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27 07:03:26, Hit : 497, Vote : 5)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5) 수정본;; ** 1,2,3편은 상관없지만 4편의 씬이 워낙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찾아보기 귀찮으실 것 같아 그냥 1편부터 다시 올립니다. 기존에 있던 것은 오늘 저녁 삭제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20편까지 올렸어야 하는데 표지도 그리고 이것저것 바쁘다 보니 약속을 어겼습니다.. ㅠ.ㅠ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Golden Age - 황금시대 [ 제1장 prologue 도빌 항(港)의 도둑 소년 ] "라, 라, 라, 라! 우리는 바다로 간다! 럼주만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다네! 블랙 비어드도 럼주가 없다면 한낱 부랑아일 뿐!!!" 도빌 항(港) 근처의 싸구려 여관을 지나며 패스티아 호의 선장 빌은 무거운 기분을 전환하려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오늘 아침, 주방장 녀석이 멍청하게 생선뼈를 제대로 고르지 않아 대못 만한 가시가 목에 걸려 빼내는데 애를 먹었다. 물론 해적생활 30년에 어지간한 생선뼈는 그냥 목으로 넘겨버리지만 오늘의 그 가시는 그냥 넘길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요리 솜씨가 좋다고 해서 채용했더니 눈도 가물가물한 늙은 고목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 빌의 배인 '패스티아'호의 주방장 도비는 분명 소개해준 녀석의 말대로 음식솜씨가 뛰어났다. 다만, 가끔 음식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딸려와서 피해를 보는 녀석들이 속출해서 문제였을 뿐. 그리고 힘든 아침 식사 후, 항해사와 함께 작도를 하며 오늘 움직인다는 '리치'호의 나포 작전을 짜던 중, 애완용으로 기르는 앵무새 녀석이 장난을 치다가 빌의 옷에 잉크를 떨어트렸다. 그 옷은 빌이 제법 아끼는 옷이었던 데다가 작도한 지도에도 잉크가 조금 튀었기에 빌의 분노는 대단했다. 함께 있던 항해사가 나중에 후회 말라며 말리지 않았으면 바로 잭을 죽여버렸을 정도로. '그 놈의 앵무새, 말동무로 좋다고 하기에 샀더니 말동무는 무슨! 매일 내 옷에 수프를 엎지르질 않나, 오늘은 잉크를 엎지르질 않나! 빌어먹을! 새 장수에게 속아도 단단히 속았어! 한 번만 더 옷에 뭘 엎지르면 바로 통 구이를 해먹어 버릴 테다!' "이봐요. 헤이! 거기 콧수염이 멋진 애꾸눈 선장님?" "? 나 말이냐?" "그래요. 지금 이 술집에 애꾸눈은 당신밖에 없다구요." 빌은 혼자 생각을 하던 중 들려온 소년의 말에 어느새 자신이 한 여관에 들어와 앉아있고, 또 언제 했는지 술 주문을 해서 지금 자신의 테이블 위에는 한 잔의 럼주가 놓여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패스티아 호의 선장 맞죠?" "…동냥을 하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꼬마야. 난 지금 기분이 좋지 않으니 다른 데 가서 놀아라." 행색이 초라한 소년은 일단 키부터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귀엽고 하얀 금발 고수머리의 소년이었다면 기분전환이나 할 겸 상대해 주었겠지만 오늘은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취향도 아닌 밀색 피부의 키 큰 소년의 상대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 "흐응. 그래요. 아쉽네. 난 또 오늘 상선 나포(拿捕)를 새치기 당한 블랙 버드 호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는 줄 알았지." "잠깐. 거기 서 꼬마." 사실 꼬마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아니, 그 나이 대 소년들 중 아주 조금 더 클 뿐이었지만 190에 달하는 빌에게는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는 갈색 피부의 소년이 돌아보았을 때―빌은 우선, 저 깊게 눌러쓴 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눈빛을 가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의중을 읽는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 눈빛 하나로 살인이 일어나는 험악한 해상 생활에서 그 눈빛을 읽을 수 없는 것이 빌은 약간 불쾌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짓는 여유로운 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헤, 관심 있으실 줄 알았다니까." "네가 블랙 버드호에 대해 알고 있다고?" 그랬다. 오늘 빌이 기분이 좋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리치'호의 나포를 최대의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있는 (비록 상대편에선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해도 어쨌든) '블랙 버드'호에 빼앗긴 것에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한낱 거렁뱅이 소년이 알고 있다니, 비록 믿음은 가지 않지만 일단 확인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러믄입쇼." "만약 거짓이라면, 너를 상어 밥으로 던져주고 말 거다. 분명 확실한 거겠지?" "그, 그렇대두요." 꿀꺽, 하고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는 것이 소년의 말은 사실인 듯 했다. "좋아,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좋습니다요. 그럼 우선…." "음?" "헤헤. 왜 이러실까. 아실 만한 나리께서…저희 같은 거리의 아이들이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사는지 모르시는 건 아닐 테죠?" "아하." 빌은 재빨리 품안에서 은화 한닢을 꺼내 아이에게 던져 주었다. 아이는 걸신들린 사람이 빵에게 덤벼들 듯 은화에 덤벼들었고, 빌은 정말 이 소년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조금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자, 이제 얘기해 보거라. 네가 블랙 버드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우걱, 우걱! 잠깐만요! 이 고기 한 점만 더 먹, 꿀꺽! 먹고!" 도대체 아까부터 저 작은 몸에 고기가 얼마나 들어가는 건지. 빌은 눈앞에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고기를 끊임없이 입 속으로 넣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꺼억! 휴우. 와아. 얼마 만에 배애 기름칠을 한 것인지!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구나! 아아, 나리 덕분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요!" "그래. 그럼 이제 슬슬 약속을 지켜야겠지. 네가 알고 있는 블랙 버드 호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아라." "예 예. 그러믄입쇼. 여부가 있을깝쇼." 입가에 묻은 양고기의 기름을 옷으로 스윽 문지른 뒤 맥주로 입가심까지 마친 소년은 잠시 주위를 살피듯 힐끔 둘러보고는, 무언가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짓고 빌이 앉아있는 맞은편으로 스윽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곤 빌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을 한 뒤, 빌이 고개를 움직이자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블랙 버드호의 선장인 블랙 버드는, 이름과는 달리 은발의 굉장한 미남이랍니다 나리」 "뭐라고?" "쉿, 쉿! 조용히 하고 계속 들으십쇼! 지금 중대한 비밀 얘기 중이잖습니까!" 빌은 생각지도 못한 자세한 정보에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기 저기 술을 마셔대는 시끄러운 무리들과 자신의 옆 테이블에서 두건을 쓴 채 맥주를 마셔대는 사내들이 있었지만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네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블랙 버드는 배에서 잘 내리지 않고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던데!」 「헤헷. 이 거리의 정보통을 무시하면 안되지요. 이 거리의 아이들은 아주 작은 연서의 심부름부터 해적들 사이에 오고가는 중요 문서까지, 못하는 심부름이 없습니다요.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블랙 버드의 얼굴 본 아이 하나쯤 없을까봐서요?」 「호오」 이 정도로 당당하게 나오니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빌이라고 해도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년의 말대로, 온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위험한 일까지 마다 않고 해대는 거리의 아이들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인상착의 말고, 놈의 배가 지금 어디 있다던지, 또는 언제 또 이 카리브 해안에 출몰할 것인지 하는 것도 안단 말이냐?」 「아이고, 두말 하면 잔소리입죠. 제가 그런 것쯤 모를까봐서요. 하지만…」 「뭐, 뭐냐!」 「헤헤, 이 정도로 중요한 정보니까, 후하게 쳐주실 테죠? 어떻습니까 나리?」 「으음!」 돈만 밝혀대는 거렁뱅이 같으니라고! 빌은 속으로 욕을 해댔지만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정보다. 최근 새로 출몰하기 시작하여 쟁쟁한 해적선들을 차례대로 물리치고 있는 블랙 버드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므로. "옛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다. 이 정도면 불만은 없겠지!" 쩔그럭, 하고 빌은 품안의 지갑을 통째로 소년에게 던져 주었다. 아까처럼 허겁지겁 지갑에 달려들 것을 예상했건만 의외로 소년은 침착한 자세로 지갑을 잡고 그 속을 천천히 들여다 보았다. "…뭐, 금화는 별로 없지만 은화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정보를 들려주어도 좋겠군요." "건방진 놈." "히히. 이 도빌 항에서 이 정도가 아니면 살지 못하옵니다 나리." "그래, 어서 말해 보아라." "예이. 그러나 그 전에 목이 마르니 맥주를 한 잔 더 마시기로 할까요. 나으리도 함께 드시죠." "그래."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목이 타고 있던 빌은 소년이 주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식도로 넘겼다. 특유의 씁쓰름하고 따끔한 느낌이 식도를 자극하며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는 듯 했다. 역시 럼주와 맥주는 해적들에게 있어 여자만큼이나 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헤헤. 맥주가 참 시원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음, 오늘따라 더욱 맛있는 듯 하군." "그렇지요. 헤헤헤." "기분 나쁘게 웃지 말고 어서 얘기나 마저 하거라. 그래서, 블랙 버드의 다음 목표는 뭐라고 하더냐?" "아, 그것이 말이지요…." 소년은 다시 빌을 가까이 불러서 귓가에 소근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은근한 말투를 듣자니 빌은 왠지 간지럽고, 졸음이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랙 버드는 말입니다 나리…」 「음……」 「아마도 그의 다음 목표는……」 「으음……」 "어라? 졸리신 듯 한데 괜찮으신 겁니까 나리?" "음…아니, 괜찮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갑자기 왜 이렇게 졸음이…." "저런,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잠깐 쉬시겠어요 나리?" "안돼…너에게서 블랙 버드에 대한 것을…듣지 않으면…." "아아…벌써 이렇게 눈이 감기셨는데 무슨 얘기를 들으실 수 있겠어요? 편히 잠이나 주무시죠. 나.으.리." 안개를 뿌린 듯 뿌얘지는 시선 너머로 빌은 소년의 입가가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속았다!'하는 생각이 들며 저 녀석을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건 조금 뒤에, 이 졸음을 조금만 쫓아 버린 뒤에 해야할 것 같았다. 지금은 너무나, 너무나도 졸리니까. "아아∼ 이 나리 엄청나게 졸리셨던 모양이네. 이봐요 주인장. 계산은 이 나리께서 하신다고 했으니까 그리 아세요. 전 그냥 이 분의 심부름꾼이거든요. 헤헤. 사람을 불러놓고 그냥 주무셔 버리면 어떡하나. 할 수 없이 다음에 와야겠다. 그럼 맛있게들 드십쇼∼." 빌이 잠든 것을 확인한 소년은 씨익, 하고 시원하게 웃고는 여유 있는 자세로 잔 안의 남아있는 맥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그리고 술집 안의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술집 안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흥에 겨워 술을 마셔대느라 그런 소년을 쳐다보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어두운 곳에서 상서롭지 못한 빛을 발하는 하나의 시선이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 * * "끼얏호! 오늘은 운이 좋은걸! 히히. 멍청한 해적들 같으니라구! 얼굴만 무섭게 생기만 다람! 머리가 멍청해서 나 같은 어린애에게도 속는 주제에! 하핫! 우하하하!!!" 도빌 항(港)에 살고 있는 소년 라디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 도빌 항에서 7살 때부터 잔 도둑질만 10년째지만 오늘만큼 쉽고, 한 번에 많은 돈을 번(훔친)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아아, 정말 기분이 좋다. 이 돈이면 마사 아주머니의 약도 며칠 치는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파크와 나도 오늘 하루쯤은 고기가 들어간 수프를 끓여먹을 수 있겠다. 신난다. 매일이 오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년은 집에서 목이 빠져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파크의 얼굴을 생각하며 주머니 속의 두둑한 돈을 만져보곤 웃었다. 정육점에 들러 사간 고기를 보면 파크는 어떤 얼굴을 할까. 얼만큼 환한 얼굴로 웃어줄까. 그리고 마사 아주머니는 내가 사간 약으로 혈색이 좀 돌아 오실까. 아아. 뛰고 있는 것 같은데도 오늘은 걸음이 왜 이다지도 느린지. 소년은 날기라도 하고 싶은 듯 발이 땅을 딛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탁탁탁탁 목적지를 향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 "조용히.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입 닥치고 내 말을 들어라." 하지만 그 즐거운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서 멈추고 말았다. 아니, 멈춰지고 말았다. 좁은 골목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두툼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조그만 녀석이라서인지 발이 제법 빠르구나. 이 나도 너를 뒤쫓는 데는 꽤 힘이 들었다. 과연 블랙 버드를 아는 정보통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건가." "!" 라디는 짙은 검은 색 후드 너머로 입술만 보이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닫자 동공을 크게 확대시키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의 검은 후드 사내가 입을 막고 있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관에서 네가 패스티아의 빌과 하는 얘기를 들었다. 너." "어떻게 블랙 버드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 "캡틴!!" 그제서야 라디는 사내 뒤에 후드를 둘러쓴 또 한 명의 사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혀 기척도 없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리다니. 비단 이 사내가 덩치가 커서만은 아닌 듯, 사내는 아주 작은 발소리마저 내지 않고 양 손목과 입을 잡혀있는 라디의 곁으로 천천히, 아주 우아하게 걸어 왔다. "놔 줘라." "하지만," "네가 무서워서라도 소리는 지르지 않을 거다. 왜냐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네가 이 소년의 목을 자를 테니까. 그렇지, 소년?" 라디는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사람들이라면 정말 목을 자르고도 남을 거라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놔줘라 스네이크." "…예 캡틴." 스네이크라 불린 남자는 아마도 뱀을 닮아서일까 생각해 힐끗 올려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라디 쪽을 째려보아 라디는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깜짝 놀랐다. 결국 뱀처럼 사납게 생긴 그의 눈만은 볼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캡틴이라 불린 남자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검은 후드를 쓰고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커다란 남자가 깎듯이 대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보다 높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을 터, 고로 더 무서운 사람이란 뜻도 된다. "자아 소년." "힉," 조금 전 걸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남자가 라디의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무서운 것과 비례하여 또 그만큼 묘하게 섹시하기도 하였다. 여자 같은 것도 아니면서 묘하게 아름다운 목소리. 어린 소년 라디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소프의 누님들이 말하는 쌀 것(?) 같은 목소리란 바로 이런 걸까 하는 조금은 관계없는 생각을 해버렸다. "말해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블랙 버드에 대하여?" "!" 역시나. 아까 저 스네이크라 불린 사내도 말했지만 역시 이 자들은 자신이 조금 전 술집에서 말한 얘기를 듣고 따라온 것이 분명했다. 좋다. 얘기를 따라온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그것은!" "그래. 누구에게도 흘리지 않았던 얘기가 한낱 거렁뱅이 아이들 사이에 돌고 있다니, 이는 분명 치명적인 정보 누설이다. 어디서 들은 게냐, 설마 너희들 뒤에 누군가 큰 배후가 있는," "제, 제가 지어낸 얘기예요!!!" "―! …뭐라고?" 눈을 질끈 감고 힘들게 소리친 라디의 고백에 언제든 침착할 거라 보이던 남자조차 잠시 숨을 멈추고 어딘가 힘 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어이없게 생각한다 해도 할 수 없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블랙 버드는 최근 5년 동안 도빌 항은 물론 해적의 루트라 불리는 북아메리카―희망봉―인도양 전 곳을 장악하고 다니는 가장 유명한 해적이었다. 값진 물건을 운반하는 아라비아와 인도의 배들 중 블랙 버드에게 약탈을 한 번이라도 안 당한 배가 없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그들의 활약상은 두문불출했고, 참다 못한 상선들이 정부에 호소를 해 호위선박을 하나씩 달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강대했다. 그러니 그런 대단한 이들을, 한낱 잔 도둑질이나 하는 라디가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정말 이 자리에서 목이 따지고 싶은 게냐!" "히익! 그게 아닙니다요! 전 정말 블랙 버드 따위 모른다고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으리! 저 같은 빈민가의 아이가 어찌 그런 무서운 해적을 알겠습니까요! 아까는 그저 멍청해 보이는 해적을 속이느라 얘기를 지어낸 것뿐이라고요! 나으리들도 제가 하는 얘기를 들으셨다면 아시겠지요! 블랙 버드가 은발의 미남이라고요? 그걸 누가 안답니까? 지저분하고 소금냄새만 나는 거친 바다의 해적들에게 그런 이미지가 당키나 하답니까? 게다가 블랙 버드가 이 바다에 와 있는지, 그걸 제가 어찌 안답니까? 저는 항구 근처의 술집들에서 거렁뱅이 소매치기나 할 뿐이지, 그런 해적들의 정보는 귀동냥으로도 얻어듣지 못합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믿으시다니요! 제 얘기 중에 진실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블랙 버드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들의 화려한 활약상 외에도, 전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블랙 버드 호의 선장, 블랙 버드의 비밀스러움도 한몫을 했다. 보물을 싣고 오는 상선들을 약탈할 때, 그는 부선장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고 지시만을 내릴 뿐, 나포한 배의 선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부하들의 능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그의 계략이 뛰어나고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싫어한다는 뜻도 되었다. 약탈한 배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원래 해적들의 습성이니까. 하지만 블랙 버드는 멀리서 조용한 목소리만 들려올 뿐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리고 그런 블랙 버드의 소문은 어느새 일파만파 전 해상에 퍼져, 그는 분명 허구의 인물일 거라는 둥, 사실은 부선장이 블랙 버드호의 선장일 거라는 둥, 또는 블랙 버드라는 이름처럼 검은 새가 그 배의 선장이 아니냐는 둥 온갖 허무맹랑한 소문마저 돌고있었던 것이다. "……." 당장이라도 라디의 목을 칠 듯 칼을 빼들고 위협하는 스네이크에게 라디는 그저 손을 싹싹 빌며 살려만 달라고 소리쳤고, 스네이크라 불린 사내는 옆에 있는 사내의 눈치를 보느라 라디를 죽이지도 못하고 칼을 쳐든 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네이크." "예. 당장 이 놈의 목을 치겠습니다!!" "히익!!" "아니, 그게 아니다." "―예?" "헉, 헉, 허억!" 라디는 바로 자신의 코앞까지 와있는 커트라스의 칼날을 보며 필사적으로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빈민가 생활 15년에 어지간한 일은 다 겪어 봤다지만 그래도 죽는 일 앞에서는 의연해지기 힘든, 라디는 아직은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 "예, 예 나리! 살려만 주십시오! 뭐든지 분부대로 하겠으니 그저 살려만!" "네 말이 분명 사실이렷다?" "그러믄요!" "허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네가 조금 전 뿌린 말에는 사실과 맞는 중요한 부분도 있다. 그 정보는 나에게 매우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과연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정보원이 아닌지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지. 스네이크." "예, 캡틴." "방을 잡아라. 조용한 방을. 어떤 소리가 들려도 서로에게 상관하지 않는, 조용한 방을 말이다." "…캡틴. 저런 지저분한 아이를…." "어서." "예." '저분이 또….' 부선장 스네이크는 선장의 안 좋은 버릇이 또 도졌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저 특이한 타입만 보면 덤벼대는 버릇은 변하질 않으니. 지금은 저 소년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 먼저이거늘 아마도 자신의 선장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불만이 있다고 선장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는 일. "그럼 먼저 가서 방을 잡아 놓겠습니다." "그래." "무, 무슨…." 라디는 아까부터 사내들이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자기가 한 말은 다 지어낸 얘기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왜 믿지를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이 블랙 버드에 한 말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고 그 말이 사실과 들어맞는다니. 도대체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소리가 들려도 상관하지 않는 방이라니, 그, 그럼 자신을 고문해서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후후, 숨겨진 보물을 찾는 내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지…이런, 내 정신. 실례를 범했군. 이름조차 묻지 않다니. 이름이 뭐지, 소년?" 스네이크라는 남자가 마사 아주머니에게 듣던 옛날 얘기의 사람들처럼 휙, 하고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자, 검은 후드를 둘러쓴 섹시한 목소리의 남자가 라디에게 말을 걸었다. "라, 라디…. 라디!" 죽일 거라면서 이름은 뭐 하러 묻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왕 죽을 바엔 이름이라도 알리고 죽자고 라디는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그림자가 져 입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로 훗, 하고 웃은 뒤 잘했다는 듯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라디라…귀여운 이름이군. 그 당참도 마음에 들었고, 해적을 뒤통수 쳐서 도둑질을 하는 호기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은 기념으로 특별히 귀여워 해주지. 이…." 라디는 어두운 골목의 그림자 진 곳에서 서서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목소리가 크게 들리면 들릴수록, 라디는 왠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커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사내가 코앞까지 다가와 그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되었을 때 극도에 달했다. "블랙 버드님께서 말이야." 사내의 후드 사이로 보이는 은발과, 차갑게 미소짓는 붉은 입술이, 그 지나치게 잘 정돈된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 라디의 불안함의 이유가 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 * * "씻기거라 스네이크. 그리고 잠시 나갔다 와도 좋다." "캡틴." "참, 숙박부에 이름은 잘 적고 왔겠지? 설마 멍청하게 본명을 적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겠다. 그런 어수룩한 네가 아니니까." "캡틴!!" "시끄럽군." "시끄럽더라도 할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뭡니까 저 소년!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쳤으면 제가 이렇게 시끄러울 일도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닳고닳은 남창들 말인가? 그네들의 나긋한 몸짓엔 질려 버렸는걸." "캡틴!!!" 스네이크는 이 태평스레 말하는 눈앞의 멀끔한 얼굴을 정말 한 대 쳐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 얼굴을 친다는 것은 뭇 여인들의 입에서 한탄을 자아내는 일이기에 웬만하면 하고싶지 않은 일이긴 하나 지금은 정말 한 대만,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쳐주고 싶었다. "아무리 어린 거렁뱅이 소년이라고는 하나, 또, 저 녀석의 말대로라면 우연이라고는 하나 당신의 정체를 나불거리려고 했던 녀석이라고요. 당신의 정체에 관한 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노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 아닙니까!" "스네이크." 갑작스레 변한 자신의 상관의 목소리에 스네이크는 흠칫 놀라며 그의 눈을 주시했다. 약간 장난스러운 듯, 나른한 목소리로 섹시하게 말하던 한량은 사라지고, 지금 스네이크의 눈앞에 있는 것은 설령 어린아이라 할 지라도 무자비하게 살인할 수 있는 '잔인한 흑조(黑鳥)' 블랙 버드의 모습이었다. "예." 그가 이렇게 나온 이상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저 모습에 명령 불복종을 했다간 자신이라 할 지라도 언제 목이 날아갈지 알 수 없으므로. 하지만 이제 막 제대로 따지려는 참인데 갑자기 위엄 있는 척을 하다니 조금 치사한 것 아닌가 하는 푸념도 조금 해보는 스네이크였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자네 나랑 몇 년짼가?" "예? 그야…블랙 버드호에서의 년 수만 따지자면 햇수로 5년째가 됩니다만." "그렇지. 5년이라 하면 이젠 꽤 나에 대해 알만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어리숙해 보이나?" "예?" "내가 저 소년을 고분고분 풀어줄 것 같은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냔 말이다." "그럼…." "저 소년은 충분히 즐긴 뒤에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일단 내 외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확실히 추궁도 할 것이고. 다만 죽이기 전에 내가 맛 좀 본다고 해서 안될 것은 없겠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몸. 죽기 전에 저 어린 아이에게 어른이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 또한 자비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궤변이 아닌가. 스네이크는 생각했지만 하늘같은 상관에게 뭐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잘못 건드리면 언제 사지를 절단할지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었다. 바다의 백정이란 말은 괜한 이유로 나온 별명이 아닐 터. "뜻이 그러시다면 더 이상 말 안 하겠습니다 만은, 제가 답답한 건, 그래 소년들이 취향에 맞으시는 것은 아무 말 안 하겠습니다. 그건 둘째치고, 깨끗하고 예쁜 소년들 다 놔두고 왜 저런 더러운 도둑 소년이냐 말입니다. 차라리 명령만 하시면 어디 귀족 집 자제라도 납치해 드릴 것을." "이런이런, 스네이크. 그러니까 자네가 해적선의 선장이 못되는 거야. 츠츠." "뭐라고요?" "내가 아까도 말했지 않나. 숨겨진 보석을 발굴하는 능력은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당신 말대로라면, 저 더러운 검은 피부의 녀석의 숨겨진 보석이라도 된다, 이 말씀이십니까?" "글쎄, 그건 지금부터 발굴해서 가공을 해봐야 알 일이지." "제 눈에는 비쩍 마르고 검댕이 묻은 못 생긴 얼굴밖에 안 보입니다만." "호리호리한 체격에 탄력 있는 밀 색 피부지. 스네이크, 스네이크. 자넨 정말 꽉 막혀 있구만. 그저 원석을 갖다 주면 똥이라 던져대고 보석을 가져다 줘야 아, 보석이구나 하고 알아보는 족속." "하?" "어쨌든, 씻겨보면 자네도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어서 잔말말고 씻겨! 상륙해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이 몸은 그동안 충분히 즐기겠다 이 말씀이지. 그리고 조금 있으면 밀정에게서 그.의 소식이 전해져 올 터. 그 전에 이 쪽 일을 끝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별미도 즐겨야 물리지 않는 법. 오늘은 멀리 동방에서 온 신비스런 별미를 먹어 보실까." 노래라도 흥얼거릴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상관을 보며 스네이크는 저 사람이 해적보다는 외교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곤 의자에 묶여 이쪽을 보고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얘기가 대강 어떤 뜻인지 눈치 챈 듯, 소년은 스네이크가 한 걸음 다가갔을 뿐인데도 흠칫, 하며 과장되게 놀라고 뒤로 물러나려는 부질없는 몸짓을 했다. "소용없다 꼬마, 네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내 손바닥 안이고, 내 상관이 너를 가지고 노는 것을 끝내면 난 너를 죽일 거다." "!" "그러니까, 얌전히 굴어라.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부드럽게 다뤄지고 싶다면 말이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 스네이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스겅! 하고 커트라스를 꺼내어 소년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 빠른 몸놀림에 과연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슬럼 가의 소년도 놀랐는지 동공을 크게 확대한 채 칼날 끝을 응시하고 있다. "이 커트라스의 칼날의 너의 생명줄을 잘라버릴 것이다. 알겠느냐?" 커다란 몸으로 그늘을 만들며 위압적으로 말하자 소년은 재갈이 물린 채로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여댔다. 스네이크는 그 재빠른 모습에 아쉽다는 듯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스르릉 하며 커트라스를 칼집에 도로 넣었다. "팔은 풀어줄 테니 따라와라. 선장의 말마따나 원석인지 똥인지는 몰라도 우선 구정물은 제거하고 판단해주지. 씻으나 마나 그 검은 피부가 어디 가겠느냐 만은." 라디는 일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멍청한 해적을 멋지게 속여넘겨 두둑하니 돈도 챙기고 남은 건 마사 아주머니의 약을 사는 것과 수프에 넣을 고기를 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골목에서 손이 튀어나오더니 자신의 앞길을 막았고 블랙 버드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는 두 명의 후드를 둘러쓴 사내. 게다가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블랙 버드 본인이라니!!! 아무리 어릴 때부터 라디의 감이 잘 맞는 편이라곤 하지만 우연도 이런 우연은 있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라디가 지어낸 사람의 이미지와 블랙 버드의 외모가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왜 하필 라디가 말한 대로 지금 이 곳에 와 있고? '어떻게 블랙 버드에 대해 알고 있게된 건지 묻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제기랄!' 속으로 거칠게 욕을 하며 혀를 차 보았지만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첨벙…첨벙…. 라디가 속으로 혀를 차건 말건 스네이크라 불린 커다란 사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세심한 손길로 라디를 씻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또한, 라디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중 하나였다. '도대체 죽일 거라면서 왜 씻기는 건데??!!' 분명 아까 그 남자의 말로 맛을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사람고기를 먹는 식인종이란 말인가. 저 무척이나 더운 반도의 어딘가에선 그런 종족도 있다고 말은 들었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블랙 버드 정도 되면 분명 돈도 많을 텐데 왜 수많은 고기를 두고 자신의 고기를 먹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씻기는 건지, 즐긴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아마도 평소라면 이것이 동료 아이들이 말하던 '비역', 즉 남색이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사고가 정지해 버린, 비록 슬럼가에서 도둑질을 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조금 어린 소년 라디였다. 한편, 스네이크를 상관인 블랙 버드의 명을 충실히 받들어 라디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여관의 점원에게 시켜 따뜻한 물을 받아오게 했다. 그리고 라디를 집어던져 무작위로 문지른 뒤, 가장 먼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쓴 모자를 집어 던져버렸다. 장마다 서는 동방인 노예시장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짙고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스네이크는 소년이 그토록 모자를 깊게 눌러썼던 이유를 알아챘다. 해적들이 난무하는 이 험한 도빌 항에서 검은 눈에 동방인의 외모라는 것을 들켰다간 생긴 것을 불문하고 당장 노예시장에 잡혀갈 테니 숨기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것. 허나, 그 초식동물과도 같은 물기 있고 선한 눈을 봤을 때도 스네이크의 심정은 그저 '색다른 것을 찾고 싶다더니 잘도 고르셨군. 동방의 검은 눈동자라는 건 정말 흔한 게 아니니까. 정도였다. 여전히 그의 눈에는 서양인에게는 흔하디 흔한 쌍꺼풀 하나 없는 붕어 같은 눈동자의 못생긴 검댕이 소년으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얼굴에 묻은 더러운 먼지를 닦아내고 상의를 벗겨냈을 때, 스네이크는 그제서야 자신의 주인이 왜 이 소년을 탐할 기분이 되었는지 조금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오…이건 또 의외로….' 먼지를 제거한 얼굴엔, 그 나이 대 소년들이라면 하나 둘쯤 자리잡고 있을 여드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만 있을 뿐이었다. 검은 피부라고만 생각했던 스네이크의 생각과는 달리 달콤하기라도 할 듯 보드라운 피부는 수확 직전의 잘 익은 밀색, 바로 그것이었다. 콧날은 동양인의 것 치고 조금 높다 할 만큼 의외로 오똑했고, 입술 또한 약간 튼 것을 제외하면 그 모양이 제법 괜찮았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분명 쌍꺼풀이 없어 붕어의 것처럼 보이던 물기 있는 검은 눈동자도 그 이목구비와 함께 붙여놓자 그 얼굴에 둘도 없이 어울리는 것이 되어 있었다. "과연, 조물주가 만든 것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인 건가. 서양인의 얼굴에 붙여 놓으면 괴상하기 이를 데 없겠지만 이 얼굴에 붙이니 다른 것은 상상할 수도 없군 그래." "?"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혼잣말이니. 쓸데없는 호기심은 명을 재촉할 뿐이라는 걸 명심해라." "!" 말 한마디에 바로 경직이 되는 라디의 몸을 뒤집은 스네이크는 아마도 처음엔 흰색이었을 거라 짐작되는 회색의 셔츠를 라디의 몸에서부터 분리해냈다. 물을 먹어 벗기는데 애를 먹자, 스네이크는 어차피 죽일 녀석인데 뭐 하는 심정으로 얇은 천을 찌이익! 하고 산산조각냈다. 그리곤 미련 없이 먼저 가서 구르고 있던 모자 옆으로 던져 버렸다. 아직은 자라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건강한 굴곡의 소년의 사지. 동방인답게 호리호리한 몸매에 팔다리가 제법 긴 것이 이 정도면 1,2년 뒤면 키가 꽤나 자랄 것이다. 물론 오늘 자신의 상관이 즐기고 나면 더 이상 자라날 기회도 없을 테지만 어쨌든 팔의 모양이 제법 예쁜 것이 몸매 하나만은 비쩍 마르기만 한 남창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소매치기를 하느라 매일 달리다보니 저절로 단련이 된 것이겠지. 게다가 이 나이 대의 소년들은 소년의 것도, 청년의 것도 아닌 묘한 향기를 머금게 마련이라, 동방의 젖은 눈동자와 더불어 보니 그 색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위험한 것이 되어 있었다. '숨겨진 원석이라…그래. 시력 하나만은 인정해 드리리다. 하지만 역시 이 고생을 해가며 안을 가치가 있는 지는 침대 위에서 당신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 아직 스네이크의 눈에는 색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어린 소년만이 있을 뿐이지만, 자신의 주인이 선택한 이상 뭔가 있기는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남색의 취미가 없는 스네이크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소년의 겨드랑이라던가, 무릎의 오묘한 곡선 같은 것을 보면서 조금 위험한 기분이 드는 자신을 의아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 * * "데려왔습니다 캡틴. 분부하신 대로 깨.끗.이 씻겨서요." "그래 알았다. 놓고 자네는 잠시 나갔다 오도록 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정사(情事) 장면까지 보일 만큼 자네에게 허물이 없진 않으니까." "하지만 캡틴," "나갔다 오래도. 설마 내가, 저런 어린 소년에게 당할 것처럼 보인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끝나면 불러 주십시오." "고집통 같으니. 알겠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있어." "예." 창가에 등을 돌린 채 밖을 바라보던 블랙 버드는 스네이크가 나간 뒤에도 잠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중요한 생각을 하는 듯, 뒤를 돌아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각함이 라디에게까지 전해지는 듯 했다. "…뭐, 어차피 궁의 놈들은 저희들끼리 다시 회의를 하겠지." "!"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 털어버리듯 가뿐하게 돌아서는 장신의 남자를 보고, 라디는 충격에 몸이 굳어 입을 닫을 수 없었다. 아니, 재갈 때문에 어차피 입은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상상 이상이로구나. 이런 것이 그 더러운 먼지 아래 숨어 있었다니. 참으로 신비스러운 검은 눈동자인걸. 마치 사냥이라도 당한 사슴의 슬픈 눈빛처럼. 이런…재갈을 풀어주지 않았구나. 가엾게도. 많이 불편하지? 곧 풀어주도록 하마." 마치 연인에게라도 속삭이듯 다정하게 말하는 남자는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이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아니, 악마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조금 전 후드를 둘러쓴 모습을 봤을 때도 잘 생긴 얼굴이라 생각은 했지만 밝은 방안에서 후드를 벗은 모습을 보니 그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블랙 버드는 은발의 굉장한 미남이랍니다」 라디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떠벌려오던 얘기였다. 그것은 우연찮게도 블랙 버드 본인의 외모와 일치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바라보자니, 그가 자신의 외모가 누설되는 것에 대해 예민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은발의 미남이랍니다 라는 단순한 말에 이렇게 굴 필요가 있나 생각했었지만 저런 미모라니. 은발도 많고 미남도 많은 나라라지만 이 마을 아니, 온 나라 안을 뒤져도 저 정도로 멋진 은발과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발설되면 어딜 가든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지. "푸하!" "괜찮으냐? 후후, 많이 불편했던 모양이로구나." 오랜 시간 라디의 입을 답답하게 했던 재갈을 푼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신비한 바다빛 눈동자가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듯 반짝거렸다. 분명, 반짝거렸다고 라디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다가 점점 가늘어지며 자신에게 가까이 온다고 생각한 순간, 라디는 갑자기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의아해하며 이것이 무엇일까 잠시 고민했다. "―!!! 무, 뭐뭐뭐!!!" "가만, 키스 정도에 이렇게 호들갑이라니. 설마 아직 처녀인 게냐? 슬럼가의 아이면서 아직도라니, 너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던가 보구나. 아니면 스네이크처럼 눈 뜬 소경들만 있었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나로선 행운이다." 남자는 즐거운 듯 말했지만 당한 라디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키스라니. 여태껏 줄리 아주머니네 코니와 첫 키스를 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것은 둘째치고 남자끼리 키스라니!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블랙 버드와??!! "다…다다다 당신!!" "뭔가 소년." "말로만 듣던 변태인가!!!" 씰룩. 신이 만든 조각품인 양 완벽하게만 보이던 남자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그 고운 아미가 한쪽만 슬쩍 올라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했으면 우스꽝스럽게도 보였을 것이 저토록 아름다운 남자가 하니 그 또한 그림이 되어 보였다. 허나 지금은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닐 터. "변태라…그런 소린 또 처음 듣는군. 지금껏 감히 내.게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마, 마사 아주머니가 그랬어! 사내임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그…이상한 짓을 해오면 그건 변태라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따라가지 말라고!" "하…?" "만약 따라 갔다간 나중에 지옥에 갈 일을 당한다고 했다고! 다른 애들도 그랬어! 변태를 따라 갔다간 아픈 꼴을 당할 거라고. 난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 "하아…이런." 남자는 웃으며 흥분해서 크게 소리지르는 라디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 해볼 만큼 해보라는 듯 팔짱까지 낀 여유로운 자세로. "그, 그래서…." "그래서?" 한참 소리를 지르던 라디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왠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하자, 라디의 목소리는 해적의 뿔피리보다 더 큰 것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보다 더 작은 것이 되어 있었다. "왜 하던 말을 그만두지 못하느냐? 조금 전엔 그토록 당당하게 소리를 질러대더니?" "그…." "흥…그 마사란 여인이 그리 말했다고? 그 여인도 저 고매하고 잘나신 크리스천의 일족이신가 보구나. 증명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자기들의 이상이 가장 위대하고 고결하다 믿는 한심한 족속들." "아주머니를 욕하지마! ――크윽!!!"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지옥과도 같은 저 검은 바다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오직 나 자신뿐이지. 신이라고? 그들이 있어서 어쨌다는 것이냐? 그 잘난 족속들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에가 있어서 내가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떠받들어줘야 한단 말이냐? 그들이 나에게 험한 태풍과 암초 외에 준 것이 무에가 있어서?" 고요한 말투와 달리 남자는 조용히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라디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거칠게 밀쳐져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바로 앞에 서서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다정하게 웃으며 속삭이던 남자는 사라져 버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과도 같은 날카로운 눈을 지닌 사나운 사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죽일 녀석인지라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상냥하게 대해주려 했건만 네 스스로 험한 길을 택하는 구나. 아무래도 네 녀석에게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다시 한 번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다정한 손길은 꿈에도 바라지 말아라 꼬마. 철저하게 블랙 버드로써 너를 대하고, 심문해 주겠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허락해주지." 남자가 망토처럼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라디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라디가 제 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아!! 아, 아파!!!" "허리를 더 들어라 꼬마. 이렇게 조여 봤자 네 쪽만 더 아플 뿐이야." "아프단 말이야! 이 나쁜 해적 놈아!!" 남자는 음탕한 말을 귓가에 속삭여대며 라디를 자극했지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아픔과 충격에 허덕이고 있는 라디에겐 그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프고 아프다. 그리고 또 아프다. 처음엔 부끄럽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신체에 들어온 이 불쾌한 이물질을 어떻게 하면 빼낼 수 있을지, 그것만이 라디의 머릿속에 가득 차 오른 생각이었다. '바다의 백정' 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남자는 가차없고 잔인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에 생리적인 공포로 침대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라디의 몸을, 남자는 가볍게 낚아채 침대의 천개에 달린 끈으로 손목을 묶어버렸다. 그 빠른 몸놀림에 공포가 더욱 가중돼 라디는 눈앞의 남자가 블랙 버드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는 발로 차고 이것 놔 이 새끼야! 라는 욕을 하는 둥 평소라면 목숨이 아까워하지 않았을 짓을 서슴지 않고 행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라디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발길질을 가볍게 손짓 하나로 막아내고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천개의 끈을 하나 더 풀어 라디의 다리마저 두 개를 한 데 모아 묶고, 또 그 묶은 다리를 아예 천개 기둥에 고정시켜 버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입 닥쳐라 꼬마. 그 하찮은 생명이 일초라도 빨리 끊기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그 차가운 눈빛에서 정말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눈치챈 라디는 순간 할 말을 잊고 입을 다물었지만, 다음 순간 남자가 행한 행동에 놀라 다시 입을 크게 열었다. 찌이익―!! 저 스네이크라는 남자가 어디서 구해왔을지 모를 하늘하늘한 셔츠를 먼지가 묻기도 전에 가차없지 찢어버리는 남자에게 라디는 새 옷에 뭐 하는 짓이야―! 라고 소리쳐주려 했지만 남자가 곧바로 바지마저 그런 식으로 찢어버리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 아까워….' 라디가 멀리 날아가 버린, 분명 조금 전에는 셔츠와 바지였을 것에 애도를 표하는 동안, 남자는 귀찮다는 듯 자신의 옷마저 찢을 듯이 거칠게 잡아당겼다. '헉!' 저 가늘고 예쁜 얼굴로 어디서 저런 괴력이 나오나 싶었더니 옷을 벗은 그의 모습을 보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그는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인가 보다. 인간의 손으로 가공된 천 하나를 벗어 던진 그의 모습은, 태양신 아폴로가 현세에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꽉 조인 근육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탄탄해 보이고, 여자라면 누구나 동경할, 아니, 여자 뿐 아니라 남자까지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이제사 겁을 먹은 것인가 소년. 분명 내가 블랙 버드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너무 느린 것 아닌가 싶군 그래." 뭔가 조금 오해한 그가 크게 뜬 라디의 눈을 보고 말했지만, 라디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블랙 버드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남자의 육체는 몸 어딘가가 즈끈, 하고 울릴 만큼, 어린 라디가 받아들이기에 자극적인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네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 건방지게 말대꾸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몸소 가르쳐 주도록 하지." '무, 무엇을 하려고―.' "힉!" 남자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조각처럼 굳히고 라디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와 라디의 벗은 상체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그 상체 위에 차가운 손가락을 스윽…하고 미끄러트렸다. 그 간지럽고 차가운 느낌에 라디가 몸서리를 치자, 남자는 그런 라디를 일견한 뒤 다시 신경 쓰지 않고 라디의 상체 위로 시선을 돌렸다. "흠…죽을 듯이 달콤하군…동방인들의 살결이란 다 이렇게 비단처럼 매끄러운 것인가? 아니면 너만?" "뭐, 뭐야, 왜이래! 간지럽다고!!" "닥쳐라. 자꾸 네 입장을 생각 못하고 시끄럽게 떠드는데, 계속 그러면 재갈을 물리겠다." "윽…!" 남자의 차가운 말에 라디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 상태에서 재갈까지 물렸다간 그야말로 찍소리도 못하고 당하다가 죽는 것 아닌가. 그래도 호흡이라도 편한 상태에서 죽는 것이 조금은 나은 것이지 싶어 라디는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삼키며 남자가 하려는 무언가(?)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히, 히이익―?! 다, 당신 뭐 하는 거야? 거긴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꼬마군." 하지만 라디의 결심은 채 10분도 가지 못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가만히 있어보려 했지만. 남자가 왜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핥아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 당신! 뭐, 뭐야. 혹시 날 여자로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당신도 지금 핥아서 알겠지만 나한테 그, 저, 젖 따윈 없다고!" "대단히 잘 알고 있다 소년. 그러니 제발 조용히 하고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네 목이 몸에 붙어있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그치만! 히익!!" 남자는 이제 아예 라디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라디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다시 라디의 가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으, 아아! 하지만! 간지러! 기분 이상하다고!!" 가슴 주위를 핥던 남자는 이제 숫제 고개를 그곳에 처박고 죽죽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아프고도 이상한 느낌에, 라디는 숙인 남자의 고개를 들어올리려 했지만 양손이 천개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상태라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춥…츠읍…. 얼굴 바로 아래에선 듣기에도 민망한 음란하게 젖은 마찰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고 있자니 그 민망한 감각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듯 해 라디는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하…아으 아파…이제 그만해…." 남자가 집요하게 빠는 그곳에서 이젠 날카로운 통증마저 느껴져 라디는 결국 애원조의 말을 내뱉었지만, 남자는 그 작디작은 과실을 뽑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발갛게 부어오른 그곳을 입술로 집요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젠장―젖은 네 엄마에게나 가서 얻어먹으란 말이다 이 변태야――!!!'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신음을 참는 데만도 온 힘을 쏟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인내가 한계에 도달할 무렵, 죽어도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남자의 입술이 마침내 라디의 유두에서 촉…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흠…이젠 제법 괜찮은 소리를 내는구나. 이 정도로 서비스를 해줘야 이런 소리가 나오다니. 꽤나 비싼 몸인걸." "뭐, 뭣!" 비웃는 것처럼 한 쪽 입술을 비틀며 말하는 남자에게 뭐라고 항의를 하려는 순간, 라디는 방금 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남자의 손이, 라디 자신도 평소에 잘 대지 않는 은밀한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뭐, 뭐 하는 거야! 거긴 또 왜…으악!!" 남자는 라디의 것을 쥐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 압력을 서서히 늘려오고 있었다. 쥐었다 놨다,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색스러운 손짓에 라디는 자신이 것이 서서히 그 경도를 달리하는 것을 느꼈다. "하, 하으…윽…!" 남자는 라디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라디의 것을 자극하는 데에만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라디의 말은 무시하는 것처럼, 라디의 의지는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남자의 손안에서 라디는 정복당하고 있었다. "으, 아, 아, 아!" 남자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고, 라디는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깨닫는 순간, 라디는 오랫동안 해방되지 못했던 자신의 정(精)을 남자의 손에 진하게 토해냈다. "하아! 하아! 하, 하아, 하아!" "상당히 진하구나…혹시 처음이었나? 혼자서도 안 해봤나?" "그, 그럴 리가 있냐!" 사실 몽정이 아닌 제 정신일 때 방사를 해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제는 오기밖에 남지 않은 심정으로 라디는 목청껏 남자에게 소리쳤다. "흥.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 오기를…지치지도 않는가 보구나. 뭐, 어차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라디는 자신의 것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젖은 손가락이 어서 빨리 치워지기를 바랬지만 남자는 이미 축 늘어져 있는 라디의 것을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 조물, 저리 조물 거리느라 도통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 그럼. 메인 디쉬를 즐기기 전에…." 그 집요한 손길에 라디는 자신의 것이 다시 열을 품을 것만 같아 인상을 쓰며 남자를 쳐다 보았지만, 남자는 라디의 것을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손의 압력을 세게 하며 즐거운 놀이라도 하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의 것이 노리개라도 된 것 같아 점점 심기가 불편했던 라디는, 급격한 탈진상태에 더불어 문화적 충격까지 접한 상태인지라 다시 한 번 남자가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남자의 갑작스레 변한 차가운 눈빛과 그 말투 때문에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소년. 너의 대답여부에 따라 너를 편하게 죽여줄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줄지 생각해 보겠다. 말해라. 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우연히 알았다느니 하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름끼치도록 딱 들어맞는 일들이니까. 그리고 그 대답에 하나의 거짓이라도 들통난다면 바로 그 순간, 나의 애검으로 너의 명줄을 손수 끊어주도록 하지." 지금 이 순간, 남자는 자신을 정말 죽일 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 무슨 소리야! 여태까지 실컷 말한 건 어디로 들은 거야! 아까부터 말했잖아! 정말 우연이라고!!" 하지만 남자의 진심만큼이나 라디도 진.심.으로 답답했다.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서야. "그러니까 그걸 나에게 믿으라는 거냔 말이다. 하필이면 블랙 버드인 나를, 이 거리에서 나름대로 신용할 수 있는 정보통인 소년들 중 하나인 네가 알고 있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해적 빌에게 내 정보를 팔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너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인가? 안 되겠군. 너는 역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 같다. 죽이기엔 무척이나 아까운 그릇이지만 이래서야." "그건! 그, 그건 당신이 나쁜 거야!!" "…뭐라고?" 남자는 완벽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라디에게 물었다. 하지만 라디도 억울했다. 저런 악당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조금 전 자신에게 변태(!)짓을 한 이 상변태가, 하필이면!! "그, 그 사람은!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뭐라는 건가, 소년. 이 나를 동경한다고?" "그게 아니야! 그 분은 너 같은 해적은 발끝도 못 따라갈 만큼 훌륭한 분이시란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동경하는 사람인, 훌륭한 분은 블랙 버드가 아니라고?" "아니지!!" 장난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라디는 말을 못 알아듣는 그가 답답하고 억울하고 또, 차마 말할 수 없는 곳이 아프기도 하여 자신이 '바다의 백정' 블랙 버드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해댈 것이 틀림없지만 방금 전 남자에게 말로 할 수 없을 부끄러운 짓을 당한 소년은 지금 그야말로 겁을 상실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해군 제독 에녹스님 말이다!!!" "그래? 누군지 모르지만 내가 아니라니 그거 참 아쉽…! …지금 뭐라고 했나 소년."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돌변한 블랙 버드의 목소리에 라디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 정도에 놀라서야 해적들 상대로 사기나 소매치기는 못해먹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도에 달하자, 라디의 머릿속은 '어차피 죽을 발엔 할 말이라도 다 하고 죽자'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당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분이라고! 이름을 알고는 있어? 천사의 것이라 불리는 훌륭한 은발과 바다 빛 눈이 멋진 분이시지!! 아무리 요즘이 해적들의 전성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분이 바다에 뜨신다 하시면 해적들은 꼬리를 보이고 도망치기 바쁘지! 당신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블랙 버드라 해도, 언젠가는 에녹스 제독에게 붙잡히고 말걸? 흥! 그것 참 통쾌하다!!" "……." "…헉." "정말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잘도 떠들어대는 구나 소년." 모든 말을 끝낼 때까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라디만을 주시하다가 라디의 말을 끝나자 곧바로 칼날을 들이대는 그의 모습에 라디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빌어먹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여간 나는 이 놈의 성질 때문에 안 된다니까! 그래서 친구 놈들에게 그렇게나 주의를 들었는데! 가뜩이나 성질 나빠 보이는 변태 해적놈에게 해적들의 천적인 에녹스 제독 칭찬을 하다니. 아이고야 이젠 정말 죽는 길 밖에는 안 남았구나∼. 말이라도 잘했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을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닻을 올린 배였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많이) 후회가 됐다. 이거야 제 발로 지옥문으로 다가간 꼴. "그래서…." "어, 어엉?" 아까부터 계속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라디는 이번 역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말로 되물었고,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상을 쓰는 것이 반말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라디는 그저 그 모습에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것을 알고 마른 목을 꿀꺽 하고 크게 울렸다. "너는, 네가 그토록 동경한다는 제독의 외모를 왜 한낱 해적의 외모로 격하시킨 것이냐?" "뭐?" "그렇지 않나. 너는 그토록 그…에녹스라는 자를 존경하는데, 기껏 사기를 치기 위해서 그자의 외모를 이용하다니. 은발에 푸른 눈이라는 것이 우연히 그자와 나의 공통점인 건 둘째치고,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야." 라디는 남자의 질문을 듣고 그 질문에 답을 할 때까지는 살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렇게 구차하게 살고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 닥쳐보니 또 생각이 바뀌는 것이 사람이었다. 당면한 과제는, 남자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여 팔 다리 하나를 잃더라도 이 방에서 살아나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거 아냐? 해적들이 블랙 버드라고 알려준 에녹스 제독에게 접근한다면 에녹스 제독은 그 해적들을 하나 둘씩 잡아들이겠지. 해적도 소탕하고 내가 좋아하는 제독님께 도움도 주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고 뭐겠어? ―합." 허나 라디의 입은 이성과 달리 제멋대로 눈앞의 대 해적을 비웃고 있었고, 정신을 차린 라디가 뒤늦게 제 입을 막아 보았지만 이미 남자의 귀로 모든 말이 흘러 들어간 뒤였다. '아이고야∼.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구나. 난 정말 죽은목숨이다.' "…재미있군." "그래요. 기왕 죽이려면 재미있게 죽이…―예?" "재미있다고 말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남자에게 되물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라디가 처음에 들은 그대로였다. 재미있다. 고? 분명 그렇다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라디가 한 말 중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할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단 한 군데도.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재미있다기보다 오히려 화가 난다고 해야할까. 라디는 해적들에게 블랙 버드의 외모를 해군 제독 에녹스 경이라 속여 돈을 뜯어내고 나아가 그들을 간접적이긴 하나 에녹스 경에게 체포되도록 돕기도 한 것이다. 소문에 듣기로 에녹스 경을 블랙 버드라 착각해 덤비다가 역으로 체포당한 멍청한 해적의 수가 꽤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 어찌 들으면 평민이나 해적이 아닌 사람들이 듣기엔 재미있는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포한 배의 부녀자 일행까지 잔혹하게 살해하는 해적들에게 골탕을 먹인다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네들에겐 마치 옛날 이야기의 악당을 골탕먹이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겠지. 하지만 저 사람은 해적이다. 그것도 당대의 가장 유명하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대 해적. 그런 사람이 도대체 라디의 이야기 속에게 재미있다고 느낄 만한 부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재미있다니…도대체 뭐가?" "푸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질문에 대답은 않고 남자는 칼을 겨누는 것도 잊은 채 이마에 손을 대고 파안대소를 하고 있었다. 라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또 칼을 쥐고 있는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이때다!!' 그래서 라디는 대 해적 블랙 버드의 손아래에서 감히 탈출할 생각을 한 것이다. "이야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라디는 10년 간의 도둑질 생활로 몸에 익은 순발력으로 재빨리 끈의 매듭을 풀어 남자가 고통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 방에서 탈출!!! …했어야 했는데. "…뭐 하는 짓인가 꼬마." 허나 그런 식의 탈출은 아무래도 옛날 이야기의 멋진 영웅들만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라디의 회심의 일격―무릎으로 급소 치기―를 몸을 뒤로 빼서 가볍게 피한 남자는 얄밉다 싶을 정도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사실 평소의 라디라면 좀 더 재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 전 남자에게 잡혀서, 그 남자의 손안에 자신의 것을 뿌린 것 때문에 탈진한 것도 있었고, 게다가 같은 남자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정신적 충격도 무시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조…좀 무서운걸.' 때로 성을 내는 사람보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 법이라고, 라디의 지금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붉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또한 그 역으로 가장 차갑게도 느껴지는 푸른 불꽃. 가히 완벽하다 할 미모의 남자가 분노를 담고 푸른 안광을 뿜으며 이쪽을 주시하는 모습은 범인(凡人)이 화를 내는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동방의 꽃이라 자상히 대해주려 했더니 아주 머리채를 쥐고 휘두르려 하는 구나. 소년. 너는 지금 네 스스로 명을 재촉했단 것을 알겠느냐?" 솔직하게 '네'라고 할만한 상황이 아닌지라 라디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남자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 자를 좋아한다는 말도 모자라 이 나에게 감히 반항을 하다니. 허긴. 그런 자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네 눈도 어지간히 비뚤린 모양인데, 어디 내가 무섭게 보이겠느냐. 그렇지 소년?" "그런 자라니! 말조심―크윽!!" "어디…더 떠들어 보아라. 지금도 네 그 잘난 혀를 놀릴 수 있느냐?" "윽, 커,억…큭!" 남자의 억센 손길이 라디의 여린 목을 움켜쥐고 그 숨통을 막고 있었다. 가빠오는 호흡사이로 분노한 남자의 푸른 염(炎)이 보였다. 그러나 라디는 그 푸른 분노한 바다에 지지 않고 맞서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 흥미롭다는 듯 이채가 보이고, 라디의 목을 죽을 만큼 조여오던 남자의 악력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라디는 생존본능으로 부족한 산소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느라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코, 콜록콜록 케헥!!! 헉, 헉, 헉…."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어. 너란 놈…지저분한 도둑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런 고고한 눈빛은 어디서 배운 걸까?" "윽, 이, 거 놔! 죽일 거면 차라리 깨끗하게 빨리 죽이란 말…콜록." "어디 너의 그 기지가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두고 보도록 할까…?" "앗, 뭐, 뭐를!" "네가 그토록 존경한다는 에.녹.스.님이란 자가 너를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너의 그 존경의 대가란 뭐란 말이냐? 어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려무나. 그리고 네가 그토록 싫어한다는 비.열.한 해적에게 지배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주마. 나는 그딴 자에게 붙들리는 피라미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말이야." "헉, ―아아악!!!" 바로 누워있던 몸을 뒤집고, 평소에 소년조차 함부로 손길을 대지 않았을 소년의 비밀스러운 문을 무자비한 손길로 열며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 **************************************************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27 07:03:59, Hit : 321, Vote : 4)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6~7) * * * "이봐! 여기 럼주 한 잔 더 다오! 아니, 아니다. 그냥 병으로 다오!" "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손님―." 스네이크는 숙박기관과 더불어 술집까지 함께 하고 있는 여관의 술집에서 가장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까부터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워내고 있는 중이었다. 가장 구석의 음침한 곳에서 검은 후드를 쓴 채 커다란 덩치를 하고 있는 사내는 얼핏 눈에 띄지 않을 듯도 했지만 그 덩치가 보통사람의 두 배는 됨직하여 의도하든 그러지 않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허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고는 해도 그 기세가 워낙 흉흉하여 아무도 말을 걸거나 그 시선을 오래 맞추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곳 도빌 항이라는 곳은 눈빛 하나만으로 말다툼이 일어나고 나아가서 살인까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니까. '빌어먹을!' 스네이크는 종업원 소년이 가져다 준 럼주 한 병을 병째로 들고 마시며 마음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부터 한 두 잔만 하고 올라가려는 것을 아차하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병째로 시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저 놈의 짓거리는 언제 끝나는 거냐고∼∼!!' 그랬다. 자신의 상관이 일(?)이 끝나면 부른다고 한 지가 어느덧 30분이 지나가고 1시간 여. 도대체 맛만 본다고 해놓고 그 놈의 맛을 왜이리 오래 본단 말인가. "쩝! 도대체가…미동도 아니고 그런 지저분한 도둑놈을 말이지."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긴 해상생활을 하는 해적생활 중 여자 없는 일상에 지친 선원들끼리 서로 쌓인 것을 풀어주는 것은 꽤나 오래 전부터 행해져 오던 관습이니까. 스네이크 또한 사람인지라 경험이 전무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가끔 해보는 비역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륙한 동안에까지 남자를 살 마음이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뭐 확실히…씻기는 내내 그 살결의 부드러움에 놀라긴 했다만…." 동방의 것이라서 인가. 늘 거친 바다의 바람을 맞아 고목이 따로 없는 선원들의 것과는 차원이 틀린 살결이었다. 그 매끄러움과 유연한 탄력에 어지간한 미색들을 섭렵해 본 스네이크조차 놀랄 정도로. "그래도…매끄러워도…유연해도…그래도 말이다!!!" 쾅!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에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움찔 하며 검은 후드의 사나이를 쳐다본다. 하지만 후드의 사나이는 이 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서 고뇌하는 흔적이 짙어 보였다. 사내의 행동에 사람들은 쫓아달라는 눈빛으로 점원을 쳐다보았지만 이제 소년에 불과한 점원은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애꿎은 주정뱅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줄뿐이었다. "그 놈은…위험한 놈이란 말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만큼…. …비록 그것이 우연이건 어떤 개 같은 이유건 그놈은!" 또 다시 들리는 큰 소리에 사람들은 앉은자리에서 몸을 떨었지만 이내 자신들의 술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히 힘을 가지지 않고서야 이곳에서는 참견해서 좋은 꼴을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라는 거지. 하지만 말이야 캡틴. 난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비록 카리브 해안에서 가장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당신이지만 말이야. 이번엔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당신도 알잖아? 내 예감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말이야. 지난 번 인도 상선의 함정을 예측한 것도 바로 나였다고. 이 스네이크! 바로 이 스네이크 님이 말이야!!" 콰당!!! 그 때. 사람들이 스네이크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저 사람은 언제 나가는 것인가 하고 속으로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낡고 허름한 여관 '찰스의 방'으로 들어섰다. "어디 계십니까 스네이크님!! 어디요! 어서 대답을 해보십시오!!" 들어올 때도 다급하게 들어온 남자는 들어와서도 또한 다급한 기세를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것인가 하며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여기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게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상륙 중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구석에 앉아서 시선이란 시선은 모두 모으고 있던 후드 사나이가 고요를 뚫고 남자에게 대답했다. "여기 계셨군요! 큰일났습니다! 지금 연락 운운 따질 때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상륙의 목적을 잊으신 겁니까! 찾았단 말입니다! 성안(聖眼)을 찾았다고요!" "뭣! 그래, 그랬었지 참! 그게 사실이냐! 찾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캡틴은 어디 계십니까! 어서 빨리 잡으러 가지 않으면 나라의 개들이 먼저 찾아낼 거라고요!!" "이, 이런 제길! 여기서 기다려라. 모시고 오겠다!" 스네이크는 몸에 남아있던 알콜 기운을 단숨에 날려버리고 커다란 후드 자락을 휘날리며 계단을 세 칸씩 뛰어 올라갔다. 큰 소리로 말하느라 사람들에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자신에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는 스네이크가 자신이 얼마나 시선을 끌었는지 몰랐기에 일어난 착각이었지만 아무튼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한, 도빌 항에는 해적이 아닌 일반 서민들 사이에 익혀진 암묵적인 룰이 있었으니, 그것은 '보고 있으되 보지말고, 듣고 있으되 듣지 말지어다.' 라는 것이었다. 쾅쾅! 쾅쾅!! "캡틴! 어서 나오십시오!! 캡틴! 비상사태란 말입니다!!" "…! ……!" "캡티인∼!!" 계단을 서너 개씩 건너 뛰어온 보람도 없이 스네이크의 진로는 낡은 나무문에 의해 막혀진 상태였다. 이렇게 크게 노크를 해도 도통 문 쪽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없는 걸 보니 대단히 중요한 때(;)인 듯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셋 셀 때까지 안 나오시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만큼 비상시국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충 처리(?)하시고 나오시라고요! 하나! 둘! 세――으앗!!!" 셋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스네이크가 문을 부수려 주먹을 들고 나무문으로 돌진하는 그 때, 기나긴 침묵만을 일관하던 나무문이 그 입을 열고 내용물을 내뱉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운가 스네이크. 방해하지 말라고 분명 일렀을 텐데." 가라앉은 허스키한 목소리. 공기 중에 떠도는 음란한 밤꽃의 냄새. 안에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연 남자는, 조금 전 그렇게 불렀는데도 대답조차 없었던 것과는 달리 전혀 흥분한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에 분노한 듯 그 청정한 바다 빛 눈동자를 흉포한 태풍이 찾아온 광해(狂海)로 빛내고 있었으니. "…뭡니까 캡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뭐가."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캡틴의 눈이…." "내 눈이 뭘 어쨌다고." "그,"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누가 '당신 눈이 하도 사나우니 눈깔에 힘 좀 푸쇼―.' 라고 대답할 수 있답디까!! 스네이크는 억울한 마음에 속으로 누군가에게 하소연해 보았지만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앞에선 차가운 눈빛의 상관만이 대답을 재촉하는 듯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오랜만에 상륙해서 즐기는 시간을 방해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오래되어 누른 냄새가 나는 나무문에 털썩 기대며 남자는 기분이 나쁜 듯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불만족스럽고 나른한 모습에 남자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상기되는 듯해 스네이크는 뛰어온 목적을 잊고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깨달아야 했다. 가만……. 뛰어온 목적? "캡틴!!!" "귀 안 먹었네 스네이크. 도대체 아래에서 술이나 마실 것이지 왜 이 난리란 말인가. 별 것 아니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별 것 아닌 게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라고요! 성안(聖眼)을 찾았답니다!! 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궁의 졸개들이 쳐들어올 겁니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라고요! 그 딴 도둑 소년 따위 어서 죽여 버리시고 성안을!" "성안을…찾았다고…." "그렇습니다! 어서 채비를 하고 나오십시오!!" "흐응…." "캡틴!" 도대체 이 사람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성안을 찾았다는데 이 시큰둥한 반응은 뭐란 말인가! "뭐 하시는 겁니까 성안을 찾았다지 않습니까? 더 이상 꾸물대시면 궁의 병졸들에게 귀한 것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니까요??!!" "아아…시끄럽긴. 알았어, 알았다고." 스네이크가 거듭 귓가에 대고 소리소리를 질러대자 그제서야 남자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안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후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작게 발을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스네이크 쪽으로 걸어오며 오래 되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나무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캡틴." "왜. 한 시라도 서둘러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빨리 따라와." "뭐 하시는 겁니까?" "뭘?" "몰라서 물으십니까?" "그렇다면?" 스네이크는 조금 전 한 대만 때리고 싶다고 한 것을 정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섯 대. 딱 다섯 대만 시원하게 때려주면 소원이 없겠다. "뒷처리는 어쩌시고 그냥 옷만 입고 나오시는 겁니까?" "뒷처리라? 난 깨끗하게 다 닦아내고 왔네만?" "그것이 아니라요!!" 뭔가 착각을 하며 대답하는 블랙 버드에게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스네이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것(?)을 말했던가. 그것(?)이 아니라 저것(?)을 말하는 것을!! "왜 또 소리를 질러. 정말 시끄럽군. 스네이크, 스네이크. 침묵의 스네이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이렇게 시끄럽고 수다쟁이 스네이크만 남았는지." "저 소년 말입니다!!" "응?" 그랬다. 조금 전 블랙 버드가 나오면서 살짝 엿보이던 방의 내부에는 검은 후드를 둘러쓰는 블랙 버드 외에도 한 명의 인기척이 더 느껴졌다. 그것이 조금 전 블랙 버드가 즐기고 있던 동방의 도둑 소년이란 걸 모를 리가 없는 스네이크였고, 또한 그 소년의 돌려진 밀색 등이 작게 오르내리고 있던 것도 모를 만큼 눈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왜 죽이지 않고 그냥 나오시는 겁니까. 제가 처리할까요? 그러라고 그냥 나오신 겁니까?" "아니." "그래요. 제가 처리, …뭐라고요?" "그냥 내버려두라고." "캡틴." 스네이크는 자신의 불길했던 예감이 자꾸만 귓가에 웅웅대는 것 같아 잠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관을 쳐다봤지만 그 아름다운 푸른 눈에 담긴 의지가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왜입니까." "별로. 저딴 도둑 꼬마 따위 어찌돼든 상관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어째서 말이 안 돼?" "저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정체에 대한 것이 털끝 하나라도 알려져선 안 된다고 한 건 바로 당신입니다! 그런데 털끝도 아니고 생김새와 머리털 전체를 알고 있는 저 소년을 그냥 두고 가자니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란 말입니까!"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스네이크는 어찌됐건 블랙 버드는 무심히 그가 가리키는 오래된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훗, 하고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스네이크를 향해 돌아섰다. "걱정 말게 스네이크."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게 됐습니까. 캡틴이 불씨를 숲에 두고 오시는데요!" "저건 불씨가 아니야. 다만 내 증인일 뿐이야." "예?"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는 것인지 몰라도 더 이상 이 사람의 페이스에 휘둘려선 정말 저 위험분자를 살려놓을 지도 모른다. 해서 스네이크는 나중에 욕을 먹더라도 지금은 우선 눈앞의 것을 처리해야지 하고 커트라스에 손을 대는 순간. "저 소년은, 내가 그.자.를 앞지르는 것을 지켜볼 증인이라고. 살려놓을 가치가 있는 소년이다. 나를 위해서 말이야." "예? 무슨…." 그자라니. 자신의 선장이 그자라고 가리킬만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 사람밖에 없을 텐데. 웬만한 사람은 다 그놈,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사람이니까. "도대체 그자와 저 소년이 무슨 관계란 말입니까?" "저 소년과 그자는 관계가 없다." "알아듣게 말씀 좀 해주시죠." "자넨 알 필요 없어. 내가 그럴 권리를 주지 않았으니까. 가자 스네이크. 서둘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 말도 얄밉게 하는 상관이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발설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인다고 한 건 분명 저 사람 자신이거늘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무서운 사람이니까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다. 어찌됐든 자신에게 있어 누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스네이크 자신은, 저 사람의 명령에 절대 불복종할 수 없으니까. "뭐 하나 스네이크. 어서 가자는 데도." "…정말, 저 소년이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아니, 저 소년은 아마 나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거다. 100% 확실히." "그럼 왜." "다만 아무도 저 소년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야.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확실히 알려지겠지. 저 소년이 말한 은발의 푸른 눈이 누구인지. 그리고 저 소년은 양치기가 될 것이다. 굳이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어. 제 꾀에 제가 넘어갈 테니까." "무슨 말인지." "차차 알게될 거야. 아무튼 가지. 아래층에서 캔의 빨리 오라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저 놈의 깡통자식은 하여튼 우는 소리도 깡통처럼 요란해요. …어쨌든. 믿습니다 캡틴. 당신은 우리들 모두의 생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저희들 비록 목숨을 당신에게 아낌없이 바치긴 했지만. 쓸데없는 개죽음은 사절이니까." "…그래." 동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관의 모습에 그제서야 스네이크는 안심하고 나무문에서 미련을 버렸다. 과연 저 마이 페이스인 사람이 동료들의 목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길지는 미지수였지만, 뭐 어쨌든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은 유일무이한 블랙 버드호의 선장이니까. 그리고 스네이크 자신이 택한 주인이니까. "빨리요 빨리! 캡틴도 그렇고 스네이크님도 도대체 왜 이리 늦은 겁니까! 이러다가 성안을 놈들에게 빼앗기면 어쩌려구요!! 어서요! 지금 시즈가 애타게 기다리며 망을 보고 있을 겁니다! 서두르자구요!!!" "그래. 알았다." 다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문을 열었을 당시 블랙 버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과 왜 갑자기 저 소년을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들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분명 오랜만에 접해보는 동방의 신비라면서 입가에서 웃음을 떼지 않던 선장이었는데, 왜 갑자기 그런 안 좋은 표정을 지었는지. 혹여 소년의 비공(秘空)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끝났을 일이다. 허나 그런 것도 아닌 듯 소년의 목숨을 살리자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저 나무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란 말인가? "서두르자 스네이크. 가장 위대한 보물을 해군들 따위에게 빼앗길 순 없지. 그러려면 우선, 성안을 차지해야만 한다. 어서 가자." "예." 허나 지금은 눈앞의 거사를 앞두고 있는 시기. 사소한 의문점은 나중에 상관에게 따로이 물어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달리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훗날 이 의문을 끝내 풀지 않고 갈 길을 향했던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이날의 스네이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27 07:04:36, Hit : 361, Vote : 13)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8~9) * * * 끼이익―탕. 뚜벅 뚜벅. 쿵쿵쿵쿵. "……."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낡은 나무문이 닫히고 누군가가 서둘러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침대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소년의 눈이 힘겹게 스윽, 하고 올려졌다. 스르륵…. "흐, 윽―…!" 침대에서 일어난 소년―라디는 몸을 움직이자마자 급습해오는 비밀스러운 곳의 통증으로 인해 억눌린 신음을 질렀다. "아이고오…빌어먹을 아파…." 아직 어린 기미가 남아있는 동그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라디는 자신의 하체로 손을 내려 탐스럽게 올라와 있는 둔덕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바로 조금 전, 남자가 잔인하게 열려고 했던 라디의 엉덩이 사이가 즈끈, 하고 울려오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젠장…빌어먹을 변태 놈 같으니라고…하마터면 정말로 당할 뻔했네…."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만질 일은 더더욱 없는 곳이었지만, 조금 전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하나도 아닌, 세 개씩이나 들어갔던 그 곳은 지끈 지끈 하며 이물질의 침입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아으…아파…정말 찢어지는 줄 알았네…제기랄. 그 뱀 아저씨 아니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하마터면 말이지…." 아직 정말로 큰일이 뭔지를 알지 못하는 라디였지만 그래도 남자의 기세로 보건데, 손가락을 세 개 넣는 것보다 더욱 큰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왔으면 아마 난 죽었을 지도 몰라! 암! 뱀 아저씨에게 감사해야지!!" …다만 그 생각의 방향에 조금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아, 아아―아퍼! 뭐 하는 거야! 거기에 손가락은 왜 넣냔 말야!!!」 자신이 남자를 화나게 했다는 걸 자각한 순간―남자는 갑자기 라디의 몸을 뒤집고 배 아래로 손을 넣더니 라디가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다. 라디의 엉덩이 사이로 다짜고짜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이다. 윤활유조차, 하다 못해 향유조차 바르지 않은 메마른 곳은 당연히 빡빡하다 비명을 저질렀고, 격한 아픔으로 라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악!! 하지마! 내가 잘못했어! 그만!!」 게다가 그 손가락이 하나에서 세 개로 늘어났을 무렵에는, 충격의 수준을 넘어서서 경악에 이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칼을 들이대며 시끄럽다고 목숨을 위협하는 남자 때문에 마음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쾅쾅! 쾅쾅!! 그 때, 충격과 고통에 혼절의 평안함으로 넘어가려던 라디의 귓가에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캡틴! 캡틴!!」 남자는 무시하려는 듯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라디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 그 면적을 넓혔고, 그 불쾌한 이물감에 라디는 다시 한 번 억눌린 신음을 입안으로 삼켰다. 「캡틴! 어서 나오십시오! 캡틴! 비상사태란 말입니다!」 스윽. 계속되는 스네이크의 다급한 목소리에 결국 남자의 곱지 못한 시선이 낡디 낡은 나무문으로 향했다. 그 사나운 눈초리를 본 사람이라면 남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겠지만 아직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것을 해방시켜본 적이 없는 어린 라디는, 그저 남자가 시끄러운 것 때문에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나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쑤욱…. 크,윽…. 남자의 손가락이 빡빡히 조여있던 라디의 몸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라디의 막혀 있던 호흡도 모자란 산소를 확보하기 위해 급하게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뭐가 이리 시끄러운가 스네이크. 방해하지 말라고 분명 일렀을 텐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 안에 손가락을 넣고 있었는데, 남자는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어느새 문 앞의 스네이크와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분명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 재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에 남자의 무서움을 조금 엿본 것 같아 라디는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캡틴! 성안을 찾았습니다. 성안……」 「……」 그 뒤로 남자는 스네이크와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 성안이 어쩌고 하면서 작고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를 했다. 그리고 급히 가보아야 한다는 스네이크의 말에 알겠다고 하는 남자의 대답에 라디가 '앗싸!'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저 소년 말입니다! 왜 죽이지 않고 그냥 나오시는 겁니까!!」 '헉―!!' 죽은 듯이 돌아누워 숨을 죽이고 있던 라디는 스네이크의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블랙 버드라는 남자가 그냥 나갈 듯한 분위기여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건만 저 스네이크라는 둔한 남자가 답지 않게 세심하게 라디를 지적한 것이다. 이쯤 되면 아까 중요한 순간(?)에 노크를 해준 것이 전혀 고맙지 않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둬라」 「예?」 그러나 남자는 라디를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스네이크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라디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왜?? 「저 소년은, 증인이니까」 남자는 라디를 그.자.를 앞서는 모습을 볼 증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끄럽게 항의하는 스네이크를 설득한 뒤 라디가 누워있는 침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남자가 자신의 후드를 가지러 침대 근처로 올 때는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춰졌지만, 그는 다행히 정말로 후드만 가져가고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문이 끼이익―하며 완전히 닫힌 후에야, 라디는 잠든 척 하고 있던 몸을 일으켜 참았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휴우…이봐 라디. 니 일생에 가장 큰 위기상황이었다고. 알아? 그 변태 놈이 왜 나를 살려뒀는지, 증인이란 건 또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지. 하하! 하.하.하.하! ―윽." 살아있다는 기쁨에 호탕하게 웃으려 하다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침범 당한 엉덩이 사이가 아파 와 라디는 작은 신음을 내며 엉덩이로 손을 가져다댔다. "젠장…나쁜 변태 놈. 아무리 내가 막말을 해도 그렇지, 다짜고짜 엉덩이에 손가락을 꽂아 넣다니! 아프잖아! 쳇…그리고 양치기는 또 뭐냐고! 정말이지 불길한 소리만 지껄이고 가고 있어…." 아마도 블랙 버드의 외모를 거짓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말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실물을 본 라디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지라 그가 자신을 양치기가 될 것이라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에게 그 누가 호의적인 감정을 품으랴 만은. "흥. 나쁜 놈 나쁜 놈. 너 같은 놈 따위 하루라도 빨리 에녹스 님에게 잡히기를 기도해 줄 테다! 아무리 날다 긴다 하는 해적 놈이라도 에녹스 제독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린다고! 암. 그렇고 말고! 흥…살려줬다고 해서 내 생각이 바뀔 줄 알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마사 아주머니의 약!!!" 한참 동안 남자에게 욕을 하던 라디는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묶여 있던 손을 이빨로 풀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욕실 저 멀리 어딘가에 던져져 있던 바지를 겨우 찾아 주워 입고, 또 어딘가에 던져져 있던 산산 조각난 셔츠를 찾아 입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한 뒤, 벗고 가는 것보단 나을 거라 생각해 그것마저 대충 꿰어 입었다. "지금쯤 기침 때문에 엄청 고생하시고 계실 거야. 빨리 뛰어 가야지!!" 슬럼 가의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고비를 넘기며 그 날 그 날을 살아간다. 라디 역시 슬럼가의 아이 중 하나이기에 오늘 겪었던 목숨의 고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음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다. 조금 전 상황이 어찌됐건 살아남았으니까. 아마도 이 경험은 다른 아이들과 있을 때 탄성을 자아낼 수 있는 멋진 모험담에 불과하겠지. "가자!!" 바로 전에 목숨이 날아갈 뻔한 사람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밝은 표정으로 소년은 여관방을 나섰다. 당연하다. 오늘 빌이라는 멍청한 해적에게서 뺏어낸 두둑한 돈이 주머니에 가득 차 있으니까. 이 돈이면 이틀 정도는 고기 넣은 수프를 끓여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운이 좋은 하루였다.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여하튼. 운이 좋은 하루였다. * * * "…파크야." "앗, 엄마! 왜 누워 계시지 않고 나오셨어요! 찬바람은 기침에 좋지 않아요. 어서 들어가세요!" "나는 괜찮다. 다만…콜록!" "괜찮긴요. 지금도 이렇게 기침을 하고 계시면서! 어서 들어가세요." "라디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거니?" "……." 문밖에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던 파크는 어느새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마사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파크가 들어오지 않는 걸 의아하게 여긴 그녀가 라디가 돌아오지 않은 걸 깨달은 듯. 파크의 표정에서 자신이 걱정하던 것의 답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파크의 입에서 확실한 답을 듣기를 원하는 듯 했다. "말해 봐라. 그 아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거지? 나 때문이냐? 내 약 때문에 그 아이가 혹시 위험한 짓이라도 한 거냐? 말해보렴. 어서." "아니에요 어머니. 라디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사실 마사가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었지만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 그녀에게 심리적 스트레스마저 줄 수는 없다고 해서 라디가 극구 숨겨달라 말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이 라디가 늦는 날이면 밖에 나와 걱정 때문에 발을 구르는 파크에게 마사는 어김없이 라디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곤 했다. 파크는 라디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녀에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자신 또한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심신이 약한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밤잠조차 자기 힘들 정도로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그, 항, 항구에서 일용직 인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배가 많아서, 인부가 모자란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라디도 거기에 함께 가 있어요! 그, 그래서 늦는 거예요?" "항구의 일을? 어째서 너는 도우러 가지 않았니?" "그, 그게!" 이제는 라디 덕분에 제법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익숙해 졌다지만 이렇듯 그녀가 기습질문을 하 때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거짓말을 해야 하나 파크가 작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딱 저에서 인원수가 잘렸답니다 아주머니. 파크도 일하고 싶어했지만 그 배에서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라디!!" "왜 이리 늦었니 라디. 걱정했단다." "헤헤. 죄송해요. 오늘은 상선에 짐이 많아서 일이 많았어요. 선원 아저씨들 심부름도 하고요.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마사 아주머니." "정말이야, 라디 너! 늦어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미안, 미안 파크. 헤헤. 하지만 봐! 오늘은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구! 심부름 값도 톡톡히 받아서 오늘은 우리 고기 넣은 수프도 끓일 수 있다고." "정말이야? 와! 진짜 고기잖아? 신난다! 나는 물을 끓일게! 아직 감자도 넉넉히 남아 있을 거야! 당근은 코니네 집에서 얻어 와야겠다. 와아! 어머니! 오늘은 정말로 맛있게 끓여드릴 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자주 감지 못해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금발을 휘날리며 뛰어가는 파크를 보며 라디는 흐뭇하기 미소지었다. 저렇게 좋아하다니. 조금 전 고생한 게 하나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디야." "네?" 웃는 얼굴로 돌아본 마사 아주머니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최근 기침이 심해져 많이 야윈 그녀의 얼굴은 심각한 표정 때문에 더욱 더 야위어 보였다. "그 옷은 어떻게 된 거니?" "예? 옷이요?" 아차. 옷을 내려다 본 라디의 심정이었다. 고기를 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그만 찢어진 옷을 그냥 입고 온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체에서라도 새 옷을 벗겨내는 거였는데, 그것을 깜빡해서 마사 아주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아, 이, 이게요! 사실은 짐을 내리다가 그 나무 결에 옷이 찢어졌지 뭐예요! 하하! 상자가 어찌나 오래 되었는지 나무 가시가 다 일어났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요 아주머니!" "상자 가시에 찢겼다고?" "네에!" "그것 참 골고루 잘도 찢겼구나. 그것도 이렇게 갈기갈기." "하, 하하. 그러게요!" 상대가 믿지 않는 것이 뻔히 느껴졌지만 이럴 때는 그저 우기는 것이 상책이다. 라디는 마사의 눈길을 요리 조리 피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까 속으로 궁리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앗! 아, 아주머니! 그것 보세요. 금새 이렇게 기침을 하실 거면서 밖에는 왜 나와 계셨어요. 요샌 가뜩이나 밤바람이 찬데! 어서 들어가세요. 이제 곧 파크가 고기가 듬뿍 들어간 따뜻한 수프를 내올 거예요. 어서요!" "콜록! 하지만 네가, 콜록! 걱정!" "아이 참, 저만큼 제 목숨 아까운 놈이 또 어디 있다고 그런 걱정을 하세요. 저는 위험의 위.자만 나와도 도망치는 녀석이라고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걱정 마시고 밖에도 나와 계시지 마세요. 아셨죠?" "콜록, 그래도 라디야. 콜록! 콜록, 콜록!!" 마사는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과연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라디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침을 심하게 하는 것은 걱정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꺼려지는 질문을 피하게 한 그녀의 기침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자. 들어가자고요. 파크∼ 수프 아직도 멀었냐? 이 형님 배고파서 돌아가시겠다∼ 도빌항에서 굶어 죽어 물고기 밥이 되긴 싫다고∼." "그래. 지금 끓이고 있어. 금방 끓여줄게. 오늘은 정말 맛있을 거야! 굶어 죽는 건 이 맛있는 수프를 먹고 난 뒤로 미루라고!" "하하하하―…." 단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 하는 소년의 밝은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자신마저 행복해지는 듯 해서, 소년은 조금 전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이미 까마득히 머릿속에서 지운 상태였다. 고기를 넣은 수프를 먹고 오늘 하루만큼은 조금 부드러운 빵을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해 본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또 다시 멍청한 해적을 찾아서 돈을 뜯어낼 방법을 모색해야겠지. 그렇게 도빌 항(港)의 도둑 소년 라디는 조금은 특별했던 하루를 대수롭지 않게 마감하며, 내일은 코니네 집에 가 아저씨의 옷이라도 얻어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잘 찢어지지 않은 튼튼한 옷으로. ― 제1장 도빌 항(港)의 도둑 소년 끝 ― *************************************** 성실해져야지.. 성실해져야지.. (자기암시중;;)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29 10:14:14, Hit : 324, Vote : 4)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0) Golden Age - 황금시대 [ 제2장 파라이아 궁의 난봉 제독 ] 대 아르센 제국의 중심부, 도빌항을 끼고 무역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 곳 파라이아드에서도 가장 화려한 파라이아 궁. 본디 아르센 제국의 창설 신화에 나오는 쌍둥이 신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의 이름을 본 따 만든 이 도시와 궁전은, 각종 관료들과 귀족들이 모여 연회를 즐기고 또한 나라의 국정에 관한 것을 토론하기도 하는 아르센 제국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심 점이었다. 그리고 그 파라이아 궁전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 귀족들조차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회의실 안 쪽에서 한 남자와 또 다른 한 남자가 마주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인 듯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며. "……한대도." "……가, ……잖습니까." "…지 않나!" "……는요!" "그치만!!" 콰당! 두 사내 중 키가 큰 사내 쪽이 흥분한 듯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지지 않겠다는 듯 앞에 앉은 사내 또한 콰당! 하는 소음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치도 물러섬이 없는, 사내들간의 강렬한 눈싸움이 시작됐다. "…자네가 포기하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자넨 내 부하야!" "그래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몰라서 물으십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남자가 눈앞의 상관이라는 남자에게 침을 튀기며 소리를 질렀다. 그 침이 입가에 튀자 남자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흥분한 그에겐 보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또 다른 부인을 데려오라는 말씀이 말이 되십니까! 어제 만난 후작부인은 어쩌시고요! 그분의 열기가 채 침대에서 식지도 않았건만 거기 또 다른 여인을 데려오라고요! 그것도 이번엔 창녀라고요!" "이런 이런, 로딘. 흥분하지 말게. 안 그래도 붉은 자네의 얼굴이 이젠 완전 잘 익은 고구마오 같아. 자네. 스위트 포테이토라는 별명이 붙고 싶은 건 아니겠지? 난 자네에게 스위트 따위의 미사여구를 붙여주는 것 절대 반대야. 암. 반대고 말고." 로딘이라 불린 남자―현 아르센 제국의 해군 제독의 부관으로 있는―는 눈앞의 상관―바로 현 아르센 제국의 해군 제독―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하극상이라 매를 맞아도 할 수 없다.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니까. "누가 농을 하자 했습니까! 저는 지금 진지하게 제독님의 명예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자꾸 장난으로 받아드리실 겁니까!" "명예라. 원래 영웅은 여자를 좋아하는 법이라지. 별로 흉 될 것은 없잖아?" "아아 예. 흉이 될 것이 없다고요! 퍽이나 그렇겠군요. 모든 장교 및 제군들에게 귀감이 되셔야 할 제독이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를 바꾸시는 모습이 참으로 흉이 안 되겠습니다!" "흠. 그런가?" "당연하지요!" 로딘은 설득의 기미가 보이자 기뻐하며 상관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어울리지 않게 반짝거리는 눈을 본 지나치게 아름다워 보이는 남자는, 마치 소년처럼 보이는 개구진 미소를 빙긋, 짓더니 자신의 부하에게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자네가 다 알아서 입막음시킬 거잖아? 믿음직스러운 부관 로딘. 안 그래?" "그!!" 반론한 수 없음에 로딘은 크으, 하고 주먹만 쥐고 땅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상관으로 모시는 유일무이한 분이신데, 차마 여자 문제로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부하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가 상관의 뒤처리를 해준 것이 벌써 한 두 번이 아닌 것이다. "언제까지 제가 막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제독께서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지금까지 쌓인 좋은 이미지가 언제 바뀔지 모른다고요!" "괜찮아, 괜찮아. 이 아르센에서 나만큼 해적을 잘 잡고 상선보호를 잘 하는 제독은 없는걸." "제독님!" 남자가 조금 전 말한 고구마보다도 더 빨개진 로딘이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시한 채 넘어진 의자를 세워 앉아 다리를 책상에까지 올리는, 태평하다못해 태만하기까지 한 자신의 상관에 모습에 로딘은 뇌의 혈관 어딘가가 꽉 막혀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말은 사실이기에 반격할 수도, 비웃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 아르센 제국 해군 제독 에녹스·리엔·팰러딘. 현 아르센 관료 중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왕의 신임이 두터우며, 또한 도빌 항의 해적들에게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남자였다. "어쨌든! 공은 공, 사는 삽니다! 도대체 어제 만난 후작부인은 어쩌시고 다른 여자를 찾는단 말입니까!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부인에게서 긴한 서찰이 도착했거늘! 그걸 무시하겠다고요! 그리고 닷새 전 만나셨던 부인께서도 어찌하여 오시지 않는지 애원하는 편지가 바로 어제 아침에 도착했습니다. 게다가 가엾게도 눈물 방울이 아롱져 있었다고요! 이렇게 레이디들을 울리다가 나중에 큰 일 나면 어쩌시려구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성의 여인들에게 가장 많은 러브 콜을 받는 사나이이기도 했고. "하지만 모두들 사랑스러운 걸. 누구 하나만 사랑해 줬다간 공평하지 못해." "그건 공평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이고 말고. 내 이 미모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내 평생동안이란 기간밖에 안 되는데, 그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의 여자들을 사랑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으면 그건 자원낭비라고 로딘." "허어." 왕자 병도 이런 왕자 병이 없다고, 로딘은 그저 어이없는 눈으로 상관의 잘 생긴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금을 그대로 녹인 듯한 밝은 은 금발. 순풍이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다 빛의 아름다운 눈동자. 어딘가 중성적이면서도 남성다움을 잃지 않는 곧게 뻗은 턱 선. 피부는 또 어떠한가. 동방의 지나(중국)라는 나라의 비단이 이보다 더 고울까. 어느 여성보다 매끄럽고 하얀 피부의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래. 분명 자랑하는 대로 대단한 미모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래. 아주 잘났다! "그래서…본 부관이 이렇게 부탁드리는 데도 자제를 못 하시겠다는 겁니까…!" "글쎄. 내가 자제를 하면 그건 기다리고 있는 레이디들에게 죄라니까?" "제도옥―!" 똑똑. "?" 참다 못한 로딘의 뇌가 폭발할 지경,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회의실에 커다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냐." "……." "대답해라. 대답하지 않으면 불법침입 죄로 너를 감옥에 쳐 넣을 것이다." "…저, 저어…." "!" 들려온 목소리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말까 한 소녀의 맑은 음성이었다. 의외의 목소리에 놀라 급하게 문을 열어보니, 과연 그 앞에는 비록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나 드러난 눈에서 어린 티를 읽을 수 있는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누구냐. 너 같은 어린 소녀가 올 곳이 아니다. 이곳까진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비록 연약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성 내부의 비밀스러운 곳까지 들어온 여자다. 방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로딘이 엄한 어조로 묻자 소녀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드러난 부분이 하얘질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것을." "?" 소녀는 손을 후드 속으로 집어넣어 뒤적거리더니 이내 작은 악세사리 하나를 꺼내어 로딘에게 보여주었다. 작고 복잡한 문양이 여러 개 들어간,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반지였다. 혹여 무기라도 꺼내는 것인가 경계를 하며 바라보던 로딘은, 소녀가 꺼낸 반지를 보고 이게 어쨌다는 거냐. 라고 말하려다가 그 반지에 들어간 문장이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이것은…?" "뭐야, 뭐.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로딘?" 뒤에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관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어조에서 로딘은 혹시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린 건 아닐까 하고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이내 자신의 상관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생각하여 소녀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상관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독님." "응?" "…이것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요." "응?" 여전히 태평한 어조로 되물어보던 에녹스 제독은, 로딘이 내미는 손안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보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잠시 후 아! 하는 표정으로 오른 손 손바닥을 반대 쪽 손으로 탁, 하고 쳤다. "이 반지! 지난 주 일요일에 간 술집에서 내가 어떤 아가씨에게 준 것이군! 다른 아가씨와 나갈 일이 있어서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서 말이야. 하핫! 정말 올 줄은 몰랐는걸!" "그, 그치만! 병사들에게도 다 말해놓으시겠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하셨으면서!" 로딘을 벽으로 세우고 문밖에 서있던 소녀의 입에서 서운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로딘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후드를 목까지 내린 소녀가 귀여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서 있었다. "오, 저런. 잊을 리가. 다만 공무에 바빠 잠시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보렴. 내가 잊지 않고 병사들에게 말을 해둬서 네가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사실 병사들에게 말을 해둬서 라기 보단 제독의 문장을 보고 함부로 제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하여튼 저 간교한 화술엔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을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을 했구나. 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기로 하지. 우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 이름이…?" "코니!" "그래, 코니. 이름도 너만큼이나 귀엽구나. 자아.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 둘이 오붓하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마." "…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표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소녀는 어디로 가고 남자의 미소 한 번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귀여운 소녀만 남았는지. 로딘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상관의 화술과 얼굴에 가증스러움과 놀라움을 느껴야 했다. *************************************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29 10:15:11, Hit : 308, Vote : 12)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1) 콰당. "허." 어느새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에녹스 제독이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로딘은 회의실에 혼자 남아 기가 찬 한숨을 흘렸다. 저 재빠른 손이라니. 과연 아르센 제국 내 최고봉이라 할 것이다. 제발 저렇게 일처리도 해준다면 오죽 좋단 말인가. 왜 매번 자신이 애원하고 여자에게서 떼어내야 그 훌륭한 능력을 발휘할까 말까 인지. "허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을 거창하게 쉬고, 로딘은 잠시 동안이었지만 상관과의 대화로 인해 피곤한 몸을 의자에 앉혀 쉬게 해주려 했다. 콰당!! "부관님!!!" 새파란 얼굴을 한 부하 하나가 회의실을 부술 듯이 거칠게 열며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뭔데 이리 소란스러우냐. 상관이 계신 곳에 노크도 없이." "죄, 죄송합니다! 워낙 시국이 급한 일인지라!" "? 시국이 급한 일…?" "그, 그렇습니다! 성안(聖眼)을, 성안을 뺏겼습니다! 저희가 수도원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뭐, 뭐라고?" 노크도 없이 들어온 병사를 혼내주려던 로딘은 그 병사가 내뱉은 말에 놀라 체통도 잊고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 어째서! 분명 제독께서 수도원에 서찰을 보내놨을 터인데! 너희들이 제독의 문장을 들고 가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게 어째서!!" "그, 그것이," "말하라!!" 왠지 우물거리는 듯한 병사의 태도에 답답해진 로딘이 소리를 질렀다. 그 기세에 놀라 병사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만큼 로딘이 앞으로 다가갔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도원의 신부님께서 제독께서 받아 가셨다고 말하시는 겁니다! 그, 그래서 저희는 바로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뭐라고?" 흥분한 병사의 말을 정리하자면, 분명 제독이 수도원에 병사가 가면 성안을 주라고 심부름을 시킨 일이, 병사들이 갔을 때 이미 제독이 찾아간 뒤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제독은 분명 로딘과 계속 같이 있었다. 물론 화장실을 갈 때와 잘 때는 따로였지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쾅!!! "에녹스님!!!"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내 귀는 아직 쓸만해 로딘."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별실의 문을 열었을 때, 에녹스 제독과 코니인지 콧털인지 하는 소녀는 이미 준비완료 태세였다. 둘러썼던 후드는 이미 온데간데없고 문소리에 급하게 입은 것이 분명한 옷가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야말로 '우리 지금 그거 하던 중이었어요'였다. "나도 장난 아니야 로딘. 도대체 뭔가. 아까부터 잔소리 늘어놓은 것만 해도 충분히 스트레스 감이라고. 난 지금 오랜만의 휴식을," "제독님 혹시, 성안을 가지러 가셨었습니까?" "…뭐?" "성안을 도둑맞았답니다. 수도원에서 말하길, 제독님께서 직접 찾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혹시 제독님께서 직접 가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가. 난 자네랑 계속 함께 있었으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녹스가 소녀와 아직까지 겹쳐져 있던 몸을 풀고 방의 중심에 놓여져 있는 탁자로 걸어왔다. 곱게 놓여져 있던 의자 중 하나를 빼내어 앉은 그는,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면 짓지 않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턱에 괴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제독." "로딘." "예?" "이거 아무래도, 골치 아픈 자가 끼어 든 모양이다." "골치 아픈 자라 하시면…?" "오래 전에 잊혀진 자. 잊혀졌어야 하는 자가, 드디어 세상에 치고 나오는 모양이야. 하필이면 성안(聖眼)이라니. 그 놈도 그걸 노리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알아듣게 말을 해보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것이라는 걸 에녹스 제독의 부관 5년 차인 로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눈까지 감은 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가 아니면 짓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녹스님…?" 번쩍. 그 때, 굳게 닫혀있던 에녹스의 눈이 열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말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그가 작게 부르는 소리 하나에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 로딘은 뇌의 혈관이 다시 터질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의 주의를 다시 현실로 돌려준 것만은 저 소녀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이제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오, 저런. 