거든 죽은 네 할머니를 만난 듯 섬겨야 한다, 이놈아!" 그녀는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비무대의 바로 밑에 있는 사람들은 퍼부어 지는 그녀의 침을 피하느라고 급히 자리를 옮겨야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무공만은 인정하는 터여서 아무도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둥! 둥! 둥! 둥......! 결국, 북이 열 번 울리고 그녀는 뚱뚱한 몸을 으스대며 일차관문을 통과한 인물들이 앉은 좌석으로 걸어갔다. 한쾌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탁 치며 탄식을 토해 냈다. "아이고! 말세로군, 말세야! 저런 미친 할망구도 보물을 찾겠다고 이런 곳에 나오고...... 저 거들먹거리는 모습 좀 보게. 영락없이 삶은 통돼지 아닌가?" 조아앵이 웃으며 조잘거렸다. "그렇게 그녀가 마음에 안 들면 조금 전에 올라가서 혼을 내주지 그랬어요?" 한쾌는 말도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둘렀다. "아이고! 그런 말 말아라, 이 계집애야! 저 육중한 몸을 봐라. 이 늙은이가 덤볐다가는 아예 뼈도 못 추리고 작살이 날 것이다. 그저 저런 뚱보 할망구는 우리 조 늙은이같이 멋있고 힘 좋게 생긴 영감이 꽉 눌러 주는 수밖에는......" "꽉 눌러 주는 게 뭔데요?" 위지명이 궁금한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그, 그건...... 저......" 한쾌가 머뭇거릴 때, "넌 그런 거 몰라도 돼!" 조아앵이 얼굴을 약간 붉히며 위지명에게 톡 쏘아붙였다. 위지명은 뭐가 뭔지 몰라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에구...... 저런 바보! 그런 것도 모르고...... 하긴...... 알고 있다면 더 나쁜 놈이지......' 조아앵은 내심 투덜거리며 밉지 않게 위지명을 흘겨보았다. 제 16 장 천외삼기(天外三奇) 그들이 이렇게 토닥거리고 있을 때, 비무대 위로 체구가 우람한 중년인 하나가 천천히 올라 섰다. 그는 구레나룻이 무성한 흑의중년인이었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는 무시무시한 신광이 번뜩이고, 쩍 벌어진 어깨와 허리에는 넘치는 패기가 들끓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무대의 정중앙에 나와 두툼한 입술을 열어 일성을 토해 냈다. "본인은 비환유문의 사환(四環) 중 셋째인 철환(鐵環) 유자량(劉子良)이라고 하오. 강호제위 들의 도전을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소." 그의 사자후가 터지자 장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아! 저 사람이 바로 비환유문에서 문주인 탈혼무적환 유종에 버금간다는 철환 유자량이군!" "과연 호탕하게 생겼군." "철환은 비환유문에서 최고의 고수인데 어떤 미친 작자가 감히 덤비겠는가?" 한쾌는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이번에도 역시 떠들어댔다. "젠장! 저놈은 아예 비환유문의 위세를 믿고 중인들을 협박하는구먼. 비환유문도 허울좋은 이름뿐이지. 탈혼무적환 유종을 빼면 모두 쓰레기들뿐이거든." 하나 스스로 철환 유자량이라고 밝힌 털보장한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철환 유자량은 비환유문의 최고고수들인 사환의 일인(一人)으로, 금환(金環) 유자군(劉子軍), 은환(銀環) 유자령(劉子靈), 마환(魔環) 유자웅(劉子雄)과 더불어 천하에 위명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자량은 거구의 몸을 대의 중앙에 우뚝 세운 채 상대를 기다렸다. 하나 중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필 뿐 아무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둥! 드디어 고수(鼓手)가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자량의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비환유문이라는 엄청난 세력이 그의 뒤에 있기에 섣불리 그에게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자량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둥! 둥! 둥! 북은 어느새 여섯 번을 울리고 있었다. 아무도 유자량이 일차관문을 통과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유자량도 감히 자신에게 덤빌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고, 설사 누가 덤빈다 해도 충분히 격퇴시킬 자신이 있었다. 둥! 둥! 드디어 북이 아홉 번을 울리고 고수가 막 열 번째 북을 치려는 순간, "멈춰요!" 돌연 북쪽 차일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교성이 터져 나왔다. 쐐액! 이어, 번갯불 같은 홍영(紅影)이 폭사해 비무대 위로 쏘아 나왔다.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나타난 인영은 놀랍게도 이제 갓 십육칠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아닌가? 일신에는 짙은 홍의를 걸친 여인, 아니, 소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는 착 달라붙는 홍의를 입고, 단아한 이마에는 붉은 홍사건(紅絲巾)을 질끈 동여맸다. 두 눈은 밝으면서도 매서웠고,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술에서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도 시 원찮을 것 같은 급한 성격이 엿보였다. 투명한 피부에 오똑 솟은 콧날, 육감적인 입술 등은 정녕 뇌쇄적이었다. 유자량은 일시 어이가 없었다. "낭자가 나에게 도전하려는 거요?" 홍의소녀(紅衣少女)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너무 싱겁잖아요, 이름만 밝히면 그냥 통과하니...... 이런 비무대회라면 삼척동자라 도 다 통과하겠어요." "허......" 유자량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웃음을 연발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질려 버릴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낭자는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아오?" 홍의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섬세한 턱을 쳐들었다. "그야 물론 무예를 겨루는 비무대회장이지요." "바로 그렇소. 이곳은 낭자 같은 소녀가 장난칠 곳이 아니오. 그러니 어서 내려가시오." 유자량은 제법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한데 홍의소녀에게는 그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웬 개가 짖느냐는 듯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딴소리만 했다. "당신은 두려운가 보군요. 하긴...... 이름만 밝히면 그냥 통과되는 줄 알고 있다가 내가 나서 니 약간 겁도 나겠지......" "......!" 유자량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할 것 없어요. 단순히 비무를 해서 승부만 가리면 되니까, 나는 당신을 다치지 않게 살살 다루어 주겠어요. 그것도 무서우면 어서 내려가세요." 그녀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 들고 유자량을 쓸어보았다. 유자량은 내심으로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 같은 노화가 들끓어올랐다. 하나 그는 당당한 비환유문을 대표하는 절세의 고수가 아닌가? 이런 일로 나이도 어린 홍의 소녀와 싸우게 된다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중인들은 모두 유자량이 홍의소녀를 어떻게 대할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유자량은 안색을 딱딱히 굳히며 홍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낭자는 기어이 본인과 비무를 해야겠소?" "그야 물론이지요. 하나 당신이 겁낸다면 안 할 수도 있어요." 유자량의 짙은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하나 그는 꾹 참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소. 낭자가 그리도 원한다면 비무에 응해 주겠소. 만약 오(五) 초(招) 내로 본인이 낭자를 퇴치시키지 못한다면 낭자의 승리로 간주하겠소." 그의 말은 과연 명성을 떨치는 인물답게 당당하면서도 자신만만했다. 홍의소녀는 그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정당한 실력으로 나와 겨루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 을 이겨도 별로 대단할 게 없잖아요?" 유자량의 구레나룻이 자욱한 얼굴에 서서히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낭자는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구려. 내 낭자의 부모를 대신해서 그 버릇을 고쳐 주겠소." "호호...... 어디 한번 고쳐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허풍만 떠는 비환유문의 절기가 얼마나 대 단한지 궁금했으니까......" "좋소. 조심하시오!" 유자량은 크게 외치며 먼저 손을 들어 그녀의 견정혈(肩井穴)을 짚어갔다. 휙! 그의 일(一) 수(手)는 어찌나 빠른지 파공음이 울리기도 전에 그의 손이 이미 홍의소녀의 어깨 근처에 가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파앗! 홍의소녀의 신형이 마치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유자량은 자신의 손이 허공을 스침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호호호......" 어느샌가, 홍의소녀는 그의 좌측에 서서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호호...... 그런 굼벵이 같은 손속으로 나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 있겠어요?" 유자량의 얼굴이 수치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는 즉시 크게 외치며 다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과연 한 가닥 재주는 있군. 하나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기만 하는지 보겠다." 파파파- 팟! 쐐액! 그는 거대한 신형을 이리저리 날리며 빛살 같은 공세를 퍼부었다. 이번 공격은 처음과는 달리 치밀하고도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유자량이 드디어 비환유문의 삼대절기(三大絶技) 중 하나인 천성십이수(天星十二手)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비록 손에 약간 사정을 두어 육(六) 성(成)의 공력으로 전개해 냈지만, 그 가공할 위력 은 능히 바위라도 박살낼 듯 엄청난 것이었다. 뻗는가 하면 찍고, 하단향인가 하면 우상방이며, 가르고 찍고...... 그것은 한마디로 수법(手法)의 극치라 할 만했다. 중인들은 유자량의, 체구답지 않게 현란하고 눈부신 공격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홍의소녀도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느리게 신형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다고는 하나, 그녀의 몸놀림은 무척 빠르고 괴이했다. 앞으로 가는가 하면 뒤로 가고, 좌측으로 돌아가는가 싶으면 어느새 그녀의 몸은 우측에 가 있었다. 어찌 보면 무척 무질서 하고 난잡해 보였으나, 안목이 예리한 고수들은 그녀의 보법(步法)에 아주 기이한 현기(玄 機)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유자량의 천성십이수로도 그녀의 몸을 격중시킬 수가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오 초가 지나갔다. 순간, "음......" 유자량이 얼굴을 침중하게 굳히며 손을 거두었다. 홍의소녀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손을 멈추지요? 설마 싸우기 싫은 것은 아니겠지요?" 유자량은 두 눈 가득 신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리더니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낭자는 그만두시오. 나는 오 초가 지나도록 낭자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졌음을 인정하겠소." 그는 당당하게 말하며 추호의 미련도 갖지 않고 대 위를 떠났다. 홍의소녀는 일시 멍청해졌다. 그녀가 비록 괴이한 신법으로 그의 공세를 피했다고는 하나 유자량은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최고절기인 탈혼칠비환(奪魂七飛環)은 아예 꺼내 보지도 않았으니 승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언약대로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으니 실로 광명 정대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아닌가? 즉시 사방의 좌대에선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 그들은 같은 무인(武人)으로서 패배에 승복할 줄 아는 유자량의 깨끗한 태도에 크게 공감했 던 것이다. 홍의소녀 또한 조금 전과는 다른 눈으로 유자량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비환유문과 사환의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공이야 어찌 됐든, 유자량의 태도 하나만으로도 비환유문이 결코 범상한 문파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명문세가(名門世家)의 전통이란 이런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긍지와 당당함, 그리고 실력이 결 합되어 수십, 수백 년간 강호무림의 세찬 도전 속에서도 꿋꿋하게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일승(一勝)을 거두었고, 다음 도전자를 맞게 되었다. 한쾌는 석중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석 노제, 자네는 혹시 저 계집애의 무공내력을 알아보겠나?"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조용히 반짝였다. "그녀의 무공을 보니 한 사람이 생각나는군요." "그게 누군가?" "천애광자(天涯狂子)입니다." 한쾌와 조담의 얼굴이 크게 변했다. 한쾌가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조금 전에 그 계집애가 펼친 신법이 천애무류보(天涯無流步)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비환유문의 천성십이수를 그토록 여유있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쾌의 얼굴이 그답지 않게 심각하게 굳어졌다. "음...... 그렇다면 저 계집애는 제력심(霽力心)의 후손이 분명하겠군."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조아앵이 의아한 듯 귀여운 눈망울을 떼구루루 굴렸다. "도둑 할아버지! 천애광자가 누구예요? 전 처음 듣는데요." 조담이 대신 입을 열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그분이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신 지가 벌써 오십 년 가량 되 니......" "아......" "오십 년 전 무림에는 그야말로 하늘도 놀라고 땅도 꺼질 절세의 고수 세 사람이 있었 다......" * * * 오십 년 전. 당시 무림에는 그야말로 개세무적(蓋世無敵)이라 칭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삼(三) 인 (人)의 절대고수(絶對高手)들이 출현했다. 그들의 무공은 감히 아무도 당적(當敵)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천외삼기(天外三奇)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았다. 첫 번째 인물, 동해검선(東海劍仙) 노중환(盧重環)! 그는 검으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무림사(武林史) 유일의 검객(劍客) 이었다. 그의 검은 거의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러, 사람들은 '노중환의 검은 곧 하늘의 검이다' 라며 극찬하였다. 그는 가히 검을 든 모든 무인(武人)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신화와 전설의 인물이었다. 두 번째 인물, 천사(天邪) 요현(姚玄)! 그는 사도사상(邪道史上)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은 인물이었다. 오십 년 전, 그가 처음 무림에 등장하였을 때 천하는 순식간에 공포(恐怖)의 도가니로 화해 버렸었다. 그는 천하에 퍼진 백오십여 가지의 사공(邪功)을 집대성해 천하사공(天下邪功)의 정화를 이 루었다. 뿐이랴! 전설로만 내려오는 극마(剋魔), 극사지체(剋邪至體)를 이루어 무림사에 다시없을 초 강자가 되었다. 그의 한마디는 그대로 법(法)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 거역치 못했다. 한데 불행중다행이었을까? 그는 등장한 지 육 년 만에 홀연히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손에 수백 명의 아까운 생명들이 목숨을 잃고 강호는 도탄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 인물, 천애광자(天涯狂子) 제력심(霽力心)! 그는 미쳤다. 그는 무림사 천년 이래 아무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미친 인물이었다. 하나 아무도 그의 앞에서 감히 그를 미쳤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광기 어린 살인무 공(殺人武功)은 천하에서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술에 미치고, 도박에 미치고, 살인에 미친 무림사 최대의 미치광이. 그가 바로 제력심이었다. * * * "당시 제력심은 구대문파의 장문인(掌門人)들을 자신의 앞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자신의 오 줌을 보약(補藥)이라고 속여 먹인 적도 있었지." 조담의 말에 위지명과 조아앵은 두 눈을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뜨고 흥미 진진하게 듣고 있 었다. "아무튼 그는 온갖 기행(奇行)과 괴행(怪行)으로 십여 년 간 천하를 쑥밭으로 만들고 다녔었 지. 천사 요현과 동해검선 노중환마저도 그의 광기에는 한 수 양보하는 처지였다." 한쾌가 쥐눈을 반짝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저 계집애도 그 미친 늙은이의 혈통(血統)을 이어받았다면 꽤나 사고뭉치겠군. 가뜩이나 소 란스러운 무림이 아주 벌집 쑤셔 놓은 듯 되겠어...... 아이구! 말세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 보여!" 그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주절거리자 위지명과 조아앵이 배꼽을 잡았다. "하하하......" "호호호...... 저 언니와 도둑 할아버지가 만나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는데요." 한쾌는 쥐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 "요 쥐방울만한 계집애야! 그런 소리는 꿈에도 하질 말아라...... 노부같이 점잖고 품위있는 체통에 어찌 저런 어린 년과 아옹다옹하겠느냐?" 한쾌가 사방으로 마구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바로 그때였다. "엇? 저 땡초 돼지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조담이 뜻밖이라는 듯 탄성을 질렀다. 중인들은 황급히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올라왔는지 홍의소녀의 앞에는 실로 괴이한 인물 하나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흔 살 가량의 화상(和尙)이었다. 일신에 붉은 가사(袈裟)를 걸쳤고, 희멀건 피부에 뒤룩뒤룩 비곗살로 뭉쳐진 모습이 마치 미륵불(彌勒佛)을 연상케 했다. "저 사람이 누구인데요?" 위지명이 그의 가공할 비곗살을 보고 해천쌍로의 반옹 곡현을 연상하며 물었다. "저 뚱보 땡초는 보기에는 저렇게 어리숙하지만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다. 마승(魔僧) 뢰극찰(雷克察)이라면 서장(西藏)에서는 울던 애도 울음을 멈추지." 한쾌가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위지명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니...... 저 중이 바로 구대흉인 중에서 가장 괴팍스럽다는 마승 뢰극찰이란 말이에요!" 마승 뢰극찰! 그는 구대흉인 중의 일인으로, 무공내력이 신비하고 심성(心性)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흉 인(兇人) 중의 흉인이었다. 그의 어리숙하고 뚱한 얼굴 밑에 숨겨진 악독한 살수(殺手)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피를 뿌리고 쓰러져 갔던가! 뢰극찰은 홍의소녀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리듯 자세히 살폈다. 홍의소녀는 그의 음탕한 눈길에 자신이 그의 앞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빠......' 그녀는 그의 독사 같은 눈초리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고 싸늘히 소리쳤다. "흥! 뚱보 화상! 눈알을 파버리기 전에 어서 그 더러운 눈초리를 치우지 못할까?" "눈알을...... 파버린다?" 뢰극찰은 기이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능글맞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미타불...... 어리석은 중생이 초열지옥(焦熱地獄)에 떨어지고 싶어서 미륵불의 현신(現身)인 이 몸께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홍의소녀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돼지중, 당신이 미륵불의 현신이라면 나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현신이 되고도 남겠 다." 순간, 착각이었을까? 홍의소녀는 그의 눈 깊은 곳으로부터 가공할 살기가 유성처럼 스쳐 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 그 빛은 곧 사라져 버렸다. "입이 달렸다고 나오는 대로 다 내뱉다간 필시 화가 따를진저...... 아미타불......" 그것뿐이었다. 뢰극찰은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합장을 했다. 하나 말싸움이라면 염라 대왕 앞에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홍의소녀였다. "쯧쯧...... 모르는군요. 입이란 말을 하기 위해 달린 것이지 먹기 위해서만......"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뢰극찰을 가리켰다. "오호! 그렇군요! 돼지중, 당신을 보니 당신의 입은 영락없이 먹기 위해서만 달린 것 같아 요." 뢰극찰은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싱긋이 웃었다. "후후후...... 피라미 한두 마리를 이겼다고, 여중생(女衆生)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구나." 홍의소녀는 요염하게 웃으며 말을 받아넘겼다. "호호...... 그래도 돼지중의 간덩이보다는 덜 부었을걸." "으허허허...... 불쌍한 중생이 시집도 못 가보고 지옥에 떨어지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것은 가공할 살기를 담은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후후...... 아직 젖꼭지도 덜 떨어진 중생아...... 부디 극락(極樂) 왕생(往生)하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홍의소녀를 향해 번쩍, 폭사되었다. 위-잉! 솥뚜껑만한 손바닥이 홍의소녀의 얼굴을 향해 맹렬히 후려쳐 갔다. 도무지 그런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쾌 절륜한 신법과 공세였다. "호호...... 가관이군. 비계가 춤을 추는 광경이라니......" 홍의소녀는 웃으면서 극히 신묘한 보법으로 공세를 피해 냈다. "헛헛...... 아미타불...... 그따위 신법으로 본 불(佛)의 손을 피할 수는 없지." 뢰극찰은 그림자처럼 홍의소녀를 따라붙으며 쌍수(雙手)를 기쾌하게 번뜩였다. 파파팟! 비수 같은 수영(手影)이 홍의소녀의 신형을 그물처럼 휩쓸어 갔다. 그 공세의 악독함은 유자 량의 천성십이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독하구나!' 홍의소녀는 순간적으로 놀랐으나 그녀의 몸은 어느새 뢰극찰의 손끝을 따라 빙글 돌아 공세 를 벗어났다. 실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헛헛...... 제법이군. 하나 네년이 어디까지 피하나 두고 보겠다." 돌연, 신쾌하게 움직이던 뢰극찰의 신형이 뚝 멎었다. "후후...... 와선멸절강(渦旋滅絶 )이다." 스윽...... 뢰극찰은 우수를 들어 지극히 유연하게 허공 중에서 반원을 그렸다. 그러자...... 봄날의 미풍이 이럴까? 마치 솜털처럼 부드러운 경력 한 줄기가 홍의소녀를 향해 밀려나왔다. 순간, '맞받으면 불리하다.' 홍의소녀는 그 부드러운 경력 안에서 질식할 듯한 기운을 느끼고 튕기듯 옆으로 신형을 날 렸다. 하나 그 와중에도 또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고수는 몸에 기름기가 많고 볼 일이군요. 그러니까 움직임이 저렇듯 유연하지." 그 순간이었다. 슈슈슈...... 홍의소녀가 서 있던 바닥이 한 겹 뒤집히며 미친 듯한 소용돌이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쳐 올 랐다. 실로 무시무시한 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와선멸절강의 무서운 점이었다. 부드럽다고 방심했다가는 순식간에 전신이 걸 레쪽처럼 찢겨 나가게 되는 것이다. "후후...... 어린 년! 처음부터 네년의 주둥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제 다시는 놀리지 못 하게 네년의 아가리를 찢어 놓을 테다." 뢰극찰은 흉험(凶險)이 발동했는지 처음과는 달리 어조가 아주 흉악해졌다. 하나 홍의소녀는 태연히 웃었다. "호호...... 돼지중, 그건 본 낭자도 마찬가지다. 너는 기분 나쁘게 살이 너무 많이 쪘단 말이 야......" 말이 끝나는 순간, "주둥아리는 지옥에나 가서 놀려라!" 한소리 외침과 더불어 뢰극찰의 쌍장(雙掌)이 벼락치듯 허공을 갈랐다. 콰우우-웅! 일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녹광(綠光)의 무리가 폭풍처럼 뻗쳐 나왔다. 홍의소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이것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녹수제마인(綠手制魔印)!' 녹수제마인은 대라인(大羅印)과 더불어 서장 포달랍궁의 삼대비학(三大秘學)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뢰극찰은 포달랍궁의 인물이란 말인가?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녹광은 홍의소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순간 홍의소녀는 우뚝 버티고 선 채 쌍장을 맹렬히 후려쳤다. 파-앙!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이 터졌고, 그에 따라 홍의소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나 그녀는 자세 를 가다듬어 그 자리에서 우뚝 버티고 섰다. "호호...... 포달랍궁의 무공도 알고 보니 별것 아니군." 홍의소녀는 손바닥을 툭툭 털며 여유 만만하게 말했다. 뢰극찰의 눈에 기광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잠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혹시 낭자가 조금 전에 펼쳤던 것은 천애무극수(天涯無極手)가 아니었소?" 어느새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홍의소녀는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보기보다는 제법 안목이 있군요." 순간 뢰극찰의 안색이 심각해지며 그의 어조가 한층 정중해졌다. "그렇다면 낭자는 천애광자 제 노선배님과 무슨 관계가......" 홍의소녀는 뻐기듯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분은 바로 제 할아버지예요. 전 그분의 손녀인 제완완(霽婉婉)이구요." 순간, "처, 천애광자......!" "오오...... 천하제일광인(天下第一狂人)의 손녀라니......" 중인들의 안색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는 뢰극찰까지도 안색이 대변한 채 주춤거렸다. 경악과 탄성으로 주위가 시장바닥처 럼 소란스러워질 때, 뢰극찰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홍의소녀를 바라보았다. "제 노선배님의 손녀 분이시라면 본 승은 감히 더 이상 덤비지 못하겠소이다. 오늘 비무는 낭자께서 이긴 것으로 하겠소." 말을 마치기도 전, 휘-익! 그의 뚱뚱한 몸은 번개같이 비무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는 구대흉인의 한 명인 뢰극찰이 천애광자란 한 마디에 놀라 꽁무니 를 뺀 것이다. 확실히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었다. 천외삼기란 이름은 이렇게 가공스러 웠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중인들은 아무도 감히 홍의소녀, 제완완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대흉인 중의 한 명이 도망갔는데, 천하의 누가 감히 그녀에게 덤비겠는 가? 더구나 그녀가 천애광자의 손녀임이 알려진 이상, 그녀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천애광자 를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결국 그녀는 열 번째로 일차관문을 통과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이어, "이것으로 오늘의 비무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낭랑한 외침과 함께 그날의 비무도 막을 내렸다. 제 17 장 간담상조(肝膽相照) 밤. 태고의 정적을 간직한 깊고 깊은 밤이었다. 석중옥은 자신의 거처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옆에는 위지명이 세상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무심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석중옥의 얼굴에는 어둠만큼이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 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의 동공에 문득 이채가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슈슉! 돌연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희끗한 물체 하나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창문을 뚫고 그의 전면 으로 날아들었다. 석중옥은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물체를 가볍게 낚아챘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놀라운 내공이군!' 석중옥은 종이가 날아온 방향을 흘끗 쳐다본 뒤 종이에 눈길을 옮겼다. <석가 애송이! 죽고 싶다면 따라오너라.> 서명도 없는 짤막한 글이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석중옥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누가 내게 장난을 하고 있나?" 그는 서찰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부스스...... 종이가 한줌 먼지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다음 순간 석중옥의 신형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그의 몸은 번개같이 방안을 벗어나 야음(夜陰)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은 거의 십여 장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단숨에 삼십여 장을 유성(流星)처럼 쏘아 가는 그의 시선 속으로 우측 방향에서 한 홍영(紅 影)이 가산(假山) 사이의 숲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투영되었다. "저자인가?" 석중옥은 담담히 중얼거리며 허공 중에서 신형을 꺾어 곧장 그곳으로 쏘아져 갔다. 아마 누군가가 날개가 달린 듯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되돌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의 신법을 보았다면 경악에 가득 차서 부르짖었을 것이다. "우, 운룡구현(雲龍九現)!" 곤륜파(崑崙派)가 천하에 자랑하는 독보적인 신법절학(身法絶學)인 운룡구현이 백년 만에 처음으로 완벽한 상태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숲속을 이십여 장 쯤 지나자 돌연 널따란 공지가 나타났다. 석중옥은 이곳에 이르자 신형을 조용히 멈춰 세웠다. 공지의 맞은편에 홍의인(紅衣人)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의인은 전신을 오직 핏빛 일색으로 치장한 인물이었다. 일신에 걸친 의복도, 깊숙이 눌러쓴 방갓도, 허리춤에 찔러 넣은 한 자루 검도 모두가 섬뜩 한 핏빛이었다. 또한 그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운도 섬뜩한 핏빛이었다. 그야말로 섬뜩하리만큼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석중옥은 그에게서 어떤 냄새 하나를 맡았다. 그것은 피와 공포로 점철된 죽음의 냄새였다. 석중옥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알 필요 없다." 홍의인의 목소리는 한 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억양의 고저가 전혀 없어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석중옥은 다시 물었다. "누구의 지시를 받았소?" 홍의인은 이번에도 되물었다. "누구일 것 같으냐?" 들으면 들을수록 홍의인의 음성에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언가가 풍기고 있었 다. 하나 석중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누구든 관계없지. 당신을 잡아 물어 보면 알게 될 테니......" 방갓 아래로 살짝 드러난 홍의인의 입꼬리 부근이 조금 움직였다. 아마 웃고 있는 듯한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섬뜩한 웃음일 것이다. "흐흐...... 네놈에게 감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까?" "문제는 당신이 몇 초나 버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순간 극히 음산하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허공 중에 울려 퍼졌다. "듣던 대로 지극히 오만방자한 놈이군." 스슥! 소리도 없이 사방에서 여덟 줄기의 홍영(紅影)이 떨어져 내렸다. 하나같이 짙은 홍의에 핏빛 방갓을 눌러쓴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금방이라도 폭 발할 듯한 살기가 서리서리 폭출되고 있었다. 석중옥은 담담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들을 느릿하게 쓸어 보았다. 그들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련을 거친 무서운 고수 들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피를 말릴 듯 온몸을 조여 오는 살기! 바람도 없는데 바닥에 쌓인 낙엽들이 폭풍을 만난 듯 미친 듯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석중옥의 시선이 그들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들의 가슴 부근에는 모두 똑같이 섬뜩한 요기(妖氣)를 뿌려대는 검은 장미 한 송이가 정 교하게 수놓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석중옥의 동공에 기광이 번뜩였다. "이제 알겠군." 중앙에 선 홍의인이 강철처럼 완강한 어투로 대꾸했다. "무엇을 알겠다는 거냐?" "당신들은 홍포구존이 아니오?" 중앙에 있던 홍의인은 가볍게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나 그것은 극히 일순간에 불과했다. 그는 곧 화염 같은 살광을 폭사하며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제법이군. 우리들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하나 그렇다고 네 수명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본(本) 당(黨)의 행사를 방해하는 놈은 누구도 살려 둘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석중옥의 뇌리 속으로 한 인물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만상공자의 사주를 받은 백쾌당의 인물들인가?" "......" 방갓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눈빛에 미세한 놀람의 빛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얄팍한 입술이 열리며 뼛골이 시릴 듯한 냉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여라!" 스스스슥! 순간, 그를 비롯한 구(九) 인(人)의 홍의인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느린 가운데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빠름이 있었 다.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일정한 규칙과 괴이한 현기(玄機)를 내포하고 있어 도저히 다 음에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차-앗!" 어느 한 순간에 단 한 마디의 폭갈이 터져 나왔다. 폐부가 갈라지는 듯한 무서운 기운이 서 린 기합이었다. 아홉 사람의 기합이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슈슈슈슈슈슉! 위-잉! 그들의 몸에서 발출된 무서운 강기가 천지를 뒤덮었다. 홍포구존의 움직임은 터져 나오는 화산(火山)의 분출과 같았다. 그들의 손이 병기에 닿는 것을 보기도 전에 검, 도, 창, 필, 극 등의 병기가 이미 석중옥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석중옥의 몸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 기세는 가히 번천지복,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 그 순간, "당신들은 과거 악행(惡行)으로 보아 지옥에 가야 마땅하오." 석중옥은 몸을 빙글 회전시켜 그들의 휘몰아쳐 오는 공세를 피하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 다. 그의 양손은 어느새 투명한 옥빛으로 변해 버렸다. "자, 잘 보시오. 이것이 바로 만상공자를 쫓아 보낸 낙화섬수라는 것이오."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석중옥은 동시에 연속 칠십이(七十二) 장(掌)을 때렸다. 그 다음에 벌어진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쐐애-액!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번갯불 같은 하얀 섬광이 마치 우박처럼 사방으 로 미친 듯이 폭사되어 쏘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기세와 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 여서 반경 오 장 이내가 온통 섬광의 그물에 갇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엇?" 소용돌이치는 강기의 폭풍 속에서 아홉 마디의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단 일 수에 이와 같은 위세를 풍기는 고수가 있다는 말을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홍포구존 역시 일세(一世)를 풍미하던 절정고수들이 아닌가? "타아앗!" 그들은 문자 그대로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신형을 날리며 강력하게 맞섰다. 설명은 길지만 실상 이들은 번갯불이 허공을 가르는 듯한 짧은 순간 동안 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파파파파! 위이-이-이-잉! 땅가죽이 뒤집히며 살갗을 도려 낼 듯한 강기( 氣)가 주위 이십여 장 내를 완전히 진공 상 태로 몰아넣었다. 홍포구존의 무공은 과연 놀라워, 석중옥의 가공할 낙화섬수 공세를 거의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석중옥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스치며 그의 신형이 풍차 돌아가듯 회전하면서 왼손이 가볍 게 휘둘러졌다. "파옥신권(破玉神拳)!" 쿠쿠쿠...... 돌연 천지를 허물 듯한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권영(拳影)이 폭우처럼 난비했다. 낙화섬수가 속도에 치중하는 무공인 데 비해 파옥신권은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절학(絶學) 중의 절학이었다. 그 위력은 능히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를 정도였다. 까깡! 석중옥의 주먹과 홍포구존의 병기가 허공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파공 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윽!" 홍포구존 중의 한 명이 미처 파옥신권에 실린 가공할 권력(拳力)을 이기지 못하고 병기를 놓치며 어깨를 감싸 쥔 채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때를 놓칠 석중옥이 아니었다. "붕천지(崩天指)!" 번쩍! 그의 손끝에서 뻗쳐 나오는, 눈이 멀 듯한 섬광! 그것은 미처 그자가 신형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그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크-악!" 최초의 비명이 밤공기를 찢었다. 그자는 목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린 채 폭포 같은 피분수를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나머지 팔 인의 공세가 일시에 주춤했다. "아, 아니......!" "세, 셋째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횡행(橫行)하면서도 단 한 번도 꺾인 적이 없었던 그들 중 한 명이 너무도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들이 언제 이런 경우를 겪어 보았겠는가? 그들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순간적으로 손 이 느려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리리링!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뭐, 뭐냐?"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던 그들의 시선 속으로 무려 마흔여덟 개로 나누어진 석중옥의 다리가 풍차처럼 선회하며 무서운 속도로 자신들을 덮쳐오는 광경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것이야말로 천하무림에 산재한 수백 가지의 각법(脚法)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환영각(幻 影脚)이었던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이 가공할 공세에 놀라 이들 팔 인은 그만 피해야 한 다는 생각조차 잊고 말았다. 퍼퍼퍼퍽! 순식간에 세 개의 머리통이 부서지면서 폭포 같은 혈막(血幕)이 자욱이 솟구쳐 올랐다. 순식 간에 강호무림에 공포스런 살명을 떨치던 홍포구존 중 네 사람이 쓰러지고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남은 다섯 사람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수중의 병기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러나 그때 한 줄기 섬광이 그들의 몸을 스치듯 지나갔다. 번쩍! 그것은 너무도 빨리 나타났다 없어져 섬광이 정말로 번뜩였는지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었 다. 그와 동시에 정신없이 병기를 휘둘러대던 네 명의 홍의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 에 맥없이 꼬꾸라졌다. 그들의 가슴은 어느새 갈비뼈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숙이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연환십절(連環十絶) 중의 사절(四絶)인 사상잔섬(四象殘殲)이란 것이지." 석중옥은 왼손을 오른쪽 허리춤에서 떼어 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실로 어느 누구도 그가 방금 전에 일(一) 검(劍)을 휘두른 뒤 다 시 검집에 검을 꽂았다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석중옥은 조용한 시선으로 홀로 남은 홍의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마지막 홍의인은 손에 핏빛 혈검(血劍)을 쥐고 있었다. 그 혈검을 쥔 홍의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어 그의 마음속 격동이 얼마나 커다란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홍포인은 공포와 경악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계속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자 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간 강호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홍포구존이 불과 단 몇 수 만에 한 인물의 손에 거의 도륙이 나버린 것이 아닌가! 홍포구존의 그 동안의 명성을 생각 한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석중옥의 흑발 아래로 내비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헝클어진 흑발과 박속같이 희고 투명한 치아와의 조화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되어 홍의 인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혈검을 쓰는 것을 보니 당신이 혈검마자(血劍魔子) 갈천성(葛天星)이란 인물이겠군." 혈검마자 갈천성은 홍포구존 중의 첫째였다. 갈천성은 단 한 순간도 오늘과 같은 날이 찾아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하나 강호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 아무리 강한 칼날도 언젠가는 부러지고, 끝이 없을 것 같 던 성대한 연회도 결국은 막을 내리게 되는 법이다. 갈천성은 칼바람 같은 강호에서 삼십 년을 넘게 살아 왔으나 이제야 비로소 그 평범한 진리(眞理)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갈천성은 입꼬리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킨 채 자신들의 주위에 질퍽한 피를 뿌리며 쓰러 져 있는 아우들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그의 몸이 한차례 세찬 경련을 일으켰 다. "으으...... 이...... 악마 같은 놈!" 혈검마자 갈천성은 씹어 먹을 듯 외치며 발작적으로 석중옥을 덮쳐 왔다. 그러나 석중옥의 우수가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소맷자락이 가볍게 펄럭였다. 퍽! 혈검마자 갈천성은 석중옥의 바로 앞에서 머리통이 부서지며 즉사했다. 홍포구존의 우두머리치고는 어이없도록 간단한 죽음이었다. 사실 석중옥의 무공이 그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는 하나 이렇듯 반항 한번 못 해보고 죽을 혈검마자 갈천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놀라움과 극도의 공포, 그리고 아우들이 모두 죽었다는 절망감이 그를 혈검 한번 제대로 못 휘둘러 보고 쓰러지는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어 버린 것이다. 석중옥은 묵묵히 홍포구존의 시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고적한 밤. 이런 밤에 혼자 월광(月光)을 받으며 숲속을 거닌다는 것은 확실히 낭만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방에 피를 토하며 나뒹구는 시체를 본다는 것은 섬뜩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문득 석중옥은 좌측의 숲속을 바라보며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도 더 구경할 것이 남아 있소?" 순간, "하하하! 과연......" 호탕한 웃음이 들리며 한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기척도 없는 신법이었다. 구 척의 훤칠한 키에 일견하기에도 극히 평범해 보이는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하나 각진 턱 에 서린 강인함과 신비롭도록 심유한 두 눈은 그의 얼굴 전체를 결코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특징짓고 있었다. 누구겠는가? "묵운편 사마진평!" 석중옥은 두 눈을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천하제일의 호한이며 칠대명인 중에서도 가장 신비롭다는 묵운편 사마진평이었던 것이다. 사마진평은 탄복했다는 듯한 눈으로 석중옥을 응시했다. "달빛이 하도 좋아 우연히 밖에 나왔다가 귀하의 싸우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되었 소. 홍포구존은 십여 년 간 무림을 마음대로 횡행한 일대의 흉인들이거늘 이토록 간단하게 처치하다니 놀라운 마음 금할 수 없구려. 실례지만 존성 대명을 알 수 있겠소?" 그의 말은 위풍당당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별말씀을...... 그렇다고 어찌 불초가 귀하의 철담협골(鐵膽俠骨)에 비하겠소? 불초는 석중옥 이란 무명소배요." "석중옥?" 사마진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자의 무공이나 기도로 보아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대체 그의 내력이 무엇일까?' 하나 사마진평은 곧 껄껄 웃으며 포권을 했다. "하하...... 반갑소. 이런 곳에서 귀하 같은 고인을 만나게 되다니 이것만으로도 남궁검문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는 것 같소." 그의 태도는 일점의 가식도 없이 진실된 것이었다. 석중옥은 내심 그의 호탕한 기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소? 월광이 이리도 좋은데 술이라도 한잔 같이하지 않겠소?" 석중옥도 마침 술 생각이 났던 참이었다. 하나 지금은 삼경(三更)이 가까워 오는 야심한 시간인데 대체 어디에서 술을 마신단 말인 가? 그의 생각을 짐작이나 한 듯 사마진평이 빙긋 웃으며 품속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보따리를 풀자 신기하게도 마른 육포와 술 한 병이 나왔다. 사마진평은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보면 술이 마시고 싶어지오. 하지만 가끔 술을 구하 기 힘들 때가 있어서 아예 이렇게 가지고 다닌다오. 하하......" 이어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술병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런 다음 씩 웃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크...... 좋군! 이건 죽산홍(竹山紅)인데 천하명주(天下名酒)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마 실 만하오." 석중옥은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사양하지 않고 술병을 받아 들었다. 그런 다음 자신도 사마 진평처럼 술병째 나발을 불었다. 술은 조금 시금털털했으나 뒷맛이 매우 좋았다. 더구나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마시니 독 특한 운치마저 느낄 수 있었다. 석중옥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사마진평이 육포를 찢어 건네 주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 가며 술을 마시고 육포를 먹었다. 짭짤한 육포와 시큼한 죽 산홍은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죽산홍은 의외로 독해서 그리 크지 않은 술병인데도 절반쯤 마시자 조금씩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술을 마실수록 사마진평의 눈동자는 더욱 반짝거렸다. 두 사람은 술병을 비울 때까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술은 곧 바닥이 났다. 사마진평은 술병을 몇 차례 흔들어 보다가 술병이 빈 것을 알고 멀 리 던져 버렸다. "오늘따라 술이 모자라는 게 아쉽군." 그건 석중옥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사마진평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월광(月光) 아래 벗과 만나 술을 기울인다...... 이백(李白)은 친구가 없어 자기의 그림자와 술을 마셨지 만 우리는 다행히 이렇게 서로 마주보면서 마실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사마진평이 이백이 그림자를 벗삼아 술을 마셨다고 말한 것은 그가 지은 '월하독작(月下獨 酌)'이란 시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의 운치가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을 터놓고 술 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하...... 난 원래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술병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 소. 하지만 오늘의 정취는 더욱 각별하구려." 그는 석중옥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하얀 이빨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모습이 무척 강렬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사귀어도 가까워지지가 않는데, 어떤 사람은 잠깐 만나도 백년지기 (百年知己)처럼 느껴질 때가 있소. 나는 비록 오늘 귀하를 처음 만났지만 꼭 오랫동안 친하 게 지내 온 벗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드는구려." 석중옥도 사실 사마진평이 마음에 들었다. 사마진평은 강호제일의 호걸답게 남자답고 솔직했다. 더구나 아무런 허식이 없이 진솔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더불어 사귀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서로의 속마음이 상대에게 비쳐지면 사귄 시간의 길고 짧음은 상관이 없지요." 사마진평은 나직이 뇌까렸다. "간담상조(肝膽相照)라...... 과연 멋진 말이군." 그는 문득 고개를 떨구어 석중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마진평은 빙긋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노제(老弟)라고 불러도 되겠소?" 석중옥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과분할 따름입니다." 사마진평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좋아! 과연 내 눈이 잘못되진 않았군! 내 노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영웅지상(英雄 之像)임을 알았소." 사마진평은 석중옥의 어깨를 굳게 움켜쥐었다. "나는 노제에게 형님 대접을 받고 싶은데 아우가 되어 줄 수 있겠소?" 석중옥은 이미 그의 호탕한 성품을 흠모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어찌 이를 사양하겠는가? "형님!" 석중옥이 사마진평의 어깨를 마주 움켜쥐었다. "와하하하......!" 사마진평이 벼락치듯 홍소(哄笑)를 터뜨리더니 돌연 석중옥의 어깨를 부여잡고 바닥에서 벌 떡 일어났다. "내 오늘 자네와 같은 아우를 얻게 되었으니 가히 기념할 날이 아닐 수 없네. 가세! 이 일대 를 샅샅이 뒤져 보면 문을 연 술집을 하나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걸세. 우리 오늘 통쾌하게 한번 마셔 보세." 석중옥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평소에 무심하고 일면 무뚝뚝하기조차 했던 그답지 않게 지극히 환한 웃음이었다. 곧 두 사 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숲속을 걸어갔다. 달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제 18 장 기관도해(機關圖解) "와아아......!" 비무대회 오(五) 일(日)째. 그날은 의외의 인물이 나타남으로 해서 더욱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하하하......"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비무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인물. 그는 의외로 귀엽고 천진무구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약간 상기된 두 볼에 소녀처럼 움푹한 볼우물, 붉은 입가에 머금어진 해맑은 미소...... 누구라도 한번 보면 덥석 껴안고 싶을 만큼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하나, 그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안색은 공포와 경악, 바로 그것이었다. 한쾌와 조담의 얼굴도 가볍게 찌푸려져 있었다. "빌어먹을...... 저 늙지도 않는 요물(妖物)도 이곳에 나타나다니...... 갈수록 태산이군." 한쾌가 투덜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소년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소년...... 아니, 소년이 아니었다. 비록 얼굴은 동안(童顔)이었으나 칼끝처럼 솟은 흰 눈썹과 숱이 빠져 듬성듬성한 허연 백발 (白髮)을 지닌 그를 보고 소년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야말로 구대흉인 중에서도 악랄하기로 유명한 백발마동(白髮魔童), 바로 그였던 것이다. 백발마동(白髮魔童) 적황(狄黃)!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하게도 불로증(不老症)에 걸린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나이가 이미 구십여 세나 되었으면서도 얼굴만은 소년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썹과 머리털만은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라 허옇게 세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지 금의 요사스럽기조차 한 기괴한 용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중인들은 모두 못 볼 것을 본 듯 그에게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의 앞에는 비쩍 마른 갈의노인 한 사람이 몸을 가볍게 떨며 서 있었다. 하북(河北)의 명숙(名宿)인 회풍신옹(廻風神翁) 추간(秋簡)이었다. 그는 기이한 신법과 보법 으로 무림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추간은 설마 자신의 상대가 구대흉인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백발마동일 줄은 몰랐는 지라 안색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하나 그도 하북 일대에서는 당당한 패주(覇主)로 군림하고 있는 인물. 두렵다고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추간은 두 눈을 약간 찌푸리며 백발마동을 바라보았다. "이 추 모가 적 선배께 한 수 가르침을 원하오."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자신의 손자뻘로 보이는 사람에게 공대(恭待)를 하는 것은 몹시 우스운 일이었다. 하나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백발마동의 살명(殺名)은 무시무 시했던 것이다. 백발마동은 귀여운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이 늙은 놈아! 네놈 따위가 감히 노부에게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소름 끼치도록 잔인했다. 추간의 안색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가 아무리 악명이 자자한 구대흉인 중의 일인이라지만, 자신도 어엿한 무림명숙 중의 하 나가 아닌가?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적 선배!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크하하핫...... 이 늙은 지렁이 같은 놈아! 네놈이 감히 노부를 훈계하겠다는 것이냐?" 순간, 추간의 얼굴이 노화로 붉어졌다. "좋다. 내 오늘 구대흉인이 얼마나 대단한 작자들인지 한번 보겠다." 노갈과 함께 그의 신형이 번뜩 움직였다. 과연, 그의 회풍신옹이란 외호는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번쩍하는 순간 추간은 이미 백발마 동의 전신 삼십육 개 대혈(大穴)을 한꺼번에 찌르고 있었으니...... 하나 백발마동은 왠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선 채 피하려 들지를 않았다. 파파파팡-! 추간의 질풍 노도 같은 공세는 그대로 백발마동의 전신에 격중됐다. 한데, "이럴 수가......?" 추간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백발마동은 끄떡도 하지 않고 유유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입술이 열리며 우렁찬 앙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늙은 지렁이! 네놈의 공격이 비록 빠르긴 해도 나는 마치 솜방망이를 맞은 듯 하구나." 이어 백발마동은 두 눈에 은은한 살기를 담고 나직한 조소를 흘렸다. "늙은 지렁이, 이제 네놈에게 구대흉인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씽긋! 백발마동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그의 손이 갈고리같이 변하며 빗살처 럼 허공을 갈라 쏘아졌다. 번-쩍! "......!" 추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급변했다. 그는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 순간 백발마동의 손이 이미 그의 가슴팍에 와 있었다. 그는 백발마동의 공세가 이리도 빠를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었다. '끝장이다......' 추간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적황!" 아주 나직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왔다. 하나 그 순간, "크윽......" 백발마동 적황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에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입 가에는 실낱같이 가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안색이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크게 변한 채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비무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정중앙의 커다란 태사의에 고요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백의문 사(白衣文士)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배...... 백(白) 대협(大俠)!" 백발마동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일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대해(大海)와도 같은 장중한 기도를 풍기며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백의문사. 그는 바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초인(超人)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고수, 여의노사 백 철군이었다. 백철군의 입에서 물이 흐르는 듯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무예를 겨루는 곳이지 살인을 하는 곳이 아니다. 적황! 추간은 이미 네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으니 그만 손을 멈추도록 해라." 그의 음성은 비록 조용하고 나직했으나 백발마동에게는 천둥보다도 더 크게 들렸다. 백발마동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 못 하고 비무대의 한쪽에 가만 히 서 있었다. 저승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회풍신옹 추간의 얼굴은 감격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급히 백철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백 대협께서 이 한 몸을 살려 주신 은혜, 추 모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백철군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비무는 자네가 진 것이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추간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 후 비무대 위를 떠났다. 중인들은 모두 흠모의 눈빛으로 백철군을 바라보았다. 구대흉인 중의 한 명을 단순히 말 한 마디로 굴복시키는 인물은 천하에 오직 그밖에 없을 것이다. 한쾌와 조담의 얼굴에도 감탄지색이 가득했다. "과연 백 대협이시군. 저와 같은 위세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지!" "아암! 아무리 적가 놈이 포악하다 해도 감히 백 대협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백철군은 다시 조용히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둥! 둥! 둥! 둥...... 북이 열 번 울리고 백발마동 적황이 일차관문을 통과했다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비무대회는 다시 열기를 띠게 되었다. "와아아아!"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갈채! "크으으으......!" 패자들의 비통한 탄식! "크하하핫......!" 승자들의 여유있는 웃음 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비무대회장은 아주 떠나갈 듯했다. 석중옥은 혼자 자신의 거처인 황방 천이백육십호에 앉아 있었다. 위지명은 조아앵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고 밖에 나가 있었다.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득, 옆방에서 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정말 대단하던걸!" 술에 절은 목소리 하나가 그 뒤를 이었다. "누구 말인가?" "천뢰장(天雷掌) 맹강(孟崗) 말일세. 나는 설마 청해(靑海)의 패자인 북극마성(北極魔星)이 단 일(一) 장(掌)에 날아가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네." "그러니 칠대명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의 천뢰삼장(天雷三掌)은 여의부주이신 백철군, 백 대협 외에는 아무도 감히 자신있게 받아 낼 사람이 없지."그리고 또한 소면낭심(笑面狼心) 도계조(都繼祖) 말일세...... 과연 구대흉인에 낄 만하더군. 난 그자의 웃음 소리만 들어도 소 름이 오싹 끼쳐 혼났다네." "자네도 그랬나? 나는 꿈속에서도 그런 무시무시한 웃음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네." "아무튼 이번 비무대회는 정말 소문대로 대단하군. 벌써 칠대명인 중에 두 사람, 구대흉인 중에서도 세 사람이나 나타나지 않았는가? 앞으로 남은 십 일 동안에는 더욱 무서운 고수들 이 나타날 거라는군."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묵운편 사마진평 같은 고수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자는 당연히 그일세." "그건 모르는 말일세. 사마진평의 무공도 비록 대단하긴 하지만 단천검객(斷天劍客) 비몽(費 蒙)이나 천뢰장 맹강도 아직까지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절대고수들이라네. 섣불리 승패를 점칠 수는 없을 것이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쿠당! 석중옥이 앉아 있는 천이백육십호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의인영이 하나 달려 들어왔다. "고, 공자님!"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뛰어 들어온 인영은 다름 아닌 위지명이었다. 그의 안색은 당황과 다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냐, 소명?" "고...... 공자님! 큰일났어요! 아앵이 잡혀 갔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위지명은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앵과 함께 천방 부근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홍의서생(紅衣 書生)이 나타나더니 아앵이 팔에 차고 있던 방울들을 뺏으려고 했어요. 아앵하고 저는 깜짝 놀라 그를 막으려고 했는데......" "방울이라니...... 무슨 방울 말이냐?" "팔찌 모양으로 된 아홉 개의 방울이었어요. 아주 예쁘게 若쨉?..... 소리가 굉장히 이상했어 요...... 마치...... 꼭 사람 넋을 빼는 듯한......" "혼섬구령(魂閃九鈴)이군." 석중옥은 그것이 무흔풍 한쾌가 훔친, 당이선생의 영물인 백전아의 목에 걸려 있던 혼섬구 령임을 짐작했다. 한쾌는 그것을 조아앵에게 주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석중옥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홍의서생이란 자는 우리가 며칠 전에 만났던 그자가 아니냐? 얼굴이 제법 준수하고 눈 빛이 음침한......" "네, 그래요! 그자가 아앵을 제압해 끌고 갔어요. 아는 사람이에요?" "그자는 혈전공자 당욱이란 사람이다. 혼섬구령의 원주인인 당이선생의 조카지." 위지명의 얼굴이 걱정으로 굳어졌다. "아! 그럼 큰일났어요...... 아앵이 몹시 고생하겠는데......" "그가 아앵을 어디로 끌고 갔느냐?" "잘 모르겠어요. 그는 저에게 아앵을 찾고 싶으면 한쾌 할아버지에게 가서 오늘밤 삼경까지 서쪽에 있는 작은 토지묘(土地廟)로 나오라고 전하랬어요." 석중옥의 눈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이상하군. 혼섬구령을 찾았으면 그만일 텐데 왜 굳이 한 노인과 대결하려 하는 걸까? 더구 나 아앵은 오행수 조담의 딸인 것을 그들도 알 텐데......"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노부가 대답하지." 한소리 심각한 음성과 함께 한 인영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바로 한쾌였다. 한쾌는 그답지 않게 제법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는데...... 비무대회에 정신이 팔려 깜 박 잊고 있었다네." 석중옥은 이미 조금 전부터 그가 자신의 방 밖에서 위지명과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쾌의 얼굴에는 한 줄기 낭패 어린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사천당문에서 아앵을 붙잡고 있는 것은 고 계집과 물건 하나를 교환하려는 속셈일 걸세." "그게 뭔데요?" 위지명이 궁금하다는 듯 급히 물었다. "녀석아! 너무 초조해 하지 마라. 아앵은 어떻게 하든 구해 낼 테니......" 한쾌가 다시 예의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위지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쾌는 히죽 웃으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노제에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네. 그것은 노부가 당이 늙은이의 백전아에게서 훔 친 것이 혼섬구령만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는 주섬주섬 품속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얇은 비단으로 된 작은 양피지 조각이었다. "백전아의 목에는 혼섬구령 외에도 이것이 달려 있었다네. 이 양피지 조각은 혼섬구령의 안 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노부도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었지." 석중옥은 그가 준 양피지 조각을 펼쳐 보았다. <좌삼(左三), 우칠(右七), 홍(紅), 청(靑), 백(白), 삼십육(三十六), 좌상(左上)......> 의미 모를 글씨와 함께 그 아래에는 기이한 점(點)과 선(線)들이 잔뜩 찍혀 있었다. 그 점과 선들은 복잡하기 그지없어,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기는커녕 머릿속 톱니바퀴가 모조리 빠져 버릴 정도였다. 하나 석중옥은 한눈에 그것이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기관장치를 풀이해 놓은 도해(圖解)임 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나군...... 이것이 정녕 어떤 기관도해(機關圖解)라면 이 기관장치야말로 가히 죽음의 절 진(絶陣)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석중옥의 손에 들린 작은 양피지 조각에 적힌 기관도해는 가히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관이었다. 그 기관장치는 천하 무쌍의 무공을 지 닌 석중옥조차도 전율할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한쾌는 석중옥의 안색을 살피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도 짐작하다시피 이것은 가공할 매복을 나타낸 기관도해라네. 노부는 처음에 이것을 혼섬구령의 뒤에서 발견하고는 여러 날 동안 그것을 해석하려고 머리를 싸맸었다네. 하나 결국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네." 석중옥은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양피지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노부는 직업이 직업인만큼 기관진식(機關陣式)에 대해서는 남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 다고 자부해 왔었네. 하나 이 기관도해만큼은 도저히 파해(破解)할 수 없었다네." 한쾌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기관진학(機關眞學)은 가히 당대(當代)에 첫째 둘째를 다툴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하 나 그런 한쾌조차도 이 기관도해만은 혀를 내두르며 손대지 못했다니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사천당문에서 무슨 보물을 숨겨 둔 곳인 줄로만 알았었네. 하나 사천당문 혼자의 힘으로는 이런 엄청난 기관을 설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네. 노부가 짐작하기에 이것 은......" 갑자기 그의 음성이 끊어지며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한쾌의 음성이 전음(傳音)으로 들려 온 것이다. "이것은...... 한백의 장보고의 기관도해가 분명하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백의 장보고는 아직 그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된 신비지처(神秘之處)가 아닌가? 그런데 이 양피지 조각이 그 장보고의 기관도해라니...... 만약 한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사천당문의 당이선생이 한백의 장보고의 기관도해를 가지고 있었 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네.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한백의 장보고는 이미 열렸 고, 이번 일에는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다는 가정이 성립되네."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그 말 뒤에 숨은 의미만은 정녕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곧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이 힘을 합해 천하의 군웅(群雄)들을 한곳으로 모아 놓고 몰 살시키려는 엄청난 음모라는 말인 것이다. "이상한 일은...... 그렇다면 그들로서는 당연히 한백의 장보고에 더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 기를 바라야 하는데 실제로는 비무대회를 열어 몇 명의 고수들만을 선발하려 한다는 것일 세. 그들이 비무대회를 연 목적을 도통 모르겠단 말씀이야." 한쾌는 쥐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설마 무림의 최절정고수 몇 명을 죽이려고 이런 엄청난 일을 꾸몄을 리는 없을 테고......" 그의 음성에는 진실로 무림을 걱정하는 진정이 가득했다. "더구나 신검 남궁뢰의 성품이나 명성으로 보아 그가 이런 일을 꾸몄다고는 믿기 어렵네. 또 사천당문과 남궁검문이 서로 비밀스런 교류를 맺었다는 것도 확신할 수가 없고...... 그렇 다고 노부의 짐작이 틀리다고 하기에는 한백의 장보고를 제외하고는 그런 엄청난 기관이 있 을 만한 곳이 없다네." 그때 석중옥이 오랜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노인께선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했소?" 한쾌는 정색을 했다. "오행수 늙은이에게만 말했다네. 이 일이 내포하는 의미가 너무도 중대한지라 웬만한 사람 들에게 말할 수가 있어야지."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오. 사천당문에서 이 양피지 조각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 다면 그들은 한 노인을 그냥 두려 하지 않을 것이오." 한쾌는 약간 굳은 얼굴에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노부는 내 한 몸을 지킬 자신은 있으니까...... 그러나 나 때 문에 아앵이나 조 늙은이에게 무슨 해가 갈까 봐 그게 염려스러운 거지." 이어 그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석중옥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석중옥이 어떤 사람인데 그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염려 마시오. 그렇지 않아도 소생은 평소에 사천당문의 행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소." 한쾌는 어색하게 웃었다. "험험...... 노부 때문에 자네까지 번거롭게 만들 생각은 없네만......" "하하...... 한 노인은 그럼 소생에게 호기심만 잔뜩 불러일으키고 혼자 슬쩍 일을 보려고 하 시었소? 만일 그랬다간 소생은 두고두고 한 노인을 원망하게 될 거요." "그런가? 젠장...... 그렇다면 자네도 끼워 주지." 겉으로는 투덜거렸으나 그의 쥐눈에는 감격의 빛이 가득했다. 그로서는 석중옥이 도와 준다 는 것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보다 더욱 든든한 일이었다. 사실 한쾌와 조담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들만으로 사천당문에 대항한다는 것 은 이란격석(以卵擊石)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천당문은 강호육패 중의 하나로, 이미 수백 년간이나 강호무림에서 명성을 떨쳐 온 혁혁 한 가문이었다. 그들의 독술(毒術)과 암기(暗器), 그리고 출수의 신속함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한쾌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석중옥의 도움을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 었다. 하나 그 말을 꺼내기가 영 어색해서 머뭇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석중옥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도와 주겠다고 하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남을 위해서 그 무시무시한 사천당문과 대적 (對敵)하려고 하겠는가? 하나 한쾌도 한 가지 사실만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백의 장보고에 얽힌 내막을 캐는 일은 그보다 석중옥이 몇 배나 더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제 19 장 문무겸전(文武兼全) 토지묘(土地廟). 이곳은 땅의 신이라는 토지공(土地公)을 모시는 기복구원(祈福久遠)의 사당이었다. 넓은 토지묘는 어둠에 의지한 채 아름드리 고목에 둘러싸여 삐걱거리고 있었다. 삼경 무렵. 어둠이 사위를 지배할 때 토지묘 앞에 세 인영이 나타났다. 흑의서생과 두 명의 노인. 그들은 다름 아닌 석중옥과 한쾌, 그리고 오행수 조담이었다. 그들이 토지묘에 막 들어서려는 순간, "멈춰라!" 얼음을 깨뜨리는 듯한 차가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석중옥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약간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그 음성은 혈전공자 당욱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흐흐...... 한쾌 늙은이만 불렀는데 오행수도 같이 왔군. 하나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것 은 아니지." 음성에는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 오행수 조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 너희 사천당문과 노부와는 서로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거늘 어찌하여 노부의 딸을 납치했단 말이냐?" "흐흐...... 내가 사천당문의 인물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그 말에 중인들은 흠칫했다. "사천당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서 아앵을 풀어 줘라!" 조담이 호통쳤다. "흐흐...... 오행수! 다른 사람들은 네놈을 두려워할지 모르나 노부에게 오행수란 이름은 하룻 강아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 노부가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그때, 한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더니 앞으로 걸어나왔다. "헤헤...... 바로 노부 말인가?" 차가운 음성이 계속 들려 왔다. "흐흐...... 그렇다, 한쾌! 네놈은 무엇 때문에 노부가 이런 번거로운 일을 했는지 알겠지?" 한쾌는 품속에서 예의 그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이것 때문인가?" "그렇다." 한쾌는 다시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좌삼, 우칠, 홍청백이라...... 게다가 삼십육에 좌상...... 에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구나. 노제! 자네가 가지게." 그는 그것을 석중옥에게 휙 던져 줬다. 석중옥은 그의 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조담은 자신의 딸이 인질로 붙잡혀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성을 잃기 십상이었다. 한쾌 자 신도 비록 경공(輕功)의 제일인자였으나 무공만으로 따지자면 아무래도 약간 불안했다. 그래 서 석중옥에게 오늘 일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석중옥은 양피지 조각을 흔들어 보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물건이오?" 토지묘에서 예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 왔다. "그렇다. 네놈이 석중옥이냐?" "그렇소." 석중옥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내놓아라." 차가운 음성이 다시 토지묘 안에서 흘러나왔다. "먼저 사람이 무사한지 봐야겠소." "노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오. 흥정을 하려면 먼저 물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게 기 본이 아니겠소?" "흐흐......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닐 텐데......"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양피지 조각을 흔들었다. "이게 내 손에 있는 한 그 정도의 요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흐흐...... 듣던 대로 입이 날카로운 놈이군." 토지묘 안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다. 이리 들어와라!" 석중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토지묘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막 토지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리도 없이 그의 좌우에서 검이 뻗쳐 나왔다. 검이 날아오는 기세는 무서울 정도로 악독하고 빨랐다. 문 옆에 두 명의 흑의인이 바짝 붙어 있다가 석중옥이 들어오는 순간 습격을 해온 것이다. 석중옥의 뒤에 있던 조담과 한쾌의 입에서 조심하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차-앙! "흐-윽!" 금속성이 터지며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일어났다. "생각대로 비겁한 작자들이군." 석중옥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털썩!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두 눈을 부릅뜬 두 흑의인이 짚단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는 각기 상대의 검이 교차되어 찔려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석중옥은 이화접목(梨花接木)의 수법으로 흑의인들의 검을 상대방의 가슴으 로 끌어당겨 그들을 서로 상잔(相殘)케 했던 것이다. 하나 암습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쐐액! 석중옥이 채 두 걸음을 더 걷기도 전에 토지묘 안의 짙은 어둠 속에서 예리 무비한 검세(劍 勢)가 일직선으로 석중옥의 목을 노리고 정면에서 폭사되었다. 바깥은 밤이라도 달빛이 있었으나 안은 그야말로 칠흑과 같았다. 이런 어둠 속에서 살인적 인 암습을 받는다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상대는 석중옥이었다. 팟! 그의 목을 금시라도 꿰뚫을 듯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검날이 석중옥의 목까지 불과 일곱 치를 남겨 놓고 돌연 거짓말처럼 멈추고 말았다. 그 검날은 석중옥의 오른손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여 있었다.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 어둠 속에 있던 습격자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석중옥은 시퍼런 검광이 번뜩이는 검날을 두 손가락으로 잡은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 었다. "검은 비록 빨랐지만 아쉽게도 힘이 부족하군." "사호(四號), 물러나라. 너의 상대가 아니다." 다시 예의 차가운 음성이 앞에서 들려 왔다. 그 음성 속에는 은은한 놀람의 기색이 어려 있 었다. 그러나 사호로 불린 자는 그 말에 따를 수가 없었다. 검을 석중옥의 손가락 사이에서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땅! 맑은 음향과 함께 검의 가운데가 두 동강나면서 죽어라고 검을 잡아당기고 있던 흑의인이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석중옥은 천천히 사방을 쓸어보았다. 토지묘 안의 넓이는 약 사 장 가량이었다. 정면에는 토지공을 모신 제단(祭壇)이 있었는데, 토지공은 엉망이 된 채로 넘어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몸집이 우람한 복면인 하나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복면인의 몸에서는 거무튀튀한 기류(氣流)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어둠 속에서도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신광(神光)을 지닌 흑의인 두 명이 서 있었고, 제단 옆에는 또 다른 흑의인 두 명이 축 늘어진 소녀의 양팔을 하나씩 움켜잡고 있 었다. 그리고 그 앞을 다시 두 명의 흑의인이 막아 서 있었다. 밖에서 막 토지묘 안으로 들어오던 조담이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대변해 달려오려 했다. "아앵아!" "안 되네, 조 늙은이!" 한쾌가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조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아앵은 그가 늘그막에 낳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도 늙은 나이에 출산(出産)을 했는지라 조아앵을 낳고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조담의 일생은 오직 조아앵, 그녀가 전부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흉악한 자들에게 잡혀 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겠는가! 한쾌는 그의 내심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서두르다 혹시 실수라도 할 것이 염려되어 급히 만류한 것이다. 제단 위의, 몸집이 우람한 흑의인이 차갑게 말했다. "조가 계집애는 여기 있다. 물건을 내놓아라!" 석중옥은 여전히 처음의 담담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가 무사한지 봐야겠소." "흐흐...... 허튼수작은 생각도 마라! 조금만 함부로 움직이면 이 계집의 목숨은 없다." 우두머리 흑의인이 슬쩍, 조아앵을 양쪽에서 붙잡고 있던 흑의인들을 쳐다보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의 흑의인이 조아앵의 막혔던 아혈(啞穴)을 풀어 주었다. "아, 아버지...... 무, 무서워요......!" 다급히 입을 열던 조아앵은 다시 흑의인이 아혈을 점하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하자는 대로 해주었다. 이제 물건을 내놓아라." 우두머리 흑의인이 석중옥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물건은 여기 있소. 하나 그녀를 풀어 주기 전에는 넘겨줄 수 없소." 석중옥은 손에 든 양피지 조각을 흔들어 보였다. "흐흐흐...... 건방진 놈! 그까짓 몇 수 가지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참는 데도 한도가 있 는 것이다." 우두머리 흑의인의 음성과 함께 사방에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형성되었다. 그의 몸에서 흘 러나오는 가공할 기세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막강한 고수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조담은 그가 금시라도 조아앵을 해칠까 봐 조마조마해서 안타깝고 초조한 시선으로 연신 석 중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석중옥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남을 믿지 못하는 소인배(小人輩)와는 협상하기가 힘든 법이오. 나는 귀하가 그런 소 인배가 아니라고 믿고 있소." 석중옥의 교묘한 말에 우두머리 흑의인은 어이가 없었던지 석중옥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 다. "흐흐흐...... 교활한 놈이군! 좋다. 네놈을 믿어 보겠다." 우두머리 흑의인은 마침내 결정을 한 듯했다. "계집애를 데려가라. 그리고 물건은 동시에 넘겨라." 그의 음성에 따라 흑의인 중 한 명이 조아앵의 목에 검을 댄 채 그녀를 앞으로 끌고 나왔 다. "사호! 도해를 받아라." 우두머리 흑의인의 말에 조금 전 검을 부러뜨린 흑의인이 석중옥에게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 다. 검이 조아앵의 목에서 거둬지고 그들이 물러서는 순간 석중옥은 기관도해를 사호 흑의 인에게로 던졌다. 조아앵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석중옥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아앵아!" 조담이 다급히 부르짖으며 조아앵의 팔을 잡았다. 사호 흑의인은 기관도해를 받아 든 후 그것을 살펴보고는 제단 위의 우두머리 흑의인을 향 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우두머리 흑의인이 슬쩍 손을 흔들자 사호 흑의인의 손에 있던 기관도해가 실로 달아맨 듯 주르르 빨려 날아 올라갔다. 놀라운 격공흡물(隔空吸物)의 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격변(大激變)이 일어났다. 와르르! 돌연 토지묘의 지붕이 송두리째 무너지면서 한 인영이 유성과 같이 지붕을 뚫고 떨어져 내 리는 것이 아닌가! 그 인영이 떨어져 내린 곳은 공교롭게도 기관도해가 날아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격공흡물 에 딸려 날아가던 기관도해는 자연스럽게 그 인영의 손아귀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붕이 무너진 것과 기관도해가 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 같았다. "웬 놈이냐?" 뜻밖의 사태에 대경 실색한 우두머리 흑의인이 노호(怒號)를 터뜨렸다. 그의 행동은 말보다 훨씬 빨랐다. 노호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가 르며 인영을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가는 그의 우람한 체구는 마치 한 마리의 붕새와 같았 다. 우두머리 흑의인이 펼친 것은 바로 최절정의 신법(身法) 중 하나인 대붕전시(大鵬展翅) 였던 것이다. 파아아아! 우두머리 흑의인의 몸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시커먼 기류가 가공할 경력을 토해 내며 기관 도해를 가로챈 인영을 향해 먹물처럼 덮쳐 갔다. "흑살마라강(黑煞魔羅 )이군!" 인영이 그것을 알아보고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말보다 빨랐다. 인영은 한 손으로는 기관도해를 낚아채며 다른 한 손으로는 우두머리 흑의인의 공세를 막아 간 것이다. 그의 손이 칼날같이 세워져 검은 경력과 부딪친 순간, 꽈꽝! 엄청난 굉음이 터졌고, 인영은 허공에서 한바퀴 재주를 넘으며 내려섰다. 하나 내려설 여가도 제대로 없었다. 우두머리 흑의인의 뒤에 유령처럼 서 있던 흑의복면인 둘이 어느 사이에 그를 덮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기형검(奇形劍) 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두머리 흑의인도 허공에서 한차례 신형을 비틀더니 다시 인영을 향해 노도와 같은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그야말로 인영의 앞뒤에서 질풍과 같은 공세가 펼쳐진 것이다. "하하핫!" 인영의 입에서 광소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몸이 회전하며 양팔을 번개같이 뻗어 냈다. 그 양팔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덮쳐 오는 검날의 등을 차고 있었다. 디- 딩! 한소리 울림과 함께 인영은 그 반동으로 몸을 솟구쳐 방금까지 우두머리 흑의인이 있던 제 단 위에 내려섰다. 펑! 그 바람에 우두머리 흑의인이 벼락같이 쏘아 갈긴 먹물 같은 일장(一掌)은 토지묘에 웅덩이 만 하나 판 꼴이 되고 말았다. 지붕이 무너지며 기관도해가 인영의 손에 들어가고, 다시 우두머리 흑의인과 격돌한 후 그 가 제단 위에 내려서기까지는 그야말로 눈 한 번 깜짝할 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야말 로 급변의 연속이어서 중인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영과 흑의인들의 격돌에 쏠리는 순간, 석중옥의 부축을 받고 있던 조아앵이 느닷없이 석중옥의 가슴팍 오개대혈(五個大穴)을 후려갈긴 것이 다. 파파팍! 느닷없이 나타난 인영을 보고 있던 석중옥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연속 삼(三) 장(掌)을 가슴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윽!" 석중옥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아앵아! 이게 무슨 짓이냐?" 조담과 한쾌가 대경 실색하여 급히 그녀를 막으려 했다. "죽어라!" 조아앵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양손을 세차게 떨쳤다. 그 순간 벌떼같은 암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슈슈슈슈- 사방 천지가 온통 암기의 그림자로 뒤덮이는 듯했다. "팔...... 팔방풍우폭!" 한쾌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일성이 흘러나왔다. 팔방풍우폭(八方風雨暴)! 백팔십 개의 각기 다른 암기들이 백팔십 개의 각기 다른 각도와 속도로 폭풍처럼 쏟아져 나 가는 무림제일의 암기수법(暗器手法)이었다. 하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팔방풍우폭이 사천당문에서도 익힌 사람이 몇 되지 않는 비전 (秘傳)의 수법이라는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새까맣게 허공을 뒤덮은 엄청난 암기의 폭풍이 조담과 한쾌를 뒤 덮었다. 조담과 한쾌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데다 팔방풍우폭의 가공할 위세에, 피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의 몸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암기의 세례에 꼬치처럼 꿰뚫리려는 순간, 스슥! 하나의 흰 손이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뻗어 나왔다. 이어 그 손은 믿을 수 없게도 가공할 암기의 폭풍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으헛!" 조아앵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퍽! 퍼-억! "크아아악!"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진한 선혈이 뿌려졌다. 조아앵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눈에 삼 장 밖에 표표히 서 있는 석중옥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정녕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결과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석중옥은 분명 자신에 의해 치명적인 오대사혈이 짚였지 않은가? 더구나 무림제일의 암기수 법으로 공인된 팔방풍우폭이 이리도 허망하게 깨어질 줄은 진정 몰랐었다. 울컥! 조아앵의 눈빛이 암담히 흐려지며 검붉은 선혈을 토해 냈다. 거기에는 잘려진 내장(內腸)의 토막까지 섞여 있었다. 석중옥의 일격이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것이다. 그제서야 조담과 한쾌는 정신이 들었는지 안색이 대변했다. "아, 아앵......" "그는 조아앵이 아닙니다." 석중옥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담과 한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석중옥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에서 정교한 인피면구(人皮面俱) 한 장을 떼어 냈다. 순간, "혀, 혈전공자 당욱! 네, 네놈이......" 드러나는 얼굴, 그것은 놀랍게도 혈전공자 당욱이 아닌가! "그는 축골공(縮骨功)으로 자신의 몸을 축소시킨 뒤 조아앵으로 변장한 것입니다." 석중옥의 설명을 듣고서야 조담과 한쾌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정녕 소 름이 끼치도록 치밀한 함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렇다면 아앵은......?" 조담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급히 물었다. 석중옥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폐허(廢墟). 가뜩이나 무너져 가는 토지묘는 이미 거의 부서져 하늘이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하나의 인영이 태산같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중인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하고 말았다. "묵운편 사마진평......" 나타난 인영은 뜻밖에도 천하제일의 호한인 묵운편 사마진평이 아닌가! 대체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중인들을 바라보며 낭랑히 웃었다. "하하...... 왜, 놀랐소? 본인이 이곳에 오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소?" 석중옥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은 과연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시는군요." "하하...... 노제를 실망시키지 않아 다행일세." 중인들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들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라는 것은 조담이나 한쾌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더구 나 그들의 말은 사마진평의 등장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석중옥의 사전 지시에 의한 것이었 음을 알려 주고 있지 않는가! 사마진평이 중인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오늘밤에 석 노제가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소. 나는 이미 그와 결의형제(結義 兄弟)를 맺은 사이인데 어찌 그의 부탁을 거절하겠소? 그래서 부랴부랴 이곳으로 달려와 미 리 천장에 잠복해 있다가 그가 양피지를 던질 때 가로챘던 것이오." 그제서야 중인들은 모든 것이 석중옥의 치밀한 안배(按配)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석중옥의 출중한 지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보고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으으...... 서, 석중옥...... 물어 볼 말이 있다......" 쓰러져 있던 당욱이 피를 토하며 석중옥을 불렀다. 석중옥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냐?" "어, 어떻게 나에게 오대사혈을 짚이고도...... 사, 살아날 ..... 있었느냐......? 나, 나의 분장과 공격은...... 완벽했는데......" 당욱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긍지였다. 석중옥은 꾸역꾸역 피를 게워 내면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당욱을 한동안 응 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무공은 확실히 대단했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순순히 조아앵을 넘겨주리라고는 애당 초 생각지 않고 있었다. 너희들이 기관도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들을 살려 줄 리가 만 무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래서 나는 네가 나에게로 올 때 이미 이혈대법(移穴大法)을 펼 치고 있었다." 당욱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치밀한 추리와 직감도 놀랍지만, 이혈대법이라니...... 그것은 절전(絶傳)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나 이제는 전설상(傳說上)으로만 알려진 무공이 아닌가! 내력이 삼(三) 갑자(甲子)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시전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불세 출의 기공(奇功)인 것이다. 그런데 석중옥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했으니...... "크하하하...... 내 오늘...... 비로소 천하에 기인이 많음을 인정해야겠구나......" 당욱은 어이가 없었던지 광소를 터뜨리다가 피를 폭포수같이 토해 내며 혼절하고 말았다. 몸에서 검은 기류를 뿜어 내며, 우두머리 흑의인은 이 광경을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서서히 사마진평에게로 다가섰다. "당신이 천하제일의 호한이라는 사마진평이오?" "그렇소." 사마진평은 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도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음...... 칠대명인의 체면을 보아 물건만 돌려주면 당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따지지 않겠 소." "하하......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내가 그리도 만만해 보이오?" "흐흐흐...... 묵운편이란 이름으로 노부를 겁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두머리 흑의인의 온몸에서 스멀스멀 검은 기류가 스며나왔다. 사마진평은 검은 기류가 그의 몸을 감싸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흑살마라강을 그 정도까지 연마한 사람은 백년래 흑옥신마(黑獄神魔)뿐이었지." 그의 음성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우두머리 흑의인의 내력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흑옥신마(黑獄神魔). 그는 이미 육십 년 전부터 강호무림에 엄청난 흉명(兇名)을 떨치던 절세의 노마두(老魔頭) 였다. 그의 흑살마라강은 마도(魔道)의 칠대공력(七大功力) 중 하나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 나타난 것이다. "정말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군." 우두머리 흑의인, 흑옥신마가 차갑게 외치며 사마진평을 덮쳐 갔다. 꽈르릉-! 그의 흑살마라강이 검은 기류를 사방으로 토해 내자 제단이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하나 그 순간 사마진평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참백(斬魄)-!" "낙혼(落魂)-!" 두 마디의 짤막한 외침과 함께 두 줄기 악독 무비한 검광(劍光)이 좌우에서 사마진평을 덮 쳐 갔다. 흑옥신마의 곁에 있던 두 흑의복면인들이었다. 그들의 위세는 결코 흑옥신마에 못 지않았다. "이제 보니 단혼수라쌍절검(斷魂修羅雙絶劍)이었군." 검광 속에서 사마진평이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단혼수라쌍절검(斷魂修羅雙絶劍) 포가형제(包家兄弟)! 그들의 합격(合擊)은 악마지검(惡魔之劍)이라 불릴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은 정사(正 邪)의 중간이나 손을 쓰면 상대를 살려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쨍! 째-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사마진평이 팽이처럼 돌며 단혼수라쌍절검의 검세에서 벗어났다. 그의 신법이 얼마나 빠르고 자연스러웠던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명불허전이군! 사마진평! 하나 네놈도 오늘 끝장이다." 흑옥신마가 벼락같이 덮쳐 들었다. 사마진평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칠대마공(七大魔功)의 하나인 흑살마라강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겠다!" 그의 손이 구름이 흩어지듯 환영을 그려댔다. 꽝! "크으......" 그와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한 인영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흑옥신마가 십여 걸음이나 주르르 물러난 것이다. 내공(內功)으로는 오히려 그가 사마진평 의 상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세 갑자 내력(內力)의 나보다 내력이 훨씬 강하다니......" 흑옥신마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믿어지지도 않아서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사마진평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사마진평의 명성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 왔으나, 설마 그가 한 갑자(甲子) 전에 이미 천 하를 떨게 했던 자신보다 오히려 막강한 내공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했 었다. 그때였다. 휘-익! 장내에 번개같이 두 인영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천상(天上)의 신동(神童) 같은 준수한 백의소년과 그에 못지않게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놀랍게도 그들은 다름 아닌 위지명과 조아앵이었던 것이다. "아...... 아앵!" 조담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미친 듯이 뛰어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 아빠......" 조아앵도 그의 가슴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담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 아앵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조아앵의 고운 뺨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소, 소명이 구해 줬어요......" 위지명은 씨익 웃으며 석중옥에게 다가왔다. 석중옥의 입가에도 언뜻 미소가 어렸다. "녀석! 잘했다."헤헤...... 저는 공자님의 말씀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한쾌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야, 원......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노제?" 위지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삼경쯤 되어 몰래 혈전공자의 침실에 들어가 보라고 해서 갔더니 그곳에 아앵 이 묶인 채로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를 풀어 주고 같이 이리로 온 거예요." 한쾌의 얼굴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어떻게 아앵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나?" 석중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생은 다만 당욱이 이곳으로 아앵을 데리고 오지 않을 거란 짐작을 했고, 그렇다면 당욱이 아앵을 가둘 만한 곳은 자신의 침실뿐이라고 생각했지요." 그의 말은 비록 간단했으나, 한쾌는 내심 그의 치밀하고도 예리한 추리력에 다시 한 번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아앵을 자신의 침실에 가둬둔 당욱의 심기(心機)도 보통이 아니지 만, 그것을 꿰뚫어보고 위지명을 시켜 조아앵을 구출한 석중옥의 두뇌야말로 탁월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진정으로 감탄 어린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탄복했네. 노부 평생 자네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네. 무공이나 지략, 어느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군. 정말 자네는 대단한 사람일세." 한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석중옥을 칭찬했다. 조담, 조아앵 부녀는 아직도 서로 껴안은 채였다. 문득 조담이 얼굴을 들어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석 노제,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 석중옥은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보다는 우선 여기에서 해결되지 않은 일부터 먼저 끝내도록 하지 요." 그제서야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흑옥신마와 단혼수라쌍절검에게로 향했다. 흑옥신마는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내심 뜨끔했다. '보아하니 오늘 일은 제대로 되긴 다 틀렸군.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그는 번개같이 생각을 굴린 후 쓰러져 있는 당욱을 들쳐 업었다. 이어, 그는 번개같이 중인들을 둘러보며 싸늘히 소리쳤다. "오늘 일은 우리가 졌음을 시인하겠소. 하나 이 빚은 꼭 갚고야 말 거요." 인사불성의 당욱은 죽은 듯 그의 어깨에 업혀 있었다. 중인들은 더 이상 그들을 만류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흑옥신마는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장내를 둘러보다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가자!" 이어, 쓰-윽! 그의 신형은 단혼수라쌍절검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전말을 자세히 생각해 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급변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는지라 어느 누구도 사건의 정황을 자 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석중옥이 기관도해를 흑옥신마에게 전해 주고, 그때 사마진평이 잽싸게 달려들어 다시 가로채고, 조아앵으로 분장한 혈전공자 당욱이 석중옥과 조담, 한쾌에 게 암습을 가하고, 다시 조아앵과 위지명이 토지묘에 나타나는 등...... 그야말로 중인들의 얼을 쏙 빼놓는 격변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사마진평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이번 일은 완전히 자네의 작품이군."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조용히 반짝였다. "사실 당욱이 너무 방심했던 게지요." 한쾌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당욱의 계략은 완벽했네. 그들은 물건을 회수함과 아울러 우리까지 몰살하려 했으니...... 단 지 그는 자네를 너무 몰랐던 게지. 자네가 아니었으면 노부 등은 당욱의 암습에 꼼짝없이 당할 뻔했네." 조담이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혈전공자의 심기가 당이선생에 못지않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 소 그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네. 하나 그는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 지.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일세." 그의 음성에는 조금도 과장하는 빛이 없었다. 중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석중옥과 같은 사람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인 것이다. 그는 비단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두뇌가 명석하고 나이답지 않게 노련했다. 그의 이와 같은 점들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간절히 원하는 조건들이었다. 하나 석중옥과 같이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이란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제 20 장 쌍혈겁도(雙血劫刀) 비무대회 십(十) 일(日)째. 그날도 한쾌는 위지명과 조아앵을 붙잡고 침을 튀기며 비무대에 등장한 인물들을 차례로 설 명해 주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 말라 비틀어진 놈이 쓰던 무기는 해남도(海南島)의 철우삭(鐵雨索)이라는 것 으로......" 석중옥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으로 이제 막 비무대에 오르고 있는 한 인물이 들어왔다. 그는 눈부신 백의(白衣)를 걸친 청년이었다. 한데 그는 무척 기이했다. 피부는 희다 못해 파랗게까지 느껴지는 은색(銀色)이었고, 눈썹조 차 서리가 내려앉은 듯 새하얀 은빛이었다. 양손에는 역시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등뒤에도 흰색의 쌍도(雙刀)가 비스듬히 교차되어 있 었다. 그야말로 전신이 온통 하얀색 일색(一色)이었다. 석중옥의 시선은 백의청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석중옥은 그에게서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유난히 탈속(脫俗)한 기가 있어 그의 시선에 들어왔는데,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은 자였다. 석중옥은 신나게 떠들고 있는 한쾌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 노인! 혹시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시오?" 쉬지 않고 주절거리던 한쾌는 석중옥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이어 그의 눈이 비무대 위의 백의청년에게로 향해졌다. "저자 말인가? 글쎄...... 무척 신비하게 생겼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흰색이로군그래. 전생(前生)에 흰색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글쎄...... 도무지 모르겠는걸. 인상이 특이해서 한 번이라도 봤다면 기억에 남아 있을 텐데......?" 이어 한쾌는 의아한 듯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왜, 아는 사람인가?" "아니오, 모습이 약간 독특해서 궁금했을 뿐이오." 석중옥은 무심히 고개를 저으며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덕분에 한쾌를 비롯한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백의청년에게로 향했다. 비무대 위. 휘휙! 감숙(甘肅)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력추(大力鎚) 왕조상(王操祥)이란 자가 정 신없이 철추(鐵鎚)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의 철추 휘두르는 실력은 제법 뛰어나서, 대 위는 온통 무시무시한 철추의 그림자로 뒤덮 여 버렸다. 하나 백의청년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그의 맹공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했다.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 의 등뒤에 차고 있는 쌍도마저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용케도 왕조상의 살벌한 공세 속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피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하얀 장갑을 낀 그의 우수가 가볍게 앞으로 뻗어졌다. 횡소천군(橫掃千軍)! 이 초식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무림인이 아니라 그 옆집에 사는 삼 척의 꼬마라 해도 이 초식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데 보라! 어느새 대력추 왕조상의 목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평범한 횡소천군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장내는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했다. 모두들 왕조상이 방심을 하여 어이없게 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 석중옥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고수! 고수로구나!' 그의 무거운 시선이 위지명을 향했다. "조금 전에 본 백의청년의 무공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위지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별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철추대한이 좀 방심한 것 같군요." "방심한 것이 아니다. 백의청년은 비록 평범한 횡소천군을 펼쳤지만 그 속에는 다른 기이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쾌가 의아한 듯 물어 보았다. "노제!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그가 횡소천군을 펼칠 때 장갑을 낀 그의 손에서 실낱같이 가느다란 백선(白線)이 뻗 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여기서 저기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런 걸 보았다는 겐가?" 한쾌의 말마따나 일행이 있는 곳에서 비무대까지는 거의 오십여 장의 거리였다. 이런 거리 에서는 사람의 얼굴마저 제대로 보일까말까 할 정도였다. 하나 석중옥은 한쾌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계속 입을 열었다. "그 백선이 순간적으로 왕조상의 마혈(痲穴)을 짚었고, 왕조상은 찰나간에 몸이 굳어져 백의 청년의 횡소천군에 제압당한 것입니다. 그런 후 백의청년은 다시 왕조상의 마혈을 풀었지 요." 한쾌를 비롯한 중인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 시간이 너무도 빨랐기에 왕조상 본인조차도 자신이 잠깐 동안 마혈을 제압당했던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생은 저자를 보자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석중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던 한쾌가 급히 물었다. 석중옥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옛날에 눈[雪]을 미치도록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설이 내리는 날이면 혼자서 눈을 맞으며 밤새도록 서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내리는 눈을 보고 한 가지 가공 할 무공을 창안해 내게 되었습니다." 한쾌가 놀람에 찬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백설마도(白雪魔刀)!" 조담의 얼굴에도 경악이 가득했다. "석 노제! 자네가 말한 인물은 오십 년 전 두 자루 무시무시한 쌍칼을 휘둘러 천하를 공포 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일대(一代)의 살인마(殺人魔), 백설마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백설마도는 이십 년간 눈을 맞으며 연구한 끝에 날리는 눈발같이 난무하는 도 법(刀法)을 창안해 냈지요. 그것이 바로 백설쌍란도(白雪雙亂刀)입니다." 한쾌가 급히 물었다. "그럼 자네는 저 백의청년이 바로 그 희대의 살인마 백설마도의 백설쌍란도를 익혔다고 생 각하는가?" "백설쌍란도는 익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칼이 나가는 방향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자칫하 면 자신이 오히려 칼에 맞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설쌍란도를 익힌 사람은 양손이 상처 투성이가 되지요. 저 백의청년은 양손에 장갑을 끼었고 등뒤에 쌍도를 교차시키고 있으니 무척 공교롭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석중옥의 말은 나직하고 조용했으나, 한쾌와 조담의 얼굴은 심각하고도 딱딱한 긴장으로 굳 어졌다. 조아앵이 궁금한 듯 귀여운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빠! 백설마도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에요?" 조담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설마도의 백설쌍란도는 한번 펼치면 피하기가 불가능한 죽음의 도법이다." 백설쌍란도(白雪雙亂刀)! 이것은 당대의 살인마 백설마도가 떨어지는 눈을 보고 창안한 가공할 도법(刀法)이었다. 쌍도(雙刀)가 순식간에 상하전후좌우(上下前後左右)를 규칙도 없이 난무하여, 얼른 보기에도 정말로 하늘에서 눈발이 마구 떨어지는 것같이 보인다. 눈은 비록 떨어지는 속도는 느리지만 그것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백설마도 는 눈의 이 특성을 모방하여 백설쌍란도를 창조한 것이다. 왕년에 백설마도가 백설쌍란도를 펼치면 아무도 감히 받아 내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백설마도는 결국 백 년 만의 폭설(暴雪)이 퍼붓던 어느 날,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미친 듯이 칼춤을 추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 후로 무림에는 두 번 다시 백설쌍란도를 익힌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었다. "아! 그렇다면 저 사람의 무공은 가히 무적(無敵)이겠군요?" 조아앵이 귀여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토해 냈다. 한쾌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요 꼬마 계집애야! 그건 너무 성급한 생각이다." "왜요?" "무공일로(武功一路)란 끝이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무적이란 말은 쉽게 쓸 수가 없지. 더구나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장강(長江)의 모래알처럼 많으니 더욱더 그러하다. 여기 있는 석 노제만 하더라도 그 백설쌍란도쯤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석중옥은 한쾌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아앵은 흑진주 같은 눈을 굴려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백의청년은 이미 가볍게 사승(四勝)을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장갑을 벗지도 않았고 등뒤에 맨 쌍도를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시합에서 절대 로 두 번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단 일(一) 초(招). 그것도 무림에 흔히 떠도는 평범한 일 초로써 승부를 낸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의 무공을 보고 반신반의했다. 펼치는 무공이 너무도 평범했기 때문이 다. 하나 그가 이승을 거두고 삼승, 사승을 올리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 다. 그래도 사람들은 설마 했다. 그가 사승을 거두고 마지막 도전자를 남겨 두었을 때도 설마 했다. 일차관문의 마지막 도전자로 맞선 사람은 오십 년 동안 흑도(黑道)를 주름잡아 왔던 대마인 (大魔人), 참혼마군(斬魂魔君) 서표(徐杓)였던 것이다. 서표는 비록 구대흉인에 끼지는 못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가공할 고 수였다. 그가 구대흉인에 들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구대흉인 중에서 서열 삼위(三位)에 있 는 구천검마(九天劍魔) 육전심(陸戰心)의 사제(師弟)였기 때문이었다. 참혼마군 서표는 잔인하기로 말하자면 중원 천지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우선, 생긴 것 하나만으로도 이 위인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는 대략 오십 가량 되었다. 깡마른 체구 하며 툭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 움푹 꺼져 들어간 눈...... 한마디로 인성(人性)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음침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지금, 참혼마군 서표는 두 눈에서 가공할 살기를 뿜어 내며 백의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흐...... 애송이 놈! 무공이 제법이더구나. 이름이 뭐냐?" 백의청년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쌍혈겁도(雙血劫刀) 단사옥(端邪玉)!" 지극히 건조하고 삭막한 음성이었다. "쌍혈겁도 단사옥?" 서표의 눈초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피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 아닌가? 하나 그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내의 어느 누구도 쌍혈겁 도 단사옥이란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다. 백의청년의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흰 선이 그어졌다. 흰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그 웃음은 어쩐지 섬뜩해 보였다. "당신으로선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될 테고......" 서표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기분 나쁜 놈이군!' 단사옥은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나는 한 가지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소." "취미......?" "나는 평생을,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고수들을 죽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아 살아 왔소. 특 히 상대를 고통없이 단 일 격에 죽일 때 나는 최고의 기쁨을 만끽하오. 상대가 강할수록 나 의 만족도 커지고......" "흐흐...... 취미치고는 제법 마음에 드는 것이로군." 서표의 최대의 취미 또한 살인(殺人)이었다. 그는 이유도 없이 살인을 즐겼다. 일단 죽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죽 여야 직성이 풀린다는 위인인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철저한 실전 위주의 살인검법(殺人劍法)은 아직까지 적수를 찾지 못하고 있 다지 않던가! 단사옥은 무표정한 시선을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허연 구름이 천천히 떠가고 있었다. "당신은 가급적이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펼치시오. 두 번째 기회는 아예 없 을 테니까!" "건방진 놈! 가만히 두고 보니까 점점 더 귀엽게 노는군그래." 서표의 눈이 스산하게 변했다. "흐흐...... 네놈의 호기를 높이 사 원한다면 본좌의 특급호위로 임명해 주겠다. 어떠냐?" 단사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죽을 준비가 다되었소?" "미친놈......!" 서표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피어올랐다. 단사옥은 여전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흡사 자신의 앞에 아무도 없는 듯, 오연하게 천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서표는 어떤 압박감 같은 것을 느꼈다. 서표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삿놈이 아니다. 어쩌면 평생 처음 만나는 강한 놈일지도 모른다.' 서표는 단사옥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어떤 기세를 느끼고 그를 경시하던 마음을 버렸다. 질식할 듯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터질 듯 사위(四圍)가 팽창되고, 드디어 영겁의 정적 을 찢어발기며 시퍼런 섬광이 작렬했다. 번...... 쩍! 서표의 몸에서 한 줄기 혈광(血光)이 뻗어 나와 단사옥의 몸을 휘감았다. 아아...... 그 가공할 빠름을 뉘라서 막을 수 있겠는가! 중인들의 눈에는 단사옥의 몸이 혈광에 잘려져 나가는 광경이 금시라도 보일 듯했다. 하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르릉!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단사옥의 어깨 위에 있던 쌍도가 그의 어깨를 떠났다. 쌍도 는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고, 빠른 듯하면서도 느리게 한차례 움직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한데 그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전개되었다. 난데없이 사방이 일시에 눈송이로 뒤덮이는 듯 수십, 수백 개의 새하얀 광망이 비무대 위에 가득 퍼진 것이다. 눈이 부실 듯 파란 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가 천지(天地)를 뒤덮을 듯 퍼부어져 내려오는 모 습을 상상해 보라! 어찌 그것을 현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 그 눈송이는 평화롭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섬뜩함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것 은 끝도 모를 진득한 살기(殺氣)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윽!" 참혼마군 서표가 덮치던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르게 머리를 감싸 쥐며 튕겨 나왔다. 서표는 단사옥과 오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몸을 우뚝 세웠다. 그의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고, 그의 이마에는 가느다란 혈선(血線) 하나가 수직으로 그어져 있었다. 문득, 서표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악마(惡魔)의...... 도법(刀法)...... 이, 이것은 백설(白雪)......"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쩌쩍! 쩍-! 마치 잘 익은 수박이 쪼개지듯 서표의 두개골이 혈선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졌 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쿵! 서표의 육신은 썩은 짚단처럼 아무렇게나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쏴아아...... 그제서야 시뻘건 핏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대 위를 붉게 물들였다. 쌍혈겁도 단사옥! 그는 그제야 비로소 허공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의 모습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머리와 어깨, 심지어는 어깨 위에 꽂혀 있는 쌍도마저 티끌만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아......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단 말인가! 어찌 보면 서표의 두개골이 마치 저 절로 쪼개진 것도 같은 이 가공할 일을 말이다. 장내에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중인들은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의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를 떨어 울리던 공포의 살인마 참혼마군 서표가 단 일(一) 도(刀)에 한줌의 고혼(孤魂) 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죽음 같은 정적은 곧 태산이 무너질 듯한 환호로 바뀌었다. "와아아-!" "와아-! 최고다!" 엄청난 박수 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중인들은 미친 듯이 쌍혈겁도 단사옥의 가공할 무공에 찬사를 보냈다. 전신이 온통 백색 일색인 기이한 청년. 그가 보여 준 놀라운 무공은 중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족한 것이었다. 단사옥은 비무대회에서 일약 폭풍의 눈이 되어 버렸다. 한쾌는 눈살을 찌푸리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제의 짐작이 맞았군. 저자가 쓴 것은 죽음의 도법이라는 바로 그 백설쌍란도야......"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설쌍란도의 무서운 점은 한번 펼치면 시전한 당사자조차 그것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 지요. 그만큼 패도적이고 잔인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일명 악마의 도법이 라고도 불리지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도법일세." 한쾌는 괜스레 몸이 으스스 떨린다는 듯 가볍게 몸을 움츠려 보였다. "저 단사옥인가 뭔가 하는 놈은 정말 노부 평생 보기 드문 잔인한 놈일세. 도법도 도법이지 만 그 심성 또한 악랄하기 그지없군." 하나, 그 때문에 비무대회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쿠쿠쿵......! 드디어 일차관문의 마지막 날인 비무대회 십오(十五) 일(日)째 날이 밝았다. "와아아-!" "와아-!" 대회장인 연무 광장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비무대회의 열기는 갈수록 고조되어 이제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다시피 했다. 더구나 오늘은 비무대회 일차관문의 마지막 날인만큼 그 열띤 경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 었다. 오늘 가장 먼저 일차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오행수 조담이었다. 그는 두 명의 도전자를 가볍게 물리친 후 더 이상 도전자가 나오지 않아 여유있게 일차관문 을 통과했다. "야아-!" 위지명과 조아앵은 신이 나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다음 번에는 한쾌가 대 위로 올라섰다. 그는 올라서자마자 날렵한 신법과 기학괴초(奇學怪 招)로써 연이어 다섯 판을 승리로 장식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한쾌는 비단 신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초식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석중옥은 전에 그와 한번 손속을 겨룬 적이 있었지만, 그의 복잡한 무공에는 내심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쾌에 이어서는 석중옥이 출전하기로 묵계되어 있었다. 한쾌가 일차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자 석중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핫-!" 엄청난 광소성과 함께 대 위로 훨훨 날아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펄럭이는 괴노인이었다. 시뻘건 혈발(血髮)은 마구 뒤엉킨 채 나부꼈고, 앙상한 몸은 흡사 마른 대나무에 붉은 장포 를 걸쳐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움푹 파여 들어간 두 눈에서 뿜어지는 눈빛은 사악하기 그 지없었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혀, 혈발마겁(血髮魔劫)이다!" "으...... 처, 천축(天竺)의 대마왕(大魔王)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중인들의 안색이 경악과 공포로 굳어졌다. 혈발마겁(血髮魔劫)! 그는 천축제일(天竺第一)의 고수였다. 그의 시뻘건 머리카락은 그가 극사(極邪)한 마공(魔功)을 연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중원(中原)에 이미 삼십 년간 나타나지 않아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있 었다. 그가 구대흉인에 끼지 않은 것은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가 중원에 잘 나 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혈발마겁은 비무대 위로 날아올라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어느 놈이 노부와 겨루겠느냐?" 말이 웃는 것이지, 사실은 그의 윤기없는 푸르죽죽한 입술이 씰룩거렸을 뿐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공포의 빛을 띤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석중옥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내가 나갈 차례인가?"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왔다. 비무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그들은 설마 혈발마겁과 겨루겠다는 미친 작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니, 저자가 미쳤나?""쯧쯧...... 보아하니 나이도 제법 젊은 것 같은데...... 괜히 객기를 부리 다가 앞날이 창창한 나이에 죽게 생겼구먼." 하나 중인들의 그런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석중옥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여 느 무림인들이 흔히 쓰는 신법조차 펼치지 않고 오십여 장을 걸어왔다. 이때, 비무대의 중앙에 마련된 특별석에 앉아 있던 백상아의 안색에 언뜻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석중옥의 훤칠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신비한 사람이야. 하필이면 혈발마겁 같은 고수에게 도전하다니......' 바로 그때, "아는 사람이냐, 상아야?"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백철군의 두 눈에 번뜩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우연히 한번 만나 인사를 나눴을 뿐이에요." "무공이 높을 테지?" 백상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유백령의 말로는 그가 백쾌당의 만상공자를 이 초 만에 물리쳤다고 하던데...... 저 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백철군의 무심한 눈에서 기광이 번뜩했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들은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기에도 바쁜데 그는 태연히 신법조차 펼치지 않고 있다. 그것 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고 쓸데없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에게서는 일문(一門) 의 대종사(大宗師)와 같은 기도가 풍기는군. 저런 고수가 있다는 말을 왜 나는 듣지 못했을 까?" 백상아는 백철군이 누구를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처음 들어 보았다. 백철군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 칭찬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괜찮군!'하는 한마디만 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감격할 판이었다. 그런데 석중옥에게는 뜻밖의 칭송을 하는 것이다. 백상아는 왠지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 같았다. 석중옥은 천천히 비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혈발마겁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흐흐...... 애송이 놈! 네놈이 감히 노부와 겨루어 보겠다고......? 크하하핫!" 그는 고개를 벌떡 젖히고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굶주린 까마귀떼가 울부짖는 것 같은 괴기로운 웃음이었다.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무심하게 빛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공의 고저(高低)를 말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오." 혈발마겁의 눈에서 살기가 무섭게 일렁거렸다. "흐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군. 감히 노부의 말에 대꾸를 하다니......" 석중옥은 묵묵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연히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 려다보고 있었다. 장포 자락이 펄럭이며 혈발마겁의 머리털이 노화로 빳빳하게 곤두섰다. "건방진 놈, 살기가 싫은가 보구나!" "......" 여전히 묵묵부답(默默不答). 석중옥은 새파란 하늘 위로 두둥실 떠가는 흰구름을 쳐다보고 있을 뿐, 혈발마겁 따위는 안 중에도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르르...... 혈발마겁의 비쩍 마른 체구가 미친 듯이 떨렸다. 분노가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동시에 그는 우수를 칼날처럼 곤두세워 벼락같이 석중옥을 덮쳐 갔다. 쐐애액-! 괴이한 음향과 함께 한 줄기 청광(靑光)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석중옥을 쏘아 왔다. "단마수(斷魔手)로군!" 석중옥은 그에게로 힐끔 시선을 돌리며 청광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 다가 돌연 중지(中指)를 구부린 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파파팟-! 반월형(半月形)의 강기가 회오리처럼 일어나며 청광과 맞부딪쳤다. 꽈- 꽝! 일진의 폭음과 함께 혈발마겁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혈발마겁은 경악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이, 이럴 수가......"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단마수는 금석(金石)이라도 종잇장처럼 바스러뜨리는 가공할 마공(魔功)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물리치기는커녕 자신이 오히려 새파란 애송이한테 밀리다니...... 석중옥은 그를 흘끗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혈발마겁도 별거 아니군." 혈발마겁의 눈빛이 벼락같은 살기를 뿜었다.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혈발마겁은 성난 야수처럼 석중옥을 향해 덮쳐 왔다. 휘리리릭......! 그는 대붕(大鵬)처럼 덮쳐 가면서 순식간에 열여덟 번의 공격을 가했다. 웅...... 우웅! 파파팟......! 주위의 공기가 마구 진탕질을 치면서 광풍노해(狂風怒海)와 같은 공세가 석중옥에게 퍼부어 졌다. 하나 석중옥은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석중옥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문사처럼 느릿느릿 그의 공세를 피하고 있었다. 한데 금시 라도 격중될 듯한 그의 몸이 너무도 유연하게 혈발마겁의 공세 속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분명 혈발마겁은 번개보다도 빠르게 공격했고, 그는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 으나 눈앞에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였다. "찢어 죽일 놈......!" 혈발마겁은 더욱 눈에 살기를 띠며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가공할 공세를 펼쳤다. 쐐애애-액! 혈발마겁은 손바닥을 뒤집었다 펴면서 기이하게 손을 휘둘렀다. 순간 부챗살 같은 강기가 삼백육십 군데의 방위를 차단하면서 석중옥을 휩쓸어 갔다. 그것은 잠마산형수(潛魔散形手)라는 것으로, 혈발마겁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무공이었 다. 하나 석중옥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안력이 날카로운 무림인들은 그의 완만하게 움직이는 몸놀림이 겉보기와는 달리 수많은 상 승(上乘)의 절정신법(絶頂身法)들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스윽......! 두 발을 움직이지 않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비켜서는 자세는 화산(華山)의 암향표(暗香飄) 인가 싶더니, 허공에 비상(飛上)한 채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은 곤륜(崑崙)의 운룡구현(雲龍 九現), 그리고 혈발마겁의 머리를 뛰어넘는 신법은 천마행공(天馬行空)이었다. 도대체가 쏟아져 나오는 무공들이 하나같이 천하무림에 산재한 거의 모든 무공들인지라 혈 발마겁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냐?' 순식간에 백여 초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돌연 반격 한번 가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석중옥이 신형을 끌어올려 혈발마겁의 공세를 피한 후 깃털처럼 가볍게 그의 맞은편에 내려섰다. "당신의 무공은 이게 전부요?" 혈발마겁의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일순, 푸스스...... 스슷! 혈발마겁의 전신에서 괴이한 기운이 구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전신이 은은 한 핏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 그 기세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험하고 패도(覇道) 무쌍(無雙)한 것이었 다. 석중옥의 눈에서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혈천마공(血天魔功)까지 익히다니...... 이제 제법 싸워 볼 만하겠군." 순간, 콰콰콰쾅- 콰쾅-!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마치 태양이 폭발하듯 눈부신 광채가 비무대 위를 가득 채웠다. 그 광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석중옥의 전신을 송두리째 에워싸 버렸다. 찰나, 석중옥이 일신(一身)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기이한 각도로 우수(右手)를 칼날처럼 찔 러 갔다. 빠빠빡! 괴이한 음향과 함께 한 줄기 섬광이 혈천마공의 가공할 강기막을 뚫고 혈발마겁에게로 쏘아 져 갔다. "헛!" 혈발마겁은 대경성을 터뜨리며 엉겁결에 우수를 내뻗었다. 꽈- 꽝! 굉렬한 폭음성과 더불어, "크으윽!" 믿어지지 않게도 혈발마겁의 몸이 사오 장 밖으로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혈발마겁은 피를 토하며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중인들은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모두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혈발마겁이 누구인가? 천축제일의 고수로서 구대흉인에 버금간다는 천하의 대마왕이 아닌가! 그런 그가 불과 십 초도 되지 않아 피를 토하며 나뒹굴다니...... 중인들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침까지 흘려 가며 넋을 잃고 석중옥을 바라보는 인물도 있었다. 문득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여의노사 백철군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저자가 펼친 것은 천하마공(天下魔功)들의 극성(剋性)이라는 낙화섬수로군. 무공도 무공이 지만 펼친 시기와 몸의 자세가 아주 좋아." 그의 음성은 비록 작았으나 바로 옆 자리에 앉은 백상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더욱 화사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때 백상아는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서 멀지 않은 좌석. 두 눈에 기괴한 빛을 일렁이며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 로 남궁검문의 소문주인 철검공자 남궁유룡이었다. 백상아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선뜩 놀랐다. 그 시선은 질투와 노화(怒火), 들끓는 애증(愛 憎)으로 괴이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나 남궁유룡은 백상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급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예의 유유하고 잔잔한 빛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백상아는 의구심이 깃들인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제 21 장 천하구도(天下九刀) 석중옥은 혈발마겁을 물리친 후 묵묵히 대 위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흑발에 반쯤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어 아무도 그 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인들은 혈발마겁을 너무도 쉽사리 격퇴시킨 그의 무공에 놀라 아무도 선뜻 도전하는 사람 이 없었다. 하나 오늘은 일차관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도전할 기회도 없는 것이 다. 휘- 휘- 휙! 비무대 위에 도전자가 나타났다. 한데 공교롭게도 북쪽과 남쪽, 서쪽에서 세 명의 도전자(挑戰者)들이 거의 동시에 날아온 것 이 아닌가! 그들은 비무대 위로 날아오른 순간 상대방을 발견하고 서로 쓴웃음을 지었다. 북쪽 차일에서 날아온 인영은 커다란 도(刀)를 든 갈의대한이었다. 하북(河北)의 명가(名家) 인 팽가(彭家)의 고수, 패환도(覇環刀) 팽우극(彭宇極)이었다. 그는 텁수룩한 얼굴에 고소를 지으며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李) 형(兄), 마(馬) 형(兄)! 소제가 양보할 테니 두 분 중 한 분이 먼저 비무를 하시구 려." 눈부신 백의를 입은 중년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말씀이오, 팽 형? 무공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당연히 팽 형이 먼저......" 그는 태산(泰山) 일대에서 쾌검수(快劍手)로 유명한 탈혼검(奪魂劍) 이자량(李自良)이었다. 그러자 그 옆의 흑의인도 잽싸게 거들었다. "그렇소. 우리들은 천천히 겨루어도 늦지 않으니 팽 형이 먼저......" 쭉 찢어진 눈에 음산해 보이는 이 인물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오독잔혼객(五毒殘魂客) 마무 량(馬無量)이었다. 팽우극이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이 이렇게 계신데 어찌 제가 먼저 할 수가 있겠소? 그러니 두 분 중 한 분이......"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속셈은 뻔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무공은 서로 백중(伯仲)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니 먼저 싸워 괜히 공력을 소비했다가는 나중에 손해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 상대가 먼저 시합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서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세 분은 그런 일로 다툴 필요가 없소."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석중옥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팽우극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세 분은 다툴 필요 없이 아예 한꺼번에 소생과 겨루는 것이 어떻겠소?" 아연 실색! 사람들은 이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인들은 석중옥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정 도였다. 도대체 지금 대 위에 올라와 있는 고수들이 누구던가? 하북 팽가의 패환도 팽우극. 탈혼검 이자량. 오독잔혼객 마무량. 그야말로 당금 무림의 절정고수라 할 만한 인물들이 아닌가! 그들은 각기 일차관문을 충분히 통과하고도 남을 만큼 가공할 무공을 지닌 고수들인데 그런 그들과 단독으로 겨루겠다니...... 백상아는 여전히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에 대 위의 세 고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들의 의중을 알고 있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세 분이 불초에게 패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만약 세 분이 불초를 이긴다면 그때 가서 세 분이 다시 겨루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의 말에 세 고수의 마음이 약간 움직였다. 사실 일 대 일로 싸운다면 혈발마겁을 간단하게 물리친 석중옥을 이긴다고는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삼 대 일이라면 사정은 판이해진다. 석중옥이 제아무리 천하에 다 시없는 고수라 할지라도 그들 삼 인의 협공을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석중옥의 제안은 그들 세 사람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불리할 것이 전혀 없지 않겠 는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순간, 탈혼검 이자량이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하는 실로 그 기개가 하늘을 뒤덮는 대장부(大丈夫)이구려. 나는 귀하의 제의에 동의하겠 소." 팽우극과 마무량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뒤 서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은 얼굴에 싸늘한 냉소를 담고 이자량과 함께 나란히 섰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놈이군." 오독잔혼객 마무량은 흉소를 터뜨리며 품속에서 기이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끝이 기묘하게 된 기형(奇形)의 단도(短刀)였다. 그것은 끝이 갈고리같이 휘어 있었고, 날이 시퍼런 것으로 보아 극독(劇毒)을 바른 것이 분명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이 기형도(奇形刀)를 보더라도 그의 평소 성품이 얼마나 잔 인하고 악랄한지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두 고수도 각자 무기를 뽑았다. 패환도 팽우극은 자신의 보도(寶刀)인 날이 두꺼운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탈혼검 이자량은 차가운 기운이 뽀얗게 흐르는 한 자루 청강검 (靑剛劍)을 뽑아 들었다. 석중옥은 태연하게 선 채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 그럼!" "간다!" "차앗-!" 커다란 외침과 함께 드디어 세 고수의 대공세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살기(殺氣)와 검기(劍氣)! 팽우극의 도에서 시전되는 것은 팽가의 비전인 자전십삼풍(紫電十三風)이었다. 그리고 탈혼검 이자량은 빠르기로 유명한 분뢰십이검(奔雷十二劍)을 시전했고 오독잔혼객 마무량은 악랄하기 그지없는 수라참마도(修羅斬魔刀)를 쏟아 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강호를 오시(傲視)할 수 있는 가공할 절학들이었다. 슈슈슈슈-! 파파파파파! 순식간에 장내는 삼엄한 검광(劍光)과 도광(刀光)으로 자욱이 뒤덮였고, 몰아치는 압력을 이 기지 못해 사방에 꽂은 깃발들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석중옥의 몸은 검막(劍幕)과 도기(刀氣)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공증인석의 철혈검존 남궁황이 해천쌍로 중 반옹 곡현을 향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력이오. 보아하니 저 흑의서생은 일 초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말겠구려." 반옹 곡현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글쎄...... 확실한 것은 두고 봐야 알겠지." 철혈검존 남궁황은 그의 말에 약간 의아했으나 다시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비무대 위에서는 오직 삼엄한 검막과 그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한 줄기 연기 같은 흑영만 이 가득할 뿐이었다. 파파파파팍-! 슈슈슈슈슈...... 예리한 검풍과 도기는 장내를 미친 듯이 휩쓸고 갔다. 석중옥의 몸은 그 엄밀한 검세 속에 서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석중옥이 이제 막 피를 토하고 쓰러지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같았다. 하나 금시라도 쓰러질 듯하던 석중옥의 신형은 계속 엄밀한 공세 속을 스치듯 지나가고 있 었다. 팽우극은 자신의 도가 이미 석중옥의 몸을 다섯 번이나 벨 듯하면서 그냥 지나감을 알았다. 마무량은 자신의 독도(毒刀)가 석중옥의 가슴팍을 거의 찌를 뻔한 것이 여러 번임을 깨달았 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사력을 다해 보아도 더 이상 석중옥의 몸에 칼을 접근시킬 수가 없었 다. 거의 벨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것이었다. 마무량은 몇 번이나 그런 일을 당하자 문득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혹시 이놈이 절세(絶世)의 신공(神功)이라도 펼치고 있는 게 아닐 까?'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석중옥이 무슨 별다른 무공을 펼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탈혼검 이자량이 갑자기 몸을 빙글 회전시킨 후, 용수철이 튕겨나듯 전권(戰圈) 밖으로 몸을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는 들고 있던 검을 거두며 침중하게 말했다. "나는 도저히 이런 싸움을 못 하겠소. 이자량은 깨끗이 패배를 자인하오." 중인들은 난데없는 그의 말에 모두 대경 실색했다. 특히 팽우극과 마무량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형! 그게 무슨 말이오? 싸움은 이제 막 시작인데......" 이자량은 말없이 그들의 옷을 가리켰다. 그들은 급히 자신들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으음......!" "이, 이럴 수가......?" 그들의 안색은 떫은 감을 씹은 듯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들의 옷은 여기저기에 손가락이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었다. 거 의 삼십여 군데나 뚫려진 구멍 사이로 그들의 속살이 훤히 내비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 이 같은 구멍이 생겨났단 말인가?' 중인들은 의혹과 경탄이 가득한 시선으로 정신없이 장내를 주시했다. "혹시...... 귀하께서 쓰신 무공은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서설지(瑞雪指)가 아니오?" 탈혼검 이자량이 자신의 몸에 난 구멍을 내려다보다가 석중옥을 향해 정중히 물어 보았다. 석중옥은 뜻밖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이 대협의 안목은 과연 놀랍구려." 이자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귀하는 과찬의 말씀을 마시오. 나는 일전에 '천하신공총요(天下神功總要)'라는 기서(奇書)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서설지가 천하지법(天下指法)의 최고봉이라 적혀 있었던 것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오. 귀하께서 손에 사정을 보아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하오." 이어 그는 석중옥에게 정중히 포권을 해 보였다. "다음날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차례 앙천 광소를 터뜨리더니 훌쩍 몸을 날려 장내에서 사라졌다. 팽우극 또한 얼굴을 침중히 굳히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무공은 과연 놀랍구려. 팽 모는 귀하에게 졌음을 솔직히 인정하외다. 그럼......!" 그의 신형도 이자량을 따라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마무량은 그들이 이토록 갑작스럽게 떠날 줄은 몰랐는지라 약간 당황했다. 그의 눈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싸늘한 냉소와 함께 훌쩍 허공으로 몸을 날 리며 쌍수를 어지럽게 휘저었다. 다음 순간, 슈슈슈슈슉!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소매에서 난데없는 푸른 섬광이 석중옥을 향해 쏜살같이 뻗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중인들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치...... 칠보추혼망(七步追魂芒)이다." 칠보추혼망(七步追魂芒)! 한번 뻗어 나가면 반드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암기가 아닌가! 그 악랄하고 치명적인 위력 때문에 무림의 오대금용암기(五大禁用暗器) 중 하나로 분리되어, 강 호상(江湖上)에서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을 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칠보추혼망을 천하의 군웅(群雄)들이 주시하고 있는 비무대회에서 사용하다니...... 석중옥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악독한 심보로군!" 갑자기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연기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크윽!" 다급한 비명이 마무량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주르륵 물러나더니 한 모금의 선혈을 왈칵 토해 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 나가고 살기가 가득하던 눈은 흐릿해졌다. 석중옥의 손에 잔혈(殘穴)이 짚여, 무림인에게는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무공(武功)이 폐지되 고 만 것이다. 갑자기 질식할 듯한 정적이 사람들의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억겁(億劫) 같기도 하고 일수유(一須庾)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난 후, "이건 무효다!" 싸늘한 외침과 함께 비무대 위로 한 인영이 번쩍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깡마른 몸집의, 두 눈에서 엷은 혈광(血光)이 뿜어 나오고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짐승 의 털처럼 뻣뻣한 백발이 무릎까지 내리덮었으며, 낡고 색 바랜 황포에는 기이한 무늬가 잔 뜩 그려져 있었다. 푸르죽죽한 안색과 입술 왼쪽 위에 달린 붉은 점...... 왠지 음울하고 음산 무비한 기운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유령산군(幽靈散君)이다!" 유령산군(幽靈散君) 좌령(左靈)! 그는 일전에 쌍혈겁도 단사옥에게 죽은 참혼마군 서표와 함께 중원이마군(中原二魔君)이라 불리는 대마두였다. 성격이 음침하고 잔인하며, 조그만 일에도 앙심을 품고 꼭 복수를 하고 야 마는 독종(毒種) 중의 독종이었다. 더구나 그는 오독잔혼객 마무량의 사숙이었으니...... 유령산군은 핏빛 광망이 어린 시선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이 시합은 인정할 수 없다. 저 애송이 놈이 사술(邪術)을 쓴 거다!" 그의 음성은 인간의 것 같지 않게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석중옥은 입가에 싱긋 웃음을 매달았다. "그럼 귀하는 어떻게 해야 그것이 사술이 아니란 것을 믿겠소?" 유령산군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흐흐흐...... 꼬마 놈아! 노부를 한번 제압해 봐라. 그럼 믿어 주겠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 중인들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유령산군은 지금 자신의 사질인 오독잔혼객 마무량이 패하자 공연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이 다. 무림인들은 그의 무공이 구대흉인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심 성은 구대흉인 중 누구보다 잔인했다. 한데 석중옥은 단지 입가에 빙긋 웃음을 매달았을 뿐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언제 시작하겠소?" 유령산군은 석중옥의 담담한 말에 두 눈 가득히 진한 살기를 피워올렸다. "애송이 놈! 지금이다!" 그는 벼락같은 호통을 지으며 몸을 번개같이 선회시켰다. 파앗! 그의 신형이 꺼지더니 순식간에 수십 개의 환영(幻影)으로 변했다. 과연 유령(幽靈)이란 외 호가 어울릴 만큼 가공할 신법이었다. 동시에 유령산군의 손이 갈고리처럼 오므라들었다. 쐐-액! 그의 귀수(鬼手)는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부터 석중옥의 목을 잡아채 왔다. 유령산군의 성명 절기인 유령잠형보(幽靈潛形步)와 색혼조공(索魂爪功)이었다. 석중옥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순간, 휘-익! 그는 한 줄기 바람처럼 수십 개의 환영이 난무하는 공간 속으로 짓쳐 들어갔다. 무엇이 어떻게 된 걸까? 두 사람의 수법과 발 놀림은 너무도 빨라 중인들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희끗한 인영들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싸움이 벌어지고 있나 보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백철군을 비롯한 몇몇의 최절정고수들은 한 순간 분명히 보았다. 석중옥의 손이 한 마리 신룡(神龍)처럼 허공을 가르고 유령산군의 완맥을 낚아채는 것 을...... 그리고 유령산군의 몸이 허공으로 가랑잎처럼 날려가는 것을...... 쿠다당! "크윽!" 유령산군은 재수없게 얼굴부터 땅에 처박혔다. 그는 얼굴이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채 비틀거 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석중옥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사술의 맛이 어떻소?" 유령산군은 악독한 시선으로 석중옥을 노려보았다. 하나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자 그는 감히 발작하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이...... 이놈! 어디 두고 보자!" 그는 발악성을 지르더니 몸을 휙 돌려 비에 젖은 참새처럼 한쪽에 넋을 잃고 서 있는 마무 량의 손을 낚아챘다. "가자!" 그들의 몸은 이내 중인들의 시야에서 아득히 사라져 갔다. 중인들은 마치 어두운 동굴을 빠져 나온 사람들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절 정고수 사(四) 인(人)을 단숨에 해치운 석중옥을 향해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와아아......" 이로써 석중옥은 비무대회의 일차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게 된 것이다. 따가운 햇살이 그의 등뒤에 무심한 얼굴로 내리쬐고 있었다. * * * 남궁검문의 중앙에 위치한 넓은 취의청(聚議廳). 하나 대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화려했다. 취의청 바닥에는 회회국(回回國) 특산의 희귀한 융단이 깔려 있고, 아름드리 백옥(白玉)기둥 이 그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융단의 가운데 길다란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수십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상 위 에는 산해진미(山海珍味)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아찔할 정도의 주향(酒 香)이 중인들의 코를 진동했다. 지금은 남궁검문에서 일차관문의 통과자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있는 중이었다. 제일 상석(上席)에는 천하제일의 고수라는 여의노사 백철군이 오연하게 앉아 있었고, 그의 좌우로 이번 비무대회의 주관인인 철혈검존 남궁황, 해천쌍로, 철검공자 남궁유룡, 남의옥봉 남궁혜와 백상아 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쭉 펼쳐진 탁자에 묵운편 사마진평 등의 일차관문 통과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열두 개의 악기로 연주되는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장내에서는 연신 호탕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하하......!" "허허......!" 장내의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때였다. 문득 철혈검존 남궁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중한 외침을 토해 냈다. "하하하...... 여러 고인들께서 이번에 일차관문을 통과하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 니다." 그의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하하...... 본인은 이번 비무대회에 실로 너무도 많은 영웅(英雄)들과 기인(奇人)들께서 참석 해 주신 데 심중으로 크나큰 놀라움과 함께 기쁨을 느꼈소이다." "......!" "사실 본 문에서는 이번에 뜻밖의 기인고수들이 많이 등장한 것에 몹시 놀라고 있소이다. 그래서 본 문에서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하기로 했소."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의혹과 궁금함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궁황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본 문에서는 이번 비무대회는 여기서 잠정적으로 마치고, 일차관문을 통과하신 여러분들을 모두 한백의 장보고로 모시기로 했소이다." "아......!" 중인들의 눈에서 일제히 경악과 흥분의 기색이 가득 피어올랐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사실 이번 비무대회에는 예상외로 강자(强者)들이 많이 등장한 탓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승부를 점치지 못했었다. 한데 이들 모두를 한백의 장보고로 안내하겠 다니...... 한쾌가 히죽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히히...... 이거 맥빠지는데...... 오랜만에 멋지게 몸 좀 풀어 보려고 했더니......" 중인들 중 몇몇은 한쾌의 말대로 약간 맥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더 이 상의 비무가 없이 바로 한백의 장보고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 다. 바로 그때 난데없이 벽력같은 호통이 들려 왔다. "이놈! 한가 늙은 도적아, 이제 보니 네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한쾌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호파파......" 그의 안색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는 인영, 어마어마한 거구에 오색의 알록달록한 채의를 걸친 노파는, 다름 아닌 전낭자 호파파가 아닌가!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제자인 곽무지가 서 있었다. 한쾌는 쥐눈에 어색한 웃음을 떠올리며 더듬거렸다. "호파파...... 아니, 호 낭자! 노부에게 어인 일이시오?" 호파파는 악을 쓰듯 외치며 금시라도 그에게 달려들 듯했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한가야! 네놈이 일전에 본 낭자에게 허튼수작을 부리고도 멀쩡할 줄 알았더냐? 어디, 오늘 혼 좀 나봐라!" 그녀가 마구 침을 튀기며 금시라도 달려들 듯하자 한쾌가 질겁을 했다. "이크! 호 할망구...... 아니, 호 낭자! 그때의 일은 그만 잊어버립시다." "이 도둑 영감쟁이! 허튼수작 말아라. 내 오늘 네놈의 그 생쥐 같은 두 눈깔을 기필코 면상 에서 떼어 내버리겠다." "제기랄......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정말 상종 못 할 할망구로다!" 한쾌는 마구 투덜거리다가 호파파의 눈이 흉흉해지자 움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호파파 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쾌를 향해 다가왔다. 중인들은 모두 그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지랄 같은 성질을 잘 알고 있는지 라 아무도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한쾌는 급히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석중옥의 뒤로 가서 숨었다. "서, 석 노제...... 노부 좀 살려 주게......" 석중옥은 빙긋 웃음만 머금고 가만히 있었다. 한쾌는 그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듯하자 이번에는 오행수 조담에게로 달려갔다. "조 늙은이...... 자네가 나서서 말 좀 해주게. 자네는 미끈하게 생겼으니 저 미친 할망구가 사족을 못 쓸 걸세." 오행수 조담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못 본 척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아! 친구도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제기랄...... 친구 믿다가는 노부의 존귀한 목숨도 끝장나 버리겠구나." 조아앵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도둑 할아버지, 이를 두고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의 평소 행동이 점잖고 올발랐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요?" 그녀는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조가, 이 꼬마 계집애야! 지금 불난 데 부채질하는 거냐?" 한쾌가 쥐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호파파는 살기를 번뜩이며 그에게로 점점 다가왔다. "이놈의 도둑고양이 같은 영감쟁이! 오늘 그 장작개비 같은 뼈다귀가 얼마나 단단한지 한번 보겠다." 한쾌는 그녀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한 채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내심 겁이 덜 컥 났다. '큰일이로구나. 보아하니 저 미친 할망구가 진짜로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 중인들은 이들의 행동에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남궁황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 낭자! 그만 손을 멈추구려. 허허......" 주인 된 입장에서 더 이상 방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파파는 비록 천하의 누구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혈검존 남궁황의 체면 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여의노사 백철군까지 그녀 를 질책의 눈으로 바라보자 더 이상 발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노화를 참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제서야 한쾌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헤헤...... 과연 남궁 늙은이가 남자답게 생겼단 말이야. 말 한마디에 성질이 지랄 같은 호파 파를 꼼짝못하게 하다니......" 호파파가 도끼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한쾌는 움찔하여 급히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남궁 형께 한마디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우렁찬 음성이 터져 나오며 한 인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체구가 작은 동산만큼이나 거대한 홍의노인(紅衣老人)이었다. 부리부리한 호목에 교룡(蛟龍)의 수염 같은 규염을 꼬아 내린 그 노인은, 바로 칠대명인 중 에서도 성질이 화급하기로 유명한 천뢰장(天雷掌) 맹강(孟岡)이었다. 맹강은 중원제일의 장법(掌法)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천뢰장은 여의노사 백철 군마저도 경탄해 마지않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철혈검존 남궁황이 어찌 그를 무시하겠는가! 그는 급히 정중한 태도로 그를 마주보았다. "맹 대협께선 서슴지 말고 물어 보십시오. 이 남궁 모가 아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소이다." "다름이 아니라, 사실 이번 비무대회는 신검 남궁(南宮) 문주(門主)가 장보도 사건을 무림에 공표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한데 정작 당사자인 남궁 문주는 도 통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중인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두들 그것이 궁금했던 참이었다. 남궁황은 중인들의 의문을 짐작했다는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분들께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소. 문주께선 지금...... 한백의 장보고에 가 계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럼 한백의 장보고가 이미 열렸단 말이오?" 맹강이 두 눈을 부릅떴다. 구대흉인 중의 하나인 소면낭심 도계조도 음산히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흐...... 남궁 형께선 정녕 우리를 놀리는 거요? 소문은 있는 대로 내놓고 이제 와서 남 궁 문주가 이미 그곳에 가 있다니......" 좌중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했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는데도 남궁황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직 남궁 모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소." 그의 태도에 좌중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백의 장보고가 이미 열린 것은 사실이오. 하나 아직 완전히 열렸다고는 볼 수가 없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맹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장보고는 열렸지만 그 안에 있는 기관진식(機關陣式)이 너무도 엄청난지라 감히 어느 누구 도 쉽사리 들어갈 수가 없었소이다. 그래서 문주께서는 삼대기보를 찾는 소문을 내고 한 발 먼저 그곳으로 가서 계속 기관을 뚫고 계시오." 맹강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노부는 남궁 문주의 기관진식에 대한 조예가 남다르다고 알고 있소. 그런데 남궁 문주의 실력으로도 그곳의 기관진식을 뚫지 못한다는 말씀이오?" 남궁황은 쓰게 웃었다. "문주님의 기관조예는 확실히 뛰어나오. 하나 한백의 장보고에 있는 무서운 기관매복은 그 분의 힘으로도 역불급(力不及)이었소. 사실 본 문에서 한백의 장보고를 연 지는 벌써 근 일 년(一年)이나 되었소. 본 문은 극비리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모두 허사였소. 지난 일 년간 본 문에서 그곳에 소비한 금력(金力)은 황금 백만 냥에 이르고 희생한 인명(人命)은 족히 이백 이상이오. 본 문은 이제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그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거요?" 말을 한 것은 기이할 정도로 깡마른 흑의검사(黑衣劍士)였다. 흑의검사는 날카로운 눈매에 각진 턱을 지녀 비정하고도 냉혹한 분위기를 풍겨 내는 인상이 었다. 매끄럽고도 유연하게 흘러내린 전신에서는 칼끝 같은 예기(銳氣)가 뻗쳐 나오고 있었 다. 석중옥은 그를 본 순간 마치 한 자루의 시퍼런 칼날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마치 싸움만을 위해 고도의 수업(修業)을 쌓은 자 같군.' 흑의검사는 놀라운 명성의 소유자였다. 단천검객(斷天劍客) 비몽(費蒙)! 자타가 공인하는 좌수검법(左手劍法)의 일인자(一人者)이며, 남궁뢰와 쌍벽을 이룬다는 당금 무림의 제일검수(第一劍手)가 아닌가! 가히 하늘을 자른다고 할 만큼 그의 검법은 가공스러웠던 것이다. 남궁황은 감히 그의 말을 경시할 수 없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비(費) 대협(大俠)! 본 문에서는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여러 명인고수들과 합작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오. 그래서......" 그가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총관님! 그분들을 모셔 왔습니다." 밖에서 시비인 듯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남궁황이 소리치자 중인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가득했다. 삐걱! 취의청의 문이 열리며 한 떼의 인영들이 들어왔다. 녹의를 곱게 차려입은 시비의 안내를 받으며 장내로 들어서고 있는 인영들을 보자 장내에는 곧 커다란 소요가 일어났다. "아! 저...... 저들은 구도회의 아홉 회주(會主)들이다......" "맙소사! 천지회의 천패와 지살까지......" "저...... 저들은 삼대기보의 주인들이로구나......" 그렇다. 나타난 인영들은 다름 아닌 한백의 장보고로 들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삼대기보의 주 인들이었다. 가장 좌측에는 일신에 먹물 같은 흑의를 걸친 아홉 명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걸어오고 있었 다. 검은 옷, 검은 피풍, 검은 신발...... 심지어는 허리에 매달린 도(刀)까지도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것은 다만 하나, 그들의 가슴에 수놓인 기이한 칼 모양이었다. 중인들은 이토록 무서운 기세를 형성하고 있는 고수들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누가 자신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쑤시는 듯 기괴한 기운이 엄습함을 느꼈다. 그것은 절정의 무공을 수련한 고수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강력한 무형지기(無形之氣)의 기운이었 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바로 구도회(九刀會)의 회주(會主)들인 천하구도(天下九刀)였던 것 이다. 천하구도(天下九刀)! 일인(一人) 일인이 각기 천하(天下) 무쌍(無雙)한 도(刀)의 달인(達人)이라는 전설적인 도객 (刀客)들. 그들의 도법(刀法)은 백 년 전 천하제일고수였던 도왕 여절파 이래 최강(最强)의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인 탈혼도(奪魂刀) 여무극(呂無極)부터 막내인 절정도(絶情刀) 서문경(西門慶)까지, 어느 누구도 절대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상대는 오직 그들 자신밖에 없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제 22 장 장보도해(藏寶圖解) 구도회의 천하구도 옆에는 실로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인물이 나란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크고 작은 백의를 걸친 인영들이었다. 우측의 인물은 사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데, 긴 머리를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늘어뜨리고 있 었다. 안색이 유달리 창백하긴 했으나 머리 위에 흰 문사건(文士巾)을 쓴 그의 신태(神態)는 극히 준수했다. 언뜻 보면 그 누구라도 그가 학문을 닦는 평범한 유생(儒生)이라고 느낄 것이다. 하나, 그의 두 눈을 보면 문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더없이 냉혹하고 비정한 눈길이었다. 일체의 모든 감정을 배제시킨 듯한 그 눈빛은 도저히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문사는 마치 조각한 인간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한 인영이 철탑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한데 그의 얼굴은 도저히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도저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끔 처참하게 짓뭉개져 있었던 것이다. 오관(五官)조차 식별이 어려운 그 모습은 제멋대로 다져진 하나의 고깃덩어리와 같았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한 줄기 섬뜩한 혈선(血線)이 그의 이마 중앙에서 턱 끝까지 길게 그 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양단(兩斷)된 머리통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같이 보였다. 그 기이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야말로 당금 강호의 마도제일문파(魔道第一門派)인 천지회의 회주, 천패(天覇) 섭붕(葉崩)과 지살(地煞) 전쾌(展快)였던 것이다. 우측의 문사 차림의 인물이 지 살 전쾌였고, 그의 뒤에 서 있는 끔찍한 용모의 거한이 바로 천패 섭붕이었다. 그들은 당금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천지회의 회주일 뿐 아니라, 사파의 최절정고수인 구대흉 인 중에서도 첫째, 둘째로 꼽히는 마인(魔人)들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강호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나 중인들은 그들의 가공할 모 습만 보아도 말할 수 없이 섬뜩한 공포와 함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들의 마명(魔名)은 그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석중옥은 좀처럼 얼굴이 변하지 않던 오행수 조담마저 떫은 감을 씹은 듯 안색이 변하는 것 을 보고 그들의 악명(惡名)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오행수 조담이 그런 석중옥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석 노제...... 저들은 정말 염라 대왕조차도 만나기를 꺼리는 지독한 놈들이라네." "그 중에서도 특히 저 지살 전쾌라는 놈은 심기가 깊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녀석이지." 한쾌가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백의중년인, 지살 전쾌를 슬쩍 쳐다보았다. 석중옥의 시선도 자연히 그에게로 향했다. 지살 전쾌는 예의 무심한 시선으로 묵묵히 전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인지 전쾌의 시선이 석중옥과 마주쳤다. 순간, 번- 쩍! 석중옥은 전쾌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섬광이 피어남을 느꼈다. 아니, 느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섬광은 사라지고 그는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 다. 그리고 전쾌는 석중옥을 바라보며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그것은 결코 웃음 이 아니었다. 얼굴 근육이 그저 한 번 꿈틀한 것에 불과했다. 석중옥은 차고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묵묵히 주시하다가 천천히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옆에는 복면을 한 훤칠한 키의 백의여인과 언뜻 보아도 남장임을 알 수 있는 여인, 그 리고 기괴한 용모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빙백마혼주를 가지고 이곳에 온 임가장의 과부 임소군과 남장여인 노연 홍, 그리고 일월쌍려 우문당과 도옥교였다. 노연홍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연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 석중옥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석중옥을 바라보며 요염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마치 그럼 그렇지, 네가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석중옥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자! 이제 오실 분들은 모두 오신 것 같으니 말씀을 계속하겠소이다......" 철혈검존 남궁황이 사방을 돌아보며 우렁찬 음성을 토해 냈다. "과거 한백은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기보란 기보는 거의 모두 수집하다시피 했었소.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혈왕경(血王經)과 파천필(破天筆)이오." "아...... 혈왕경...... 파천필......" 중인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둘은 모두 무림인이라면 꿈에서조 차 얻기를 원하는 절세의 무공비급(武功秘 )과 신병(神兵)이었던 것이다. * * * 혈왕경(血王經)! 혈왕경은 천년무림사상 가장 강한 인물이었던 천년삼왕(千年三王) 중 하나인 혈왕(血王) 위 혼(魏魂)의 마공비급이었다. 천년삼왕은 모두 전설로만 전해질 뿐, 어느 누구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 그들의 무공이 무림 역사상 가장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천년삼왕(千年三王)! 천 년 전의 혈왕 위혼! 이백 년 전의 검왕 절대검자! 백 년 전의 도왕 여절파! 그들은 모두 살아서 무적(無敵)을 기록한 신화(神話)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당시 무림을 종횡했을 때는 아무도 적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잔인하고 패도적인 인물이 혈왕 위혼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마도(魔道)의 법(法)이었다. 그가 나타났다는 말만 들리면 십리 밖의 마두 (魔頭)들도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 혈왕의 무공을 기록한 것이 바로 혈왕경이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파천필(破天筆)! 우내육대중보(宇內六大重寶)의 하나인 절세(絶世)의 신병(神兵)! 파천필은 무림사상 최강의 신병인 우내육대중보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가공할 마병(魔兵) 이었다. 이것은 그지없이 은은하고 그윽한 혈홍빛 광채로 된 하나의 필(筆)이라고 했다. 하나, -이것이 진한 홍하(紅霞)와 함께 용틀임을 하는 날, 온 천하인들은 전율과 함께 공포로 경 악하고 말리라...... 이런 소문이 천하를 진동할 만큼 그 위력은 능히 경천동지할 것이었다. * * * "본인은 여기에 모이신 대부분의 군웅들께서 그 두 가지 기보를 노리고 모이신 것을 알고 있소." 남궁황의 말에 천뢰장 맹강이 큰 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오! 한데 보물은 두 개뿐이고 사람은 많으니 남궁 형께선 이것을 어찌 분배하시려 하오?" 이것은 비단 그만의 관심일 뿐 아니라 여기에 모인 모든 군웅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모두의 시선은 남궁황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남궁황의 말 한마디에 따라 여차하면 커다란 풍파(風波)라도 일 기세였다. 하나 남궁황의 대답은 의외로 싱겁기 짝이 없었다. "보물을 찾기도 전에 임자부터 정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이것의 분배 는 한백의 장보고를 확실히 연 후 결정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 노부의 의견이외다." 그 말에 중인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자신들이 약간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모습이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두 가지 기보 중 최소한 하나는 본 문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외다. 그것은 보물로 인해 지금까지 희생한 노력에 대한 대가일 뿐 아니라 장보고의 주 인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오." "그럼 남궁검문에선 두 가지 중 어느것을 원하고 있소?" 오행수 조담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사실 본 문에서는 검(劍)을 주로 쓰기 때문에 파천필은 별로 소용이 없소. 따라서 의당 혈 왕경을......" 순간,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알짜배기는 당신들이 차지하고 우리는 기껏 들러리나 서라는 말 이오?" 소면낭심 도계조의 눈이 쭈욱 찢어졌다. 백발마동 적황 등 십여 명의 얼굴에도 불만의 기색이 역력했다. "본 문에서 혈왕경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되오. 한백의 장보고는 그 두 가 지 기보 외에도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희대의 기보들이 즐비할 것이오......" 남궁황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했다. "한백의 장보고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열린다면 본 문에서는 그 기보들을 여러분들 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이외다. 하나 혈왕경을 비롯해서 최소한 삼분지 일은 본 문의 것 이 되어야 하오." "그럼 파천필은 어떻게 할 거요?" 천뢰장 맹강이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본 문에서는 한백의 장보고에 있는 모든 보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파천필 등은 여러분 들께서 알아서 할 문제요." 중인들의 얼굴에 다시 일말의 희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사실 우내육대중보가 그렇게도 무림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고금무적의 신병이라는 것도 있지만, 우내육대중보에는 각기 그것을 호신(護身)할 수 있는 광세(曠世) 무비(無比)의 기학(奇學)이 한 가지씩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석중옥은 중인들을 바라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한백의 장보고에 있는 보물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런 고수들을 모두 불러 낼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 칠대명인이나 구대흉인같이 당금 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고 무공이 고 강한 그들도 이곳으로 온 것은, 다름 아닌 혈왕경과 파천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넋을 잃고 남궁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인들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 중에는 벌써부터 입가에 침까지 흘려대는 작자도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처음부터 보물 따위엔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들의 적수(敵手)가 그것들을 얻음으로 해서 자신보다 강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들의 발길을 부득불 이곳 으로 향하게 했는지도 모르지.' 석중옥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人間)의 야망(野望)...... 하기사 끝이 없겠지......' 그런데, "흥! 그때는 관심이 없는 척하고 점잖을 빼면서 혼자 가더니 결국 보물이 탐나 이곳으로 왔 군요!" 뜻밖에도 보물에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석중옥은 그것이 노연홍의 전음임을 알았다. 그녀의 공력이 아직 심후하지 못한 탓인지 전 음성도 작았다. 그러나 석중옥에게는 원망이 가득 찬 그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리는 것이다. 석중옥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해하시오. 낭자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오. 단지 혼자 행동하는 것이 마음 편했을 뿐이오. 그래, 잘 있었소?" 전음을 전개하고 있으나 석중옥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 내 려오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불문(佛門)의 기공(奇功)이었다. 이것은 마음을 일으켜 상대 에게 뜻을 전달하는 무공으로, 일반 전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석중옥은 이 기공으로 남과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바로 그때, "거기에 확실히 혈왕경과 파천필이 있소?" 싸늘한 음성이 나오며 단천검객 비몽이 입을 열었다. 철혈검존 남궁황이 가볍게 웃었다. "장보도를 보고 싶다는 말이오?" 철혈검존 남궁황이 눈짓을 했다. 철검공자 남궁유룡이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보기 드문 장방형의 옥합이 들려 있었다. 달- 깍. 옥합이 가벼운 음향과 함께 철혈검존 남궁황의 앞에 놓여졌다. 모두의 시선이 옥합에 집중되었다. 옥합의 뚜껑은 이미 열려져 있었던 것이다. 옥합 속에는 매우 복잡한 도형(圖形)이 교차된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소면낭심 등의 눈에 탐욕의 빛이 드러났다. 철혈검존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원래의 장보도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오. 원래의 장보도는 이것보다 더 작고 낡은 것이오." "진짜는 어디에 있소?" 한쾌가 급히 물었다. "그것은 문주께서 가지고 계시오." 한쾌를 비롯한 중인들의 얼굴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제기랄...... 알짜는 자기들이 가지고 가짜는 우리에게라...... 이거 너무 불공평한데......" 중인들이 투덜대자 남궁황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여러분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이것은 진짜 장보도와 한치도 틀림이 없을 뿐 만 아니라 본 문이 수많은 노력 끝에 해독(解讀)한 장보도의 일부까지 모두 해석되었으니까 알아보기가 수월하오. 진짜는 사실 너무도 낡고 심하게 훼손되어 여러분들은 보아도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을 게요." 이어 그는 천천히 장보도를 들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한백의 장보고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소. 이번 모임에 참가 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목숨을 내걸어야 할 것이오." 그는 천천히 양피지를 옥합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내일 모레, 그러니까 이틀 후 아침에 출발하겠소. 생각이 있으신 분들은 그때 모여 주시 오." 남궁황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 오늘밤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이외에는 참가할 수가 없소. 들어갔다가는 죽음뿐일 테 니까!" "정녕 그곳이 그토록 험악하오?" 비환유문의 사환 중 둘째인 은환(銀環) 유자령(劉子嶺)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본 문에서 할 일이 없어 이백의 인명과 황금 백만 냥을 소비했을 것 같소?" 남궁황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 어조는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유자량은 노화로 안색이 변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중인들은 남궁황이 결코 허언(虛言)을 하 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알지 못할 불안의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워지고 있었 다. "자네, 조금 전에 그 장보도를 보고 뭐 느낀 것 없었나?" 한쾌가 물었다. "장보도에 표시된 기관도해 말이오?" 석중옥이 그의 의중을 짐작한 듯 빙긋 웃었다. 그들은 이미 취의청을 벗어나 황방에 이르고 있었다. 한쾌는 그답지 않게 제법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노부의 생각이 틀렸던 모양일세. 그 장보도와 노부가 일전에 당이선생에게서 훔 친 기관도해는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으니 말일세." "그렇게 생각할 수만도 없는 일이지요." 석중옥이 담담하게 말하자 한쾌의 쥐눈이 치켜 떠졌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황이 중인들에게 보여 준 장보도는 장보고의 전체적인 도해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당 이선생의 기관도해는 어느 건축물의 중심기관에 관한 기관도해입니다. 그러니 설사 그 두 가지는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언뜻 보아서는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지요." 한쾌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노제는 기관진식에 대한 조예도 보통이 아니군그래. 노부조차 잘 알아보지 못하 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석중옥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보통이 아닌 건 내가 아니라 한 노인의 배짱이오." "왜? 그건 무슨 소린가?" "그렇지 않소? 등뒤에서 곧 벼락이 떨어질 텐데 한가하게 잡담을 할 여유가 있다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요놈! 한가 도둑고양이야! 잘 걸렸다." 엄청난 호통이 터지며 한쾌의 비쩍 마른 몸이 누군가에 의해 번쩍 쳐들렸다. 한쾌는 대경 실색하여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순간, "호, 호파파......" 그의 안색이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구겨졌다. 한쾌의 몸을 한 손에 번쩍 쳐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전낭자 호파파였 던 것이다. 호파파는 가공할 비곗살로 이루어진 뚱뚱한 얼굴에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한쾌 를 금시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호호...... 요 도둑 늙은이! 네놈이 드디어 본 낭자의 수중에 떨어졌구나. 네놈이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의 쥐새끼지......" 그녀는 한쾌의 몸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빙글빙글 돌렸다. "호파...... 아니, 호 낭자...... 노, 노부가 일전에는 실수한 것 같으니...... 손에 자비를...... 케 엑!" 사색이 된 채 그녀의 손에서 바둥거리던 한쾌는 그녀가 억센 손 힘으로 목을 조여 누르자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호파파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더욱더 빠르게 한쾌의 몸을 허공에 서 빙빙 돌렸다. "으으...... 노, 노부 살려! 아니, 사람 살려...... 이 미친 할망구가 사람 잡는다......" 한쾌는 바락바락 악을 썼으나 호파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으...... 호, 호 낭자...... 제발 노부를 바닥으로 내던지지 말고 세게 돌리기만 해주시오. 그러 다가 잘못하여 바닥에라도 떨어지면 노부의 목숨보다 귀한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니......" 순간, 호파파의 눈에서 번쩍 빛이 났다. "그래? 그럼 어디 뒈져 봐라, 도둑고양이......" 호파파는 크게 외치며 한쾌의 몸을 우악스럽게 앞으로 집어던졌다. 그녀는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있는 힘껏 던졌는지라, 한쾌의 몸이 날아가는 속도는 그야 말로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것보다 더욱 빨랐다. 휘-익! "으악! 도둑고양...... 아니, 노부 살려......!" 한쾌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십여 장을 날아갔다. 호파파는 득의의 미소를 띠며 한쾌가 코를 땅에 처박고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기대했다. 한데, "어엇? 저 늙은이가......?" 호파파의 눈이 쭈욱 찢어지며 코에서 거친 숨이 내뿜어졌다. 십여 장을 정신없이 날아가던 한쾌가 땅에 처박히기 직전, 몸을 빙글 돌려 바닥에 사뿐히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으헤헤...... 과연 미친 할망구는 미친 할망구로다. 노부의 장기(長技)가 신법(身法)인 것도 모르고 집어던지다니......" 한쾌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짓궂게 혀를 날름거렸다. 그제서야 호파파는 자신이 한쾌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이...... 빌어먹다 뒈질 한가 놈아! 거기 서라!" 하나 그때 이미 한쾌의 몸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놈! 한가 도둑고양이야! 네놈이 또다시 본 낭자를 우롱해......?""으히히히...... 호 할망구...... 그 살찐 암퇘지 같은 몸으로 노부를 쫓아올 수 있겠나?" 한쾌의 웃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 왔다. 호파파는 분기 탱천,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갔다. 휙! 그녀의 뚱뚱한 몸이 한쾌가 사라진 곳으로 비호같이 날아갔다. 석중옥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때, 여태까지 호파파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않고 있던 한 여인이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다리를 약간 절룩거리고 있는 싸늘한 안색의 미녀는 바로 호파파의 제자인 곽무지라는 소녀 였다. 그녀는 야릇한 시선으로 석중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석중옥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급히 몸을 날려 호파파의 뒤를 쫓아갔다. 스윽! 그녀의 몸놀림은 표홀하기 그지없어 창졸지간에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신법은 어찌 나 날렵하고 빠른지 호파파는 물론이고 한쾌의 신법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석중옥은 예전에 한쾌가 그녀의 신법이 자신을 뺨친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오늘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그 당시 한쾌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보기보다 대단한 아가씨로군. 보아하니 그녀는 자신의 신체가 불구인 것을 극복하기 위해 경공(輕功) 방면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미녀로군요. 누구예요?" 맑은 여인의 음성이 석중옥을 불렀다. 석중옥은 그것이 노연홍의 것임을 알았다. '쯧...... 골칫덩어리 아가씨로군.' 석중옥이 몸을 돌리자, 아니나다를까 노연홍이 쪼르르 달려왔다. 아미를 상큼하게 치켜 뜬 그녀의 모습은 화가 났다기보다 오히려 교태가 흐르는 듯했다. 그 뒤에 복면을 한 임소군과 우문당, 도옥교의 모습이 보였다. "흥...... 넋을 잃고 보는 꼴이라니...... 누구예요? 조금 전의 그 절름발이 계집애는?" 웬일인지 노연홍은 코웃음을 치면서 석중옥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석중옥은 내심 쓴웃음 이 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쯧...... 여자들이란 그저......' 하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부드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호파파의 제자인 곽무지라는 여인이오. 나와는 별로 안면이 없는 사이이고......" "정말이에요?" "그렇소." 석중옥은 그녀의 안색이 금세 활짝 피는 것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호호호...... 난 또 뭐라고...... 참! 당신도 이번에 한백의 장보고로 갈 거지요?" "생각 중이오." 석중옥은 그녀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급히 시선을 그 옆의 임소군과 일월쌍려 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셨소, 임 부인?" 임소군은 복면 속으로 보이는 두 눈을 영롱하게 반짝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석 공자님!" 그녀의 음성에는 진실로 그와의 해후를 반가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석중옥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왜 이런 곳에서조차 복면을 벗지 않는 것일까? 혹시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 한 문제라도 생긴단 말인가?'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임소군이 가볍게 웃었다. "호호...... 제가 복면을 한 것은 혹시라도 흉수(兇手)들 중에서 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해서예요." '과연 재녀(才女)는 재녀로군. 내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보다니......' 석중옥은 감탄 어린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도 이번에 그곳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요. 아무래도 임가장의 혈겁이 이번 일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게 그 동안의 제 추측이 에요. 한데 지금껏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젠 장보고로 가볼 수밖에요." "나는 부인께 도움이 될 만한 사실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임소군이 반색을 했다. "무슨 일인가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기보라는 곳이 있소......" 석중옥은 자신이 반옹 곡현에게서 들은 철기보의 혈겁에 대한 것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석중옥의 말을 듣고 있던 임소군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공자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이번 혈겁을 당한 것은 비단 저희 임가장만이 아니었군요. 어쩌 면 이번 일은 당금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암류(暗流)와 연관이 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임가장과 철기보뿐만이 아니라 강소(江蘇)의 벽력당(霹靂堂), 진주(晉州)의 언가(言家), 그리고 매화곡(梅花谷), 신창보(神槍堡) 등 줄잡아 십여 개의 문파가 그와 흡사한 상황으로 혈겁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일은 의외로 크게 확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노연홍이 옆에서 끼여들었다.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군요. 좋아요. 저는 그럼 사형에게 도움을 청해야겠군요." "사형? 낭자의 사형도 이곳에 와 있단 말이오?" 석중옥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노연홍은 약간 우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번에 비무대회에 참가하여 일차관문에도 통과했는걸요. 사형은 바로 무림사공자 중의 일인인 금도공자 전붕비예요." "전붕비......"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어른거렸다. '전붕비가 그녀의 사형? 이제 보니 노연홍은 그의 ?後孫)이었군...... 쯧...... 노씨 성을 쓰는 것을 보고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석중옥은 그녀가 전붕비의 사매라고 하자 이제껏 궁금했던 그녀의 사문(師門)을 알 수 있었 다. 그것은 그가 이미 전붕비가 사용하는 무공을 보고 전붕비의 사문이 어디인지를 파악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연홍은 석중옥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하게 떠들어댔다. "자, 가요! 내가 사형에게 소개해 줄 테니......" 그녀는 석중옥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끌려갔다. 우문당과 도옥교가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임소군도 그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하나 그녀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것이 었다. 제 23 장 지하동부(地下洞府) 황산(黃山)!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황산은 예부터 명산(名山)으로 불려 왔다. 안휘성의 태평현(太平縣)에서 휴령현(休寧縣)까지 이어진 이 장대한 산은 검산(黔山)이라고 도 불리며, 예부터 신화와 전설이 다른 산보다 더욱 많았다.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황산삼해(黃山三海)였다. 즉 운해(雲海), 송해(松海), 석해(石海)로 불 릴 만큼 풍경이 수려하고 경물이 아름다웠다. 그런 까닭에 이곳을 찾는 유람객들의 발길은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정오경. 햇살이 구름에 잠긴 황산의 절봉(絶峰) 위를 따사롭게 내리쪼일 무렵, 한 떼의 인영들이 황 산에서 가장 큰 봉우리인 천도봉(天都峯) 아래에 나타났다. 한데 그들은 평범한 유람객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걸음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무림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수효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한곳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한 명의 황의노인이 눈부신 백의를 걸친 열두 명의 백의검수(白衣劍手)들 에게 에워싸인 채 날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경신공부(輕身功夫)는 매우 뛰어나 마치 비 조(飛鳥)와도 같았다. 이 일단의 고수들의 수효는 백 명이 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남궁황을 비롯한 군웅들이었 다. 남궁황을 에워싼 백의검수들은 남궁검문이 자랑하는 십이쾌검수(十二快劍手)였다. 남궁황이 한 계곡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남궁 대협! 아직도 장보고는 멀었소?" 그 순간, 남궁황을 비롯한 백의검수들의 신형이 멎었다. 남궁황이 앞을 가리켰다. "이 계곡의 중앙에 있소."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궁황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순간, "아......"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그들에게서 백여 장 떨어진 곳! 이름 모를 계곡의 가장 후미진 곳에 마치 지진(地震)이 일어나 균열이 생긴 듯 바닥이 쩍 갈라져 있었다. 그 갈라진 틈 사이에는 밑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무저곡(無底谷)이 펼쳐져 있 었다. 계곡은 끝었이 깊었다. 또한 그 밑바닥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괴이한 음향이 끝없이 울려 퍼 지고 있었다. 우우우...... 우우...... 우웅...... 억겁신비(億劫神秘)가 토해 내는 태고(太古)의 숨결인가? 괴이한 음향에는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신비스런 기운이 담겨 있었다. 무흔풍 한쾌가 떫은 감을 씹는 듯한 표정으로 남궁황을 쳐다보았다. "저곳이 바로 장보고의 입구란 말이오?" "그렇소. 한백은 천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가공할 기관매복을 설치한 후 그곳에 자신 이 훔친 기보를 숨겨 놓았던 거요." "빌어먹을...... 성질도 지랄 같구먼. 하필이면 이런 으스스한 곳에 숨겨 놓다니......" "이곳은 가히 죽음의 계곡이라 할 만큼 험한 곳이오. 여러분께선 지금부터 각별히 조심하시 기 바라오." 그는 '죽음'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 중인들의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소면낭심 도계조가 음험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그렇다고 겁먹을 우리가 아니지." 남궁황이 그를 바라보며 약간 싸늘한 안색으로 말했다. "이곳의 바닥까지의 깊이는 오백여 장...... 그것도 일직선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매우 꾸불꾸불 꺾여 있소. 자칫 잘못하면 뼈도 추릴 수 없을 것이오." 소면낭심은 더욱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우리들 중 그 정도의 경공 실력을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도 없소. 그러니 괜히 우 리를 겁주지 마시오." 중인들은 지옥의 입구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계곡으로 모여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처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에 서서히 흥분의 기색이 드러났다. 몇 사람이 앞으 로 먼저 나서려고 술렁거렸다. "멈추시오! 먼저 들어가는 자가 제일 먼저 죽을 것이오." 남궁황의 말은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다. 군웅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노부는 여러분들을 이 계곡 아래 있는 넓은 분지(盆地)까지 안내할 것이오. 거기까지가 본 문에서 아는 곳이오. 문주님께선 지금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오." 남궁황이 힘주어 외쳤다. "이 계곡 안에서는 아무거나 함부로 손대면 절대로 아니 되오! 기관 함정이 곳곳에 설치되 어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노부가 알려 주는 곳 이외의 곳에는 더 더욱 가서는 아니 되외 다." "흐흐...... 겁은 그만 주고 어서 내려가시지." 소면낭심이 얼굴에 흉흉한 웃음을 매달았다. 남궁황은 약간 언짢은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노부가 길을 안내할 테니 모두들 따라오시오." 다음 순간, 남궁황은 번쩍 신형을 날렸다. 이어 그의 신형은 유성(流星)처럼 아래로 폭사되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중인들 은 그의 뒤를 쫓아 하나둘씩 아래로 몸을 날렸다. 휘이이이...... 익! 잠시 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백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유성처럼 계곡 아래로 낙하해 가 고 있었다. 백여 명의 무림고수들이 한곳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리는 장면은 가히 일대(一 大) 장관(壯觀)이라 할 만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석중옥을 비롯한 일행들뿐이었다. 석중옥이 해천쌍로를 불렀다. "곡 노인, 곽 노인! 두 분께서는 일전에 내가 지시한 대로 해주시오." 반옹 곡현과 고수 곽창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공자님께서는 존체(尊體)를 보중하십시오." 중인들은 일대의 기인(奇人)들인 해천쌍로마저 석중옥에게 굽신거리자 그의 정체에 대한 의 문이 더욱 깊어졌다. 하나 대놓고 물어 볼 수도 없어 모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석중옥은 위지명과 조아앵을 불렀다. "소명, 아앵! 너희들은 두 분 노인을 따라가거라." 위지명이 머뭇거렸다. "고, 공자님......" "흥! 싫어요. 이제 막 재미있으려고 하는데 왜 우리만 쏙 빼놓으려고 하지요?" 조아앵은 노골적으로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것들아! 우리가 지금 장난하러 가는 줄 아느냐? 어서 석 노제의 말대로 해천쌍로 두 분 을 따라가거라!" 한쾌가 조아앵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얏! 도둑 할아버지...... 괜히 아앵이 있으면 도둑질을 마음대로 못 하니까 그러지요?" "이것아! 노부가 어찌 네가 있다고 할 일을 못 하겠느냐? 다만 앞길의 흉험(凶險)을 예측할 수 없으니 너희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거다. 사실 이번 일은 심혈을 기울 여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어느 세월에 너희들까지 신경을 쓰겠느냐?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어서 석 노제의 말대로 해라." 위지명과 조아앵은 내심 투덜거렸으나 어쩔 수 없이 해천쌍로를 따라갔다. 해천쌍로가 떠나기 직전, 석중옥은 그들에게 한 가지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하나 그 지시가 무엇인지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행수 조담은 조아앵을 해천쌍로에게 딸려 보내자 그제서야 안심을 한 듯 얼굴을 활짝 폈 다. "그저 석 노제에게 매번 신세만 지는구먼." "별말씀을...... 이런 걸 어찌 신세라고 하십니까?" 한쾌가 오행수 조담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자...... 은혜는 나중에 갚으면 될 것이고 우리도 어서 내려가세나. 이러다가는 앞 사람들 의 꽁무니도 구경 못 하겠네." 이어, 그들은 석중옥과 사마진평보다 한 발 앞서 아래로 내려갔다. 사마진평은 그들을 따라 막 몸을 날리려다 석중옥의 안색이 약간 굳어있는 것을 보고 궁금 한 듯 물었다. "석 노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석중옥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머리를 저었다. 하나 여전히 그의 안색은 별로 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문득 이 계곡의 입구인 이곳이 무척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만일...... 이곳에 형님 정도의 고수가 한 사람이라도 지키고 있게 된다면 아래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사마진평은 그 말을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렇다. 이 협곡(峽谷)은 그야말로 천험(天險)의 요새로, 능히 한 사람이 천 명을 격퇴시킬 수 있는 곳이다. 절정고수 한 사람이 이곳에 버티고만 있어도 아래로 내려간 그 누구도 올 라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고 다시 한 번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노제의 생각은......?" 석중옥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베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새파란 하늘이었다. 하나,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이건만 왠 지 오늘따라 하늘이 음침해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자신의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다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야겠지요." 말을 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까마득한 아래로 쏘아 가고 있었다. 사마진평은 그가 멀어져 가는 광경을 쳐다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 순간, 사마진 평의 신형도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계곡은 깊고 습(濕)했다. 또한 일정한 간격마다 좌우로 꺾여 꾸불꾸불한 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휘-이-잉! 허공을 가르며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곡의 틈 사이가 돌연 좌측으로 급격히 꺾여 있었다. 팟-! 석중옥은 그 부근에 이르러 벽을 차고 신형을 비스듬히 꺾어 쏘아 갔다. 멋모르고 일직선으로 뛰어내렸다간 그대로 피곤죽이 되었을 판이었다. 그렇게 몇 구비를 꺾어들었을 때, 석중옥은 절벽 한 귀퉁이에 솟아 있는 돌출부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는 주위를 빠르게 한번 살펴보았다. '정말 지독한 험지(險地)로군......' 처음 뛰어내렸던 계곡의 끝단은 어둠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 정도라면 초일류고수라도 쉽게 내려가지 못할 텐데 이들 중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다. 이들이야말로 당금 무림의 최정예(最精銳) 고수(高手)들인 것이다.' 문득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만약 이들이 여기서 모두 몰살하게 된다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금 무림은 그야말로 머리를 잃은 몸뚱이 꼴이 되는 것이다. 하나, 이곳에 모인 자들 중 아무리 약한 사람도 능히 강호무림에서는 초일류고수들이었다. 더구나 무림의 최고고수들인 칠대명인과 구대흉인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 있었다. 이런 절 대고수들이 백여 명이나 모여 있는데 천하의 누가 감히 이들을 몰살시키겠는가? '하나 모르지...... 누군가 치밀한 계획하에 수십 년간을 준비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재차 신형을 날렸다. 슈우-우-웃! 그의 신형은 섬광인 양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 * * 암흑(暗黑). 코앞에 칼을 들이대도 모를 캄캄 절벽의 암흑천지(暗黑天地)였다. 이곳이 어디인가? 짙은 유황 냄새가 연신 후각을 찔러대는 이곳. 양 옆으로는 깎아지른 듯 가파른 지하 절벽 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전면에는 암흑과 함께 좁고 길다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지금 유황 냄새 만연한 암흑 속엔 거의 백여 명 가량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남궁황 등의 군웅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중한 모습으로 바짝 긴장한 채 전신의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상태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숨막힐 듯 고조된 긴장은 음산 무비한 침묵과 정적을 낳고 있었다. ...... 소면낭심 도계조가 무언가 껄끄러운 듯한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이곳이 어디이기에 유황 냄새가 난단 말이오?" 남궁황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신중히 말했다. "이곳은 밑으로 지하화맥(地下火脈)이 지나가고 있소. 눈앞에 보이는 동굴은 그 지하화맥의 일부가 분출돼 가공할 열기(熱氣)가 뻗어 나오는 곳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 들어오며 하나의 동굴이 나타났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천연의 동굴이었다. 남궁황은 동굴 입구에 멈춰 서며 다시금 일행들을 돌아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동굴이 바로 장보고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요. 지금부터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 오." "......"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그것은 곧 죽음으로 직결됨을 명심하고 조심해서 나를 따라오시 오." 중인들은 말없는 침묵 속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표했다. 남궁황은 그런 그들을 다시 한차례 돌아다본 후 임소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부인! 이제 빙백마혼주를 내게 주시오." 임소군은 서슴지 않고 품속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여기 있어요." "빙백마혼주에서 나오는 한기(寒氣)만이 이 동굴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소." 남궁황은 중얼거리며 옥합을 열어 보았다. 순간, 스-으으-! 뼛골이 시릴 듯한 싸늘한 기운이 주위에 감돌았다. 옥합 안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작은 구슬 한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천하에서 가 장 차갑다는 빙백마혼주인 것이다. 남궁황은 옥합의 뚜껑을 연 채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군웅들의 신형이 차례차례 동혈(洞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지 하화맥의 일부가 저주스럽게 뭉클거리고 있는 사지(死地)를 향해서...... 군웅들이 동혈 속으로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화르르르- 릉! 즈즈- 즛! 그들의 전신으로 돌연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렬 무비한 열풍이 몰아닥쳤다. "음!" 중인들은 일제히 내공을 극성(極成)으로 끌어올려 열풍에 대항했다. 하나 뼈를 녹이고 살가죽을 지글지글 태울 듯한 참혹한 열기는 앞으로 전진할수록 더욱 극 심해졌다. 일행 중 공력이 약한 자들의 전신은 이미 굵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그들의 숨결에서는 이 내 화끈거리는 연무(煙霧)가 사정없이 피어올랐다. 진정 인간의 힘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마 (魔)의 불화로였다. 그나마 빙백마혼주가 이곳의 열기를 약간이나마 식혀 주었기 때문에 이 정도지, 빙백마혼주 가 없다면 천하의 어느 누구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전진하였을까......? 돌연, 동혈 안을 자욱하게 메우는 핏빛의 혈무(血霧)가 군웅들의 눈앞으로 분출되었다. 뭉- 클! 뭉- 클! 동시에 군웅들의 모든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을 남김없이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만한 무시무시한 열기가 폭출되는 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흠칫 놀라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남궁황이 이때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저것이 바로 지하화맥의 일부가 새어나와 형성된 지극화염무(地極火焰霧)요!" 군웅들은 모두 긴장된 낯빛으로 전신을 굳히며 제각기 극성의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지옥의 마화(魔火)...... 지극화염무! "지극화염무는 지옥의 불길이오. 모두들 저 혈무에 조금이라도 몸이 닿지 않게 하시오." 군웅들은 마음의 고삐를 바짝 잡아당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몸 위로 제각기 끌어올린 호신강기(護身 氣)가 각종의 광채를 번쩍거리며 둥글게 확 산되었다. 남궁황은 빙백마혼주를 오른손에 움켜쥐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버-언쩍! 주위를 동결시킬 듯한 가공할 한기가 폭출됨과 동시에 우윳빛 섬뜩한 광채가 사방으로 발출 되었다. 우윳빛 광채는 지극화염무를 뚫고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츠츠츠...... 빙백마혼주에서 뻗어 나오는 광채는 지극화염무의 가공할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점차 변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빙백마혼주에서 뻗어 나오는 한기도 한결 약화되었다. 하나 그로 인해 지극화염무의 열기가 약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군웅 들이 난생처음 보는 지독한 열기임에는 틀림없지만...... 군웅들은 지극화염무의 열기가 약간 약해진 틈을 타 앞으로 전진했다. 하나, 군웅들의 행렬이 지극화염무를 채 반도 통과하기 전이었다. 돌연, "으...... 헉!" 지지- 지지직! 서너 명의 옷자락이 시뻘건 불길로 타들어 가며 순식간에 화염으로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내공이 약한 몇몇 고수들의 호신강기가 지극화염무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흐트러지고 말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겨, 견딜 수 없다-!" 그들의 얼굴은 뜨거움으로 인한 고통으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남궁황은 다급하게 호통쳤다. "참으시오! 지금 물러서면 모든 것이 끝장이오!" "크-윽!" 불길을 견뎌 내지 못한 한 명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성이 폭발했다. 다음 순간, 화류류- 류류! 그의 전신에서 시커먼 열기가 쏟아지며 몸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해 버리지 않는가! 나머지 세 명의 얼굴 위로 죽음의 공포가 벼락처럼 번져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차츰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남궁황이 그들을 향해서 힘껏 소리쳤다. "참아라, 참아! 두려움을 가지면 절대로 안 돼......!" 하나, "으-아! 못 참겠다-!" 세 명의 신형은 이미 지면을 박차고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 "큭!" "우아...... 악!" 돌연 그들의 전신은 발끝부터 불길로 화하기 시작해서 이미 머리 끝까지 불더미로 돌변했 다. 화류- 류류! 치치치- 칫! 세 명의 인간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린 참혹한 순간이었다. 군웅들의 귓전에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처절한 비명성만이 허무하게 맴돌고 있었다. "으...... 저주의 불안개......" 중인들의 안색이 공포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남궁황은 안색을 침통하게 굳히고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법이오. 우리도 여기서 더 머뭇거리다가는 저 꼴이 될 수도 있 소. 어서 갑시다." 이어 그는 중인들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일곱 명. 무려 일곱 명이었다. 중인들이 그 가공할 지옥의 불안개, 지극화염무를 통과하는 동안 희생된 인명이...... 더구나 그들은 개개인이 모두 강호를 주름잡았던 절정고수들이 아닌가! "......!" 모두들 넋을 잃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장보고의 입구를 통과한 대가인 것이다. 이제 겨우 입구를...... 무려 칠(七) 인(人)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하나 아직도 죽음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그들은 이 제 겨우 장보고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뿐이다. 불현듯, 중인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서리쳐지는 전율을 일으켰다. 연후, 남궁황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시다. 이곳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니까......" "......!" 