코니. 미안하구나. 워낙 사안이 중요하다보니 귀여운 너를 기다리게 했구나. 그래, 잠시만 기다려라. 저 유리가 보이지? 저 유리를 살짝 밀면 비밀 방이 나온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렴. 나는 잠시 국정에 관련된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나. 알았지?" "네에…." 국정에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소녀의 얼굴이 새침에서 동경으로 바뀌며 홍조를 띠었다. 한편, 그런 모습이 로딘에게는 당연히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독!" "아아, 귀 안 먹었대도."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제독님 말대로 국정에 관계된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저런 소녀 따위를 신경쓰시는 겁니까?!" "아아, 국정은 국정. 휴가는 휴가." "제도옥―――!!!" "흥분하지 말래도 로딘. 자꾸 그러면 자네의 벗겨진 머리가 그 면적을 넓히려고 안간힘을 쓰게 될 거야." 안 그래도 흥분한 상태에서 로딘은 에녹스가 자신의 머리에 대해서 말하자 붉은 얼굴을 더붉게 물들였다. 이런 상황에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농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 "제가 지금 흥분 안 하게 되었습니까! 두 달 동안 진행되고 있던 국가의 계획에 가장 중요한 보물을 빼앗겼는데요! 게다가 그 도둑은 당신과 꼭 닮은 놈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래도." "그게 말이 되는!" "대용품은, 있어." "있긴 뭐가 있―…예?" "있다고. 대용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관의 말에 말대답을 하고 싶진 않지만 이미 그런 거 생각할 만큼 격식 따지는 관계도 아닐뿐더러, 지금 에녹스의 말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전해지는 성안(聖眼)에 대용품이 있다니? "있어. 있다구.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잖아? 해적 소탕에만 3대 째야. 이런 일따위, 예상해서 그 대용품을 만들어 놓아도 이상할 게 하등 없지." "그런…!" 만약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왠지 저 사람의 말에는 믿음이 가질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에 속아 일 잘하고 핸섬한 젊은 제독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만 바로 곁에서 늘 에녹스를 지켜보는 로딘은 그의 본 모습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해결된 거지? 성안의 대용품은 내가 내일 회의에서 말할 테니 이제 자네도 흥분 가라앉히고 모처럼의 상륙과 휴가를 즐겨보라고. …남은 머리카락 관리도 하고." "제독―!!!" 바로 세상에 둘째라가면 서러울 난봉꾼과 농짓거리만 좋아하는 가벼운 남자라는 것을!!!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과 감상과 추천을 남겨주시는 고마운 분들. 새해에도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남은 2003년도 마무리 잘 하시길 기원하고요. 내일 또 올리겠습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ㅠ.ㅠ 이번엔 꼭!!)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30 22:32:50, Hit : 284, Vote : 6)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2) * * *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이곳 대 아르센 제국. 그 중에서도 대 탐험가 오닐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라는 말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험악한 항구'라고 칭한 도빌항은, 군사적 요충지와 동시에 세계의 모든 해적들이 모인다는 매우 역설적인 곳이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해적들의 횡포에 이기지 못해 국민들은 하나 둘 무역 중심지인 도빌 항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해적들은 더욱 활개를 치며 그들의 세력권을 육지로까지 넒히려고 했다. 비록 아르센 제국 역사상 가장 젊고 핸섬하며, 그 능력 또한 역대 해군 제독 중 최고라 불리는 에녹스·리엔·팰러딘 경의 활약으로 조금 잠잠해지긴 했다지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해적에 비해 그의 몸은 하나였기에 모든 해적들의 약탈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르센 제국의 왕 파노이아 13세는 나라의 수익이 무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많은 상선과 더불어 해적선까지 출몰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저 나라의 대신들과 방법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논의 끝에 나온 것이 바로 고대의 신화에서 고안한 '제왕의 보물'이었다. 제왕의 보물. 기원전 2000년, 부신 파라이아드와 모신 파라이아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보물.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여 그 주인을 반드시 제왕의 자리에 올려준다고 전해지는 이 보물은,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신들의 전쟁에서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승리하여 아르센의 땅을 차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신들과의 전쟁에 지친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영원의 휴식을 위해 아르센의 땅에 잠들었을 때, 그들은 제왕의 보물 또한 쉴 수 있도록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곳'에 제왕의 보물을 잠들게 했다. 길고 긴 영겁의 시간 뒤에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마저 못 알아보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어떠한 '표식'을 그들이 잠든 땅 위에 올려두고. "그래서…?" "……." "그 '표식'이 바로 성안(聖眼)이다, 이거요 제독?" "그렇습니다 대신." "그런데 그것을 한낱 해적 놈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할 말이 없다는 듯 기란 대신의 눈앞에서 젊고 아름다운 육체가 그 고개를 살짝 숙여 사죄를 표한다. 허나 애초부터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던 대신은, 오른 쪽 손을 살짝 드는 것으로 그에게 사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표했다. "허면 어찌할 생각이요, 앞으로? 제왕의 보물은 해적 놈들에게 넘어가 버린 거나 진배없지 않소? 이대로 해적들의 행태가 더욱 심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것이오?" 지금은 사죄를 받는 것보다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하여 고개를 든 제독에게 묻자 그가 빙긋, 하고 여느 여인네라면 얼굴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대신. 본디 제왕의 보물에 대한 신화와 성안 또한 저희 가문에 전해진 것. 분실에 대한 해결책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호오―." 자신만만한 젊은이의 대답에 늙은 대신의 입가가 움직이며 그 주름을 더한다. 과연 젊은이답지 않게 매사에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성안을 해적들에게 빼앗긴지 이틀, 소식이 알려지자 궁에서는 분란이 일어났고 당연하다는 듯 책임자인 에녹스 제독에게 화살이 쏟아졌다. 애초에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세력을 늘린 해적들을 지배하자 해서 제왕의 보물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보물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해적들에게 빼앗기다니, 이거야 죽 쒀서 개 준 격이 아닌가. 아마도 어디서 새 나갔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해적들이 보물에 대한 정보를 듣고, 그들 또한 모든 해적을 지배하는 제왕이 되기 위해 요즘 여기 저기 보석상마다 보물을 뒤지고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는 지경이었다. 전부터 젊고 능력 있는 그를 시기했던 관료들은 이 때다 하고 그를 비난했고, 기란 대신 역시 그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너무 젊은이에게 중대한 사안을 맡긴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눈앞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자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하여 한 번만 더 그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그래, 그 해결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혹여 성안을 다른 곳에 봉인해 두기라도 했다는?" "그건 아닙니다 대신. 해적들에게 빼앗긴 것은 성안이 맞습니다." "음. 그렇다면?" "본디 성안(聖眼)이란, 물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어라?" "성안이란, 제왕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뭐라고?" 거듭 거듭 되물음을 하며 대신은 놀라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성안(聖眼)이 사람이라니. 이건 또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아마 다른 어떤 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성안이 사람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눈, 바로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뜻합니다." "호오!" "성안이란 기원전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 여신이 정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대대로 그들은 장님입니다만, 오로지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만은 누구보다도 밝은 사람들이지요." "사람들? 한 둘이 아니란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일족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기에 한 사람이라 지칭할 수 없음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한 사람이란 것 아닌가! 그것을 해적들에게 빼앗겼다니 이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기에, 대책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대체 뭔가!" "성안의 일족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 파라이아 신으로부너 이 일족이 받았다고 전해지는 것인데, 그것이 오랜 시간 그 일족과 함께 하면서 영험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능력?" "바로 보물이 곁에 다가오면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능력입니다." "반응이라니…?"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저희 집의 고서를 정리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니까요. 어쨌든, 기록에 의하면 그 보석은 제왕의 보물과 접촉하는 순간 어떠한 반응을 일으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보석이 어디 있는가! 어서 해적들에게 또 빼앗기기 전에 이 성으로 가져오는 것이!" "그것은 걱정 마십시오." "어째서." "그 보석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뭐라고?" 기란 대신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에녹스는 빙긋 웃으며 조용히 해군 제복의 앞섶을 열며 그 신의 육체와도 같은 아름다운 상체를 보여주었다. "뭐, 뭐 하는 건가 에녹스 경! 나는 그런 취미는…." "이것이 바로 그 보석입니다. 기란 경." "뭐?" 검은 고목 같은 얼굴을 불게 물들이며 늙은 대신이 소리쳤지만 젊고 아름다운 제독은 상관않고 빙긋 웃으며 자신의 앞섶을 더욱 열어 그 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귀하디 귀한 금으로 만든 아름다운 체인으로 이어진,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펜던트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 아이고.. 지금 급하게 나가봐야 해서 우선 한 편만 올려 드리고 갑니다. 늦잠이 죄.. ㅠ.ㅠ (네에; 좀 전에 일어났습니다;;) 약속 갔다가, 12시 쯤 돌아와서 다시 또 올려 드리겠습니다.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31 01:32:19, Hit : 295, Vote : 7)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3) * * * "…그래서. 잘 넘어가신 겁니까?" "그야 당연하지." "하아. 해군 제독말고 차라리 외교관을 하실 걸 그랬습니다, 경. 그 언변이 참으로 아깝게 느껴지거든요." "무슨 소리. 외교관보단 제독이 더 폼나지 않나. 여자들도 그 편을 더 좋아할 테고."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로딘 부관은 분명 크게 한 소리 듣고 나올 거라 생각한 대신의 회의실에서 방긋 방긋 웃으며 앞섶을 헤치고 나오는 에녹스 제독의 모습에 '저 인간 설마 미남계라도 쓴 것인가!' 라고 잠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저 여자 좋아하는 인간이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밀어 오르는 궁금함에 복도로 나오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더니 성안의 대용품이 어떠느니 하면서 팬던트를 보여준 모양이었다. 허긴. 상관에게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저 여우같은 인간이 늙은 너구리 하나 구스르는 게 어디 일이나 되겠는가. "뭔가 로딘. 그 비꼬는 어조는 말이야." "비꼬긴 누가요. 그저 외교관이 안 되신 게 한이라니까요." "흐응." 서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병사들 눈 많은 데서 말싸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에녹스의 별실로 지정된 곳의 복도로 들어오자, 로딘은 말 소리를 반으로 줄이며 에녹스에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제독」 "응?" 「도대체 성안을 훔쳐간 해적은 어떻게 성안이 보석이 아닌 사람이라는 걸 안 걸까요?」 "흠." 「그것도 제독께서 말하신 잊혀진 자인지 뭐인지에 관계된 겁니까?」 "흠…." 「제독?」 "안 가르쳐 줘." "뭐, 제독, 지금 뭐라고 하셨." "안 가르쳐 줘. 비밀이야 로딘." "또 장난 하시자는 겁니까!" "이건 우리 집안의 치부와도 같은 거니까." "……." 장난이라 생각하여 화를 내려던 찰나, 로딘은 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의 에녹스를 보고 '정말 뭔가 있기는 하나보군'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는 해야할 터. 뭐라고 둘러댄단 말인가. "…놈이 제독을 닮은 가면이라도 썼다고 해야 하나." "응. 그렇게 해 줘 로딘. 둘러대는 건 자네 특기잖나." "…누구 때문에 생긴 특기인데요." "거 참. 나는 너무 훌륭한 상사인 거 같아. 모자란 부하의 특기마저 발달시켜주니 말이야. 이보게 로딘. 굳이 감사를 표하지는 않아도 좋아. 자네가 나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야." "…허어." 언제나 그렇듯 어이없는 말싸움의 패자는 로딘이다. 외교관도 이겨먹을 저 혓바닥에 과연 이길 수 있을 자가 누구인지. 있다면 그 면상 한 번 보고 죽었음 소원이 없을 것이다. "참." "응?"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제독." "이상한 정보라니? 제왕의 보물에 대한?" "아니, 그것은 아니옵고…." 따로 배치된 별실이라고는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다. 다시 한 번 주위를 조심스레 살펴본 로딘은, 편하게 앉아 메이드가 갖다 놓은 와인을 마시려 하는 에녹스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독이 해적이라고 떠벌리는 놈이 있는 모양입니다." "푸핫―!!" "…와인은 남의 얼굴에 뱉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독." "콜록, 하지만 자네가 너무 어이없는 소리를 하니까! 무슨 소리인가 그게?" "최근 들어, 제독을 보고 멍청하게 덤벼드는 해적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날 보고 블랙 버드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 몇 있었지." "그게 아무래도, 웬 소년 하나가 제독의 외모를 해적이라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소년?" 실크로 된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자신의 입가만 얄밉게 닦은 에녹스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하긴 예쁘장한 소녀가 아닌 이상 그의 관심을 끌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블랙 버드라는 놈에게 당한 멍청한 해적들이 그 소년이 말하는 정보만 믿고 수도에 왔다가 잡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흐응. 그렇다면 잘된 일 아닌가. 우린 가만히 앉아서 꼬여드는 멍청한 해적 놈들을 잡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또 그 소년은 그걸로 돈이라도 벌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 이조 아닌가." "그런데 그 소년이, 최근에 정말로 블랙 버드를 봤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블랙 버드의 실물을?" "예." "호오…이 나조차도 웬만한 꼬리 하나 잡을 수 없었던 그 놈의 실물을 그 소년이 보았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무엇보다 블랙 버드에 대한 것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소년이 그를 보았다고? 그게 말이 되는 거라 생각하나?" "그," 블랙 버드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늘 느끼하게 웃던 얼굴을 진지하게 바꾼 채 따져오는 에녹스에 당황한 로딘이 말을 더듬자, 에녹스는 눈을 내리깔고 차를 따르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뻔하군. 돈을 더 벌려고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 틀림없어. 신경쓸 거 없네. 어차피 언젠가는 그 소년이 말한 외모가 나라는 것이 알려지고 그 소년은 뜨거운 맛을 보게될 거야." 역시 만사 태평해 보이는 에녹스 제독이라 할 지라도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가장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블랙 버드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화제인 모양이군. 하고 로딘은 생각했다. 아마도 소녀들과 사랑을 나눌 때를 제외하고 저 사람에게 심각한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블랙 버드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히든카드마저 던져 보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데 그 소년이, 실제로 본 블랙 버드는 정말로 제독님의 외모와 똑같았다고 말하고 다닌다더군요." "?! 뭐라고?" "밝은 은발에 바다 빛 눈동자, 얼굴 선이라던가 그 외에도, 소년이 말하고 다니는 인상착의는 제독님의 것과 똑같았습니다. 실제로, 그 소년의 말을 듣고 온 해적들이 제독님을 블랙 버드라 부르면서 달려드는 것이 일상 다반사이지 않습니까. 요즘 들어 더욱 심해졌구요." "그렇긴 하지만." "그 소년이 실제로 블랙 버드를 봤다고 하는 날 뒤로 신빙성이 더 생기면서 더 많은 해적들이 정보를 얻으러 그 소년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슬럼 가의 아이인지라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지만요." "블랙 버드의 외모가 나와 같다…고…설마…." "제독?" 로딘이 불러 보았지만 그는 또 다시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럴 땐 불러 보았자 소용없는 일. 쉽게 포기한 로딘은 양해를 구하고 에녹스의 맞은 편에 앉아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는 홍차를 마시며 그가 생각의 바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정말로 그 놈이…그 골치 아픈 블랙 버드 놈이 바로 그 놈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인가…. 번번이 놓치고 말았던, 이 나를 따돌릴 수 있는 그 빠른 배가 설마 놈의 배였단 말인가…!" 혼자 생각에 빠져있던 에녹스는 뭔가 분한 것이 떠올랐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주먹을 꽉 쥐며 아름다운 장밋빛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혼잣말을 추론하여 가설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어설픈 가설은 오해만을 낳을 뿐이라 로딘은 그가 말해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설령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라고 해도 나라의 국정에 관계된 일을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그 소년을 만나보아야겠다!!" "예?" 로딘의 찻잔 안에서 향을 풍기던 홍차가 차갑게 식어갈 즈음, 어느새 현실로 돌아온 에녹스 제독이 로딘의 눈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로딘이 잠시 말의 뜻을 헤아리는 동안, 에녹스는 어느새 외출복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예, 예? 제독! 잠깐만요! 휴가는 내일이면 끝나는 것을 설마 모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내일 모레부터 당장 제왕의 보물을 위해 고서를 조사하고 보물이 묻혀있는 곳을 탐사하는 일정이 시작됩니다. 게다가 저희는 짬짬이 해적소탕도 해야하고, 무엇보다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겁니까! 당신의 부하들은 무엇에 쓰려고요! 에, 에녹스님?" "직접 가서 만나봐야 해. 내가 직접 들어야 할 이야기다." 로딘의 애타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쿵, 하고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여자를 안을 때와 해적들을 잡아들일 때 외에는 볼 수 없는 그의 빠른 행동력에 로딘이 잠시 멍해 있을 때, 복도 밖에서 병사들에게 말을 준비하라 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핫 하고 놀란 로딘이 들고 있던 찻잔을 여전히 손에 낀 채 달려가며 말했다. "내가 못 살아! 제독! 같이 가십시다! 제독님! 혼자 가면 전 상부에 뭐라고 보고한단 말입니까! 적어도 임무동행이라고 라도 하잔 말입니다! 말은 제 것도요! 제 말도 준비해 주세요! 제도옥――!!!!" ― 제2장 파라이아 궁의 난봉 제독 끝 ― *********************************** 내일부턴 라디가 등장합니다. 여태껏 나온 것과는 쬐에끔(?) 다른 모습의 라디.. ^^ 기대해 주시구요. 감상, 추천 남겨주시는 분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도 많이 올려드리고 싶지만... 비축분이 그 동안 간당간당 했던지라;; ㅠ.ㅠ 죽여 주십시오~~ 하지만 올 연말엔 정말 바쁜 일이 많습니다~~ 본업에 언니 결혼식에, 최대한 줄이고는 있다지만 송년회 모임에... 흐으.. 그래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자!!!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3-12-31 20:08:03, Hit : 267, Vote : 8)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4) Golden Age - 황금시대 [ 제3장 양치기 소년, 늑대를 만나다 ] "라디." "응?" "오늘도 나갈 거니?" "? 당연하지?" "그래…." 도빌 항(港) 근처의, 슬럼 가에서도 더욱 안 쪽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작은 집의 나무 문 앞. 이제 갓 십대 후반에 들어섰을 것 같은 소년 둘이 아침햇살을 맞으며 서 있었다. 소년 중 한 명은 라디였고, 다른 한 명은 라디가 십여 년 전부터 빌붙어 살고 있는 마사 아주머니네의 외동아들 파크였다. 라디는 늘 하던 대로 동이 트자마자 파크가 끓여준 감자 수프와 호밀빵으로 배를 채우고 일을 나가려 했지만,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파크가 곁에서 떠나질 않으며 출근(?)하려는 라디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러니 파크? 내가 나가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어젯밤에 아주머니의 기침이 너무 심했던 것 때문에 그래? 그것 때문이라도 나가야지. 나가서 돈을 벌어야 아주머니의 약을 사올 것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우물쭈물 할말이 많아 보이는 파크에게 라디가 얼굴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저 소심한 아이가 이렇게까지 라디를 붙잡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시, 실은." "응." "어젯밤에 꿈을 꾸었어." "꿈?" "응." 아아, 뭔가 무서운 꿈이라도 꾼 모양이군. 하고 라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곧잘 말도 잘하고 웃기도 하는 파크였지만 모르는 사람이나 무서운 아저씨들을 상대할 때는 말도 더듬고 하는 소심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밤 중에 무서운 꿈을 꿔서 라디의 침대로 숨어 들어오는 일도 제법 많았고. 분명 이번에도 그런 것 때문에 무서워서 같이 있어달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네가, 푸른 눈을 한 하얀 늑대에게 잡혀가는 꿈을 꿨어." "뭐어?" 귀신 꿈이라도 꾼 줄 알았더니 늑대란다. 게다가 푸른 눈을 한 하얀 늑대라니. "뭐야 파크. 겨우 늑대 꿈이었단 말이야? 난 또 할로윈 귀신이라도 나온 건가 했더니, 참 내." "그, 그치만! 끌려가는 네 표정이 너무 애처로웠단 말이야! 나, 나에게 구해달라며 손을 내밀었었어!" "하아?"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건 그야말로 꿈속에서의 일일뿐이다. 라디가 늑대근처에 갈 만큼 조심성 없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저 파크에게 도움을 청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야 파크. 여긴 해안가야. 상어라면 몰라도 늑대가 어디 있다고 그래." "하지만 내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단 말이야!! 저, 전에 네가 옷이 마구 찢어져서 왔을 때도 아침에 이런 이상한 꿈을 꿨었다구!" "파크. 파크으∼." 되도 않을 억지를 부리는 파크에게 이제 라디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라디가 일을 나가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파크와 그의 어머니인 마사 아주머니 때문이거늘 오늘따라 왜 이리 웃기지도 않는 이유를 대며 귀찮게 하는지. "정말 왜 이러니. 그 때야 우연히 내가 나뭇가지에 걸렸던 거라고 말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뭇가지에 긁혀서 옷이 그렇게 찢길 정도라면 숲에서는 살아날 사람이 없겠다!" "우웅…." 이 녀석, 어리버리한 척 눈치보더니 이렇게 반격을 하다니. 갑자기 말문이 막힌 라디는 하릴 없이 집 앞 골목의 쓰레기들을 슬쩍 보고, 그 사이로 보이는 해에 깜짝 놀라 뒤에 서있는 파크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이런! 늦겠다! 오늘은 정말 항구에서 짐 날라주는 일을 하기로 했단 말이야! 야, 파크. 네 잔소리는 오늘 일 끝내고 와서 들으마! 하지만 오늘 내가 돈 많이 벌어서 고기 사오면 잔소리 안 하기다, 알았지?" "뭐? 라디! 거기 서! 오늘은 아무래도 쉬는 것이 좋을," "너야말로 집에서 좀 쉬어! 오늘 하루쯤 집안 일 안 해도 봐줄 테니까! 그럼 난 간다! 서방님 오실 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어라 마누라!" "뭐야? 누가 서방님이고 누가 마누라야! 너 정말 거기 서지 못해! 한다면 내가 서방님할 거야! 그리고 너! 그 옷 좀 다른 걸로 바꾸라니까! 어깨랑 배랑 다 드러나고 그게 뭐냐고! 네 사이즈에 맞는 옷을 입도록 해! 내가 구해다 줄 테니까!" "하하하하―…." 길게 웃음을 남기며 달려가는 라디의 목소리가 골목 안에 넓게 울려 퍼졌다. 경쾌하게 달려가는 뒷모습에 파크는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있지만 돈을 벌러 나가는 라디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걱정어린 배웅을 끝마쳤다. * * * '네가 푸른 눈을 한 하얀 늑대에게 잡혀가는 꿈을 꿨어.' 늑대라니. 참 내. 파크도 참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해안가에서 나서 해안가에서 자랐으면 무서운 꿈이라도 으레 물에 관련된 것으로 꾸는 게 당연한 것 아니었던가. 실제로 라디 또한 피곤한 날 꿈을 꾸더라도 커다란 식인 물고기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치만 끌려가는 네 표정이 너무 애처로웠단 말이야! 나에게 구해달라며 손을 내밀었었어!' 게다가 파크에게 도움을 청했다니. 하다 못해 지나가던 개에게 도움을 청할지언정 자신보다 몸도 약하고, 키도 작고 얼굴까지 예쁘장한 파크에게 도움을 청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역시 개꿈이야. 암, 그렇고 말고." 무엇보다 오늘은 항구의 정식 일자리도 들어올 정도로 운수가 좋은 날이다. 그러니까 파크의 꿈 따위 개꿈으로 치부해 버리고 돈이나 많이 벌어오는 것이 상책이다. 또, 돈을 많이 벌어서 고기와 약을 듬뿍 사간다면 파크도 자신의 걱정이 헛된 것이었다는 걸 깨달을 테고. "좋아.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자, 그리고 저번의 빌인가 하는 놈처럼 멍청한 해적을 물색해 보는 거야. 암, 그 수많은 해적 중에 멍청한 해적 따위 발에 채일 정도지. 돈이다 돈! 돈을 버는 거야!!" 촤아악!!! "으아아악??!!" "엇차, 이런! 밑에 누가 있었던 게냐? 이런 이런, 미안하다. 혹시 맞았냐?" "이, 이이이…코주부 아저씨! 변을 이런 곳에 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다행히 맞진 않았지만 하마터면 맞을 뻔 했다구요! 다음부턴 밑을 보고 버리세요!" "껄껄. 그래 미안하다. 늘 이 시간엔 아무도 안 돌아다니기에 그랬지. 거 참, 평소에는 늘 보다가 오늘 하루만 안 보고 부은 건데 왜 하필 네가 거기 있었는지. 어디, 옷에 튀지는 않았니? 튀었으면 내 옷을 빌려주도록 하마." "괜찮아요! 앞으로 조심하기나 하세요!" 항구 앞 포목점을 지나 고용인과 만나기로 한 여관에 당도하기 직전, 라디는 하마터면 대변 세례를 받을 뻔했다. 여관의 2층에 살고 있는 코주부 아저씨 닐슨이 하루 종일 쌓아뒀던 요강의 내용물을 창 아래로 부어버린 것이다. 뭐, 변을 길가에 버리는 것이야 일반적인 상식이라 치지만 적어도 아래 사람이 있는지는 보고 부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닐슨 또한 평소에는 늘 아래 사람을 확인하고 버리곤 했었고. 그런데 그러던 것을 유독 왜 오늘 하루만 그냥 부어버렸는지, 또 그것이 왜 하필 라디가 지나가는 시간이었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 날의 위험한 경험을 예언하는 것일 지도 몰랐지만, 그 때의 라디는 그저 '에이, 하마터면 옷이 더러워질 뻔했군. 그래도 옷에 튀지 않았으니 다행이야♡'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 이 시기엔 아직 화장실이 발달하지 않은 설정이라, 대소변의 처리는 거리에 버리는 것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엔 신사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나가도 변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있었고, 하이힐의 발달 또한 이런 변(;;)들 때문에 이루어 졌다지요. ^^;;; 자아. 드디어 글의 페이스를 잡아가는 기분입니다. 내일은 3편쯤 올려 드릴게요. 흐흐흐.. 읽어주시는 모든 분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4-01-01 23:05:18, Hit : 239, Vote : 3)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5) * * * 덜컥! 끼이이―…. "안녕하십니까! 루즈 볼리 호의 선장님이 누구십니까! 오늘 하역일을 하게 된 라디라고 합니다! 비록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일은 누구보다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있는 저랍니다! 한 번 맡겨보시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엥?"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 "너야말로 여기 왜 있냐. 이 지져먹을 자식아." "저게!!" "아아, 조용 조용! 왜들 이리 시끄러워! 오늘 임금을 받고 싶지 않은 게냐!" "헉, 아, 아니요!" "크윽…." 대립하고 서서 으르렁대며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 같았던 두 소년은 험악하게 소리 지르며 들어서는 하역 담당자 때문에 싸움을 멈추고 칫, 하고 혀를 차며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왜 하필이면 저 녀석이 이 자리에 있는 건지, 오늘 만약 저 녀석이랑 같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면 파크의 말대로 정말 운이 나쁜 하루일 거라고 라디는 생각했다. '아니지 아니지, 파크는 분명 바다 빛 눈의 하얀 늑대라고 했어. 저런 썩은 맥주 색 눈을 한 놈에게 그런 호칭이 어울릴 리 없잖아. 게다가 늑대라고. 저 놈은 개만도 못한 놈이야! 흥!' "자, 알고 있다시피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은 아라비아에서 오는 상선의 하역 일이다. 만약 혹여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의 오늘 임금은 없는 걸로 알아라. 알겠냐!"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모여있는 십 여명의 소년들에게서 우렁찬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슬럼가에서 잔 도둑질을 하며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던 아이들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은 계속 할 수 있는 항구 일을 놓칠 만큼 멍청한 아이는 없을 것이다. "그럼요, 나리!" 그래서 라디도, 분하긴 하지만 저 녀석과의 싸움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디와 조금 전 싸울 뻔한 소년의 이름은 짐이었다. 슬럼가에서도 라디가 살고 있는 6번가에서 골목대장 격에 속하는 소년으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단독행동으로 돈을 버는 라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시비를 걸곤 했었다. 라디가 소매치기를 할 때면 어디서 달려왔는지 그 사람에게 일러 급하게 도망가게 만들었고, 사기를 치려고 누군가에게 다가서면 저 녀석은 사기꾼이라며 미리 선수를 치기 일쑤다. 짐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라디의 하루 수입이 짐의 두 배나 되기 때문이었는데, 그럴 때면 라디는 늘 다른 대상을 찾아가 성공했고, 저런 식으로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면 자기도 돈 벌 시간이 모자랄 텐데, 저 녀석 바보 아냐? 라고 생각하며 무시해 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같은 일을 하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앞으로 심심하면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이거 고정직으로 돈 좀 쉽게 벌어 보려 했는데 의외로 꽤나. 무지. 심각하게 골치 아픈 일이 될 것 같았다. 바로 지금도 이렇게. "야, 라디." "……." "이 자식이, 사람 말이 말 같이 안 들려! 내가 부르고 있잖아!!" 시비를 걸고 있으니 말이다. 하역 담당자에게 대강의 설명을 듣고 약 두 시간 뒤부터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면 두 건은 더 할 수 있겠다 싶어 라디는 술집이나 가보려 했다. 하지만 라디가 여관을 나서 좁은 골목안에 들어서자마자 이때다 하고 우두두 몰려온 소년들의 모습에 두 건은 글렀군, 하고 포기 어린 한숨을 쉬었다. "…왜. 너 따위의 호출에 일일이 대답할 의무 없어. 용건 말하고 꺼져." "저 새끼가!!" "아아, 됐어." 라디의 차가운 말에 짐의 뒤에 서있던 소년들 중 하나가 주먹을 들고 덤비려던 것을 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웃겼다. 자기들이 무슨 조직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흥. 차가운 말투는 여전하시군. 넌 늘 그래. 항상 혼자 잘났지. 같이 도둑질 해대는 사이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뻗대냐? 어지간히 하고 내 밑으로 기어들어 오시지?" "하." "하? 야, 하, 시랜다. 저 잘난 소매치기 귀족께서 하,라고 하셨다고. 저 거만한 웃음에 내가 무릎꿇고 구두에 키스라도 해야하냐? 저 더러운 구두에? 크하하하!!!" "우하하하!!" "푸하하하!!" 뭐가 저리 우스운지 자기들끼리 크게 웃고 난리가 난 짐 쪽을 보며 라디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할 일이 없을까. 이렇게 자신을 막아서고 시비 걸 시간에 한 번이라도 일을 더하면 단 돈 1핀이라도 더 벌 수 있을 것을. "미안하지만, 난 너같이 대.단.한 대장 모실 능력이 안돼서 말이다. 혼자서 너희들 돈의 두 배 버는 게 좋아. 그러니 너희도 내 반도 안 되는 수입 갖고 잘 살아 보라고. 평생 돌처럼 딱딱한 빵이나 씹으며 말이지. 가도 되냐? 누구와 달리 이 몸은 바쁘셔서 말이야." "거기 서지 못 해!!" 오랜만에 진심 어린 충고 좀 해주고 돌아서려 하는데 역시나 한 마디를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서라고 해서 서면 바보지, 하면서 라디가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짐의 억센 손이 라디의 얼마 전 새로 얻은 옷가지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 필요도 없이 센 악력 덕분에, 라디의 짝사랑인 코니네 아버지에게 얻은 옷이 찌이익―하며 그 여린 살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이게! 이 옷은 찢어지면 안 된단 말이야! 찢어지면 네가 물어낼 거냐!" "미친! 내가 니 옷을 왜 물어 내냐! 애초에 네가 재수 없게 말하고 멋대로 돌아서니까 그렇지!" "뭐가 어째! 몰려다니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거 없는 멍청이들에게 충고 좀 해줬더니 그게 그렇게 불만이냐? 엉?" "뭐? 멍청이? 너 지금 멍청이라고 했냐?" "그래, 멍청이! 내가 너희보다 돈 좀 더 번다고 시샘해서 우두두 몰려오는 게 꼭 멍청이 닭이 아니고 무어냐! 너희들은 멍청이야!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라디는 그동안 귀찮고, 싸우는 것은 배를 또 고프게 하는 영양가 없는 일이기에 피해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오늘을 결전의 날로 삼기로 했다. 아마 오늘도 그냥 무시해 버린다면 짐이 일할 때 무슨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니까, 그것보단 일하기 전에 끝내 놓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이, 이 자식!! 알아?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네 그 재수 없는 말투도! 그 눈깔 안 보이게 푹 눌러쓴 모자도! 네 그 누런 색 피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는 줄 알아! 네 그 주근깨는 어떻고! 그 덧니는 어떻고! 당근 색 머리는 어떻고!!!!" "이게 정말! 으아아아――!!!!!" 말다툼으로 시작됐던 아이들의 싸움은 결국 주먹다짐으로 발전했고, 팽팽히 대립하며 서 있던 아이들은 어느새 뒤섞여 혼잡함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라디와 짐의 패거리라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긴 했지만 역시 아직은 어린 소년들의 싸움이다 보니 다들 눈을 감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싸움법이었다. 라디 역시 어린 소년들 중 하나였기에 그들은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뒤섞여 작은 골목 안을 아침부터 소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젠장, 야! 저 모자를 벗겨 버려!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지가 뭔데 모자사이로 맨날 노려보냔 말야! 야, 뭐 해! 벗기라니까?!" "이거 놔! 이 비겁한 자식들아! 이거 놓으라구!" 진열 따위 생각지 않고 마구잡이로 엉켜있던 소년들이 짐의 말을 듣자 일제히 라디의 옷깃을 쥐려 달려들었다. 라디는 최대한 옷을 잡히지 않으려 손들을 뿌리쳤지만 다섯 명의 소년들을 한꺼번에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놓으래도!! 익!" "벗겼다! 야, 대장! 모자 벗겼어! 이것 보라구!" "그래, 잘했어! 흥, 이 자식! 어디 그 잘난 면상이나 한 번 보……." "어…." 라디가 도망치지 못하게 양손을 잡고 있던 두 소년은, 맞은 편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세 소년이 왜 저런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라디 역시 마찬가지로, 이 녀석들이 성난 황소처럼 덤벼들다가 갑자기 왜 이러나, 마법이라도 걸렸나 싶었다. "어어어…." 라디는 소년들의 말에 역시나, 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눈과 피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숨기고 다니는 것을 들춰서 서로간에 기분 나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싶어서 말이다. "라, 라디 저 녀석 눈이 왜 저래." "그, 그러게…." 짐의 뒤에 서 있던 소년 둘이서 말을 더듬으며 헛기침을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짐을 비롯해 슬럼 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있어 부자들의 노예로 노예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동방인은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신비한 것이었으니까. 비록 그것이 늘 말다툼을 해오고 욕설을 해가며 영역 싸움을 하던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 해도. 말이다. "야, 이봐 짐?" 라디의 팔을 잡고 있던 녀석이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짐을 재촉했지만 짐은 그 부름에 답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서 제대로 본 동방의 소년은, 아직 어린 그에게 넋을 빼놓고 구경할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히. **********************************************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4-01-01 23:06:14, Hit : 269, Vote : 12)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6) 그저 노란 색의 더러운 황색 피부를 가진 원숭이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눈까지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기고 헐렁한 셔츠를 입은 눈앞의 라디는 짐이 알고 있던 더러운 소매치기 소년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황색 피부? 그게 아니다. 밝게 비치는 햇살과도 같은, 너무도 따사하고 부드러워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은, 그런 살색이었다. 전부터 험하게 자란 애답지 않게 살결이 곱다고는 생각했지만 얼굴의 피부가 저렇게 잡티하나 없이 고울 줄은 몰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사슴과도 같은 젖은 까만 눈동자라니. 물론 검은 색 눈동자를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방의 검은 색 눈과 동방의 검은 색 눈은 분명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도 꽤 많이. 블랙 홀과도 같은 검은 눈은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도, 갈색으로도, 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짙디짙은 푸른색으로도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이, 가만히 응시하는 자신을 궁금하게 여기며 그 각도를 달리 하자―. "잇! 이거 놔 이 자식들아! 떼로 몰려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멍청이들 같으니! 너희들은 평생 그렇게 몰려다니다 하루 벌어 사는 그런 한심한 생활을 계속 하라고. 난 돈을 많이 벌어 나중에 내 장사를 할 테니까!" "이 새끼가!! 야! 대장! 너 뭐 하냐니까!" "어, 어? 어어…." 가만히 서 있는 짐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라디가 다시 몸부림을 시작했다. 그러자 라디의 팔을 잡고 있던 두 소년이 화가 난 어조로 짐을 불렀고, 짐은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 나와 자신을 원망스레 쳐다보고 있는 소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뭐라고 했냐?" "이 새끼 어떻게 할거냐고! 이대로 묶고 팰 거면 빨리 패던가! 아니면 옷을 발가벗겨서 창피를 주던가 혼쭐을 내 줘야 할 거 아니야! 대체 너희들 셋 넋 놓고 뭘 하고 있는 거야??" "으, 응?" "우, 우리가 뭘." "그래, 우린 짐이 가만히 있길래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렇지, 비타?" "그럼. 그렇고 말고." "아무튼 어떻게 할거냐 짐? 이 자식 팰 거냐, 옷을 벗길 거냐? 빨리 택하라고. 이 자식 몸부림이 어찌나 심한지 톰이랑 나는 팔이 마비될 지경이라고!" "패…? 옷을 벗겨…?" 라디의 팔을 쥔 채 하는 소년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짐은 잠시 그 내용을 생각하고는, 손을 턱에 괴고 무언가 생각하는 포즈를 취했다. 옷을 벗긴다…? 저 고운 피부가 과연 속살에도 여전할까…? 그리고 바닷바람과 흙으로 거칠어진 피부도 저리 고와 보이는데, 과연 속살은 어떠할까…?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던 짐은 뒤를 돌아 자신과 함께 라디를 보고 말문이 막혔던 두 소년을 보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라디의 두 팔을 잡고 있는 소년들에게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옷을 벗겨 버리자. 다시는 내게 기어오르지 못 하도록 단단히 창피를 줄 테다. 옷을 벗겨! 실오라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몽땅!!" "좋았어! 이 자식! 오늘 집에 돌아갈 때는 발가벗고 갈 줄 알아라! 크하하!!" 소년들은 자신들 특유의 방식으로 라디를 벌주려 했다. 아마도 그들이 조금만 더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했다면 자신들이 왜 라디의 얼굴을 보고 한 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는지, 또 그 피부를 보고 왜 한 번쯤 건드리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아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육체만 급성장 해버린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놈들이 단체로 미쳤지 싶었다. "야 이 새끼들아, 뭐 하는 거야! 그만두지 못 해! 그 옷은 찢으면 안 돼! 젠장! 이것만은 안 된단 말이야!!" 차라리 패는 것이 백 배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코니네 아버지에게 빌린 옷을 찢어발기고 있다니, 그러면 저녁에 가서 아저씨에게 뭐라고 사과를 하고, 또 코니의 얼굴은 어찌 본단 말인가. "안 된다니까아―이 자식들아!!!" 아무래도 코니의 실망한 얼굴만은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라디가 초인적인 힘을 끌어올려 다섯 명의 소년들이 옷을 벗기려고 하는 데에 제동을 걸었다. "으악!!" "아악! 이 빌어먹을 새끼가 깨물고 있어!" "아아악!! 이게 어디서 손톱으로 긁고 있어! 니가 계집애냐! 이딴 짓을 하게!" "흥! 내가 계집애라면 너희들은 그 계집애만도 못한 놈들이다! 단체로 몰려와서 한 사람에게 덤비는 비겁한 놈들은 지나가는 개의 똥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알고는 있냐!!" "저게!!!" "야! 벗겨 벗겨! 이 새끼 발가벗겨서 멍을 잔뜩 만들어 줄 테야! 다시는 이 골목에 창피해서 못 오게 만들 거라고!!"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이 놈들아!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줄 알아!" 군중심리라는 것의 요인으로 소년들은 과다한 흥분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라디가 가만 있었다면 적당해 패고 기나 좀 꺾은 다음에 보내 주었을 것을 바락 바락 대들며 도발을 하는 바람에 그 흥분은 더욱 더 배가되고 있었다. 찌이익―!!! "으아악!!" 필사적으로 막아보기는 했지만 결국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라디의 짝사랑 코니네 아버지에게 빌린 셔츠가 찢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한 번 옷깃을 잡히기 시작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라디의 옷깃을 길게 잡아 마구잡이로 찢기 시작했다. "이 놈들아! 하지 말란 말이다! 젠장! 차라리 때려! 차라리 때리라고!!" 라디는 어떻게든 더 이상 찢어지는 것만은 막아보려 양손을 교차시켜 가슴 위로 올리며 옷깃을 꼭 쥔 채 눈을 감고 소리쳤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파크에게 시켜 바느질로 대충 무마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제발 이 이상 찢지만 말아 달라고. 하지만 라디는 몰랐다. 군데 군데 드러난 어깨의 선과 허리의 선, 그리고 짧은 옷 탓에 훤히 보이는 배와 보기 좋게 잡힌 복근이, 그리고 더 이상 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는 그 절박한 목소리가. 혈기 왕성하다 못해 혈기 폭발하는, 생기 발랄하다 못해 성기 발광하는 소년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를 말이다. * * * 찌이익! 찌익, 찌이익―!! "으악! 하지 말래도! 그만 찢어! 이 자식들아 차라리 패란 말이야! 그게 너희들도 속 시원하잖아! 야!!" "더 찢어! 바지도 찢어! 아예 발가벗겨 버리자고!!" 라디는 정말로 절박한 심정이 되어 소리 질렀지만 소년들은 라디의 말은 듣지도 않고 무아지경으로 자신들의 흥분을 해소하는 데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흥분을 삭히기 위해 라디의 옷을 벗기면서도 하나 둘 드러나는 라디의 속살에 자꾸만 흥분이 고양되는 자신에 대해 소년들이 당황해가고 있을 즈음. "정말 야만적이군……." 작은 목소리였다. 혼잣말을 하듯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작게 울려 퍼지는 자극적인 허스키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묘한 힘을 가지고 뚜렷하게 귀로 파고들어, 골목 안의 소년들은 순간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여기라네 소년들. 그 야만스런 싸움 방식은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아님 설마 짐승처럼 단지 본능으로? 아름답지 못해. 아름답지 못하다고." 소리의 진원지는, 골목 입구의 왼쪽 벽에 서 있는 후드를 눌러쓴 키가 큰 남자였다. 처음엔 골목 입구에 반사되는 아침 햇살 때문에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던 라디는, 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남에 따라 짐 패거리와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있을 정도로 극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히, 히이이익―!!' 그였다. 정확히 일주일 전, 라디의 목숨을 위협하고 라디의 비밀스러운 곳을 마구 헤집어 놓았던 자. 눈빛 하나로, 손가락 하나로. 라디의 내부까지 모두 제압해 버린 자. 틀림없다. 저 후드. 웬만한 키 큰 사내도 내려다 볼 만한 훤칠한 키. 그리고. 멀리서도 알 수 있는 살아있는 바다 빛의 눈동자. 라디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리적인 공포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한 번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는 쪽이 더 이상할 것. 그리고 소년들 또한 남자의 알 수 없는 오오라로 인해 뒷걸음질치는 라디를 붙잡지 않았다. 그만큼 남자의 존재감은 척 보기에도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저, 저 재수 없는 놈이 여긴 또 왜!' 물론, 라디의 경우 오랜 슬럼가의 생활로 몸에 익은 오기 덕분에 분노 쪽이 더 강하긴 했지만. "뭐, 뭐야 당신은! 참견하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지! 구경 값 줄 거 아니면 말이야!" 그래도 한 무리의 대장이라고 짐이 큰 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비록 꽉 쥔 주먹이 작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둘째라고 한다면. "호오. 자네, 보기와 달리 제법 용기가 있구만. 자네가 이 소년들의 우두머리인가 보지? 그래, 그렇게 용기 있는 대장께서 어쩌면 한 사람을 데리고 비겁하게 집단으로 싸우려 하는 것일까? 아무리 슬럼가라고는 하지만 사나이의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여유 있게 말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라디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식으로 말을 했던가? 그 검은 후드의 사내 역시 사람을 깔보는 듯 재수 없는 말투이긴 했지만 저 정도로 느끼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 비슷한 목소리이기는 하나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블랙 버드라는 놈은 누구인가를 막론하고 말부터 놓는다던가 하는 점. 게다가 저 사람은 후드 또한 때 타기도 쉬워 보이고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는 눈부신 백색이고. 그리고 저 눈도. 그는 저렇게 경망스럽게 눈웃음을 짓지 않았었다. 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무언가 힘든 일을 겪어온 듯한, 라디와 같은 냄새가 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떤가. 후드 밑으로 드러난 것만 보아도 평생 흙이라곤 대 본 적이 없는 도자기 같은 얼굴이다. '뭐, 뭐야 설마. 그 놈이 아닌가? 그치만.' "자, 그럼 자네의 용기를 높이 사 이 몸이 손수 사내들간의 싸움이란 어찌하는 것인지 가르쳐주도록 하지. 아아, 고마워해도 좋아. 이 몸은 다름 아닌," 후드의 이음새를 매만지며 남자가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골목의 가장 안 쪽, 소년들과 라디가 있는 곳에 다다를 무렵, 남자는 후드의 이음새를 풀어 뒤쪽으로 날려 버리며 말했다. "이 아르센 제국 역대 제독 중 최고의 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해지는 에녹스·리엔·팰러딘님이시니까 말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소년들." 완벽하다면 완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까울 정도로 느끼한 미소를 덤으로 지으며. ************************************************ 떡국은 드셨나요..? ^^ 세 편 올려 드린다고 약속했지만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글을 많이 못 썼습니다. 헤헤.. 오늘은 추스려서 많이 써 볼게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연재소설방 . 연재소설 게시판지기님은 마야님(askaya@hanmail.net)이십니다. 낙무아이 (2004-01-03 13:59:47, Hit : 334, Vote : 16) [연재] Golden Age-황금시대 (17) * * * "…뭐?" "누구?" "야, 뭐래냐?" 웅성 웅성 시끌 시끌. 갑작스런 남자의 난입에 더불어 호화찬란한 미사여구에 소년들 사이에 어수선함이 맴돌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 어수선함이 자신의 미모 때문이라는 듯 다시 한 번 느끼하게 머리를 뒤로 휙, 하고 날리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후후. 다시 한 번 말해주지. 이 아르센 제국의 해군 총 제독 에녹스님이시다. 소년들. 그러니 어서 예를 갖추고 그 야만스러운 싸움을 멈추도록 하라." "제독?" "야, 야아 짐. 제, 제독이래." "어떻게 하냐? 라디 이 자식, 놔 줘?" "놔주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소년들!!" 험한 일이라면 웬만한 것은 겪어온 슬럼가의 소년들이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마치 한량과도 같은 가벼운 미소를 짓던 남자였는데, 자신의 말이 소년들 사이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조금 전의 모습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위엄있는 목소리와 표정을 내는 것이다. 소년들은 지레 놀라 자기도 모르게 잡고 있던 라디의 팔을 놔주었고, 라디는 소년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해군 제독 에녹스·리엔·팰러딘 경??' 분명 그렇다고 말했다. 남자의 입으로, 자신은 아르센 제국의 해군 제독이라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놈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랬다. 어느 곳 하나 꼽을 것 없이 모든 곳이. 남자의 모든 곳이 블랙 버드와 판 박은 듯 꼭 닮아 있었다. 그런데 블랙 버드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라디가 동경했던 해군 제독 에녹스 경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라디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그것을 또 어찌 해석했는지 남자는 오만한 얼굴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마도 자신의 얼굴에 반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 소년들. 내 비록 바쁜 몸이지만 볼 일이 있어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아량을 베풀도록 하지. 내가 입회자의 역할을 하겠다. 일대 일로 정정당당히 해보는 거다. 아무래도 이 쪽은 저 넝마 소년 혼자인 거 같고…그 쪽은 누가 리더인 건가? 나와서 음…진정한 사내라면 총으로 단 번에 끝내겠지만 너희들은 아직 어리고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맨손 싸움으로 하지. 아아, 야만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너희들에게 해군의 것과 같은 아름다운 무기들을 바라는 게 무리니까. 자, 시작하라." 일방적인 명령을 하고 거만한 자세로 팔짱까지 낀 남자가 라디와 짐들을 재촉했다. 너무도 익숙해 보이는 명령조의 말투에 넋을 잃은 라디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짐 패거리들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가 어째? 해군 제독이면 다야? 이 골목에는 이 골목의 방식이 있는 거라고! 대세를 따라오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놈은 이렇게 처리하는 게 관례야! 당신이 해군 제독이면 해적들이나 잡아들일 것이지 왜 우리 일에 참견을 하는 거야?!" 비록 대 해군 제독이라 치더라도 슬럼가에선 이방인일 뿐이다. 게다가 아직 정확한 신분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도 호위 한 명 없이 혼자 온 사람을 덜컥 해군 제독이라고 믿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짐은 나중 일은 생각지 않고 기분에 따라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남자가 정말 해군 제독이라 할지라도 그 때는 그 때가서 바닥에 코를 박고 빌거나 하면 되는 것이고. "호오…기세만은 높이 사줄만하다만 소년, 그러다가 죽게 되면 네 목숨은 누가 보상해주지…?" "뭐, 뭐라고?" "귀족들 중에 나처럼 마음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귀여운 소녀도 아닌 네가 이렇게 대들다니, 마음 좋은 나도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군. 허긴, 한 사람에게 다섯 명이 덤비는 비열한 무리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군. 내 실수다. 인정하지 소년." "뭐가 어쩌고 어째!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대체 왜 남의 일이 끼어 들어서는 난리야! 야, 얘들아! 자칭 제독 나리께서 아무래도 이 골목의 법칙에 대해서 모르고 계신가 본데, 한 번 주머니를 털리셔야 정신을 차리실 것 같다. 어떠냐!" "좋지!" "푸헤헤! 그러게 호위도 없이 슬럼가에 오는 게 아니지! 예쁘게 생긴 나으리!" "흠…." 분명 아직은 십대의 소년들임에 틀림없었지만 오랜 고생과 풍파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새 입에 익은 걸쭉한 말투에 남자는 별 감흥 없이 콧소리를 낼뿐이었다. 아무리 애들이라 하더라도 저 인원수가 덤빈다 하면 제 아무리 남자라 하더라도 성치 못할 것인데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담담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것 참. 자네들이야말로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 인상들이로세. 내가 해군제독은 그냥 공으로 된 줄 아는 건가? 다섯 명이라고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저 소년처럼 쉽게 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쉽게 잡혔다는 비아냥에 평소였다면 매우 기분 나빠했을 라디였지만, 아직 남자의 얼굴을 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라디는 그저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 그래 어디 한 번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야! 덮쳐!!" "우와아아!!!" "제도옥――!!!!" 이크, 하고 남자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오랜만에 운동 좀 해보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하나. 역시나 무지 무지 귀찮은 녀석이다, 저 부관이란 놈은. "여기 계셨군요! 말을 묶는 사이에 도망치시면 제가 못 찾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이 로딘,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래봬도 소싯적엔 섬광의 로딘이라 불리……응?" 여관의 마굿간에 말을 매는 사이에 도망쳐버린 무심한 상관을 찾아 길을 헤매던 중, 아무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 그 상관의 후드 끄트머리를 발견하고 찾아온 로딘은, 무턱대고 상관에게 소리를 지르고 들어와서 본 골목 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은, 포위되어 있다. 상대는 다섯 명의 소년, 아니, 옷이 찢겨 전의를 상실한 듯 보이지만 큰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쪽도 안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비록 소년이라고는 하지만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소년들이므로 어리다고 안심할 수 또한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한몸 바쳐 상관을 지켜드려야 한다!!! "제, 제도옥! 피하십시오! 제가 막고 있는 동안 어서 이 골목을 떠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제독께서만 무사하시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제독은 앞으로 이 나라의 해상을 지키실 중요하신 분. 이 로딘, 아르센의 미래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어서! 저 놈들이 무기를 꺼내기 전에 어서!!" "자네…뭐 하는 건가 로딘?" "…예?" 자신의 굳은 결의를 상관에게 말하던 로딘은, 주위가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중 상관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렇다. 비록 각오는 했다지만 겁나기는 했던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자네가 아르센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았지만 죽는 건 나중으로 해 줘. 기왕이면 내가 없는 자리에서 말이지. 나는 이런 곳에서 자네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 따위 사절이거든. 자네가 봉긋하게 가슴이 솟은 귀여운 소녀라면 모르지만 말이야." "에…예?" 눈을 뜬 로딘의 눈에 보인 것은, 하얗게 겁이 질린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다섯 명의 소년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로딘의 제복을 보고 있었지만. 그랬다. 고지식하다면 파라이아 궁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에녹스 제독의 부관 로딘. 휴일에도 꼬박꼬박 제복을 챙겨 입는 고지식함의 제왕이었다. 「야, 짐…저것 봐, 해군 제복이야. 저 사람 정말 해군 제독인가 봐. 어떡하지?」 「게다가 에녹스 경이라 하면 해적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그 분 아니냐? 야, 그러면 싸움도 엄청 잘할 거 아냐? 그, 그것보다, 해적들도 그렇게 무서워한다는데 그런 사람이 자기한테 욕하고 때리려고 한 우리들을 살려둘까?」 「으아앙―난 죽기 싫어! 다 짐이 시켜서 한 거란 말야! 난 죽기 싫어!」 뒤늦게 들어온 로딘의 해군 제복을 본 소년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맴돌았다. 아무리 슬럼가에서 산 소년들이라곤 하지만 해군 제복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제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또한 그 해군에게 조금 전 자신들이 어떤 짓을 하려고 했었는 지도 알고 있었고. 게다가 아르센의 왕 파노이아 13세가 가장 아끼고 친애한다는 에녹스 제독이라니. 조금 전의 흥분상태에서는 기억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나며 소년들의 공포는 높아만 갔다. "시끄러워!!!!" 동요하는 소년들 사이를 짐의 날카로운 외침이 갈랐다. 물론 짐 또한 지금 남자의 존재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꼴사납게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라디에게 보여주기엔 왠지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오…?" 그런 짐의 모습을 보고 에녹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분명 제독이란 걸 알면 코를 박고 빌기 바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녀석이 독기를 담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쪽의 옷이 찢어진 소년을 계속 쳐다보는 것이, 아마도 저 독기의 이유는 저 소년인 것 같았다. "의외구나. 내가 진짜 제독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표정이라니. 좋아. 네가 여성은 아니지만 그 호기는 마음에 들었다. 아아, 나는 정말 마음이 넓은 사람이야. 그렇고 말고.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겠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운이 좋을 거라고는 생각지 말아라. 다음 번에 나에게 다시 걸린다면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 꿀꺽. 고요한 골목 안에 소년들의 성 마른 목 울림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 전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저 표정은 분명 해군 제독의 표정이야!' 소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해군 제독의 표정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 만무했지만, 지금 이 순간 소년들에겐 남자가 지은 표정이 바로 위엄 있는 해군제독의 표정, 그것이었다. '쳇!' 남자의 표정을 본 짐은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분함을 달랬다. 오늘이야말로 라디 저 자식을 손봐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튀어 나와 방해를 하고 그 사람이 해군제독이라니. 라디 저 자식도 운이 좋은 자식이다. 힐끗. 재촉하듯 남자의 사나운 눈이 소년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소년들은 몸을 떨며 짐에게 애원하듯 시선을 돌렸고, 짐은 다시 한 번 혀를 차고 마지막으로 라디에게 선포했다. "라디 너 이 자식! 어쨌든 앞으로도 두고볼 거야! 계속 그렇게 건방지게 굴었다간 오늘보다 더 무서운 꼴을 당할 줄 알라고!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 얘들아 가자!!!" 우두두두두……. 기다렸다는 듯 짐이 발을 떼기도 전에 소년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좁은 골목을 달려나갔다. 짐은 마지막으로 왠지 넋을 잃고 있는 듯한 라디를 한 번 더 째려봐 주었지만, 라디의 눈엔 그런 짐의 말이나 눈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을 만큼 라디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흠…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허풍만 센 녀석이군. 하지만 재미있는 녀석이야. 나중에 해군으로라도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나. 군기 정도는 확실히 잡아줄 수 있는데." 블랙 버드를 꼭 닮은, 아니, 마치 판을 박아 넣은 듯 똑같이 생긴 남자가 말했다. 진로도 퇴로도 없는 이 어둡고 좁은 골목 안에, 라디와 에녹스 제독, 둘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앗! 조, 조심해 이 녀석들! 날 피해서 가란 말이다! 너희들 옷의 검댕이 묻지 않느냐! 아앗! 조심하래도!" 조금 전엔 나라를 위해 죽겠다면서 호기를 부리더니 소년들이 행여 자신을 헤치기라도 할까 무거운 몸을 틀며 달려나가는 소년들을 피하는 로딘을 포함한 셋이. *************************************** 피곤하네요... 새해 벽두부터.. ^^;;; 읽어주시는 분, 감상 주시는 분, 추천해 주시는 분.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새해엔 모든 일이 잘 풀리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가입은 2004년 4월 10일부터 15일까지입니다. 가입인사 적어주세요!::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94 2389 160 2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18~1권 완결까지 (1) 엔터가 없어 읽기 조금 힘드실 지도 모르겠네요.. ^^;;; 4월 11일 자정까지만 공개됩니다. * * * "괜찮은가 소년? 뭐, 겉보기에는 옷만 찢긴 것 같고 별 상처는 없어 보인다만." 남자가 라디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블랙 버드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목소리로. '하지만 다른 사람이다.' 비록 똑같이 생겼다지만 계속 보고있자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는 뉘앙스라던가, 가끔 짓는 표정이라던가. "이런. 아까부터 내 얼굴을 보느라 도무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군. 소년. 네가 사는 곳에서 나만큼의 미남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노골적인 시선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구나." 하지만 적어도 블랙 버드는 저 사람처럼 느끼한 말을 줄줄 읊어댈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에?" "물론 찢어진 옷을 감싸고 있는 지금의 네 모습이 무척 섹시하긴 하다만, 나는 그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귀여운 가슴이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알겠느냐? 미안하지만, 나에게 비역의 취미는 없단 말이지." "무슨!" 도대체 그 놈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도대체 자신의 눈빛 어디에서 그런 뜻이 보인단 말인가. 그저 같은 얼굴에 놀라서 쳐다본 것뿐인데 그걸 가지고 남색을 상상하다니. 얼굴이 닮으면 저런 것까지 닮는 것일까? "저도 그런 취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해 마세요!!" "호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자네가 계속 리퀘스트를 해오면 어찌 거절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네. 그런 취미는 없지만 이 정도로 귀여운 소년이라면 뭐 한 번 정도는 이 몸이 성은을 베풀어 줄 수도 있거든. 내 쪽이 손해이긴 하지만." "됐네요!!" 정말 저 사람이 그 유명한 해군 제독 에녹스 경이 맞는 것일까. 소문에 듣기로 그는 해적들에 한해서이긴 하지만 용서가 없고, 원칙 주의자이며 항해술과 전략 및 검술 또한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실제로 보는 그의 모습은 뭐랄까. 느끼한 말을 수없이 읊어대며 여자만 찾고 있는 한량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정말…에녹스 제독님이세요?" 참지 못한 라디가 결국 확인사살을 위해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미 뒤늦게 들어온 저 대머리 아저씨의 제복을 통해 확인했고, 소문으로 듣던 외모와도 일치했지만 뭐랄까, 왠지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그렇고 말고. 전하의 앞에서 훈장을 받는 모습이라도 봐야 인정을 하겠다는 거냐 소년. 이 아름다운 외모의 에녹스 님이 아니고 다른 누가 에녹스가 될 수 있다는 거냐?" "윽…." 또 다시 여지없이 나오는 느끼한 말에 라디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심하다. 이건 환상을 깨도 너무 깨고 있다. 도대체 라디가 늘 존경하고 동경했던 푸른 은발의 멋진 제독님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표정은 뭔가 소년. 내 말에 불만이라도 있다는 거냐!" "엑 ?" 라디는 순간 남자가 불쾌한 표정을 하기에 실수했군, 하고 생각하며 매라도 한 대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남자가 한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개구쟁이는 이렇게 해주는 거다. 거 참. 슬럼가의 소년들은 지저분하고 못생긴 녀석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너같이 귀여운 녀석도 있구나. 음. 참으로 부드러운 살결이다. 탄력 또한 여느 소녀에게 뒤지지 않고. 후훗." "놔, 놔줘요! 우앗!" 어이가 없었다. 라디의 버릇없는 말투에 남자가 내린 형벌이란 바로 볼을 꼬집는 것이었다. 처음엔 남자가 한 짓이 이해가 되질 않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지만 손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기에 라디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의 손은 도통 라디의 볼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놔주라고 했!" "뭐 하시는 겁니까 제독. 어린 소년을 데리고 애완견 놀이라도 하시려구요?" "흥.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깨어있었군 로딘. 난 또 겁에 질린 자네 얼굴을 보고 오줌이라도 지리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했어." "무슨! 제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입니까! 그런 애들에게 겁을 먹어서 오, 오주, 아니, 실례를 하다니요!" "그래? 내가 보기엔 그 소년들 앞에서 자네는 한 두 살 먹은 온순한 아기처럼 보였는걸." "제도옥!!" "아아, 시끄러워. 소리 좀 지르지 말게. 자넨 왜 나만 보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지. 나의 섬세한 귀가 상처를 입겠어. 그렇게 목청이 남아돌면 그 블랙 버드를 보았다는 소년이나 좀 찾아보던가." "!!" 로딘이라고 불린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말을 걸자 남자의 손은 라디의 볼에서 아쉬운 듯 떨어졌다. 떨어진 손에 라디가 안심하며 얼얼한 볼을 문지르려 하는데, 에녹스 제독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블랙 버드라고. 그리고, 블랙 버드를 봤다는 소년을 찾는다고. 그건 자신이 아니던가? "너무하십니다! 언제는 데리고 오지 않으려고 그렇게 서둘러 도망치시더니 기왕 따라왔으니 심부름이나 해라 이겁니까! 물론 상관인 제독님의 명령에 제가 불복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정말 너무하시다구요! 제발 여인네들에게 하는 것 반만큼이라도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제가 얼마나," "자네는 여인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반 만이라도요!" "자네가 귀여운 가슴을 달고 온다면 생각해 보지." "제독!!" "블랙 버드라고요?" "넌 조용히 하라 거렁뱅이 소년! 난 지금 제독님과 국정에 관련된 중요한 얘기를 하는 중… …응?" "뭔가 알고있는 것인가 소년." 로딘이라는 남자가 마치 연인에게 사랑을 구걸하듯 그의 상관에게 애정을 호소하고 있을 때, 라디의 조용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고, 그들은 표정을 굳게 굳힌 채 라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하라. 혹시, 네가 블랙 버드를 만났다는 그 소년인가? 응?" "그래 어서 말해라! 이 중요한 시기에 제독님을 도빌항까지 오게 만들다니! 만약 네가 그 소년이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자넨 가만히 있게!!" "헉. 예스, 써!!" 남자의 엄한 목소리에 로딘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빳빳한 자세로 경례를 했다. 그 지엄한 목소리라니. 라디는 비로소 남자가 평소 자신이 동경하던 해군 제독 에녹스 경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라디의 목숨은 별개의 것이었다. 아마도 저 로딘이라는 자가 한 말로 보아서 이들이 블랙 버드를 보았다는 소년 라디 자신이지만 을 발견하게 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돈을 벌 수 있는 중요한 시기에 몸이 상하는 것만은 아무리 에녹스 님이라 해도 사절이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거짓말! 방금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블랙 버드라고!" "…로딘." "예. 제독. 찍소리도 안 하고 있겠습니다." 로딘이란 남자는 잘 흥분하고 또 금새 가라앉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에녹스 제독은 뭐랄까. 잘 웃지만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말해봐라 소년. 알고 있는가?" 남자가 한발자국 더 다가와 라디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윽한 목소리. 느끼함이 담기지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가 그리도 좋아하는 소녀들 앞에서는 꽤나 큰 효력을 볼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라디 또한 그 효과가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마음 속으로 동경해오던 사람이었다. 소매치기를 하다가 들켜 몰매를 맞는 날이면 멋지게 해적을 소탕한 미남 제독의 얘기를 생각하며 아픔을 참았고, 마사 아주머니의 기침이 심해 숨이라도 넘어갈 듯 한 날이면 해적과 멋지게 싸운 제독님을 생각하며 무서움을 이겨냈다. 그런 동경의 대상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어린 소년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작용했던, 그런 사람이. …하지만. "어서 말해보래도. 말한다고 해서 너를 해코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나를 믿겠지 소년? 나는 이 나라의 제독이다. 너처럼 어린 소년에게 거짓말을 하는 불한당 같은 짓은 하지 않으니까." 왜 하필이면 그 재수 없는 놈을 닮았단 말인가! 아니, 닮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왜 그 놈과 이리도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 "…모릅니다." "몰라?" 맑은 바다 빛을 담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각도를 달리하며 라디의 눈을 응시한다. 두근, 순간 심장이 울렁이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마도 놀라서 그런 것일 게다. 실제로 보게된 동경하는 대상이니까. 절대로 이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예. 그냥 얘기하시는 도중에 블랙 버드 얘기가 나와서 아는 척 했을 뿐입니다. 그, 유명한 해적이잖아요? 요새 출몰하는 해적 중에서 가장 세다는." "그래봤자 해적 나부랭이일 뿐이다." 차가운 목소리. 과연 나라를 지키는 해군이라 그런지 해적들에겐 용서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 해군들을 통솔하는 제독이니 당연히 해적들이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해적들 중 가장 활동이 왕성하고 매번 해군들의 포위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블랙 버드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 곱게 보이기는커녕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일 정도의 사이겠지. "그렇지요. 그저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해적놈일 뿐이지요." "흠?" 라디 또한 블랙 버드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는지라 거친 말이 자연스레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에녹스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자신은 단지 해적을 욕했을 뿐인데. "뭐야? 정말 모른다는 게냐? 그럼 됐고! 에잉, 이 녀석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 제독. 어서 술집 같은 데 가서 그 소년이나 조사해 보지요. 더 이상 지체하시면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는 성에 당도하셔야 한다고요." "아니, 됐다. 이대로 성으로 돌아간다." "예!?" "?" 에녹스는 라디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로딘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했다. 돌아가자니. 휴가가 몇 시간 남지 않았으므로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자고 할 때도 블랙 버드에 대해 알고 있는 소년을 만나야 한다며 한사코 슬럼가로 걸음을 옮기던 사람이 바로 지금 눈앞의 상관이거늘, 왜 또 금새 마음이 변했단 말인가?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이 불어서?? 그것은 라디 또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조금 전에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블랙 버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소년을 만나야 한다고 하던 에녹스가 갑자기 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을 보며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뭘까. 뭔가 눈치챈 것일까 저 사람? 자신이 블랙 버드를 만난 그 소년이라는 것을?? "무슨 말입니까 에녹스님? 그 슬럼가의 소년을 만나야 한다면서요?" "…됐다. 생각이 바뀌었어. 어차피 블랙 버드란 놈은 제왕의 보물을 찾다보면 만날 수밖에 없는 걸림돌.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보물을 찾을 궁리를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돌아가지 로딘. 말을 어디에 묶어뒀다고?" "예? 그야 이 골목 바로 돌면 나오는 여관입니다만…에녹스님? 에녹스님??" 로딘은 알 수 없는 상관의 돌발행동에 당황해 하며 그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가려 짦은 다리를 부산히 놀렸다. 그러다가 얼만큼 걸었을까. 소년이 멍하니 서 있던 골목을 빠져 나와 여관으로 가기 십여 걸음 전, 갑자기 멈춰선 상관의 등에 코를 박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 어이쿠! 죄송합니다 에녹스님. 그러게 왜 갑자기 멈춰선 ." "저 소년에게 사람을 붙여둬라 로딘." "예?" 나지막하게. 바로 뒤에 있는 로딘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하는 에녹스의 목소리는 다른 어떤 때보다 심각하고 진지했다. 그 목소리에서 해적들을 소탕할 때와 같은 카리스마를 느낀 로딘은 어느새 부동 자세를 취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예스, 써! …하지만 왜?" "아무래도, 이렇게 그냥 지나칠 소년은 아닌 것 같다 저 아이. 굳이 블랙 버드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아니. 블랙 버드에 대해 말할 때 묘하게 내 눈을 피하는 것이 수상쩍기도 하고. 아무튼 이대로 지나치면 뭔가 후환을 남길 것만 같다. 그러니 조용하고 믿을 만한 놈으로 붙이도록 해. 저 소년이 누구랑 만나는지, 어디를 주로 가는지 낱낱이 보고하도록." "아…예!" 과연 이상하게 그냥 돌아간다 싶었더니 역시 저 소년이 마음에 남았던 것인가. 로딘은 가볍게만 보이는 자신의 상관의 영민함에 감복하며 제발 이런 모습 평소에도 보여줬으면, 하고 다시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푸념을 마음 속으로 했다. 하지만 이런 상관을 만난 것도 자신의 팔자려니 하고 이내 언제나 처럼 체념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간…건가?" 짐의 패거리들도 도망가고, 믿기지는 않지만 동경의 대상이었던 에녹스 제독의 일행 또한 떠나간 좁은 골목 안에는, 옷이 찢겨진 채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라디만이 남겨져 있었다. "제대로…속여넘긴 건가?" 에녹스는 블랙 버드의 얘기가 나오자마자 눈빛이 바뀌었지만 보지 못했다는 라디의 말을 듣고 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돌아간 것을 보니 먹히긴 먹힌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만약 그 소년을 안다면 당장 군으로 끌고 가 고문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는데 무사히 넘긴 듯 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도망치자!!" 그렇다. 비록 동경의 대상이었다고는 하나 자신과 걸리는 일이 있으니 도망치고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지금은 마음을 바꿨다지만 언제 다시 돌아와 자신을 붙들고 블랙 버드를 알고 있는 소년에 대해 캐물을지 모를 일이다. 하역 일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집에 가서 놀란 마음을 좀 진정시켜야겠다. 또 옆집 코니를 보고 원기충전도 좀 해야겠고. 다다다다. 라디는 십 년 간의 소매치기 생활로 익히 알고 있는 개구멍과 지름길로 달아나며 행여 뒤에서 누가 따라오지는 않나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왠지, 에녹스 제독이란 자는 녹록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에녹스 제독님이 그런 사람이라니…." 들려오는 얘기만 듣고 분명 신사에다가 실력도 뛰어난 진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건 뭔가. 여자만 밝히는 한량에다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황제병에 걸린 남자가 아닌가. 뭐 물론 그에 걸맞는 실력이 따라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저래서야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라디의 가슴이 상처를 너무 많이 받는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면서도 자꾸만 밀려오는 확신에 라디는 달리면서도 붕붕 고개를 저으며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게다가, 블랙 버드와는 왜 이리 똑같이 생긴 거냐고!!"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얼굴에 있는 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생길 수 있는 것인지. 처음엔 후드 때문에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일 거라고 생각한 라디도 보면 볼수록 블랙 버드와 에녹스 제독의 외모의 동일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마치, 마치. "에이 설마, 어떻게 그런 대해적과 해군 제독님이 그럴 수 있겠어? 그.건. 말도 안 돼!" 혹여 그들이 모종의 상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추측도 해보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무엇보다 에녹스 제독은 블랙 버드를 아주 증오하는 듯 했다. 그러니 그들이 라디가 생각하는 가족이라던가, 하는 그런 관계가 될 가능성은 아주 적다는 것이다. 거의 희박하다고 해야겠지. " 정말이야, 코니?" 집 근처까지 수많은 개구멍과 비밀 지름길을 건너 무사히 도착한 라디는 작게 들려오는 얘기소리에 달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동네 계집아이들의 대화라면 무사하고 지나쳐도 될 것이지만 얘기 도중에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니라고? "그렇대도? 후후. 난 너희들이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높으신 분과 멋진 경험을 하고 왔단 말야. 아아. 그 분은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어." "꺄아 엉큼한 계집애!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데? 대체 누군데 그렇게 높은 지위에 아름답기까지 했다는 거야? 말 좀 해봐 코니. 응?" "후후…들으면 기절할 걸? 그분이 누구냐 하면 말이지…바로 해군 제독 에녹스 님이시지!" "뭐! 정말?" "정말, 정말이니 코니, 너?" "그렇대도? 못 믿겠으면 이 반지를 봐! 에녹스님이 정표로 주신 거니까!" "맙소사! 이거 진짜잖아?" "이 고급스러운 문장을 봐! 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 에메랄드는 진짜로 보이는 걸?" "진짜래도?!" "뭐야. 그래서 너, 그 분과 정혼이라도 한다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당연하지 바보! 그 분이 우리 같은 천한 신분의 아이들과 정혼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코니 너는, 어차피 유희거리밖에 안 된다고.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흥! 유희거리면 어때? 너희는 그 유희거리도 안 되잖아? 나는 그래도 이 외모 덕분에 그 분에게 하룻밤이라도 사랑을 받은 몸이라고? 너희들은 그 주근깨와 뚱뚱한 몸 때문에 평생 그럴 일은 없을걸? 괜히 샘나니까 못된 소리들이니." "뭐야? 흥.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긴 하지만 열 받는걸?"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마을에서는 코니가 제일 미인이니." "까르르. 그것 봐.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그래 좋겠다." 털썩.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의 첫 경험 얘기를 하는 계집아이와 그 경험을 부러운 듯 띄워주며 축하해주는 계집아이. 라디는 저 아이들 대신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첫 경험. 코니가 첫 경험을 한 것도 모자라 그 상대가 바로 저, 에녹스 리엔 팰러딘 경이라고? 기실 코니는 갑자기 슬럼가로 향한 에녹스 때문에 첫 경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또래 계집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외모와 지위라면 결혼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것만으로도 다른 여인들에게 부러움을 살 테니까. 하지만 어린 라디가 그런 여인의 심정을 알리 만무했다. 그래서 지금 이리 코니가 있는 골목 밖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심정일 듯 하다. 라디의 첫사랑인 코니가, 바로 조금 전 만난 그 가벼운 남자에게. 그것도 하룻밤 즐거움의 대상으로!! "크흑…!" 달려오면서도 라디는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기를 바랬다. 그래도 제독인데. 그래도 자신이 어릴 때부터 동경해오던 대단한 사람인데. 저건 아니지 싶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겠거니 하면서 나름대로 정당성을 만들며 마음 속으로 다시 미화를 시키고 있었는데 이렇게 찬물을 끼얹다니. 참. 믿을 것 하나 없는 세상이라더니. 어린 라디는 세상사 덧없음을 깨달으며 슬프게 울고 있는 중이었다. "제길…이제 여자 따위 믿지 않아 !!!" 자신의 앞에서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세상에서 제일 조신하고 새침한 여자인 척 하더니 뒤로 저렇게 호박씨를 깐 코니. 배신감이 들어도 이렇게 많이 들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 코니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영웅인양 온갖 폼을 잡으며 위선을 떨더니 그 속내를 알고 나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저 아름다운 외모의 해군 제독 또한 라디의 숙청 대상이었다. "제길…이 놈이나…저 여자나…다 똑같아! 똑같다고 !!!" 어린 라디. 이 날 처음으로 남자의 위선과 여자의 내숭을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파크가 얼룩진 라디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라디는 울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기만 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짐 패거리들과 라디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은 파크는 옷이 찢긴 데다 울기까지 하는 라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며 납득한 듯 했지만, 첫사랑이 무참히 깨진 데다 자신의 동경의 대상에게 배신까지 당한 라디는 파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생각 못한채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에녹스의 명령으로 자신의 집 지붕 위에 누군가가 잠복해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제4장 금은요동 색출 "…기분은 어떤가." "……." "대답을 안 할 셈인가? 어차피 큰 상관은 없지만." "…좋지는 않습니다." "호오. 만 하루만에 꺼낸 말이 그거군. 좋지는 않습니다, 라.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당신의 기분이 풀릴까? 응?" "……." "위대하신, 성안(聖眼)이시여." "비꼬시는 겁니까?"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너희 일족의, 아니 너희 가문의 능력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최고 수도사가 인정해서 보호를 자처한 능력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대대로 수도원에서 보호받아온 능력을, 내가 믿지 못할 리 없잖아?" 충분히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성안이라 불린 남자는 마음 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괜히 입을 놀리는 것은 그다지 이득이 되는 행동이 아닌 것 같으니까. 성안(聖眼). 성스러운 눈. 말 그대로 창조 신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성스러운 눈을 가진 일족 중에서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사람인 테이어드는 그렇게 생각해서 굳게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하지? 내 말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뒤틀림으로 가득한 머리는 무슨 말을 해도 뒤틀려 들어갈 뿐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곱게 들리시겠는지요." "이거야." 선천적인 것과 더불어 대대로 눈이 보이지 않는 성안 일족인지라 테이어드 역시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가 자신의 말에 웃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우습다는 것일까. 자신의 말이. "!" "나는 분명 제왕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성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사상가 양반이시구만? 그런 고매한 논리를 나에게 가르쳐서 어쩌려구? 이런 천박한 해적놈에게 말이야." 기척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손에 고개가 쳐 들린 상태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약간의 럼주 향이 섞인 숨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위험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던 불온한 기운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더욱 더 테이어드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더군다나 알콜이 들어간 지금 상태에서는 자극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본능이 충고하고 있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취하신 듯 하군요. 선실로 돌아가 주무시면?" "하."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충고했지만 남자에겐 고깝게 들린 듯 하다. 피곤하다. 일주일 전 자신을 수도원에서 납치해 온 이래 제대로 재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실신하는 꼴을 보고싶지 않다면 오늘이라도 편히 재워줬으면 하는 바램이거늘. "그렇겐 안되지. 이제는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밤마다 내가 이 방에서 자는 것이 특별하지도 않을 텐데 이젠?" 하아. 테이어드는 이 거대한 배에 끌려온 후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쉬며 오늘밤도 잠들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일주일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열 살 때부터 맡겨져 자라온 보르부 수도원에서 이 남자, 블랙 버드에게 납치를 당했다. 처음 이 남자를 봤을 때 테이어드의 심정은 그야말로 경악이었다. 아니, 볼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분명 에녹스 제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마차로 오는 내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에녹스 제독이라 부르기에 다른 때와 느낌은 달라도 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믿고 그를 따라왔다. 결국 남자는 테이어드를 바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끌고 오더니 어느 배로 데려와 선실로 안내한 뒤에야 말했다. 자신은 블랙 버드라고. 그 악명 높은 대 해적, 블랙 버드가 자신이라고. 처음엔 에녹스 제독이 부패한 궁에 염증을 느껴 해적으로 변심이라도 한 것인가 했었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저 남자는 자신은 에녹스 제독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놈. 따위와 비교하지 말라고. 불쾌하다며. 말만 듣기엔 전혀 연관 없는 사람인 듯 했지만 사람들이 에녹스 제독이라 착각할 정도라면 그 생김새가 닮았다는 것 정도로는 통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마도, 똑.같.다.라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 수도원의 빠릿한 늙은 수도사들을 속이고 자신을 빼낼 수 있었을 텐데. 그래, 적어도 '쌍생아' 정도로 닮은 얼굴이라면 모를까. "이리로 와라 성안(聖眼)이여." 창가에 서 있던 테이어드는 손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두 눈에 또렷이 보이는 듯 했다. 왜일까. 자신에게는 분명 시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저 남자의 행동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강한 남자라서 일까. 지금의 테이어드는 남자의 실루엣마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것은, 단순히 남자의 존재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은, 남자의 윤곽을 싫어도 외울 수 있을 만큼 많이 접하고, 또 느꼈으니까. 뚜벅…. 나무로 된 선실 마룻바닥에 자신의 발소리가 건조하게 울린다. 오늘은 바람이 습기를 머금고 있지 않아 내일은 날씨가 쾌청할 듯 하다, 라고 저 남자가 조금 전 말했었다. 남자의 말대로 얼굴에 느껴지는 바람은 건조했다. 마치 지금 테이어드의 마음처럼. 남자가 앉아있는 침대로 향하는 아무런 감정 없는 딱딱한 자신의 몸처럼 말이다. "좋아. 착한 아이다. 쿡쿡. 아르센 제국에서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성스러운 눈은, 그 명성만큼 성스러운 육체를 가진 것 같진 않군. 쿡쿡쿡쿡!!!" 누구 때문인가! 말을 안 들었다면 사흘 전처럼 고통스러운 짓을 할 게 뻔한데 그럼 자기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가. 얌전하면 얌전하다고 어떻다, 반항하면 반항한다고 건방지다, 저 남자,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제 보니 정말 제멋대로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말을 했다간 또 뺨을 맞거나 아니면 듣기 싫다고 재갈을 물릴 것이다. 숨이라도 온전히 쉬고 싶다면, 남자의 웃음을 그냥 조용히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참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처럼. 사락. 남자의 강요로 인해 옷 대신 입고 있던 침대 시트가 남자의 억센 손에 너무도 쉽게 흘러 내려간다. 처음 수도원에서부터 입고 온 로브가 납치되어 온 첫 날 무참히 찢긴 후, 테이어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입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남자의 한 마디 때문에. 그리고 제대로 된 수면 역시 취해 본 적이 없었다. "…누워라. 내 아래로. …그리고 마음껏 울부짖어라." …저 남자의 몸 아래에 깔려 한참을 울고 난 뒤에 얻는 약간의 휴식을 제외하고. " !!!" "……." " ! 흑!" 남자는 최후의 자존심으로 신음 소리만은 내지 않으려 하는 테이어드의 몸을 무자비하게 찢어 열며 자신의 욕구만을 해소하기에 바빴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경험으로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너무도 거친 남자의 몸짓에 테이어드의 몸 중 가장 여린 곳은 전혀 익숙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늘도 그 여린 속살을 흉포한 침입자에게 내주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처음 납치되어 온 날, 남자는 테이어드의 외모를 보고 '동방인들과 비슷하게 생겼군' 하며 조금은 기쁜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남자의 옆에 있던 부하인 듯한 남자가 '또 입니까' 라는 말을 했고 남자는 목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남자와 동방의 일족과 일련의 관계가 있는 듯 했다. 테이어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동방인은 아니고 예전에 할머님의 할머님께서 동방인과 결혼을 하신 적은 있습니다만…?'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했고 남자는 대답 없이 그런 테이어드를 비어 있던 선실 중 하나로 끌고 들어왔다. 거칠게 끌려오는 도중에 남자의 부하가 '오늘밤은 저 선실 근처에 가지 마라. 요상한 소리 들으면서 잠 설치기 싫으면 말이야.' 라고 한 것 같았지만 테이어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실에 들어온 지 1분도 되지 않아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벗어." "뭐요?" "벗으라고. 벗기 싫으면 벗겨줄까? 부드럽게 벗겨줄 자신은 없지만." "무슨, !" 짜아악. 짝짝! 남자는 테이어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로브의 옷깃을 사정없이 찢어냈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수도원의 로브는 남자의 거친 해상생활로 단련된 손에 무력하게 조각났고,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테이어드의 하얀 속살은 흔들리는 유리병 안의 촛불 빛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흠. 혼혈이라서인가. 그 녀석보단 피부가 하얗군. 뭐 상관없어. 그래도 비슷하니까. 안는 느낌도 비슷하겠지." "무, 무슨. 도대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할거냐고? 이거 이거, 수도원에서 고이 길러진 세인트·아이는 설마 어른들의 밤놀이도 모른다는 건가? 이거야, 내가 꼭 악당 같잖아?" 악당 아니면 뭐란 말인가! 물론 수도원에서 길러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말하는 어른들의 놀이를 모르는 테이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자신은 둘 다 남성이 아니던가. 둘 사이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 정상이 아닐 텐데. 아닐, 벌어져서는 안 될 텐데. 설마 이 남자, 수도원에서 절대 금기로 삼았던 그 짓을 지금 자신에게 하려는 것일까. "이,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신이 정하신 남성. 그리도 당신 또한 엄연한 남성입니다. 우리들사이에 우정과 충의를 다지는 접촉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으로 이해한 테이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땅에 떨어진 로브 자락을 쥐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보다 먼저 닿아있는 손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블랙 버드라는 남자의 손이었다. "아, 먼저 주워 주시려고 한 겁니까? 감사히 받겠…." "침묵과 인내를 덕으로 여기는 수도사께서 말이 너무 많군. 아무래도 오늘밤은 이게 필요하겠어." "뭐! !!??" 찢을 때는 언제고 먼저 주워주려는 것인가 하고 허한 웃음을 지으려던 테이어드는 갑작스레 입을 덮쳐온 로브 자락에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크게 뜨며 경악했다. 믿을 수 없을 만치 빠른 속도로 묶여진 로브, 아니, 재갈에 놀라 손을 뻗자 그 손에 억센 손이 겹쳐졌다. 그리고, 손 또한 부드러운 로브 자락에 입과 같이 묶여졌다. 그리고, 침대 기둥에 고정되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자각할 틈도 없이 바지가 벗겨지고, 속옷이 벗겨진 뒤 다리가 벌려졌다. 그리고, 눈앞에 하얀 섬광이 보일 만큼 급작스레 찾아온 지독한 격통. " !! !" 끊임없이 운 것밖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드문 드문 기절하는 사이에 들리던 남자의 '달라…달라….'라는 분한 듯한 읊조림. 그것이 과연 자신보다 피부가 검다고 한 그.녀.석.이라는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고 테이어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지금 이런 일을 겪고 있다면 왠지 조금 그 녀석이 싫어질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흐윽 !! 흑!!" "왜, 벌써 힘이 빠졌나? 좀 더 반항해 봐. 좀 더 소리를 질러보란 말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남자는 매일 낮이면 상선들을 나포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밤이면 어드가 묵고 있는 선실로 찾아와 의례를 하듯 보물의 행방을 묻고 다음 단계로 당연히 자신을 탐하며 다른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에 품에 안으려다 자신을 납치하느라 안지 못한 도둑 소년이라는 것을 테이어드가 알리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그의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입장인지라 비교의 대상에게 분노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녀석인지…제발 하루라도 빨리 이 악마의 손에 떨어지길! 그래서 제발 나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기를!!' 처음 이틀간 미약한 반항이나마 해보았지만 남자는 그럴 때면 으레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며 테이어드의 약한 육체를 무력 상태로 만들었다.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하여 테이어드는 이틀 째부터 반항을 포기했지만 남자는 또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나 그 누군가와 비교를 하며 더 반항하라고, 더 소리를 지르라고 테이어드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테이어드에겐 더 이상 소리를 지를 힘도, 의지도 남아있질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수도원으로 가라하면 가고, 수련을 하라 하면 말 없이 수련을 하던 자기 주장이라는 것과는 상관없는 의지 박약아였으니까. 그래도 눈물이 나는 것은 아마도 육체의 고통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날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남자에게 무참하게 섹스, 라는 미명하에 당하는 폭력이 아니면 어떤 이유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새로 보수를 한 듯 선실을 건조하는 데 쓰인 참나무의 냄새가 흔들리는 테이어드의 육체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리고 테이어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또한, 테이어드의 볼로 따갑게 스며들었다. …이렇게 후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흑! 윽!!!" 자신의 몸 아래에서 그 녀석과 비슷한 녀석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 녀석과는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부가 백인과는 달리 아주 조금 노란빛을 띠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녀석과 닮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저 노란 피부를 가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흥분하고 흉포해지고 있었다. 뭣 때문에. 도대체 뭣 때문에. "!!!!" 작게 경련하던 몸이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오늘밤도 실신을 했다. 나약한 녀석. 하룻밤에 두 번의 사정조차 견디지 못하는 재미없는 장난감 같으니. 주르륵. 늘어진 몸과 함께 흥미를 잃어 역시나 늘어진 자신의 것을 빼내는데 안에서 자신의 것과 함께 저 성스러운 눈알이라는 녀석의 피가 섞여 묻어 나온다. 기분이 나쁘다. 실컷 즐기지도 못했는데 뒤처리를 해줄 기분이 들지 않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선실을 나와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치익. 블랙 버드는 부싯돌을 마찰시켜 촛불을 켠 뒤 책상 위에 놓여진 항해도로 잠시 시선을 돌리곤 이내 눈을 감고 침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밤은 저 눈 먼 녀석이 버텨주지 못해 제대로 풀지도 못했으니 또 그 녀석이 꿈에 나와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이거 놔! 다, 당신! 말로만 듣던 변태인가!' 눈을 감으면 그 죽을 듯이 달콤했던 밀 빛 피부가 생각난다. 눈을 뜨면,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며 자신을 고양시키던 그 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귀를 막으면, 극상의 것을 맛보기 전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눈앞에서 놓쳐버린 동방의 진미(眞味)가 생각나 몸 한가운데가 열을 품으며 즈끈, 하고 울려온다. "이거야…다음에 상륙하면 가장 먼저 동방인들만 모아놓은 남창촌에 가야겠군." 한 번 맛을 알게 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런 것이다. 금기의 맛이라는 것은. 극상의 진미라는 것은. 비록 녀석을 제대로 맛보진 못했지만 자신의 손가락만으로 느껴본 녀석의 비밀스러운 곳은 너무도 좁고, 또한 너무도 달콤하여 손가락을 물어버리듯 놔주질 않았었다. 그곳에 자신의 것을 묻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 부드러운 살을 두 손에 잔뜩 움켜쥐고, 그 둔덕에 자신의 것을 비벼본다면. 그랬는데 저 스네이크 때문에 다 망쳤다. 그동안 최고급이었다고는 하지만 바쁜 해상생활 때문에 남창들만을 상대해 오다가 드디어 숨어 있는 동방의 보석을 맛본다고 생각한 순간 저 놈의 부선장 녀석이 훼방을 놓다니. 비록 성안(聖眼)을 찾으러 가는 중대한 임무였는지라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은 조금 더, 적어도 그 진미를 한 번이라도 맛 볼 정도의 시간만 늦게 가도 되지 않았나 하는 심정 때문에 스네이크가 몹시도 좋지 않게 보이는 블랙 버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놓쳐버린 일이다. 그리고 놓쳤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모종의 이유를 들어 그 녀석을 살려둔 채였다. 그러니 인연이 있으면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때는, 침대에서 일어날 틈도 없이 끊임없이 안고 또 안을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묘한 갈증이 풀어질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천하의 블랙 버드가 도둑 소년 하나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 꼬마 녀석, 이름이 라디라고 했던가. 눈빛에선 아직 색기가 부족하나 몸이 먼저 남자를 홀리니, 다른 놈들이 알아채고 그 맛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을런지." 자신이 버리고 온, 아직도 다리 사이에서 붉은 선혈을 흘리고 있는 가녀린 신체의 누군가는 이미 관심에서 던져버린 채, 그렇게 블랙 버드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술로 지새우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갈증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려는 듯. * * * "라디!!" "…?" "라디!!" "? 마사 아주머니?" 라디는 들고 있던 후추나무 통을 내려놓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역 일을 맡고 있는 '제레미'호의 아래에서 애타게 두 손을 모아 자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분명, 늘 집에서 누워있기만 해도 체력에 부쳐했던 마사 아주머니가 틀림없었다. "아니, 어찌된 일이세요 여기까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라디는 잰걸음으로 배를 내려와 마사 아주머니에게 달려갔다. 혹시라도 아주머니 몸이 나아져 자신의 일하는 모습을 보러 오시기라도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높은 배에서 내려와 마사 아주머니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라디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마사 아주머니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실신할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상태가 안 좋으면 안 좋았지 몸이 나아진 것은 전혀 아닌 듯 싶었다.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대체? 안색이 무척 안 좋아요. 급하게 알리실 일이 있으시면 파크를 보내시지 않구," "파크가! 라디! 파크가!!" "파크가 왜요?" 쿨럭 쿨럭!! 마사 아주머니는 밭은기침을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라디는 답답했지만 기침을 하는 아주머니를 보챘다간 증상이 더 심해질 뿐이니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콜록, 라디, 파크, 파크가 잡혀갔다. 콜록!!" "예?" "갑자기 마을에 군복을 입은 무리들이 들이닥치더니, 콜록! 좌우 눈동자 색이 다른 아이들을, 콜록, 잡아갔어! 어떡하면 좋으니?"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좌우 눈동자 색이 다른 애들이라니? 그런 애들을 뭐 하러 잡아갔단 말인가? 막말로 그것이 마녀의 표식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대체 갑자기 왜요?" "나도 모르겠구나. 콜록, 나라에서 중요한 일을 위해 금은요동이 필요하다고, 콜록, 그렇게만." "금은요동? 중요한 일?" 금은요동이라니 갑자기 무슨, 이라고 말하려던 라디는 아차했다. 그러고 보니 라디는 파크와 늘 같이 있는지라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파크는 두 눈동자의 색이 각각 다른 금은요동이었다. 한쪽은 푸른색 다른 한쪽은 녹색인. 그러니 파크도 금은요동을 찾는 군인들에게 아주머니 앞에서 강제로 잡혀갔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좋으니? 파크가 만약 큰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렇게 되면!!" "아주머니!!" 몸도 안 좋은 상태에서 라디가 일하는 항구까지 달려온 마사 아주머니가 결국 실신을 했다. 라디는 간발의 차로 아주머니가 땅에 곤두박질 치기 전에 달려가 아주머니의 몸을 받았다. 하지만 안심한 것도 잠시. 마사 아주머니의 입가에는 드문 드문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마도 아까 기침을 할 때에 담과 함께 내장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아주머니의 병세가…!' 전부터 가끔 기침을 할 때 피가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그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아마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체의 경고음일 것이다. 붕붕. 라디는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지금은 우선 파크의 안위가 먼저였다. "어디. 어디로 끌려갔죠?" "항구 저 끝에 있는 가장 큰배라고 들었다. 콜록, 성에서 오신 높은 분이 금은요동의 소년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더구나." "높은 분이요?" "그래. 뭐라더라…제독이라던가. 그래. 에녹스 제독님인가 하는 분이시라더구나." "!" 에녹스 제독. 라디는 좋지 않은 기억이 스멀스멀 머리를 치고 올라오는 기분에 짙고 검은 눈썹을 찌푸렸다. 첫사랑이 코니. 그리고 짐 패거리. "그 녀석이…." "라디?" "아주머니. 우선 집에 가 계세요. 저는 파크가 있는 곳에 가볼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꼭 파크랑 같이 갈 테니까요. 집에 가서 기다리시면 오늘 번 돈으로 맛있는 고기랑 약을 사갈게요. 아시겠죠?" "라디야…." "어서요." 라디는 아주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은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마사 아주머니가 억지로 만든 것과 자연스레 나오는 웃음을 못 알아보실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씁쓸하고 미안해 보이는 것이었다. "미안하구나…. 그들에게서 너를 맡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식으로 내게 짐을 지우려 한 것이 아닌데…." "에이 아줌마." "그 뒤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생계는 네가 맡아 하고, 파크는 집안 일을 하고…미안하다 라디…이렇게 고생을 시켜서 미안해…." "참 진짜. 아줌마도." 라디는 거친 뱃일을 하느라 여기저기 검댕과 나무가시가 묻고 햇빛에 그을린 자신의 몸을 안쓰럽게 보는 마사 아주머니 때문에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쑥스럽다는 표시로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려 콧등을 긁자니, 아주머니는 그 표정에 더욱 마음이 아파왔는지 이제는 눈물마저 그렁거리실 듯 했다. "참, 파크, 파크를 데리러 가야지요. 아셨죠 아주머니. 집에 가서 얌전히 침대에 누워 계시는 거예요?" "…그래…." 탓. 라디는 마사 아주머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항구의 끝 쪽으로 향했다. 항구의 끝 쪽이라면 아마 대형 선박들을 세워놓는 곳을 말할 것이다. 게다가 에녹스 제독이라는 그 녀석 정도면 작은 배 따위를 몰고 올 리 만무하니까. "……." 라디가 떠나간 자리. 마사는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달려가는 라디의 뒷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언제 저만큼 큰 것인지. 분명 자신이 맡았을 때는 한 두어 마디의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애였는데 저 아이는 자신이 돌봐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제 앞가림을 했다. 거기에 몸이 불편한 자신과 아들인 파크를 돌보기까지. '…이 아이는 우리의 보물입니다. 지켜주세요. 부디.' "……." 저 아이를 자신들의 보물이라 말하던 라디의 부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커다란 부상을 입고 항구에 서 있던 마사의 눈에 띈 그들.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품안에서 고이 지키고 있던 아이를 마사에게 넘기며 그들이 했던 말. 보물.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보물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보물을 자신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저 아이의 부모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몸이 이 모양이니. 지금의 마사 자신은 아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른 몸.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고된 일을 해온지라 제법 단단하게 단련되어온 몸. 저 몸에 의지해 삶을 연명해온 것이 벌써 몇 년째일까. 마사는 오랜만에 밝은 햇빛 아래에 서 본 라디의 몸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이 자라있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밝게 웃던 집안에서의 모습과 달리 훨씬 야위어 있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내려다 본 자신의 팔목 또한. 마사는 라디의 모습에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지자 아쉬운 눈빛을 떼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든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자신이 부탁한 것 때문에 저 아이는 위험한 일을 마다 않고 파크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또 염치없이 저 아이에게 감사를 하며 다음날이면 또 다시 힘든 일터로 내몰고 말겠지. 그래선 안 되는데. 더 이상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돌아오면. 이번에 저 아이가 돌아오면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저 아이를 힘들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저 아이들을 위해 남은 목숨을 불태우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저 여린 아이의 몸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짓은 하지 말자, 라고. 마사는 다짐했다. 오랜만에 스스로의 힘으로 박차고 나온 침대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게 된 라디의 몸을 보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이의 몸에서 슬프도록 애처롭게 보이는 상처 자욱들을 보며. 더 이상은 저 아이를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그리고 돌아오면 저 아이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부모에 대한 것들도 이야기해줘야겠다고. 그동안은 자신을 부모라 생각하라며 억지로라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들에 대한 것들을 샅샅이 이야기해줘야겠다고 또한 다짐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을까. 그것이 마사가 라디를 볼 수 있는, 라디에게 부모에 대한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마사가 그리도 애처롭게 바라보며 돌아오면 잘해주리라 다짐했던 소년이 바로 그 뒤에 크고도 큰, 힘들고도 힘든 고난과 역경 속에 휘말리게 될 줄을.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가입은 2004년 4월 10일부터 15일까지입니다. 가입인사 적어주세요!::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94 2389 160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18~1권 완결까지 (2) * * * "파크! 파크! 어디 있니 파크! 라디야! 대답 좀 해봐! 파크!!" 도빌 항에서도 가장 큰 선박들만 모여있는 가장 안쪽 선착장은 갑작스레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 때문에 전쟁터를 방불케할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 색출된 금은요동 아이의 부모들까지 와 있는 듯 어림잡아도 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배 앞에서 해군들과 대면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어떤 이는 주먹다짐까지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파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밖에 있는 이들은 모두 금은요동 소년 소녀들의 관련자인 듯 했다. 모두들 절박한 표정을 하며 해군들에게 매달린 채 내 자식을 왜 데려가냐며, 부탁이니 돌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라디는 큰 소리로 다시 파크를 불러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데서 소리를 지르는 데야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하나. 배 안으로 몰래 잠입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을 때. "모두들 조용!! 