중인들은 일제히 이를 악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금도 물러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물러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저벅...... 저벅...... 그들은 다시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석중옥 역시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말 신비한 곳이군. 황산의 지하에 이런 곳이 존재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는걸......' 그가 내심 침중한 중얼거림을 내뱉고 있을 때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석중옥이 의아함에 시선을 돌리자 노연홍의 아름다운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옥용 (玉容)은 긴장 탓인지 몹시 굳어 있었다. "이봐요!" 그녀는 석중옥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석중옥이 묵묵히 있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곳을 무사히 물러 나올 수 있을까요?" 노연홍의 음성에는 희미한 불안의 기색이 깃들여 있었다. 석중옥은 담담히 대꾸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소...... 하나 세상에는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으니 방심하지 않고 전력 을 기울인다면 반드시 잘될 수 있을 거요." 노연홍은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무시무시한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하나 당 신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녀의 음성에는 어떤 은은한 정(情)이 흐르고 있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사르르 돌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석중옥은 문득 그녀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사랑스런 아가씨군.' 노연홍은 석중옥이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자 부끄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흡족했다. 하 나 그녀는 짐짓 뾰로통하니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석중옥은 빙긋 웃었다. "낭자는 이곳에 있을 때는 결코 임 부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마시오. 그녀와 낭자의 사 형이 도와 준다면 이곳이 아무리 흉험한 곳이라도 큰 위험은 없을 거요." "......!" "임 부인은 소저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여인이오. 더구나 그녀의 재지에 낭자 사형의 무공이 합해진다면 웬만한 위험쯤은 문제없을 거요." 그의 따뜻한 말에 노연홍의 가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옥용은 밝고 환하게 만개했다. "당신은 보기보다는 좋은 분이군요." 석중옥은 말없이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연홍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이때 한쪽에서 이들의 다정한 모습을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몇 쌍의 시선이 있었으 니...... 백상아, 임소군, 곽무지...... 바로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의 시선 속에는 야릇한 시새움과 함께,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대담하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노연홍의 솔직한 성격 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제 24 장 마물출현(魔物出現) 그때였다. 앞쪽에서 남궁황의 신중한 음성이 들려 왔다. "모두들 지금부터는 더욱 조심하시오. 이 앞에 있는 것은 지중유사(地中流沙)의 일종인 침혼 류사하(沈魂流沙河)요." 석중옥과 노연홍은 퍼뜩 정신을 수습하며 앞을 응시했다. 그들의 앞에는 동굴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형성된 광장(廣場)이 펼쳐져 있었다. 한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면의 동굴 바닥은 황금빛 모래가 아닌가! 하나 보기에는 부드럽고 고와 보이는 그 황금빛 모래는 사실 지극화염무에 못지않은 무시무 시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흐르는 모래인 침혼류사하였다. 남궁황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저 모래는 겉으로 보기엔 고요하지만 속에는 무서운 소용돌이가 흐르고 있소." "......!" "한 발이라도 자칫 실수해서 엉뚱한 곳을 밟으면 그대로 유사 속으로 잠겨들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오." 그때 누군가 소리쳐 물었다. "저 유사의 길이는 얼마나 되오?" "약 오십 장 정도로 알고 있소." 남궁황이 대답하자 방금 그 음성이 재차 일었다. "그러면...... 경공(輕功)으로 뛰어넘으면 되겠구려." 제아무리 경공의 달인이라도 단번에 오십 장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군 웅들의 실력이라면 작은 돌멩이 몇 개만 있으면 점수횡도(點水橫渡)나 등평도수(登平渡水) 같은 신법으로 오십여 장을 건너뛴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하나 남궁황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소." "......?" 모두들 표정으로 짙은 의혹을 드러냈다. 그러자 남궁황은 시선을 들어 동굴 천장을 가리켰다. "저곳을 보시오." 모두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순간, "헉......!" "저, 저럴 수가......" 중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대경의 기색을 드러냈다. 보라! 동굴 천장은 온통 거미줄로 가득 덮여 있지 않은가! 더욱이 거미줄은 보기에도 가슴 섬뜩한 핏빛이었다. 그리고 거미줄에는 수천, 수만 마리는 됨직한 무수한 거미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들 역시 핏빛을 띠고 있었으며, 크기는 거의 어른의 주먹만했다. 그 끔직한 광경에 여인들은 물론 내로라 하는 고수들도 부르르 소름 끼치는 전율을 일으켰 다. 남궁황은 무거운 음성으로 설명을 이었다. "저 거미들은 지옥혈주(地獄血蛛)라는 것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조금도 움직 이지 않소." "......!" "하나 잘못해서 저 숱한 거미줄 중 하나라도 건드리게 되면 지옥혈주들은 깨어나고, 거미줄 에 걸린 사람은 꼼짝없이 놈들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오." "으......" 중인들은 말만 들어도 무서운 듯 부지중 공포의 신음성을 터뜨렸다. 남궁황은 다시 한 번 중인들을 돌아보며 다짐시켰다. "때문에 누구도 경공을 펼쳐서는 안 되오. 모두 나의 발자국만을 따라 오시오." "알겠소이다."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갑시다." 중인들은 초조한지 남궁황을 재촉했다. 남궁황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천천히 신중한 발걸음을 모래밭에 내디뎠다. 중인들은 긴장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남궁황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군중들은 모래 위를 전진해 갔다. 침혼류사하!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유사에 빠져 영원히 나올 수 없게 된다. 이름 그대로 혼을 이곳에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방심할 수 있으랴? "......!" 장내에는 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있었지만, 숨소리 한번 크게 일지 않았다. 모두들 발 밑을 주의하며 한걸음 한걸음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전진하고 있었 다. 사박...... 사박...... 넓은 동굴 안에는 모래를 밟는 조심스런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백여 명의 인물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침혼류사하의 중앙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거의 한 시진 가량의 시간이 소비된 후였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 어디선가 기괴한 음향이 들려 와 중인들의 바짝 곤두선 신경을 자극했다. 그와 함께 침혼류 사하가 돌연 기괴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소면낭심 도계조가 다급한 음성을 발했다. "이, 이게 무슨 현상인가?" 그러나 선두에 선 남궁황 역시 당혹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 나도 모르겠소. 두 달 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바로 그 찰나였다. 키-악! 돌연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괴성이 동굴 속에 메아리쳤다. 동시에, 촤아-! 갑자기 침혼류사하의 한곳이 폭죽 튀듯 튀어오르며 거대한 물체가 솟았다. 아! 그것은 괴이하게도 길이가 수장에 달하는 거대한 뱀이 아닌가! "......!" 중인들은 너나할것없이 대경 실색하여 입을 딱 벌렸다. 대망(大 )은 크기부터 엄청나게 컸다. 몸통이 거의 장정 두 사람이 손을 내뻗어야만 간신히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굵었고, 길이는 도저히 꼬리가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침혼류사하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대망은 군웅들을 노려보며 한차례 시뻘건 눈알을 떼구루 루 굴렸다. 대망의 세모꼴로 쭉 찢어진 눈에서 소름끼치는 끔직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피처 럼 붉은 혓바닥이 마구 넘실댔다. 다음 순간, 덥석! 대망은 돌연 근처에 있던 한 인물의 다리를 물고 다시 모래 속에 잠겼다. "아-악!" 다리를 물린 인물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발버둥쳤다. 하나 비명성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그 인물은 모래 속으로 흔적도 없이 딸려 들어가 버렸다. 미처 다른 사람들이 손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크-악!" "사, 살려 줘......!" 재차 처절 무비한 비명성이 연거푸 들려 왔다. 다시 세 명의 인물들이 모래 속으로 딸려 들 어가 버렸다. 그들은 대망을 피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어이없이 유사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공포(恐怖)! 무서운 죽음의 공포가 중인들의 뇌리를 엄습했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남궁황의 절망 어린 외침이 들렸다. "유, 유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그럴 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중인들이 분분히 대경성을 터뜨릴 때였다. "헛!" 감숙성(甘肅省)의 고수인 철면배도(鐵面背刀) 위전상(威展祥)이란 인물이 다급한 헛바람을 토했다. 그의 한 쪽 발목은 이미 무릎까지 유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몹시도 다급한 상황 은 순간적으로 그를 당혹케 만들었다. "차앗-!" 위전상은 남궁황의 당부도 잊은 채 그대로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남궁황은 급히 그를 제지했다. "안 되오! 경공을 펼치면 안 되오!" 하나...... 이미 위전상의 몸은 핏빛 거미줄에 닿아 버리고 말았다. 순간, 차-앗! 괴이한 음향과 함께 위전상은 그대로 거미줄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악-! 이, 이것은......!" 그는 거미줄에서 떨어지려고 몸부림쳤다. 하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의 신형은 거미줄에 더욱 친친 감겨 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사사사삭......! 죽은 듯 꼼짝 않던 지옥혈주들이 사방에서 나는 듯 기쾌히 몰려들었다. "아아아악-!" 처절 무비한 단말마가 중인들의 고막을 아프게 찔러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옥혈주들은 금세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아......! 무엇이 남았는가? 뼈 한 개...... 핏방울 하나 남지 않았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지옥혈주는 한 인물(人物)을 송두리째 먹어 치운 것이다. "저주받은 마물(魔物)들......!" 누군가가 씹듯이 일갈을 내뱉었다. 진정 지옥혈주의 무서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카아아악-! 동굴 속은 소름 끼치는 괴성들로 귀청이 터질 듯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거대한 대망들이 솟구치며 중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으-악!" "케-엑!" 공포가 극(極)에 달한 처절한 단말마가 잇달아 일어났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인명이 대망의 밥으로 사라져 갔다. 무서운 유사의 소용돌이 또한 중인들을 죽음의 위협 속으로 몰아넣었다. 대망과 유사를 피해 솟구치면 이번에는 지옥혈주가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크-아-악!" "아-흑!" 순식간에 동굴 속은 처절 무비한 비명성으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 와중에도 중인들은 안간힘을 다해 침혼류사하를 벗어나려 애썼다. 이 지옥 같은 곳을 한 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길이 유일한 생로(生路)임을 깨달은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씩 죽음의 행진(行進)이 계속되었다. 키-악! 또다시 한 마리 대망이 솟구치더니 전낭자 호파파를 향해 덮쳤다. "이런 찢어 죽일-!" 호파파는 발연 대로하여 혼신의 장력(掌力)으로 대망을 후려갈겼다. 꽝! 끄-악! 대망은 목을 격타당하고 고막이 터질 듯한 고통성을 터뜨렸다. 하나 그뿐......! 대망은 전혀 끄떡도 않는 것이 아닌가! 대신에 대망은 다른 한 인물을 덥석 통째로 물고 사라졌다. "크-아-악!" 아아! 십팔층(十八層) 지옥(地獄) 어느 곳에 이런 곳이 있던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낱 대망과 거미의 먹이로 화하다니...... 아수라지옥이 있다면 필경 바로 이런 곳이리라. 사방을 돌아보아도 죽음뿐, 살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 나머지 인물들은 이를 악문 채 필사적으로 사지(死地)를 벗어나고 있었다. 석중옥 역시 이 순간만은 난생처음으로 은은한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가공하군. 천하에 이런 죽음의 절지(絶地)가 존재하고 있다니......' 바로 그때, 캬-악! 돌연 한 마리 대망이 모래와 함께 튀어오르며 석중옥을 물어 왔다. 바로 일 장 거리의 눈앞 에서였다. "한낱 미물 따위가 감히......" 석중옥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꽈르르릉! 가공할 장력이 뻗어 나오며 그대로 대망의 양쪽 눈을 강타했다. 콰쾅! 크-악! 대망은 눈에서 피를 뿌리며 잽싸게 모래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노연홍은 크게 놀란 얼굴로 다급히 석중옥의 곁으로 다가왔다. "큰일날 뻔했어요." "......" 석중옥은 말없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선두에 가던 남궁황의 외침이 들려 왔다. "여러분-! 침혼류사하를 거의 다 빠져 나왔소.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아......!" 중인들은 분분히 탄성을 터뜨리며 걸음을 빨리 하여 전진했다. 한데 순간, "악-!" 또다시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뾰족한 여인의 비명성이었다. 석중옥은 얼른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사에 무릎까지 빠진 여인의 모습 이 보였다. 그녀는 바로 호파파의 제자인 절름발이 소녀, 곽무지가 아닌가! 곽무지는 몹시 당황하여 급히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치고 있었다. 차-악! 곽무지는 영락없이 지옥혈주의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아-악! 살려 줘요......" 곽무지는 처절히 옥용을 일그러뜨리며 몸부림쳤다. 하나, 사사사삭...... 먹이를 발견한 지옥혈주들은 또다시 눈부신 속도로 모여들었다. 석중옥은 다급함을 느끼고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듯 기쾌히 지면을 박찼다. 휙! 그 순간, 노연홍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제지했다. "안 돼요!" 그러나 이미 석중옥은 곽무지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지옥혈주들 역시 막 곽무지를 덮쳐 가 고 있는 참이었다. 석중옥의 우수가 은은한 푸른 빛과 함께 반원형을 그리며 세차게 뿌려졌 다. 파츠츠츳-! 꽝- 꽈르르릉-! 고막을 긁는 음향에 이어 엄청난 굉음이 동굴을 진동시켰다. 그와 함께 너무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장을 자욱하게 뒤덮고 있던 지옥혈주와 거미줄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한꺼번에 박살나며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천장이 십여 장 넓이로 움푹 파여 들어가 버렸다. 실로 단 일(一) 수(手)의 위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스윽! 석중옥은 유연한 동작으로 곽무지를 허리에 안고 허공 중에서 빙글 신형을 회전시키고 있었 다. 이어 가볍게 침혼류사하를 벗어난 지면에 내려섰다. "......!" 그 일련의 광경에 중인들은 경악과 경탄으로 입을 딱 벌렸다. 특히 철검공자 남궁유룡의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음...... 역시 놀라운 자다. 당욱이 당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당욱이라니...... 그는 일전에 토지묘에서 석중옥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 않은가? 한데 남궁유룡이 그 일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을까? '어쩌면 저자는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주의를 요하는 인물인지 모른다. 하나......' 이렇듯 남궁유룡이 뇌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중인들은 마침내 침혼류사하를 벗어났다. 하나, "......" 사지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인들의 표정은 침통하기만 했다. 침혼류사하를 벗어나는 동안 무려 이십여 명의 인명(人命)을 잃은 탓이었다. 지금 백여 명의 인물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팔십 명이 될까말까 했다. 희생된 고수들의 면면을 보면 그야말로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서는 능히 한 지방의 패주(覇主)가 되고도 남는 절정고수들이 짧은 순간에, 너무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모두들 침통히 침혼류사하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고운 모래밭, 침혼류사하! 유사는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하기만 했다. 그 광경은 더욱더 무서운 공포와 치 떨리는 분노를 일으켰다. "으......" "이, 이런 곳은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 중인들은 분분히 이갈리는 신음성과 욕설을 터뜨렸다. 이때 한편에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곽무지가 석중옥의 품을 벗어나고 있었다. "고, 공자, 고마워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곽무지는 은은히 노을빛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말했다.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이어 그는 시선을 돌려 침혼류사하를 응시했다. 그러자 조금 전에 벌어졌던 한 편의 참극(慘劇)이 생생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지옥이 따로 없군. 바로 이곳이 저주받은 지옥이 아닌가?' 그는 내심 탄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였다. 다른 한쪽에선 뜻하지 않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바로 소면낭심 도계조가 무서운 얼굴로 남 궁황을 다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황! 네놈은 어째서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남궁황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소면낭심 도계조는 두 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목에 힘줄을 돋우었다. "왜 진작에 이곳에 괴물 같은 뱀이 있다고 일러주지 않았느냐 말이다!" 남궁황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나도 몰랐기 때문이오." "남궁황! 웃기지 마라! 네놈도 몰랐다고......?" 분위기는 점차 험악하게 발전해 갔다. 백발마동 적황이 재빨리 나서서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도(都) 형(兄)! 그만두시오. 남궁검문의 십이쾌검수도 네 명이나 목숨을 잃지 않았소?" "......!" "만일 남궁황이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어찌 십이검수까지 희생시켰겠소?" 백발마동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과연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백발마동은 이어 남궁황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남궁 대협! 다시 길을 안내해 주시오." "......" 남궁황은 여전히 무거운 신색이었으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재차 일행의 선두에서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문득 석중옥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백발마동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구대흉인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다는 그답지 않군.' 하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무겁게 그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이미 흉흉한 살기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니...... 항차, 그들은 어찌 될 것인가? * * * 천연적인 동굴은 곧 끝이 났다.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가미된 인공통로가 나타났다. 통로의 벽은 모두 청석(靑石)을 깎아 만 들었으며 그 넓이는 무려 이 장 가량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 중인들의 앞에 거대한 석문(石門)이 하나 나타났다. 거기에는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천하의 기보가 모두 이 안에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안에 들라. 한백.> 그 글씨를 보자 그제서야 중인들의 굳었던 안색이 약간 펴졌다. 남궁황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부터가 한백의 장보고에 해당하오. 문주께서는 이 안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 오."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어서 들어갑시다." 천뢰장 맹강이 답답하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좋소. 그럼 안으로 들어가겠소." 이어 그는 남궁유룡과 십이쾌검수의 남은 여덟 명과 함께 석문으로 다가갔다. 이때 석중옥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들을 제지하려고 했다. 하나 이미 때는 늦었다. 스륵! 남궁황이 석문의 어느 한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 그들이 있던 곳이 빙글 도는가 싶더니 그 들의 신형이 암문(暗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창졸지간의 일인지라 중인들은 그때까지도 무슨 영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순간, 쿠르르르- 르르릉-! 동굴의 어디에선가 굉렬한 굉음이 들려 왔다. 동시에 동굴 전체가 천천히 진동했다. "큰일났다. 기관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한쾌가 안색이 대변해 크게 외쳤다. "뭣이? 나, 남궁황은......?" "그는 암동(暗洞) 속으로 사라졌다...... 우,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중인들 속에서 커다란 소요가 일어났다. "남궁황! 이 시러베아들 같은 놈아! 어디로 갔느냐?" 한쾌가 악을 쓰듯 외쳤다. 그때 어디선가 남궁황의 음성이 미묘한 여운을 울리며 들려 왔다. "이곳은 매 십(十) 보(步)마다 죽음의 기관이 중첩(重疊)되어 있으니 그대들이 이것을 모두 뚫는다면 아마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게요. 으핫핫핫......" 소면낭심 도계조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찢어 죽일......!" 순간, 쿠쿠쿠쿠- 쿠쿠쿠쿠-! 굉렬한 굉음이 중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들은 일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의 안색은 일제히 시커멓게 변하고 말 았다. 아......! 천장이 통째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우르르르릉...... 동굴의 뒷면이 커다란 석벽(石壁)으로 가로막혀 버렸다. 도계조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씹듯이 외쳤다. "남궁황...... 이 빌어먹을 놈! 어쩐지 네놈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했다." 하나 상황은 계속 급변하고 있었다. 스르르르릉-! 이번에는 밀폐된 벽면에서 굉음이 울리며 여러 개의 통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 치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가라는 듯이...... "처, 철저히 농락당하는군!" 누구의 입에선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리 오래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에도 천장은 계속 그 들의 머리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일순, 지살 전쾌가 침중한 어조로 뇌까렸다. "우리는 이곳으로 가겠다." 이어 그는 천패 섭붕, 백발마동 적황과 함께 한 통로를 택해 신형을 날렸다. 쿠쿠쿠쿠- 쿠쿠쿠! 천장은 점점 빠른 속도로 내려앉았다. "안, 안 되겠다." "우선 피해야겠다." 나머지 인물들도 어쩔 수 없는지 분분히 하나씩의 통로를 택해 몸을 날렸다. "빨리 이리 와요!" 저쪽에서 노연홍이 석중옥을 향해 어서 오라고 마구 손짓을 했다. 하나 석중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노연홍은 다급한 표정으로 몇 차례인가 더 그를 손짓해 부르다가 금도공자 전붕비가 계속 재촉하자 안타까운 듯 그를 한차례 더 쳐다보더니 임소군 등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는 통로 로 몸을 날렸다. "석 노제...... 왜 그러고 있는가? 우리도 어서 몸을 피해야 하지 않겠나?" 석중옥이 여전히 묵묵히 있자 한쾌가 답답한 듯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사방의 문은 이미 절반 이상 닫히고 있었다. 그때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며 그의 몸이 가장 좌측으로 날아갔다. "따라오시오." 한쾌와 오행수 조담, 사마진평 등은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좌측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위와 아래에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석중옥의 신형은 그 중에서 거의 닫혀 가는 위쪽 문으로 보이지도 않게 날아갔다. 휘휘휙! 중인들의 몸은 전광같이 허공을 갈랐다. 그들이 막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콰-앙!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그와 함께 천장은 굉렬한 음향과 함께 내려앉았다. 쿠콰콰콰콰...... 사방이 온통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에 중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 것이다. < 제2권 끝 > 25 장 위기중첩(危機重疊) 26 장 관문돌파(關門突破) 27 장 풍운무적(風雲無敵) 28 장 암도열풍(暗道熱風) 29 장 팔층루각(八層樓閣) 30 장 신검출현(神劍出現) 31 장 삼대사법(三大邪法) 32 장 사지탈출(死地脫出) 33 장 장강풍운(長江風雲) 34 장 검정여정(劍情女情) 35 장 삼인합공(三人合攻) 제 25 장 위기중첩(危機重疊) 석중옥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석문 안은 괴이한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누군가 화섭자에 불을 댕겼다. 화르르...... 어둠이 짙어서인지 불꽃은 유난히 밝게 타올랐다. '불이 타는 것을 보니 어디선가 공기가 통하고 있군.' 불꽃을 바라보는 석중옥의 눈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비쳐졌다. 그와 같이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한쾌와 오행수 조담, 묵운편 사마진평, 그리고 놀랍게도 단천검객 비몽과 천애광자의 손녀인 제완완도 있었다. 그들은 엉겁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석중옥 일행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한쾌가 석중옥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석 노제, 굳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라도 있나?" 석중옥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됨을 보고 쓰게 웃었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뭔가?" "잊으셨습니까, 당이선생의 기관도해를......? 전 그것이 이곳 중앙기관의 도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중옥은 중인들의 얼굴이 의혹에 물들어 있음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 도해에는 도해말고 몇 마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 그 '좌상, 우칠, 홍청백, 삼십육, 좌상' 따위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 거기서 문득 좌상이란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좌상(左上)! 한쾌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수많은 통로 중에서 가장 좌측의 위에 있는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구먼." 제완완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당신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관도해라니...... 그리고 좌상, 우칠은 또 무얼 말하는 거예요?" 그녀는 원래 성질이 급한지 쉬지 않고 재빠르게 물어 보았다. 한쾌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쯧...... 어지간히 성질도 급한 아가씨구먼......" 이어 그는 자신이 당이선생의 백전아를 훔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우연히 기관도해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단천검객 비몽과 제완완은 흥미 진진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동안 거의 말이 없던 단천검객 비몽이 그의 말을 듣고 눈에서 기광을 흩뿌렸다. "귀하의 말대로라면, 이번 일이 비단 남궁검문뿐만 아니라 사천당문까지 연관되어 치밀한 계획하에 준비된 것이라는 말이오?" "그렇다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글쎄...... 천하 정복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한쾌는 농담 식으로 말했으나 막상 말을 해놓고 나니 왠지 꼭 그런 것 같았다. 말을 하는 도중 그들은 계속해서 암도(暗道)를 걷고 있었다. 암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끝간데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데 문득 석중옥은 걸음을 멈추고 전면을 응시했다. "무슨 일인가, 노제?" 한쾌가 의아한 듯 중얼거릴 때, "쉬! 가만......"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 장내에는 일시 죽음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이한 울림이 들려 오고 있지 않은가? 우우웅...... 그것은 너무도 나직한지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고막을 찢을 듯 커지며 가공할 울림으로 울려 퍼졌다. 우...... 우...... 우...... 웅! 그 괴이한 음향에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이것이 무, 무슨 소리지?" "그, 글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중인들의 시선이 앞으로 향하는 순간, "으헛......" 그들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졌다. 본 것이다. 우...... 우...... 우...... 웅! 천지를 뒤흔드는 음향과 함께 어두운 동굴을 가득 메우며 퍼져 오는 붉은 안개를...... 아니, 그것은 붉은 안개가 아니었다. 박쥐! 먹물 같은 어둠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날아 올라오고 있는 것은 피처럼 붉은 박쥐 떼였던 것 이다. 그것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숫자였다. "사, 사혈편복(死血 )!" 한쾌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에 공포의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사혈편복은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것이었다. 묘강(苗疆)의 깊숙한 오지(奧地)에만 살며 한번 나타나면 쥐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않는다 는, 죽음의 박쥐 떼였다. 그것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묘강에서만 서식하는 사혈편복이 이곳에 있다니......" 한쾌의 중얼거림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우...... 우...... 우...... 웅! 동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노도와 같이 몰려드는 사혈편복의 무리가 이미 그들의 코앞에 들 이닥친 것이다. 중인들은 다급하여 미친 듯이 장력을 후려갈겼다. "야잇!" "죽어랏-!" 슈르르릉-! 꽈르르- 릉! 그들의 공세는 금시라도 암도를 무너뜨릴 듯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하나 속수무책이었다. 거의 끝도 보이지 않는 사혈편복이 겨우 육(六) 인(人)의 장력(掌力)에 물러날 리가 없었 다. 사혈편복에 가려져 그들의 온몸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만약 석중옥 등이 강호 초일류고수들이 아니었다면 그 들은 벌써 한줌 핏물로 화해 버렸을 것이다. 하나 그들이 쓰러지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했다. "으윽!" 그들 중 공력이 제일 약한 축에 속한 제완완이 결국 사혈편복 한 마리에게 어깨를 물리고 비틀거렸다. 그러자 사혈편복이 그녀에게로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순간, "낙화섬수!" 석중옥의 일갈이 터지며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뻗어 나와 그녀의 주위를 한차례 맴 돌았다. 동시에, 끼아-악!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수십 마리의 사혈편복이 눈 깜짝할 새 한줌 잿더미로 화해 사라졌 다. 실로 가공할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아무리 쳐죽여도 사혈편복의 수는 조금도 줄어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미친 듯이 장력을 갈겨대고 있던 사마진평의 눈에서 가공할 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 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마물(魔物)! 아예 이 세상에서 흔적을 없애 버리겠다." 나직한 냉성과 함께 그는 자신의 품속으로 왼손을 집어넣다가 빼내며 왼쪽 손바닥을 쫙 폈 다. "모두 눈을 감으시오!"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번- 쩍! 난데없이 눈이 멀 듯한 엄청난 광채가 그의 왼손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으윽!" "음!" 중인들은 황급히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고수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광채를 보는 순간 아찔한 충격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광채는 그토록 강렬했다. 석중옥 역시 일순 동공(瞳孔)이 파열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눈을 감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절전된 지 이백 년이 넘는 희대(稀代)의 기공(奇功), 무시대법(無視大法)을 펼 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천검객 비몽 같은 초일류고수조차 감히 마주볼 수 없는 광채를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순간, 석중옥은 보았다. '저, 저것은......?' 대체 무엇을 보았는가? 사마진평의 손바닥! 그곳에 홀연 우윳빛 둥근 원형이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 우윳빛 원형 속에는 품(品) 자(字) 형(形)으로 세 개의 금불상(金佛像)이 뚜렷이 떠오르 고 있었다. 웃고, 노(怒)하고, 번뇌(煩惱)하는 세 개의 불상! 동시에 사마진평의 전신에서는 이 순간 가공할 마기(魔氣)가 몸서리쳐질 정도로 강력하게 내뻗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금불상에서 뻗어 나오는 광채가 사방으로 폭사되자 그 것에 스친 사혈편복들이 모두 으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끼아-아-악! 무서운 기세로 사방을 짓쳐 들던 사혈편복의 무리가 먼지처럼 스러져 갔다. 으스스스...... 수도 헤아릴 수 없었던 사혈편복 떼는 금빛 광채를 받는 순간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 석중옥은 이 기적 같은 광경에 한동안 넋을 놓았다. 기적(奇蹟)! 그렇다. 기적이 아니라면 어찌 인간이 이렇듯 무서운 사혈편복의 무리를 일시지간에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중인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 "......!"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무흔풍 한쾌였다. 그는 쥐눈을 부릅뜨고 사마진평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끔찍한 사혈편복은 다 어디 가고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다 니......!" 그때 석중옥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사마진평을 향해 진중한 음성을 열었다. "형님! 조금 전의 그것은 혹시 탈명금마경(奪明金魔鏡)이 아닙니까?" 이번에는 사마진평이 깜짝 놀라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노제, 자네가 어찌 그것을......?" "탈명금마경? 그게 도대체 뭐지?" 중인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마진평은 석중옥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노제의 눈은 속일 수 없구먼. 이것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나의 친구인 녹림마군자 (綠林魔君子) 단요종(段瑤宗)에게서 빌린 탈명금마경일세." 탈명금마경(奪明金魔鏡)! 이것이야말로 포달랍궁의 진산기보(鎭山奇寶)로서, 포달랍궁의 사대존자 중 하나인 황룡존자 오찰극이 백쾌당의 도움을 받아 회수하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것을 본 사람은 모두 이 세 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위력을 아무도 모른다는 절세의 마물(魔物)! 그 탈명금마경이 단요종을 거쳐 사마진평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탈명금마경의 위력은 좀처럼 놀랄 줄 모르던 석중옥마저 경악시킬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가히 고금제일의 마보(魔寶)로서, 포달랍궁에서 최고의 보물로 신성(神聖)시한다는 말이 결 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인들은 사마진평에게 탈명금마경에 대한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득, 멍하니 사마진평의 말을 듣고 있던 한쾌가 돌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구......! 헛살았구나, 헛살았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한 늙은이?" 오행수 조담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지 않은가? 저런 기보가 포달랍궁에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달려가서 훔쳐 왔을 텐 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가 있어도 듣지 못해서 저런 보물을 놓치다니...... 애석타...... 애석해......" 중인들은 그의 익살에 굳었던 안색이 약간 펴졌다. 그때였다. "으음......" 제완완이 현기증이 이는지 몸을 한차례 휘청거렸다. 사혈편복의 이빨에는 사람의 신경(神經) 을 마비시키는 기이한 독(毒)이 묻어 있었다. 중인들은 제완완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떼이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칠흑 같은 어둠과 괴이한 적막이 흐르는 동혈 속. 그 어둠보다 더 짙은 흑의(黑衣)를 걸친 아홉 명의 인물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흑의, 검은 피풍, 검은 신발...... 가슴에는 기이한 칼 모양의 무늬를 새긴 그들은 은연중 가공할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들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도객(刀客)들이라는 구도회의 천하구도(天下九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동혈은 무섭도록 적막했고, 갈수록 기괴로운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분명 동굴 안이건만 나무들이 무성했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 그루가 아니라 마치 남 만(南蠻)의 밀림(密林)을 연상케 하듯 숲이 울창하고 넝쿨이 우거져 있었다. 어둠 속의 동혈 안에 있는 수많은 나무숲들은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하나 갈수록 기괴한 나무들만 울창하게 자라 있을 뿐, 별다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돌연 그들 중 성질이 가장 급한 혈도(血刀) 음무기(陰無忌)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별것 아닌데그래. 아무것도 없잖아......" 천하구도 중 셋째로, 그들 중 가장 심기가 깊고 냉철한 쾌도(快刀) 엽궁(葉宮)이 고개를 흔 들었다.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다, 여덟째. 이곳은 지하화맥이 가까이 지나는 곳이라 비록 중원(中 原) 땅 밑이지만 기후는 남만이나 묘강의 그것과 같다. 이런 지형지물을 이용해 남궁검문에 서 술책(術策)을 부렸다면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런 쾌도 엽궁조차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의 모양이 점점 괴이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구(九) 인(人)은 더욱 속도를 빨리 하여 전진을 계속했다. 한데 돌연 구 인의 전신을 향해 사이롭기 짝이 없는 파공음이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것이 아 닌가! 츄츄- 츄츄츄-! 끼-익! 끼지지- 직! 제일 앞장섰던 혈도 음무기가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벼락처럼 신형을 멈추고 경악에 가득 찬 음성을 토해 냈다. "어헛! 나, 나무가 움직인다!" 주위에 울창하게 우거져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앞으로 해일처럼 밀려오는 괴목(怪木)들의 가공할 움직임은 가히 악마(惡魔)의 화 려한 윤무(輪舞)를 연상케 했다. 순식간에 천하구도의 코앞까지 다가온 나무들은 더욱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다. 가지와 줄기 가 괴이한 각도로 뒤엉키며 마치 용수철처럼 늘어나는 것이었다. 끼지지- 지직! 쐐애-애액! 그 늘어진 가지와 줄기들은 순식간에 아홉 사람의 몸을 휘감아들었다. 쾌도 엽궁이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이...... 이제 보니 이것은 묘강에서만 자란다는 식인목(食人木)이구나!" 하나 그가 채 놀란 외침을 토해 내기도 전에 수십 가닥의 나무줄기가 쾌도 엽궁의 몸을 소 용돌이처럼 얽어들었다. 식인목은 묘강에서도 오지(奧地) 중의 오지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진 괴목으로,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생명체는 무엇이든 다가가서 뼈를 부수고 껍질을 발라 내서 그 영양분을 빨아먹는 끔찍한 마물이었다. 그런데 그 식인목이 황산의 지하동부에 나타났으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징그러운 것들! 모조리 베어 버리겠다." 쾌도 엽궁의 손에서 새파란 도기(刀氣)가 줄기줄기 뻗어나며 빛살처럼 사방을 난도질했다. 버-언쩍! 우지- 끈! 후두두- 둑! 수십 가닥의 나무줄기들이 순식간에 수백 조각으로 갈라지며 한꺼번에 지면으로 떨어졌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지면(地面)으로 떨어졌던 수백 조각의 나무줄기들이 그대로 꼿꼿하게 곤 두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쾌도 엽궁은 물론이고 나머지 여덟 사람도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백 개의 나무 조각들은 돌연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며 무섭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기변(奇變)이 아닐 수 없었다. 아홉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식인목의 수효 가 순식간에 수십 배로 불어나 버린 것이다. "으...... 아, 악마의 숲이다!" 아홉 사람의 전신은 이미 수백 가닥의 식인목에 의해 거미줄처럼 옭아매어져 있었다. 불- 끈! 불- 끈! 식인목들이 그들의 전신을 쥐어짤 듯이 조여들자 그들의 옷자락이 툭툭, 터지며 그들의 근 육 사이로 시뻘건 힘줄이 무섭게 불거졌다. 둘째인 패도(覇刀) 잠풍(岑風)이 자신의 목을 휘감아드는 나뭇가지를 힘껏 잡아떼며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천하구도가 아니냐? 천하제일의 도객이라는 우리가 이따위 나무에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는 부르르 전신을 떨며 자신을 조여 감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올렸다. "이-얍!"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패도 잠풍의 두 팔이 뽑아 올린 나무를 힘껏 죄었다. 순간, 우지- 끈! 콰- 쾅! 식인목은 대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으로 박살나 버렸다. 하나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 이럴 수가......?" 어처구니없게도 수천 조각으로 박살났던 식인목이 또다시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벌떡 곤두 서는 것이 아닌가! 아홉 사람의 심혼(心魂)은 이 순간 완전히 절망으로 얼어붙었다. 끼지- 지직! 쐐-액! 쐐애-액! 이제는 수만 그루로 불어난 악마의 식인목은 저주스럽게 꿈틀거리며 아홉 사람의 숨통을 무 섭게 조여 오고 있었다. * * * 분지(盆地). 빽빽한 원시림(原始林) 사이에 있는 조그만 분지였다. 이 분지는 괴이하게도 땅의 색깔이 온통 잿빛을 띠고 있었다. 그 분지의 입구에 문득 대여섯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의 맨 앞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장여인(男裝女人)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노연홍이었다. 노연홍은 동굴을 벗어난 후 난데없이 밀림(密林) 같은 분지가 나오자 흠칫 놀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녀의 뒤를 따르던 임소군이 눈을 빛냈다. "이곳은 지하화맥이 지나는 곳이기 때문에 기후가 열대(熱帶)와 같아. 그래서 나무들이 이렇 게 밀림을 이루고 있는 것일 거야." "그런데 왜 분지 색깔이 저렇지요? 난생처음 보는 거예요." "글쎄...... 나도 이런 곳은 처음인데......" 그녀들의 뒤로는 금도공자 전붕비와 일월쌍려 두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문득 임소군이 중인들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모두 조심하세요. 왠지 모르지만 이곳에 커다란 위험이 있을 것 같군요." 모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분지 속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에 와 닿는 느낌이 여느 땅보다 부드럽게 느껴졌다. '기분 나쁜 곳이군. 땅의 색깔이나 느낌이 어딘지 이상한데......' 일행 중 가장 끝에 처져 있던 금도공자 전붕비는 무언지 모를 기이한 느낌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하나, 그렇다고 특별히 꼬집어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전붕비는 문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후훗...... 아마 내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운 모양이군." 그랬다. 최소한 분지의 절반 가까이 이를 때까지만큼은 전붕비의 꺼림칙했던 생각은 기우 (杞憂)에 불과했다. 한데 분지의 중앙에서 채 두 걸음이나 더 나아갔을까? 돌연, 두 발이 땅속으로 쑥 빠져 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전붕비는 대경 실색하여 급히 신형을 뽑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판인지 두 발은 마 치 끈끈한 아교에라도 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두 발은 마치 자석(磁石)에라도 끌리듯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이...... 이런 낭패가 있나!' 전붕비는 당혹한 표정으로 급히 아래를 쳐다보았다. 순간, 꿈틀...... 꿈틀...... 여태껏 멀쩡했던 회색 땅이 갑자기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이 시야에 투영되었다. 그러나 이 순간, 전붕비의 두 눈은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부릅떠지고 말았다. "배, 뱀!" 뱀? 그렇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땅이 아니었다. 그들이 땅인 줄 알고 밟고 지나왔던 분지는 바로 수많 은 뱀 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회색 물결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족히 수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회색 물뱀이 발 밑에서 일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끼-악!" "으헛...... 이, 이것은......!" 노연홍을 비롯한 중인들의 입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제서야 그들도 지금 자신들이 발을 딛고 있는 것이 땅이 아니라 뱀의 무리라는 것을 안 것이다. 여기도 꿈틀...... 저기도 꿈틀...... 알고 보니 이 분지는 온통 회색 물뱀으로 가득 채워진 하나의 늪이었던 것이다. '어...... 어쩐지 부드럽다 했더니...... 우리는 땅을 밟은 게 아니라 물뱀들을 밟아 온 것이구 나!' 전붕비는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뱀 위를 걷는다고 상상해 보라. 어찌 끔찍하지 않겠는가? "사, 사형...... 점점 빨려 들어가요......" 노연홍의 거의 울음에 가까운 비명이 그의 귀에 들려 왔다. 노연홍뿐만이 아니었다. 임소군과 우문당, 도옥교, 그리고 전붕비 자신도 이미 두 발이 무릎 까지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홍매! 진정해...... 물뱀에겐 독이 없으니 너무 겁먹지 마......" 임소군이 노연홍을 진정시켰다. "그, 그래도 이렇게 고스란히 빨려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중인들은 전신의 내공(內功)을 최대한 상체(上體)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신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임소군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런 기색이 스쳐 지났다. "이제 보니 이 물뱀들은 모조리 한 덩어리로 엉켜 있는 모양이야!" 설상가상이라더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자신들의 발목을 감고 있는 물뱀들이 이 늪 속의 모든 물뱀들과 한 덩어리로 뒤엉켜 있다면 수백 마리가 넘는 이 물뱀을 모조리 끌어올리기 전에는 결코 두 발을 뽑아 낼 수 없다는 결 론이 아닌가? 이때, "끼-악-! 물뱀들이 모, 몸으로 기어 올라와요!" 노연홍은 몇 마리의 물뱀들이 자신의 허벅지까지 슬슬 기어 올라옴을 느끼고 사색이 되었 다. 기생충처럼 가늘고 긴 회색 물뱀.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리는 그것들이 마침내 몸 위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갑자기 임소군이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려 음향을 흘려 내기 시작했다. "피이이리-" 그 기괴한 음향은 딱 꼬집어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수많은 뱀들이 한꺼번에 혓바닥을 놀려대는 소리 같다고나 할까? 한데 신기하게도 허벅지까지 기어 올라오던 물뱀들이 그 소리를 듣자 서서히 방향을 틀어 다시 발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의 발목을 감아 쥔 힘도 한결 느슨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경악한 눈으로 임소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입을 오므려 기이한 음향을 발출해 냈다. 그러던 한 순간, "자! 지금이에요. 어서 몸을 날려 늪을 벗어나요." 중인들의 귀로 임소군의 다급한 전음성이 들려 왔다. 과연 그들은 발목이 더욱 홀가분해진 것을 느끼며 즉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휘-익! 휙! 그제서야 그들은 간신히 물뱀의 늪을 벗어나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나 그들의 전신은 마치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노연홍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늪을 바라보았다. "세, 세상에 저런 곳이 있다니......" 전붕비가 기이한 눈으로 임소군을 바라보았다. "임 부인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데 조금 전의 일은......?" 복면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임소군의 입이 조금 벌어지며 박속같이 새하얀 치아가 모습을 드 러냈다. "별말씀을...... 전 일전에 만수지이록(萬獸地異錄)이라는 기서(奇書)를 읽은 적이 있어요. 그 곳에서 뱀 종류를 다루는 기이한 무공 하나를 배웠답니다. 바로 조금 전의 용음소(龍音嘯)라 는 것이지요. 한데 이런 곳에서 써먹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군요."..... 그런 무공이 있다니...... 과연 부인께선 일대의 기녀(奇女)이십니다." 전붕비는 진심 어린 감탄을 토해 냈다. 임소군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 한 일을 당했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그들은 조금 전의 끔찍했던 악몽을 되살리며 더욱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해 갔다. 제 26 장 관문돌파(關門突破) 한편, 석중옥과 사마진평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흐아...... 정말 죽겠군......"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내며 지친 듯이 벽에 몸을 기댄 사람은 무흔풍 한쾌였다. 한쾌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까치 집을 방불케 했다. 항상 해학과 익살이 떠나지 않던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불안의 빛이 어려 있었다. 지친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석중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눈 한번 붙여 보지 못한 채 쉬지 않고 걸어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 도사린 무서운 관문(關門)을 아홉 개나 통과한 상태이고 보니 오히려 지금까지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피해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 하나하나가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석중옥의 커다란 활약이 밑거름이 되어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 마냥 있다가는 언제 무 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갔을까? 제완완이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 것 같아요?" 중인들의 제일 앞에서 묵묵히 전면을 응시하고 걷던 석중옥이 그녀를 돌아보며 담담히 대답 했다. "기관도해로 보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곳의 중앙기관에 도달할 수 있소." "다른 관문은 또 없나요?"蚌?..... 도해로 보아 한 서너 개쯤은 더 있을걸......" 중인들의 얼굴에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한쾌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할...... 이놈의 관문은 끝도 없이 계속되니...... 대체 남궁뢰, 그 망할 놈은 어디서 이런 것들을 준비했지?" "남궁뢰가 특별히 만든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 한백의 솜씨겠지요." 석중옥의 말에 한쾌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니, 그럼 이곳이 정말로 한쾌의 장보고란 말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남궁뢰는 이미 오래 전에 한백의 장보고를 열었고, 이제 그것을 이용하 여 군웅들을 몰살하려는 것일 겁니다." "그...... 그러면 혈왕경이나 파천필 등 그 한백의 귀중한 보물들이 이미 그놈들의 손에......?" 한쾌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아까워라...... 그런 줄도 모르고 제기랄......" 한백은 넋두리를 토해 내다가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들의 앞을 난데없는 커다란 석벽(石壁)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석벽은 거대하기 짝이 없었고 거무튀튀해, 언뜻 보면 쇠로 만든 금성철벽(金城鐵壁)같이 보 이기조차 했다. "이...... 이게 뭐야? 길이 여기서 끝이란 말인가?" 한쾌가 쥐눈을 치켜 뜨며 석벽으로 다가갔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석중옥이 급히 한쾌를 제지했다. "무슨 일인가, 노제?" 석중옥은 심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기관도해가 틀림없다면 이것은 단순한 석벽이 아닌, 가공할 죽음의 장치로 이루어진 살인 마벽(殺人魔壁)일 겁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기관이라도 발동하게 된다면 모두 끝장이 나고 맙니다." 이어 그는 앞으로 걸어나가 조심스럽게 석벽을 살펴보았다. 석벽은 언뜻 보아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나...... '역시......' 석벽을 살펴본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석벽의 여기저기에 기이한 선(線)들이 종횡(縱橫)으로 마구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다. 그 선들은 일견 매우 평범했고 어찌 보면 몹시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하나 석중옥은 그 선들이 한번 건들기만 하면 누구라도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매우 무서운 기관장치들임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신경을 집중시킨 채 선들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중인들은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석중옥과 석벽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석중옥의 가공할 무공이 아니었으면 중인들의 피해는 엄청났을 것 이다. 그 때문에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게 중인들의 우두머리가 되다시피 해왔다. 지금도 중인들은 누구도 나서거나 방해하지 않고 오직 석중옥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 足)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석중옥은 불쑥 손을 내밀어 여인의 살결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벽면을 매만졌다. 보통 사람이 이 석벽을 함부로 만졌다가는 여지없이 기관을 발동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달랐다. 지금 그가 시전하고 있는 것은 천하수공(天下手功)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염 화유유수(捻花柔柔手)였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꽃잎을 부드럽게 찍어 바르듯이 손바닥의 감 각신경을 최고로 끌어올려, 단지 만지기만 해도 물건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광세기학(曠 世奇學)이었다. 염화유유수를 끌어올린 그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공기의 부드러운 흔들림조차 그대로 감지해 내는 것이 염화유유수의 묘용(妙用)이었다. 석중옥은 염화유유수의 공력을 가득 끌어올린 손으로 석벽을 지극히 부드럽고 섬세하게 쓰 다듬고 있었다. 그때부터 족히 두 시진은 흘렀을 것이다. 중인들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모두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석중옥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 하나가 주르륵 흘러내려 눈 속으로 스며들었 다. 하나 석중옥은 눈 한번 깜박거림 없이 끈기있게 석벽을 살폈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여기다!' 석벽을 더듬던 석중옥의 손이 한곳에서 딱 멈추었다. 손이 멈춘 곳은 석벽의 하단부였다. 그의 눈에 번갯불 같은 기광이 번뜩였다. 바로 그때, 여인의 옥수(玉手)인 듯 아름다운 손 하나가 그의 이마로 다가왔다. 그 손에는 새하얀 수건이 하나 쥐여져 있었다. 손의 임자는 제완완이었다. 그녀는 석중옥이 자신을 쳐다보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좀 쉬시면서 하세요."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맙소." 석중옥은 사양하지 않고 손수건을 받아 이마의 땀을 씻었다. 진한 여인의 냄새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석중옥은 땀을 닦은 후 제완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제완완은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새하얗게 내비치는 그의 이빨이 몹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흑발에 감춰진 그의 얼굴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을 보니 용모에 별로 자신이 없 나......?' 하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이라도 하듯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뭘 좀 발견하셨어요?" "그렇소." 그 말에 여태껏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석중옥에게로 집중됐다. "그래, 뭘 좀 발견했나, 노제?" "이 벽에는 백이십여 가지의 기관장치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 이제 이곳을 뚫고 나갈 방법 을 찾았습니다." "오...... 과연......!" 중인들의 눈에 일제히 경악과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석벽에 백이십여 가지의 기관이 매복해 있다는 것도 놀랍지 만, 또 그것을 파해(破解)할 방법을 발견했다는 그의 능력에 새삼스럽게 감탄한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천검객 비몽의 느낌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육(六) 인(人)은 하나같이 강호무림의 초절정고수들이다. 특히 저 묵운편 사마 진평은 절대로 누구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닌데도 저자의 말에는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보 내고 있다. 뿐이랴......' 그는 중인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오행수 조담과 무흔풍 한쾌는 성질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어 강호상의 어느 누구와도 사귀 기를 꺼리는 기인들인데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응하고 있다. 이것은 저 석중옥이란 자의 몸 에서 은연중 뻗어 나오는 기이한 매력 때문이다.' 사실 그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석중옥에게 점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보면 볼수록 신비한 사나이다, 저 석중옥이란 자는......' 그때 석중옥의 말이 이어졌다. "이 석벽 너머에는 살인동(殺人洞)이란 동굴이 계속됩니다. 도해에 의하면 살인동은 백(百) 장(丈) 길이의 통로로, 모두 백아흔두 가지의 암기(暗器)들이 매복되어 있다고 하니 여러분 들은 절대로 경각심을 잃지 말아야 할 거외다." "백...... 백아흔두 가지의 암기......?" 석중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지만 중인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백아흔두 개의 암 기들이 좁다란 동굴에서 우박처럼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실로 오금이 저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자! 모두 한쪽으로 비켜서시오. 석벽이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제완완이 급히 석중옥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하려고요?" 석중옥은 담담히 대꾸했다. "이 석벽은 내부기관이 복잡하기 짝이 없소." "그래서요?" "나는 이 석벽 안으로 내공(內功)을 주입시켜 그 기관들을 모두 녹여버릴 생각이오." "그러다 자칫 잘못하면 기관이 모두 발동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기관이 미처 발동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녹여야 하오." 제완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럴 수 있겠어요?" "가능하오." 그는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제완완은 그 웃음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순간이었다. 무우우웅...... 석벽에서 괴이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석벽이 가볍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아!" 제완완은 그 광경에 깜짝 놀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돌연 석중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빨리 엎드리시오, 낭자!" 다른 중인들은 벌써 낌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멀찌감치 피해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 었으나, 제완완은 석중옥의 바로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영문을 모른 채 석벽을 바라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파...... 파...... 팟! 석벽이 시뻘겋게 물들며 쩍쩍 갈라졌다. 찰나, "피하란 말이오!"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며 석중옥의 신형이 벼락같이 제완완을 덮쳐 갔다. "앗!" 제완완은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하나 상대는 석중옥이 아닌가! 채 장력(掌力)이 뻗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이미 제완완의 허 리를 껴안은 채 저만큼 나뒹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꽈-앙! 굉렬한 폭음과 함께 석벽이 그대로 폭발했다. 동시에, 화르르르릉...... 시뻘건 불기둥이 석벽으로부터 맹렬하게 뿜어 나왔다. 그 불기둥은 석중옥과 제완완의 몸을 거의 스치듯 지나갔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후우......" 석중옥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제완완을 바라보았다. "미...... 미안해요, 석 공자!" 석중옥은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오. 어서 갑시다." 뻥 뚫린 석벽 사이로 시커먼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살인동이오. 모두 조심해서 내 뒤를 따라오시오." 그는 중인들이 미처 놀라기도 전에 지체없이 구멍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순간, 파파파-! 파- 츠-! 사방에서 무서운 암기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반경이 채 이 장도 안 되는 좁다란 통로가 온통 암기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인간이 라면 누구라도 그 암기의 세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나 섬전(閃電)을 무색케 할 암기들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암기가 발동된 순간에 석중옥 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실로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가공할 빠름이 었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통로는 계속 이어졌다. 그 속을 석중옥은 번개같이 쏘아 갔다. 발 밑에서, 등뒤에서, 전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곳에서 무수한 암기들이 무더기로 날아들었 다. 하나 그 요란한 파공음은 그의 등뒤에 남겨지고 말았다. 간혹 어쩌다가 그의 몸에 적중된 암기들도 모두 그의 호신강기(護身 氣)를 뚫지 못하고 바 닥으로 맥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중인들은 석중옥이 방패가 되는 덕분에 한결 쉽게 살인동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몸을 날리면서도 자신들의 앞에서 가공할 속도로 치달리는 석중옥의 신위 (神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야 노제의 실력을 확실히 알겠군. 그의 무공은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야.' 사마진평은 어둠 속을 눈부시게 쏘아 나가는 그의 모습이 마치 무신(武神)과도 같다고 생각 했다. 제완완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석중옥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저 정도라니...... 저 정도면 할아버지 못지않은데..... '제, 젠장! 이제까지 신법 하나만 은 자신있었는데...... 노제에 비하니 그야말로 보름달 아래 반딧불 격이로군. 더럽게도 빠르 네......' 한쾌는 석중옥의 기경(奇驚)할 신법에 내심 야릇한 질투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것은 무예를 익힌 무림인(武林人)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만한, 그런 것이었다. 하나 정작 석중옥 본인은 이 관문을 빠져 나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으니...... 그는 갑자기 통로가 끝나며 눈앞에 다시 어두운 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타-앗!" 번- 쩍! 새하얀 섬광이 어둠을 뚫고 허공에 번뜩이는 순간, 꽈- 꽝! 벽이 자욱한 낙진(落塵)을 안고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석중옥의 몸은 번개같이 벽 저쪽으로 날아갔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눈부신 빛더미가 어둠 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석중옥이 들어선 곳. 그곳은 놀랍게도 하나의 거대한 광장(廣場)이었다. 아니, 이곳을 광장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았다. 무겁게 일렁이며 검은 늪처럼 가라앉아 있는 어두운 호수(湖水), 그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가산(假山)들...... 호수 한가운데에는 낡은 목조로 된 전각(殿閣) 한 채가 외롭게 서 있었다. 석중옥은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몸을 움직이는 것도 잊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휙! 휘휙! 그의 뒤를 이어 사마진평 등 중인들이 날아들었다. 그들 또한 장내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흠칫했다. "이거, 왠지 기분 나쁜데그래......" 한쾌가 몸을 가볍게 떨며 중얼거렸다. 석중옥은 전신의 살갗이 음습하게 식어 감을 느꼈다. 죽음의 기운...... 그렇다. 이곳의 모든 것은 죽어 있었다. 가산에 자라나 있는 모든 수목들은 시커먼 고사목(枯死木)들 이었고, 호숫물은 썩을 대로 썩어 기분 나쁜 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호숫물 깊숙이 자라 있는 수초(水草)마저 죽음의 그림자처럼 흐늘거리고 있었다. 강물 속 같은 어두운 정적...... 석중옥은 지그시 어금니를 문 채 중인들을 향해 묵직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건드리거나 만지지 마시오. 만에 하나 기관이 발동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그는 조심스럽게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광장의 바닥에는 바둑판처럼 수도 없이 많은 선(線)들이 종횡(縱橫)으로 그어져 있 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청(靑), 녹(綠), 홍(紅), 황(黃), 백(百), 흑(黑), 남(藍), 자(紫), 회(灰), 주 (朱)의 열 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십색관(十色關)!" 석중옥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일성이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그 열 가지 색들이 수도 없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중인들은 그것이 한눈에 보아도 무시무시한 기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이건 또 어떻게 통과하지?" 한쾌가 막막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때, 문득 석중옥의 뇌리로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기관도해에 표시된 홍청백(紅靑白)의 세 글자는 바로 이곳을 통과하는 열쇠가 아닐 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모두 내가 밟는 곳만을 밟으며 따라오시오. 절대로 다른 곳을 밟아선 안 되오." 이어 그는 선을 따라 좌우로 이동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홍, 청, 백색의 벽돌들을 번갈아 밟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의 몸놀림은 너무나 절묘하고 기쾌했다. 과연 그가 앞으로 나아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 지 않았다. 중인들은 이미 석중옥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십색관은 끝없이 이어진 듯 계속되었다. ...... 얼마나 걸었을까? "이곳이 바로 중앙기관의 입구인가 보군." 십색관을 벗어나던 석중옥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십색관은 끝나 있고 길다란 복도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복도의 끝에는 두터운 석문(石門)이 가로막혀 있었다. 이때, 돌연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음성이 통로의 끝에서 들려 왔다. "총기관(總機關)이 발동되었으니 이제부터는 길목마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더욱 조심하도 록 해라." "알겠습니다." "쳇! 이곳에 왔던 놈들은 모두 죽었을 텐데 왜 또 총기관을 발동했는지 모르겠군." 중인들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으나 석중옥은 이내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렇군. 남궁검문에서는 이미 이곳에 고수들을 풀어 많은 준비를 해두었군.' 이때 음침하게 생긴 육순 가량의 노인과 홍의인 다섯 명이 통로의 저쪽에 나타났다. 눈빛이 매섭고 날카로운 것으로 보아 평범한 고수는 아닌 듯했다. 그들은 설마 누군가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는지 무방비 상태로 걸어오다가, 석중옥 등을 발견하고 일제히 안색이 돌변했다. "네...... 네놈들은......?" 바로 그 순간, "너희들은 알 자격이 없다." 간단한 한마디에 이어, 위-잉! 석중옥의 우수가 바람같이 허공을 갈랐다. 퍽! 선두에 선 홍의인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헉!" "아니......!" 핏물이 허공으로 뿜어지는 순간에 남은 오(五) 인(人)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일제히 검을 뽑 았다. 그러나 그들의 검이 검집에서 채 반도 뽑혀 나오기 전, 위잉-! 귀청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노인을 제외한 사(四) 인(人)의 몸이 모조리 두 토막이 나버렸 다. "이...... 이런......" 노인은 자기가 틀림없이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이토록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이렇듯 무서운 검법(劍法)이 존재하리라고는 감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네...... 네놈들은......?"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신이 얼어붙듯 경직되었다. 검(劍). 순식간에 네 명을 황천으로 올려 보낸 그 검의 끝이 어느새 자신의 목에 와 닿은 것이다. 검의 주인은 비쩍 마른 체구에 냉엄한 얼굴의 흑의인이었다. 특이한 것은 흑의인이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흑의인은 바로 좌수검법의 일 인자인 단천검객 비몽이었던 것이다. 비몽의 입에서 주위를 동결시킬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총기관의 위치는 어디냐?" 노인은 바로 코앞에 우뚝 선 채 비몽을 잔뜩 부릅뜬 눈으로 응시했다. "너...... 너는 누구......?" "총기관의 위치를 물었다." 비몽은 무표정하게 말하면서 검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주르르...... 살갗이 베어지면서 검신(劍身)을 타고 진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순간 노인은 눈앞의 상대에게 어떤 말도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비몽은 오랫동안 이 안에서 너무나 고생을 했기 때문에 살기가 온몸에 충만해 있는 상태였다. 비몽의 두 눈이 금시라도 폭발할 듯한 살기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자 노인은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이...... 뒤쪽에 보이는 서, 석문 너머가......" "네가 맡은 직책은 무엇이냐?" "나는 제이십칠부(第二十七府)의 열 개 통로의 부분 기관을 작동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십칠부?" 중인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이자 노인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았다. "이곳은 모두 팔십일(八十一) 부(府)로 나뉘어져 있다." 그때 문득 석중옥이 차가운 눈빛으로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곳엔 모두 몇 명이나 있느냐?" "으......" 노인은 그의 눈빛을 보자 왠지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의 눈빛은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신비한 기운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오...... 오백 명 정도 있소." "음......" 중인들의 눈에 희미한 경악의 빛이 스쳤다. 한쾌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부르짖었다. "오백 명? 아니,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곳에 있단 말이냐?" 석중옥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현재 이곳의 관장자는 누구냐?"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이미 저항할 것을 포기해 버렸는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건곤일마(乾坤一魔) 우문양(宇文陽)이오......" "건곤일마......?" 중인들의 입에서 경악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건곤일마(乾坤一魔) 우문양(宇文陽)! 구대흉인 중에서도 배분이 높고 무공이 가장 고강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구대흉인에서 혈천노조 구양중에 이어 서열 이위(二位)에 올라 있는 가공할 대마두(大 魔頭)였다. 근 일(一) 갑자(甲子) 동안 거의 적수를 만나지 못하고 사라진 일대(一代)의 거마 (巨魔)! 한데 그가 이곳의 관장자라니...... '남궁검문의 세력이 의외로 대단하군. 건곤일마까지 포섭하다니......' 석중옥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노인이 약삭빠르게 눈을 번뜩이더니 번개같이 호각 을 꺼내 힘껏 불었다. 삐-익! 그런 다음 그는 흘끗 중인들을 올려다보며 득의에 찬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네놈들이 용케도 이곳까지 왔지만 이젠 끝장이다!" 하나 석중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흐흐...... 곧 있으면 호각 소리를 들은 고수들이 이곳으로......" 석중옥은 피식 웃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떤 소리라도 차단하는 호신강기가 있다는 사실을......" "......!" 노인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는 이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그 자리에 털썩, 하고 얼굴을 처박았다. 어느새 비몽의 검이 그의 목덜미를 베고 간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놈! 감히 우리 앞에서 잔꾀를 부리려 하다니......" 비몽이 차갑게 중얼거리며 검을 검집에 꽂았다. "이곳이 바로 중앙기관이란 말이지?" 한쾌가 지금까지의 고생을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눈에 살기를 띄웠다. "서둘지 마시오, 한 노인!" 석중옥이 금시라도 석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어들 듯한 그를 제지했다. "복수는 천천히 해도 늦지 않소. 우선 이 안에 무엇이 있나 알아봅시다." 이어 그는 청력(聽力)을 집중시켜 석문 뒤의 상황을 살폈다. 태고의 정적 같은 침묵 속에 이상한 마찰음이 나직이 들려 왔다. 끼이익- 끼익! 그것은 쇠사슬과 쇠사슬이 마주치는 듯한 음향이었다. 그리고 석중옥은 가느다란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모두 열 놈이군! 그 중 네 명은 절정고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았는지 눈빛에 긴장이 넘쳐 흘렀다. 석중옥은 그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먼저 신형을 날렸다. "갑시다!" 휘- 휙! 그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 꽈- 꽈- 꽝!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두께가 거의 한 자나 되는 석문이 박살나 버렸다. 자욱한 먼 지가 장내를 뽀얗게 뒤덮었다. "누구냐......?" "어떤 놈이냐?" 날카로운 대갈성과 함께 망막을 찌르는 빛줄기 속으로 여섯 개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석중옥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번- 쩍! 그의 우수가 시퍼렇게 변하며 마치 벼락이 치는 듯한 음향이 일어났다. 쿠르르르- 릉! 그의 손이 마치 수십 개로 불어난 듯 천지를 새카맣게 뒤덮었다. 바로 공포(恐怖)의 분뢰구 환수(奔雷九環手)가 펼쳐진 것이다. 그의 손바닥이 채 허공에 나부끼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크-윽!" "윽-!" "끄...... 윽!" 자욱한 피보라가 벽력같은 폭음을 따라 허공에 뿌려졌다. 여섯 구의 시체는 시커먼 잿더미 로 화해 허공을 날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석중옥은 시체를 살필 겨를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하나의 석실(石室)이었다. 한데, 사방 벽에는 수많은 쇠사슬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굵고 가는 갖가지 쇠사슬이 어느 한곳을 정점(頂點)으로 교묘하게 얽혀 있었다. "제대로 찾았군. 이곳이 중앙의 기관사슬이다." 석중옥의 무심한 동공에서 은은한 흥분과 격동이 차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놀라운 놈들이군. 감히 이곳까지 스며들다니......" 돌연 까마귀 울음 소리 같은 괴음이 울리며 사방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듯 나타났 다. 제 27 장 풍운무적(風雲無敵) 중인들은 흠칫 놀랐다. 하나 그들은 곧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들의 전면을 향해 다가드는 인물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좌측의 두 인물은 몹시도 잔인한 인상이었다. 한 명은 등에 거대한 팔형도(八型刀)를 매었다. 살찐 자줏빛 얼굴에 시커먼 눈썹, 데룩데룩 굴리는 눈알이 포악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두툼 한 입술에는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있어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명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비쩍 마른 중년인이었다. 파르스름한 낯빛에 두 눈은 가늘게 째져 독사처럼 번뜩였다. 그 눈은 한번 대하면 누구라도 그 공포로 열흘은 앓아야 할 만큼 잔인 무도한 것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한쾌의 몸이 흠칫 떨렸다. "저놈들은 청해(靑海) 일대에서 죽음의 별이라 불리는 지옥쌍마성(地獄雙魔星)인데......" 그 말에 중인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지옥쌍마성은 청해 지방에서는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어마어마한 괴력(怪力)을 타고났다는 팔형마도(八型魔刀)의 달인(達人), 합극 파(合克巴)! 그리고 취미라고는 사람의 심장을 먹는 것뿐이라는 희대(稀代)의 살인귀(殺人鬼), 무혈잔마 (無血殘魔) 등고(鄧古)! 두 마인(魔人)의 악명은 청해를 넘어 멀리 중원에까지 자자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지옥쌍마성의 옆에는 유난히 강퍅한 인상의 깡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유난히 길어 보이는 왼손에 한 자루 뭉뚝한 도(刀)를 쥐고 있었다. 노인의 가늘고 길 게 째진 눈은 간간이 섬뜩하고 위협적인 안광을 내뿜었고, 눈 언저리에는 푸르스름한 기운 이 짙게 어려 있었다. 한마디로 어둠 속에 도사린 야수(野獸)를 보는 듯한 느낌의 인물이었다. 단천검객 비몽이 그를 알아보고 신음 같은 일성을 토해 냈다. "음...... 흑살방주(黑殺幇主)인 혈견마도(血見魔刀) 종일심(鍾日心)까지......!" 흑살방(黑殺幇)은 전문적인 살인청부단체(殺人請負團體)였다. 그들은 아직까지 맡은 청부를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흑살방을 거의 단신(單身)으로 이루다시피 한 인물이 바로 혈견마도 종일심이었다. 그의 잔혹한 살수(殺手)와 악독한 심성(心性)은 무림인들에게는 거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마지막 인물에게로 향했다. 한데 그를 보는 순간, "마승 뢰극찰......!" 중인들의 입에서 부지불식중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비곗덩어리의 얼굴 가득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붉은 가사의 중은 분명 비무대회 에 나타났었던 마승 뢰극찰이었다. 그는 구대흉인의 하나로, 제완완에게 격퇴당해 물러나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그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뢰극찰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흠...... 놀랍군! 어느 방면의 고인들이기에 이토록 쉽게 이곳까지 들어왔나 했더니, 바로 당 신들이었군."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듯이 스쳐 보았다. "오행수 조담...... 무흔풍 한쾌 나으리...... 단천검객 비몽..... 게다가 묵운편 사마진평까지......" 이어 그의 시선이 제완완에게로 향했다. 순간 그의 입꼬리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 나를 이기신 천애(天涯), 미친 늙은이의 겁없는 손녀딸도 와 있군." 제완완은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천애광자를 미친 늙은이라고 말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 다. "뚱보 돼지, 말조심해요! 감히 할아버지를 그따위로 말하다니......" 뢰극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흐흐...... 어린 계집! 입이 더러운 것은 여전하군! 한번 봐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 다니......" 그때 혈견마도 종일심이 앞으로 나섰다. "뢰(雷) 제(弟)! 긴말할 것 없네. 이들이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어." 그의 음성은 흡사 지옥의 악귀(惡鬼)가 지껄이는 듯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뢰극찰을 비롯한 지옥쌍마성의 신색에도 서서히 살기가 피어올랐다. "크크크...... 오랜만에 몸 좀 풀게 생겼군." 팔형마도를 든 거구의 합극파가 입술을 꿈틀거리며 냉막한 괴소를 흘렸다. 옆에서 무혈잔마 등고가 음산한 어조로 거들었다. "살만 추린 뒤 뼈다귀는 잘 묻어 주도록 하지." "흐흐흐...... 물론!" 스- 릉! 합극파는 팔형마도를 뽑으며 괴기로운 웃음을 지었다. 투박한 그의 손에 의해 느리게 뽑혀 나오는 팔형도! 그것은 여덟 개의 칼날이 예리하게 번뜩이는 무시무시한 도였다. 수천 근(斤)의 묵강철이라 도 두부처럼 저며 내고 말 것 같았다. 슥! 슥! 합극파는 팔형마도를 자신의 손바닥에 이리저리 갖다 대며 서서히 중인들을 향해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드는 그 기세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칼날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음향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제완완은 자신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나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때였다. "청해에 두 마리의 미친 늑대가 있다더니 그게 너희들이냐?" 묵운편 사마진평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합극파와 등고가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들은 청해성에서만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아직 사마진평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하나 그들은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당당하면서도 위압적인 기세를 알아차리고 그가 만만한 인물 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사마진평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억양없는 음성으로 담담히 말했다. "너희들이 저지른 악행(惡行)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하나 이제 오늘로써 너희들의 죄 많은 인생도 끝이 날 것이다." 일순 합극파와 등고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흐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군......" "감히 우리에게 그따위 말을 하다니...... 하나 네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사마진평은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때 마승 뢰극찰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분은 조심하시오. 그자는 칠대명인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럽다는 사마진평이란 자요." 순간 합극파와 등고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음......" "네가 자칭 천하제일의 호한이라는 묵운편 사마진평이란 말이냐?" 사마진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극파와 등고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청해성에만 처박혀 있던 그들도 사마진 평에 대한 소문은 들었던 모양이다. 하나 이내 그들의 입가에는 살기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네놈이 대단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나 그것은 중원의 떠벌이기 좋아하는 놈 들이 지껄인 소리에 불과하지......" "오늘 우리가 진정한 무공을 보여 주마!" 사마진평은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다. "청해에서는 입으로 싸울지 몰라도 중원에서는 손으로 싸운다." 합극파의 부리부리한 눈과 등고의 독사눈이 허공에 부딪치며 번뜩 살기를 뿜었다. "미친놈...... 살고 싶지 않은 게로군!" 다음 순간, 두 개의 신형은 거의 동시에 사마진평을 향해 쏘아들었다. 그들의 몸은 기가 막히게 빨랐다. 위이이이-잉! 합극파의 팔형마도는 가공할 도막(刀幕)을 형성하며 사마진평의 목을 압박해 갔다. 귀신도 뚫지 못할 무서운 형세였다. 이때 등고는 사마진평의 시선이 팔형마도의 도기에 가려진 틈을 타서 소리도 없이 그의 우 측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한데 막 사마진평을 향해 살수를 전개하려던 등고의 시선이 문득 사마진평의 오른쪽 손목 에 가 닿았다. 순간 그의 눈은 째지도록 부릅떠졌다. '저, 저것은......?' 그는 황급히 신형을 회전시키며 합극파를 향해 소리쳤다. "합극파! 위험하다-! 상대의 무기는......!" 하나 때는 이미 늦었다. "크하하- 핫핫- 핫-" 허공에서 사마진평의 광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우우우우-우우웅! 그의 손목에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합극파의 목을 휘감아 버렸다. 그것은 한 가닥의 기이하게 생긴 채찍이었다. 합극파는 냉소를 흘리며 계속 도를 후려쳐 갔다. '겨우 채찍 나부랭이로 나의 팔형도를 가로막......' 순간, 파파파파- 팟! 팔형마도가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합극파의 오른손이 거기에 휘말렸다. 촤아-악! "끄아-악!" 합극파는 처절한 비명성을 내질렀다. 그의 팔뚝이 검은 채찍에 처참하게 뜯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살점과 핏덩이가 붉은 눈덩이처럼 뿌려졌다. 계속되는 처절한 비명과 신음! "으윽...... 크악-!" 합극파는 오른팔에 이어 상반신이 검은 채찍에 휘감겨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등고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멈- 춰- 라!" 그는 다급한 노갈을 지르며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 공격했다. 하나 그의 무서운 공력으로도 검은 채찍의 회오리 곁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다. 파파파파팟! 연신 소용돌이를 이루며 돌아가는 그 가공할 채찍의 위세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 다. 사마진평은 연신 요란한 광소를 터뜨리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핫핫핫- 핫핫!" 이번에도 검은 채찍은 합극파의 허리를 감아 버렸다. 주우욱! 소름 끼치는 음향과 함께 합극파의 옆구리 살이 가죽처럼 찢겨 나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내장과 더불어 심장까지 토해 내는 듯한 처참한 고통의 비명이 오랫동안 석실을 메아리쳐 나갔다.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시뻘건 선혈! 주르르 쏟아져 나오며 꾸물거리는 핏빛 내장들...... 정녕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악......!" 제완완은 그만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등고는 분노에 거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었다. "이...... 찢어 죽일 놈......!" 쐐애애-액!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노도와 같이 사마진평을 향해 쏘아 갔다. 그의 몸은 처음보다도 몇 배나 빨라서 그 어떤 상대라도 도저히 대처할 자세를 갖추지 못할 것 같았다. 더구나 미친 듯한 분노가 담긴 그의 공세는 정녕 가공(可恐), 그 자체였다. 하나 사마진평은 허공 중에서 신형을 한바퀴 선회하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네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번엔 상대를 잘못 만났다!" 다음 순간 그의 우수에서 다시 조금 전의 묵광(墨光)이 번뜩이며 검은 회오리가 장내를 질 풍처럼 휘몰아쳐 갔다. 파파파파파팍!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에 스친 석벽이 괴이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그것은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여 빛보다 빨리 등고에게로 덮쳐 갔다. 그 회오리가 무엇인지 느끼기도 전에 등고의 머리는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선명한 피보 라와 함께 허공에 흩어지는 미완성의 경악성! "풍, 풍운무적편(風雲無敵鞭)!" "......!" 중인들은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사마진평의 무예가 이리도 가공하리라고는 정녕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등고 의 마지막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마진평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의 우수에는 길이가 무려 일 장이나 되는 괴이하게 생긴 채찍이 들려 있었다. 채찍의 전 신(全身)은 먹을 칠한 듯 새까맣고, 마치 쇠를 깎은 듯 매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푸, 풍운무적편이다!" 한쾌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아! 천지(震動)가 진동할 가공할 무기! 한번 펼치면 태양조차 가려 버린다는 풍운무적편! 우내육대중보의 하나가 드디어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칠대명인 중의 하 나인 묵운편 사마진평에 의해서...... "자! 이제 자네들 차례일세, 종일심! 뢰극찰!" 넋을 잃고 있던 중인들은 사마진평의 무뚝뚝한 음성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 사마진평...... 다, 당신이 설마 풍운무적편의 주인일 줄이야!" 마승 뢰극찰의 뚱뚱한 얼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미소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혈견마도 종일심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한동안 지옥쌍마성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수염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종일심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을 사마진평에게 주었다. "사마진평! 과연 명불허전이다!" "고맙군, 칭찬해 줘서......" 사마진평의 대답은 여유 만만하기조차 했다. 종일심의 음성은 나직하게 침잠되어 있었다. "지옥쌍마성의 무공은 구대흉인 중 어느 누구에 못지않다. 한데 그들이 이토록 허망하게 죽 다니...... 과연 우내육대중보의 소문은 사실이었군." "......!" "그러나...... 그렇다고 쓰러져 가는 대세(大勢)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백의 장보고에 들어온 자는 모두 죽는다. 사마진평! 너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곳 에서 살아 나갈 수는 없다." 순간 사마진평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종일심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종일심은 어느새 처음의 무표정하고 냉혹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네가 아무리 강해도 그분을 당할 수는 없다. 풍운무적편이 아니라 우내육대중보가 모두 나 타난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마진평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분이라니......?" 혈견마도 종일심은 본래의 신색을 되찾은 모습으로 싸늘히 괴소했다. "흐흐...... 우리를 모두 죽이고 이곳을 나간다면 알 수 있겠지." 이어 그는 수중의 도를 서서히 치켜 들며 전신에서 잔혹한 살기를 물씬 뿜어 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너의 명성을 듣고 한번 겨루기를 희망해 왔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그 소원을 풀 수 있게 되었군." "......!" 사마진평은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말없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묵묵히 대치해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은 왠지 숨막히는 긴장을 맛봐야 했다. 혈견마도 종일심은 수중의 도를 가슴께로 끌어올린 채 도의 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세 는 일견하기에도 살벌한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사마진평의 자세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양손을 척 늘어뜨린 채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 가 유람이라도 나온 줄 알았을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대단하다. 사마진평의 자세는 완전한 정(靜)의 극치를 이룬 것이다. 그의 무공이 저 정도에 올라 있다니......' 그렇다. 마치 물 흐르듯 여유 작작해 보이는 사마진평의 자세는 절정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엄청난 기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렇게 숨막히는 시간이 지나갔다. 중인들은 감히 큰 소리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쩐지 이들 의 대결은 단 일 초 만에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차-앗!" 침묵을 찢어발기는 일성폭갈과 함께, 쐐-애-액! 종일심의 도가 가공할 도기(刀氣)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빛살처럼 사마진평에게 쏘아왔다. 그 속도는 정녕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찰나, 번- 쩍! 한 줄기 시커먼 광채가 사마진평의 오른쪽 손목에서 섬광처럼 뻗쳐 나왔다. 다음 순간, 꽈- 꽈- 꽝!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도와 묵광(墨光)이 무겁게 부딪쳤다. 찰나 종일심의 도가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들려 오는 처절한 단말마(斷末魔)! "크-아악!" 중인들은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몰라 눈을 부릅떴다. 사마진평과 종일심은 여전히 마주보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의 자세가 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문득 종일심의 입에서 아무런 감정도 배어 있지 않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초식의 이름은......?" 사마진평은 묵묵히 입을 열었다. "풍운칠편(風雲七鞭) 중의 노도풍운파(怒濤風雲波)!" 순간 종일심의 무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노도라...... 좋았어...... 저, 정말 멋있었어...... 마치 성난 파도를 보는...... 것 같았어......" 말을 마치기도 전, 쿵! 그의 몸은 피를 뿜으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어느샌가 그의 복부는 반으로 갈라진 채 피와 내장이 범벅이 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마진평은 그의 시체를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당신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소. 당신의 도법은 정말 훌륭한 것이었다고." "......!" "......!" 중인들은 문득 왠지 모를 비애(悲哀)가 가슴을 축축이 적셔 옴을 느꼈다. 그렇다. 이것은 무림인(武林人)들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였다. 무림(武林)이란 결국 이런 것이 아닌가?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언젠가는 그보다 더한 강자 (强者)를 만나 쓰러져야 하는 것이다. 중인들은 종일심의 시신을 바라보며 각자 묵묵히 상념에 잠겼다. 하나, 한 사람. 단 한 사람만은 눈을 교활하게 빛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바로 마승 뢰극찰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더 고강한 혈견마도 종일심이 사마진평의 일 초에 고혼(孤魂)이 되자 덜컥 겁이 났다. '저, 저놈의 무공이 이리도 고강할 줄이야......' 교활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문득 넋을 잃고 종일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완완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그는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살금살금 제완완에게로 접근해 갔다. '흐흐...... 잘하면 이년을 이용해 살아날 수도 있겠군.' 그는 소리없이 한 발, 두 발 제완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하여 그가 막 손을 내밀어 제완완의 몸을 제압하려 할 때였다. "선사! 동료 분들이 모두 황천으로 가서 선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서 가봐야 할 것 아니 오?" 한소리 담담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뢰극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 안 돼......!" 그는 하나의 손이 자신의 머리로 다가옴을 보고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하나, 퍽! 번개같이 다가들던 손은 어느새 그의 머리를 두부처럼 으스러뜨리고 지나갔다. 뢰극찰은 채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실로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손의 임자는 다름 아닌 석중옥이었다. 구대흉인 중의 하나로 악명(惡名)을 자자하게 떨치던 마승 뢰극찰이 그의 손에 너무도 어이없게 쓰러진 것이다. 중인들은 모두 그의 시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 종일심에 비하면 피라미 같은 놈이군." 한쾌는 뢰극찰의 뚱뚱한 시신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석 노제!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이 기관을 이용해서 남궁검문의 놈들을 역(逆)으 로 공격할 수는 없겠나?" 석중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이곳에는 남궁검문의 고수들 외에도 우리들과 같이 들어온 군웅들이 있습 니다. 기관이 자칫 잘못 발동되면 양쪽 모두 피해가 커집니다." "그럼 어쩌지?" 석중옥은 뭔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번쩍 쳐들며 말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흩어진 군웅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지요." 사마진평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말인가?" 석중옥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번졌다. "이 장보고에 분포된 모든 통로를 한곳으로 귀일(歸一)시키는 겁니다." 그 말에 중인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곳의 기관을 보니 모든 것은 이 중앙기관의 사슬에서 조종하게 되어 있더군 요. 그러니 이것만 잘 조종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 그렇게만 된다면......" 제완완이 한시름 놓는다는 듯 탄성을 발했다. "히히...... 그럴 수만 있다면...... 남궁뢰, 그놈은 아마 사색이 될 것이네. 헛헛......" 한쾌가 익살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중인들의 얼굴에도 언뜻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웃어 보는 웃음이었다. 제 28 장 암도열풍(暗道熱風) 석중옥 등 육 인의 고수들은 칠흑 같은 암도(暗道) 속을 질풍처럼 치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중앙의 기관사슬에 모든 통로를 귀일시킨 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통 로가 합쳐지는 곳을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암도는 끝없이 이어진 듯 계속되었다. 한데 어느 한 순간, "아......" 일행의 앞에서 달려가던 석중옥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앞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쓰러져 있는 자를 얼른 살펴본 석중옥은 나직이 침음했다. "악독한 장공(掌功)에 심맥(心脈)이 끊어져 즉사했군." "장공? 아니, 그럼 기관에 당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한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더구나 이자는 우리와 함께 이곳에 들어왔던 고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석중옥은 내심 걱정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남을 깨닫고는 침중한 안색이 되었다. "아무래도 남궁검문에서 군웅들을 향해 무차별 살수를 전개하는 것 같습니다." "남궁뢰...... 그놈이......!" 중인들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들은 다시 앞으로 달려가다가 몸을 멈춰 세웠다. 피비린내가 풍겨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앞에 두 구의 시체가 나타났다. 시체는 끔찍했다. 첫눈에 보아도 무서운 고수에게 당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남궁검문의 세력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가공스러운 것 같군." 한쾌의 음성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무거웠다. "이상한데......?" 앞으로 달려나가던 석중옥이 갑자기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앞에는 또 한 구의 시체가 있었다. 몸에 치명적인 상처는 별로 없었지만 안색이 시퍼 런 것으로 보아 중독사(中毒死)인 것이 틀림없었다. "왜 그래요?" 제완완이 물었다. "이자의 몸에 얼룩덜룩한 반점(斑點)이 난 것으로 보아 그가 당한 독은 사천당문의 비전(秘 傳)인 오행잔독(五行殘毒)이오. 짐작은 했었지만 사천당문에서조차 이렇게 노골적으로 살수 를 쓰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군웅들의 피해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 같네." 사마진평의 낯빛도 아주 침중해졌다. 석중옥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중인들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회랑(回廊). 긴 회랑은 굳게 닫힌 석문 앞에서 끝나 있었다. 석문 앞에는 세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 중인들은 심상한 눈빛으로 세 구의 시체를 응시했다. 마치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변한 시체. 도저히 용모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처참한 것이었다. "저것은 천뢰장 맹강의 천뢰삼장(天雷三掌)에 격중된 흔적인데......" 오행수 조담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정말인가?" "그렇다네, 한 늙은이! 천뢰삼장에 격중되면 저렇게 화기(火器)에 당한 것처럼 처참한 모습 으로 변하게 되지." "그렇다면 그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이 되겠군." 한쾌는 중얼거리며 석문을 향해 다가갔다. "젠장......! 이 안에 또 뭐가 있지?" 그는 석문의 고리를 잡아당겨 그것을 열었다. 삐-이-익! 뾰족한 마찰음과 함께 석문이 열렸다. 순간, "물러나시오!" 석중옥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휙! 석중옥의 몸은 그의 말보다 더욱 빨리 날았다. 석중옥은 문 안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를 들 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빛이 한쾌를 덮쳤다. 그것은 흡사 눈이 내리는 듯 눈부신 백색(白色)의 꽃을 뿜어 내고 있었다. 한쾌는 사방이 온통 쏟아지는 눈으로 덮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천하에 이토록 기이한 무공은 오직 한 가지밖에는 없다. "배...... 백설쌍란도......"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순간, 스윽! 석중옥의 몸이 유령같이 퍼부어지는 도광(刀光)을 피해 한쾌의 몸으로 접근했다. 이어 한쾌 의 손을 잡은 석중옥은 너무도 쉽사리 눈처럼 퍼붓는 백설쌍란도의 공세를 피하는 것이 아 닌가! "어-엇?" 어둠 속에서 뜻밖이라는 경호성이 들렸다. "멈추시오. 우리는 적(敵)이 아니오!" 석중옥이 낭랑한 외침을 토하며 번개같이 물러났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석문을 바라보았다. 사실 한쾌가 석문을 열자마자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실로 너무도 빠르고 갑작스러웠던지라, 그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석문 앞에는 한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온몸이 백색 일색인 청년이었다. 더구나 피부도 은빛이었고 눈썹조차 희어서 마치 설인(雪 人)을 보는 듯했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양손에 각기 백색의 도(刀)를 두 개 들고 있었는데, 몹시 놀란 듯 석중옥 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쌍혈겁도 단사옥!" 