에녹스 제독님께서 나오신다!!" 갑자기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남자가 제독이라는 지위를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입증하듯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크게 떠져있고 개중엔 얼굴을 붉힌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긴, 나도 처음엔 넋을 잃고 쳐다보긴 했었지.' 정적을 뚫고 뱃머리로 나와 관중들 앞에 선 남자는, 과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답고 멋졌다. 그러면서도 또한 위엄을 잃지 않는 것이 우스갯소리로 해적들이 태풍보다도 더 무서워한다는 제독이라는 말이 단순히 거품만은 아닌 듯 했다. 허나. '쳇. 저 모습이 다 만들어진 가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라디는 이미 이웃집의 코니 사건이라던가 모종의 사건으로 눈앞의 온갖 폼을 잡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가 상종 못할 바람둥이에다가 고치지 못할 황자병 환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아무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중을 둘러보아도 라디에게는 폼잡기 위한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비꼬는 표정밖에 얼굴에 떠오르지 않았다. '응?'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마 하나같이 놀라거나 얼굴을 붉히고 존경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겠지. 라디는 한쪽 눈썹이 올라간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불만을 잃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 되어 아예 팔짱까지 끼고 눈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아예 입까지 둥글게 말며 호오 하는 소리를 내고 그런 라디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기억하는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듯 남자는 정면을 보며 라디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선이 고운 외모에서 나온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렁차고 멋진 목소리로 배 앞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성들에게 고한다!! 우리가 금은요동을 색출한 것은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위해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어떤 사실만 알아보면 너희들의 자식은 너희들의 품으로 고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넉넉잡아 이틀만 기다리면 색출 작업이 끝날 것이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에 몰두하라. 작업이 끝나는 즉시 너희들이 아이를 너희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나 알려 주십시오! 우리 아이를 왜 잡아간 겁니까!?"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이것은 현재 온 해상뿐 아니라 육지에서까지 약탈과 살인을 일삼고 있는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너희에게 나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니 집으로 돌아들 가라." "그, 그럼. 내 아들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그래! 절대로 데려온 아이들을 해하지는 않는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나 에녹스·리엔·팰러딘의 이름을 걸고!!" 사악. 남자의 말이 끝나자 마치 밀물과 썰물이었던 듯 한꺼번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그와 같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저 남자 말 한마디를 덜컥 믿고 자식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다니 바보가 아닌가. 아무리 해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 큰 일이 생겼을 때 나라를 위해서였다, 라고 한 마디 변명하면 그만인 것이 저네들 귀족들인 것을. 사람들이 돌아간 조용한 선착장에는 해군들을 제외하고 배 위에 서 있는 에녹스와 라디만이 대립하고 서 있었다. "…왜 안 돌아가고 있지, 소년?" "당신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 "뭐라고!" 라디의 건방진 말에 말을 들은 본인은 가볍게 웃는 것을 곁을 지키고 있던 해군 한 명이 라디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그 기세에 라디는 조금 뒤로 물러섰지만 뒤에 서 있던 에녹스가 '그만'이라고 말하자 금새 표정을 풀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과연. 해적들에게 무서운 해군 제독은 부하들에게도 무서운 상관이라는 건가. "어째서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지?" 싱글싱글.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저 녀석의 부하들이 들고 있는 칼에 찔려 몸에 구멍이 벌집만큼 생기겠지. "…당신은, 바람둥이니까." "하?"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코니 맥플러!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 아이야! 당신이 하룻밤 놀다가 버린 가엾은 소녀지. 어때!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도 당신이 가벼운 바람둥이가 아니라고 말할 참이야?"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남자의 얼빠진 웃음소리에 흥분한 라디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기억을 더듬는 듯 엄지손가락을 턱에 올리고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아마도 코니가 보았다면 괴성을 지르며 좋아할 모습이겠지만 라디가 보기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무척이나 많이 닮은 얄미운 표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코니?" "그래! 코니 맥플러!" "맥플러 맥플러…코니 맥플러……." 설마 기억 못하는 것인가! 아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대했기에 코니처럼 예쁘고 매력적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냐. 역시 저 녀석은 여자를 아주 가벼이 여기는 바람둥이에 약속 또한 지키지 않을 한량일 것이다. 라디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아! 코니! 그래 그 아이!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아이였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달라붙는 것이 익숙했던. 하지만 나는 그 날 사정이 있어서 그 아이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했는데?" "뭐, 뭐가 어째?" 달라붙는 것이 익숙하다니. 코니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 …라고 말하려던 라디는 순간 녀석의 말을 이해하고 말았다. 전에 골목에서 라디가 들은 코니의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있던 새침하고 얌전한 소녀와 달리 높은 신분의 귀족과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을 자랑스레 또래 계집아이들에게 말하던 아이. 그 아이가 코니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하지마! 코니는 그 날 돌아와서 당신 얘기를 모두에게 했었어. 당신이 코니에게 한 짓을 낱낱이 말이지. 그런데도 지금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거야?" "오리발이라니…너무한걸. 믿어주라고. 난 적어도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안는 그런 불한당은 아니야. 게다가 그 아이는 정말 중간에 돌아갔다고." 남자는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 표정에 라디는 왠지 더 남자가 믿을 수 없어져 버렸다. 아마도 평소라면 하늘같은 귀족에게 이런 무엄한 짓을 할 리가 없는 슬럼의 아이 라디였지만 저 녀석만 보면 왠지 평소 같은 행동은 불가능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저런 '얼굴'을 한 녀석만 보면. 그리고 여차할 땐 믿을 수 있는 빠른 발로 도망치면 그만인 일이다. "믿을 수 없어. 당신 따위. 절대로!"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 "뭐?"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줄 거냐고?" "그," "이리 와봐." "뭐라고?"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어!'라고 소리치려던 순간 라디는 어느새 내려온 에녹스의 손에 이끌려 배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어어 하는 순간에 갑판에 올라와 있었고, 배에 올라왔다는 자각을 한 순간 벌써 누군가가 가득 들어있는 선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누구 ! 제독님?" "아이들의 부모는 잘 설득하셨 …누굽니까 그 애는?" 넒은 선체를 지나 아래층의 선실로 들어가자 그 안은 아마도 조금 전의 부모들의 아이들로 추측되는 소년들과 소녀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친 라디와 에녹스를 본 내부의 사람들은 경계태세를 갖춰 무기들을 세웠지만 에녹스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무기를 내려놓고 부동자세를 취한 뒤 거수경례를 했다. 부동자세를 취한 인물들 중에는 전에 에녹스와 함께 슬럼으로 왔던 그의 부관의 뚱한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라디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 파크!!" "라디! 네가 여긴 어떻게??" 해군용 로프로 손을 묶인 파크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자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묶인 상태 그대로 발만을 움직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라디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려는 것을 앞에서 창을 들고 대기 중이던 해군들이 막아섰다. "뭐야! 무장한 군인들에게 감시까지 시키고 이건 완전 감금이잖아! 이러고도 나에게 믿기를 바래?" "별 수 없다. 그냥 뒀다간 다들 도망칠 테니 임시 방편이다. 아프게 묶진 않았어." "말은!" 정말 말은 잘 한다. 오고 싶어했지만 이 쪽으로 오지 못한 파크를 대신하여 라디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가려했을 때, 남자가 그런 라디를 한 손을 들어 제지하며 자신의 가슴팍으로 라디의 손을 이끌었다. "뭐야 당신, 미,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거 참. 사내아이임에도 피부가 제법 곱기에 귀여워 해줬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기어오르는 구나. 아마 나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뿐일 거다. 가만 있어봐. 뭐가 있는걸 느끼지 못하겠어?" 사내 가슴에 가슴팍 말고 있긴 뭐가 있겠는가. 이 느끼한 인간이 또 뭐하는 짓인가 싶어 경악을 금치 못하던 라디는 남자의 말에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려다, 억지로 문질러대는 손가락 아래로 그의 말대로 뭔가가 느껴지기에 잠시 입을 다물고 손가락의 감각에 집중했다. "…응?" "그래. 이게 뭔지 알겠어?" "목걸이…같은데? 그게 어쨌다고?" "이건 그냥 목걸이가 아니다. 이 팬던트로 말씀하자면," "제독." "응?" "…팬던트고 나발이고. 제발 주위의 이목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을 동경하며 따르는 부하들에게 제발, 남자가 남자의 가슴을 지분대는 모습만은 보여주지 마십시오. 제발." "뭐?" 라디와 에녹스의 입에서 동시에 얼빠진 물음이 나가고, 머리가 약간 벗겨진 부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둘은 자신들을 '으'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수십 쌍의 눈을 봐야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그 괴상한 표정의 원인인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납득. "이런." "소, 손 내놔! 내 손 돌려주라고." 과연. 부관이 말한 것처럼 그닥 좋은 모습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 같았다. 해적의 천적이라 불리는 해군 제독 에녹스가 검은 피부의 소년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을 매만지게 하는 모습이라니. 비록 에녹스에게 숨은 뜻이 있어 한 행동이라고는 해도 일반인들에게 곱게 보이는 장면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음.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쫘악!! "으악 제독! 만지게 하는 것만으로 부족해 이젠 옷까지 벗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이걸 잘 보라니까 로딘! 이 팬던트를 말이다!" " 예?" 로딘의 말에 백 배 동감이었던 라디는 에녹스의 억울한 듯한 말투에 손으로 가린 눈을 들어 애써 티 하나 없는 가슴에서 시선을 돌려 에녹스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온갖 오해와 망상을 불러일으킨 에녹스의 가슴 중앙에는, 에녹스가 그리도 애절하게 설명하던 팬던트가 빛나고 있었다. "호오…정말 아름다운 팬던트입니다." "그렇지?" "줄과 테두리만요." "엥?" "뭡니까 이 안의 보석은? 라피스 라즐리? 루비? 아니면 설마 이 꾀죄죄한 것이 다이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요. 이런 탁한 색을 가진 것이 그런 투명한 보석들과 같은 것일리 없으니까." "너무한 혹평이군. 이것은 체인이나 테두리 장식보다 몇 만 배쯤 중요한 보석인데 말이야." "이게요?" "그럼."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 로딘에게 라디도 동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녹스가 분명 보석(寶石)이라고 말한 것은 보석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그냥 석(石), 즉 돌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 그냥 돌이 아닙니까. 그것도 새카맣고. 구멍까지 숭숭 뚫렸군요. 보석이라기 보단 흉석(凶石)같습니다만." "거참 로딘 자네. 말하고는." "비단 저만 그리 느끼는 것은 아닐 걸요? 무슨 영문으로 데려오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독께서 데려오신 저 거렁뱅이 소년도 그리 느끼고 있을 겁니다. 이봐 소년?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저게 과연 보석으로 보이…응?" "과연. 보석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이건 그냥 돌일 뿐인걸." "이봐 자네. 나랑 만난 적 없나? 응? 난 왜 자네가 낯이 익은 것 같지?" "그래서. 이 돌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 돌이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해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날 무시하는 거냐 !'라고 라디에게 따지려 했던 에녹스의 부관 로딘은 라디의 질문이 자신또한 궁금했던 것인지라 조용히 화를 접고 에녹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무지 슬럼을 갔다온 뒤 갑자기 왕실 회의를 조직해 나라안의 금은요동 소년 소녀들을 불러모으더니 대체 뭘 어쩔 심산인지. 응? 가만…슬럼이라? "생각났다! 너는 분명 한달 전의 슬럼에서 만났던 그 거지소년! 옷이 발기발기 찢겨 있었던 그 소년 말이야! 야아. 한달 만에 키가 꽤 커서 몰라봤는걸? 적어도 5센치 이상은 큰 거 같은데?" "이 돌은,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성안(聖眼)의 돌이다." "성안의 돌?" "그래." 여전히 자신이 하는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하는 라디와 에녹스가 조금 야속한 로딘이였지만 그렇다고 상관이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무턱대고 말을 잘라먹고 라디를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 선실을 나가면 저 노란 피부의 꼬마 녀석을 꼭 한 대, 아니 두 대 때려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게. "보물을 알아본다고? 무슨 보물을?" "후후…말해봤자 너는 모르겠지. '제왕의 보물'이라는 것이다." "제왕의 보물?" "그래.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이 지상에 남겨놓고 갔다는 제왕의 보물. 그게 있으면 이 세상은 더 이상 극악무도한 해적 놈들 때문에 겁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전쟁과 기아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고서(古書)에 분명 그렇게 적혀져 있었어." "헤에?" "그래서 나는 이 성안(聖眼)으로 보물을 알아본 뒤, 보물이 아닌 아이들은 집으로 바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니, 넌 거기서 내가 백성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지켜보면 되는 거야. 어때? 이래도 이 에녹스님을 믿지 못하겠나?"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보물이 왜 사람이라는 거야? 그리고 왜 금은요동이고?" "그건 나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책에 그리 쓰여 있었다. '보물은 제왕의 가장 가까운 반려이고, 양 눈에 다른 세상을 담은 제왕으로 가는 지도(地圖)'라고. 그러니 당연히 사람이지 않겠나?" "흠. 과연." "뭐, 내가 너 같은 한낱 슬럼의 소년에게 왜 이런 설명까지 해야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거기서 보고 있어라. 비록 단 한 사람의 슬럼 소년이라도 나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귀여운 동방의 소년." 웩. 로딘은 '귀여운' 이라는 미사여구에 갑작스레 구토기가 올라오는 듯 했지만 상관의 취향엔 뭐라 왈가왈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요즘 자신의 상관의 모습은 정말 이상했다. 한달 전이었지만 저 소년에게 추파를 던진 일도 이해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지금은 귀엽다느니 자신을 믿어달라느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던져대는 것이다. 분명 여자 외에는 아무리 예쁜 소년들이 접근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상관이었는데, 근 한달 새에 취향이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아무리 취향이 변했다고 해도 저.건.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뭐 좋아. 어디 한 번 해봐. 할거면 빨리 해서 파크와 나를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집에서 오매불망 저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 병에 걸린 아주머니가 계시단 말이야." "그래. 너희 같은 슬럼가의 평범한 소년이 '보물'일 리는 없으니 아마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 너, 제일 앞줄에 있는 소년부터 하나씩 차례로 내게 데려와라." "예스, 써!" 군복을 입고 창을 든 채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던 군인 중 하나가 에녹스의 명을 듣고 제일 앞에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년을 그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선원용 가죽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고는 떨고있는 소년의 손목에 묶인 로프를 끊어주었다. "자. 이제 내가 이 소년의 금은요동에 성안을 비춰보면 이 소년이 '보물'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을 했을 것 같은 은발의 미남자는 상의 앞섶을 풀어헤친 채 자신의 목걸이를 들어 눈앞의 소년의 눈동자에 들이밀었다. 선실 안의 모든 좌중은 그것을 예의주시하며, 혹여 저 구멍 뚫린 새카만 돌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묘한 기대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의 돌처럼, 저 돌에서 무슨 광채라도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처음 다섯 명까진. 아니, 많게 잡아 열 명 정도까진 참고 봤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십 명, 삼십 명, 마침내 마지막 줄에 서 있던 파크까지 도합 오십 명에 이를 때에는 이것은 더 이상 예의주시만 하며 지켜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실 안에 들어있던 모든 사람들은 에녹스가 눈동자에 성안을 지켜보는 소년 소녀가 열 명이 넘어서면서부터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정신병자들 같아' 라고. "이봐. 에녹스 제독님. 정말 그 성안이란 거, 효과 있는 거?" "당연하지. 우리 가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분명히 기록서에 써있는 내용이야. 성안은 보물을 보면 마치 자석이 다른 극을 끌어들이듯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제길, 제대로 된 성안(聖眼)이라면 내가 이런 짓 하지 않아도 알아서 보물이 있는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테지만 진짜 성안을 웬 놈에게 뺏긴 바에야." "뺏겨?" "그래. 원래 성안이란 보물을 알아볼 수 있는 성스러운 눈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네들은 선천적으로 사물을 볼 수 없지만 보물을 보는 눈만은 이 세상 누구보다 정확하지. 그런데 그런 성안을 한달 전 나와 똑같이 생겼다는 알 수 없는 놈에게 납치 당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나라고 해서 수도원에서 요양하고 있던 성안을 빼돌린 모양이야." "당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에녹스의 말에서 라디는 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에녹스의 얘기에서도 등장한, 에녹스와 똑 닮은 얼굴을 한 잔인한 누군가를 말이다. "왜 그래. 뭔가 알기라도 하는 건가 너?" "뭐?" "성안의 얘기를 듣더니 얼굴이 파래졌잖아. 괜찮나? 원, 식은땀도 나잖아?"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계속해. 이젠 파크가 서 있는 줄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아아. 다섯 명 남은 건가. 이중에서도 없다면 꽤 절망적인데. 그래도 조치를 빠르게 한다고 한 건데 성안을 빼돌린 그 놈이 나보다 먼저 '보물'을 찾았다는 건가." 에녹스는 아름다운 얼굴에 한 점 그늘을 드리우며 장대하게 한숨을 쉬곤 남아있는 다섯 명에게 다시 우스꽝스러운 사이코드라마를 실현했다. '성안'이라 지칭한 돌을 소년 소녀들의 눈동자에 대곤 십 초 정도를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크와 마지막 한 명 주근깨 투성이의 지저분한 금발 소녀만이 남았을 때에도 성안은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에녹스의 부하들이 금은요동의 소년소녀들을 선실에서 나가지 못하고 막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들 중에 에녹스가 그리도 찾는 '보물'은 없는 듯이 보였다. 드디어 파크의 차례였다. 비록 우습기는 했지만 저 시커먼 돌에 파크가 눈동자를 십 초 정도만 비추면 파크는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 걱정하고 있을 마사 아주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까짓 십 초 정도는 얼마든지 우스워도 되는 시간이었다. 파크도 그걸 알고 있기에 보무도 당당히 걸어가 에녹스의 정면에 선 채 그가 들어올리는 성안이라 불리는 돌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 성안이 자신의 눈에서 치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 "뭐, 뭐야?" 처음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거라 생각했다. 요즘 하역 일을 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눈에 헛것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의심도 해 보았지만 옆에 있는 에녹스의 부관인 대머리 남자의 입에서도 놀라움의 신음성이 들리는 것을 보니 그것은 비단 라디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닌 듯 했다. "대, 대체 저게…?" "쉿, 가만!" 보고도 무엇인지 알지를 못해 묻는 라디에게 에녹스가 검지를 들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변화를 일으킨 본인 파크도, 곁에서 보고있는 관찰자들도 모두 놀란 얼굴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 에녹스만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있는 성안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생기기 그지없는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돌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전 파크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까이 있던 라디와 로딘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게, 그리곤 점점 선실 내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마치 '바로 이 아이야' '바로 이 아이야'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성안은, 음을 낼 수 없는 대신 그렇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듯 했다. 파크는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고, 라디의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에녹스만이, 그 남자만이 이 선실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평정심은커녕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듯 양쪽 눈썹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제독! 제독의 말대로 이 돌이 움직입니다! 이 돌이 정말로요! 그럼 이 아이가 바로 그," "속단은 일러."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가 믿지 않을 때도 제독께서 성안이 분명 반응을 보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긴가 민가 하던 와중에 성안이 이리 반응을 보여주는데 속단이라니요. 다른 말 할 것 없이 바로 이 소년이 제왕의," "아니, 이런 정도가 아니야." "예?" "모두 읽지는 못했지만 아주 오래전 제왕의 보물을 찾았다는 기록서에는 성안이 보물을 보자마자 무척이나 격하게 반응했다고 되어있어. 그것이 사람이건 이 돌로 된 성안이건 말이지. 그런데 이걸 봐. 이 반응은 너무 미약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저희 모두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인데요." "그 정도가 아닐 거야. 분명 굉.장.히 격했다고 했단 말야. 내가 보기엔 아마도 이 소년은 '보물'이 될 자질이 있다던가, 또는 무슨 관계가," "맞아!! 파크가 제왕의 보물 따위일 리가 없어!!!!" " !" "너, 거지 소년. 지금 뭐라고," "난 거지가 아니다. 대머리 아저씨! 비록 가끔 소매치기를 하긴 하지만 구걸은 하지 않는다고! 난 엄연히 나의 능력으로 먹고살고 있어. 사람을 함부로 매도하지마! 그리고 파크도! 저 녀석은 그저 나와 함께 살며 집안 일을 하는 마사 아주머니의 아들 파크일 뿐이야! 보물 같은 거창한 것과는 관계가 없어! 알겠어? 이 녀석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불만 없겠지?"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성안이 반응을 보인 이상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이 녀석은 보물 같은 게 아니라니까!!!" "이봐 너 거지, 아니, 소매치기, 아니 능력 소년…에에이 아무튼 너! 감히 제독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 감히 불복종을…지하에 갇혀 노 젓는 노예들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은 거냐!!" "이봐 로딘. 자넨 좀 가만히 있어." "잡을 테면 잡아보시지. 내 발이면 당신들 따위 금방 제치고 도망갈 수 있으니까! 파크를 업고 간다 해도 매일 고기만 먹어 배에 기름이 꽉 찬 당신들보단 빠를 자신이 있다고!" "라, 라디…." "뭐가 어째! 이, 도둑 주제에 감히!" "둘 다 조용히 하래도!!" 쩌억. 하필이면 파크의 순서에서 딱 반응을 보인 성안에 라디가 불안해하며 겁내고 있는 파크를 집으로 데려가려 그 떨리는 손을 잡았고, 그것을 본 로딘이 그런 라디를 가지 못하게 하려 막아서며 대립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본 에녹스가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싸우는 두 사람을 말리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사이에 양팔을 벌리고 서는데 그 일이 일어났다. 쩌어어억.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에녹스는 최악의 경우 무력으로라도 파크를 데려가는 라디를 막으려던 팔을 걷고 품안의 성안을 들어보았다. 웅웅웅. 쩌어억. 쩌억!! 틀림없었다. 성안은 깨져가고 있었다. 그것도 지나친 진동을 견디다 못한 성안 외부의 균열로 인해! "이게 왜 갑자기…헉!" 갑작스런 성안석(聖眼石)의 변화로 당황해하고 있던 에녹스는 얼결에 성안을 파크와 라디 쪽으로 가져다 대 보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안 그래도 갑자기 강렬해진 성안의 진동이 파크 쪽으로 다가가자 금방이라도 깨질 듯 쩌적, 하고 이곳 저곳 금이 갈 정도로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아, 아니야! 파크 이 녀석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니야! 이리 줘 봐! 내가 대볼게! 당신이 장난하는 거지! 일부러 당신이 깨트린 게 틀림없어. 파크, 이리와 봐. 이것 봐. 아무렇지도 않," 파삭!!! "으악!!" "왓!!!!" 에녹스를 믿을 수 없어 그의 손에서 팬던트를 빼앗은 라디는 직접 성안석을 파크의 눈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만 극한 진동을 견디지 못한 성안석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폭발하고 말았다. 그랬다. 깨지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했다. 아마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파크의 눈은 빠르게 감지 않았다면 튄 파편에 시력을 잃었을 만큼 갑작스럽고 강력한 폭발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제독?" "그래…이것인가." "예?" "격한 반응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군. 성안이 폭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확실한 '보물'을 찾았으니 이제 성안의 역할은 다 했다 이건가. 하하…하하하하!!!" 에녹스 제독은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갑자기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듣기에 그 웃음소리는 목적을 달성한 상관의 즐거운 웃음소리일지도 몰랐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커다란 배에 끌려와 이상한 일을 겪고 있는 라디와 파크에게는 두렵기만 한 것이었다. "우…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 돌은 수명이 다 해서 그렇게 박살난 거라고. 파, 파크와 나는 돌아가겠어. 이제 용건은 끝났지? 집으로 돌아가자 파크!" "라, 라디… 우왓!!" "…저런. 그렇게는 안되지. 귀여운 소년들." 지옥신인 하데스의 목소리가 저처럼 달콤하면서도 두려운 목소리일까. 라디와 파크는 등뒤에서 뻗쳐온 커다란 손에 온 몸에 소름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조금 더 빨리 정신을 수습한 라디가 파크의 손을 이끌려고 한 순간, 라디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난 뒤의 순간만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몸에 땅바닥에 내려와 있는 것을 자각해야 했다. "무…무슨." 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스피드로 라디의 멱살을 잡아채 업는 것처럼 등에 진 채 그 기세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시켰다. 험한 일을 하느라 어지간한 매에는 익숙해진 몸이었지만 정확히 들어온 '제독'이 기술에 아무리 라디라도 한 순간 골이 띵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 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싶진 않았지만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지. 이 소년은 나와 함께 지금부터 희망봉으로 간다. 그곳에 가면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말한 진정한 '제왕의 보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희망봉?" "그래. 기록서에 써 있었다. 보물과 함께 희망봉으로 가라고. 그러면 제왕이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러니, 미안하게 됐다 소년. 약속은 지킬 수가 없게 되었구나. 이봐 로딘." "예스, 써." "이 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이 아이는 특별 객실에 고이 모시도록 하고. 보초를 두 명 정도 세워야 할 것이다. 귀하신 몸이니까 말이야." "이봐, 기다려! 파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익!!" "라, 라디! 도와줘! 라디!!" 겁에 질린 파리한 안색으로 군인 둘에게 잡혀가며 파크가 소리쳤다. 라디는 파크의 내민 손을 잡으려 몸을 앞으로 굽혔지만 가슴께를 누르고 있는 에녹스의 손이 의외로 완강하여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것이, 해적들조차 무섭다고 하는 '에녹스 제독'의 힘인가! '하지만 악이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고!!' "음!!" "파크!" "라디!" 에녹스는 방심하고 있다가 소년의 입을 허용한 자신의 손에 남은 이빨 자욱을 잠시 보고, 곧바로 파크에게 달려가는 라디의 옷깃을 낚아챘다. 하지만 소년의 힘 또한 만만치 않아서, 에녹스는 결국 끝내 하고싶지 않았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구나. 너에게 한 약속도 있고 해서 상처 따위는 남기지 않고 고이 집으로 보내주고 싶었는데…어쩔 수 없다. 이는 나라를 위한 일. 로딘!" "예!" "저 소년을 보물에게서 떼어내라! …어떤 수를 쓰든!!" "…예스, 써!!" 철컹. 철컹. 창!! "죽이지는 말아라. 가능하면 상처를 입히지 말고 어떻게든 '보물'을 생포하는 방향으로 해라. 알겠나!" "예스, 써!!" 라디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창과 칼들을 보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대로 파크를 저 남자의 손에 보냈다가는 왠지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비록 위험하다고는 해도 어떤 방법을 써서든 파크만은 밖으로 내보낼 방법을 궁리했다. 설령 자신이 조금의, 혹은 조금 큰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다. '정말 다치게 하고싶지 않았는데.' 에녹스는 결국 무력을 쓰게 만드는 라디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자만을 좋아하는 자신이 유일하게 귀엽게 여기는 소년인지라 조금은 잘해주고 싶었는데 일이 많이 틀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뭐 약속을 안 지킨 자신의 탓도 있긴 하지만 성안석이 저렇게까지 저 파크라는 소년이 보물임을 확신하는데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나라 전체를 위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저 소년의 절친한 친구였다니. 인생이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어린 소년이다. 너희들의 병력을 다 쓸 생각하지 말고 인해전술로 나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라! 알겠나! 가능하면 최대한 상처를 내지 말란 말이다! 저 소년은 죄 없는 무고한 백성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저, 저 소년이 한 시라도 빨리 투항을 하고 여기서 무사히 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잇, 젠장! 역시 싸우고 싶은 마음만으로 제대로 교육받은 해군을 이기기란 무리였던가!' 라디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낭패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기 서 있는 얄미운 남자의 명으로 병사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라디와 파크의 퇴로를 막아서고 있었다. 뿐인가. 날카로운 칼날로 만든 포위망 덕분에 조금만 섣불리 움직여도 금새 팔이나 목이 베일 처지에 놓여 있었다. "라, 라디…." 서슬 퍼런 칼날에 겁에 질린 파크가 떨리는 손으로 라디의 옷깃을 잡아왔다. 무리도 아니었다. 파크는 여지껏 슬럼가의 술집을 전전하며 일해온 라디와는 달리 집에서만 고이 굳이 말하자면 집안이 온갖 살림을 담당했으므로 고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 자라온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에게 있어 군인들의 칼이란 발걸음조차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기도 하겠지. 몇 번 잭나이프를 대면할 일이 있는 자신도 이렇게 무서운데 파크는 오죽할까.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로 나갈 기회를 영영 잃고 마는데. 결국 더 이상의 거리를 좁힐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해군들의 칼날에 라디가 자신은 좀 베이더라도 이들의 다리 사이로 파크를 빠져나가게 해야겠다 라고 결심했을 때. 쾅! 콰광!!! "!" "우앗!" "뭐, 뭐냐!!" 갑작스레 선실을 덮친 충격에 모든 사람들이 균형을 잃지 않으려 마스트나 난간을 잡았다. 개중 선실 중앙에 있던 불행한 소년이나 미처 의지할 것을 찾지 못한 병사들은 바닥에 구르며 충격을 그대로 흡수해야만 했다. 라디와 파크는 라디의 선천적인 반사신경 덕분에 간신히 바닥에 구르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폭탄! 폭탄이다!!" "폭탄이라고!?" 아니다. 이것은 배에서 나오는 캐논포다. 폭탄으로 오는 충격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분명 대포라고 에녹스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왜 갑자기. "제독! 선미에 있는 병사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놈들은 굉장히 빠른 쾌속범선으로, 졸리로저까지 달고 있는 걸로 보아 해적놈들인 것 같습니다!!" "뭐! 해적이라고!" 재빨리 에녹스가 있는 곳으로 보고를 하러 온 선원장이 내뱉는 말에 에녹스는 크게 놀랐다. 군인에게 정면으로 대항해오는 해적선이라니. 게다가 정박해있는 배에 이유도 없이. 자신의 배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찌 알고!! "놈들의 위치는!" "북북서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입니다. 이미 계획을 한 것인 듯 이미 유리한 위치를 확보한 상태입니다!" 교전할 결의를 굳힌 범선은 일반론이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위치를 한 편이 유리하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의 배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가르고 올라가는 것과 전투 준비를 동시에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수한 승무원이 있다고 해도 매우 힘든 일이다. 처음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있으면 상대 편 배에 접근하는 것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도 함장과 승무원의 기량만 좋으면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즉, 전투를 전개하는데 절대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대가 우연히 만나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점하려고 하고 함대를 조정하는 비밀스러운 기술을 다하는 것이 된다. 이는 함장의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기회다. 놈들은, 꽤나 유능한 선장을 모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쪽엔 불행하게도. 에녹스는 해적 놈들이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이 정도로 완전히 돌았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범선들의 격전지인 바다도 아니고 무고한 시민이 천지인 항구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곧바로 청동대포를 날리는 미친놈이 있을 줄은. "어떻게 할까요 각하. 놈들은 서서히 이 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야? 보딩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설상가상이라도 아예 접근전을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이 배에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얘긴데. 하지만 이 배는 군선이라 놈들이 원하는 상선의 보물이라던가 화폐, 비단 따위는 싣고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만. 보물…? 그렇군! 제왕의 보물이다! 놈들은 제왕의 보물을 노리고 오는 거야! 그렇다면 보르부 수도원에서 성안을 납치한 해적 놈도 분명 있을 것! 이 기회에서 성안을 되찾고 해적놈들도 소탕한다! 전 대원에게 알려라! 전방에 해적들이 다가오고 있으니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예스, 써!" "궁수, 창기병, 소총부대 모두 진열을 다듬어라. 포문은 모두 열어라. 대포 탑재 갑판에 모래를 뿌려! 조타수를 증원해라. 저 놈들을 물리치고 희망봉으로 전진해야한다. 혹여라도 자고 있는 포수가 있다면 모두 두들겨 깨워라. 비번인 놈들도 모두 불러! 긴급상황이다!" "예스 써!!"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해군들이 접근 전을 준비하고 위쪽 갑판에 대기했다. 무장은 마스켓 총, 피스톨, 장검 등으로 발포에 능한 사람이 총으로 무장하고 각 마스트의 탑에 올라갔다. 적군의 함대와 뱃전이 접해서 전투가 벌어질 때 유달리 눈에 띄는 지휘관이나 제독을 저격하기 위해서였다. 선실에 있던 대원들도 모두 선실 밖으로 나와 갑판에서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 라디와 파크를 둘러싸고 있는 대여섯 명의 병사를 제외하고. "이 소년만은 절대로 빼앗겨선 안 된다.나는 메인 데크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도 보물을 데리고 나를 따라라. 절대로. 절대로 빼앗겨선 안 돼. 너희들의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예스 써!" 한편 라디는 결단을 내리고 파크를 도망치게 하려는 순간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가 절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의 포격을 맞고 라디와 파크가 균형을 잃고 흔들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병사들의 그들의 몸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현재 라디와 파크는 다섯 명의 병사들에게 꼼짝없이 잡혀있었다. 파크의 손에는 다시 밧줄이 묶였고 라디는 등뒤의 옷을 잡혀 물건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제독, 이제 이 녀석은 필요 없지 않나요? 곧 위험한 접근전이 벌어질 텐데 이대로 배 아래로 던져 버릴까요?" '뭐!' 라디의 옷을 잡고 있던 대원 하나가 그렇게 말하자 에녹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옷을 잡혀있는 라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여기 있다간 위험해질 테니 돌려보내라. …미안하다. 너의 친구는 이제부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하므로 도려보낼 수 없게 되었구나. 참으로 미안하지만 집에는 너 혼자 돌아가도록 해라." 왠지 듣기에 따라서는 보내주기 싫다고 생각될 정도로 표정이 씁쓸했지만 어쨌든 그는 병사에게 라디를 놓아주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파크를 갑작스레 벌어진 전장에 두고 갈 라디가 아니었다. "잠깐! 말도 안 돼! 지금 나보고 이런 데에 파크를 두고 가라고? 당신 제정신이야? 차라리 나도 함께 있게 해줘. 나 혼자 돌아가 마사 아주머니를 어찌 보라고. 차라리 나도 데려가란 말이야!!" "너 제독께 무슨 말을," "…흠. 그래. 그것도 괜찮겠군." "예?" "뭐 보물을 희망봉으로 못 데려가는 것은 문제지만 그의 친구 한 둘쯤 붙는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좋다 소년. 네가 원한다면 함께 데려가 주마. 친구를 데려가면 보물께서도 항해 기간 동안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겠지." 그는 조금 기쁜 듯이 말했다. "제독!" "그만. 지금은 우선 눈앞에 닥친 놈들의 보딩에 대비해야 한다. 어서 빨리 소년들을 메인 데크로 옮겨라. 놈들의 배가 벌써 저만큼 가까워졌다. 과연 쾌속범선. 서둘러!" "예, 예에." 함장은 원칙적으로 군함의 고지에서 배를 조정하거나 전투 전반의 지휘를 하고 부장 또는 항해장이 그를 보좌한다. 때문에 그는 비상시 제일 안전하면서도 모든 전반적 상황을 알 수 있는 곳에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일단 얘기가 정해지자 빠른 발걸음으로 장소를 옮기는 병사들 틈에 끼어 라디와 파크도 난간을 올라 메인 데크로 향했다. 제5장 교전 시작. 검은 새와 태양 제독의 최악의 조우 쾅! 쾅! "읏!" 데크로 향하는 도중에도 적의 배에서 뿜어져 나온 캐논포가 에녹스의 배를 덮치며 병사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갑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진열을 다듬기 위해 병사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 선미부에는 포를 맞은 병사들이 없어진 다리를 감싸쥐고 피를 뿜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비규환. 라디와 파크는 처음 보는 해적들의 잔혹함과 실제 전투 상황에 공황을 느끼고 있었다. "돛을 올려라! 놈들과의 전투를 끝낸 뒤 바로 희망봉으로 향한다! 쾌속범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올려!! 부상병들은 재빨리 병실로 옮겨라. 의사에게 보이고 나머지는 속히 위치로 돌아오라. 각 마스트마다 팀을 짜서 돛을 올려! 방향은 북북동! 우선은 놈들과 반대 방향으로 진로를 확보한다!!" 메인 데크로 올라오자마자 남자는 선원들에게 호탕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적절한 명령을 했다. 라디는 분주한 와중에도 남자의 명령을 모두 알아듣고 철석같이 따르는 대원들이 매우 신기했다. 상황이 안 좋기는 했지만 십 칠 세의 소년에게 이 장면은 모든 상황을 잊고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흥미를 돋구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대단한걸!' 파크 역시 같은 심정인지 마주본 눈이 반짝거리며 분명하게 상기되어 있다. 라디는 고개를 돌려 이 혼란스런 와중에도 목소리 하나로 모든 사람을 통솔하고 있는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동경하던 '에녹스 제독'의 모습. 남자는 맑은 날의 바다빛처럼 푸른 눈을 빛내며 눈앞의 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고있었다. 실패라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승승장구만을 겪어온 곧은 등의 아름다운 남자. 저것이 라디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아니. 꿈에도 그리던, 자신이 늘 생각하던 최고의 이상향의 남자. 그리고. 그 얼굴과 분명 같은 얼굴임에도 너무도 다른 눈을 했던, 또 하나의 아름다운 남자.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에녹스의 곧은 옆얼굴을 직시하고 있자 궁금했던 것이 머리를 치고 올라온다. 쌍둥이처럼, 아니, 마치 한 사람인양 같은 얼굴을 한 두 남자. 한 쪽은 나라에서 가장 인정받는 해군 제독 에녹스. 다른 한 쪽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최악의 해적 블랙 버드. "옵니다! 정말 빠른데요 제독. 저 정도면 최대 20노트까지도 거뜬할 듯 합니다. 최악의 경우 과연 저 범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나의 레이디를 우습게 보지 말아라 로딘. 저런 쾌속범선이 아니라고 해도, 이 '플라잉 클라우드' 호는 아르센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최고의 배야. 어느 누구에게도, 어느 해적 놈들의 범선에도 장비 및 속도 무엇하나 뒤지지 않는다고. 알겠나?" "…예스, 써." 대단한 자존심이었다. 라디에게 보이던 달콤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그는 해적의 배를 멸시했다. 분명 그 대단한 성능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음에도. 남자는 해적 따위 자신의 구두에 묻은 흙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놈들의 졸리 로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해골과 교차된 뼈. 그리고…헉! 제독! 검은 새입니다! 교차된 뼈 위에 앉아있는 검은 독수리!! 돌진하고 있는 배는 블랙 버드의 배입니다!!!" "블랙 버드!!!" "!" 라디는 망원경으로 적을 관찰하고 있던 대원이 에녹스에게 하는 보고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블랙 버드. 그 남자가 오고 있다고. 우연이란 이런 것일까. 아니, 악연이란 이런 것일까. 라디는 그럴 일은 없지만 왠지 남자가 이 배로 오는 것이 자신을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까지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의 운명으로 저 남자와 만나 인생의 대 사건이라고 할만한 일을 겪었다. 생명의 고비를 넘긴 일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니, 어린 소년이 저 남자가 오는 것이 전에 하지 못한 일 자신을 죽이러 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호오…블랙 버드란 말이지…. 그동안 나의 포위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던, 늘 그 잘빠진 뒷태만 보여주던 블랙 버드호가 오고 있단 말인가. 어쩐지. 해적 놈들의 조악한 배에 20노트의 속도가 나올 리가 없지. …저 블랙 버드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에녹스는 눈앞에서 다가오는 검은 옻칠을 한 아름다운 선체를 향해 누구라도 반할 만큼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해적을 앞에 둔 제독의 모습이 아니라 고백하고픈 레이디를 앞에 둔 신사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바로 곁에 서 있던 부함장 로딘은, 그런 에녹스의 모습에 '그동안 보물 보물 보물만 찾더니 이 사람이 드디어 실성을 했나'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에녹스의 기쁨은 가히 상상할 만할 것이다. 이제는 육안으로 보는 라디의 눈에도 그 선체가 훤히 보일 만큼 블랙 버드호는 플라잉 클라우드호에 근접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답고도 날쎈 선체에 라디는 그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온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블랙 버드호는 쾌속범선이라는 특성을 가진 배답게 선체가 무척이나 날렵하고 간결한 수선을 가지고 있었다. 선미는 길고 오목했으며, 선체를 물 속 깊숙이 담고 있었다. 돛대는 일반 배들보다 훨씬 높은 기형적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이는 길고도 날렵한 블랙 버드호의 선체에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과연. 세간의 사람들이 'Extreme Clippers'라고 부를 만한 아름답고도 인상적인 범선이었다. …마치 저 배의 주인처럼 말이다. "좋아. 받아주지. 너의 도전 말이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나의 레플리카인 너를 없애주겠다. 다시는 세상에 그 얼굴을 디밀지 못하게 말이야. 원래의 오리지날인 내가 말이다!!!" 로딘을 비롯한 데크 안의 대원들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에녹스의 옆얼굴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평소엔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용맹한 상관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평소엔 눈도 돌리지 않던 웬 사내아이 하나를 귀여워하지를 않나, 그 아이와 함께 여행을 가게 된다고 하자 어린 아이처럼 기쁜 얼굴을 하지를 않나. 게다가 지금은 최대의 난적인 대 해적 블랙 버드를 앞에 두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고 있다. 이거 아무래도 무슨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대원들은 다음 책임자인 로딘을 쳐다보았지만 로딘은 좀 더 지켜보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적어도 이 배에서, 저 남자를 능가할만한 통솔력과 전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설령 저 이가 실제로 실성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하지만 에녹스는 그런 대원들의 시선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적을 주시할 뿐이었다. 레플리카 녀석, 박살을 내주겠다고. 이미 세상에서 잊혀진 '언데드(좀비)' 주제에 세상에 얼굴을 디민 벌을, 자신과 같은 면상을 하고 성안(聖眼)을 빼돌려 자신을 능욕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고. "…후후후……좋아. 로딘. 포문은 열었겠지. 지금부터 환영인사를 해주겠다. 그것도 제일 큰 폭죽으로 화려하게. 우리의 기쁨을 저 쪽에서 충분히 알 수 있게끔. 알겠나? 가장 큰 것으로, 가장 센 것으로 가자. 포구를 넣어라! 그리고 알려라! 축제의 시작이다!!!!!!" 잔인한, 그러면서도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선전포고는 시작되었다. 쾅! 콰앙! 펑! 펑!! "정신 없이 쏟아 붓는군요. 이 나라 재정이 그리 여유로운가요? 저렇게 대포를 남발하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을 만큼?" "쿡…적어도 저 자에게는 그렇겠지. 왕이 애모 해 마지않는 태양 제독이시니까 말이다." "그렇죠. 증오해 마다 않는 모 블랙 버드씨와 다르게 말이지요." "쿡쿡쿡쿡." 청동으로 된 캐논포에 집중포격을 받으면서도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이미 테이어드의 선실 밖으로 다리나 팔이 잘려나간 선원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들리기 시작했는데 밖에 나가 지휘는 안 하고 왜 여기 앉아서 웃고만 있는 것인지. 테이어드는 자신의 침대에 앉아 고급와인을 즐기고 있는 남자의 속내를 새삼 알 수가 없었다. 뭐 알아봤자 득 될 것도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장이라 하면 적어도 자기 선원에 대한 애정은 있을 것 아닌가. 아니, 굳이 선장이 아니라도 저 정도로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는 선원들에 대해 분노를 할 만큼의 동지애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겠지. 그러나 이 남자는 아무래도 보통의 인간이 아닌가 보다. 분노를 하기는커녕 여전히 즐거운 웃음을 쿡쿡거리며 시트를 걸치고 있는 테이어드의 몸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으니 말이다. "읏…." 시력을 갖지 못해서인지 남들보다 더욱 발달한 오감은 너무도 익숙한 손길을 느끼고 반가움에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자 남자는 그런 테이어드의 반응을 깨닫고 더욱 즐겁고 음흉하게 웃는다. 똑똑똑똑. 부하들을 살피러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긴 금 갈색 머리에 손을 넣는 남자에 대해 테이어드가 이해하기를 포기했을 때, 나무 문 밖으로 노크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선장. 이제 곧 놈들의 배 앞에 당도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언제나처럼 돌진해서 순식간에 끝내 버릴까요?" 스네이크, 라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인간 같지 않은 남자의 오른손 격인 이 배의 부선장. 테이어드는 그가 한 번도 선원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보지(듣지) 못했고, 한번도 선상 규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부선장이 선원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면 그는 선원들에게 업신여겨지며 반란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허나 그런 규칙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해적들은 규칙을 어기고 자신들만의 교감을 만든다며 온 선원이 하나가 되어 럼주를 마시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스네이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원칙에 준수하고,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도대체 왜 저 사내와 같이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충직하고 올곧은 사나이였다. "그래? 불꽃놀이 소리가 시끄럽기에 나는 놈들의 재롱을 좀 더 즐겨보려고 했더니…진짜 축제의 시작인가. 이거 아쉽게 됐군." 읏…. 엉덩이 둔덕 사이에 들어와 있던 손가락 하나가 메마른 입구를 비틀며 빠져나가자 테이어드는 원치 않는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듣고 저 무뚝뚝한 사내가 어찌 생각할지…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테이어드는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시트를 올리며 스네이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마도 그는 테이어드의 이런 몸짓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선장실에서 보시겠습니까?" "아니." "예?" 예의 상 물어본 말이었는데 예상외의 대답이 나오자 스네이크는 당황했다. 늘 선장실 안에서 지휘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럼요? 이 선실에서 보시려구요?" "아니. 직접 보딩할 거야." "예. 직접 저 배에 타신다고요. 알겠… … 예에?" "내 귓전에서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지 스네이크. 자네 목소린 조용히 말해도 시끄럽단 말일세." "하지만 선장! 당신이 직접 저 배에 보딩하겠다면서요! 소리 안 지르게 생겼습니까?" "왜. 해적선 선장이 해군 전함에 올라타서 직접 보물을 낚아채겠다는데 문제가 있나?" "그야 일반 해적이라면 문제가 안되겠지만!" 당신은 다르잖아 !!! 스네이크는 답답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 알면서 저 능청이라니. 하여간 저 놈의 나쁜 버릇은 평생 가도 안 고쳐지지 싶다. 알다시피 블랙 버드는 그 나포한 배와 잔인함, 갈취한 보물의 수 등으로 유명한 해적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가 모두 베일에 가려진 것이 더 유명한 해적이기도 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이미 나포한 배에서 죽이는 것이 확정된 선원들을 처리할 때 정도. 선장 자신이 직접 자신은 절대 나서지 않을 테니 너희들끼리 올라가서 다 죽이고 와라. 절대로 정체가 밝혀져선 안 된다며 절대로 지지 말라고 모든 선원들에게 몸소 검술을 가르칠 때는 언제고. "보딩엔 참가 안 하시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가야겠어." "'보물' 때문에요?" "그렇지." "뭐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예?" "또 다른 '나'를 만나러 가기도 해야하고 말이지. 쿡쿡쿡쿡……." "?" 실성한 듯 혼자 웃는 블랙 버드를 보며 스네이크는 조금 걱정이 앞섰다. 물론 평소에 보이는 시범으로 저 아름다운 미남자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와인도 거나하게 걸친 데다 기분도 이상하게 고양되어 있었다. 저 상태로 보딩을 했다가 실수라도 하는 것은 아닐지. 직접 남의 배에 올라타 그 배의 선원들과 일대일 대결을 하는 보딩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집중력을 요하는 공격법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런 상태의 선장이라면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이다. "자. 가볼까. 나의 커트라스에게 오랜만에 피를 듬뿍 먹여줘야겠군. 칼날이 붉은 색으로 물들만큼 말이야. 가지 스네이크." "하아. 예."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장은 저 사람. 블랙 버드였다. 스네이크는 부하로서 그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고. 그것이 부선장의 도리였다. 그리고 사실 걱정도 팔자인 것이, 저 사람은 술 한두 잔으로 실수 같은 귀여운 짓을 할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로. "참." "?" 뭔가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이 문을 나서려던 발을 멈추고 남자는 선실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그러더니, 스네이크가 들어왔을 때부터 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간 후, 가려봤자 그 여린 선을 다 알 수 있는 가는 몸을 거칠게 침대에서 일으켰다. " 무슨!" "너도 가야지. 이거야 가장 중요한 도구를 잊을 뻔했군. 이번엔 너의 역할이 나의 커트라스보다 중요할 텐데 말이다. 위대하신 성안(聖眼)이시여. 후후후." "이것, 놓아요! 내가 왜 해적들의 군함 약탈 따위에!" "이번엔 군함 약탈이 아니다. 보석 탈환이지." "뭐라고요?" "그러니 보물을 알아보는 역할을 해줘야겠어." 테이어드가 그에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블랙 버드는 다짜고짜 그 손을 이끌어 선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허나 스네이크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시트를 몸에 둘둘 말고 있던 테이어드는 그 거친 힘 때문에 시트에 걸려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바람에 그만 걸치고 있던 시트가 모조리 벗겨져 그 하얀 나신이 여지없이 스네이크의 눈에 투영되고 말았다. "서, 서서서선장!!" "왜 그러나. 이봐. 어서 일어나 성안. 어서 가서 보물을 찾으라고. 너의 역할은 그거니까 말이야. 그동안 식량 축낸 값을 해야지. 안 그래?" "저, 저저저적어도 옷은 입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원들이 다 볼텐데 저 꼴로 데려갈 거란 말이오!!" "옷을? 뭐 하러? 어차피 이 녀석은 도구일 뿐인데?" "그래도!" 블랙 버드의 잔인한 말에 테이어드가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보고 스네이크는 왠지 가슴 한 쪽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납치해 온 포획물이라 선장 마음대로이기는 해도 그래도 사람인데 기본 인권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스네이크 역시 대 해적 중 한 명인지라 그닥 마음이 고운 편은 아니지만 죄 없이 끌려온 사람에게 저건 너무하는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제가 옆 방 놈들에게 금방 옷을 뺏아 오겠습니다. 선장.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요." "허어." 평소와 달리 허둥대며 선실을 나가는 스네이크를 보며 블랙 버드는 이상하다 생각을 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도구에 금박을 씌우느냐 마느냐의 의미일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기분이 너무도 좋아 저런 명령 불복종쯤 가볍게 눈감아 줄 수 있는 상태이기도 했고. 커다란 굉음과 함께 다시 한 번 배가 뒤틀리는 충격 후, 스네이크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를 들고 선실로 돌아왔다. 됐다고 사양하는 성안에게 직접 옷을 입혀 단추까지 세심히 채워주고는, 이제 되었다며 그제야 블랙 버드에게 성안을 인도했다. 블랙 버드는 안 하던 짓을 하는 스네이크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 어쨌든 좋아. …그럼 이제. 어디 한 번 만나러 가 보실까. …내 동생을."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블랙 버드라는 자신의 별명답게 독수리와도 같은 빠른 몸짓으로 선실을 박차고 금새 선미부로 발을 옮겼다. 옆구리에 성안이라는 소년을 끼우고 있었음에도 저는 보통의 선원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스네이크는 동생이 어쩌고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연이어 들려오는 시끄러운 포격 소리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판단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저 남자의 몸놀림을 보는 것만으로 시선과 뇌가 과부하일 지경이었다. 역시. 대단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 일반 사람과 같다 고 생각했다간 금새 저 커트라스의 칼날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저런 몸놀림이 가능한 것이냐고 선원들은 늘 스네이크에게 묻곤 했었다. 하지만 말해줄 수 없었다. 자신의 선장이 워낙 자신에 대해 알려지는 걸 꺼려하기도 했고, 또 말해줘봤자 저 상상력 빈곤한 녀석들이 선장의 잔인하고 암울한 과거를 믿을 리가 없으니까. "올라타라! 아르센의 졸개들을 모조리 박살내라 블랙 버드의 형제들이여!!" "우와아아아아아!!!!!!!!!!!!!!!!!!!!!!" 배가 서로의 승무원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본격적인 보딩이 시작되었다. 고로 스네이크의 사색을 할 시간 또한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자신의 캡틴은 이미 혼비백산해 있는 적을 다섯 바다의 제물로 바친 상태였다. 그 뒤를 힘겹게 따르며 스네이크 또한 커트라스의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이제부터는 바다의 백정 블랙 버드호의 부선장이 되는 거다. 철저히. * * * 아르센의 해군 해병대 닐센 오닐은 꽤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무리 빠르다고는 하나 직공들이 아닌 해적이 만든 허술한 배 따위, 태양 제독 에녹스님이 이끄는 플라잉 클라우드호에 비하면 물 컵 위에 띄운 성냥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에녹스 제독에게 반해 해병대에 지원한 것은 세 달 전으로, 처음 입대를 했을 때만 해도 실수 투성이에 해군 제복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촌뜨기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녹스 제독 휘하로 들어가겠다는 일념 하에 노력에 노력을 한 것이 보답을 받은 것일까. 그는 초년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단 세 달만에 가장 용맹한 부대라는 에녹스 제독의 부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간 첫 해상 전투. 처음 그가 만난 해적은 '로맨틱 로즈'라는 저질스러운 이름을 가진 배의 로제트라는 해적으로, 그는 느린 범선을 가졌지만 호위 범선이 없는 작은 상선만을 노리는 더러운 수를 써서 재물을 노리는 전형적인 해.적.놈.이었다. 오닐은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로 해군에게 있어서는 안 될 배 멀미까지 느끼고 있었고, 주위의 상사들은 그런 그를 안쓰러워하며 혀를 차고 또 어떤 이는 방해가 된다며 발로 차고 가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통증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오닐은 처음 해적을 만나고 격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은가?" 오닐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전혀 괜찮지 않다는 표시로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 반동에 울렁거리는 속이 더욱 심해져 오닐은 푸른 바다에 그 날 아침에 먹은 베이컨과 맥주를 모두 올려야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머리를 들이밀다간 로맨틱 로즈에서 뻗어 나온 화살에 머리를 맞기 십상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위치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걸을 수 없었다. 걸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좋지 않고 긴장으로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화살을 맞아 죽는 것이 더 편하겠다 라고 생각했을 때. "괜찮다. 나도 처음엔 너만큼 긴장했었어. 우선 후미에 대기해 있다가 상황을 지켜보도록 해라." "!" 아까부터 오닐의 곁에서 등을 두드려주며 토사물의 냄새를 참고 위로의 말을 건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에녹스 제독이었다. 이십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제독이 된 뛰어난 능력의 사나이. 물론 그 집안이 삼대 째 제독을 이어온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가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선원들과 온 나라의 백성, 나아가서 국왕이 그를 이렇게까지 신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비록 개중엔 그를 가벼운 바람둥이에 외모만을 앞세워 여론을 몰고 있는 운 좋은 사내라고 모략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닐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늘 부정해 왔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믿음이 보답을 받는 것 같았다. 교전에 도움도 되지 않는 병사를 하나 하나 챙기는 세심한 모습이라니. 이는 그의 리더쉽과 성품. 모두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때의 에녹스는 로제트의 로맨틱 로즈 선에 보딩하기 위해 가려는 길목에 하필 오닐이 토하고 있어 그를 그 자리에서 치우려 보인 행동이었지만, 뭐 결과적으로 그는 부하에게 굉장히 사랑 받는 상사가 되었다. 일개 사단의 병사 하나하나를 챙기는 무척이나 따뜻하게 능력까지 고루 갖춘. 아무튼 오닐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과연 백금을 녹여 만든 듯한 반짝이는 은발에 맑은 날 보이는 수평선처럼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가 멋진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또한 해적을 소탕한다는 것 즉 신나게 누군가를 패며 스트레스 해소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신이 난 에녹스가 지은 미소였지만 어쨌든. 오닐은 그 미소에 멀미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어느새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불행히 그는 오닐의 경례를 받을 수 없었다. 오닐 때문에 보딩을 하지 못한 에녹스에게 반대쪽에서 보딩을 해 와 던지는 칼날을 피해야만 했으니까. "!"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놀라 굳어 있는 오닐의 앞으로 에녹스의 커트라스와 얼굴이 붉은 해적의 커트라스가 불꽃을 일으키며 정신 없이 부딪쳤다. 하지만 한낱 해적이 태양 제독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지도 않을 짧은 시간에 해적을 해치우며 다른 녀석을 붙잡기 위해 분주히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한 명. 또 한 명. 오닐은 그의 검술에 감동마저 느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금의 낭비하는 움직임도 없이, 정확한 스피드와 기술로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한다. 그렇게 그는 혼자서 열 명분의 활약을 선보이며 해적선 로맨틱 로즈호를 자신의 경력에 보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완전히 매료된 부하를 한 명 가지는 것도. 그 날 이후 오닐은 에녹스의 마음에 들려 온갖 궂은 일을 떠맡고 검술 연습도 열심히 하며 어떻게든 그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받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고 이제는 해적을 본다 해도 겁이 나기는커녕 한 놈이라도 더 잡아야한다는 의지만이 불타올랐다. 지금 블랙 버드호를 마주하기 전까지 오닐이 겪은 해적선은 모두 다섯이었고, 다섯 개의 해적선에서 그는 열 명의 해적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고로 더 이상 해적 따위, 그에게 공포를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로지 에녹스 제독에게 공로치하를 받을 수 있는 '디딤돌' 밖에는. "드디어 놈들이 올라왔다! 모두들 무기를 손에 들어라. 올라오는 놈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베 버려라. 붉은 얼굴과 구레나룻의 해적 따위, 진열을 다듬고 군복을 입은 너희들 앞에 무력하다! 나가라 병사들이여! 나가자 플라잉 클라우드호!!!!" "우와와아아아아!!!!!!!!" 등뒤에서 에녹스 제독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힘을 얻은 대원들이 무기를 높이 쳐들고 플라잉 클라우드에 하나 둘씩 올라오고 있는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곤 곧바로 누가 누군지도 모를 난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적들의 더러운 셔츠와 해군의 군복은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아군을 못 알아봐 동족상잔을 하는 비극만은 피할 수 있었다. 오닐 역시 혼란스러운 전장 안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여 턱수염을 길게 길러 세 갈래로 우스꽝스럽게 땋은 해적 하나와 대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뛰어난 실력의 사내는 아니었다. 전에 겪은 놈들에 비하면 조금 뛰어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다. "으악!!" 턱수염의 사내가 오닐의 검에 베어져 쓰러지고, 오닐은 다음 적을 물색하기 위해 혼전하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를 보았다. 남자는 다른 사람보다 두 배는 됨직한 빠른 스피드로 전진하며 누구보다 앞장서 플라잉 클라우드 호를 장악하고 있었다. 검술 또한 매우 뛰어나, 그를 막아서는 플라잉 클라우드의 대원들이 오닐이 본 것만 해도 벌써 넷 쓰러졌다. 뒤에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옷을 입은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과 손을 잡은 채, 그는 그렇게 오닐을 향해 다이렉트로 전진하고 있었다. 매우 뛰어난 자였다. 그래. 마치. 에녹스 제독과 같이. '이게, 대체?' 오닐은 눈앞에서 다가오는 에녹스 제독을 보며 처음엔 반가운 마음에 입을 열고 벙긋 웃었다. 물론 그는 오닐의 웃음에 화답을 하지는 않았다. 오닐은 그래도 좋았다. 지난날처럼 그의 활약상을 눈앞에서 직접 보게되는 것이 행복했다. 오늘은 '보물'인가를 지키기 위해 메인 데크에서 총 지휘를 한다고 하더니 그게 아니셨나.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에녹스 제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오닐의 등뒤에서 들렸고 눈앞의 에녹스 제독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우리 쪽 아군을 베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왜? 분명 에녹스 제독인데. 왜 우리편을? 오닐 뿐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지 자신들을 베어오는 에녹스 제독에게 차마 대항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뛰어난 실력 탓도 있지만 그것을 논할 수 없는 것이 대원들은 그의 얼굴을 보고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당연했다. 자신의 상관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에게 칼을 들 수 있는 군인이 몇이나 있을까. 백금을 녹인 듯한 아름다운 은발. 무의식중에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맑고 푸른 눈동자. 지나치게 곧고 높은 쭉 뻗은 콧날과 남자다운 곡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입술도. 모두 에녹스 제독의 얼굴이었다. 그럼 저 뒤에서 들리는 에녹스 제독의 목소리는 무어란 말인가? "저, 저게 블랙 버드…에녹스 제독이잖아?" "그러게? 야, 이게 어찌된 일이야? 제독께서 지금 블링크를 죽였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당황하지 마라! 저 자는 내가 아니다! 너희들의 상관이 아니란 말이다! 공격해! 검을 든 손을 놓지 마!! 저 얼굴은 내가 아니야. 저것은 분장이다! 너희들을 혼란시키기 위한 놈의 작전이야!" 당황해하는 대원들 사이로 격분한 듯한 에녹스 제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닐을 비롯한 대원들은 그런 에녹스 제독의 말에 더욱더 당황되는 걸 느꼈다. 분장이라고? 저렇게 완벽한 분장이 있을 수 있나? 에녹스 제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등뒤에서 들렸지만 대원들은 차마 눈앞의 그를 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등뒤에서 누가 내는지 모를 목소리보다는 눈앞의 실물을 더 믿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니까. 오닐은 서서히 자신 쪽으로 다가오며 무척이나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에녹스 제독을 보니 지난날이 생각났다. 그래. 자신이 처음 이 배에 타 항해를 시작한 날. 첫 날부터 재수 없게 해적선에 걸려 싸우지 않으면 안됐지. 평소엔 전혀 없던 멀미마저 생기고 마구 토하고 있을 때, 그 때 에녹스 제독이 도와주셨었다. 그래. 꼭 저런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야. 이상하다. 눈앞에 있던 동료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에녹스 제독이 걸어온 자리에는 동료들의 시체가 점점이 놓여져 마치 그가 걸어온 행적을 말해주는 듯 했다. 그는 저 날의 일을 재생하듯 너무도 즐거운 미소로 오닐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씨익. 모양 좋은 입술이 양쪽으로 밀어 올라가며 그 하얗고 고른 치열이 보인다. 아. 치열이 보일 정도라니. 제독께서 정말로 나에게 가까이 오셨나 보다. 그런데 옷차림도 이상하다. 군복에 저런 망토는 어울리지 않는데. 망토 속의 옷도 왠지 군복이 아닌 듯, 색이 이상하다. 그리고, 제독의 검도 이상하다. 왜. 자신의 목을 향해 그어지고 있는 건지. 오닐은 알 수가 없었다. 영원히.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가입은 2004년 4월 10일부터 15일까지입니다. 가입인사 적어주세요!::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82 2389 160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18~1권 완결까지 (3) * * * "안 돼 !!!!!!!!" 에녹스는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소리를 질렀다. 열 다섯. 놈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라 착각해 손의 힘을 빼다가 순식간에 목숨을 뺏긴 부하가 벌써 열 다섯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저 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리 등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줘도 대원들은 눈앞에서 웃고있는 자신과 같은 얼굴에 방심하고 칼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죽는다. "제길! 저 놈이 내 행세를 하며 내 부하들을 죽이고 있어.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다. 더 이상 개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내려갈 수밖에. 로딘. 갑판으로 내려간다!" "예? 그러나 제독! 보물을 보호해야 한다면서요!" "나와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에 한 말이었다. 헌데 이대로 있다가는 놈의 얼굴 하나 때문에 부대가 전멸하게 생겼다. 놈의 승무원들은 보통의 해적과는 달리 제법 교육을 받은 놈들이야. 당황한 상태의 혼란스러운 부대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고. 이대로 있다가는 대원들이 전멸 당해 놈들에게 메인 데크가 포위되고 말 것이다. 내려간다. 되든 안 되든 '보물'을 데리고 내려가 저 놈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말 테다!" "제독!!" 자신의 의견은 기다리지도 않고 할 말이 끝나자마자 난간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에녹스의 모습에 로딘은 야속하다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계속 에녹스의 곁을 지켰던 로딘 조차도 순간 에녹스가 왜 저기 내려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 대원들은 오죽할까. 아마 철석같이 눈앞의 저 해적이 에녹스 제독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어, 파크!!" 옆에 서 있던 검은 피부의 라디라는 소년이 상관이 끌고 가는 제왕의 보물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아무리 험한 슬럼에서 자랐다고 해도 칼과 총이 난무하는 교전장으로 주저조차 하지 않고 달려나가다니. 역시 저 소년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어린 녀석들이라면 물러날 것도 같은데 친구 하나를 구하기 위해 무장한 해군들과 대립하는 것도 그렇고, 남자라곤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저 제독이 이상하게 집착을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지금은 교전이 먼저다. 로딘은 그러나 최종 지휘관이 자리를 비운 메인 데크를 차마 비울 수가 없었다. 저 감정에 앞선 상관이 나가 저 사내와 싸우다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최종 책임자는 바로 로딘이 될 테니 로딘은 그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와 대적하러 간 상관의 행운을 빌 수밖에 없었다. "으악!" 그의 커트라스에 넋을 놓고 있던 플라잉 클라우드 호의 대원이 또 한 명 피를 흘리며 갑판에 쓰러졌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왜'라는 의문을 표현하듯 크게 뜨여 있었고, 남자는 그들의 표정에 잔인한 미소로 화답하며 자신의 칼로 대답을 해주었다. 에녹스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남자의 커트라스에 당한 대원이 이십 명을 넘어섰고, 처음엔 이상하게만 생각했던 대원들이 하나 둘 이상한 망토를 걸친 상관에게 칼을 들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 남자는 거침없이 휘두르던 커트라스를 잠시 내려놓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분명 눈앞에 상관의 얼굴을 보고 있음에도 등뒤에서 들리는 에녹스의 목소리에 놀란 대원들 또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경악을 뜻하는 침묵. 그것은 비단 플라잉 클라우드 호의 선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 블랙 버드호의, 자신의 선장의 얼굴을 알고 있는 선원들도 또한 에녹스 제독의 얼굴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부터, 보딩을 할 때부터 선장의 얼굴을 보고 석상이라도 된 듯 굳어있는 녀석들이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이유였던가. 그렇다면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었다. 왜냐하면, 눈앞의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미남자의 얼굴은 자신들이 매일 질리도록 보고 있던 블랙 버드호의 선장, 블랙 버드의 얼굴이었으니까. "A hoy! 만나서 반갑군. 태양 제독 에녹스 경." "거기까지 해라. 내 면상으로 우리 대원들을 속여먹다니. 추악한 해적 놈 같으니라고. 너희들의 수법이란 늘 그 따위지." "그것 참 미안하게 됐군. 내 조악한 머리로는 이런 방법밖엔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야. 위대하신 제독 에녹스 리엔 팰러딘 경." 같은 얼굴. 같은 머리색. 같은 체형. 듣기에 따라 같게도 들리는 목소리까지. 그들은 경악하고 있는 양 배의 선원들과 달리 얼굴을 대면하는데 전혀 스스럼이 없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고도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운 대면이었다. 허나 그들은 분명 처음 보는 사이. 분명 내심으로는 놀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에녹스는 기선 제압을 위해 주먹을 꽉 쥐고 눈앞의 레플리카에게 씹어뱉듯 말했다. "…좀비 같은 놈.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최악의 방법으로 세상에 그 존재를 과시하다니. 참으로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치욕스럽기 그지없군." "하." 차가운 욕설에도 불구하고 블랙 버드는 연신 즐거운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에녹스 역시 즐거울 만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참 아까부터 미안하게 됐는걸. 하지만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주겠어? 이대로 평생 네 그림자로 얼굴 한 번 세상에 못 디밀고 살다갈 순 없잖아? 어.찌.됐.든 살아 남았으니. 비록 네게는 불행일지라도." "과연 그렇다." "네가 생각해도 그런가?" "과연 내게는 불행이라는 뜻이다." "저런. 애석한걸."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가 이 자는! 에녹스는 분함에 이를 갈았지만 블랙 버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에녹스의 얼굴을 직시할 뿐이었다. 그 웃음이 왠지 자신에게는 없는 여유로 보이는 듯 해 에녹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도대체 뭐 하는 자인가. 도대체 왜. 왜 근 30년 가까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어째서 지금 이 세상을 치고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목적이 무엇이어서. 남자의 비밀스런 존재에 대한 것과 함께 이 남자가 왜 이 시점에서 등장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던 중, 에녹스는 남자의 등뒤에서 희끗거리는 한 인영을 보았다. 곁에 오는 사람은 가리지 않고 다 베었을 텐데 저 정도로 근접한 자가 있다니.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자는?" "? 아아." 에녹스의 말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블랙 버드는 뒤에 서 있던 가녀린 몸의 누군가를 앞으로 끌어냈다. 거친 몸짓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듯 두 눈을 꼭 감고 붉은 입술을 깨문 채 작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거 소개가 늦었군. 인사해.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먼저 만났을 성스러운 분이시지. 그래. 세인트 아이(성안)이라고 하면 알겠지?" "성안(聖眼)!! 역시 네놈의 목적은 제왕의 보물이었나!!"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보르부 수도원에서 성안인 테이어드 수도사를 납치한 것은 역시 저 남자였다. 에녹스는 자신이 예감했던 것이 하나 하나 맞아떨어지면서 그가 이 배를 공격한 이유도 단숨에 알아차렸다. 아마도 자신이 가지고 있을 정보통을 통해 오늘 이 배에서 보물을 찾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성안을 이끌고 보물을 빼앗으러 온 것이겠지. 과연 뛰어난 정보력과 추진력. 해적이라고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래. 이봐 세인트 아이. 드디어 네가 밥값을 할 시간이다. 말 해봐. 이곳에 '보물'이 있나?" "……." 테이어드는 다짜고짜 자신을 옆구리에 끼더니 어딘가로 달려와 누군가를 베는 것이 명백한 끔찍한 소리와 피 냄새를 안겨준 남자 때문에 두려움과 역함에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테이어드가 힘들어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밥.값.을 하라고 했다. 그동안 자신의 배에 무임승차하여 밥을 얻어먹은 값을. 즉. 자신의 존재 이유인 제왕의 보물을 식별하는 일을. 그러나 그 무임승차와 식사가 자신이 절대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까 라고 테이어드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었지만 자신이 잠시 생각을 하는 틈을 참지 못하고 잡고 있던 손을 뒤로 훽 꺾는 남자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말대로 밥값을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만약 더 시간을 끈다면 남자는 눈만 있으면 된다며 자신의 팔다리쯤 아주 쉽게 절단을 내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까. 빛. 빛이 보였다. 그것은 기실 테이어드가 이 배에 가까이 올 때부터, 즉 자신의 선실에서 블랙 버드에게 비밀스러운 곳을 희롱 당할 때부터 느끼고 있던 빛이었다. 처음엔 햇빛이 어딘가에서 새는 것인가 라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심장의 박동이, 미칠 듯이 올라가는 혈압이, '드디어'라고 말하는 듯한 온 몸의 떨림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기에 있다고. '그것'이 저기에 있다고. 그리고 이 배를 탔을 때부터 그 빛은 거의 섬광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을 잃은 새카만 테이어드의 시야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온 몸을. "어때? 이 배에 제왕의 보물이 타고 있는가 성인이여. 어서 말해라." 듣기에 따라선 매우 다정하게도 들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남자는 테이어드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온 몸을 속박하고 있는 지배자의 목소리로. 섬광. 섬광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그 빛은 위력을 덜하며 그곳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준다. 바로 정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제 눈앞에." "역시!!" "시끄러워! 뭐라고 하는 거냐 침입자 주제에! 네 놈은 제왕의 보물 따위 손끝도 건드려보지 못하고 이 배에서 주검으로 실려나가게 될 것이다. 아니, 덕킹이나 킬 홀링을 해도 좋겠지. 기대해도 좋아. 아주 오랜 시간 물에 담궈 주지. 그 얼굴이 나와 같다고 선원들이 다시는 착각할 수 없도록 말이야." "이런 이런. 그것 참 영광이로군. 그럼 난 반드시 바다에서 기어 나와 친히 너의 머리를 잘라 내 배의 뱃전에 걸어주지. 그래. 블랙 비어드처럼 말이야." "그럼 네가 메이나드라도 된다는 거냐. 해적 나부랭이 주제에 메이나드를 자청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한낱 블랙 버드 주제에." 독특한 억양을 써서 자신을 폄하하는 에녹스의 발언에 연신 즐거운 듯 웃고 있던 블랙 버드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분명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끈한 피부를 지니고 있는 자신을 흑인 노예에 비유하니 거슬리는 것이겠지. 그러나 역시 대 해적답게 금새 평정을 되찾고 예의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과연. 바다의 검은 독수리는 노련하다는 것인가. "뭐 어쩔 수 없지. 내 부모는 정말 '블랙 버드'였으니." "뭐라고?" 무슨 헛소리인가. 자신이 알기로 저 자의 부모는 분명히. "아아. 이제 잡담은 그만.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하지. 어차피 이름조차 얻지 못한 이런 미천한 놈에 대해 시시콜콜 따질 필요는 없잖아? 그래. 네 뒤에 있는 그 금발머리의 소년이 제왕의 보물인가? 그렇다면 내가 가져가겠다. 제왕엔 흥미가 없지만 보물엔 흥미가 있거든.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을 뺏는 일에도." "헛소릴!" 에녹스는 자신이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부하들에게 호위 받고 있는 파크라는 소년을 주시하며 미소짓는 블랙 버드의 모습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들고있던 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 이 자의 목표는 제왕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해적들을 없애기 위해 찾은 제왕의 보물. 해적 따위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절대로. "역시 그냥 줄 수는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억지로라도 가져야겠지. 너무 원망하지는 말기를." "미친! 너 따위에게 뺏길 만큼 이 에녹스, 물렁하지 않다! 대원들! 보물을 지켜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 내가 뚫리더라도 절대로 그 소년을 빼앗기면 안 된다! 알겠나!!" "예스, 써!!!!" 호탕한 해병대의 대답에 에녹스는 마음이 든든해져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얼굴에 미소를 올렸다. 대원들 또한 에녹스의 미소를 보고 진정한 자신의 상관을 되찾은 듯 해 사기가 올라갔다. 이 모습을 보면 아마도 조잡한 해적들은 분명 당황하여 진열을 흐트러트리며 그 허술함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저 자와의 맞대결에서 성공한 뒤, 당황해하고 있는 해적들을 부하들이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완벽하다. 해적 따위, 저 놈은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차피 모두 페스트 균 투성이의 지저분하고 천한, 절대로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는 놈들일 뿐이었다. "…흠. 재미있군. 어디 한 번 막아보시지. 나는 견고하고 단단한 범선일수록 더욱 완벽하고 잔인하게 박살내는 취미를 가지고 있거든. 그게 그 동안 나를 대신해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녀석의 배라면 더욱더!!" "흥! 헛소리!!" 그 소리와 함께 휴강에 접어든 상태에서 두 배의 선장들 그것도 같은 얼굴의 의 맞대결은 시작되었다. 라디는 파크가 서 있는 갑판 중앙으로 가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미 구경꾼들(대원들)이 라디의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녹스 제독이 파크를 끌고 가자마자 바로 뒤따라 나왔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도대체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나고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빡빡하게 모여있는 것일까. 그것도 교전 도중에. 대강의 목소리들을 듣기에 아마도 에녹스 제독을 닮은 그.남.자.가 와 있는 듯 했다. 게다가 그 남자 역시 에녹스 제독에게서 지겹게 들은 성안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저 남자도 파크를 노리고 이 배에 그렇게 캐논포를 퍼부었던 듯 했다. 도대체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단지 양쪽 눈 색이 다를 뿐인데 평범한 소년 파크를 두고 왜 이리 난리인 건지. 서로의 배에 대포까지 퍼부으면서 말이다. 아무튼 이 소란은 라디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였다. 지금 아무래도 앞에서는 그 남자와 에녹스 제독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는데 그 때문에 온 시선이 거기에 몰려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파크를 몰래 뒤로 빼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마사 아주머니를 모시고 이 소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숨어살면 될 것이다. 그럼 저들도 포기하고 파크와 자신은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테지. 라디는 한 치의 틈도 없는 사람의 살 사이를 어떻게든 부대껴 나가며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타이밍이 중요한 일이기에 아까부터 심장이 긴장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니, 두근거리는 것은 다른 이유인 듯도 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을 제치고 나면 라디의 눈에 보일, 또 하나의 '에녹스 제독'.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이 돈벌이 수단으로 썼던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그 남자가. 아마도 라디의 두근거림의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왜 이렇게 떨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남자가 자신을 기억이나 할른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잘 기억해 전에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해 보자마자 바로 죽이려 들 것인지, 그도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뭘 어쩐다는 것일까. 그는 지금 라디와 상관없이 에녹스 제독의 말마따나 제왕의 보물이란 것을 찾으러 온 참이었다. 아마 라디 따위 머리의 구석 어디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텐데 왜 자신은 혼자 헛물을 켜고 있는 것인지. 아마도 지난 번 남자에게 워낙 호된 꼴을 당한지라 조금 과민반응이 되어버린 듯 했다. 그리고, 같은 얼굴로 너무도 다른 생활과 표정을 하고 있는 에녹스 제독을 보고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는 지도. 어쨌든 지금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이 수많은 장정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가야 에녹스 제독의 뒤에서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파크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라디는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하지 않도록 고개를 붕붕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그리고 전혀 진전이 없는 듯 했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사람으로 꽉 차 있는 갑판의 중앙부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고, 단련된 검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녹스는 블랙 버드를 해적 나부랭이라고 과소 평가했던 자신을 속으로 탓했다. 인정하고 싶지만 남자의 실력은 대단했다. 여지껏 검술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일이 없는 에녹스조차 애를 먹고 있을 정도로. 에녹스의 검은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정통 스워드인 반면 남자의 검은 해적들이 주로 쓰는 일반 커트라스일 뿐이었다. 날도 아무리 잘 다듬었다고 해도 자신의 것보단 무디고 스피드 또한 좋은 금속을 쓴 자신의 검을 앞설 리가 없었다. 그런데 밀리고 있었다. 그래.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남자는 에녹스에게 밀리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에녹스를 능가하고 있었다. 많은 경험으로 한 두 번만 검을 마주해도 어느 정도 승패를 예감할 수 있는 에녹스는 남자와 검을 마주친 순간부터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쪽의 패배를 예감했기 때문이다.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군사교육과도 가까운 호된 검술 교육을 받은 자신의 패배를 말이다. 에녹스는 남자에게 밀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강한 치욕감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뒤지고 있다니. 이 내가 레플리카 따위에게 뒤지고 있다니. 여지껏 누구에게도, 어느 때에도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이 정도란 말인가 이 괴물같은 남자는! 절망감은 플라잉 클라우드호의 선원들에게 또한 엄습했다. 그들은 자신의 상관이 밀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에녹스에게 검을 사사 받은 대원들은 그의 움직임이 평소 같지 않은걸 느끼고 드디어 저 완벽한 이에게 패배가 찾아오는 것인가 하고 조심스레 예감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믿고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챙! 챙! 하지만 이제는 검을 모르는 이의 눈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치고 있는 커트라스와 스워드였지만 대세는 있었다. 블랙 버드는 여전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에녹스를 갑판 사이드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진영을 빼앗긴 것을 의미했다. 고로, 자신들의 선장이 적의 선장에게 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에녹스는 다년간의 전투 경험으로 아직 포기는 하지 않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패배감으로 커다란 당혹과 상실감을 맛보고 있는 와중이기는 했지만 에녹스는 해군 초년병이 아닌 총 지휘 제독이었다. 자신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배가 장악 당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에녹스는 남자에게 순순히 밀리면서도 남자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남자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니 빈틈이 생긴다. 그 때 일격을 노린다. 그 때가 바로 에녹스가 노리고 있는 최후의 타계책이었다. 물론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런데 그때, 정말 거짓말처럼 기회가 생겼다. 에녹스의 발이 뒤에 모여 이쪽을 보고있는 대원들과 열 걸음도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누구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아예 에녹스의 부하들의 절망적인 표정을 감상하기까지 했다. "어떤가 성안!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제왕의 보물이 맞겠지! 저 소년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보물 확실한 거겠지! 말해봐!" 남자는 이젠 여전히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눈먼 자에게 질문까지 하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성안이라 불린 긴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소년은, 자신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들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자신의 뒤에 있는 파크라는 소년을 보고 뭔가를 느낀 것이겠지. 저 자는 자신이 갖고 있던 대용품 돌이 아닌 진짜 성안이니까. 제길. 제대로 제왕의 보물을 찾은 것은 기뻤지만 이젠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아니 찾더라도 이 남자가 없을 때 찾을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자신은 이 남자와 검을 마주하고 있고 이미 실력은 판가름난 듯 하지만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는 남자를 막아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자신의 뒤에 있는 병사들을 힐끔거리면서도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블랙버드의 실력에 정말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며 에녹스가 희망의 끈을 놓으려 할 때. 남자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 유일무이의 한순간. 에녹스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 나온 영웅답게 그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일격필살에 들어갔다. 아무리 블랙 버드라 할 지라도 방심한 때를 노린 필살기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큭!!" '좋았어!!' 예상대로 공격은 제대로 먹혀 들어가 검에 꽤나 묵직한 느낌이 닿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꽤나 깊이 베였을 것이다. 남자의 인간 같지도 않은 반사신경 때문에 급소나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말이다. "제독님!! 만세! 에녹스 제독 만세!!" "선장! 괜찮으세요 선장?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양쪽의 대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에녹스의 진영은 죽음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표정이었고,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은 단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의 선장을 걱정했다. 에녹스 또한 어찌 운이 좋아 공격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남자가 왜 갑자기 방심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분명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절망하는 플라잉 클라우드호의 선원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추고 그 표정은 놀라움으로 가득했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 남자를 이 긴박한 순간에서 검을 멈추게 했을까? 예상되는 것은 제왕의 보물이었다. 그가 시선을 멈춘 곳은 에녹스의 바로 뒤 쪽, 제왕의 보물이 서 있는 쪽이었고 그 뒤에는 수많은 대원들이 보물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보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 쪽으로는 벌써 여러 번 시선을 던진 뒤였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제왕의 보물 뒤로, 뭔가 놀라운 것이 보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제독! 조심하십시오!" "큭!" "바보같이…싸움 중에 정신을 팔다니, 바보짓을 했군 그래." 그러나 상처 입은 야수라도 맹수는 맹수. 남자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고 있던 에녹스에게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을 펼쳐왔다. 그래, 한 군데 쯤 검상을 입었다고 승리를 할 수 있을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수많은 전투를 치러오며 이런 부상쯤 이젠 가볍게 참을 수 있을 만큼 면역이 생겼는지도 모르지. 남자의 방심을 노릴 때는 언제고 이젠 자신이 딴 생각을 하느라 눈앞에 적을 대면하고 방심을 했다. 에녹스는 크게 반성하며 다시금 검을 세게 잡았다. 간신히 잡은 기회다. 이것을 허사로 돌려서는 안 된다. 여세를 몰아서 단번에 놈을 전투불능상태로 만들어야만 했다. "좋아…어차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간다 레플리카여. 이 기회에 언데드인 네놈을 데드로 만들어주마!!" 힘찬 기세로 갑판을 박차 오르며, 에녹스는 이 한번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처음엔 매일밤 술을 마시고 생각을 하던 것 때문에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인가 했다. 분명 뛰어난 실력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에녹스였기에 즐거운 심정으로 놈의 부하들의 표정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보였다. 라디. 라고 했었다. 패밀리 네임은 알지 못했지만 분명 퍼스트 네임은 라디. 그것이었다. 약 한달 전, 성안을 보르부 수도원에서 빼내오기 위해 상륙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특이한 외모의 동방의 소년. 처음임에도 꽤나 예민한 반응과 더러운 옷으로 가려진 몸은 예상외로 늘씬하고 부드러웠으며 제법 단련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험하디 험한 슬럼가에서는 느린 발로 생활하기가 불편했을 테니까. 처음 접해보는 동방의 아이였기에 흥미가 동해 안아보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었고 감도 또한 뛰어났다. 하지만 스네이크에게 절묘한 타이밍에 방해를 받아 미처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게도 그 뒤로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 그리고 그런 밤이면 으레 생각나는 동방의 부드러운 살결과 신비스런 검은 눈동자. 자신의 의지를 굽히려 하지 않는 정직한 눈빛과 결이 굵지만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짧게 친 검은머리가. 계속 생각이 났었다. 그렇게 매일 누군가의 몸과 얼굴이 아른거리자, 계속되는 불면증에 그는 이 동방의 소년에게 증오심마저 싹트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눈에 보인 것이다. 그 소년은 빼곡이 에녹스라는 놈의 뒤를 메우고 있던 플라잉 클라우드호의 선원들을 비집고 그 작은 얼굴을 무언가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달 전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듯 키가 약간 커 보였고, 땡볕 아래서 일을 했는지 부드러운 밀 빛 피부는 전보다 약간 그을려 있었다. 그리곤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사슴의 그것처럼 한없기 맑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광채를 눈에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복부에서 화끈하면서도 서걱거리는 소름끼치는 느낌이 치달았다. 놈의 검에 베인 것이었다. 다행히 평소의 단련으로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느낌으로 보나 출혈의 양으로 보나 꽤나 깊게 베인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환상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소년을 쳐다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봉착한 생명의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자신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달은 놈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매섭게 공격을 해왔다.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알자 본 기량보다 더한 실력을 발휘하며 블랙 버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적어도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고 방어 또한 잘 하고 있었지만 출혈이 더 심해지면 빈혈이 올 것이고 서서히 복부에서 뇌로 밀려오고 있는 통증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블랙 버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스네이크!!" 블랙 버드의 목소리를 들은 스네이크는 깜짝 놀라며 앞으로 다가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출혈 때문인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시체와도 같았다. 상황이 아무래도 좋지 않게 돌아가는 듯 싶었다. 그가 자신을 부를 때에는 뭔가 위급한 상황일 때 결정적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여전히 에녹스와 검을 맞대며 뒤로 내밀어진 블랙 버드의 왼손은 블랙 버드와 스네이크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암호를 형상화하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스네이크는 그의 의중을 깨닫자 마자 옆에 있던 연락책 녀석을 시켜 블랙 버드호로 신호를 보내게 했다. 일련의 행동들로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은 자신들의 선장과 부선장이 하는 일을 알 수가 없어 불안감에 서성거리며 부선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잠깐…저건 뭐야?" "응? 뭐가…아니 저건!" "소타선이다! 소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독!!" "소타선이라고?" 에녹스는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던 사지가 탁 하고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막 놈과의 대결이 승리로 이끌어질 참이었는데 당장 소타선에 대한 대비부터 해야하게 생겼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됐는데. 이대로 승부를 다음으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 소타선 뿐만 아니라 블랙 버드호에서는 대포까지 다시 쏘아대며 보딩이 아닌 원거리 공격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상대방의 배를 포획하는 마지막 단계인 보딩에서 다시 대포공격을 하다니. 물러설 생각이던가 블랙 버드. "포기인가?" "그럴 리가." 폭발물을 싣고 다가오고 있는 배와 대포를 쏘라는 명령을 한 장본인이 눈앞에서 드디어 약간의 땀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입술이 파래지고 있는 것이 역시나 출혈이 심한 것 같았다. 칼을 맞대고 있는 만큼 근거리에 있는 에녹스는 역시 아까부터 발 밑이 미끄러운 건 이 놈의 피 때문이었어, 하고 블랙 버드의 부상의 심각도를 파악했다. 하긴 심각하지 않으면 저 정도의 사내가 승부를 포기하고 소타선을 불러들일 리 만무했겠지. "아쉽지만 승부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듯 하군. 동.생.과의 첫 대면이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 쪽 또한 그다지 여유 있는 직업은 아닌 듯 하고. 그러니 이쯤에서 결론을 내도록 하지." 챙! 검을 맞댄 채 시선 싸움을 하고 있던 두 남자는 동시에 칼을 밀어내며 반탄력으로 크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에녹스는 올 것이 왔군 하는 심정으로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려 했다. 소타선이 오고 있는 이상 다 죽기 싫으면 피하거나 불을 끄거나 해야할 테니까. "그래. 동생이라느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아쉽지만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 "그럼, 간다." "!" 에녹스는 분명 승부를 그만두는 것이라 생각해 칼집에 칼을 넣으려다 예상을 깨고 들려온 남자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일단 급한 대로 칼을 잡고 방어자세를 취했다. 간다,라니. 저 부상을 입고 아직도 덤빌 생각을 하고있단 말인가. 벌써 온 갑판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게 그의 피이거늘. 저 정도로 흘렸다면 이미 시야가 흐리고 현기증을 느끼고 있을 텐데. "타앗!" "우왓! 미친 놈! 소타선이 오고 있다니까!" "그러니 빨리 너를 쓰러트리고 보물을 데리고 가야겠지!" 챙! 챙! 챙! 챙! 다량의 피를 흘린 사람답지 않게 무서운 기세로 블랙 버드가 에녹스에게 검을 부딪쳐 왔다. 이제 승부가 끝난 거라 생각해 신경을 느슨히 하고 있던 에녹스는 방어하기에만 급급하여 공격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조금 전처럼 다시 블랙 버드에게 밀려 부하들이 밀집해 있는 갑판 후미로 물러나고 있었다. 폭탄을 실은 소타선은 다가오고, 눈앞의 커트라스도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쉴 틈 없이 들어오고, 사면초가에 빠져버린 에녹스였다. "선장!! 지금입니다!!" "알았다!" "? 크윽!!!" 챙! 퍼억!! 스네이크라 불린 뱀을 닮은 사내가 블랙 버드를 부르자 그는 그 대답에 호명하며 에녹스에게 기형적인 공격을 했다. 커트라스의 칼날을 마주친 상태에서 갑자기 힘을 빼더니 팔꿈치를 에녹스의 턱에 직격 시킨 것이다. 순간 눈앞이 갈라지며 균형감을 잃은 에녹스는 갑판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순간 '죽는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눈을 질끈 감으려 했지만, 이내 대 아르센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서 꼴사납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 당당하게 눈을 뜨고 커트라스의 칼날을 받았다. "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에녹스의 시야에 블랙 버드의 커트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그가 고개를 돌려 블랙 버드의 인영을 뒤쫓자, 자신의 뒤편으로 길게 펄럭이는 그의 망토가 보였다. 그리고, 에녹스의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순식간에 주륵, 하고 흘렀다. 뭔가 짐작가는 게 있어서 에녹스는 배의 기둥을 잡고 소타선이 오고 있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소타선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들고 온 물통으로 불을 모두 끈 뒤 어느새 내려 탄 선원들을 태우고 있는 Gig만이 바다에 떠 있을 뿐이었다. " 보물!! 제왕의 보물을 지켜라! 놈! 시간을 끌기 위해서 나와 다시 싸운 것이었던가! 절대 놈에게 넘겨선 안 돼! 보물을 지켜!!!!" 에녹스는 균형감을 되찾자 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뒤편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었다. 놈은 이미 제왕의 보물을 지키고 있던 근처의 대원들을 모두 벤 뒤 겁에 질려 굳어있는 보물의 손을 잡아채고 있었다. 여전히 꽉 쥐고 있는 복부에서는 손가락을 흘러 넘칠 만큼 피가 흐르고 있는데 저 스피드와 정확성이라니. 저 놈은 역시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건 말건 제왕의 보물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불행히도 저 자와 얽힌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이다 더럽고 치졸한 해적!!" 블랙 버드는 에녹스의 말은 무시하고 버둥대는 파크를 가볍게 한 손으로 들어올리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 이미 꽤 가까운 거리에 다가와 있는 블랙 버드호로 건너가기 위해 마스트에 고정된 로프 중 하나를 잡았다. 아마도 배로 가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빠를 거라 생각한 듯 했다. 에녹스는 그가 저 로프를 잡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 라는 생각에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블랙 버드가 서 있는 갑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무리였다. 이 거리라면 블랙 버드가 로프를 타고 자신의 배에 내린 다음에야 그가 서 있는 자리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이대로 제왕의 보물을 해적에게 넘겨야 한다는 건가!! "안 돼! 파크를 두고 가! 파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 "!" 같은 얼굴의 두 남자는 어디선가 튀어나온 소년의 목소리에 놀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디!!" 품안에 있던 소년이 부르는 이름을 듣고 블랙 버드는 조금 전에 본 것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소년 또한 과다한 출혈로 인한 환영이 아니라는 것을. 왜 여기에. 저 소년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우연이라 해도 이런 우연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배에, 그것도 자신이 데려가는 소년의 친구로. 하긴 첫 만남부터가 지나친 우연의 연속이었다. 돈을 벌려 멍청한 해적들을 속여 블랙 버드의 정보를 팔았던 소년. 하지만 정말 우연하게도 소년이 말한 외모는 블랙 버드의 외모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자신은 저 소년을 잡아 정체를 물었지만 결과는 어이없게도 에녹스란 자를 동경해서 그 자에게 해적을 잡게 해주려고 말한 외모라는 것이었다. 분노에 차서 힘으로 소년을 지배한 뒤 가는 목을 비틀어 생명줄을 끊어주리라 결심했을 때, 스네이크가 성안을 납치하러 가야한다며 여관방의 문을 노크했었다. 정말. 정말 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랬다. 왜 저 소년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신과 이토록 자주 마주치는 것일까. 하필이면 지금. 이 중요한 시점에서. 그동안 알 수 없는 미련에 집착하며 소년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 때에. "라디! 도와줘! 난 가기 싫어! 라디!!" "파크!! 잇, 당신! 파크를 놔 줘! 그 녀석은 평범한 소년일 뿐이야. 눈 색이 양 쪽 다를 뿐이지 나와 다를 바 없는 녀석일 뿐이라고!! 어서 놔 줘!!" 소년은 성안이 지목한, 제왕의 보물이 틀림없는 소년은 자신의 친구라며 블랙 버드에게 놓고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블랙 버드는 소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등뒤에서 어서 건너오라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저 소년을 잡아서 함께 데리고 갈까' 라는 것뿐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그리고 저 가는 허리를 붙잡아 자신의 품안으로 이끌고 싶다. 그러면, 전에 차마 마음껏 맛보지 못한 그 부드러운 살결을 다시 느낄 수 있겠지. 그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과즙을,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겠지! 블랙 버드는 머리가 몸에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어느새 파크를 안고 있는 손이 아닌 다른 손을 라디에게 내밀고 있었다. 갑작스런 블랙 버드의 행동에 소년이 놀라 쌍꺼풀 없는 선한 눈을 크게 뜬 순간. 푸욱 . "큭!" 블랙 버드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옆구리로 손을 뻗었다. 곧바로 손을 뻗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넘쳐흐르는 피. 굉장한 출혈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계속 출혈을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당장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제서야 블랙 버드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시가 급한 이 때, 자신은 무슨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신이 들자 블랙 버드호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선원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옆을 보자 어느새 옆구리에서 칼날을 꺼내 다시 공격을 하려는 에녹스란 놈이 보였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이 정도로 출혈을 하면 시야도 확보되지 않고 팔 또한 원하는 대로 칼을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했다. 저.아.이.를 데리고!! "왓!!" 블랙 버드는 지나친 출혈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오로지 본능에 의지해 손을 뻗어 한 소년을 잡았다. 그리고,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곧바로 로프를 잡아 뛰어올랐다. 사각, 하면서 머리칼이 잘리는 느낌이 나고 등뒤로 칼바람이 쉭, 하고 불었다. 아마도 조금만 늦었다면 자신의 목은 몸에 붙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선장!" "괜찮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그 때 바로 건너오시지 않고," 블랙 버드는 선원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빈혈 현상으로 귀 울림이 일어나 그들의 말은 웅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품안의 소년만은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게 꼭 쥔 상태였다. 누군가 풀려고 하자 더욱 더 세게 쥐었다. 안 돼. 뺏기지 않을 거다. 이젠 네 자식에게 아무 것도 뺏기지 않을 거야. 그 동안 누려 왔으면 충분하잖아. 이젠 내가 가질 차례야!! "배를…출발해. Ahead!!" 출혈로 인해 체온이 떨어지는 가운데, 품안에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에 안심하며 블랙 버드는 마지막 명령을 하고 정신을 잃었다. 왠지 익숙한,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누군가의 감촉 같다고 느끼면서. 제6장 희망봉으로 "…정신이 드셨습니까?" "……아아." "만 3일을 주무셨습니다. 주무신 게 아니라 혼수상태였지만 어쨌든요." "…항해는?" "선장의 부상과 필요한 물품들 때문에 약 이틀 정도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놈들과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희망봉에 도착하는 시간은 하루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제길." 낮게 욕설을 뱉으며 블랙 버드는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곧 윽…하는 신음과 함께 다시 침대로 누워야 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지 아직도 아물지 않아 있었다. "누워 계십쇼. 의사가 말하길 3일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합디다. 