단천검객 비몽이 그를 알아보고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눈앞의 백의청년은 백설쌍란도의 달인, 쌍혈겁도 단사옥이었다. 단사옥은 차고 예리한 시선으로 석중옥을 바라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돌려 중인들을 훑어보 았다. "당신들은......?" 조금 전에 큰 곤욕을 치를 뻔했던 한쾌가 투덜거렸다. "제기랄...... 사람 좀 봐가며 칼을 휘두르게. 이거 영문도 모르고 황천으로 갈 뻔했잖은가!" 단사옥은 그때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칼을 등뒤로 꽂으며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오.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이 이곳까지 무사히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소." "젠장...... 이 세상에 고수는 자네뿐인 줄 아는가? 우리는......" 바로 그때였다. "크-아-악!" 느닷없이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암도 속에 메아리쳤다. "으-악-!" 뒤를 이어 또다시 처절한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순식간에 암도의 분위기는 소름 끼치는 공포 속으로 젖어들고 말았다. 중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비명 소리는 암도의 좌측 통로에서 들려 왔다. "이...... 이럴 수가!" "지...... 지독하구나!" 중인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곳에는 거의 십여 명의 인물들이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선혈 (鮮血)이 바닥에 고여 내를 이루고 있었다. 시체는 모두 흑의인들이었다. 한데 그들의 가슴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스친 듯 예리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때 중인들은 흑의인들 사이에 쓰러져 있는 또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 시체는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전신이 온통 짓뭉개져 있어 도무지 형체조차 식별할 수가 없었다. 하나 시체의 오른손에 기이한 은색 팔찌가 끼여 있는 것을 본 한쾌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비...... 비환유문의 사환 중 둘째인 은환(銀環) 유자령(劉子嶺)이다!"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은환 유자령! 비환유문의 최고고수라는 사환 중에서도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 아닌가! 그제서야 석중옥은 흑의인의 가슴에 난 상처가 모두 비환유문의 독보적인 수법인 탈혼구절 환(奪魂九絶環)에 의한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유자령은 누가......?' 그러다 문득 석중옥은 유자령의 오른손 중지(中指)가 왼쪽을 가리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지 우연일까? 아니면......? 다음 순간, "이쪽으로 가봅시다." 석중옥은 벼락같이 신형을 날려 암도의 왼쪽으로 꺾어져 갔다. 중인들도 모두 그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쌍혈겁도 단사옥조차 한쾌를 비롯한 중인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않고 묵묵 히 신형을 날렸다. 하나 석중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휘익! 얼마쯤 달려갔을까? 석중옥은 다시 진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들의 앞에 다시 끔찍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시체. 한 구의 시체가 끔찍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시체는 백의를 입은 초로의 중년인이었다. 한데 그를 보는 순간, "이...... 이자는 마환(魔環) 유자웅(劉子雄)인데......" 한쾌의 입에서 다시 신음 같은 일성이 터져 나왔다. 마환 유자웅! 그는 비환유문의 사환 중 막내가 아닌가! 그 역시 이곳에서 시체로 발견되다니...... "대체 누가 비환유문의 최고고수들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였단 말인가?" 한쾌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아-앗!" 이번에는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 오지 않는가! 중인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무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앞쪽이다!" 한쾌가 외치며 중인들의 앞에서 먼저 번개같이 신형을 날렸다. 휙!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때, 펑! "크윽!" 섬전같이 암도의 좌측을 돌던 한쾌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비틀,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엇!" 석중옥은 흠칫 놀라 그곳으로 날아갔다. 순간 그는 주춤 물러서는 한쾌의 등 너머로 한 인영이 모퉁이를 도는 것을 발견했다. "조...... 조심하게...... 그놈이 금환(金環) 유자군(劉子君)을 죽이고 여자 한 명을 납치해 갔 네." 한쾌가 간신히 신형을 세우며 다급히 외쳤다. 과연 바닥에는 질퍽한 피바다 속에 한 인물이 누워 있었다. 석중옥은 그가 바로 비환유문 사환의 우두머리인 금환 유자군임을 알았다. 어이없게도 천하 를 떨어 울렸던 비환유문의 최고고수 사환(四環)이 세 명이나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이 다. 휙! 석중옥은 몸을 날려 앞서가는 인영을 뒤쫓았다. "저자는 내가 맡을 테니 중인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석중옥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공할 속도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그가 모퉁이를 돌자 앞서가는 인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멈춰라-!" 석중옥은 그 인영의 팔에 한 여인이 안겨 있음을 보고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인영이 멈칫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쉭! 쉬-익! 그 순간에 석중옥의 손에서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지공(指功)이 발휘되었다. "붕천지(崩天指)!" 인영은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소리만 듣고도 석중옥이 발휘한 무공을 알아 본 것이다. 그의 몸이 모퉁이로 숨었다. 석중옥의 붕천지는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석중옥이 그것을 보고 냉소했다. "와선지(渦旋指)!"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쉬-익! 지풍이 매서운 음향과 함께 모퉁이를 돌아 인영에게 격사되는 것이 아닌가! "헛!" 모퉁이 안에서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 석중옥의 몸은 이미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모퉁이에서 일 이 장쯤 떨어진 곳의 어둠 속에는 음침한 신광(神光)을 발하는 흑의복면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키가 훤칠했다. 다소 말라 보이는 체구에 두 눈은 지극히 차갑고 맑게 느껴지 는 인물이었다. 흑의복면인의 팔에는 과연 한 여인이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귀하는 누구요?" 석중옥이 묻는 순간, "흐흐...... 석중옥! 과연 아직까지 살아 있었군." 흑의복면인이 석중옥을 쏘아보며 나직이 웃었다. 석중옥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를 아시오?" "흐흐...... 지옥에 가서 염라 대왕에게 물어 봐라!" 흑의복면인의 말소리는 더욱 음산했다. 석중옥은 그가 일부러 목소리를 변성(變聲)한 것을 알고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자는 내가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은데...... 누굴까?' 그때였다. 쓰류류류류- 흑의복면인의 우수(右手)가 소리없이 흔들리며 괴이한 음풍(陰風)이 석중옥을 향해 몰아쳐 왔다. 그 절세적인 와선지에도 흑의복면인은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다. '대단하군.' 석중옥은 흑의복면인의 무공이 자신이 여태껏 만난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았다. 석중옥은 훌쩍 옆으로 몸을 날려 음풍을 피했다. "흥!" 흑의복면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치며 잇달아 삼(三) 장(掌)을 쏟아 냈다. 우우우우우...... 우웅......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손 그림자들이 암도에 가득 차면서 뼈를 깎을 듯한 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마치 호곡(號 哭)하는 듯한 음향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허공을 가득 메운 손 그림자들이 마치 유령(幽靈)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흡사 귀신이 나타난 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귀...... 귀곡인(鬼哭印)!" 석중옥이 대경성을 토하며 급히 우수를 휘둘렀다. 그의 우수가 시퍼런 빛을 토하며 장내를 휩쓸어 갔다. 파파파파파-! 과연 석중옥의 무공은 대단했다. 그 무서운 음풍이 대번에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귀곡인을 받아 내다니......" 흑의복면인은 석중옥의 일수(一手)에 깜짝 놀랐는지 대경성을 토해 냈다. 하나 그러는 순간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르고 괴이 악독한 공세가 석중옥을 향해 몰아쳐 갔다. 말하는 순간에 공격을 하다니 실로 악독한 심계가 아닐 수 없었다. 흑의복면인은 한 팔에 여인을 안고 있는데도 그토록 표홀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석중옥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영문조차 모르고 죽어 가고 있었으리라. 그만 큼 흑의복면인의 공세는 기척도 없이 빨랐던 것이다. 하나 상대는 다름 아닌 석중옥이었다. 그는 차갑게 코웃음치며 가볍게 손을 반쯤 말아 앞으로 쭉 뻗었다. 마치 장난을 하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다. 하나 순간, 꽈르르르릉- 꽝! 벼락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흑의복면인이 뒤로 주르르 물러났다. "크-윽!" 흑의복면인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안고 있던 여인마저 떨어뜨렸다. 복면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울컥울컥 토해져 나왔다. 실로 석중옥의 일권(一拳)은 가공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흑의복면인은 여인마저 땅에 떨어뜨리자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석중옥은 급히 흑의복면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뻥 뚫린 시커먼 암도만 보 일 뿐, 어디에도 흑의복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석중옥의 눈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나의 쇄옥신권(碎玉神拳)을 맞고도 도주할 수 있다니...... 더구나 그는 이곳 지리에 아주 밝 은 것 같군." 흑의복면인의 무공은 석중옥의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석중옥은 흑의복면인의 종적을 찾으려다가 문득 조금 전에 땅에 떨어졌던 여인이 생각났다. 그는 급히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의 하얀 백의(白衣)가 어둠 속에서 선명히 보였다. 한데 그가 그녀에게 다가간 순간, "으음......"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백의여인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록 몇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가슴에 깊이 각인(刻印)된 얼굴...... 아니, 단 한 번을 보아 도 좀처럼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까? 서럽도록 고운 이마에 눈썹에서 콧날로 이어지는 능선은 한없이 화려했다. 게다가 붉고 섬 려한, 화편(花片) 같은 입술의 섬세함이라니...... 가히 온 천하의 모든 미(美)가 이 여인에게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늘 아래 이토록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은 결코 둘일 수가 없었다. "백상아......!" 그렇다. 백의여인은 천하제일의 미녀(美女)라고 공인된 천중일미 백상아였던 것이다. 석중옥은 흑의복면인이 납치하려는 여인이 설마 그녀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그만큼 놀라움도 컸고 의혹도 커졌다. '그 흑의복면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백 소저를 납치하려 하다니...... 더구나 백 소저도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여인 같구나.' 석중옥은 의아심을 느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특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은 남자의 욕망(慾望)을 끓어오르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주위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적막만이 지배할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천하제일의 미녀가 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기이한 욕망을 참 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석중옥 또한 가슴이 뜨거운 젊은 남자였다. 그라고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목석(木石)인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 그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여 가슴속에 일어나려는 욕망의 불길을 억눌렀다. 그러고는 묵묵히 백상아의 몸을 살펴보았다. 백상아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하나 석중옥은 그녀의 몸이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것을 느꼈다. '무슨 음독(陰毒)한 장공(掌功)에 심맥을 다친 것 같군.' 석중옥은 그녀의 상세(傷勢)가 의외로 심각한 것을 깨닫고 급히 그녀의 완맥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그윽한 사향 냄새 란...... 석중옥은 새삼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철담간장(鐵膽肝臟)의 석중옥조차 마음이 가볍게 떨려 옴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다급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았다. 이어 그녀의 전신으로 공력을 운기(運氣)시켰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기는 그녀의 몸 을 돌다가 몇 군데에서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석중옥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이런...... 하필이면 그곳인가?' 그녀의 진기가 막힌 곳은 바로 중정혈(中庭穴) 부근이었던 것이다. 중정혈은 양쪽 젖가슴 사이가 아닌가! 석중옥은 난처함과 함께 흉수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여인의 가슴을 공격하다니...... 악독한 심보로군!' 하나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백상아의 몸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몸을 침범한 음기(陰氣)가 가슴을 지나 혈맥(血脈)을 따라 전신으로 번지고 있다. 빨리 손 을 쓰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그는 굳게 결심한 뒤 백상아의 앞가슴 옷깃을 풀어헤쳤다. "......!" 하나 천하의 강심장인 그 역시 자신도 모르게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붉은빛 가슴가리개가 드러났다. 스-윽! 석중옥의 느릿한 손길이 가슴가리개를 내렸다. 불쑥!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팽팽하면서도 탄력있는 백옥(白玉)의 살결이 튀어나왔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풍만한 처녀의 가슴이었다. 탐스러운 젖가슴. 그 한복판에 자리한 분홍빛 유두는 도발하듯 우뚝 솟은 채 석중옥을 향해 있었다. 석중옥은 가슴이 진탕되었다. 그는 천하에 다시없는 요녀(妖女)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력(定力)의 소유자 였으나, 한없이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무방비 상태에서 뿜어 내는 매력에는 마음이 흔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사부에게서 받은 혹독 하고 철저한 수련(修鍊) 때문이었다. 그는 한차례 마음을 가라앉히는 심결(心訣)을 암송한 후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그의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문지르며 진기를 체내로 주입시켰다. "......" 이 느낌을 과연 뭐라고 표현해야 옳을까? 어찌 보면 부드러운 고무풍선을 만지는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따뜻한 솜 뭉치를 쓰다듬는 것도 같았다. 하나 다시 생각하니 고무풍선이나 솜 뭉치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 아주 이상야릇한 느낌이 그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가슴을 열심히(?) 주물러댔다. 한없이 풍만한 가슴과 그 한가운데 있는 분 홍빛 돌기가 그의 뇌리를 유혹으로 물들였으나 그는 억눌러 참으며 치료에만 열중했다. 석중옥은 기나긴 고역(苦役) 끝에, 마침내 그녀의 가슴에 막혔던 응어리를 풀어 내는 데 성 공했다. 석중옥의 전신은 땀투성이였다. 한바탕 치열한 격전(激戰)을 치르고 난 후라 해도 이토록 피 곤하지는 않으리라. 석중옥의 눈앞에 탐스러운 포도알이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에 뽀얗게 빛나는 여인의 우윳빛 살결이었다. 어찌 뇌쇄적(惱殺的)이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천하제일의 미녀인 백상아가 아닌가!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옷을 입히려 했다. 하나 벗기기는 쉬웠어도 붉은 가슴가리개는 잘 올려지지 않았다. 풍만한 젖가슴 때문에 좀처럼 올려지지 않는 가슴가리개를 석중옥이 땀까지 흘리며 올리고 있을 때, "으...... 음!" 깊숙이 드리웠던 검은 휘장이 제쳐지듯 가지런하고 긴 속눈썹이 반짝 치켜 떠졌다. 백상아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깨어난 순간, 그녀는 누군가가 무례하게도 자신의 가슴을 유린하고 있음에 놀람과 동시에 격분했다. "이 천하에 무례한 놈!"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도 살피지 않고 따귀를 올려 붙였다. 순간, 휙! 석중옥은 번개같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 소생은 석중옥이오. 무례한 일이었으나 소저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소." 석중옥은 그녀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여며 주었다. "서...... 석 공자?" 백상아의 눈에 기이한 빛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슴에 아련한 통증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조금 전에 흑의복면인에게 납치당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석중옥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하자 조심스레 말했다. "불편한 곳은 없소?" 백상아는 영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단번에 모든 사정을 눈치채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숙였다. "서...... 석 공자!" 그녀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가슴이 떨려 감히 얼굴도 들지 못했다. "죄송해요...... 석 공자! 엉겁결에 저도 모르게 그만......" 석중옥은 입가에 빙긋 미소를 매달았다. "괜찮소. 턱이 돌아간 것은 아니니까......" "......" 그의 그런 표정에 백상아의 눈에서는 다시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빙긋 웃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정말 기이한 사람이다. 보면 볼수록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백상아는 문득 흑발 아래 숨겨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흑발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할 듯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공연히 가슴이 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귓전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 다. 공연히 얼굴만 붉어지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그녀도 자신이 왜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 그토록 고고하고 차분하던 그녀가 아닌가? 하나 석중옥을 남궁검문에서 우연히 알게 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그녀의 마음은 그의 무심 한 듯하면서도 기이한 매력에 서서히 이끌리고 있었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에 석중옥도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그 자신도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한 뒤 가볍게 웃었다. "백 소저, 한데 조금 전의 흑의복면인은 도대체 누구요? 소저를 납치하려는 것으로 보아 혹 시 아는 사람이 아니오?" 그제서야 백상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눈빛이나 몸집은 눈에 익은데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군요." "음...... 그자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더구나 혈왕경(血王經) 내의 무공을 사용했소." 백상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소. 그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무공은 혈왕 위혼의 오대마공(五大魔功) 중 하나인 귀곡인 이 분명했소." 귀곡인(鬼哭印)! 한번 떨치면 흡사 유령의 손바닥처럼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괴이 무쌍한 장공(掌功) 이었다. 그 위력은 스치기만 해도 심맥(心脈)이 절단되어 죽고, 어떠한 호신강기도 두부처럼 으스러뜨려 가히 악마(惡魔)의 장공(掌功)으로까지 불리고 있었다. 이것을 펼치면 마치 귀신의 울음 소리 같은 음향이 들려 온다고 하여 귀곡인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혈왕 위혼의 무공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자는 필시 남궁검문과 관계가 있는 인물일 것이 오." "남궁검문? 그렇다면 혹시......?" 백상아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에 언뜻 영롱한 혜광(慧光)이 번뜩였다. 석중옥은 그녀의 눈빛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백상아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네, 하지만 그가 설마......" "그게 누구요?" 백상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을 열었다. "석 공자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자는 철검공자 남궁유룡과 매우 흡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 어요. 하지만...... 남궁유룡의 무공은 기껏해야 사환 중의 한 명과 비슷할 정도인데......" "남궁유룡!" 석중옥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군. 어쩐지 눈빛이 몹시 눈에 익다 했더니 바로 그였군." "하지만......" "백 소저는 아직 짐작하지 못하셨소? 남궁검문은 이미 오래 전에 혈왕경을 얻었소." 백상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경악으로 가볍게 변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석중옥은 차분하게 자신이 그 동안 보고 느낀 점들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듣고 있던 백상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랬군요. 어쩐지 아버님께서......" "백(白) 대협(大俠)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소?" "아버님께서는 이곳에 한백의 보물 같은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럼 백 대협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신 거요?" "아버님은 무척 침울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이번 일이 흉다길소(凶多吉小)한 것은 분명하지 만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무언가 의혹이 있어 그것을 꼭 알아 내야만 한다고 말씀하 셨어요." "의혹......?" 석중옥은 이번 일이 갈수록 복잡해진다고 생각했다. 백상아의 말을 빌리자면, 여의노사 백철군은 이미 이번 사건이 하나의 거대한 음모(陰謀)임 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이곳까지 따라온 것일까? 그리고 대체 그가 느끼고 있는 의 혹이란 무엇일까? 석중옥은 문득 이번 일에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무언가가 연루되어 있지 않는 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궁검문에서 이미 오래 전에 한백의 장보고를 연 이상, 그들이 십 년 전 위지 사형의 천심장 혈겁을 주동(主動)했거나, 아니면 배후 세력과 무슨 관계가 있으 리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상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원래 저와 함께 이곳까지 오셨어요. 한데 도중에 그분은 무언가 이상한 흔적 을 발견하시고 저를 비환유문의 삼환에게 부탁하시고는 혼자서 다른 길로 가셨어요." 석중옥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급히 물었다. "영존께선 무슨 종적을 발견하셨소?" 백상아는 고운 아미를 약간 찌푸리며 옥음(玉音)을 굴렸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면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도 모르겠다시면서 무척 위험하니 혼자 가시겠다고......" 석중옥은 의혹이 더해 감을 느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내가 아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알고 있을까?' 더구나 백철군,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아닌가! 그런 그조차 자신의 몸을 보존할 자신이 없어 백상아를 삼환에게 맡겼다니...... '그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문득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석중옥은 하나의 별빛 같은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봄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한여름 밤의 혜성같이 반짝이는 백상아의 눈이 시야 에 들어왔다. 백상아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여인,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하고 차가운 여인이라 해도 약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 신과 다른 이성(異性)을 알고 나면서부터이다. 석중옥은 갑자기 백상아가 사랑스러워짐을 느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른 감정일 까? 고립된 장소에서 이상하게 시작된 두 남녀의 관계. 이것이 시작이었다. "석 공자는...... 무척 이상하신 분 같아요." 한동안 얼굴만 붉히고 있던 백상아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백상아의 얼굴은 불타 오르는 석양의 노을과도 같았다. "어쩐지 처음 뵐 때부터 남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무척 신비하고...... 속마음을 알 수 없으 면서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아요." "......" 석중옥은 백상아의 선녀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백상아는 석중옥의 시선을 받자 목까지 새빨개졌다. 하나 그녀는 불쾌하다기보다는 왠지 허 공을 훨훨 날아오르는 듯한 기쁨이 느껴졌다. 남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의 시선에서 유혹을 느낀다고 하던가? 석중옥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를 보자 불현듯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하면 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물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나도...... 백 소저를 처음 만날 때부터 타인(他人)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소." "아......!" 백상아는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온몸 가득히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한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 들었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석중옥을 응시했다. "석 공자께 청(請)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석중옥은 그녀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내 힘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그녀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석 공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도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석중옥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흑발 사이로 내비치는 두 눈이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열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그의 고개가 조용히 끄덕여졌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먼저 코와 눈이 드러났고, 곧 이어 석중옥의 얼굴이 이마까지 백상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아......! 음......" 백상아의 두 눈이 묘한 빛을 띠며 몽롱해졌다. 아......! 그녀의 눈 속으로 들어오는 석중옥의 용모를 보라! 실로 너무도 당당하고 고귀한 기풍(氣風)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칼날 같은 눈썹과 봉황(鳳凰)같이 검고도 시원한 눈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 같고, 코는 한 일 자로 매끈했다. 어찌 그뿐이랴. 얼굴은 관옥(冠玉)처럼 하얀데, 그 흰 얼굴에 보기 좋게 혈색(血色)이 떠올 라 있어 여자의 피부보다 더 보드라워 보였다. 나이는 대략 이십삼사 세 정도. 가히 천하제일의 미남자(美男子)라 할만하지 않은가? 백상아의 눈은 이상스러울 만큼 신비스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빛나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실눈으로 변하면서 그녀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번졌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것이 석 공자의 진면목이군요." "별로 보여 드릴 만한 얼굴이 못 되어 미안하오." 석중옥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흑발을 내려 얼굴을 덮었다. 그러자 백상아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중옥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왜 한숨을 쉬오?" "저는 여태껏 석 공자께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는 것이 얼굴에 무슨 흉터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한데...... 이제 보니......" "이제 보니......?" 백상아의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로 변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가리며 몸을 교태스럽게 비틀었다. "이, 이제 보니...... 너무...... 아이, 몰라요......" 석중옥은 그녀의 사랑스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낭랑하기 그지없는 그 웃음은 왠지 여인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기이한 매력이 담겨 있었 다. 백상아는 그윽한 눈으로 석중옥을 응시했다. "전 어려서부터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모든 소녀들이 가지는, 그런 꿈을......"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몽롱하게 변해 갔다. "언젠가는...... 눈부신 백마(白馬)를 탄 준수한 왕자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 저를 꿈속의 궁전 (宮殿)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 "저는 오랫동안 그 꿈속의 왕자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왕 자님은 나타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꿈을 포기하려고 했었지요." 석중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그 백마의 왕자님을 발견하고야 말았어요." "......!" "그는 멀리 있지 않았어요. 꿈속에서처럼 백마를 타고 오지도 않았고...... 멋진 궁전을 가진 분도 아니에요. 하지만 전 처음부터 바로 그가 꿈에도 그리던 백마 탄 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 않고 무심하기만 한 汰訣嗤?..... 전 그를...... 당신을...... 정말......" 실로 놀랄 만큼 대담한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이것은 그녀가 대담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죽음만이 흐르는 어둠 속의 동굴...... 자신의 가슴을 보였다는 어떤 종속감...... 그리고 어쩌면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들이 그녀, 백상아로 하여금 이런 대담함을 발휘하게 했던 것이다. 석중옥은 백상아의 눈에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 서 풍기는 열기가 자신의 몸으로 짜릿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기분은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백상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눈길에는 점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백상아는 그의 뜨거운 눈길에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석중옥,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백상아의 가는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몸과 몸이 맞닿는 순간, 서로의 마음은 하나로 융화되고 사랑의 신(神)은 환희의 찬가를 불 렀다. 뜨거운 열기를 토해 내며 두 남녀의 입술은 맞닿았다. 아득한 사랑의 늪 속으로, 끝없는 몰아(沒我)의 경지로 그들은 깊이 침잠해 갔다. 서로의 혀로 상대방의 마른 마음을 풀어 주며, 두 남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숨 가쁜 신음 속에 두 남녀는 서서히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갔다. 바닥은 차가운 돌바닥이었다. 하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원앙금침인들 이렇듯 따스하고 푹신할까? 석중옥은 한줌도 되지 않을 듯한 백상아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아......" 백상아는 허리를 휘청하며 석중옥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몸은 한 마리 새였다. 사랑을 알기 시작한, 작고 아름다운 새...... 그 새의 전신에 파문처럼 번져 가는 것은 사랑의 환희였고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 새는 난 생처음 느끼는 알 수 없는 쾌감에 흐느끼듯 가는 신음을 토했다. 붉은 입술이 반쯤 벌어져 박속처럼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보석인 양 빛났고, 반쯤 감겨진 두 눈은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뜨거운 혀를 미친 듯이 빨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한없이 탐스런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가슴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풍성했다. 그의 손길이 옷깃을 뚫고 자신의 가슴을 만졌을 때, 그녀의 눈꺼풀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아......" 그녀는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발하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제 29 장 팔층루각(八層樓閣) 칙칙한 어둠. 그 속을 두 개의 인영이 바싹 밀착한 채 걷고 있었다. 크고 훤칠한 체구의 인영에 안기다시피 한 작고 섬세한 인영. 바로 석중옥과 백상아였다. 무수한 위험과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들이었다. 또한 미로(迷路)는 여전히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 이 순간, 백상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두려움도, 불안의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저 꿈을 꾸듯 몽롱하고 행복한 표정일 뿐이었다. 하나 석중옥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정이 담뿍 담긴 표정으로 석중옥을 바라보던 백상아가 입을 열었다. "중옥!" 꿀물이 흐르는 듯 달콤한 음성...... 하나 석중옥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여전히 앞만 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백상아의 아미가 상큼 치켜 떠졌다. 이어 그는 석중옥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다시 불렀 다. "중옥......!" "으응?" 그제야 석중옥은 퍼뜩 정신을 추스르며 백상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상아?"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그렇게 안색이 심각해지시니......"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였소." "무슨......?" "이 정도 왔으면 사마진평 등 다른 사람들을 만났어야 할 텐데 그들은커녕 다른 어느 누구 도 안 보이지 않소?" 백상아는 움찔하여 그를 응시했다. "중옥! 당신의 말은......?" "나는 혹시 그들이 다른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려." 백상아는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가 이윽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들은 비록 여섯 명뿐이지만 모두 하나같이 일당백(一黨百)의 절정고수들이 아니에요? 더 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묵운편 사마 대협은 가히 무적이라 할 만한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누가 감히 그들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만도 없소." 석중옥의 안색은 여전히 무거웠다. "남궁검문은 이미 이번 일을 오래 전부터 계획했음이 틀림없소. 더구나 나는 왠지 혈견마도 종일심이 죽기 전에 말한 '그분'이란 인물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그들의 대화에는 서로 아무런 격의가 없었다. 하기야 그들은 이미 특별한 사이가 아니던가! "종일심은 결코 허언(虛言)을 일삼는 자가 아니오. 그의 어조에는 천하의 어느 누구도 이곳 을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소. 우내육대중보의 주인들이 모두 나타나도 대세 를 역행시키지는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했소. 나는 그것이 걱정스러운 것이오." "......!" "더구나 백 대협께서 하신 말씀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소. 그분의 성격으로 보아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분이신데, 그렇게 심각해 하셨다면......" 백상아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하나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석중옥의 팔을 힘주어 껴안았다. "그래도...... 전 당신이 곁에 있어 주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몰라요." 석중옥은 그녀의 말에 내심 가슴이 진동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여인이 오직 자신만을 믿고 두려움을 잊는다는 것이 그를 감격스럽게 했다. "상아......" 석중옥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으음......" 백상아는 가볍게 신음하며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품에 깊숙이 안겨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의 입술이 포개졌다. 뜨겁고 정열적인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은 일시 어두웠던 기분을 잊고, 두둥실 떠올라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황홀함에 빠져 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으아악......!" 느닷없이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암도 속을 메아리쳤다. "으...... 아...... 아......!" 뒤를 이어 또다시 처절한 비명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순식간에 암도의 분위기는 소름 끼치는 공포에 젖어들고 말았다. 석중옥과 백상아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손을 마주잡고 몸을 날렸다. "지독하구나!" 석중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백상아는 역한 피비린내가 강하게 풍김을 느끼고 참혹 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암도의 전면에는 하나의 커다란 석실이 보였다. 한데 그 석실의 앞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피떡이 된 물체가 보였다. "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거지?" 석중옥은 시체들의 끔찍한 모습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두 시체 중 하나는 흡사 커다란 바위에 깔려 죽은 듯한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리한 칼 로 잘게 짓이겨진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지 모르지만 본 낭자 좀 살려 줘라!" 찢어지는 듯한 노파의 괴성이 들려 왔다. 석중옥은 대번에 그 음성이 전낭자 호파파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호파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예요?" 백상아가 석중옥의 손을 잡은 채 두리번거렸다. "석실이오." 그때 호파파의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 연놈들아! 수다 좀 그만 떨고 어서 본 낭자를 구해 주지 못할까!" 호파파는 아예 악을 쓰듯 외쳤다. "사부님!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그러다가 그들이 그냥 가버리면 어쩌려고......" 뾰족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그래...... 호 할망구...... 입다물고 가만히 있게. 그렇게 떠들다가 는 이 석실이 통째로 무너질까 걱정이네......" 우렁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석중옥은 갇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았다. '여인은 호파파의 제자인 곽무지인 것 같은데...... 다른 한 명은 누굴까?' 하나 그는 더 생각을 굴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호파파의 찢어지는 듯한 욕설을 들어야 했 다. "이 병신 같은 계집애야! 지금 우리가 뒈지게 생겼는데, 그럼 저놈들이 구해 줄 때까지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그제서야 석중옥은 그들의 상황이 몹시도 다급한 것임을 깨달았다. "갑시다!" 석중옥은 백상아의 손을 잡고 석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데 그들의 몸이 막 석실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크르르르...... 괴이한 음향과 함께 암도의 벽(壁)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실로 너무도 빨라 미처 피할 사이도 없어 보였다. "아앗!" 백상아는 대경 실색하여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내질렀다. 순간, "무쌍초영(無雙超影)!" 석중옥의 입에서 한소리 외침이 터지며, 쐐-액! 그의 몸이 섬전보다도 빨리 암도를 벗어났다. 가히 기가 막힌 신법이었다. 한데 그의 몸이 백상아를 안은 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석실로 쏘아져 갈 때 더욱 기경할 일이 벌어졌다. 파-앗! 돌연 석실의 양쪽 벽에서 차가운 한망(寒芒)을 뿌리는 검날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것은 실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엇?" 천하의 석중옥조차 안색이 홱 변했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이 불의(不意)의 기습에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석중옥과 백상아 의 몸이 검날에 꼬치처럼 꿰일 찰나, 팟! 놀랍게도 석중옥의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우뚝 서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토록 섬전 같은 기세로 앞으로 쏘아져 나가던 그의 몸이 찰나지간에 멈춰 선 것이다. 실 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답공술(踏空術)!" 그의 품에 안겨 이젠 죽었구나 하고 눈을 꼭 감고 있던 백상아는 눈앞의 상황이 믿을 수 없 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답공술(踏空術)! 이것은 허공에 몸을 세울 수 있는 어기능공비기(御氣凌空秘技) 중 최상의 것이었다.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이 신법 중 가장 빠른 것이라면, 이 답공술이야말로 신법 중 가장 현 묘한 것이었다. 전설로만 전할 뿐, 익혔다는 사람도,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는 절대기공 (絶代奇功)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약관 석중옥의 몸에서 펼쳐지다니...... 석중옥은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차가운 검날을 피해 천천히 나아가 석실 앞으로 떨어져 내렸 다. "악독 무비한 기관이군......"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중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그는 조금 전의 그 참혹한 시체들이 바로 이 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알았 다. 암도 가운데 있던 사람은 암도의 벽에 끼어 죽은 것이고, 석실의 앞에 있던 사람은 암도의 양쪽 끝에 솟아 나왔던 칼날에 당한 것이다. 신법이 고강한 사람은 칼날에 죽게 마련이고, 신법이 느린 사람은 벽에 의해 찌그러져 죽게 되는, 실로 무서운 기관이었다. "저, 정말 끔찍한 곳이군요!" 백상아가 조금 전의 소름 끼치던 장면을 기억하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때, "이...... 이놈들...... 그...... 그래, 무사하냐?" 호파파의 걸찍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백상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당신들은 왜 이런 장치가 되어 있다고 말해 주지 않았죠?" "끌끌...... 말해 줘봤자 죽을 게 뻔한데, 미쳤다고 말해 주냐?" 석중옥과 백상아는 그녀의 말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전낭자의 전(癲) 자는 결코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누구나 그녀의 그런 말을 들으면 이를 갈며 등을 돌릴 것이 아닌가! 그때 우렁찬 노인의 외침이 들려 왔다. "여보게...... 우리는 그쪽으로 오지 않았네. 그래서 그쪽에 무슨 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 다네." 백상아가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직이 소곤거렸다. "천뢰장 맹강이에요."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우리가 가는 곳말고 다른 길로 그곳에 들어갔단 말이오?" "그렇다네. 이 석실에 들어와 보면 알겠지만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사방에 있다네." "이 미친 녀석아! 구해 주려면 빨리 구해 주고 아니면 냉큼 꺼져라!" 호파파의 외침이 다시 들려 왔다. '정말 성질 한번 더럽군.'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으며 석문을 바라보았다. 우측에 작은 벽돌이 세 개 보였다. 주의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은밀한 것이었다. "어느 건지 알 수 있겠어요?" 백상아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호파파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이것들아...... 뭔지 모르면 닥치는 대로 눌러 봐.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호파파는 아예 욕으로 한몫 잡으려고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말은 무시한 채 눈을 빛내며 벽돌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로군." 그는 한눈에 가운데 벽돌이 기관의 열쇠임을 알아보았다. 석중옥은 그 벽돌을 밟았다. 그 순간, 끄르르르릉-! 요란한 음향과 함께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나 그와 동시에, 끄릉! 갑자기 발 밑이 푹 꺼져 버렸다. 무려 십 장에 이르는 암도가 밑으로 꺼져 발 디딜 곳이 없게 된 것이다. "앗!" 백상아가 깜짝 놀라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때 하나의 팔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바싹 끌어안 았다. "염려 마시오." 동시에 석중옥의 전음이 백상아의 귓전에 울려 퍼지며 그의 몸이 그녀와 함께 비조같이 날 아 석실로 들어섰다. 기가 막힌 신법이었다. 그들이 있던 곳은 완전히 갈라져 있었고 그 밑은 깊이를 모르는 함정이었다. 두 번이나 거듭된 죽음의 함정을 거친 후, 석중옥은 석실로 들어서 장내를 둘러보았다. "으음!"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석실(石室). 아니, 이곳은 석실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넓이는 대략 백여 장쯤 되어 보였다. 석실, 아니, 광장(廣場)에는 네 개의 호수(湖水)와 네 개의 가산(假山)이 팔방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앙에는 거대한 팔층누각(八層樓閣)이 한 채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백상아의 눈이 커졌다.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누각이 설마 이런 곳에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천 장은 거의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광장의 규모에 놀라고 있을 때, "야, 이놈들아! 구경은 나중에 하고 어서 본 낭자를 풀어 주지 못할까!" 호파파의 호통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제서야 석중옥과 백상아는 자신들이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상기시키는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장의 사방으로 난 석문 중 어느 한곳에 세 인물이 낭패한 몰골로 묶여 있지 않은가! 전낭자 호파파, 곽무지, 그리고 천뢰장 맹강,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의 의복은 거의 갈가리 찢겨져 넝마에 가까웠고, 전신이 쇠사슬로 묶인 채 석문(石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석중옥은 그들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오?" 하나 호파파는 대뜸 짜증부터 냈다. "말해 줄 테니 어서 이 쇠사슬부터 풀어 다오. 답답해 미치겠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이런 것을 두고 일컬음인가? 석중옥은 내심 어이가 없는지 다가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어 그는 싱긋 웃으며 뒷짐을 졌다. "미치는 것은 당신이지 우리가 아니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눈앞을 걸었다. 그 모습에 전낭자 호파파는 눈알이 홱 뒤집혀 버럭 폭갈을 터뜨렸다. "이놈! 이제 보니 한가, 그 늙은 도둑고양이와 같이 있던 바로 그 새까만 놈이구나. 어서 풀 어라. 당장 풀지 않으면 요절을 내고 말리라!" 석중옥이 피식 실소했다. "허...... 애걸복걸 사정을 해도 구해 줄까말까 한데 오히려 목숨을 위협하다니......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군." 이어 그는 백상아를 향해 돌아섰다. "상아, 그만 갑시다." "네." 백상아는 그의 의중(意中)을 짐작하고 일부러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신형을 돌렸다. 호파파는 몹시 다급해졌다. "자, 잠깐......!" 그녀는 황급히 석중옥을 불러 세웠다. 석중옥은 내심 고소를 지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호파파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호파파는 잔뜩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참는 듯 우거지상을 하며 말했다. "미...... 미안하다...... 이놈아!" "이놈......?" 석중옥의 검미가 꿈틀 용솟음쳤다. 순간 호파파는 내심 분통이 치밀어 올랐으나 뚱뚱한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아, 아니...... 그래...... 소협(少俠)이다, 소협! 미안하다. 호호...... 본 낭자가 잠시 실수를 했 네." 호파파는 기괴한 용모에 어울리지도 않게 정중한 경어를 쓰고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다급 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석중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이쯤에서 장난을 멈추고 다시 물었다. "한데 어쩌다가 그 모양이 되었소?" 호파파는 답답하고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만큼 꾹 참고 입을 열어 설명하 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관문을 뚫고 통로를 따라 쭉 걸어왔네. 한데 이 근처 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지." "......!"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문을 열다가 그만 이렇게......" 그 말에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럼 짐작대로, 바로 이곳이 모든 통로가 귀일되는 지점이군. 사마진평 등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곳에 모였을 것이다.' 하나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석중옥의 시선이 흘끗 광장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누각으로 향했다. '아마 저 팔층누각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호파파는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재촉했다. "이봐...... 어서 본 낭자를 풀어 주기나 하게!" 석중옥은 심중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이 묶여 있는 쇠사슬을 살폈다. 찰나, "만년철삭(萬年鐵索)......" 석중옥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만년철삭! 그렇다. 호파파 등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만 년철삭이 아닌가! '어딘가 이것을 조종할 수 있는 장치가 있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던 석중옥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석벽의 위쪽에 북두칠성(北斗七星) 모양으로 주먹만한 백석(白石)들이 박혀 있었다. 석중옥 은 그 백석들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렇군." 그는 그것이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칠성금쇄관(七星禁鎖關)임을 알아보았다. 칠성금쇄 관은 북두칠성의 오묘한 조화를 이용한 천고(千古)의 기관이었다. 하나...... 슷! 석중옥이 지풍(指風)을 날려 그 중 두 번째와 네 번째의 백석을 동시에 누르자, 철- 컥! 경쾌한 음향과 함께 기관이 작동되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이제껏 중인들을 친친 동였던 쇠사슬이 스르르 풀리며 석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파파를 비롯한 곽무지와 맹강은 그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휴...... 살았다......" 그들은 한차례 전신을 움직여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놈! 아무튼 고맙다...... 그런데...... 너무 건방져......" 호파파는 대뜸 말하며 석중옥을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석중옥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으로 호파파 옆에 서 있는 곽무지의 얼굴이 들어왔다. 한데 웬일인지 그녀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은 채였다. 더구나 그녀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 지 석중옥을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석중옥은 내심 입맛이 썼다. 고마워하기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나 그렇다고 이런 대접을 받 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는 것이다. 하나 천뢰장 맹강은 달랐다. "고맙네. 한데 자네는 용케 이곳까지 왔군그래." 맹강이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석중옥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 이곳은 가히 악마(惡魔)의 동부(洞府)라 할 만하네. 노부 평생 이렇게 끔찍한 곳은 아직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네. 그러니 결코 운(運)만으로는 통과할 수가 없지. 보아하니 자네는 노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 같군." "대단은 무슨...... 그 도둑고양이와 어울려 다니는 것으로 보아 저놈도 한통속인 게 뻔한 데......" 호파파는 얼굴을 사납게 찌푸리며 석중옥을 퉁명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녀석아! 그래, 한가 도둑고양이는 어디에 두고 너만 이곳에 왔느냐?" 백상아는 그녀의 미친 듯한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나 석중옥의 표정 은 여전히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노인은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소." "그래? 그런데 왜 본 낭자의 눈에 안 띄지?" 의아한 듯 중얼거리던 호파파의 눈에 우뚝 서 있는 팔층누각이 들어왔다. 광장의 한가운데 마치 철탑(鐵塔)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누각의 모습은 몹시 괴기로워 보였 다. "저곳으로 들어갔나?" 호파파는 중얼거리며 돼지의 그것처럼 남들의 두 배는 될 듯 큰 엉덩이를 돌려 누각으로 향 했다. 그 뒤를 곽무지가 조용히 따랐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석중옥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석중옥과 백상아의 다정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정말 똑같은 사제간(師弟間)이군." 천뢰장 맹강은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석중옥과 백상아도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제 30 장 신검출현(神劍出現) 팔층누각의 거대한 대청 안. 지칠 대로 지친 수십 명의 군웅(群雄)들이 여기저기 떼를 지어 나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 다. 그들은 모두 수십 차례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왔는지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곳 에 들어올 때는 백이십여 명에 달했던 군웅들이 지금은 얼른 보아도 삼사십 명밖에 남지 않 았다. 무려 팔구십 명의 고수들이 이곳에 뼈를 묻은 것이다. 하나 살아남은 고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강호를 주름잡는 최절정고수들이었다. "제기랄! 당해도 너무 당했군. 살아남은 자들이 겨우 이 정도라니......" 한쾌가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남궁뢰, 그놈은 중원 전체를 깡그리 속였다!" "으...... 내 이곳만 벗어난다면 남궁검문을 기필코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리라." "애당초 이곳에 한백의 보물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남궁뢰! 그놈은 완전히 계획적으로 우리 를 이곳에 몰아넣은 것이다...... 죽일놈!" 여기저기서 연신 씩씩거리며 야유와 욕설이 퍼부어졌다. 그때 갑자기 담담하면서도 기이한 신기(神氣)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애초부터 탐욕을 갖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 실수였소. 그러니 지금 와서 누구를 탓하겠소?" "......!" 한쾌를 비롯한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쏠렸다. 막 대청 안으로 다섯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쾌를 비롯한 몇몇 중인들은 그들을 보는 순간 놀람과 기쁨의 기색을 함께 떠올렸다. "서, 석 노제......!" "여의부의 백 소저와 천뢰장 맹강 대협도 왔군......" 들어온 인물은 바로 석중옥을 비롯한 백상아, 맹강, 전낭자 호파파와 그녀의 제자인 곽무지 였다. 그때 중인들 중 가장 성질이 급하고 흥분을 잘하는 벽력패(霹靂覇) 하후강(何侯康)이라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석중옥을 노려보며 굵은 눈썹을 꿈틀 치켜 올렸다. "방금 네놈이 지껄였느냐?"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후강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건방진 놈...... 노부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냐?" 석중옥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귀하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소. 다만 분명한 것은 그따위 허언에 기죽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오." "뭣이?" 수십 명의 군웅들이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에 노골적으로 맞서는 석중옥을 그냥 둔 다는 것은 하후강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이- 놈-!" 한소리 대갈에 이어 하후강의 쌍장(雙掌)이 위맹하게 허공을 갈랐다. 위-잉! 만근거석(萬斤巨石)이라도 일격에 때려 부술 듯한 장력이 노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망신을 자초하는군!" 석중옥은 묵묵히 선 채 슬쩍 오른손을 내뿌렸다. 꽈꽝!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윽!" 하후강은 답답한 신음과 함께 취한 듯 휘청거리며 오륙 보를 물러났다. 그런 광경에 군웅들은 아연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니......?" "저런......!" 그들이 알고 있는 하후강은 광동무림(廣東武林)을 오래 전부터 주도해 온 일대의 패자(覇 者)였다. 더구나 그는, 외호가 말해 주듯, 장공(掌功)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아닌가? 그런 그가 약 관의 청년에게 어이없이 밀려난 것이다. 하후강의 얼굴이 일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런 개망신이......' 이어 그가 막 재차 공세를 펼치려 할 때였다. "멈추시오-!" 돌연 수천, 수만 개의 철종(鐵鐘)을 후려치는 듯한 굉량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한마디에 군웅들은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적(敵)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거늘 어찌 한 배에 탄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단 말이오?" 오행수 조담, 그가 쩌렁쩌렁한 노성을 거침없이 토해 내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 석 노제는 여러분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곳의 중추기관을 부쉈을 뿐 아니라, 통로의 모든 기관을 움직여 분산되어 있던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했소." 이어 조담은 중인들을 무섭게 훑어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의 경중(輕重)은 가리지도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워 자중지란(自 中之亂)을 일으키려 한단 말이오!" 그의 시선은 무섭게 하후강을 노려보았다. "......!" 좌중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칠대명인 중에서도 가장 성질이 급하다는 오행수 조담! 과연 그의 기세는 가공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후강은 덜컥 겁이 나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소면낭심 도계조가 왠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정말 이곳의 중추기관을 부수고 통로를 귀일 시켰단 말이오?" 조담은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내 말을 못 믿겠단 말이오?" "이곳의 기관은 상상을 절(絶)할 정도로 흉험할 뿐 아니라 내 평생 처음 보는 악독한 곳이 오. 나는 이곳의 지리를 파악하기는커녕 기관장치들을 피하기조차 힘겨웠소. 한데 그가 어떻 게 중추기관의 위치를 알고 그것을 부수었단 말이오?" 도계조는 석중옥을 응시하며 노골적인 조소를 떠올렸다. "그가 남궁뢰와 한패가 아닌 바에야 그런 일은 불가능할 것이오." 구도회의 천하구도가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소, 저자는 확실히 수상하오." "여러분들 중 누구도 저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지 않소?" 이때 묵운편 사마진평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는 분명 그것을 했소. 그것은 내가 보증할 수 있소." "......!" 소면낭심 도계조를 비롯한 천하구도의 비웃던 얼굴들이 그대로 화석같이 굳어졌다. 사마진평이 누구인가? '천금일락(千金一諾) 강수서류(江水西流)'의 신화(神話)를 가진 천하제일의 호한이 아닌가? 군웅들은 그가 목숨보다도 말 한마디를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 의 말이니 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석 노제를 우습게 여기는 자는 노부가 용서 못 한다." 무흔풍 한쾌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두 눈에 흉흉한 빛을 띠며 앞으로 나섰다. "나도 그렇소." 단천검객 비몽이 그의 뒤를 이어 석중옥의 옆으로 다가가서 우뚝 섰다. 제완완이 그의 뒤를 아무 말도 않고 따라갔다. 그 뒤를 이어, "우리도 그를 믿어요." 노연홍, 임소군, 우문당과 도옥교, 백상아, 천뢰장 맹강 등이 우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심지어는 성질이 편협되고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어 미치광이로 불리는 전낭자 호파파마저 자신의 제자인 곽무지를 데리고 석중옥의 옆에 섰다. 순식간에 중인들의 반이 석중옥에게 동조를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다른 군웅들은 놀랍고 의아하여 멍청해졌다. '대체 저 흑의서생(黑衣書生)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사마진평을 비롯한 저들이 이토록 따른 단 말인가?' 특히 그 중에서도 심기가 깊기로 유명한 천지회의 지살 전쾌의 눈에서는 예리한 광망이 번 뜩이고 있었다. '바로 저자였군. 우리의 일을 계속 방해한 자가......' 이때였다. "크하하핫-! 중원동도(中原同道) 여러분! 이곳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오!" 우렁찬 웃음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나타난 인물은 혈의(血衣)를 걸친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는 가공할 신광(神光)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붉은 수염, 붉은 눈썹에 얼굴도 대춧빛으로 붉었다. 그의 우람한 등뒤에는 커다란 깃발 하나가 둘둘 말린 채 매여져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패도(覇道) 무쌍(無雙)한 기운은 장내를 순식간에 제압하 고도 남음이 있었다. "......!" 군웅들은 일순 그의 가공할 기도에 압도된 듯 숨을 죽였다. 그때 혈의노인을 알아본 몇몇 인물들이 대경한 음성을 터뜨렸다. "거, 건곤일마 우문양이다!" "저, 저 노마(老魔)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순간, "뭣이?" "저자가 바로 건곤일마 우문양이라고......?" 벌집을 쑤신 듯한 소란이 군웅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아아...... 건곤일마 우문양! 누가 그를 모르겠는가? 구대흉인 중에서 혈천노조 구양중에 버금간다는 서열 이위의 절대고수를...... 이미 백 세가 훨씬 넘은 그는 무공의 깊이 또한 추측을 불허했다. 뿐인가? 그 공포스런 이름은 신검 남궁뢰를 훨씬 능가하고 있지 않는가! 그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군웅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큰지는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 라. 건곤일마 우문양은 입가에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사마진평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사마(司馬) 노제(老弟)!" 순간 사마진평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이 번뜩였다. "그렇소. 태산(泰山)의 대회동(大會同) 이후 십 년 만이오." 태산의 대회동. 그것은 정파(正派)의 칠대명인(七大名人)과 사파(邪派)의 구대흉인(九大兇人)이 십 년 전 태 산의 관일봉(貫日峯)에서 한자리에 모여 자웅(雌雄)을 겨루던 전대(前代)의 대사건(大事件) 이었다. 당시 비무(比武)에서 칠대명인 중의 여의노사 백철군과 구대흉인 중의 혈천노조 구양중이 서로 결선(決選)에 올라 마지막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한데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비무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건곤일마 우문양은 그 대회동에서 혈천노조 구양중에게 천(千) 초(招) 만에 옷자락 이 잘린 이후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건곤일마 우문양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 당시 자네는 여의노사 백철군의 의협심(義俠心)에 감동하여 그와의 비무를 포기하고 말 았지. 난 당시 일을 몹시 아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무엇이 아깝다는 말이오?" "내가 보기에 자네의 무공은 결코 백철군의 아래가 아니었네. 어쩌면 자네야말로 칠대명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물일는지 모르지." "......!" 사마진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자네와 같은 고수가 이렇게 그냥 썩는 것을 무척이나 원통하게 여긴다네." 실로 의미 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사마진평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당신도 남궁검문에 포섭되었소?" "포섭?" 우문양이 양미간에 적미(赤眉)를 모으더니 나직하게 웃었다. "흐흐...... 나, 우문양이 누구의 명(命)을 들을 사람이라고 여기는가?" 사마진평의 두 눈이 번뜩 빛을 뿌렸다. "그렇다면......?" "합작일 뿐이지. 남궁(南宮) 문주(門主)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지. 나 우문양이 감탄할 만 큼......" "음......" 사마진평은 부지중 낮은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때 오행수 조담이 엄중한 신색으로 물었다. "그대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말에 우문양은 정색을 하며 천천히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가 막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우문 형! 그것은 내가 이야기하겠소." 돌연 굵직한 음성이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군웅들이 시선을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신태(神態) 비범(非凡)해 보이는 다섯 인물이 막 대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특히 앞장서서 걷고 있는 인물이 중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각진 얼굴의 그는 그리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화강암처럼 단단해 보이는 체구에 가슴까지 늘어진 기품있는 흑염(黑髥),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무형중 뻗쳐 나오는 기운은 가히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그것이 아닌가? 중인들은 부지중 압박해 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검(劍)> 그 인물이 걸친 곤룡포(袞龍袍) 앞자락에 새겨진 뚜렷한 글씨를...... 순간 군웅들은 한결같이 한 인물을 생각해 내고 안색을 변화시켰다. "남궁검문의 문주인 신검 남궁뢰다!"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남궁뢰가 나타났다-!" 흥분한 군웅들은 남궁뢰를 향해 살기에 찬 야유를 퍼부었다. 하나, "......!" 남궁뢰는 티끌만큼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여유있게 걸음을 옮겼다. 우문양 역시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흥분한 군웅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남궁뢰의 입에서 웅후한 대소성이 터져 나와 다시 대전을 진동시켰다. "하하하...... 무림동도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되어 상당히 유감스럽소이다." 순간, "남궁뢰! 노부는 설마 네가 이런 작자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오행수 조담이 싸늘한 표정으로 냉갈을 터뜨렸다. 남궁뢰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조 형!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조담은 대꾸없이 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칠대명인 중에 네놈 같은 자가 끼여 있다는 것은 칠대명인의 수치다. 노부가 네놈을 칠대 명인에서 제외시켜 버리겠다!" 그것은 선전(宣戰) 포고(布告)와도 같은 정식 도전이었다. 하나 남궁뢰는 조소 섞인 대소를 낭랑히 터뜨릴 뿐이었다. "하하하...... 칠대명인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게요? 나는 허명(虛名)만 높은 그 자리에 조금도 미련을 느끼지 않소." "뭣이......?" 조담이 번뜩 두 눈에 살광(殺光)을 뿌렸을 때였다. 남궁뢰 뒤쪽에 있던 네 명의 인물들 중 좌측의 두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음침하게 괴소를 지었다. "흐흐...... 조담! 칠대명인이란 허울좋은 이름일 뿐이다. 노부가 그것을 증명해 보일 테니 앞 으로 나서라!" 군웅들의 시선은 일제히 남궁뢰에게서 그 두 인물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둘 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홍의(紅衣)를, 다른 한 명은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는데 두 명의 생김새가 흡사했 다. 특히, 쭈글쭈글한 안면 속에 움푹 박힌 두 눈에서는 강철이라도 녹일 듯한 한광(寒光)이 연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군웅들은 전신을 얼릴 듯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부지중 오싹 신형을 떨었다. 이때 남궁뢰가 빙긋 미소 지으며 재차 입을 열고 있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 동도들께 전대(前代) 기인(奇人) 두 분을 소개해 드리겠소." "......" "여기 계신 두 분은 지난 오십 년래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여러분은 아마 잘 모를 것이오." 이어 그는 잠시 말을 끊어 중인들의 호기심을 고조시킨 뒤 다시 설명을 이었다. "이분들은 바로 지옥쌍군(地獄雙君)이시오." "아......!" 그 말을 듣자 중인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지옥쌍군! 그들은 근 이백 세에 이르는 전대의 거마(巨魔)들이었다. 천마군(天魔君) 철무형(鐵無瀅)! 지마군(地魔君) 철무광(鐵無光)! 그들은 친형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문파나 단체도 섭렵함이 없이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그들의 이름은 곧 공포(恐怖), 그 자체였다. '이상하군. 우문양도 그렇지만 지옥쌍군 정도의 인물들이 남궁뢰의 밑에 있다니......' 석중옥의 뇌리에 몇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혈견마도 종일심이 말한 그 인물은 과연 남궁뢰가 분명한 걸까? 아니면...... 그에게 다른 배 후 인물이 있는 것일까?' 남궁뢰는 장내의 조용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둘러보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어 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내가 이렇게 무림동도 여러분을 찾은 것은 화해를 하기 위함이오." 조담이 또다시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화해? 그건 또 무슨 뜻이냐!" 남궁뢰는 은은히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 그는 곧 엄숙한 시선으로 장내를 돌아보며 말했 다. "살생(殺生)이란 어차피 당하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그리 기분좋은 일이 못 되오." "......!" "시기(時機)를 알아야 준걸(俊傑)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만약 여러분 중 그 누구라도 본 (本) 문(門)에 투신할 의사가 있다면 나는 성심껏 그분들을 맞이할 것이오." 결국 그가 말한 화해란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그의 뜻대로 따르라는 은근한 협박과 다름 없었다. 남궁뢰는 중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마진평을 향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준비했소. 그러니 한치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소이다. 만약 싸움이 시작된다면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소." "......!" "특히 사마(司馬) 대협(大俠) 같은 분이 이런 데서 뼈를 묻는다는 것은 강호무림 전체를 보 더라도 몹시 애석한 일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소. 사마 대협께서 본 문에 투신하신다면 결코 섭섭지 않게 대해 드리리다." "......!" 사마진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어 남궁뢰는 그의 내심을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사마 대협......" 남궁뢰가 나직하나 힘있는 음성으로 다시 그를 부르자 사마진평은 그제서야 조용히 입을 열 었다. "남궁 문주! 귀하는 나를 너무나 실망시키는구려." "......!" 남궁뢰는 안색이 홱 변했다. 사마진평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남궁뢰의 귀에는 그것이 천둥소리보다도 더욱 크게 들렸다. "오늘 보고 들은 일은 내 눈과 귀를 몹시 더럽히는 것뿐이었소. 남궁 문주! 더 이상 긴 이야 기 할 것 없이, 당신이 자랑하는 그 준비란 것을 좀 구경합시다." 남궁뢰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뜨린 채 그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실로 너무나 모욕적인 말이 아닌가? 하나 남궁뢰 또한 일대의 효웅(梟雄)이 아닌가?하하하...... 과연 내 사마 대협을 잘못 보지 않았구려. 역시 천하제일의 협골(俠骨)답소." 남궁뢰는 언제 인상을 썼느냐는 듯 안색을 활짝 폈다. 이어 그는 물러나려 했다. 그때였다. "아버님! 소자에게 잠시 할말이 있습니다." 그의 등뒤에 서 있던 네 인물 중 가장 우측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철검공자 남궁유룡이 아닌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인물은 철혈검군 남궁황이었다. 남궁뢰는 아무 말도 않고 그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남궁유룡은 중인들 앞으로 나섰다. 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여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하나 석중옥은 그것이 자신의 쇄옥신권 에 당한 후유증임을 알 수 있었다. 남궁유룡은 중인들을 훑어보다가 백상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 소저!" 백상아는 아름다운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남궁유룡의 얼굴은 일순 당혹감으로 약간 일그러졌으나 다시 침착을 되찾았다. "백 소저! 이리로 오시오. 당신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여의부로 모셔다 주겠소." "흥!" 백상아는 그의 내심을 짐작하고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그리고는 석중옥에게 다가가더니 그 의 곁에 우뚝 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는 순간 남궁유룡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 으로 느껴 보는 질투의 감정이었다. "배, 백 소저......!" 백상아를 바라보던 남궁유룡의 시선이 그 옆의 석중옥에게로 옮겨 갔다. "석중옥! 네놈이 끝까지......!" "......" 석중옥은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묵묵히 있었다. 남궁유룡의 눈빛에는 흉악한 분노와 살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내, 네놈을 절대로 살려 두지 않으리라!" 백상아는 그의 말을 듣자 고운 아미를 상큼 치켜 떴다. 그리고는 오히려 오른손으로 석중옥의 손을 꼭 잡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그런 대담한 행동에 남궁유룡은 물론이고 옆에서 보고 있던 노연홍과 임소군, 곽무 지 등의 눈에서도 기묘한 빛이 반짝였다. 남궁유룡은 난생처음으로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분노와 함께 지극한 슬픔을 느꼈다. 생전 처음 사랑한 여인.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던 여인! 하나 지금 그 여인은 다른 남자의 품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반짝! 그의 눈가에 엷은 이슬이 내비쳤다. 순간 그는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급히 몸을 돌려 대전을 벗어났다. "......"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이젠 모두 끝낼 때가 왔군." 남궁유룡의 쓸쓸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뢰의 입에서 무심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치켜 들었다. 순간, 둥! 둥! 둥! 둥! 요란한 북 소리가 어둠을 찢고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려 나왔다. "두 분 노선배님! 부탁합니다." 남궁뢰는 지옥쌍마군에게 고개를 숙인 후 건곤일마 우문양과 함께 장내를 벗어났다. "크크크...... 염려 마시오. 여기에 온 놈들 중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니까......" "흐흐...... 오랜만에 신선한 피맛을 흠뻑 보게 생겼군." 지옥쌍군은 흉측하게 웃으면서 벽의 한쪽을 눌렀다. 일순, 콰콰콰- 쾅! 우르르르...... 일시에 대전 사방의 벽이 먼지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순간, "아......!" 군웅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보았다. 허물어지는 벽면 너머에서 마치 숨통을 조이는 듯한 가공할 마기(魔氣)가 무 섭게 뻗어 나오고 있음을...... 제 31 장 삼대사법(三大邪法) 돌연한 사태에 사방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짓눌러 왔다.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 버릴 듯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두의 신형이 화석처 럼 굳어져 버렸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핫......!" 완전히 갈라진 벽(壁)을 통해 한 떼의 검은 인영들이 허공을 너울너울 날아 들어오고 있었 다. 한데 놀랍게도 검은 인영들은 사람이 아니라 시커먼 흑무(黑霧) 속에서 꿈틀거리는 백골 (白骨)들이었던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흑무에 에워싸인 백골들의 뻥 뚫린 두 눈에서는 비수보다 더 예리한 남빛 광 망(光芒)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 광경에 몸서리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백골은 분명한 백골인데 살아 있는 뼈다귀인 것이다. 실로 기문(奇聞) 중의 기문이 아닐 수 없었다. 완전히 썩지 않은 상태로 움직이는 시체를 강시( 屍)라고 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 니었으나, 강호무림에는 강시를 전문적으로 부리는 고수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었다. 한데 지금 군웅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강시도 아닌, 완전한 뼈다귀였던 것이다. 군웅들은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모두 놀라 망연자실한 표정들이었다. "크흐흐...... 나의 귀여운 지옥고루십팔천마들아......!" "으흐흐...... 이 안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음의 유부(幽府)로 보내 주어라......!" 지옥쌍군이 흉측한 웃음을 띠며 소리쳤다. 순간, '지옥고루십팔천마?' 석중옥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좀처럼 놀랄 줄 모르던 그조차 경악한 지옥고루십팔천마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가히 불사(不死)의 악령(惡靈)이라고 일컬어지는 공포(恐怖)의 마물(魔物)이었다. 인간은 아니되 인성(人性)을 지녔고, 전신이 수화도검불침(水火刀劍不侵)에 일개의 능력이 절정고수 백 인을 능가한다는 악마들이었던 것이다. 하나 석중옥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옥고루십팔천마는 바로 혈왕 위혼의 삼대사법(三大邪法) 중 하나였던 것이다. * * * 혈왕 위혼은 천년삼왕 중의 한 사람으로, 온 천하의 사공이술(邪功異術)을 집대성한, 그야말 로 사도(邪道)의 제왕(帝王)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수백, 수천 가지의 사공이법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삼대사법이었 다. 혈마강신마법(血魔降神魔法)! 독왕지왕(毒王之王)! 지옥고루십팔천마(地獄骨古骨婁十八天魔)! 이것을 일컬어 혈왕 위혼의 삼대사법이라고 하며,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삼대사법 중 서열 삼 위에 올라 있었다. 비록 삼위라고는 하나 지옥고루십팔천마의 위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것이어서 인간의 힘 으로는 당해 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한 서열 이위인 독왕지왕과 삼대사법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혈마강신마법은, 혈왕 위 혼조차 이론상(理論上)으로만 설명했을 뿐 이루지 못한 전설상의 사법이었다. 혈왕 위혼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내 후대(後代)에 어쩌면 독왕지왕이 달성될지 모른다. 하나 혈마강신마법은 천년 내로는 불가능하며...... 만약 혈마강신마법이 완성된다면 천하의 무엇으로도 그것을 당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이다! 혈왕 위혼 자신도 혈마강신마법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 삼대사법 중 하나가 드디어 강호무림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 * * "크후후후후......!" "쿠쿠쿠쿠쿠......!" 소름 끼치는 웃음을 풀풀 날리며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들의 우물처럼 깊숙이 파인 두 눈에서는 악마의 불꽃처럼 시퍼런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이것들이 도대체 뭐냐?" 한쾌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군웅들도 모두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채 주춤거렸다. 그때, "크크크......!" "크흣흣흣......!"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괴음을 흘리며 지옥고루십팔천마들이 중인들의 앞으로 다 가왔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시커먼 흑무에서 속을 매스껍게 하는 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나왔 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성질이 급한 하후강이 벽력같은 노갈을 터뜨리며 가장 앞에 있는 지옥고루십팔천마에게 벼 락같은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꽈꽈- 꽝! 한소리 폭음성과 함께 하후강은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지옥고루십팔천마의 뼈다귀를 후려친 자신의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파 오자 놀랍고 당황 하여 겁이 덜컥 났다. 그의 일장에는 천근 거석(巨石)이라도 박살내 버리는 위력이 담겨 있었는데도 지옥고루십 팔천마에게는 조금도 충격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후강의 일장을 몸으로 받았던 지옥고루십팔천마가 괴이쩍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놈의...... 신선(新鮮)한 피맛을...... 보고 싶다......" 지옥고루십팔천마의 음성은 실로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섬뜩하면서도 심장을 저며 오는 듯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로 지옥의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 끔찍한 음성이었다. "으으......" 하후강의 안색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순간, "피...... 피맛을 보고 싶다......" 지옥고루십팔천마는 꼿꼿이 선 자세로 하후강을 덮쳐 갔다. 쏴아...... 앙......! 흑무에 둘러싸인 뼈다귀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비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모골이 송연하다 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하후강의 안색은 그야말로 똥빛이 되었다. 이어 그는 입술을 찔끔 깨물고 씹어 뱉듯 일성 을 토해 냈다. "꺼져랏......!" 하후강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쌍장을 휘둘렀다. "크흐흐흐......!" 그러나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완전히 방어를 무시한 채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하후강의 공세는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는 지옥고루십팔천마의 가슴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퍼퍼- 퍽! 다음 순간 지옥고루십팔천마가 움찔하여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더욱 빠른 속도로 하후강을 덮쳐 가는 것이 아닌가! "으으......" 하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순간, "으아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비명성이 대전 안을 뒤흔들었다. "......!" 중인들의 안색이 더 이상 물들 수 없을 만큼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끔찍하게도, 지옥고루십팔천마는 하후강의 가슴에 자신의 손목을 그대로 박아 버린 것이다. 시뻘건 선혈이 뭉클뭉클 쏟아지고 있었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우...... 두...... 둑......! 지옥고루십팔천마는 하후강의 가슴에 손을 박은 채 그대로 비틀어 버렸던 것이다. "으아아...... 아...... 아...... 악!"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가운데, 하후강은 인간의 입으로 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흐흐...... 피의 향기는...... 나의 정신을 맑게...... 한다...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하후강의 가슴에 박힌 손을 빼내었다. 푸앗......! 핏물이 확 솟구치며 하후강은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다. 그는 마치 벼락맞은 사람처럼 사지 를 마구 떨며 격렬히 몸부림쳤다. "크흐흐...... 죽이겠다...... 죽이겠다......" 지옥고루십팔천마의 눈빛이 더욱 무섭게 이글거렸다. "끄륵...... 아...... 안 돼......!" 하후강은 처참한 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안타깝게 바둥거렸다. 그러자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발을 번쩍 쳐들었다. 이어 그대로 하후강의 가슴을 짓밟는 것 이었다. 퍼퍽......! 하후강의 가슴으로 지옥고루십팔천마의 발목이 파고들었다. "커억......!" 하후강은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핏발 선 그의 눈은 금세라도 터질 듯이 툭 불거져 나왔다. 우지...... 지...... 직! 뼈와 살점이 한꺼번에 뭉그러지는 소리가 거북하게 들렸다. 비명도 지를 겨를이 없었던가? "끄르르륵......" 하후강의 목구멍에서는 피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렸다. 지옥고루십팔천마는 하후강의 육신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퍼퍽- 퍽- 퍽-!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중인들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너, 너무 잔인해요......" 백상아가 두려운 듯 떨리는 음성을 흘리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 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와 역겨움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악마 같은 놈들......!" 평소 하후강과 친하게 지내 왔던 절강성(浙江省) 제일의 검수(劍手), 천섬검(天閃劍) 조충(曹 忠)이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죽어라...... 이 악마들!" 그의 손에서 가공할 검광이 폭죽 터지듯 피어올랐다. 파파파파팟! 천섬검이란 외호답게 조충의 검은 눈부시도록 빨라서, 검광이 발출되었다 싶은 순간 어느새 찬란한 검화(劍花)가 지옥고루십팔천마의 몸에 그대로 작렬하고 있었다. 팟! "크흐흐흐흐......!" 한데, 지옥고루십팔천마는 끄떡도 않고 그대로 조충의 몸을 향해 덮쳐 오지 않는가? 흑무 사이로 내보이는 그 가슴에는 예리한 검흔(劍痕)이 나 있어 뼈가 부러진 듯 보였다. 그 런데도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거, 검에 맞아도 끄떡없다니......" 조충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죽이겠다...... 죽이겠다......" 지옥고루십팔천마 중 하나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케엑-!" 조충은 몸을 바둥거리며 자신의 검으로 지옥고루십팔천마를 마구 내리쳤다. 카-앙! 불꽃이 튀기며 지옥고루십팔천마의 가슴뼈가 박살났다. 하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크흐흐...... 피...... 피가 그리워......!" 지옥고루십팔천마는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았는지 손가락뼈에 더욱 힘을 주어 조충의 목을 움켜쥐었다. 조충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그의 입가로 검붉은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꼬르르......" 그의 목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점 바둥거리던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지옥고루십팔천마의 손은 이미 조충의 목을 절반 이상이나 파고 들어가 있었다. 콰르르...... 조충의 목에서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흑무로 몸을 감싼 해골이 조충의 목을 조르는 모습, 그것은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 바로 그것이었다. 마침내 눈알이 툭툭 불거지며 입으로 선혈을 콸콸 쏟던 조충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혓 바닥이 길게 나온 채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하나 지옥고루십팔천마는 계속 괴이한 음성을 중얼거리며 그의 목을 죄고 있었다. "죽이겠다...... 죽이겠다......" 뚝! 조충의 목이 뼈로 이루어진 지옥고루십팔천마의 손에 의해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혈왕 위혼의 삼대사법 중 하나인 지옥고루십팔천마! 그 위력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보다 위에 있다는 독왕지왕이나 혈마강신마법의 가공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쿠후후후후후......" "크크크크크크......" 지옥고루십팔천마들이 악귀 같은 웃음을 흩날리며 군웅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군웅들의 안색이 모두 참담하게 변했다. 그때였다. "이들을 멈추게 하시오!" 나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듣는 이의 가슴을 진동시키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지옥쌍군의 앞으로 한 인영이 불쑥 다가왔다. 전신에 태산 같은 기도를 풍기며 앞으로 나선 인물은 약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흑의서생 (黑衣書生)이었다. 마침내 석중옥이 나선 것이다. "웬 잡놈이냐?" 지옥쌍군 중 천마군 철무형이 음침하게 외쳤다. 석중옥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 눈을 보는 순간, '보...... 보통 놈이 아니다.' 천마군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그 안광 속에는 기이한 신기(神氣)가 담겨 있어 마 공(魔功)을 익힌 그의 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마공이 흔들릴 정도이니 천마군이 잔뜩 경각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석중옥은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썩은 뼈다귀를 그만 멈추도록 하시오." "뭐, 뭣이......?" 석중옥의 너무도 태연한 말에 천마군은 어안이 벙벙하여 막 무어라고 소리치려다 다시 안색 이 변했다. 단지 한걸음 앞으로 내딛기만 했는데도 석중옥의 전신에는 묘한 기세가 어리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천마군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자 그의 옆에 있던 지마군이 대신 이를 갈며 외쳤다. "뭐 이따위 녀석이 다 있어? 후후...... 네놈에게 능력이 있으면 멈추도록 해봐라!" 그들은 평소 성격으로 보아 벌써 덤벼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해 길길이 날뛰지 않음은 그들의 심기가 깊음을 말해 주는 것 이었다. 한데 지마군이 외친 순간, "좋소!" 석중옥은 다시 불쑥 한걸음 다가섰다. 말이 한걸음이지 그의 보폭(步幅)은 무려 사(四) 장(丈)이나 되었다. '좋소'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석중옥의 신형은 지마군의 코앞에 이른 것이다. 이 한 수는 지마군을 대경 실색케 하기에 충분했다. "헛!" 그는 몸을 옆으로 틀면서 벼락같이 갈고리 같은 손으로 석중옥을 휘감아 갔다.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팟! 그는 무언가 희끗한 것이 눈앞을 스침과 동시에 가슴팍이 불로 지지는 듯이 화끈함을 느껴 야 했다. "이, 이건...... 이럴 수가......" 가슴팍을 내려다본 지마군은 자신의 가슴이 쩍 벌어져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안색이 창 백해지고 말았다. 석중옥은 아슬아슬하게 한걸음 물러나 태연히 지마군의 손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녹슨 철검(鐵劍)이 매달려 있는 왼쪽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내 검이 노리는 것은, 이번엔 당신의 목이오." 석중옥은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마군은 꿈을 꾼 것 같았다. "방금 전의 것이 검이었다고? 천하에 이토록 빠른 쾌검(快劍)이 있단 말이냐?"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음산히 외쳤다. "어디, 그 쾌검을 다시 한 번 시전해 봐라!"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손톱을 세우며 석중옥을 덮쳐 왔다. 어느 새 그의 손톱은 알록달록한 오색(五色)으로 물들어 있었다. 쌔애-액! "오독추명조(五毒追命爪)로군." 석중옥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팟! 그의 몸이 별달리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한 가닥 섬광(閃光)이 천지(天地)를 뒤덮을 듯 지마군의 조영(爪影)을 뚫고 들어갔다. 그 속도와 변화의 예리함은 실로 보고도 못 믿을 정도였다. 따- 따땅! 예리 무비한 금속성이 터지며 검세(劍勢)와 조영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흐흐...... 본좌의 오독추명조는 신검(神劍)으로도 잘려지지 않......" 회심의 미소를 짓던 지마군은 혼비백산했다. 싹둑! 검광에 스친 그의 손톱 하나가 툭, 잘려져 나간 것이다. "이...... 이......!" 지마군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든 순간, 투툭! 그의 나머지 손톱이 송두리째 잘라져 나가 버렸다. 사파(邪派)의 칠대공력(七大功力) 중 하 나로 흉명이 자자한 오독추명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오독추명조가 어떤 것인데 썩은 새끼줄같이...... 저 녹슨 철검에......' 지마군은 혼비백산할 시간조차 없었다. 석중옥의 검이 이미 그의 목에 이르고 있었다. "오독탈혼(五毒奪魂)!" 지마군은 전공력을 쏟으며 미끄러지듯 십 장을 물러났다. "그냥 갈 수 있나? 팔 하나는 남겨 두어야지......" 담담한 음성과 함께, "으악!" 피보라가 솟구치며 지마군은 미친 듯 땅바닥을 뒹굴다 일어나고 있었다. 지옥의 손톱이라 불리는 오독추명조는 이미 그의 오른팔과 함께 그의 몸을 떠나 있었다. 지마군이 물러난 곳은 마침 천마군의 바로 앞이었다. "혀, 형님! 지옥고루십팔천마로 저놈을 공격하십시오......" 그는 또다시 석중옥이 덮쳐 올까 혼비백산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마군은 오른팔이 잘려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였고, 머리는 풀어헤쳐져 귀신의 몰골과 다 름이 없었다. 처음의 기세는 간곳없고 그야말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천마군은 이미 석중옥의 기세에 움츠러든 데다, 그의 검술(劍術)이 신(神)의 경지에 올라 있음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그를 당해 낼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지마군이 말하지 않아도 벌써 지옥고루십팔천마를 동원하리라고 마음먹고 있던 터 였다. "저놈을 공격해라......" 천마군은 뼛속을 찌르는 듯한 외침을 토해 냈다. "우우우......" 군웅들을 공격하려던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모두 석중옥을 향해 돌아섰다. 석중옥은 자신이 물러날 기회를 주었는데도 천마군이 계속 살수를 전개하려 하자 불 같은 살심(殺心)이 솟구쳐 올랐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작자들이군!" 그의 입에서 싸늘한 호통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파-앗! 그의 몸이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그의 신형이 너무도 빨리 움직여 중인들의 눈에 그런 착각이 일어난 것이었다. 쌔애-액!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파공음과 함께, 한 가닥 검은 선(線)이 천마군을 향해 덮쳐 갔다. 천마군은 무언가 섬뜩한 것이 자신을 향해 다가옴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색이 시 퍼렇게 변하고 말았다. 무언지 모를 괴이한 기운 한 가닥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자신 의 몸을 후려쳐 왔던 것이다. 그 기세와 속도는 천마군이 피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 다. 꽝! "끄-아-악!" 그의 몸이 벼락치는 음향과 함께 훨훨 날아올랐다. 흡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는 그의 몸 에서는 피분수가 폭포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순간, "우우우......" 검은 연기를 내뿜는 두 개의 지옥고루십팔천마가 석중옥의 좌우에서 덮쳐 왔다. 그때 석중 옥은 천마군을 날려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중인들의 눈에는 그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지옥고 루십팔천마의 공세에 노출된 것으로 보였다. "주...... 중옥!" 백상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나오는 순간, "흥!" 석중옥의 양손이 좌우로 폭발하듯 뻗어 갔다. 꽝꽝! 꽝! 굉음과 함께 두 마디 괴이한 비명이 한 순간에 터지며 두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무서운 속도 로 벽을 향해 날아갔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지옥고루십팔천마의 공격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손은 이미 그들의 가슴을 후려갈기고 있었던 것이다. 콰-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피어올랐다. 가공스럽게도 벽에 부딪힌 지옥고루십팔천마가 석벽(石壁)을 부수며 박혀 버리듯 날아가 떨어진 것이다. 그의 쇄옥신권은 이토록 가공스러 웠다. 한데, "우우우...... 주...... 죽이겠다......" "크으으......" 더욱 기경(奇驚)스럽게도 그토록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다시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크으으......" "죽이겠다...... 죽이겠다......" 나머지 지옥고루십팔천마들도 일어선 자들을 따라 모두 석중옥을 공격해 왔다. 그것은 가히 풍운(風雲)이 변색(變色)할 엄청난 것이었다. 흑무로 몸을 감싼 고루인(骨古骨婁人)들! 그 저주받은 열여덟 구의 마물들이 일제히 석중옥 하나를 향해 덤벼드는 것이다. 간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질리고 말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꽝! 꽝! 우르르릉...... 요란한 굉음과 함께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제아무리 지옥고루십팔천마라도 석중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짚단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다음 순간에도 지옥고루십팔천마는 또다시 바람과 같이 덤벼드는 것 이었다. '과연 혈왕 위혼이 자랑할 만하군. 이 정도면 가히 절정고수 백 인에 맞먹는다.' 석중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크으......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석중옥이란 애송이였군. 사사건건 우리의 일을 방해한......" 지마군이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신음성을 날렸다. 그의 오른쪽 팔은 끔찍하게도 어깨에서부터 싹둑 잘려져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 당혹의 빛이 가득했다. "네놈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이야...... 하나 지옥고루십팔천마에 걸린 이상 네놈도 끝장이 다." 그 순간 석중옥이 벼락치듯 외쳤다. "늙은이! 지옥고루십팔천마의 최후를 보여 주마!" 쎄쎄-엑! 그의 몸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자 한 가닥 눈부신 섬광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왔다. 아아...... "끼아아-아아-악!" 순간, 괴이한 부르짖음과 함께 그토록 지독하던 지옥고루십팔천마 중 한 구의 허리가 두 동 강나는 것이 아닌가!저...... 저럴 수가! 도대체 저 녹슨 철검이 무엇이기에......! 내 오독추명조 를 잘라 버리더니 이번에는 지옥고루십팔천마까지도......" 지마군이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파파파! "광만육합(光滿六合)!" 석중옥의 몸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속도의 빠름을 누가 감히 알아볼 수 있으랴! 파파파! 수십 가닥의 섬광이 불을 뿜으며 장내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것은 가히 환상(幻像)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크으으-윽!" "끄아아악!" "케에에엑!" 비명은 동시에 터진 것 같았다. 마치 수십 인이 함께 비명을 지른 듯했다. "아...... 안 돼......" 지마군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석중옥에게 덮쳐 갔다. 그 순간, 파팍! "으아악!" 창졸지간에 십칠 구의 지옥고루십팔천마를 잘라 버린 섬광이 그의 몸을 정확하게 두 쪽으로 동강냈다. "......"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눈을 부릅뜬 채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불사의 악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썩은 짚단처 럼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중인들 중에는 눈이 툭 불거져 나온 자도 있었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석중옥은 언제 손을 썼냐는 듯 태연히 손을 허리춤에 늘어뜨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오른쪽 허리춤에 달려 있는 녹슨 철검은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정말 눈앞의 시체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의 일은 모두 꿈속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장내에는 이상한 중압감을 동반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이내 사마진평의 탄식으로 인해 깨어졌다. "흐음! 난 이제껏 진정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지."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 때문에 군웅들의 귀에는 아주 또렷 하게 들리고 있었다. "하나 이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군. 진정한 천하제일인은 분명 존재한다고......" 사마진평의 시선이 석중옥에게로 향했다. "자네야말로 천하제일인일세, 석 노제."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사마진평은 고개를 흔들며 진심이 가득 담긴 음성을 토해 냈다. "나는 여태까지 누구를 칭찬해 본 적이 없었네. 또한 내 자신이 남보다 뒤진다고도 생각지 않았었네. 한데 오늘로써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넓은지를 안 느낌일세." "......" 중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눈빛과 표정은 사마진평의 말에 절대적인 동의를 보내고 있었다. 제 32 장 사지탈출(死地脫出) 한쾌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 귀신 같은 뼈다귀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놈들도 뾰족한 수가 없겠지?" 그 말에 중인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하나 석중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들은 이번 일을 위해 이미 수십 년간 준비했을 겁니다. 겨우 이 정도로 물러설 자들이 아닙니다." 한쾌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그...... 그렇다면 또 다른......?"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곧 그들의 두 번째 공격이 있을 겁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팍! 팍! 대전을 훤하게 밝히고 있던 야명주(夜明珠)들이 일제히 꺼지며 장내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인지라 석중옥조차도 순간적으로 당혹스 러움을 금치 못했다. "앗! 이게 어찌 된 일이냐?""비, 빌어먹을...... 놈들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남궁뢰! 그 미친놈이......" 한데 그 순간, "크-윽!" "아, 암습(暗襲)이다...... 아악!" 군웅들 사이에서 오싹 소름이 끼치는 비명이 연거푸 들려 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의 비명. 그것은 군웅들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으아아악!" "크윽...... 