선장, 당신 상처 사이로 내장까지 비집고 나왔었다구요. 그러니 가만히 누워 계십시오." 스네이크의 명령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은 부선장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희망봉에 도착하기 전에는 반드시 본래의 체력을 회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블랙 버드는 체념의 한숨을 장대하게 쉬고 침대에 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보물은?" "예?" "제왕의 보물 말이다. 어디에 있지?" "그야 이 지구상 어딘가에 있겠지요. 살아 있다면요." "…장난하자는 건가." 블랙 버드의 어조가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네이크는 더 이상 비아냥거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저 성질 더러운 선장이라면 불손한 부하를 혼내주기 위해 다시 상처가 벌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검을 드는 것을 자청하리라. "물론 플라잉 클라우드호에 있습니다. 태양 제독과 함께요." "…역시 그런가." 블랙 버드는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쉬고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설마 했지만 자신이 본능이 택한 것이 제왕의 보물이 아니라 도둑 소년이었다니. 자신의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꿈이길 바랬는데 사실이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당신이 어이없게 저 까만 녀석을 데려온 덕분에 남겨진 제왕의 보물은 고스란히 태양 제독의 손으로 넘어갔지요. 아마 녀석도 도대체 선장이 왜 그랬을까 하면서 고민 좀 하고 있을 겁니다. 저희들도 그러니까요." "선원들이?" "물론 제가 알아서 둘러댔습니다. 갑자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고 다니던 놈이 배에 있어 선장이 놀랐는데, 그 잠시를 노리고 제독 놈이 선장에게 부상을 입혔다. 부상으로 인해 손을 쓸 수 없을 때 태양 제독 놈이 보물을 낚아채 갔다. 방법이 없었던 선장은 복수라도 하기 위해 저 까만 놈을 우리 배에 싣고 온 거다, 라고요." "납득하던가?" "그야 녀석들은 배에 복귀하느라 선장 꼴을 못 봤거든요. 그저 늦게 오기에 어찌된 일인가 걱정하는데 선장은 로프를 타고 오는데 왠 까만 놈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있지, 처음에 입었던 부상 외에도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지. 그래서 한 동안 배가 좀 시끄러웠습니다. 지금은 제가 말한 얘기 때문에 다들 그 녀석만 갈구면서 평화를 되찾았지만요." "갈군다고?" "그럼 이뻐할 줄 아셨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 지금 몸에 멍이 안 든 곳이 없을 걸겁니다. 지나가는 놈들마다 다 한 대씩 치고 다니니까요. 아. 살도 좀 빠졌을 겁니다. 하루에 제일 딱딱한 빵 한 조각밖에 안주거든요." "어디 있나!" "……." 기어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자신을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는 선장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스네이크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블랙 버드의 모습을 감상했다. 얼굴은 평소보다 약간 창백하지만 여전히 완벽할 만큼 아름다웠고, 눈빛 또한 평소보다 이글거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실성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선장. 누우십시오." "어디 있냐고 물었다 스네이크. 언제부터 내 말에 불복종하고 다른 말을 꺼낼 정도가 되었지?" 제길. 스네이크는 장대한 흉터가 남아있는 오른쪽 눈썹을 찌푸리며 마음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저놈의 선장은 하여튼 걱정해줘도 난리다. 상처 벌어질까 봐 누우라고 했더니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다. "하아. 최하층 갑판에 흑인 노예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합니다. 그래도 선실은 하나 따로 마련해 줬다고요. 전에 쓰던 감옥이요. 정신 나간 흑인 놈들이 덮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뭐 다른 녀석들은 덮치면 차라리 잘된 거 아니냐고 그 녀석을 못 죽여 안달이기는 하지만… …어어. 어디 가십니까?" 벌떡. 스네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난 블랙 버드가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하지만 굉장히 아픈 것이 분명했다. 저 지독한 인간이 옆구리를 쥐고 걸음은 평소의 절반의 속도도 나지 않았으니까. "녀석에게 간다. 그 정도로 심하게 했다니. 이거야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군." "선장!!" 정말 저 사람 왜 저러나.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나보다. 스네이크는 너무도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블랙 버드 때문에 당황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런 까만 놈 하나 때문에 저 지경이 되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 감옥에 가겠다니. 정말 실성한 게 아니란 말이냐!! "좀, 기다리십시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지금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 "괜찮기는요!! 것봐요. 지금 옷에서 피 베어나오고 있잖습니까! 그거 하얀 옷이라 다 보인다고요! 정말 이러시깁니까?" "내 상처다. 내가 괜찮다는데 웬 말이," "그게 어떻게 선장 혼자의 상처입니까? 제왕의 보물을 차지하겠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선장이 그걸 망치려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도둑놈 하나 때문에! 선장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십시오! 전 다 봤다고요. 그 소년을 보더니 보물을 쥔 손에 힘을 푸는 것을요! 이젠 아예 목적을 상실하신 겁니까! 당신의 억울했던 유년기를 돌아보시란 말입니다!! 그리고 선원들은 어쩌고요. 뭐 물론 개중엔 돈만 보고 온 썩을 놈들도 있지만 나머지 당신 하나만 믿고 있는 놈들은요!!" "……." 블랙 버드는 스네이크의 열변을 문에 기대어 듣다가 그 말이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에 기대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사람이. 역시나 지금 굉장히 안 좋은 상태인 거다. 저 몸을 하고 도대체 어딜 나가겠다는 건지. "…스네이크." "왜요." "미안하다." "뭘요." 답지 않게 쑥스러운 말을 해대다니. 역시나 저 사람 많이 아픈 것이 확실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사실 선원들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몰랐나? 나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저 녀석들도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 돈이나 쾌락을 위해 쫓아오는 것 뿐이야. 충심?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나랑은 상관없이 저들 맘대로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감정일 뿐이다. 내가 책임질 이유는 없어.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나를 무척이나 많이 도와준 사람이야. 너에 대해서라면 어느 정도 동지애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책임감을 갖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하아?" 설마 설마 했지만 저 남자, 성격이 저 정도로 제멋대로 일 줄이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늘 새로이 놀라는 것을 보니 자신도 아직 멀었지 싶다. 왠지 저 성질 못된 남자의 카리스마 하나만 믿고 그를 따르고 있는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장이 자신들을 이렇게 밖에 안 여기고 있다는 것을 과연 알까. 알아서는 안되지 싶다. 물론 저 남자는 안다고 해도 상관 안 하겠지만 그 뒤처리는 다 스네이크의 몫이다. 고로, 이런 얘기는 그저 스네이크의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입 단속을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어이 그 꼬마 놈이 있는 감옥으로 가시겠다 이겁니까?" "아니." "예?" 분명 그러려고 자기 성격 멋대로 라는 것을 피력했겠지 했는데 의외로 블랙 버드는 옆구리를 쥐고 괴로운 듯 인상을 쓰며 스네이크가 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왜 안 가시구요?" "스네이크. 내가 선원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예?" "내 자신의 목표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 희망봉. 희망봉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니 앞으로 3일 동안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도록 하지. 3일이다." "무슨…." 아무리 의사가 3일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피를 그렇게나 흘릴 정도로 깊었던 상처다. 의사가 말한 것은 운신 가능한 날이지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는 날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나 스네이크가 말해봤자 저 선장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저 3일 뒤에 움직여보고 불편한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봐야 알 사람이다 저 블랙 버드라는 남자는. "뭐,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야 보물만 찾으면 되고, 어차피 선장 당신의 몸이니까요." "그래. 나가봐." "예." 정말 자신의 입으로 말한 대로 3일 동안 죽은 듯이 쉬기만 하려는 듯 그가 시체처럼 눈을 감은 채 스네이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라면 나가는 수밖에. 스네이크는 등잔불을 끌까 말까 고민하다가 왠지 켜둬야 할 것 같아서 남겨두고 선장실에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죽은 듯이 자고있는 줄 알았던 선장의 부름만 없었다면. "스네이크." "예?" 돌아보니 자고있는 줄 알았던 그가 앉아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말. 상처 벌어진다는데 왜 자꾸 일어나 앉는지.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배 의사를 올려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 녀석. 반응은 어떤가?" "예?"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어미를 올려 묻자 대답은 안 하고 스네이크의 눈만을 주시한다. 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녀.석.의 얘기인가. "정말.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예에. 말해 드리지요. 참.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그 녀석 선장만큼 지독하고 재미없는 녀석입니다. 왜냐고요? 선원들이 아무리 때리고, 일을 많이 시키고, 욕을 해도 뭣 때문인지 입 꾹 다물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때리는 대로 맞거든요.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선원들이 그 녀석을 진즉에 죽이려고 하기도 했겠지만 암튼. 때려도 울지도 않고 소리도 안 지르고. 게다가 일도 꽤 잘합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슬럼에서 자랐으니 이런 막일이 적성에 맞기도 하겠지요." "그래?" 얼씨구. 스네이크는 왠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듯한 선장의 희색 만연한 얼굴에 기가 막혔다. 저 인간, 정말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니야? 그 놈 깡다구 세다는 데 왜 당신이 좋아해? "예에. 하지만 뭐 이제 슬슬 한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매일 피멍 들도록 맞는 데다, 말씀드렸다시피 식량도 하루에 한 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실신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지요. 어쩔까요? 선장 당신이 원하시면 선원들에게 한 마디 일러두겠습니다만." 전에도 동방의 신비니 어쩌니 하며 온갖 표현을 다 쓰며 안고싶어 했던 놈이니 멍든 몸을 안기는 싫어할 거라 생각해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나오겠거니 했는데, 블랙 버드의 웃고 있는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스네이크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아니." "예?" "그냥 둬라. 내가 쉬는 3일 동안. 그대로 둬." "어째서요?" 당연한 물음에 '그것도 모르나' 라고 말하는 듯한 선장의 눈에 스네이크는 조금 억울해졌다. 내가 당신처럼 제멋대로 이고 성격 더러운 인간의 맘을 어떻게 알겠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 녀석 같은 들짐승들은, 겁이 많아서 무척이나 조심성 있고 사람이 다가가면 손톱을 세우지." "하아?" "허나, 상처 입었을 때나 힘들 때 내미는 손은 거절하지 않아. 그래. 야생짐승과는 또 다른 것이지. 한 번 손맛을 알면 미친 듯이 달라붙어 그 손을 핥아대거든. 들짐승 주제에 애완동물이 되는 거지. 쿡쿡쿡……." 고로, 선원들이 있는 대로 괴롭히게 만들어서 심신을 파김치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그 때 뚜둥! 하고 나타나 영웅 행세를 하며 그 은혜로운 손을 내미시겠다? 스네이크는 새삼 남자의 교활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저 잔인한 남자에게 걸린 라디라는 소년을 동정하는 수밖에. 하지만 자신 역시 그 소년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니 녀석들에게 얼굴은 때리지 말아라, 정도 말해주도록 하자. "그래 알았다. 나가도 좋아." "예…참. 선장." "?" "테이…테이어드는 어쩌실 겁니까?" "누구?" 기억도 못하는 건가. 아무리 한달 동안 철저히 '장난감'으로만 취급했었다지만 저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굴 것은 없지 않은가. 스네이크는 왠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라 호흡을 한 번 고르고 감정을 억누른 채 자신의 선장에게 말했다. "성안(聖眼)말입니다. 당신이 납치해오신." "아아. 그 녀석." 그제야 기억난다는 듯이 남자가 감탄성을 질렀다. 그나마 기억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말은 아예 기절초풍할 내용이었다. "그 배에서 데려왔나?" "예?"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블랙 버드가 배에서 에녹스 제독과 대결하느라 여력이 없기에 자신이 멍하니 뱃전에 눈을 감고 서 있는 그를 안고 소형선으로 내려왔었다. 그런데 저 책망하는 듯한 어조라니? "뭐 하러 데려왔지? 제왕의 보물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이제 그 녀석은 필요 없는데. …뭐. 기왕 데려온 것이니 어절 수 없지. 이젠 질렸으니 봐서 여자에 굶주린 놈들에게 던져주던지, 별로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일을 부려먹던지 마음대로 해. 이도 저도 다 귀찮으면 그냥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던지." "!" 남자의 잔혹한 말에 스네이크는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3일전. 바로 3일 전까지만 해도 저 남자는 테이어드의 침실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며 그를 안고, 희롱했었다. 그런데 성안이라는 역할이 끝나자마자 헌 쓰레기 버리듯 매몰차게 내몰다니. 수도원에서 평온히 살다가 어느 날 해적에게 붙들려 강제로 남자에게 안기고, 온갖 위험한 상황 속에 처하게 한 가련한 남자에게 너무도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그건…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한달 여 동안 꽤나 예뻐하시던 아이인데." "필요 없다. 어차피 그 녀석은 대용품이었어. 진품이 이 배 아래에 있는데 그런 대용품은 이제 필요 없지." "그렇지만!" "뭐?" 핫. 스네이크는 순간 입에서 튀어나간 큰소리에 스스로 놀라 입을 가렸다. 블랙 버드 역시 꽤나 놀란 눈치로, '이 녀석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이었다. 자신 또한 모르겠다. 왜 테이어드를 무시하는 블랙 버드의 발언에 큰 소리가 나간 건지. "흥…그런가." "?" 하지만 선장은 뭔가를 눈치챈 기색이었다. 약 5초 동안 멍하니 입을 가린 스네이크의 얼굴을 주시하던 블랙 버드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소를 씩, 짓더니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조금 전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짓더니 스네이크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해." "예?" "선원들에게 돌리던, 일을 시키던 상어에게 던져주던 자네 맘대로 하라고. 난 이제 그런 녀석 모르니까." "하지만 선장," "아. 뭣하면 자네가 가지고 놀던지. 소리를 내지 않아서 재미가 좀 없기는 하지만 그 녀석 그래도 꽤 괜찮거든. 뭐 내가 가지고 놀던 것이라 조금 찝찝하다면 할 수 없지만 길은 잘 터놓았으니 감도는 걱정 말라고." "선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는 비역은!!" "남색이 어떻다고. 우리 같은 바다 사나이들에게 여자란 외계 생물이란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여자를 태우고 다닌다면 부정을 탈 것이고. 그러니 그네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구할 수 없는 사치품이야. 자네도 자네 손가락 신세만 지지말고 쌓인 것 좀 풀지 그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선자앙 !!!" "아. 나가 봐. 난 피곤해서 자야겠어. 갈 때 문 꼭 닫고 가게. 오늘은 바람이 세군. 내일은 순풍이겠어." "!! *%$(!@$^&#*!!!!!!" 쾅!! 스네이크는 나가라는 블랙 버드의 말에 온갖 욕을 속으로 주구장창 나열하며 명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스네이크는 몰랐다. 표정관리를 하는 스네이크의 이마에 솟아난 혈관 한 줄 때문에 방안에서 블랙 버드가 쿡쿡거리고 웃고있는 것을. 그저 지금은 자신을 저질스러운 농담으로 놀려댄 블랙 버드 때문에 뒤틀린 심기를 가라앉히느라 바쁠 뿐이다. "후우. 후우." 항해술이나 지휘력만은 누구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 두어 번 대련도 해보았지만 검술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 아니, 굉장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 누구에게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성격이 더럽고 능청맞다!!! 바로 그거야!!!!!! 분명 자신이 테이어드에게 뭔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 능글한 웃음이라니. 그래 신나기도 하겠다. 늘 원칙만 준수해서 재미없다는 평을 듣고있는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자신을 놀리는 걸 유희로 삼는 저 사람이야 오죽할까. 정말 한 대만 때려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후우우…." 이런 저런 과격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스네이크는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참아야지. 별 수 있나. 선장 놈은 어린애다. 그렇게 생각하며 참는 거다. 아마도 큰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데려온 저 라디라는 놈을 못 만나게 하니 심통이 난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목적이 어쩌고 하면서 전에 못한 일(?)을 하러 가는 걸 막았으니 심통이 나기도 했겠지. 잘났다. 그 더러운 동방 놈 하나 못 안은 것이 그렇게 화가 날만한 일이란 말인가. 한 인간의 생사를 걸고 농담을 할 만큼? '왜 살렸어요?' "음!" 스네이크는 갑자기 귓전을 파고든 테이어드의 목소리에 놀라 한 쪽 귀를 막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테이어드는 없었다. 환청을 들은 것이다. "미쳤군. 저 놈의 선장 때문에 최면이라도 걸렸나 보군." '난 어차피 보물을 알아보는 일만 끝내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사람인데.' "이런 젠장!!"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려 했음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스네이크는 손가락으로 귀를 마구 후벼대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러자 잠시 소리가 안 들리기에 만족하며 자신이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번에 환상이 보인다. 하얗고 가는 몸. 건드리면 부서질 듯, 여자보다 부드럽고 나긋한 몸이 자신에게 다가오며 원망스레 말한다. 왜 살렸느냐고. 하얀 얼굴. 깨끗하고 맑은 피부. 얼핏보면 여자로도 보일 만큼 선이 가는 턱 선과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시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세상 단 하나뿐인 투명하면서도 아득한 에메랄드 그린의 눈동자. 그 모든 것을 생각하자 명치 언저리가 지끈거린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십대 때나 겪었던. 그래. 같은 골목에서 자라난 계집아이를 좋아하던 때처럼……. "아니야!!" 붕붕!! 스네이크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 저어 자신의 뇌를 치고 올라오는 어떤 생각을 몰아내려 애썼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명치가 아픈 것은 단지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아픈 것 때문이다. 그래. 다 저 망할 선장 때문이다. 밉고 또 밉지만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자신의 선장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그럴 뿐이다. 저얼∼대로 두근거림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암. 내 팔자에 무슨. 잠이나 자자. 아무래도 며칠 동안 선장 땜질하느라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야."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두운 갑판 위를 걸어갔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발이 자꾸만 갑판 위를 배회하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영 심란한 듯 보였다. 아까부터 혼자서 화를 내고 고개를 붕붕 젓고있는 스네이크를 이상하고 쳐다보고 있는 선원들의 눈에는 말이다. "음.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저녁을 못 먹었지. 그거나 갖다 줘야겠군. 아무리 납치해 온 놈이라도 밥은 먹여야지." 결국 그가 갑판 위에서 한 마지막 말은 저것이었다. 블랙 버드가 들었다면 아마 체통에 맞지 않게 포복절도라도 했을 말이었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로. * * * "어이. 노란 얼굴!! 뭘 멍하니 서서 날씨 감상이야? 갑판 청소 끝났으면 어서 가서 화장실 청소하지 못해? 그게 끝나면 콕핏에 가서 의사를 돕고, 그리고 끝나면 주방에 가 감자를 깎아. 알겠어!!" 퍽!! 윽…. 라디는 어제 맞아 멍이 든 곳을 용케 알아채고 그 곳만 골라 발로 차는 갑판장의 횡포에 소리 없는 신음을 목안으로 삼켰다. 이미 맞아 피멍이 든 곳을 다시 맞는 것은 정말, 정말 정말의 정말로 아프다. 허나 갑판장의 횡포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왜냐하면 이미 라디의 몸에서 멍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란, 꽤나 힘든 일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이상하게 얼굴들은 안 때리는 것이 오늘밤은 얼굴에서 나는 열 때문에 잠 못 드는 일은 면할 것 같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뭐야? 왜 안 가고 서 있어? 한 대 더 맞아야 내려갈 마음이 들 것 같으냐? 응?" "큭." 기어이 한 대를 더 때린 갑판장은 라디가 좀처럼 내지 않는 신음소리를 듣고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비죽 웃음을 흘리며 다른 선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갔다고 안심해서 서 있었다간 아예 불려가서 맞을 테니 어서 시킨 대로 화장실로 내려가서 청소를 하는 것이 상책이다. 사락. 하도 맞아 퉁퉁 붓고 열이 나는 라디의 얼굴 위에 시원한 서풍이 불어 상처를 다독거려준다. 라디는 최하갑판으로 내려가는 난간 바로 앞의, 그러니까 갑판장의 시선을 겨우 피할 수 있을 만한 중갑판의 사각지대에서 바람을 맞으며 피로한 몸에 잠시나마 휴식시간을 주었다. 이리도 부드러운 것을 보니 오늘은 아마도 캣츠포우라는 것인가 보다. 처음 이 배에 탔을 때, 라디는 파크가 아닌 자신 쪽을 향해 손을 내민 블랙 버드 때문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처음으로 해적선에, 그것도 세간에서 가장 무섭다고 여겨지는 블랙 버드호에 타다 보니 겁을 먹기도 하고 했었다. 하지만, 처음엔 붉은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Chantey를 부르는 그네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라디는 그들이 왜 잔혹한 바다의 백정이라 불리는지 자신의 몸으로 부딪치면서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라디를 파크, 즉 제왕의 보물이라 착각하여 선실을 마련하라는 둥 선장의 품에서 빼내라는 둥 부산을 떨어댔다. 하지만, 스네이크라는 전에도 본 기억이 있는 남자가 이 아이는 보물이 아니라. 라고 폭탄 같은 한 마디를 꺼내자 그들은 그 자리에서 웃던 표정 그대로 굳는 우스운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분위기가 상서롭지 못해 라디는 웃을 수 없었지만. 무슨 소리냐고. 그들 중 정신을 차린 이가 스네이크에게 물었다. 스네이크는 대답했다. '선장은 부상 때문에 보물을 데려올 수 없었고 자신을 실패하게 만든 이 꼬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배로 데려온 것이다'라고. 선원들은 놀랐지만 라디 또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복수라고? 고작 그런 것을 위해 파크를 포기하고 그 절대 절명의 상황에 자신의 옷깃을 잡았던 것이란 말인가? 물론 스네이크는 블랙 버드가 '보물을 놓친 것' 때문에 자신을 데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라디는 알고 있었다. 그가 파크를 데려올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쳤던 것을. 이유가 뭘까. 정말 스네이크의 말대로,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위해서일까. 즉, 블랙 버드의 정체를 밝히고 다니는 자신을 죽였어야 하는데 죽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아서??? 만약 그렇다면 정말 어이없는 남자가 아닌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에녹스 제독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는 '제왕의 보물'을 포기하다니. 하지만 아닐 것이다. 라디는 잠깐이긴 했지만 저 남자에 대해 조금은 알 기회가 있었다. 저 남자는, 적어도 그런 작은 이유로 자신의 목표를 포기할 정도로 포부가 작은 남자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장이 비져 나올 만큼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자신을 이 배로 끌고 와야만 했던 큰 이유가. 하지만. 대체 무슨 이유? "후우." 라디는 간만에 생긴 여유로 3일 전부터 궁금했던 것에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나 나지 않는 결론에 한숨을 쉬었다. 부어있는 얼굴 근육을 움직이자 욱씬, 하는 둔한 아픔이 번져온다. 하지만 마음의 궁금증으로 인한 갑갑함은 그를 뛰어넘고 있었다. 아마 모든 것은 저 남자가 깨어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을 죽이던지 지금보다 더한 폭력을 써서 흑인 노예보다 못한 대우를 하던지 뭘 하든 하겠지. 어쨌든 지금은, 혹여 최하갑판에서 올라오는 이에게 농땡이 피우는 것을 들켜 맞기 전에 갑판장이 시킨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금이라도 덜 맞고 죽는 것이 덜 억울할 테니까 말이다. 촤악!! 바닷물을 모아놓은 통 안에서 물을 받아 변기로 세게 뿌리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오물들을 씻어낸다. 변기로 모인 물은 고스란히 그 물이 있던 바다로 흘러간다. 라디는 깨끗이 씻겨지는 화장실에 갑갑했던 마음의 오물들도 조금은 씻기는 듯 해 어느새 웃는 얼굴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물론 화장실 벽 여기 저기 붙어있는 하얀 찌꺼기라던가, 속이라도 좋지 않았는지 조준을 잘못한 오물 등을 볼 때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화장실 청소를 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지 않기에 적어도 구타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제일 편한 장소이기도 했고. 이제 이 곳 청소가 끝나면 콕핏에 가 배 의사인 한스씨를 돕고 감자만 깎으면 또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그다지 맞지도 않았고 선원들의 욕설이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다. 블랙 버드가 그렇게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뒤로 매일같이 온 몸에 멍이 떠날 날이 없었는데, 저 녀석들.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봐." 그렇다면 혹시, 그 남자가 깨어나기라도. "야!!! 오줌 색 얼굴!!!!!!!!!!" "?" 라디는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의아해서 등뒤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대여섯 명의 선원들이 라디가 있는 화장실 칸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는데, 라디는 그들을 보고 화장실이 급한 것인가 해서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비록 바로 청소를 한 화장실을 그들이 더럽힌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화장실이란 쓰라고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화장실이 목적이 아닌 듯 했다. "어디 가냐?" "? 반대편 화장실 청소하러…." "그럼 여기는?" "…사용하실 것 아닌가요?" "아아 그럼. 사용하고 말고." "?" 사용한다 해서 비켜주는데 왜 팔로 가로막고 서 있는 건지? 라디는 그렇게 묻는 얼굴로 나가려는 자신을 팔을 뻗어 막고 있는 턱수염을 세 갈래로 땋은 해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코털이 비져 나온 주먹만한 코에서 흥! 하고 콧김을 뿜어대며 그가 라디를 거만한 눈으로 쳐다본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비켜주시겠어요. 청소를 하러 가야합니다." "어디를?" "반대편 화장실이라고 아까," "뭐 하러?" "예?" "넌 내일 모레 죽을 텐데 뭐 하러 청소 따위를 하냐 이 말이다. 응? 이 오줌 색 누런 얼굴을 하고 있는 놈아." "뭐…라고요?" "왜. 안 믿겨지냐, 응? 이 놈아. 우리 선장이 깨어나셨다. 너에게 아주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까지 끌고 오신 분이다. 오냐 그래. 너를 그냥 둘 것 같으냐? 큭큭. 아니다. 너 아주 큰 각오를 해야할 거다. 덕킹이나 킬 홀링 따위 애들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아주 무서운 형벌을 가하실 거야. 암. 너는 이제 그 분 손에 죽는, 아니, 죽는 건 기정 사실이고, 아마 죽는 것이 더 편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래. 내 충고를 하나 하마. 죽을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지 않으려면 너. 자살을 해라. 응. 옳다. 그러면 아마 편히 죽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봐 어때. 너희들. 내 말이 맞지 않나??" "옳다. 옳다." "킥킥킥킥." 그들은 아르센의 사람들이 아닌 듯 이상한 어조로 말하며 라디를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센 사람들보다는 약간 눈썹이 짙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저 어딘가 무척이나 추운 나라라는 곳의 사람들 같기도 하였다. "그러니까…자살을 하라구?" "그래. 너 죽지 않으면 선장이 아마 산채로 포를 뜰 거다. 뿐인가. 거기에 친히 바닷물도 부어 주실 거다. 응. 맨 가죽에 소금물을 부으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는 당하는 사람만이 안다. 너 그거 알기 싫으면 오늘밤 바다에 뛰어들어라. 응. 내 그거 구경해주마. 킥킥!!" "내가 왜?" "그래. 니가 왜…뭐?"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뭐라고? 애송이?" "너희들의 선장이 깨어난 건 알겠는데. 그래 그리고 그 자식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까지도 알겠어. 그런데 내가 왜 자살을 해야해?" "이 자식…너 지금 뭐라고," "난, 살 거다." "뭐?" 남자들은 멍 때문에 고개도 숙이고 다니고 폭력에 굴복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라디가 갑자기 너무 당당히 나오자 당황하여 자기들끼리 놀란 시선을 주고받았다. "너 오줌색 얼굴, 지금 건방지게 누구에게 눈깔을," "난 라디다!! 오줌색 얼굴이 아니야!! 너희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사람을 함부로 취급하지마!! 내가 왜 이유도 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거야!?" "뭐야?" "너희들의 두목이 정신을 차린 것이 뭐가 어떻다고! 내가 왜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을 버려야 하는데! 난 단지 내 친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난 살 거다! 반드시 살아서 내 친구 파크도 되찾고 도빌 항으로 돌아갈 거야! 이 따위 배에서 개죽음을 당하진 않을 거야! 절대로!!" "뭣. 너 지금 이 따위 배라고 했겠다! 우리 블랙 버드호를 이 따위 배라고! 옳아! 너 좀 맞아야겠다! 어차피 선장에게 죽을 놈이라서 오늘하고 내일은 그냥 두려고 했더니. 응. 너 맞아라. 친구들! 이 녀석 때려주자. 언제나처럼, 오늘도 때려주자!!" "옳아!!!!" 어쩐지 오늘 이상하게 때리는 놈이 별로 없다 했더니 이렇게 한 번에 오려고 그랬던 것인가 보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는데. 쩔걱. '!! 제기랄!!' 발 께에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절걱거렸다. 족쇄였다. 어느새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있는 듯 없는 듯 무거운 족쇄가 발에 익어 버렸지만 이렇듯 누군가에게 맞기 전 뒷걸음질을 칠 때에는 한 번씩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이쯤에서 체념을 해야하지 싶었다. 라디는 지난 3일 동안 지겹게 행해진 구타에 익숙해져 터득한 데미지를 가장 적게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라디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고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퍽! 툭탁탁! 퍽퍽퍽!!! 옆구리, 허벅지, 어깻죽지, 등, 엉덩이. 장소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식 구타가 계속되는 가운데 라디는 맞으면 맞을수록 반드시 이 배에서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오기가 생기는 걸 느꼈다.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보란듯이 파크를 데리고 도빌 항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사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파크와 자신의 집으로.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하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당하게. 스스로의 몫을 하며 당당히 이 배를 탈 거다. 절대로 그딴 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일하고 그 몫으로 먹으며, 그렇게 이 배를 타고 갈 거라고 라디는 맞으면 맞을수록,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렇게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퍽! 퍽! "헉…헉…! 독한 놈! 소리 한 번 안 지르다니! 그래도 처음에는 아픈 티도 내더니 이제는 아주 조용하다. 재미없다. 친구들. 어떻게 하지?" "흠…오랜만에 그림 그리기는 어때?" "그림 그리기?" 철컥. 소름끼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의 가슴팍에서 무언가가 꺼내졌다. 그것은 칼날이 반대로 된 작은 단도로, 이 배의 선원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듯 돛에 연결된 로프를 이 칼로 자르는 것을 라디는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저 칼을 지금 왜? "그 칼로 뭘 어째. 친구." "그림을 그리자니까." "무슨 그림을? 이 오줌 녀석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웬 그림." "그러니까…." 휙! 밤에 열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로 가리고 있던 라디의 얼굴을 남자의 억센 손이 들어 올렸다. 그리곤 작은 커트라스의 칼날로 스윽…하며 그 위를 애무라도 하듯 부드럽게 그어나가며 남자는 즐거운 듯 말했다. "여기. 좋은 도화지가 있다. 이 녀석. 얼굴색은 더러운 오줌색인 주제에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멋진 장식 그려주자. 이 칼로." "!"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까 지금, 저 칼로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한다는 것인가. 멀쩡히, 그것도 제정신인 상태의 사람을 상대로?? "이것, 놔!!" "어딜!!"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서 뒤로 기며 도망치려는 라디의 발목을 남자들이 낚아챘다. 그리곤 겁에 질린 라디의 표정을 보고 그제서야 흥이 오르는지 잔인한 웃음을 짓는다. 미쳤다. 이 놈들은 완전 미쳤다.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멀쩡한 사람 얼굴에 칼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 따위, 못할 테니까. "놓아!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야!! 미친놈들! 너희들은 미쳤어!!" "뭐라는 거야 이 오줌색 얼굴을 한 원숭이가. 야. 꽉 잡아라. 흐흐. 여자도 못 안고 안을 만한 사내놈은 부선장이 꽉 잡고 있는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산다. 너. 여자 대용은 못될 만큼 이상하게 생겼으니 유희거리나 되라. 그래. 넌 그 정도밖에 안 된다. 피부색도 이상하고. 응." "놓으라니까!!!" 얼굴이 못생겼건 말건 상관없었다. 이 녀석들의 여자 대용이 되어줄 생각도 없었고 이대로 놈들의 유희거리가 되어 얼굴을 난도질당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건장한 성인 남자, 라디는 이제 한참 성장기를 겪고 있는 소년일 뿐이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물기까지 하며 놈들에게서 벗어나려 해도 그것은 괜한 매를 더 불러일으킬 뿐 그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안 돼!!" 죽은 듯 순순히 맞고만 있던 라디가 반항을 하자 신이 난 것일까, 빠져나가려는 라디의 얼굴을 한 명이 움켜쥐고 나머지 둘은 팔, 그리고 그 외는 다리를 잡으며 그야말로 완벽한 족쇄를 만들었다. 이제 라디는 손가락 하나 자기 마음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별 수 없다. 구해주러 올 사람도 없고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싶은 마음도 없다. 어차피 사내자식으로 태어난 몸, 흉터가 좀 많이 남는다해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며 라디가 체념으로 눈을 감는 순간. "그쯤 해둬라. 선장에게 혼나고 싶지 않으면." "?!!" "부, 부선장?" "어떻게 여기에?"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너희들,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지만 그 녀석은 선장이 가지고 온 소장물품이야. 함부로 흠집을 냈다간 선장이 가만두지 않을걸. 놔두면 없어지는 멍 정도야 넘어갈 수 있다지만 말이다." "그런." 라디는 완벽하게 얼굴에 체스판이 그려질 판에 생각지도 못하게 다가온 구원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생소한 사람들로 가득한 해적선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 스네이크였다. 이 배의 부선장. 즉, 저 남자의 직속 부하라는 것이 된다. "하지만 부선장. 어차피 선장도 이 애송이 자식을 죽이려고 데려온 것이 아닙니까? 그 전에 좀 가지고 논다는데 그것 가지고 혼내실까요?" "너희들 그렇게 오랜 시간 선장이랑 같이 항해를 했으면서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해 모르냐? 자기가 가져온 건 자기가 끝을 내야하는 분이다. 아마 너희가 이만큼 주물러 놓은 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탐탁치않게 여길 사람이야." "정말입니까!" "뭐, 이 녀석에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만, 어쨌든 칼은 쓰지마. 다른 녀석들에게도 일러놔라. 적당히 주무르는 것은 허락되지만 흠집 내는 것은 선장이 용서치 않을 거라고. 알겠나?" "…예." "그럼 가봐라." "예." 그들은 뭔가 불만이 많은 듯 안 그래도 튀어 나와있는 입을 더욱 불룩 내밀며 억지로라는 것이 분명한 태도로 라디의 팔다리를 놓고 화장실을 나섰다. 라디로 말하자면,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 때문에 놀라기도 했고, 사실 남자들에게 얼굴을 난자 당할 뻔했다는 충격에 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화장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하여튼. 얼마 전 상륙으로 여자를 안고 오더니 미련이 남아서 아주 거칠어져 있군. 단순한 놈들. 정 급하면 지들끼리나 풀 것이지. 이봐 꼬마. 일어날 수 있나? 네가 청소해서 제법 깨끗해져 있기는 하다만 원체 화장실이란 곳이 그다지 눕기 안락한 곳은 아니니 이만 일어나지 그래? 왜, 다리가 후들거리면 내가 부축이라도 해줄까?" "…너무 맞아서 다리가 잠시 마비되었을 뿐이야 아저씨. 누구더러 도와주니 마느니 하는 말을 꺼내는 거야?" "허?" 벌떡. '윽…제기랄!' 오기 때문에 단번에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어나자마자 온 몸을 덮쳐오는 타박상의 격한 통증 때문에 절로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로 입밖으로 소리는 내지 않는다. 그걸 눈앞에서 보는 스네이크는 역시 슬럼에서 자란 소년답지 않게 자존심이 강하고 기백이 높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슬럼에서 소매치기나 해적들 등치기나 하면서 살아온 소년인데. 도대체 저 높은 자아와 오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여간 특이한 놈이라는 것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장의 취향 또한 특이하다는 것도. "그래. 니 말대로 혼자서도 잘 일어나는구나. 실언했다. 내 도움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 녀석이었어." "당연하지." 스네이크는 조금 띄워주자 무척이나 아플 텐데도 무리해서 옷까지 툭툭 터는 녀석을 보고 역시 어린애군, 하며 속으로나마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 고양이 같은 녀석 앞에서 웃었다가 무슨 험한 소리를 들을지 모르므로 절대로 소리를 내서 웃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 동방 소년. 오늘의 할 일은 끝났나?" "아직이다. 콕핏의 보조와 주방의 잡일이 남아있어." "그래? 피곤하겠군." "전혀. 내 뱃삯이다. 이 정도야 가뿐하지." "호오." 저 험악한 녀석들이 밥을 잘 줄리 만무하고, 주방장이 하는 말이 실제로 하루에 한 끼밖에 주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3일만에 보는 얼굴은 움푹 패여 있고 입술은 창백한 기마저 돌고 있는데 아직도 이건 고압적인 태도라니. "그래? 아직 살만한가 보군. 난 힘들다고 하면 녀석들의 린치를 좀 줄이라고 일러두려고 했더니, 이거 그럴 필요는 없겠는걸." "윽." 약올리듯 말하는 실제로 그럴 의도로 한 말이긴 했지만 스네이크에게 라디는 노려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난 3일 동안 너무 맞아서 온 몸에 멍이 없는 곳이란 없고, 하루에 한 끼 주는 식사로 남들 배는 되는 잡일을 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런 말을 하다니.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딴 말을 내뱉고 있나 싶어서. 하지만 라디는 모르겠지만 사실 스네이크는 라디에게 그닥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선장이 한달 전 도빌 항에 정박했을 때, 금방 죽여버렸으면 됐을 것을 괜히 맛 좀 보겠다고 집적대다가 죽이지 않고 온 것도 찜찜했었고, 이번 같은 경우 이 녀석 때문에 가장 큰 목표였던 제왕의 보물을 목전에서 놓쳐버렸다. 이 사실은 자신만이 알고 있지만 아마 다른 녀석들이 안다면 선장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동방의 꼬마 하나 때문에 거대한 보물을 놓친다는 건 해적선의 선장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녀석 때문에 테이어드가 선장에게 폭행을 당하고, 게다가 이 녀석이 오자 곧바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테이어드가 동방인과 아르센인의 혼혈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지난 한달 간 거의 매일 테이어드의 선실에 드나들며 그를 강간했다. 그리고 보물을 알아보는 성안(聖眼)의 역할이 끝나자마자 바로 쓰레기 버리듯 아무런 미련 없이 그 태양 제독의 배에 두고 오려고 했다. 그리곤 진짜가 왔다고 대용품을 버리는 저 태도라니. 도대체. 테이어드가 이 노란 피부의 녀석보다 못한 게 뭐란 말인가. 피부도 훨씬 하얗고, 콧날도 오똑하고, 몸도 훨씬 가냘프고 나긋나긋하다. 도대체 뭐가! 아, 그래. 솔직히 저 녀석의 피부가 백인보다 검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탄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동양인 치고 제법 팔다리도 길었고 저 썩어빠진 두건을 벗기면 꽤나 신비한 눈동자와 까만 머리가 나온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깟 신비함이 뭐가 어쨌다는 건가. 신비한 걸로 치자면 테이어드 또한 절대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테이어드는 대대로 내려오는 성안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아르센 제국에서도 그런 그를 대우해 수도원에서 보호를 받을 만큼…. "스네이크?" "……." "?" 라디는 실컷 빙글거리며 놀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웃었다 찡그렸다 하는 스네이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 설마 정신 쪽에 병이 있었던가. 아무튼 사람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그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혼자 내버려두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 라며 배 의사가 있는 콕핏으로 향하는데. "꼬마." "?" "모레, 블랙 버드 선장이 네 감옥, 아니, 방으로 찾아갈 거다." "!" "전에 '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하기 위해서 말이야. …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아.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가입은 2004년 4월 10일부터 15일까지입니다. 가입인사 적어주세요!::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77 2390 160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18~1권 완결까지 (4) * * * '모레, 블랙 버드 선장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찾아온다, 고.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다고 한다. 몸이 회복되는 내일 모레.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거기 꼬마, 멍하니 딴 생각 하지말고 와인과 톱을 가져와라." "아, 예." 라디는 어느새 계속 스네이크의 말을 곱씹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는 의사의 말에 따라 의사의 함에 들어있는 여러 물품 중에서 황토색 항아리와 척 보기에도 무척 살벌해 보이는 톱을 가져와 배 의사인 한스씨에게 내밀었다. "그래. 이 녀석의 얼굴을 두들겨봐라." "예?" "마취가 됐는지 알아보라고." 아아. 라디는 지난 3일 동안 익숙해진 몸놀림으로 손가락으로 누워있는 환자의 얼굴을 툭툭 쳐보았다. 마취제 대신 쓰인 독한 럼주로 거나하게 취한 그는, 라디가 자신의 볼을 치건 다리를 꼬집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듯 했다. 수술 시작의 신호였다. "됐는데요." "음. 꼭 잡고 있어라." 3일 내내 해오긴 했다지만 이 작업은 라디가 선원들에게 맞는 것보다도 싫어하는 일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캐논포에 맞아 짖눌려진 선원의 다리를 절단하기 위해 그 다리를 고정하여 잡고 있는 일이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니까. 슥석. 슥석. 출혈을 막기 위해 그의 다리를 밧줄로 묶자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톱으로 다리가 절단되기 시작했다. 라디가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누구나 자신의 다리가 주위에 털썩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싶어하지 않는다는 배 의사의 배려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환자야 배려를 한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잡고있는 라디에게는 달갑지 않은 배려였다. "움…우움…." 취기로 인해 몽롱한 와중에도 고통을 느끼는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잠투정을 하고 있다. 이름. 라디는 그의 이름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왠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그 또한, 자신을 매일 구타하고 있는 저네들과 다를 바 없는 블랙 버드호의 선원임에도 불구하고. 슥석. 슥…. 탁, 하는 느낌과 함께 라디의 손에 묵직한 다리의 느낌이 실려왔다. 온전히 다리가 절단된 것이다. 의사는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손잡이가 달린 큰 항아리를 기울여 그의 다리에 부었다.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와인을 붓는 것이다. 그리고 섬세하게 꼬맨 뒤 목재로 만든 주걱으로 연고를 바른다. 이것으로 수술은 완료되었고, 더 이상 악화되지 않게 휴식을 취하게 하고 상륙하여 살 수 있도록 조치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의 해상생활은 무리겠지만, 아마도 의지만 충분하다면 의족을 달고 다시 바다로 나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찌됐든 살아 남았으니까. 살아남는다. 이 바다 위에서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다. 비록 며칠 안 되는 나날이었지만 라디는 배를 타면서부터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또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단 한 순간에 누군가의 목숨이 날아가고 누군가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진다. 이곳은 정신을 놓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목숨이 끊겨버릴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었다. 라디 또한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이곳에 비하면 낙원과도 같았다는 것을 이 배를 타면서부터 알게되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왔던 것일까 그 사람은. 늘 누구보다 밝은 곳에서 찬사만을 받으며 살아온 에녹스 제독과 달리, 늘 이런 삶의 치열함을 겪으며, 언제나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것일까. 라디는 조금 전까지도 그가 모레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을 정도로 죽음에 가까이 있었고, 바로 곁에서 다른 이가 죽는 것 또한 이 배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비로소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래. 적어도, 마사 아주머니에게 부탁 받은 대로 파크를 집으로 데려가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리고 설령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증오하는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한이 있게 되더라도 말이다. * * * 끼룩. 끼룩. 바닷 갈매기가 수평선 위를 날아다니며 그 울음소리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날씨는 쾌청. 웨더는 순풍. 바다가 약간 거칠기는 하지만 오늘 역시 항해를 하기에는 그만인 날이었다. 라디는 여느 때처럼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일으키고 주린 배를 감싸쥐며 누구보다 일찍 갑판 위로 올라와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조금 있다 거들먹거리며 올라오는 갑판장에게 아침부터 호되게 걷어차이기 때문이다. 직. 직. 밤새 비가 조금 왔는지 갑판을 닦는 걸레 소리가 질척하다. 마치 체력이 한계를 넘어선 라디의 발걸음 소리처럼. 하아…. 호흡이 가빠져 와 한숨을 쉬었더니 후끈한 열이 뱉어진다. 아마도 차고 눅눅한 감옥 방에서 잠을 자다보니 몸살기운이 있는 듯 했다. 하루 한끼씩 돌처럼 딱딱한 빵만 먹으며 중노동을 해온 지 일주일 여. 라디의 몸은 이제 정신이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본능만이 살아있을 정도였다. 십대. 그것도 식욕이 가장 왕성한 십 칠 세의 소년에게 이런 가혹한 행위를 하고 있으니 체력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가혹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라디는 어차피 죽게될, 죽기 전까지는 적은 식량에 마구 부려먹을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차그락. 차그락. 안 그래도 몸이 천근같이 무거운데 발에 걸린 족쇄는 그 무게를 배로 늘리며 걸음 하나마다 산 하나를 오르는 듯한 고통을 낳게 한다.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처음 5일 정도는 오기로 버텼다지만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매일 배가 고프고, 매일 죽도록 일했다. 그리고 일하는 중간 중간엔 선원들의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되 주어야 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이제는 왜 이렇게까지 해서 이 배에 타고 있는지.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서 희망봉으로 가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아있는 목표라고는 사는 것.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 그 하나였다. 이 더러운 갑판을 매일 매일 닦는 한이 있더라도. 돌처럼 딱딱한 빵을 씹느라 이가 아릿하게 쑤셔와도. 저들이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 안하고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가야만 했다. 무엇을 위해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파크를 데리고 마사 아주머니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말 며칠 내에 사생결단이 날지도.'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야 확고하다지만 더 이상 제대로 된 영양과 수분을 섭취 못하고 지나치게 체력을 소비하고, 게다가 구타로 인한 열까지 계속된다면 며칠 안에 정말 큰 일이 날지도 모른다…. 오늘밤. 남자는 라디에게 온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남자가 죽이기도 전에 라디의 체력이 다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배의 선원놈들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겠지. 오줌색 얼굴의 꼬마 녀석이 드디어 죽었다. 선장이 보물을 가져올 수 없도록 훼방을 놓은 놈이 드디어 죽었다 라면서 말이다. 아니, 개중에 어떤 놈은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지도 모를 일이다. 피식…. 라디는 스스로 한 생각에 무척이나 자조적인 기분이 들어 열이 오르는 와중에도 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정도의 존재밖에 되지 않는 놈이었던가 나는. 그래도 도빌 항에서 살 때는 마사 아주머니도 있고 자신을 한 가족처럼 생각해주는 파크도 있었기에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고 그들의 웃는 얼굴 한 번에 모든 피로가 씻기는, 그래, 마치 자신이 그들의 가장이라도 된 듯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뭐란 말인가. 오줌색 얼굴이라 불리며, 심심할 때마다 지나가면서 한 번씩 치는 길가의 휴지만큼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안 돼!' 라디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약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체력이 약해지고 병마가 찾아와서일까. 자꾸만 나약한 생각이 의지를 밀어내고 차 오르고 있었다. '파크를 생각하자. 지금은 그 녀석을, 도빌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그래. 반드시 살아서, 하루라도 빨리 녀석을. 마사 아주머니가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가는 거야. … 마사 아주머니가, 아주머니에게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이야.' 언제나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것은 라디 뿐 아니라 파크 또한 알고 있던 사실이다. 기침을 하면서 동반되는 각혈은 날이 갈수록 그 양이 늘고 있었고 살이 빠지는 속도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 한달? 보름? 그녀의 생명줄은 남은 양이 얼마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는 나날이 짙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북! 북! 갑판을 밀어대는 라디의 걸레질에 박력이 붙었다. 새롭게 다잡은 의지로 인해 한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다시 정비한 이상 쳐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랬다간 약한 마음과 병들이 얼씨구나 하고 자신에게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활기차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위험한 슬럼에서 아무리 아픈 일이 있어도 돈을 벌러 나가야했던 라디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갑판에서 윤이 날 정도로 힘을 주어 열심히 걸레질을 했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갑판을 닦아대는 노예소년 라디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스턴 갤러리에 서서 그런 소년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은발의 키 큰 남자를 제외하고는. 제7장 작은 새, 검은 독수리에게 잡아먹히다 철컹. 흑인 노예들을 감시하는 간수가 내려와 라디의 손에 수갑을 채운 뒤 감방문을 닫고, 이제는 친구처럼 익숙해진 어둠과 한기가 라디의 곁에 다가오며 외로움을 달래준다. 으슬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몸살에 걸린 것이 확실한 듯 하지만 그렇다고 누워있다간 차갑고 축축한 나무바닥의 한기에 몸만 더 상할 뿐이다. 침구라고 던져준 넝마 조각이 보였지만 저 작은 천 조각 하나가 열이 오르는 라디의 몸을 덥혀줄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잠들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유도 남아 있었고. 뚜벅…. "!" 최하 갑판 중에서도 가장 안 쪽, 죄인들만을 가두어 두는 이 곳 감옥은 현재 수감자가 없는 상태로 있는 사람이라고는 라디 뿐이었다. 물론 간수들이 라디가 혹 탈출이나 자살을 하지는 않았나 해서 가끔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그것도 모두들 잠드는 시간인 밤 10시를 기해서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 그렇다는 것은. '오는 건가.' 블랙 버드. 그 남자가 오고 있었다. 물론 스네이크에게서 오늘쯤 체력을 회복하여 자신이 수감된 감옥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저 남자를 만날 때는 늘 긴장이 되고 이상하리 만치 심장이 뛰어오는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 튀어나올 만큼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의 원인은. 뚜벅. 뚜벅.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그 주인이 이 감옥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확실시 시켜주고 있었다. 스윽. 라디는 덮고 있던 넝마를 두 손 가득 꼬옥 쥐며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불빛 하나 없는 감옥 안은 라디의 불안한 검은 눈동자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으며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하아. 라디는 달뜬 한숨을 쉬며 이제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두 눈을 감자 민감해진 오감으로 인해 남자의 다가오는 발소리를 온 신경과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뚜벅. 뚜벅. 뚜벅…탁. "!" 발소리가, 멈췄다. 라디는 눈을 감고 있었던 지라 마치 남자의 발소리가 자신의 바로 옆에서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떠보았지만 주위에 누구의 구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착각이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이 방 앞에 선 것만은 착각이 아니었다. 방문 앞의 남자가 들고 왔을 것이 분명한 촛불로 인해, 라디의 시야가 조금 전과 달리 환해져 있었으니까. 절그럭. 절걱…끼릭. 열쇠를 찾는 듯 금속소리가 맑게 울리고, 맞는 열쇠를 찾은 것인지 구멍 안에 그 열쇠가 쏙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라디는 눈앞에서 돌아가는 잠금쇠를 바라보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심정으로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저 남자에게만은 지치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지금 자신이 저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해야하는 상황일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끼릭. 철컥! 끼이이…. 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습하고 누른 냄새가 코를 자극해 온다. 죄수들을 수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감옥인지라 통풍 또한 좋지 않고 바닥에는 침대조차 놔두지 않았다. 그저 작은 화장실 대용 통 하나와 시 체스트만이 휑한 감방 안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삭막한 방안에서 웅크린 채 이 쪽을 주시하고 있는 작은 인영(人影) 하나. 라디는 블랙 버드를 향해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오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 버드는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검은 눈을 잠시 주시하다가, 가까운 곳에서 천천히 둘러본 소년의 몰골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기에 조금 놀란 눈으로 그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얼굴. 맑은 눈. 약 한달 전 도빌항의 여관에서 봤던 보습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다. 키는 조금 큰 것일까. 조금 그을린 듯한 탄탄한 밀 빛 팔다리가 길고 야위어 보인다. 그러나 야위어 보인다고는 해도 그 몸은 여전히 탄력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색을 가지고 젊고 순수함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군데 군데 변색되고 부어오른 가련한 모습. 그는 구타는 허용했지만 저 작은 얼굴마저 무참하게 짓밟아놓은 선원들의 행태에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 그래도 어린애인데 때리려면 얼굴은 빼놓고 때릴 것이지. 하긴 해상에서 가장 잔인한 자들만 모아 놓았다는 자신의 배들의 선원이니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건드리지 말라는 접근금지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블랙 버드는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얼굴의 참상을 먼저 보았지만 다른 곳이라고 절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은 아니었다.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겉에 입을 옷을 주지 않아 짧은 반팔 셔츠을 입고 있는 소년의 팔은, 원래의 색인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멍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다리 또한 마찬가지로, 설상가상으로 족쇄까지 채워진 다리는 걸을 때마다 거슬리는 족쇄로 인해 살과 닿는 부분이 짓물러 있고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창백한 얼굴색이라니. 어딘가 몸이 안 좋기라도 한 것일까. 스네이크의 말대로 하루에 한 끼밖에 주지 않아 얼굴선이 많이 날카로워진 것을 제외하더라도 저것은 분명 제대로 된 몸 상태의 사람의 얼굴색은 아니었다. 소년의 피부가 자신들보다 약간 검은 편을 생각한다면 저것은 심각하게 창백해진 상태.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볼 중간에는 약간의 홍조도 띠고 있는 것이 열꽃이 핀 것이 분명했다. 블랙 버드는 라디의 상태가 스네이크에게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저토록 가련한 모습을 보면서 몸의 중심 어딘가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왔으면 앉지 그래.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말야." 계속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소년이 먼저 기브업을 외치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멍하니 감방 문턱에 서 있는 남자를 자신이 있는 안으로 불러들였다. 블랙 버드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 때까지 자신이 넋을 놓고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먼저 초대를 한 소년이 놀라워 잠시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옆으로 돌린 채 입술을 비죽이 내민 상태. 아마도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멍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 창피했을 지도 모른다. 유리병 안의 촛불이 밝혀주는 옆모습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 그런데 들어가도 괜찮을까?" "뭐?"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라디는 기껏 괴롭히라고 자신을 이 배에 끌고 온 주제에 이제 와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방에 들어오기를 꺼려하고 있는 블랙 버드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역시 저 남자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자신의 내공이 한참 모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아직 살만해. 죽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래?" 블랙 버드는 라디의 호언에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감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스네이크가 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자신이 이 방에 온 이유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들어오라고 초대할 리가 없는 아이였는데. 그간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터벅…. 습기로 가득 찬 감방 안에 블랙 버드의 구두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습하고 차가운 곳에서 일주일을 지냈단 말이지. 게다가 타박상이 저 정도면 몸살을 앓고 있을 것이 뻔했다. 얼굴까지 저 모양이면 아마 아파서라도 매일밤 잠을 잘 수 없었을 테지. "그래. 몸은 어떤가?" "보시다시피. 좋지는 않아. 누구 누구씨가 갑자기 나를 이 배에 끌고 온 덕분에 말이야." "흠." 소년을 갑자기 이 배로 끌고 온 누구 누구씨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앞을 바라보며 딴청을 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기 위해 몸이 낫자마자 이 감옥으로 내려온 것이 아닌데. "그렇군. 듣기로 하루에 한끼밖에 식사를 주지 않았다고 하던데,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닌가?" "뭐?" 도대체 아까부터 왜 저런 것을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분명 이 남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오늘 밤 이 감옥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몸 상태를 묻는 것일까. 혹 몸이 괜찮다고 하면 좀 더 부려먹고, 못 견딜 정도라고 하면 당장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곤란한데. 아직은 죽을 수 없는데. 결국 파크를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인 라디로서는 허풍을 부려서라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괜, 괜찮아. 견딜 만 하다니까. 조금 배가 고프긴 하지만 일하는데 지장은 없어. 뭐, 요즘 들어 살이 찐 상태였는데 살도 빼고 좋지 뭐." "그래?"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과연 남자가 믿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다만 그저, 활발하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좀 더 쓸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군. 앞으로 할 일들은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거든." "문제 없대도." "하하." 다행히 소년의 허세는 남자에게 그럭저럭 먹힌 모양이었다. 문제없다는 라디의 말에 남자는 즐거운 듯 낮게 웃었다. 그 멋진 울림소리를 바로 귓가에서 들으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몸에 추위와는 사뭇 다른 소름이 돋는 듯 했다. 하지만 뭐가 저리 즐거울까. 자신을 죽이지 않고 좀 더 부려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저리도 기뻐하는 것일까? "저, 말이야." "?" 라디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 꺼내야 하는 것인지 고민되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판단 하에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 나를 죽이러 온 거지?" "뭐?" "알고 있어. 그 때 내가 당신을 불러서 당신이 파크를 이 배에 데려올 수 없었지. 그래서 호가 나기도 했을 거야. 물론 그 때 왜 당신이 파크가 아닌 나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건 당신이 정체를 알리고 다니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 배로 데려와, 선원들로 하여금 나를 괴롭히게 한 거겠지. 보복의 일환으로 말이야." "흠." 사실과는 거리가 먼 추론이었지만 블랙 버드는 왠지 소년의 오해가 유쾌해져 어디까지 가는가 끝까지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죽이기 위해서라.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 본 순간 바로 커트라스의 칼날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자신이란 남자는 불필요한 후환을 두고두고 지켜볼 만큼 성격이 좋은 남자가 아니니까. 그럼 왜 살려둔 것일까. 그것은 블랙 버드 본인 역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금방 죽였으면 보물을 놓치는 성가신 일 따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저런 외모의 소년 따위, 구하려고만 한다면 몇 백 명이라도 구할 재력과 능력이 있는 블랙 버드였는데. 여전히 감방 문 앞 편에 서 있는 블랙 버드의 눈에 보이고 있는 소년은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 온 몸이 멍으로 덮여있고 옷 또한 두르고 있는 넝마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추레한 것을 입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소년이 외모는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만큼 나긋나긋하고 아름다운 편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모로 따지자면 서방사람들이 보기엔 참으로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편이라고 할까. 작지만 그 색이 자신과는 현저히 다른 밀 색 동그라운 얼굴. 마찬가지로 동그란 눈 모양과 제법 오똑하지만 기본 선은 역시 부드러운 코하며. 창백하긴 하다지만 모양 좋은 도톰한 입술이. 전보다 키는 커졌지만 갑작스러운 성장기로 선이 얇아진 팔다리라던가, 또는 선원들이 잡아당겨 찢어졌음이 분명한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속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 무엇보다. 늘 젖어있는 듯한 한없이 선한 저 새카만 눈. 사슴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 눈을 처음 본 순간 그 한없이 맑고 촉촉한 눈빛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무심코 저 촉촉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싶어지는, 그런 묘한 동물의 눈빛이라고 할까. 전에 봤을 때도 한없이 촉촉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두운 곳에서 보니 그 물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자기도 모르게 그 눈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해 손을 내밀 정도로 말이다. 이런. 이건 외모가 이상하다고 말할 만한 계제가 아닌가. "블랙 버드?" "!" 남자는 어느새 올라가 있는 소년의 눈께의 손을 소년의 목소리에 놀라 서둘러 품안으로 거두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블랙 버드의 손을 어떤 뜻으로 해석한 것인지, 분명 눈을 만지려 했던 손인데 목께를 가리며 약간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야." "뭐?" "이유야 어쨌건 당신은 나 때문에 파크를 데려오지 못한 거니까. 게다가 전에는 우연이었다곤 하지만 당신이 정체를 말하고 다닌 것도 있고…하하. 당신하고는 왜 이렇게 많은 우연이 겹치는 건지. 남들은 평생에 한 번 겹칠까 말까한 우연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이야." "그건 동감이군." "그렇지?" 확실히 흔한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년이 해적들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블랙 버드의 외모가 바로 블랙 버드 본인의 외모였다던가. 블랙 버드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제왕의 보물이 하필이면 소년의 친구라던가 하는 점은 말이다. "그래도. 절대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 "아아. 알고 있다." "그리고, 나 때문에 파크를 놓친 것을 사과할 생각도 없어. 난 갑자기 친구를, 아니 가족을 납치해간 이에게 돌려달라 말했을 뿐인걸. 그러니 당신에게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생각보다 당돌한 녀석이 아닌가. 물론 오해하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소년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라면 자신은 지금 소년을 죽이러 온 대 해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태도라니. 아마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당돌한 꼬마의 버릇을 가르쳐 준다는 미명하에 가볍게 이 가는 목을 부러뜨려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하지만." "?" "내가 파크를 구하러 가기 위해 희망봉으로 가는 이 배를 얻어 타고 있다는 것만은 인정해야겠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나를 희망봉까지 데려가 줘. 나는 파크를 데리고 반드시 도빌 항으로 돌아가야 해. 죽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말이야. 설령 밥을 더 줄이더라도. 때리는 것이 더 심해지더라도 견딜 수 있어. 나는 꼭, 내 가족 파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거다." "……." 소년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블랙 버드는 굳이 그것을 정정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소년이 자신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유쾌해져 거기에 맞춰줄 기분까지 드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그래. 뱃삯에 대한 보답은 꼭 할 테니까." "어떻게?" "내 몸으로." "뭐?" 하하하. 남자는 참지 못하고 작은 감방 안이 크게 울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 아이.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소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줄이야. 하지만 라디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생명을 살려주는 대신 어떤 가혹한 대우도 참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말했을 뿐인데 남자가 저리 즐거운 듯이 웃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뭔가 웃길 만한 말이라도 했던가. 그럴 만한 거리는 없었는데. "뭐야. 왜 웃지?" "몸으로 갚는다고 했나, 지금?" "그랬는데?" "그 말뜻을 알고서 하는 소리인가, 소년?" "? 그야 당연하지." "하. 하하하! 이렇게 웃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하하. 하하하하!!" 실성은 한 것은 아닐까. 라디는 온갖 폼을 다 잡으며 들어왔던 남자가 허리를 접고 크게 웃어대는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혼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큰 소리로 웃어대던 남자의 웃음은, 크나큰 각오를 하고 진지하게 말했던 소년이 남자의 웃는 모습에 의아해함을 거쳐, 무안해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추었다. "쿡쿡…참. 의외로 재미있는 녀석이었구나. 너는." "내가? 대체 왜?" 라디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혼자 웃어대더니 자신에게 재미있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에 남자는 다시 한번 크고 짧게 웃더니, 그제야 라디가 앉아있는 감방 바닥에 살짝 쭈그려 앉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으로 보답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라고?" "? 그렇대도?" 블랙 버드는 당당한 태도로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소년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실, 남자는 라디의 몸을 한계로 몰아붙여 죽음 직전에 이르게 한 뒤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무슨 일이라도 달갑게 받아들일 만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다니. 이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쯤에서 반전의 키워드를 제공해볼까. "…보통 누군가에게 뭔가 부탁하는 상황에서 몸으로 갚겠다 라고 말하는 건, 자신이 정절을 그 사람에게 바치겠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 "……." "…뭐?" 역시 모르고 있었던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소년의 멍한 얼굴이 우스워 블랙 버드는 다시 한번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실지로 정말 유쾌했다. 자신의 말의 의미를 알아채기 위해 소년이 멍한 표정을 지은 채 한참을 생각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재미있을 정도로. "!!! 뭐, 무, 무슨 소리야!!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왜 그렇게, 가 아니라 일반론이다. 지난 번 나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모르겠나? 이런 것은 굳이 남자들 사이라고 해서 통하지 않는 얘기는 아니거든. 알고서 꺼낸 얘기 아니었나?" "그럴 리가 있냐!!" 정말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 이런 몰골을 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 도중에 왜 저런(?) 것을 생각하는지! "뭐야.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실망인걸." "실망은 무슨! 그런 의미일 리가 없잖아. 나는 내 몸으로 일해서 그 노동력으로 뱃삯을 치르겠다고 한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거 참 유감이군. 그래, 나와 그 밤을 지낸 이후에도 돈을 벌기 위해 한 번도 누군가에게 몸을 바친 적이 없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어!" 누가 들으면 굉장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남자는 태연하게 했다. 물론, 그날 굉장히 위험할 뻔한 상황이 일어났던 것은 인정한다. 바로 남자의 다섯 손가락을 정말로 어이없는 곳에 집어넣을 뻔한 일 말이다. 하지만 라디는 다행히 끝까지(?)는 가지 않았었다. 고로 밤을 지냈다고 하는 말은 맞는 표현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말이다. 너희들 슬럼가의 소년들은 어차피 힘든 노동은 하기 싫어하고 대부분 도둑질을 하거나 몸을 파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너도 그곳에서 자라서 잘 알 것 아닌가. 너희들의 그 나태함과 천박스러움을." "나를 그런 가벼운 녀석들과 같이 취급하지마!!" "호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편하게 돈을 벌자고 더러운 짓을 한 적도 없으며 언제나 항구 일이나 술집의 점원 일을 하며 정당하게 돈을 벌었다. 소매치기라고? 아아. 한 적은 있어.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은 같이 살고 있는 마사 아주머니의 병증이 심해져 약을 사기 위해 급한 돈이 필요할 때뿐이었어. 그 외에는 절대. 절대로 쉽게 돈을 벌거나 내 몸을 가벼이 굴린 적은 없어!!!" "……." 남자는 분한 듯이 말하는 라디의 얼굴을 촛불 빛에 비추어 바라보았다. 순하고 부드럽게만 보였던 까만 눈이 분한 듯 불타오르며 색의 순도를 높여 열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까만 색이라는 것이 이리도 아름다운 색이었던가. 억울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는 소년의 마음은 알겠지만 블랙 버드는 사실 소년의 신비한 눈빛에 사로잡혀 그 말을 듣고있지 않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눈이었다. 언제나 봐오던 색색의 형형한 눈동자들보다는 탁하지만, 그 어떤 빛보다도 눈에 띄고 화려한 빛이 바로 이 검은 색이 아닐까. 게다가 촛불 빛에 비춰서일까. 분에 차서 역설을 하는 소년의 눈동자는 비단 검은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속에 보물을 품고 있는 듯 황금으로도 보이고 루비 에메랄드, 비취 그 어느 것으로도 보이는 빛을 내재하고 있었다. …보물의 빛이라? "어떻게 된 거지?" "뭐가." "네 눈 색이 다르게 보인다." "무슨 소리야. 내 눈과 머리는 검은 색이야. 너희들이 그렇게도 놀려대던 까마귀 색이란 말이지." "아니, 아니다. 지금 분명 다른 색으로 보이," "촛불에 비춰졌기 때문이겠지. 당신 눈도 파란 색 위에 촛불 빛이 겹쳐졌다고." 그런 것일까? 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순간 너무나도 많은 빛이 눈에 있었는데.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 짧은 순간에 다섯 개 이상의 불빛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뭐야 당신. 갑자기 눈이 뭐 어쨌다고. 나를 모욕하더니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로 그냥 넘어갈 셈이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못 본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빛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생각은 해보았지만 도저히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해서 아마도 자신의 옷에 달린 보석들의 빛이 순간 비친 것이라고, 나름대로 그럴듯한 결론을 내린 후에야 그는 소년의 검은 눈망울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사실 그 이유가 아니면 달리 뭐라 말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사람 눈에서 가지각색의 빛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어쨌든." "음?" "분명 말했겠다? 몸으로 갚겠다고 말이지." "…그야 그렇지만…?" "그럼 이 자리에서 당장 갚아보는 것은 어때?" "응?" "이 자리에서 당장, 이 배의 선장인 내게 뱃삯을 치러보라고." "뭐?" 무슨 소리인지. 자신이 뱃삯을 치를 수 있는 시간 즉 뱃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해가 뜨는 아침부터이다. 지금 나가봤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보초서는 일 뿐일 텐데. 새벽부터 일하고 온 자신에게 보초라도 서러 나가라는 건가. 스윽. 의아해하는 라디의 몸으로 하얗고 긴 아름다운 손이 다가왔다. 그 손이 다가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은, 그 손이 걸치고 있는 넝마를 젖히고 바람막이로나마 두르고 있던 셔츠의 옷깃으로 향하자 그제야 무언가 번쩍, 하고 머리를 스쳐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탁!! "뭐 하는 거야!?" "…지금 내 손길을 쳐낸 건가?" "당연하지.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뱃삯 얘기를 하는데 왜 몸을 더듬으려는 거야?" "말하지 않았나. 뱃삯을 치르라고. 그 동안은 내가 부상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그걸 지금," "그래. 네가 말한 대로 몸을 바쳐 치르라는 뜻이다. 네 목숨 값 대신으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도대체 이 남자는!! "당신 머리 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는 것인가!!" "무슨?" "그거! 그거 하는 생각 말이다! 대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한다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남창에게 가면 되는 거잖아! 왜 자꾸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쉽게도 이 배에는 남창이 없다." 물론 비슷한 눈먼 장난감 하나는 있다만, 하고 남자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 그럼 다른 녀석을 찾아보라고! 당신들은 나를 오줌 색 얼굴이 어떻다느니 지저분한 머리색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천대하더니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나는 천대한 적이 없다만."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 때문에 라디는 기어이 짜증이 났다. "어쨌든! 당신은 이상해! 왜 나 같은 사내아이가 몸으로 값을 치른다는 말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굶주렸단 말이야? 블랙 버드 정도의 사내가?" "글쎄. 굳이 내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남자라면 몸으로 갚는다 라는 대목에서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까." "에녹스 제독은 안 그럴걸!!" !! 합. 라디는 답답한 남자 때문에 화가 나 뭔가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바로 입을 막아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고요한 침묵. 라디는 눈을 들어 남자를 보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사자(死者)의 그것처럼 어둡고 분노에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그 자와 비교하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 "분명 그렇게 말했지. 그딴 자와 비교하지 말라고. 안 그래?" "그건," "하긴. 네가 보기에 비교가 많이 되기도 할 것이다. 너는 그 때 에녹스 제독과 함께 있었지?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그 정도로 가까이 있으려면 꽤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 터인데, 그 남자에 대해 알기도 많이 알았을 것이다. 아아 그래. 그 자는 그렇게 고상하던가? 이런 천한 생각만 하는 해적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응?" " 흑!"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입만 가리고 있던 라디의 머리채를 남자가 거친 손으로 잡아 고개를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한다. 라디는 빠져 나와보려 했지만, 남자의 손은 무쇠라도 되는 듯 라디의 목 힘을 가볍게 넘어서며 자신과 마주보도록 고정시키고 있었다. "왜 말을 못하나. 응? 어서 말해보시지. 그래. 너는 전에도 내 얼굴이 에녹스 제독과 일치한다며 기분 나빠했었지. 이거 내가 기억 못해줘서 정말 미안한 걸. …그래.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군. 너. 설마. 그 놈에게는 다리를 벌렸던 건가?" " 무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디는 점점 심해지는 남자의 말에 결국 눈을 뜨고 그 분노한 푸른 바다를 마주보았다. 허나 가까운 곳에서 마주보는 블랙 버드의 분노한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조금 전의 여유있는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바다의 백정이라 불리는 잔인한 남자의 얼굴만이 남아 라디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왜. 아니라고 말할 참인가? 너는 그 제독을 동경한다고 했잖나. 그러니 그 제독에게는 나와 달리 다리를 벌리는 것도 쉬운 일이었겠지. 그래. 나처럼 천박한 생각도 하지 않는 고상한 제독님에게는 네가 먼저 다가설 수도 있었겠군. 안 그래? 너는 그 자를 좋아하니까." "헛소리하지마! 제독은 당신과 달라!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뭐…!" '아이고, 미치겠네. 이 놈의 성질!' 라디는 할 말 못 참는 성격은 결국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커다란 폭탄을 건드리고 말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편해지겠다고 남자의 웃기지도 않는 저질스런 농담에 맞춰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말이다. 짜악 !!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커다란 충격이 찾아오고, 라디는 순간 어딘가로 날아간다고 착각할 정도로 부한 느낌을 받으며 뒤로 밀려났다가 감옥의 나무 벽에 부딪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상에서 처음 맞아보는, 너무도 아픈 몽둥이 같은 따귀였다. "흑…!" "네 말이 맞다…난 그자와 다르지. 그래. 어차피 난 그자와 다르니 새삼 얌전을 떨며 너에게 잘해줄 필요도 없겠지. 나는 원래 이런 놈이니까. 안 그래? 나는 블랙 버드. 그 자는 태양 제독이거든." "우… 뭐, 뭐야!" "닥쳐!" "악!!" 남자는 라디의 넝마를 잡아채서 뒤로 던져버리고는 라디의 셔츠마저 찢을 듯이 세게 쥐고 벗겨내려 했다. 놀란 라디가 옷깃을 잡고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멍이 가득한 얼굴에 다시 한 번 따귀를 맞고는 잠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잠깐의 기절 뒤에 눈을 떠보자, 남자는 찢어낸 옷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있었다. "우! 우웅우우우우!!!!" "왜. 무슨 일을 할 지 겁이 나는가? 모르는 것도 아니잖나. 나란 놈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게 다 이런 거거든." "우우우우우!!!!!"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라디의 마음과는 별도로 몸은 남자가 주는 충격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철컥. "!" 남자가 허리춤에 손을 얹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라디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칼날이 반대로 된 작은 단도, 커트라스였다. 죽는 것인가! 라디는 자신의 기분을 거스른 대가로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라디의 생각처럼 라디를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닌 듯 했다. 커트라스의 칼날은 라디의 작은 목이 아닌, 라디의 다리를 가리고 있는 바지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쫘아악. 쫙. 쫙. "우우웅! 우우우우!!" 라디는 입이 가린 상태에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지만 남자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시하고 바지를 바지의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타박상 때문에 쑤시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움직여 보는데. 절걱!! '!' 족쇄. 다리에 걸린 무거운 족쇄가 라디의 반항을 개미의 힘만큼도 못한 미약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족쇄를 없애보려 손을 뻗지만 그 손 또한 저녁에만 채워지는 수갑으로 인하여 사용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부질없는 반항을 하려다 자신의 상황을 눈치채고 절망하는 라디의 모습을 잔인한 웃음으로 비웃어준 뒤, 이내 자신이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제서야 라디는 자신이 남자에게 털끝만큼도 반항할 수 없고, 남자 또한 자신이 반항을 하던 말던 자신의 뜻대로 원하는 것을 행할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포기. 포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도래한 것이다. 족쇄만 없었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도망쳐 나갈 순 있을 텐데. 족쇄. 저 족쇄만 없었더라도!! 남자는 라디가 족쇄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뒤로 도망치려던 움직임을 멈추자 제 세상을 찾은 듯이 편안한 자세로 라디의 옷을 마저 날카로운 칼날로 찢어 내렸다. 찌이이익. 서글픈 소리와 함께 라디의 겉옷은 모두 천 조각으로 변해버리고, 서늘한 바닥에 드러난 맨살은 나무 벽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시린 바닷바람을 맞으며 작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작은 떨림에도 흔들림 없이 바지를 잘라내자마자 곧바로 라디가 유일하게 걸치고 있는 속옷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커트라스로 바지와 같은 찢긴 천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라디가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머리의 두건과 작게 찢긴 셔츠 조각으로 만든 재갈과 손발에 걸린 족쇄. 단지 그것뿐이었다. 부스럭. 옷을 벗으려는 듯 남자의 허리께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드러난 라디의 엉덩이 사이에 사람의 체온을 가진, 그러나 그보다 훨씬 뜨거운 딱딱한 것이 닿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엉덩이 사이에 들어와 있는 것이 무엇일까 소년이 알아채기도 전에 남자의 흉포한 그것은 소년의 작은 비공(秘空)을 가차없이 꿰뚫었다. " 흅!!!!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처음에는. 남자가 들고있던 커트라스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몸 안에 들어온, 너무도 뜨거운 이것은 자신의 좁은 곳을 찢을 듯이 억지로 밀어 열며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소름끼치는 날카로운 느낌이 몸 중앙부에서부터 뇌를 치고 올라왔다. 라디는 자신의 살이 찢어질 것 같은 끔찍하면서도 두려운 느낌에 남자에게 꿰뚫려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어떻게든 도망치려 뒤를 돌아 앞으로 기어나갔다. 그러나 소년의 필사의 탈출은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도자기처럼 하얀 손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남자의 백도자기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손은 소년의 의외로 가는 허리를 억세게 쥐더니, 커다란 손바닥을 이용해 탱탱한 둔부까지 손안에 들어오게 한 뒤 그 촉감을 즐기듯 위 아래로 주물럭거렸다. 두 손안에 들어오는 작고도 탄탄한 둔부가, 남자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드는 곳의 안으로 들어가려 동그란 두 둔덕을 양손으로 있는 힘껏 벌려 보았다. "이것은…!" 그러자 어두운 감옥 안에서도 확연히 그 생김새와 떨림을 알 수 있을 만큼 훤히 보이는 소년의 작은 꽃봉오리. 소년은 부끄러운 곳이 보이고 있다는 생각에 엎드린 자세에서 여전히 앞으로 가려 애쓰고 있었지만 허리와 엉덩이를 남자에게 강하게 붙잡힌 상태라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긴장한 소년의 꽃봉오리가 수축과 이완을 하는 모습에 남자의 흥분이 배가됐을 뿐이었다. 남자는 어두워서 자세한 색은 알 수 없지만 제법 깨끗하고 좋은 모양을 하고 있는 소년의 작은 그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꽤 많은 소년 또는 청년들을 안아왔지만 그 중 어느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꽃잎이라고. 아마도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거나 낮의 햇빛 아래에서 본다면,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관계를 가지는 이들을 장난감쯤으로 생각해오던 남자가 평소라면 절대로 들지 않았을, 참으로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아무리 소년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분노한 상태에서 시작된 행위인지라 남자는 소년을 배려해줄 생각은 차마 들지가 않았다. 게다가 소년의 몸이 생각보다 색스럽고 탄탄했기에, 오히려 흥분만이 증가되어 그는 여유마저 잃고 완전히 본성에만 따르고 있었다. 마르고 빡빡한 소년의 좁디 좁은 처녀지를, 조금 전보다 더 험악한 기세로 단번에 파헤쳐 놓은 것이다. "훕!! 후우!!!! 후으우 !!!!!" 핏, 하고.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소름끼치는 느낌이 아래쪽에 느껴졌다. 찢어졌다. 그러나 또 들어온다. 아래의 그곳에 힘을 주어 못 들어오게 해도 끊임없이. 반항을 하면 할수록 더욱 거칠게, 조금씩 조금씩 그 윤곽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남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소년의 엉덩이 사이의 작은 문을 비집고 그 커다란 존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 ! 우! 후으!!!!!" 아직도 들어오고 있다. 아직도. 이미 찢어지고 더 이상은 무언가를 받아들일 공간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데, 남자의 것은 아직도 작은 항문을 비집고 찢어진 균열 사이를 흐르는 혈액을 윤활유 삼아 꾹, 꾹 하는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후! 후으… 우! 웁! 웁!! 웁!! 우우웁!!!" "…큭. 너무 조이는군…빌어먹을." 좀처럼 들어가도록 놔주지 않는 라디의 작은 입구에 남자 또한 힘든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남자가 힘들다면 억지로 칩임을 당하고 있는 라디쪽은 완전 탈진 직전이었다. 이대로 내장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끝도 없이 들어오고 있는 남자의 것마저 아래구멍을 넘어서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긴 삽입이 끝나고, 남자는 가련한 소년이 정신을 수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소년의 항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나무바닥에 튈 만큼 격한 펌프질을 시작했다. 소년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의 것은 빠져나가기는커녕 그 모양을 라디의 작은 직장 안에 선명히 새기며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아프다. 아니. 이것은 아픔이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죽음이었다. 남자는 섹스라는 또 다른 이름의 폭력으로 라디를 죽이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섹스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도 미비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살을 찢어 자신의 살을 집어넣고 쑤시는 일종의 형벌일 뿐이었다. "훕…흑! 흑, 후,훕!!" 지걱. 지걱. 철썩. 철썩. 땀과 체액, 혈액까지 뭉쳐진 라디의 작고 여린 곳은 질척하고 끈적한 소리를 내며 남자의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연약한 속살인 그곳은 무자비한 침입자에 의해 가련히 짓물렀고, 남자는 짓무를수록 침입이 용이해지자 그것을 기회 삼아 아예 호흡도 고를 수 없을 만큼 빠른 스피드로 자신의 육봉을 라디의 구멍에 마찰시켰다. "후우으 우우 …으,으,으,으,으." 쉴 새없이 빠른 스피드로 마찰해오는 남자의 커다란 육체에 그보다 작은 몸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접합 부위는 음란한 소리를 더욱 긴박하게 울리며 끝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짧게 이어지던 신음소리가 아예 긴 하나의 음절로 이어지며 소년이 단말마의 신음도 이어나가지 못했을 때 턱, 턱 하고. 라디의 작은 점막 안은 남자의 것과 더불어 남자의 몸 안에서 나온 하얀 정(精)을 접착시켰다. 그것은 아주 소름끼치고, 마치 뱃속에 용암을 붓는 것도 같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두려운, 또한 너무나도 불쾌한 경험이었다. " !!! !!!" "호흡을 쉬어라. 태양 제독을 좋아하는 놈은 섹스할 때의 호흡법도 모르는 거냐? 얼굴이 창백하군. 산소를 마셔 멍청한 녀석." 남자의 정액이 직장 내의 점막에 달라붙는 끔찍한 느낌에 고개를 미친 듯이 저어대는 라디에게 블랙 버드는 차가운 어조로 호흡을 고르라 말했다. 허나 소년은 극심한 고통과 처음으로 겪는 섹스라는 이름의 폭력 혹은 살인 으로 인해 패닉 상태였기에 남자의 말을 듣고 실행할 만한 정신적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라디의 산소부족으로 인해 창백해지는 얼굴을 보다못한 남자가 그 볼을 다시 찰싹, 하고 때리는 것으로 주의를 전환시켜 라디의 폐는 가까스로 산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산소부족으로 인한 쇼크로 넘어갔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후으, 후으, 후으, 후으…." "정신이 드나? 멍청한 녀석. 섹스를 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죽는 녀석이라니,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녀석이로군." 같은 남자의 몸에 자기 것을 끼우고 폭력을 행하는 자는 창피한 자가 아니냐!! 라디는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아래에서부터 찌를 듯이 타고 오는 격통과 산소 부족, 눈물로 인한 시야의 흐림 때문에 남자를 째려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남자의 것 또한 아직 라디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채 그 존재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었다. 주륵, 주륵 하며 조금 전보다 기세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라디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진득한 액체를 비롯하여. "……!!" "……." 어서 빼라고,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이 뜨거운 무기를 빨리 빼내라는 뜻으로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남자는 그런 라디의 눈물 어린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자신의 것을 빼기는커녕 조용히 응시한 채 몸 중앙 어딘가가 근지러워지며 피가 몰리는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멀은 듯 했다. " ??!! 우, 우으으??!!! 우으!!" 몸 속에 들어와 있는 남자의 것이 시들기는커녕 다시 점점 커져 가는 느낌에 소름이 좌악 하고 온 몸을 달렸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되는데. 싫다. 더 이상은 싫어!! 라디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남자에게 그곳을 꿰인 상태로 빠져 나가보며 몸을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에 남자는 음, 하는 작은 신음과 함께 몸 속에 들어온 흉기를 더욱 크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남자의 것이 점점 커지자 조금이나마 진정되어 가고 있던 그 곳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걸 느꼈다. 그 아픔에 세차게 젓고 있는 라디의 얼굴에서는 눈물 방울이 아롱져 흔들리는 고개에 맞춰 가련히 떨구어지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유혹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겠지…?" "!! 우으으으으!!!!!!!!!" 재갈이 물린 입 때문에 어떻게든 부정의 뜻을 표현하려 남자를 노려보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라디의 대답은 상관없는 듯 했다. 아니 오히려 거절을 하는 라디의 얼굴에 더 자극을 받은 듯, 라디의 작은 구멍을 압박하고 있는 그것은 거절을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더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이제는 라디가 남자의 것에서 빠져 나오려 해도, 남자의 흉기는 라디의 작은 입구보다 훨씬 커져 탈출은 불가능했다. 방법은 저 광폭한 욕망을 가라앉혀, 남자의 흉기를 잦아들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아니면, 큰 상처가 날 것을 감안하고 억지로라도 남자의 커다란 물건을 자신의 몸 안에서 빼내는 방법이라던가. 하지만 지금 라디의 몸은 눈을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갈 시도를 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동안 버텨온 것이 용할 정도로 혹사를 당한 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동안 당한 것의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잔인한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소년에게는 더 이상 버티라는 것 자체가 잔혹한 처사였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디는 필사의 의지로 기절하는 것만은 피해보려 했지만 남자의 것은 서서히 박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천천히 펌프질을 하고 있었고, 서서히 움직이는 남자의 움직임에 남자의 것을 소름끼치도록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평소에는 본 적도 없을 만큼 비밀스러운 작은 곳으로. "으…후으…!" 재갈이 물린 입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빨라지는 남자의 움직임은 라디의 온 신경을 접합부 한 곳으로 몰면서 정신을 탈진으로 이끌고 있었다. 자고 싶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놓아 버리면 이 아픔도, 끔찍한 불쾌함도, 남자에 대한 증오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피곤해. 아파. 피곤해. 아파. "후…!" 체력과 정신의 한계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흔드는 라디의 모습에 남자의 눈이 한 순간 크게 떠지며 그 모습을 주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준 것인지, 남자의 밑에 엎드려 있는 소년의 작은 밀 색 등이 순간 크게 휘며, 고통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더욱 크게 주억거린다. 소년의 두 눈은 고통스럽게 꼭 감겨있고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소년의 입에 물린 재갈을 적실 정도로 흥건히 흘러 넘쳤다. "우, 욱! 후으! 후…!" "음!!" 소년의 몸은 생각지 않고 지나치게 흥분한 자신의 것을 상처 입은 작은 입구에 거칠게 비벼대던 남자는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는 소년의 몸을 엉덩이를 쥐고 있던 두 손으로 받아 잠시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을 감고 완전히 힘을 뺀 얼굴. 결국 기절한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 그 동안 하루 한끼만 먹으며 서 있는 것만 해도 힘들었을 텐데 순전히 오기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버텨온 것이겠지. 주륵. 남자는 더 이상 후배위 자세를 지속할 수 없는 소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삽입이 된 상태로 소년을 자신과 마주보는 자세로 만들었다. 소년의 몸은 죽기라도 한 듯 힘없이 늘어져 남자의 손짓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젖은 소리가 나며 접합부에서 분홍색 액체가 흘러 나왔다. 남자의 하얀 욕망과 소년의 가련한 처녀혈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색정스런 액체의 색에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는 괘씸한 욕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째려보아도 도무지 식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기절한 녀석을 안는 파렴치한 짓을 해야한단 말인가.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소년의 모양 좋게 각진 어깨와 탄탄한 피부, 전보다 훨씬 단련되어 있는 복부와 목선 등으로 모여간다. 지난 한달 여 동안 꽤 힘든 일을 했는지 전에는 아직 어린 아이 티가 나던 몸이 이제는 제법 근육도 붙어가며 청년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듯 했다. 마른 몸에 적당히 붙은 근육이. 적당히 익은 부드러운 빵과도 같은 색과 감촉의 피부가.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관능적인 두 짐승의 접합부가. 이토록 자신의 욕망을 부채질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도무지 눈이 그곳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리고, 자꾸만 소년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흥분한 자신의 물건 또한. 이상할 정도로 자제가 되지 않는다. 이 나이대의 소년을 안아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처녀를 안아보지 못한 것 또한 아니었다. 게다가 이 소년의 외모는 평소 자신의 취향에 그다지 근접하는 것도 아닌 것이, 오히려 멀다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외모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자제가 되질 않는다. 소년을 보는 순간, 제왕의 보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강력한 욕망에 휩싸인 자신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소년의 벗은 모습을 보자, 이미 이곳이 어디이고 소년의 몸이 어떤 상태였는가 하는 것은 모두 머리에서 날아간 상태였다. 기실, 소년의 몸을 한계로 몰아 목숨을 구걸하게 한 뒤 자신 없이는 살 수 없도록 천천히 그 몸에 자신을 각인시킬 요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우…." "!" 기절한 와중에도 상처 난 곳의 통증을 느끼는지 눈을 감은 소년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맑은 눈물을 한 방울 또르륵, 흘렸다. 그 모습에 이 잔인하고도 거친 남자는, 결국 기절한 소년의 몸을 안는 것으로 오랜 고민을 끝내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부터 결정된 사실이기는 했지만. 굴쩍, 하는 진득한 소리와 함께 한사람만이 만족하는 섹스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감옥 안은 여전히 습하고 어두웠으며, 이제는 그와 더불어 끈적한 밤꽃의 향까지 풍기며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철썩. '파도 소리…?' 파도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그보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점성이 강한 어딘가 이상한 소리. 아마도 젖은 두 무언가가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럼 무엇일까. 물소리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분명 습한 소리이다. 무엇인가가 젖어있는 것이 분명한. 그리고 아까부터 허리도 아프다. 얼굴도 아프고 팔다리도 아프다. 게다가 이상하게 벌려져 있는 것 같은 골반도 땡긴다. 그리고. 그리고. 도대체 저곳이 왜 아픈 것일까. 저 비밀스러운 곳이. 저 수치스러운 곳이. 아까부터 왜 이리 압박감이 느껴지고 아릿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일까. 게다가 뭔가가 계속 그곳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쉴 새 없이 마찰을 하고 있었다. 왜. 왜 저런 곳에. 도대체 뭐가? "윽…!" "정신이 들었나." "!" 라디는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감각이 사실이었다는 것과 남자가 아직도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자마자 기겁을 할 만큼 놀랐다. 아직도.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악마 같은 짓거리를! "파트너를 두고 먼저 잠들어 버리다니. 참으로 예의가 없는 아이군. 안 그렇게 생각하나?" "누가 너 따위의 파트너야!! ?" 남자의 웃기지도 않는 착각에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 라디는 자신의 말에 자기가 놀라 자신의 입가를 내려보았다. 재갈이 없었다. 게다가 비록 남자에게 양쪽 다 잡힌 상태라고는 하지만 손목의 수갑도 풀려있는 상태였다. " 나쁜 자식!! 이거 놔! 흑!!" "…흥…아직도 그렇게 소리지를 힘이 남아있었나…이거 몸 생각해서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나." "놓으란 말야! 으, 악!!" "그럴 순 없지. 네 말대로 나는 '나쁜 자식'이거든." "흑!! 아, 아흑! 크윽!!" 남자의 크고 광폭한 흉기는 여전히 라디의 가장 비밀스러운 입구에 들어와 이제는 감각마저 둔해진 가련한 구멍을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라디가 정신을 차린 것을 깨닫자 잠시 속도가 줄었지만 남자를 향한 욕설을 듣자마자 곧바로 속도를 최고조로 올린다. 나쁜 자식. 정말로 나쁜 자식이라고 라디는 마음 속으로 욕했다. 차마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은 남자의 가혹한 공격에 신음소리를 내기에 바빴으니까. "으…ㄱ! 이 녀석, 너. 네가 더 힘들어질 줄 알면서도 이러는 건가?" "흐…윽!!" 남자는 조금 전보다 훨씬 심하게 압박해오는 라디의 입구에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그래도 라디는 그곳의 힘을 풀지 않았다. 이대로 남자가 멋대로 그곳을 휘젓게 해버린다면, 정말로 남자에게 몸으로 자신의 빚을 지불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싫다. 자신은 지금 단지 폭행을 당하고 있을 뿐, 절대로 몸으로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 으, 으, 아, 아아!!"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살을 찢는 고통에 잇새로 새어나가는 흐느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아무리 꼭 닫아 보아도. 의지를 넘어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액체를 막을 수가 없었다. 허나 마음만은. 마음만은 절대로 남자에게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여리고 작은 자신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도, 라디는 그것이 고통을 배가시키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꼭 준 힘을 절대로 풀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에게는 오랜 기간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갈증이 풀리는. 그러나 소년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가혹하며 잔인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쏴아아…. 철썩…. "……" 이른 아침. 남자는 벽을 통해서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은 물소리를 듣고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보이는 것은 조금은 생소한 오래되고 썩은 나무의 벽. 그리고 자신의 방과는 사뭇 다른 작은 장소. "음…." 남자는 잠자리가 불편함에서 기인한 가벼운 근육통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을 좋은 기분의 원인을 찾아 긴 팔을 좌우로 뻗어보았다. 어젯밤의 폭력적인 섹스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기분 좋은 행위를 가져다 준 것에 대한 포상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생각을 하며. "……?" 그러나 누군가의 부드럽고 탄탄한 어깨가 만져질 거라 생각한 손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눅눅한 나뭇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지금쯤 분명히 기절한 듯이 자고있을 터인데. 남자는 결국 포식한 맹수처럼 기분 좋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눈꺼풀을 열어 그 맑은 날의 푸른 바다처럼 아름다운 눈을 좌우로 돌려보았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그 몸을 해서…어딜 간 거야 그 녀석?!" 자신의 예상으로는 아마도 오늘 운신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고 그곳 또한 성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들로 다 썩어 가는 감방의 나무바닥에는 소년의 혈흔과 찢겨진 옷가지 등이 처참하게 널부러져 있었고. 그런데. 이 처참한 흔적의 주인공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남자는 우선 혹시라도 잠버릇이 험한 것인가 하여 감방 안의 구석구석까지 시선을 돌려 소년의 여윈 몸을 찾았다. 그러나 작은 감방 안 어디에도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 몸을 해서 나갔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방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과 세면실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소년의 야윈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설마!! 탁탁탁탁!! "어? 선장. 일어나셨어요? 오늘은 굉장히 이르시네요? 들어보세요. 오늘 플릭 칸 녀석이 글쎄요, 어어? 선장?" 급한 발걸음으로 난간을 오르는 사이에 선원 중 사림이라는 녀석이 말을 걸어왔지만 남자는 그보다 훨씬 급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야 했기에 무시하고 두 개씩 오르고 있던 난간을 세 개로 늘렸다. 늦었다면 큰 일인데. 만약 그렇다면 그 녀석은 지금!!!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와 현장부터 살펴본 블랙 버드는 다행히 그곳에 자신이 찾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했다. 놈. 바다에 몸을 던지진 않은 것 같군. 그러나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몸을 던진 상태이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아직 배 안에서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한 시라도 빨리, 소년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이 자식! 어서 빨리 움직이지 못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굼뜨게 움직이는 거야!? 아침부터 지각이나 하고 말이야! 네 놈 진짜 한 번 뒈지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테냐? 엉?"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자신이 원하던 사람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서있는 갑판의 바로 뒤에서 말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 오늘은 선장이 깨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니 준비할 것이 많단 말이야! 네 놈 하나 때문에 신경 쓸 정신이 있는 줄 알아?" 퍼억!! 저 녀석은 본 기억이 있다. 분명 자신이 스네이크가 추천한 갑판장으로, 이름이 해크인가 하는 녀석이었다. 노예들을 게으름피지 않게 부리는 것이 특기라고 하던.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저 해크라는 놈에게 구박받고 있는 한 나이 어린 노예였다. 바로 어젯밤.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받아준 동방의 소년 라디. "이 자식이?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네? 야, 임마! 빨리 움직이라고 했지! 지금 그 짐 하나만 갖고 시간을 얼마나 끄는 거야? 이 자식 이거 아침에 손수 옷까지 새로 내려줬더니 은혜를 몰라보고 계속 농땡이를 피네? 야, 임마!" 옷을 줬다는 갑판장의 말에 소년의 복장을 살펴보자 과연 어제 보았던 옷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당연했다. 소년의 옷이라고 말할 수 있는 넝마는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버려 걸레로조차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그 찢긴 옷보다 낫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다 문드러진 천 조각을 셔츠와 바지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것뿐이었지만. 아마 배 안에서 죽은 노예의 것을 창고 안에 처박아 두었다가 옷을 달라는 소년의 말에 귀찮아하며 던져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옷은 갑판장에게서 받았다지만 밤새 거칠게 시달린 몸이 단 몇 시간만에 회복될 리 만무했다. 과연 무리하고 있는지, 소년의 귀여움을 간직하고 있던 얼굴 선은 하루만에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고, 잘 익은 벼처럼 건강한 색을 유지하고 있던 볼은 백짓장이 따로 없을 만큼 창백해져 있다. 출혈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혈색이 없을 만도 하겠지. 게다가 저 걸음걸이. 옷이 워낙 더럽고 검댕이 많이 묻어 다른 선원 녀석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소년의 작게 조여진 엉덩이 부분이 검붉게 물들어 있다. 아마도 상처입은 그곳이 어제에 이어 출혈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몸이 저 지경인데도 이 새벽부터 나와서 갑판 일을 하고 있다니. 제정신인가 저 녀석.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 쫘악 !!!! "흐윽!!" '저!' 자신에게서 기인된 고통 때문에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소년을 답답해 한 갑판장이 참지 못하고 기어이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소년에게 휘둘렀다. 생사를 확인했다는 안도감에 소년의 모습을 살피던 블랙 버드는 갑작스런 갑판장의 체벌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년을 향해 손을 뻗고는 이내 자신이 내민 손을 거뒀다. 소년과의 거리는 자신이 손을 벌린다고 해서 닿을 만큼 가까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손을 내밀다니. 이 무슨 창피한 짓이란 말인가. 다행히 각자의 일에 바빠 이 추태를 본 선원들은 없는 듯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민망하여 블랙 버드는 내밀었던 손을 반대편 손으로 슬며시 문질렀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콰당! "!" 그때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던 소년이 갑판장의 채찍을 맞고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남자가 서 있던 자리를 박차고 소년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고, 갑판장은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누워서 게으름을 피려는 괘씸한 노예에게 다시 일침을 가하려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건방진 자식이 어디서 드러누워 드러눕기를! 오냐 그래. 어디 한 번 오늘 매나 제대로 맞아 봐라!!" 쫘아아악!!!!!!!!!!!!!!!!!!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탈진한 소년을 향해 휘두른 채찍이 사람의 살에 휘감기는 경쾌한 소리를 내자 갑판장은 신이 나서 한 번 더 휘둘러줄 생각으로 채찍을 다시 회수했다. 아니, 회수하려고 했다. 자신의 앞에 서서 채찍을 하얀 손목에 휘감고 있는 은발의 미남자만 아니었다면. "뭐야 너는!!! 누군데 감히 내가 하는 일에 참견…응? 서, 서, 선장??" "…어지간히 해. 이 녀석 기절한 거 안 보이나." "예에?" 노예를, 그것도 농땡이 피는 노예를 체벌하는 현장에서 선장이 방해를 하다니. 그것도 그냥 말로 중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채찍을 노예대신 맞아가며??!! "아, 아니 선장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선장의 회복 기념을 위해 지금 한창 고기도 굽고 럼주도 나르며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아. 감시 나오신 건가요? 그렇다면 걱정 마십시오. 아주 착착 진행중이니까요. 아 근데 글쎄 저 포로 녀석이 오늘 아침부터 늑장을 부리더니 발가벗고 와서는 나무에 옷이 찢어졌으니 옷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허 참. 괘씸하지만 이 착한 제가 옷을 던져줬읍죠. 그런데 이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일하는 꼬락서니가 영 시원찮습디다. 그래서 버릇 좀 고쳐주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장께서 왜?" "……." 해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이해할 수가 없는 선장이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저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허나,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선원들과 갑판장뿐만이 아니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본인. 블랙 버드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까는 닿지도 않을 채찍에 손을 뻗으려 하더니 이번엔 소년을 다시 한 번 갈기려는 채찍을 자신의 손에 대신 감았다. 갑판장이 벌주려는 노예를 막아서고, 게다가 모든 선원들이 한 눈에 보고 있는 갑판 안에서. 어쨌든 본인 자신도 패닉 상태이긴 했지만 상황수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더 이상 이 고요한 상태로 있다간 선원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저 녀석 또한 매우 좋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다. 하던 일들을 마저 속행해라." "뭐라고요 선장?" 블랙 버드가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갑판장이 얼빠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선원들도 상황이 어찌될지 모두들 시선을 모은 채 흥미진진한 표정들이다. 하던 일들이나 마저 하라고 했더니. 쯧. 더 이상 말해봤자 득 될 것도 없고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을 듯 해 블랙 버드는 조용히 손목에 감긴 채찍을 풀고 소년이 누워있는 갑판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옮기는 걸음 하나 하나마다 선원들이 시선도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왓! 까, 깜짝. 선장, 채찍을 놓으면 놓는다고 미리 말씀을… 서서서선장?! 지금 대체 뭘 하시는," "뒷정리를 부탁한다. 이 녀석은 치료가 좀 필요한 녀석이라서." "예에?" 자신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남자는 조용히 자기 앞에 누워있는 노란 피부의 이상한 노예를 품에 안아 들어올리고 있었다. 해크의 놀라움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선원들의 표정 또한 해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저 선장이. 노예 따위 배의 밑바닥에 고인 오물만큼도 생각 안 하는 남자가. 고깟 노예 한 마리쯤 채찍으로 다룬다고 손수 채찍을 막아서고 게다가, 안아 들어서 옮기기까지?? 미친 것이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조차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남자가 저럴 수는 없는 거다. 선원들은 전원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다가 자기랑 똑같이 생긴 태양제독에게 부상 한 번 당하더니 사람이 변했다. 아니 미쳤다. 선장이 미쳤다. 선장이 미쳤어!! 그러나 그 말을 감히 용감하게 입 밖으로 낼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이었으니까. 그 동안 전 해상을 장악하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누구보다 많은 보물을 갈취해 온 블랙 버드에게 함부로 미쳤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선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무도 없었다.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가입은 2004년 4월 10일부터 15일까지입니다. 가입인사 적어주세요!::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88 2390 160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18~1권 완결까지 (5) ** 2권 분량은 다음주 금토일 3일간 공개됩니다. 이 글은 11일 자정에 삭제됩니다. 자세한 공지는 전에 올렸으니 검색해봐주시기를..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끼이…털썩. "우…음…." 자신의 방으로 딸린 선실로 돌아와 나무문을 닫은 뒤 품안에 안고 있던 소년을 침대에 내려놓자 소년이 괴로운 듯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낸다. 자는 와중에도 고통은 계속된다는 건가. 저 몸을 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무거운 럼주 통을 나르고 있었다니. 역시나 보통 녀석은 아니지 싶었다. 잔인한 해적들을 상대로 자신을 내건 사기를 치는 것을 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 스윽. 상처를 보기 위해 바지를 벗기는 와중에도 피는 계속 흐르고 있는지 어느새 침대 시트에 혈흔이 점점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찢어진 정도가 꽤 심한 듯 하다. 역시 어제는 자신이 너무 거칠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녀석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다고, 먼저 도발을 한 것은 소년이었다고 남자는 자위하며 소년의 바지를 마저 벗겨냈다. 혈액에 젖은 더러운 바지가 질척거리며 남자의 일을 방해했다. 그러자 남자는 이제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품안의 커트라스를 꺼내 소년의 바지를 또 다시 자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낡아 군데 군데 찢어져 있던 진 녹색 바지는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금방 그 안의 내용물을 비추기 시작했다. 여전히 멍이 들어 안쓰러움을 자아내는, 탄력 있는 근육이 매력적인 소년의 긴 다리였다. "흠." 남자는 어젯밤 자신이 잘라버려 차마 속옷을 입지 못해 드러난 소년의 성기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정으로 누운 소년의 자세를 엎드린 자세로 뒤집었다. 그러자, 오래되어 검게 굳은 피와 지금 막 흐르고 있는 선홍색 피로 처연히 물든 소년의 작은 엉덩이가 보인다.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그곳이 꽤 많이 찢어졌고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이었다. 드륵. 남자는 앉아있던 의자를 밀어내며 자신의 방에 딸린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함을 꺼내왔다. 배 의사가 자신에게 상처를 보이는 걸 꺼려하는 선장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가장 좋은 약들로만 가득 채운 선장 개인용 약재 함이었다. 약재 함을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남자는 잊지 않고 아침 세수용으로 놓인 항아리 안의 물로 소년의 상처 부위를 닦은 뒤 앙증맞은 색색의 병들 중 연보라색의 병을 열어 노란색으로 된 액체를 엄지손가락만큼 손바닥에 덜어냈다. 차가운 물이 쓰린 상처 부위에 닿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소년이 으…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상관치 않고 소년의 남은 혈액 응고 덩어리를 깨끗한 침대 시트로 마저 닦아낸 남자는 손바닥의 연고를 둘째손가락에 덜어 소년의 비밀스러운 입구로 가져가 발랐다. 겉뿐만 아니라 분명히 상처 입었을 뜨거운 안까지 세심하게. "으…으…싫어…!" "!" 상처에 손가락이 닿아서일까. 소년이 어제의 일을 꿈꾸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온몸을 뒤틀고 도망치려 했다. 남자가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잡자, 소년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엎드린 자세에서 앞으로 기어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으아아!! 싫어! 이거 놔!! 이거 놔아아아!!!!" "가만있어! 치료해 주려는 거다!" "싫어어!! 싫어어어!!!!" "가만 있으래도!!" "이 망할 자식! 이거 놔! 나쁜 자식! 이거 놓으란 말이야!!!!" "이 녀석이!!" 현실과 꿈이 혼동된 것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러 대는 소년 때문에 치료를 할 수가 없자 남자는 우선 진정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선장용 고급 와인을 한 입 가득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쳐 날뛰고 있는 소년의 위장으로 부어버렸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흡! 음…으음!!! 으, 흐…ㅂ!" 꿀꺽. 목 울대의 울림과 함께 소년의 목안에서 와인은 틀림없이 식도를 통해 위장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의 혀는 소년의 입안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아니, 빠져나오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방해가 되는 소년의 혀를 이리 저리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고 할까. 블랙 버드는 분명 처음 목표는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녀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뜻하지 않게 한 키스가 어째서 지금 자신을 무아지경으로 만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의 이런 생각마저 곧 무아(無我)의 경지로 흘러가면서 결국은 오로지 소년의 입안을 탐색하는 데만 온 정신을 쏟아 붓게 되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흡…하아…으, 읍…우…." 라디는 지난 밤에 그렇게 괴롭히고도 모자라 이제는 숨도 마음대로 쉬지 못하게 하는 남자가 야속해 다시금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보았지만 무쇠처럼 턱을 꽉 쥐고 있는 남자의 큰 손 때문에 고개는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의 혀는 마치 럼주 안에 잘못 들어간 벌레인 것처럼 자신의 입안에 들어와 이방인임을 증명하며 이곳저곳을 휘젓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아래쪽의 상처도 아프다. 뭘 발랐는지 미끄덩거리는 것이 아픔에 불쾌함까지 가미되었다. 갑자기 들어간 술 때문에 식도와 위는 타는 듯 하고, 그 때문인지 정신이 아릿해지면서 왠지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아아. 아마도 와인 때문일 것이다. 슬럼에서 자란 라디는 입에도 대보지 못한, 순도 높은 귀한 와인이 일주일 여 동안 굶주린 배속에 갑자기 들어와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심장 가까운 곳이 지끈거리면서 몸 한 가운데가 뜨거워지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래서 이 남자의 등을 찢을 듯이 세우고 있던 손톱의 힘이. 서서히 빠지고 있는 것일 게다. 메마른 입술을 적시고 치열을 가르고 들어온 남자의 붉은 혀는 종내는 라디의 분홍빛 혀를 찾아 드디어 기다리던 것을 만났다는 듯 정신 없이 돌리고 빨고, 그리고 비벼댄다. 혀의 돌기 하나 하나마저 셀 수 있을 정도로 길고도 음란한, 소년이 처음으로 겪어보는 '어른의 키스'라는 것이었다. 라디는 키스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과연 키스라는 것이 맞는 것인지, 맞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숨막히고 힘 빠지는 것을 하면서 어떻게 다른 더 심한 것들도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촉…. "하아…하아…하아…." "……." 섹스라면 섹스, 키스라면 키스 뭐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는 남자의 지나치리만치 뛰어난 테크닉에 섹스나 키스 모든 것에 익숙하지 못한 소년은 완전히 넉다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가 손발 입술까지 모두 자유롭게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커녕 욕설조차 하지 못한 채 가빠진 숨만 고르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년의 음란하게 젖은 입술을 감상하고는, 이내 자신이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소년의 다리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치료를 위한 명목이라고는 하나 어찌됐든 소년에게는 무척 불쾌할 만한 행동을 했다. "하… 뭐, 뭐 하는 거야!!" "치료하는 중이라고 좀 전에 말한 것 같은데." "치, 치워! 거기다 손을 넣어서 무슨 치료를 한다는 거야! 악랄하고 치졸한 변태 자식 같으니!!" 하. 블랙 버드는 이제 용감을 뛰어 넘어 무모하기까지 한 소년의 발언에 화가 난다기보다 기가 막혔다. 변태 자식이라. 과연 저것이 바로 한달 전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해적들을 속이고 돈이나 뜯던 거지소년이 맞단 말인가. 맞다면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해진 것인지. 그리고 자신은 한낱 슬럼가의 소년에게 저런 말을 듣고도 왜 처벌을 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이 소년을 만나고부터. "…잘 들어라 꼬마. 치료란 원래 상처난 곳을 고치기 위해 하는 것이지. 그런데 너는 어제 이곳을 상처 입었고 나는 이곳을 치료하기 위해 연고를 바르는 중이었다." "그게 어쨌다고!! 하여튼 빨리 빼," "그런데 네가 이렇게 힘을 주고 꽉 조이고 있으면, 손가락을 뺄 수가 없지. 뭐지 이건.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팟, 소리라도 날 듯 소년의 비밀스러운 입구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지고 남자의 손가락은 조금 아쉬운 듯 따뜻한 내부에서 번들거리는 연고와 함께 밀려나왔다. 빠져나온 손가락은 바깥 세상의 한기에 가볍게 떨며 조금 전까지 들어있었던 내부의 따뜻함을 다시 요구해온다. 남자는 너무도 따뜻했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하는 손가락을 아쉽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한 짓을 눈치채고 더 이상 없을 정도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이 한 행동이 생각나 부끄러운 나머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영 보여줄 기미가 없는 듯 하다. 저런. 저 정도로 고개를 깊게 묻으면 호흡에 문제가 생길 터인데. 역시 보면 볼수록 질리지 않는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남자는 진심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무리를 시킨 것도 있고, 또 생각보다 훌륭한 명기(名器)에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겼겠다, 이쯤에서 기분을 풀어주고 자잘한 멍들마저 치료를 해줄까 생각하는 와중에. 똑똑똑똑. 늘 그렇듯 자신이 뭔가를 결심한 타이밍 아니면 굉장히 중요한 타이밍마다 노크를 해대는 저 얄미운 손가락을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코 고의가 아닐 텐데 조금 잔인한 것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전혀 잔인하지 않다 저 남자에게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괴롭히는 것을 보면 저 남자, 고의가 분명했으니까. "…누구냐." "접니다 선장." 역시나.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좋은 타이밍을 방해한 것은 친애하고 신뢰해 마지않는 부선장 스네이크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참을성 많고 잔인하기는 하다지만 부하들 챙기는 것만은 어느 해적선 선장에게도 뒤지지 않는 블랙 버드라 하더라도 저 얄미운 직속 부하를 한 번쯤 괴롭혀줄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뭐라 해도 정말로 간만에, 아니 어쩌면 역대 최고의 애첩이 탄생되는 순간일 수도 있었던 것을 말이다. "…들어와라." "!"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순간을 방해했다고 해도 부선장은 부선장. 자신이 생사를 헤맬 정도의 위급한 일이 아니면 저 사내의 보고는 받아야 했다. 그것은 선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 의무 겸 권리였으니까 말이다. 한편 스네이크라는 남자가 들어온다는 소리에 라디는 베개에 박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어 굳게 닫혀있는 선장실의 참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들어온다고? 지금 이 꼴인 나를 보러? 기실, 스네이크는 절대 라디를 보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원들의 열화와도 같은 성원을 입어 십자가를 지고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포로와 선장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었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선장…." "무슨 일인가."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스네이크는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전경에 일단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건. 신 새벽부터 부녀자 강간하는 파렴치한의 모습도 아니고.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침대 위의 소년과 청년, 이라 할 수 있는 이 배의 주인은 남들이 본다면 스네이크가 생각한 곤란한 장면으로도 오해할 수 있을 만큼 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스네이크가 생각한 것이 오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꽤나 들어맞는 부분들이 많긴 했지만, 어찌되었던 강직하고 원칙 주의 사나이 스네이크가 보기에 그 장면은 꽤나 이색적이고 보통이 아닌 장면인 것만은 확실했다. 침대 위에 검붉은 피를 흘리며 고개를 파묻고 있는 부드러운 황색 피부의 마른 소년. 그리고, 참으로 부끄러운 곳에 손을 가까이 대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선장. 게다가 소년은 전라에 옷들은 갈기갈기 찢겨 온 사방에 널려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방해를 한 듯 하군요." "알면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게. 제.발." 잘났다고 큰 소리인가 저 사람은! 도대체 이른 아침부터 갑판에, 그것도 선원들 가장 많이 있는 장소에서, 게다가 웬 노예 소년을 들쳐업고! 아니, 들쳐업었으면 말을 안하겠다. "선장." "그래. 무슨 일인가." "갑판장에게 노예 한 명 한 명을 사랑하라는 지침을 몸소 보여주셨다고요?" "뭐?" "게다가 그 노예를 위해 채찍까지 맞아 가시면서요. 그리고 뭐? 공주님 안기로 안아 이 방으로 데려오셨다고요." 스네이크의 말에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마른 몸이 움찔 하고 작게 떨렸다. 깨어있나 보군. 그럼 설마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운반되어 왔단 말인가.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공주님 안기라. 하하. 나는 워낙 천박하게 노는지라 공주님 따위 안아본 적이 없지만 뭐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부정은 안 하네. 이 녀석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거든." "이유라? 그게 혹시 어제 노예 담당 녀석에게 감방 열쇠를 뺏어 가신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뺏다니. 난 그냥 볼 일이 있으니 잠시 빌려달라고 했을 뿐이야. 내 배에서 내 배의 열쇠를 가져간 게 잘못인가?" "평생 안 하던 짓을 하시니 이상하게 생각한 선원들이 전부 저에게 하소연하러 오니 그게 문제이긴 하지요." "아하.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이리 비틀려 있는 게로군 자네." "아시면 다행입니다만." "뭐." 남자는 스네이크의 차가운 말투에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능글맞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정말 정신이 나간 건가 이 사람. 갑판장 및 선원들이 말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언지하에 묵살했지만 슬슬 그 말에 믿음이 가기 시작한다. 평소 같았으면 좋은 시간을 방해했다고 불호령을 해도 마땅치 않은 차에 웃어? 남자의 그간의 행적을 아는 스네이크로서는 저것이 자신을 책하기 위한 웃음인지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짓는 웃음인지 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설마. 저 노란 피부의 소년이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는 것일까. 선원들의 시선과 자신의 책망은 전혀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이봐 스네이크." "예, 선장." "지금부터 이 녀석은 부역에서 해방시켜라." "예?" "그리고 숙소도 이곳으로 옮긴다. 그 감방은 치울 필요도 없으니 그냥 녀석이 입을 만한 옷과 식사만 이 쪽으로 가져오면 된다." "서, 선장?" "선원들에게 말해놔라. 특히 갑판장에게. 더 이상 이 녀석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얼떨한 기분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선장만 찾고 있는 스네이크에게 남자는 눈앞의 소년의 몸을 즐거운 듯 바라보며 소년의 탄탄한 몸 중 가장 심한 멍이 있는 곳을 찾아 꾹 눌러보았다. 고통스러운 듯 귀여운 얼굴을 베개로 더욱 파묻는 것이 보인다. 이런 것에 재미를 붙이면 좋지 않은데. 라고 남자는 왠지 점점 위험해지는 자신에게 스스로 경고음을 울렸다. "선원들에게 더 이상 이런 장난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 만약 스트레스 해소를 하고 싶다면, 선장의 것이 아닌 다른 것에 하라고 말이야." "!" "선장!" 남자의 폭탄 선언에 스네이크뿐만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누워있던 소년조차 번쩍 고개를 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것'이라고? 저 남자 지금 그 의미를 알고서 하는 말인가? 만약 알고 있다면, 저 성스러운 수도사 테이어드에게도 하지 않던 말을 이런 못생기고 더러운 노예 소년에게 한단 말 …. 아니. 스네이크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못생기고 더러운, 이라는 말은 맞지 않았다. 아니 아니, '더러운' 이란 말은 여기 저기 멍이 생기고 검댕이 묻은 소년에게 조금은 맞는 듯도 했지만 아마도 '못생긴'이란 말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될 것 같았다. 하룻밤 새에 저 남자가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소년의 외모는 많이 변해 있었다. 아니, 외모라기 보다는 분위기랄까. 아마도 색기라는 것을 말한다면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일 게다. 어젯밤에 대체 무슨 광란의 밤을 보냈기에 울어서 퉁퉁 부은 눈꺼풀에 붉게 충혈 된 흰자위. 게다가 아직도 촉촉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검은 눈동자. 저 눈빛 하나만으로도 남자의 신경을 자극할 텐데 소년의 하룻밤 새의 변화는 비단 눈동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은 더러운 두건을 쓰고 있었기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의외로 결이 좋고 올이 굵은 검은 새의 깃털 같은 새카만 직모. 만져도 만져도 금새 제 모양을 찾아올 것 같은 빛나는 검은머리에 저도 모르게 손을 넣고 싶다고 스네이크는 생각했다. 물론, 이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쳐 보고있던 블랙 버드와 라디를 당황하게 만들긴 했지만. 게다가 하룻밤 새 심한 일을 당하느라 쏙 빠진 얼굴 선과 얼마나 비벼댔는지 두툼하니 부은 입술. 일주일 간 창백한 색밖에 보지 못했던 소년의 입술을 저리 보니 또 굉장히 색스럽고 육감적이기까지 하다. …스네이크는 이번엔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쭉 뻗은 팔다리에 남아있는 저…수많은 얼룩덜룩 멍울들. 실지로 블랙 버드가 남긴 것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이렇게 보니 또 그 멍이 그렇게 묘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가 없었다. 마치 온 몸에 남겨진 키스마크처럼 말이다. 스네이크는 왠지 그 동안 소년을 끊임없이 폭행해 온 녀석들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저 엉덩이. 등의 곡선. 견갑골의 위치. 엎드려 있는 자세 때문에 얼핏 얼핏 보이는 소년의 비밀스러운 곳의 음영이라던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스네이크는 고개를 붕붕 저어 하고 있던 어이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음영이라니. 도대체 그곳의 음영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고 왜 시선이 머문단 말인가. 요즘 들어 테이어드의 일 때문에 블랙 버드에게 놀림을 받았더니 머리가 아예 그쪽으로 돌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소년은 남색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스네이크조차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있기는 했다. 전에는 블랙 버드의 말처럼 더러운 밭에서 구르던 원석이었다면, 이제는 어떤 보석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기만의 색을 가진 독특한 보석으로 다듬어졌다고나 할까. 그래. 그 표현이 적당히 들어맞는 듯 했다. 다듬어진 보석. 지금 혼란스러운 스네이크의 머릿속을 채워주고 있는 소년의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세공사의 손에 의해 길들여진. "너…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스네이크가 자신의 생각을 마저 정리하기도 전에 관심의 대상이었던 소년이 스네이크의 잡념을 저 멀리 떨쳐버리게 해주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이름을 들었다간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저 무서운 선장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뭐…라고 꼬마?" 반말을 들은 본인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 빙긋 미소만 짓고 있었고 패닉에 빠진 스네이크가 블랙 버드가 할 말을 대신했다. 이 상황에서 웃고 있다니. 저 사람 정말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닐까. 자기에게 말 한 마디라도 거역을 하는 놈에게는 설령 바다 한 가운데라 할 지라도 당장 식량 한 조각과 보트 한 척만을 주어 굶주림에 죽거나 상어에게 물려죽거나 그도 아니면 노를 젓다가 과로사로 죽게 만들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웃고 있다고??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면, 저 소년은 분명 동방의 양귀비인지 하는 명기보다 더한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저 황색 피부의 소년이 그 정도로 남자를 홀리는 명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조금 전 자신도 소년의 모습에 흔들리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나 동방의 소년, 라디? 넌 오늘부터 부역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이 방에서, 나만을 만족시키면 되는 거야. 그게 니가 할 일이고, 네가 치러야 할 뱃삯이다." "뭐가 어째?" "영광으로 알아라. 생각보다 네 몸의 감도가 꽤나 좋아서 나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거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버릇없는 행동들을 눈감아 주고 몸소 네 몸의 상처를 씻기고 연고까지 발라줄 정도로 말이야." "누구 때문인데!!!" 소년은 자신의 상처의 탓이 블랙 버드 때문이라고 하며 적반하장을 따졌지만 블랙 버드의 말대로 그것은 영광으로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저 잔인한 남자에게 재수 없게 걸려 인생 망친 소년 및 청년, 그리고 가끔 가다 한 번씩 있는 아가씨들을 수도 없이 봐 온 스네이크였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내쳐진 이유는 참으로 간단명료하면서도 어이없는 것들뿐이었다. 감도가 좋지 못하다거나, 신음소리가 좋지 못하다거나. 그 외에도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이유들. 그 이유들로 인해 그들은 식량 탓으로 산 채로 고기밥으로 던져지거나 여자에 굶주린 선원들의 배출구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저 소년 또한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스테이크였건만. 뭐라 했던가. 부역일 할 필요 없이 이 방에서 편히 선장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게다가 뭐? 몸소 상처까지 씻기고 저곳에 연고까지 발라 줘? 자신이 알기로 테이어드를 처음 안은 날 남자는 상처를 씻어주기는커녕 저녁까지 다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깨끗이 씻겨놓으라는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었다. 다른 선원들이야 납치되어온 녀석을 일일이 신경 쓸 리 없으니 그저 여린 곳을 다친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테이어드를 보다못한 스네이크가 씻겨주고 약도 발라주고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테이어드는 그나마 체력을 보존하고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던 것이고.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이렇게까지 차별대우를 하다니. 소년은 지금 뭔가 억울한 듯 선장을 노려보고 있지만 저건 저 소년이 자신의 선장을 몰라서 하는 행동이었다. 아마도 목숨이 아까운 줄 아는 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선장에게 저런 눈빛을 보낼 수 없으리라. 저런 것이 가능하다니. 의외로 대범하고 대단한 소년이 아닌가. "그래 나 때문이지. 그래서 몸소 돌봐주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넌 이제 이곳에서 매일 몸이나 돌보면서 나만 받으면 되는 거야." "뭐…가 어째?" 듣자 듣자 하니까 남자의 말은 마치 자신이 가진 것은 몸뿐이고 배운 것은 남자를 받는 것밖에 없는 소파의 여자들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이 방에 갇힌 채 저 남자의 그 살인과도 같은 폭행을 참으라고? 그것도 매일? "내가 미쳤어! 차라리 일을 줘! 나는 일을 할거다!" "뭐?" "나는 너 따위의 남자에게 노리개가 되려고 이 배에 탄 것이 아니야! 그딴 일을 하면서 뱃삯을 치를 거였다면 진작에 탈출해서 이 배에서 내렸을 거다! 나는 내 의지로 이 배에 타고 있는 거야! 너 같은 자식에게 굴할 거였다면 진작에 목숨을 포기하고 너희들의 폭력에 하지 말아달라 애원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를 몸이나 파는 남창 따위로 취급하지 말아라! 나는 라디! 도빌 항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온 사람이야! 당신에게도 정당한 노동으로 값을 치르려 한 것이지 그따위 더러운 짓으로 쉽게 배를 타려한 것이 아니야. 설령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상대하느니 몸이 부서지는 걸 택하겠어. 너 따위가 함부로 굴어도 될 만큼, 쉽게 살아오지 않았단 말이야! 일을 줘!!" "더러운 짓…이라고 했나 지금?" "그래!! 사람을 억지로 묶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가지고 노는 비열한 행위가 더러운 짓이 아니면 뭐란 말야!! 당신은 비열한 인간이야!!" "……." 이제는 기가 막힌 것을 넘어서서 소년의 기개가 걱정되기까지 했다. 저 정도라면 아마 산채로 물고기 밥으로 던져지는 정도가 아닐 텐데. 아마 평소의 선장 성격이었다면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바닷물을 붓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정도로 소년이 하고 있는 행동과 말은 목숨을 아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옷은 발가벗고 침대 위에 엎드린 상태에서 옷을 걸치고 정자세로 앉아있는 미남자에게 하는 말이었기에 조금 박력은 떨어진다지만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화가 난 선장이 발가벗은 소년을 들쳐업고 그대로 바다로 던져버린다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소년이 하는 가차없는 말들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선장이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덕킹인가 킬홀링인가. 그도 아니면 단지 드롭인가.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서 바로 커트라스를 꺼내는, "…멋대로 해라." "예?!" 남자의 쇠를 긁기라도 하는 듯 거친 목소리에 놀라움을 표한 것은 소년이 아닌 스네이크였다. 멋대로 하라고? 지금 설마 자신에게 멋대로 저 소년을 처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럼 정말 저 소년의 뜻대로?? "…옷을 줘. 당신이 망가뜨렸으니 정식으로 청한다. 아무리 부려먹는 노예라도 기본적 인권은 존중해주기 바래." "…줘라 스네이크." "주라고요??"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재차 확인을 하자 소년에게도 향하지 않던 사나운 눈빛이 자신에게 향한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바다에서 보내며 갖은 일을 겪어왔지만 선장의 저 눈빛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 계산해도 자신보다 적어도 5년 이상은 어릴 저이가 저 정도의 강한 살기와 매서운 눈빛이라니. 도대체 어떤 유년기를 겪으면 한 인간이 저리된단 말인가.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는 스네이크로서도 때때로 남자의 저런 눈빛을 볼 때면 모골이 송연해 지면서 다른 보물만을 노리는 해적들이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하긴, 저런 선장을 모시고 있으니 다른 해적선의 선장들은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아 이 블랙 버드호가 최고의 해적선이 된 것이긴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스네이크." "…예." 남자의 말에서 더 이상의 용서는 없다고 판단한 스네이크가 재빨리 선장실에 딸려있는 옷장을 열어 소년이 입을 만한 옷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했다. 저 정도로 분노한 상태이면서 왜 소년을 벌하지 않는 것일까. 아무리 몸이 만족을 했다해도 저 정도의 소년은 상륙만 하면 얼마든지 안을 수 있고 또 마음에 든다면 바다로 나올 때도 데리고 올 수 있을 터인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선장과 저 소년 사이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 아름다운 테이어드를 안을 때도 냉정하기 그지없던 남자가 저토록 명을 재촉하는 소년을 그냥 살려둘 리가 없는 것이다. "입어라 꼬마." "…고마워 스네이크." 소년은 블랙 버드의 사납다 못해 서늘한 눈빛이 무섭지도 않은지 그 눈을 정면으로 맞으며 알몸인데도 당당한 자세로 앉아서 스네이크가 옷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저 인간 같지 않은 남자와 더불어 이 소년도 보통은 아니다.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피부색이 더러운 슬럼 가의 사기 치기 소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변화는 뭐란 말인가. 게다가, 전에는 벌벌 떨며 눈을 마주치기조차 두려워했던 자신에게 반말까지? 하긴, 선장에게도 당신이니 너 따위라는 말을 해대는 소년인데 자신은 견제대상도 아니다 이건가. 스네이크는 문득 든 생각이 조금 불끈했지만 그렇다고 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소년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시선의 맞대결 속에, 옷을 입어야만 하는 소년이 먼저 시선을 거두고 힘겨운 듯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큭…!" 소년이 앉아있던 자리 아래에는 검붉은 핏자국들이 만연한 것이, 상처 입은 곳이 꽤 아플 텐데도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어떻게든 티를 안 내려 애쓰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힘겹게 옷을 입은 소년이 조금 큰소매와 바지 단을 두어 번 접어 올린 뒤, 한 동안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올려 다시 선장과의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에게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스네이크조차 뭔가 가슴속에서 즈끈, 하고 울릴 정도의 당당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난 이 배의 노예다. 하지만 노리개는 아니야. 당신이 무슨 짓을 했건 난 그 일을 뱃삯이라 생각지 않아. 내가 치르는 뱃삯은 아침부터 하게 되는 갑판 일과 다른 잡일들이야. 당신에게 당한 일은, 그저 미친개에게 물린 정도의 폭행이었다. 그 뿐이야." " !!" 드디어 미친개라는 말까지 나왔다. 아무리 오늘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선장일지라도 저건 못 참을 거라고, 이제 소년에게 남은 것은 사지가 절단되어 바다로 던져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여 스네이크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 남자가 라디라는 소년의 사형선고를 말할 입술로 말했다. "…그래. 잘 알았다." 라는 말과 함께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미소까지 씨익. 말도 안 돼!!! 스네이크는 이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혼자 절규했다. 그러나 스네이크의 기분을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그저 자신들의 대화가 끝이 나자 한 쪽은 할 일을 하기 위해 선실 밖으로 나가고, 다른 한 사람은 분을 삭히기 위해서인지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와인 병을 잡아 거칠게 목안으로 들이부었다. 저렇게 마셔서야 위가 상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선장." "나가라 스네이크. 지금은 어떤 얘기를 들어도 나에게서 고운 답변을 듣지 못할 거다." 역시 그 미소는 좋은 뜻의 미소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꼭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만." "……."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건 괜찮은 거라고, 스네이크는 저 남자와의 해상생활만 십 년째의 노하우로 알게 된 눈치로 질문을 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왜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 "맨 처음 저 소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 날 차마 품어보지 못하여 나중에 납치할 생각이었다면 또 몰라도 그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때는 분명 저 태양제독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이니 그 증명을 위하여 남겨둔다고 하셨지요? 사실 그 때도 이해는 잘 가지 않았지만 테이어드를 납치해오는 것이 급선무였던 지라 그냥 넘어 갔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또 뭡니까? 소년의 상처를 보니 어젯밤 과하다 할 정도로 충분히 안아보신 듯 한데, 설마 아직도 만족을 못하신 겁니까? 선장, 저 정도의 소년은 상륙하면 발에 채일 정도로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습니다. 저런 말을 듣고도 고이 보낼 만큼 남자가 궁하셨나요? 그것도 아니실 텐데요." "……." 블랙 버드는 쉴 새없이 쏘아붙이는 스네이크의 말에 처음엔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과연 자신 또한 이상하게 생각되는지 라디라는 소년을 처음 만났을 당시를 회상했다.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선원들 또한 선장의 변화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선장의 이상한 행동에 놀란 선원들이 등을 떠민 것이지요. 설명해 주십시오 선장. 도대체 저 소년이 뭐간데 저런 치욕스런 말까지 들으면서 참고 계십니까? 설마,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도 된단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 정도의 의미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요."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 "예?" 별 의미 없이 내뱉은 스네이크의 말에 와인을 마시며 생각에 잠겨있던 블랙 버드의 눈이 번쩍 하고 뜨여졌다. 뭔가 이건. 이 부분에서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여선 안 되는데. "서…선장?" "뭐야. 그럴 리가 없잖나 스네이크." "예에?"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남자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스네이크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럴 거면 대체 반응은 왜 보인 건지. "저런 노예 소년에게 이상형이라니. 자네, 피곤해서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정말 어이가 없군." 정신이 이상한 건 내 쪽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 하는 가련한 말. 언제쯤 저 얄미운 선장 앞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수 있을는지. 게다가 오늘은 소년의 폭탄 발언 때문에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이니 더욱더 조심해야만 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선원들에게도 신경 쓰지 말라 전해. 너도 알고 있다시피 이곳은 바다다. 물론 육지로 올라가면 저 정도의 소년쯤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적어도 희망봉까지는 아니지. 그 동안은 저 소년을 데리고 즐겨야겠지. 그러니 적어도 희망봉에 도착해 제왕의 보물을 얻을 때까지는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 그 정도의 이유로 미친개라는 말까지 참는단 말인가? 저 남자가??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선장이 저렇게 못 박는데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희망봉에 도착해 제왕의 보물을 찾는 즉시 처리하겠다고. 그러니 믿어보는 수밖에. 하지만 스네이크는 눈칫밥 십 년에 남자의 변화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남자는 전혀 인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저 대용품으로 쓰이다가 버려진 누군가만 불쌍해질 뿐이었다. "…테이어드도 있지 않습니까." "뭐?" 스네이크는 아차 하는 심정이었지만 이미 주책 맞은 입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뒤였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 올랐지만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런 재미있는 놀림거리를 그냥 넘어갈 선장이 아니었다. "뭐야. 그 장님 녀석이 내 관심 밖이라 해서 측은한 마음이라도 든 건가 스네이크? 응?" "그렇,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기왕 즐기실 거라면 뒤끝도 없고 순순한 녀석으로 하라는 것이," "그래? 내가 다시 그 녀석을 안아도, 자네는 괜찮겠어?"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스네이크는 강하게 부정을 했지만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남자는 조금 전의 분노한 표정을 지우고 어느새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장의 기분이 풀린 것은 다행이지만 이런 식으로 풀리길 원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을 의미가 담긴 눈으로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짓는 선장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이 남색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까 하고 스네이크가 고민하고 있을 때, 선장실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이봐! 이 녀석 또 쓰러졌는데? 어쩌지? 선장님께 말해야 하나?" "뭐? 또야? 젠장, 골치 아프구만. 이젠 채찍을 써서 깨울 수도 없잖아? 그 녀석 조금 전에 선장실에서 나왔다고?" "멍청이들. 채찍?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저 옷 선장 옷인 거 모르겠냐? 야, 괜히 건드렸다가 경을 친다. 가만히 내버려둬. 그리고 선장이나 불러! 선장님!! 이 오줌 색 얼굴 꼬마 쓰러졌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중앙 갑판 선미루에서 들린 구원의 소리에 스네이크는 기뻐하며 자신을 놀리고 있던 남자의 얄미운 얼굴을 살펴보았다. 처음 쓰러졌다는 말에 조금은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표정을 지우고 여느 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더니, 역시나 얄미울 만큼 회복이 빠른 남자였다. 어찌됐든 기절했다니, 역시나 저렇게 피를 많이 흘렸을 상처가 단 하루만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단 몇 시간 만에지만 나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갈 때 얼굴에 붉은 기가 돌고 호흡이 거칠었던 것이 아무래도 알콜이라도 마신 듯 했으니, 상처 입은 몸과 체력에 알콜을 들이부었다면 정신 차리고 있는 쪽이 이상한 거다. "어찌할까요 선장? 가서 이곳으로 부축해 올까요? 아님 선장께서 직접?" 떠보는 말에 한 쪽 눈을 사납게 치뜨고 본다. 잘못했다간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다. "됐다. 자업자득이지. 내버려 둬. 선원들이 다시 감방으로 옮기도록 둬라. 차가운 감방에서 추위와 아픔에 떨다보면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겠지." 과연 그럴까요. 스네이크는 남자의 말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조용히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위해 선장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자신이 계속 있어봤자 저 남자는 허세만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남자라고는 해도 블랙 버드 또한 분명히 사람이었다. 일주일 동안 죽은 듯이 쉬기만 했다고는 해도 그렇게 심한 상처가 일주일만에 나을 리가 없겠지. 아마도 어제 무리를 했다면 지금쯤 꽤나 피로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하 앞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일 사람도 아니니 충직한 부하가 선장을 위해 피해줄 수밖에. "부선장! 이 녀석 어떡하죠? 선장실로 옮겨야 하나요?" 선장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선장실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선원들이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하기는. 저 성격 나쁜 선장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놈이 원래 있던 감방으로 내려보내라. 그리고 평소처럼 일을 시키라는 선장이 명이다." "예?" 선장이 몸소 공주님처럼 안아 선장실까지 데려갔던 꼬마를 다시 감방으로 보내라 했더니 역시나 의문의 탄성들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스네이크는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고 명령에 늑장을 부리는 부하에게 한 번 눈을 부라렸을 뿐이었다. 비록 블랙 버드만큼은 아니지만 크게 뒤지지 않는 그 눈빛의 박력에 눈이 마주친 녀석이 재빨리 쓰러져 있는 창백한 녀석을 어깨로 부축한다. 궁금한 점은 많겠지만 상관이 말해주지 않는 것은 캐지 않는 것이 목숨에 이롭다. 그 진리를 이 배의 선원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네이크를 비롯하여. 열에 들뜬 호흡을 뱉고 있는 라디를 부축한 두 선원의 뒷모습이 점차 작아지자 명령한 것을 실행했다고 생각해 본연의 일로 돌아가려던 스네이크는, 자신이 선장의 말 중 한 가지를 실천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냉큼 뒤로 돌아 선장의 명을 선원들에게 마저 알렸다. "참. 그리고! 선장의 명이다! 앞으로 저 녀석에게 린치를 가하는 놈은 상어 밥이 될 각오를 하라는 분부이시다! 모두 알아들었나!" "넵!!" 화통한 대답에 만족한 스네이크는 발을 돌려 가려던 목적지로 향했다. 테이어드의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안 그래도 말라서 밥이라도 제 때 먹지 않으면 사람의 몰골을 유지하고 있기가 힘들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입맛이 떨어질지 모르므로 배고파질 시간에 딱딱 맞춰 가는 것이 좋다. '녀석이 감자수프만은 잘 먹었었지. 오늘은 그걸 좀 푸짐하게 들고 가봐야겠군.' 이미 남색이니 뭐니 하는 것과 조금 다를 지는 몰라도 자신이 선장이 말하던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스네이크였다. 한편 스네이크가 나간 선장실 안에는 청동 술잔을 손에 들고 얼음과도 같은 차가운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사내가 한 명 남아 있었다. 사내, 블랙 버드는 뭔가 분한 것을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붉은 입술을 연신 깨물며 손안의 청동 잔을 깨트리기라도 할 듯 심줄이 서도록 세게 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들자 결국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앞에 있는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건방진…이 내가 이 정도로 아량을 베푸는데 그 오만한 반응이라니. 한낱 슬럼가의 아이인 주제에. 그래. 어디 한 번 볼까. 네 그 기개가 과연 며칠이나 갈지. 체력과 마음 모두 지친 상태에서 네가 오기 하나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봐 주겠다." 벌컥 벌컥! 남자는 던져버린 술잔이 전혀 아쉽지 않도록 고급 와인을 병째로 들고 단숨에 위로 들이부었다. 서서히 몸을 마비시키고 기분을 고조시키는 와인의 효력에 입가의 미소가 점점 진해지고 있다. 그와 함께 남자의 미소 또한 더욱 사악해지고 있었다. "큭…!" 마비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꽤나 큰 상처가 남아있는 부상이 블랙 버드의 심기를 거스른다. 저 태양 제독놈. 감히 방심한 사이에 부상을 입히다니. 제대로 싸운다면 한 칼 거리도 안 될 놈임에 분명하거늘. 저 죽을 듯이 부드럽고 탄탄한 피부의 꼬마 놈이 태양 제독 놈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같은 얼굴. 같은 체격에 같은 목소리인데도 저 놈은 그 망할 제독 놈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런 소년을 자신의 것으로 정복시키는 기분은 정말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흥분되는 것이었다. 물론, 지난 밤 저 꼬마의 몸을 정복하면 정복할수록 이상하게도 자신의 마음은 텅 비는 것과도 같은 이상한 가슴의 통증을 동반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마도 태양 제독 놈을 완전히 굴복시키면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이 통증의 원인은, 놈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자신의 다짐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러니 오늘도 뺏긴 것 중 하나를 찾으러 가 보실까. 어쩌면 자신의 것이 되었을 지도 모를, 슬럼 가의 작은 도둑 소년의 동경하는 마음을 훔치러. 하지만 결코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마음 대신, 그 몸이라도 원 없이 탐하러 말이야. "쿡쿡…." 이른 아침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선장실 안에 남자의 어두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딘가 사악하면서도 왠지 어딘가 슬픈 듯한, 참으로 역설적인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 * * 철썩. 철썩. 쏴아…. '파도 소리…?' 오래된 참나무의 냄새, 은은히 흘러 들어오는 바닷물의 짠내. 그리고 오랫동안 씻지 않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것과도 같은 오물냄새까지. 왜 이런 냄새가 한꺼번에 나는 것일까. 이곳이 어디이기에.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온 몸이 아프다. 일어나기 싫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 일어나지 않으면,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스륵…. 라디는 쉽게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자신을 자극하고 있던 냄새들의 원인을 찾아보았다. 오래된 참나무 냄새는 참나무 바닥에서 나는 소리였고, 바다냄새 역시 문 밖의 바다에서 은근히 풍겨오는 내음이었다. 그리고 오물냄새는, 오랫동안 치우지 않아 썩어가고 있는 감방 안의 변기 냄새였고. "감방…안인가." 얼마나 지난 것일까. 주변이 벌써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설마 아침부터 이 시간까지 내리 잔 것일까? 어찌됐든 몸은 제법 개운해져 있었다. 몸 전체에 퍼진 미열과 타박상 및 열상 등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당장 정신을 잃을 듯 눈앞이 흐릿하지는 않다. 아까 그렇게 정신을 잃은 뒤 어찌 어찌 감방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모양이었다. 틀림없이 호되게 채찍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간까지 자게 내버려두다니. 설마 그 남자가 무슨 말이라도 해놓은 것일까. "고마워 할 줄 알아. 그딴 남자." 무엇보다 이렇게 쓰러지게 된 주원인이 바로 그 남자였다. 타박상과 가벼운 몸살 기운 등은 하루만 푹 자면 나아지는 것이지만 남자에게 당한 것 때문에 나온 출혈과 통증 등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침에는 정말 웃기지도 않은 제의를 해오고. 아니, 사실 제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뱃삯을 몸으로 대라니. 자신보고 매일 밤 몸을 팔라는 얘기인가. "미친 놈." 욕설은 좋아하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왔다. 슬럼에 살면서도 어찌됐든 타락하지만은 말자고 매일같이 다짐하던 라디였는데, 그 남자는 태연히도 라디에게 몸을 팔라 제의를 해왔었다. 그것도 매일 밤을.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해. 나는 내일부터 당장 갑판 일을 다시 하면서 내 노동의 대가로 당당히 이 배를 타, 아야…." 의식이 돌아와서일까.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찢어진 곳의 통증이 뇌를 강타한다. 그래도 아침에는 감각이 없을 정도였는데 통증이 돌아온 것을 보면 꽤 많이 나아있다는 얘기겠지. 이것 또한 블랙 버드가 약을 발라준 덕분이었지만 원인 역시 약을 발라준 이와 동일하기에 라디는 절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욱씬 욱씬. 무언가를 알리기라도 하는 듯 일정한 간격으로 그곳이 후끈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마치 어젯밤 그곳에 들어온 남자의 박동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듯, 평소에 자신은 모르고 있던 박동과 열기였다. 기분이 나쁘다. 지금도 마치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곳은 벌어져 있고 남자의 진득한 욕망이 흐르고 있는 듯 그곳이 끈적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남자가 발라준 연고가 그곳에 맺혀 그런 기분을 야기하는 것이었지만 라디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잊고 싶은데. 빨리 잊고 싶은데. 뚜벅. "헉!" ……. "……." 잘못 들은 것일까. 라디가 너무도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부위의 계속되는 박동 때문에 그곳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가 다른 것을 생각하며 잊어보자 했을 때, 그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 예민해진 자신이 어제 일 때문에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일까. 잠시 귀기울여 보았지만 다시 들리진 않는다. 역시 착각이었던 듯 하다. 뚜벅. "!" 오금이 저리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아마 이 좁은 감옥 안에서 좀비와 대치하게 된다해도 이보다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라디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이기는 했지만 갈 수 있는 최대한 뒤로 물러나 자신의 진로를 막고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착각이 아니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아…아, 아…." 라디가 환청이라 착각할 만큼 그 텀이 길었던 처음과 두 번째의 발소리가 지나가자 남자의 발걸음은 고민을 털어 버리기라도 한 듯 거침이 없고 라디가 있는 곳을 향해 직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틀림없다. 그 남자다. 밤의 악마처럼 또 다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검은 새. 블랙 버드. 왜. 어째서. 자신은 분명히 노동으로 뱃삯을 치르겠다고 말했는데. 왜 또 이곳에. 무슨 할 말이 남아서.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남자는 절대로 자신의 말에 멋대로 하라고 했지 좋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즉 자신의 의견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는 분명히 전했는데. 그리고, 남자 또한 기분 나쁜 표정을 보였으므로 이제 자신의 얼굴은 꼴도 보기 싫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또 다시 이 감방을 찾아오고 있단 말인가!!!!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탁. 마치 기시현상(데쟈뷰)처럼, 어제의 악몽이 하나 하나 과정을 되풀이하며 다시금 라디를 덮쳐오고 있었다. 남자가, 감방 문 앞에 도착했다. 절그럭. 절걱. 끼릭. 저건 열쇠를 찾는 소리. 저건 수많은 열쇠들 중 이 방의 열쇠를 찾은 소리. 저건…이 방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는 소리! 철컹. 끼이…. 딱. 딱. 딱. 딱. 끔찍했던 어제의 일들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에 어린 소년의 턱과 이빨이 절로 떨리며 딱딱한 소리를 감방 안에 울린다. 그리고, 소년의 얼굴 또한 울린다. "흐…으으…!" 라디는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를 악물어도 절로 눈동자 안에 차 오르고 멋대로 눈 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섭다. 지금 이 상황이 무섭고 이 방을 향해 들어서고 있는 저 발의 주인이 미치도록 무섭다. 하지만 저 남자에게 무서운 척을 하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저 자는 검은 독수리니까. 조금만 방심하면 내장 째로 뜯어 먹힐 지도 모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터벅. "…뭐 하러 온 거지. 나는 분명히 노동으로 뱃삯을 치르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설마 당신, 말귀도 못 알아듣는 바보라는 건가?" "쿡." "뭐가 우습다는 거지!" "당당한 말투는 무척이나 멋있다만 눈가의 눈물 자국이나 지우고 하지 그래. 이거야 이러면 마치 내가 괴롭히러 온 악당 같잖아?" "아니라는 건가!" 라디는 분명 닦았다고 생각한 눈물 자국이 하필이면 남자의 눈에 보인 것과 자신이 마치 악당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악당의 말에 화가 나고 기가 막혔다.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친 걸 모른다고 하더니, 이것은 악당에게 또한 해당되는 말이 아니던가? "그럼. 아니고 말고. 난 단지 내 배에 타는 손님에게 요금을 받으러 왔을 뿐인걸." "노동으로 갚겠다고 하지 않았나!" 답답한 남자. 도무지 몇 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 정도로 바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정말 비교를 안 하려고 해도 저 영악하고 똑똑해 보이던 태양 제독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그건, 네 맘대로 정한 너의 룰일 뿐이다. 나와 합의가 된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네 멋대로 하라고 했을 뿐이고 그것을 요금으로 받겠단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어때. 내 말이 맞지?" "비열한 인간!! 머리를 그런 쪽으로만 굴리니까 당신이 에녹스 제독과 달리 해적밖에 될 수가 없는 거다!!" 라디는 말을 하면서도 이 또한 남자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위험한 발언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했다. 그리고 어차피 저 남자, 자신이 말 한 마디 하고 안하고에 따라서 자기 하고싶은 일을 수정하는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야말로.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조금은 편해질 텐데 그렇게 자꾸 나를 도발하는 것은 이거 은근히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헛소리." "유감이로군." "당신 유감 따위 백만 번이 있어도 무섭지 않아." "그래? 무섭지 않다니 그거 다행이군…난 또 울고 있기에 나를 너무 무서워하면 어쩌나 걱정했지. 관계를 가질 때 상대방을 무서워하면 서로간에 즐기지 못하거든. 안 그래?" "!!" 라디는 남자의 눈에서 어젯밤의 광기의 흔적을 느끼고 그제서야 진정으로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남자는 라디의 눈에서 그런 두려움을 읽었는지 냉정한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손에 들고 있는 불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라디의 머릿속에는 긴박한 경고음이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받아 보실까. 태양 제독을 좋아해 얼굴만 똑같이 생긴 해적 나부랭이의 배를 얻어 탄 소년의 승선요금을 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헉!!" 눈 깜짝할 사이, 였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남자는 자신의 말이 끝나고 라디가 말을 하는 그 잠깐의 사이에 탓, 하는 소리를 끝으로 어느새 라디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물론 감방 안이 성인 남자 다섯 걸음 정도의 워낙 작은 크기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다가오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라디로서는 정말 놀라운 스피드가 아닐 수 없었다. "…왜. 어디 한 번 빠져나가 보지 그래?" "…비, 비켜." "쿡쿡쿡." 머리 위에서 남자의 비웃음 소리가 머리카락을 간지럽힌다. 남자는 라디의 올곧은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감촉을 즐기는 듯 좌우로 비벼대고 있었다. 잡혔다. 이토록 허무하게, 아무런 반항도 못 해보고. 이렇게 굴할 수는 없었다. " 익!!" 라디는 남자의 품안에서 빠져 나가보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보기와는 달리 강철같은 남자의 몸은 아주 작은 탈출의 가능성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남자에게 주먹이라도 휘두르려 손을 올렸지만 두 손 모두 가볍게 허공에서 붙잡은 남자는 자신의 커다란 손안에 소년의 두 손을 모두 잡아넣어 고정시켰다. 다리는 어젯밤 남자의 잔혹한 처사로 인해 힘이 들어가지 않고 지지대가 되는 허리 또한 서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뻐근했다. 블랙 버드는 마지막으로 급소라도 차려한 한 라디의 의지를 다리와 다리를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시킴으로서 무산으로 돌리고, 일석이조의 효과로 딱딱하게 흥분한 자신의 욕망을 라디에게 알리기까지 했다. 자신이 것에 다이렉트로 느껴지는 남자의 거대한 흥분에 질색을 한 소년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는 상관치 않고 자신의 옷, 현재 소년이 걸치고 있는 자신의 옷 속으로 무심하게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연고를 바른 지라 부드럽게 풀어져 있는 그곳으로 무자비하게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 !! 으아아악 !!!!!!!!!!!!" 연고 덕분에 겨우 출혈이나마 멎어가고 있던 그곳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찢어지는 끔찍한 느낌에 라디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소리를 아무리 질러도 남자의 손은 라디의 엉덩이 사이 더욱 더 깊은 곳을 찾아 찔러 들어오고 있었고, 이윽고 그 손은 개수를 늘려 라디의 고통을 배로 늘리고 말았다. "아, 아흑! 아, 아아악!!!" "아픈가? 그렇겠지. 출혈이 다시 일어나고 있거든. 손가락에 너의 피가 느껴지는 구나. 분명 어젯밤에 그렇게 안아줬는데도 아직도 처녀혈을 흘리고 있어. 느껴지나? 내 손가락이 느껴지냐고? 그래. 충분히 느껴지겠지. 과할 정도로 충분히 말이야." "흐…아! 아아! 아 …파!!!" "그래. 아파해라. 너의 뇌리에 완전히 박힐 정도로 똑똑히 각인시켜 주지. 네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네가 지금 누구의 배에 타고 있는지. 너를 지금 안고 있는 자가 태양제독이 아니라는 것을!!!" "으, 아! 하악!! 아아악!!!!!!!" 아픔에 울고 있는 라디의 짓무른 작은 입구에 남자의 뜨거운 것이 들어왔다. 블랙 버드는 자신의 말대로 라디의 뇌 속에 자신이 블랙 버드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지 어젯밤보다도 더욱 아프게, 더욱 잔인하게, 더욱 격렬하게 행위를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하면 더 극단적으로 아프고 잔인하고 격렬하게 할 수 있는지 연구를 한 사람처럼. 라디는 이 남자가 에녹스 제독이 아닌 블랙 버드라는 걸 싫어도 처절할 만큼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에녹스 제독이란 남자는 자신을 이렇게 안을 일도 없을 테고, 블랙 버드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이름 하나 하나에 도발 당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굳이 에녹스 제독이 아니라 해도, 이렇게 자신의 몸에 발정하고 심하게 다룰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또 없을 테니까. "아, 흐, 아, 아악, 아!!" 남자의 태풍과도 같은 일방적인 섹스를 아픈 몸으로 받으면서, 소년은 그렇게 온 몸으로 절규했다. 자신의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남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결심을 마음 속 깊이 다지면서,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태양이 감옥 안에 여명을 불러올 때까지.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회원가입이 마감되었습니다. 가입인사 작성 꼭 해주세요. 안하시면 미워합니다.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39 2164 145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1) 야밤동 리뉴얼이 좀 더 미뤄지나봅니다...-__-;;;; 더 이상 기다리시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하여 우선 마유동에 먼저 올립니다. 야밤동엔 리뉴얼이 완성되는 대로 곧바로 올리겠습니다. 음... 역시 큰 동이라 리뉴얼도 큰 일일 거예요. 음. 음. 끄덕. 음.. 오늘 꽤 늦게 올렸으니 22일, 목요일 자정에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외전 50여 페이지를 제외한 완결까지.입니다. 그럼.. 즐감하시기 바래요... ^^ 8장. 탈출. 그 날 아침, 라디는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새벽부터 하던 갑판 일 도중 결국 실신하여 선원들에 의해 울며 겨자 먹기로 선장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전날 밤도 블랙 버드 본인이 정한 선상 요금을 치르기 위해 밤새도록 울고 소리치며 진을 다 뺐고, 아침에는 라디 본인이 정한 선상 요금을 치르기 위해 누구보다 빨리 갑판에 올라와 갑판을 닦고 돛대용 로프를 감았다. 밤새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새벽에는 가장 힘든 일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열심히 하니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 버티라고 해도 못 버틸만한 일을 다른 선원들에 비하면 몸집도 훨씬 작고 체력도 약했던 소년이 버틸 리가 없었던 것이다. "후우…." 라디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자신의 감방과는 다른 좋은 재질의 나무 천장에 '또 잡혀 왔군'하며 체념과도 비슷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기절로만 이 선실에 몇 번째인지. 놈이 어제 참으로 집요하게 지분댄다 했더니 역시 기절로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선원들은 남자와의 악몽 같은 첫 밤 이후, 자신을 선장의 애첩쯤으로 생각한 것인지 라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선장인 블랙 버드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바빴다. 그럴 때면 남자는 라디가 기절해 있는 자신이 방으로 찾아와 라디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할 말이 있는 듯 의미가 담긴 눈으로 라디를 쳐다보았지만, 라디에겐 그것이 결국 '거봐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니 기절이나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의 시선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기로라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밤 이후. 남자의 방문은 매일 밤 계속되었고 라디의 온 힘을 다한 반항 또한 계속되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라디의 공격력에 남자의 몸에 생기는 자잘한 상처 또한 늘어만 갔고, 라디의 목은 하루라도 쉰 목소리가 아니 나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블랙 버드는 라디가 오늘처럼 쓰러진 날이면 선장실까지 운반해 온 선원들을 물린 뒤 기절해 있는 라디의 옷을 벗겨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처를 치료했다. 침대에서 깨어난 라디는 그 상처에 발라져 있는 연고들을 보며 더욱더 짜증이 나고 나약한 자기 자신에게 늘 화를 냈다. 지독한 악순환의 반복. 그러나 남자는 라디의 몸을 탐하는 걸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고, 라디 또한 남자의 뜻대로 순순히 몸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기로라도 일을 계속 하고 있었고 해야만 했다. 만약 하루라도 일을 거르는 날이 있다면 남자는 그것 봐라 하는 기고만장한 눈으로 쉬고 있는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 그것은 보기 싫다. 그래서 라디는 선원들의 묘하게 흐물한 눈빛과, 혹여 선장의 애첩을 부려먹다가 선장에게 꾸중을 듣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스런 눈빛들을 받으면서까지 뱃일을 하려는 것이다. "끙…윽." 천근같은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일으키는데 가벼운 빈혈과 함께 여지없이 몸 중앙의 비밀스러운 곳에서 통증이 타고 올라온다. 라디는 흐트러진 중심을 다잡기 위해 잠시 이마를 잡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뭇결들이 회오리를 치며 시야를 어지럽히다가 서서히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간다. 그러나 욱씬거리는 그 곳의 상처는 여전히 라디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걸을 때마다 무언가가 들어차 있는 것만 같은 이물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나쁜 놈. 그 망할 것은 밖에다가 뿌려대란 말이야." 라디는 아침에 화장실에서 스스로 열심히 긁어냈지만 남자의 액이 아직도 자신의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복통을 줄이기 위해 열이 오른 따뜻한 손을 배에 가져가 문질렀다. 첫 날이야 워낙 먹은 것도 없고 체력이 없기도 했다지만, 둘째 날 라디는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리고 하루 종일 화장실을 오가며 그나마 먹은 것도 없는 것을 모조리 바다로 흘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남자와의 밤이 계속되고 조금이긴 하지만 몸도 익숙해져 가는 요즘, 라디는 복통의 원인이 빌어먹을 남자의 정액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다 그가 자신의 안에 쏟지 않은 날 …은 없지만, 평소보다 적게 쏟아낸 날에는 아침에 있던 복통이 조금 덜했던 것이다. 남자의 것이 원인이었다. 그 망할 끈적끈적한 허연 것이, 안 그래도 부족한 자신의 체력을 더욱 더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라디의 남자를 향한 증오는 더욱 더 거센 것이 되었지만, 반항을 해보아도 어쩔 수 없는 힘과 기술의 차이로 남자에게 안긴 다음날 아침이면 라디는 눈물을 머금고 스스로 손을 집어넣어 남자가 자신의 몸 안에 배설한 것을 긁어내야 했다. 그 작업은 참으로 끔찍하고도, 단숨에 인간의 기분을 최저로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매번 열심히 긁어낸다고 하는데도 늘 남아있는 것 같은 찝집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오늘 또한 그랬다. 분명 아침에 그곳이 후끈거릴 정도로 깊게 긁어냈거늘 왜 또 이리 미끄덩거리는 것인지. 설마 또 피가 난 것일까. 그래도 최근 며칠은 출혈이 없었는데. "모두들 일어나! 이봐! 육지다! 육지가 보이고 있어! 희망봉에 도착하고 있는 거라고!!" "!!" 열 때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데 속 안의 것을 긁어야 하나 하고 라디가 고민하고 있을 때, 선장실 바깥으로 망원경을 보고 있던 선원 하나가 놀라운 소식을 말했다. 육지가 보이고 있다고. 희망봉이. 가까이에 있다고. 라디는 가물가물하던 의식이 단번에 깨어남을 느끼며 제대로 서지지도 않던 몸을 곧추세웠다. 희망봉이 가까워지고 있다면 파크에게도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 이대로 침대에 누워있을 시간이 없다. 콰당!! 당장에 늘어지려는 몸을 채찍질 해 밖으로 나가자 모든 선원들이 중갑판으로 나오며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희망봉을 보기 위해 현장에 매달렸다. 그들은 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허리를 완전 바다로 내밀어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 애를 썼고, 눈이 좋은 라디는 그들과는 조금 뒤떨어진 곳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섬을 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희망봉. 아주 오래 전 한 군함에 의해 발견된 오랜 기간 육지를 보지 못 하다가 2주만에 육지를 발견한 뒤 과감히 북진을 하여 마침내 발견하게 되었다는 폭풍의 곶.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데 큰 희망을 돋운 곶이라 하여 희망봉이라 불리는 곳. 그곳이 라디의 눈앞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라디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곶이라 불리며 웅장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희망봉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희망봉을 둘러싸고 있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아무리 시력이 좋은 라디라 해도 어렴풋한 윤곽밖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저 곳에 희망봉이 있다는 것은, 파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너." " !!" "왜 나와있는 거냐." "당신…." "스네이크다. 설마 이름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어려운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아." 등뒤에서 덮쳐 온 커다란 손의 주인은 라디의 예상처럼 블랙 버드가 아니라 그의 보좌인 부선장 스네이크였다. "기절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침대에 누워 쉬지 않고 뭘 하는 거지. 뭐야. 너도 희망봉을 보고싶어서 나온 거냐? 그런 걸 보면 어린애는 어린애군. 제 몸 아파도 신기한 것에 뽀르르 달려오는 걸 보면 말이야." "어린애라니! 누가!" "들어가지. 선장의 명으로 네가 먹을 약과 바를 약을 가져왔다." 어린애라는 말에 발끈해 소리지르는 라디를 무시하고 스네이크는 들고 온 통을 보여주며 라디에게 따라오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렇다는 건 역시 그 남자가 오지 않는다는 뜻일까. "뭐 해 안 들어오고?" "왜…오늘은 당신이지?" 당연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원한 것이었는데 스네이크는 라디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뭔가 다른 뜻을 가진 것 같은 묘한 웃음을 빙긋, 하고 지었다. 그 웃음에 라디는 왠지 놀림을 당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꼬마. 내가 온 게 불만이냐? 캡틴이 오기를 바래?" " !! 무슨 헛소리야!! 매일 그 망할 자식이 오다가 당신이 오니까 이상해서 하는 소리잖아. 누가 그 자식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나!" "아아. 그래 그래." 시끄럽다는 듯 스네이크가 한쪽 귀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선장실 안에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들어가기야 한다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여전했다. 도대체 왜. 자신이 그딴 남자를 기다린다고 착각했단 말인가!! "누워라 꼬마. 상처 치료를 해주마. 그리고 니가 기다리는 선장의 소식을 알려주지." "글쎄 누가 기다리고 있," "선장은 목적지인 희망봉이 보이고 있으므로 전략 회의 및 정박소 선정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선장이라 해도 지금만큼은 전심으로 작전을 짜고 있지." "!" "?" 블랙 버드가 상륙 작전으로 바쁘다는 말에 눈이 커지자 스네이크는 그 잠시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주목했다. 선장이 바쁘다는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던가? "왜 그러지?" "뭐?" "선장이 바쁜 것이 그렇게 기쁜가? 그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뜰만큼?" "…내 눈은 작지 않아. 당신들처럼 깊게 패이지 않아서 커 보이지 않을 뿐이야. 쌍꺼풀도 속에 있고." "그래. 그래. 잘났다 동방 소년. 어찌됐던 내가 보기엔 못난이의 못난 눈일 뿐이야. …뭐 선장이 보기에는 그게 둘도 없는 예쁜 눈으로 보이는 모양이다만." "뭐야. 이상한 소리 마. 당신." "이상한 소리라?" "예쁘다니.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해대는 거야. 그딴 이상한 소리하려거든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오줌색 얼굴이라 부르라고. 난 계집애취급 당할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호오?" 분한 듯 부드러운 밀 색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소년을 보며 스네이크는 조금 의외의 눈빛을 했다. 지금 정도면 다른 여타의 소년들처럼 저 선장에게 넘어 갔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아직도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저 남자가? 별 생각 없이 소년을 놀리고 있던 스네이크는 슬슬 진심으로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했다. 설마 슬럼에서 자란 이 거지 소년이 이 정도로 의지가 강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거야 저 선장이 그동안 매일 똥 씹은 표정을 했던 것도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왠지 지난 며칠 동안 악천후도 별로 없었는데 선장의 기분이 좋지 않다며 벌벌 떨었던 선원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스네이크였다. "그래 뭐 아무튼. 누워라. 상처에 약을 발라주지. 그리고 감기 기운도 있다면서? 좋은 약을 얻어왔다. 선.장.명.으로." "…필요 없어." "고집은." "정말 필요 없다고!! 그딴 자식이 준 약 먹을까봐!!" "그 동안 선장이 치료해주는 건 다 받은 주제에." "기절해 있는 동안 그 자식이 멋대로 해놓은 거다!! 큭." "이봐 꼬마." 상황이야 어찌됐건 간에 자신의 상관인 블랙 버드에게 아까부터 이 놈 저 놈 하는 라디가 스네이크에게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블랙 버드의 욕을 하는 라디의 멱살을 단숨에 잡아 올리자 놀란 표정을 짓는다. 허나 그 동안 블랙 버드와의 몸싸움으로 웬만큼 익숙해진 것인지, 이내 평정을 되찾고 금새 자신에게 눈을 맞춰온다. 역시, 그냥 거지 소년이라 보기엔 뭔가 다른 놈이었다. 그나저나 지난 며칠 동안 꽤나 얼굴이 많이 변했다. 일단 얼굴과 몸의 살이 빠져 선이 훨씬 갸름해져 있는 데다 얼굴색은 병색이 완연하여 창백하고 가냘퍼졌다. 그리고 이상하게 색기가 많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무리 선장이 매일 밤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도가 조금 심했다. 여지껏 선장이 안는 많은 소년들을 봐왔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스네이크는 최근 들어 라디의 뒷모습이나 일하는 모습 등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는 몇 몇 놈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그저 더럽고 못생겨만 보이던 소년은, 지금은 완전 남자를 알고 있는 한 마리의 요마로 변해 있는 것만 같았다. 표현이 조금 심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건 저 선장의 능력 때문인지 이 소년의 잠재력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슬럼가의 거지 소년의 변모는 스네이크에게 있어 그 눈을 보고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음…눈동자? "…응?" "뭐야. 이것 놓고 말해 아저씨." "너, 눈이 금색이었냐?" "무슨 헛소리야?" "아니…지금 왠지 금색으로…." "그럴 리가 있어? 내 눈은 검은 색이야. 저번에 블랙 버드 놈도 그렇게 말하더니, 대체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보면 모르나?" 물론 장님인 테이어드가 아닌 이상 소년을 보면 단번에 까마귀의 날개처럼 결 좋은 까만 머리와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네이크 역시 소년이 다른 이보다도 훨씬 짙은 흑색의 머리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런데 왜 눈이 갑자기 금색으로 보였던 것일까? "…햇빛 때문인가. 지금은 역광이 비칠 시간이 아닌데." "뭐?" "…아니다. 무슨 상관이냐. 저 선장이 요즘 너 때문에 농땡이를 피워서 내가 대신 바빴었는데, 아마 그 때문에 헛 거라도 보인 게지. 암튼 너. 아무리 그래도 블랙 버드호에 타고 있으면서 선장인 블랙 버드를 욕하지 말아라. …내 앞에서야 이 정도로 봐준다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걸리면 정말 뼈도 못 추리게 큰 일을 당할 수 있어." "흥." "흥?" "이 배의 선원들은 어차피 나를 놈의 애첩쯤으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니었나? 선장의 아주 특이한 취향에 걸맞는 못생긴 애첩 말이야. 아주 가관도 아니더군. 전에는 어떻게 하면 한 대라도 더 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더 부려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더니 요즘에는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일을 안 줘서 말이야. 이래서야 내가 뱃삯을 치르는데 지장이 생기잖아?" "뱃삯이라?" "그래. 난 이 배에 공짜로 타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건가. 역시 그렇다 그렇다 생각은 했지만 정말 거지 소년 주제에 오기와 자존심으로만 똘똘 뭉친 녀석이었다. 저 선장의 상대만 해도 선원들은 자기에게 아무 말도 안 할텐데 말이다. 그런 것으로 배에 타고있는 값을 치르고 싶지 않다 이거겠지. "뭐, 외로운 선장의 말동무라도 해주면 그 값이 오히려 네 노동보다 과할 텐데 말이다." "누가 외롭다고?" "우리 선장. 블랙 버드." "하." 저렇게까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다니.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얘기였던가. "왜 웃지?" "당신은 나보다 오랜 시간을 지내왔으면서 당신의 선장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건가?" "네가 보는 우리 선장은 어떤 사람이기에?" "안하무인. 철면피에 최고 악한. 남색이나 밝히는 변태에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외엔 돌아보지 않는 멋대로인 남자. 더 듣고 싶어?" "아니. 충분해." "그럼 됐고." "하지만, 네 말대로 선장과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온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아무래도 넌 선장에 대해 잘못 알고있는 것 같은데." "잘못 알고 있다고?" "그래." "대체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는 소년에게 스네이크는 앉아있는 침대 옆을 툭툭 두드렸다. 어찌됐든 명령을 받고 왔으니 상처는 치료해줘야 한다. 저 선장이 다른 놈들은 덮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다하여 자신을 보낸 거니 그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지. "…됐대도." "보이는 게 창피해서 그러는 거면 연고는 너에게 주고 나는 나가겠다. 그러니 일단 약이라도 먹어." 경계하는 고양이에게는 강경 대응이 먹히지 않는지라 얼르는 말투로 나갔더니 입술을 내밀며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다. 역시 이 녀석 고양이과였군. "꼬마." "라디다." "그래. 소년. 라디. 너는 우리 캡틴의 안 좋은 면만을 보고 안하무인에…그래, 암튼 안 좋은 추사여구는 다 갖다 붙이는데, 사실 우리 선장이 네 말대로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된 것에 이유가 있다고 할까." "이유라니. 그런 거 내가 알아서 뭐하겠어." "들어봐. 저래 봬도 선장이 너를 꽤 아끼고 있으니 말이다. 봐라. 맘에 들지 않으면 다치건 말건 자기 욕망만 채우고 돌아설 사람이다. 하지만 너는 몸소 상처까지 치료해주고 기절하면 이 선장실을 내어주며 쉬게 해주고 있지 않나? 다른 놈들이었다면 아마 안는데 귀찮다며 상처 입은 놈을 가차없이 바다로 던져버렸을 거다. 실제로, 그 동안은 그래왔고." "!" 상대방을 바다로 내던졌다는 잔인한 말에 소년의 눈이 크게 떠진다. 뭐 사실 그런 적은 다른 해적선의 스파이를 태웠던 단 한 번뿐이었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다. 실지로 질리거나 하면 다시는 안 돌아보는 사람인 건 맞는 얘기고. 저, 지하 선실에서 홀로 외로이 숨어있는 테이어드의 경우 또한 그랬다. "그러니까, 너는 꽤나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그것만은 알아둬." "흥…매일 밤 좁고 냄새나는 감방에서 원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뭐." 저런 얘기를 스네이크에게 적나라하게 할 정도면 소년도 꽤나 쌓인 것이 많은 듯 했지만 어쨌든 저걸 풀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뭐라 해도, 저 선장의 마음에 꽤나 든 것이 분명했고. "저 사람은 아마 네가 태양 제독을 좋아한다고 하니 더 거칠게 다루는 걸 수도 있을 게다." "뭐라고?" "태양 제독에게, 뺏긴 것이 많은 사람이거든." 태양 제독이라는 말에 라디의 마른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늘 그 말만 나오면 남자는 미치기라도 한 듯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더욱 거칠게 밀어 올리며 기어코 자신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 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에녹스 제독에 대한 증오와 분노. 그로 인해 라디는 매일 밤 상처입고 괴로워했다. 이것은, 매일 밤 겪는 라디의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라디는 건성으로 듣고 있던 자세를 고쳐 침대 위에 앉아있는 스네이크의 바로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어. 저 남자는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고 무조건 태양제독을 좋아하는 나를 미워했다. 도대체 이유가 뭔데?" 글쎄 미워하는 게 아니래도 당췌 알아듣지를 못하는 라디가 조금 답답했지만 일단 지금은 둘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선장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하는 건 반칙인 듯도 했지만 그렇다고 세월아 네월아 그냥 내버려두면 저 요령 없는 선장은 그저 이대로 이 소년이 자신을 미워하게만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 분명했다. 십 년 넘게 옆에서 보좌해 온 도리로 지켜볼 수만은 없지. 게다가, 매일 밤 반항하고 아침에는 일하면서 픽픽 쓰러지는 소년 때문에 선장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는 것도 이제 슬슬 질려 가는 참이고. "선장과 그 제독의 생김새가 같은 건 알고 있겠지?" "그래.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지. 워낙 눈에 띄는 얼굴들이니." "그렇지.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우리 선장 쪽은 오히려 손해였지만." "어째서?" 스네이크는 이제부터 시작되려는 중요한 얘기를 하기 전에 자신의 옆에 앉은 작은 얼굴의 소년을 잠시 쳐다봤다. 맑은 눈. 왠지 이 소년에게라면, 해도 괜찮을 거 같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선장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소년이라면, 그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스네이크는 소년의 검은 진주처럼 맑은 눈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집안의 치부와도 같은,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충격적인 진실을. * * * "…아마도 놈들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정박소에 정박했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는 이렇게 놈들의 눈에 띄기 전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해안가에 정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기습을 시도하는 거죠. 아마도 보물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모나쉬 마운틴에서 놈들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 그곳에 보물이 있다고 하셨죠 캡틴?" "그래." 라디와 스네이크 간데 밀담이 오고가는 그 때, 블랙 버드는 상륙 작전을 짜느라 나침반을 든 조타수와 함께 회의실에 있었다. 희망봉은 이제 곧 눈앞에 다가오게 될 것이고, 그들은 이미 도착해 있을 플라잉 클라우드호와 반나절 정도의 차이로 희망봉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블랙 버드호가 설마 희망봉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대응을 준비하지 않고 있겠지만, 저 태양 제독이라면 안심할 수 없었다. 모두가 상륙한 뒤 순번제로 돌아가며 망원경으로 블랙 버드호가 뒤쫓아오지 않는지 감시하라고 시켰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열을 갖추고 있는 그들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해적의 특성상 기습이 효율적이라는 의견에 따라 블랙 버드호는 플라잉 클라우드 호와 반대편 방향으로 돌아가 정박을 하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그들은 정박을 위해 배로 시간과 노력과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제왕의 보물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오랜 시간 이 시간을 기다려온 남자는 선원들에게 독려했다. 선원들 또한 그들의 유능한 선장의 말을 믿고 따르며 그 누구도 불평을 하는 자가 없었다. 덜컹. 조타수와의 긴급 작전 회의가 끝나고, 이제 겨우 가벼운 럼주 한 잔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을 무렵, 두꺼운 나무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내의 커다란 인영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심부름을 보냈던 스네이크였다. "다녀왔습니다 선장." "그래. 순순히 치료를 받던가." "예? 아아, 예." "…? 그래? 그런 것치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는걸?" 블랙 버드는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눈과 마주친 스네이크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포착하고 의아하여 그에게 물었지만 사실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배신할 리는 없었고 라디 또한 스네이크와 무슨 일이 있을 만한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아마도 테이어드에게 들러 맛있는 간식거리라도 갖다준 게지. "저, 그것이. 선장." "음?" "실은…." "?" 콰당!! "선장님!!" "…뭐냐 몰린 풀. 중요회의 중이라고 말했는데 함부로 들어오다니."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긴급한 일인지라!!" "긴급한 일?" 간부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회의실을 침입한 한 선원을 보며 자신에게 뭔가 얘기를 하려던 스네이크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몰린 풀이라는 선원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얼굴은 짜증에서 이내 당황으로 바뀌었다. 블랙 버드는 스네이크의 표정 변화를 주목하며 침입해 온 선원의 용건을 듣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스네이크는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들어온 몰린 풀의 얼굴을 보며 자꾸만 드는 안 좋은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 저 녀석은. 저 녀석은 분명. "무슨 일이냐 몰린 풀. 어서 얘기해." "그, 그것이…." 스네이크의 눈치를 보며, 몰린 풀은 분명 용건이 있어 왔음에도 선장에게 그 용건을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자꾸만 안 좋은 예감이 들어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 그 오줌 색 얼굴의 꼬마가 탈출했습니다!! 시간은 약 30분 정도전으로, 제가 처음 갔을 때는 분명 약을 먹고 자고 있었는데, 두 번째로 물을 갈아 들어가니까 없었습니다. 아마도 육지가 가까워오니까 수영을 해서 도망친 듯 싶습니다. 없어진 것은 가벼운 음식과 몇 가지 약. 그리고 선장실에 비치되어 있던 나침반입니다!!" "!!" 스네이크는 크으…하는 신음과 함께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불길한 예감이 정확히 적중한 것이다. 빌어먹을 꼬마. 자신이 그런 얘기까지 해줬는데 어째서!! 블랙 버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죽을 각오를 하고 벌벌 떨면서 보고를 한 몰린 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알아서 죽으라고 말하는 편이 덜 잔인할 것이다. 저토록 서늘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을 계속 쳐다봐야 할 바에는. "태양 제독에게…날아간 건가." 남자는 몰린 풀을 바라보던 눈을 풀고 초점을 흐리며 어딘가 놀러 나가기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얼핏 들으면 남자가 기분이 좋다라고 착각할 만큼, 아주 부드럽고 은근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쯤 스네이크와 회의실 안에 있던 조타수, 몰린 풀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선장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고 마음 속으로 떨고 있는 것이다. 저 아름다운 미소가, 그가 가장 잔인하고 가혹해질 때의 그것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으므로. 저 정도가 되면 아군 적군 없이 누구든 눈앞의 인간을 살육할 때의, 인간 백정과도 같은 모습일 때의 블랙 버드의 눈이었다. '지금 당장 이 회의실을 나가고 싶다!!' 라고, 회의실 안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생각했다. 허나, 선장의 기분이 상할까봐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그래야겠단 말이지…그 몸을 하고서도, 저 차디차고 짠 바닷물을 견뎌내고 수영을 할 만큼 태양제독이 보고싶었단 말이지…쿡쿡쿡…그래 좋아. 그렇게까지 서로가 좋아 못 견디겠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야겠지. 언제까지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마. 서로가 다시는 떨어질 수 없도록, 죽어서도 늘 함께 있도록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여주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두 가지를 되찾게 되는 날, 축포의 의미로 말이야. 크크크…크하하하!!!" "!" 남자는 라디와 에녹스의 살육 예고를 하며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스네이크는, 이제 좀 뭐가 풀리려나 하는 시점에서 도망을 쳐버린 라디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우선 저 몰린 풀이라는 녀석을 족쳐서 이유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분명, 그런 얘기를 했는데도 도망을 친 거라면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서 선장에게 알려야 했다. 저 상태에서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올는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봐서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겠지. 희망봉을 목전에 둔 시점. 동방에서 온 밀 색 피부의 소년 라디, 블랙 버드호를 탈출하다. 제9장 제왕의 산 모나쉬 마운틴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는 기점 희망봉. 그 중에서도 중심부에 우뚝 솟은 모나쉬 마운틴은 예로부터 '제왕의 산'이라 불리며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정복지가 되고는 했는데, 실지로 이 산의 정상을 밟는 것만으로도 제왕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거도 실화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산이 제왕의 산이라는 것도, 정상을 차지하면 제왕이 될 수 있다라는 설화도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버린 구전 동화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구전 동화의 진정한 증거를 들여다보며 제왕의 산을 정복할 야망을 품은 자가 있었으니, 그는 자신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서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연구중인 에녹스·리엔·팰러딘이었다. "후우……." 기록서에 뭔가 좋지 않은 내용이라도 적혀있는 것일까,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이 밝지만은 않았다. 희망봉에 도착하기 전부터 계속 이 기록서만을 파고 있던 그를 곁에서 보좌하던 병사들은 이번엔 또 무슨 내용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상관이 말해주기 전에 질문을 해서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순 없기에 궁금증을 억누르며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그 때, 아침나절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기록서 만을 들여다보던 에녹스의 입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겠군…. 보물이 반려라니. 세상 밖이라고? 이미 세상 밖에 나와있는 걸 대체 어쩌란 말이야?" 그러나 입이 열렸어도 병사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기록서에 나라에서건 그 자신이건 그토록 찾고 있다는 '제왕의 보물'에 대해 나와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리 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사들은 오늘만 해도 벌써 손가락을 가볍게 넘어갈 정도로 에녹스의 한숨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덤으로 그의 부관의 울음소리 역시. "또요? 또입니까 에녹스님? 또 다시 막히는 부분이 나온 겁니까?" "아아." "아니 대체, 그 놈의 기록서에는 뭐가 그리 어려운 말만 적혀져 있답니까? 그러고서도 기록서라 할 수 있답니까? 적어도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서라면 그 가문의 사람들은 척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는 적어 놨어야지요. 이거야. 팰러딘 가의 에녹스님마저도 기록서에 적혀져 있는 말들의 뜻을 모른다면 제왕의 보물을 어떻게 찾으라는 겁니까 대체?" "아아." '폭풍의 곶'이라 불리며 오면서부터 엄청난 폭풍을 겪게 했던 희망봉에 도착한 지금, 그들은 며칠 전부터 폭풍보다도 더 그들의 두통을 자아내게 했던 기록서에 대한 문제로 다시금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니, 언성을 높이는 것은 순전히 로딘 쪽이었지만. "그래서요? 이제 모나쉬 마운틴에 도착해서 정상으로 돌진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도 방법을 찾지 못하신 겁니까? 제왕의 보물인 금은요동 소년까지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요?" "아아." "제독!! 제 얘기 듣고 계신 겁니까!!??" "아아." 곁에서 듣는 사람까지 귀가 쩌렁쩌렁할 정도인데 듣는 당사자는 아마도 그의 부관의 고성이 참을 만한가 보다. 아무리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눈앞에서 번쩍이는 대머리를 들이대어도 혼자만의 세계에 깊게 빠진 듯 멍한 눈을 한 채 턱을 괴고 있었으니까. "후우." 로딘은 결국 에녹스의 관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하고 거하게 한숨을 쉰 뒤 에녹스가 보고 있던 기록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막히는지, 어떤 얘기를 이해할 수 없는지 말을 해줘야 함께 의논을 하던가 해결책을 찾던가 할 것 아닌가. 혼자서 머릿속에만 집어넣으면 그게 알아서 슬슬 해결이 되기라도 하는 건지. 에녹스가 국왕의 명을 받고 제왕의 보물을 찾기 위해 출발하기 전, 팰러딘 가에서 가져온 것은 두 가지였다. 바로 성안인 사람 대신 제왕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다는 성안석, 그리고 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기록서. 성안석(聖眼石)이야 제 기능을 다해 제왕의 보물인 소년을 알아보고 자폭했다지만, 이 기록서는 성안석처럼 제 기능을 다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보면 볼수록, 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에녹스의 한숨소리는 커져만 가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로딘은 에녹스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을 이용해 에녹스가 펼쳐놓은 페이지의 그림과 문장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고대의 아르센 언어로 적혀져 있는 기록서는 몇 몇 단어는 사장(死藏)된 것이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림도 꽤 있고 아직 남아있는 단어도 몇 개 있어서 대강의 내용은 알 수 있었다.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의 관계는 인간들이 아는 것과는 다른 ……이다』 『대신(大神) 파라드가 그들의 부(父)인 것은 맞지만 …는 파라이아의 …가 아니다』 『보물은 제왕의 곁에 있음으로써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되리라』 『진명(眞名)을 가진 보물이 제왕의 반려가 되어줄 것이니, 이는 반려를 제왕으로 이끄는 이다』 『보물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제왕은 그의 진정한 보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머무는 곳, 그 곳에 보물이 있을지니 68과 13의 32, 12와 3에 32이다』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지상에 다시 강림하는 날, 희망은 무너지리라』 "……." 로딘은 펼쳐져 있는 기록서의 글들을 훑어본 뒤 상관의 넋 나간 얼굴을 돌아봤다. 하긴, 이런 얼굴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런 뜬구름 잡는 식의 기록들로 가득 찬 기록서라니. 물론, 대강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숫자가 나오는 문구, 아마도 이것은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위도와 경도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희망이 머무는 곳이란 바로 이 희망봉을 말하는 것일 테고. 보물은 제왕과 있음으로써 그 역할을 한다는 것 또한 알겠다. 그런데 다른 것은 영…. 진명이라니? 반려라? 그것은 제왕과 보물이 한 쌍이 되어야 진정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보물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야 보물을 얻을 수 있다니, 이미 파크라는 보물로 책정된 소년은 세상에 드러난 소년이거늘 더 이상 어떻게? 그리고 뭐?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다시 지상에 강림해? 환생이라도 한단 말인가? 이외에도 기록서에는 알 수 없는 말 투성이었다. 도대체 이 책이, 제대로 된 기록서가 맞기는 하는 것일까? "제독." "…아아." "이 기록서, 확실히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게 맞기는 합니까?" "아아?"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던 그가 이번에는 눈동자를 로딘에게 향하며 미약하나마 반응을 보인다. 아마 자신 또한 확신이 서지 않던 차에 기록서를 본 부하까지 그런 말을 하니 신경이 쓰이기도 했겠지. "무슨 소린가 로딘?" "도대체가 말입니다. 기록서라 하면 당시의 일들을 세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 기록서라 불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기록서라 하기에는 너무 미비하지 않습니까. 뭐 오래된 책인지라 몇 몇 단어들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라도, 글들이 마치 시라도 써놓은 듯 너무 은유적이고 난해합니다. 이건 뭐 수수께끼 푸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맞아." "예?" "이건 수수께끼 책이야." "뭐라고요?"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전대의 제왕 또는 제왕의 보물이었던 자가 쓴 기록서이지 싶어." "어째서요?" "이걸 보게. 주변 인물들이라고 하기엔 기록들이 제법 자세하고, 또 관련자들만 알 수 있게끔 묘한 언어로 말장난을 해놨어. 나도 잘 알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제왕의 보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말을 하면서 에녹스는 기록서의 나머지 부분들을 파라락, 하고 펼치면서 로딘에게 보여줬다. 과연, 실지 겪은 사람이 아니고는 알기 힘들 것 같은 주변 경관이라던가 환경 등이 제법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렇군요." "그리고 말이지, 만약 이 기록서에 나온 것처럼 기록서의 인물들이 제왕의 보물을 차지했다면 어떻게 그 보물이 아직 남아있겠나? 그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실패한 거야. 그래서 후세들 또한 쉽게 찾지 못하도록 이렇게 말을 꼬아놓은 것이지. 자기들도 못 찾은 것을 우리가 찾으면 샘이 날 테니까. 어디 찾을 수 있으면 찾아봐라, 해서 온통 어려운 말로 도배를 해서 말이지. 가장 제왕의 보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그 어떤 누군가가." "뭐, 그럴 듯 하군요." "그렇지?" "그런데 제독." "음?" "지금까지 곰곰이 고민하신 게 그겁니까?" "그런데?" 당당하게 말하는 상관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늘 그렇듯 구타 욕구가 치밀었지만 로딘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뛰어난 인내심으로 이번에도 하극상의 위험을 벗어났다. 어찌됐든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직속상관이니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올바른 부관의 도리. "제독." "응?"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더 이 문구들을 해석해서 제왕의 보물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고 봅니다만." "그치만 봐. 얄밉잖아. 자기들은 못 찾았으니 너희도 쉽게 찾게 둘 순 없지∼라면서 쓴 사람이 웃는 게 보이지 않아? 난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 놀려먹는 사람들이 제일 싫더라." 나를 놀려먹는 당신은 어떻고!! 로딘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 또 다시 참고 어떻게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뭐 제독께서 싫다고 한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일 테고, 저희에게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그 수수께끼들을 풀어서 제왕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저 무뢰한 같은 해적 놈들도 소탕하고 폐하의 근심도 줄어들 테니까 말이죠." "음.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어서 빨리 기록서를," "아아. 하루종일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지겹구만. 기껏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희망봉까지 와서 서적이나 파고 있어야 하다니. 너무 억울하지 않나?" "중대한 임무가 있잖습니까!" "왜 화를 내고 그러나 로딘? 자넨 나와 얘기할 때 너무 과민해지는 경향이 있어. 그거 알고 있나?" "누구 때문입니까!!" "거야 알 수 없지. 자네의 성격이 다혈질인 것인지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인지. 그렇게 보이지 않나, 보물이여?" "……." 자기 탓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며 로딘 탓만 하는 에녹스의 모습에 로딘의 핏줄이 막 터지려는 찰나, 에녹스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천막 안의 구석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어두운 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빌항의 슬럼가에서 평범히 살다가 난데없이 제왕의 보물이라 끌려온 금은요동의 소년, 파크였다. "왜 말을 안 하지?" "당신들이 내 의견을 언제 상관했었나요." "호오." 처음에 봤던 인상과는 달리 무척 차갑고 날카로운 답변에 에녹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오는 내내 이상하게 조용하다 했더니, 저런 칼날을 다지고 있었던가. 도빌항을 출발해 이곳 희망봉에 도착하기까지, 플라잉 클라우드호는 해신(海神)인 포세이돈의 은총을 받아 순항만을 겪어온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날씨의 변화에 곤란을 겪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온 암초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하였었다. 게다가 이곳 희망봉은 다른 말로 '폭풍의 곶'이라고도 불릴 만큼 주변 해상의 폭풍우가 심하여, 도착하기 며칠 전에는 그야말로 속이 뒤집히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파크는 이상하다 할 정도로 의연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었다. 라디라는 소년과의 뜻하지 않은 헤어짐 후, 파크는 에녹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배정된 선실 안에서 늘 무언가를 생각하듯 침착하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탈출을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를 거라는 로딘을 비롯한 부하들의 걱정 어린 의견도 있었지만 에녹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으니까. 설명 이 플라잉 클라우드 호에서 탈출한다 치더라도 파크는 도빌 항으로 돌아갈 배도 없을뿐더러 그 뿐인가 식량 및 무기, 하다 못해 가장 기본이면서도 중요한 선원용품이 나침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보트야 어떻게 나무로라도 만든다 쳐도 그것이 저 폭풍 밭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가지기 어려웠고, 바람을 읽는 능력 또한 저 배 한 번 타보지 못한 평범한 소년이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고로, 소년은 자신의 입장을 십분 생각해 에녹스의 뜻에 순응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어찌됐든,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라디와 파크 양쪽에 맹세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소년의 변모는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제왕의 보물로 책정되었다며 희망봉으로 끌고 가려 하자 소녀처럼 예쁘장한 얼굴에 눈물을 글썽이며 라디라는 소년에게 매달렸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서늘하고 눈동자에서 제법 총명함이 비친다. 사내란 역시 홀로서기를 해야 강해진단 말인가. 에녹스가 흘려 듣기로 그 동안 집안의 생계유지는 몸이 약한 파크 대신 라디라는 소년이 대신했던 것 같은데, 그로 인해 아마도 이 소년은 강단을 가질 만한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라디라는 소년의 의지와 고집만 이 소년의 것을 포함해 두 배로 늘어난 것이겠지. 재미있구나. 잡초들의 생명력과 의지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에녹스는 위험한 생각을 하며 소년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어차피 자신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 존재들이 바락 바락 대드는 모습에 흥미가 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보물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 나도 나라의 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이 쪽의 입장도 조금은 생각해주기 바래." "제가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요?" "물론 없지." "잘 아시면서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훽, 하고 결 좋은 금발을 찰랑이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흡사 토라진 계집애의 그것이다. 저런, 사내의 강단이 아니라 레이디의 앙탈이었던가. 에녹스는 여자만을 좋아했던 자신이 요점 이상해지는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년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루라도 빨리 보물을 찾아서 이 섬을 떠나자고. 음. 섬이라고 하기엔 약간 작은 곶이긴 하지만. 어쨌든. 봐. 너도 한 번 생각을 해 봐. 명색이 제왕의 보물로 태어난 자라면 제왕의 보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게 있을 것 아닌가? 몸 속에 기억된 피의 기억이라던가 하는 것 말야. 옛 영웅들의 신화에 보면 자주 등장하곤 하던." "그야말로 옛날 얘기를 너무 많이 들으신 듯 하네요." "후후. 그런가?" 차갑게 쏘아붙여도 능글맞게 대처하는 에녹스의 모습에 파크는 이 남자에겐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남자의 말이 맞다. 기왕 여기까지 온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제왕의 보물인가 뭔가를 찾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말이에요. 피의 기억이니 뭐니 해도 저는 그런 것 전혀 몰라요.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집에서 어머니의 병 수발을 들며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다였다고요. 이런 제가 그런 거창한 일, 알 리가 없잖아요?" "음. 그래도. 나는 네가 평범한 소년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는데. 너도 봤잖니? 그 성안석이 파삭, 하고 깨지는 것 말이야. 그런 마법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 너였는데, 분명 출생이라던가 어딘가에 비밀이 숨어있을 게다. 그래, 너. 아버지는 어떻게 됐니? 혹 해적이라던가 아니면 뭔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니?" "여관을 운영하시다가 폐병이 걸려 돌아가셨는데요." "음. 저런." 손가락을 딱 하고 맞추면서 그럴 듯한 것이라도 생각난 양 물어본 것이 불발로 끝나자 남자는 금새 실망한 표정을 짓고 양손을 뒤로 짚은 채 천막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것이었지만 현재 이곳의 최고 지휘자이기에 그 누구도 저 남자에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진명!! 너 말이다, 그 이름이 진짜냐?" "예?" "파크라는 이름 말이다. 혹여, 다른 이름이 있지는 않니? 너희 어머니가 어릴 때 지어주신 아명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중간에 숨겨놓은 이름, 그래, 여기 기록서에 적힌…제길, 이걸 뭐라고 읽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고어를 가르쳐주실 때 열심히 배워두는 건데. 어디…." "이것 보세요 제독님." "디…아…뮤? 디아뮤? 그렇게 읽는 건가, 로딘?" "예. 그런 것 같은데요 제독." "디아뮤 앞에 있는 이 글씨는 뭐지?" "음…이건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병사들 중에 고어를 아는 놈이 있나 물어볼까요?" "글쎄, 저는 진명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파크가 제 이름의 다라니까요." "정말 모르나?" "전혀요. 그런 이상한 이름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적도 한 번도 없…." '디아뮤?' "왜 그러지? 혹 들어본 기억이 있나?" "예? 아, 아닙니다. 그냥 참 이상한 이름이라서요. 어쨌든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런 이름." "그런가…역시 아쉽게 됐는걸. 아마도 이런 이름을 갖고 있는 제왕의 보물이 반려를 제왕으로 이끈다…이런 내용인 것 같은데." "하지만 제독, 어차피 저 소년이 제왕의 보물이라는 것은 성안석이 밝혀주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기록서에 씌여 있으니 모두 들어맞으면 얼마나 좋은가. 하긴 뭐, 저 소년의 진명을 모른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지. 제왕의 보물만 얻을 수 있으면 말이야." "그렇지요. 다른 부분을 연구해 보지요. 보물이 있는 곳이라던가 제왕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던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 이것 보게 로딘. 도대체 '보물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야 제왕이 될 수 있을지니' 라고 써 있는데 나는 도통 모르겠단 말야. 대체 어쩌라는 뜻인지……." "이것은 제가 보기엔…." 결국 파크에게서 얻어낼 정보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마자 에녹스와 로딘은 다시 기록서에 파고들었고, 파크는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자신이 그 이상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걸 들킬 뻔 했으니 말이다. '디아뮤' 처음 들었을 때는 이상한 이름이라 생각하며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분명 자신은, 저런 비슷한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데요 제독." "뭔가 로딘?" "그 블랙 버드인가 하는 놈은, 대체 뭡니까?" "음!" 달갑지 않은 화제인지 에녹스가 심통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파크는 들려온 로딘의 목소리에, 자신 또한 궁금해했던 것인지라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별로 하고싶지 않은 얘기인데." "저도 듣고 싶어요." "음?" "그 사람이 라디를 데려간 거라고 하셨죠. 게다가 아주 악명 높은 해적이라고요. 그래서…라디의 생사를 보장할 수 없다고." "그래. 안타깝지만 그렇다. 어쩌면 네 친구는 이미 상어밥이 되었을 수도…,"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겠어요. 도대체 그 사람은 당신의 뭐기에 이렇게 방해를 하고 라디까지 납치해간 거죠? 난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느새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에녹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소년이 물었다. 꼿꼿이 편 등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친구가 죽었다는 에녹스의 말을 잘라먹을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자격이라." "그래요. 당신들의 목적 때문에 얼결에 납치되어온 게 저예요. 이런 얘기 정도는 들을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 "얘기. 해주세요." 당당히 마주쳐 오는 색이 다른 양쪽의 눈동자에 에녹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소년의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보초병들을 밖으로 물렸다. 소년에게는 해줄 수 있지만 부하들에게까지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가문의 치부와도 같은 얘기였으니까. * * * "…이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부관, 로딘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할 말이 있는 듯 아쉬운 눈빛을 하며 에녹스를 바라보던 로딘까지 천막을 빠져나가자,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천막 안에는 에녹스와 파크,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 "와인?" "됐습니다." 뭔가 대단한 얘기라도 숨기고 있는 듯 남자는 시간을 끌려는 눈치였다. 