저, 적(敵)은 우리들 중에 있다!" 장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놀랍게도 군웅들 중에서 몇 명의 인물이 닥치는 대 로 살수(殺手)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설마 군웅들 속에 첩자가 있을 줄이야......' 석중옥은 내심 다급함을 느끼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고 모두 한곳으로 모이시오!" 순간, "흐흐흐...... 네놈이 여기에 있었군. 죽어랏!" 어둠 속에서 음침한 괴성이 들리며 석중옥이 있는 곳으로 노도와 같은 경력이 몰려왔다. 꽈르르릉! 석중옥은 흠칫 놀라 가볍게 일장(一掌)을 마주 쳐냈다. 콰- 쾅! 폭음이 터지며 덮쳐 오던 인영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으...... 음!" 그때 중인들 중 누군가가 화섭자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러자, 휙-! 쐐애-액!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리며 장풍과 함께 우박 같은 암기가 그쪽으로 덮쳐 갔다. "으윽! 이런......" 불을 켜려던 인물은 깜짝 놀라 급히 화섭자를 버리고 몸을 피했다. 이어 그는 몸을 낮추며 암기가 날아온 곳으로 덮쳐 갔다. 그의 행동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 었으나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타났다. "이...... 이런...... 내가 암기를 던진 게 아니다!" 노호가 터지며 웅후한 장경(掌勁)이 작렬했다. 콰르르릉! 펑! "으윽!" 덮쳐 가던 인영은 이번에도 격퇴당하여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그 순간, 쐐애애액! 파파파파! 소털 같은 암기들이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를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두 인영은 깜짝 놀라 몸을 피하며 암기가 날아온 곳을 향해 일장을 갈겼다. 한데 이번에도 그들의 장력은 엉뚱한 곳을 공격한 모양이었다. "윽......! 이건 또 뭐야? 이 녀석들아! 노부는 가만있었는데 왜 지랄하는 거냐?" 거친 욕지거리가 들리며 두 인물의 공격을 받은 인영이 마구 장력을 갈겼다. 콰- 쾅! "크-윽!" 하나 그는 두 사람의 공력에는 미치지 못했는지 신음을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으...... 이놈들이......"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자신을 공격했던 두 인물 중 한 인물이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상대방은 강호 경험이 노련한 듯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덮쳐 가던 인영은 화를 참 지 못하고 아무데나 마구 장력을 날렸다. 콰르르르-! 꽝! 그러자 사방에서 마구 욕설이 터지며 그 인영에게로 우박 같은 공세가 집중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네놈이 바로 남궁뢰의 주구(走狗)였구나......" "뒈져라!" 콰르르르-! 쏴아아아-! 보이지는 않지만 실로 엄청난 공세가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 인영은 깜짝 놀라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콰르르릉- 쾅!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조금 전까지도 그 인영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웅덩이가 움푹 파였 다. 그의 움직임이 조금만 늦었어도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다. 그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다. '빌어먹을...... 이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는 기가 질려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중인들의 합공(合攻)을 받고 객사(客死)할 판이었다. 죽음 같은 침묵이 장내를 휘감았다. ...... 얼마나 지났을까? 성질이 매우 급한 자인 듯, 누가 소리를 질렀다. "젠장...... 이거 답답해서 살 수가 있나?" 순간, 콰르릉...... 파파파파...... 우르릉- 파팡! 여기저기서 태풍 같은 공격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그자는 자신의 실태를 느낀 듯 곧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되자 장내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가운데 어이없게 혼전(混戰)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탓에 모두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기척이 들려도 모두 그곳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내공(內功)이 약해 청각이 예민하지 않거나 조금만 동작이 굼뜬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뭇 매를 맞아 죽을 판이었다. 석중옥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기척만 보이면 여지없이 사방에서 소나기 같은 공세가 쏟아져 나오니 낭패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미련한 짓도 없겠다. 맞아 죽지는 않더라도 지쳐 죽겠구나.' 더구나 군웅들 틈에 숨어 있는 첩자들은 가끔 엉뚱한 곳에 암기를 날리고는 잽싸게 몸을 피 해 중인들을 계속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그때였다. 문득 석중옥은 진한 향수(香水) 냄새가 코를 찌름을 느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냄새는 그가 어디선가 맡아 본듯, 익숙한 것이었다. "상아, 당신이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소리로 다가오는 인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 순간, 쉬-익! 다가오던 인영의 손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몇 줄기의 섬광이 석중옥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뜻하지 않은 사태에 석중옥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틀었다. 파팟-! 팟! 가벼운 음향과 함께 미세한 암기들은 아슬아슬하게 석중옥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석중옥은 소름이 쭈욱 끼쳤다. '적의 첩자들 중에는 여인도 끼여 있군. 한데 조금 전의 그 냄새는 전에 맡아 본 것 같은 데...... 누구의 몸에서 나는 향수였지?' 석중옥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꽈르르르- 파파파팟- 암기 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무지막지한 공세가 집중되었다. 석중옥은 어이없어 하며 급히 신형을 날려 공세를 피했다. ...... 다시 죽음과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석중옥은 점점 다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안 되겠군. 이러다가는 우리끼리 싸워 모두 죽고 말겠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도, 첩자들 중 한 명이 중인들을 향해 암기를 뿌려대고는 잽싸게 다른 곳으로 피신해 버렸다. "으악!" "이...... 이런 죽일 놈......!" 슈슈슈...... 파파파팍! 터지는 비명...... 솟구치는 공포심...... 그야말로 중인들은 맞아 죽기 직전이었고, 맞아 죽기 전에 지쳐 죽을 판이었고, 지쳐 죽기 전에 긴장과 불안으로 초조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아......!" "으음......" 죽음 같은 침묵과 긴장이 흐르던 장내에 일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보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휘황찬란한 불빛이 비쳐 오지 않는가? 아니, 그것은 불빛이 아니었다. 금광(金光)! 한 인물의 몸에서 금빛 찬란한 광채가 서서히 뻗쳐 나오고 있는 것이다. 몸에서 장엄한 금 광을 피워 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인물. "서...... 석중옥......!"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몸 전체에 신비스런 금광을 퍼뜨리며 두 눈을 감은 채 정좌(正坐)해 있는 인영은 바로 석중 옥인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인간이 저럴 수가......?' 중인들이 입을 딱 벌렸다. 금광은 점점 더 진해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주위의 모든 광경을 환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질 것 같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콰르르릉-! 어둠 속에서 별안간 누군가가 석중옥을 향해 가공할 장력을 갈겨대는 것이 아닌가! "앗?" "누...... 누구냐?" 중인들의 놀란 외침이 들려 오는 순간, 꽝! 벼락치는 굉음과 함께 먹물 같은 장력은 정좌해 있는 석중옥의 등판에 여지없이 작렬했다. "크윽!" 하나 낭패를 본 것은 오히려 암습자인 듯 어둠 속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들려 왔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암습자는 잽싸게 몸을 날려 다른 곳으로 피해 버렸다. 두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던 석중옥의 눈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조금 전에 그는 비록 호신강기의 위력으로 암습자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워낙 갑작스럽고 맹렬한 위력을 지닌 공격이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나 그래도 그는 여전히 정좌한 채로 몸에서 금광을 뿜어 내고 있었다. 마침내 주위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환해졌다. 한쾌를 비롯한 몇몇 중인들이 급히 화섭자에 불을 밝혔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장내의 상황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 "으음...... 이럴 수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중인들의 표정이 침통히 굳어졌다. 아! 장내에는 무려 십여 명의 인물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반 가량은 악독한 암기에 당한 듯 온몸에 시퍼런 반점이 돋아 있었고, 나머지는 어 이없게도 중인들의 합공에 당한 듯 전신이 짓뭉개져 있었다. ...... 모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단 한 순간에 중인들의 삼분지 일이 쓰러진 것이다. 한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호성을 터뜨렸다. "누구냐? 어떤 놈들이 남궁뢰의 첩자냐?" 중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 중 분명 첩자가 있는 것을 알았 으나 그들이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불신(不信)의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장내가 훤히 밝아졌지만 의혹과 불안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더해만 갔다. '누군가? 대체 어느 놈인가?'혹시 내 옆에 있는 놈이......? 앞에 있는 놈도 수상한데......' 중인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어색한 침묵에 빠져 있을 때였다. 번쩍! 석중옥의 몸에서 금광이 점차 가시며 그가 눈을 떴다. "오오...... 석 노제......" 한쾌를 비롯한 중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반가운 빛이 가득했다. 그들이 지금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석중옥뿐이었다. 최소한 석중옥이 첩자가 아닌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사마진평이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혹시 노제가 조금 전에 펼쳤던 신공은 전설로만 내려오던 금광대능력(金光大能力)이 아닌 가?" 석중옥은 싱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중인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느 한 인물에게 집중되었다. 그 는 천천히 그 인물에게 다가갔다. "어떻소?" 그 인물, 어린아이 같은 동안(童顔)에 머리와 눈썹이 하얀 백발마동 적황은 석중옥의 엉뚱한 물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었다. "내 금광대능력을 받아 본 느낌이 어떻냐는 말이오!" 그 말에 백발마동의 얼굴이 홱 변했다. "그걸 노부가 어찌 알겠느냐?" "하하...... 당신은 건망증도 심하구려. 바로 조금 전의 일도 잊어버리다니......" 그제서야 중인들은 석중옥의 말을 알아듣고 모두 얼굴을 굳혔다. 천지회의 회주인 지살 전쾌가 의혹스러운 듯 물었다. "이자가 정말 조금 전에 당신을 공격했던 인물이란 말이오?" "그렇소." "당신은 그때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안단 말이오?" 석중옥은 백발마동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조용히 말했다. "금광대능력에 격중된 사람은 미간(眉間)에 금빛 반점(斑點)이 생기게 되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백발마동의 이마에 집중되었다. 과연, 그의 어린아이 같은 붉은 홍안에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금빛 반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이...... 이놈...... 네놈이 남궁뢰의 주구였구나......" "어쩐지...... 침혼류사하를 지날 때 남궁황을 두둔하고 나서서 이상하다 했더니......" 군웅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백발마동의 얼굴은 칠면조처럼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나 이내 그는 음악(陰惡)한 흉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과연...... 석중옥, 네놈은 대단하구나......!" "이제는 믿겠다는 말이오?"그렇다...... 흐흐...... 그러나 네놈도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다. 오 늘 이곳에 모인 자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한쾌가 이를 부드득 갈며 그를 향해 외쳤다. "이놈! 늙지도 않는 귀신 같은 요물(妖物)아! 허튼소리 하지 말고 다른 첩자가 누구인지 어 서 밝혀라." 백발마동은 흉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흐흐...... 한가야! 너무 큰소리치지 마라...... 네놈도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이런 빌어먹다 뒈질 요사한 늙은이가......!" 한쾌의 눈이 부릅떠질 때였다. 한쾌를 노려보고 있던 백발마동이 갑자기 번개같이 자신의 앞에 있는 석중옥을 향해 일격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기습이었다. 꽝! 그의 손이 여지없이 석중옥의 가슴을 가격하는 순간,크윽...... 그...... 금강불괴(金剛不壞)라더 니......" 백발마동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의 손목은 이미 부러져 있었다. "다른 첩자가 누구인지 대답하시오." 석중옥은 눈을 빛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으으......!" 단순히 다가오기만 했는데도 백발마동은 항거할 수 없는 가공할 기세가 자신을 짓눌러 옴을 느끼고 사색이 되었다. "마...... 말할 수 없......" 백발마동이 몸서리를 치며 말할 때, 부-웅! 그의 몸이 갑자기 붕 뜨는 것이 아닌가! 백발마동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엄청난 기세로 자신의 온몸을 억압해 옴을 느꼈다. "끄으으......" 그는 허공에 뜬 채 사지(四肢)를 바둥거렸다. "그들이 누구요?" 석중옥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백발마 동은 전신이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다. 백발마동의 입과 코에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내장이 너무도 강력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백발마동은 한차례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더니 거의 꺼져 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케-에...... 마...... 말하겠으니...... 나를 내...... 내려 줘.. "첩자가 누구요?" 백발마동은 안색이 거의 잿빛으로 변한 채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쐐애-액! "크아악!"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백발마동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선명한 빛을 뿌리는 단검 하나가 그의 목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당신들이었군!" 석중옥이 외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앗!"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 왔다. 동시에, "크하핫! 용케도 알아챘군. 하나 늦었다, 석중옥!"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중인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석중옥의 시선은 좌측 십여 장 밖을 향해 있었다. 그곳, 얼굴이 처참히 짓뭉개진 거한과 백의문사가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거한의 손에 는 한 백의미녀의 완맥이 잡혀 있었다. 중인들은 그들을 보고 경악성을 토해 냈다. "천패 섭붕과 지살 전쾌...... 너희들이......" "서...... 설마 천지회까지 그들과 한패일 줄이야......" 아......! 그들은 바로 천지회의 천패 섭붕과 지살 전쾌였던 것이다. 그들의 수중에 잡혀 있는 미녀는 백상아였다. 백발마동이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려고 할 순 간, 지살 전쾌가 단검을 날려 그를 죽이고 그와 동시에 천패 섭붕은 백상아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실로 너무나도 찰나적인 일이었던지라 중인들이 눈 한번 깜빡거릴 사이에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흐흐...... 석중옥, 때는 이미 늦었다." 지살 전쾌가 싸늘한 조소를 터뜨렸다. 천패 섭붕은 커다란 손으로 백상아의 손목을 쥔 채 그의 곁에 우뚝 서 있었다. "흐흐...... 백 낭자는 남궁 소문주가 원하니 데려가야겠고......" 석중옥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쾌는 얄팍한 입술에 냉랭한 미소를 매달았다. "흐흐...... 사실 본(本) 회(會)는 이미 오래 전에 남궁검문과 합작을 하고 있었다. 남궁검문은 밖에서, 본 회는 안에서 이번 일을 주도한 것이다." "......" "너는 내 평생 처음 보는 고수였다. 하나 오늘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는 없지."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문득 그는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허공으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나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말이오?" "흐흐흐...... 이제 곧......" 득의의 미소를 짓던 전쾌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암경(暗勁)이 가공 할 속도로 자신과 섭붕에게 닥쳐 옴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흡사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손바닥이 덮쳐 오는 것 같아서 전쾌와 섭붕이 그것 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펑! 꽈앙! "크윽!" "음!" 섭붕과 전쾌는 각기 무형의 쇠망치가 자신들의 가슴을 격타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 렸다. 슈욱! 그 순간, 어느 사이엔가 석중옥의 몸이 한 줄기 흑선(黑線)이 되어 섭붕에게로 덮쳐 갔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주르르 물러나던 섭붕이 어찌 이 공격을 피할 수 있겠는가! 섭붕의 흉측한 얼굴에 다급한 빛이 가득했다. 그는 즉시 백상아를 석중옥을 향해 집어던지 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하나, 꽝!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의 거구가 석중옥의 일장을 맞고 데구루루 굴러갔다. "으음-!" 섭붕의 입술을 뚫고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석중옥의 몸은 어느새 백상아를 받아 들고는 바닥에 내려서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저 방금의 눈부신 격전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조금 전, 석중옥이 전쾌와 지살을 향해 무형의 경력을 날리고, 그들이 격퇴당할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섭붕에게 다가가 그를 쓰러뜨린 다음 백상아를 구출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숨 한 번 내쉴 시간도 소요되지 않았다. 그만큼 석중옥의 행동은 질풍 노도처럼 빨랐던 것이다. 천하를 떨어 울리던 천지회의 전쾌와 지살을 찰나간 땅바닥으로 구르게 만든 그의 무공은 가히 천신(天神)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하나 바닥을 나뒹굴던 전쾌와 섭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비밀 암도(秘密暗道)를 통해 몸을 빼낸 모양이었다. 석중옥은 그들이 없어진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안아 든 백상아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다친 데는 없소?" 백상아는 내심 달콤한 감정이 샘물처럼 솟구침을 느끼며 노을처럼 얼굴을 붉혔다. "네......" 석중옥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백상아의 손을 잡고 안심하라는 듯 손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이런 정다운 광경을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는 몇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바로 노연홍, 제완완, 곽무지 등이었다. 심지어는 그 동안 말없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임 소군조차도 복면 밖으로 야릇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서...... 석중옥! 네놈이 설마 실전(失傳)된 지 이백 년이 넘는 전설의 무영장(無影掌)을 익혔 을 줄이야......" 어디선가 전쾌의 낭패 섞인 음성이 들려 왔다. 중인들은 모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네놈들을 영원히 지옥으로 보내 주겠다." 그의 싸늘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는 다시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 기이한 침묵만이 장내를 감싸고 있었다. 중인들은 무언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이곳 광장(廣場)의 모든 출입구들은 철저히 막혀 있어서 어디에도 출구(出口)는 보이 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하나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한쾌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제기랄...... 이 녀석들은 모두 어디 가서 죽었나? 도대체 무슨 수작들인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런 조용함은 오히려 다른 무엇보다도 중인들을 공포와 불안으 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잡고 있는 백상아의 손에 땀이 배어나옴을 느꼈다. "중옥! 왠지 자꾸 불안해져요......" 석중옥은 아무 말도 않고 마주잡은 손에서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상아는 그의 웃음을 보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정인(情人)의 웃 음만큼 여인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없었다. 백상아는 조금 전까지 불안에 떨던 마음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를 향해 마주 웃었다. 그녀 가 웃자 장내가 온통 환해지는 것 같았다. 단순한 웃음 하나로 분위기를 이토록 바꿀 수 있는 여인은 천하에 오직 그녀뿐일 것이다. 중인들이 백상아의 웃음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였다. 쿠르르르릉...... 돌연 요란한 폭음이 일며 광장이 진동했다. 쿠구구구궁-! 모두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뭐, 뭔가가 폭발하는 것 같은데......!" 돌연 석중옥의 안색이 대변하며 놀람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혹시 그들이 열화굉천뢰를......?" "여...... 열화굉천뢰......!" 중인들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열화굉천뢰(熱火轟天雷)! 열화굉천뢰는 남궁검문에서 공표한 삼대기보 중의 하나이며, 천지회의 천패와 지살이 가지 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이백 년 전의 신화자(神火子) 요굉(姚宏)이 만든 고금제일(古今第一)의 화기(火器)로, 한번 터지면 반경 오십 장 이내에 있는 생체(生體)는 전멸하고 만다는 공포의 마물(魔物)이 었다. 석중옥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남궁검문에서 열화굉천뢰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그것을 어디에 쓰려고 하 는지 몹시 궁금했소." "......!" "한데 이제 보니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마지막 수단이었구려." "......!" 중인들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문득 한쾌가 눈을 빛내며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노제! 난 열화굉천뢰가 아무리 천하제일의 화기라고는 하나 이곳을 무너뜨릴 만큼 가공스 럽다고는 믿지 않네. 자네는 설마 이 넓은 장보고가 그까짓 열화굉천뢰 하나에 무너지리라 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석중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노인!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오." "그럼 뭔가?" "한 노인은 잊었소? 이곳의 아래 지하화맥(地下火脈)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 지하화맥!" 그제서야 한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소. 열화굉천뢰의 화기만으로는 이곳이 무너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터진다면 억눌 려 있던 지하화맥이 폭발할 게 분명하오." 중인들의 표정이 암담하게 변했다. 한데 그 순간, 꽈르르릉-!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한 굉음이 터지며 광장 전체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 폭발이 어찌나 가공스러웠던지 그들이 서 있는 거대한 누각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마구 흔들렸고, 밖에 보 이는 가산(假山)의 바윗돌들이 마구 갈라지기 시작했다. 석중옥의 안색이 더욱 심하게 굳어졌다. "기어코 지하화맥이 터졌군!" 쿠르르르릉-! 꽈르르...... 꽈르르릉! 굉음은 갈수록 요란해져 광장, 아니 장보고 전체를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우드드득...... 우득득......! 급기야 천장에 금이 생기며 흙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마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으...... 꼼짝없이 생매장당하게 생겼다." "비...... 빌어먹을......!" 쿠르르...... 쿠구궁...... 콰콰콰쾅! 군웅들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기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백상아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석중옥의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중옥......!" 초조한 건 석중옥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는 짐짓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시오. 우리는 안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쩌-억! 돌연 동굴 바닥이 가뭄에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으아...... 악!" 참담한 비명이 터지며 한 사람이 갈라진 틈으로 빠지고 말았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퍼-억! 묵직한 둔음이 일며 또 한 명의 비명이 터졌다. 군웅 중 한 사람이 천장에서 무너져 내린 거대한 바윗덩어리에 머리가 박살난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더 이상 놀라고 있을 겨를조차 없었다. 꽈르르...... 릉......! 와르르릉-! 진동을 견디다 못한 천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앗!" "피...... 피해라!" 대경한 다급성이 터지며 중인들은 사방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나 또 한 사람이 집채만한 바윗덩어리에 깔리고 말았다. 퍽!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굉음 속을 뚫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콰르르릉-! 칠공(七孔)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힘차게 뿜어 나오고 복부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모습은 끔찍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큰일이군...... 한데 왜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지?' 석중옥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연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그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악!" 이때, 비단폭을 찢는 듯한 비명과 함께 제완완이 바닥의 틈 사이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찰나간, "이얍-!"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게 대갈을 터뜨리며 섬광처럼 신형을 날렸다. 그 빠름은 도무지 형용 할 수가 없었다. 석중옥은 제완완의 허리를 벼락같이 낚아채며 한쪽 구석으로 쏘아 갔다. 꽈꽈꽈꽈-! 집채만한 바위가 그들이 방금 지나온 곳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실로 일발의 차이로 위 기를 넘긴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백상아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이 갈라지며, 설상가상으 로 위에서는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가 그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악! 중옥!" 석중옥은 백상아의 비명을 듣자 미처 제완완을 내려놓을 시간도 없이 그대로 그녀에게 날아 갔다. 쐐액! 허공에 한 줄기 흑선이 그어지는 순간, 석중옥은 백상아를 남은 한쪽 팔로 안아 위기를 넘 기고 있었다. 양팔에 미녀(美女)를 안아 든 석중옥. 누구는 그를 몹시 부러워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그 로서는 다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 아직까지 아무런 낌새가 없으니......' 그는 연신 떨어져 내려오는 바위를 피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였다. '저거다!' 그의 눈에 섬전과 같은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주위에 있는 네 개의 인공호수(人工湖水) 들이 갑자기 파문을 일으키더니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콰쾅! 콰쾅! 그때 다시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일며 한쪽 벽면이 완전히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소름 끼치는 열기(熱氣)와 함께 시뻘건 용암(熔岩)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석중옥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모두 인공호수로 뛰어드시오. 그리로 가면 장강(長江)으로 나갈 수 있소." 그의 말은 거의 사경(死境)에 처한 중인들에게는 완전히 신(神)의 계시(啓示) 같은 것이었 다. "와......!" "가자......! 인공호수로......" 하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꽈우우-우우! 콰아아아-아아! 네 개의 호수에서 일제히 거대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위세는 실로 가공스러웠다. 가산들이 일제히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갔다. 콰우우- "으아아......!" 순식간에 몇 명의 인물이 거대한 해일 같은 물의 급류에 휩싸여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중인들은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물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지옥의 불길 같은 용암 이 바로 지척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장내의 모든 것은 불타 오르거나 용암에 녹아 버렸다. 한쪽에선 물바다...... 다른 한쪽에는 지옥의 불바다...... 그야말로 생지옥(生地獄)이 따로 없었다. 콰아아아......! 쿠르르르-릉! 하나 근처에 가기만 해도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용암보다는 거세기는 하지만 물이 더 안전 하다고 느꼈는지, 중인들은 쏘아져 오는 물살을 헤치며 너도나도 호수 속으로 뛰어들고 있 었다. 엄청난 급류가 그런 그들을 가로막았다. 하나 중인들은 사력을 다해 물살을 헤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만 뻥끗해도 노도와 같은 물살이 그대로 목구멍으로 밀려 들어올 테니까...... 석중옥도 양팔에 두 여인을 안은 채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전진했다. 콰르르릉! 머리 위에선 지금도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면 천장은 아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석중옥은 양팔에 여인들을 안고 있는 터라 손 을 쓸 수가 없어 발을 놀려 산더미 같은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꽈르르르르...... 그때 다시 반경 오 장이 넘는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석중옥은 반사적으로 급히 옆으로 피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쐐애-애-액! 파파파파파! 그가 피하려는 방향에서 난데없이 가공할 도기(刀氣)가 파공음을 내며 쏘아 오고 있지 않은 가! 흡사 눈[雪]이 내리듯 백설(白雪) 같은 도광(刀光)을 뿌리며 엄청난 위세로 덮쳐 오는 도의 폭풍!백설쌍란도...... 쌍혈겁도 단사옥...... 당신이......?" 석중옥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귓전으로 차가운 웃음이 들려 왔다. "흐흐흐...... 왜 죽는지는 알아야겠지, 석중옥? 나는 백쾌당의 당주(黨主)님을 모시는 흑백쌍 위(黑白雙衛) 중 백위(白衛)다!" 그것은 바로 쌍혈겁도 단사옥의 음성이었다. 쌍혈겁도 단사옥, 그가 바로 신비의 인물인 백쾌당주의 호위 중 한 명이었다니...... 눈부신 백색의 도기는 벌써 석중옥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석중옥은 손을 쓰고 싶어도 양쪽 에 안긴 제완완과 백상아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머리 위에선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절체절명의 순간, "후욱!" 석중옥은 이미 자신의 눈앞으로 닥쳐 온 도기를 향해 세찬 입김을 내뿜었다. 동시에 번개같 이 물구나무를 서며 두 발로 떨어져 내리는 바윗덩이를 강타했다. 째쨍! 콰콰앙- "크윽-!" "으음......!" 불꽃이 튀기며 바위가 박살나고 두 마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실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설쌍란도! 이 공포의 도법이 석중옥의 가벼운 입김으로 격퇴당하고, 둘레만도 오 장이 넘는 거대한 바 윗덩이가 석중옥의 발길질에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입으로 강기( 氣)를 뿜어 백설쌍란도를 막아 내다니......" 산더미 같은 물살 속에서 단사옥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려 왔다. 실로 귀신의 눈알도 뒤집히게 할 불가사의한 기공(奇功)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옥금강(玉金剛)이라고 하지." 석중옥이 태연한 신색으로 단사옥이 있을 만한 방향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 그럼 조금 전의 그 발길질은......?" "단혈철각(丹血鐵脚)이라는 건데, 혹시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군." "악...... 악마의 다리라고 하는 그 단혈철각 말이냐? 네가 그것까지 익혔다니......" 단사옥의 음성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단혈철각은 익히기가 너무도 힘들고 수련(修鍊)의 고됨이 인간의 상상을 불허하여 지난 오 백 년간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공포의 각법(脚法)이었다. 그러나 일단 익혀 한번 펼치기만 하면, 두 발이 천하의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보다도 더 단단하게 변해 가히 무적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 위력은 가히 불문가지(不問可知)! 집채만한 바위를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박살낼 뿐 아 니라, 어떠한 호신강기도 간단히 박살낼 수 있는 것이다. 단사옥은 석중옥의 가공할 무공에 질렸는지 더 이상의 암습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꽈르르르릉! 촤아-아-아-! 태산 같은 물의 해일 속에서 멀리 단사옥의 음성이 들려 왔다. "오늘은 네가 이겼다, 석중옥! 당주께서 네가 본(本) 당(黨)의 제일적(第一敵)이라고 말씀하 셔도 별로 믿지 않았는데...... 그분의 말씀은 사실이었다......" "......!" "하나 기억해라! 오늘의 승리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본 문은 이미 너를 척살(擲殺) 일호(第一號)로 올려놓고 있다...... 조만간...... 너의 목숨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나중에 다시 만...... 나...... 자......!" "......!" 석중옥은 휘몰아쳐 오는 급류 속에 말없이 우뚝 서 있었다. '백쾌당주가 이미 나를 알고 있다니...... 과연 내 짐작대로 백쾌당주는 역시 그란 말인가?' 그는 묵묵히 서 있다가 천천히 한숨을 쉬며 다시 앞으로 헤엄쳐 갔다. 제완완과 백상아는 이미 기절한 지 오래였다. 두 여인의 옷은 물에 젖어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석중옥은 양팔에 전해지 는 두 미녀의 풍만한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콰르르르릉- 촤촤아아-! 콰콰콰콰콰- 콰콰쾅-! 산더미 같은 물살은 광장, 아니, 장보고 전체를 수수깡처럼 허물어뜨리며 거침없이 밀려나갔 다. 붕괴! 풍운을 불렀던 지하동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으아아악!" "으아악......" 공력이 약해 물줄기에 휘말린 채 허우적거리던 고수들은 이 순간 완전히 소용돌이 속에 휘 말려 버렸다. 처절한 아비규환(阿鼻叫喚)! 이것은 정녕 한 폭의 끔찍한 지옥도(地獄圖)였다. 쿠르르르르-! 고오오-오오-! ......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다시 정적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 * * - 석 노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 무엇입니까? - 대체 어떻게 그 호수가 장강으로 통해 있는 것을 알았나? -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근처의 지형을 봐두었습니다. 보니 근처에 지하화맥이 지나 가고 있더군요. - ...... - 그래서 저는 그들이 만에 하나 이곳의 지하화맥을 터뜨려 버리지 않을까 생각했었지요. - 아! -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해천쌍로에게 일러 두었습니다. - 어떻게 말인가? - 이 계곡의 위쪽에는 장강의 지류(支流)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곳으로 연결 시키라고 말해 두었지요. 그들은 인부(人夫)를 동원해 강물을 막아 두었다가 열화굉천뢰가 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강물을 터뜨렸던 겁니다. -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우리처럼 무사히 나왔을까? - 아마 대부분은 탈출에 성공했을 겁니다. 그때 남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호무림의 최절 정고수들이었으니까요. - 그래, 자넨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남궁검문으로 쳐들어갈 생각인가? - 전 우선 사형(師兄)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 사형? - 하하...... 아니, 그럼 저라고 사형이 없겠습니까? - 자네 같은 고수에게도 사형이 있다니...... 누군가, 그 대단한 작자가? - 하하...... 나중에 아시게 될 겁니다. - 젠장...... 또 비밀이란 말인가? - ......! 제 33 장 장강풍운(長江風雲) 장강(長江). 천년을 가도 변치 않고 도도히 흘러가는 망망대하(茫茫大河)! 중원의 젖줄인 장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무렵. 강변에 서서 흐르는 장강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흑영이 있었다. 전신에 걸친 흑의는 칠흑보다도 검었고 머리를 반쯤 산발한 모습에 담담한 시선, 허리에 달 랑 매어 달린 녹슨 철검 하나...... 그 모든 것이 모여 형용할 수 없이 신비한 기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황산에서의 일은 정녕 끔찍했다. 과연 몇 사람이 그 지옥 같은 곳을 무사히 탈출했는지 궁 금하군.' 흑의서생. 그는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는 황산에서 같이 탈출한 백상아, 제완완, 한쾌 등과 헤어져 사 형을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하나 그의 마음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상아와 한 노인에게 군웅들을 여의부로 모으라고 일러 두었는데, 과연 얼마나 모일지 걱정 이군.' 그는 한동안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의 물살을 내려다보며 몇 가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아악!" 돌연 어디선가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석중옥은 그 음성이 어딘지 귀에 익음을 깨닫고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쉬익! 그의 몸은 한 마리 검은 비조(飛鳥)처럼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오십여 장을 이동해 갔다. 그 움직임은 가히 무영지경(無影之境)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명 소리가 들려 온 곳은 그가 서 있던 곳에서 하류 쪽으로 백여 장쯤 떨어진 강변이었다. 석중옥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벌써 일장(一場)의 피비린내나는 참극(慘劇)이 벌어져 있었 다. 드넓은 백사장(白沙場)의 한가운데에 질퍽한 피바다를 이루며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시체는 끔찍하게도 허리 아래로 완전히 두 동강이 나서 시뻘건 선혈 속에 내장이 송두리째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시체의 몸에서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으로 보아 방금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석중옥은 시체 쪽으로 다가가다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두 토막이 난 시체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일월쌍려 중의 월랑 도옥교였던 것이다. 석중옥은 한백의 장보고에서 그녀가 임소군 일행과 함께 물속으로 휩쓸려 가는 광경을 언뜻 보았었다. 한데 그녀가 이곳에서 처참한 시신이 되어 쓰러져 있다니...... 임소군은 물론이고, 그녀와 평생을 함께 붙어 다니던 일군 우문당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도옥교만이 이런 비극을 당했단 말인가? 도옥교는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싸늘히 식어 가고 있었다. '도옥교가 이런 꼴이 되었다니...... 그럼 임 부인은 대체 어디에......?' 석중옥은 도옥교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문득 눈을 빛냈다. 바닥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웅덩이를 이루다시피 했는데, 그 피웅덩이 주변에 피 묻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발자국은 서너 명의 것으로 보였는데, 강변을 따라 하류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흉수(兇手)들이 그녀를 해치고 떠날 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신발이 젖었던 모양이었다. 석중옥은 부릅뜬 채 식어 있는 도옥교의 눈을 감겨 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복수는 반드시 해주겠소." 이어 그는 발자국이 향하는 곳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난잡하긴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네 사람의 것이었다. 석중옥은 날카로운 안력으 로, 그 중 하나의 발자국이 다른 세 명의 발자국보다 조금 더 깊이 파여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발자국의 주인이 다른 세 사람에 비해서 내공(內功)이 현격히 떨어지거나,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었거나, 누군가를 업고 있음을 나타 내는 것이다. 하나 그 발자국이 한 번 움직인 거리가 삼 장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절대 내공이 떨어지거 나 다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석중옥은 내심 자신의 짐작이 맞았기를 바라며 더욱 쏜살같이 앞으로 질주해 갔다. 쐐액! 그의 몸이 움직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유성(流星)과도 같았다. 멀리서 누군가가 보았다면 한 줄기 흑선(黑線)이 움직이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신법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무쌍초영(無雙超影)이 시전되는 것이다. 무쌍초영은 그 빠른 속도만큼이나 내력(內力)의 소모도 극심하여, 제 아무리 막강한 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일(一) 각(刻) 이상은 펼칠 수가 없는 절세의 기학(奇學)이었다. 그런데 도 석중옥이 서슴없이 계속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그가 얼마나 서두르고 있는지 짐 작이 가는 일이었다. 일 리쯤 갔을까? 석중옥은 다시 멀지 않은 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창! 창! "이얍!" 욕설과 고함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는데, 그 중 석중옥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찾아 냈다. "이놈들......!" 카랑카랑한 그 음성은 바로 일군 우문당의 것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 석중옥은 더욱 신형을 솟구쳐 허공을 훨훨 날아갔다. 장강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격탕치고 있는 여울목 부근에 삼(三) 대(對) 일(一)의 치열한 격 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등에 백의여인을 업은 괴인 하나가 세 명의 노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합공을 당하고 있었 다. 괴인의 신세는 몹시 험악해 보였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노인들의 무공이 그보다도 높은 데 다가 등뒤에 여인을 업고 있어 행동에 제약을 받기 때문에 금시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기 그 지없었다. 괴인을 에워싼 세 명의 노인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의 복만 각기 홍의(紅衣)와 황의(黃衣), 청의(靑衣)로 달랐을 뿐, 키나 몸집, 이목구비가 굉장히 흡사했다. 세 노인의 움직이는 속도와 공세의 표독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괴인은 사력을 다해 세 노인의 공세를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전신에는 이미 유혈이 낭 자했다. 팟! "크윽!" 다시 홍의노인의 수중에 들린 어린도(魚鱗刀)가 무서운 도광을 뿌리자 마침내 괴인은 더 이 상 견디지 못하고 왼쪽 팔에 일도(一刀)를 격중당했다. 괴인의 신형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팔을 잘리지는 않았으나 거의 손을 들어올릴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 바람에 괴인은 하마터면 등뒤에 업은 여인을 놓칠 뻔했다. 여인은 혼절(昏絶)했는지 몸 이 축 늘어진 채 그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꼼짝 않고 있었다. 괴인의 목숨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왼쪽 팔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가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아...... 이런 곳에서 쓰러져야 하다니......' 괴인의 눈에 아득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상태로는 자신이 삼 초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주인마님을 이놈들에게 넘길 수는 없다!' 괴인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벼락같은 십팔(十八) 검(劍)을 내갈겼다. 그가 최고의 절기 로 생각하는 십팔연환무정검(十八連環無情劍)의 절초였다. 파파파팟! 주위가 온통 삼엄한 검광에 휘감겨 버렸다. 세 명의 노인은 여유 만만한 자세로 그를 상대하다가 그가 갑자기 수비는 도외시한 채 사력 을 다해 반격해 오자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엇?"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그들의 몸이 품(品) 자(字) 형(形)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 바람에 괴인이 날린 회심의 절초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하나 그들이 흩어졌다 뭉치는 그 짧은 순간에 괴인은 자신이 업고 있던 여인을 있는 힘껏 장강으로 던져 버릴 수 있었다. "에잇!" 휙! 창졸지간, 여인의 몸은 허공을 날아 장강의 한가운데로 빠지고 말았다. 풍덩! 세 노인은 설마 그가 이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하나 이내 입가에 비릿한 냉소를 머금었다. "흐흐...... 얕은 수작을 부리려 하지만 노부들에게는 어림없다." "하루살이 같은 놈!" 세 노인 중 황의와 청의를 입은 노인이 괴인을 향해 폭포수와 같은 공세를 전개했다. 그리 고 홍의노인은 여인이 떨어진 장강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동작은 마치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된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매끄러웠다. 괴인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홍의노인을 향해 덮쳐 갔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반도 날아오르기 전, 콰쾅! 황의노인과 청의노인이 내갈긴 공세가 그의 등판에 사정없이 작렬해 버렸다. "크악!" 괴인은 입으로 피분수를 내뿜으면서도 홍의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홍의노인은 막 장강으로 뛰어들려다 자신의 등뒤에서 예리한 바람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느끼고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의 시야로 괴인의 장검이 빛살 같은 속도로 자신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는 광경이 가득 들 어왔던 것이다. 괴인이 전력을 기울여 날아온 데다, 황의노인과 청의노인의 장력(掌力)을 맨 몸으로 받아 내며 그 반탄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 일검(一劍)은 그야말로 섬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홍의노인은 전력을 다해 머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파앗!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관자놀이를 스치며 머리칼이 우수수 잘라져 내렸다. 홍의노인은 모 골이 송연해지며 몸이 오싹 떨려 왔다. 하마터면 그대로 머리가 잘려질 뻔했던 것이다. 하나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자, 그는 분노가 폭발하여 괴인을 향해 수중의 어린도를 맹렬하 게 휘둘렀다. "이 찢어 죽일 놈!" 파팟! 그의 어린도는 사정없이 괴인의 몸을 내리쳤다. 괴인은 마지막 힘을 다한 일검(一劍)이 빗나가는 순간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푹......! 괴인은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함을 느꼈다. 괴인은 참으려고 했으나 너무 도 고통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입을 딱 벌렸다. 벌려진 입으로 잘려진 내장 토막과 시커먼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이...... 이...... 놈......" 괴인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어린도를 내려다보다가 어린도의 주인인 홍의노인을 노려보았 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빛은 급격히 흐려지며 의식이 끊겨져 갔다. 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괴인은 홍의노인의 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인영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괴인의 눈에는 한 줄기 안타 까움의 빛이 떠올랐다. '서...... 석 공자...... 당신은 너무 늦게 왔......' 그 순간 괴인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쿵! 그의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진 채 바닥에 쓰러졌다. "흐흐...... 피라미 같은 놈!" 홍의노인은 괴인의 가슴에 박힌 어린도를 뽑으며 음충맞게 웃었다. 한데 그 순간, "둘째, 조심해라!" 청의노인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 옴과 동시에, 쉬아앙! 홍의노인은 무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이 무시무시한 위세로 자신을 향해 몰아 쳐 옴을 느꼈다. 그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괴인의 가슴에서 뽑아 든 어린도를 휘둘렀다. 아 니, 휘두르려 했다. 하나...... 콰아아...... 어느 사이에 그 기운은 그의 백발 성성한 머리통을 산산이 부순 채 지나가고 있었다. 비명도 없었다. 홍의노인은 어린도를 든 자세 그대로 머리통이 박살난 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머리가 없 어진 몸뚱어리가 칼을 든 채 서 있는 광경은 끔찍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쿵! 그의 몸은 벼락맞은 고목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장내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냉엄한 눈빛의 흑의서생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물론 석중옥이었다. 석중옥은 홍의노인의 시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괴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한 줄기 애석해 하는 빛이 떠올랐다. "내가 조금 늦었군......" 그는 전력을 다해 달려왔으나 일발의 차이로 괴인이 여인을 강물로 던지고 홍의노인의 손에 죽음을 맞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괴인은 일군 우문당이었다. 그리고 그가 강물에 던진 여인은 물론 임소군이었다. 석중옥은 강호무림의 유명한 부부(夫婦)였던 일월쌍려 두 사람이 모두 이곳에서 죽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금슬 좋기로 소문난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 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잘 가시오. 그녀는 내가 반드시 구하겠소." 석중옥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오는 두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의노인과 청의노인. 그들은 전신에 끔찍한 살기를 이글거리며 석중옥을 향해 다가왔다. "으...... 이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가, 감히 둘째를 죽이다니......" 그들은 머리가 박살난 채 바닥에 쓰러진 홍의노인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듯 이를 부드 득 갈았다. 석중옥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삼색마존(三色魔尊)이군." 이 말에 황의노인과 청의노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나 이내 악독한 빛이 일렁거 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가 바로 삼색마존이시다." "애송이 놈!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네놈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도 알겠지?" 삼색마존(三色魔尊). 그들은 강호에서 이미 삼십 년간이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전대(前代)의 마두(魔頭)들이 었다. 그들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들로, 서로 영성(靈性)이 통해 합격술(合擊術)의 고 수가 되었다. 하나같이 심성이 잔인하고 수단이 악랄해서 그들이 무림에서 횡행(橫行)할 때는 삼색마존이 라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 치를 떨곤 했었다. 청의노인이 삼색마존의 첫째인 청마(靑魔) 혁련광(赫連狂)이었고, 황의노인이 막내인 황마 (黃魔) 혁련치(赫連痴)였다. 그리고 석중옥의 손에 머리통이 박살나 죽은 홍의노인이 삼색마 존의 둘째인 홍마(紅魔) 혁련표(赫連彪)였던 것이다. 이들 혁련삼형제(赫連三兄弟)가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무림이 한바탕 소동 에 휩쓸리고 말리라...... 석중옥은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너무 세상을 오래 살았다고 생각지 않소?" 그 말을 듣자 청마 혁련광과 황마 혁련치의 얼굴 가죽이 마구 실룩거렸다. "미친놈!"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군!" 그들은 더 이상 솟구치는 살심(殺心)을 억누르지 못하고 벼락같은 노호성을 지르며 석중옥 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놈! 죽어라!" 콰르르릉!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두 가닥의 무서운 장경(掌勁)이 노도처럼 석중옥을 향해 덮쳐 왔다. 하나 석중옥은 허깨비처럼 슬쩍 몸을 날려 그들의 공세를 피했다. 스윽! 그러더니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강물 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유연한 동작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혁련광과 혁련치가 내갈긴 장력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석중옥은 이미 조금 전에 여 인이 빠진 부근까지 날아가 있었다. "저기 있군." 석중옥은 강물 위로 날아가면서도 주위를 예리하게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하얀 옷자락 이 출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번뜩였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도 대접인신공(大接引神功)을 끌어올리는 신기(神技)를 발휘 했다. 그의 손에서 막강한 흡력(吸力)이 뻗어났다. 쏴아아...... 물기둥이 솟구치면서 물속에서 하얀 옷의 여인 하나가 삼 장 높이로 떠 있는 석중옥에게 빨 려들었다. 그가 막 그 여인을 잡는 순간, "이놈!" "네놈은 너무 방심했다!" 음랭한 외침과 함께 무서운 경풍이 석중옥에게 쏟아졌다. 어느 사이엔가 혁련광과 혁련치가 그의 등뒤로 바싹 다가오며 맹렬하게 양손을 휘두르고 있 었던 것이다. 그때 석중옥의 몸은 너무 오랫동안 허공에 떠 있었던 탓에 힘을 잃고 강물로 떨어지고 있 었다. 때문에 도저히 몸을 돌려 그들의 공격을 피하거나 반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 다. 그들이 석중옥의 절세 무쌍한 신법에 경악했으면서도 서슴없이 그를 따라 강물 위로 날아 오르며 공격을 했던 것도, 지금 석중옥의 위치와 자세로는 절대로 자신들에게 반격할 수 없 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석중옥이 비록 무공은 뛰어나지만 강호 경험이 일천 (日淺)하여 이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석중옥은 왼손으로 여인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고오오...... 갑자기 주위가 이상한 진공 상태가 되더니 혁련광과 혁련치가 내갈긴 장력이 그의 손짓을 따라 강물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 팡! 장력이 강물을 후려치며 물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 탄력을 이용해서 석중옥은 다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앗?" 그가 설마 이화접목(梨花接木)의 수법으로 자신들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몸을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라, 혁련광과 혁련치의 입에서는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는 이미 석중옥의 몸은 다시 강물 위를 날아 백사장에 내려서고 있었다. 이제는 자세가 역전되어 석중옥이 백사장에 있고 그들이 강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다급함을 느낀 혁련광과 혁련치는 발바닥으로 자신의 발등을 차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절묘한 천상제(天上梯)의 신법이었다. 하나 그들의 몸이 허공에서 채 안정을 되찾기도 전, 스윽! 하나의 창백한 손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 사이에 석중옥이 혁련광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오른손을 내뻗었던 것이다. 그 수법의 신속함은 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이런......" 혁련광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혁련치는 혁련광의 위급함을 눈으로 뻔히 봤지만 자신도 허공에 몸이 떠 있는 상태였기 때 문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형님...... 어서 피...... 피해야......" 그는 이 말만을 뇌까리고 있을 뿐이었다. 혁련광은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어 석중옥의 손을 피하려 했으나 천상제의 신법으로 간신 히 올라온 몸을 마음대로 비틀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석중옥이 펼친 것이 절세 무적의 낙화섬수임에랴...... 콰쾅! 북이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혁련광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날아갔다. "끄아악......!" 처절을 극한 비명이 긴 꼬리를 남기며 주위의 공기를 찢어 놓았다. 혁련광은 거의 오 장이나 날아가 강물 위로 떨어졌다. 풍덩! 그의 몸이 떨어진 수면이 금세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떨어진 혁련광의 몸은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서야 바닥에 내려선 혁련치가 이를 갈며 석중옥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이...... 이놈!" 하나 그 순간, 어느 사이에 다가왔는지 석중옥은 다시 오른손을 불쑥 내밀어 그의 목을 그 대로 움켜쥐어 버렸다. 이건 아예 상대도 되지 않았다. 혁련치는 무언가가 눈앞에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 목덜미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눈을 부 릅떴다. "크윽......" 석중옥은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은 채 자신의 왼팔에 안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듯 석중옥의 품에 늘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람은 과연 임소군이었다. 성결하리만큼 깨끗하고 고귀한 기품을 담고 있는 미부(美婦), 임소군. 그녀의 온몸은 물에 젖어 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풍만한 여인의 몸이 석중 옥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이다. 임소군은 심한 내상을 입은 데다 물을 먹은 탓에 기식이 엄엄했다. 석중옥은 임소군의 모습을 보고 눈을 매섭게 반짝였다. "당신들이 이 여자를 다치게 했소?" 석중옥은 자신의 손아귀에 매달린 채 바둥거리고 있는 혁련치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는 실로 신비한 기운이 어려 있어 보는 이를 질식시킬 듯했다. "크윽...... 그...... 그건......" 혁련치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석중옥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순간부터 도무지 공력을 조금도 끌어올릴 수가 없었 다. 석중옥이 그를 잡은 수법은 제룡절맥수(制龍截脈手)라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상대를 제압하 는 순간에 맥을 끊어 놓기 때문에 일단 제압당하게 되면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없는 공력의 소유자라 해도 꼼짝할 수 없게 되는 상승(上乘)의 절학(絶學)이었다. 혁련치가 경악과 공포 어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석중옥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을 쫓은 이유가 무엇이오?" 석중옥의 음성은 조용했고 시선도 담담했으나, 그 순간 혁련치는 도저히 참기 어려운 고통 을 느꼈다. "으...... 으윽......" 그의 목을 움켜쥔 석중옥의 손아귀에 엄청난 힘이 가해졌던 것이다. "끄으...... 이...... 이것 좀......" 그의 눈알이 툭 불거져 나오며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석중옥은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을 죽이려고 했던 거요?" "주...... 죽이려던 게 아니라 납치하려고......" 석중옥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한층 강렬해졌다. "납치? 그 나이에도 여색(女色)이 탐나 함부로 사람을 죽였단 말이오?" 그가 금시라도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듯한 기세로 소리치자 혁련치는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우...... 우리는 그저 지시받은 대로...... 해...... 했을 뿐.... "누구의 지시요?" "고...... 고천악(古天岳)!" 반쯤 혼이 나간 혁련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순간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고천악?" 그의 뇌리 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천악이라면 혈천노조 구양중의 대제자(大弟子)가 아닌가? 그가 대체 무슨 일로......' 석중옥은 내심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을 납치하려 한단 말이오?" "그...... 그것은 노부도 잘...... 모른다......" 혁련치는 입에서 선혈을 흘리면서 더듬거렸다. 무림인들이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강호무림에 공포스런 존재로 군림했던 삼색마존이 꼬리를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젊 은 청년의 손아귀에 잡혀 고분고분하게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있었으니...... 석중옥은 임소군을 한 팔에 안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입으로 피를 게워 내면서 금시라도 쓰러질 듯 몸을 떨던 혁련치의 두 눈이 악독하게 빛나 며, 그의 양손이 섬전 같은 기세로 석중옥의 단전(丹田)을 강타했다. "이놈! 죽어라!" 석중옥이 방심한 사이 조금의 공력을 되찾은 혁련치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암습을 가한 것 이다. 순간, 쾅! "크악!" 석중옥의 단전을 가격했던 혁련치의 양손이 손목째 부러지며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 져 나왔다. 이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룬 석중옥의 몸을 완전하지도 않은 공력으 로 후려갈겼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끄윽...... 꺽!" 손목이 부러진 통증에 비명을 토해 내던 혁련치의 얼굴이 샛노랗게 변하며 혓바닥이 길게 비어져 나왔다. 그러다가 그의 몸은 세찬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그제서야 석중옥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손을 풀었다. 스르르...... 혁련치의 몸은 뼈 없는 연체 동물처럼 미끄러지듯 그의 손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 쓰러졌다. 혀를 내민 채 목 아래 천돌혈(天突穴)이 파괴되어 죽어 있는 그의 시신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석중옥은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강호에 다시 나오는 게 아니었어." 그는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다 임소군을 안은 채 훌쩍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제 34 장 검정여정(劍情女情) "이것 참 낭패로군!" 이곳은 한 채의 낡은 사당(祠堂)이었다. 강변에서 일 리쯤 떨어진 곳. 도무지 언제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가 싶게 거의 쓰러져 가는 폐허의 사당이었다. 지붕은 휑하니 뚫려 먹물 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퀴퀴한 마른 흙 냄새와 군데군데 자라난 풋풋한 잡초 내음이 가득 차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한데 지금, "이것 참......" 석중옥은 이 낡은 곳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옆으로 쓰러진 채 잔뜩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부스러진 토신상(土神像) 위에 속눈썹이 긴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몹시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 있었다. 여인은 임소군이었다. 그녀의 성결하도록 고운 아미와 기품이 서린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파래, 숨결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석중옥은 낭패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상(內傷)을 입어 폐부(肺腑)가 상한 데다 물을 먹었기에 기혈(氣血)이 응체(凝滯)되어 있 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내심 중얼거렸다. '이대로 두면 한 시진도 견디지 못할 텐데......' 이런 정도의 상세라면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평상시라면 석중옥이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상대는 여인이 아닌가! 더구나 처녀도 아닌, 결혼을 한 어엿한 부인(婦人)이었다. 비록 남편을 여의었을망정, 남의 아내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순 없는 일이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옷을 벗겨야 할 텐데......' 석중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임소군의 옷은 물에 젖어 착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농염한 육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 석중옥은 임소군의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의 살결은 아직도 처녀의 그것처럼 팽팽하고 탄력이 있었다. 하나 의식을 잃은 그녀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깊숙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군. 나중에 무슨 욕을 먹든 우선 그녀의 생명을 구해야겠다." 이어 그는 용기를 내어 착 달라붙은 그녀의 옷으로 손을 가져 갔다. 그녀의 옷은 몸에 착 붙어 있는지라 좀처럼 잘 벗겨지지 않았다. 옷을 벗기자니 그녀의 매 끄러운 살결이 그대로 만져지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임소군의 백의를 벗겨 나갔다. '상아가 이 일을 알면 뭐라고 할지 걱정이군.' 이윽고 어둠 속에서 분을 바른 듯 희뽀얀 살결이 수줍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십대 후반의 풍만한 여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긴 목 선에서 미끄러지는 둥그스름한 어깨, 은은히 드러나는 젖가슴의 곡선과 새하얀 질 감...... 그것은 보는 이의 머리가 터질 듯한 강렬한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석중옥은 한없이 매끄러운 살결에서 계속 젖은 옷을 벗겨 갔다. 적당히 부푼 아랫배와 미끈한 곡선의 허리, 그리고 깜짝 놀랄 만큼 확산된 탄력있는 둔부와 매끄러운 옥지(玉脂)로 빚어 놓은 듯한 다리...... "......!" 석중옥은 일순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임소군의 나신(裸身)......! 그것은 실로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육체였다. 만지면 터질 듯 농염하고도 우유같이 희고 매끄러운 살결과,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 은 나온 굴곡이 완연한 몸매는 정녕 인세(人世)의 여인 같지가 않았다. 석중옥은 일전에 백상아의 나신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육체도 그야말로 완벽한 미(美), 그 자체였다. 그녀와 임소군의 몸을 비교하자면, 백상아의 나신이 한없이 청순하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자 랑하는 몸이라면 오늘 본 임소군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농염하고도 풍만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몸을 보고 욕정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 석중옥은 곧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는 이보다 더한 광경이라도 눈썹 하나 까딱치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크고도 탐스러웠으며 처녀의 그것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처녀 의 그것보다 더욱더 팽팽하고 탄력이 있어 보였다. 추위 탓인가? 가슴 위에 솟아 있는 조그마한 유두(乳頭)는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석중옥은 손을 들어 그녀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뭉클한 감촉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한없이 풍만하면서도 그윽한 가슴...... 누구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성인군자(聖人君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한 여인의 그림자가 너무도 굳게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서기(瑞氣) 같은 광채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묵묵히 추궁과혈하다가 손을 조금씩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살결은 너무도 매끄러워 살짝만 갖다 대었는데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한 느 낌이 들었다. 유부녀답지 않게 처녀의 그것처럼 탄탄하고 탄력있는 배를 지나 그의 손은 그 녀의 아랫배의 단전에 밀착되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매끄럽고도 야릇한 느낌이 손끝을 통해 삽시간에 전신으로 전해졌다. 석중옥은 순간적으로 손을 더 아래로 내려 그녀의 모든 것을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순간적이나마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심결(心訣)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다시 침착을 되찾자 그는 곧 전신의 내 공을 운기(運氣)해 임소군의 단전으로 주입시켰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임소군의 온몸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 음......" 임소군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 그녀의 눈이 떠졌다. 긴 속눈썹이 치켜 떠지며 영롱하기 그지없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 이곳은...... 아앗!" 그녀는 살짝 아미를 찌푸리며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의 가슴과 단전에 낯선 남자의 손이 올 려져 있음을 알고 대경 실색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직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부인!" 석중옥이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다시 눕게 된 임소군은 새파랗게 질려 발버둥치려고 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 기혈이 뒤엉키게 되면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될 것입니다. 잠시만 그대 로 계십시오." 석중옥이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음을 느낀 임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석중옥을 올려다보았다. '아!' 석중옥과 눈이 마주치게 되자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석중옥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자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잠시 결례(缺禮)를 범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끄는 대로 운기(運氣) 하십시오." 그 웃음, 그 음성. 놀라고 지쳐 사경(死境)을 헤매던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포근히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가슴에 대어져 있던 석중옥의 손에서 부드러운 열류(熱流) 가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녹여 주고 있었다. 파르르...... 내리감은 그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용서하십시오. 치료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석중옥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임소군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 임소군은 기품있는 얼굴을 홍조로 물들인 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다시 백의로 감춰져 있었다. 하나 비록 옷으로 몸을 감쌌다 하나 젖어 있는 백의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여인의 몸을 아낌없이 드러내 주고 있었다. 석중옥은 고개 숙인 임소군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부인이군. 상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내심 그녀의 미색(美色)에 새삼 감탄하며 다시 어색하게 말했다. "부인...... 조금 전 일은......" 그때 임소군이 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쳐들었다. "휴......!"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석중옥은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애틋한 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부인......" "아무 말씀 마세요. 전 공자께서 이 한목숨 구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벌써 두 번이나 저를 도와 주셨으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임소군이 의외로 담담하자 석중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그녀는 이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으니......' 석중옥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임소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망설이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일월쌍려 우문부부(宇文夫婦)를 보지 못하셨는지......" 석중옥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안됐습니다만...... 부인, 그들은......" 그의 뒷말을 듣지도 않고 임소군의 안색은 침울하게 변해 버렸다. 석중옥도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 별다르게 격동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석중옥은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마음속으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 한동안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려 있었다. 그 침묵을 깨려는 듯 석중옥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한데 어쩌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되셨습니까? 듣자 하니 고천악이란 자와 무슨 원한이 있었 던 것 같은데......" 임소군의 얼굴이 다시 한 차례 미미하게 변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생각을 하더니 이윽고 마 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말씀드리지요......" * * * 그녀의 남편은 청년협객으로 유명한 도룡검객(屠龍劍客) 유수광(柳秀光)이었다. 유수광은 훤 칠한 용모와 호협(豪俠)한 성품으로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신진고수(新進高手)였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고천악을 알게 되었다. 비슷한 연배에 기질이 비범했던 두 사람은 쉽게 의기 투합하여 곧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수광은 자신의 약혼녀였던 임소군을 고천악에게 소개시켰다. 한데 하늘의 장난일까? 임소군을 한번 본 고천악은 그녀의 미색(美色)에 흠뻑 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의제(義弟)인 유수광과 장래를 약속한 여인. 결국 고천악은 혼자서 눈물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한데 도룡검객 유수광은 그녀와 혼인(婚姻)을 하던 날, 과음을 한 탓인지 그만 급사(急死)를 하고 말았다. 임소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데 유수광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천악이 그녀를 찾아왔다. "소군, 나와 결혼해 주시오!" 고천악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청혼(請婚)을 했고, 아직도 유수광의 모습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임소군은 그의 청혼을 일거에 거절해 버렸다. 그 후로 고천악은 끈질기게 그녀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 몇 차례나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 절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천악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던 그답지 않게 폭음을 하고 그녀를 찾아왔 다. "크하하...... 소군! 그대가 정녕 나를 이토록 멀리한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소. 무슨 수를 써서 라도 기필코 당신을 내 아내로 만들고야 말겠소!" 고천악은 그녀에게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임가장은 혈겁을 당했고, 임소군은 고천악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런데...... * * * "제가 황산의 장보고를 기적적으로 탈출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고천악의 수하들이 저를 뒤쫓기 시작했어요." "그럼 그 전에는 고천악이 부인께서 살아 계신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네, 그래요. 그는 제가 임가장의 혈겁 때 죽은 줄 알았을 거예요." 석중옥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음...... 그렇다면 황산의 장보고에 모였던 인물들 중 고천악의 측근이 있었던 게 분명하군 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나 누구인지는 도무지 짐작도 안 가는군요." 석중옥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그녀에게 물었다. "한데...... 부군(夫君)의 죽음에 무슨 의문은 없었습니까?" 임소군은 일대의 재녀(才女)답게 단번에 그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눈을 반짝였다. "타살(他殺)이 아닌가 하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에요. 특히 고천악이 의심스러웠거든요." "......" "하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타살이란 증거는 없었어요." "혹시 독살(毒殺)은......?" 임소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에 독을 탔는가 하고 조사해 보았지만 그와 술을 마셨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어 요. 그리고 그는 그날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어요."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그날 종일 중인들의 시선 속에 있었고 아무도 그가 암수(暗手)나 습격을 당한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 저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석중옥은 그녀의 고충을 짐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타까우셨겠습니다, 부인!" 임소군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오 년이나 지난 일이니...... 그런데도 그분이 제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던 모습이 아직 도 눈에 선하답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군요." "......" 임소군의 얼굴에는 처연(凄然)한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음인가? 그녀의 눈빛에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석중옥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한 줄기 형용하기 힘든 비애(悲哀)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 석중옥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때때로 원망 (怨望)을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왜 이리도 씁쓰레한지를...... * * * "저......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곳은 장강에서 멀리 떨어진 하구집(河口集). 석중옥과 임소군은 그곳에서 난처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하구집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객잔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화풍객잔(和風客棧)> 그 앞에서 석중옥은 점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방은 없소? 아무데라도 좋소. 사람이 잘 수만 있다면......" "글쎄...... 손님, 저희 객잔은 원체 작아서 그런 곳도 없습니다. 다른 곳은 모두 손님이 꽉 들 어차 있고 이제 남은 것이라곤 작은 방 하나뿐인데, 미안하지만 그곳에서 주무셔야겠습니 다." "쯧......" 석중옥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천(西天)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자니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그렇다고 노숙(露宿)을 할 수는 더 더욱 없었다. 석중옥은 혀를 차며 임소군을 돌아다보았다. 임소군의 기품있는 아름다운 얼굴은 약간 상기 되어 있었다. "석 공자! 저는 괜찮으니 방을 얻으세요." 말을 해놓고 그녀의 얼굴은 좀더 붉어졌다. 석중옥은 하는 수 없이 화풍객잔의 제일 구석에 있는 조그만 방을 얻고 말았다. 방은 무척 작았다. 한쪽에 약간 꾀죄죄한 침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다른 한구석에 는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쓸쓸히 놓여 있었다. 석중옥과 임소군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석중옥은 여인에게는 무척 냉랭한 사 람이었지만 이런 경우를 당하고 보니 가슴이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임소군의 고운 얼굴은 홍조가 가득했으나 그녀는 연장자(年長者)답게 차분히 말했다. "공자께선 피곤하실 테니 침상에서 주무세요. 저는 의자에 앉아 잠깐 눈만 붙이면 되니......" 석중옥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부인께서 침상에서 주무십시오. 아무래도 남자인 제가......" "아니에요, 석 공자께서......" 임소군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손을 내젓는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마주 닿았다. 순간, "......!" "......!" 두 사람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하나 그것도 일순, 그들은 급히 손을 거두었다. 임소군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노을처럼 붉힌 채 고개를 떨구며 몸 을 살짝 비틀었다. 석중옥은 그런 그녀의 교태스런 모습에 내심 가슴이 뛰었다. 연상(年上)의 여인(女人)이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결코 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석중옥이 자신을 멍청히 보고 있자 임소군은 그윽한 눈을 들어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 는 나이답지 않게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그것이 또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석중옥은 약간 어색함을 느끼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 부인께서 침상을 쓰십시오." 임소군은 더 이상 사양을 못 하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때, "아......" 그녀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낀 듯 몸을 비틀거렸다. "부인!" 석중옥은 다급히 양팔로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았다. "미...... 미안해요. 피로했나 봐요...... 좀 어지럽군요." 임소군은 자신의 등에 건장한 석중옥의 가슴이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석중옥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하여 침상에 앉혔다. 그의 팔과 가슴으로 한없이 보드랍고 매끄러운 여인의 살결이 기분좋게 마찰되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하고 성숙(成熟)한 여인의 내음에 약간 정신이 어지러 웠으나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 한잠 자면 나을 것 같아요." 임소군은 얼굴을 노을처럼 붉히며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이 몹시도 미묘했다.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게 가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 그녀를 덮어 주었다. "주무십시오." "......!" 임소군은 아무 말도 않고 기이한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뜨겁게 교차했다. 석중옥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임소군의 고귀하고도 기품있는 얼굴이 이토록 요염하게 보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웬일인가? 문득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풍만하고도 농염한 나신(裸身)이 뇌리에 떠오름은...... 석중옥은 그런 자신에 깜짝 놀라 급히 시선을 돌렸다. 임소군의 입에서 아쉬운 듯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석중옥이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석중옥은 잠든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얇은 이불 하나로 한창 피어오르는, 터질 듯 젊고 싱싱한 그녀의 육체를 다 감출 수는 없 었다. 석중옥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서 가느다란 목으로...... 다시 목에서 봉긋하게 솟아 있는 탐스런 가슴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탁자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석중옥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기이한 느낌을 받고 눈을 떴다. 방안은 아직도 컴컴했다. 하나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비치는 달빛은 그의 시선을 막지 않 았다. 마치 은빛을 뿌리는 듯 영롱하게 내리쏟아지는 월광(月光)을 받으며 석중옥의 앞에 한 여인 이 서 있었다. 달빛에 떠오른 듯한 미부. 본래 궁장(宮裝)이었던 머리는 풀어져 허리까지 내려왔고, 전신에는 얇은 망사(網絲)를 걸치 고 있었다. "부인......!" 석중옥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이 임소군임을 알고 나직이 신음했다. 임소군의 눈빛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아주 몽롱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 다. "수광!" 그녀의 입에서 나직하고도 신비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석중옥을 응시하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수광......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전 당신이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을 알고 있었어요." "......!" 석중옥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달빛보다도 더욱 반짝이는 듯했지만 어찌 보면 아주 모호한 것도 같았다. "오랫동안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듯 말했다. 석중옥이 미처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석중옥이 다급히 그녀를 안았다. 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석중옥에게 몸을 밀어붙였다. 머리카락이 그윽한 내음을 풍기며 석중옥의 얼굴에 닿 았다. 뜨거운 입술이 사향 같은 냄새를 풍기며 가볍게 벌어졌다. 그녀의 두 팔은 석중옥의 목을 휘감은 채 가쁜 숨을 그의 얼굴에 토해 내고 있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석중옥의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다. "......" 석중옥의 입김을 느끼자 임소군은 가늘게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혀가 나왔다. 석중옥은 거의 미친 듯이 그녀의 혀를 빨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전율이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석중옥의 목을 감았던 그녀의 두 손이 아래로 내려지며 무엇인가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 에 걸쳐 있던 얇은 망사가 사르르 흘러내렸다. 그 안은 오월(五月)의 아침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터질 듯 무르익은 탐스런 가슴과...... 대리석보다 더욱 매끄럽고 새하얀 두 다리...... 그 사이 에 숨겨져 있는 여인의 신비......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혀 줘요."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꿀같이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석중옥은 그녀가 말한 대로 행동했다. 두 팔을 돌려 알몸인 살갗에 댔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려 침대 위에 내 려놓으려 했다. 하나 그녀는 그를 놓지 않고 두 팔을 다시 목에 감았다. 가쁜 호흡이 그녀의 목에서 울렸다. "으음......" 그녀는 몸을 교태스럽게 틀고 나직한 신음 소리를 냈다. 너무도 자극적인 유혹이었다. 천하의 석중옥조차도 가슴이 타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불타는 입술로 임소군의 향기로운 입술을 탐했고, 손으로는 어느 새 터질 듯 무르익은 그녀의 젖가슴을 취했다. "아......!" 임소군은 전신 혈관 속으로 짜릿하고 황홀한 전율이 퍼져 오름을 느꼈다. 석중옥의 손길은 그녀의 익을 대로 익은 나신을 구석구석 쓰다듬었다. "아아...... 여...... 보......" 임소군은 전신을 꿈틀거리며 비음을 발했다. 석중옥의 손길은 갈수록 여인의 깊숙한 부분으로 파고들었다. "으...... 음......" 그녀는 석중옥의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의 손길이 어느 한 부분에 닿자 임소군은 신음을 토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여...... 여보......" 그녀는 두 팔로 석중옥의 몸을 휘감았다. "부인!" 제아무리 석중옥이라 해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목석(木石)이 아닌 바에야 이와 같은 유혹에는 누구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아닌가! 어느새 그는 옷을 벗고 임소군과 똑같은 알몸이 되었다. 이윽고 두 남녀의 나신은 서로 빈틈없이 포개지며 불꽃을 튀겼다. 석중옥은 한없이 부드럽고 수축력이 있는 부분으로 자신의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 다. "으음......" "아아......" 뜨겁고 진한 애욕(愛慾)의 불길이 그들의 전신을 지글지글 태웠다. 그들의 육체가 몇 번이고 섞였다. 그것은 희열(喜悅)의 극치를 넘어서 이미 열락(悅樂)의 경 지에 수차례 뛰어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혼입(混入)된 육체는 서로를 결코 놓아 줄 줄 몰랐다. 길고 긴 시간 동안 그들의 애욕의 여행은 몇 번이나 계속됐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들의 정 열과 젊은 힘은 한 밤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윽고 사나이는 온 힘을 쏟았다. 여인은 자신의 문이 활짝 열림을 느끼며 그 순간 고통이 섞인 아득한 희열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치 어느 한 순간 온통 작렬하며 터지는 폭약처럼 찬란하게 확산되는 쾌감을 느끼면서, 그 녀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제 35 장 삼인합공(三人合攻) 아침. 간밤의 열풍(熱風)은 숨 가쁘게 지나가고 찬란한 햇살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 석중옥은 눈이 부심을 느끼고 깨어났다. 그의 품속에는 임소군이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 그 역시 알몸이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살결의 촉감은 꿈결 같았다. 석중옥은 자신의 가슴에 뺨을 대고 잠든 임소군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도무지 너무도 아름 답고 고귀해 보여 인간 세상의 여인 같지가 않았다. 석중옥은 간밤의 그 일이 마치 한 조각 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의 얼굴에 한 가닥 수심(愁心)이 떠올랐다. 그는 간밤에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정력(定力)은 언제나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해 왔었다. 한데 그토록 쉽사리 허물어질 줄이야! 더구나 자신이 누님같이 생각해 왔던, 고귀한 기품 을 지닌 임소군을 범(犯)하게 될 줄은 정녕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방그레 홍조 띤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임소군...... 그녀의 미(美)는 완벽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고아(高雅)했다. 이때, "으...... 음......" 임소군은 가볍게 신음을 발하며 뒤척였다. 그 바람에 이불이 흘러내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한없이 풍만하고 탄력있는 젖가슴, 그리고 그 보드라운 융기 위에 얹힌 연분홍의 열매...... "......" 석중옥은 또다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희대의 탕아(蕩兒)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임소군의 몸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흥분이 되니, 아무리 생각해도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 동안은 초인적인 정력(定力)과 오랜 기간 동안의 수련(修鍊)으로 다져진 인내심으로 참 고 있었지만, 일단 여인의 늪에 빠지게 되자 성벽(城壁)처럼 단단했던 정염(情炎)의 불길이 전신을 휘감았던 것이다. 그녀의 나신은 실로 뇌살적(惱殺的)이었다. 석중옥이 아닌 누구라 해도 그녀의 몸 전체가 끌 어당기는 마력(魔力)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말 것이다. 석중옥은 간밤의 일이 너무도 돌발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녀의 의도적인 유혹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져서 벌어진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하나 원인이야 어떻든 그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는 그녀에게서 매력을 느꼈고, 그 매력에 항거하지 못 했던 것이다. 석중옥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임소군이 두 눈을 살짝 떴다. 그녀의 눈이 석중옥의 시선과 마주쳤다. "......!" "......!"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석중옥은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임소군은 아무 말도 말라는 듯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는 영롱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그 순간 석중옥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어젯밤의 그녀는 결코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리 행동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임소군의 시선은 석중옥의 얼굴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간밤의 치열했던 정사(情事)로 석중옥의 앞으로 헝클어졌던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의 용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 임소군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실로 천하절세(天下絶世) 미장부의 영준 무비한 얼굴이 아닌가? 그 어디에서도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절세미남(絶世美男)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임소군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석중옥의 관옥(冠玉) 같은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 러다가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석중옥은 다시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부인......" 임소군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윽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제가 당신을 유혹했다고 욕하지 마세요...... 전......" "간밤의 일은 모두 부인의 장난이었구려." 임소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석중옥의 건장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소곤거렸 다. "절 나쁜 계집이라 욕해도 좋아요. 하지만...... 전...... 참을 수가 없어서......" "......!"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야릇한 감정을 담고 있어, 석중옥의 귀 에는 천하의 어떤 음성보다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남편이 죽은 뒤 한 번도 다른 남자를 생각하거나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어요." "......!" "언제나 남편만을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영상을 가슴속에 간직하려고 했지요." 석중옥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너무도 부드러워서 손바닥에 스치는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끼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로 말을 이었다. "한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영상(映像)은 점점 제 가슴속에서 희미해졌어요. 그리고 대 신 다른 한 사람의 영상이 그 자리에 새겨지기 시작했답니다." "부인......!" "그 사람은 비록 저보다 나이가 어리고 싸늘해 보이지만...... 전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 터 그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석중옥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행복한 친구가 누구요?" 임소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항상 흑의를 입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하며...... 여인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어요. 하지 만 전 그의 가슴에 누구보다도 뜨거운 정열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 그녀의 뱅어같이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살짝 찔렀다. "그는 바로...... 당신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꿈결처럼 달콤했고 솜사탕보다 부드러웠다. "어제 당신이 남편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전 제가 더 이상 그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다른 남자와 마주앉아 남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전혀 모르는 타인(他人)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임소군은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다시 요염한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제가 어젯밤 당신을 유혹했을 때 제 마음속엔 온통 당신뿐이었어요. 단 하루만이라도 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당신을 대하고 싶었어요." 석중옥은 가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임소군은 그가 아무런 말이 없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다 시 영롱한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 "혹시...... 당신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나요?" "......" 석중옥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조금 긴장된 표정을 지었으나 음성만큼은 여전히 꿈결처럼 부드러웠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제가 들어갈 공간(空間)이 있느냐는 것이에요." "......!" 석중옥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임소군은 문득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장보고에서 당신이 백 낭자와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았어요. 전 그녀만 허락해 준다 면......" 아......!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며 현숙한 여인, 임소군. 그녀는 비로소 석중옥에게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불타는 듯한 애정의 눈빛은 짙은 갈망을 담은 채 석중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중옥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곧 조각처럼 준미한 그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일어났다. 돌연 그는 손을 움직여 임소군의 봉긋한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임소군은 움찔했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석중옥은 부드럽게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누님......" 순간 임소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석중옥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매끈한 등과 허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상아는 이해해 줄 거요. 난 누님과 같은 아내를 맞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오." "아......" 임소군의 입에서 기쁨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 중옥!" 그녀는 그의 이름을 뜨겁게 부르며 전신을 그의 품안에 넣으려는 듯 밀착시켰다. "중옥!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녀의 고운 뺨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누님!" 석중옥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소. 누님과 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분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 다니......"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님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나이요." "중옥......!" 그녀는 뜨거운 음성을 토해 내며 그에게 입술을 요구했다. 길다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요염 한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무방비 상태로 그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폭발 적인 유혹을 담고 있었다. 석중옥은 다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가볍게 입을 벌린 채 그의 입술을 기다리는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으...... 음......"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석중옥은 다시 그녀를 애무했다. 그 바람에 반쯤 젖혀진 이불이 완전히 침상 아래로 흘러내 렸다. 그때 석중옥은 이불 아래에 묻어 있는 몇 점의 앵혈(櫻血)을 볼 수 있었다. 점점이 찍혀 있는 앵혈!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 외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놀랍게도 임소군은 아직 처녀(處女)의 몸이었던 것이다. "누...... 누님......" 석중옥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임소군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남편은 결혼 첫날밤에 죽었다고......" "......" 석중옥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뜨거운 시선으로 임소군을 바라보다가 솟구쳐 오르는 애정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알몸 구석구석을 쓸어 갔다. "으...... 음......!" 임소군은 다리를 비비꼬며 달콤한 신음을 발했다. 석중옥은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묻고 능숙히 그녀를 애무했다. "아아...... 으...... 음......" 임소군은 또다시 전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양손은 허공을 몇 번 젓다가 든든 한 사내의 등판을 찔렀다. 또다시 그들은 애욕(愛慾)의 불길에 휩싸였다. "학...... 하학......" "음......" 미묘한 호흡 소리. 침상은 두 남녀의 폭풍 같은 열기에 타오를 듯했다. 임소군은 자신의 몸속 깊은 곳으로 한 없이 뜨겁고 당당한 것이 뚫고 들어옴을 느끼고 나직이 전율했다. 뜨겁고 뜨거우며 깊숙한 진입! 석중옥의 정열적인 정욕은 그녀를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거칠고 숨막히는 율동과 함께,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아......!" 임소군은 전신이 폭발하는 듯한 엄청난 쾌감에 몸을 활처럼 휘며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석중옥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으음......"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파도처럼 흩어진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손끝, 발끝, 아니, 머리칼 끝까지 그녀의 희열은 퍼져 있었다. 비로소 석중옥의 거듭된 공격은 일단 멈추어졌다. "저...... 정말...... 도...... 동생...... 대단해요." 임소군이 학학거리며 말했다. 석중옥은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했다. "무엇이 말이오?" "모...... 몰라! 이 바람둥이 같으니......" 임소군은 석중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그를 꼬집었다. "아얏!" 석중옥은 엄살을 부렸다. 이어 그의 손은 탐스런 여인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하하...... 누님 같은 미녀를 안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게 목석이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 소?" "호호......" 임소군은 달콤한 웃음을 발하며 석중옥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석중옥은 얼굴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댄 채 그녀의 향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음...... 냄새가 좋은데......" "으응......" 그녀는 애교를 부리듯 몸을 비비꼬았다. 석중옥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연상의 여인이 애 교를 부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싫지가 않았다. 석중옥은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누님!" 임소군은 행복이 충만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저와 헤어지면 바로 여의부로 가십시오." 그 말에 임소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왜, 동생은 어디 가려고?" "그렇소. 난 다른 곳에 잠시 들러야 합니다. 누님은 여의부에 가서 백 낭자를 도와 군웅들을 모아 주시오." 임소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중옥은 손을 뻗어 그녀의 탐스런 둔부를 쓰다듬었다. 그가 그녀의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갑자기 임소군이 얼굴을 붉히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아이......" 하나 그녀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들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뭐라고? 이 녀석아! 방이 없다고?" 돌연 밖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엄청난 고함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성은 마치 꽹과리를 마구 치듯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그 음성이 귀에 익은 것임을 느꼈다. "전낭자 호파파예요, 동생!" 임소군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호파파가 이곳에 웬일일까요?" 석중옥은 그녀의 몸을 열심히 더듬다 말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석중옥은 혀를 차며 그녀의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누님! 그만 일어납시다. 밖에 나가 호파파를 만나야 되니......" 임소군은 곱게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석중옥은 그녀의 눈부신 나신을 다시 한 번 환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인간 세상의 요귀(妖鬼)와도 같은 마력(魔力)을 발하는 완벽한 몸매였다. 석중옥은 다시 심신이 황홀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자신의 백의가 침상 밖에 있는 것을 발견한 임소군은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갔다. 그녀가 살그머니 육체를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미의 극치였다. "......" 석중옥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만 애송이처럼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임소군은 문득 그의 시선을 느끼고 몸을 교태롭게 비틀었다. "뭘 보는 거예요?" 석중옥은 빙그레 웃으며 탄성을 발했다. "누님의 몸은 정말 아름답소." 임소군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하나 그녀는 여느 처녀들과는 달리 그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 녀의 예쁜 둔부가 살짝 호선(弧線)을 그렸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의(白衣) 를 입었다. 그녀의 몸이 옷으로 가려지자 석중옥은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나 이때, "이놈! 빨리 본 낭자가 머무를 방을 준비하지 못할까!" 호파파의 폭갈이 터지며 뒤이어 점원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미친 할망구가...... 케엑!" 석중옥과 임소군은 얼굴을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석중옥은 자신의 흑의를 입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과연 밖에는 호파파가 예의 알록달록한 채의(彩衣)를 입은 거구의 몸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사발 뚜껑만한 거대한 손에 점원이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고 있었 다. "케엑! 사...... 사람 살려......" 점원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외치며 바둥대고 있었다. 호파파는 입에서 침을 튀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놈! 이 빌어먹다 뒈질 점원 녀석아! 네놈이 감히 본 낭자를 우습게 여기고 방을 안 내주 는 모양인데...... 어디, 오늘 본 낭자가 단단히 맛을 보여 주마!" 그녀는 금시라도 점원을 팽개칠 듯 번쩍 쳐들었다. "아이고......" 점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그때, "하하...... 호파파! 그만 하시구려." 낭랑한 웃음 소리와 함께 석중옥의 모습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호파파는 눈을 번쩍 뜨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멀거니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에? 네...... 네가 살아 있었구나!" "하하...... 아니, 그럼 내가 죽은 줄 알았소?" 호파파는 뚱뚱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본 낭자는 황산의 장보고에서 탈출할 때 네가 쌍혈겁도 단사옥인가 뭔가 하는 녀 석에게 암습(暗襲)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용케도 무사했구나!" 석중옥은 그녀의 눈이 의외로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보기보다 제법이군. 그 당시에는 자신의 몸을 피하기에도 급급했을 텐데 그 장면을 보았다 니......'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운(運)이 좋았을 뿐이오. 한데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소?" 호파파는 입에서 침을 튀기며 나불거렸다. "본 낭자는 그 빌어먹을 장보고에서 제자 년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뭔가? 그래서 혹시 그년 이 이 근처에라도 있지 않나 해서 찾아 다니는 중일세." 이어 그녀는 석중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네 혹시 그년을 보지 못했나?" 석중옥은 그녀의 말버릇에 내심 어이가 없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보지 못했소." 그때 임소군이 옷을 단정하게 입고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호파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절세의 미녀가 석중옥이 있던 방에서 걸어나오자 눈을 번쩍 빛냈다. "호...... 이것 봐라! 이 새카만 놈아, 제법 여자 다루는 솜씨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녀는 무언가 감을 잡은 듯 석중옥을 의미 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때는 미녀 두 명을 끌어안고 있더니...... 오늘은 다른 여자와 한방에서......" 임소군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석중옥은 더 있다가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급히 대꾸했다. "호파파! 그런 게 아니오. 공교롭게도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 그래서 겸사겸사 같이 잤단 말이지?" 석중옥과 임소군은 그녀의 독설(毒舌)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으이구...... 저런 바람둥이를 내 제자 년은 무엇이 그리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군." 석중옥은 호파파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오." 석중옥은 호파파를 허겁지겁 방안으로 집어넣었다. "끌끌끌......" 호파파는 괴이쩍게 웃었다. "본 낭자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온 천하에 모두 불어 버리고 테니 그리들 알라구. 호호...... 그럼 어디, 호강 좀 해볼까?" * * * 한백의 장보도 사건으로 인해 술렁였던 강호가 한 가지 엄청난 파문(波紋)으로 인해 더 이 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워졌다. 한백의 장보도 사건이 남궁검문의 음모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금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火藥庫)에 난데없는 폭죽(爆竹)이 터진 것이나 다 를 바가 없었다. 남궁검문의 무서운 음모! 그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한백의 장보고를 열어 그곳을 죽음의 동부(洞府)로 개조했고, 혈 왕 위혼의 마공(魔功)을 모두 익혀 가공할 마(魔)의 집단으로 화했다는 소문은 전무림을 거 듭 경악시켰다. 게다가 강호무림에서 정상을 달리는 백여 명의 절정고수들이 한백의 장보고에 들어갔는데, 그들 중 살아서 나온 사람은 불과 이십여 명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천하는 더욱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음모에 무림 전체가 분노에 떨었고, 장보고에서 친지와 혈육(血肉)을 잃은 무림인들 이 남궁검문에 피의 복수를 선포했다. 근 백여 년 간 지속된 무림평화(武林平和)에 잠잠하니 활동을 하지 않던 전대(前代)의 기 인(奇人)들이 대거 움직이기 시작했고, 무림인들은 그 동안 녹슬었던 자신의 병기를 꺼내 다 시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한 인물이 너무도 갑자기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흑발! 허무한 눈빛에...... 녹슨 철검을 차고 있는 흑의서생(黑衣書生)! 그의 일수(一手)에 내로라 하는 강호의 거마(巨魔)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그의 일 검(一劍)에 혈왕 위혼이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마물, 지옥고루십팔천마가 도륙나 버렸으니...... 그가 아니었다면 어찌 남궁검문의 음모가 분쇄될 수 있었겠는가? 성질 급한 무림인들은 그를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손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무적(無敵)의 신검(神劍)이고, 그의 손은 하늘도 놀랄 위력 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강호무림에는 '무적신검경천수(無敵神劍驚天手)'라는 일곱 글자의 별호 가 우레와 같은 기세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무적신검경천수 석중옥! 혜성과 같이 강호무림에 나타나 온 천하를 경동(驚動)시키고 있는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 인가? 그리고 그는 대체 어디서 그토록 가공할 무공을 익히게 되었는가? 이것이 당금 무림의 최대 관심 거리였다. * * * 암흑(暗黑)! 마치 태초(太初)의 어둠인 듯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이었다. 꿈틀...... 한데 이토록 지독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연신 꿈틀대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기이한 물체...... 아아......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아니, 수만, 수십만 마리의 독물(毒物)들...... 독사(毒蛇)와 전갈, 지네, 독거미, 독개미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우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온 천하의 독물들은 모두 이곳에 모인 듯했다. 기이하도록 짙은 어둠 속에서 연신 꿈틀거리는 끔찍한 독물들...... 그 광경은 실로 보는 이로 하여금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게 하는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꿈틀거리는 수많은 독물들 사이에서 한 인물이 정좌(正坐)해 있었다. 짙은 어둠 탓에 인영의 모습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는 지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묵묵히 정좌해 있다는 것밖에...... 인영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독물들은 그의 다리와 팔, 어깨, 심지어는 머리카락과 겨드랑이 사이에까지 꿈틀거리며 마구 기어올라 그의 살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런데도 인영은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문득, 우우우우우...... 괴이한 음향과 함께 죽은 듯 앉아 있던 인영의 몸에서 먹물같이 시커먼 기류(氣流)가 뿜어 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후두둑! 두둑! 그의 몸에 새카맣게 붙어 있던 독물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놀랍게도, 인영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흑무(黑霧)에 닿는 순간 독물들의 몸이 모조리 녹아 버리는 것 이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우우우우웅...... 흑무의 농도가 한층 짙어짐과 동시에 그의 반경 오 장 이내의 모든 독물들이 한줌의 독수 (毒水)로 화해 버렸다. 흑무는 점점 짙어지고 그에 따라 독물들이 녹는 범위도 점점 넓어졌 다. 마침내 흑무가 십 장 밖에 있는 독물들까지 핏물로 만들 즈음, 번- 쩍! 앉아 있던 인영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한데, 아아...... 이럴 수도 있을까? 놀랍게도 인영의 눈빛은 완전한 자색(紫色)이 아닌가! 소름이 오싹 끼치는 자색(紫色)의 안광(眼光)! 그것은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괴이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자안괴인(紫眼怪人)의 입에서 듣기만 해도 전율이 일어나는 괴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크크...... 이제 멀지 않았다......" 그 음성...... 누구도 그것을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지 옥의 염라귀(閻羅鬼)조차 귀를 틀어막고 도망칠 만큼 사악한 음성이었던 것이다. "크크...... 놈은 설마 내가 다시 살아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괴인의 자안이 공포스런 빛을 뿌리고 있었다. "크흐흐......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나 이제 얼마 후면 나는 전설의 독왕지왕(毒王之王)이 된다......" 아아......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이냐! 독왕지왕(毒王之王)! 고금제일의 마종(魔宗), 혈왕 위혼의 삼대사법 중 서열 이위의 절대지체(絶對至體)가 아닌 가!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독인(毒人)의 마지막 단계. 그것은 혈왕 위혼조차도 이루지 못한 절대의 경지였다. 한데 이 암흑 속의 자안괴인은 그것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가! "크흐흐...... 식물 인간으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독인으로 무적(無敵)이 되리라는 나의 판 단은 옳았다...... 하나......" 괴인의 자안이 어둠 속에서 무섭게 번뜩였다. "놈...... 그놈! 나를 폐인(廢人)으로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내 꿈을 모두 빼앗아 간 놈!" 괴인의 몸이 격정으로 부르르 떨렸다. "석...... 중...... 옥! 너를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 괴이한 일이었다. 괴인이 대체 누구이기에 그의 입에서 석중옥이란 이름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석중옥...... 기다려라! 머지않아 내가 간다......" 괴인의 음성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내가...... 나 독왕지왕 당욱이......!" 오오...... 당욱! 혈전공자 당욱! 괴인은 다름 아닌 토지묘에서 석중옥에 의해 빈사지경에 이른 당욱이었던 것이다. "크하하하하......" 짙은 어둠 속에서 자안괴인 당욱의 미친 듯한 웃음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천하를 온통 떨게 하려는 듯...... * * * 하남성(河南省) 복우산(伏牛山)! 복우산은 하남성의 숭현(崇縣)에서 서남(西南)으로 뻗어 있는 장쾌한 산이었다. 그 길이가 무려 일천(一千) 리(里)에 달한다고 하며, 어찌나 산세가 높고 가파른지 하늘도 탄식한다고 하여 천식산(天息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수백의 첨봉(尖峯)을 자랑하는 웅장한 산세...... 끊임없이 이어진 능선과 계곡...... 가히 중원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산이었다. 복우산의 가파른 산중의 한 능선. 쉬이이잉...... 한차례 세찬 산바람이 능선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한데 바람에 실려 왔는가? 한 인물이 소리없이 능선 위에 나타났다. 허름한 흑의, 담담한 눈빛, 흐트러진 흑발...... 허리에 녹슨 철검을 찬 흑의서생은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는 하구집에서 임소군과 호파파를 여의부로 보낸 후 이곳 복우산으로 온 것이다. 한동안 석중옥은 능선 위에 우뚝 선 채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복우산의 산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짙푸른 수림이 아득히 펼쳐진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란 누려 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못 할 만큼 호쾌(豪快) 무비(無比)한 것이었다. 한데 석중옥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 복우산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이 복우산의 성인봉(聖人峰)에 그의 둘째 사형이 기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사형은 십 년 전, 그의 삼사형인 단천거사 위지송의 천심장이 의문의 혈겁을 당한 후, 성인봉 자락에 금마별부(禁魔別府)를 세우고 그곳에 은거하여 두 번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석중옥은 이사형이 이곳에 칩거한 이유가 혹시 천심장의 혈겁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나 하 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휘-잉! 산바람이 그의 흑의를 한차례 펄럭거리며 지나갔다. 석중옥은 불어오는 산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사형의 은거와 셋째 사형의 혈겁이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이사형이 어떤 식 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걸 밝혀 내면 이번 일에 대한 가닥도 잡을 수 있겠 지......" 그의 음성은 비록 담담했으나, 그 속에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어 왠지 모르게 비장해 보 였다. 그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웅-! 돌연 그의 허리에 매달린 녹슨 철검이 기이한 울림을 토해 냈다. 다음 순간, 쐐애액-! 난데없이 모골이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소리도 없이 그의 등뒤에서 쏘아져 오는 것이 아 닌가! "누구냐!"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토록 가까이 접근한 인물이 있음에 크게 놀라 벼락같이 외치며 번개처럼 몸을 하늘로 솟구쳤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허공에 완전히 떠오르기도 전, "흐흐...... 죽어라!" 음산한 음성과 함께 그의 머리 위가 모조리 찬란한 검광(劍光)으로 뒤덮였다. 그 검광은 추 호도 상대를 살려 두지 않으려는 듯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슈파파파팍! 석중옥은 대경 실색하여 허공을 박차고 옆으로 날았다. 그것은 인간이 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경공(輕功)이었다. 그러나, "폭풍취기(暴風聚氣)!" 소름 끼치는 음성과 함께, 꽈르르르-! 가공할 광풍(狂風)이 노도와 같이 밀려왔다. 석중옥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는 평생 이와 같이 엄청난 광풍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문득 그의 눈으로 천지(天地)를 뒤엎을 듯, 반경 수십 장을 온통 폭풍으로 휘감으며 밀 려오는 하나의 거대한 깃발이 들어왔다. "버...... 번천폭풍기(飜天暴風旗)!" 석중옥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아아......! 우내육대중보의 하나인 번천폭풍기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한번 펼치면 천지가 뒤집히리라! 번천폭풍기의 가공할 공세는 천하의 석중옥조차도 더 이상 피해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석중옥은 사문(師門)의 절학인 대천강신공(大天 神功)을 펼쳐 냈다. 꽈꽈꽝-! "윽!" 벼락치는 폭음과 함께 창졸지간에 겨우 칠(七) 성(成)의 진기를 사용한 석중옥은 답답한 신 음을 뱉어 냈다. 번천폭풍기는 그의 칠성공력(七成功力)으로는 받아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또 온다!' 석중옥은 그들이 누군지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가 멈칫하는 순간에 조금 전 제일 먼저 석중옥을 등뒤에서 덮쳤던 자의 공세가 또 그를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석중옥은 번개처럼 뒤로 돌면서 파옥신권(破玉神拳)을 질러 냈다. 쐐애애애액-! 꽈꽝! "으음!" 석중옥은 기혈(氣血)이 진동됨을 느꼈다. 암습자들의 공격이 너무도 빨라서 도저히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충격을 이용해 번개같이 잠형산보(潛形散步)를 전개했다. 피융-! 그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도 않게 날아갔다. 그는 이 순간만 넘기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어 떠한 경우라도, 해볼 자신이 있었다. 하나 상황은 그에게 결코 그런 여유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쿠쿠쿠...... 기다리고 있었다." 혼백(魂魄)을 뽑아 놓을 듯한 굉량한 웃음이 들리는 순간, 석중옥은 한 가닥 가공할 기운이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날고 있었기 때문에 도 저히 그 기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급히 대천강신공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는 환영각(幻影脚)을 전개해 날아오는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리며 발길질을 해댔다. 하나 가공할 기운은 어느새 가슴에 닿고 말았다. 콰쾅! "음!" 석중옥은 가슴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입가로 가는 선 혈이 내비쳤다. 하지만 그 순간에 상대도 석중옥의 환영각에 격퇴당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나 공포의 암습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석중옥!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사방 십여 장이 다시 폭풍에 휩싸인 듯 진공 상태로 변하며 석중옥을 집어삼켰다. 번천폭풍기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처음과 두 번째의 공격도 무시무시했지만, 그것 들에 이어지는 번천폭풍기의 공세는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럽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 이 없는 것이었다. 처음의 두 공세도 그의 몸을 번천폭풍기의 공세 속에 빠뜨리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 었다. '정말 지독하군......' 석중옥은 내심 이를 갈며 잠형산보로 그 속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하나, 고오오오...... 번천폭풍기로 휘둘러진 장내는 진공 상태로 변해 괴이한 흡력(吸力)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공세 속에 일단 빠져 들면 설사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견디지 못할 게 뻔했다. 석중옥은 다급히 단혈철각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그의 두 발이 흡사 쇠망치로 변한 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폭풍과도 같은 강기( 氣)의 막 (幕)을 찢어 갔다. 과연 단혈철각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공할 번천폭풍기의 공세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나 석 중옥은 내부가 진동됨은 면할 수가 없었다. "으흐흐......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하지만 오늘로 네놈도 끝장이다!" 음산한 외침이 들리는 순간, 석중옥은 다시 차가운 검광이 자신을 덮침을 느껴야만 했다. 도 대체가 전혀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석중옥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다만 그들이 모두 세 명이며, 그 중 한 명은 우내육대 중보의 하나인 번천폭풍기를 휘두르고, 다른 한 명은 검을 쓴다는 것밖에는...... 석중옥의 무공으로도 이런 지경이니 습격해 온 자들의 무공이 어떤지는 그야말로 불문가지 가 아닌가! "크크크...... 나도 있다!"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의 등뒤로 뼛골이 시릴 듯한 질풍 같은 경력(勁力)이 몰아쳐 왔다. < 제3권 끝 > 제4권 차례 36 장 연환십절(連環十絶) 37 장 금마별부(禁魔別府) 38 장 무림비사(武林秘史) 39 장 천하구도(天下九刀) 40 장 괴인등장(怪人登場) 41 장 무인지로(武人之路) 42 장 여인유정(女人有情) 43 장 양수집병(兩手執餠) 44 장 천비령주(天秘令主) 45 장 독왕지왕(毒王之王) 46 장 경천동지(驚天動地) 47 장 급전직하(急轉直下) 48 장 고독천리(孤獨千里) 제 36 장 연환십절(連環十絶) 석중옥의 몸에서 찬란한 금광(金光)이 빛나기 시작했다. 절세무적의 금광대능력을 펼친 것이 다. 동시에 그는 양손을 좌우로 뻗었다. 쐐애애액-! 그의 우수에서는 눈부신 백색 섬광이 뻗어 나갔고, 좌수에서는 시퍼런 빛이 폭사해 나갔다. 오른손으로는 낙화섬수를, 왼손으로는 쇄옥수를 전개한 것이다. 콰르르르-! 우르르릉...... 꾸아앙! 벼락치는 폭음과 함께 주위의 바윗덩어리가 미친 듯이 날리고 무서운 강풍이 소용돌이쳤다. "으음......" 석중옥은 머리가 완전히 풀어헤쳐진 채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물러날 때마다 그의 두 발은 바위를 뚫고 깊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지금 그가 당한 압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석중옥으로 서는 무림출도(武林出道) 이래 처음 당해 보는 위기이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의 신색은 차갑고도 당당했다. 이제 그에게서 당황한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전의 격돌로 석중옥은 피해를 입었지만, 암습했던 두 인물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몸을 주춤거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톱니바퀴 같던 그들의 연환진(連環陣)에 미세한 틈이 생겼다. 그것은 비록 숨 한 번 내쉴 정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석중옥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콰콰콰...... 바로 뒤이어 번천폭풍기의 공세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아쳐 왔으나, 이미 석중옥의 손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자루를 잡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곤쌍단(乾坤雙斷)!" 그의 입에서 차가운 폭갈이 터짐과 동시에, 쐐액! 주위를 온통 휘감은 폭풍 속을 뚫고 한 줄기 유성(流星)과도 같은 검광이 번뜩거렸다. 드디 어 석중옥이 출검(出劍)한 것이다. 찌이이-익! 마치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번천지복할 폭풍이 반(半)으로 쪼개져 나 갔다. "허- 헉!" 그 폭풍 속에서 경악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려 왔다. 그리고...... 폭풍이 씻은듯이 가셨다. 석중옥의 오른쪽에는 우람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백 살은 넘은 듯한데, 두 눈은 물론 머리 끝까지 붉은 기운으로 물들어 있어 소름 끼치는 형상이었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고, 가슴은 쩍 갈라져 갈비뼈까지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강풍(强風)에 홍포 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몹시도 위맹스 러워 보였다. 그렇다. 오른손에 무려 일 장이나 되는 거대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홍포노인은 바로 건곤일마 우문 양이었다. 석중옥의 뒤쪽에 서 있는 자는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가득한 거구의 인물, 바로 천패 섭붕 이었다. 그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석중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잇단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을 석중옥. 그가 그 몸으로 이들과 맞서 단 일(一) 검(劍)에 절대 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평수(平手)를 이룬 것이다. 하나 세 번째 암습자는 한결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파파파파파...... 그들의 격돌로 인해 생긴 강기의 소용돌이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무 서운 검세(劍勢)가 석중옥에게로 쏟아졌다. 사방이 모조리 검광 속에 파묻히고 태양마저도 빛을 잃는 듯했다. "지살 전쾌......" 석중옥이 입 속으로 냉담히 중얼거렸다. 세 번째 암습자는 바로 지살 전쾌였다. 전쾌는 석중옥이 잠시 손을 멈춘 순간을 놓치지 않 고 지체없이 덮쳐 온 것이다. 석중옥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땅을 박차며 번개같이 반 바퀴 돌았다. 동시에, "삼절추혼(三絶追魂)!" 쐐애애-액! 연환십절(連環十絶)의 무서운 검광이 전쾌의 검세를 단숨에 씻으며 쏟아져 나갔다. 그의 동 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침착하여 그가 이미 준비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흡!" 전쾌는 조금 전에 건곤일마 우문양이 석중옥에게 당한 것을 직접 본 터라 연환십절의 제삼 절(第三絶)인 삼절추혼의 무서운 기세를 보자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그 순간 삼절추혼의 그 무서운 기세가 씻은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석중옥의 신형은 수많은 환영을 일으키며 전쾌의 공세에서 벗어났다. "아차!" 전쾌는 자신이 석중옥의 허초(虛招)에 속았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갈았다. "어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건곤일마 우문양과 천패 섭붕이 음산히 외치며 날아들었다. 와르르르릉...... 콰아아아앙...... 건곤일마의 번천폭풍기가 다시 가공할 굉음을 토하며 엄청난 광풍을 일으켰다. 그 위세는 정녕 파천황(破天荒), 바로 그것이었다. 더구나, 쐐애-액! 섭붕의 천황마권(天荒魔拳)이 섬뜩한 묵빛을 띠며 쏘아 오고 있었으니...... 그들의 공세는 순식간에 이십여 장 이내를 동장철벽(銅墻鐵壁)과 같이 뒤덮었다. 그들은 능히 수십 장 이내는 초토로 만들 능력이 있는 초강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연환 공세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다음 순간, "이...... 이럴 수가!" "아-앗!" 경악과 불신이 가득한 외침이 터지며 두 사람은 그대로 손을 멈추고 말았다. 석중옥의 신형이 허공에서 괴이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그들의 공세 밖으로 빠 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석중옥을 쳐다보았다. 하나 그들은 이내 안광을 번뜩이며 번개같 이 석중옥을 포위했다. 석중옥의 모습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고, 입가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 고 피가 묻어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서 그런 낭패한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담담한 가운데 보이지 않 는 위압감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지살 전쾌는 석중옥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후후후......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하나 오늘은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싸늘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천천히 좌수(左手)를 늘어뜨려 철검(鐵劍)으로 가져 갔다. "당신들은 내가 이곳을 지나리란 것을 어떻게 알았소?" "흐흐...... 그것이 궁금하냐?" 전쾌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우리의 이목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다. 우리는 이미 네놈이 장강(長江)의 지류(支 流)를 이용하여 군웅들을 탈출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리고 네놈이 사형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지나리라는 것도......" "......!" 석중옥의 무심한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하는 일인데......' 문득 그의 뇌리로 장보고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한 향수의 여인이 그에게 암습을 가했지 않았는가? 그는 아 직도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군. 그 당시 장보고를 빠져 나온 군웅들 중에는 아직도 이들의 첩자가 끼여 있다. 그것 도 여자가......' 석중옥은 자신의 녹슨 철검을 어루만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암습은 치밀했소. 당신들은 분명히 나를 죽일 수 있었소! 하나......" 석중옥의 눈에 서서히 가공할 신광(神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회는 이미 지나갔소." 건곤일마 우문양이 음산히 외쳤다. "네가 지금 그 몸으로 우리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석중옥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이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기회를 놓친 것은 당신들이오." "뭣이......?" "번천폭풍기의 위력에 천패와 지살의 합공(合攻)...... 매우 훌륭했소. 하나 이제 내가 검(劍)을 손에 잡은 이상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 석중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나의 검은 무척 무섭소!" 석중옥을 포위한 세 사람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들의 뇌리에 조금 전에 잠깐 겪어 보았던 석중옥의 그 가공할 검법(劍法)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 연환십절은 아무도 막을 수 없소." 석중옥이 늠름하게 외쳤다. 녹슨 철검의 검자루가 석중옥의 손에 잡혀졌다. 단숨에 태산이라도 잘라 내고 뒤엎어 버릴 듯한 가공할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들끓어올랐다. "으......!" 세 사람은 자신들이 석중옥의 무형지기(無形之氣)에 위축됨을 느끼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미친놈! 죽음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큰소리만 치는구나!" 건곤일마 우문양이 그러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는 듯 코웃음쳤다. 석중옥이 싱긋 웃었다. "당신들 셋으로는 어림없소." 이 얼마나 상대를 무시하는 말인가! 그들이 이제껏 언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 보았겠는가? "으......" 세 사람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들 중 성질이 가장 폭급한 천패 섭붕의 눈에서 무서운 살염이 타올랐다. "망할 자식! 과연 네놈의 무공이 그토록 고강한지 한번 보자!"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주먹을 앞으로 쭉 뻗었다. 꽈르르릉-! 이미 백 년 전부터 마도제일권법(魔道第一拳法)으로 불린 천황마권이 시커먼 묵광(墨光)을 토해 내며 번개같이 쏘아져 왔다. 석중옥은 태연히 몸을 돌려 그것을 피해 냈다. "당신 정도로는 안 된다니까." "건방진 놈!" 분노한 음성과 함께 지살 전쾌가 덮쳐 왔다. 슈파파파파팍! 차가운 검광을 뿌리며 그의 수중에 들려진 혈검이 주위를 질풍 노도와 같이 휩쓸었다. 그의 최대절기인 절육참마검(截肉斬魔劍)이었다. "당신이 덤벼도 마찬가지요." 석중옥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했다. "네놈의 주둥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보겠다!" 건곤일마 우문양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콰콰콰콰콰- 꽈르르르르르릉! 엄청난 광풍이 하늘을 뒤덮으며 일어났다. 번천폭풍기의 수호절학(守護絶學)인 대번천폭풍사 결(大飜天暴風四訣)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가공할 위세는 정녕 인간이 펼치는 무공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 세 사람 중 건곤일마의 무공이 가장 강했다. 그들의 합공은 정녕 경천동지할 위세가 있었다. 하나 석중옥의 안색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세 절정고수들의 합공을 보며 느릿느릿 철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연환십절의 무서움을 보여 주겠다!" 석중옥이 차가운 음성을 뱉어 내는 순간, 차...... 아...... 아...... 앙! 용(龍)의 울부짖음 같은 검명(劍鳴)이 일어나며 천지가 검광으로 가득 찼다. 눈도 제대로 못 뜰 찬란한 검광이었다. "연환십절 중의 제사절(第四絶), 사상잔섬(四象殘殲)!" 휘이이-잉! 검광이 더욱 강렬히 일어나며 시퍼런 검기(劍氣)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위세의 가공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하겠는가! 파파파팍! 슈슈슈슈슉! "으흑!" "아아...... 앗!" "우...... 우......" 가공할 맞부딪침이 일어나는 순간, 괴이한 음향과 함께 세 마디 신음이 거의 동시에 터졌다. 쏴아아...... 무서운 강기의 여파가 일어나는 가운데 인영들이 흩어졌다. 석중옥의 검은 단 일 초에 삼십육방(三十六方)을 베어 버리고 있었다. 그 서른여섯 번의 변 화는 너무도 쾌속하고 정확해서 우문양 같은 초절정고수도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연환십절의 제사절, 사상잔섬의 위력이었다. 천패 섭붕! 그의 온몸은 피 칠을 한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특히 그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른손 은 뼈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깊이 베어져 있었다. 지살 전쾌!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다. 목에서 피가 흘러 가슴을 적시는 것이 보였다. 찰나지간으로 목이 잘리는 것을 면한 것이다. 어찌 식은땀이 흐르지 않겠는가? 그의 얼굴은 납덩이같이 굳어져 있었고, 수중에 들린 혈검 (血劍)은 어느 사이에 두 동강나 있었다. 건곤일마 우문양의 사정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시뻘건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번천폭풍기를 잡고 있는 오른손은 손가락이 두 개 없어졌으며, 일그러진 입가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공손철검(孔孫鐵劍)......"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석중옥. 그는 그들의 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좀더 창백했다. 연환십절은 최강(最强)의 검식(劒式)이므로 극도의 내력 소모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입가에서는 또다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신색은 담담했고 일면 무심해 보이기까 지 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보라! 그의 손에 거무튀튀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철검이 쥐여져 있지 않은가! 길이는 대략 석 자 가량.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으나, 왠지 모르게 그 철검에서는 기이한 신기(神氣)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고금제일(古今第一)이라는 우내육대중보에서도 서열 일위(一位)에 꼽히는 공 손철검이었던 것이다. 한번 펼치면 만마(萬魔)가 굴복한다는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의 검(劍), 공손철검! 그것이 드디어 검집에서 벗어나 그 웅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손철검을 비껴 든 석중옥의 모습에서는 무서운 기세가 뻗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가히 검신(劍神), 바로 그것이었다. "으으...... 서...... 설마...... 공손철검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건곤일마 우문양이 신음했다. 그는 자신의 번천폭풍기강(飜天暴風旗 )이 공손철검에서 뿜어 나오는 검기에 여지없이 갈라짐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은 필승(必勝)의 자신이 있었다. 그들 세 명이 펼치는 죽음의 진(陣)에 걸리면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너무도 판이한 것이었다. '공손철검은 과연 천하제일신검(天下第一神劍)이다. 번천폭풍기를 사용했는데도 내 몸은 검 기에 허리가 두 동강날 뻔하고 손가락 두 개가 희생됐다.' 건곤일마는 가슴속이 심하게 떨림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석중옥과 같은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룬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 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저놈의 나이로 보아 오늘 없애지 못한다면 영원히 우리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에서 혈광(血光)이 무섭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천패 섭붕과 지살 전쾌의 눈에서도 그런 빛이 오갔다. "만약 우리가 이번 일을 실패한다면 지존(至尊)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전쾌가 차갑게 외쳤다. 지존이란 이름이 나오자 건곤일마와 섭붕의 눈에 한 가닥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지존? 지존이 누구기에 저들과 같은 고수가 단지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한단 말인가?' 석중옥이 의아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절육단혼(截肉斷魂)!" 전쾌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그의 몸이 희뿌옇게 빛나며 석중옥에게 덮쳐 갔다. "천황혈세(天荒血洗)!" 섭붕이 시커먼 흑빛 덩어리가 되어 날았다. 사방이 온통 묵빛이 되었다. 그리고, "번천태양폭풍참(飜天太陽暴風斬)!" 건곤일마가 번천폭풍기를 휘두르며 날아올랐다. 꽈르르르르-! 쇳덩어리라도 녹일 듯한 가공할 열기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미친 듯한 광풍이 반경 십 장 이내를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만들어 버렸다. 합공이 아니라 완벽히 조화된 가공할 합격이었다. 석중옥은 세 사람의 공격이 절묘한 배합을 이루어 그 위력이 배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다음 순간, "제오절(第五絶), 오행전류(五行電流)!" 굉량한 외침과 함께 공손철검이 한 무리의 찬란한 검광으로 변해 그의 손을 벗어난 듯했다. 쏴아아-앙! 한소리 굉음이 터지더니 공손철검이 한 개가 아닌 두 개로, 두 개가 다시 네 개로...... 마치 부챗살과 같이 쫙 펴지면서 무섭게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차차차차차-! 예리 무비한 검광이 무섭게 뻗어 나갔다. 파파파파...... 그 무서움을 어찌 형용하겠는가! 묵광이 산산이 흩어지고 섭붕의 천황마권이 태풍을 만난 듯 스러졌다. 달빛이 태양을 만나 빛을 잃는 듯했다. "으-악!" 천패 섭붕의 팔 하나가 어깨에서부터 잘려져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공손철검은 부챗살과 같이 갈라져 무서운 광환(光環)을 형성한 채 석중옥의 주위 십여 장을 뒤덮고 그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그 속도는 정녕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것이다. "아악!" 전쾌가 혼비백산하여 유령과 같이 날아올랐다. 핏줄이 불거졌다. 검기가 그의 머리털을 왕창 자르고 지나간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석중옥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섭붕과 지살을 공격하는 동안 건곤일마 우문양의 번천폭풍기에 공격할 틈을 준 것이다. "우야...... 얍......" 건곤일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번천폭풍기의 모든 위력을 쏟아 덮쳤다. "제육절(第六絶), 광만육합(光滿六合)!" 순간, 한소리 낭랑한 외침과 함께, 위-잉-! 꽈르르르릉! 꽈꽈꽈꽈! 폭포수와 같은 검광이 찬연하게 피어올랐다. "으아악!" 그 검광에 닿는 순간 광풍 같은 열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건곤일마의 가슴이 뼈가 보이도록 갈라져서 뭉개졌다. 더구나 그의 좌수는 거의 떨어져 나갈 듯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석중옥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거듭되는 격돌로 적지 않은 충격을 입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쉴 여가는 없었다. 어느 사이에 머리를 산발한 전쾌가 미친 듯이 그의 코앞으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 다. 차차차차...... 공손철검이 하늘에서 덮쳐 오는 전쾌를 향해 부챗살같이 쏟아져 갔다. "제칠절(第七絶), 칠성회두(七星廻頭)!" 파-팟! 일순, 까깡! "크아-악!" 전쾌의 혈검이 산산이 박살나며 그의 몸에서 혈화(血花)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의 양쪽 팔 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것을 본 섭붕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 "네...... 네놈이 전쾌를 죽이다니......" 갑자기, 우-웅! 그의 거구가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는 묵빛 기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놈! 없애 버리겠다......!" 섭붕의 이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혈선(血線)의 붉은색이 더욱 진해져 갔다. 그것은 실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석중옥은 그의 끔찍한 모습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수라폭멸공(阿修羅暴滅功)......!"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수라폭멸공(阿修羅暴滅功)! 혈왕 위혼의 가공할 마공(魔功). 이것은 전신을 폭발시켜 상대방과 동귀어진(同歸於盡)하는 극악(極惡)한 마공(魔功)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피하게...... 그가 아수라폭멸공으로 동패구사(同敗具死)하려 하네!"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터지는 동시에 한 가닥 항거할 수 없는 부드러운 강기가 날아왔다. 그것은 여지없이 섭붕의 단전에 격중되었다. 파악! "크악!" 섭붕의 칠공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며 그의 몸이 그대로 녹아 내렸다. 아수라폭 멸공의 가공할 기운이 미처 폭발하지 못하고 그의 체내로 역류(逆流)해 들어간 것이다. 순식간에 섭붕의 거구는 한줌의 핏물로 화해 버렸다. 동시에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이제 사십을 넘은 듯한 청의문사(靑衣文士)였다. 칠흑 같은 머리털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검은 수염을 배까지 드리운 청수한 인상이었다. 물처럼 고요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였다. 초탈한 기품과 고고한 기도가 배어 있는 청의 문사였다. 특히 맑고 깨끗한 두 눈에 서려 있는 현기(玄機)는 일말의 신비감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환영처럼 나타나며 보여 준 일수(一手)는 그가 최고의 고수임을 말해 주고 있 었다. "다...... 당신은......?" 건곤일마 우문양은 그를 보더니 안색이 대변했다. 이어, 휙! 그는 홍포 자락을 휘날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가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천하의 건곤일마가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이다. 청의문사는 신비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건곤일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순간 석중옥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청의문사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가 당금 강호의 제일고수(第一高手)로 떠오른 무적신검경천수 석중옥인 모양이구려. 그 래, 크게 다친 곳은 없으신가?" 석중옥. 황산의 장보고 사건 이후 그는 이미 당금 강호의 천하제일고수로 부각되고 있었다. 무림인 들은 그의 가공할 무예와 신비한 내력을 흠모해 그를 '무적신검경천수'라는 거창한 이름으 로 부르고 있는 터였다. 석중옥은 청의문사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자 기광을 번뜩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귀하는......?" "나는 손중양(孫重陽)이란 사람일세." "손중양? 그럼 귀하가 절세신유(絶世神儒)......?" 석중옥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절세신유(絶世神儒) 손중양(孫重陽)! 그는 바로 칠대명인 중의 한 명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심기(心機), 기관(機關), 토목(土木), 건축(建築), 매복지학(埋伏之學)의 천하제일인이었다. 하나 좀처럼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행적이 신비스러워,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사 람이 없었다. "이제 보니 천하제일의 지자(智者)이시라는 손 대협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逑?..... 천하제일이라니, 당치도 않소. 오히려 그보다 나는 이번에 황산(黃山)에서 보여 준 귀 하의 신위(神威)를 듣고 깊이 감복했소이다." 손중양은 악의없이 웃었다. "나는 우연히 이곳 복우산을 유람하던 중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격투 소리를 듣고 달려오게 된 것이오. 한데 설마 건곤일마와 천패, 지살이 귀하를 합공하고 있을 줄이야......!" "......!"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천패 섭붕과 지살 전쾌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혈투(血鬪)는 그야말로 끔찍했던 것이다. 하나 그로 인해 당금 무림에서 최대 거 파 중 하나인 천지회의 두 회주가 몰살되고 말았으니...... 문득 석중옥은 손중양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해 보였다. "오늘 도와 주신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불초는 볼일이 있어 이곳에 왔는지라 이 만 실례해야겠습니다." 손중양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치기도 전, 스-윽! 석중옥의 신형은 한 마리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 손중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말 가공할 신법이군. 저런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단번에 수십 장을 날아가다니......" 손중양은 석중옥의 놀라운 경공을 보고 감탄을 발했다. 문득 석중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심유한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래, 그것도 좋겠군......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할 일이니......" 그의 입에서 알지 못할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중양. 불어오는 산풍에 청의를 펄럭이고 있는 그의 몸에서는 왠지 모르게 신비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과연 그의 정체는......? 제 37 장 금마별부(禁魔別府) 성인봉(聖人峰). 성인봉은 복우산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험난한 복우산에서도 가장 험준하기로 유명한 절 봉이었다. 사시사철 신비롭고도 괴이로운 운무(雲霧)가 항상 굼실거리고 있어,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구름 위에 봉우리가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짙은 운무에 둘러싸인 성인봉의 중턱에는 하나의 계곡이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도 없는 이 계곡은 마치 도끼로 찍어 놓은 듯, 기암절벽 사이에 좁다랗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 문에 모르는 사람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천험(天險)의 절지(絶地)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듯한 계곡의 입구를 지나면 사정은 판이해진다. 계곡이 급속도로 넓어지며 곧 이어 널따란 분지(盆地)가 눈앞에 가득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 분지의 반경은 거의 수백 장에 달했으며, 분지의 중앙에는 거대한 장원(莊院)이 한 마리 잠룡(潛龍)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누구도 계곡 안에 이런 별천지(別天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할 것이다. 이 장원이 바로 전대(前代)의 최절정고수가 은거해 있는 금마별부(禁魔別府)인 것이다. 금마별부 안에는 수백 채의 크고 작은 누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금마별부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괴물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무언지 모를 무거운 괴기로움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삼경(三更). 어두운 한구석으로 창백한 달빛이 비껴드는 금마별부의 모습은 섬뜩한 신비가 느껴졌다. 금마별부의 중앙에 있는, 수백 년은 묵었음 직한 아름드리 떡갈나무 위. 무성한 가지 속에 한 인영이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석중옥이었다. 석중옥은 나뭇가지에 몸을 기댄 채 금마별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고수들이 철저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모두 황의(黃衣)를 입은 인 물들이었는데, 어둠 속을 꿰뚫어보는 그들의 눈빛은 실로 범상치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사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이토록 삼엄한 경비만 있다니......' 석중옥은 금마별부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용담호혈(龍潭虎穴)이 되어 있자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사부님께 듣기로는, 사형은 비록 성질이 편협하고 잔인한 면이 있지만 번잡한 것을 싫어하 고 고독(孤獨)을 즐긴다던데 이곳에 웬 고수들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더구나 사형이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으니......' 금마별부의 건축은 구궁연환금쇄진(九宮連環禁鎖陣)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지리 (地理)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밤새 제자리만 헤매다가 지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석중옥이 있는 떡갈나무에서는 금마별부 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석중옥의 시선은 구궁연환금쇄진의 묘한 진세(陣勢)를 따라 금마별부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문득, 금마별부의 곳곳을 누비던 그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고정되었다. 떡갈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오십 장쯤 떨어진 곳에 거대한 삼층누각(三層樓閣)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닌가? 누각의 높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 층의 높이만도 무려 삼 장에 달할 뿐 아니라, 누각 전체 는 거의 십 장에 육박하는 것이어서 얼른 보기에는 마치 거대한 철탑(鐵塔)을 연상케 했다. 기이하게도 누각에는 창문이 전혀 없어 신비스러워 보이기조차 했다. 짙은 어둠에 잠긴 삼층누각. 그곳을 보는 석중옥의 눈은 유난히 번쩍거리고 있었다. '저곳이 수상하군.'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는데 그의 신형은 어두운 허공을 허깨비처럼 날아 누각 가까이로 떨어 져 내렸다. 그 신법이 어찌나 표홀했던지 단 두 번의 도약으로 사십여 장을 날아왔는데도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막 누각의 정면에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가던 석중옥의 몸이 갑자기 빙글 돌며 아래로 뚝 떨 어져 내렸다. 누각 주변에 매복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몸을 숨긴 것이다. 그의 동작이 조금만 느렸거나 지체되었더라도 영락없이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누각 주변의 매복은 삼엄했다. 누각 주위는 언뜻 보기에는 전혀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은커녕 그 그림자조 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석중옥은 사방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 옴을 알 수 있었다. '지독하군. 이 부근에만도 최소한 열두 명의 고수들이 잠복해 있다. 어쩌면 내 짐작이 맞을 지도......' 나무 위에서, 바위 뒤에서, 심지어는 땅속에서도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숨소 리는 그야말로 미약해서 석중옥이 초인적인 청력(聽力)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석중옥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몸을 숨긴 채 눈앞의 매복을 어떻게 뚫고 누각으로 접근할지 생 각에 잠겼다. 매복을 돌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종적을 들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숨어 있는 자들의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로 보아 하나같이 굉장한 무공을 지닌 실력자들이 분명했다. 그런 고수들이 치밀한 천라지망(天羅地網)을 치고 있으니,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돌파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석중옥이라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때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짙은 흑의를 입고 키가 삐쭉하게 큰 텁석부리 대한이었다. 텁석부리 대한은 이곳의 지 리에 익숙한 듯 빠르고 민첩한 걸음으로 누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텁석부리 대한이 누각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휘잉! 그의 귓전으로 갑자기 나직한 휘파람 소리 같은 음향이 들려 왔다. 텁석부리 대한은 움찔 놀라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뒤에는 짙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텁석부리 대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나 그는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 하나의 인영이 자 신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것을...... 텁석부리 대한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누각 앞으로 다가갔다. 주위에 매복해 있는 고수들이 그를 보았을 텐데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누각에 자주 출입하는 신분임이 분명했다. 누각에는 아무런 현판도 걸려 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창문도 없이 온통 거무튀 튀한 색으로 칠해진 십여 장의 삼층누각은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육중하고 괴기스러워 보였다. 텁석부리 대한은 누각의 앞으로 다가가서 굳게 닫힌 문고리를 몇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빠르게 세 번 두드리는 모습이 몹시 능숙해 보였다. 잠시 후, 덜컹! 아무런 표식도 없던 누각의 문 한쪽에 갑자기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속에서 하나의 예리한 눈이 텁석부리 대한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黃) 형(兄)이오?" 텁석부리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요, 장(張) 형(兄)." 구멍 속의 눈은 텁석부리 대한의 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탁! 작은 구멍이 다시 닫히고 이어 그 옆에서 사람 하나가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스릉! 텁석부리 대한은 그 문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을 보았는지 텁석부리 대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아......" 그의 입에서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스으으...... 그는 지금 달빛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그림자가 삐끔하게 열린 누각의 문안으로 길게 드리 워져 있었다. 한데 지금 그의 그림자 중 일부분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텁석부리 대 한은 입을 딱 벌린 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경(奇驚)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 고 있었다. 스윽! 그의 그림자에서 하나의 검은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텁석부리 대한은 그 검은 인영의 손이 자신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들 때까지도 '이 럴 수가...... 이럴 수가......'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팟! 검은 인영의 손은 어찌나 빨랐는지 그가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찰나간에 텁석부리 대한은 가슴팍의 오개대혈(五個大穴)이 모두 제압당해 그 자리에 석상(石像)처럼 서버렸다.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인영은 머리가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고 키가 훤칠한 흑의서생 이었다. 흑의서생은 순식간에 그를 제압한 후 안광을 번뜩이며 다시 오 장을 성큼 날아올랐 다. 누각 안은 넓은 대청이었다. 그 대청의 한쪽에 한 명의 황의중년인이 입을 벌린 채 멍청히 서 있었다. 바로 텁석부리 대한이 들어올 수 있도록 누각의 문을 열어 준 인물이었다. 황의중년인은 텁석부리 대한의 그림자 속에서 난데없이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그 를 제압하고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어안이 벙벙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도망치려는 듯 몸을 돌렸다. "적(敵)......!" 그의 입에서 외침 소리가 흘러나오려는 찰나, 파앗! 어느 사이엔가 오 장여를 질풍처럼 압축해 들어온 흑의서생의 손이 그의 등뒤에 도달해 있 었다. 황의중년인은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옴을 느끼고 황망중에도 사력 을 다해 몸을 비틀어 옆으로 떼구루루 굴렀다. 흑의서생의 눈에서 뜻밖이라는 빛이 떠올랐다. 상대가 자신의 일수(一手)를 피할 줄은 몰랐 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황의중년인이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뜻한다. 하나 그것이 한계였다. 휘리리링...... 흑의서생이 다시 허공에서 빙글 한 바퀴 회전하며 양손을 휘두르자 주위 사방이 온통 그의 손 그림자로 덮여 버렸다. 막 바닥을 구르며 일어나려던 황의중년인은 사방이 온통 흑의서생의 수영(手影)으로 뒤덮인 채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자 안색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 엄청난 공세는 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이...... 이것이 대체 무슨 무공......?'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그의 전신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흑의서생은 단숨에 황의중년인을 쓰러뜨린 후 소리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그가 텁석부리 대한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텁석부리 대한을 쓰러뜨리고, 다시 오 장을 날아 황의중년인을 제압할 때까지는 불과 숨 한 번 내쉴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만큼 빠르고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어느 누구도 누각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흑의서생은 물론 석중옥이었다. 조금 전 그가 텁석부리 대한의 그림자 속으로 숨은 수법은 혜영수종(慧影搜踪)이라는 전설 적인 신법(身法)이었다. 이것은 오행둔법(五行遁法)에서 파생(派生)된 은신술(隱身術)의 일종 으로, 사술(邪術)이나 눈속임과는 차원이 다른 상승절학(上乘絶學)이었다. 석중옥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매복을 뚫고 누각 안으로 들어오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마침 누각으로 오던 텁석부리 대한의 그림자에 숨어 매복해 있던 고수들의 눈과 귀를 속인 것이 다. 하나 말은 쉽지만 석중옥이 아닌 어느 누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석중옥은 누각 안을 한차례 쓸어보았다. 누각 안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욱 넓고 황량했다. 별다른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고 가구는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빈 대청만이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한쪽에 이층으 로 올라가는 계단이 어렴풋이 보일 뿐, 그 외에는 전혀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석중옥은 잠시 침음하다 자신이 제압한 황의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뭐 하는 곳이오?" 석중옥은 담담히 물었다. 황의중년인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 귀하는 누구요?" 석중옥은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소." 석중옥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순간 황의중년인은 그에게서 질식할 것 같은 가공할 기세 를 느꼈다. 절대고수에게서 뿜어 나오는 무형지기(無形之氣)는 웬만한 고수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의중년인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으...... 이, 이곳은 주인어른의 거처요......" "주인어른? 그가 누구요?" 황의중년인은 허겁지겁 입을 열였다. "그, 금마별부의 부주(府主)님이시오......" 석중옥은 하마터면 그의 말에 속아넘어갈 뻔했다. 하나 그는 그 말을 할 때 순간적으로 황 의중년인의 눈알이 한차례 옆으로 떼구루루 구르다 돌아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석중옥은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금마별부의 주인은 어디 있소?" 황의중년인은 위를 가리켰다. "사, 삼층에 계시오......" 석중옥은 그의 몸을 한 손으로 잡아 일으키며 위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안내해 줘야겠소." 황의중년인은 전신의 혈도가 제압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석중옥 이 잡아 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연신 두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의 손목을 잡은 채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계단은 좁아서 한 사람 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밖에는 되지 않았다. 석중옥은 막 계단으로 성큼 발을 내딛으려다 돌연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황의중년인을 돌아보았다. "정말 이곳의 주인이 삼층에 있소?" 황의중년인은 움찔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하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는구려. 그만한 신분에 자신의 거처를 이렇게 볼품없이 꾸며 놓는 사람은 없을 거요." 황의중년인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귀하를 속이겠소? 정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올라가서 확인해 보면 알 거 아니오?" 석중옥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소." 황의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당신이 직접 올라가서 주인을 내려오라고 하면 되오." 이어 석중옥은 그의 몸을 계단 앞으로 밀었다. 황의중년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마구 도리질을 했다. "자, 잠깐......" 하나 그때 그의 발은 이미 계단의 가장 앞부분을 밟고 있었다. 순간, 덜컹! 갑자기 계단이 아래로 푹 꺼지며 그의 몸이 그대로 시커먼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가! "아앗......!" 황의중년인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구멍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안은 너무 캄 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황의중년인의 몸이 떨어지는 순간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물체가 그의 몸에 꽂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타타타타탁!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계단은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찰나간의 일인지라 하마터면 석중옥도 황의중년인을 따라 계단을 밟을 뻔했 다. 석중옥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이 누각이 결코 금마별부의 주인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계단에 이와 같은 무서운 함정이 있을 줄은 미처 상상치 못했었다. 계단이 벌어졌다 닫히는 속도로 보아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할지라도 일단 계단에 발을 디디게 되면 함 정 속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함정에 빠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게 아닌가! '정말 무서운 함정이군. 설마 계단 전체를 함정으로 이용하다니......' 누각이 삼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이었다. 침입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무심결에 계단을 밟게 되면 그 순간 기관이 작동하여 침입자를 함정으로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해 보이는 장치가 사실은 세상의 어떤 기관매복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었 다. 석중옥은 황의중년인의 눈치가 이상해서 그를 먼저 보내고 자신도 뒤따라서 올라가려고 했 었는데 간발(間髮)의 차이로 함정에 빠지는 것을 모면하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계단은 한 사람의 몸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는데도 조금도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석중옥조차도 이 계단 아래 그와 같은 무서운 장치가 되어 있다고 믿지 못했 을 것이다. 석중옥은 다시 몸을 돌려 처음에 쓰러진 텁석부리 대한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그의 막힌 아혈(啞穴)을 풀어 주며 물었다. "당신에게 다시 묻겠소.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오?" 텁석부리 대한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석중옥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내가 조금만 조사해 보면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소. 내가 굳이 당신에게 묻는 건 단지 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일 뿐이니 당신은 고집 부릴 필요가 없소." 이어 그는 텁석부리 대한의 완맥을 슬쩍 잡았다. "이래도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도 그자와 마찬가지로 계단 위로 올려 보내 주겠 소." 그 말에 텁석부리 대한의 얼굴에 공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만 보아도 저 계단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석중옥이 금시라도 자신을 계단으로 잡아 끌 듯하자 텁석부리 대한은 마침내 더듬거리며 입 을 열었다. "이곳은 지하뇌옥(地下牢獄)의 입구...... 요......!" 석중옥은 턱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저 계단은?" 텁석부리 대한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것은 살인단(殺人段)이라는 것인데...... 침입자를 유인하여 제거하는 곳이오." "저곳에 빠지면 어떻게 되오?" 텁석부리 대한의 얼굴에 다시 두려움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 안에는 모두 마흔아홉 종(種)의,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살인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일단 떨어지면 누구라도 살아날 수 없게 되오......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해도 마찬가 지요." 석중옥은 그 음성만 들어도 계단 아래가 어떤 곳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석중옥은 다시 물었다. "이곳이 지하뇌옥이라고 했는데, 누구를 가둔 곳이오?" "그...... 그건 모르오......!" 석중옥은 텁석부리 대한을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하나 텁석부리 대한은 그 순간 숨이 막히는 기세를 느꼈는지 안면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저...... 정말이오...... 나는 그저 명을 받고 이곳을 지킬...... 뿐이오." "누구의 명이오?" 텁석부리 대한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어쩔 수 없었는지 힘겨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쾌당주(百快黨主)!" 순간 석중옥의 눈에서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백쾌당주! 오직 신비와 공포로 점철된 천하제일의 신비인(神秘人)이 아닌가! 한데 그의 이름을 이곳에서 듣게 되다니...... 대체 이곳에 누가 있기에 백쾌당주는 이토록 삼엄한 경비망을 펴고 있단 말인가? '역시 내 짐작대로란 말인가?' 석중옥은 내심 침음하며 텁석부리 대한을 바라보았다. "뇌옥의 상황은 어떻소?" "귀...... 귀하는 누구요......?" 텁석부리 대한이 오히려 되물었다. 그는 평생 석중옥과 같은 기도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질식시킬 듯한 강력한 무형지기를 발출하는 고수가 있을 줄은 지금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당주님 외에 천하에 이런 기세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석중옥은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원래 신분은 무엇이오?" 텁석부리 대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태...... 태산검협(泰山劍俠) 황조광(黃照光)이오." 석중옥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산검협 황조광이라면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협(大俠)이라고까지 불리던 협객으로, 산동 성(山東省) 일대에서는 지금까지도 협명(俠名)이 쟁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태산검협 황조광은 석중옥의 눈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숙였다. 석중옥은 다시 물었다. "조금 전의 황의중년인은?" "그는 귀영자(鬼影子) 장철기(張鐵騎)라고 하오." 귀영자 장철기 또한 이십여 년 전에 강북 일대를 석권하다시피 한 고수였다. 황조광이나 장철기의 명성으로 보아 그들이 이런 외진 곳에서 뇌옥을 지키는 신세가 되었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조광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하는......?" "나는 석중옥이라 하오." 그 순간, "서...... 석중옥......! 무적신검경천수!" 황조광이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석중옥의 명성은 이미 중천(中天)의 해를 가릴 정도로 혁혁 해서 이곳 외진 금마별부에 처박혀 있는 황조광도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상대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무적신검경천수임을 알게 되자 황조광은 한 가닥 남아 있던 저항의 기색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황조광은 이를 악물었다. "내...... 내게서 무엇을 알려고 하시오......?" "귀하가 아는 것 전부요." "내가 아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소. 이 누각 지하에 뇌옥이 있고...... 그곳에 한 사람이 갇혀 있다는 것밖에는......" 석중옥은 누각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하나 어디를 보아도 뇌옥의 입구는 보이지 않 았다. 입구는커녕 문(門) 같은 것도 없었다. 있다면 오직 이층으로 올라가는 공포의 계단뿐이었다. 죽음으로 이르는 살인단...... "뇌옥의 입구는 어디에 있소?" 황조광은 이미 대항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는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계단에 있소." "그곳은 살인단이 아니오?" "계단은 모두 스물두 개인데, 첫째부터 스물두 번째 계단까지는 모두 살인단이오. 하지만 그 중 열한 번째 계단을 밟으면 뇌옥의 입구가 나타나게 되어 있소." 확실히 그것은 절묘한 기관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함정과 뇌옥의 입구가 그런 식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어 나도 도저히 그것들을 분간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지키는 사람은 없소?" "나는 입구를 경비하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오. 언뜻 듣기로는 십여 명 정도가 있다고 하 오." "어느 정도의 고수들이오?" "모르오. 나는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알겠소." 석중옥이 담담히 내뱉듯 말했다. 그 순간, "우...... 욱!" 태산검협 황조광이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머리를 떨구었다. 석중옥이 그의 혼혈(昏穴)을 짚은 것이다. 그의 점혈법은 독특해서, 황조광은 적어도 하루 이상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석중옥은 그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계단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위로 뻗어 올라간 스물두 개의 계단...... 그것은 마치 죽음으로 인도할 듯 괴기스러워 보였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그 중 열한 번째의 계단으로 내려섰다. 그의 발이 계단을 밟는 순간, 끄- 르- 릉! 갑자기 나직한 굉음과 함께 계단 바로 옆의 벽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너비 이 장에 이르는 통로가 나타나면서 밑으로 뻗은 계단이 나타났다. 실로 절 묘하기 이를 데 없는 장치였다. 석중옥은 서슴없이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통로 아래로 사라지자 장내에는 오직 정신을 잃고 쓰러진 황조광만이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한데 어느 한 순간, 휙! 한 인영이 번개같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는 눈부신 백의(白衣)를 입은 준수한 청년이었으나, 지금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그는 석중옥이 들어간 지하통로를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하나...... 한번 이곳에 들어온 이상 살아 나갈 생각은 버려라. 더구나 일전에 네게 받은 일 검(一劍)의 원한은 반드시 갚고야 말 것이다." 두 눈 가득 살기를 띠고 있는 백의청년. 그는 바로 무림사공자 중의 하나인 만상공자였다. 일전에 그는 석중옥에게 일검을 맞고 도주하지 않았던가? 한데 백쾌당의 인물로 알려진 그가 대체 이곳에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혹시......? 모를 일이었다. 제 38 장 무림비사(武林秘史) <절대금지(絶對禁地)> 벽에 쓰인 네 개의 글자가 음산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었다. 석중옥은 내심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드디어 귀신도 모르게 지하뇌옥에 도달한 것이다. 계단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약 백 장. 그 흉험함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하나 이곳을 지키던 열두 명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호무림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무서운 고수들이었지만, 경보조차 알리 지 못하고 모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석중옥의 무공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는 달리 이곳은 암반을 뚫어 만든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는 어 린아이 팔뚝만한 쇠창살이 가로질러 있었다. 제아무리 절정고수라도 어찌할 수 없는 굵기였다. 하나 석중옥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쑥! 갑자기 석중옥이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한 가닥 청광(靑光)이 벼락같이 뻗어 나왔다. 차-아-앙! 금속이 절단되는 음향이 터졌다. 석중옥은 다시 손을 뒤집었다. 카-앙! 청광이 부챗살같이 퍼져 나가며 십여 개의 철창이 썩은 새끼줄같이 끊어졌다. 실로 무서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와장창! 광세기학(曠世奇學)인 쇄옥수(碎玉手)에 잘린 철창이 무너지며 석중옥은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 안은 몹시 어두웠다. 하나 석중옥은 거침없이 동굴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때였다. "크하하하하하핫......" 돌연 벽력음이 터져 나오듯 엄청난 광소(狂笑)가 동굴 속을 마구 뒤흔드는 것이 아닌가! 광 소는 마치 폐부(肺腑)에서 쥐어짜는 듯 처절하게 들려 왔다. 우-우-웅! 광소의 위력이 어찌나 가공한지 통로가 마치 지진을 만난 듯 웅웅거리며 미미하게 흔들렸 다. '으음......!' 석중옥은 광소에 의해 고막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무서운 내력(內力)이다! 천하에 이토록 가공할 내력을 지닌 사람은 채 다섯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그란 말인가?' 석중옥은 생각을 굴리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점점 더 커지는 광란의 웃음 소리...... 석중옥은 안으로 잠입해 들어가며 자신이 펼친 호신강기조차 흔들리게 하는 광소성에 놀라 워했다. 그 위력은 가히 가공(可恐)이라는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석중옥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예의 미친 듯한 광소는 한참을 더 울리다가 서서히 멎었다. ...... 광소가 멎자 죽음보다 더 깊은 정적이 동굴을 고요히 감싸기 시작했다. 동굴은 어지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얼마나 지나왔을까? 문득 석중옥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날카롭게 전방을 주시하던 그의 시야에 급격히 좌측으로 구부러진 통로가 들어왔다. '이 모퉁이를 돌면 사람이 있다......' 석중옥은 전신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느껴진다. 그는 내공을 모두 끌어올린 채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느낌!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확실한 것이었다. 인간이 익힐 수 있는 내공의 최고 극한에 도달한 자끼리만 알 수 있는 그 느낌! 석중옥은 온몸에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구부러진 좌측 통로로 접어들었 다. 순간, "크하하하핫......!" 예의 그 엄청난 광소가 폭풍처럼 동굴 속을 휘몰아쳤다. 동시에, 우-우-웅! 공기의 진동조차 없는 무서운 무형(無形)의 경력이 가공할 위세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마 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석중옥은 번개같이 장력(掌力)을 마주쳐 냈다. 찰나, 쿠...... 쿠...... 쿠...... 동굴 속의 공기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저리를 쳤다. 실로 가공할 강기( 氣)와 강기의 대결이었다. '으음......' 석중옥은 내심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주춤 한걸음 물러섰다. 다음 순간 석중옥은 이어지는 상대의 공세에 대비하여 예리한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했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하나의 물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人間)이었다. 뒤엉킨 수세미처럼 부스스한 흑발은 치렁치렁 땅에 끌리고, 한 자도 넘는 손톱을 가슴 앞에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한 명의 괴노인이었다. 얼굴조차 구별할 수 없는 텁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는 두 가닥의 시퍼런 귀광(鬼光)이 으스스하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괴노인의 체구는 흡사 작은 동산을 연상시킬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한데 괴노인과 석중옥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히는 순간, "크하하핫...... 천악(天岳)! 이 배은망덕한 놈! 드디어 내 앞에 다시 나타났구나. 크하하하 핫......!" 괴노인은 가공할 살기를 내포한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천악......? 저 괴인은 나를 천악이라는 인물로 알고 있단 말인가?' 순간적인 의혹이 석중옥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 순간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아......! 괴인의 팔과 다리를 보라!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광소를 터뜨리는 괴노인의 사지(四肢)는 실로 눈부신 금광(金光)을 뿜어 내는 황금족쇄로 꽉 조여 있었던 것이다. 뒤쪽의 동굴 벽으로 이어져 깊숙이 박혀 있 는 황금족쇄는 한치의 여유도 없이 노인의 전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천형(天刑)의 죄인(罪人)보다 더 비참한 몰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괴노인은 무서운 분노와 원한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석중옥을 쏘아보았다. "크하하핫...... 천악! 이 잔인한 놈, 잘 왔다. 크하하하...... 네놈을 갈가리 찢어 그 피로 목을 적시겠다!" 저주로 가득 찬 그 괴성. 그것은 그의 처절한 통한(痛恨)이 피부로 느껴지는 음산한 음성이었다. 금마별부의 지하뇌옥에 감금되어 있는 수인(囚人).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돌연, 괴노인이 광소를 뚝 그쳤다. 그리고 흘러나온 원독(怨毒) 어린 음성. "천악! 네놈은 내가 죽은 줄 알았겠지만...... 흐흐흐...... 노부는 결코 죽지 않았다." "......!" "네놈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 온 노부이거늘 어찌 이대로 죽을 수 있겠느냐!" 석중옥은 담담한 음성으로 노인의 말을 받았다. "노인장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나는 천악이란 사람이 아니오." "네가 고천악이 아니라고?" 문득, 괴노인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흐릿하게 변했다. "그...... 그래, 맞다. 천악은...... 너같이 젊지 않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돌연 그는 두 눈에서 광기를 뿜어 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로 하여금 기나긴 세월을 썩게 한 놈! 감히 사부인 나 를......" 미친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천악! 으하하...... 고천악!" 순간, '고천악?' 석중옥의 전신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일어났다. '고천악의 사부라니...... 그렇다면 설마...... 정말로 그란 말인가?'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때 괴노인이 웃음을 뚝 그치며 석중옥을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네놈은 누구냐?" 순간 석중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평정을 되찾으며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석중옥이란 사람이오." "석중옥?" "내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겠지만 이 말 한마디면 노인은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 오." 이어 석중옥의 음성이 엄숙하게 변했다. "천상유산(天上有山:하늘 위에 산이 있고)......" 순간, 부르르...... 괴노인의 전신이 세찬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너...... 너는!" 그의 얼굴은 격동으로 쉴새없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미친 듯 큰 소리로 석중옥의 말 에 답했다. "사...... 산정유운(山頂流雲:산 위에는 구름이 흘러간다)!" 그의 음성은 한없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운중와룡(雲中臥龍:구름 속에는 용이 누워 있으니)......" "처...... 천룡무적(天龍無敵)...... 천룡무적......" 뜨거운 두 줄기의 눈물이 괴노인의 주름진 노안(老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석중옥이 이사형(二師兄)을 뵈옵니다." 석중옥은 정중히 괴노인을 향해 절을 올렸다. 괴노인의 눈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너...... 너는...... 며...... 몇째냐?" "저는 사부님의 네 번째 제자입니다." "사...... 사부께선......?" "사부께선 이미 신선지경(神仙之境)에 이르셨는지라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오......" 돌연 괴노인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하늘도 무심치는 않구나...... 내, 내가...... 이 구양중(歐陽重)이 넷째 사제를 보게 될 줄이야......" 목이 찢어질 듯한 광소가 쉴새없이 동굴 벽을 울렸다. 한데 구양중이라니......? 아아...... 그렇다면 눈앞의 이 노인이 구대흉인(九大兇人) 중에서도 서열 일위(一位)에 꼽히는 혈천노조(血天老祖) 구양중(歐陽重)이란 말인가? 혈천노조(血天老祖) 구양중(歐陽重)!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이며, 여의노사 백철군과 함께 명실상부한 당금 무 림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가 아닌가! 단 한 번도 무림에서 자신의 진실한 내력을 보인 적이 없다는 무적(無敵)의 마인(魔人). 그가 설마 석중옥의 이사형일 줄이야...... "노부가 마지막으로 사부님을 뵈었을 때 그분의 세수(世壽)는 이미 이백을 훨씬 넘으셨건 만......"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괴성이 구양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가 벌써...... 삼십 년 전인데......" "......!" 석중옥은 묵묵히 머리를 조아린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못난 제자가 그분의 심려를 무척이나 끼쳐 드렸건만 아직도 정정하시다니......" "사부님께선 이사형께서 십여 년 간 소식이 없으신 걸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십니다." 석중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구양중은 한참을 웃다가 울다가 했다. 그리고는 석중옥을 응시하며 허탈하게 말했다. "사제를 보니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구먼. 그래, 사문(師門)에는 별 일이 없었나?" 석중옥의 표정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십 년 전, 셋째 사형의 천심장이 혈겁을 당했습니다." "뭐...... 뭣이? 셋째가......!" "그 혈겁으로 셋째 사형과 형수님께서 모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으으...... 어, 어떤 놈이 그런......!" 구양중은 극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거구를 휘청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줄기줄기 시퍼런 살기 가 뻗어 나왔다. "아직 흉수가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이어 석중옥은 단천거사 위지송이 우연히 한백의 장보도를 얻었으며, 천심장의 혈겁 이후 실종되었던 장보도가 남궁검문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남궁검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한 백의 장보고를 열었다는 것 등을 말했다. 듣고 있던 구양중의 몸이 점점 커지는 분노와 경악으로 부르르 떨렸다. "으...... 그...... 그래...... 나...... 남궁뢰! 그놈이 틀림없다 그...... 그따위 놈에게 셋째가 죽다 니......" 구양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셋째의 무공은 나를 능가했는데...... 그...... 그는 우리 천룡문(天龍門)의 자랑이었고...... 사부 께서도 가장 아끼던 놈이었는데......" 그의 전신에는 허탈감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놈이 죽다니...... 앞날이 가장 촉망되던 그가...... 이 늙은 사형보다 먼저 죽다 니......" "......" "내 잘못이다...... 모두 내 잘못이다!" 돌연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 셋째의 죽음은 모두 내 탓이다...... 내...... 내가 죽놈이야......" "사형!" 석중옥이 그를 달래려 했으나 구양중의 음성은 비통스럽기만 했다. "내가...... 내가 그 당시 그런 마음만 먹지 않았더라도......" 석중옥은 그의 말에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구양중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다." "......!" "특히 승부욕이 강해서 누구에게도 지기를 싫어했지." 구양중은 허탈한 표정으로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한데 대사형(大師兄)은 언제나 나보다 뛰어났다. 난 그것이 항상 부러웠지만 한편으론 불만 이었지. 그런데......" * * * 대사형! 구양중의 대사형은 다름 아닌 오십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던, 천외삼기(天外三奇) 중의 일 인(一人)인 동해검선(東海劍仙) 노중환(盧重環)이었다. 노중환은 성품이 담백하고 사람 됨이 출중해 언제나 구양중을 앞서 나갔다. 구양중은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구양중은 노중환을 앞서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 했으나 언제나 역불급(力不及), 그를 앞설 수는 없었다. 한데 어느 날, 우연히 두 사람은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에 천하제일미인(天下第一美人)으로 불리던 절세의 미녀였다. 천향검비자(天香劍妃子) 심옥란(沈玉蘭)! 바로 그녀를 두 사람은 동시에 사랑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비록 천하를 눈 아래 보는 절대기재(絶代奇才)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천향검비자 를 한 번 본 순간 모든 혼을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천향검비자 심옥란도 거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천하의 기재 두 사람을 모두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나 여자의 선택은 한 명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 결국 심옥란은 성질이 편협되고 잔인한 면이 있는 구양중보다는 인물이 대범하고 대인(大人)의 풍모가 역력한 노중환을 선택하고 말았다. 구양중은 실연(失戀)에 침식(寢食)을 잊고 괴로워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자신이 평소에 질투심을 느껴 왔던 노중환이었으니...... 구양중은 피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무서운 노화가 타오르고 있었으니...... * * * "결국 노부는 그 당시 이성을 잃고 분노하여 천하무림인들을 모두 저주하게 되었다." 구양중은 아득한 옛일을 더듬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하여 노부는 천하를 정복하려는 가공 무쌍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 "그 당시 노부에게는 충분히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 "노부는 천하에 세력을 깔고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한백의 장보고를 무서운 도살장으로 개 조하는 등 모든 계획을 완비하고 있었다." 그 말에 석중옥은 흠칫했다. "아니, 그럼 한백의 장보고를 죽음의 동부로 만든 것이 바로 이사형이시란 말입니까?" 구양중은 만면 가득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 그 당시 노부는 복수에 미쳐 제정신이 아니었지. 한데......" * * * 구양중은 남궁검문을 비롯, 사천당문 등을 포섭하여 천하를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거의 완성 시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막 계획을 실현하려는 순간, 셋째 사제인 단천거사 위지송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 는지 구양중이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무림에 일부러 흘려 버린 한백의 장보도를 가지고 그 의 앞에 나타났다. 이어 위지송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칠(七) 주야(晝夜)간 그를 설득했다. 위지송의 눈물 어린 간청을 들은 구양중은 복수(復讐)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계획 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금마별부를 지어 그 안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한데 그때 구양중은 우연히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에게 포섭된 줄만 알았던 남궁검문과 사천당문! 그들은 벌써 한 신비의 인물에게 암중 장악된 상태였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죽음의 도살장으로 만들어 놓은 한백의 장보고가 실은 그들의 계획하에 조작 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즉 그들은 이미 훨씬 오래 전에 한백의 장보고를 열었고, 그것을 일부러 구양중의 눈에 띄 게 하여 복수에 미친 구양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용하여 천하를 혈겁(血劫)에 몰아넣게 하 려고 했던 것이다. 구양중은 자신이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발연 대로하여 그들의 음모를 제지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 * * 돌연 구양중은 만면 가득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때...... 노부의 세 제자가 배신(背信)을 했다." 화르륵...... 원한의 불꽃이 그의 두 눈에서 활활 타올랐다. "으하하하...... 놈들은 노부를 바로...... 이곳으로 유인하여......" 원한의 불꽃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변해 구양중의 두 눈에서 번갯불보다도 더 전율스럽게 뿜 어져 나왔다. "고천악! 그놈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결국에는 이 대라금삭(大羅金索)에 묶여 십여 년을 지내 왔다." "......" "그 기나긴 세월을 노부는 죽음보다도 더한 절망 속에서 보냈다. 나는 셋째 사제가 나를 구 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만을 의지한 채 지내 왔지." 구양중은 공허한 음성을 발했다. "하나...... 그는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한데...... 그가 나보다 먼저 죽었다니......" 그의 음성 속에는 짙은 비애(悲哀)가 가득 깃들여 있었다. 석중옥은 그제서야 일의 내막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랬군요. 결국 남궁뢰는 한백의 장보도를 빼앗기 위해 셋째 사형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가 자신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기에 혈겁을 저지른 것이군요." "그래...... 그리고 그것은 모두 내 불찰이었지......" 문득 구양중의 두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으...... 그놈! 그 세 놈만 배반하지 않았어도...... 셋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고천악...... 형곤(荊坤)...... 이옥당(李玉棠)...... 이놈들.... 구양중은 원한과 저주에 사무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옥당? 형곤과 고천악이 그의 제자인 것은 알겠는데...... 이옥당이라니...... 혹시......?' 석중옥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입을 열었다. "사형! 이옥당의 외호가 혹시 만상공자 아닙니까?" 구양중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사제가 그놈을 어떻게 아는가?" "역시 그랬군요......" 석중옥은 자신이 폐찰에서 그를 만났고, 그가 백쾌당의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당시 그는 저에게 연환십절의 제일절(第一絶)인 분뢰일전(奔雷一電)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가 혹시 사형의 제자가 아닌가 하여 살수(殺手)는 쓰지 않았지요."으...... 그...... 그놈이 감 히 자네에게 검을 휘둘러......!" 구양중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따지고 보면 만상공자는 석중옥의 사질(師姪)이 아닌가! "그놈이 백쾌당에 있다면 고천악과 형곤도 그곳에 있겠군......" 구양중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 내가 이곳을 나가기만 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놈들을......" "......!" "하나...... 이 저주의 대라금삭이 나의 육신(肉身)을 놓아 주지 않는구나...... 으하하하......" 석중옥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그 대라금삭을 잘라 드리겠습니다." 순간 구양중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웃음을 뚝 그쳤다. "사제가 이 대라금삭을......?" 하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흐흐...... 이 대라금삭은 보통 쇠사슬이 아닐세......" "알고 있습니다, 이 대라금삭이 어떤 것인지......" "......!" "해저(海底) 일만 장 깊은 곳에 있는 수십만 근의 천금석(天金石)에서 추출한 대라금사(大羅 金砂)를 단련시켜 만든 것입니다." 구양중은 흠칫했다. "자세히 알고 있군." 석중옥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라금삭은 천하의 그 어떤 것에도 손상을 입지 않죠." "그렇게 잘 알면서 어떻게 이것을 자르겠단 말인가?" "하나, 방법은 있습니다." "방법?" "천하의 그 어떤 물체라도 극성(剋性)은 있는 법이죠." "물론이지. 대라금삭의 극성은 바로 우내육대중보의 서열 제일위인 공손철검(公孫鐵劍)뿐일 세. 그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부수지 못하지." "제게 바로 그 공손철검이 있습니다." "뭣이?" 구양중의 몸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번- 쩍! 순간 석중옥의 허리춤에서 시커먼 광채가 뻗쳐 나왔다. 공손철검! 천하제일의 신검(神劍)이 어느새 석중옥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으...... 그...... 그렇다면......!" 구양중의 입에서 격동으로 가득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자, 자네가 본 문의 신물(信物)을 가지고 있다니...... 그렇다면......" 석중옥은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품에서 하나의 영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천룡무상령이었다. 순간, "천룡문 제십오대(第十五代) 제자 구양중이 문주(門主)를 뵈옵니다." 구양중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가 비록 석중옥의 사형이라지만, 천 룡문의 문하인 이상 문주인 그에게 대례(大禮)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석중옥은 이를 알고 있기에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하나 구양중이 대례를 마치자 그는 천룡 무상령을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사형, 일어나십시오. 중옥은 예(禮)를 받기 송구스럽습니다." 구양중은 정중히 일어났다. "설마 문주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중(重)이 미처 몰랐습니다." "사형, 말씀을 낮추십시오. 중옥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어찌......" "나이로 따지면 저는 사형의 손자뻘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십 시오." 석중옥이 극구 만류하자 그제서야 구양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사제는 너무 겸손하군. 자네의 말에 따르겠네." "감사합니다." 구양중은 그런 그가 못내 대견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하나, 그의 눈에는 은은한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부님께선 좀처럼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오죽하면 나와 대사형이 출도 (出道)할 때에도 겨우 목숨이나 부지할 정도의 무공밖에는 없으니 문주 될 자격은 없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는 흑발 사이로 두 눈을 지혜롭게 번뜩이는 석중옥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데 저 어린 사제에게 선뜻 문주의 신물인 천룡무상령을 내리시다니...... 그의 능력이 그 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그는 문득 급히 석중옥에게 물었다. "사제, 자네는 연환십절을 몇 절까지 터득했나?" 석중옥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운이 좋아 간신히 십절(十絶)까지 익힐 수 있었습니다." 구양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시...... 십절을 모두 익혔단 말인가?" "모두 사부님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크하하하...... 과연...... 사부님의 혜안(慧眼)은 광명(光明)하시도다." 구양중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연환십절은 결코 운(運)이나 누가 도와 줘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닐세. 내가 출도 할 당시에는 겨우 육절까지밖에 익히지 못했었네. 그래도 무림에서는 무적(無敵)이라고 불렸 지......" "......" "지금의 내 능력으로도 기껏해야 제팔절(第八絶)인 팔황개동(八荒開動)까지밖에는 펼칠 수 없네. 대사형도 구절(九絶)까지밖에는 익히지 못했을 것일세...... 한데 자네가 십절까지 모두 익혔다니......" 그는 새삼스러운 듯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연환십절! 이것은 이들의 사부인 노신선(老神仙)이 창안한 고금무적(古今無敵)의 검술(劍術)이다. 그 위력은 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기가 불가능한 절대의 검학(劍學)인 것이다. 하나 그만큼 익히기도 힘들다. 십 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 일세(一世)의 기재(奇才)라도 평 생을 가야 오절(五絶)까지밖에는 익힐 수가 없는 것이다. 노중환과 구양중은 모두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人物)들인데도 겨우 육절까지밖에는 익 히지 못했었다. 하나 그 정도로도 노중환은 동해검선이라 불리며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으 로 추앙받고 있고, 구양중은 천하제일마로 위명을 떨쳤던 것이다. 한데 이제 약관인 석중옥이 십절을 모두 익혔다니...... 연환십절! 제일절, 분뢰일전(分雷一電)! 제이절, 건곤쌍단(乾坤雙斷)! 제삼절, 삼절추혼(三絶追魂)! 제사절, 사상잔섬(四象殘纖)! 제오절, 오행전류(五行電流)! 제육절, 광만육합(光滿六合)! 제칠절, 칠성회두(七星廻斗)! 제팔절, 팔황개동(八荒開動)! 제구절, 검비구주황(劍飛九州荒)! 그리고 제십절, 십자파천황(十字破天荒)! 이 중 제십절인 십자파천황은 이들의 사부인 노신선께서도 말년에 가서야 겨우 터득한 광세 의 검학이었다. 석중옥은 공손철검을 들고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휙! 공손철검이 허공에 한 줄기 흰 선을 긋는 순간, 투두둑-! 대라금삭이 힘없이 잘려져 나갔다. 구양중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과 격정에 휩싸여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드...... 드디어 이 저주받은 마물(魔物)에서 벗어났구나!" 다음 순간 그는 미칠 듯한 기쁨에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 동굴이 그의 광소에 한차례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흡사 앞날의 파란을 예고하듯...... 제 39 장 천하구도(天下九刀) 암흑에 뒤덮인 어두운 통로를 섬전같이 치달리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동굴을 유연하게 빠져 나가는 인영. 그는 다름 아닌 석중옥이었다. 어둠에 파묻혀 날아가고 있는 그의 몸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사형은 십여 년 간을 묶여 있었기에 본신(本身)의 진력(眞力)을 회복하는 데 얼마의 기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다른 자들의 이목을 나에게로 집중시켜야 한다.' 석중옥은 번개같이 치달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데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이 이미 십여 년 전에 한 인물의 수중에 있었다니...... 혹시 그가 천패, 지살 등이 말한 지존(至尊)이란 인물이 아닐까......?' 그는 지금까지 실타래처럼 엉켜 있던 일의 실마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백쾌당! 그곳에는 분명 사형을 배반한 세 사람이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한데 그 들이 사형을 배반한 시기가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남궁검문 등과 한 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휙!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생각을 굴리면서도 그의 나아가는 속도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상태로 보아 남궁검문과 백쾌당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당금 무림의 암류(暗流)는 모두 두 가지라는 셈이군...... 하나는 남궁검문과 사천당문, 천지회 를 주축으로 한 지존이란 인물의 세력...... 다른 하나는 백쾌당과 사형의 세 제자...... 복잡하 군......'