라디의 안부가 걱정되어 한 시라도 빨리 듣고 싶은 파크가 거절을 하자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잔 안의 와인을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저 냉정하고 여유만만이던 남자가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의 전설은 알고 있겠지?" "그야." "사실, 그 둘이 쌍둥이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나?" "예?" 블랙 버드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달랬더니 웬 창설 신화 얘기인지. 파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의문을 표했다. "고상하고 고매하신 역사학자들께서는 보는 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이들의 이야기를 미화시킨 모양이지만 진실은 따로 있지. 그들은, 창세신 파라드의 밑에서 태어난 이복남매였다." "뭐라고요?" "그래. 워낙이 외모가 비슷한 둘이었으니 사람들이 쌍둥이라 착각할 만도 했겠지. 하지만 아니라고. 그들은, 파라드의 천륜을 배반한 악행으로 태어난 악연의 혈육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나 역시도." "!!!" 더 이상 상관없는 얘기는 그만하려고 말하던 차, 에녹스가 신화와 연계된 자신의 충격적인 사실을 고했다. 얼굴을 보고 당연히 쌍둥이일 거라, 아마도 쌍둥이는 불길하다는 신화를 믿은 부모가 버렸을 거다 라는 것쯤으로 예상하고 있던 파크는 예상 밖의 전개에 놀라 남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남자가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장교용 고급 와인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가득 채웠다. "무슨 소리죠? 악행이라니, 어떤?" "창세신 파라드에게 형제가 있었던 것은 알고 있나?" "예?" "역사학자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반인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 그래. 파라드에게는, 오리스라는 형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아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지." "……." "그러던 어느 날, 오리스는 사랑에 빠져 한 여신과 결혼을 하게 되지. 그것이 바로 파라이아의 오빠 파라이아드의 어머니인 여신 플로라였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신이었지." 에녹스는 다시 한 번 잔 안의 와인을 단 번에 마시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에 질새라 파라드도 부인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센의 모신(母神)으로 알려진 위시느였다. 이 여신의 이름은 아마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아아." "그리고 이 여신이, 파라이아의 어머니가 된다." "에? 잠깐, 잠깐만요." "……." 듣다 보니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어서 파크는 손을 들어 에녹스에게 중지를 요청했다. 그러니까, 오빠인 파라이아드의 어머니는 플로라고, 여동생인 파라이아의 어머니는 아르센의 모신인 위시느라고? "그렇지만 그 둘은 쌍둥이라고 알려졌잖아요?" "그래."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둘 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데 같은 얼굴이라뇨? 아. 설마, 파라드와 형인 오리스가 쌍둥이였다던가 그런 건가요?" "아니, 그 둘은 전혀 다른 외모의 형제였다. 심지어 체격과 머리색 어느 것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그럼 어떻게," "말했잖나. 창세신의 악행으로 인해 태어난 이들이라고. 그들은,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던 거야." "그런! 그렇다면, 창세신인 파라드가," "그래. 자신이 형을 사랑했던 어리석은 창세신은, 그만 눈앞의 질투에 휩싸여 형의 아내를 범하고 말았다. 형이 안았을 거라 생각했던 그 부드러운 몸에서, 형의 향기를 느껴보려는 듯이." "말도 안 돼!! 그런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어요! 혹시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 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 이것은 아르센 창설 당시 발견된 석굴에서 벽화와 고대문자들로 그려져 있던 얘기야. 초대 왕이 인륜에 어긋난 것이라 하여 설화에는 이런 내용들을 삭제했지만. 그리고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나에게는 상관없어. 어차피 나에게 있어서는 사실인 이야기니까." 파크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눈앞의 남자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자기만 잘난 줄 알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불사하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할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들을 텐가?" 에녹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여 파크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할거라 생각해서 물었지만 소년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녹스의 얘기를 재촉했다. 의외라 생각했지만, 에녹스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소년이 원하는 대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창세신의 치부, 또는 자신의 치부와도 같은 숨겨진 진실을. "그래. 창세신 파라드는 그렇게 플로라를 안고 난 뒤 태연히 자신이 아내인 위시느 또한 안게 되지. 그래서 둘은 거의 같은 시기에, 마치 쌍둥이인 것처럼 태어난 거다. 자신들의 아버지인, 파라드의 용모를 가지고." 그렇다면 이들과 저 남자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신들의 수태기인 3년 뒤,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태어난 거지. 아니, 태어난 것은 파라이아드가 빨랐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 본 오리스는, 아이의 외모가 자신의 것도, 부인인 플로라의 것과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는 깨닫게 되는 거지. 그 외모는 바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동생의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얘기와 남자와의 연계성은 충분했다. 블랙 버드와 에녹스의 외모는 마치 쌍둥이의 그것처럼 똑같았다. 하지만 쌍둥이는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격분한 오리스는 동생을 죽이려 날뛰게 되고 파라드는 차라리 사랑하는 형의 손에 죽기를 바랬지만, 이는 파라드를 사랑해 버리고 만 플로라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되었지. 파라드를 사랑한 파라드의 형수는, 파라드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남편을 독살하게 되거든." "저런." "그래. 안타깝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고 싶어하던 파라드도 안타깝고 사랑에 배신당한 오리스도 안타깝지.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미움을 받아야 했던 플로라 또한." 남자는 마치 자신의 얘기라도 하듯 진정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얘기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당신과 블랙 버드의 관계가…." "간단히 정리를 해주지. 창세신 파라드는 나의 아버지. 녀석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형. 그리고 플로라는 녀석의 어머니 위시느는 나의 어머니인 것이지. 신화와 다른 것이 없어. …녀석과 내가 형제라는 것을 빼고는." 그렇다면 이건 생각보다 더 굉장한 얘기가 아닌가. 명가로 알려진 팰러딘 가에 이 정도의 비화가 숨어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에녹스의 아버지와 그 형은 해적들을 잡으러 다니다가 장렬히 전사한 줄만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그는 왜 팰러딘 가에서 쫓겨나게 된 거죠?" "당연한 거지. 우리 어머니가 그 자식을 두고볼 것 같나? 신화에서야 워낙 능력들이 뛰어난 신들이었으니 독립할 수 있었다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해. 질투도 신보다 더 뛰어나고. 자신의 남편이 바람피워서 낳은 아들을 두고볼 수 있을 만큼 우리 어머니는 마음이 곱지 못해. 아니, 오히려 그 아이를 없앨 정도로 독하시다면 독하셨지." "그런." "내가 어렸을 때 어렴풋이 듣기로, 녀석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계절에 차가운 바다에 버려졌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냐. 내 어머니가 그리 하셨지. 그런데 나타난 거야. 저 좀비 같은 자식이. 내가 찾고 있는 제왕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챙!! "!!" 에녹스는 분한 듯 손안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깨트리며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주먹을 꼭 쥔 채로 서 있었다. 그 피를 보고 조금 섬뜩하였지만 저대로 두었다간 유리 파편이 손안에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크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입고 있던 옷의 천을 쫘악, 하고 찢어냈다. " 뭐야, 됐어. 괜찮다." "가만요. 이대로 두면 유리 파편이 스며들어 신경이 상한다고요. 해군 제독쯤이나 되시는 분이 설마 다시는 검을 못 잡게 되는 걸 원하시지는 않겠죠?" "음." 파크의 말의 효과가 있었는지 에녹스는 뿌리치려던 손에서 힘을 빼고 파크의 손에 의지를 하기 시작했다. "…라디도." "응?" "라디도, 자주 이렇게 다쳐서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매일 넘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말을 믿겠어요? 하여간 그 녀석은 나를 바보로 안다니까. 그래서, 엄마가 보시기 전에 걱정 끼쳐드리기 싫다며 늘 저에게 찢어진 옷을 꿰매달라고 말했었죠." "그래서 꿰매줬나?" "아니요. 당연히 상처 치료가 먼저였죠." "흐음." 재미있는 것일까. 코울림을 울리는 남자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파크는 왠지 친구를 자랑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에 신이 나 더욱 입을 활발히 놀렸다. 사실, 그간 또래 아이도 없는 살벌한 군인들 사이에서 무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혈기 넘치는 소년은 심심했던 것이다. "그래서요, 녀석은 아예 작은 상처 따위는 지 혀로 핥고 말거든요. 이 정도쯤 침 바르면 나아! 하고요. 하지만 침에 아무리 소독 작용이 있다고 해도 씻지도 않고 그렇게 바르기만 한다고 다 낫나요? 그래서 제가 늘 억지로 잡아 앉혀서 녀석의 더러워진 옷가지들과 팔다리를 닦아주곤 했어요. 녀석은 자기가 하겠다고 새끼 고양이처럼 몸부림을 치기는 했지만요. 후훗." "호오. 그것 참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그렇지요?" "음." 에녹스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함께 살았던 친구에 대해 마치 엄마라도 된 양 흐뭇한 표정으로 말하는 파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맑은 얼굴. 푸름과 녹음이 함께 하는 신비스런 눈동자.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 머리에 내려다 봐도 그 쭉 뻗음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콧날까지. "그런데…그는 그럼 이름이 뭐죠?" "음?" "그는 블랙 버드라는 별명말고는 알려진 게 없잖아요? 본명은 뭐예요?" 파크의 아름다운 얼굴 선에 매료되어 정신 없이 그 얼굴을 감상하던 중, 소년이 좋은 기분을 깨는 소리를 했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지." "?" "말했잖나. 그 녀석은 이미 죽은 녀석이야. 이름을 지어줄 만큼 크기도 전에 이미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녀석이라고. 이름 같은 것을 지어줄 만큼 자애로운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니셨고, 죽은 자에게 새삼 이름을 지어줄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그런…." 그딴 자식을 동정이라도 하는 것인가 해서 사나운 시선으로 내려보자 소년은 금새 주눅이 들어 치료를 하고 있던 상처로 다시 시선을 내린다. 그 축 처진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측은하여, 에녹스는 사납게 올라가 있던 눈썹을 제자리에 돌리며 다시 그 얼굴에 시선을 뺏겼다. '이것이 제왕의 보물이라는 것인가.' 과연 제왕이 될 자의 반려가 될 만큼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왕이 될 자의 반려가 어째서 '소년'이었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내려다보면 또 영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남색이라고는 전혀 관심이 없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 소년을 귀엽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귀엽다고 생각하면 눈앞의 소년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제왕의 보물과는 관계가 없음에도 이상하게도 관심이 가던 검은 피부의 동방의 외모를 가진 소년. 라디. '그러고 보니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한 것은 그 소년이 처음이었군.' 분명 자신은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카사노바라 불려질 정도로 여성을 좋아하고 그네들의 부드러운 가슴에 파묻히는 건 더더욱 좋아하는 정진 정명의 훌륭한 여색가였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소년을 귀엽다고 생각한 것일까? 물론, 외모가 이국적이어서 관심을 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이 봐온 어떤 사람보다 아름답다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그런 취향이었는지도 모르지. 혹은, 그 소년이 제왕의 보물 곁에 있음으로 해서 그 사랑스러움이 묻었다던가.' 생각하다보니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년이야 제왕의 보물인지라 제왕이 될 자신이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소년은 설명이 안 된다. 하지만 이 파크라는 소년과 같이 살면서 보물의 파동이 옮겨졌다거나 하는 말이라면 설명이 되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년보다도 그 소년이 더 많이 떠오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것은 자신 또한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점이었지만, 눈앞의 부드러운 윤곽의 아름다운 소년보다도 자꾸만 그 쌍꺼풀 없는 자위가 큰 검은 눈과 험한 일을 해서 다져진 몸, 거칠게 그을린 연갈색의 피부가 떠오른다. 이것은 아마도 그 소년을 먼저 본 후유증일까.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회원가입이 마감되었습니다. 가입인사 작성 꼭 해주세요. 안하시면 미워합니다.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회원가입이 마감되었습니다. 가입인사 작성 꼭 해주세요. 안하시면 미워합니다.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38 2164 145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2) "자, 다 됐습니다. 이대로 하루 정도는 내버려두세요. 유리에 베인 것은 의외로 많이 아프고 상처가 오래가기도 하거든요." "……." "…제독님?" 어느새 치료를 다 마친 것인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와인으로 소독을 하고 부드러운 실크로 상처를 동여맨 파크가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진 에녹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방향에 고민하고 있던 에녹스는, 그 빛깔이 다른 아름다운 양쪽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기자, 어느새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것을 하얗게 날려버리고 시선을 마주하는 데에만 전심을 다하고 있었다. "……저, 왜 그렇게 보시는…." "제왕의 보물들이란, 다 너처럼 외모가 아름다울까?" "예, 예?" "나는 본디, 여성의 나긋하고 동그란 곡선의 몸매가 아니면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뭐, 뭐가요." "라디…아니, 너를 보니 이상하게 내 몸이 뜨거워지고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이건 뭐랄까. 그래, 향기? 제왕의 보물인 너에게서 무슨 향기가 나는 듯 하구나. 제왕이 되고 싶어하는 자를 유혹하는 것과도 같은, 너무나도 위험한 최음의 향기가." "네에?" 파크는 적나라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한 남자의 욕정 고백에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대번에 아래로 내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말을 사람 눈을 똑바로 보고 하다니, 대체 어떤 신경의 사내인가 저 사람은! " !" 그러나 내려졌던 시선은 5초도 되지 않아 타인의 손에 의해 다시 위로 들려졌다. 시선을 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에녹스가, 다시 그 아름다운 금은요동을 보고싶다 생각하여 파크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린 것이다. "무슨, 놔주세요." "아름답구나…." "네?" "금은요동이란 것이, 처음엔 잘못된 유전자의 실패작이라 생각했었는데, 너를 보니 그 생각이 참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워. 마치 아름다운 호수와 푸른 녹음이 함께하고 있는 것 같아." "……." 파크는 한 뼘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칭찬, 아니 찬사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도저히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턱을 쥐고 있는 의외로 억센 선을 가지고 있는 에녹스의 손 때문에 그저 얼굴을 붉히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아름답다니. 자신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늘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여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거나 머리 한 번 제대로 빗은 적이 없었고, 손은 병든 어머니 대신 온갖 살림을 하느라 거칠게 트고 얼굴 또한 제대로 된 영양을 취하지 못해 좋은 색을 띠고 있지 못하다. 이런 자신을 보고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것인지. 오히려 아름답다는 말은 자신보다 라디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체력이 약한 자신 때문에 밖에서 힘든 일을 하고 들어와도 늘 사라지지 않는 그 맑은 미소가. 아무리 더러운 일들을 겪어도 결코 순수함을 잃지 않는 그 아름다운 검은 진주 빛 눈동자가. 아무리 차가운 물로 씻고 관리를 허술히 해도 절대 그 빛을 흐리지 않는 결 좋은 검은머리와 부드러운 피부가. 파크는 부럽다고 늘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은. "…제가 보기엔, 제독께서 제일 아름다우신 것 같은데요." "내가?" 그렇다. 지금까지 파크가 봐 온 사람들 중에는, 라디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국적이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제독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태양 제독.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별명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칼은 달빛이요 눈동자는 호수 빛이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기와 광채는 분명 세상 무엇보다 환한 태양의 빛이었다. 처음 본 순간 태양의 신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파크는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에 한참동안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물론, 남자가 자신을 납치해 온 이유 때문에도 입을 다물 수 없었긴 했지만. "네.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남자다운…처음 봤을 때부터 과연 라디가 좋아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호오? 그 라디라는 소년이?" "네. 모르셨나요? 라디는 당신을 동경해서 해적들을 당신들에게 유인하기도 했는데요." "뭐라고?" "아마도, 블랙 버드의 외모를 당신의 것으로 비유해서, 당신을 블랙 버드라 착각한 바보 해적들이 당신에게 가도록 만든 거죠. 뭐 정말 우연치 않게도, 정말 블랙 버드가 당신과 똑같이 생겼었지만 말이에요." "!" 에녹스는 지난 두 달 전 해적들이 이상하게 도성으로 몰린 사건의 원인이 라디라는 사실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렇다면 자신이 도빌 항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년이 바로 라디였다는 건가. 그 때는 제왕의 보물 건으로 워낙이 바빴던 지라 더 이상 그 소년의 행방에 대해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라디였다니. '이들과 나 사이에 도대체 어떤 운명이 있기에 이리도 심상치 않은 우연이 계속되는 것일까.' 에녹스는 놀라는 자신의 모습에 의아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는 파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의 때라고는 모르는 얼굴.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페로몬을 가지고 자신을 유혹하는 존재. '제왕의 보물.' 그리고, 너무나도 흔치 않은 우연으로 자신과 만나 이상스레 관심을 끌었던 검은 눈동자의 소년, 라디. 이 소년들과의 만남들을 생각해 봐도, 역시 자신은 제왕이 될 운명임에 틀림없었다. 보물과 제왕은 마치 자석처럼 서로 끌리게 되어 있고, 그들은 일생의 반려가 될 둘도 없는 한 쌍의 파트너라고 했으니까. "…제독…님?" 그렇다면 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자신의 도리 아닐까. 보물의 향기에 취해 정신 없이 달아오르는 이 몸을, 저 부드러운 장밋빛 입술에 다가가고 싶은 이 욕망을.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 왜 이러세요. 저기, 내일은 모나쉬 마운틴에 오른다고 했으니 이제 그만 침구를 준비해야," "가만." 파크는 움직일 수 없도록 턱을 단단히 고정시킨 채 그 자신의 턱을 가까이 가져오는 에녹스 때문에 당황하여 그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 또한 마치 다가오는 모양 좋은 입술을 기다리는 것처럼 원래 힘의 반정도 밖에 내주질 못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의 친구를 위험에 빠트린 저 아름다운 남자에게, 끌려서는 안 되는데. "…파크…." "제, 제독님…." 펄럭!! "제독! 큰일났습니다! 침입자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순찰중인 대원이 발견하여… 에구머니!!!" 어느 소녀보다 귀여운 모양의 장밋빛 입술과 그보다 약간 색이 바랬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남자다운 입술이 막 어색한 첫 만남을 가지려 할 때, 천막의 천을 펄럭이며 들어온 불청객이 그들의 만남을 방해했다. 긴급 소식을 전하러 온 에녹스의 부관, 로딘이었다. "!!" " 제길." 팟, 하고 들어온 불청객의 소리에 놀라 몸을 뗀 파크를 보며 에녹스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고 로딘은 들어오자마자 보인 접촉한 두 사람의 모습에 지레 놀라 그 자리에서 크게 팔을 허우적대며 눈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본 장면이었고 방해해버린 상관의 거사(?)였다. "…무슨 일인가 로딘.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기분 안 좋음'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보통 때의 두 배는 낮은 목소리에 로딘이 가리고 있던 손을 단번에 내리며 보고를 위해 부동자세를 취했다. 저 기분에 거슬렸다간 그 누구라도 화를 면치 못할 지니. "예! 곶 주위를 순찰하던 대원들 중 하나가 웬 이상한 소년을 발견했다 하여 지금 끌고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소년의 모습은 헤엄을 치고 산길을 달려온 듯 여기 저기 옷가지가 젖고, 찢겨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진 소년이라고 합니다!" "! 라디!! 라디가 틀림없어요! 라디가 지금 어디 있다는 거죠!?" "가만. 진정해라. 로딘, 그 소년이 검은 피부라고? 그렇다면 흑인이 아닌가?" "아닙니다. 흑인은 아니랍니다. 아무래도 병사들은 동양인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검은 피부라고 한 것 같은데, 절대 흑인은 아니랍니다. 아무튼 곧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일단 투항을 했다고는 하지만 도망치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웠답니다." "! 족쇄라니요! 라디는 죄인이 아니에요. 왜 족쇄를 채운 거죠!" "진정하래도. 소년이 라디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소년이 어떻게 블랙 버드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았겠나?" "저, 그것이." "음?" 파크를 진정시키려 말을 하는 도중 또 다시 방해를 당한 에녹스는 좋지 못한 눈길로 로딘의 얼굴을 바라봤다. 로딘은 뭔가 곤란한 것을 말하려는 듯 조금 망설이는 기운을 보이더니, 이내 다시 차렷자세를 취하며 상관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했다. "그 소년은 아무래도 계속 족쇄에 구속되었던 듯 발에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리고, 대원들이 아무래도 도빌 항에서 본 적이 있는 소년인 것 같다고 말했답니다. 자세한 것은 곧 도착할 대원들이 데리고 온 소년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 "그것 보세요! 역시 라디인 거예요. 족쇄라니! 나쁜 블랙 버드 자식, 어떻게 라디 같이 어린애에게 족쇄를!!" 바로 옆에서 파크가 분한 목소리로 블랙 버드의 잔인함을 탓했지만 에녹스는 그와는 다른 놀라움으로 차마 그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 소년이 이곳 희망봉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 녀석이 이 곳에 진정한 제왕의 보물이 묻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도대체 그 정보를 어디서? 제왕의 보물을 찾고 있고, 그 제왕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성안 등은 나라 안에 퍼진 소문으로 알아낼 수도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이곳까지 자신을 바짝 쫓아와서 그 존재를 과시하며 자신이 것을 빼앗아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 어디까지 쫓아와야 포기할 것인가. 레플리카여. "어서 빨리 라디를 데리고 와야 해요. 제독님! 뭐 하시는 거예요! 에녹스 제독님!!" "!" 옆에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듣는 기색이 없자 답답해진 파크가 에녹스의 팔을 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부하와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그 소년에게 가보도록 하지. 만약 파크의 친구인 라디라는 소년이 맞다면, 지금 당장 전열을 정비하고 대책을 세워야겠다 로딘." * * * 천막을 나가 병사들이 묵고 있는 초소로 들어가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에녹스는 쉬어, 라고 재빨리 말한 뒤 로딘에게 눈길로 그 병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로딘이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 있던 붉은 머리의 병사를 집었다. 에녹스는 거침없이 척척 걸어가서 붉은 머리의 병사 앞에 섰다. "자네가 순찰 도중 웬 소년을 발견했다고…?" "예스, 써! 해안 정박소 근처의 수풀을 헤치고 초소로 오던 것을 제가 잡았습니다! 발견 당시에는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로, 상처도 여기 저기 많았고 다른 이들과 몸싸움도 있었던 듯 타박상 또한 많았습니다." 상처와 타박상이라는 말에 파크의 눈살이 또 찌푸려졌다. 어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상처도 느는 듯하니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 지금 어디에 있나." "예. 우선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도 기본 체력은 확보해야겠기에 의무실로 옮겼습니다. …저. 잘못한 것입니까?" "…아니. 잘했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행여 잡은 포로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하여 상관에게 문책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붉은 머리의 병사는 상관의 대답에 안심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의무실에서 치료 중이라는 말에 파크 또한 안심을 하는 듯 했다. "…! ……!!" "…!!! !!" "…무슨 소리지?" "글쎄…의무실에서 누군가 다투고 있는 듯 한데요." "싸운다고?" 의무실 대용으로 쓰고 있는 또 다른 천막으로 가는 도중, 천막 밖으로 누군가의 흥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나는 아직 청년이라 말할 수 없는 조금은 앳된 소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대원들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것 같았다. 에녹스와 파크, 그리고 로딘은 발걸음을 서둘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 것, 놔!" "글쎄, 상처를 보지 않으면 치료할 수가 없다니까!!" "필요없대도! 그냥 보이는 데만 치료하란 말이야!!!" "거, 참! 고집은!!" "라디!!!!!!!!!!!" " !! 파, 파크!?" "라디!! 라디!! 라디!!!" "우왓!! 아파라!!" "엣, 미, 미안!!" "아냐. 파크. 살아 있었구나!!" "너야말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에녹스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천막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친구의 것이란 걸 깨닫자 마자 파크가 소년이 누워있는 해먹으로 달려들었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에녹스는 마치 몇 십 년 만에 상봉한 가족이라도 되는 듯 흥분하여 포옹을 하고 있는 소년들을 보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영 포옹을 풀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슬슬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차, 라디가 먼저 다가오는 에녹스를 보고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아주 큰 액션으로. "…?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라디?" "!! …아…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단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원수라도 되는 양 험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소년이 이유를 묻자 놀란 얼굴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돌린 시선으로도 힐끔 힐끔 쳐다보는 것이, 왠지 자신의 얼굴에 저 표정의 원인이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착각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 누구? …아. 설마?" "그래…. 그 놈과." 에녹스는 명색이 나라의 해군 제독인 자신에게 소년이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소년의 말이 아무래도,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던 원인을 말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블랙 버드. 나는 그 놈과 조금 전까지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정박소의 반대편으로 돌아 상륙하고 있어. 아니, 어쩌면 벌써 상륙을 끝내고 배도 숨겼을지 모르지." "!!" "그런!!" "어쩌죠 제독님? 그들이 왔다면, 분명 제왕의 보물을 찾기 위해 공격해 올 텐데." 소년의 말에 놀란 로딘과 파크가 에녹스를 쳐다봤지만 에녹스는 그들을 돌아볼 심적 여유가 없었다. 불안했던 사실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 놈이 여기까지 등장했다. 게다가, 정박소의 위치까지 알고있을 정도로 제왕의 보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다…!! "로딘." "예." "당장 자고 있는 놈들을 두들겨 깨워서 불침번을 세워라. 그리고 천막 주변 경계를 강화시키고, 제왕의 보물 주위에는 지금보다 두 배의 병력을 배치해라." "제독. 그렇다면." "그래." 갑작스런 작전명령에 로딘이 이유를 묻자, 에녹스는 조금 전 파크와 있을 때의 달콤한 표정은 거짓말이었던 듯 완벽한 '해군 제독'의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놈이 아무래도 기록서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곧 전면 공격을 해올 거야. 숲 속의 게릴라전이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전쟁이다. 이 섬에서 살아 나가는 것은 둘 중 하나 뿐이야." 그것은 자신의 실패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승리자의 미소였다. 제10장 두 얼굴의 태양 라디가 에녹스 제독의 야영지로 온 그 날 밤, 아르센 해군 중 가장 용맹하다는 태양 제독의 부대는 긴장과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제왕의 보물도 찾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섬 어딘가에 있을 진정한 '제왕의 보물'을 얻어서 아르센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 희희낙락하던 대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검은 피부의 소년의 말 한 마디에 마음 속의 경계를 다시 수면 위로 부각시켰다. 바로 그들 최대의 난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블랙 버드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라디는 자신이 온 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살벌해진 것 같은 느낌에 잠시 표정이 굳어 있기도 하였으나, 이내 근 한달 만에 보는 친구와의 담소에 십 칠 세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바로 에녹스가 바라보고 있는 이곳, 에녹스 개인의 천막 안에서. " 랬구나. 그래서, 블랙 버드가 나를 못 데려간 분풀이로 너를 데려가 마구 일을 시켰단 말이지?" "아아. 정말이지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 게다가 내 성격에 공짜 배 얻어 타기는 죽어도 싫지, 피부 색 좀 다르다고 그 자식들이 얼마나 갈구고 패던지. 여기 봐. 이 멍들. 진짜 샌드백이 따로 없었다니까." "저런." "크크.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쯤 사내의 훈장이지. 내가 이 정도 상처에 계집애들처럼 찔끔거리는 거 봤어?" "훈장은 무슨! 이게 흉터지 무슨 훈장이니! 하여간 라디 넌…." "후후후." 곁에서 에녹스가 지켜보건 말건 동갑내기 소년들은 한달 간의 모험담을 풀어놓기에 바쁜 듯 했다. 그냥 지켜보자면 한없이 흐뭇한 광경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어찌됐던 이미 '일반인'과는 다른 범주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었다. 이 '희망봉'에 들어와 있는 한은. "그래서. 어디 봐.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팔 다리 얼굴 할 것 없이 온 몸을 때릴 수가 있어? 아무리 해적들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괜찮아. 생각을 해 봐 파크. 블랙 버드호에서 살아 돌아온 거라구? 사실 목숨을 건진 것만해도 대단한 거지 뭘."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넌 모르지? 네 얼굴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전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먹을 거 하나만은 거르지 않았다구. 그런데 너 블랙 버드호에서는 매일 굶기라도 한 거야? 네 동그랗던 얼굴 선은 다 어딜 간 거냐고!?" 파크는 라디의 선이 날카로워진 얼굴에 속이 상한 듯 했지만 라디는 그저 머쓱한 웃음만 계속 지을 뿐이었다. 사실 가장 많이 시달리고 아픈 곳은 따로 있지만, 눈앞의 순수한 친구에게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지라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차마 말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디." "!" "에녹스 제독님." 라디가 친구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문에 마음 속으로 미안해하고 있을 때, 인기척도 없이 에녹스가 그들이 앉아있는 해먹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에녹스 제독 때문에 놀란 라디는, 검은 눈을 크게 뜨며 해먹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이렇게 서자 위압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인가 보다. "왜 그러지?" "친구와의 회포를 푸는 것은 그 정도로 해두고, 지금은 그보다 시급한 일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다. 너는 분명, 블랙 버드호를 타고 이곳 희망봉까지 왔다고 했지?" "그랬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블랙 버드가 희망봉에 도착하여 어디에 잠입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또한 그들이, 무언가 굉장한 무기를 배 아래에 싣고 있는 것 같았다고." "그래. 뭔지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조심하고 세심하게 다루는 것 같았어. 나 같은 하급 일꾼은 가까이 갔다간 채찍만 얻어맞을 뿐이었지. 뭔진 몰라도 대단히 비싼 보석 아니면 굉장히 위험한 무기일 거야." "흠…." 의무실에서의 간단한 외상 치료를 마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곳도 꼭 치료를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 라디는 에녹스의 천막 안으로 들어온 뒤 계속해서 충격적인 발언만을 하고 있었다. 한낱 해적 나부랭이라고만 생각했던 남자의 엄청난 치밀함과 계획성에 대해서. "그렇다면 일단 놈들의 무기 수준이나 전투력을 군대 수준으로 생각하고 대비를 해야겠군…좋아. 그건 뭐 너희들에게 상의할 일이 아니지. 그럼 우선, 너희는 여기서 잠시 있어라. 나는 참모들과 작전 회의를 해야겠다. 잠시 후에 돌아오도록 하지. 먼저 자도 좋아." "내가 안 가도 돼?" 당연히 자신에게서 정보를 캐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파크와 있도록 두고 가는 에녹스가 의아하여 물었더니 에녹스는 훗, 하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해먹에 앉아있는 라디에게 다가오더니 그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선은 쉬어라. 그 무서운 해적선에서 사방이 해적들에게 둘러싸여 긴 시간을 보내느라 너의 심신은 굉장히 지쳐있는 상태일 거다. 그런 너를 족칠 만큼, 긴박하지도 않고 놈들이 무섭지도 않아. 그리고, 사실 해상전이라면 놈들의 배의 정보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상륙한 상태이니 게릴라전일 거야. 이건 정보와는 상관없이 예상 싸움이다. 놈들이 어디서 올지 예상하고 공격 법을 예상하는. 그러니 쉬고 있어도 좋아." "아…." "아, 물론 혹시나 해서 잠시 뒤에 블랙 버드나 다른 놈들의 약점 같은 것은 물어볼 테니 잘 기억해 봐. 혹시 알아? 그 놈이 너에게만 특별히 보여준 신체 약점이 있다거나 말이야. 쿡. 물론 그런 일은 없었을 테지만." "……." "…? 그럼 난 갔다 오지. 파크. 친구를 잘 돌봐주도록 해." "말 안 하셔도 제가 알아서 해요." "그래." 에녹스는 나오기 직전 라디의 표정이 걸렸지만 지금은 급하게 습격해올 놈들에 대비를 해야했기 때문에 라디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은 저 숲 속을 헤쳐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을 테니까. 비록 소년에게서 나는 것 같은 부드러운 향내를 조금 더 맡고 싶다고 해도 말이다. 에녹스가 나간 뒤, 파크는 잠시 라디에게 줄 음료를 가지러 식량이 있는 천막으로 나갔다. 야윈 친구를 위해 뭐라도 먹이고 싶은 친구의 마음이었지만, 그 덕분에 라디는 드디어 혼자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었다. "후우…." 한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자 가죽으로 잘 짜여진 천막 내부와 다섯 개 정도가 걸려있는 선원용 해먹들이 보인다. 이제야, 그 악몽 같은 곳에서 탈출을 한 것이 실감나는 것 같았다. 탈출. 탈출했다. 그 남자에게서. 그 배에서. 정말 완벽히 탈출한 것일까. 혹, 그 남자와 똑같이 생긴 에녹스 제독이 사실은 블랙 버드 본인이었다던가…. "…그럴 일은 없어. 바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미 블랙 버드호에서 멀어져 적진에 와 있는 상태면서도 라디는 아직도 남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가 들리고, 잊으려고 고개를 저으면 남자의 감촉이 온 몸에 되살아난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자신을 옭아매고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아니, 이미 각인되었는지도. 「벗어」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넌 내 손안에 있고 도망쳐봐야 내 손 안이다」 「다리를 들어」 " 큭." 지난 항해 기간 동안 남자가 자신을 안으며 내내 해왔던 말들이 귓가를 맴돌며 잊으려는 라디의 정신을 침식해오고 있었다. 출혈을 보고 의사가 치료를 하려고 했지만 끝끝내 보이지 않은 그곳의 상처는 마치 남자를 품고 있는 듯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박동을 하며 누군가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싫다. 익숙해져 버린 자신이 싫다. 남자의 몸을 알아버린 이 몸뚱아리를 버려버리고 싶다. "싫어…!" "라디??" "아…파크…." 여기 저기 다친 듯 하고 체력도 많이 떨어진 듯 하여 음료와 더불어 영양수프까지 챙겨온 파크는, 천막에 들어오자 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고 있는 라디를 보고 접시를 내팽개친 채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 본 라디의 얼굴은, 조금 전 파크와 얘기를 하며 생기있던 것과는 달리 분이라도 바른 듯 하얗게 창백해져 있었다. 무슨 일일까. 잠시 나갔다 오는 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겁먹은 얼굴을 하고있는 것일까.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라디." "아…무 것도 아니야…그냥…." "그냥 뭐? 뭐 때문에 이런 얼굴을 하고 있어?" "얼굴? 내 얼굴…이상해?" "이상하다기 보다는…." 라디의 얼굴에 대해 자신이 느낀 것을 설명해주려던 파크는 순간 마땅히 표현할 만한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물끄러미 며칠 새에 너무도 변해버린 친구의 마른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라 해야할까 저것을. 검은 새의 깃털처럼 반짝이는 검은머리에 살짝 벤 식은땀이 빛나고, 짙고 뚜렷한 눈썹과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며, 아파서 터진 거라고는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저 입술이 조화를. 뭐라고 해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파크는 지금 라디의 모습을 사실 뭐라고 말해야하는 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했다간 친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기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릴 때부터 서로의 성기를 보며 함께 자라온 가족 같은 동성 친구에게 '요염해졌다' 라는 말을. "왜. 뭔데 파크. 나 뭐가 이상해? 호, 혹시 나한테서 뭔가 느껴져?" "어, 어엉?" '느껴진다'는 말을 순간 오해하여 받아들인 파크는 깜짝 놀라 라디의 얼굴을 봤지만 이내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과민한 자신을 속으로 책망했다. 느끼다니. 하마터면 자신이 속마음을 들킨 거라 착각하여 친구에게 큰 실례를 저지를 뻔 하지 않았는가. 한편, 라디는 라디대로 혹여 자신에게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라도 느껴지는 것인가 하여 친구의 익숙하고 그리운 얼굴을 보면서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혹여 자신에게서, '남자를 알고 있는' 기운이라도 나가는 것은 아닌지 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진 평소처럼 자신을 대하며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느라 바쁜 친구였는데 블랙 버드를 생각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상하다고 말을 했다. 설마. 설마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 남자가. 항해 기간 내내 자신을 '여자' 취급했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저, 라디." "…으, 응." 서로간에 친구를 향한 불안한 생각들을 하던 두 소년은 왠지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없어 해먹의 연결 부위들을 내려다보며 어색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마치 친구가 아닌 타인을 본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었다. "그러니까…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어, 엉?" "그 배에서 말이야. 네 몸…." "내, 내 몸이 어때서!" "!" 분명 조금 전에 하던 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라디에게 놀라 파크는 하려던 말을 마저 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만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 그 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는 건데. 네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 친구 라디. 내 가족 라디가 이렇게 달라지면 안 된단 말야. 지금의 네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아. 마치 다른 곳에 나가 다른 이의 향기를 묻혀온, 그런 이질적인 냄새가 난단 말이야.' 파크는 변해버린 친구의 모습에 가슴속이 아릿해 오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늘 자신을 보호해 주던 입장과 달리 무척이나 약해져 있는 친구에게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바보. 지금 네 몸 보고도 어때서 라는 말이 나오냐? 이 멍들. 얼굴에 남은 멍들. 게다가 이 긁힌 상처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의사가 말하기로 너 출혈도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어디야? 어딜 다쳤기에 피가 났어? 응?" "피, 피는 별 거 아니야! 그냥 긁힌 상처에서 피가 난 걸 그 의사가 괜히 유난을 떤 것 뿐! 보이는 상처 외엔 별 거 없어 파크! 그, 그리고. 도착하기 며칠 전에는 놈들도 분주해서 때리는 것도 줄었는걸. 봐. 멍도 오래된 것들 뿐이잖아. 하, 하핫! 나는 괜찮아!" "그래?" 고작 긁힌 것 정도의 상처로 의사가 그리 유난을 떨리는 없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데 더 캐물었다간 화라도 낼 듯한 분위기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해적선에서 탈출해 온 지라 예민해져 있는 상태일 텐데, 더 이상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파크는 생각했다. "그래 그럼…우선 멍든 데에 연고를 바르자. 자. 여기 상비된 연고가 있어. 바지 좀 걷어봐." "응…." 화제를 돌리자 그제서야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고 파크가 말한 대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린다. 역시 뭔가 있다, 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조금 진정되면 조용히 따로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냥 바지를 벗지 그래? 허벅지도 멍든 데 있는 거 아니야?" "어? 아, 아니 괜찮아. 거긴 멍도 별로 없고…그냥 내가 나중에 할게." "뭐야∼? 너 이제 와서 부끄러워 하니? 자식, 너랑 나랑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하고 자라온 사이인데 뭘 가리는 거야? 쿡쿡. 이리 내 봐. 아예 엉덩이에 있는 멍에도 연고를 발라줄 테니까. 보자. 그러고 보니 라디의 엉덩이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귀여운 멍이 있었지? 뭐라더라, 어머니가 분명 '몽고 반점'인가 라고 했던 것 같은데…후후. 아직도 있을까…?" "내, 내가 한다고 했잖아!!!!!!!!!" "!!" 무릎까지만 올려진 바지에 제대로 치료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우스갯소리로 말하며 바지를 벗기려 하자 라디가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펄쩍 뛰며 파크의 손을 쳐냈다. 가볍게 놀릴 생각으로 손을 뻗었던 파크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친구가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내쳐진 손을 거둘 생각도 하지 않고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라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대체," "미, 미안해! 내가, 지금 좀 예민해져 있어서. 그, 그 동안 해적들과 생활하다 보니 사람의 기척에 너무 민감해져 있는가봐. 곁에만 다가오면 나를 공격할 것 같고, 아무튼 그래!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나 좀 혼자 내버려 둬. 지금은, 그 누구의 손이라도 거부할 것만 같아." "…그래…알았어." 파크는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다른 천막에서 자겠다고 말하고 라디를 홀로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라디는 '미안하다'며 자신이 나가겠다고 했지만 아픈 병자를 여기저기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며 파크는 그런 라디를 만류했다. 밖으로 나오자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풀벌레 소리가 파크의 귀에 파고들며 이곳이 자신이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만나고 온 생소한 모습의 친구가 자신과 함께 살던 친구 라디라는 것 또한. 겉모습이 변했어도 라디는 라디다. 분위기가 변했어도 가족은 가족. 그리고 아무리 자신을 밀쳐냈어도…친구는 여전히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위험한 기분을 느끼기는 했어도. 그래도. "후우." 왠지 모를 갑갑함에 한숨을 내쉬자 도빌 항과 달리 깨끗한 공기가 폐 속 깊이 들어오며 무거운 머리를 조금이나가 가볍게 해준다. 그래. 일단 자고 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 지쳐있는 라디의 체력도 조금은 회복될 것이고, 어색해진 분위기도 내일이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 줘야지. 그 동안 자신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힘든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을 테니까. 마음을 정한 파크는 혼자서 늘 힘든 일을 겪으며 홀로 훌륭히 헤쳐오던 친구를 믿고 옆 천막으로 들어가 남아있는 해먹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내일은 친구의 예전 같은 해맑은 미소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하지만 파크가 잠시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천막의 원래 주인인,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운 한 남자의 존재를. * * * 다가오지 마……. 「다리를 벌려. 이렇게 조여봤자 너만 아플 뿐이야」 싫어.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네 작은 구멍은 처녀의 그것처럼 나를 물고 놔주질 않는 구나…흥. 이 요마 같은 구멍으로 태양제독을 유혹할 심산이었나?」 아니야! 「창부 같은 꼬마. 너에게서 나는 암내가 나를 이토록 거칠게 만든다. …너란 놈, 겉으로는 순진한 척 하지만 구멍을 보면 다 알 수 있다. 넌. 남자를 잡아먹기 위해 태어난 요물이야」 아니란 말야!!!!!! 아니라고. 싫다고. 부정하고 소리쳐도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말을 비웃는다. 화가 나 주먹을 뻗어 보지만 남자의 하얀 손에 너무도 쉽게 잡히는 자신의 연갈색 손. 도망치려 뻗어보지만 금새 철컹, 하고 자신의 발을 옭아매는 족쇄.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뻗어 온다. 뒤로 물러나려 하지만 공간이 없다. 갇혔다. 이 작고 어두운 공간 안에. 오늘도 꼼짝없이 저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 싫어어어어 !!!!!!!!!" "라디!!!!!!!!!!!!!!!!!!!!!" " 헉!!" "괜찮으냐? 웬 식은땀을 이렇게…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시, 싫어." "응?" "싫어! 오지 마! 오늘은 싫어!! 싫단 말야!! 저리 가아아아 !!!!!!!!!!!!!!!!!!" "라디!?" 에녹스는 작전 회의가 끝난 뒤 돌아온 천막에 라디 홀로 자고 있는 것이 의아하여 안쓰럽긴 하지만 자고 있는 라디를 깨워 파크의 위치를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면서도 계속 악몽을 꾸는 듯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을 하던 라디는, 깨어난 후 자신의 얼굴을 보더니 그야말로 기겁을 하여 그물처럼 촘촘히 매어진 해먹 위에서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왜. 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저리가!! 아파!! 저리 가!!!!!!!" "라디!!!!!!!" "헉!!" "잘 봐라. 난 에녹스야…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거지. 난 아르센의 해군 제독 에녹스 리엔 팰러딘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헉…헉…에녹스…?" "그래. 네가 동경한다던 그 에녹스라고. 맞지?" 가슴의 약식 훈장들과 멋지게 차려입은 해군 제복을 눈앞에 들이밀자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린 눈으로 그것을 주시하던 소년은, 이내 그것이 자신이 조금 전까지 꿈속에서 보던 남자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허억…하는 긴 한숨을 쉬며 몸에 들어갔던 힘을 뺐다. 그러더니 곧바로 다시 잠들려고 하는 것을, 남자가 크고 아름다운 하얀 손으로 흔들어 깨웠다. "우…응…." "일어나 봐.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너에게 들어야 할 얘기가 있다." "무슨…파크라면 옆 천막에 있…." "아니, 너에 대한 얘기." "응…?" "방금 의사에게 듣고 왔다. 네가 치료받기 싫어했던 곳과 타박상 이외의 상처들에 대해." "!" 아직 남아있는 잠 기운 때문에 계속 영리함을 보이지 못하던 눈이, 에녹스가 결정적으로 뱉은 마지막 한 마디에 그 빛을 되찾고 번득거린다. 한 동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에녹스의 눈을 마주보던 라디는, 그 눈빛에서 진심을 읽고 포기한 듯 출렁이는 해먹에서 내려와 천막 안에 놓여 있는 간이 테이블에 와 앉았다. 뒤따라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은 에녹스는, 흥분한 듯 보이는 소년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교용으로 마련된 질 좋은 치즈와 코코아를 내놓았다.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딱한 소년은, 이내 굶주린 들개처럼 치즈에 달려들어 목이 막히는 것도 상관치 않으며 그저 음식을 넘기는 것에만 전력을 다했다. 보다 못한 에녹스가 소년의 팔을 붙잡고 코코아가 담긴 컵을 쥐어줄 때까지. "…그래. 동방의 소년 라디." "…나는 그런 것 몰라. 나는 그저 도빌 항의 라디일 뿐이다." "그래. 도빌의 라디." "……." 소년의 배가 어느 정도 찼을 거라 여길 즈음, 에녹스는 이제는 됐겠지 싶어 진정으로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첫 대화부터 순탄치는 않았지만. "이제는 슬슬 얘기해줘도 되지 않을까. 그 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은 무슨," "그리고, 그 남자가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 또다. 그 자에 대한 얘기만 꺼내면 소년은 경기라도 들린 듯 몸을 크게 떨며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본다. 그래. 마치 퇴로를 확보하듯. 눈앞의 존재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지, 짓이라니, 무슨 짓." "네가 지금 이런 반응을 보일 만한, 아주 나쁜 짓이겠지." "그!" "말해봐라. 내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 않나?" "어째서?" "뭐?" "어째서 나를 도우려고 하는데? 나는 당신의, 아무것도 아닌데." "……너는 귀중한 '보물'의 둘도 없는 친구니까. 말해봐.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도움을 준다고 약속하지." "…." 하. 보물의 둘도 없는 친구라. 구실 한 번 그럴싸하구나 에녹스. 에녹스는 스스로의 이해 타산적인 세리프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자신이 얼굴을 보고 소년이 저토록 겁을 내는 이유가 알고싶은 것이면서. 사실은, 단 며칠 새에 저토록 위험한 분위기와 향기를 품기는 연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면서. 겉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여 끝까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자신의 모습에 에녹스는 염증을 느꼈다. "…다 알고 왔다면서." "응?" 에녹스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자신이 모습에 회의를 느끼며 마음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긴 침묵을 끝내고 소년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에녹스는 저 상처 입은 입술의 피를 핥고 싶다, 고 생각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소년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미안. 뭐라고 했지?" "…의사한테 다 듣고 왔다면서. 그런데 왜 또 물어? 듣고 나서 대강 짐작했을 거 아니야?" "아…그 얘기인가." 물론 듣기는 했다. 비록 헤엄치느라 물에 번져 잘 보이는 않지만 소년의 바지에서 피가 비쳤다. 그런데 그 피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일반 타박상이나 창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허나 내게는 얘기하기를 꺼리는 것 같으니 제독께서 직접 설득을 해보시라, 라고. 일반 상처가 아니라니. 그럼 무슨 희망봉에만 있는 토속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에녹스는 의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까무러치기라도 할 듯이 놀라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저 남자와 관계된 일이다. 라는 것을. "그래…얘기해 봐라. 그 남자, 그 놈이 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그런 피가 났던 거니?" "알면서 왜 물어. 왜 자꾸 모르는 척 하는 건데!" 소년은 에녹스가 알면서 일부러 짓궂게 물어본다 생각하여 짜증을 내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에녹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의문이었고, 사실을 말하자면 소년의 발갛게 물든 얼굴과, 저번과 달리 몸에서 나는 것 같은 이상한 향내에 정신이 몽롱하여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든 탓도 있었다. "음…그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건가?" "……." 소년은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에녹스의 얼굴을 째려보았다. 저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맞는 것도 같고. "그럼…역시 너는 그 남자에게…." "그래!!!" 소년은 참지 못하고 두 주먹을 꼭 쥐고 소리를 질렀다. 에녹스 또한 남자의 악행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나 때문에 고문이라도 당한 거…." "지난 항해 기간 내내 나는 그 놈의 '여자'였다! 됐어!!!!!!!!!!" "!!!!!!!! 뭐라고?" " 당신이야말로 뭐라고? 고문?" 소년은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듯이 붉게 물든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에녹스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에녹스는 그런 소년의 눈을 탓할 생각도, 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자'였다고? 항해 기간 내내? 저 놈의, 기껏해야 자신의 레플리카인 놈에게, 안겼다고? 저 부드럽고 향내나는 몸을, 저 놈이 먼저 맛보았다고…?! 덜컹!! " 와앗! 무슨 짓이야!!" "그딴 놈이…감히…!" "이, 이것 놔 제독님! 뭐 하는 짓이야! 아, 앗!!" 쫘아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소년이 캠프에 들어와 에녹스에게서 받은 셔츠가 찢어져 나갔다. 라디는 자신의 옷들이란 하루도 안 되어 다 찢길 운명인가 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디가 당황한 그 잠시의 틈 동안에, 에녹스는 이미 라디의 몸에서 상의를 벗겨내고 하의에마저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 !! 뭐 하는 거냐니까!! 이것 놓아, 제독님!" "나보다 먼저 안다니. 이 몸을, 이 아름다운 몸을!" 에녹스는 소년의 말이 귀에는 들어왔으나 그 뜻은 뇌로 전달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상했다. 아까부터 소년의 몸에서 묘하게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은 했지만 점점 그것이 자신을 몽환 상태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에녹스였다. 몸에 있는 멍들이 전부 놈이 만든 키스마크로 보였다. 채찍에라도 맞은 듯 길게 나 있는 상처와 멍들은 놈이 만든 손자국인 것만 같았다. 견딜 수 없다. 이 몸을 누가 탐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아, 아얏! 이거, 놓으라니까!!!!!!!" 퍼억 쿵!!!! 의외로 잘 단련된 단단한 복부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빨을 세우려는 찰나, 소년의 주먹이 무아지경에 빠진 에녹스의 얼굴에 직격했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제대로 된 주먹을 맞은 에녹스는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까지 밀려났고, 얼떨결에 큰일을 당할 뻔한 소년은 천 조각이 된 셔츠를 움켜쥐고 그런 에녹스에게서 한 발이라도 멀어지려 손을 짚고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헉…헉…도대체…왜 이러는 거야!!" "……." "당신은, 당신은 그 놈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 놈이고 당신이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여자로 보여? 내 가슴이 여자의 것으로 보여? 이 납작한 가슴 어디에서 여자를 느끼고 이렇게 덤비냔 말야!!!" "…여자가 아니야……." "그래! 난 여자가 아니라고!!" "아니…너에게서 느끼는 것은 여자가 아니다……." "뭐라고?" 맞은 턱을 어루만지며 남자는 멍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왕의 보물." "제왕의 보물?" "그래. 제왕의 보물에서 나는 향기와 비슷하다." "…파크를 말하는 거야?" "아아." 에녹스는 의외로 꽤 시큰거리는 턱을 어루만지며 소년의 물음에 답했다. 안면을 이 정도로 정통으로 맞다니. 참으로 오랜만에 겪어보는 일이었다. "아까부터 너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가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제왕의 보물이었다. 저 파크라는 소년에게서 나는 냄새가, 너에게서도 나고 있어." "냄새라고?" 에녹스의 말에 소년은 자신의 팔이며 머리카락을 코로 내밀어 킁킁거렸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냄새인 법. 소년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에녹스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목욕은 매일 했는데." "아니, 그런 냄새가 아니고…흠. 제왕의 보물에게서 나는, 제왕이 될 자를 유혹하는 향이 있는데, 그게 너에게서 난단 말이다." "제왕을 유혹한다고?" "그래." "그 냄새가 나에게서?" "그렇대도." "어째서???" 나도 묻고 싶다. 라고 에녹스는 속으로 대답했다. 어째서 파크라는 소년, 즉 '제왕의 보물'인 소년에게서 나는 향기가 이 소년에게서도 나는 것일까. 하긴 그래서 처음부터 이 소년에게 관심이 갔던 것 같지만, 에녹스가 궁금한 것은. "그건 나도 알 수 없다…그리고, 왜 그 향이 파크라는 소년보다 너에게서 나는 것이 더 강한 지도 말이다." "에?" 그랬다. 파크에게서 나는,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고 왠지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그 향은 분명 이 라디라는 소년에게서 더 강하게 나고 있었다. 아니, 향이 맞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그저 왠지 이 소년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온 몸의 기관들이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가라, 접촉하라, 입 맞추라, 고 명령을 하는 것 같으니까. 그저 최음의 효과가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무슨 소리야. 그게 왜 나한테서 더 강하게," "글세. 내가 생각하기로는 아마 너희가 형제처럼 자랐다고 하니 함께 살면서 파동 같은 것이 옮겨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아…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얘기로도 어째서 그 파동이 너에게서 더 강하게 느껴지는 지는 설명되지 않아." "……나도 몰라." "그렇겠지. …아무튼." "!" 무릎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녹스를 보고 소년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안심하란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걱정 마. 지금은 정신이 돌아왔으니 아까처럼 짐승같이 덤비진 않을 거다. 네가 정 그렇다면 나가서 자도록 하지." "…이 천막은 당신 것이잖아. 차라리 내가 나가서 자겠어." "그 꼴로?" "당신이 만든 거잖아!" "쿡쿡. 그렇긴 하지만." 에녹스는 '그 꼴'로 밖에 안 보이는 소년의 갈기갈기 찢긴 옷가지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저게 자신이 한 짓이라니. 모든 귀부인들에게 진정한 신사로 불리우는 자신이, 저런 짐승 같은 짓을. 찢긴 옷가지 사이로 소년의 마른 몸과 그 마른 몸에 적당히 붙은 근육, 부끄러운 듯 가리고 있는 가슴의 앙증맞은 열매. 저 열매에 매달려 그 달콤한 과즙을 먹고 싶다. 저 작은 열매를 빨아서, 자신의 타액으로 그 색이 더욱 더 탐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조금 더 아래에 있는, 더욱 더 탐스러운…! "제독님?" "!!" 웃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라디가 불안하여 에녹스를 부르자 남자가 핫, 하고 놀라며 적나라할 정도로 집요했던 시선을 라디의 몸에서 거뒀다. "…괜찮아? 역시 내가 나가는 것이," "아니, 아니다. 몸도 안 좋은데 쉬어야지. …옷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구나.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아니, 됐어. 어차피 슬럼에서 살 때는 제대로 된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는걸. 뭐 사실 윗도리쯤 안 입어도 상관없지. 사내아이인걸." "입어라!" "!" 갑자기 화를 내는 에녹스에게 놀란 라디는 고개를 들어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인지 민망해하는 것인지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아름다운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서 옆선만을 보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한 탓에 옆얼굴만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뭐, 뭐야.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아무리 나라도 정말 상의를 벗고 다니겠어?" "…쉬어라. 난 나가겠다." "잠깐만 제독님." 더 이상 소년을 보고 있다가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 서둘러 나가려는 에녹스를 라디가 붙잡았다. "뭐지?" "…옷." "응?" "옷…찾아주고 가면 안 되나?" "아아."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자신이 발기발기 찢어놓은 것이니 옷을 내놓고 가라는 얘기였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해군의 애드미럴(장군)에게 참으로 무엄하다 할 만한 일이었지만, 에녹스는 자신 또한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소년의 말에 따라 개인용 시 체스트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 소년에게 던져 주었다. "고마워." "별 말을. 내가 한 짓 때문에 찢어진 건데." "……." 이제는 정말로 할 말도 없고 라디가 자신을 붙잡을 일도 없을 거라 여긴 에녹스는 더 이상의 미련이 남기 전에 이 천막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다. 그런데. 왜 자신의 몸은 이성을 배반한 채 이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일까. "저…제독님?" 소년이 불안한 눈빛으로 에녹스를 올려다봤다. 이미 전적(?)이 있으니 들고 있는 셔츠의 안부가 걱정이 된 것이겠지. 저 눈을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눈물을 머금고 두려움에 떠는 검은 눈동자를 보고 싶기도 하다. 무엇이 진심인가. 무엇이, 자신의 마음의 방향인가. "그러고 보니." "?" 간신히 소년의 몸을 다시 흙바닥에 쓰러트리려는 자신의 의지를 꺾은 에녹스는 화제를 전환하려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손안에 쥔 흰 셔츠를 놓아주자 그제야 소년이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 내리며 셔츠를 몸에 걸친다. 그 몸의 선이 가려지는 것이 아쉽다고, 에녹스는 잠시나마 생각했다. "너…그러면, 그 남자에게 그러니까. 폭행을 당해왔다는 거지." "! …그렇다고 말했잖아." "그래…그랬지. 그렇다는 건, 그 놈도 역시 제왕이 될만한 자질이 있다는 것인가…." "제왕의 자질이라고?" "그래." 궁금해하는 소년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에녹스는 쓰러진 테이블의 의자를 바로 세워 다시 앉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에게선 제왕의 보물과도 같은 어떤 파동이 느껴진다. 사실 느낄 수는 없지만 내 몸이 반응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이것은 네가 파크와 함께 살아온 세월 때문일 테고, 그것 때문에 내가 아까 그 같은 실례를 저지른 것이기도 하지." "……." "하지만 이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기록서에 보면, 보물은 제왕을 끌어들이며 갈구하게 한다고 했다. 즉, 너에게서 풍기는 파동을 느끼고 그 남자가 반응한 것이겠지. 그러므로, 그 놈 역시 나와 같은 제왕의 피가 흐른다는 증거다. 기분 나쁘지만." "그런…건가."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해적 놈이 왜 너를 살려뒀겠나?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너 정도의 소년은 노예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어. 그 놈 정도의 재력과 능력이라면 말이지." "……." 약간의 사감이 섞인 에녹스의 진언(眞言)에 소년은 어찌 보면 상심인 듯, 또 어찌보면 분노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표정이 자신이 의도한 것과 맞아 떨어지는 것에 흐뭇해하며, 에녹스는 확인사살을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만약 보물의 파동이 느껴지는 자를 안는다고 하면 그자처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자처럼, 이라고?" "그래." 이제 다 왔다. 조금만 더 하면. "상대가 상처입고 아파하는, 그런 행위는 말이야." "!!" 확, 하고 소년의 맑은 피부가 다시 붉어지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을 회상하는 듯 했다. 아마도 그 자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는 자신의 작업은 성공한 것 같다고, 에녹스는 마음 속으로 미소지었다. "어때…그 자가 밉지 않나?" "…당연한 것 아냐? 그 자는 나를, 나를." "아아. 말 안 해도 알 수 있다. '여자'로 다뤘다고 했지." "아니." "아니라고?" "그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자식의 '여자'도 아니었어. 그저 놈의 욕망의 배출구일 뿐이었지. 그래. 그 놈은 나를 그런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일," 라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남자와의 악몽 같은 지난밤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반항하는 자신을 가볍게 눌러버리는 남자. 아프다고 하는데도 그 아픈 곳을 더욱 벌리며 억지로라도 들어오려는 남자.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끊임없이 출입하는 남자의 흉기. 그리고. "…라디?" 이름조차 갖지 못한, 어두운 곳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공허한 눈을 한. 지나치게 아름다운. 그 남자. "라디?" 대답을 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그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남자와 같은 얼굴로. 그 남자와 같은 목소리로. 허나 그 남자와 이 사람의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눈일 거다. 그 놈은, 그 쓸쓸한 눈을 한 몹쓸 남자는 저런 밝은 눈이 아니었다. 색은 눈앞의 해군 제독님처럼 밝은 푸른색이었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그 눈은 해군 제독과는 달리 쓸쓸함과 서글픔, 고독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남자의 푸른 눈에서는 '죽음'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라디 자신, 십 칠 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동안 죽음이란 것은 느껴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눈에서는 왠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런 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느끼기에 그랬을 뿐이다. 허나 그것도, 블랙 버드호를 탈출하기 전 들은 얘기로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남자는, 정말로 '죽음'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쓸쓸해 보였던가. 그래서 그렇게 슬프게도 보였던가. 그래서 그렇게. 그래서 그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던가. "이것 봐. 라디!" "…에?" "뭘 그리 생각하고 있지? 그 남자의 악행이 너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는 가히 상상이 가지만,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너의 안정이나 정신 건강에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 …아아. 그래. 그렇군…." 악행이라. 그래. 그 자는 자신에게 잔인하고 가혹한 짓만을 행했다. 그로 인해 아파하고, 분노하고 증오한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이상하다. 왜 그 자의 쓸쓸한 눈동자가 자꾸 생각나는 것일까…? 어째서 그 자가 자신을 비열한 눈으로 바라보며 희롱한 것이, 여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생각이 나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 주던 의외로 부드러운 손길이라던가, 자신을 볼 때의 쓸쓸한 눈이라던가 하는 것들만이 기억에 남아, 남자의 부정적인 면을 생각하며 증오하려는 자신을 흔들리게 한다. "그래. 그 자는 너를 이렇게 아프게 만든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못된 놈. 내가 그 놈을 제치고 반드시 제왕의 자리에 올라 해적이란 해적 놈들은 전부 싹쓸이를 해버릴 테다." 아. 이 남자와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이 남자 때문에, 더더욱 비교가 되며 남자의 슬픈 얼굴들이 떠오른 탓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축복 받으면서 한 나라의 해군 제독이 된 남자.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채 버려져 목숨마저 빼앗길 뻔한 가련한 남자.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가.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이란 말인가. 저 남자는 그 자가 나쁜 놈이라 욕하지만 그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그 자는, 과연 정말로 나쁜 사람일까? "라디?" 눈앞의, 소위 '선인'인 남자는 그 자를 미워하라 말한다. 나쁜 짓을 했으므로, 가혹한 짓을 했으므로 미워해 마땅하다고. 그러나 정말 알 수 없다. 왜 이렇게 자신이 도망쳐 온 자의 공허한 눈빛이 자꾸 뇌리에 머무는지. "왜 그러지. 설마, 내가 제왕이 될 거라는 걸 못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다만." "다만?" 다만 그 자의 눈빛이 악인의 것이 아니어서, 라고 말하면 이 남자는 비웃을 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니야 제독님. 그런데, 자야하지 않아?" "아아. 그렇지. 내일은 일찍 모나쉬 마운틴으로 출발해야 하니까." "그럼…." "아아. 축객령인가. 알았다. 너도 그 무시무시한 해적선에서 탈출하느라 피곤할 터이니 이만 자리를 비켜주도록 하지." "……." 그 자신의 숙소임에도 불구하고 한낱 슬럼가의 소년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제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디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혼란스러웠다. 왜 그 자를 미워할 수가 없는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남자를!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런 녀석에게, 흔들려서는 안 되는데. "잠깐, 제독님!" "응? 또 뭐지? 옷은 줬는데." 막 천막을 제치고 나가려던 차에 다시 또 자신을 호출하는 소년에게 에녹스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용건을 물었다. 아마 이번에도 별 것 아닐 거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음 속으로 내심 소년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하던 중에 반가운 호출이었기 때문이다. "…나랑." "너랑?" "나랑…같이 잘래?" "!!"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소년의 향기에 몽롱해져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추태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이제는 환청마저 들리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지금 그 말이…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아마도." "지금 내 상태론, 절대 '같이 잔다'는 것 만으론 만족할 수 없어." "아아." 기회다, 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리고 라디 또한, 자신이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측근인 스네이크에게 그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측은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저 남자를 통해 알고 싶었다. 저 남자와의 접촉을 통해 느끼고 싶었다. 저 자가 옳은 거라고. 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일 거라고. 뚜벅…. '그 자'가 아닌,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그 사람이, 누구보다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애드미럴, 해군 장교 에녹스 리엔 팰러딘이.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막아도 막아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던, 같은 얼굴의 사내와 달리 자신의 의지로 인해. "라디……." 이 사람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도 자신의 의지였다. 또한, 이 사람이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손을 뻗어오는 것도, 그 손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어 내리는 것도 저 입술이…확실한 의지를 담고 자신의 입술을 향해 다가오는 것도. 저 붉은 혀가…자신의 입술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라디……." 타앙 !! "으악!!" "!!" "무슨 소리지?" 에녹스의 붉은 혀가 라디의 수줍은 혀와 막 닿으려는 찰나, 에녹스의 천막 밖에서 총성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굉음과 함께,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쓰러지는 소리. 습격이었다. "…칫." "제독님. 나가 봐야," "어찌된 일인가! 무슨 상황이야!" "예, 제독. 밖에서 제독 숙소의 경비를 서던 해가튼이 당했습니다. 소총입니다. 놈들은 소총까지 가지고 있는 정예 부대인 것 같습니다." "일개 해적 나부랭이에게 정예 부대는 무슨! 어차피 나포한 상선에게 갈취한 것일 테지! 로딘을 불러라! 그리고 작전 참모도 깨워! 놈들, 오늘 하루 정도는 섬에 적응하느라 조용히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더 멍청한 놈들이 아닌가. 이 쪽은 이미 진열을 갖추고 현지 적응까지 마친 부대이거늘!" 에녹스는 막 라디와의 접촉을 이루려던 차에 타이밍 좋게 방해를 당하자 작게 욕설을 뱉고는 이내 휙, 하고 라디에게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원대한 결심을 하고 에녹스와의 거사(?)에 임했던 라디는 순간 목표를 잃은 긴장감에 허탈하여 홀로 남은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는 확 하고 얼굴을 붉혔다. '내가 무슨 짓을!' 잠시 미쳤었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잠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빙의(憑依)되기라도 한 것인지. 중간에 방해를 받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방해를 한 존재 또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남자. 그 남자가 왔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아직 그 남자의 체취를 잊기도 전에. 탈출한 자신의 노예와 보물을 되찾기 위해서.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3) 제11장 검은 새의 역습 "피해 상황은?" "아직까지는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한 해가튼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의 그 피격을 제외하고는 공격 의사가 없는 것인지, 더 이상의 접촉은 없습니다." "허점을 찌르고 이 쪽의 반응을 즐긴다는 것인가. 뱀 같은 놈들. 한 번 문 쥐를 구경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거냐." 상황 보고를 하고 있던 페티 오피서 밀런 상관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대 해적 블랙 버드라 추정되는 대상에게 기습을 당한지라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당연할 테지만, 아무래도 그것과는 달리 또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있는 듯 했다. 평소의 상관이라면, 해적에게 기습을 당한 일로 저 정도까지 흥분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이…하필이면 그 시간에…설마. 어디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건가. 내 천막을 지켜보고 있었다던가." 심지어 해적이 자신의 숙소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어찌된 것일까. 어떤 무서운 적을 만나더라도 냉정을 잃지 않고 본연의 목적을 잊지 않는다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선은 수색조를 편성해 일대를 샅샅이 뒤지도록 해라. 꽤 넓은 곶이긴 하지만 그래봤자 반도에도 속하지 못하는 작은 섬일 뿐이다. 우리의 병력으로 뒤진다면 하루 정도에 수색이 가능할 거다.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수색해라. 놈들을 잡아서 해적들의 최후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말 테다!!" "예스, 써." "그리고 주의할 점! 놈은 우연스럽게도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난 도빌 항에서의 전투로 모두들 그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흔들리지 말아라! 영광스러운 아르센 해군 제복을 입지 않은 해적 따위를 나와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각 중대의 병사들에게 이 사실을 꼭 알려두도록 해라. 행여 놈의 얼굴 때문에 소중한 군의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알겠나!" "예스, 써!!" 상관의 명을 받은 연대장 및 각종 하사관들은 즉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작전실로 마련되어 있는 천막을 줄줄이 빠져나갔다. 밀런 소위는 상황 파악을 위해 작전실에서 문서 및 작전도(作戰圖)를 형성하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관의 평소와 다른 이상행동들을 남김 없이 관찰할 수 있었다. "놈…감히. 감히 나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들다니. …를 먼저 탐한 것도 모자라, 보물까지 차지하려고? 그렇게 둘 순 없지. 내 너를,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암. 내가 내 어머니가 하지 못했던 일을 완성해주마.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그 얼굴을 디밀지 못하도록 해주리라." 이상한 모습의 상관은 이제는 혼잣말까지 하며 팔짱을 끼고 작전실을 둥글게 배회하고 있었다. 밀런은 왠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장난기와 바람기가 좀 넘치기는 해도 누구보다 믿을 수 있고 뛰어난 상관이었는데, 저 모습은 흡사…뭐랄까.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인 것처럼. 그래, 꼭 그런 것처럼 화가 난 얼굴이었다. 상관이 하는 혼잣말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꼭 틀린 내용도 아닌 것 같았고. "좋아…무슨 수를 쓰든,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놈에게서 그를 빼앗고 말 테다. 아니, 어쩌면 마음은 이미 내 것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후후후……." 이제는 웃기까지 한다. 밀런은 정말로 두려워졌다. 지금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용맹했던 자신의 상관은 실성한 사람들이 한다는 행동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까. 이 작전실 안에 상관과 자신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버겁다고 느꼈을 때. "제독! 어찌된 일입니까! 보초병이 당했다면서요." "아아. 로딘인가."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바로 에녹스 제독의 부관 로딘 해밀턴 장군이었다. 그는 언제나 에녹스 제독의 좋은 천적이 되어 주었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위치에서 제독이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도 또한, 밀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예. 잠시 참모들과 산책을 하던 와중이었는지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습격이라니요. 대체 어떤 놈들이. 블랙 버드 놈들입니까." "그래. 그런 것 같다. 정확한 것은 저격수 놈을 잡아봐야 알 수 있겠지만, 거의 십중팔구 그 놈의 소행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조악한 짓을 할 놈은, 그 놈들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로딘이 등장하자 에녹스는 본래의 해군 제독으로 돌아와 자신의 부관과 함께 해적들에 저항할 방법을 모색했다. 다행이었다. 계속 저런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평소의 '태양 제독'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습격을 한 괘씸한 해적을 소탕하는 일만 남았다고, 그것은 아마 오늘밤이면 끝나고 동료들과 가뿐히 럼주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아르센 해군 부대의 페티 오피서 밀런은 생각했다. 물론 그 예상이 틀렸다는 것은, 바로 다음날 다시 빈틈을 노리고 습격해 온 해적들 덕분에 알 수 있었지만. * * * 희망봉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가고 이틀째. 에녹스의 부하들은 밤새 계속된 수색과 또 다른 기습에 대한 긴장으로 잠을 설친 채 그다지 상쾌하지 못한 아침을 맞았다. 아마도 평소라면 뒤져도 나오지 않는 적에 대해 다른 방책을 모색하고 피곤한 대원들을 다시 캠프로 불러들였을 상관이었지만, 어제는 귀대하라는 명령도 없었기에 대원들은 밤새 어디 있는 지도 모를 해적들을 찾아 밤새 숲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수색에서 빠진 몇몇 대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병든 닭처럼 아침으로 나온 돼지고기에 포크 대신 자신의 코를 찌르는 사태를 연출했고, 졸지 않는 다른 병사들 또한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최고 상관 덕분에 그리 즐거운 식사시간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래서, 놈들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잡듯이 섬을 뒤졌는 데도 나오지 않았단 말이지." "예. 보기보다 꽤나 영악한 놈들입니다. 아마도 한 곳에 밀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잠복하기 좋은 곳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듯 합니다. 연락책을 따로 두고서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쾅!! 수색조의 총 책임자인 이지 소위의 보고를 받던 도중 들고 있던 청동 와인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상관의 횡포에 식사를 하던 100여명의 대원들은 놀라 씹지도 않은 베이컨을 꿀꺽, 하고 식도로 넘겼다. 아마 이대로 라면 배 의사를 찾아가는 식체 환자들이 부지기수로 출현할 지도 모른다. "말이 되니 그 많은 수색조가 찾아도 검은 독수리의 꼬리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흥분하지 마십시오 제독. 당신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언제나처럼 옆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는 로딘 덕분에 식체 환자는 반으로 줄었다. 대원들은 다시금 그에 대한 존경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그가 상관의 기분을 풀어주기만을 바랬다. "나다운 게 뭔데! 그리고 검은 독수리는 개뿔! 그딴 자식에게는 검은 피래미 정도가 딱 맞는 별명이라고!!!" "그 놈의 정체를 알기 전 블랙 버드를 검은 독수리라 처음 부른 것은 당신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 큭! 로딘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그럴리가요. 다만 제독께서 흥분하여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부하로써 충언을 드렸을 뿐입니다." "크윽." "진정하시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병사들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상관인 당신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답지 못합니다. 확실히요. 평소보다 신경질적이기도 할뿐더러 침착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해요. 더할까요 제독?" "…충분한 것 같네 로딘." "분부대로." 대단하다! 대원들은 마음속으로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 기분 나빠 보이는 최고 지휘관에게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다니. 대원들은 평소에 대머리 문어라고 로딘을 놀렸던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머리를 맑게 하시고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오늘은 희망봉에 오르는 날입니다. 제왕의 산 모나쉬 마운틴으로요. 놈들은 분명히 습격해 올 테고,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야합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제독. 지나간 적을 돌아보기보다 앞으로 올 적을 대비하십시오." "…그래. 고맙다 로딘."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의 대화는 일단 끝이 났다. 에녹스의 얼굴은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의 냉철함은 살아있는 얼굴로 돌아왔고, 로딘은 계속 그의 곁에 붙어서 그가 그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날카로운 일침을 날려줄 것이다. 대원들은 그제야 안심해서 들고 있던 포크를 다시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대비해서는 많이 먹는 자가 이긴다. 전장에서의 생존 법칙이었다. 그 시각, 대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 싫어하고 보안상의 이유로 따로 식사를 하는 파크와 함께 라디도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하는 질 좋은 식사는 기분을 좋게 했지만, 보름 여를 하루에 한끼만 먹는 생활을 해서인지 위가 음식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디는 친구와의 대화로 대신 배를 채우기로 했다. "그럼 넌 어제의 총성을 듣지도 못하고 그냥 잤다는 거야? 잠꾸러기 같으니라고." "이건 잠꾸러기와는 계제가 달라. 난 단지 아빠를 닮아서 잠귀가 어두울 뿐이라고. 엄마가 그러셨어. 우리 아버지는 항구 바로 옆에 살면서 뱃사람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익숙해져 옆에서 아무리 대포가 터져도 일어나지 않던 분이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하하하. 너희 아버지 혹시 귀에 이상이 있으셨던 건 아니고?" "그건 아니야. 듣기에 주무시다가도 엄마가 '식사 다 됐어요'란 말만 하면 거짓말처럼 번쩍, 하고 눈이 뜨여졌다고 하니까." "와하하! 그럼 너 맞네. 파크 너, 아무리 자다가도 음식 냄새만 나면 눈이 뜨여지는 녀석 아니야." "글쎄 유전이래도." "하하하하하……." 어젯밤의 어색함은 하룻밤이 지나고 나자 마치 거짓말처럼 깨끗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예전처럼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라디와 파크는 둘 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로의 식판을 들고 마주앉아 어젯밤에 다 하지 못한 담소들을 나눴다. "…그나저나…." "응?" "엄마는…어떻게 되셨을까." "아…." 대화를 하던 중 나온 부모님의 일화에 엄마가 생각난 듯 했다. 라디는 파크의 갑자기 어두워진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소년들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숨이, 이 세상에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잘…계실 거야. 옆집 코니네 아저씨도 계시고. 그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좋아했잖아?" "그래.그 아저씨 우리 엄마에게 흑심을 품고 늘 꽃이며 고기 따위를 던져주곤 했지. 가슴에까지 털이 숭숭 난 털보 아저씨 주제에. 흥." "쿡쿡. 그렇지. 정말 그 아저씨에게서 코니 같은 예쁜 애가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니까." "사실 뭐 코니도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 뭐. 라디 너의 첫사랑이라고 해서 인정해 주긴 했지만 그 아이 헤픈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니야 파크. 코니는 헤픈 아이가 아니," "?" 아니라고 말하려던 라디는 순간 코니와 에녹스 사이에 있었던 해프닝을 생각하고는 소녀를 변호하려던 입을 닫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안기어 신분상승을 원하는 소년의 욕망이 결코 헤프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파크에게 말해봤자 좋은 얘기를 들을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에녹스 제독." "어, 어어? 어떻게 알았지?" "? 무슨 소리야?" "아…아니야 아무 것도. 잘못 들었나 봐. 제독이 왜?" 코니와 에녹스 제독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기라도 하는 건가 해서 깜짝 놀랐지만 그게 아니었던 듯 했다. "흠…녀석. 저기 말야, 라디." "응?" "에녹스 제독…어떤 것 같니?" "어떤 것 같냐니?" "그게…." 어떤 점을 물어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파크에게 되묻자 대답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내리깐 채 약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 뭘까. 이 시츄에이션은. "저기 말이지. 그게." "? 그래. 얘기해 봐 파크." "그, 내가 말이야. 그거잖아?" "뭐가?" "제왕의 보물인지, 뭔지 하는 거 말야." "아아." "그래서 말인데, 에녹스 제독이 말하길, 기록서라는 것에는 그렇게 쓰여있다. 보물은 제왕을 끌어들인다고. 그래서인지 나한테서 제독을 끌어들이는 향기 같은 것이 난다는 거야." "아아." 그 얘기라면 나에게도 어제 했어, 라고 라디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으응."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군, 하며 라디는 끝까지 인내심을 잃지 않고 코코아를 마시며 파크의 말을 기다렸다. "나 어쩌면, 제독을 좋아하는 지도 몰라." "푸핫!!!!!!!!" "괜찮니? 여기 이걸로 닦아." 마시고 있던 코코아가 코로 넘어가 눈물이 찔끔 났다. 파크는 서둘러 바지 속에 들어있던 깨끗한 천을 라디에게 내밀었고 라디는 그것을 받아 얼굴 여기저기에 튀어 있는 코코아를 닦아냈다. 놀랐다. 진심으로. "콜록, 콜록…콜록! 파크…뭐라고?" "안 되는 거겠지? 나를 납치해 온 남자니까. 엄마도 걱정끼치게 하고." "아니, 그건 둘째치고." "그럼 뭐?" "아니, 그게 그…남자잖아?" "그게 어때서? 어차피 파라이아 궁에서 시동 한 둘쯤 안 두고 있는 남자 귀족은 없는걸." "아니, 그치만." "?" 그렇게 간단한 문제던가. 라디는 왠지 파크의 얘기에 충격을 입은 자신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대게 이런 경우, 자신과의 연계성을 따지기 이전에 서로 남자라는 사실을 문제삼는 것이 우선 아닌가? "그래서 있지. 내가 제왕의 보물이라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제왕이 될 에녹스 제독님에게 끌리는 걸 느껴. 이 느낌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분과 만나면 내 심장이 뛰고 이상하게 몸이 달아올라. 이거, 그게 맞는 거겠지?" "그거라니?" "사랑 말야, 사랑." "콜록." 라디는 십 칠 세라는 나이를 먹고도 여지껏 첫사랑 한 번 못해본 순수한 파크가 부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걱정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늘 집에서만 생활하고 밖의 자극적인 것들을 경험할 기회가 없던 아이였다. 그런 파크에게 한 번 보기만 하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미모의 해군 제독이라는 것은 너무도 큰 컬쳐 쇼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동경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일 또한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고. 하지만 파크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 굳게 믿으며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친구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까. 뭐라고? "저기, 파크." "응. 응." 파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라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순진한 눈에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하는 걸까. 어젯밤에 네가 사랑한다는 그 남자가 나를 반 강간했다고? 옷을 발기발기 찢어 젖꼭지며 하는 부끄러운 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고? 그도 아니면, 아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너무도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러니까, 남자간의 사랑에는 꽤나 큰 아픔이 존재해." "아픔이라고? 어떤?" "어떤이라니 그건…." 파크에게 자신이 겪은 끔찍한 아픔과 기분들을 전해주기 위해 일단 말문은 열었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사실대로 '그 곳은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라서 처음 하는 날에는 너는 아파서 기절해 버리고 말 거야!' 라던가, '아침에 그걸 긁어내는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 지 아니? 잘 긁어지지도 않아서 손가락이나 천을 깊이 넣어서 긁어내야 하는데 안 그래도 상처 입은 그곳을 긁어내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데!' 따위의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지." "어서 말해봐? 어떤 아픔인데? 아, 혹시 주위의 시선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걸 말하는 거니?" "그, 그래! 그렇지! 그것은 굉장한 아픔이거든. 정말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반응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겠어?" "흥…그럴까?" "뭐?" "들어봐 라디. 그 사람은 왕의 신뢰를 독차지하고 있는 떠오르는 귀족이고 해군들의 총 지휘자야. 게다가 나는 '제왕의 보물'이라고? 제왕의 보물은 제왕의 평생 반려가 되야 할 텐데, 누가 그와 붙어있는 날 보고 뭐라고 하겠어? 안 그래?" "제왕의 보물이 평생 반려라고? 누가 그래?" "그냥 내가 생각한 거야. 이름도 제왕의 보물이잖아? 그렇다면 늘 제왕의 곁에 서서 빛나는 보물이 되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니? 안 그래?" "하아." 아무래도 파크를 본 궤도의 사랑으로 올려놓는 길은 포기해야 할 듯 싶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 생각을 하고 전설에 대해 해석까지 하는 데야. 라디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평소 아픈 거라면 질색을 하고 의지가 약했던 친구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런데 말이야 파크…너 그거 알고 있니?" "뭘?" "네가 만약 에녹스 제독을 좋아한다고 한다면, 그냥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아닐 거 아냐?" "뭐? 아, 아마…그렇겠지만…." 역시 깊게 생각 안 하고 있었군. 라디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친구의 얼굴을 보고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야. 남자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부위가 어디인지 알고는 있어?" "아니?" 이런. 완전 어린애가 무턱대고 '나 저 사람이랑 결혼할래요!'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라디는 집에만 틀어박혀 자란 덕에 너무도 순진하게 자란 친구의 모습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잠깐만 파크." "? $^&^*&$^??????? 라, 라디! 뭐 하는 거니!! 지금 이런 장난할 때야!? 남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남자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곳이, 바로 여기야." "뭐?" 라디는 말로 하는 것보다 이 쪽이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앞에 놓인 테이블을 건너 파크가 앉아있는 맞은 편으로 건너왔다. 그리곤 곧바로 소년의 작은 엉덩이 사이의 비밀스러운 홈을 노크. 파크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보고 말하는 라디의 모습에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여기?" "응. 거기." "그치만 여기는." "그래. 배설기관이지. 그치만 남자는 여자처럼 들어가는 데가 없으니까. …뭐 나도 경험은 없지만 그렇다고 하대." "누가!?" "어…어, 블랙 버드호의 해적들이." "아…." 라디는 스네이크에게서 들었던 부끄러운 정보들을 파크에게 알려주며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어서 빨리 이상과 현실의 갭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정보를 더 추가했다. "게다가…." "또 있어?" "무지무지하게…아프대." "어디가?" "어디긴." "…? 아." 라디가 말하는 부위가 어디인지 짐작을 못하던 파크는 라디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향하다 그 부위가 어디인지를 눈치챘다. 그리고, 더 이상은 붉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그, 그렇게 아프대?" "그럼. 정말로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라고. 너. 아침에 일을 볼 때 혹여 조금 큰 것이 나오면 거기가 아프지 않니?" "응, 조금." "그것보다 백 배쯤 아프다고 생각하면 돼." "백, 백 배나?" "아니다. 대략 이백 배쯤 되나." "히 ㄱ." "생각해봐. 너, 코니네 아저씨의 물건 봤지? 그만한 게 그 작은 곳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해보라구. 게다가, 무지무지하게 딱딱하기도 하다구? 너, 그게 밀고 들어올 때의 느낌이 얼마나 끔찍한 지 알기나 해? 그건 이 세상 어떤 경험보다도 끔찍하고 기분 나쁜, 게다가 아프기까지 한 경험이라구." "히에엑 무섭다." 사실, 비록 동성간이라 할지라도 방법만 잘 채택하면 그다지 아프지 않고 서로간에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소년은 자신이 겪은 경험이 전부라 생각하여 자신의 친구에게 있는 그대로를 알려줬다. 그 끔찍함을 알아야만 친구가 자신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치? 그러니까, 남자간의 사랑이란 거 가볍게 생각할 게 아니라구. 절대." "그럼 귀족들의 시동들은 어떻게 그런 아픈 걸 참고 견디는 걸까?" "걔들이야 신분 상승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애들이니까. 그런 아픔이라도 참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그렇구나아…." "그래. 그러니까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고," "그런데 라디." "응?" "어찌 그리 잘 알어?" " 어, 어엉?" "굉장히 세세하게, 잘 알고 있네? …꼭. 겪어본 사람처럼." "뭐, 뭐라고!?" "? 왜 그렇게 놀래? 꼭 정말로 그런 것처럼." "무슨 소리야!! 나는 단지, 그,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서!!"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네가 흥분하니까 이상하잖아. 꼭 네가 말한 것들이 네가 겪은 것처럼…." "아니야!!!" "…라디…?" "제길." 라디는 흥분한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장난으로 하는 파크의 말에 흥분해 화를 내는 모습이라니. 이보다 꼴불견이 또 있을까. 도대체 왜 저 남자와 관계된 일에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지. "괜찮아 라디?" "아아. 화내서 미안해 파크." "나야 괜찮지만…네 뜻은 잘 알았어." "응?" "네가 그렇게까지 남색을 싫어할 줄은…너에게 상담한 내가 잘못이야. 혐오감을 줘서 미안해." "파, 파크?" "하지만 에녹스 제독에 대한 내 마음을 접기는 힘들 것 같아…미안해 라디. 그래도 다시는 너에게 이런 얘기해서 괴롭게 하지 않을게." "파크.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지? 분위기가 왜 이래?" "!!" "에녹스 제독님!!" "그래. 화기애애해야할 친구들의 식사 분위기가 왜 이러는 거지? 설마, 싸우기라도 한 건가 너희들?" 라디가 뭔가 큰 오해를 하며 슬퍼하는 파크에게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을 때, 천막을 제치고 이 오해의 주범인 아름다운 은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바로 방금 전까지 파크가 열렬히 고백하고 있었던, 아르센 제국의 해군 제독 에녹스 리엔 팰러딘이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 라디?" "아아." "…?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 식사는 맛있게 했나? 파크, 라디." "네." "뭐 그럭 저럭." "라디!" 솔직히 슬럼에서 먹던 것과, 바로 며칠 전 블랙 버드호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지만, 라디는 가족인 파크의 일 때문에 에녹스의 모든 것이 곱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그의 부하가 마련한 이 식사까지도. "저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로군. 그래.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나? 해상 생활이란 것이 메뉴가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섬엔 과일 열매들도 있으니 말해봐라. 내 쿡에게 말해놓도록 하지." "제독님, 그럴 필요는." "그래. 그럴 필요 없어. 안 그래도 130여명의 식사를 마련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쿡인데, 괜히 일을 늘릴 필요는 없지. 그냥 내 식사는 하루에 한 번으로 족하니까 안 줘도 된다고 해." "하루에 한 번이라고? 그렇게 먹었다간 체력이 버티지 못할 텐데?" "블랙 버드호에서 매일 그렇게 먹었기 때문에 지금은 위가 그렇게 굳었어. 천천히 늘려갈 거야." "그런 잔인한 짓을!" "그 사람들이 너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야 라디? 이렇게 때리기도 하고 밥도 제대로 안 주고?" "그렇다니까. 난 어차피 죽일 예정이었던 노예니까. 괜히 식량 축내서 뭐 하냐? 그냥 부려먹을 수 있을 때까지만 부려먹고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면 그만이지." "라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사실인걸." 뭐, 중간에 갑자기 조금은 쓸모 있는 선장용 침대 노예라는 옵션이 더 붙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고 라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정말…나쁜 놈들." "그래 파크. 그 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란다. 그러니 내가 빨리 제왕의 보물을 찾아서 그 놈들을 모조리 카리브 해안에서 쫓아낼 거다." "네 제독님." 에녹스는 마치 라디에게 들으라는 듯이 라디의 눈을 보며 당당히 블랙 버드의 험담을 했다. 물론, 사람이 방심한 틈을 타서 총을 쏘는 짓은 절대 착한 사람이 할 짓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라디는 왠지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한 에녹스의 눈빛과 말이 싫었다. 이것 또한 자신의 친구를 꼬여낸 남자에 대한 반감인 걸까. "그러니 한 시라도 빨리 모나쉬 마운틴으로 가서 전설을 풀어봐야지. 그곳에 진정한 제왕의 보물이 묻혀있다고 하니 어서 빨리 가서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보물을 찾아야 한다. 라디. 너도. 넋 놓고 있지 말고 어서." "아…응…." "파크. 준비됐니? 지금부터 모나쉬 마운틴을 오른다. 조금 힘들지도 모르니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렴. 모나쉬 마운틴은 의외로 험하고 높은 산이라고 한다." "네." "응…." 두 소년의 대답을 들은 에녹스는 천막을 나가 부하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것저것 명령하느라 다시 이곳에 들어올 여유는 없는 듯 했다. 결국 파크에게 설명할 기회를 놓친 라디는 별로 상관없다 생각하여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그나마 없는 짐을 챙겨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가자 파크." "그래 라디. 신발을 신기전에 발을 싸 둬. 그냥 신고 갔다간 물집이 잡히고 많이 아플 테니까." "그래. 너도." 이리하여 그들은 오랜 기간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진정한 제왕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제왕의 산 모나쉬 마운틴으로 향하게 되었다. 두 소년 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기도 전에. * * * "와, 저것 봐 라디!! 저 꽃은 대체 이름이 뭘까?" "글쎄." "저건 희망봉에서만 서식하는 야생초의 하나로 뱀꽃이라고 한다. 뱀들이 자주 숨어있는 꽃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는군." "앗, 정말! 저기 뱀이 있다. 라디! 저것 봐! 뱀이야. 나는 처음 봐!" "응." "방울뱀이라는 거다. 저기 꼬리에 방울같은 것을 매달로 소리를 내는 것이 보이지. 조심해라. 물리면 즉사를 할 수도 있는 맹독을 가진 뱀이야." "어이쿠. 무섭구나." "후후." 생전 처음으로 집밖에 나와 신기한 경험을 하는 파크는 이 원정이 모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라디 역시 밖으로 돌아다니며 파크 대신 돈을 벌긴 했지만 이런 신기한 자연과 동식물들은 라디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파크 만큼 유난을 떨며 좋아하진 않았지만 라디 역시 처음 보는 세계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희망봉은 워낙이 넓은 바다에 외떨어져 있기도 했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그다지 마땅치 않아 오랜 시간을 무인도로 방치되어 온 섬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세월이 흐르고 하나 둘 있던 동식물들이 그 자손을 번식시키며 증식을 계속한 결과, 에녹스 일행이 오르고 있는 지금 모나쉬 마운틴은 온갖 야생 동식물들의 천국이고 집합체였다. 물론 소년들이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지만, 에녹스는 새삼 세월의 신비함에 놀라 겉으로는 표현을 안 했지만 내심 감탄하며 자신 역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부하들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고. 눈을 돌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나무들은 소택성수목이었고, 그 사이로 늪이 보이는 것이, 저 근처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에녹스는 두 소년을 비롯해 자신의 부하들 모두에게 경고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소나무와 참나무, 버드나무 등등이 피곤한 병사들의 눈을 맑게 해줬고, 나무 저편으로는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둘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아침해가 보였다. 그리고 상수리나무가 밀집해 있는 산의 중턱 어귀에 도착했을 즈음, 일행은 잠시의 휴식을 위해 무장을 풀고 간단한 요기와 음료 등을 마셨다. 푸드덕 !! "왓, 깜짝이야!" "새다." "무슨 새지?" "글쎄."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던 도중 상수리나무 사이를 뚫고 부리가 긴 새 한 마리가 파크의 머리 위로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베는 상처를 입을 뻔한 파크는 꽤 놀랐지만 다행히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파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디는 이곳에 올 때까지 산의 환경을 설명해 주는 역할이었던 에녹스에게 이번에도 설명을 해달라 눈으로 물었다. 그러자 에녹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곤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저 새는 나도 모르겠군. 이 산에 대한 것은 기록서에 있는 정보가 다인데. 저런 새에 대한 기록은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긴 세월 속에 탄생한 변형종이 아닐까." "흐음." "헤에…." 말이 청산유수라고,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기어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에녹스에게 라디는 '그러냐'는 뜻의 심드렁한 콧소리를 냈고 파크는 '과연'하는 얼굴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사랑에 빠지면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더니. 에녹스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긍정부터 하고 보는 파크의 모습에 라디의 혀에서는 츳,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자, 그럼. 휴식도 적당히 취했겠다. 다시 출발해볼까." 일행은 현재 에녹스가 손에 들고 있는 기록서의 지도 중 X표시가 그려져 있는 곳을 향해 가고있는 중이었다. 그 곳에 보물이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어쨌든 총 세 개가 있는 X표시의 지점 중 한 군데쯤은 보물의 단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지요 제독. 출발한다! 무장을 갖추고 진열을 맞춰라!!" "예스, 써!!" 제독의 명령에 우렁찬 대답을 한 병사들이 손 옆에 놓아두었던 무기들을 다시 손으로 집으려는 찰나, 그 소리는 들려왔다. 쌔액 퍽!!! "헉!" "으악!!" "크아아악!!!" " !!!" "무슨 일인가!!!" "활, 활입니다 제독!" "그것은 나도 알고 있다! 어디서 쏟아져 오는 것인지 파악해라!! 그리고 우선 바위 뒤로 숨어!!" 미처 방패와 자신의 무기를 챙기지 못한 병사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라디와 파크는 갑자기 자신들의 주변 병사들이 몸을 뚫고 튀어나온 기다란 나무 막대를 쥐고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 서로의 손을 잡고 굳어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런 경험에 익숙한 라디 쪽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굳어 있는 파크를 큰 바위가 많이 있는 바위 언덕으로 끌고 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쏟아지는 화살에 생사를 보장할 수 없었던 간발의 차이였다. "모두 피했나!! 화살이 방향은 어디인가!" "10시 방향입니다, 서!" "반격을 준비해라!" "예!!" 약 10여 초 동안의 폭우처럼 쏟아지던 화살에 상당수의 병사가 부상을 당하고 겨우 매복지를 정해 피신한 뒤, 드디어 에녹스의 군은 반격을 위해 궁병을 앞세워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공격준비를 했다. 비록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어젯밤의 작전회의 덕분에 그나마 빨리 대응을 할 수가 있었다. "……." "……? 뭐지?"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화살을 뽑아 시위를 당기기만 하면 되는데, 더 이상 적진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조금 전의 공격이 거짓이었다는 듯이, 이 쪽의 착각이었다는 듯이. "…어찌할까요 제독?" "……." 에녹스는 이것이 적의 페인트인지 후퇴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로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보류했다. 만약 후퇴라면 당장 추격대를 보내야 할 것이고 페인트라면 이 진열을 유지한 채 놈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올라간다." "정말로요?" "그래. 놈들은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나갔다가 다시 화살 비라도 맞는 날에는!" "날 못 믿는 건가 로딘?" "! 예스, 써.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상관의 차가운 말투에 로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는 하지만 전장 경험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어찌됐든 해군을 통솔하는 최고 지휘관의 명령에 토를 다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좋은 것이 아니다. 로딘은 사죄의 표시로 에녹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좋아. 전진한다! 궁병들은 살을 집어넣고 다른 창병 및 소총병들은 또 다시 있을 기습에 대비하라! 놈들은 반드시 또 온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언제든 긴장을 늦추지 말고 주변을 널리 살펴보도록 해라!" "예스, 써!!" 활을 쥐고 자세를 잡고 있던 궁병들은 마치 한 사람인 듯 같은 속도로 이러나 화살을 화살 통 안에 다시 집어넣고 전진할 준비를 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조금 전 경치를 구경하던 모습이 거짓이기라도 한 듯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좌우 상하를 살피며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뻗고 있었다. 파크와 라디는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진정한 전쟁의 시작을. * * * "…이곳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제독. 이 바위, 확실하군요." "그래." 에녹스의 군은 로딘의 말에 크게 한숨을 쉬며 술렁였다. 드디어 도착한 것인가. 보물이 있는 곳에? "드디어 단서의 하나에 도착 했습니다." 털썩. 로딘의 또 다른 말에 병사들 사이에 또 다른 술렁임이 일었다. 단서의 하나라고? 보물이 아니라? 모나쉬 마운틴 세 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이곳 칸 봉우리엔 유난히 바위가 많고 모래가 많아 안 그래도 험한 산세를 더욱 오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바위 틈틈이에 숨어있는 뱀들은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놀라게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어있던 늪 때문에 아까운 병사 하나를 추가로 잃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인간과 자연, 모두가 그들의 적이 되어 있었다. 또한 오는 도중 온통 나무로 뒤덮여 있어 일렬로밖에 올 수 없었던 수풀림 지대에서는, 미리 와서 매복하고 있던 블랙 버드측에게 기습을 당해 또 다시 열 명 정도의 부하를 잃은 에녹스였다. 이제는 정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일단 병사들은 쉬게 한 뒤 기록서를 보고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 어디서 또 기습을 할 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해라." "예." 로딘은 명령을 전하기 위해 한 하사관에게 명령을 했다. 그리고 에녹스는 품에 들고 있던 기록서를 펼치며 수수께끼라는 것을 풀기 위해서인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라디와 파크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공포에 떨고 있었다곤 하지만 두 소년의 공포는 각각 원인이 달랐다. 한 소년은 생리적인 죽음에의 공포였고, 다른 한 소년은 자신을 노리고 정확히 파고 들어오는 남자의 공격에 대한 공포였다. '그 자, 분명 나를 보고 있어.' 처음 화살이 파크와 자신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에게 맞았을 때만 해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기습이 두 번, 세 번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라디는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습의 공격 방향이, 자신의 주위를 향해 있다는 걸. 