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 그의 앞에 하나의 석벽(石壁)이 나타났다. 바깥과 통하는 마지막 문이리라. 석중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관을 작동시켜 석벽을 열었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꽝! 꽈꽈꽝! 벼락치는 폭음과 함께 시퍼런 섬광이 석중옥이 있던 곳 주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뇌옥의 입구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시커먼 공 같은 것이 문안으로 날아 들어, 그것이 채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폭발한 것이다. 그 폭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지하뇌옥의 입구였던 거대한 삼층누각이 그대로 산산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콰콰콰...... 박살난 돌덩이들이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통쾌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크게 웃으며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만상공자 이옥당이었다. 거의 백여 명에 이르는 황의인들이 그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황의인의 선두에 선 인물은 놀랍게도 구대흉인 중의 한 명인 소면낭심 도계조가 아닌가! 그 또한 백쾌당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만상공자는 산산이 부서진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누각의 잔해를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설마 문이 열림과 동시에 벽력신화(霹靂神火)가 폭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왔을까? 본(本) 당(黨)의 총단(總壇)은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바로 이곳이 백쾌당의 총단이란 말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앗! 아직 죽지 않았다......!" 누군가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그 말에 만상공자는 퍼뜩 놀라 황급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음......"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을 뚫고 경악에 가득 찬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칠흑 같은 암천(暗天) 속에서 한 인영이 서서히 아래로 낙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 석중옥, 그...... 그놈이다......!" 소면낭심 도계조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 순간, 파- 팟! 석중옥이 채 허공에서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그의 전후좌우(前後左右)에서 밤하늘을 달리 는 유성과 같은 십여 개의 검광(劍光)과 도기(刀氣)들이 폭사되었다. 열 명의 인영들이 한 가닥 광채가 되어 석중옥에게 쏘아져 간 것이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완벽한 합공(合攻)이었다. 게다가 그 빠름은 어떠한가? 채 방비도 하기 전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갈 정도로 무서운 빠 르기였다. 하나 석중옥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분뢰일전!" 츠-! 한 가닥 햇무리와 같은 검광이 찬란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쨍! 째-앵-! 차-아-앙! "으악-!" "크으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석중옥의 허리에서 한 가닥 섬광이 뻗어 나오고, 거기에 마주친 검(劍)과 도(刀)가 마치 무 토막인 양 잘려져 나가고, 피보라가 일고, 마지막으로 비명이 들린 뒤...... 사방에 남은 것은 고요뿐이었다. "......" 일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황의인 열 명이 피를 뿌리며 천천히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여...... 연환십절......!" 만상공자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한소리 중얼거림이 흘러나오는 순간, 휘-익! 석중옥의 몸은 희미한 흑선이 되어 사방을 휩쓸어 갔다. 동시에, "으악!" "아...... 아...... 악!" "우와아악-!" 단말마(斷末魔)의 처참한 비명이 어둠을 가르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명 소리의 이어짐 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한 순간에 터지는 듯했다. 마치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목을 내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 서야 하나같이 일당백(一當百)의 정예고수들인 황의인들이 이토록 맥없이 쓰러질 리가 없지 않은가? "미...... 믿을 수 없다......" 만상공자의 안색은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시커먼 한 줄기 흑선(黑線) 과 거기서 번뜩이는 검광(劍光)뿐이었다. 나무와 함께 두 조각이 나는 자! 바위와 함께 두 조각이 나는 자! 검과 함께 양단(兩斷)되는 자! 흑선이 스치고 지나간 곳에 살아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상공자는 평소 자신을 절정고수로 자부했었다. 그러나 사람이 이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 고, 이토록 공포스런 검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치 못했었다. 그가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고금최강(古今最强)의 검법(劍法)인 연환십절을 모두 익힌 석중옥! 지금 그가 고금제일신병 (古今第一神兵)인 공손철검으로 연환십절을 전개하고 있음을...... '으으...... 사...... 사부보다 더 강하다...... 누구냐? 저자의 정체가 누구냐? 연환십절을 저토록 능숙하게 시전하다니......' 만상공자는 넋을 잃고 있었다. 문득 그의 동공으로 소면낭심 도계조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장내에 살아 남은 사람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중옥은 소면낭심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한옆에서 넋을 잃고 있는 만상공자를 발견했다. 만상공자는 그의 시선을 받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석중옥은 도계조를 쫓으려던 생각을 바꾸어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옥당! 오랜만이군." 만상공자는 움찔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나의 이름을......?" "이것을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석중옥은 품속에서 천룡무상령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순간,아...... 처...... 천룡무상령! 그렇다면 그대는......!" "난 천룡문의 제십오대 문주다." 만상공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대한 경악과 공포를 담고 있었다. 석중옥은 위엄스럽게 호통을 질렀다. "이옥당! 네가 감히 천룡무상령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단 말인가?" 기세!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뻗어 나와 만상공자를 짓눌렀다. "으으......!" 만상공자의 얼굴이 땀으로 뒤덮였다. 그는 무릎을 후들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나...... 난......"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 석중옥! 네가 천룡문의 문주라니 놀랍구나." 어디선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괴이하게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 기이한 공포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나 석중옥은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누구요?" "크하하하...... 용기가 있으면 이리 와서 직접 확인해 보아라!" "음! 시시한 격장지계(擊將之計)로군!" 석중옥은 만상공자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본(本) 문(門)의 규율은 엄격하기 그지없소. 더구나 가사멸조(家師滅 祖)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 먹는 다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소.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오." 그의 표정은 엄숙했고 음성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만상공자는 그 위세, 그 기도가 문득 눈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니......" 석중옥은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만상공자는 그것도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 짙은 어둠이 그의 양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휙! 석중옥은 어둠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날아 어느 한곳에 떨어져 내렸다. 유등(油燈)......! 그가 내려선 곳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누각. 그 처마에는 흐느끼듯 은은한 불빛을 흘려 내는 유등이 걸려 있었고, 주위는 이상하게도 다 른 곳보다 더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바로 그때, "크흐흐흐......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단신으로 이곳까지 오다니......" 예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 왔다. "흠! 귀하는 누구요?" "난 구도회(九刀會)의 수석회주(首席會主)인 탈혼도(奪魂刀) 여무극(呂無極)이다." "탈혼도 여무극!"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놀라운 일이군! 명성이 자자한 천하제일도문, 구도회가 한낱 백쾌당의 앞잡이라니......" "흐흐...... 괜한 짐작은 하지 마라! 우리는 단지 동업(同業)하는 사이일 뿐이다!" "......!"네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일 대 일로는 네 상대가 되 지 못함을 인정한다." "아니 다행이군." "흐흐...... 역시 광오하군!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진식(陣式)으로 너를 상대하기로 했다. 이름 하여 지옥마화구도방(地獄魔火九刀方)이라는 것이지." "지옥마화구도방......?" 석중옥은 생소한 이름에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흐흐...... 너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를 것이다. 이것은 너 같은 초절정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창안된 가공할 ?絶陣)이니...... 흐흐...... 네 무공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것 에 걸리면 살아날 수 없다."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점차 가늘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흐흐...... 그럼 석중옥! 이제 슬슬 시작하겠다. 각오해라!" 그 말을 끝으로 사위(四圍)는 죽음과 같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 석중옥은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주위를 감쌀 뿐,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석중옥은 왠지 모르게 주위의 공기가 기이하게 파동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데 바로 이 순간, 툭! 그의 느낌을 대변이라도 하듯 천장에 걸려 있던 유등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석중옥의 검미가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휙! 다음 순간 그는 떨어져 내리는 유등을 받으려고 몸을 날렸다. 하나 유등은 마치 석중옥의 손을 거부하듯 예측보다 훨씬 빨리 지면에 떨어져 없어졌다. 화악! 그 순간 독한 냄새가 주위에 번져 가고 있었다. "음......? 이것은 유황 냄새!" 석중옥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그가 미처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사방이 불 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화르르...... 화-악! 불길이 번지는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콰르르르...... 화광(火光)이 솟구치는 범위는 무려 이십여 장에 달했다. 그것은 제아무리 석중옥이라 해도 도저히 피해 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것이었군." 석중옥은 지옥마화구도방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몸을 최대한 구부려 전신을 공처럼 둥글게 축소시키고 있었다. 휙! 휙!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허공 중에서 연속적으로 회전하며 화염 속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의 몸놀림. 그것은 놀랍게도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대응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이 한 동작은 실로 기가 막히도록 적절해서, 화기(火氣)가 인체에 접촉되는 부분을 극 소화시키며 최대한 빨리 화기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인 것이다. 하나 화기만이 지옥마화구도방의 전부는 아니었다. 쏴아-! 파파파팍-! 돌연 화염 속에서 무서운 도광(刀光)이 번뜩이지 않는가! 가공할 속도로 뻗어 나오는 도세 (刀勢)의 위력은 살인적인 것이었다. '흥!' 석중옥은 내심 한기를 머금으며 아슬아슬하게 몸을 젖혔다. 하나 그 순간 난데없이 하나의 도광이 그의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팟! 석중옥은 전력을 다해 몸을 비틀었으나 도광은 어느새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흑 의가 갈라지며 옆구리에 희미한 핏자국이 흘러내렸다. 비록 치명적인 일격은 면했지만 천하의 석중옥이 너무도 어이없게 부상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팟! 팟! 화염 속에서 다시 몇 가닥의 도기가 전광(電光)처럼 폭사되었다. 기실 지옥마화구도방의 화염은 생각만큼 지독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화염 뒤에 쏟아질 도세의 공세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 지 않았던 것이다. 팟! 파파팟! 무서운 도광이 순식간에 사면팔방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도기는 화염에 가려 정확히 알아볼 수 없어서 석중옥이 도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도세에 전신이 노출된 후였다. "진정한 지옥마화구도방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군!" 석중옥은 그 놀라운 공세에 내심 냉소를 머금으며 황급히 사면에서 뿜어 나오는 도세를 피 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캭! 카-악! 도기가 뻗어 나오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아홉 군데였다. 그러나 그 아홉 개의 도기는 단 한 번도 방향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예측 불허의 장소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석중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기실 석중옥이 아닌 다른 고수였다면 벌써 지옥마화구도방의 악독한 공세에 한줌의 피모래 로 화해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지옥마화구도방의 공세는 가공스러웠다. 천하제일의 고수라고 인정받은 석중옥조차도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전신에 대여섯 군데 의 도상(刀傷)을 입으며 몸을 피해 내기에 급급했다. 반격을 하려 해도 상대방의 모습은커녕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로 그로서는 난생처음 당해 보는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 시뻘건 피가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벌써 반 시진째...... 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예리하게 도세가 뻗어 오는 방향과 순서 를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진식인 이상 아무리 복잡해도 공수(攻守)에 일정한 규칙과 나름대로의 틀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 그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계속되는 지옥마화구도방의 공세는 그야말로 불규칙적이어서 이것이 일정한 법칙에 의한 진식임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섣불리 진법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다가는 쓸데없는 진력만 낭비하겠군. 이러다가는 손도 못 써보고 당하게 생겼는데......' 석중옥은 내심 전율이 일어났다. 지옥마화구도방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공스런 것이었다. 슥! 파-앗! 살인적인 공세는 실로 숨쉴 겨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석중옥은 전신의 근육을 있는 대로 긴장시킨 채 지옥마화구도방의 허점을 찾아 두 눈을 무 섭게 반짝였다. 그러나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지옥마화구도방은 일말의 허점도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제풀에 쓰러져 죽겠군. 인간이 만든 이상 어딘가에 허점이 있을 텐데...... 이건 너무 완벽해......' 석중옥은 내심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눈에 이채를 번뜩였다. '완벽(完璧)...... 그렇다!' 그는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 순간 그는 정신없이 피하던 몸을 멈추고 가슴을 활짝 폈다. 그의 가슴 부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허점을 보이고 있었다.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공할 도기가 뻗어 오는 것이 아닌가! 파-아! 삭! 하나의 도(刀)가 화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석중옥의 가슴을 베어 갔다. 차-악! 석중옥의 가슴이 길게 베어지며 선혈이 뿜어졌다. 하나 그 순간, "삼절추혼(三絶追魂)!" 석중옥은 쓰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도가 튀어나온 방향을 향해 공손철검을 쳐내고 있었다. "왁!" 화염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지면을 굴렀다. 석중옥의 고육지계(苦肉之計)에 걸려든 그는 석중옥의 가슴에 일격을 격중시키기는 했으나 그 순간 연환십절에 의해 고혼(孤魂)이 되어 버린 것이다. 땅바닥에 몸이 닿는 순간 그의 신형은 그대로 화염에 휩싸여 버렸다. 화르르- 그의 신형이 유황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순간, 푸-욱! 돌연 좌측에서 다시 하나의 도가 솟아나와 석중옥의 옆구리에 박혀들고 있었다. "오행전류(五行電流)!" 석중옥은 옆구리에 상대의 도를 그대로 꽂은 채 몸을 돌려 공손철검을 쳐냈다. "크-악!" 또다시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석중옥은 단숨에 천하구도 중 두 명을 쓰러뜨렸지만 자신도 몸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특히 옆구리에 도가 박힌 충격으로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사방에서 무서운 도광이 가공할 기세로 석중옥의 신형을 덮 쳐 들었다. 하나 그것을 보는 석중옥의 눈에는 한 가닥 싸늘한 냉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석중옥은 바 로 이 점을 노리고 몸을 일부러 휘청거렸던 것이다. 그의 신형이 눈부시게 돌아가며 그의 검에서 빛살 같은 검광이 사방을 질풍 노도처럼 휩쓸 어 갔다. "광만육합(光滿六合)!" 파파파팟! "크윽!" 그에게 덮쳐 들던 인영 중 하나가 채 다가오지도 못하고 검광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때 하나의 도가 다시 석중옥의 늑골을 헤집었다. 하나 석중옥의 연환십절은 그 순간 이미 다섯 명째를 베고 있었다. "팔황개동(八荒開動)!" 실로 가공할 검광이 부챗살처럼 사방을 휩씀과 동시에, "크아악!" "으악...... 지...... 지독한 놈!" 비명과 함께 석중옥을 습격했던 천하구도는 모조리 쓰러지고 말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그토록 가공스러웠던 지옥마화구도방이 깨어지고 만 것이다. 그것은 실로 일순간의 일이었다. 석중옥은 전신에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지옥마화구도방...... 정말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절진(絶陣)이었다." 석중옥은 자신의 몸에 나 있는 상처들을 대강 살펴보았다. 그 상처들은 하나같이 치명적인 것들이었으나 석중옥의 눈에는 단지 여느 자상(刺傷)과 다를 바 없이 생각되었다. 천하 무쌍 의 도객(刀客) 아홉 명의 목숨의 대가로 이 정도 부상이라면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구도...... 그대들은 내가 본 고수 중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었다." 석중옥이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휘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때, 꿈틀...... 불타고 있는 시신 중 하나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서...... 석중옥...... 너...... 지...... 지옥마화구도방을 깨다 믿을 수 없다." 석중옥은 그의 음성이 바로 예의 가라앉은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지...... 지옥마화구도방은...... 완벽한 줄 알았는데......" 그는 바로 탈혼도 여무극이었다. 그는 몸이 반이나 타들어 가는데도 이를 악문 채 석중옥을 노려보고 있었다. 석중옥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식은 완벽했소. 허점은 바로 당신들에게 있었소." "그...... 그게 무슨...... 말이냐?" 화르르- 무섭게 이글거리는 불길로 인해 여무극의 살이 타들어 가면서 메스꺼운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하나 그래도 여무극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석중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을 모르고 서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듯...... "당신들은 완벽한 진세하(陣勢下)에 움직이고 있었소. 만약 조금만 더 그런 상황이 진행되었 다면 쓰러지는 것은 나였을 것이오." "......!" "하나 당신들 중 한 명이라도 진세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정은 달라지고 마오." 석중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일부러 가슴에 허점을 보였소. 과연...... 당신들 중 한 명은 내 가슴을 베기 위해 손을 썼소. 하나 그 순간 그는 진세의 변화에 미처 따르지 못했고, 때문에 완벽하던 진세가 깨어 지고 만 것이오.""그......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여무극의 몸은 이미 불길에 의해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입인 듯 여겨지는 부분에서 가래 끓는 음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다...... 겨...... 겨우 그런 일로...... 완지옥마화구도방이...... 깨어지다니......" 여무극의 몸은 참혹했다.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것은 실로 참혹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석중옥은 실로 담담한 시선으로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파멸(破滅)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법이오.""으...... 서...... 석중옥...... 너...... 너는 강하다...... 하. 너는 결코 그분을 이기지 못해......!" 불에 타들어 가는 여무극의 음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서서히 죽음의 손이 그의 목을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너...... 호...... 혼자로는 더...... 이상...... 어...... 어쩔 어...... 없......" 화르르륵...... 스르륵! 그의 몸은 타오르는 화염에 의해 한줌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화염 또한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나 꺼져 가는 그 불길과는 달리 석중옥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대체 여무극이 말한 그분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문득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우측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구경할 것이 남아 있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만상공자 이옥당이었다. 한데, "......!" 그의 얼굴을 주시하던 석중옥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이옥당은 넋이 나간 듯했다. 그는 멍하니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와 잿더미로 화한 여무극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가 죽다니...... 그가......!"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마련이오." "으......" 이옥당은 고개를 번쩍 들어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석중옥은 다시 한 번 흠칫했다. 이옥당의 얼굴은 괴기로운 표정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 표정은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괴이했다. 어찌 보면 공포에 질린 것 같기도 했 고, 어찌 보면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석중옥은 이옥당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가 이런 표정을 짓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이옥당이 석중옥을 바라보며 허탈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가...... 여무극이 누군지 아시오?" "......?" 석중옥은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그는...... 그는 그분의 단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소." "그분이라니......?" "그분...... 그......" 만상공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채 입가에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형!" 석중옥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이옥당이 스스로 자신의 심맥(心脈)을 끊은 것을 알았다. "으......" 이옥당이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이 형! 왜 이런 짓을......"으...... 여무극은 그분의 유일한 손자였소...... 그가 죽은 이상 그분 의 노여움을 달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이옥당이 석중옥의 품에 안겨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석중옥은 이미 그의 심맥이 가닥가닥 끊겨 설사 대라신선이 와도 그를 살리지 못함을 알았 다. "이 형!"으...... 문, 문주! 곧...... 무서운 일이 일어나오...... 그분이 여무극의 죽음을 알게 되 면......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소...... 서...... 설사 문주라 하더라도......" "그분이 누구요?"그, 그분...... 여무극이 죽은 이상...... 우...... 우리는 아무틂꼰 못하오...... 사...... 사실...... 사부님을 배반한 건 내杉 것이 아니오...... 그분이 너무도 무서워...... 사...... 사부보다도 더......" "그가 대체 누구요?" 이옥당의 눈은 흰자위로 가득했다. "나...... 난 천룡문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소...... 다..... 그는 우리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인물...... 그 그는 바로......" 이옥당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진 것이다. "......!" 석중옥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그는 말못할 상념에 빠져 이옥당의 시신을 안 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이옥당의 눈을 감겨 주었다. "편히 쉬시오, 이 형! 누가 뭐래도 이 형은 천룡문의 제자요......" 석중옥은 그의 몸을 바닥에 편하게 눕혀 주었다.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어 그 자신도 지금 자신의 심정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다 만 왠지 모르게 가슴 가득 비애가 솟구칠 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장내의 피비린내나는 분위기를 조용히 덮고 있었다. 휘...... 이잉...... 어디선가 한 줄기 야풍(夜風)이 불어와 헝클어진 그의 마음을 달래 주는 듯했다. 제 40 장 괴인등장(怪人登場) <석중옥이 죽는 곳> 그 푯말은 복우산을 내려가는 소로 위에 세워져 있었다. 석중옥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 푯말을 흘긋 바라보았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그의 폐부에 시원하게 들어왔다. 아침이슬의 서늘한 감촉이 발바닥을 간 질이고, 어디선가 산새들의 지저귐이 찌푸려졌던 마음을 상쾌히 씻어 주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웬 섬뜩한 푯말이란 말인가? "누군가 나에게 장난을 하고 싶은 게로군." 석중옥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게 장난을 하고 싶은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숲속의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 그 를 에워싼 인물들은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도는 가공(可恐),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천천히 석중옥에게로 접근해 왔다. 휘-잉! 무서운 기세가 회오리치듯 석중옥을 압박했다. 그것은 엄청난 위력의 진세(陣勢)가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석중옥의 눈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진세인데 이토록 엄청나다니......' 그의 눈빛이 굳어졌다. 바로 그때, "흐흐흐...... 석중옥! 이들은 본(本) 당(黨)에서 자랑하는 백팔천위단(百八天衛團)이다. 이들의 무적백팔망혼진(無敵百八亡魂陣)이라면 네놈의 뼈를 이곳에 묻을 수 있을 것이다." 폐부를 가를 듯 서늘한 음성이 들려 왔다. 석중옥은 단번에 그 음성의 주인을 알아챘다. "쌍혈겁도 단사옥!" "흐흐...... 용케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군. 네가 설마 천하구도의 지옥마화구도방을 격파시 킬 줄은 몰랐다. 하나......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우- 우- 웅-! 엄청난 소용돌이가 쌍혈겁도 단사옥의 음성을 묻어 버렸다. 백팔(百八) 인(人). 백팔천위단의 무적백팔망혼진이 가공할 파공음을 내며 진세를 발동한 것이다. 석중옥은 싸늘한 냉소를 터뜨리며 양손을 휘둘렀다. "낙화섬수!" 쐐애-액! 눈부신 섬광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그러나, 고오오오...... 섬광은 씻은듯 사라지고 돌연 엄청난 압력이 석중옥을 짓눌러 왔다. "으음......!" 석중옥의 온몸이 경직되며, 발 밑이 대번에 한 자나 꺼져 들어갔다. "크하하하...... 무적백팔망혼진은 그까짓 장공(掌功) 따위로 격파될 것이 아니다!" 쌍혈겁도 단사옥의 웃음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무적백팔망혼진! 그것은 백쾌당에서 자랑하는 비장의 절진인만큼 그 위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순, 파아아아아......! 누런 빛이 온통 하늘을 가리며 귀곡성 같은 음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압력이 이토록 세다니......' 석중옥은 전신이 으스러질 듯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내심 침음했다. 그는 단숨에 깨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도 이 백팔망혼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 았다. 순간, 콰콰콰콰......! 다시 엄청난 위세가 그를 짓눌러 왔다. 석중옥은 대천강신공을 끌어올렸다. 위이이잉...... 무서운 압력이 그를 짓누르는 가운데 그의 몸이 미미하게 진동하며 미친 듯한 강력( 力)이 엄청난 위세로 일어났다. 백팔망혼진의 압력과 대천강신공의 힘이 서로 부딪치자 석중옥은 전신의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나 이내 그는 전력을 다해 대천강신공을 회전시켰다. 콰아아아...... 그의 몸이 서기(瑞氣)로 가득 차며 무서운 기세로 돌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이어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그 회오리를 따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대천강신공과 무적백팔망혼진의 경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그 여파로 거대한 회오리 가 발생한 것이다. 순간, "팔황개동!" 석중옥의 신형이 그 원 속에서 더 큰 원을 그리며 돌아 나갔다. 그 속도는 무적백팔망혼진이 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었다. 슈슈슈슈! 그에 따라 눈부신 검광이 쭉쭉 뻗어나고 있었다. 찰나, "으-아악!" "우와-아-!" 참담한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오며, 석중옥의 신형은 어느새 무적백팔망혼진을 벗어나고 있었 다. 단 한 순간, 백쾌당이 자랑하는 무적의 절진이 어이없이 깨어진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꽈르르르- 릉! 파파파파파팍! 석중옥의 손에 들린 공손철검이 연환십절의 가공할 변화를 토해 내자, 그 위세와 빠르기는 일반 무학(武學)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으악!" "우-웩!" 진이 깨어지자 백팔천위단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청을 찢는 가운데 처참한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며, 선명한 피 보라가 박살난 검 조각과 함께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은 조각처럼 뿌려졌다. "으으...... 이, 이럴 수가......?" 쌍혈겁도 단사옥의 신음성이 들려 왔다. 백팔 명의 백팔천위대. 그들이 불과 몇 초 만에 처참히 박살난 것이다. 그 막강한 진세가 온통 피바다 속에 잠겨들었다. 석중옥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거듭되는 격전에 그의 전신은 상처와 피로 지쳐 있었다. 하나 그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오른쪽의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또 뭐가 남았소?"으음...... 지, 지독한 놈......! 본 당의 십 년 공(功)을 네놈이 박살내 는구나." 수풀 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오는 세 인영이 있었다. 가장 좌측의 인물은 바로 쌍혈겁도 단사옥이었다. 중앙의 인물은 검은 정령(精靈)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전신에는 짙은 흑의를 입고 있었다. 짙은 흑발...... 검은 피풍...... 머리에는 흑립(黑笠)을 쓰고, 신발마저 흑단화(黑緞靴)를 신고 있어 자못 신비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일견한 순간, '고수구나! 단사옥보다 최소한 두 단계는 뛰어난 고수......!' 석중옥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흑립인의 기도는 석중옥으로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놀라운 것이었다. '저와 같은 고수가 백쾌당에 있다니...... 저자가 바로 백쾌당주일까?' 석중옥은 심각한 눈으로 흑립인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일 우측에 있는 인물은 머리를 산발한 중년인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비수처럼 예리한 눈빛을 발산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전신에는 섬 뜩한 혈의(血衣)를 입고 있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차라리 잿빛에 가까운 무심한 두 눈뿐이 었다. 더구나 그의 손톱은 길이가 무려 두 자나 되는 시뻘건 혈조(血爪)가 아닌가! 석중옥은 그를 난생처음 보았지만 그 독특한 혈조에서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독조(毒爪) 형곤(荊坤)......" 그렇다. 이 산발괴인이 바로 구대흉인 중의 일인이며, 혈천노조 구양중의 둘째 제자인 독조 형곤인 것이다. 단사옥이 그를 싸늘히 노려보며 씹어 뱉듯 말했다. "석중옥! 네놈이 여무극을 죽인 이상 네놈의 목을 베지 않고는 우리도 살 수가 없다. 각오해 라......!" "겨우 당신들 셋으로 말이오?" 석중옥은 담담히 대꾸하며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단사옥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과연 광오하군. 석중옥! 너는 우리의 합공(合攻)을 받아 낼 자신이 있느냐?" 석중옥은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독조 형곤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신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거요." "......!" 독조 형곤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당신이 사형을 배반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하나 당신이 지금이라도 잘못 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내가 사형에게 용서를 바랄 수도 있소." "......!" 독조 형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심적으로 큰 동요를 일으킨 듯 날카롭던 눈빛이 여지없이 흔들렸다. 하나 이내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 지나간 일이오...... 나...... 난...... 이미 천룡문을 잊었소." "......!" "한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소. 그리고...... 나는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소." 독조 형곤은 넋두리하듯 나직이 뇌까렸다. 석중옥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단사옥이 음충맞게 웃었다. "흐흐...... 석중옥! 괜한 말로 그를 유혹하려 하지 마라. 그는 천룡문 따위에 연연해 대사를 그르칠 사람이 아니다." "......!" "흐흐...... 네놈이 어떻게 지옥마화구도방을 깨뜨렸는지는 모르나 우리들의 합공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석중옥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독조 형곤을 쳐다보았다. 만상공자 이옥당의 죽음은 석중옥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석중옥은 그 때문에 되도록이면 독조 형곤에게도 살수(殺手)를 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하나 독조 형곤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서서히 양손을 쳐들었다. 그의 붉은 손톱이 아침 햇살을 받아 무시무시하게 번뜩거렸다. 뒤이어 단사옥과 흑립인도 석중옥의 좌우에서 서서히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석중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위이이이...... 그들 주위의 공기는 천천히 회오리치고 있었다. 땅위에 쌓였던 낙엽들이 마구 휘날리고, 주 위의 나무들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팽팽한 대치 상태. 이 정지된 상태는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랴! 이놈의 말이 왜 이렇게 느리지?" 난데없이 숲속에서 괴상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것은 흡사 마구 꽹과리를 치는 것처럼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석중옥 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수염난 말이 벌써 늙었나? 좀더 빨리 달리지 못할까!" 찰싹! 어린아이의 볼기를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말을 탄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한데 그 인영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 중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인영이 특이하게 생겨서......? 아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인물이 타고 있는 말에게로 쏠려 있었다. 말. 아니,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나타난 인물이 말처럼 올라타고 연신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바로 얼마 전에 석중옥에게 놀라 도망쳤던 소면낭심 도계조임에랴...... 소면낭심 도계조! 그가 누구인가? 구대흉인 중의 하나로 흉명(兇名)이 자자한 일대마두(一代魔頭)가 아닌가! 그런 그가 한 인물을 업고는 말처럼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입에는 재갈 대신에 낡을 대로 낡은 신발이 하나 물려 있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가 다 떨어진 신발을 입에 물고 엉금엉금 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 관이었다. 하나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소면낭심 도계조의 등에 앉아 연 신 '이랴이랴'를 외치고 있는 인물에게로 쏠렸다. 노인. 그는 꾀죄죄한 옷을 걸친 호호백발의 노인이었다. 한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식!" 석중옥은 그만 고소를 금치 못했다. 노인의 모습이 너무도 가소로웠던 것이다. 노인의 키는 오 척을 간신히 넘을까말까 할 정도였고, 얼굴은 마치 원숭이를 연상케 하듯 익살맞기 그지없었다.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찢어진 새우눈에 주먹만한 딸기코는 술독이 올 라 시뻘겠다. 더구나 멋을 부리려고 했는지 목에는 야하기 그지없는 빨간 수건을 질끈 동여맸고, 오른손 에는 커다란 술병을 든 채 연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한데 손에 든 그 술병이 또한 가관이었다. 그곳에는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솜씨로 여자의 나체화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 척 단구의 노인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헤헤...... 좋구나, 좋아! 명승절경에 멋진 말을 타고 술을 들이키는 신선 같은 나...... 이를 어 찌 속세에 사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단구의 노인은 주기가 오른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술 취한 원숭이, 바로 그것이었다. "꿀꺽꿀꺽...... 크! 역시 술은 미녀를 보면서 먹어야 제 맛이라니까...... 안 그렇냐?" 그는 술병에 그려진 나체화를 보며 소면낭심 도계조의 허리를 발로 쿡쿡 찔렀다. 말, 소면낭심 도계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중인환시리에 이런 모욕을 당하니 어찌 참을 수가 있단 말인 가! 도계조가 대꾸를 하지 않자, "말아! 갑자기 귀머거리라도 됐느냐? 왜 아무 말이 없지?" 노인은 주먹만한 딸기코를 움찔거리며 도계조의 귀를 마구 잡아당겼다. 도계조의 얼굴이 아픔을 참느라 시뻘게졌다. 노인은 귀를 잡아당기다가 이번에는 또 수염을 마구 뽑기 시작했다. "말아...... 어디 아프냐?" "으으......!" 마침내 도계조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 아...... 아닙니다...... 노선배님!" "아프지 않다고?" "그...... 그렇습니다." 노인은 원숭이 같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 이상한데...... 난 아프라고 그랬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단 말이지? 어디......" 노인은 도계조의 귀를 더욱 힘껏 잡아당겼다. "크윽......" 도계조의 얼굴은 우거지상이 되었다. 노인은 그의 코와 수염을 마구 잡아당겼다. "으윽...... 아, 아픕니다...... 모, 몹시 아픕니다......!" 도계조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래? 진짜 아프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선배님!" "건방진 것!" 갑자기 노인이 버럭 호통을 질렀다. "그래...... 주인이 장난을 좀 쳤기로서니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단 말이냐, 감히 말 주제 에......!" 노인은 도계조의 머리와 수염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버르장머리없는 요놈의 말! 내 오늘 단단히 버릇을 고쳐 주고야 말겠다......" "끄윽...... 끅!" 도계조는 아픔을 참느라고 얼굴을 오만가지로 찌푸렸다. 노인은 한참 동안 도계조의 얼굴을 꼬집고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어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어? 여기에도 말들이 있네......" "......!" 중인들은 노인의 괴이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 모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은 노인이 혹시 광인(狂人)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 소면낭심 도계조 같은 인물을 타고 다닐 정도라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다. 절대 보 통 사람일 수가 없었다. "노인장은 누구요?" 쌍혈겁도 단사옥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중인들도 모두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제 41 장 무인지로(武人之路) 노인은 주기로 인해 새빨갛게 충혈된, 조그만 두 눈을 부릅떴다. "허! 그놈의 말 참 건방지구먼. 감히 노부가 누구냐고 묻다니......" 쌍혈겁도 단사옥은 그가 자신을 말에 비유하자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못 했다. "......!" "궁금하면 알려 주지. 에헴! 노부로 말할 것 같으면 복마승마주마자(伏馬乘馬走馬者)라고 하 네. 다른 말로는 천상천하승마독존객(天上天下乘馬獨尊客)이라고도 하지." "보...... 복마승마...... 주마자......?" 쌍혈겁도 단사옥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복마승마주마자란, 즉 말을 굴복시켜 타고 다니는 사람이란 뜻이 아닌가! 천상천하승마독존객이란 또 무언가? 그것은 천상천하에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중인들은 노인의 엉뚱한 익살에 다시 한 번 멍청해졌다. 그때 노인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단사옥을 바라보았다. "호! 이제 보니 네놈은 노부 평생 처음 보는 멋진 백마(白馬)로구나! 노부는 네놈처럼 잡털 하나 없이 새하얀 놈은 보다보다 처음 본다." 그는 목에 맨 빨간 수건을 쓰다듬으며 새우눈을 반짝였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탄 이 늙은 말은 몸이 허약하고 꾀가 많아 영 글러 먹었는데, 이 기회에 젊고 건장한 백마로 바꿔야겠다." "......!" 단사옥은 어이가 없어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흐흐...... 늙은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군." 그의 눈에 서서히 가공할 살기가 뻗어 올랐다. 하나 노인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헤헤...... 원래 야생마일수록 길들이는 맛이 있는 법이지. 말이란 사나우면 사나울수록 일단 길만 들이면 더 잘 따른단 말이야......" 이어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도계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헤헤...... 말아! 그 동안 노부를 업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벼...... 별말씀을......" 도계조는 노인이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만면에 긴장된 빛을 떠올렸다. 그가 간사하게 웃자, "아니야! 네가 비록 미물일망정 노부가 어찌 네 속마음을 모르겠느냐? 너는 필시 지금껏 노 부를 욕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아니야...... 네가 말 안 해도 다 알 수 있어...... 네놈은 필 시 노부를 마구 욕했겠지?" 갑자기 노인의 얼굴이 다시 흉악해졌다. 도계조는 안면이 사색이 되어 급히 더듬거렸다. "아, 아니올시다...... 정말입니다...... 선배님! 맹세코 저는 선배님을 향해 단 한 번도 딴마음을 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정말이냐?"그...... 그렇습니다. 만약 거짓이면...... 제 성(姓)을 갈겠습니다." "이놈! 말 주제에 건방지구나......" "옛?" "이놈아! 너는 말이 아니냐? 말이 무슨 성이 있다고 간단 말이냐!" "저...... 그, 그게......" "잔말할 것 없다. 이것만 봐도 네놈은 노부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으렷 다!" 도계조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 죽지도 않는 미치광이 늙은이 때문에...... 자칫하다간 나까지 미치겠구나......' 돌연 노인은 원숭이 같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띄워 올렸다. 황금빛을 번뜩이는 누런 이가 아침 햇살을 받아 주위를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허헛...... 말아!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노부가 어찌 가만히 있을쏘냐? 그래서 이번 기회에 너를 노부에게서 해방시켜 주고 저 탐스런 백마로 바꿔 타려 한다. 네 생각은 어떠냐?" 도계조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노인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 "어떠냐? 좋으냐?" "네...... 저......" "이놈아! 좋으냐, 싫으냐? 어서 말을 해!" "조...... 좋습니다." 도계조는 큰맘 먹고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니나다를까! "좋다고? 그렇다면 과연 네놈은 지금까지 노부와 같이 다닌 것이 몹시 불만이었나 보구나!" 노인의 눈이 샐쭉하게 찢어졌다. 도계조의 인상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잔뜩 구겨졌다. "아, 아닙니다...... 노선배! 노선배님과 같이 있겠습니다.""아니야......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 는 없지. 그리고 노부는 늙고 힘없는 네놈보다는 저 하얀 놈이 더 마음에 든다." 노인은 갑자기 도계조의 몸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제 편히 쉬거라!" 노인은 히죽 웃으며 도계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 "끄-윽-!" 도계조는 눈동자를 뒤집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사지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새 도계조의 칠공(七孔)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심맥이 노 인의 손에 의해 가닥가닥 끊어진 것이다. 석중옥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때 원숭이 얼굴의 노인이 그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노부가 너무 잔인한 것 같은가?" "......!" 석중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無言)의 시인(是認)이었다. "이놈은 과거에 무수한 악행(惡行)을 저지르고 다녔지. 한번은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간살(姦殺)한 적도 있었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이놈을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의 말에 기광을 번뜩였다. 사실 자신도 노인의 말대로 그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의외로 심기(心機)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작은 키를 발딱 세운 채 뒷짐을 지고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근처에 피바다를 이루며 쓰러져 있는 백팔천위대의 시신을 훑어보았다. "호...... 꼬마야! 저건 네가 만든 걸작이냐?" 그의 작은 눈은 기이한 빛을 띠며 석중옥을 보고 있었다. "그렇소." "흐음! 노부가 듣기로 근자 무림에 석중옥이라는 애송이 하나가 나타나 휘젓고 다닌다던데, 그게 바로 너냐?" "소생이 바로 그 애송이요." "흐흐...... 녀석! 듣던 것보다 귀여운 데가 있군그래." 그는 아예 석중옥을 어린아이 취급했다. 하나 석중옥은 그것이 조금도 불쾌하거나 역겁지 않았다. 아마도 노인의 가식없는 웃음과 눈빛이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노인은 그를 보고 히죽 웃더니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계집애야! 할아버지를 이곳까지 오라고 사정사정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 지 않느냐!" 석중옥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순간, 휘-익! 그림자가 번뜩이며 장내에 두 인물이 나타났다. 불타는 듯한 홍의를 입은 미녀와 흑의노인이었다. 홍의미녀, 정열적인 미모에 폭발할 듯한 몸매를 지닌 홍의미녀는 뜻밖에도 제완완이 아닌 가! 그녀의 옆에 있는 흑의노인은 탐스런 흑염을 기른, 비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제완완은 나타나자마자 의식적인지 석중옥을 힐끔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는 듯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원숭이 같은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헤헤...... 요 계집애야! 그래, 네가 좋아한다는 그놈이 바로 저놈이냐?" 그는 석중옥을 가리키며 짓궂게 물었다. 제완완이 아무리 대담하고 적극적이라도 여인은 여 인이었다. 즉시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변해 버렸다. "하...... 할아버지......!" 그녀는 몸둘 바를 몰라 하며 그만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석중옥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석중옥은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안녕하셨소, 제 낭자?" "아...... 안녕하셨어요?" 제완완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듯했다. 평소의 명랑하고 쾌활하던 그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나 석중옥의 시선은 벌써 그녀를 떠나 노인에게로 가 있었다. 제완완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노인. 그의 정체는 무엇이겠는가! "불초 석중옥이 천애광자(天涯狂子) 제 노선배님을 뵈옵니다." 석중옥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그렇다. 원숭이같이 초라하게 생긴 노인. 그가 바로 천하제일광자라는 천애광자 제력심인 것이다. 천애광자(天涯狂子) 제력심(齊力心)! 오십 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인 천외삼기 중 일인이 아닌가! 성격이 종잡을 수 없고 온갖 기행(奇行)을 일삼아 무림제일의 미치광이로까지 불리는 일대 기인(一代奇人)! 그의 변화 무쌍한 행동과 가공할 무공에 질린 무림인들은 그를 만나는 것 을 염라 대왕 만나기보다 더 꺼려 했다. 그런 그가 오십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나타난 것이다. 과연 그는 무림에 어떤 풍파(風波)를 일으킬지...... 제력심은 석중옥이 자신을 알아보고도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자 뜻밖인 듯 새삼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완완이는 고집이 세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계집애인데 어떤 놈이기에 홀딱 빠져 있나 했더니...... 역시 뭔가 있는 놈 같군그래......" 제완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할아버지-!" "이 계집애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왜 그러느냐? 저놈에게 잘 보이려고 노부를 끌고 나올 때는 언제고......" "......!" "아무튼 네년 때문에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더니 좋긴 좋구나! 멋진 백마도 보고......" 그의 시선은 다시 쌍혈겁도 단사옥에게 향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단사옥은 제력심의 정체를 알자 감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력심을 향해 포권을 했다. "노선배! 소생은 백쾌당의 쌍위(雙衛) 중 백위(白衛)인 쌍혈겁도 단사옥이라 합니다." "쌍혈겁도? 거참 이름 한번 무시무시하네...... 그래, 백마가 두 발로 칼을 잘 휘두른다 이거 지?" 단사옥의 눈초리가 쭉 치켜 올라갔다. 하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감히 발작은 못 하고 정중 히 말했다. "노선배님! 오늘 일은 저자와 본 당과의 일이니......" "참견을 말라 이거지?" "그...... 그렇소이다!" "알겠다!" 제력심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사옥의 얼굴에 반색의 빛이 떠올랐다. "감사......" "히히......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다. 대신에 네놈을 꼭 노부의 말로 써야 되겠다." 제력심은 히죽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단사옥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의 미간에 서서히 살기가 피어올랐다. "흐흐...... 제 선배! 우리가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오산은 무슨 오산? 노부는 그저 자네를 잡아 말로 쓰면 그뿐이네." 마침내 단사옥의 노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제 선배는 꼭 우리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들 생각이시오?"헤...... 손이라니? 발이지...... 백마 가 두 발로 하얀 눈을 어떻게 자르나 보고 싶은데......" 막 발작하려던 단사옥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제력심의 말에 뼈가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백설쌍란도를 아시오?"흐흐...... 노부가 그런 것을 어찌 알겠나? 눈에 미친 작자가 만들어 낸 그런 쓸데없는 것을......" "......!" "원래 백설마도(白雪魔刀) 고란(古亂)이란 놈은 노부보다 더 미친 놈이었지. 그놈이 눈에 미 쳐 죽던 날, 노부는 그놈의 어린 자식을 노부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맡겼었지. 보아하니 네놈은 고란의 아들놈에게서 그것을 배운 모양이구나!" 단사옥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제력심이 설마 자신의 내력을 그리도 상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라 겁이 덜컥 났 다. 그에게 손을 쓸 마음이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제력심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이죽거렸다. "헤헤...... 고란의 아들놈 이름이 천악이던가? 아마 지금쯤은 사십이 넘었을걸......" 석중옥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천악? 그렇다면 고천악은 바로 고란의 아들이란 寬?.....? 그러면 제력심의 가장 절친한 친 구는 바로......'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던 흑립인이 문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전신에서 는 비범한 신태가 떠오르고 있었다. 제력심조차 그를 보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백마(白馬) 대신 이번엔 흑마(黑馬)라...... 네놈은 누구냐?" 흑립인은 그의 앞에 우뚝 선 채 나직한 음성을 흘려 냈다. "난 백쾌당의 쌍위 중 흑위(黑衛)요!" "흑위? 그렇다면 저 백마와 같은 서열이란 말이냐?" "그렇소."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왠지 모르게 듣는 이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장중한 기도가 포함되 어 있었다. 제력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네놈은 저 백마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고수가 틀림없다. 그런데 어찌 백마 따위와 어울린단 말이냐?" "......!" 흑립인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석중옥은 흑립 아래로 내비치는 그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발견했다. 제력심은 혀를 찼다. "너같이 뛰어난 기도를 지닌 자가 백쾌당같이 썩어빠진 놈들과 어울리다니......" "......!" "아깝구나...... 아까워!" 제력심의 음성에서는 진실로 아까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흑립인의 눈에서 짙은 고민과 아픔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건 내 일이오, 제 선배!" 흑립인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한 발 더 앞으로 나섰다. 우-웅! 그러자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라 제력심을 짓눌렀다. 제력심의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했다. "너는 왜 나와 겨루려고 하는냐?" "......!" "네 무공은 노부 평생 드물게 보는 것이다만 내 상대는 되지 않는다. 한데 왜 목숨을 버리 려 하느냐?" "......" 제력심은 안타까운 듯 흑립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흑립인의 기도와 언행(言行)으로 보아 그 가 필시 명성을 떨치던 정파(正派)의 고수(高手)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광인처럼 행동하고 미치광이로 불렸으나, 인재(人才)를 아끼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더구나 그는 과거에 일시의 불찰로 앞날이 창창한 청년고수를 망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일을 항상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흑립인에게 섣불리 손을 쓰려 하겠는가! 흑립인의 두 눈은 고뇌에 찌들어 있었다. "내가 제 선배의 상대가 되지 않음은 알고 있소. 하나 나는 이미 백쾌당주에게 충성을 맹세 한 몸! 그를 위해 오직 최선을 다할 뿐이오." 그의 음성에는 사나이다운 의지와 굳건한 신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문득 제력심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자네는 혹시 대응왕(大鷹王) 위중악(葦重岳)이 아닌가?" 그의 말투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순간, 부르르...... 흑립인의 전신이 지진을 만난 듯 격하게 떨렸다. 석중옥의 눈에도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대응왕(大鷹王) 위중악(葦重岳)! 그는 준남(準南) 응조문(鷹爪門)의 창시자로, 삼십육수(三十六手) 대응조력(大鷹爪力)으로 천 하에 위맹을 떨치던 절정고수였다. 더구나 그는 비환유문의 문주인 탈혼무적환 유종의 동생인 유삼고와 결혼하여 그야말로 앞 으로의 무림을 영도해 나갈 재목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이십 년 전 갑자기 실종되어 버렸던 것이다. "난 대응왕 위중악이 아니오!" 흑립인이 갑자기 악을 쓰듯 외쳤다. 제력심의 눈에서는 신광이 번뜩였다. "아닐세. 자네는 분명 대응왕이 틀림없네." "아니오...... 그, 그건 제 선배가 잘못 안 것이오." "왜 노부를 속이려 하는가?" 제력심은 문득 나직하게 탄식했다. "자네는 이십 년 전 노부가 한때의 호승심(好勝心)을 참지 못하고 패배의 쓴잔을 안겨 준 위중악이 분명하네...... 자네가 노부에게 패한 충격으로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 노부는 얼마 나 후회했는지 모른다네......" "......!" "노부는 그 동안 자네를 찾아 천지(天地)를 헤매고 다녔다네. 자네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였지...... 노부가 다 늙은 나이에 세상에 다시 나온 것도 혹시나 자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네......" "......!" 흑립인의 굳건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나...... 난 대응왕 위중악이 아니오. 그것은 제 선배가 잘못 안 것이오!" 갑자기 흑립인은 크게 소리치며 제력심에게 덤벼들었다. 쐐애-액! 그의 양손이 시커멓게 변했다. "아...... 악마조(惡魔爪)!" 흑립인의 양손이 먹물을 바른 갈고리처럼 새카맣게 변해 오므라진 것을 본 제력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악마조(惡魔爪)! 이것은 절전(絶傳)된 지 이미 삼백 년이 넘은 극악한 마공(魔功)이었다. 썩은 시체 수천 구의 독기(毒氣)를 빨아들여 그 부시독(腐屍毒)을 양손에 집중시킨다. 그 위력은 가히 불가사의...... 양손에서 뿜어 나오는 부시독은 천하의 모든 것을 녹여 버렸다. 언뜻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게 된다. 오죽하면 악마의 손가락이라 하겠는가! 하나 익히기가 너무도 힘들고, 양손이 부시독에 완전히 물들어 그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즉, 무공 이외의 생활에서 양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삼백 년 동안 무림에서는 아무도 악마조를 익히는 사람이 없었다. "자...... 자네가 그 저주받은 마공을 익히다니......" 제력심은 안색이 침통해졌다. 파파파파파...... 흑립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독기에 시체들이 마구 녹아들기 시작했다. 제력심은 허공에서 몸을 선회하며 악마조의 가공할 독기를 피하고 있었다. 뿌시시시...... 석중옥의 손에 쓰러진 백팔천위군의 시신들이 순식간에 한줌의 독수로 변해 버렸다. 과연 악마조의 위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공할 것이었다. 하나 그것으로도 제력심의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제력심은 계속 피하기만 했다. 그는 흑립인이 이 악마조를 익히기 위해 어떤 희생을 무릅썼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신(一身)의 찬란한 명예와, 사랑하는 아내, 충성스런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일생(一生) 을 바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직 제력심을 꺾기 위한 것이었음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차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조의 위력은 제력심이 피해 낸다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제력심은 자신에게 미치는 압력이 점점 가중됨을 느꼈다. 점점 피하기가 힘이 든 것이다. 마침내 악마조는 허공 가득 시커먼 조영(爪影)을 뿌리며 제력심의 전신을 핍박해 들어갔다. 그의 몸이 삽시간에 악마조에 의해 걸레 조각처럼 찢겨져 나가는 듯이 보였다. "하...... 할아버지!" 제완완이 대경 실색하여 부르짖었다. 그 순간, 번- 쩍! 사방을 시커멓게 뒤덮은 조영 사이로 한 줄기 광채가 빛살처럼 번뜩였다. 그것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 뇌전(雷電)이 치는 듯했다. 그리고...... "크...... 윽!" 한 줄기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죽음 같은 침묵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흑립인은 제력심의 바로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흑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흑립인의 얼굴은 무척 위맹스러워 보였다. 구레나룻이 자욱했고, 우뚝한 콧날과 두툼한 입술 이 사내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사내답게 생긴 것이 어떤 것인가 알 수 있었다. 하나, 그의 입에서는 시커먼 핏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그의 가슴은 어느새 쩌억 갈라 져 있었다. 제력심의 안색은 오직 침통, 바로 그것이었다. "위중악...... 과연 자네였군......" 흑립인은 그토록 엄중한 상세(傷勢)를 입었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나...... 난 위중악이 아니오......" 제력심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렇게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아내와 부하들은 아직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 네...... 왜 그들에게 가지 않았나?" 흑립인은 이빨을 악물었다. "나...... 난 대응왕이 아니오...... 그는 이십 년 전 죽었소..... "......!" "나...... 난 위중악이 아니오......" 흑립인은 제력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간절한 애원의 빛이 가득했다. "나...... 난 대응왕이 아니야......"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래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간절한 눈으로 제력심을 바라보았다. 제력심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자네는 대응왕 위중악이 아닐세." "나...... 난 단지 백쾌당의 흑위일 뿐이오." "그래...... 자네는 백쾌당의 흑위일세." 흑립인의 눈에서 급격히 생기가 사라졌다. "대...... 대응왕 위중악은 이...... 이십 년 전에 죽었...... 소. "그래...... 그는 이십 년 전에 죽었 네...... 아무도 대응왕을 죽이지는 못하네." 그제야 흑립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토록 그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던 고통과 번뇌의 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쿵! 그의 우람한 체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하나 그는 이제 안심할 것이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것은 대응왕 위중악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백쾌당의 흑위로 죽은 것이다. 따라서 대응왕 위중악의 이름은 죽은 것이 아니고, 응조 문의 명성도 계속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대응왕은 영원히 죽지 않고 무림인들의 가슴에 남게 될 것이다. 제완완은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무림인(武林人)들의 속성이자 비애였다.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 대응왕 위중악은 목숨을 버리고 명예를 얻은 것이다. 제력심은 묵묵히 위중악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천하제일광인이라는 외호가 무 색할 만큼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자네의 부인을 보게 되면 이 말을 꼭 해주겠네. 대응왕 위중악은 진실로...... 진정한 무인 (武人)이었다고......" 장내는 어느새 숙연해져 있었다. 문득 독조 형곤은 허무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위중악은 악마조를 익히기 위해 북망산에서 이십 년간을 묘지기로 지냈소. 그는 비록 악마 조를 완성했으나 부시독이 온몸에 퍼져 빈사지경에 처하게 되었소." "......!" "그때 마침 당주께서 그를 발견하고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소.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원받 은 은혜를 갚기 위해 당주의 부탁대로 흑백쌍위 중의 한자리를 맡게 된 것이오......" 그의 말은 나직하고 공허한 것 같았으나 중인들은 너무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독조 형곤. 그는 허탈한 눈빛으로 대응왕 위중악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언뜻 그의 눈에 눈물이 비친 것 같았다. 그는 평소에 대응왕 위중악을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라도 위중악을 알게 되면 그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는 그런 사나이였다. 하나 그는 이제 죽었다. 자신의 명예와 응조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편안한 안식과 휴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제 42 장 여인유정(女人有情) "이젠 노부가 나설 차례인 것 같군." 침묵을 깨고 앞으로 나선 인물은 뜻밖에도 제완완과 같이 나타난 흑의노인이었다. 흑의노인. 언뜻 볼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척 비범한 인상이었다. 은빛 수염은 풍성하게 가슴까지 늘어져 있고, 일신에는 묵의(墨衣)를 걸쳤다. 안색이 무섭도록 차갑게 느껴졌는데, 한 손에 새하얀 검을 쥐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물처 럼 고요한 중에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흑의노인의 시선은 단사옥을 향해 있었다. 단사옥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노인은 나에게 볼일이 있소?" "그렇다네." "무슨 일이오?" 흑의노인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자네에게 일전에 죽은 참혼마군 서표는 나의 사제(師弟)였네. 나는 그의 빚을 갚으러 왔 네." "참혼마군 서표의 사형? 그렇다면 당신은......" 단사옥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부는 구천검마(九天劍魔) 육전심(陸戰心)이라고 하네. 들어 보았겠지?" 비록 흑의노인의 음성은 나직하고 차분한 것이었으나, 단사옥의 귀에는 천둥벼락을 치듯 크 게 울리는 듯했다. 구천검마(九天劍魔) 육전심(陸戰心)! 구대흉인 중 서열 삼위(三位)의 인물. 사실 그를 구대흉인 중의 하나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여태껏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악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대흉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검법의 위력이 너무도 살인적(殺人 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좀처럼 무공을 펼치지 않았으나, 일단 검을 펼치기만 하면 절대로 상대방을 살려 두는 법이 없었다. 그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적인 검법 때문에 그는 구대흉인 중의 하나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하나 그의 확실한 무공 능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껏 그와 겨루어 살아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성이나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 었기에 혈천노조와 건곤일마에 비해 낮게 평가된 것이다. 단사옥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감히 방심치 못하고 전신을 바짝 긴장시킨 것이다. "서표와 나는 정당한 비무를 했을 뿐이오." "......!" "그가 죽은 것은 단지 나보다 무공이 낮았기 때문일 뿐,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소." 육전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하나 서표는 사부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네...... 비록 성질이 잔인하고 오 만하기는 했지만 노부에게는 둘도 없는 사제일세......" "......!" "그가 정당한 비무로 목숨을 잃은 이상 노부도 정당한 비무로 그의 복수를 해주고 싶네." "......!" 단사옥은 타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육전심을 쏘아보았다. 그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고수가 아닌가! 결코 상대가 두려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좋소! 당신과 비무를 하겠소." "고맙네." 육전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자루를 어루만졌다. "자네가 전설적인 백설쌍란도를 익혔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나 노부의 참광마검(斬光魔劍) 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네." "......!" 단사옥은 삭막한 미소를 지었다. "백설쌍란도에는 완성되지 않은 절초가 하나 있소. 바로 백설무영단(白雪無影斷)이라는 것이 오." "......!" "나는 지난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백설무영단을 완성시켰소. 한데 아직껏 그것을 펼쳐 볼 기회를 갖지 못했었소." "......!" 육전심은 두 눈을 비수처럼 예리하게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사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마땅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오, 백설무영단을 처음으로 선보일 만한......" "무척 안타까웠겠군." "그렇소. 한데 이제 나는 그 대상을 찾은 것 같소." "다행이군." "난 석중옥에게 이 초식을 보여 주고 싶었소. 하나...... 그보다는 당신이 더 나을 듯하오." "허......!" 육전심은 희미한 미소를 운무처럼 머금었다. "노부가 늙었다고 너무 얕보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단사옥의 전신에서 서서히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육전심도 마찬가지였다. 물 흐르듯 차분한 기도를 나타내던 그는 태산인 양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침묵. 터질 듯한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터질 듯 사위가 팽창되고, 드디어 영겁(永劫)의 정적 을 찢어발기듯 시퍼런 섬광이 작렬했다. 번-쩍! 두 줄기의 섬광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상대의 몸을 휘감았다. 중인들은 그 섬광에서 주위를 뒤덮을 듯 떨어져 내리는 백설과 폭발하듯 피어오른 한 줄기 광선을 동시에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환영처럼 중인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쾌(快)! 천하에서 이들처럼 빠른 손을 지닌 인물들이 또 있을까? 찰나간에 그들은 모든 생(生)의 정 열과 심혼(心魂)을 불태워 서로 일격을 뻗어 낸 것이다. ...... 싸움은 끝났다. "......!" "......!" 육전심의 가슴에는 길게 두 줄기의 상흔(傷痕)이 그어져 있었다. 그 상처는 무척 깊어 언뜻 보기에도 위태로운 것이었다. 하나 육전심은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사옥은 조그만 상처도 없었다. 그런데...... 털썩! 쓰러진 것은 육전심이 아니라 단사옥이었다. 단사옥은 바닥에 무릎을 굽히며 육전심을 올려 다보았다. "이...... 이 초식은......?" "참광난분(斬光亂紛)이라네." "참광난분......" 문득, 주욱! 단사옥의 배가 갈라지며 내장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좋았소...... 그리고 고, 고맙소...... 나는...... 나...... 난 석중옥에게 죽기는 싫었...... 거든......" 서서히 미약해지는 음성...... 육전심은 나직이 탄식했다. "자네의 무공이 약했던 것은 아닐세. 단지 자네는 경험이 부족해 참광난분의 마지막 변화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뿐일세......" 그는 단사옥의 시선을 그윽히 응시했다. "자네의 무공은 정말 훌륭했네......" "흐흐흐......" 단사옥의 입에서는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그의 고개는 차가운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육전심은 뭔가 허탈한 표정으로 단사옥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하나 육전심은 곧 본래의 무표정한 안색을 되찾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독조 형곤뿐이었다. 형곤은 착잡한 눈빛으로 단사옥과 위중악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허무와 후회로 텅 비어 있었다. 석중옥은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그놈은 나에게 넘기게, 사제!" 한소리 웅후한 음성과 함께, 장내엔 어느새 우람한 체구의 괴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일까? 흡사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 성성한 백발을 미풍에 휘날리며 우뚝 서 있는 노인. 마치 투명한 흰 유리를 한 겹 씌운 듯한 안색에, 손에는 금빛 찬란한 이 장 길이의 쇠사슬 을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으리라! "사...... 사부......" 독조 형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렇다. 괴노인은 바로 혈천노조 구양중인 것이다. 구양중은 독조 형곤을 바라보며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놈! 네놈의 눈에 이 노부가 사부로 보인단 말이냐?" 그의 음성은 치솟는 노화와 분노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쇠라도 녹일 듯한 가공할 살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우...... 웅......! 주위의 공기조차 그의 일갈에 놀라 요동을 치지 않는가!"이...... 이놈...... 네놈이 감히 노부를 배반하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사, 사부...... 님......" 독조 형곤은 취한 듯 비틀거렸다. 혈천노조 구양중은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아직도 나를 사부라 부르는구나...... 이 나쁜놈!" "뇌...... 뇌옥을 벗어나셨군요......" "그래, 흐흐...... 네놈은 미처 생각 못했겠지?" "우......!" 형곤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는 구양중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을 휘감아 오는 극도의 공포! 그것이 체념과 절망으로 뒤바뀌는 데에는 절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문득 형곤의 눈빛이 흐려지며 절망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후...... 불안했습니다......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이놈......!" 형곤은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 믿어지지 않겠지만...... 전 사부를 진정으로 존경했습니다." "이놈! 거짓말하지 마라!" 구양중은 싸늘하게 외쳤으나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형곤은 암울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부는 내게 부모님 같은 분이셨소......" "이, 이놈! 그런데...... 왜 노부를 배신했느냐?" 형곤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강했습니다." 그 말에 구양중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누구냐? 그가 누구냐? 어느 놈이 너희들을 사주했느냐?" 형곤은 텅 빈 동공을 들어 하늘을 향했다. "사부님! 그는 사부님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사형도...... 그 치밀하고 무서운 대사형도 그에 비하면 피라미에 불과합니다......" 주르르...... 문득, 그의 입가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구양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곤아야......!"사...... 사부님...... 그...... 그 동안 정말 뼈가 저리도록 맨颯윱求?..... 하...... 하지 만...... 저는......"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제 여무극이 죽은 이상...... 그는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을 하나도...... 사...... 살려 두지 않을 겁니다......" "누구냐? 그놈이 대체 누구냐?"사...... 사부님도 그를 당할 수 없습니다...... 피...... 피하세 요......" 형곤의 몸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심맥을 절단한 것이다. "그...... 그는 도......!" 형곤의 목이 꺾였다. 그 순간 구양중은 자신의 몸에서 살점 한 덩어리가 베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 다. 아무리 배신자라 하나 한때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아니었던가?이...... 이 녀석...... 결국 이렇게 될 것을......" 구양중은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그의 몸을 휘감았던 복수와 분노의 불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픔이 그의 가슴을 저밀 뿐...... 석중옥은 묵묵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구양중의 지금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이미 이옥당의 죽음에서 그런 감정을 맛보았지 않았는가! 아무리 배신자라 하나 그들은 모두 천룡문의 문하인 것이다. 석중옥은 문득 지극한 슬픔과 함께 한 줄기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암중에 이들을 휘어잡고 있는 그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여무극의 할아버지이며, 구양중보다 더 무섭다는 그.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문득 탄식을 하며 형곤의 시신을 바라보던 구양중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휘이이잉......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맞으며 그는 천애광자 제력심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제 형!" 제력심은 몸을 가늘게 떨며 구양중의 전신을 핥듯이 보고 있었다. "저...... 정말 구양 노제, 자네인가?" "그렇소. 제 형의 못난 친구 구양중이오." "자네가...... 자네가......" 제력심은 격동으로 작은 몸을 떨며 더듬거렸다. 구양중은 나직이 탄식을 했다. "삼십 년 만이구려." "그, 그래...... 그때 노부는 자네에게 고란의 아들놈을 맡겼었지......" "나는 그놈에게 십 년 동안을 갇혀 있었소." 제력심의 안색은 보기에도 딱할 만큼 구겨져 있었다. "모...... 모두 노부의 잘못일세." "아니오, 그것이 어찌 제 형의 잘못이겠소? 제자를 잘못 가르친 노부의 죄가 더 크지......" "노부는 그 동안 자네의 소식을 듣지 못해 죽은 줄로만 알았다네."허헛...... 이미 죽은 것이 나 다름없소...... 내 인생은......"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사랑하던 제자들의 배신. 그것은 이미 그에게 살아 갈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린 것이다. 석중옥이 앞으로 나섰다. "사형! 왜 그렇게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형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사제......!" "그리고 잊으셨습니까? 이들을 배반하게 만든 그 인물을......" 순간 구양중의 눈에서는 다시 불 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천룡문하(天龍門下)는 받은 빚은 꼭 돌려주고야 맙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말이지......!" 구양중의 전신에서는 불 같은 투지와 무혼(武魂)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암중의 인물에 대 한 분노가 그의 투혼을 다시 일깨워 준 것이다. 그때, "아니...... 저 꼬마놈이 자네의 사제란 말인가?" 제력심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새우눈을 부릅떴다. 그뿐만이 아니라 구천검마 육전심과 제완완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혈천노조 구양중! 그의 나이는 벌써 구십이 넘었다. 더구나 그들이 알고 있기로는 구양중의 배분은 당금 무림 에서 천외삼기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약관에 불과한 석중옥이 그의 사제라니...... 처음으로 구양중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그는 노부의 막내사제요." "호...... 그것 참!"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력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럼 노신선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신단 말인가?" 구양중은 그의 그런 모습에 지금까지의 울적했던 마음을 잊고 오랜만에 빙긋 웃음을 띄웠 다. "그렇소. 사제의 말로는 그분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시다고 하오.""그...... 그럴 수가...... 그분의 춘추가 올해 몇이시거늘......" "소제가 삼십 년 전 그분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그분의 세수는 이미 이백 하고도 육십오 세셨소." "그, 그럼...... 지금은 이백구십오 세......" 제력심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아니, 그것은 제력심뿐이 아니었다. 육전심과 제완완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세상에...... 인간이 과연 삼백 살까지 살 수 있단 말인가?' 제완완은 두 눈을 귀엽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석중옥의 사부인 노신선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는 석중옥에게 물어 볼까 하고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한 눈빛을 흘리며 묵묵히 제력심과 구양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완완은 그 모습을 보자 약이 바짝 올랐다. '흥! 목석 같으니...... 난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갑자기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말을 하고 있는 제력심에게 불쑥 다가갔다. "할아버지!" 그러자 과연 구양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 형! 저 아이는 누구요?" "헤헤...... 버르장머리없는 노부의 손녀라네. 완완아! 인사드려라...... 할아비의 가장 친한 친구 이니라." 제완완은 쪼르르 달려가서 공손하게 절을 했다. "제완완이 구양 할아버지를 뵈옵니다." 구양중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몹시 귀여운 듯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 제 형과는 딴판으로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로군......" "아니, 노부와 딴판으로 생겼다니......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는가?" 제력심이 얼굴을 찌푸리며 자못 험상궂게 대들었다. 그래 봐야 성난 원숭이 같은 몰골이지만...... "헛헛헛...... 사실은 사실이 아니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제 형의 얼굴은 영락없이 원 숭......" "구양 노제, 정말 이러긴가?" 제력심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구양중은 찔끔하여 급히 둘러댔다. "허허...... 사실 인간을 어찌 외모로만 평가하겠소? 제 형은 외모는 비록 볼품없으나 그 지고 (至高)한 학식과 덕망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바가 아니오?"지...... 지고한 학식과 덕망이 라...... 헤헤! 그, 그렇지...... 정도는 돼야지." 제력심의 안색이 활짝 풀렸다. 구양중은 그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헛헛......!" 그때 제완완이 석중옥을 보며 정감 어린 목소리로 은근히 물었다. "석 상공! 노신선이란 어느 분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석중옥은 그녀의 물음에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오." 제완완은 안광을 번뜩였다. "저에게는 숨겨야 하나요?" "숨기는 게 아니라 천기(天機)를 누설할 수 없다는 말이오. 정 궁금하면 나중에 제 노선배님 께 물어 보구려." 제완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궁금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안광을 번뜩이며 석중옥을 향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석 상공,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석중옥은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시오." "호호호...... 석 상공께선 응락하시는 건가요?" "나의 힘이 미칠 수 있고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소." 천하제일의 기재답게 그의 대꾸는 조금도 허점이 없었다. 그는 제완완이 제력심을 닮아 가끔 엉뚱한 짓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둔 다음 자기를 위한 돌파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 그것은 헛되이 심기를 낭비한 결과가 되었다. 제완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석 상공, 감사해요." 제완완은 웃음띤 얼굴을 바꾸어 정색을 했다. "저와 제 할아버지에게 석 상공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석중옥은 그녀가 설마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지라 흠칫했다. 그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허허헛...... 제 낭자, 그럴 필요가 있겠소?" 제완완은 눈썹을 치켜 떴다. "왜 그러세요? 안 되나요?" "낭자, 낭자와 제 노선배님은 굳이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소?" "안 돼요. 당신은 우리의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전 아직 당신의 얼굴조차 알지 못 하잖아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낭자...... 직접 보게 되면 아마 실망할 거요. 그보다는 그냥 이대로 있는 것이 일종의 호기심이라도 남아 있어 더 좋지 않겠소?" 제완완은 고개를 저었다. "전 당신이 뭐라고 하든 기어코 진면목을 보고야 말 거예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제력심이 갑자기 맞장구를 쳤다. "그래...... 우리 손녀 잘한다...... 그렇지 않아도 저 녀석의 낯짝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구양중도 마찬가지. "허허......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까지 사제의 얼굴조차 확실히 모르고 있었군그래."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석중옥도 더 이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 낭자께서 실망이 크실 텐데......" 제완완은 냉소를 터뜨렸다. "흥! 그렇게 얼굴에 자신이 없으면 아예 복면을 쓰고 다니지 그래요?" 그녀는 얼굴을 싸늘히 굳히며 말했다. "그만두세요. 전 더 이상 조르지 않겠어요. 진면목을 보여 주시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세 요." 그녀가 토라져서 아예 몸을 돌려 그를 외면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제력심은 평소에 제완완을 끔찍이도 귀여워했는지라 지금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도와 주지 않을쏘냐! "이놈아! 사람 복장 터지게 하지 말고 어서......" 석중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두 손을 치켜 들었다. 그는 헝클어져 내리덮인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중인들은 갑자기 눈이 환해짐을 느꼈다. 구양중은 자신의 어린 사제가 이리도 준수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지라 깜짝 놀랐다. '정말...... 노부 평생 처음 보는 미남이로고......' 제력심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더니 갑자기 버럭 외쳤다. "완완아! 빨리 봐라......!" 제완완은 여전히 외면한 채로 있었다. 석중옥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낭랑하게 말했다. "제 낭자, 난 가봐야겠소." 제완완은 아직도 성이 안 풀렸는지 냉랭히 소리쳤다. "가고 싶으면 가실 일이지 뭐 때문에 알리는 거예요?" "하하...... 낭자에게 인사를 하고 가야 예의가 아니겠소? 낭자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다시 만날 수 없으면 없는 거지...... 뭐, 뭐라고요?" 그녀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석중옥의 안면에 멈추자 움직일 줄 모르고 굳어버렸다. 석중옥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제완완...... 이윽고 그녀는 입이 헤벌어졌다.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아...... 석, 석 상공...... 당신......" 마침내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딱달라붙은 듯이 그의 얼 굴만을 바라보았다. "오...... 난 몰라요......"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구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비비꼬았다. 그녀의 몸짓은 쥐구멍이라도 찾는 듯 너무나 당황한 것 같았다. 석중옥은 쑥스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슬며시 돌렸다. 제완완의 얼굴은 완전히 홍시 같았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화를 내는 것인지, 수줍음인 것 인지...... 석중옥은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제 낭자! 그래도 화가 덜 풀리셨소?" 제완완은 교태 어린 웃음을 머금고 낭랑하면서도 짧게 내뱉었다. "몰라요!" "하하...... 제 낭자! 낭자의 요청에 따라 진면목을 보여 주었으니 이제 다시 얼굴을 가려야겠 소." 제완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꼭 안았다. "몰라요!" 그 말은 어쩌면 그녀의 전용어인 듯했다. 제 43 장 양수집병(兩手執餠) 황산대혈겁(黃山大血劫)! 그것은 한백의 장보고에서 벌어진 처참한 혈극(血劇)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혈극에서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 팔십여 명이 참변을 당했었다. 그것은 가히 무림에 커 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사람들을 경악과 공포에 떨게 했다. 모두들 황산대혈겁 이후 무림이 다시 한바탕 피바다 속에 빠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황산대혈겁 이후 무림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폭풍전야(暴風前夜)와 같 은 일촉즉발의 고요라 생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무림에 실로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의 실종! 무림인들이 이를 갈며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으로 몰려들었을 때,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 던 것이다. 누구도 그들이 어떻게, 왜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했다. 남궁검문과 사천당문!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실로 누구도 예측치 못했던 대괴변(大怪變)이었다. 이 괴변에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의아해 하면서도 불안해졌다. 무언지 모를 괴이한 기운이 무림을 서서히 죄어 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주 가공할 기운이...... * * * 비〔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폭우(暴雨)였다. 사위는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어두웠고, 폭우는 천지를 집어삼킬 듯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미친 듯 퍼부어지는 폭우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한 인영이 있 었다. "으...... 마, 막아야 한다......" 인영은 거의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누구인가? 이 지독한 폭우 속에서 사력을 다해 걷고 있는 이 인물은......? 꾸역꾸역...... 인영의 입과 코로 시커먼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 저, 저주받은 그 마법(魔法)이 완성되기 전에...... 누군가가 그것을 막아야 한다......!" 장대 같은 빗줄기를 전신에 받으며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인영의 동공(瞳孔)은 이미 흐릿 하게 풀려 있었다. 주위는 적막한 어둠에 잠겨 있고,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폭우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한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엄청난 상세를 입은 채 미친 듯이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단 말인 가? 처음에는 제법 고급스런 백의였을 인영의 옷은 퍼부어지는 폭우와 몸에서 흐르는 피로 인해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크으...... 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는데......!" 인영은 제대로 걷기도 힘든 듯 연신 앞으로 고꾸라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쏴아아- 쏴아-! 폭우가 그의 몸을 통째로 쓸어 버릴 듯 퍼부어대고 있었다. 인영...... 그는 대체 누구인가? * * * 여의부(如意府)! 여의부는 천하의 명산(名山)으로 알려진 북안탕산(北雁蕩山)에 위치해 있었다. 강호제일문파! 당대의 최강집단인 이곳은 곧 천하무림의 최중지(最重地)라고 할 수 있었다. 의사청(議事廳). 거대한 여의부의 의사청에는 지금 수십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한결같이 태산 같은 기도를 풍기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알아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우선 묵운편 사마진평을 위시하여 오행수 조담, 천뢰장 맹강,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절세신 유 손중양 등 칠대명인들......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을 비롯한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인물들...... 그리고 단천검객 비몽, 해천쌍로, 금도공자 전붕비, 무흔풍 한쾌...... 또한 백상아를 비롯한 노연홍, 임소군, 호파파 등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야말로 당금 천하의 초강고수들은 거의 빠짐없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문득 무흔풍 한쾌가 몇 가닥 안 난 수염을 비비꼬며 투덜거렸다. "남궁검문과 사천당문 놈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예 코빼기도 볼 수 없으 니......" 이들은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의 실종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젠장...... 황산에서 당한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별렀는데...... 하늘로 꺼졌나, 땅으로 숨었 나?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 중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의혹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 "현제(賢弟),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들의 행동에 어떤 비밀이 있는 것 같은가?" 한쾌는 가장 중앙에 앉아 있는 한 인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만인의 앙시(仰視) 속에 묵묵히 앉아 있는 흑의서생. 그는 바로 당금 무림의 제일고수로 떠 오른 무적신검경천수 석중옥이 아닌가! 석중옥은 여전히 흑발을 늘어뜨린, 약간은 퇴폐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밖에는 없 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중인들은 이미 석중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여의부주인 여의노사 백철군이 의문의 실종 을 당한 지금, 그는 자연스럽게 중인들의 우두머리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한 인물의 손에 조종되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아......!" "어찌 그런......!" 중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한쾌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신검 남궁뢰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데...... 더구나 나는 우문양 같은 거마(巨魔)를 수하로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네." "복우산에서 천패지살과 건곤일마가 저를 협공했을 때 그들은 지존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 리고...... 황산의 장보고에서 만난 혈견마도 종일심도 자신의 배후에 엄청난 인물이 있다는 식의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말한 그 인물이 신검 남궁뢰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그 말에 중인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검 남궁뢰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천패지살이나 건곤일마 같은 인물들을 수하로 거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궁검문이나 사천당문, 그리고 천지회는 모두 하나같이 당금 강호를 주름잡는 초강세력들 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토록 단합된 행동을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들의 배후를 조종하 는 인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천하제일의 지자(智者)라고 불리는 절세신유 손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석 대협의 의견에 동감이오. 그들이 단순한 합작을 했다고 보기에는 그들의 개성이 너무 강하오. 결국 누군가가 그들을 완벽하게 조종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오." 과연 말을 듣고 보니 중인들은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그렇다면 그 거대한 세력들을 배후조종하는 암중의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무겁게 굳어졌다. 문득 한쾌가 답답한 듯 중얼거렸다. "건곤일마나 남궁뢰가 누구의 조종을 받고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구먼......!" 석중옥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비록 추측에 불과하지만 추측이 맞는다면 머지않아 무림은 더욱 무서운 혈겁을 당 하게 될 것입니다." "......!" 중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은 점점 무섭게 변하는 것이었다. 그 누가 상상인들 했겠는가? 남궁검문, 사천당문, 천지회 등...... 당금 강호의 초강세력인 강호육패 중 삼 개 세력의 배후를 조종하는 인물이 있다니......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체 그 암중인물의 세력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 * * 창궁헌(蒼穹軒). 여의부의 그 방대한 건축의 후원. 그 깊숙한 곳에는 한 채의 고아한 누각이 있었다. 그 누각의 주위에는 송백림(松栢林)이 무성했다. 그토록 세차게 퍼붓던 폭우가 어느새 그치고, 만월(滿月)이 흑야(黑夜)를 가렸다. 그 교교한 달빛이 누각과 송백림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 추야(秋夜)가 깊어 가고 있었다. 창궁헌 안. 그곳에는 백의미녀 한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인가? 무림인들은 단연코 그녀를 꼽을 것이다. 천중일미 백상아. 백상아. 그녀는 탁자에 팔을 올려 아름다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궁등(宮燈) 아래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특히, 긴 속눈썹의 매력은 가히 천상(天上)의 미(美)를 더해 주는 듯했다. 한데, "아......!" 절세미녀 백상아는 탄식을 했다. 그 무엇이 천하제일미녀의 속을 상하게 한 것일까? 그 순간이었다. "상아, 무슨 일 때문에 한숨을 쉬고 있소?" 지극히 부드럽고 다정스런 음성이 그녀의 등뒤에서 들렸다. "앗? 누구......"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빙글 돌려지더니 바로 눈앞의 한 흑의서생과 얼굴이 마주치게 되었다. "중옥!" "상아!" 백상아는 석중옥의 믿음직한 가슴에 교구를 던졌다. 석중옥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을 덮쳤다. 백상아는 석중옥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는 놓으면 사라질세라 석중옥의 허리를 굳 게 안은 채 자신의 불타는 입술을 내맡기고 있었다. 뜨겁고 진한 애정의 불길이 그녀의 입을 통해 영혼을 불살랐다. "......!" 이윽고, 석중옥과 백상아는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백상아의 얼굴에 그윽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것을 본 석중옥이 빙그레 웃었다. "상아! 못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려." 석중옥은 미소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붉은 뺨을 매만졌다. 그 말에 백상아는 눈을 흘겼다. "흥! 거짓말 마세요. 당신 때문에 제 이마에 주름살이 잡힌 걸 아세요? 책임지세요!" 석중옥은 픽 웃었다. "주름살이라니...... 당신의 이마는 여전히 백옥 같소." "흥!" "정말이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천하제일의 미녀요!" 석중옥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어머......!" 백상아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녀의 내심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올랐다. 하나 짐짓 겉으로는 토라진 척했다. "흥!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세요, 이 바람둥이!" "바람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석중옥은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안으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음......!" 백상아는 전신이 뜨거워졌다. "하하하......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데 내가 어찌 바람을 피운단 말이오?" 석중옥은 낭랑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백상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쏘아붙였다. "흥, 뻔뻔스럽기는...... 임 언니의 일이 기억 안 나세요?" "임 언니?" "임가장의 임 부인 말이에요!" 그제야 석중옥의 얼굴에 찔끔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사, 상아...... 그래서 말인데......" "흥!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그녀는 토라져 휑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석중옥은 어쩔 줄 몰라 그녀의 뒤에서 손만 비벼대고 있었다. 천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지 정말 암 담했다. 끼-익! 그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들어왔다. 궁장미부, 그녀는 다름 아닌 임소군이었다. '이런......!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하필이면 이런 때......' 석중옥은 약간 당황했으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누님!" "누가 당신의 누님인가요?" 임소군은 기품 어린 얼굴에 매서운 빛을 띄우며 그를 노려보았다. 천하의 석중옥도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누...... 누님!" 임소군은 얼굴 가득 싸늘한 빛을 떠올렸다. "흥, 나는 당신 같은 바람둥이 동생을 둔 적이 없어요." 석중옥은 어쩔 줄을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실로 그로서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킥!" 그때, 등을 돌리고 있던 백상아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그제야 석중옥은 그녀들이 자신을 놀린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니나다를까? "호호...... 중옥! 한 번만 더 바람피우면 그때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백상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활짝! 그녀가 웃자 온 방안이 온통 화사함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임소군이 얼굴에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 "호호...... 아매가 웃지만 않았어도 좀더 혼을 내주는 건데......" '아매? 그녀들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석중옥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호호......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요, 어서 이리로 앉지 않고?" 백상아가 의자를 내밀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석중옥은 의자에 앉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후유-!" "왜 그래요?" "이제야 세상의 남편들이 어떻게 공처가가 되는지 알겠구려." 석중옥의 말에 두 여인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호호......" "호호...... 그러기에 누가 바람을 피우랬어요?" 석중옥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두 여인은 정말 우열을 가리기 힘든 미녀들이었다. 백상아가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라면, 임소군은 활짝 개화된 연꽃이었다. 아무리 무심한 석중옥이라 해도 이토록 아름다운 두 미녀와 함께 마주앉아 있으니 황홀해 지는 것 같았다. 임소군이 활짝 웃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호호...... 양손으로 두 꽃을 꺾으니 기분이 어떠세요?" 석중옥은 멋쩍게 웃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소. 한꺼번에 꺾지 않아서......" "뭐라고요? 엉큼한 양반!" 백상아가 눈을 치켜 뜨며 그의 팔을 때렸다. 석중옥은 두 여인이 이미 의기 투합한 것을 알고 불쑥 용기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팔을 토닥거리는 백상아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아까 나를 놀린 벌이오." "어멋!"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 석중옥의 두꺼운 입술은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힘껏 빨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바둥거렸으나 이윽고 팔을 돌려 그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혀와 혀가 서로 교 차되며 상대의 타액을 한껏 음미하고 있었다. 임소군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며 석중옥과 백상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상아는 몹시 부끄러운 듯했다. 더구나 옆에는 임소군이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석중옥을 흘겨보았다. "흥...... 나쁜 사람!" "하하...... 이것은 모두 상아, 당신이 자초한 일이오." "아매, 기분이 어땠어?" 임소군이 짓궂게 물어 보자 백상아의 얼굴은 그대로 홍시가 되었다. 그때, "하하...... 벌은 누님도 받아야겠소." 석중옥이 웃으며 돌연 임소군의 몸을 바짝 껴안았다. "어멋! 안 돼......" 그녀의 마지막 말은 석중옥이 입 속으로 삼켜 버리고 말았다. 석중옥은 농염한 그녀의 몸을 껴안으며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그녀는 몇 번 꿈틀거리다가 이윽고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오히려 말랑말랑한 혀를 그의 입 속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석중옥의 손은 그녀의 등을 지나 풍만할 대로 풍만한 둔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백상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턱을 괴고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석중옥의 손이 불쑥 그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으나 그대로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흥! 바람둥이 같으니......' 백상아는 예쁘게 입을 삐죽거렸다. 하나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석중옥은 양손에 두 미녀를 안은 채 무릉도원(武陵桃源) 속을 거닐고 있었다. 이윽고 석중옥은 임소군의 입술에서 천천히 자신의 입을 떼었다. 임소군은 몽롱하고 황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중옥이 빙긋 웃었다. "기분이 어떻소, 누님?" 임소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두들기며 품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이 소녀 같은 모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이때, "중옥!"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임소군이 그윽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오?" "제 낭자와는 어떤 사이예요?" 뜻밖의 물음에 석중옥은 약간 당황했다. "그...... 그녀와는 아무런 일도 없었소." 그의 오른쪽 팔에 안겨 있던 백상아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흥, 그런데 왜 그녀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뜨거운가요?" "상아...... 그건 오해요!" "오해는 무슨...... 당신이 그녀에게 이상한 행동을 했으니까 그녀가 그러는 것 아니에요?" "허...... 참!" 석중옥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었다. 임소군이 그의 품에서 소곤거렸다. "그렇게 우습게만 생각할 게 아니에요, 중옥!" "아니! 누님까지도......"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당신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어요?" "......!" "다만 제 낭자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예요. 그녀 성격으로 봐서 만약 당신이 그녀를 받아 주지 않으면 자살이라도 하고 말 거예요." "......!" 석중옥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그녀는 천애광자의 광기 어린 혈통(血統)을 이어받았으니......' 그는 만약 그럴 경우 제력심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어떤 일을 벌일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임소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매와 나는 이미 타협을 보았어요." "......!" "그녀를 우리들의 자매로 인정하기로 말이에요." "누님!" 임소군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문제는 당신의 마음이에요, 중옥!" "그래요, 중옥! 당신도 그녀와 같은 미인 아내가 한 명 더 생기는 것을 싫어하진 않겠죠?" 백상아가 그의 귓불을 가볍게 물며 짓궂게 웃었다. 석중옥은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임소군은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동생은 뭐가 불만이지요? 한꺼번에 세 송이의 꽃을 꺾을 수 있을 텐데......" 석중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휴...... 비로소 알겠구려!" "무엇을요?" "당신들의 고집이 얼마나 센가를 말이오." "호호! 그걸 이제 아셨어요?" "호호......" 두 미녀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방안은 온통 그녀들의 미소로 인하여 환해지는 것 같았다. 석중옥은 두 여인에 대한 애정이 불끈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여인을 안은 팔에 힘 을 주어 꼬옥 껴안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고...... 공주님!"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그들은 급히 떨어졌다. 두 여인의 얼굴은 동시에 새빨개져 있었다. 백상아는 귀엽게 석중옥을 흘겨본 뒤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관(關) 위장(衛將)?" 그녀는 그 목소리가 여의부의 삼대위장(三大衛將) 중 하나인 철면신옹(鐵面神翁) 관후룡(關 候龍)의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하오나 너무도 급한 일이라......" "급한 일이라뇨?" 백상아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예! 남궁검문의 소문주인 남궁유룡이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왔습니다." "남궁유룡이?" 중인들은 흠칫 놀랐다. "예! 그자는 천하의 안위(安慰)를 뒤흔들 중대한 일을 알려야 한다고......" "천하의 안위를 뒤흔들 중대한 일?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백상아가 급히 물었다. "예, 그의 상세(傷勢)가 너무도 위독한지라 전낭자 호파파, 호 여협께서 상처를 치료하신다 고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습니다." "호파파? 뜻밖인데...... 호파파에게 그런 자비심이 있을 줄은." 한데 그때였다. "저...... 전낭자 호파파!" 갑자기 석중옥이 펄쩍 뛸 듯 놀라 외쳤다. "무슨 일이에요, 중옥?" 백상아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석중옥의 얼굴은 뭔가 놀라운 일을 발견한 듯 대변해 있었다. "그렇군! 바로 그녀였구나......" 그의 눈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남궁유룡이 위험하다!" 그는 의미 모를 소리를 외치며 그대로 몸을 날려 밖으로 날아갔다. 파아아...... 얼마나 급박했던지, 그의 몸은 그대로 천장을 뚫고 솟구쳤다. "주...... 중옥!" 임소군과 백상아가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토록 침착하던 석중옥이 이리도 놀란 것일까? 제 44 장 천비령주(天秘令主)크으으...... 어, 어서 석중옥을...... 석중옥을 불러 줘......!" 인영. 거의 살아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상세를 입은 그 인영은 계속 석중옥의 이름만 불렀 다. "으...... 그...... 그만이 막을 수...... 있다!" 오른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 창백해 이미 산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눈은 정기(精氣)를 잃은 지 오래였으니...... 왈칵! 그의 입에서 다시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으...... 나, 나를 석중옥에게 데려다 주오." 선혈을 주르르 흘리며 고개를 쳐든 인영. 그는 놀랍게도 철검공자 남궁유룡이 아닌가! 하나 지금의 그에게서 과거에 보였던 준수하고 헌거로운 기상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으......!" 남궁유룡이 신음할 때, "이 녀석아! 조금만 기다려라...... 그러면 된다!"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한 인영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알록달록한 오색의 채의를 걸친 뚱뚱한 노파! 바로 전낭자 호파파가 아닌가!으...... 호...... 호파파...... 나...... 나를 어서 석중옥에게. 남궁유룡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호파파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이런...... 전신의 구대경맥(九大經脈)이 폐쇄되고 이대경락(二大經絡)이 끊어졌구나. 이대로 두면 일(一) 각(刻)밖에는 견디지 못하겠는걸......" "나는...... 괜찮으니 어서......" "정말 괜찮으냐?" "그...... 그렇......?" 신음을 하던 남궁유룡은 호파파의 말투가 이상함을 느끼고 힘들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 았다. 호파파의 얼굴에는 실로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호호...... 네놈은 그냥 두어도 일 각밖에는 살지 못한다. 하나 그 정도로도 너는 할말을 다 할 수 있지." "으......" "미안하지만 본 낭자는 너의 입을 좀더 빨리 막아야겠다." 호파파의 얼굴이 점차 흉악해지며 그녀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흐으...... 다...... 당신은......" 남궁유룡은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호호......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군. 지존 휘하의 천비령주(天秘令主)라고......" 순간, "다...... 당신이 신비로 점철된 천비령주란 말이오?" 남궁유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까뒤집었다. 그가 알고 있기로 천비령주는 남궁검문을 암중으로 장악한 지존이 가장 신임하는 비밀의 인 물로서, 그 지위나 신분이 철저한 장막 속에 가려져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천 비령주의 존재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다. 한데 그 신비의 대명사인 천비령주가 설마 미치광이로 유명한 전낭자 호파파일 줄이야...... "호호...... 네놈이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본 영주를 만난 이상 죽어 줘야겠다!" 호파파의 뚱뚱한 손이 천천히 들려졌다. "으...... 이, 이럴 수가...... 이곳까지 와서 개죽음이라니...... 남궁유룡은 몸을 꿈틀거리며 바둥거렸다. "호호...... 죽어라, 애송아!" 호파파의 손이 남궁유룡의 가슴을 향해 내리쳐졌다. 쾅! "크악!" 남궁유룡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앙! 그녀가 있던 누각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며 한 인영이 섬전같이 날아왔다. "멈춰라!" 나타난 인영은 호파파가 남궁유룡에게 살수(殺手)를 쓰는 것을 보고 대갈성을 터뜨렸다. 동시에 호파파는 뭔가 시커먼 물체가 자신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짐을 느꼈다. 그것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파파팍! "크-윽!" 한 줄기 흑선을 그리며 날아든 인영은 어느새 호파파의 가슴팍 오개대혈(五個大穴)을 점해 버렸다. 실로 너무도 빠르고 순식간의 일인지라 호파파는 영문도 모르고 제압된 것이다. "한 발 늦었군." 호파파를 제압한 인영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 남궁유룡을 보고 침울한 음성을 흘렸다. 호파파는 그제야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서...... 석중옥......" 그렇다. 나타난 인영은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는 쓰러진 남궁유룡에게로 다가가 그의 맥문(脈門)을 짚어 보았다. 그의 안색이 무겁게 변했다. '늦었다. 이미 경맥이 끊어진 데다가 심맥을 보호하던 호심진기(護心眞氣)마저 호파파의 일 장에 흩어져 버렸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다!' 언뜻 그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호파파를 바라보았다. 그때, 휙! 휘-익! 다른 사람들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날아들었다. 석중옥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궁유룡에게로 다가갔다. 일순, 그는 번개같이 손을 휘둘러 남궁유룡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팡! "캑!" 남궁유룡이 한 모금 검은 피를 토하고 눈을 떴다. "남궁 형! 소제 석중옥이오!" 남궁유룡은 가물거리는 눈을 들어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처연한 미소가 가득했다. "서...... 석 형! 서...... 석 형을 보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소." "미안하오. 내가...... 너무 늦은 것 같구려." 석중옥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남궁유룡의 얼굴빛은 이미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으...... 서...... 석 형에게 꼭 하...... 할말이 있소." 석중옥이 장력에 진기를 돋우어 그의 마지막 남은 진력을 격발시켰기 때문에, 남궁유룡의 목숨은 한 숨의 진기가 사라지면 더불어 소멸되는 짧은 순간밖에 남지 않았다. 석중옥은 무 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남궁 형!" 남궁유룡의 얼굴에 한 줄기 비통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나...... 남궁검문과 사...... 사천당문은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소." "그게 무슨 말이오?"화...... 황산의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지...... 맛 나......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의 인물들을 가...... 강시( 로 만들어 버렸소. 이제...... 더 이상은 필요가 없다며......" 석중옥의 눈빛이 굳어졌다. "강시?" 남궁유룡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렇소. 내...... 내 동생 혜아는 그것을 피하려고 자결을 했고...... 아...... 아버님과 숙 부님은......" 갑자기 남궁유룡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으...... 그들을 막아야 하오. 석 형...... 그 일을 막을 사람은 천하에...... 서...... 석 형밖에는 없소." 석중옥은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그 일이라니...... 무슨 일 말이오?"으...... 지...... 지존은 아버님과 당이선생...... 그리고 당문? 聆 천수마군 당익형을 마법(魔法)의 제물로 삼았소." "마법?" "혀...... 혈마강신마법(血魔降神魔法)......!" 순간 그토록 담담하던 석중옥의 낯빛이 일시에 굳어졌다. 혈마강신마법이라면 혈왕 위혼의 삼대마법 중 서열 일위의 절대마공이 아닌가! 당년에 혈왕 위혼조차도 자신의 후대에서라도 완성할 수 없을 거라고 예언했던 미완(未完) 의 마법! 남궁유룡의 입 밖으로 거듭 시커먼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 그들은 혈왕 위혼의 그 저주받은 혈마강신마법을 받고 있소...... 그것이 완성되면 그들 은 가공할 혈인(血人)이 되고...... 천하의 무엇으로도 그들을 막을 수 없게 되오." "음...... 그것은 당년의 혈왕 위혼조차도 완성시키지 못한 것인데......"지존의 능력은...... 이미 천하제일...... 혈마강신마법마저 완성하게 되면 아무도 그를 당해 내지 못하오. 그것이 완성 되는 것을 막아...... 야......" 석중옥은 남궁유룡의 몸이 마구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물었다. "마법이 시전되는 장소는 어디요?"과...... 괄창산(刮蒼山)...... 귀...... 귀무곡(鬼霧谷)......!" 남궁유룡의 눈빛이 흐려지며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혀...... 혈마강신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마...... 막아야.. "지존의 정체는 누구요?"지...... 지존...... 그는 이십 년 전부터 남궁검문을 자...... 장악......" 그의 눈에서 생기가 급격히 사라져 갔다. "그는 혈...... 왕경을 완전히...... 이...... 익힌 뗌?大魔人)...... 그는...... 처...... 천사(天邪)...... 요 혀.. 털썩-! 남궁유룡은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나 석중옥을 비롯한 중인들은 놀람에 찬 음성을 토했다. "천사(天邪) 요현(姚玄)!" "맙소사! 그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니......" 석중옥의 얼굴도 무겁게 굳어졌다. 천사(天邪) 요현(姚玄)! 어느 누가 그를 모르겠는가? 천외삼기 중의 일인인 사도제일인(邪道第一人)! 그는 사도사상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온 천하의 사공(邪功)을 집대성하여 천하사공의 정화를 이루었으며, 이미 오십 년 전 극마극 사지체(極魔極邪至體)를 이룬 전설적인 인물인 것이다. 한데 그가 설마 남궁검문과 사천당문의 배후에 있는 지존일 줄이야...... 석중옥은 침중한 눈빛으로 남궁유룡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석중옥은 그의 부릅떠진 눈을 감겨 주었다. '남궁 형! 고맙소. 부디 극락 왕생하시오......!' 이어 그는 천천히 일어나 혈도를 제압당해 쓰러져 있는 호파파에게로 다가갔다. "호파파! 당신의 교활한 수작도 이제 끝장이오." 호파파는 까마귀 같은 목소리로 음충맞게 웃었다. "호호호...... 석중옥, 이 녀석! 어떻게 본 낭자의 정체를 알았느냐?" 그녀의 음성에는 추호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는 빛이 없었다. 석중옥은 흑발 사이로 조용히 눈을 반짝였다. "처음엔 몰랐었지. 한백의 장보고 안에서 당신이 나를 암습했을 때 나는 한 줄기 짙은 향내 를 맡았었소. 나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몰라 몹시 궁금했었소." "......!"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인! 나는 응당 젊은 여인이려니 짐작하고 다른 여인들만 의심했었소. 하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짐작이 틀린 것을 알았지." 중인들은 모두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장보고에 있었던 젊은 여인들은 물론 모두 약간의 화장을 했었소. 하나 원래 젊은 여인이 란 그토록 진한 화장은 하지 않는 법이오. 향내가 사방에 진동하도록 요란한 화장을 한 여 인은 오직 하나, 당신뿐이었소." "......!" "나는 당연히 그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당신의 평소 소행으로 보아 첩자일 리가 없다고 지레 짐작을 했었지. 결국 당신은 일부러 모자라는 듯한 행동을 해 중인들의 눈을 속여 왔 던 것이오." 중인들은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설마 저 뚱뚱하고 괴팍한 성질의 호파파가 그토록 교활한 인물일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호파파는 얼굴 가득 징그런 괴소를 흘렸다. "호호...... 석중옥! 과연 대단하구나. 그렇다. 본 낭자는 지존 휘하의 천비령주이시다." 석중옥은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지금까지 의문스러웠던 몇몇 일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 었다. "당신이 내 행방을 알려, 천패지살과 건곤일마가 복우산에서 미리 잠복해 있다가 나를 암습 하도록 했었군." "그렇다. 본 낭자는 복우산에서 네놈이 없어질 줄 알았다. 한데 그 병신 같은 놈들이 세 놈 씩이나 덤벼도 너를 죽이지 못할 줄이야......" 호파파의 얼굴에는 사악한 빛이 가득했다. 석중옥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의 휘하에 들게 되었소?" "호호...... 내가 그것을 말할 것 같으냐?" 호파파의 음성에는 지독한 사기(邪氣)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비록 본 낭자를 제압했지만...... 곧 지존께서 네놈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천사 요현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나를 당할 수는 없소." 석중옥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감이 충만해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 히 가라앉혀 주는 것이었다. '으으......' 호파파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형의 기세가 석중옥에게서 뻗어 나옴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하늘처럼 받들고 있는 지존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이...... 이놈!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호파파가 갑자기 악을 쓰듯 외쳤다. "하나 그분을 오십 년 전의 천외삼기 중 일인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년의 천외삼기의 두 사람이 동시에 덤빈다 해도 그분을 당해 낼 수 없다...... 지금 그분은 혈왕경을 완전히 터득해 고금무적이 되셨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칠공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자결을......?" 석중옥의 두 눈에 의외라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분을...... 당해 낼 자는...... 아무도...... 없다......" 호파파! 온갖 기행과 술수로 천하를 주름잡았던 이 희대의 마녀(魔女)는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했 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에게 충성하고 있었군." 석중옥의 중얼거림은 무거웠다. "......!" 그리고 그녀의 시체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시선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괄창산(刮蒼山)! 절강성(浙江省)의 동쪽을 가로지르는 명산. 산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험악한 데다 깊숙한 숲 곳곳에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원시림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에 따라 명승과 절경도 적잖은 곳이 바로 이 괄창산이었다. 괄창산 깊은 곳에 이르면 대낮에도 음침한 운무(雲霧)가 어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토박이 사냥꾼들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계곡 주위에는 온갖 독물(毒物)들이 득실거리고 대낮에도 가까이 간 사람은 급살을 맞아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귀신의 장난인지 장독(山章 毒) 때문인지 그 계곡은 금지(禁地)가 되 어 그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 계곡이 바로 귀무곡이었다. 삼경(三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말 캄캄한 밤이었다. 대낮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이 귀무곡을, 산새들마저 잠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 주시하는 눈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들에서 안광이 훤하게 비추는 것으로 보아 하나같이 내공(內功)이 절정 에 달한 고수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앞선 사람. 그의 흑의는 어둠보다 더 검고, 그 눈동자는 별빛보다 더 밝았다. 그는 바로 석중옥이었다. 그의 뒤에는 약 오륙십 명의 절정고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석중옥은 주위를 둘러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지독한 곳이군......' 석중옥은 주위의 지형이 너무도 흉험함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으스스한데...... 이런 곳에 매복이 있으면 뚫기가 힘들겠는걸......" 무흔풍 한쾌가 석중옥의 뒤에서 소곤거렸다.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중인들을 이끌고 뒤따라 오십시오." 사마진평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단신으로 가겠다는 건가?" 모두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 석중옥은 담담하면서도 힘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측의 피해가 너무 클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나가 길을 트겠습니다." 사마진평 등은 비록 석중옥의 의견이 탐탁치 않았으나 그의 무공을 잘 아는지라 말리지 않 았다. 석중옥은 군웅들을 둘러보았다. "천사 요현이 혈왕경을 모두 익힌 이상 그의 수하들도 모두 혈왕경 내의 마공을 익혔을 것 이오. 그러니 손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되오. 가장 빠르게 적을 해치워야 하오." "걱정하지 말게. 우리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 조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스스스...... 석중옥의 신형은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 45 장 독왕지왕(毒王之王) 귀무곡. 어둠에 묻힌 귀무곡 안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희미하게 안개가 서린 귀무곡 안은 약 이십여 장 가량의 암석이 널린 평지라 몸을 숨길 곳 이 없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짙은 운무가 어린 귀무곡의 넓이는 약 사오 장 정도 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속에 어떤 배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제아무리 안력이 좋은 사람도 알아볼 수 가 없게 되어 있었다. 석중옥은 몸을 숨긴 채 귀무곡 앞 평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군웅들은 백여 장 밖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귀무곡 주변의 매복은 이미 제거했는데...... 안은 어떨지 모르겠군......' 스-윽! 그의 몸이 그대로 이십여 장의 공지를 지나 귀무곡 입구에 들어서도 경보조차 울리지 않았 다. 그만큼 석중옥의 신법은 기척도 없는 것이었다. '귀무...... 여기에는 미혼향(迷魂香)이 섞여 있군!' 문득 석중옥은 앞 부분의 지형이 기이함을 느꼈다. '저것은......? 그렇군.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만리무형천살진(萬里無形天殺陣)이로군......' 만리무형천살진(萬里無形天殺陣)! 아홉 개의 방위와 십팔(十八) 문(門), 삼십육 개의 매복이 혼합된 죽음의 절진(絶陣)!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석중옥은 소리도 없이 만리무형천살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냥 통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유령처럼 스쳐 가는 곳의 진은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스스스- 석중옥의 신형은 소리도 없이 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과 눈, 귀는 조금도 쉬임이 없었다. 만리무형천살진의 사방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매복해 있었다. 절벽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물샐틈없이 사방을 경비하던 고수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어 떻게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 가고 있었다. 귀무곡 입구 이십 장 길이에 설치된 매복과 함정은 가히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설사 천라지망을 뚫을 수 있는 고수가 오더라도 경보가 울릴 수 있도록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으나, 그것들 모두는 석중옥에 의해 단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지독히 흉험한 곳인데...... 이런 곳을 용케도 찾았군.' 콰르르- 콰아아! 입구의 끝은 음습한 데다가 칼날 같은 암석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고, 그것을 가로지르며 급류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형세는 석중옥도 난생처음 보는 험악한 것이었다. 그 급류가 휘몰아치는 계곡 끝에는 쇠사슬로 이루어진 다리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길이는 약 오 장. 소용돌이치는 급류는 대단하여 물보라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곡의 운무는 이곳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았다. '감시가 넷...... 아니, 다섯이다. 하나하나가 대단한 공력을 지녔군.' 석중옥은 소리도 없이 용솟음치는 물보라에 닿을 듯 날았다. 쇠사슬 다리 주위에는 두 명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고, 그 바로 뒤에는 곡의 내부로 통하는 듯한 관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매우 견고해 보였다. "저......!" 문득 다리 앞을 지키던 고수 하나가 날아오는 석중옥을 발견하고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나 그 순간 그는 그대로 심맥이 부서졌다. 뭔가 이상한 기척에 동료를 돌아보던 또 다른 고수도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그대로 심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석중옥은 번개같이 관문을 덮쳐 갔다. "......!" 관문을 지키고 있던 자들의 무공은 대단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던 두 명의 고수는 대번에 석중옥을 발견했다. 그들은 다급하게 허리 춤에 있던 검을 뽑아 휘두르려 했다. 하나 그 순간 석중옥의 손은 어느새 그들의 미간을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석중옥의 손은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몸은 이미 석상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석중옥의 신형은 관문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하나의 인영이 더 있었다. "윽!" 침중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석중옥의 신형은 이미 관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 관문 안에는 가슴 떨리도록 차갑게 생긴 대한이 두 눈을 퉁방울같이 부릅뜨고 석중옥을 쳐 다보았다. 주르르-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역시 대단한 공력이군. 무영장(無影掌)을 견디다니......" 담담한 음성을 흘리며 석중옥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흐...... 흑의(黑衣)에...... 철검(鐵劍)...... 너...... 무적신검경천...... 수...... 석중옥!" 대한은 경악과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자아냈다. 순간, "혈마강신마법을 하고 있는 곳이 어디냐?" 석중옥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우-웅!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으으...... 이...... 이런 기세가 있다니......!" 대한은 한기가 전신에 퍼짐을 느꼈다. "혀...... 혈혼동(血魂洞)......!" 대한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석중옥이 조금 전에 사용한 것은 섭혼미령술(攝魂迷靈術)이라는 절기였다. 대한은 이미 석중 옥의 기세에 눌려 있었기 때문에, 섭혼미령술에 어이없이 걸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기밀을 내뱉은 것이다. "크윽!" 순간, 대한은 입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스윽! 석중옥의 신형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았다. 평상시였다면 이렇게 잔인하게 손을 쓰지 않을 석중옥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위급 하여 손속에 추호의 사정도 두지 않은 것이다. 귀무곡의 외경은 매우 험악하나, 내부는 매우 넓어 우물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로 길 하나가 끝없이 쭉 뻗어 있었고, 그 좌우에는 수많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낭패로군. 설마 동굴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이 많은 것 중에서 어느것이 혈혼동인지 어 떻게 안단 말인가!' 석중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문득 기광이 어른거렸다. 가운데로 쭉 뻗은 길의 끝 부분에 폭이 거의 오 장여에 달하는 거대한 동굴이 뚫려 있지 않 은가? 한데 기이하게도 붉은 혈무(血霧)가 연신 뿜어 나오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혈무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모습은 왠지 섬뜩한 것이었다. '저곳인가?' 석중옥의 몸이 매복을 피해 소리도 없이 날아올랐다. 동굴은 무척 괴이했다. 넓이는 대략 오 장 가량. 언뜻 보기에 시뻘건 혈무가 뿜어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다. '괴이하군. 다른 곳은 모두 치밀한 경비가 서 있는데 이곳에는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 니......' 정말 그렇다. 모든 동굴마다 거의 예외없이 몇 명의 호위고수들이 있었건만, 이곳만 유독 아무런 경비가 없었다. 석중옥은 조심스럽게 몸을 날려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스으으...... 악마의 불길처럼 뿜어 나오는 혈무가 그의 피부에 살짝 닿았다. 순간, '으음......' 석중옥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이...... 이것은 이제 보니 지극혼옥혈기(地極魂獄血氣)......' 그의 동공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지극혼옥혈기(地極魂獄血氣)! 태초(太初)에 온 천하의 사기(邪氣)와 마기(魔氣)들이 모여 이룩된 곳이 있었다. 지극혈지(地極血地)! 그곳은 천하에서 가장 가공할 마지(魔地)이며, 마공과 사공을 익히는 고수들이 꿈에도 그리 는 곳이었다. 지극혈지에 있으면 저절로 마공(魔功)을 극(極)에 이르도록 연마할 수 있기 때 문이다. 하나 여태껏 아무도 지극혈지를 보았다는 사람도, 찾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지극혈지에서 뿜어 나오는 가공할 마의 기운이 바로 지극혼옥혈기였다. 보통 사람이나 무공이 고강하지 못한 고수들이 지극혼옥혈기를 쬐면 그 혈기에 내포되어 있 는 가공할 마기를 이기지 못하고 전신의 심맥(心脈)이 파열되어 죽고 만다. 하나 마공이 거의 극에 다다른 마도인(魔道人)들이 지극혼옥혈기를 받게 되면, 자신의 마공 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이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랬었군. 지극혼옥혈기가 있기에 아무런 경비도 세워 두지 않았군.' 석중옥은 이곳이 설마 전설의 지극혈지일 줄은 몰랐는지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석중옥은 대천강신공을 운용한 채 지극혼옥혈기를 뚫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극혼옥혈기의 가공할 마기도 대천강신공으로 보호된 그의 몸을 침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르릉-! 갑자기 동굴 천장에서 태풍 같은 경력(勁力)이 석중옥을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가공할 기세였다. 석중옥은 그 경력 속에 하나의 거대한 깃발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눈 에 익숙한 것이었다. "번천폭풍기(飜天暴風旗)구나......!" 석중옥이 다급히 외치며 거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선 자세 그대로 뒤로 쭈욱 물러난 것이다. 한데 그 순간, 쐐애애애애-! 한 줄기 기이한 기운이 소리없이 이십여 장 허공을 완전히 뒤덮으며 석중옥을 덮쳤다. 그와 함께 속이 메스꺼울 정도의 지독한 악취가 진하게 풍겨 왔다. 석중옥의 안색이 싹 변했다. "독강(毒 )이구나!" 그의 몸에서 한 줄기 섬광이 피어올랐다. 쐐애애액! 귀가 떨어지는 듯한 괴이한 금속음이 터지는 가운데 석중옥의 몸은 바닥으로 내려서고 있었 다. 그는 낙화섬수로 독강을 깨고 그것을 피한 것이다. 그의 앞, 동굴 속에서 한 명의 혈의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피처럼 붉은 옷을 입었기에 지극혼옥혈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건곤일마 우문양......" 석중옥의 입에서 감정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문양의 손에는 우내육대중보 중의 하나 인 번천폭풍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때 석중옥은 뒤에서 괴이한 기세를 느끼고 돌아보았다. "......!" 석중옥의 눈에 한 가닥 놀람의 빛이 보일 듯 말 듯 스쳤다. 그의 뒤에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전신이 검은빛 일색인 그의 몸에서는 괴이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서 암자색(暗紫色) 안광이 뿜어 나와 공포스 러워 보였다. "독왕지왕(毒王之王)......" 석중옥은 대번에 흑의인의 정체를 알아 냈다. 아아...... 독왕지왕! 전설로 전해지는 혈왕 위혼의 삼대마법 중 서열 이위인 절대의 지체(至體)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석중옥은 대번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가공할 고수가 둘이나 나타난 것이다. 그 위세는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것이었다. '이들의 합공은 복우산의 그것보다 더 지독하다...... 더구나 독왕지왕이 이미 완성됐을 줄이 야......' 석중옥이 묵묵히 눈을 빛내며 서 있자, "크하하하...... 석중옥! 과연 네놈이 여기까지 왔구나." 건곤일마 우문양이 광소를 터뜨렸다. 석중옥은 그의 말에 뜻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흐흐...... 그렇다." "어떻게......" "흐흐...... 그걸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석중옥은 그가 말해 줄 것 같지 않자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하나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설마 중인들 중 호파파말고 다른 첩자가 또 있었단 말인가?' 석중옥은 무거운 마음을 떨쳐 버리려는 듯 우문양을 바라보았다. "하하...... 복우산에서는 잘도 도망치더니 이제 와서 큰소리군." 우문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건방진 놈! 지난번에는 실패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네놈의 몸을 육시내 버리겠다!" "당신들 둘이서 말이오?" 그 순간, "석중옥! 흐흐...... 전보다 더 광오해졌구나!" 흑의복면인, 독왕지왕이 음침히 외쳤다. 휘휙! 그의 말소리에 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과연 대단하군. 독왕지왕은 혈왕 위혼조차도 못 이룬 경지인데......' 석중옥은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소?" "그렇다! 흐흐...... 아주 잘 알고 있지!" 독왕지왕은 으스스하게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마치 숯을 보는 듯, 끔찍하도록 시커먼 얼굴이 드러났다. 어디가 코이고 입인지도 모르게 짓 뭉개진 얼굴에서는 암자색 광망만이 소름 끼치는 광채를 뿌려대고 있었다. 석중옥은 문득 그 눈빛이 언젠가 본 누군가의 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를 모르겠느냐? 모르겠지...... 흐흐...... 내 얼굴은 독왕지왕을 이루기 위해 완전히 파괴되 었으니...... 흐흐...... 하나 토지묘에서 네놈에게 당한 일장의 원한은 기억하고 있겠지?" 순간, "혈전공자 당욱......!" 석중옥이 깜짝 놀라 부르짖듯 말했다. "으흐흐...... 아핫핫...... 이제는 알아보겠느냐? 네놈에게 당해 무공을 상실하게 되었으나 지 존의 보살핌으로 독왕지왕이 되었다!" 아아...... 혈전공자 당욱! 그가 드디어 독왕지왕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너는 네 아버지와 숙부가 혈마강신마법으로 강시가 되어 버렸는데도 그를 따른단 말이냐?" 석중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흐흐...... 그분들은 지존 덕분으로 영생(永生)하게 된 것이다. 한데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느 냐!" "강시가 되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라고?" 석중옥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이놈! 할말이 있으면 지옥에 가서나 해라!" 건곤일마 우문양이 싸늘하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콰르르- 콰아아-! 번천폭풍기가 가공스런 강기를 일으켰다. 꽈르릉! 좌우에서 마치 태풍과도 같은 엄청난 기류가 수십 장 방원을 뒤덮으며 소용돌이쳤다. 건곤 일마 우문양이 대번천폭풍사결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이다. 두 초강고수의 합공. 그 기세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주위는 평지로 변해 갔고, 주위의 절벽이 온통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꽈꽈꽈르르...... 스으으으...... 번천폭풍기의 가공할 강기가 스치는 곳의 암석이 가루가 되고 독왕지왕 당욱의 독강이 스치 는 곳은 모조리 녹아 버리고 있었다. 석중옥. 그의 전신은 기이한 신광(神光)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로 사문의 비전인 대천강신공인 것이 다. 이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룬 그였다. 하나 그런 그조차 추호도 방심할 수 없는 무서운 공격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꽝! 벼락치는 폭음과 함께 무서운 바람기둥이 일어났다. 파파파- 땅이 마구 파여 바람을 타고 흙먼지가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와르릉...... 태풍과 같은 강기가 수십 장을 뒤덮으며 석중옥에게 덮쳐 갔다. 건곤일마 우문양이 대번천폭풍사결 중의 번천폭풍만리황(飜天暴風萬里荒)을 쏟아 낸 것이다. "하하...... 번천폭풍기로는 나를 당할 수 없다!" 석중옥이 웃으며 마주 일권(一拳)을 갈겨 냈다. 파옥신권(破玉神拳)의 가공할 권력(拳力)이 번천폭풍기의 강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네놈도 나를 당할 순 없다!" 혈전공자 당욱이 음랭히 외치며 덮쳐 왔다. 그의 독강은 실로 가공스러운 위력이 있었다. 독왕지왕에 이른 그의 독강은 금강불괴까지 녹여 버리는 패도무적이었다. 석중옥이 아무리 만독불침(萬毒不侵)이라 하나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꽈르르- 꽝! 번천폭풍기강과 파옥신권이 맞부딪치자 경천동지의 대폭음이 일어났다. 태산이라도 날려 버릴 듯한 가공할 강기가 몰아치는 가운데, 건곤일마 우문양은 처참히 안 색을 일그러뜨리며 잇달아 아홉 걸음이나 물러났다. 석중옥의 신형도 가볍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쏴아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혈전공자의 절대독강(絶對毒 )이 가공스런 기세로 그의 온몸을 뒤덮 었다. 위기였다. 그 순간, 석중옥이 몸을 비틀며 왼손을 쳐냈다. 쏴아아-악! 눈부신 백색 섬광(閃光)이 폭발하듯 피어오르며 사방을 뒤덮었다. 낙화섬수가 가공할 열기를 동반하고 폭사되는 것이다. "크하하...... 그따위 장공으로 절대독강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욱이 미친 듯 웃으며 절대독강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다. 콰콰콰쾅!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백색 섬광이 사그라졌다. "음!" 석중옥이 짤막한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석중옥, 목을 내놓아라!" 당욱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허공에서 덮쳐 내렸다. 시커먼 기류가 가공 무쌍의 강기가 되어 수십 장을 뒤덮었다. 무엇이든 스치기만 해도 녹아 버리는 절대독 강인 것이다. "여기도 있다!" 우문양이 끝장을 보려는 듯 석중옥의 퇴로를 전력을 다해 봉쇄했다. 와르르릉! 번천폭풍기가 가공스런 기세로 쏟아졌다. 그 순간, "오행전류!" 파파파파...... 낭랑한 음성과 함께 일진섬광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빗줄기 같은 섬광은 석중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마치 폭발하듯 겹겹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다음 순간, 꽝! 꽈르르르- 꽝! 귀청이 터져 나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우드드...... 와르르...... 오십 장 밖의 나무가 뿌리째 뽑히더니 그대로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구십 장 밖에 있던 거 대한 바위가 흔적도 없이 박살나 버렸다. "으...... 으......!" 그 무서운 회오리 속에서 분간할 수 없는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석중옥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다. 그의 몸이 허벅지까지 땅속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당욱과 우문양의 상세는 더 좋지 않았다. 당욱은 막강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삼십 장 허공으로 튕겨져 오르며 피를 쏟았고, 우문양 은 수염이 피범벅이 된 채 사십 장 밖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격돌은 백 장 주위를 완전히 풍비박산낸 것이다. 그 절 대 무쌍한 두 고수의 합공을 불리한 상황에서 정면으로 막아 낸 석중옥의 무공은 가히 인간 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 무서운 놈! 내 독공은 이미 금강불괴라도 녹일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견디다니...... 하지만 저놈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으리라!' 당욱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우...... 우...... 웅! 그의 몸에서 가공할 독강이 검은 구름과 같이 무섭게 일어났다. 당욱이 자신의 밑바닥 진원(眞元)까지 끌어 낸 것이다. 꽈꽈꽈꽈...... 주위의 공기가 마구 회오리치며 무섭게 요동쳤다. 드디어 백 장 주위를 모조리 녹여 버린다는 독문(毒門) 최강절학(最强絶學)인 절대융겁독류 강(絶對融劫毒流 )이 전개되려 하는 것이다. 그의 몸이 두 배나 거대해지는 듯 보였다. 쐐애액! 허공으로 튕겨졌던 당욱이 한 가닥 검은 번개가 되어 석중옥에게 내리 꽂혔다. 그와 함께 건곤일마 우문양도 사십 장을 한달음에 가로질러 석중옥을 덮쳤다. 그의 손에 들린 번천폭풍기가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이며 무시무시한 경기를 폭풍처럼 동반 하고 있었다. 바로 대번천폭풍사결의 마지막 초식인 번천폭풍대운뢰(飜天暴風大暈雷)가 펼쳐진 것이다. 그 기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꽈르르르- 번천폭풍기가 미친 듯 요동치는 가운데, 실로 믿기지 않는 엄청난 강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이다. 그 순간, 석중옥이 눈을 떴다. 그의 몸에 어린 대천강신공이 더욱 짙어졌다. "팔황개동!" 낭랑한 한 줄기 외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쏴아아앙! 순간, 거대한 햇살과 같은 검광이 그에게서 모아져 폭발하듯 사방을 휩쓸었다. 그것은 암천 (暗天)을 깨뜨리는 광명(光明)과 같이 석중옥을 뒤덮은, 거의 백 장 범위에 이른 가공할 묵 운 속을 쏘아져 갔다. 혈전공자 당욱은 그 순간 똑똑히 보았다. 절대융겁독류강의 가공할 기류가 그 검광에 닿는 순간 썩은 새끼줄과 같이 가닥가닥 끊어져 나감을...... "으-아-악!" 차차-아앙! 꽈르릉! "크으-윽!" 처절한 비명과 함께 검광도, 묵운도, 폭음도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석중옥! 그는 태산같이 의연히 서 있었다. 보라! 그의 손에서 찬란히 빛나는 공손철검의 위용을...... 그의 모습을 보고 그 누가 경외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문양! 천하제이마(天下第二魔)로까지 불린 야심 만만했던 거마는 뜻도 채 펴보지 못하고,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갔다. 그가 자랑하던 번천폭풍기는 산산조각난 채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가 공손철검에 치명상 을 입고 쓰러지자 절대융겁독류강의 독강지류(毒 之流)가 그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린 것이 다. 당욱. 그는 처참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양손이 반듯하게 잘려져 나간 채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어 그는 처절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무적일 줄 알았던 독왕지왕이 깨어지다니......" 다음 순간, 그의 몸은 거짓말처럼 녹아들기 시작했다. 절대독강이 깨어지며 그것이 체내로 역류하여 스스로의 몸을 녹이고 있는 것이다. 츠츠츠...... 지독한 악취와 함께 그의 몸은 순식간에 한줌의 시커먼 핏물로 화해 버렸다. 실로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석중옥은 담담한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탄식하며 몸을 돌렸다. 그의 가슴팍과 소매의 옷이 녹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절대독강이 그의 검막(劍幕)을 뚫고 들 어와 그의 옷을 녹였으나 그의 몸까지는 침범하지 못한 것이다. 당욱의 독공(毒功). 그것은 과연 고금제일이었다. 석중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돌연 담담한 음성으로 불쑥 말했다. "아직도 기다릴 것이 남았소?" 순간, "하하하하......" 낭랑한 웃음 소리가 조용히 주위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한 청의유생(靑衣儒生)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 46 장 경천동지(驚天動地) 그는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신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네모졌고, 가늘고 긴 두 눈은 호수와 같이 맑고 깊었다. 부드럽게 늘어진 검은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오고, 말할 수 없는 기세가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발가벗은 듯 자신을 찾지 못하리라! 그가 지나가는 곳은 풀잎조차 눕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바닥을 밟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청의유생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석중옥, 너의 능력은 노부의 생각보다 뛰어난 것 같구나...... 노부가 잠시 계산 착오를 했 다." 석중옥이 담담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하가 바로 천사 요현이오?" "그렇다. 노부가 바로 요현이다!" 천사(天邪) 요현(姚玄)! 남궁검문을 비롯한 삼대문파의 암중 인물이며, 이미 오십 년 전 마도제일인으로 불린 절대 의 고수! 더구나 지금은 혈왕경을 완전히 터득하여 아무도 그 깊이를 추측할 수 없는 무공 을 지니지 않았는가! "내가 이들에게 죽지 않아서 실망했소?" "아니다! 오히려 노부는 마음이 기쁘구나!" 그의 말투는 마치 자상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타이르는 듯했다. "너에게 사상 처음으로 완성된 혈마강신마법을 보여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요현이 가볍게 손짓했다. 순간, 혈무로 뒤덮인 동굴에서 소리도 없이 세 사람이 나왔다. 그들을 보는 순간 석중옥의 몸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남궁뢰...... 당이선생...... 천수마군 당익형......?" 그렇다. 그들은 바로 신검 남궁뢰와 당이선생, 그리고 사천당문의 문주인 당익형이었다. 하나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사이(邪異)해 보였다. 전신의 피부가 은은한 핏빛을 띠고 있었고, 두 눈의 동공은 시체처럼 무감각하게 굳어 있었 다. 게다가 머리마저 시뻘건 혈발(血髮)이어서 간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요현은 빙긋 웃으며 그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지금 막 혈마강신마법을 완성해 그 위력이 생전(生前)의 배를 능가한다. 좀더 자세 히 말한다면 일인 일인이 건곤일마와 독왕지왕을 합친 것만하다고나 할까...... 넌 사상 처음 으로 이들 삼 인의 혈마강신(血魔降神)에 의해 죽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 석중옥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혈마강신마법이 이미 완성되었을 줄이야...... 혈마강신마법에 의해 완성된 이들의 위력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더구나 하나도 아닌 셋이나 되니...... 제아무리 석중옥이라 하더라도 그들과 맞붙는다면 승패(勝敗)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 가! 그러나 석중옥은 담담한 시선으로 요현을 바라보았다. "물어 볼 말이 있소." 요현은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느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엇이냐? 노부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알려 주지." "장보도 사건은 어찌 된 것이오?" "아! 그것 말인가?" 천사 요현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노부는 오십 년 전 우연히 한백의 장보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노부는 그곳에서 혈왕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삼십 년간 심산(深山)에 은거했었다." "......!" "혈왕경의 무공을 완성한 후 노부는 천하에 적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지. 천외삼기의 다른 두 명도 혈왕경을 익힌 노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노부는 천하독패(天下獨覇)를 생 각하게 됐지." 석중옥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데 그때 마침 혈천노조 구양중이 무림을 말살(抹殺)하기 위해 혈겁을 꾸미고 있다는 것 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노부는 슬쩍 그에게 한백의 장보고가 발견되도록 해두었다. 과연...... 그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가공할 도살장으로 만들어 무림을 말살하려 했지. 그런데 웬일인지 구양중은 신비스럽게 실종되어 버렸다. 그래서 노부는 다시 남궁뢰를 시켜 이번 일을 꾸몄던 것이다." 석중옥은 그의 말에 내심 침음했다. '그렇다면 이자는 아직 구양 사형이 십 년간 갇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 결국 사형을 배반케 한 세 제자의 배후인물은 그와 동일인이 아니란 말인가?' 석중옥은 내심 생각을 굴리며 다시 물었다. "천심장의 혈겁도 당신이 저지른 것이오?" "천심장? 오오...... 단천거사 위지송의 천심장 말이군!" 천사 요현이 뜻밖이라는 듯 눈에 신광을 떠올렸다. "위지송의 천심장은 십 년 전에 멸문했지. 그것은 노부도 지금까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이 다. 한데 네가 어찌 그것을 묻느냐?" 그 말에 석중옥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그럼 천심장 혈겁의 원흉은 따로 있단 말인가?' 그는 미궁(迷宮)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사 요현은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천심장을 멸망시킨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석중옥은 지금껏 남궁검문이나 그 배후인물이 천심장 혈겁의 흉수라고 짐작했던 자신의 생 각이 틀린 것에 대해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물어 볼 것이 또 있느냐?" 천사 요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석중옥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니오, 없소!" 요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됐다. 그렇다면 이제 혈마강신마법의 위력을 직접 겪어 보도록 해라!" 석중옥은 내심 가슴이 떨려 옴을 금치 못했다. '설마 혈마강신마법이 벌써 완성되었을 줄이야...... 과연 내가 저 삼 인의 합공을 받아 낼 수 있을까?' 요현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색이 긴장된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넌 비록 뛰어난 인재지만 시기를 잘못 만났다. 하필이면 노부와 같은 시기에 태어나다 니......" 그는 자신만만하게 명령했다. "남궁뢰! 당이선생! 당익형! 저자를 공격해라!" 바로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끄악-!" "케에엑!" 처참 무쌍한 괴이한 단말마가 거푸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요현이 경악의 부르짖음과 함께 두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게도 당이선생이 혈마강신을 이룬 남궁뢰와 당익형의 목을 수중의 담뱃대로 연 달아 꿰뚫어 버린 것이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가공스럽고 신속했는지, 남궁뢰의 목은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당익형의 목도 거의 잘려져 있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요현은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 있다가 당이선생을 노려보았다. "너는 당이선생이 아니로구나! 너는 누구냐?" "요 형! 그간 잘 있었소?" 당이선생이 요현을 향해 머리를 굽혔다 폈다. 찰나지간, 그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주름살투성이의 육십대 노인에서 이목이 청수하고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으로 변한 것이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백철군...... 네가......!" 요현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이선생은 한백의 장보고에서 신비스럽게 실종되었던 여의노사 백철군의 분장이 아닌가! "네, 네가 어찌......?" 백철군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백의 장보고에서 나는 우연히 당이선생을 발견하게 되었소. 그래서 그를 제압하고 변장 했던 것이오." 요현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멀거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이내 그의 마음속에는 불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완성시킨 혈마강신마법인가! 그 동안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요현이 기울인 노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천년 전의 혈왕 위혼조차도 완성하지 못했던 혈마강신마법이었으니 그것을 이루기 위한 요 현의 심혈(心血)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닌가? 한데 그토록 모진 고생 끝에 완성한 혈마강신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어 버리다니...... "으...... 그, 그것을 만들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백철군, 네놈이 감히......!" 지금까지 냉정을 잃지 않던 요현의 턱수염이 덜덜 떨렸다. "이...... 이놈!" 그의 온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무섭게 솟구쳤다. 백철군은 슬쩍 석중옥의 뒤로 몸을 숨겼다. "자네에 대한 소문은 자세히 들었네. 나는 감히 혈왕경의 무공을 받을 자신이 없으니 그는 자네가 맡게." 석중옥은 감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 자신은 흉험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백 대협!" 석중옥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요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됐군. 최후까지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실력뿐이다!" 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흐흐...... 너의 무적신검경천수라는 외호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남들은 네가 왕년의 노부 를 능가한다고 하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보겠다!" 순간 그의 손이 천천히 장삼 속으로 들어가더니 기이한 형태의 필(筆)을 꺼냈다. 길이는 석 자쯤 될까? 마치 악마의 불길처럼 시뻘건 혈광(血光)이 이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필이었다. "파천필(破天筆)!" 석중옥이 그것을 보고 신음했다. - 파천필이 진한 홍하(紅霞)와 함께 용틀임하는 날, 온 천하인들은 전율하게 되리라! 그 가공할 파천필이 드디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스-윽! 검광이 빛나며 석중옥은 공손철검을 요현에게 겨누었다. 요현의 몸에서 서서히 혈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혈왕경의 최고무공은 바로 대혈천혼마신공(大血天魂魔神功)이다. 왕년의 혈왕 위혼조차도 십 성밖에 연성치 못했던 것이지. 하나 노부는 그것을 십이 성 연마했다." "......!"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대혈천혼마신공을 당할 수는 없다. 네가 공손철검을 지녔어도 결과 는 마찬가지다." 요현은 잘라 말했다. 그의 눈빛은 완전한 혈광을 쏟아 내고 있어 매우 공포스런 모습이었다. "대혈천혼마신공이 비록 무섭지만 천하제일은 아니오......" 석중옥이 담담히 중얼거리는 순간, "으하하하...... 아직도 노부가 고금무적(古今無敵)임을 믿지 않는군!" 요현이 크게 웃었다. 메아리가 귀청이 터질 듯 웅웅거렸다. 콰르르...... 요현의 온몸이 완전히 핏빛 혈광으로 뒤덮였다. 하늘이라도 가릴 듯 그 위세는 이십여 장을 퍼져 나갔다. 파파...... 파파...... 석중옥의 몸에서 서기가 뻗어 나오고 그사이에 강풍이 회오리치며 일어났다. "크하하하...... 석중옥! 혈왕경 내의 파뢰혼(破賴魂)을 받아 보아라!" 혈광 속에서 요현이 크게 웃었다. 동시에, 땡!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요현에게서 터져 나왔다. 꽈꽈꽈......! 석중옥은 온몸을 으스러뜨리는 듯한,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을 느꼈다. 우지끈! 꽝...... 백 장 주위의 나무들이 박살나 흩어지고 바위가 쩍 갈라졌다. 석중옥. 그는 여전히 태산같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졌다. "흐흐...... 과연 대단하군. 파뢰혼을 견딜 수 있다니......" 혈광이 더욱 짙어지는 속에서 요현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생각보다는 약하군!" 석중옥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순간, 꽈르르...... 릉! 그의 몸이 무서운 기세로 요현에게 덮쳐 갔다. 그 속도는 눈으로 보이지도 않으니...... 바로 무쌍초영(無雙超影)의 신법이었다. 요현은 석중옥의 몸이 눈 깜박할 사이에 자신의 코앞으로 육박해 오는 것을 보고서도 광소 를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파천필에는 파천오마해(破天五魔解)가 있다. 제일마해(第一魔解), 파천혼암(破天 混暗)!" 순간, 파천필이 은은히 흔들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혈광을 석중옥에게로 폭사시켰다. 파파...... 팟! 마치 수천, 수만의 혈침(血針)이 쏟아지듯 혈광은 처절한 마기와 함께 석중옥을 뒤덮었다. 석중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혈광 속으로 뛰어들며 공손철검을 휘둘렀다. "오행전류......!" 파...... 앗! 찰나, 그 처절한 혈광이 흩어지며 절대 무쌍의 검광(劍光)이 요현을 덮치지 않는가! 그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이...... 이런 일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 요현은 벼락같이 물러나며 필을 휘둘렀다. "제이마해(第二魔解), 파천망혼(破天亡魂)!" 콰콰쾅...... 피바다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광만육합!" 무쌍초영을 펼치고 있는 석중옥의 신형은 그보다 더 빨랐고, 손에 든 공손철검은 고금무적 의 검법인 연환십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하나 요현은 여태껏 석중옥이 만난 최고의 고수였다. 그의 신형은 이미 불가사의하게 석중 옥이 펼쳐 낸 광만육합의 검광을 벗어나고 있었다. 석중옥의 검이 허공에서 기이하게 회전을 했다. "흥! 칠성회두!" 파파...... 팍! 검광이 전광과도 같이 혈광 속을 파고들었다. 꽈르르...... 쐐애애액! 누가 저런 대결을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엄청난 혈광에 휩싸인 요현이 무서운 속도로 물러서고, 석중옥이 공손철검을 들고 쫓아가는 데, 그것은 마치 질풍신뢰(疾風迅雷)가 치는 듯했다. 꽈르르릉...... 꽝! 우지끈...... 뚝딱! 아름드리 나무들이 그들의 몸에 닿기도 전에 산산이 부서지고, 거암이 공깃돌처럼 마구 허 공으로 날아올랐다. 실로 보고도 믿지 못할 엄청난 대결인 것이다. "팔황개동!" 찬란한 검광이 엄청난 기세로 뻗어났다. "제삼마해(第三魔解), 파천뢰겁(破天雷劫)!" 꽈꽈...... 꽝! 천지개벽의 엄청난 기세가 수십 장을 뒤덮으며, "크으...... 윽! 대혈천혼마신공을 뚫다니......" 신음과 함께 요현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혈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석중옥은 득수(得手)했음에도 내부가 마구 들끓어올랐다. 상대가 상처를 입었음은 확실한데, 그의 전신이 핏빛 덩어리니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나 그들이 떨어졌다고 느낀 순간, 쨍! 또다시 귀청이 떨어지는 음향이 일어났다. "윽!" 석중옥의 입에서 선혈이 스며나왔다. "흐흐...... 천렬파(天裂波)를 견디다니......" 요현의 음성이 미친 듯 울려 왔다. 그 순간, "제사마해(第四魔解), 파천육백(破天戮魄)!" 하늘을 뒤덮은 혈광(血光)이 파천필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천지를 완전히 혈광으로 뒤 덮는, 조금 전과는 그 위세가 다른 것이었다. 푸스스스...... 초목이 마기(魔氣)가 소용돌이치는 혈광에 스치며 생기를 잃고 바스러져 갔다. 그러나 그토록 살인적인 혈광으로도 대천강신공의 석중옥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석중옥의 무쌍초영신법이 너무도 빨라 혈광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순간,"흐흐...... 이놈! 잘도 피하는구나...... 하나 이젠 마지막이다!" 요현이 시뻘건 혈무 속에서 사악하기 이를 데 없이 웃어 젖혔다. 그의 미친 듯한 웃음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제 가거라! 제오마해(第五魔解), 암흑혈세황(暗黑血洗荒)!" 천지가 온통 피바다 속에 잠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석중옥의 몸은 그 혈광에 잠겨 아예 보 이지도 않았다. 찰나, 피바다 속에서 하나의 새하얀 검광이 분수처럼 폭사해 나왔다. 그 검광은 눈부신 속도로 사방으로 펴져 나가더니 허공을 온통 새하얗게 수놓기 시작했다. 그 검광에 닿는 순간 핏빛 혈광은 여지없이 갈라져 버렸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이 허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붉은 비단을 찢는 듯 한 광경이었다. 쐐애애- 고오오오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파공음이 주위를 진공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 사방에 갑자기 숨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그토록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였던 핏빛 혈광은 어느새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장내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석중옥은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더 이상 창백할 수 없을 만큼 창백해져 있었다. 그리고, 스스스스...... 요현의 몸에서 혈광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천천히 드러났다. 아아...... 놀랍게도 그의 몸에는 머리에서부터 정확히 반으로 기나긴 혈선(血線)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파천필.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파천필은 어느새 부러져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천사 요현은 천천히 눈을 뜨고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더 이상 혈광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것이 무슨 검법이냐?" 석중옥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연환십절 중의 구절(九絶)인 검비구주황(劍飛九州荒)이오......!" 요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너, 너는 검왕(劍王) 절대검자(絶代劍子)의 제자였구나!" 석중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검왕(劍王) 절대검자(絶代劍子)! 이백 년 전, 이미 천하제일(天下第一)을 구가했던 전대의 최고검객이 아닌가! 그는 고금무적(古今無敵)의 검수(劍手)로 불렸었다. 한데 석중옥이 바로 그의 제자였다니...... 요현의 입에서 고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천하무적인 줄 알았던 내가...... 십절도 아닌 겨우 구절에......" 요현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반으로 그어진 혈선이 순간적으로 팍 터져 버렸다. 동시에 시뻘건 선혈과 내장이 와르르 그의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털썩! 요현의 몸은 완전히 두 동강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천하를 떨어 울리던 희대(稀代)의 마인(魔人)치고는 너무도 처참한 최후였다. 석중옥은 허탈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어느덧 그의 주위에는 군웅들이 서 있었다. 사마진평, 조담, 손중양, 한쾌, 해천쌍로...... 그들은 모두 치열한 격전을 치른 듯 안색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강시로 화해 있던 남궁검문과 사천당문, 천지회의 인물들과 싸운 끝 에 그들을 모두 도륙하고 온 것이다. 그들은 석중옥과 요현의 엄청난 결투에 넋을 잃어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석중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천천히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불쑥 나섰다. "하하하...... 과연 짐작대로 당신이 이겼군!" 그는 의외로 절세신유 손중양이 아닌가? "운이 좋았을 뿐이오." 석중옥은 담담히 말했다. 손중양의 입가에는 기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소. 당신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소. 하나 이제 그 좋던 운도 끝이 난 것 같구려." 석중옥은 안광을 빛내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하하하...... 모르겠다면 알려 주지." 손중양은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순간, 스스스스-! 귀무곡의 앞쪽 계곡에서 백의인들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그 수효는 어림잡아도 사오백은 될 듯했다. "저...... 저들은 백쾌당의 인물들이다." 중인들 중 누군가가 그들을 알아보고 대경 실색해 외쳤다. 군웅들의 안색이 모두 대변했다. 그들은 지금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손을 쳐들 힘조차 없었다. 한데 그들의 다섯 배나 되는 백쾌당의 고수들을 무슨 수로 무찌른단 말인가? 석중옥의 눈에서 신광이 뻗어 나왔다. "이제 알겠군. 당신은 바로 백쾌당주(百快黨主)가 아니오?" 순간, "하하하...... 그렇소. 본인이 바로 백쾌당을 맡고 있소." 절세신유 손중양이 낭랑한 대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는 순간, 청수한 중년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대신 무척 준수하고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사십 세 정도 되었을까? 짙은 눈썹에 날카롭게 솟은 콧날, 그리고 얄팍한 입술 에 탐스럽게 기른 수염...... 젊었을 때는 천하의 미남자(美男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었다. 더구나 눈빛이 마치 수정(水晶)처럼 차갑고 맑아서 더욱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한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 당신은 고천악(古天岳)!" 한쪽에 서 있던 임소군이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절세신유 손중양은 임소군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소, 연매! 내가 바로 고천악이오." 임소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 당신이 설마 백쾌당주일 줄이야......!" 중인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가득했다. 제 47 장 급전직하(急轉直下) 의외의 급변(急變)!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손중양, 아니, 고천악이 임소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연매! 나는 왜 당신이 유수광 따위를 못 잊어 수절(守節)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닥쳐요!" 임소군의 얼굴에 노화가 피어올랐다. "흐흐...... 나 아닌 어느 누가 감히 당신을 차지할 수 있겠소? 유수광도 못 건드린 당신 을......" "다, 당신......!" 그의 말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듯 임소군이 비틀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신이었군. 수광을 죽인 사람이......" 고천악은 휘청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소, 바로 나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다, 당신이 어떻게......?" "나는 그가 당신과 결혼하기 며칠 전에 천축(天竺)에서만 나는 특이한 고(蠱)를 그의 몸에 풀었소. 그리고 그가 당신 방에 들어갈 때쯤 고를 발작시킨 것이오." "다, 당신이......!" 임소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는 당신을 의형(義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녀의 몸이 경악과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누님!" 석중옥이 나직하게 외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 중옥......" 임소군이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주, 중옥! 나...... 나는......" "누님! 아무 말 마시오." 석중옥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누님을 믿고 있소.""미...... 미안해요. 하......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미녀의 눈물. 그것은 철석간장을 지닌 사나이의 마음일지라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사랑해서, 그를 위해 울고 있는 것 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언니......" 백상아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임소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임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 아매!" 그녀는 젖은 뺨을 닦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제 이와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이것은 과거를 잊는 마지막 눈물이었고, 새로운 출발을 다지는 첫 눈물이었다. 임소군도 부끄러운 듯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석중옥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임소군도 감사와 애정이 충만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웃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천하의 다른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듯 활짝 웃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고천악은 눈에서 불이 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흐흐...... 이제 보니 벌써 딴 서방을 두고 있었군."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흉악해졌다. 그제야 석중옥의 시선이 고천악에게로 향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쳐 불똥을 튀겼다. 석중옥의 눈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고천악 은 질투로 끓어올랐던 자신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대...... 대단한 기도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석중옥은 그의 자세에서 그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가공할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구양 사형의 대제자인 고천악이오?" "흐흐...... 그렇소. 하지만 천룡문을 이용해 괜히 나를 겁주려 하지 마시오." 고천악이 먼저 선수를 쳤다. 석중옥의 눈에서 한 줄기 신광이 번뜩였다. "그럼 당신은 자신이 천룡문하임을 부정하겠단 말이오?" "흐흐...... 애당초 천룡문 따위는 나의 안중에 없었소. 그리고 나는 이미 십 년 전에 천룡문 을 나왔소." "......!" 문득 석중옥은 무엇을 느꼈는지 안색이 변했다. "그렇군. 천사 요현에게 내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알린 것이 바로 당신이었군!" "흐흐흣, 그것을 이제야 알다니...... 양패구상(兩敗俱傷)을 시키기 위해 약간 손을 써봤을 뿐 이오." 고천악은 만면에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당신들은 과연 나의 예측대로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도 없이 지쳐 있소. 본 당에서 공격만 하면 당신들을 몰살시키는 것은 식은죽 먹기가 될 것이오." 중인들은 모두 고천악의 말에 이를 갈았다. 하나 그의 말이 사실인지라 아무도 감히 발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석중옥은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겨우 이들로 말이오?" 그는 일대를 에워싼 백의인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고천악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하하...... 당신의 배포는 정말 대단하오. 이들로 부족하면 더 나올 수도 있지." 이어 그는 우측을 향해 크게 외쳤다. "대법왕(大法王)! 준비되었소?" 순간, "크하하...... 하마터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주가 부르기도 전에 나올 뻔했소!" 굉량한 웃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한 떼의 인마(人馬)가 무서운 기세로 중인들을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모두 누런 승포에 갓을 쓴 승인(僧人)들이었다. 생김새가 특이한 것이 중원인(中原人) 같지는 않았다. 그 수효는 대략 이백여 명. 그들의 선두에는 상반신을 벗은 여덟 명의 승려들이 짊어진 가마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배 가 미륵불(彌勒佛)보다도 더 나온 중 하나가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다. 그 가마는 승려 십여 명의 호위 아래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포,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대법왕이다!" "으...... 서역(西域)의 제일인자(第一人者)라는 저자까지 나타나다니......" 군웅들의 입에서 절망에 찬 탄식이 흘러나왔다.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대법왕(大法王)! 약관의 나이에 서역제일인 포달랍궁의 주지(主持)가 된 이래, 서역의 모든 세력을 복속시켜 서역활불(西域活佛)이란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역에만 칩거하여 중원에서는 그가 서역을 장 악한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가 백쾌당과 암중에 손을 잡고 있을 줄이야! 가마 위의 대법왕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흐음, 저자가 바로 본 궁의 황룡존자 오찰극을 죽인 중원제일고수 석중옥이란 자요?" "그렇소." 고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본(本) 불(佛)은 그에게 본 궁의 빚을 갚아야겠소." "하하...... 그것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고천악이 여유 만만하게 웃었다. 한데 석중옥 또한 입가에 싱긋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천악은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귀하는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 것이오?" "왜, 나는 웃으면 안 되오?" 석중옥이 태연할수록 고천악은 이상하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흠! 사정이 이렇게 됐는데도 여유를 부리다니, 귀하는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군." "하하......" 갑자기 석중옥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천악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하하...... 당신이 나를 너무 몰라서 웃었소." "모르다니......?" "하하...... 고천악! 당신은 내가 진짜 당신의 함정에 빠져 천사 요현 등과 싸운 줄 아시오?" "그게 무슨 뜻이오?"하하...... 내가 일부러 당신의 뜻대로 따라 준 것은...... 그 동안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종적을 보이지 않던 당신의 세력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소." 고천악은 코웃음을 쳤다. "흥! 본인이 세력을 드러낸 것이 당신의 뜻이었단 말이오?" "하하...... 그렇소. 한번 보시겠소?" 석중옥은 허공을 향해 외쳤다. "사형! 어디 계십니까?" 순간, "크하하하...... 나는 사제가 나를 부르는 것을 잊어버린 줄 알았네." 엄청난 광소성이 터지며, 군웅들을 포위하고 있던 백쾌당 인물들의 일각이 크게 허물어졌다. 마치 해일이 덮쳐 방파제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크아악!" "으으윽!" 펑! 쉬-이-익! "크하하하하...... 이놈들!" "으아-악!" "케엑!" 마치 쾌속선을 타고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듯 한 떼의 인영들이 무서운 기세로 백쾌당의 저지를 뚫고 나타났다. 그들의 선두에는 원숭이 몰골의 괴이한 노인과 수염을 기른 우람한 체구의 흑의노인이 있지 않은가! "사...... 사부...... 거기에 천애광자까지......!" 그들을 알아본 고천악의 안색이 대변했다. 나타난 인영들. 그들은 바로 혈천노조 구양중과 천애광자 제력심을 비롯한 천룡문(天龍門)의 제자들이었다. "크하하...... 고천악, 이놈! 과연 여기에 있었구나!" 혈천노조 구양중이 고천악을 발견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고천악의 안색이 잔뜩 찌푸려졌다. 구양중 곁에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듯 준수하기 그지없는 중년의 선비와 아름다운 중년미 부가 서 있었다. 고천악은 그들의 기도가 구양중보다 오히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 았다. 그의 뇌리 속으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한 부부(夫婦)의 이름이 떠올랐던 것이 다.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 한소리 꾀꼬리 같은 음성과 함께 한 줄기 백영이 그들의 품속으로 번개같이 날아갔다. 중년의 선비는 껄껄 웃으며 백영을 마주 안았다. "허허...... 녀석! 얼마 동안 안 본 사이에 어리광만 늘었구나!" 기쁜 듯 중년선비의 품에 안긴 인영, 그녀는 바로 노연홍이 아닌가! 중년미부가 그녀의 뺨을 톡 건드리며 웃었다. "호호호...... 이것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느냐? 얼굴이 더 예뻐졌구나......" 노연홍은 중년미부의 말에 두 뺨을 노을처럼 붉혔다. 금도공자 전붕비가 그들에게 절을 했다. "비아(飛兒)가 사부님과 사모님을 뵈옵니다." "하하...... 그래, 잘 있었느냐?" 중년선비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의 태도에는 은연중 기품이 흐르고 고귀한 기상이 어려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심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때 석중옥이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중년선비와 미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중옥이 대사형(大師兄)과 형수님을 뵙습니다!" 석중옥이 정중히 포권을 했다. 중년선비는 그의 전신을 쓸어보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하하...... 자네가 바로 사부님의 칭찬이 자자한 막내사제로군. 대례(大禮)는 생략하시게. 문 주(門主)의 절을 받기는 싫으니까......" 중년미부도 기품있게 웃었다. "호호...... 과연 듣던 대로 준수하기 그지없군요." 그녀는 흑발을 꿰뚫고 석중옥의 용모를 알아본 것이다. 중년의 선비와 미부!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 동해검선(東海劍仙) 노중환(盧重環)! 천향검비자(天香劍妃子) 심옥란(沈玉蘭)! 바로 그들 부부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년(中年)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들의 나이는 거의 백 세에 육박하고 있 었다. 한편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노연홍은 깜짝 놀랐다. '어머나! 저분이 할아버지의 사제라고......? 그럼 나에게는 사숙조(師叔祖)?' 그녀의 안색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는 뭐가 못마땅한지 연신 입을 삐죽거렸다. 대체 무엇이 불만일까? 바로 그때였다. "흐흐...... 사부! 더 이상 나를 핍박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천룡문을 탈퇴한 지 오래이니......" 고천악의 음성이 들려 왔다. 하나 왠지 모르게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 이놈! 아직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다니......" 구양중은 고천악이 자신을 보고도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자 대로하여 외쳤다. "이놈! 네놈을 사주한 놈이 누구냐? 어서 말하지 못할까?" "흐흐...... 사부 정도로는 그분을 뵈올 자격이 없소." "뭣이?" 구양중의 몸이 치솟는 노화로 부르르 떨렸다. "이놈!" 그는 고천악을 향해 맹렬한 일장(一掌)을 내갈겼다. 꽈우-우-웅! 엄청난 장력(掌力)이 땅거죽을 뒤집으며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고천악은 냉소했다. "흥! 나는 예전의 고천악이 아니오." 동시에 그의 일장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순간, 쿠콰쾅! 천지가 뒤집힐 듯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동시에 고천악이 휘청, 한걸음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나 구양중은 연거푸 세 걸음을 뒷걸음질치고서야 간신히 몸을 세웠다. "이...... 이럴 수가......!"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구양중의 얼굴은 수치로 인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찢어 죽일 놈! 어디서 장공 하나를 배워 가지고......" 이어 막 일장을 내뻗으려는 순간, 스슥! 한 인영이 미끄러지듯 구양중의 앞을 막아 섰다. 놀랍게도 그는 묵운편 사마진평이었다. 구양중은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마 노제! 어쩌자는 건가?" 사마진평은 정중히 말했다. "구양 대협! 저자는 제가 상대해야겠습니다." "비키게! 저놈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찌 사제와 사형의 얼굴을 볼 수 있겠 나?" 하나 사마진평은 조금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구양 대협! 저의 절친한 친구인 녹림마군자 단요종이 백쾌당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의 무덤 앞에서 복수를 해주기로 맹세했습니다." 사마진평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누구도 꺾지 못할 불굴의 신념이 깃들여 있었다. 사마진평의 친구, 녹림마군자 단요종! 그는 포달랍궁의 청부(請負)를 받은 백쾌당에 의해 얼마 전 암살당했던 것이다. 구양중은 사마진평이 한번 입으로 내뱉은 말은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해치우는 성격 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고천악은 자신의 제자가 아닌가! 아무리 화가 나기로서니 사부 된 입장에서 자신의 제자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사마진평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다. "알았네! 그렇다면 자네가 맡게나!" "고맙습니다, 구양 대협!" 이어 사마진평은 몸을 우뚝 세우고 고천악을 마주보았다. "긴말은 필요없겠지? 무기를 꺼내시오." 담담히 말하는 그의 손목에는 어느새 검은 빛을 뿌리는 풍운무적편이 감겨 있었다. 고천악의 안색은 여러 가지로 변하고 있었다. "......!" 하나, 결국 승부를 피할 수 없음을 알았는지 그의 얼굴에 각오의 빛이 떠올랐다. "좋소! 내 천하제일의 호한이라는 당신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보겠소." 이어 그는 품속에서 넉 자 길이의 작은 창(槍)을 꺼내 들었다. 후끈......! 볼품없어 보이는 그 창에서는 가공할 열기(熱氣)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건곤이화창(乾坤離火槍)!" 사마진평의 눈에서 기광이 어른거렸다. "그렇소. 과연 안목이 대단하구려. 이것이 바로 건곤이화창이오!" 고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한번 펼치면 주위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천하제일의 열양지병(熱陽之兵) 건곤이화창이 설마 고천악의 수중에 있을 줄이야......! 두 사람은 서로 묵묵히 대치하고 섰다. 우내육대중보 중 하나인 풍운무적편과 건곤이화창을 든 그들의 무공은 실로 백중한 것이었 다. 마침내, "야앗!" 고천악의 외침과 함께, 콰르르릉...... 건곤이화창이 시뻘건 불기둥으로 화해 가공할 기세로 사마진평을 덮쳤다. "좋은 공격이군!" 사마진평은 일 장 높이로 떠오르더니 신형을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파파파파파팍! 한 줄기 거대한 흑편(黑鞭)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장내를 질풍 노도와 같이 휩쓸어 갔다. 순간, 꽈꽈꽈꽈- 꽈르르릉- 두 사람 사이에서 굉렬한 폭음이 일었다. 이때 천애광자 제력심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야하기 그지없는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제법 점잖은 걸음으로 대법왕을 향해 다가 갔다. "네놈이 바로 서역활불인가 뭔가 하는 포달랍궁의 대법왕이냐?" 대법왕은 움찔했다. '이 노괴물이......!' 제력심은 히죽 웃으며 대법왕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냈다. "노부는 언제나 살찐 중을 보면 밥맛이 떨어지지. 땡중아! 우리 한번 겨뤄 보자!" 대법왕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하나 그는 감히 제력심을 경시하지 못하고 지그시 이빨을 깨물면서 전신 내공을 끌어올렸 다. 순간, 콰우우우...... 그의 뚱뚱한 몸에선 무형의 기세와 소용돌이가 일어나 주위를 무섭게 휘날렸다. "땡중! 제법이구나...... 하나 노부가 오늘 네놈에게 중원무학(中原武學)의 진수를 보여 주마!" 제력심은 한 줄기 직선을 이루며 대법왕에게 덤벼들었다. 드디어 이 대 이의 치열한 격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하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절정고수들인지라 그들의 격전은 가 히 땅이 울리고 하늘이 꺼질 놀라운 것이었다. 석중옥은 묵묵히 사(四) 인(人)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옆에 서 있는 여의노사 백철군을 응시했다. "어떻습니까?" 격전을 지켜보던 백철군이 석중옥을 돌아보았다. "무엇이 말인가?" 석중옥은 미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쯤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어떻냐는 말입니다." 순간, 번쩍! 백철군의 눈에서 번갯불 같은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신광이 어른거리는 시선으로 석중옥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석중옥은 조금도 거리낌없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문득, "크하하하...... 과연 너는 뛰어난 아이구나!" 백철군이 대소를 터뜨렸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백철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노부를 의심하게 되었느냐?" 석중옥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사 요현은 분명히 당신에게 혈마강신마법을 펼쳤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정신을 잃지 않고 오히려 혈마강신마법으로 금강불괴가 된 남궁뢰와 당익형을 쉽게 죽였소. 백철군 대협 의 무공이 비록 강하다고 하나 그토록 엄청날 수는 없는 일이오. 혈마강신마법에 당하고도 정신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직 혈마강신마법을 극성에 이르도록 연마한 사람뿐이오." "하하하하...... 과연......!" "난 이곳으로 오면서 내가 꼭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래서 고천악을 배후 조정하는 당신이 모든 일의 원흉(元兇)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 다." "하하하......" 백철군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때, "아...... 아버님!" 백상아가 뜻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백철군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는 백 대협이 아니오, 상아!" 석중옥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백상아를 비롯한 중인들이 대경 실색했다. 백철군이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아이야! 너는 노부를 거듭 놀라게 하는구나! 그렇다. 노부는 백철군이 아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중년인에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신선(神仙) 같은 풍채의 노인이었다. 완전히 은백색으로 빛나는 학발(鶴髮)과 귀 밑에 이르는 백미(白眉), 그 백미 아래 부드럽게 빛나는 자안(慈眼)은 천하의 누구라도 감싸 줄 것 같았다. 배까지 늘어뜨린 은빛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난 이 노인을 보고 누가 경외지심을 갖지 않겠 는가? "아...... 아버님은......?" 백상아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할 때, "하하...... 백철군은 노부가 제압해 두었다." 노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노부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노부는 그를 제압하고 다시 당이선생으로 변장해 이곳으로 온 것이지." "......!" "노부는 나의 분장이 완벽하다고 자신했다. 한데...... 뜻밖에도 정체가 드러날 줄은 몰랐군." "실망을 끼쳤구려." 석중옥이 냉담히 말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천만에! 노부의 마음은 지금 매우 기쁘다. 왜냐하면 네가 노부의 생각보다 더욱 뛰어난 사 람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뒷짐을 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산중에 유람을 나온 사람인 듯...... "천하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인물이라 불릴 사람은 오직 노부 뿐이었다......!" 그의 말은 미묘한 여운을 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말을 광오(狂傲)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만큼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가 가공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나 노부는 오늘에야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석중옥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중옥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세영웅(絶世英雄)! 절세효웅(絶世梟雄)!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두 거인(巨人)의 만남이었다. 제 48 장 고독천리(孤獨千里) "위지 사형의 천심장을 멸문시킨 것도 당신 짓이었소?" "허허...... 그렇다!" "임가장을 비롯해 철기보 등을 멸문시킨 것도 귀하의 짓이오?" "아암! 모두 노부가 지시한 일이지." 석중옥의 얼굴에 무서운 신광이 어렸다. "왜 그런 짓을......!" 문득 노인은 석중옥을 바라보며 점잖게 물었다. "너는 노부가 누구인지 아느냐?" 석중옥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노인이 본 모습을 나타낼 때부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 하던 동해검선 노중환이 갑자기 대경(大驚)해 부르짖었다. "이...... 이제 보니 당신은......!" 노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허허...... 나를 알아보겠느냐?" "도...... 도왕(刀王) 여절파(呂絶破)......!" 노중환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 "여...... 여절파......?" 중인들은 아연 실색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동안 태연하기 그지없던 석중옥조차도 안색이 대변했다. 도왕(刀王) 여절파(呂絶破)!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르겠는가! 백 년 전 한 자루 도(刀)를 들고 나타나 천하무적(天下無敵)으로 군림하던 절대(絶代)의 무 인(武人)을...... 그는 무림사상 최고의 도객(刀客)으로 불렸다. 그의 이름은 천년삼왕(千年三王)이란 명칭으 로 후세에 길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서 사라져 숱한 신비와 전설을 남겼던 여절파! 그가...... 백 년이 지난 오늘에 다시 나타나다니...... "허허...... 모두 놀라는군. 하긴...... 아직까지 노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겠지." 도왕 여절파는 담담한 미소를 떠올렸다. "귀하 같은 대선배가 왜 이런 짓을......?" 노중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허...... 그대가 어찌 노부의 속마음을 알겠는가?" 여절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강호에 출도(出道)한 이후 무적이었다. 감히 아무도 노부의 손에 일 초를 넘긴 사람 이 없었지. 노부는 그 무공으로 온 천하에 널린 마인(魔人)들을 제압하는 데 전력을 다했 다." "......!" "하나 사람들은 그런 노부에게 천하무적이란 말을 쓰는 것을 아깝게 여겼던 것이다!" "......!" "노부의 손에 일 초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노부의 무공이 천 년 전의 혈왕 위혼이나 이백 년 전의 검왕 절대검자보다 못하다고 말할 때, 노부는 정말 죽고 싶도록 괴로웠다!" 그의 음성은 비록 여전히 낮고 조용한 것이었지만, 중인들은 그 속에서 한 줄기 무서운 분 노를 느낄 수 있었다. "노부는 당장이라도 혈왕 위혼이나 절대검자를 만나 무공을 겨루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의 무공이 그들보다 뛰어남을, 명실상부한 천하무적임을 입증하고 싶었다. 하나...... 그들 중 혈 왕 위혼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절대검자도 은거한 지 백 년이 훨씬 넘어 어디에서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노부는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 더욱 열심히 강호의 마인들을 제거하고 무공을 연마하는 데 열중했다. 하나 언제나 들려 오는 소리는 단 한 가지였다. 혈왕 위혼과 검왕 절대검자가 있 는 한 도왕 여절파는 결코 천하무적이 될 수 없다는......" 여절파의 눈에서 번뜩이는 신광이 뿜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결국 노부는 미치도록 분노하고 말았지. 노부의 무공이 반드시 혈왕 위혼과 검왕 절대검자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노부는 혈왕 위혼과 절대검자의 무공을 찾아 천하를 헤매게 되었던 것이다. 노부는 온 천하에 있는 기보와 무공비급 등을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순간, "그...... 그럼 종횡무영도 한백은......?" 석중옥이 무언가를 느낀 듯 다급하게 물었다. 여절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종횡무영도 한백이란 바로 노부가 무공비급을 찾아 다니면서 일부러 만든 명호였 다!" "아......!" 중인들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종횡무영도 한백! 무림사상 최고의 신투(神偸)로 전설적인 명성을 떨쳤던 한백이 설마 도왕 여절파의 화신(化 身)이었을 줄이야...... "그럼 혈왕경은......?" "그것은 노부가 수십 년간 강호를 뒤지다 천신만고 끝에 발견한 것이다. 노부는 미친 듯 혈 왕경의 무공과 노부의 무공을 비교해 보았다. 과연...... 노부의 무공은 충분히 혈왕의 무공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노부는 뛸 듯이 기뻤었지." "......!" "그리하여 노부는 이번에는 절대검자의 무공을 찾으려고 천하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절대검자의 종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노부의 마음에 무서운 살심(殺心) 이 피어올랐다. 온 천하의 무림인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절대검자의 무공을 익힌 자를 찾아 내고야 말리라고......!" 그 말을 하는 여절파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중인들은 모두 숨막히는 공포를 느끼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리하여 노부는 가공할 계략을 세웠다. 먼저 한 인물에게 우연인 것처럼 여기게 혈왕경을 전해 주고...... 그 인물로 하여금 혈겁을 일으켜 절대검자의 무공을 찾게 하려는 것이었지." 석중옥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그렇다면 결국 천사 요현도 그의 의중에 놀아난 꼭두각시에 불과했군.' 천사 요현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여절파는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혈왕경을 익힌 자와 절대검자의 무공을 익힌 자 중에 승리하는 사람과 대결하기 로 마음을 먹었다. 노부는 우연히 기회를 보던 중 천사 요현의 야심(野心)이 대단한 것을 알 고 그의 수중에 혈왕경이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과연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무림을 제패할 야욕에 불타 버렸다." "......!" "한데 일이 뜻밖으로 어긋나 버렸다. 천사 요현은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구양중이란 인물 에게 그 일을 떠맡기려는 것이었다. 노부는 급히 구양중의 내력을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는 노부가 그토록 찾던 절대검자의 제자였던 것이다." 구양중의 안색이 그 말을 듣자 참담하게 변해 버렸다. 자신이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여절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 구양중은 절대검자의 무공을 채 반도 익히지 못했지. 그리하여 노부는 크게 실망하고 그의 사부인 절대검자를 나타나게 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구양중의 제자로 하여금 그를 배반케 하여 구양중의 사문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 "한데 이번에는 구양중의 사제인 위지송이란 자가 나타나 노부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천심장을 멸문시킨 것이다." "으음......!" 석중옥은 움켜쥔 두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 뒤의 일은 자네도 알겠지...... 노부의 짐작대로 절대검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무 공을 완전히 익힌 자네를 만났으니 노부의 백 년간의 계획은 성공한 것이네." "......!" 석중옥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백(百) 년(年)! 무려 백 년간을 이토록 치밀한 계획하에 수많은 혈겁을 저지른 이유가 고작 자신을 불러 내 기 위함이었다니...... '결국 본 문은 그의 손에 철저히 농락당한 셈이군!' 석중옥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남궁뢰와 당익형을 죽여 나를 위기에서 구해 준 이유는 무엇이오?" "노부는 너와 천사 요현이 정당하게 실력을 겨루는 것을 보고 싶었다. 과연 노부의 짐작대 로 네 무공이 그를 능가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석중옥은 자신도 모르게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임가장과 철기보를 멸문시킨 이유는 뭐요?" "그거 말인가? 남들의 이목을 좀더 남궁검문과 천사 요현에게 쏠리게 하기 위해서였지. 아 울러 천심장의 혈겁이 그들의 짓이라고 믿게 하려고......"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석중옥은 어이가 없었다. "네게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노부는 백 년간을 기다려 온 것이다." 문득 여절파의 몸에서 서서히 가공할 기세가 피어올랐다. "일전에 너에게 죽은 탈혼도 여무극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悶눼? 하나 그 일로 너를 탓하지 는 않겠다...... 다만...... 나의 백 년간의 고독(孤獨)을 씻어 다오." 석중옥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여 절파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정상(頂上)에 선 자의 고독! 그것은 정상에 서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여절파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근 이백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면서...... 노부에게는 단 한 명의 적수(敵手)도 없었다. 너는 적수가 없는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이해하느냐?" "......!" "한데 우매한 세인들은 위혼과 절대검자를 노부와 비교하여 나를 분노케 하였다." "......!" 여절파의 시선은 석중옥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실로 훌륭하다.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노부의 적수가 될 만한 자다." 석중옥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과거 혈왕 위혼도...... 너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네가 이토록 뛰어나다는 것을 노부는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마침내 한 명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의 말에 석중옥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나 그로 인해 무고한 인명을 수없이 해친 당신의 죄는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오." "허허......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용서인가? 죄라면 말 많은 세인들이 노부를 분노케 한 것이 고, 용서라면 의당 백 년 세월을 고독 속에서 보낸 노부가 해야지." "......!" "노부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자네와의 비무(比武)뿐일세." 석중옥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석중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하하...... 자네가 응낙할 줄 알았네......" 여절파는 껄껄 웃으며 장삼 속에서 기이한 형태의 도를 꺼냈다. 기이한 뇌광(雷光)을 뿌리는 섬뜩한 마도(魔刀)! "참홍뢰도(斬虹雷刀)!" 석중옥은 그것을 알아보고 신음했다. - 공포의 뇌광이 번뜩이는 순간, 천하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리라. 천하제일의 마병(魔兵), 참홍뢰도! 드디어 우내육대중보가 모두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석중옥은 천천히 공손철검을 쳐들었다. 우우우우...... 그의 몸에서 가공할 검기(劍氣)가 형성되어 나아갔다. 드디어...... 드디어 백 년의 기간을 두고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으로 불리는 무림사 최대최강 고수 두 사람의 번천지복(飜天地覆)할 대격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휘우우우...... 아직 손도 쓰기 전이었건만, 그들 사이에 무서운 경력이 뒤얽히며 먼지를 허공으로 말아 올 렸다. 긴장!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 흡사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군웅들은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채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단 일 초...... 이들의 승부는 절대 일 초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중인들 중 무공이 가장 고강한 동해검선 노중환의 안색은, 이 순간 엄숙하게 굳어 있었다. 주위에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르고, 시간과 공기의 흐름조차 멎은 듯한 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번- 쩍! 번개! 한 줄기 뇌광이 돌연 여절파의 참홍뢰도에서 뻗쳐 나갔다. 하나, 그것은 이내 수십, 아니, 수천, 수만 개의 뇌광으로 변해 벼락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 다. "아아......!" 노중환은 그 엄청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울렸다. '저...... 전설의 도뢰강(刀雷 )이다...... 저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 어린 시선으로 석중옥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보았다. 한 줄기 낭랑한 음성과 함께 환상처럼 피어오르는 수많은 십자(十字) 무늬의 섬광을...... "십자파천황(十字破天荒)......!" 오오...... 십자파천황! 연환십절의 마지막인 고금최강(古今最强)의 검식(劍式)이 드디어 무림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노중환은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괜스레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이다. '자...... 장하군, 사제......! 십자파천황을 익혔다니......' 보였다. 보이는 것은 하늘을 뒤덮은 섬광뿐...... 십자 무늬의 섬광은 흡사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화려함...... 아름다움이여......! 그것은 이미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검학(劍學)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노중환은 수만 가닥으로 쏘아져 나오던 가공스런 뇌광이 십자검광(十字劍光)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으...... 악......!"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일까? 피! 선명한 핏물이 무지개 속으로 그림처럼 폭사해 가고...... 쿵! 그 속에서 한 인물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왕 여절파! 그는 꿈틀거리며 바닥에서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필사적으로 석중옥을 찾고 있었다. "네...... 네가 이긴 것이냐?" "운이 좋았을 뿐이오." 석중옥의 음성은 왠지 침울했다. 여절파의 눈에 언뜻 미소가 보인 것 같았다. "고...... 고맙다...... 이제...... 난 외롭지 않...... 아......" 그것뿐. 고금제일 도객의 최후는 이렇게 끝이 났다. 정적! 죽음 같은 정적이 있는가 싶더니,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고개를 돌린 석중옥의 시선 속으로 풍운무적편에 허리가 동강난 고천악과 피를 뿌리며 쓰러 지는 대법왕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득 석중옥은 전신으로 밀려오는 허탈감을 느꼈다. "와아아-아아!" "우아아아-!" 터질 듯 요란한 함성과 함께, 석중옥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수많은 군웅들의 모습을 언뜻 보았다. 백상아...... 임소군...... 제완완...... 노연홍...... 사랑스런 여인들!사마진평...... 한쾌...... 조담...... 제력심...... 구양중...... 얼굴들! 하나 석중옥은 그들이 아닌 하늘로 얼굴을 돌렸다. 시릴 듯 파란 하늘...... 그 하늘 아래 고독했던 사나이, 여절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네. 여절파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 같았다. 석중옥도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하나 나는 외롭구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이제 천하제일인이 된 젊은 사나이는 푸른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