어쩌면 파크를 노리고 하는 공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늪에서의 기습 때 라디는 잠시 파크와 다섯 걸음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기습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걸어가는 나무 뒤에 숨어 있었던 블랙 버드호의 해적들은 날카로운 커트라스를 들고 나타나 라디의 옆에 있던 병사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에녹스의 병사들은 바로 추격해 그들을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무거운 군장을 두르고 청동과 쇠로 된 무기를 들고 있는 그들이 얇은 옷에 커트라스 하나만을 들고 있는 그들을 따라잡기란 무리였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마치 이 섬에서 오래 살기라도 한 사람처럼 지리를 이용해 도망치는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에녹스는 블랙 버드가 기록서의 지도를 선원들에게 교육시킨 것 같다며 분한 듯 이를 뿌득 갈았다. 그리고 세 번째, 바로 조금 전 수풀림에서의 창의 기습. 그 역시 라디의 옆에 있던 병사가 가장 먼저 피해를 입으며 시작되었다. 라디는 긴장하며 걷던 와중에 갑자기 자신을 미는 병사가 이상하여 쳐다봤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블랙 버드호의 해적들이 찌른 창에 옆구리가 꿰뚫려 서있을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 공격으로 인해 라디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기습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라디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라디의 주위. 즉, 라디의 곁에 있는 병사들을 차례로 하나씩 쓰러트리며 마치 금방이라도 라디를 쓰러트릴 것처럼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내 손아귀 안에 있다』 남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며 그가 바로 등뒤에 서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자신은 그 남자를 벗어날 수 없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그 배에서 탈출해 나왔어도 곧 그 남자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는 습격이었던 것이다. "라디." "으, 으응?" "왜 그렇게 놀라나. 습격 때문에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아, 아니야 제독님. 왜?" "흠…함께 풀어보지 않겠나, 기록서의 수수께끼들? 우선 파크에게 물어봤지만 파크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모양이야. 혹시나 제왕의 보물과 함께 자란 너라도 무슨 감이 잡히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나는 제왕의 보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걸." "그래도." 어떻든 간에 혼자 머리 쓰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에녹스는 기어코 라디의 원조를 요청했다. 계속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던 지라 달리 생각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라디는, 에녹스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이며 함께 기록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빽빽한 수풀 속에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을 알지 못한 채. 제12장 캡틴 쥴은 말하고 있다. "칸 봉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의, 해골 바위가 있는 곳입니다." "…역시. 캡틴의 예상대로 딱딱 맞아떨어지고 있군요." "……." 대답을 하지 않는 선장의 모습에 보고를 하러 온 선원 녀석이 자신의 눈치를 봤지만 스네이크는 큰 상관없었다. 저 사람이 하루 이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지금은 대답을 듣는다 해도 그다지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것이 뻔했으니까. 희망봉에 도착한 지 만 이틀째.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은 현재 희망봉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제왕의 산, 모나쉬 마운틴에 잠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섬에 도착하기 전 선장이 관심을 가지던 노예 소년 하나가 탈출하는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난한 상륙이었다고,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그들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선장 블랙 버드였다. 정박소의 반대 방향으로 배를 우회해 힘들게 배를 숨긴 것까진 좋았는데, 그 뒤부터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에게 주어진 것은 지옥과도 같은 훈련과 선장의 호통소리 뿐이었다. 「섬의 지도를 외워라」 「그 동안 가르쳐 온 잠복술을 실행해 볼 좋은 기회다. 실패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지도를 외우지 못하는 놈은 태양 제독에게 당하기 전에 내 손에 먼저 죽게될 것을 명심해라」 선원들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어떻게든 지도를 외우고 그간 오랫동안 쓰지 않아 거의 잊었던 기습 공격법이라던가, 자연을 이용해 몸을 숨기는 법등을 필사적으로 기억해 냈다. 실제로 설마 죽이겠어, 하는 마음으로 지도를 제대로 외우지 않은 놈은 커트라스를 들고 일어서는 블랙 버드의 모습을 본 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고, 선원들은 그런 그의 행동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선원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뿐이었다. 그런 것이다. 해적들에게 있어 선장이란 곧 그들의 목숨이고, 선장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목숨 모두를 잃는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리하여 해적선 선장의 권력이란 왕의 절대권력과 맞먹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선장의 말에 착실히 따른 보람이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 해 온 기습과 습격은 성공적이었고, 적들은 당황하여 대항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군사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만 나간다면, 채 이틀이 지나기 전에 절대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블랙 버드호의 모든 이들은 한 편으로 기뻐하면서도 조심스레 예측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선장은 아무리 머리 나쁜 해적들이 열심히 필사한 기록서의 지도를 외우고 습격에 성공해도,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가 다른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일까. 모두들 서로 다른 이견을 내며 추측해 보았지만 좀처럼 답은 나오지 않고 무서운 얼굴을 한 선장에 대한 공포만 나날이 높아져 갔다. 단 한 명, 블랙 버드가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고 있는 스네이크를 제외하고. 눈치를 보고 있던 선원 녀석이 상황을 보다가 자리를 떴다. 우연히 찾아낸, 기록서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동굴 안에는 스네이크와 블랙 버드만이 남아있었다. 스네이크는 갖가지 양탄자가 놓인 바닥에 앉아 온갖 인상이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는 블랙 버드에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습격이 모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보물을 찾아오는 것뿐이군요." "아니." "예?" "보물은 되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면요?" "……." 또 무시인가. 스네이크는 요 이틀 동안 계속 저렇게 혼자서 생각하느라 자신의 말을 씹는 블랙 버드에게 익숙해진 자신을 느끼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마 지금도, 그 노예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나칠 정도의 우연이 연결되어 마치 운명처럼 만난 한 동방의 소년에 대하여. 라디라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 그 소년이 희망봉에 도착하던 날 블랙 버드호를 탈출하면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선장의 무서울 만큼 차가운 얼굴도, 소름 끼칠 만큼 잔인한 명령과 살생도. 그리고. 전에도 차지하려고는 했었지만 정말로 미칠 듯이 제왕의 보물에 대해 매달린 것도. 모두 소년이 탈출하던 순간부터 시작된 일들이었다. 그렇게 화가 났던 건가. 스네이크는 작은 동방의 한 소년의 영향이 이리 클 줄은 몰랐기에 변한 선장의 모습에 조금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하룻밤의 유희를 위해, 조금 마음에 드는 미동(美童)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까. 저 사람이 저토록 조용히 분노하고, 저토록 조용히 그 염을 표출하고 있을 정도로? 스네이크는 설마 설마 했던 자신이 예감이 맞아오는 것만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선장이 어떠한 '감정'을 가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그 감정이란 곧 약점, 혹은 냉철한 판단을 흐릴 수 있는 요인으로도 작용을 하니 말이다. 허나 지금은 그저 자신들의 선장이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을 거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떠한 '감정'에 의해서, 큰 목적을 잊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그런데 그 생각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었다. 물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습을 명령하면서 그 소년의 호위병을 먼저 공격하라 이르는 것이라던가, 제왕의 보물과 더불어 그 소년만은 죽여선 안 된다고 하는 면들을 보면 조금 불안해 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죽여 버리면 속이 편할 것을. 이런 말하면 조금 잔인하다 할 테지만, 사실 그런 동방의 소년 따위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질 좋은 노예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저 선장에게는 아무래도 소년이 '상품'의 가치는 아닌 듯 했다. 그보다 더 낫다면 문제가 안 될 테지만 안타깝게도 선장에게 있어 소년의 가치는 상품 이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이지 않을 리도 없을뿐더러, 소년의 주위를 공격해서 주의를 돌리는 귀찮은 짓 따위는 하지도 않을 테니까. 라디. 라디라는 이름뿐이었다. 블랙 버드가 그 소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리고 또 하나, '제왕의 보물' 인 파크라는 소년과 가족처럼 긴 시간 함께 살아왔다는 것과, 그리고. 그리고. 미칠 듯이 자신을 흥분시키는, 묘하게 도발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뿐. 그리고…. 자신이 지금, 그 소년을 미칠 듯이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는 없지만 블랙 버드가 소년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보물의 파동이라는 건가…." "예?" "스네이크." "예." "보물의 파동이라는 것이 옮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파동이라니요?" "제왕의 보물, 즉 파크라는 소년 말이다. 기록서의 필사본에 보면, 보물은 제왕을 유혹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반드시 서로에게 이끌려 둘도 없는 반려가 된다고 하지. 어때, 그 파동이, 십 몇 년을 함께 산다고 다른 이에게 옮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잘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말이야." "예? 직접 겪다니요?" 스네이크는 어이가 없었다. 하루종일 인상을 쓰고 있다가 뜬금 없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하고. 도대체 그 소년 하나가 탈출한 것이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단 말인가. 화가 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사람이 변할 줄이야. 전에도 선원들이 어려워하는 선장이긴 했지만 지금은 무서울 정도다. 선원들의 목숨 따위 하찮은 잡초만큼도 여기지 않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알 거 없다. 아무튼. 그러니까 보물은 되찾아오지 않을 거다. 중간에 잡아오면 그만큼 포획했을 때의 쾌감이 작아지니까 말이야. 즐거움은, 나중에 최고조에 이를 수 있도록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지." "예에…." 뭐 선장이 저렇게 말하는 데야 부하는 그저 잘 순응하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면 쿠데타라도 일어나겠지만 지금까지의 그의 명령은 잘못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씩 착착 적을 없애가며 원하는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으므로 선원들은 불만은커녕 '제왕의 보물'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보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대를 나날이 부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선장의 아슬아슬한 모습에 스네이크는 불안했다. 마치, 하나로 이어진 외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장은 그런 스네이크의 기분은 알지 못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두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보물의 파동이 묻은 소년이 그 정도라면…정말 제왕의 보물은 어떠할지. 이거 생각만 해도 기쁠 정도로군. 어리석은 놈. …그러나 보물을 얻게 되도 네가 나에게서 탈출한 것이 어떤 일이었는지는 두고 두고 알게 해주리라. 지금까지의 것보다 몇 십 배로!" 듣는 이가 섬뜩해질 정도의 낮은 웃음을 웃으며, 어두운 동굴 속에서 검은 새가 말했다. * * * "라디,요?" "아아. 그 까만 피부의 꼬마 녀석 때문에 아무래도 지금 선장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흐…음." "뭐가 흐…음이야?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어. 팔목이 이게 뭐냐? 어째 날이 갈수록 더 말라가는 것 같잖아? 식사는 매번 갖다 주고 있는데 말이야." "…갖다 주기만 하잖아요?" "그래. 내가 매번 갖다 주…뭐라고?" "갖다 주기만 하고 내가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잖아요? 당신, 내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봐준 적 있어요?" "그건," "알아요. 유명한 해적 블랙 버드호의 부선장님은 공사가 다망하시겠죠. 뭐 하지만 저도 외로운 포로 살이에 식사시간마저 홀로 해야 한다면 식사를 남기는 것은 다양하다…." "대체 무슨 소리야?" "뭐, 그런 얘기예요." "??" 스네이크는 기껏 바쁜 와중에도 매번 식사를 날라줬더니 아쉬운 소리만 해대는 테이어드가 이해되지 않았다. 식사를 홀로 하면 식사를 남기겠다고? 그렇다는 건 매번 먹는 모습을 지켜봐 주기라도 하라는 건가?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아아. 익히 잘 알고 있어요. 이 동굴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듣다 보면, 당신의 소리가 반 이상을 차지하니까요. 실제로 당신이, 선장인 블랙 버드보다 더 선장 같은 걸요."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지 마라!" "!!" 한 번도 자신 앞에서 화를 낸 적이 없다가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스네이크의 모습에 테이어드는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눈이 보이지 않기에 다른 기관이 예민한 자신이었다. 스네이크 또한 그런 자신의 사정을 잘 알기에 늘 귓가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는 것이 여실히 보이곤 했었는데, 그가 저런 소리를 내다니?? "왜 화를 내죠?" "네가 우리 선장을 욕보이고 있으니까!" 아아. 테이어드는 남자의 꽉 막힌 충직을 다시 절감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이 딱딱한 남자가 어디 가벼운 발언 하나라도 넘기겠는가. "그런 말뜻이 아니었는데요." "아니었다 하더라도. 만약 내가 아닌 다른 놈이 들었다면 당장 선장에 대한 모독으로 너를 해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무슨 말을 그리 잘못했는데요?" "내가 진짜 선장 같다니. 그건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모든 사항을 점검하는 선장을 무시한 발언이다. 나는 단지 몸으로 뛰는 일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야. 언제나 그렇듯 배의 모든 일을 점검하는 것은 선장의 일. 나는 그 대리인일 뿐이다." "하아." "하아?" "예이 예이. 잘 알았습니다." "……." 스네이크는 테이어드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기는 테이어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왜 그런 남자를 선장 대우를 해줘야 한단 말인가. 저 자는 말 그대로 수도원에서 자신을 납치하여 강간하고 죽음까지 몰고 갈 뻔한 파렴치한 자인데. "…뭐야. 화났나?" "화는요. 어차피 잡혀 있는 포로의 몸. 식사를 가져다주시는 것만 해도 영광이죠." "화났는데?" "……." "내가 성격이 불같은 게 어제 오늘 일인가. 뭘 화를 내고 그래?" "어찌 아셨죠?" "응?" "제가 화난 거 어찌 아셨냐고요?" "아아." 테이어드는 기껏 티를 안 내려고 애썼는데 알아챈 스네이크가 무심하여 물었다. 이런 때야말로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억울한 순간이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의 비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너, 네 버릇을 알고 있나?" "버릇이요?" "그래." 버릇이라니. 테이어드는 사물을 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버릇이라던지 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물론, 남보다 오감이 발달한 지라 목소리에서 슬픔 또는 기쁨 등을 알아채는 것은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지만, 그 사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몸동작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뭔데요? 제 버릇." "여기." "!! 뭐, 뭐," "? 왜 놀라는 거지? 네 버릇을 말해주려 했을 뿐이야?" "버, 버릇이 여기와 무슨 상관이," "너, 삐졌을 때 입술을 삐죽, 하고 내미니까. 마치 새끼 오리의 주둥이처럼." "뭐라고요!?" 테이어드는 자신도 모르게 스네이크가 톡, 하고 건드린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쳤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으리란 건 잘 알 수 있었다. 얼굴이 온통 뜨거운 열로 덮여있었기 때문이다. "헤에? 얼굴이 익은 홍당무 같네? 괜찮아?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니야?" "놀리지 마세요!!" 겉으로는 감기가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거 같았지만 그의 말투에선 웃음기가 느껴졌다.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눈치 채지 못할 줄 알고, 자신의 이런 핸디캡을 이용해 가면서! "어라? 이봐 이봐, 정말 화난 거야?" "아닙니다!" "화내지 마. 그래. 내 오늘 특별히 옛날 얘기를 해주지. 전에 그거 좋아했잖아?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그래. 블랙 비어드의 얘기는 전에 해줬으니 오늘은 프린트 선장에 대한 얘기를 해줄까? 악랄하면서도 머리가 좋았던, 프린트 선장의 얘기?" 항해가 길어지면서, 테이어드는 자신을 강간한 뒤 버려둔 남자에 대한 증오로 절망하고 있을 무렵 자신을 챙겨주고 돌봐준 남자가 의외로 박식하고, 또 의외로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네이크는 테이어드가 바람이 세 기침을 하는 날이면 귀한 차를 따뜻이 덥혀서 가져다 주었고, 두려움에 떠는 태풍의 밤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 주면서 눈이 안 보이는 테이어드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주었다. 그 중에서도 테이어드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유명한 해적들의 이야기로, 지난번엔 퀸 애니 전쟁과 블랙 비어드의 얘기, 그리고 남장을 한 채 해적선에 탑승한 용감무쌍한 여 해적, 포니·데일의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하지만 그 재미있는 얘기에는 바로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아니, 얘기의 결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즐거움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이 있었다. "……." "어이," "…몇 시간이나 해주실 건데요." "으, 응?" "저번에도 해주시다가 금새 볼일이 있다고 나가시지 않았던가요. 이번에도 그렇게 감질나게 해주실 거면 차라리 해주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네요. 옛날 얘기라는 건, 처음에만 듣고 끝을 못 듣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거든요." 그렇다. 대게 한 번 얘기를 하면 밤을 지샐 정도로 긴 얘기들이 대부분인지라, 스네이크는 늘 바쁜 업무를 핑계대며 테이어드에게 앞부분만을 들려주곤 했던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전부를 들으려면 한참 동안을 궁금증에 시달리고 참아야 하는 인내의 밤들을 지새야만 했다. "어…음…그게." "것 보세요. 역시 앞에 조금만 얘기해 주시고 바로 나가시려는 거였죠? 사양하겠습니다. 긴 밤. 어차피 잠이 적지 않은 저로서는 그 얘기의 뒷부분을 궁금해 하며 보내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예요." " 알았어, 알았어! 끝까지 해줄게. 끝까지 해주면 될 거 아니야!!" "…뭘요?" "어, 뭐? 뭐라니. 옛날 얘기라고 조금 전에 말했…." "아아. 그랬지요." 스네이크는 조금 전에 한 얘기를 기억 못하고 되묻는 테이어드가 이상했지만 테이어드는 테이어드 나름대로 답답했다. 이 둔하고 우직한 남자는 차마 테이어드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둔하디 둔한 남자. '끝까지 해준다' 고? 무엇을? 옛날 얘기를? 물론 스네이크가 해주는 해적 이야기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꽤 좋아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이어드가 '끝까지' 해주길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미 남자를 알아버린 몸으로, 이젠 남자를 그저 자신과 같은 성별의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테이어드로선. 그리고 처음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왠지 호감이 가고 시간이 갈수록 그 충실함에 마음이 가던 남자. 그 남자를 향해 자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허나 남자의 충실함이 도가 지나쳐서일까. 스네이크는 도무지 테이어드가 하는 언어유희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거다 하면 이거다, 라고만 이해할 뿐이었다.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당신.' 그래. 저 정도로 나이를 먹고 험한 세상을 살아온 남자가 자신이 하는 말장난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알아들으면서도 해줄 수 없기에, 해줄 생각이 없기에 모른 척 하고 있을 뿐. "자, 그럼 프린트 선장이 숨겨 놓은 보물섬의 얘기를 해볼까?" "…아뇨." "응?" "오늘은 됐네요. 그다지 얘기를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에요." "어? 어째서?" 스네이크는 자신의 안 좋은 기분을 눈치 채는 것은 빠르지만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봤자 소경인 테이어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검은 암흑뿐이었지만, 그는 그래도 스네이크가 서 있을 곳을 감으로 짐작해 눈썹을 찌푸렸다. "글쎄요?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졌을까요?" "음. 그러게? 원래 이야기만 해주면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잖아?" 저런 말투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간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자신이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 정도로 고단수였던가 이 남자. "정말…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뭘?" "내가 이러는 이유요." "네가 이러는 이유?" "한 달. 우리 한 달 동안 같은 얘기만 하고 있지요. 내가 이유 없이 기분 나빠하면 당신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재미있는 모험담을 들려주고요.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죠.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제 기분은 절대로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근본적 원인이라니? 혹시 기분 나빠하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어?" "정말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대도!?" 믿을 수가 없다. 저 남자의, 블랙 버드호의 부선장쯤 되는 남자가 설마 그 흔한 남색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게다가 자신이 저 남자에게 안기는 장면을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목격하지 않았던가. 옷조차 걸치고 있지 못하던 자신의 옷을 챙겨준 것도 저 남자였고, 남자가 버려둔 자신을 측은히 여겨 도와준 것도 저 남자. 그렇다면 자신에게 아무관심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테이어드의 착각인 듯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건,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고 싶어하지 않는 스네이크의 잔머리일 뿐이다. "됐습니다. 무리한 부탁해서 미안하군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해적 이야기는?" "됐다구요." "어…왜 그래. 몸이라도 안 좋아? 따뜻한 수프라도 갖다줄," "됐다고 하잖아!! 싸구려 동정 따윈 원하지 않아!! 나가달란 말이야!!!!!!!!" 탕!! 보이지 않는 눈으로 힘겹게 남자의 등을 찾아 온 힘을 다 끌어내어 숙소 밖으로 밀어냈다. 바위 너머로 남자의 '어,어어 어라?' 하며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저것 또한 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 남자는 지금, 지독히 잔인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 테이어드. 정말 괜찮아? 거 참. 갑자기 왜 저러나 모르겠네…오늘 해 줄 프린트 선장 얘기는 특히나 재미있는데…정말 안 들어도 돼? 나중에 후회하지 마? 나 간다?" "가 버려요!!" 어린애를 다루기라도 하듯 구스르는 말투에 확 하고 열이 올라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남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윽고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테이어드는 동굴의 바위에 기댄 채로 바닥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리고, 흐느꼈다. "흐…윽. 나쁜 남자. 이렇게 외롭게 만들 거였다면, 차라리 그 때 살리지 말지 그랬어…!" 테이어드의 슬픈 목소리는 테이어드를 위해 스네이크가 따로 마련한 동굴 가장 안 쪽의 숙소 안에 울려 퍼졌다. 그날 밤을 가득 채우도록. 하지만 테이어드는 몰랐다. 스네이크가 자신을 정말로 어린애, 즉 성적 욕구를 풀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사실 블랙 버드가 다른 남자를 안는 것은 많이 목격했지만 스네이크는 의외로 순진하고 남색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숙맥이라는 것을. 그로 인해 지금 동굴의 안쪽에서 빠져 나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아! 그런 의미였던가!!'하고 뒤늦은 탄성을 지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스네이크 또한 알지 못했다. 블랙 버드에 의해 개발된 청년의 욕망이 자신을 향해 있고, 그 욕망의 분출을 억눌린 청년이 그에 대한 분풀이로 자신과 블랙 버드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회원가입이 마감되었습니다. 가입인사 작성 꼭 해주세요. 안하시면 미워합니다.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49 2164 145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4) * * * "『쥴은 알고 있다…』라고?" "아니, 캡틴 쥴은 알고 있다." "그거나 저거나." 라디는 함께 풀자고 말한 주제에 의견을 피력하자 대강 대강 무시하는 에녹스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물어볼 때는 언제고 기껏 의심 가는 부분을 말해줬더니 '그거나 저거나'라니, 도대체 찾을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아아, 그래? 그러면 그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상관없겠네. 나 같은 놈에게 묻지 말고 머리 좋은 다른 놈에게 묻지 그래?" "잠깐만 잠깐만. 왜 화가 난 거야?" "화는 무슨." 검은 양피지로 된 기록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에녹스는 라디의 좋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라디를 쳐다봤다. 아무런 표정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왠지 색기가 느껴지는 자신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일까. "단지 함께 머리를 써보자고 한 주제에 내 말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당신이 이해가 안 되서야. 그럴 바엔 그냥 혼자서 해보지?" "쿡쿡." "웃어?" 소년은 쿨 해보이던 성격과 달리 지금은 꽤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에녹스는 그것이 또 제 또래의 다른 소년처럼 보이는 것 같아 귀여웠다. 물론 이 말을 하면 또 자신을 여자로 취급하지 말라며 불 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하지만. "아아, 미안. 네 말을 안 들은 것이 아니야. 다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아서." "그걸 함께 풀려고 나에게 말한 거 아니야?" "그래. 그렇군. 내가 실수했어. 미안해." 사과를 하자 금새 치켜 올렸던 눈초리를 내리고 물이라도 묻어날 것만 같은 새카만 눈을 이리 저리 돌린다. 저 까만 속눈썹은 어떻게 저리 긴 것일까. 그 속의 눈동자는 어쩌면 저렇게 맑고 촉촉한 것일까. 지끈…에녹스는 시국도 알지 못하고 주책없이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기실, 라디가 화를 낼 만큼 이 쪽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있던 것도 바로 이런 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아냐. 혼자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면 나는 파크에게 가보겠다." "아니야, 아니야. 이제 막 수수께끼의 힌트들을 조합한 차야. 이쪽으로 와서 함께 보겠어?" "힌트들이라?" 곁에서 보는 다른 병사들은 소년, 그것도 노예 시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연갈색 피부의 소년에게 절절 매는 상사의 모습 때문에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본인은 그저 소년이 옆에 와 앉는 것이 기분 좋은 듯 벙실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로딘은 그 모습을 보고 체념의 한숨을 쉬었고 그 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하나 하나 호통을 치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캡틴 쥴은 알고 있다…』, 『허리를 잘린 클랜트가 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게다가 또 뭐? 『알은 부화하여 제왕의 날개가 된다』, 그리고 『날개를 단 제왕은 제왕의 의자에 앉게 되리니』? 도대체 무슨 소리들이야?" "나도 그게 알고 싶어." "헤에. 정말 수수께끼잖아 이거?" "아아. 누가 쓴 기록서인지는 모르지만 장난기가 다분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 아주 찾는 사람 골치 아프게 해놓고 말이야. 자기는 우리가 이렇게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고 있겠지?" "글쎄. 이미 죽지 않았을까 그 사람." "그렇지? 제길. 복수할 방법도 없어. 나쁜. 그냥 알기 쉽게 쓰면 어디가 덧나냔 말이다. 그랬다면 벌써 보물을 찾고 아르센으로 돌아갔으련만." "아하하." 마치 어린애처럼 기록서를 쓴 이를 욕하는 에녹스의 모습에 라디의 입에서 웃음이 튀어 나갔다. 재미있는 남자였다. 어떤 때 보면 세상 누구보다 용맹한 최고의 해군 제독이었고, 또 어떤 때에 보면 세상 누구보다 천진한 어린애 같은 말을 하며 제독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놀라게 한다.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일까. 라디는 자신이 웃는 모습에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머금고 기록서를 보고 있는 에녹스의 옆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선이 너무 고와 얼핏 보면 여성과도 같은 얼굴이라고 착각하지만, 그 선을 조금만 보다보면 금새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구보다 고운 얼굴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것은 누구보다 남성다운 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강직함을 보여주듯 일자로 쭉 뻗은 이마선과 콧날이, 저도 모르게 키스를 하고 싶어 진다는 모양 좋고 아름다운 색의 입술과, 그리고 저 환상적인 모양의 턱선이라던가…. 사람들은 말했었다. 파라이아 궁에 살고 있는 태양 제독은 지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용맹함을 갖춘, 지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라디는 지상에 둘도 없을 아름다움을 똑같이 갖고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래, 에녹스의 얼굴을 보다 보면 으레 떠오르는 같은 얼굴의 너무도 다른 한 사람. 블랙 버드였다. 「그는 가엾은 사람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야.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어미젖을 문 적이 없고, 그와 똑같이 생긴 동생 때문에 세상 빛을 본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차가운 바다에 버려져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의 노예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미친 듯이 자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오직 팰러딘 가에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를 살려준 노예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배는 설명 흑인 노예라 할지라도 대우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게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유를 주고 일정액의 임금을 주기도 하지. 봐라. 우리 선장은 그렇게 나쁜 놈만은 아니야」 믿을 수 없어. 그딴 거 하나만으로 그 자식을 판단하라고? 「그는 서툰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복수를 위한 일과 몸을 단련하는 일 외에는 생각한 적이 없다. 철들어서부터는, 이 배를 가지고 자신의 세력과 재력을 늘리기 위해 미친 듯이 나포를 했지. 그의 인생은 오로지 그게 다였다」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 「애정이란 것도 마찬가지야. 그를 살려낸 노예에게서 감정을 가지는 것은 약점을 잡히는 것과 같다고 배웠기 때문에 그는 모르고 있는 거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왜 너에게 이러고 있는지」 무슨 뜻이야? 「아마도 다른 노예였다면 너는 이미 목숨을 잃어도 수백 번은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장은 계속 너를 살려두고 게다가 상처까지 몸소 치료해주고 있지」 그래서 어쩌라고…? 「간단해. 믿고 싶지는 않지만 선장은 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선장이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넌 아마 꽤 편한 생활을 보장받게 될 거다. 그 뒤에 선장이 변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그는 나를 파괴한 사람이야. 「하지만 너도 느껴봐서 알고 있을 거 아니냐? 나쁜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이 있어. 뭐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가 바로 그렇지. 너 같은 경우 미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슬픈 눈을 보다보면 차차 생각이 바뀔 것이다. 내 장담하지」 어떻게 그리 자신해…? 「모두들 그리 했으니까. 아무리 그가 나쁜 대우를 해도, 결국엔 모두들 그에게 돌아서게 된다. 우리들 블랙 버드호의 선원들 또한 그래. 그리고 그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잡아온 포로들 또한, 결국엔 선장에게 매달리며 그를 용서하게 되지.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나…? 「아니. 그는 바로 선장의 눈을 볼 수 없었던 단 한 사람. 제왕의 보물을 알아보는 성안(星眼) 테이어드였다」 그 말을 끝으로, 스네이크는 선장의 명이라며 자신의 족쇄를 풀어주고는 선실에서 나갔다. '노예의 족쇄를 풀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그건 바로 자유를 준다는 뜻이지.' '이것이 선장의 마음일 거다. 아프다고 하니까 당장 풀어주라고 했거든.' 이라는 둥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며. 그것이 바로 이틀 전, 라디가 블랙 버드호를 탈출하기 바로 전의 일로, 라디는 족쇄를 풀어준다는 말에 머릿속으로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탈출할 수 있다. 이 배에서, 저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더 이상 억지로 같은 남자에게 안길 필요도, 선상 요금을 치른다며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이 족쇄가 풀어지면. 족쇄가 풀어지면. 「그는 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고 자꾸만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 했다. 그러나 다그치면 다그칠수록,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스네이크의 말은 라디의 귓가를 맴돌며 독해지려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 라디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스네이크가 나가고 잠시 후, 바쁜 선장과 부선장을 위해 시중을 들러온 한 선원에 의해서였다. 그는 스네이크의 명을 받았다며 라디의 옷가지와 타박상에 좋은 연고 등을 배의사에게 들러 받아온 참이었다. 라디는 그들에게서 명을 받는 노예의 입장으로 왠지 민망하여 그에게서 옷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는데. "네가 선장의 이번 잠자리 노예인가 보지?" "! 뭐…라고?" "뭘 놀라고 그래?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선장이 매일 밤 네 감방으로 가는 걸 모르는 놈이 어디 있다고? 뭐야, 아침에 나와 일 잠깐 한다고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거냐?" "나는 잠자리 노예가 아니야!!" "아니긴 뭘. 지금도 선장실에서 선장 옷을 입고 있었던 주제에. 어차피 네 놈들 그 잘난 냄새나는 구멍 하나로 연명하는 주제에 잘난 척 하지 마시지?" "!!!! 뭐, 뭐가 어째… !?" "어이쿠, 한 대 치겠다? 선장의 잠자리 노예를 건드렸다가 나중에 경을 치지. 네 옷과 똥구멍에 바를 연고 여기 둔다. 크크. 혼자서 잘 발라봐라? 난 아무리 선장의 명이라 해도 니 똥구멍에 손가락 넣고 싶지는 않거든." "거기 서, 이 자식! 가만 두지 않겠어!!" " 흥! 어딜!! 이래봬도 선장과 매일 아침 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너 따위에게 주먹을 허락할 듯 싶으냐? 어차피 아래 갑판 성안의 대용품밖에 안 되는 주제에!!" "읏, 이것 놓으 …뭐라고?" 간단히 주먹을 잡힌 라디는 몸부림을 쳐 빠져 나오려 했지만 이 배의 선원들은 모두다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대로 블랙 버드와 함께 매일 아침 수련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라디는 귀에 거슬리는 이상한 말을 듣고 남자에게 물었다. 성안.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왜. 몰랐냐? 이 갑판 아래 최하 갑판에는 제왕의 보물을 알아보기 위해 납치해 온 성스러운 눈깔이 있다. 응. 이 몰린 풀이 몸소 마차를 몰았었지. 뭐라더라. 이름이 테이어드였나? 아무튼 너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몸매도 귀여운 놈이다. 응. 그 정도라면 이 몰린 풀도 한 번쯤은 박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뭐 나야 박는 것보단 박히는 쪽이 좋지만 말이야. 흐흐흐." 제 놈도 제 말마따나 구멍으로 그 짓을 하는 주제에 조금 전에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 것인가! 라디는 몰린 풀의 빠진 이빨을 아예 몽창 빠지게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들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너희들의 선장이 그에게도 나와 같은 대우를 했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몰린 풀이 짝눈을 찌푸리며 라디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성안(星眼)이라고? 너 따위 더러운 피부색을 한 노예 놈과 같은 취급을 하는 거냐? 그는 아주 극진한 애첩 대우를 받았지. 선장은 한 달 내내 성안의 옷을 입히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예뻐하셨다고. 하긴. 클클. 그 정도로 하얗고 귀여운 엉덩이가 눈앞에 떠다니면 누가 이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선장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한 번 보게 되었는데 아주 그만이었다. 하얗고 여자같이 나긋한 몸매에 예쁜 금발과 얼굴까지. 나 같으면 아마 박고 나서 아침까지 빼지 않을…." "그래서!!" "뭐야?" "어째서 내가 그 자의 대용품이라는 거냐!!" "아아." "만약 같잖은 이유로 나를 모욕하려는 거면 가만두지 않겠다." "바보 아냐? 네가 나를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헉!"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어서 말해." 몰린 풀은 선장이 밤에 한 번씩 안아주는 노예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와중에 소년에게 커트라스를 빼앗기고 그 커트라스에 자신의 목을 허용하고 말았다. 몰린 풀이 놀라 대답을 않고 있자 소년이 목에 칼날을 더욱 가까이 하며 금방이라도 목을 자를 듯한 기세를 보인다. 허세와 겁 빼고는 자랑할 것이 없는 몰린 풀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서, 선장은 늘 말했어! '다르다'고!!" "뭐? 뭐가 다르다는 거야. 제대로 말하지 못해?" "그, 그러니까!! 너랑 그 성안, 테이어드랑 다르다는 거지 뭐!!" "뭐?" "그래. 내 중갑판에 있는 녀석들에게서 분명히 들었다. 선장이 입버릇처럼 다르다 다르다 라는 말을 늘 달고 다녔다고. 분명 너와 테이어드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었어!" "다르다…고?" "그래. 킥킥. 꼴 좋다. 선장이 지금은 비록 테이어드를 최하갑판에 방치해 두고 있지만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래. 부선장 스네이크가 그 증거다. 선장이 다시 부를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극진하게 모실 리가 없다. 부선장은 매끼 직접 식사를 들고 테이어드에게 갖다 준다. 그는 소경이라 앞을 못 본다. 그래서 하나 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데 부선장이나 되는 사람이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이것이 선장의 애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에란 말이냐." "……." "꼴좋다. 오줌 색의 더러운 얼굴. 꼬마. 넌 어차피 버림 받아 곧 바다에 던져질 거다. 그도 아니면 희망봉에 도착하는 즉시 적을 관찰하기 위한 총받이로 쓰일 지도 모르고 말이야. 하하하. 그것 참 꼴좋다. 그것 참 꼴좋다!!" 몰린 풀은 조용해진 라디의 모습에 풀이 죽었다 생각하여 이때다 하고 신나게 웃어댔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목을 겨누고 있는 커트라스 때문에 라디의 눈치를 보며 호탕하게 웃지는 못하였지만. 몰린 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아니, 사실이었다. 조금 전 스네이크에게서도 테이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은 누구보다도 열려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오기 전 저 남자의 욕망을 받아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남자는 성격이 잔인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이는 곧바로 바다의 고기밥으로 던져준다고 했다. 사실, 마음에 조금 든다 하여도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던져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그런데 테이어드는 그러하지 않다고 했다. 이 배의 최하갑판, 그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선실에서 부선장 스네이크의 접대를 받으며 호화롭게 항해 중이라고. 어느 누구도 테이어드를 죽일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고. 그리고 분명 말했었다. 남자의 눈빛에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스네이크는 자신에게 주제파악을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라디 자신은 이제 곧 테이어드가 등장하면 사라져야할 조연이니, 알아서 처신을 하면 편해질 것이라는 걸. 그렇다면 스네이크가 말한, 블랙 버드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다던 어떠한 '감정'은 무엇일까? "멍청한 꼬마. 안 그래도 선장은 너 때문에 제왕의 보물을 놓친 것으로 너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그러니 알아서 기는 것이 좋아. 지금이야 죽기 전의 사형수에게 맛있는 것을 주는 심정으로 안아주기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만,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저 바다의 식인종 피라냐들의 식사가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킬킬킬킬!!" 그러나 라디가 고민을 하기도 전에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몰린 풀이 안겨주었다. 그래. 그 감정의 정체는 '증오'였다. 그러고 보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던 지라 잊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 날 도빌항에서의 전투 때 자신을 보고 한눈을 판 사이 에녹스 제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었다. 그로 인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크나큰 부상을 당한 와중에도 자신을 이 배에 끌고 온 것이었고. 왜 잊고 있었을까. 바보같이. 저 남자가 자신을 폭행했던 이유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러므로 스네이크는, 죽기 전에라도 선장에게 얌전히 안기면 편안한 죽음이라도 안겨준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었던 것은 아닐까. 희미하게 끼어있던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었다. 결국 자신이 이 배에 있어야 할 마지막 이유마저 없어진 셈이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 희망봉에 도착할 때까지 견뎌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 버리면 끝나는 거다. 기실, 몰린 풀이 말한 정보는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말도 안 되는 와전과 오해의 산물이었지만, 어쨌든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묘하게 들어맞아 라디에게 크나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었다. "이얏!!!!!!" "!!" 아무 말이 없이 멍하니 있는 라디를 몰린 풀이 공격했다. 방심하고 있었던 지라 꼼짝 없이 당한 라디는 콰당, 하고 선실의 벽에 밀려 부딪혔다. 몰린 풀은 생긴 것과는 달리 재빠른 동작으로 라디가 놓친 커트라스를 쥐고는, 금방이라도 라디를 벨 듯한 기세로 달려왔다. "이 망할 오줌 색 얼굴이!!!!!!!!" " !!!!!!!" 죽는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생리적인 두려움으로 눈이 감겼다. 그 망할 남자 때문에 이런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죽는구나 하고 남자에 대한 증오가 더욱 커졌을 때, 라디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통에 의아하여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흥…상대도 안 되는 오줌 색 얼굴이. 넌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어차피 내가 안 죽여도 선장이 곧 죽일 녀석이니, 내가 먼저 죽였다가 나중에 무슨 호통을 들을지 몰라 그냥 넘어가는 거야. 건방진 자식. 감히 내 목에 칼을 들이대??" 몰린 풀은 라디를 블랙 버드가 곧 죽일 거라 생각해 관용이라도 베푼다는 듯이 커트라스를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라디에게는 더욱 더 큰 치욕으로 다가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여! 개자식! 곧 죽을 사형수 취급은 죽기보다 싫다구 이 자식아!!!" 목숨을 잃을 것까지 각오하고 말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의 절규를 들은 몰린 풀은 예의 비웃는 얼굴을 만들면서 이를 악물고 있는 라디를 조롱했다. "하. 내가 왜? 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선장에게 혼나야 하냐? 그것도 네깟 놈의 말을 듣다가 말이야. 나는 싫다. 너는 어차피 선장의 손에 죽을 것이니, 죽는 그 날까지 선장에게 똥구멍이나 대주면 되는 거다. 아, 그래. 어차피 받는 건 거기 하나니 팔 다리쯤은 잘라도 되겠는 걸. 네 놈, 나를 열 받게 했는데 똥구멍만 남기고 다른 데를 다 잘라 버릴까!!" "으아아아아아!!!!!!!!!!!!!!!!!" 정말 잘라버리기라도 할 듯 커트라스를 들고 위협적으로 흔드는 몰린 풀에게 분노한 라디가 덤벼들었다. 몰린 풀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말로 팔을 자를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모양만 나도록 커트라스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달려온 라디 때문에 차마 칼날을 회수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우왓!!" "나쁜 자식!!!! 나를 모욕했어!!!! 죽여 버리겠어!!!!!!" "이, 이 꼬마 자식이!!" 몰린 풀은 자신을 쓰러트리고 마구잡이로 얼굴을 때리고 있는 라디를 막으려 했지만 손에 쥐고 있는 커트라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리 노예라지만 선장이 매일 밤 안고 있는 녀석에게 칼로 상처를 입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몰린 풀은 가엾게도 무기를 손에 쥐고도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소년의 주먹에 맞아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한 뒤 깨어난 그가 소년이 없어진 걸 발견하고는, 선장에게 혼나지 않을 만한 핑계거리를 생각해 낸 것은 시간이 조금 많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라디는 블랙 버드호에서의 긴 항해를 마치고 탈출한 것이다. 채 육지에 닿기도 전에 탈출을 한 것이라 1km에 가까운 거리를 헤엄쳐야 했다. 비록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던 상태라 육지에 도착했을 무렵 라디의 입술은 보라색으로 질려 있었다. 육지에 내려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로, 놈들이 쫓아올까봐 정신없이 내달리는 몸과 얼굴에 수없이 많은 나뭇가지들이 덤벼들었다. 개중 어떤 것은 눈알을 치기도 하여 라디는 눈물과 바닷물, 각종 상처가 범벅된 상태로 에녹스의 부하에게 발견된 것이었다. "…라디?" "…응." "왜 그러지. 표정이 좋지 않은데." 함께 기록서를 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라디를 보고 에녹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연인에게라도 말한다 생각할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아무 것도 아냐. 그저, 블랙 버드호를 탈출할 때가 생각나서." "저런." "탈출할 때만 해도 정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너무도 절박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파크와 함께 있으니 꿈만 같아서. 그리고, 식사도 하루에 두 끼 이상씩 주고 말이야. 하하하." "그런 잔학한 해적들의 일 따위 어서 잊어라. 그리고." "?""아르센으로 돌아가면, 내 너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마." "!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학교건, 음식이건 네가 원하는 대로 대주겠다. 그런 해적 놈 따위 어서 잊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라. 네가 해줄 수 있는 한 도와줄 터이니." "무슨…." "그딴 놈에게 상처를 입다니. 나는 그 놈을 용서할 수도 없고 너를 두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 둘 다 해결할 것이다. 놈은 반드시 이 희망봉에서 처리할 것이고 그 놈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너는 내가 살필 것이다. 어때. 너도 좋지?" "……." 분명, 가만히 듣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에다가 굉장한 스폰서를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라디는 에녹스가 이러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돌보겠다고 하는 이유가, 블랙 버드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왜 대답이 없지?" "아아. …고마워. 이제 앞으로 음식 걱정은 없게 생겼네." "그래. 그리고…이건 돌아가 봐야 알 일이지만, 아마도 파크는 내가 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보물과 제왕은 반려라고 했어. 그러니 늘 함께 있어야지. 고로 내가 살고 있는 성으로 데려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파크를 데려가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마사 아주머니와 자신은 어떡하라고!! "아아. 흥분하지 마라. 방법은 있어, 라디." "방법이라니!" "너도, 내 성으로 들어와 살면 되지." " 무슨 소리야!?" "왜. 좋은 방법이지 않나? 제왕의 보물과 그 친구. 나의 반려와 그리고…나의 연인이 내 성에 들어와 사는 거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뭐?" 라디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여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에녹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라디에게 당당히 말했다. "연.인.이라고 했다 라디. 어제 확신했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제왕의 반려라고 불리는 파크보다 너에게 끌릴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그러니 이제 아무 걱정 말아라. 그딴 놈에게 당한 상처는 모두 내가 덮어줄 것이고 생활 또한 해적놈들의 생활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고급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마.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해주는 것만 받으면 돼. 나와 그 이름도 갖지 못한 비천한 자와는, 저 하늘의 별만큼 커다란 차이점이 있으니까." "무…슨,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왜. 설마 싫은 건가?" 남자는 정말로 설마, 하는 표정으로 라디를 보며 답을 구하고 있었다. 싫으냐고? 고급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겠다고? 단지 그 자와의 차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연하지!!" "어째서?"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몰라서 묻나!! 그게 뭐야. 그게 소위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분 상승을 노리고 귀족의 집에 들어가는 미동(美童)들과 다를 게 뭐냔 말야! 해주는 것만 받으면 된다고? 그 말은 즉, 나를 네 정액 받이로만 쓰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지!!!" "저, 정액 받이라니, 라디!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파크." 어이없을 만큼 확신에 차 우습지도 않은 말을 하는 에녹스에게 일침을 가하는 순간, 하필이면 최악의 타이밍으로 파크가 라디와 에녹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파, 파크, 그러니까 우리가 하던 말은," "말 그대로다. 나는 지금 라디에게 아르센으로 돌아가면 나와 함께 살 것을 제의하고 있었어." "이봐! 제독님!!" "진…짜야 라디? 진짜로…에녹스 제독님이 그런…." "그럴 리가! 이 사람이 괜히 농담 해 본 거야. 아주 질 안 좋은 농담. 알지?"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라디." "제독!!!" "에녹스님." "그래." 라디가 아무리 상황을 수습하려고 해도 막무가내인 에녹스 때문에 점점 파크에게 설명할 길이 묘연해지는 가운데, 파크가 심각한 얼굴로 에녹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에녹스는 얼마든지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저는요?" "응?" "저는, 제왕의 보물이라면서요? 그리고 제왕의 반려가 될 사람이라면서요? 그렇게 되면 저는 제독님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아아." 에녹스는 한 번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아무 문제없다는 밝은 표정으로 파크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라. 나는 제왕이 될 자이므로 물론 너를 반려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라디에게 가는 걸 어쩔 수 없지. 그러므로 너희 둘을 내 성에 들이면 가족인 너희들은 헤어지지 않아서 좋을 것이고 나는 제왕의 보물과 연인을 둘 다 들일 수 있으니 일석 삼조, 금상첨화이지. 안 그런가?" "예…에?" " 당신! 진짜 아까부터 뜨거운 맛을 한 번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내가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라디? 나는 너를 한낱 미동 취급할 생각도 없고 파크를 외롭게 할 생각도 없다. 이보다 더 현명한 방법이 무엇이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어디서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거야!" "그럼 너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건가?" "뭘 해도 그것보다는 나아!!" "그만, 라디. 됐어." " 파크." "난 괜찮아. …에녹스님." "그래." "에녹스님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그리고…저는 찬성입니다." "파 크!?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 너는 라디보다는 조금 더 현명한 것 같구나." "…얻을 수 없다면, 곁에라도 있는 것을 선택하겠어 라디…." "파, 파크!!" 마치 시구와도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파크는 라디와 에녹스가 앉아있는 큰 바위에서 멀어져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어서 빨리 제왕의 보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려고 열심히 수수께끼를 풀던 중에 저 남자가 한 망언 때문에! "왜 그런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지?" "제대로 봤어. 난 지금 제독님이 원망스러워." "어째서?" "나를 너무 쉽게 봤고, 내 친구 파크를 상처 입혔으니까." "너를 쉽게 봤다는 말은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기는 하겠다. 하지만 파크는 왜?" "그야," 라디는 말을 꺼내려다 과연 친구가 말하지도 않은 그 마음을 자신이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대답을 못하지 라디?" " 아무튼!! 난 당신의 연인이 될 생각도 없고 당신의 궁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어. 나는 그냥 내가 살고 있던 곳, 도빌 항에서 계속 살 거니까 그리 알어! 당신의 애첩 따위, 추호도 될 생각 없다고!!!!!!!" "애첩과 연인은 의미가 다른 건데 라디." "어쨌든!! 수수께끼나 풀어!!" "후우. 그러도록 하지. 일단 이것을 푸는 게 급선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상대와 계속 말을 섞어봤자 이쪽의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라디는 에녹스 쪽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그저 이 답답한 남자와의 대화를 단절하기 위해 서면으로 된 기록서의 해석에 전념했다. 어쨌든 간에 진정한 제왕의 보물인지 뭔지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책이다. 일단 아르센에만 돌아가면 뭐든지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캡틴 쥴은 아무래도 사람일 테고, 이 클랜트 라는 것도 사람 이름인 것 같고, 그런데 클랜트라는 이름은 아무리 봐도 남자 이름 같은데 알을 품고 있다라? 남자가 어떻게 알을 품지?" "답답하긴." "뭐라고?" "제독님 당신, 수수께끼 한 번도 풀어본 적 없어? 수수께끼의 힌트들이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의미만 있는 줄 알아? 이건 아마 다 어떤 것을 형상화하는 암호들일 거야. 그러니까 굳이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사물, 또는 동물 어느 것으로도 다 생각해 봐야 하지." "호오?" "캡틴 쥴은 알고 있다…아마도, 캡틴 쥴이란 건 분명 있었던 사람 같기는 해. 하지만 아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테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살아생전 당시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는 그 사람을 뜻하는 독특한 별명이라던지 하는 것이 힌트가 될…," "돌!!!!" "뭐라고?" "그래. 그러고 보니 왜 생각을 못했지. 아아. 이건 우리 할아버님께서 쥴을 쥴이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늘 돌머리 녀석이라고만 불러서일 거야. 돌이다 라디. 캡틴 쥴은, 약 100여 년 전에 돌머리 선장이라 불리던 녀석이었어." "헤에? 머리가 나빴나?" "아니. 박치기가 강했거든" "어." 혹시나 해서 꺼내본 말이긴 했는데 정말로 에녹스에게서 말한 정보가 나오자 라디는 조금 얼떨떨했다. 게다가 그 사람의 별명의 유래도 조금 어이없는 것이었고. 아무튼 간에 도빌 항에서 해적들을 사기치며 쌓아온 수수께끼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 캡틴 쥴이 돌을 뜻하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기록서에 그리 적혀 있으니. 뭐야. 그럼 이 기록서 생각보다 얼마 안 된 거네? 쥴이 100여 년 전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안 됐다는 거잖아?" "아. 기록서란 원래 하나가 아니거든." "그럼?" "대대로 우리 집에 이어져 온 기록서만 열권이 넘는다 라디." "에 에?" "각 기록서들마다 정보는 비슷하지만, 가장 최근의 것과 가장 정확한 정보가 적혀있는 것을 서고에서 가져온 거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저 레플리카 녀석이 필사본 또는 서고에서 훔쳐간 기록서를 가지고 있던가." "잠깐, 제독님. 이해 안 되는 게 있어." "뭔데?" "기록서가 그렇게 많다면, 제왕의 보물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지." "아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물을 찾아 떠났었는데, 그리고 이 희망봉에 찾아왔었는데, 보물이 남아있단 말이야?" "아아." 에녹스는 '그 얘기인가' 하면서 조금 심통맞은 얼굴을 했다. 조금 걸리는 일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나도 궁금하다, 라디.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록서에는 제왕의 왕좌 근처까지 간 얘기들은 수없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이상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어. 구체적인 찾는 방법이라던가, 찾은 뒤에 보물을 본 경험담이라던가 하는 것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고. 뭐 찾는 방법이야 자기들도 힘들게 찾았으니 너희들도 힘들게 찾아봐라 하는 심보가 작용했다손 치더라도, 보물을 찾은 뒤의 쾌감은 누구라도 기록하고 싶은 것일 텐데, 어느 기록서를 뒤져봐도 그런 기록은 없단 말이지." "헤에. 진짜 이상하네." "그렇지?" 로딘은 조금 전 싸울 때는 언제고 지금은 쿵짝이 맞아서 기록서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라디와 에녹스가 왠지 고깝게 보였다. 자신들의 말에 상처 받아 파크라는 소년은 나무 뒤편에서 울고 있던데 이들은 이렇게 다정한 모습이라니,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제독." "그런데 말이야 라디. 나는 혹시 그것이 보물을 차지하는 마지막 관문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단다." "헤에. 그럴 수도 있겠군." "제독!" "로딘인가. 무슨 일인가. 두 번이나 부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내 귀는 아직 쌩쌩하다네." 그렇다는 건 결국 듣고도 모른 척 했다는 거 아닌가! 로딘은 새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그래도 어찌됐던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무심한 이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부동자세를 취했다. "제독." "세 번째야 로딘." "제왕의 보물이 울고 있습니다만." "!! 파크가요?" "그래서?" "제독." "이봐 제독님!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파크가 울고 있다잖아! 당신 때문에!!" "왜 나 때문이지?" "그," "그건 제독." "안돼요 로딘! 말하지 말아요!!" "엥? 네가 뭔데 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인가 거렁뱅이 소년." "아무튼!! 그건 파크가 직접 말해야 하는 얘기라고요. 다른 사람이 함부로 그 마음을 까발릴 권리는 없어요!!" "까, 까발리다니, 너 지금 무슨 천박한 말투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둘이서? 로딘, 대체 무슨 얘기야? 라디. 나에게 말해 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것이 제독." "대머리 아저씨! 말하지 말라니까!!" 저게! 로딘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콕 집어 말하는 라디가 얄미워 사납게 째려보았다. 그러나 웬걸. 이 거렁뱅이 소년은 더 사나운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반하장이라는 것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었다. "너, 너 이 거렁뱅이. 지금 나에게 뭐라고." "어서 이유를 말하라고 하지 않나 로딘!" "거렁뱅이라고 하던 뭐라고 하던! 왜 자꾸 파크의 마음을 까발리려고 하냔 말이야!! 하지 말라고 했잖아 대머리 아저씨!!" 조용히 신경전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말싸움으로 번져 세 사람은 서로에게 인상을 구기며 해선 안 될 말까지 들먹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에녹스가 먼저 상관의 명을 듣지 않는 부하를 혼내기 위해 앉아있던 바위에서 내려오고, 에녹스의 말을 듣느라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화가 난 라디마저 바위에서 내려왔다. "도대체 자네 내 말을 뭘로 아는 건가 로딘. 이젠 내 말은 무시해도 된다 이건가? 도대체 아르센 해군의 군율이 언제 그렇게 헐렁해졌지?" "죄, 죄송합니다 제독. 저 꼬마 놈이 감히 제 대머리…아니 제 콤플렉스를 건드려서!!" "뭐야 아저씨. 왜 내 핑계를 대! 애초에 아저씨가 쓸데없는 말 안 꺼냈다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뭐야! 그런데 이 꼬마 놈이 아직 무서운 맛을 모르고!" "그만 좀 하게 둘 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당신이야 말로 자꾸 꼬마 꼬마 하는데! 내 키가 당신보다 큰 거 알고는 있어!? 나는 이제 6피트 반에 가까워졌다고!! 당신은 6피트라도 되나!?" "이, 이, 이, 이 꼬마 자식이 !!!!!!!!!!!!" "흥, 이 바위에서 서로의 키라도 재볼까, 대머리에 땅꼬마 아저씨!!!" "으아아아!!!!!!!!!!!!!!!!!!!!!!!!!!!!!!!!" "이봐, 두 사람. 제발 그만 좀," "잠깐!!" 6피트를 놓고 따지는 두 사람을 보며 7피트에 달하는 은발의 미남자가 한숨을 쉬며 중재에 들어가려고 할 때, 소년이 놀란 눈을 하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뭔가 굉장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였다. "뭐야 이 꼬마 자식, 이제야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나 보지? 흥,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 아르센 제국 해군 준장으로써…." "닥치고 좀 있어봐 아저씨." "저!" "가만! 가만히 있어 보게 로딘!!"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건가!! 10년 가까이 모셔온 상관을 이제 한 달 조금 넘게 알게 된 거렁뱅이 소년에게 뺏긴다는 사실에 마음 약한 해군 준장 로딘의 눈에 눈물이 고이려는데. "이거다…! 이거야!! 이봐 제독님!! 이거라고!!!" "그래. 라디. 알겠으니까 말해주렴. 도대체 이게 이거인 건 알겠는데 뭐가 어쨌다는 거니?" "이거라고!! 캡틴 쥴 말이야!! 이 바위를 봐!! 이게 바로 캡틴 쥴이야!!" "뭐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검둥이 꼬마!" "난 흑인이 아니야 멍청한 대머리! 동양인이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하얀 흑인 봤어!!" "아아, 제발 두 사람. 조용!!" "……." 절대로 누가 먼저 질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상관의 명령에 충실한 로딘 덕분에 이번 말싸움은 생각보다 빨리 끝을 맺었다. "라디. 좀 진정하고 로딘. 자네는 나이가 몇인데 이런 어린 소년에게 도발을 당해 말싸움을 한단 말인가? 체통 좀 지키게. 나 원 참." 체통이라니요. 파라이아 궁 최고의 난봉꾼으로 소문난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아 !!!! 라고 로딘은 소리치고 싶었다. 미칠 정도로. "말해봐라 라디. 이 큰 바위가 기록서에서 말하는 캡틴 쥴이라고?" "응. 봐 이 바위. 생긴 것이 꼭 사람 얼굴 같지 않어?" "그러고 보니…." 에녹스는 소년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앉아있던 바위가 얼핏 보면 사람의 얼굴로도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돌머리' 선장이었으니 정말 '돌'로 표현된다는 건가. "그래. 기록서의 지도에 표시된 부분은 분명 이곳이고 주변에 돌은 많지만 이렇게 크고 특징 있는 바위는 좀처럼 없다. 우리가 여기 와서 앉은 이유도 이 바위가 눈에 띄어서였으니까. 그렇다면 보자…캡틴 쥴은 알고 있다고 했지." "그래. 허리를 잘린 클랜트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고개의 각도다!!!!!!!" 뒤에서 입을 댓발로 내밀고 있는 늙은 보좌관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사람은 한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로딘만이 알 수 없는,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처럼. "그렇군! 이 바위의 얼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바로 다음 힌트의 위치였어. 어쩐지. 다음 장소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기에 수수께끼를 푸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이거였군!! 라디! 네가 해냈어!!" "됐어. 난 단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파크와 함께 도빌 항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글쎄 파크와 넌 내 궁으로 들어갈 거라니까. 에녹스는 속으로 대답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괜히 소년에게서 또 안 좋은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 * * 기록서의 캡틴 쥴의 칸 봉우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한다는 것을 안 에녹스 일행들은 단번에 활기를 되찾고 보물이 가까워져 온다는 생각에 하나 둘 얼굴에 웃음을 머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제독님! 이제 제왕의 보물이라는 대단한 것에 한 걸음 가까이 간 것이군요!" "아아. 아직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다 제군들. 다만, 우리가 놈들보다 먼저 고지에 도착할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우와아아아 !!!! 대원들 사이에 커다란 함성이 맴돌았다. 분명 그들의 제독이 그렇게까지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릿속은 보물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들은 소리 지르며 몇 몇 흥분한 이들은 서로 간에 포옹을 하는 장면까지 연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호하는 수많은 이들 중 단 한 명 표정이 어두운 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 실연을 당하고 그 실연의 원인이 바로 친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불행한 소년, 파크였다. "…파크." "라디."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역시 수많은 군인들 중 한 명의 평범한 소년은 꽤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라디가 파크의 어깨를 짚은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파크. 저기." "괜찮아 라디." "하지만." "괜찮대도. 네 탓도 아니고." "그래도." "나 정말 괜찮아. 나는 그래도 '제왕의 보물'인 걸. 그러니까 저 분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어. 그거라도 얼마나 다행이야?" "파크……." 라디는 함께 자란 가족 같은 친구의 마음이 이토록 깊은 지 미처 몰랐다. 마음이 없어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니. 도대체 그 남자의 어떤 면이 파크를 이 정도까지 만드는 것일까? 하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외모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같은 얼굴의 너무나도 다른 사람인 블랙 버드라는 남자를 포함해. 늘 집에서 아픈 마사 아주머니 대신 살림을 도맡아 하며 밖에서 라디가 겪고 온 조금 신기한 얘기를 하면 눈이 동그래져서 듣던 파크였다. 그렇게 내성적이던 파크에게 있어 진취적이고 용맹한,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해군 제독님은 반하지 말라는 게 무리인 존재였겠지. 게다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사랑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얼마나 애틋하고 아련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디의 첫사랑이었던, 그러나 무참히 깨어진 옆집 코니라는 소녀를 대할 때의 라디의 마음이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신 때문에 깨졌다고 생각하니, 라디로서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도 같은 아픔이었다. 아마도 파크의 마음은, 자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훨씬 아플 테지만. "라디." "응?" "에녹스 제독님에게 잘 해주기 바래." "뭐?" "내가 사랑하는 분이지만 너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별 수 있니. 부디 네가 그 분의 마음을 받아줬으면 좋겠다." "파크, 그게 무슨 말이야." "왜.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코니는 저번에 실연한 걸로 완전히 정리됐다며?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저분을 이길 수는 없을 걸. 세상에 저 분보다 아름다운 이는 별로 없을 테니까." 고개까지 갸우뚱, 하면서 너무도 천진하게 묻는 파크의 모습에 라디는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가. 동성간의 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였나? 이렇게 친구 간에 서로 상대를 떠넘기고 가볍게 반려를 삼고 안는…다느니 하는 얘기를 쉽게 할 만큼? 라디는 고민하는 자신이 바보로 느껴질 만큼 에녹스 제독의 마음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생각하는 파크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다른 상대가 있느냐니. 저것은 분명 다른 이성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에녹스 제독에 견줄 만한 다른 남자를 마음속에 둔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일 텐데.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있을 리가. '내가 무슨 생각을!!' 라디는 순간 자신이 머릿속을 스치고 간 한 남자의 얼굴에 놀라 자신의 입을 손으로 턱, 하고 가렸다. 파크가 라디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렇게 본다 해도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말해줄 수 없었다. 절대로. 왜. 왜 그 남자가 생각났는가. 왜. 달리 마음에 둔 사람이 있냐고 묻는 친구의 대답에 대체 왜, 그 파렴치한 남자가 생각났단 말인가. 무려 보름여를 자신을 억지로 안고 온갖 고통과 치욕을 안겨줬던 그 남자가 대체 왜!!! "라디?" 파크는 물음에 답은 않고 갑자기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더니 그 손을 깨무는 친구의 모습에 의아하여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나 파크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을 하는 건지 미동이 없다. "라디…." 가엾은 파크는 자신의 친구가 마음에 둔 이도 없을뿐더러 에녹스 제독에 견줄 만한 멋진 사람을 찾지 못해서, 친구를 배신하게 되어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담아 진언(眞言)을 해주었다. "괴로워하지 마 라디. 나는 괜찮다고 말했잖아. 뭘 그렇게까지 미안해하는 거야. 라디. 난 신경 쓰지 말고 제독님에게 잘해줘. 그 분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또한 나의 행복인 것 같아. 그러니까…나는 그냥 곁에서 지켜보기만 할게. 그것만 허락해줘." "…파크? 뭐라고?" "그럼." "파크? 파크??" 라디는 혼자 생각을 하는 틈에 이상한 말을 뱉더니 대답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는 파크의 뒷모습을 보며 허망히 서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간 건지. 듣지는 못했지만 왠지 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간에 본인에게서 듣지 않는 한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제길." 라디는 파크의 말을 놓치게끔 만든, 그만큼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정신을 빼놓은 대상을 향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봤자 그에게 전해지리란 가능성은 전무했지만. 어쨌든 그 대상으로 인해 자신이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고 친구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랙 버드. 그자가 왜. 도대체 왜. '달리 마음에 두는, 에녹스 제독과 견줄만한 자' 라는 대목에서 떠올랐단 말인가. 얼굴이 닮아서, 라고 한다면 좋은 핑계가 되겠지.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물어야 할 일이었다. 다른 이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솔직해 지자. 도대체 왜 그 자가 생각난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파크가 물은 것은 '사랑'의 의미에 가까운, 라디 자신 한 번은 겪어본 그 애틋한 감정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와는 그런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아니, 전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싫다고 싫다고 반항하는 자신의 허리를 꼭 쥐고 놔주지 않는 커다란 '남자'의 손. 아프다고. 너무도 아프다고 말하는 데도 멈추지 않는 크고 뜨거운, 너무나 크고 뜨거웠던 남자의 흉기. 그리고, 저 커다란 사람 모양의 바위 위에서 빛나고 있는 태양 제독과는 달리 온 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크고 작게 남아있던, 척 보기에도 치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흉터 자욱들. 그의 생명의 촛불이 아주 예전에 꺼졌을 수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너무도 가혹한 그 세월의 흔적들이. 그리고.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나던. 미칠 듯이 가슴 속을 파고들던 그 공허한 겨울 호수 빛의 눈동자가. 그 시리고도 쓸쓸한 푸른 눈동자가. 기억에 남았다. 아니. 박혔다. 라디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각인되어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빌어먹을. 그렇지만!! 이건 분명히 말해두지만 사랑 같은 달콤한 감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라고!! 알기나 해!!" "뭐, 뭐야 꼬마!?" 라디는 갑자기 든 이상한 생각에 기분이 불쾌해져 괜히 옆에서 기뻐하고 있던 병사 하나를 붙잡아 멱살을 쥐고 외쳐댔다. 병사는 웬 미친 녀석이야 하는 표정으로 돌아봤지만 이내 그 부드러운 황색 피부의 소년이 바로 제왕의 보물의 친구라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태양 제독에게 미움을 산다. 그것만은 싫다는 것이 에녹스 휘하의 군이 가지는 공통점이었다. 그래. 이것 또한 달랐다. 사람들은 그를 찬송하고 태양이라 부르며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만을 사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지도 못하고 외려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만 애써왔다.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인데. 어떻게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라디는 새삼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얼굴이라고 그렇게, 아니, 생각해 보면 이제는 얼굴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르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한 사람은 자신의 이상향이었고. 다른 이는 기피 대상이었다. 어찌 됐든 두 사람 모두와 너무도 깊게 연관되어 버렸고 두 사람 다 어떤 방향으로든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마음이 갈 곳은 간단했다. 물론,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가정했을 때. 태양과 암흑.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태양을 택한다. 어두운 암흑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지, 모두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라디의 뇌리 속에는 밝게 타오르는 태양빛보다 서서히 잠식해 오는 암흑이 더욱 더 강하게 박혀 있었다. 다른 누구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주목!! 그럼 지금부터 캡틴 쥴이 가리키고 있는 허리가 잘린 클랜트를 찾으러 간다. 위치는 파악됐는가 항해사!!" "예. 다음 봉우리의 어귀 부분 말뚝으로 쳐진 울타리가 있는데, 그곳에서 채 이십걸음도 안 되는 곳입니다." 해도(海圖)를 그리는 항해사는 한 번만 척 보고 캡틴 쥴일 가리키는 방향을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아마도 그가 있다면 처음 가보는 곳에서도 절대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좋아. 가자 제군들. 허리가 잘린 가여운 클랜트를 만나러. 그리고,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알을 품고 있는 그 가여운 사내를 업무에서 해방시켜주자." "와하하하하!!!" 에녹스가 덧붙인 한 마디의 유머에 병사들은 크게 웃었고 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고양되었다. 아마 지금은 눈앞의 삼면이 해적이라고 해도 그들을 무찌를 수는 없을 거라고 라디는 생각했다. 태양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암흑의 해적을 제외하고. "출발이다! 풀 어헤드!!!!" "예스 써!!"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전속력 전진을 이르는 말에 선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태양 제독은 누구보다도 앞선 위치에서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그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덤빌 테면 덤벼라 암흑이여. 그 누구도 태양 앞에선 그 위풍을 드러내지 못할 지니. 그의 의지가 쭉 뻗은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드디어 일행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왕의 보물을 향해 일보를 뻗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미소의 캡틴 쥴이 배웅했다 제13장 황금 알을 낳는 클랜트 바위가 많고 늪이 많았던 칸 봉우리를 지나, 에녹스 일행은 캡틴 쥴이 알려준 대로 착실하게 다음 봉우리 봉우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바이킹 헤드 산을 오르고 있었다. 희망봉의 산들 중 그 모양새가 가장 뾰족하고 마치 바이킹들이 쓰는 모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바이킹 헤드. 희망봉 중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하는 바이킹 헤드 산은 회색 삼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산맥 줄기임에도 불구하고 푸른빛을 많이 띠고 있던 칸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나무들은 수목림으로 어떤 것들은 군집하고 어떤 것들은 고립하여, 마치 그 이름처럼 제멋대로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는 커다란 갈대숲이 일행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하였고, 역시나 처음 보는 산새들과 짐승들이 어린 두 소년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허나 이 곳의 새들과 짐승들은 마치 칸 과 바이킹 헤드가 다르듯 그 차이를 꽤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칸의 산새와 짐승들이 초식 동물과도 같은 분위기라 하면 이 쪽은 마치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는 악어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들 또한 달랐다. 칸의 나무들은 생생하고 그 색이 녹색인 데에 비해, 바이킹 헤드의 나무들은 잿빛에 생기 또한 그닥 가지지 못했다. 배 의사는 칸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고 있지 않다가 바이킹 헤드에 올라 두어 번 살펴본 뒤에 일행에게 경고했다. '이곳에 다른 건 몰라도 열병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에녹스는 서둘러 클랜트를 찾고 재빨리 이 산을 빠져 나가자고 일행에게 고했다. 모두들 동감하는 눈치였다. 라디와 파크는 앞뒤로 밀착한 채 가능한 늪의 물이라던가 흘러내릴 것만 같은 나뭇잎에 닿지 않도록 노력하며 에녹스의 뒤를 따라 바이킹 헤드의 내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허나 이상했다. 조금 전 칸에서는 아마도 아침 햇살 때문에 잘못 봤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곳에 와서 보니 라디는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역시 이 곳은 라디의 생각대로. 빛나고 있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까. 칸에서는 워낙 모든 식물들과 짐승들이 생기 있게 반짝이기에 햇빛 때문이겠거니, 그 건강함 때문이겠거니 하며 추측을 했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잿빛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이킹 헤드에서마저 그런 빛을 보게 된다면, 이는 섬 자체에 뭔가 특이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칸 봉우리에서는 산새들의 부리가 반짝이고 있었고 짐승들의 이빨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목림이 반짝이고 있었고 폭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다못해 늪지대의 물마저 반짝이고 있었다. 금빛으로. 황금빛. 그래. 미약하긴 했지만 분명 그건 보통 빛이 아닌 황금의 빛이었다. 햇빛으로 반사되는 하얀 빛이 아닌, 스스로 발광하는 황금의 빛. 라디는 이것이 과연 자신만 느끼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위를 살피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과연. 모두들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앞서 가고 있는 에녹스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바이킹 헤드의 잿빛 숲에서 비치는 황금빛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보물. 보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찾아오고 있다고. 점점 제왕의 보물과 제왕의 왕좌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자연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때 라디. 너에게도 보이나? 이 황금빛들이?" "아아." "그래. 가까워지고 있다. 제왕의 자리가. 제왕의 보물이. 세상 모든 것들을 얻는 영광의 순간이." 라디는 에녹스가 이제 막 첫 번째의 단서를 찾았을 뿐인데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에녹스의 모습이 조금 불안하였지만 저 남자는 자신보다 어른이고 지금까지 목숨과도 연결되는 위험한 순간을 수도 없이 넘겨왔을 것이다. 허튼 짓을 해서 대의를 상실하는 짓 따위 할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 같군." "그렇지. 블랙 버드놈도 여기서는 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돌림병에 당할 지도 모르는데 허튼 짓을 할 리가 없지. 병이 옮을 걱정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적어도 습격당할 걱정은 없다. 오히려 잘된 일이야. 재빨리 클랜트를 찾아 품고 있는 알을 가지고 재빨리 제왕의 왕좌로 가자. 그럼 우리가 그 놈보다 앞설 수 있을 거다." "아아." 라디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눈앞의 썩은 나뭇잎들에 닿지 않으려 노력하며 앞을 보는데 주의했다. 저 남자에겐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거다. 보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누구에게든 확인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썩은 나무와 물들이 난무하는 산 중턱에 올라, 일행들은 계속해서 식물들에 닿지 않기 위해 주의하느라 매우 지치고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함부로 흐르는 물을 떠먹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이 산에 돌고 있는 열병을 옮기 딱 좋을 테니까 말이다. 모두 지쳐있었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를 적보다 돌림병이 더 무서운 적이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모두들 긴장으로 흘린 땀 때문에 군복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항해사. 말뚝 울타리는 아직 멀었나! 분명 이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병사들의 상태가 그닥 좋지 않다는 걸 파악한 에녹스가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항해사를 닦달했다. 항해사는 오랜만의 육지이다 보니 감을 잡지 못한 모양이라면서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이상하다…분명 이쯤인데…'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에녹스는 답답한 항해사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는지 결국 최고 지휘관인 자신이 직접 나서는 기염을 토했다. 돌림병이 도는 곳을 제독이 먼저 순찰을 하더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지금 에녹스는 정상인 상태가 아니라고 라디는 생각했다. 보물이 그를 저런 상태로 만드는 것일까.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영리한 판단을 내리던 그가 저런 모습이라니. 도대체 제왕의 보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간데 사람들 저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일까. 라디는 지난 두 달 전 처음 보았던 그의 여유 넘치고 부드러웠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만요 제독. 도대체 어디를 가신다는 겁니까!!" "됐다. 판단력이 흐려진 항해사를 믿고 돌림병 도는 곳을 돌아다니는 건 사양하겠어. 너희들은 대기하고 있으라. 내가 순찰하고 오겠다." "정말 판단력이 흐려진 게 누구입니까!! 제독이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신다면 선원들은 어쩌구요! 자신의 입장을 너무 간과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쳇…." 로딘의 온 힘을 다한 만류에 그는 겨우 자신이 직접 순찰을 할 생각을 접은 듯 했다. 정말로 위험하다. 지휘관이 흔들리면 곧바로 선원들에게 그 영향이 나타난다. 바로 이렇게. 술렁 술렁. 지금까지 지휘관 하나만을 믿고 따라온 병사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침착치 못한 상관의 모습에 불안한 심리가 작용한 탓이다. 만약 여기서 적이 습격해 온다면 끝장이었다. 팀웍에 균열이 간 군의 최후란, 불을 보듯 뻔한 거였으니까. "앗?" "뭐냐!" 로딘과의 일로 일행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지른 단말마의 신음에 예민해져 있던 에녹스가 곧바로 호통을 쳤다. 만약 별 일이 아닌데 소리를 낸 거라면,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저 제독님! 이 곳의 나무 사이로 뭔가가 보이는…." "비켜라!" 수 없이 들어서 있는 잿빛 나무들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한 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색조와 에녹스는 날기라도 할 듯 병사가 말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로딘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병사들도 한숨을 쉬었다. 상관의 갑작스런 변모에 그들은 모두 불안해하고 있었다. " 모두들 들어와라!!! 말뚝 울타리를 찾았다!!" 그 순간 불안해하는 대원들의 귓가에 에녹스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썩은 나무를 헤치고 에녹스가 있는 나무 숲 안으로 들어갔다. 라디와 파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들어간 뒤 작게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 * * "어떤가 항해사. 조금 전 망원경으로 본 곳이 확실하지?" "그런 것 같습니다 제독님. 제대로 찾으셨군요." "후…하하하!! 이렇게 쉬운 것을!! 썩은 나무들에 가려져 이 가옥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워낙 장목(長木)들이 많으니 알아채지 못한 것이지. 그것을 우연히 우리 병사 하나가 옷깃이 걸려 알아챈 것이지. 이것은 아마 블랙 버드놈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설령 찾아낸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빨리 찾지는 못하겠지. 하하하!!!" 썩은 나무들을 제치고 들어간 바이킹 헤드의 가옥촌은 이미 예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듯 집터는 무너져 내리고 지붕은 움푹 패이고 벽은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곶이었다. 곶이란 곳에서 사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미친 짓이다. 시도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블랙 버드보다 두 번째 힌트를 빨리 찾아냈다는 사실에 에녹스는 무척이나 기쁜 듯 했다. 하얀 이를 보이면서 연신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들의 상사가 판단력과 여유 중 여유만은 찾은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을 했다. 오두막은 말뚝으로 울타리의 내부에 존재했다. 먼저 그 곳에 들어가 내부를 살펴본 에녹스의 부하들은 그곳에 그가 원하는 '허리가 잘린 클랜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곤 무척 난감해했다. 그들의 상관에게 이 말을 전했다간 또 다시 불같이 화를 내며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과연 그들의 예상은 들어맞아 그들의 상관은 수색조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지켜보고 있는 라디로서는 그들이 가엾기 그지없었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저렇게 꾸중을 듣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칸 봉우리의 캡틴 쥴이 이곳에 허리 잘린 클랜트가 알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다 와서도 찾아내질 못하다니. 부하조차 믿을 수 없다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한단 말이냐! 허리를 잘린 클랜트라 하면 정말로 허리가 잘린 시체라던가, 그도 아니면 허리 잘린 돼지라도 발견해야할 것 아니야!!" 1차 수색조의 수색이 실패로 끝나고 2차 수색조가 오두막 안으로 수색을 들어갔을 무렵, 라디는 계속되는 에녹스의 훈계에 슬슬 지루해져 잿빛으로 가득 찬 오두막의 둘레를 빙 둘러 보았다. 잿빛 수목림. 잿빛 수목림. 작은 솔나무. 큰 솔나무. 작은 오소리 나무와 큰 참나무. 그리고 중간에 허리 길이의 정도에서 잘린 통나무 하나. 그리고 또 다시 잿빛 수목림. 잿빛 수목림…. "…응?" "왜 그래 라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낸 친구에게 파크가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친구는 쉿, 하면서 파크의 입술에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이내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두막 주위를 빽빽이 채우고 있는 나무들 중에서 어지간히 유의깊게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뒤로도 빽빽이 서 있는 잿빛 수목림들이 보이지만, 그 나무는 유독 자라지를 못하고 큰 나무들 사이에서 작은 덩치를 뽐내고 있었다. 아니, 자라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라디는 가까이 가서 보고서야 그것이 덜 자라 나뭇잎이 듬성듬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주변 나무들의 나뭇잎이 점점이 붙어 마치 아직 자라고 있는 나무처럼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나무는,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라서, 다른 나무와 같은 크기인 것을 자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딱 성인의 허리 정도의 높이에서. "라, 라디." "…가서 에녹스 제독을 불러와." "응!" 100여 명에 달하는 대원들이 모두 오두막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라디는 천천히 중간에서 잘린 나무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특별히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주변의 흙이 다른 것들의 흙보다 약간 색이 다르다는 것 정도? 그것 또한 어릴 때부터 장작을 직접 하느라 토양이나 나무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라디가 아니었다면 알지 못할 정도로 작은, 아주 작은 색의 차이였다. " 무슨 일이지 라디. 지금은 오두막을 수색해서 허리 잘린 클랜트를 찾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 "여길 봐 제독님." "뭐?" "허리 잘린 불쌍한 사내는, 아무래도 여기 서 있는 것 같아." "!!" 라디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에녹스는 뒤를 돌아 기다리고 있던 로딘에게 대원들을 모두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말을 건넸다. 로딘은 곧바로 오두막 쪽에 밀집해 있는 대원들을 모아 라디와 에녹스가 서 있는 말뚝 울타리의 외곽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독." "여길 봐라 제군들." "?" "이 소년이, 허리가 잘린 채 알을 품고 있다는 불쌍한 사내를 찾아냈다." "!!" "아앗!!!" 촤악, 하며 허리가 잘린 나무에 걸쳐져 있던 나뭇잎들을 걷어내어 그 밑둥을 보여주자, 대원들은 그제서야 상관의 말뜻을 깨닫고 신음성을 내질렀다. 상관이 보여준 것은 바로 자신들의 허리길이에서 몸이 잘린, 클랜트 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나무였기 때문이다. 연재 소설란 입니다 . +++++ :: 회원가입이 마감되었습니다. 가입인사 작성 꼭 해주세요. 안하시면 미워합니다. :: +++++:: 마유동 연재1방 연재2방의 차이는 없습니다. 편한곳에 연재하시면 됩니다.:: 152 2164 145 1 ViewArticles Name 낙무아이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5) * * * 허리가 잘린 클랜트 라는 나무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힌트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나무가 알을 품고 있다, 라는 것이 이 지점의 힌트의 끝이었다. 그렇다면, 이 나무가 품고 있는 알을 찾아야만 제왕의 날개를 달 수 있다는 것인데. "어떠냐 라디. 알을 품고 있다 라는 게 무슨 뜻인 거 같나? 이것 역시, 있는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지금까지의 힌트가 그래왔듯이 말이야." "아니." "아니라고?" "그것만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적은 것 같아. 기록서를 적은 심술 맞은 이가 웬일로 말이야." "있는 그대로의 의미라고?" "그래. 여길 봐 제독님." "?" 의미를 궁금해 하는 에녹스에게 라디는 손가락을 클랜트가 서 있는 곳의 토양, 그 중에서도 조금, 아주 조금 다른 곳과 다른 색을 띠고 있는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 클랜트의 뿌리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곳에 흙의 색이 변해 있어. 유난히 밝고 뭐랄까…황금빛이 나지 않아? 대체적으로 섬의 동식물이 다 그 빛을 발하긴 하지만 여기는 다른 흙보다 유난히 빛나는 것 같은데." "흠." '과연' 이라는 얼굴로 에녹스가 손가락으로 기댄 턱을 크게 주억거렸다. 그리곤 뒤에 서서 이 쪽을 쳐다보고 있는 로딘을 호출한 뒤,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곳을 파라 로딘. 아무래도 여기 클랜트가 품고 있는 알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요?" "그래." "…이봐, 연대장들!! 다들 손으로 이 흙을 파…아니, 아니다! 이곳은 돌림병이 돌고 있다 하니 짐 중에서 삽이 될만한 걸 찾아서 그걸 든 놈만 와라!!! 그리고 이 나무 밑둥을 파 보아라!! 여기 클랜트의 알이 있을 것 같다고 하신다!" "예스, 써!" 무기와 식량 외에는 별다른 짐을 가져오지 않은 에녹스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찾은 삽 세 개로 그의 부하가 클랜트 나무의 밑둥을 파는 것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 깊게 파고 들어갔음에도 아무런 내용물을 보이지 않는 클랜트 나무의 밑둥에서 병사들이 지쳐 교대를 하고, 두 번째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세 명의 병사들이 제법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때. 틱! 턱,턱!! "!!!" "무슨 소리인가!!" "제, 제독님. 여기 뭔가 딱딱한 것이 삽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에…황, 황금!? 황금입니다 제독님!! 이 아래에 동그란 금화로 가득 차 있어요!!! 꽤 많습니다! 보물이에요!!!" "비켜봐라!!" 흥분해서 발음도 꼬일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부하를 제치고 에녹스는 꽤 깊게 파여진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부하들의 말대로였고 소리를 지를 만 했다. 허리를 잘린 클랜트 나무의 밑둥은 온통 금으로 된 알 동그란 금화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현재 통용되는 금화는 아니었고, 에녹스로서도 본 적이 없는 복잡한 문양의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화였다. 새겨져 있는 것은 여신의 옆모습이라도 되는 걸까. 너무도 아름다운 선의 여인의 모습에 에녹스가 순간 시선을 빼앗기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다. "…제독님?" " 아아. 가만. 이게 다가 아닐 거다. 클랜트가 품고 있는 알이 부화하여 제왕의 날개가 되어준다고 했어. 그래서 그 날개로 제왕의 왕좌까지 단번에 갈 수 있고. 도대체 무슨 뜻이지? 이 금화가 어떻게??" "글쎄요 제독…저희에게 물어보셔도." "에이, 쓸모없는 녀석들! 가서 라디를 불러와라. 네놈들보다 그 소년이 백배쯤은 더 소용이 있겠다." 곤란한 모습으로 모른다 말하는 부하들에게 평소엔 하지 않는 혹평을 내린 뒤 에녹스는 이번에도 라디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제왕의 보물과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수수께끼 자체를 너무 잘 풀고 있었으니까. 이 또한 '제왕의 보물'인 파크라는 소년과 함께 자란 영향 탓일까. "불렀어?" "아아. 이번에도 조언을 부탁한다 라디. 아무래도 클랜트가 품은 알까지는 찾은 것 같다만. 그 알이 부화하여 나의 날개가 되어 준다고 했잖아? 너는 이 말이 무슨 뜻일 거 같나?" "흠…." "모르겠나?" "왜 여기까지밖에 파지 않았지?" "뭐?" "분명, 알이 '부화'해서 제왕의 날개가 되어준다고 했잖아?" "그렇긴 했다만. 그래서 이 금화들을 더 파보라고?" "당연하지. 원래 '부화'라는 걸 알을 깨고 나오는 거니까. 저 금화들을 깨고 나오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아?" "!! 그렇군…!! 하하!! 라디!! 너는 정말 영리하다!! 내 부하들과는 정말 천지 차이가 따로 없어! 이토록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니!! 정말이지 어째서 네가 '제왕의 보물'이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어!!" "제독!!" 바로 눈앞에 '제왕의 보물' 본인을 두고 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다니. 라디는 에녹스의 처사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세계를 손에 넣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해준다는 제왕의 보물이 그를 변질시키고 있는 것인가. 휙! "파, 파크!" 더 이상 지켜보기가 힘든지 라디와 에녹스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파크가 뒤돌아 로딘과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멀어졌다. 라디는 서둘러 파크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라디의 호명에 대답할 기분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그 존재를 부정당한 거다. 그 원인인 라디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 "이봐! 삽으로 이곳을 더 파봐라! 아마도 나의 날개가 되어줄 만한 것이 매복되어 있을 거다. 어서 파 봐!!" 에녹스는 파크의 기분이 상한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부하들에게 금화를 파내는 것을 명령했다. 그런 그의 차가운 모습에 화가 난 라디가 에녹스에게 뭐라 한 마디 하려고 했을 때. 덜컥!! "나왔습니다!! 제독님!! 뭔가 금화 외의 다른 것이!!" "어서 꺼내봐라!" 라디는 또 다시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나타난 금화속의 물건 때문에. '제기랄. 한 번만 더 파크에게 함부로 말했다간 정말 가만두지 않을 테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보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화들 사이로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 하나가 보였다. 아마도 저것이 기록서에서 말한 날개일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반짝이는 금화를 뒤로 하고 낡은 나무 상자를 꺼낸 에녹스는 삽을 들고 있는 병사들에게 상자에 걸려있는 자물쇠를 부수하고 명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일행들의 이전에 왔을 거라 생각되는 사람들이 이미 자물쇠를 부숴놓고 걸어놓기만 해놓은 상태라 자물쇠를 빼내기만 하면 열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철컹. 끼익. 녹슨 소리를 내며 해골 장식이 되어 있는 나무 상자가 열리고, 그 안의 내용물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이게…뭐야?" "지도…같은데…." 라디 역시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해가 안 되서 하는 말이었다. 어째서 지도가 제왕의 날개가 되어준다는 것인지?"…우선은 보기로 할까." "그래." 상자 속에서 낡은 양가죽 종이를 꺼낸 라디와 에녹스는 밀착한 채 지도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우선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조금 전 에녹스 일행이 다녀 온 칸 봉우리와 뾰족한 모양의 바이킹 헤드 산. 산 중심에 그려져 있는 일자의 타원형은 아마도 일행들이 서 있는 말뚝 울타리를 뜻하는 것이리라. 해안가를 빙 돌아 바이킹 헤드 산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정박소와 그 반대편에 그려져 있는 해안 포구. 그리고 여러 가지 나무들과 해류 방향을 적어놓은 것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에녹스의 기록서에 있는 지도와 비교해 보아도. 하지만 단 하나. 기록서의 지도와 다른 점이 있었다. "이게…뭐지?" "이 X 표시 말이에요?" "아아 그래. 아주 의심 가는 표시로군 그래. 마치 무언가가 있는 곳을 뜻하는 것처럼…." "여기겠네요."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그렇다. 아마도. 진정한 제왕의 보물 혹은 제왕의 왕좌가 마련되어 있는 곳. 지도 속의 X 표시는, 아마도 그것을 뜻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어째서 이게 제왕의 날개일까?" 이미 기록서에서 제왕의 날개라고 표현된 지도를 얻었음에도 에녹스는 어째서 이 지도가 날개라고 표현된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라디 또한 계속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지라, 자신이 추측하고 있던 것을 남자에게 말해주었다. 물론 그 추측이 맞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글쎄 뭐. 의외로 간단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헤맨 것과 달리 이 지도를 발견하면서부터 우리는 단번에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잖아? 여기 저기 돌아갈 필요 없이 이것만 있으면 바로 찾아갈 수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과연 그렇다." 에녹스는 몇 번의 추측이 맞은 걸로 이젠 완전히 라디의 말을 신용하고 있는 듯 했다. 로딘은 지나친 신뢰가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소년의 말은 묘하게도 전부 들어맞아 상관에게 소년의 말을 너무 믿지 말라는 간언들 드릴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 '그럼 자네가 찾아보게'라는 말이 나오면 곤란할 테니까. 헌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저 소년이 아무리 수수께끼를 잘 푸는 소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저렇게 말하는 것마다 다 들어맞으며, 가는 곳마다 수수께끼의 힌트들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저래서야 마치, 힌트들이 자신을 찾아달라며 소년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나의 지나친 비약이겠지.' 로딘은 쓸데없는 생각을 머리를 붕붕 흔들어 털어내고는 에녹스와 라디가 대화중인 클랜트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럼 이제 우리는 이 지도에 표시된 제왕의 왕좌로 가서 진정한 제왕의 보물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군. 하하! 장하다 라디! 과연 내 연인이 될만해!!" "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자식!! 자꾸 그딴 헛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지!! 당신 정말, 파크의 마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안다면?" "그래, 제발 좀 알아주, 뭐라고?" "아아,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좀 싸우십시오. 제독도, 그리고 꼬마. 너도. 지금 제왕의 날개까지 얻은 바에야 한 시라도 빨리 보물을 찾아서 이 섬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로딘." "이 아저씨가 지금 뭐라고," "로딘의 말이 맞다 라디. 어서 빨리 제왕의 왕좌로 가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놈들이 닥치기 전에 먼저 도착해야 한다." 에녹스는 곤란한 얘기를 하던 중 로딘의 참견이 고맙다는 듯 눈으로 살짝 신호를 보낸 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뻐끔거리는 라디를 일부러 모른 척 하고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 외쳤다. "기뻐해라!! 제왕의 날개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제왕의 왕좌를 차지하는 것뿐이다!!! 귀항이 멀지 않았다 제군들!!!!!!" "우와아아아아!!!!!!!!!!!!!!" "앗, 그런데 제독. 클랜트가 품고 있던 금화들은요?" "내버려 둬라. 어떤 병균이 묻어있을지 모를 그런 금화들보다 앞으로 얻게 될 보물들을 생각해. 그 정도는 앞으로 얼마든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오오!!!!" 에녹스는 클랜트 나무 아래의 금화들의 양이 꽤 됨에도 불구하고 가져가기를 사양했다. 물론 돌림병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이미 그런 작은 양의 금화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디는 에녹스의 모습에서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랜트 나무의 금화들이 온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출발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남자의 모습에 라디는 기가 막혔다. 분명 알고 있다고 말했다. 파크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그럼 그렇지. 그 정도로 여자를 많이 안아보고, 또한 버려본 남자가 아무리 파크가 남자라곤 하지만 그 연심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능숙하게 모르는 척 또한 가능했겠지. 나쁜 남자. 뭐라고? 어차피 파크는 '제왕의 보물'이니 자신의 반려로써 늘 곁에 두고, 나를 애인으로 삼겠다고? 라디는 남자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람의 마음 따위 가벼운 것으로 싫다고 하는데도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꺾으려 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예전에 몰랐던 시절에는 '에녹스 제독님, 에녹스 제독님'하며 저 사람처럼 되기를 바랬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막무가내인 사람 따위, 저 얼대로 닮고 싶지 않다. 절대로!!! "전진하라! 이제는 돌림병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는 못한다! 남은 것은 전진뿐이다! 가자! 보물을 차지하러! 해적 놈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용맹하게! 가자 나의 병사들이여!!" 남자는 뒤에 남은 자들의 기분이 어떠한 지도 모르고 그저 전진만을 외치고 있었다. 뒤에 남은 파크와 라디, 로딘마저도 복잡한 심경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데도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패배를 모르는 태양 제독은 그런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 * * 필수적 아이템인 제왕의 날개도 구했겠다, 일행은 제왕의 왕좌가 놓여있다는 모나쉬 마운틴의 봉 중 가장 높은 봉, 크라운 봉으로 향했다. 크라운 봉은 지금껏 지나온 칸도, 바이킹 헤드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산세가 아름답고 사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또한 그 어디보다 강렬하여, 산을 오르는 내내 에녹스 일행은 황금 숲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걸음을 서두르는 에녹스 때문에 일행들은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파사삭 하며 부서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며 빠르게 고원을 올랐다. 산 정상에 들어설 즈음, 에녹스는 지친 대원들을 쉬게 해줄 필요가 있다는 로딘의 충고를 받아들여 약 5분여의 휴식을 명령했다. 지쳐있던 대원들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군대식 행군이 익숙지 않은 라디와 파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기절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지쳐있었고, 특히나 파크의 발에는 꽤 심하게 물집이 잡혀 있었다. 파크만큼은 아니지만 라디 또한 몸 여러 곳에 상처를 입고 있는 데다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아 이런 강행군은 그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야망에 눈이 먼 남자는 이러한 소년들의 가련한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름답구나.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제왕의 산의 모습이겠지. 황금빛으로 빛나는 포구와 백사장. 작고 어린 송들과 황록빛 밀림. 정박소에 보이는 아름다운 나의 배 플라잉 클라우드호라. 이거야 장관이 아닌가." 에녹스는 등 뒤에서 아픈 발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파크는 무시한 채 절벽에 올려져 있는 바위에 발을 올리고 아래로 보이는 산세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파크는 그런 에녹스에게 포기라도 한 듯 그저 울상을 지으며 발을 살피고 있었다. 붉게 벗겨진 살과 척 보기에도 너무 아파보이는 물집은 그런 파크를 지켜보는 라디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우…우…." "이리 내 봐, 파크." "라디." 올려다보는 파크의 눈동자가 눈물로 그렁그렁하다. 라디는 당장이라도 앞에서 한가로이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는 에녹스에게 욕이라도 해주었으면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 순진한 친구가 슬퍼할 것이다. 이게 뭐야 바보. 의사에게 보여서 약이라도 발라달라고 할 것이지. 너는 걷는 게 익숙지 않아서 금새 다리가 붓는단 말야." "응. 미안." "왜 나한테 미안해 해. 아픈 건 네 자식이지." "그래도 미안해 라디."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데?" "내가 네 인생의 방해가 되고 있잖아." "아아?"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라디의 한쪽 눈썹이 우스꽝스럽게 올라갔다. 파크는 의외로 엉뚱한 녀석이라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치만, 너랑 에녹스 제독님의 사랑이 나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그래도 나는 제왕의 보물이니 피해줄 수도 없고, 또 저분을 생각하면 피하고 싶지도 않아. 비록 사랑은 얻지 못하더라도 지켜보고 싶은걸. 미안해 라디. 내가 이렇게 미련이 많아서 미안해. 정말, 처음 납치를 당할 때만 하더라도 내가 저 분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잠깐, 잠깐 파크." "아까 기록서를 해석하고 보물의 힌트를 찾는 너희 둘을 보고 정말로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어. 또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이런 말하면 미안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뭔데." 우선 얘기나 끝까지 들어보자고 라디는 파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너는 우리와 다른 유색인종이잖아. 그래서, 솔직히 처음에는 에녹스 제독님과는 너보다 내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어. 미안해 라디. 절대 너를 싫어한다거나 차별한다는 건 아니야. 다만 내가 더 어울리고 싶어서, 내가 그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뿐이야." "알아 알아. 네가 어디 나 차별할 놈이냐. 그건 너와 같이 산 내가 제일 잘 알아." "고마워." "어쨌든. 그래서?" "그런데. 너의 그 부드러운 빵 색의 피부와 제독님의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가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 조금 전 클랜트의 알을 찾을 때도, 얼굴을 맞대고 있는 너희 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나는, 나는…흐윽!!" 혼자서 온갖 미사여구를 쓰며 한 폭의 그림을 창작하고 있던 파크는 결국 제 설움에 겨워서 얘기 도중에 아픈 발을 움켜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라디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설명하기 난감하기도 하여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파크.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란다. 그러나 걱정하지마. 나는 너 또한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니까. 절대 너를 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너는 나의 보물인걸. 네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제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에녹스!!" "제독님!! …역시 그런 거군요." "으음." "하지만 어째서 지난 밤에는 저에게 키스하려고 하신 거죠?" "키, 키스라니, 에녹스 너 이 자식!!" "그건 네가 제왕의 보물이기 때문이지. 너와 난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운명이지만 라디에게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꼈단다. 이게 사랑이지 싶어. 너와 내가 끌리는 것은 제왕과 제왕의 보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인력일 뿐이야." "무슨 헛소리야! 욕망이라니, 그런 부끄러운 말을 잘도, 그리고 파크에게 키스라니!! 당신 내가 없는 새에 이 순진한 녀석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오해마라 라디. 키스하려고 했을 뿐이지 하진 않았어. 너를 두고 내가 다른 이를 탐할 리가 없지 않니. 그러니 질투하지 않아도 좋아." "누가 질투를 한다는 거야 누가!! 굳이 말하자면 난 이 녀석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어! 이 녀석을 무사히 마사 아주머니에게 데려갈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만약 파크에게 손을 댔더라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무슨 소리야 라디! 난 너의 보호 따위 바라지 않아! 나도 너와 동갑이라고! 왜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그럼! 이런 놈에게 멍하니 있다가 키스를 당할 뻔 했다는데 너를 믿으라고? 너, 그렇게 함부로 몸을 굴리면 마사 아주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저런, 라디. 어젯밤 나를 유혹한 건 그럼 네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던가?" "!!" "무슨 소리야? 유혹이라니? 라디, 너 지금 그럼 어젯밤에 제독님을 유혹씩이나 했으면서 키스할 뻔 했다고 나를 욕하는 거야? 네가 그런 말 할 자격 있어!?" 여기 저기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대원들은 이제는 그들의 삼각관계로 인한 말싸움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말싸움 역시 그다지 쉽게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 아마도 휴식 시간이 원래 정했던 시간의 배는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파크, 그건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기 위해서," "뭐!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정도로 경험이 많다는 얘기니! 그리고 그건 제독님께 대한 실례가 아니야! 정말 실망이야 라디! 네가 그런 애일 줄이야!" "뭐, 실망이라고!" "혹시 너,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온 것도 그럼!" " !!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어!! 파크 너, 오냐 오냐 했더니 정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네가 나를 오냐 오냐 할 만한 자격이 있니!!" "아아, 그만 그만!!" "당신은 조용히 있어!" "있으세요!!"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일 뿐 같은 말을 동시에 한 소년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픈 소년의 발을 다른 소년이 돌봐주는 가족 같은 모습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지금은 마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으르렁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자신 때문에 소년들이 심각하게 싸우는 것 같아 어떻게든 중재해 보려고 했던 에녹스는 소년들이 동시에 말한 함구령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라디와 파크는 서로에 대한 분노로 에녹스의 모습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니. 라디는 십 칠 년간의 우정, 혹은 가족애가 단번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공을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마사 아주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열 살 때부터 라디는 돌아가신 아저씨 대신 가장 노릇을 위해 온 몸으로 뛰고 일을 했었다. 행여 감기라도 걸린 날이면 쉬라고 하는 마사 아주머니에게 괜찮다 말하고 흐물거리는 몸을 다잡아 그 날의 식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눈물 대신 땀을 흘리고 일해 온 라디였는데. 파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받쳐 오는 서러움에 라디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눈물을 그 눈동자에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서럽기는 파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일한다고는 하지만 파크 역시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며 온갖 살림을 맡아 한 덕분에 마음대로 외출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고 아파하시는 엄마를 보며 홀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물론 라디 역시 힘들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하지만 자신 또한 집안에서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로 힘들고 이런 저런 생각도 많았는데, 밖에서 사람들과 부대낀 경험이 없다고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라디가 섭섭한 것이었다. 그 섭섭함에 라디는 약간의 물기를 눈동자에 비치는 반면, 파크는 얼굴을 온통 눈물로 적신 채 잘 맞지도 않는 초점으로 라디를 노려보며 턱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다. "어이 이봐 소년들…부디 나 때문에 싸우지 말아. 그리고 지금은 어쨌든 제왕의 왕좌를 찾으러 가야 하니 싸움은 나중으로 미루," "두고 봐! 제왕의 보물만 찾으면 너 따위 무시해 줄 거야!!" "이 쪽이 할 말이야!! 망할 녀석!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 휙, 하고. 소년들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파크는 에녹스가 있는 선두 진열로, 라디는 후임병들이 모여 있는 후미 진열로. 에녹스는 파크 말고 라디를 곁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무리 에녹스라 하더라도 파크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될 것 같았고, 라디 또한 이 곳으로 오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보였기 때문에 아쉬움의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 * * "……제독." "…그래 로딘." "여기가…!" "그래. 제왕의 왕좌다!! 도착했다!! 이 곳에 제왕의 보물이 묻혀있다고!!!" "우와악!!!!!" "제왕의 보물!!!!!!!!" 이미 첫 번째 힌트를 찾을 때부터 보물을 찾은 듯한 분위기였던 에녹스의 부하들은 이제 정말로 보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거의 광란에 가까울 만큼 기뻐했다. 중간에 적들의 습격으로 인해 상당수의 동료를 잃기도 하고, 돌림병 지역을 돌아 힌트를 찾는 등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모두 지나가고 '제왕의 보물'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보물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에녹스 또한 그런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은 듯 태양 제독이라 불리는 것이 이해가 갈 만큼 환하게 웃었고, 로딘도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계속 쓰고 있던 인상을 풀고 대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허나 이 기쁜 와중에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는 파크와 입을 내민 라디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제왕의 왕좌'라 불리는 곳은 사실 말 그대로 왕좌라 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 역시 기록서에 적힌 수수께끼들처럼 은유적인 표현이었던 듯 했다. 지도에 표시되었던 곳으로 가보자 그곳에는 말만 듣고 병사들이 생각한 왕좌라고 불릴 만한 화려한 의자 대신, 다 썩어가는 웬 연못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독. 어서 빨리 보물을 찾아서 이 섬을 떠나지요. 습격을 해왔던 그 악랄한 해적 놈들이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요." "아아." 그러나 모양은 어찌되었건 에녹스는 찾아온 것만으로도 만족하여 연못의 상태에 대하여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태까지 평범하고 추레하게만 보였던 장소들이 사실은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겪다 보니 이곳 또한 그런 것이겠지 하고 이해를 한 탓도 있었다. "걱정 말아라 로딘. 보물만 차지하면 나는 제왕이다. 너희는 제왕의 부하들이다. 감히 그런 우리들을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 정도까지 사기가 충전된 나의 부대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나는 확신한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로딘은 확실히 부하들의 사기가 고양된 것은 인정했지만 워낙이 상대가 안심을 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이미 놈들의 세 번의 습격으로 잃은 병사의 수가 30에 달했고 반면 놈들의 숫자는 거의 줄지 않았다. 만약 놈들의 수가 처음에 이 쪽과 같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싸움이 되는 것이다. 허나 실패를 모르는 자신의 상관 태양 제독은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듯 그저 지도상에 제왕의 왕좌라 표시된 지점에 서서 즐거운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에 도빌 항에서의 전투 때 본 블랙 버드의 뛰어난 검술 실력도 있고 해서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태양 제독은 지난 번 블랙 버드와의 전투를 기점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절대 패배라고는 모르던 사람이 너무도 쉽게 패배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닐까 라고 로딘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패배한 것을 만회해 보려 블랙 버드 또한 찾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자신이 먼저 찾으려 하는 것일 거라고. 평소처럼 병사 한 명을 잃는 것에도 분노하여 적을 소탕하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습격 같은 경우도 아마 평소의 그였다면 습격해 올 만한 곳을 금새 짐작하여 뭔가 대책을 세웠을 텐데 세 번이나 허용할 만큼 대비가 허술했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 당장이라도 적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다. 로딘은 부디 상관의 냉철한 감각이 돌아와 주길 바랬다. 저렇게, 보물을 찾는 데만 급급해 다른 사람의 상처 따위 상관치도 않고 무조건 전진만을 외치는 속물적인 남자의 모습 말고. "자. 이제 이곳에서 보물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찾는 거죠?" "흠." 부은 눈을 가리려고도 않고 당당히 걸어 나와 에녹스에게 묻는 파크에게 에녹스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에녹스도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도, 여기마저 수수께끼로 되어 있어. 몇 번을 읽어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 제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람을 약 올리는 군 이 기록서." "뭐라고 써있는데요?" "글쎄. 보자….『제왕이 그 자신의 손으로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리라.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보물로 제왕의 왕좌를 빛내면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릴 지니. 그곳이 제왕의 왕좌. 제왕의 보물섬이라』…라? 무슨 뜻일까?" "글쎄. 저는 잘." "흠. 역시. 수수께끼를 풀려면 라디가 있어야 하는데." " !" 무심히 말하는 남자의 한 마디에 소년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도 자신은 '제왕의 보물'인데. 눈앞의 남자가 제왕이 된다고 하면 자신은 그의 보물이 되는 것일 텐데. 어째서 지금 느끼기로는 한낱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개 돼지의 배설물보다도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분명 라디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라디가 저 무서운 블랙 버드호에서 탈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며 세상 누구보다 아끼는 것만 같았는데. "흠…라디라면 아마 이 부분에서 분명 나와 다르게 생각하여 해결책을 내렸을 텐데. 흠…여기는 라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대놓고 말은 하지 않는다지만 은연중에 묻어나는 '물러가라'는 남자의 마음에 파크는 더 이상 고집 피우기를 포기했다. 이미 에녹스의 마음에 자신의 존재란 제왕이 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에 남고 싶다면 그가 사랑하는 존재인 라디를 그의 곁에 데려다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제기…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냔 말이야! 제왕의 보물인 파크는 이미 이 세상에 나와 있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보물로 왕좌를 빛내라? …파크를 제왕의 왕좌에 앉히란 소리인가.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해봐야, 이봐 파크." "파크는 내가 있던 곳으로 갔어. 당신이 계속 가라는 말을 했다며? 정말 생각보다 형편없는 인간 같으니라구." "라디! 온 건가! 이런. 그 잠시를 떨어져 있는데도 네가 어찌나 보고 싶던지. 그래. 잘됐군. 사실 파크는 있어봤자 그다지 보물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그 녀석은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떼어놓고 납치를 해왔어도 당신이 좋다고 하는 녀석인데." "라디. 우리 지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기로 하지. 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공사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파크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를 푸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어. 인정하지?" "그야," "참으로 이상하지만 제왕의 보물인 파크보다 네가 더 제앙의 보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알고 있었다기 보단 느꼈다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나는 제왕의 보물보다는 네가 더 믿음이 간다. 그래서 지금은 너와 함께 있고 싶은 생각 때문도 있지만 단순히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너와 함께 있기를 바란 거야." "세 치 혀로 말은 잘 하는군 그래." "내가 혀로 잘하는 것이 말 뿐인 줄 아나?" "뭐라고?" "쿡. 원한다면 너에게 보여줘도 좋은데. 내가 혀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라고 하면서 붉은 입술 위에 핑크빛 혀를 사악, 하고 훑는 남자. 그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던 라디는 얼굴을 확, 하고 붉히며 눈앞의 느끼한 남자에게 그 리액션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 됐어!!!" "아쉽군." 정말 저 남자의 신경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자기 때문에 상처 입은 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라디 앞에서 어떻게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미 예전부터 이해하기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어때, 알 것 같나?" "음……아니." "저런." 에녹스는 진심으로 실망스럽다는 듯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기록서의 문구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큰 도움이 되어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라디마저 이 문구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니, 제왕의 보물을 찾는데 갑작스런 먹구름이 끼게 된 것이다. 『제왕이 그 자신의 손으로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리라.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보물로 제왕의 왕좌를 빛내면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릴 지니. 그곳이 제왕의 왕좌. 제왕의 보물섬이라』 얼핏 보면 굉장히 쉬운 문구처럼 보인다. 그저 보물만 찾아서 왕좌에 갖다 놓으면 만사가 풀리는 듯한 문구였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비추어 볼 때 이 또한 어떤 것을 은유하여 수수께끼 형식으로 적어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 수많은 기록서들만 남기고 단 한 팀도 제왕의 보물을 얻는데 성공하지 못한 정도의 난이도다.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 될 리가 없다. "그럼 이제 어쩌지?" "글쎄.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떡해." 하긴 그렇다. 에녹스는 어느새 기록서에 대한 것을 라디에게 일임하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이라곤 없는 소인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군. 미안하다. 지금부턴 내가 생각해 보지.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니 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지." "그래." 라디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에녹스의 말에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파크가 있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뒤편으로 물러났다. 평소 같았으면 갖은 감언이설로 라디를 곁에 두려할 에녹스도 지금만큼은 기록서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보물이 갖고 싶다 이거지.' 그러나 에녹스의 성실한 모습도 라디에게는 그다지 좋게 비쳐지지 않았다. 워낙이 그 때문에 파크와 싸운 것도 있고, 앞 뒤 안 가리고 보물만을 위해 친구를 가볍게 대하는 것이 라디의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더 이상 실망 안 하고 집에만 돌아가게 해주면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겠어. 어차피 그 뒤로 다시 볼 사람이 아니니까.' 솔직히 이제는 모든 것에 지쳐서 누군가를 신경 쓰는 것도, 더 이상 다른 사람 때문에 파크와 싸우는 것도 사양이었다. 지금의 라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도빌 항으로 돌아가 언제나처럼 땡볕 아래서 하역 일을 하는 것, 그것이었다. '세상에. 그 힘든 하역 일을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인생 살아봐야 알 일이라니까.' 이제는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짐마저 보고 싶었다. 도빌 항에 돌아가 짐이 괴롭히는 말을 듣는다면 자신은 반가워서 울지도 모르겠다고, 창피하지만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다고 라디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기록서의 문구의 의미를 에녹스에게 알려줄 순 없었다. 만약 그것이 자신의 해석이 맞는다 해도. 절대로. 제13장 격돌. 빛과 암흑의 두 제왕 "…다른 놈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데요, 선장?" "돌아간다고??" "예? 아, 예 부선장. 그런데요." 스네이크는 망원경을 가진 선원 녀석이 하는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간다고? 지금까지 그 소년이 기록서를 봐서 수수께끼를 풀더니, 이번엔 왜? "선장. 그 라디라는 소년이 이번만은 모르겠나봅니다. 태양제독에게서 떨어져서 조무래기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데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스네이크." "예에. 예에." 블랙 버드호의 선장 블랙 버드는 오늘도 쿨하다 못해 쌀쌀맞았다. 하루 이틀 겪는 것이 아닌 스네이크는 그것이 '혼자 내버려 두라'는 뜻이라는 걸 눈치 채고 더 이상의 보고를 멈췄다. "스네이크." "예, 캡틴?" "자네는 무슨 뜻인 것 같나?" "예?" "저 문구 말일세. 『제왕이 그 자신의 손으로 보물을 세상에 드러내리라.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보물로 제왕의 왕좌를 빛내면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릴 지니. 그곳이 제왕의 왕좌. 제왕의 보물섬이라』라는 것. 무슨 뜻인지 알겠나?" "글쎄…요. 워낙 암호가 많았던 기록서인지라. 하지만 적어도 보물이란 제왕의 보물이겠고 제왕이란 선장 또는 제독이겠고 제왕의 보물섬이라는 건 수수께기를 품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물이겠지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예에." 그럼 왜 물어봤나. 라는 어리석은 물음은 통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아마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일 테지만 스네이크는 그 혹시나, 라는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게 자신은 이변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니까. "대강 짐작은 가네만…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어." "예?"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보물이라니…제왕의 보물이 금빛으로 빛난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금빛이라…아! 선장! 저 파크라는 소년이 머리가 금발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머리카락으로 왕좌를 빛나게 만들란 얘기가 아닐까요!!" "하지만 제왕의 보물들이 전부 금발이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별다른 묘사는 없었지만 이 기록서에 등장하는 '제왕의 보물'은 붉은 머리라는 것 같은데." "에에…." 또 막혔다. 스네이크는 간만에 낸 명답에 스스로도 기가 찼는데 그 명답이 수포로 돌아가자 단번에 맥이 빠졌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답이 안 나오면 방법이 없다. 원래의 계획대로 저 태양 제독 측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순간에 덮치는 수밖에. "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 답." "!!" "흠?" " 너!! 네가 여기 웬일이야!!" "뭐라고 했지?" "제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수께끼의 답이요. 금색의 보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세상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는지를." "…거짓이라면 당장에 너를 상어 밥으로 던져 주리라. 그래도 네가 말한 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동굴의 가장 앞 쪽, 블랙 버드가 앉아있는 곳까지 나와 기록서의 수수께끼를 알고 있다고 말한 자는 테이어드였다. 스네이크는 눈이 안 보이는 그가 혼자서 이곳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도 의문이었고 지금 대체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안 그래도 선장의 상태는 라디라는 꼬마 때문에 정상이 아닌데 괜히 헛소리를 했다가는 그야말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테이어드!!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네 자리로 돌아가. 여긴 네가 참견할 곳이 아니," "조용히 해라 스네이크. 나와 얘기 중이다." "서, 선장!" "쓸데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스네이크. 나는 분명히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님의 할머님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얘기를 들려드리려는 것이니까요." "뭐라고!" "그것 참…흥미 있는 발언이구나, 성안(星眼)이여." "그동안 말해드리지 않은 건 죄송합니다만 한 번도 저에게 묻지 않으셨지요? 그러니 저도 대답을 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묻지 않으시기에 당연히 알고 계시는 줄 알고 있었지요." "…쿡. 복수인가." "복, 복수라니요! 선장,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녀석 그렇게 대찬 녀석이 못돼요! 지금도 아마 괜히 허세를 부리는 걸 겁니다. 그 동안 납치되어 와서 고생한 것 때문에 그럴 테니 부디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그렇다고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사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 무리 아닌가요? 당신이 저에게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 보면." "쿡. 뭐가 그리 감정에 남으셨는지?" "납치에 강간에 살인미수까지. 이 정도면 악랄한 범행은 전부 다 저지른 것이지요. 틀린가요?" "하." "으아아아!! 테이어드!!!" 망했다. 고 스네이크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불쌍한 녀석이 잠시 미쳐서 헛소리 했다고 넘어가려던 자신의 계획마저 테이어드의 망언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저 성질 더러운 선장에게서 어떤 잔인한 말이 나와도 스네이크는 막을 수 없었다. "재미있구나. 안 보는 새 칼날을 많이 닦은 것 같군." "아직 당신만큼은 못 미칩니다." "그렇지. 날 따라오려면 좀 더 많은 적을 두어야 하거든. 쿡쿡." "서…선장?" 어째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자 어리둥절한 스네이크가 블랙 버드의 이름을 불렀다. 저 선장이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버…벌주지 않으실 겁니까? 저 아이에게?" "아아." 블랙 버드는 유쾌한 얼굴로 테이어드의 감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웃는 얼굴이었다. "저 바락 바락 대드는 모습이 그.녀.석.을 생각나게 한다. 즐겁구나. 궁지에 몰린 쥐새끼 주제에 고양이 코를 물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간만에 그 녀석의 모습을 저애에게서 보았다." "아아." 그 라디라는 소년 얘기인가. 스네이크는 일단 테이어드의 목숨이 확보된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은 쉬었지만 선장의 독특한 취향만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궁지에 몰아넣고 바락 바락 대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니. 참으로 이상한 취향이 아닌가. 하지만 저것도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저 사람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알기에 스네이크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말해라 성안이여. 수수께끼의 비밀을 말해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말씀드리지요." 테이어드는 고개를 숙여 블랙 버드의 명에 응했다. 성공이다. 자신이 던진 미끼를 그가 물었다고,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에 한 걸음 들어섰다고 테이어드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아직입니까 제독." "조용히 하게 로딘.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는가. 어디 보자. 그렇다면 금색으로 빛나는 보물이란 일단 ……일 게 확실하고…그것으로 왕좌를 빛내라는 것은 …해서 이렇게 …하라는 건가 그렇군! 그런 거였어!! 하, 핫! 이봐 라디!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다! 어떠냐! 나도 할 수 있잖아!!" "풀었다고?" 에녹스는 소위 자신의 '구애'의 상대인 라디에게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보여주려 가장 먼저 불렀지만 라디는 귀라도 후빌 것 같은 심드렁한 태도로 에녹스가 앉아있는 회색의 바위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봐. 어떻게 해석했는데?" "이걸 봐. 금색으로 빛나는 보물로 제왕의 왕좌를 빛나게 하라고 했지? 이것은 바로 파크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말하는 거다. 그것으로 왕좌를 빛나게 하라는 것은 바로 파크의 머리카락을 잘라 연못으로 던져 넣으라는 거지. 그러면 이 연못이 뭔가 변화를 보여서 나를 보물들이 있는 신세계로 보내준다는 것 아니야!! 하하! 어떠냐 라디!!" 라디는 에녹스의 해석이 자신이 해석한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녹스의 해석에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지만 자신이 해석한 것 또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차라리 이 제독의 말을 믿고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 자신이 해석한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진 올바른 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흠…그럴 듯 하군." "그렇지! 어때. 이런 내가 멋있게 보이지 않나?" "아니, 전혀." "거짓말. 나를 동경한다고 했던 주제에." "그건 당신을 몰랐을 때 얘기고!! 암튼." "암튼?" "당신의 추리는 그럴 듯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몇 개 있어." "뭐라고? 이 완벽한 추리에 어떻게 실수가." "보물이 금발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해?" "뭐?" "솔직히, 파크가 제왕의 보물이라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제왕의 보물들은 다 금발인 건가? 그렇다는 얘기는 기록서엔 없었잖아? 당신들도 도빌 항에서 소년들을 납치해 갈 때 금발인 소년만을 납치해 간 것은 아니고." "그야 그렇지만," "확실하지 않은 정보로 파크의 예쁜 머리를 자르는 건 용서할 수 없어. 좀 더 생각해 본 뒤에 추리를 해봐도," "그럴 시간은 없다, 라디." "없다고?" "암. 없고 말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해적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이 산을 올라오고 있을지 모른다. 세 번, 세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사실 다가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지." "아…." 그 남자가 온다, 는 생각에 라디는 갑자기 두려움이 치솟았다. 남자의 큰 손이 또 다시 자신의 허리를 휘감는 것만 같다. "비록 네 덕분에 그 놈들보다 먼저 '제왕의 날개'를 찾아내긴 했다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아. 어서 빨리 보물을 되찾고 그 놈들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런…가." "그래. 그리고 개인적으로, 네가 그 남자와 다시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 질투하고 있다, 는 완곡한 표현을 남자는 당사자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다. 듣고 있는 라디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피함의 창자도 모르는 이상한 남자였다. 이 에녹스라는 태양 제독은. 감정 표현의 표, 자도 모르는 그 남자와 너무도 대조되도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 그 놈이 나에게 표현할 감정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나마 있을 감정인 증오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표현했잖아!?' 라디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스스로에게 놀라 괜히 애꿎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결 좋고 올이 굵은 까만 생머리가 밀려 올라가자 드러나는 반듯한 이마에 키스하고 싶다, 고 에녹스는 생각했지만 말했다간 또 화만 낼 테니 속으로만 즐기자고 흥분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 이거지. 그리고, 지금은 뭐라도 일단 시도해봐야 하는 상황이고." "뭐? 아아. 그 얘기인가. 하지만, 파크는 머리를 꽤 아끼는 녀석인데. 당신도 봤잖아. 관리 잘 된 녀석의 긴 금발을. 자른다고 하면 무척이나 슬퍼할 거야." "뭐, 그거야 물어보면 알 일이고. 대의를 위해서 그 정도의 소품은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지 않나." "뭐라고."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라디가 무신경한 남자의 말에 화가 나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무신경한 남자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련한 소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라디는 에녹스가 또 무슨 파크 가슴에 대못박을 말을 할지 불안하여 일단 무작정 그 뒤를 따랐다. "이봐, 파크." "아, 제, 제독님." "너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들어주겠니?" "저, 저에게요? …네에. 얼마든지요." "착한 아이다." 자신의 말이라면 바다에라도 뛰어들 소년에게 에녹스는 놀아버릴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상으로 준 뒤 파크를 부하들의 무리에서 끌어내어 '제왕의 왕좌'라고 명명된 썩은 연못으로 데려왔다. "저 말이다 파크." "예. 말씀하세요 제독님." "나는 너의 금발을 좋아한다. 알고 있니?" "저, 정말요? 영광이에요. 저 같은 것의 금발은 어차피 제독님의 아름다운 은발에는 발끝도 못 미치는 걸요." "아니야, 아니야, 아름다워. 무척." " !! 감, 감사합니다." 에녹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일까, 갑자기 왜 자신을 띄워주는 말들을 마구 남발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한 번쯤 할만도 하련만, 가엾게도 사랑에 빠진 소년은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그저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는 말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 때, 남자가 잔인하게도 파크의 좋은 기분을 산산이 깨트리는 말을 던졌다. "그래서 말인데 파크, 내가 기록서의 수수께끼를 풀던 중 아무래도 제왕의 왕좌에 던져야 할 아이템이 너의 머리카락인 것 같다는 추리를 해냈다. …줄 수, 있겠지? 이는 나라를 위한 일이고 너를 위한 일이고, 또한 나를 위한 일이니까." "에…예?" "조금이면 돼. 아마 그 길이에서 1피트가 조금 안 되게 자를 거다. 걱정 말아 파크." 마치 '저 앞에 산책이라도 가자' 라고 말하는 듯 가벼운 어조로 에녹스는 파크에게 칼을 내미려 말했다. 파크는 서서히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칼날에 저도 모르게 뒤로 움칫 물러나며 소중하게 길러온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파크…?" "머, 머리를 자르신다고요?" "음. 아주 조금이면 된다. 그저, 저 연못에 뿌릴 만큼 두 줌 정도만 있으면 돼. 파크. 1피트도 안 된다니까?" 1피트도 안 된다, 라고 에녹스는 가볍게 말했지만 파크의 지금 머리 길이는 두피에서 양 1.5피트 정도로, 만약 1피트 길이를 잘랐다가는 모양도 엉성할뿐더러 길이도 엉성하여 아예 짧게 숱을 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17년 동안, 열심히 관리하며 길러온 머리였는데. 파크는 눈앞에서 서운한 얼굴을 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녹스의 모습을 보며 소중한 머리카락에 이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머리카락 두 줌 보다는, 저 사람의 관심 한 줌이 더 소중하니까. "…자르세요." "그래 그래. 그래야 착한 아이지. 잘 생각했다 파크." 에녹스는 잠시나마 파크가 뒤로 물러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이 아이는 자신의 말이라면 뭐라도 따를 아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라디는 에녹스와 파크, 두 사람 모두에게 화가 치밀었다. '뭐야 저건. 파크 녀석, 언제는 내가 실수해서 아주 조금 태웠을 때도 불같이 화를 내더니 지금은 삼분의 이를 잘라내도 그러세요, 라고? 멍청한 녀석! 네가 네 머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지는 내가 잘 알아! 어째서 반항 한 번 해보지도 않는 거야! 네 머리를 자른다고 해서 확실히 제왕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데!!' 그러나 라디는 현재 파크와 싸운 상태인 것도 있고, 또 머리를 자르는 것이 파크 본인의 의지라는 것을 생각해 마음속의 말을 친구에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소년이 마음속으로 독백을 하고 있을 때, 에녹스는 날카로운 칼날을 꺼내 소년이 자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걱 ! 하며 아름다운 금발을 파크에게서 분리해 냈던 것이다. " 아아!" "너, 너 이 자식 적어도 파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쐐애액 !! 탕! 탕! 탕! "!!" "뭐, 뭐야! 무슨 소리지!" "무슨 일인가!!!!!!" 라디가 파크에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머리를 자른 에녹스에게 분노하여 소리를 지르려 할 때, 칼날과도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소총 소리가 들리고 매캐한 연기가 숲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절규와도 같은 단말마의 비명. 습격이었다. "놈들,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가! 피해라 라디, 파크! 지금은 우선 저 놈들을 쓰러트리고 봐야 한다." "!!" 에녹스의 말에 라디는 당장 대피를 해야 하는 긴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었다. 그 남자가 왔다. 드디어, 자신이 탈출한 것을 주위에 있던 다른 이의 죽음으로 비웃으며 서서히 신경을 조여 오던 그가, 드디어 그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 물론, 블랙 버드가 라디만을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당연히 제왕의 보물을 찾으러 왔고, 그것을 위해 라이벌인 에녹스의 병사들을 습격하며 그 수를 줄여온 것일 게다. 하지만 왜일까. 라디는 저 남자가. 에녹스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제쳐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남자가. 자꾸만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것만 같았다.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이런 기분. 도빌 항에서의 전투 때, 남자가 자신을 보고 에녹스와의 대결 중 한눈을 팔았었다. 저 때도,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자신이 저 남자를 끌고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인력 감.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이쪽을 주시한 채,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거슬리는 태양 제독의 부하들을 가볍게 물리치며, 설령 그 손짓이 그들의 목숨을 뺏는다 해도 그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라디를 향해 '그것 봐. 어차피 내 손 안이라고 했잖아'라고 비웃는 듯이. 연재 소설란 입니다 . Subject [창작연재] Golden Age 2권 분량-(완결) * * * "흩어지지 말아라! 진열을 유지해!! 흩어졌다간 놈들의 게릴라 수법에 바로 당하고 말 거다. 놈들은 백병전의 고수들이야!! 놈들의 방향은 어디인가! 등을 보이지 않도록 반대편 방향으로 서라! 소총부대!! 앞에 서서 놈들의 저격수에 맞서라! 창기병은 어디인가! 접근전을 대비해라!!!! 당황하지 마라! 너희들은 아르센의 무적함대 플라잉 클라우드호의 전사들이다!!" 에녹스는 블랙 버드호의 해적들이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발하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보물에 눈이 멀고 사랑에 눈이 먼 상태라 대응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일단 한 번 전장의 흐름을 읽기 시작하자 그는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명령은 신속했고 전술은 정확했다. 병사들의 배치에 어긋남이 없었고 부상당한 병사에 대한 조처도 빨랐다. 대원들은 신속한 그의 명령에 기쁘게 응했고 적을 상대함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마 기합소리와 사기만으로 보기에는 에녹스 군의 승리가 확실할 거라고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으리라. 허나 전쟁이란 때로 사기와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 그들은 밀리고 있었다. "어…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이게!!" 에녹스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병사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며 다가오는 적을 착실히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아까부터. 놈들의 수는 줄지 않고 군복을 입은 자신의 부하들만 속속들이 쓰러지고 있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이 너무 강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군인들을 가볍게 무너트릴 정도로, 갑옷을 입고 있는 부하들의 수족을 잘라낼 만큼. 도대체 어떤 훈련을 해 온 거냐. 결코 허세가 아닌 '무적함대'라 불려온 에녹스의 배와 병사들이었다. 훈련시간도 다른 부대의 배로 하며 그 어느 적에도 뒤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왔는데. 그런 자신의 부하들이었는데. 속수무책이었다. 그 오랜 훈련 시간이 헛된 것이라는 듯. 너는 나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듯이 놈들의 공격법은 하나같이 그 자를 닮아 있었다. 지난 도빌 항에서의 결투 때 에녹스가 참패를 당했던 그 남자, 블랙 버드의 공격법을. 한 치의 헛된 움직임도 없고 몸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재빠르고 정확하다. 잔인함까지 갖춘 그 훌륭한 공격법은 에녹스의 부하들을 하나같이 전투불능 태세로 만들며 서서히 두 진영간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블랙 버드쪽의 월등한 우위 진로로. "제기랄…네깟 죽은 놈에게…… 질 것 같으냐아아아 !!!!!" "앗, 제독!!!" 갑자기 진영을 이탈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에녹스의 모습에 로딘은 질겁하여 소리쳤지만 지금 그는 로딘의 목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아니었다. 생전 처음 겪어본 도빌 항에서의 패배에 이어 이곳 희망봉에서의 연이은 참패. 지금껏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에녹스였지만 그것은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모래성과도 같은 여유였다. 늘 성공과 쉬운 길만을 겪어온 에녹스. 그는 지금 모든 것이 자신이 겪어온 것과 다르게 흘러가자 기본적인 이성마저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 버드가 서 있는 곳은 에녹스의 진영 중 검을 쓰는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에녹스 만큼은 아니어도 대부분 근위대에 필적하는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챙! 챙! " 윽!!" "크아악!!" 그러나 그 뛰어난 실력의 병사들이 블랙 버드가 내지르는 칼 한 번에 너무도 쉽게 쓰러지고 있었다. 하나는 팔이 잘렸고 다른 하나는 절단부에서 내장이 비어져 나올 정도로 깊은 검상을 입었다. "네 놈…감히 내 병사들을!!!!" "나오셨나. 입만 살은 태양 제독 나으리." "뭐가 어째!!" 블랙 버드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몸놀림으로 주위를 둘러싼 두 명의 병사와 맞서고 있었다. 저 상태에서 저 여유로운 미소라니. 저 놈은 정말 괴물인 건가!! 에녹스는 이미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이 남자가 사실은 정말로 죽었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악마와 계약한 좀비라도 되는 것은 아닐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왜. 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그럼 이건 어때? 부하들의 보호에 둘러싸여 있다가 그 부하들이 다 죽어 나자빠져야 그 귀한 얼굴을 보여주는 겁쟁이 나으리. 마음에 드나?" "건방진 자식!! 한낱 해적 주제에 나를 능멸하려 하다니!! 덤벼라! 내가 너와 일대일로 맞서 같은 얼굴이라도 귀천의 차이는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귀천(貴賤)이라…?" 남자는 아름다운 눈을 번득이며 에녹스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이, 천천히 입 안에서 씹듯이 발음을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끼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래! 너와 달리 나는 이런 조잡한 습격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 섬의 지도를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등뒤를 치다니 비겁한 녀석!!" "하. 아르센 해군 장교들은 공격의 기본법인 허점을 찌르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는 건가?" "닥쳐라, 천박한 놈! 너 따위에게 훈계 들을 일은 없어!!" "흥…천박한 놈이라…그래서 그 천박한 놈에게는 제왕의 보물을 넘길 수 없으시다…?" "당연한 소리를 묻지 말아라 멍청한 놈! 너 따위에게 보물을 넘겨줄 리가 없지 않나! 그리고, 너희들 같이 머리 나쁜 해적들은 설명 제왕의 보물을 얻는다 해도 기록서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평생 제왕의 왕좌 앞에서 고민하다가 머리만을 쥐어뜯고 그 앞에서 돌아서겠지." "이상할 정도로 확고한 확신이로군." "당연하지! 나도 이렇게 고심해서 겨우 그 방법을 알아냈는데 너 정도의 놈이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지!!" "호오? 방법을 알아냈나?" "멍청한 놈! 네 놈에게 알려줄 것 같아!!" 에녹스는 제왕의 왕좌를 여는 방법을 묻는 블랙 버드를 비웃으며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블랙 버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성안(星眼)인 테이어드에게 들은 것과 같은 충격적인 방법을 저 남자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방법을 안다면 이런 가벼운 분위기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도 조금 전 자신들이 덮치기 전에 꽤나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을 만한 충격적인 방법이었다. 블랙 버드가 테이어드에게서 들은, 제왕의 왕좌를 '빛나게' 만드는 방법은. "그래…? 대단하군. 우리 측의 성안이 말해준 방법과도 같은 것을 해석해 냈다니. 태양 제독은 역시 대단하군 그래." "뭐? 성안. 성안이라고 했나." 성안이 방법을 말해줬다고 하자 조금 전까진 그래도 여유가 있었던 에녹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궁금증과 불안함으로 뒤덮였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한 것과 블랙 버드가 성안에게서 들은 정확한 방법이 들어맞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겠지.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디는 블랙 버드가 하는 말을 듣고 왠지 불안하여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에녹스의 옆얼굴을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블랙 버드가 말한 방법이 자신이 해석한 그 방법이 맞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에녹스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그 시선이 어떻게 보였는지 에녹스의 옆얼굴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무리 상대가 많아도 라디 쪽을 주시하고 있던 블랙 버드가 번득, 하고 그 은색 늑대와도 같은 날카로운 푸른 눈빛을 빛냈다. 저것이 어떤 의미일런지는 시선을 받는 라디로서도 알 수 없었고 그 시선을 보내는 블랙 버드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화가 났을 뿐. 다른 이를 향해 뻗어 있는 아름다운 목선과 하염없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지 않는 그 눈동자가 그렇게 화가 났을 뿐이다. "분명…성안이 말한 게 확실한가?" "아아, 그럼. 분명히 말했지." 라디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블랙 버드가 불안했다. 안 돼. 그것만은 말하지 말어. 제발. 그러나 남자는 애타는 라디의 얼굴을 보고 더욱 즐거운 얼굴을 하며 그 아름다운 장밋빛 입술을 열었다. "제왕의 왕좌는, 금색의 빛나는 보물로써 열린다고 했지. 바로. 금색으로 빛나는 보물의 생명수로 말이야." " !!" "뭐!!" 라디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파크는 남자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라디는 잔인할 정도로 딱 들어맞은 자신의 해석에 치를 떨었다. 어째서, 안 좋은 예감은 한 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을까. 처음 제왕의 왕좌라는 연못에 왔을 때, 라디는 '이번엔 또 뭔가 물에 관련된 수수께끼겠군, 하고 아련히 짐작을 했었다. 그리고 에녹스가 내민 기록서의 문구들을 보며, 믿고 싶지 않았지만 눈치 채고 말았다. 저 망할 썩을 연못이, 자신의 친구의 생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만은 아무리 수수께끼를 잘 풀어왔다고 해도 자신의 실수일 거라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는데. 저 남자가. 자신이 탈출해온 배의 주인인 블랙 버드가. 라디의 바램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도망쳐 봐야 내 손 안이야. 포기해.' 남자가 웃고 있다. 이것이 네가 도망친 벌이라고. 너 때문에 나는 네 친구를 죽게 만드는 주문을 외운 거라고. 너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듯이 남자는 에녹스와 대면한 상태에서도 계속 라디를 응시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아름답게. 잔인할 정도로 아름답게. 라디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뭐라고 해봤자 자신과 저 남자의 관계는 해적과 슬럼가의 소년.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물론 어이없을 정도의 기막힌 우연으로 인연이 맺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라디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왕의 보물'에 관련된 일, 즉 파크에 대한 것도 라디가 원해서 남자의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 집착은 뭐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증오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한, 그래, 이상할 정도의 집착. 설령 자신 때문에 일에 차질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렇다면 다른 이들처럼 차라리 죽이던가, 그도 아니면 무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남자는 자신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며 마치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와서 괴롭히겠다는 것처럼 라디에게 말하고 있다. 눈으로. 미소로. 뿌리쳐도 뿌리쳐도 다가오는 아름다운 하얀 손으로. "싫어어어 !!!!!!!!!" "라, 라디!?" 에녹스는 뒤에서 자신의 보호를 받으며 파크와 서 있던 라디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블랙 버드는 대항하고 있던 한 명의 병사를 마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베어낸 후, 에녹스의 등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아름다운 그의 미소가 어느 때보다 진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덜컹 내리게 만들 정도로 위험하고 잔인한 분위기가 서렸다. "앗, 에녹스 제독님 위험!!!!!!!" "!!" 서걱!!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무언가 단단한 것이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에녹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변한 것은 없다. 그래, 지금 뭔가 커다란 것이 베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자신의 목도 붙어있고 가슴팍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도 없다. 그래. 괜찮은가 보다. 다시 자신의 레플리카인 저 해적 놈과 칼을 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상했다. 어째서. 어째서 팔이 들어올려지지 않는가. 왜 이다지도 왼쪽 팔이 가볍고, 무섭도록 통증이 찾아오고 있단 말인가. "제독님! 제독님!! 아아!!!!!! 팔이! 팔이이!!!!!!!!!!!!" 파크가 자신의 곁으로 달려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 핏자국이 거나하게도 튀어 있다. 이 귀여운 소년의 얼굴에 핏자국은 어울리지 않는데. 그래. 라디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부드러운 연갈색 피부의 아름다운 소년은? "…어째서." 어째서 저런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 분노? 경악? 그래. 경악이다. 뭔가에 놀라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라디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또한 파크가 보며 울고 있는 자신의 왼쪽 팔을 보고 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다른 이들을 보기 위해 주위를 빙 둘러 보았다. 부하들도 이쪽을 향해 놀란 눈을 금치 못하고 있다. 어떤 녀석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어떤 녀석은 등 뒤에서 블랙 버드 놈의 부하가 덤벼들고 있는데 검을 놓고 이쪽을 향해 입만 벌리고 있다. 위험해. 바보 같은 녀석. 검을 들어야지. 그리고 로딘은? 로딘이 있는 쪽을 찾아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한 로딘이 자신을 쳐다보며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는 들고 있는 커트라스가 온통 피로 젖은 커다란 사내 하나가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아, 저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 분명 블랙 버드가 '스네이크'라 명명하던 놈의 부하. 아무래도 부선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런데 어째서 나의 부선장은 저 놈의 부선장과 달리 일어나 있지 못하는 건가. "……." 에녹스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우선 소년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왼쪽 팔부터 내려다보았다. 왠지 무지하게 보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팔 끝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통증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꽤 깊게 베기라도 한 거라면 어서 지혈을 하고 다시 검을 잡아야겠다. 늘 들고 있던 검이 손에서 떨어지니 너무 허전해서 이상하다. 꼭 팔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제, 제독님!! 흐아아아…이 팔. 어떡해요, 어떻…!!" 에녹스는 한참 동안을 자신의 팔을 내려다 본 후에야 자신의 팔이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검을 잡았던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에 이르는 부분이 4차원에 빠지기라도 한 듯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뿐이었다. " 크윽!!" 그제서야 본격적인 통증이 팔꿈치에서부터 뇌를 잘라먹기라도 할 듯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에녹스는 그때까지 피가 줄줄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있던 팔을 쥐고 낮은 신음성을 뱉었다. "제독님! 허어어!!! 제독니임!!! 이, 이거, 이거로 지혈, 허억!!" "파크…!!" 에녹스는 이미 피에 젖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손수건으로 어떻게든 에녹스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아보려고 했다. 허나 별 소용은 없었다. 열심히 막힌 곳을 순행하고 있던 혈액들은 바깥세상으로의 통로가 열리자 자유를 찾는 수감자들처럼 밖을 향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녹스는 그저 멍하니 그 피들을 바라보며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에녹스는 라디가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어떡해요. 피가 멈추지 않, 으아악!! 이거 놔!! 이 파렴치한 해적 같으니라고!!!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어!! 제독님을 이렇게 만들다니!! 당신도 똑같이 만들어주고 말겠어!!!!!" "쿡…할 수 있다면 해보아라. 단, 그 전에 너는 나를 위해 저 연못에 모든 생명수를 쏟아내게 될 테지만." "!!!!!!!" "파, 파크!!" "너 이 자식, 감히 파크를!! 그 손놓지 못, 으, 으아아악!!!!!!!!!!!!!" "전투 불능의 상태인 주제에 입만 살으셨군. 위대하신 태양 제독 나으리. 그래. 한 손을 잃은 기분이 어떠신가? 허전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이제 곧 모든 수족을 그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 줄 테니까." "이, 천박한 해적 자, 아아악!!!!!!!" 절단된 팔에 발을 올려놓고 가차 없이 비벼대는 남자의 모습에 라디와 파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블랙 버드에게 손을 잡힌 파크는 기어이 실신을 해 마치 생명이 없는 천 인형처럼 남자의 손에 힘없이 흔들렸다. 에녹스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보는 사람에게 아픔이 전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처절했다. 라디는 새삼 남자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자신에게 하는 일도 잔인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그는 '바다의 백정'이었다. 저렇듯 사람을 죽이고 팔 하나를 자르는 일 따위, 길가의 꽃을 꺾는 일처럼 간단했던 것이다. "가…가만두지 않겠다…크윽!! 이 자식…가만 두지 않아!!!" 아름다운 푸른 눈을 붉게 물들이며 분노한 에녹스가 소리를 질렀지만 블랙 버드는 그저 쿡, 하고 에녹스를 비웃을 뿐이었다. 에녹스는 생전 처음으로 실패를 안겨주고 연이은 참패에 이어 자신을 비웃기까지 하는 남자에게 증오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느꼈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다친 팔을 움켜쥐고 에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연한 장밋빛의 입술이 하얀 치아에 찔려 붉은 피를 턱까지 흐르게 했다. 왼쪽 팔에서 분수와도 같이 피를 흘리고 입가에서마저 가느다란 실선을 그리며 피가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은 이제 처절하기까지 했다. 지금 블랙 버드와 에녹스의 모습은, 비록 같은 얼굴이라 해도 그 모습이 너무도 달라, 더 이상 그들을 같은 사람이라 착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블랙 버드는 실신한 파크의 배에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올리고는 제왕의 왕좌라 불리는 썩은 연못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팔을 잘린 에녹스는 자신의 손과 검이 있는 곳으로 기어가 어떻게든 잘린 팔에서 검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블랙 버드는 그런 에녹스를 적으로도 보지 않는 듯 무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가던 그 무기를 다른 손으로 잡던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 각자의 부하들은 리더의 대조적인 모습에 한 쪽은 환호하여 들고 있는 무기들을 머리위로 들어올렸고, 다른 한 쪽은 전의를 상실한 듯 자살 행위 들고 있는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 거기 서!! 파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드디어 등장하셨나. 성에서 탈출하신 공주님." " 누가 공주라는 거냐!! 성이라고! 네놈들은 족쇄를 채워 폭행하고 강간하는 곳을 그렇게 말하는가 보지!!" "글쎄. 내 나름대로 극진히 대접한다 했는데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거 실망인데. 쿡…." "미친…! 어쨌든 파크를 놔줘!! 설마 그 테이어드가 말한 대로 정말 파크의 피를 연못에 부으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라 생각하지?" " 그런!! 그런 짓을 했다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어서 놔줘! 그런 짓을 해서 보물이 찾아질 리가 없어!!!" "재미있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윽!" 남자의 말대로였다. 남자는 라디의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라디의 말에 역행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방향일 정도로 그들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디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친구를 다른 사람들의 목적 때문에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 그래도!! 파크는 아무 죄가 없다! 단지 성안석인지 뭔지 때문에 어이없이 이곳에 끌려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거다! 그런 녀석을 단지 당신들이 보물을 찾겠다는 목적 때문에 죽이겠다고!!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인가!" "훗…너는 나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 "말해봐라 동방의 소년이여. 너는 나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너 역시 저기서 기고 있는 태양 제독처럼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라거나, 혹은 일반 사람들처럼 나를 인육이라도 먹는 식인종이라 생각하나. 그도 아니면, 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가? 파렴치한 강간범에 살인범쯤 되려나? 어느 쪽인가?" 라디는 블랙 버드가 왜 자신에게 저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면서, 그래서 그런 짓들을 했었으면서 왜 자신에게 저런 것을 묻는 것인지. 라디는 남자가 무엇을 바래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예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스네이크의 말을 들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남자는 태어면서부터 부정 당해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흔한 이름조차 받지 못한 자신의 존재를. 물론, 그것을 왜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남자가 싫어하고 미워할 존재일 거라 생각되는 자신에게. 그러나 라디는 질문에 답을 하는 동안이라도 파크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으므로 남자의 질문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당신이 버려졌다고, 태어났을 때부터 그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해서 자기 자신마저 부정한다면 당신은 그 정도의 못난 사람밖에 되지 않는 거다. 나 역시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오줌색 얼굴이라 욕하지만 나는 그저 도빌 항의 라디일 뿐이다. 네 노예도, 오줌 빛 얼굴의 더러운 유색인종도 아니야!!" "!!" 파크를 안고 있던 블랙 버드는 분명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생가한 라디의 대답이 예상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라디의 맑게 빛나고 있는 밀 색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의지가 넘치는 아름다운 얼굴. 빛나는 검은 머리. 빛나는 검은 눈동자. 허름한 옷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몸까지. 저 아이는 어째서 저리도 빛나고 있는 것인지. 그래. 마치 전에 자신의 배에서 억지로 안을 때 빛나던 금색의 눈동자처럼. "그렇지만 역시 당신이 나에게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망할 자식. 여기서 빠져나가면 반드시 당신에게 복수할 거다. 두고 봐." "뭐?" 하하…블랙 버드는 웬일로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나 했던 소년이 여지없이 욕설을 하며 자신을 노려보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왜 다른 녀석이면 당장이라도 커트라스를 휘둘렀을 행동도 저 소년이 하면 이렇게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인지. "역시…족쇄를 풀어주지 않고 평생 가둬뒀어야 했어…망할 녀석. 이번에 잡아가면 평생 방에 가둬두고 내보내지 않을 테다." "뭐라고?" 라디는 남자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해 다시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파크에 대한 것이라도 말하지 않나 해서 걱정스레 살펴보았지만 아직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두 번 다시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겠지. 잘 봐둬라 소년. 네 친구는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터이니. 마지막 가는 얼굴은 지켜봐줘야겠지." " !! 뭐, 뭐라고! 안 돼! 파크는 안 돼!! 왜 그 녀석이야!! 그 녀석은 정말 나랑 도빌 항에서 평범히 살고 있던 녀석이란 말이야!! 제왕의 보물이라니 말도 안 돼!! 왜 당신들이 멋대로 정한 이름 때문에 그 녀석이 죽어야 해! 뭐든 들을게!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을 테니!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죽이지만 않으면 무슨 말이든 다 듣겠다. 그러니 제발 그 녀석은 놔 줘. 나는 마사 아주머니에게 그 녀석을 보내줘야만 해! 제발!!" 라디는 태평한 대화를 하다가 갑작스레 마음이 바뀌어 기절해 있는 파크에게 커트라스를 들이대는 블랙 버드에게 애원했다. 갑작스레 겪은 두 달 여의 힘든 경험들로 인해, 지금 라디의 머릿속에는 파크를 데리고 도빌 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미워하고 있다고…?" "그래. 나 때문에 제독에게 칼을 맞기도 하고, 물론 이유가 많겠지. 그러나 내 친구는 죄가 없다. 부디 봐줘. 매일 매를 때려도 좋아. 부디 파크만은 살려줘!!" "호오…뭐든 다 하겠다라…그거 참 유혹적인 제의이긴 하다만…어쩔 수 없구나. 네 친구가 아니면 안 되는 역할이거든. 다른 대안이 있다면 네 정성을 봐서 생각해 보기도 하겠다만. 뭐 아쉬운 일이군." "블랙 버드 !!!" 자신의 생명을 건, 모든 것을 건 애원에도 불구하고 파크를 향해 커트라스를 높이 쳐드는 블랙 버드의 모습에 분노한 라디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가려 할 때, "…대안은 있습니다. 검은 독수리여." " !! 당신은!!" "뭐…라고?" "대안은 있습니다. 블랙 버드. 그 소년을 죽이지 않고 제왕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요." "무슨 소리지. 헛소리를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헛소리라니요. 저는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오직 암흑밖에 보이지 않는 저의 눈에 보이는, 단 하나의 진실을." "진실…이라고?" "그렇습니다. 블랙 버드. 제 눈에는 보입니다. 당신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이. 오직 저만이 볼 수 있는, '제왕의 보물'이요." "……." "라디, 라고 했나요? 동방의 소년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의 친구는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온전히요." "그, 그게 정말인가? 테이어드. 아니, 성안.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테이어드의 등장에 당황한 블랙 버드는 테이어드의 속내를 알아채기 위해 생각에 빠지고, 친구를 구할 수 있다는 절대 절명속의 희소식에 얼굴을 밝게 하며 테이어드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테이어드가 잠시의 침묵을 끝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자신이 숨겨온, 절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충격의 진실을. "그것은, 당신이 바로 진정한 '제왕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소년. 라·디아뮤." 제15장 희망은 무너지리라 " !!!!" "뭐, 지금, 뭐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너…더 이상 헛소리를 하면 아무리 스네이크 때문이라 해도 가만두지 않을…," "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블랙 버드. 그리고, 당신도 이미 느꼈을 텐데요. 소년이 보물이라는 것을." "그런 일은 없다." "그렇게 확신할 만큼 자신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정말로 한 번도 보지 못했나요? 당신이 그를 안을 때면,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금은요동을." "!!!!!!!!" "제왕의 보물은, 제왕과 만남으로써 그 빛을 더하는 법이지요. 특히나 그 제왕의 '애정'을 받으면 더욱더." "도대체…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테이어드 당신. 내 눈동자는 검은색이야. 금은요동이란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라디는 자신이 남자에게 안겼다는 사실을 테이어드가 알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조금 전부터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테이어드의 말에 부정을 하지 않는 블랙 버드의 모습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서 금빛이라니, 그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테이어드.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하…?" 테이어드는 남자의 말에 놀랐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블랙 버드는 그 모습에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굳은 표정으로 테이어드의 입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 거짓을 말할 거라 확신하여, 조금 전의 것은 거짓이었다고 말하기를 바라면서. "이거, 이거. 블랙 버드 정도 되시는 분이 대상이 좀 달라졌다고 해서 제왕의 보물을 포기하시기라도 하겠다는 말투시군요? 뭡니까. 설마 저를 못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죠. 제 눈엔 지금도 너무 선명히 보입니다. 당신이 서있는 파크라는 소년 쪽이 아니라, 동방의 소년 라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광채가요. 그래요. 바로 저 쪽이군요. 이래도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요?" "!!" 블랙 버드는 눈이 보이지 않는 테이어드가 라디가 서 있는 곳을 정확히 집어내자 그제서야 테이어드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짓이.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저 자신에게 작은 복수라도 해보기 위해 하는, 그런 농담이 아니었단 말인가. 테이어드는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지금만큼 화가 나고 답답했던 일이 없었다. 만약 눈이 보인다면, 지금 당장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말에 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터인데. 자신이 한 일의 성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터인데. 테이어드가 생각한 복수란 이것이었다. 스네이크를 통해서 자신이 저 '라디'라는 소년의 대용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테이어드는 그 날부터 저 남자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러던 중 테이어드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분명 선원들이 말하기로 '제왕의 보물'은 태양 제독이라는 자에게 빼앗겼다고 들었다. 그래서 희망봉으로 배를 돌려 당지에서 만나 탈환하기로 결정 되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눈에는 전에 제왕의 보물을 보았을 때의 금빛 광채가 머물러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시력이 없는 자신에게 그 빛이 너무 강렬하여 잔상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빛은 항해를 하는 내내, 일주일이 가고 열흘이 넘어 보름에 가까워질 때까지도 테이어드의 눈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잔상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밤이면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게 테이어드의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보물이 이곳에 있어, 보물이 이곳에 있어 라고 말해주듯이. 그러던 중 알게 되었다. 선원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잡담들 중에서 선장의 독특한 취향과 밤마다 떠날 줄을 모르는 감방 안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대해서. 그 신음의 주인공이, 전에 도빌 항에서의 전투 때 제왕의 보물이라는 소년 곁에 있던 라디라는 소년이라고. 그리고 그 날 저녁,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 블랙 버드의 라디를 향한 기행들을. …테이어드는 미소 지었다. 드디어 자신에게 기회가 온 것을 깨닫고. 자신을 어여삐 여겨 복수를 할 기회를 준 창세신에게 감사하며. 그리고 지금, 자신은 시원하다 못해 통쾌할 정도로 남자에게 복수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라디라는 소년이 보물이라는 걸 깨닫자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정말로, 지금 단 한 순간만이라도 시력이 돌아온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가…진정한 제왕의 보물…이라고." "그렇습니다. 보물의 진정한 진명은 라·디아뮤. 아마도 소년을 돌보았다는 그 여인이 줄여서 부른 것이겠지요. 뭐 여러 가지를 살펴봐도, 파크라는 소년보다는 라디가 보물의 조건에 들어맞는 군요." "……." "그러니 어서 목표를 이루십시오, 검은 독수리시여. 그 소년의 심장을 찔러 그 피로 왕좌를 적시면 당신은 제왕이 되고 천하를 얻으실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반려로써 상대방을 제왕으로 만드는 '보물'의 역할이니까요." "…이것을…항해 기간 내내 생각해 왔던가…용의주도한 놈." "후후. 글쎄요. 아마도 당신을 만나서 겪어온 몇 달 동안 절로 익혀진 것 같습니다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저를 수도원에서 납치한 사람은 제 앞에 계시는 분이 아니신지." 사실, 테이어드는 블랙 버드가 라디를 죽이건 말건 상관없었다. 죽이면 죽이는 대로 저 냉혹한 남자가 처음으로 감정을 가진 이를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안 죽이면 또 안 죽이는 대로 블랙 버드가 진정한 제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어느 쪽이든 테이어드의 승리로 내정되어 있던,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테이어드의 완승이었다. 한편, 블랙 버드의 손에 안겨 정신을 잃고 있던 파크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제왕의 보물'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게 거짓이었다니. 자신이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왜 자신을 보고 에녹스가 가지고 있던 성안석은 폭파한 것일까. 아니, 파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분명, 제왕의 보물의 파동은 옮는 것 같다고 에녹스는 말했었다. 자신은 라디와 함께 십칠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했고 잠을 잘 때는 하나밖에 없는 침대로 인해 늘 좁은 공간에서 서로 몸을 붙이고 잠을 잤었다. 그리고 전에 들었을 때는 혹시 혹시 했던 것이 이제야 확실히 기억이 났다. 어머니가 슬럼 가의 아이가 이름이 길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며 줄였던 라디의 본래 이름. 라·디아뮤. 그래서 자신을 보고 성안석이 미약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랬던 것이 라디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껴안자 진정한 보물을 보고 폭발했던 것이고.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저 블랙 버드라는 해적이 라디에게 집착했던 것도, 에녹스가 라디에게 끌렸던 것도. 왜. '제왕의 보물'이었던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지를. "도대체…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내 이름이 라·디아뮤인 것은 맞지만 그게 보물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 내가 파크 대신 죽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야. …내가 왜?"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가 택한 제왕의 보물은 당신입니다, 라디." "테이어드…." "어서 선택하십시오. 해적의 왕 블랙 버드. 그를 죽이고 진정한 제왕에 등극하겠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쫓아 한 사람만의 제왕이 되겠습니까?" "… 뭐?" "기분 나쁜 녀석이군 성안이란 녀석은…나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보겠다 이거냐?" "후후. 설마요. 저는 단지 당신을 돕기 위해 진실을 말해드렸을 뿐입니다. 선택하세요. 제왕의 보물은 당신의 눈앞에 있습니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저랑은 상관없는 일." 라디는 자신을 무시한 채 블랙 버드와 테이어드가 나누고 있는 대화를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백 보 양보해서, 자신이 제왕의 보물인 것은 인정을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저 잔인한 남자는 지금 당장 자신을 붙잡아 그 심장을 찔렀어야 하는데. 왜 저렇게 멍하니 서서 주먹만을 꼭 쥐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마음을 쫓는다는 말은. 잘못 들은 말은 아니었다. 분명 이 귀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흘러 들어온 말이었다. 마음이라니, 무슨 마음? 저 남자가, 나에게? 처음 본 순간부터 죽이려고 했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도 죽지 않을 만큼 고문했던, 그렇게 자신을 증오하던 저 남자가? 라디는 테이어드가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저 곳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저 눈이, 저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눈이 증오가 아닌, 다른 뜻이라고? 분명. 테이어드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 저 남자를 봐 테이어드. 다가오고 있어. 나를 죽이러. 제왕의 보물이 나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내 심장을 찔러 진정한 보물을 차지하려고. 나를 찌르려고 걸어오고 있어. 저 슬픈 눈이 절대 나를 위한 것은 아닐 거야. 왠지 모르게 내 상처를 치료해 주던 눈과도 닮아있는 듯 하지만, 절대 그런 것은 아닐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나를 죽이러 이곳으로 올 리가 없으니까. "……." "죽이러, 온 건가." "…그래.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을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으니까." "아아. 알고 있어." "죽이고 말 거다. 죽여서, 제왕의 보물을 차지해서 나를 죽이려 했던 그 집안의 모든 이들을 말살시키고, 온 세계를 지배하고 말 거야." "원대한 야망이시네. 디딤돌이 된다니 영광이라고 말해줄까?" 블랙 버드는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린 채로 라디에게 다가와 말했다. 푸른빛이 도는 아름다운 은발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여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래. 내 야망은 원대하지. 그러니까 너 따위 슬럼가의 소년, 한둘쯤 죽는다고 개의치 않겠다." "그래." 블랙 버드는 순순히 대답하는 라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찌푸린 눈썹을 더욱 짙게 찌푸리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조용히 라디의 손을 잡아, 제왕의 왕좌라 불리는 연못으로 끌고 갔다.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친구 파크의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찮다. 그래도 이 일이 끝나면 에녹스가 파크를 집으로 데려가 줄 거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눈앞에서 다가오는 칼을 가벼운 마음으로 받지 못할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한낱 슬럼가의 거렁뱅이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죽여. 어차피 당신 배에서 그 상태로 며칠만 더 있었어도 죽었을 것. 며칠 뒤로 미뤄진 것뿐이지." "…정말 그것뿐인가." "그래." 이상하게도 자꾸 말을 끌며 좀처럼 칼을 내려치지 않는 블랙 버드에게 라디는 마지막으로 단호히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도, 어째서 자신이 제왕의 보물이라는 거창한 것인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은. 테이어드가 말한, 마음을 쫓아 한 사람의 제왕의 되겠느냐는…거기서 말한 남자의 마음. 그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기 위해 블랙 버드가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옴으로써 그 또한 답이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테이어드가 생각한 것이 틀렸다는 답이. 스르릉. 눈을 감은 라디의 귀에 블랙 버드가 커트라스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모든 것이 끝이다. 이제는 도빌 항의 코주부 아저씨를 보는 것도, 코니를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것도, 파크에게 갖다 줄 고기 때문에 기뻐하는 일도. 모두 끝이다. "그래…. 내가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그 동안 내가 당한 괴로움과 아픔, 죽음들을 위해 여기까지 버텨왔다. 너 하나 때문에 내가 머뭇거릴 순 없어. 비록 너를 죽임으로써 내 가슴에 한 점 앙금이 남는다 해도, 나는 나를 위해서 그리 할 것이다." "……그래." "쿡쿡. 그러셔야지요." 테이어드는 마음을 정한 블랙 버드를 멀리에서 보면서, 혹은 들으면서 천박하다 싶을 정도로 웃음을 남발했다. 그것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 테이어드만이 알 수 있는, 소년도 모르고 남자 자신도 모르고 있는 블랙 버드의 속마음을 테이어드만이 알고 있어서일까. 테이어드는 서로의 마음도 모르는 채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두 사람의 상황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면, 자신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네이크에게 다가갈 것이다. 모든 것을 털어버린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을 능멸했던 블랙 버드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연 자의 목숨을 스스로 끊은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블랙 버드의 모습을 즐기면서. 철컹. 남자의 손이 올라가고 들고 있는 커트라스의 칼날이 소년의 마른 가슴 위 심장 부근에 멈춰졌다. 그리고, 남자가 어떠한 결심을 하고 크게 호흡을 들이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보물은 내 것이다아 !!!!!!!!!!!!!!" "!!" "에녹스 제독!!" 서걱!! 두툼한 근육질의 단백질 층이 베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연못가에 울리고, 블랙 버드는 자신의 배 위로 솟아 있는 날카로운 칼날을 보며 그 위로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 존재를 확인시켜주듯 옆으로 주욱 하고 내장을 베어내는 해군의 검. 그리고. 자신이 검을 잡는 팔을 꼭 쥐고 눈을 꼭 감고 있는, 파크라는 이름의 소년. " 크윽!" "크하하하!! 맛이 어떠냐!! 비록 네 놈이 자른 왼팔 때문에 제대로 된 검맛을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이것이 귀족의 검법이다!! 네 놈이 하는 천박하고 난삽한 검술 따위와 차원이 달라! 하압!!" " !!!!!!!!" 다시 한 번 길게 옆으로 그어 내리는 칼날에 남자는 소리도 지를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다. 산 채로 내장이 잘라지는 끔찍한 느낌. 수많은 죽음을 겪어온 남자도 서있을 수가 없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흥…건방진 놈…사생아 주제에 건방지게…진작에 죽었어야 할 놈이 세상에 나와 설치면 그렇게 되는 거다. 감히 내 팔을 자르다니. 두고 봐라. 보물만 찾고 나면 네 놈도 나와 똑같이, 아니, 더 이상 네놈과 똑같다는 말은 끔찍하다. 나와 달리 온 팔과 다리를 잘라주지. 몸통 하나만으로 기어서 이 섬에서 살아가도록 말이다!! 하하하하!!!!" "크…으…!" 블랙 버드가 막 라디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려는 찰나, 그가 라디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기 전에 아주 잠깐의 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잘린 팔을 지혈해 다른 쪽 팔로 칼을 들고 온 에녹스가 그에게 분노의 일침을 가했다. 기실, 에녹스보다 월등한 실력의 블랙 버드인지라 평소라면 쓰는 손이 아닌 반대편 손으로 하는 허술한 공격이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블랙 버드는 칼을 든 채로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했고, 또한 그의 눈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정신을 차린 파크가 서서히 일어나 다가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에녹스는 마음 놓고 블랙 버드를 향해 검을 날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생각보다 더욱 대 만족이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이걸로써 놈은 전투불능이다. 자신도 한 쪽 팔이 잘려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놈은 복부를 뚫림으로써 일어서서 균형을 잡는 것도 불가능했다. 놈의 진영에 있던 성안이란 놈은 비록 도망가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눈 먼 소경인지라 아군을 불러올 수도 없을 테고 길을 가다 뱀에게 물리지만 않으면 다행일 터. 자신의 승리다. 죽지 못해 다시 살아 기어 나온 좀비의 승리가 아닌, 본래의 오리지널인 자신의 승리!!!!!!!!! "큭큭큭큭…!!" "에녹스…제독…." "보았느냐 라디. 역시 나의 승리다. 암. 이런 놈에게 내가 질 리가 없다. 비록 팔 하나를 잃긴 했지만 나는 보물을 찾은 뒤 놈의 양 팔 다리를 자를 것이다. 그리고 알을 품은 클랜트가 있는 곳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그곳에는 틀림없이 돌림병이 돌고 있지. 놈은 그곳에서 출혈과다 또는 돌림병, 그도 아니면 굶어죽을 것이다. 큭큭큭." 라디는 지나친 흥분 상태인 듯 눈을 벌겋게 해서 톤이 높은 목소리로 웃어대는 에녹스의 얼굴을 봤다. 마치 실성하기라도 한 사람 같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그의 상태는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크크…라디. 어떠냐. 이래도 내가 제왕이 아니냐. 저딴 놈보다 내가 못하단 말이냐. 말해봐라. 이제는 나를 제왕이라 인정해 주겠지." "제독…정신 차려." "어서 말해!! 내가 제왕이라고!!!" "!!" 그는 지금 미쳐 있었다. 언제나 고상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용맹했던 태양 제독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자신을 노리는 추격자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 수를 가리지 않고 광인(狂人)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 당신이 제왕이야." "후…후하하하!!!!!!!!! 그렇지!! 내가 제왕이다!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를 잇는, 그들의 환생이 바로 나다!!! 내가 제왕이야!!!!!!!" "……." 그러나 라디는 눈앞에서 제왕이라 웃어대는 남자보다, 남자의 등 뒤에서 배를 움켜쥐고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남자가 더욱 신경 쓰였다. 바보 같으니라고. 그렇게 원하던 순간이라고 했으면서, 왜 그 중요한 순간에 칼날을 주저했단 말인가. 왜 파크같이 평범한 소년의 살기조차도 감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 번이면 끝나는데, 단 한 번의 칼질이면 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어째서. 라디는 지금 멀리서 이 쪽의 상황을 볼 수 없어 나무를 쥔 채 불안히 떨고 있는 테이어드를 보며, 그가 말한 것이 어쩌면 사실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남자의 마음. 그 마음을 쫓으면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한 것. 즉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이 마음을 따른다는…그런 뜻. "크크…라디." "…제독." "내가 다 들었다. 암. 듣고 말았지. 크크…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래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였어, 네가. 응?" "!!" "네가 제왕의 보물이란 걸 다 알고 있다. 그러니 허튼 짓 마라. 만약 그랬다간 안 그래도 쓰는 팔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은데 내 칼이 어디를 찌를지 몰라. 아프기는 싫지? 내 단번에 끝내주마. 사랑하는 네가 편히 내 왕좌를 빛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사랑스러운 라디." "제, 제독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 넌 조용히 하고 있어!! 보물도 아니면서 보물인 척 하고 있었던, 가짜 주제에!!" "! 그런…!!" "무슨 소리야, 제독! 파크가 알고서 한 것이 아니," "어떻든 상관없어!! 어쨌든 보물은 라디 너고 나는 이제 네 심장을 찔러 내 세상을 가지리라. 아아 사랑스러운 라디. 걱정 말아라. 네 심장이 멈추더라도 나는 네 눈동자를 뽑아 고이고이 간직할 테니. 쿡쿡쿡." "끼야악!!" "제독…당신…!!!" 에녹스의 그답지 않은 잔인한 말에 파크는 소리를 질렀고 라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러나 지금은 그다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 광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녹스의 정신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섬에 들어오면서부터, 제왕의 보물을 찾기 위한 항해를 하면서부터 병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것이 계속 누적되어 블랙 버드에게 완벽한 실패감을 맛본 지금 그 병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에 무너지고 마는, 허무하고 부질없는 모래성의 모습을. "왜. 내가 이상한가? 걱정 말아라. 나는 지극히 정상이니. 그래. 그렇고 말고. 누구든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한다 라디. 그리고 제왕이 되고 싶어 하지. 그러니 내가 정상이다. 저기 누워있는, 사랑 때문에 너를 죽이기를 주저한 바보 같은 패배자가 정상이 아니라!" "! 무, 무슨 소리를…!" "왜. 설마 모른다고 말할 참이냐? 이 내가 뒤에서 들어도 다 알겠는 것을. 정말 저 자식은 바보가 틀림없어. 흔들리는 자기 마음도 알아채지 못하고 갈등하다가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뭐, 저 놈이 저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고 이름조차 얻지 못한 것이겠지만! 하하하하!!!!" "그런…말도 안 되는…저 자는 분명 나를…!!" 나를. 라디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해보아도,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남자가 자신을 미워한다거나 증오한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를 증오하고 있겠지'라는 말에 '내가 너를 증오한다고…?'라며 라디에게 되물었던 블랙 버드. 한 번도. 단 한 번도 미워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외려, 그 아름다운 눈은 늘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굳이 말로 표현하려 한다면 '너를 원해' 라는 그 말. 너를 원해. 너를 원해. 라디의 작은 몸을 억지로 비집어 열며 들어올 때에도, 그로 인해 상처 입은 곳을 치료해줄 때도, 혹은 라디가 그의 욕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해 그 몸을 밀어낼 때도 그의 표정은 늘 한가지였다. 너를 원해. 그 말뜻을 이제야 눈치채다니. 조금 전, 바로 조금 전에도 남자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살려 달라 말하면, 살려줄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칼날을 멈추고 있노라고. 그러나 못 알아챈 라디 덕분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고 지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아무도 알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 그의 가슴은, 이미 그 박동을 멈추고 있다는 걸 뜻하는 듯 했다. 왜 몰랐을까. 왜 자꾸만 에녹스와 블랙 버드를 비교하게 되었는지를. 왜 자꾸만, 자신을 아껴주고 웃는 얼굴만을 보여주는 에녹스보다 서늘하고 쓸쓸한 눈빛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그 남자가 생각났었는지를. 왜. 왜 자꾸만. 남자를 생각할 때마다 미워하려 미워하려 하는데도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마음속에 먼저 들어섰는지를. "뭐야. 정말 몰랐었나? 하…! 이거야. 정말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닌가. 나야 사랑스러운 네가 저 남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은 고맙지만 저 남자도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군. 한 번도, 네게 표현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라디와 남자에게 에녹스가 바보라 욕한다. 바보 같은 자신. 바보 같은 저 남자. 바보 같은 남자는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바보 때문에 지금 죽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고 바보 같은 자신은 지금 그 마음을 받지 못해 죽을 위기에 처해있다. 누가 더 바보인 걸까. 우리. 이봐 블랙 버드. 이름도 없는 남자. 일어나서 말해봐. 응? 우리 중에. 누가 더 바보인 지를. "자 그럼…사랑하는 라디를 위해 저 멍청한 녀석 대신 고백도 해주었겠다. 어때.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을 실행해도 되겠지?" 스르릉. 이미 여러 번을 들어본 것 같은, 이제는 끝났을 법도 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소리는 또 다시 라디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날을 금빛 해 아래로 드러내 라디의 검은 눈동자를 금빛으로 물들이며. 마치 눈앞에서 목숨을 노리고 다가오는 남자의 아름다운 별명처럼. "아, 안돼요 제독님! 라디를 죽이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당신은 라디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 칼을 거두세요. 예!?" "뭐야…저리 가라고 했지 않나 가짜 제왕의 보물!!!!!!!!" "아악 !!!" "파크!" 라디를 죽이려는 것을 파크가 말리려 하자,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에녹스가 그런 파크를 거칠게 밀쳐냈다. 태어나서 운동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연약한 체력의 소년은, 그런 에녹스이 손짓에 맞아 크게 뒤로 밀려나며 다시 실신을 하고 말았다. "당신, 정말 미쳤군!!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저 애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호오? 남 걱정할 여유가 있나, 사랑스러운 라디? 너는 지금 네 눈앞에서 너를 노리고 있는 이 검이나 걱정해야할 텐데?" " 큭." 파크에게 한 처사에 화가 난 라디가 그에 대해 따지려 하자, 잘리지 않은 오른팔로 검을 든 에녹스가 그 검의 끝으로 라디의 가슴께를 쿡, 하고 찔렀다. 조롱하는 듯도, 희롱하는 듯도 한 그 움직임에 라디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자신이 제왕의 보물이라지만, 지금까지의 일들에 지쳐 조용히 그들의 칼날을 받으려 했다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라디는 차라리 자신이 파크의 대신이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걱정하시는 마사 아주머니를 안심시켜 드릴 수 있다고. 어차피 고아였던 자신이 횡사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차라리 잘 된 것이라고. 그러나. 정말로 이런 것은 아니다. 라디는 블랙 버드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래. 그의 억울했던 지난 세월들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아니,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희생되는 것이 억울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길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그와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얼마나 쓸쓸하고 서글픈 눈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미워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남자의 배에서 탈출하고 난 뒤 계속 남자를 생각했던 자신의 마음이라면 아마도 남자를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억울하게 생각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그러나 이런 것을 위해서. 에녹스의 허영심을 위해서 이유 없이 희생되는 것은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누구보다 사랑한다 말하던 남자는 자신이 제왕의 보물이라는 걸 깨닫자 마자 바로 은색의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며 말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라고. 그리고 지금, 마치 금새 웃기라도 할 것 같은 즐거운 얼굴로 자신의 심장에 칼날을 겨누고 있다. 그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연못을 적셔, 더욱더 자신을 태양처럼 빛나게 해줄 보물을 찾기 위해. 단지 그것을 위해. "자 그럼…간다, 라디. 아까도 말했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이 날카로운 칼날에 다른 곳을 찔린다면, 꽤나 아플 테니까. 나는 사랑스러운 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단다. 후후…." 반 광란의 상태로 아름다운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트린 에녹스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라디의 가슴에 겨눈 칼을 고쳐 쥐며 얼굴의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라디는 그 아름다운 미소와 얼굴이 무저갱의 악마보다도 더 흉하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의 이중적인 얼굴이 혐오스러웠다. 철컹. 조금 전에도 들었던, 블랙 버드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다가 머뭇했던 것처럼 에녹스도 똑같이 라디의 심장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곳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블랙 버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아름다운 동방의 소년, 라·디아뮤." '싫어.' "아름다운 너의 몸을 안아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뭐. 다음 생에는 반드시 기회가 있겠지.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라. 쿡쿡." '싫어. 저 남자에게 죽기는 싫다.' "잘 가라." '싫어!!!!!!' 챙!! " !! 다, 당신…!" "뭣! 바, 바보 같은 일어날 수 있을 리가!!" "네가…말했었지……." "이, 이 좀비 같은 자식." "그래. 네 말대로." 라디의 심장으로 향하는 에녹스의 칼날을 막은 것은 죽었을 거라 확신했던 블랙 버드의 검이었다. "나는 좀비다…네가 죽여도, 너희 집안이 아무리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지. 나는 절대로, 절대로 너에게는 죽지 않는다. 설령 식인어에게 이 몸을 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너에게는, 너에게는 죽지 않는다. 위선의 태양이여." "웃기는 소리!! 너의 얼굴은 이미 죽어있는 자의 것이거늘. 그래.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통을 끊어 주마 이 흑인 노예자식!!" 우그그그그… 콰앙!! "!!" "뭐, 뭐야!" "제왕의 보물은…." "이 망할 좀비 자식. 너인가! 네가 폭탄을 설치한 것인가!" "후후…그래. 제왕의 왕좌는 어차피 너희가 찾아서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는 착실히 섬 주위에 폭탄을 설치했지." "이 자식! 어쩐지! 오두막에서 습격을 안 해온다 했더니 그런 것이었던가!!"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 나를 제외하고. 그리고 제왕의 보물을 죽일 수 있는 것 또한, 나 뿐이다. 너는 건드릴 수 없어. 절대로!!" "누가 할 소릴!!!" 라디는 갑작스레 들려온 커다란 폭발음과 블랙 버드 둘에 모두 놀라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눈만을 크게 뜨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왔다. 돌아왔다 검은 독수리가. 죽은 줄 알았는데. 분명 죽었을 거라 믿었는데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죽이기 위해 휘두르던 그 칼을 나를 살리기 위해 다시 휘둘렀다. 검은 새가 말했다. 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다른 이는 건드릴 수 없다고. 그렇다면. 저런 말을 들었다면. 남자의 진심을 이미 들은 것과도 같지 않을까. 챙! 챙! 팔을 잘린 남자와 복부를 난도질당한 남자, 얼굴이 같은 두 남자는 서로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또 다시 격돌했다. 검을 한 번 마주할 때마다 서로의 피가 서로의 얼굴을 적셨고, 기합을 한 번 내뱉을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핏기 또한 가셔졌다. 생명과 생명을 건 절대 태양과 절대 암흑. 두 제왕의 사투였다. 쾅! 콰쾅! 쾅!! 그들이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블랙 버드가 설치했다는 폭탄은 연신 터지고 있었고, 멀리서 양측 병사들의 놀란 비명들이 들려왔다. 남은 숫자가 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대립을 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터진 폭발음에 놀란 양측 병사들이 도망치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블랙 버드의 부하들까지 도망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예정보다 빨리 터졌거나 예정에 없던 폭발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양측 진영의 리더인 남자들은 이쪽의 사투를 신경 쓰느라 자신들의 부하를 돌아볼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헉…허억. 크윽! 제기랄." "후우…후우……." 둘 다 큰 부상을 입고 있는지라 상황은 비슷했지만 일단 출혈로는 에녹스가 우세했고 체력으로는 블랙 버드가 유리했다. 허나 어느 쪽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치명상을 입은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한 시라도 빨리 승부를 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실력으로 월등했던 블랙 버드의 부상이 더 심했기에 지금 그들은 웬만해선 승부가 나지 않았다. 폭탄의 굉음은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고 남자들의 출혈은 심해져만 갔다. 더 이상 끌었다간 모두 죽겠다고 라디가 생각했을 때. 챙 풍덩!!! "!!" "제기랄!!!" "나의…승리다. 태양이여. 암흑의. 잊혀진 자의 승리다." 길어질 것 같았던 두 남자의 사투는 한 쪽 손을 잃어 균형감각을 상실한 에녹스의 패배로 끝이 났다. 에녹스는 분한 얼굴로 블랙 버드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의 검은 저 멀리 제왕의 왕좌인 연못으로 던져진 상태였고, 온전한 오른 손마저 방금의 공격으로 제법 깊게 베여 있었다. 더 이상 싸워봤자 헛수고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들려오는 굉음이, 이제 이 산에서 제법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모두가 폭탄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에녹스는 분한 듯 이를 악물로 지옥의 악귀처럼 블랙 버드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온전한 두 다리를 놀려 블랙 버드의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태양 제독이 적을 등 뒤에 두고 도망치다니. 저 또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에녹스의 정신은 몰려 있었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철저히 뭉개고 있는 한 남자 때문에. 쾅!! 쾅!! 콰가가 콰앙!!!!! 터벅…. "!!"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폭음과 함께, 피가 철철 흐르는 복부를 아름다운 하얀 손으로 막으며 남자가 라디에게 걸어왔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자들의 사투를 지켜만 보고 있던 라디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그제야 블랙 버드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아름다운 은청의 은발이, 맑은 날의 바다처럼 아름다운 푸른 눈이, 백도자기처럼 하얀 피부가, 큰 키지만 너무도 완벽히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몸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혹여 그를 닮은 다른 이가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와 같은 얼굴의,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으면서 스스럼없이 칼을 겨눈 태양 제독은 아닐까 하고. 허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저 쓸쓸하고 공허한, 너무나도 깊은 슬픔을 간직한 눈동자를 볼 때면, 저 사람은 태양 제독과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원한다'라고 말하는 듯한, 저 뜨거운 푸른 염(炎)이. 무엇보다도 남자를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가자." "…보물은…어떡하고?" 지금 자신을 죽이고 연못에 그 피를 뿌리면, 어쩌면 폭발과는 관계없이 보물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직 어떤 것인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파라이아드와 파라이아 두 신의 숨겨 놓은 보물. 아마도,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것이라는 것만은 세상 사람들 모두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 것을 두고. 그냥 간다고? "…됐어. 가자." 남자는 다시 한 번 가자고 라디에게 말했다. 됐다, 라는 말을 라디에게 강조하며. 참으로 바보 같은 남자가 아닌가. 자신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 모두가 말하던 노예 시장에 가면 흔히 건질 수 있을 이런 오줌 색 피부의 소년 하나 때문에, 세상의 제왕이 될 수 있는 보물을 포기한단 말인가. 라디는 자신의 생명을 건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을 존재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한을 풀어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포기한다고? 겨우 이런, 너무도 평범한 슬럼가의 한 거렁뱅이 소년 때문에?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었다. "어서. 가자." 부상 때문에 힘이 든 것인지, 남자가 파리한 입술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가자, 라고. 저 아름다운 입술이 파랗게 된 것도 자신 때문, 저 아름다운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도 자신 때문. 그런데도 꼭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뭐를 위해서. "…응." 그러나 라디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마음속에서 밀려오는 의문들에 대한 답변은, 아마도 이 남자를 따라가는 이 순간이 지나면 아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예감 때문에. 라디는 내밀어진 남자의 하얀 손을 붙잡았다. 마주잡은 남자의 하얀 손과 소년의 밀 색 손이, 마치 노랑과 흰색을 섞어 놓은 황금인 것 같다고, 라디는 잠시나마 생각했다. * * * "잠깐, 잠깐!!" "뭐지. 한 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폭탄의 양이 많아 불이 이어 붙을 수 있기 때문에 예상 시간보다 빨리 나가야 해." "그래도 잠깐만. 내 친구 파크가 저기 있어. 데려가야 해." "파크가면…전의 제왕의 보물…?" "아아. 반드시 데려 가야해. 녀석을 도빌 항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내가 여기까지 온 의미도 없어. 꼭. 데려갈 거야." "…알았다."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라디는 파크가 기절해 있는 우물가로 돌아가 기절한 파크의 뺨을 쳐 보았다. 두어 번을 쳐도 일어나지 않기에 한 번을 호되게 쳤더니, 우웅…하는 신음과 함께 푸름과 녹의 금은요동이 드러난다. "일어나 파크. 어서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해. 여기는 곧 폭탄 때문에 불바다가 될 거야." "라…디? 죽은 게, 아니었어?" "그래. 뭐야, 자식. 내가 죽기를 바랬어? 미안하게도 안 죽었네요. 어서 내려가자. 한 시가 급해." "어…." 라디는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몽롱해 있는 파크를 다그쳐 일으킨 후 어깨로 부축했다. 끙…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마른 편인 녀석이라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파크와 함께 부상 때문에 올라오지 못한 블랙 버드가 있는 곳을 향해 산을 내려가는데. "…거기 서. 망할 꼬마와 제왕의 보물." "!!" " 제, 제독님!!" 아까 완전히 도망친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엔 얼굴만 얼핏 보고 블랙 버드인가 하여 반가운 얼굴을 했던 라디는, 이내 남자가 익숙한 커트라스를 들고 있지 않고 한 쪽 팔 또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악귀의 형상처럼 일그러트리고 있는, 에녹스였다. "나를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고…그냥 섬을 빠져 나가려고 했단 말이지…그럴 순 없지. 이렇게 된 바에야 너희들도, 그 망할 레플리카 놈도 모두 죽여 버리겠다. 이대로 팔이 잘린 채 치욕스런 귀항을 할 수는 없어. 알기나 해!!" 터벅… 터벅…. 에녹스는 누군가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분명한 해군의 검으로 라디와 파크를 겨누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음침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쾅! 콰광!! "그, 그러지 말고 제독님도 어서 저희와 같이 대피하세요. 폭탄이 터지고 있대요. 어서 빨리 피하지 않으면 이 섬은 불바다가 될," "닥쳐라 가짜 보물. 너 때문에 허비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너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으니까." "!!"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터벅….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그야 그렇게 느끼니까 지. 그리고 너. 제왕의 보물 라디. 앙큼하게 그 해적 놈을 좋아하면서 나를 유혹했었겠다…? 가만두지 않겠다. 나쁜 짓을 하는 고 예쁜 입술을 이 칼로 잘라내 주마. 응, 그리고. 우선은 내가 하려던 일을 마저 해야겠지. 너의 심장을 파내는 일을!!!" 탓!! 타다다다다다!!!!! "으아아악 !!!" " !!"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오다가,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에녹스의 모습에 놀란 파크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과연 무서운 장면이었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이 피 칠갑이 되어 흰자만이 드러난 듯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 파크도 놀라긴 했지만 라디 또한 그 모습에 놀라 어떠한 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두려움에 확장된 눈동자로 보고만 있었다. "죽어어어어어 !!!!!!!!!!" 차캉!! "으아아악!!!!!" " !? 뭐," "…나를 죽이는 것 같아 죽이는 것만은 금하려 했더니…명을 재촉하는 구나 태양이여." "브, 블랙 버드!?" 악귀와도 같은 무서운 얼굴로 달려오는 에녹스를 저지한 것은 블랙 버드였다. 부상이 심하여 오지 말라고 했더니 결국 따라왔던 건가. "어, 어떻게…." "놈이 도망쳤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정신 상태도 이상해 보였고. 올라와 봤더니 이 모양이군. 정말…어쩌다 이렇게까지." "이놈들…나를 이렇게 만들고…감히…감히…!" 라디와 파크를 죽이려던 에녹스는 기어코 남아있던 팔 하나를 마저 잃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을 높이 쳐들어 달려오고 있던 그의 팔을 달려온 블랙 버드가 잘라버린 것이다.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수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지배하던 태양 제독은 두 날개를 잃었다. 이제 그는, 누구보다도 낮은 곳에서 기어 다니며 존경 대신 동정을 사고 있었다. 라디는 추락해 버린 그의 위상에 잠시나마 애도를 표했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하지?" "별 수 없지. 내버려 두면 내려오는 그의 부하들 중 하나가 걷어갈 거다. 서둘러야 해 라디. 더 이상 지체하면 정말로 위험하다." "아아 그래…파크, 가자." "난 두고 가." "그래 어서 가…뭐라고 파크?" "두고 가. 난 제독님이랑 같이 있을래." "파크!! 무슨 소리야!!" 라디는 산을 잘 내려가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파크에게 소리를 질렀다. 농담이라도 질이 나쁘다. 이 폭탄으로 넘쳐나는 섬에 파크를 두고 가라니. 두 번 다시 듣기 싫은 악랄한 농담이다. "…미안. 두고 가 줘 라디. 마지막이라도, 이분이랑 함께 있고 싶어.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마지막만은 함께 해주고 싶어서 그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같으면 나를 두고 가겠어! 그래, 차라리 에녹스 제독을 부축해 함께 내려가자. 그러면,"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저 분이 허락할 리도 없을뿐더러 제독님이 그걸 원치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라디. 나를 두고 가 줘. 부탁이야." "파크!! 그게 대체 무슨 소리니!!" "…라디." 절규하는 라디의 귓가에 블랙 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그 목소리의 의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파크가 진심이라는 것도. 하지만 어떻게 두고 간단 말인가. 죽을 것이 뻔한데. 행여 에녹스의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무사히 섬을 빠져나간다 할지라도 정신을 차린 에녹스가 가짜 제왕의 보물이었던 파크를 그냥 둘 리가 없는데!! "라디. 제발…부탁이야. 나는 이렇게라도, 이분의 눈동자에 나를 남겨두고 싶어." "파크…!!" 이미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파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어떤 말로도, 파크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이 자식…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리고 갈까 보다…!!" "훗. 참아줘. 네 주먹은 맞으면 아프다구."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데 파크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아련한 미소를 짓는다. 라디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연인을 위해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친구가 바로 지금 그리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보내줘야만 했다. 그 친구의 진심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제기랄…꼭 살아남아!! 반드시 탈출하라고!! 탈출해서, 에녹스 제독이랑 행복하게 살아야 해!! 알겠어!!" "그래…잘 가." "블랙 버드!! 가자!! 저 바보 놈은 그냥 두고 어서 산을 내려가자고!!" "…아아." 라디와 파크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블랙 버드는 라디의 결정이 끝나자 조용히 수긍하며 라디의 뜻에 따랐다. 라디는 마지막으로 파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는, 그 미소가 정말로 행복할 때 나오는 친구의 미소라는 걸 확인하고 그제서야 머뭇거리던 발길을 단호히 돌렸다. 숲을 내려오는 라디의 발걸음이, 소금을 머금은 물기로 점점이 젖어 있었다. * * * 콰광!! 쾅쾅!! 콰과과과과광!!!!!!!!!! 중턱에서 에녹스와 대면했을 때만 해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리던 폭발음은 이제 완전히 라디와 블랙 버드의 귓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라디는 큰 부상을 입은 블랙 버드가 걱정됐지만 그는 오히려 상처를 입지 않은 라디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라디를 이끌고 있었다. 꼭 잡은 손. 두 사람은 잡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고 열심히 발을 놀려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는 금방이라도 둘을 덮칠 듯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지만 라디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산을 내려와 정박소의 반대편인 해안 포구로 향하는 길, 라디는 숲의 나뭇잎이 잔뜩 깔린 길이 아닌 사장에 들어서야 블랙 버드의 부상의 심각함을 눈치 챘다. 모래가 펼쳐진 사장에 점점이. 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큰 혈흔들이 비치고 있었다. 어쩌면 옷에 묻은 피들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라면 아마 산을 내려오는 시간 동안 다 떨어졌을 것이다. 저것은 분명, 아직도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블랙 버드." "아아." "블랙 버드." "왜 그러지." 그는 라디의 부름에 충실히 응했지만 고개를 돌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진 않았다. 라디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뭐지 라디. 궁금한 것이라도 있나." 그러고 보니 대답하는 그의 호흡에서 뭔가가 새는 듯한 쇳소리가 흘러나온다. 위험하다. 내장이 역류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로 가망성이 없는 것인데. 라디는 이대로 남자를 멈추게 해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 시라도 빨리 블랙 버드호로 가야하는 것일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치료라고 해봤자 정통 의료지식이 없는 라디인지가 기껏해야 지혈을 하고 내장이 비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다일 테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살 수 있는 시간이 연장될 것이다. 하지만. 치료를 하려면 이 손을 놓아야 한다. 꼭 잡은 이 손을, 서로의 체온을 알 수 있도록 한 치의 틈도 없이 꼭 잡은 이 손을 놓아야만 한다. 남자의 손은 상태의 심각성을 말해주듯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출혈 쇼크 때문인지 체온 또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라디는 굳은 결심을 하고 남자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어서 빨리 블랙 버드호로 돌아가자." "……그래." 남자의 손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안 그래도 꼭 쥐여져 있는 라디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놔주었다. 두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 중 하나는 여전히 검붉은 핏자국이 흥건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가벼웠다. * * * "…라디." "…배 의사가 뭐래?" "그다지 좋지는 않다." "…살아날 가능성은 있고?" "그 또한 알 수 없다." "그래…." 라디는 현장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보고를 하러 와준 이를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키 큰 사나이, 스네이크가 라디를 심통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디는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가 불사신이어서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던가, 혹은 남자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어 걱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라디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참으로, 의문이었다. "…어쩌겠나. 콕핏에 한 번 가보겠나?" "…아니." "정말?" "아아. 봐 봤자 별로 기분이 좋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됐어. 나중에 혹시나 무슨 소식이 있으면 알려줘. 난 한 동안 중앙 갑판에 있을 거야." "……알았다." 스네이크는 미심쩍은 얼굴로 라디를 쳐다보곤 최하갑판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왜 기껏 배까지 두 손 꼭 잡고 온 애틋한 사이에 얼굴을 보러 병실까지 내려가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서겠지. 그러나 그런 사이이기에 보러 가지 않는 것이다. 남자가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라디에게 은청색 은발만을 보여주고 그 아름다운 은발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배에 돌아와서 바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힘들었으면서도 끝까지 라디의 손을 놓지 않았던 것도, 다 자기의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해서였을 거라 생각되어 라디는 그의 얼굴을 보러 콕핏으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물론 보고 싶다. 가서 식은땀이 흐르는 그 하얀 얼굴을 쓸어보고, 그 쓸쓸한 눈동자가 뜨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열망보다, 끝까지 자신에게 힘든 모습 보이는 것을 싫어했던 남자의 뜻대로 해주고 싶다는 열망 쪽이 더 크기에, 라디는 지금 이 곳 현장에 기대어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불러주기를. 그 쪽에서 먼저 청해주기를.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정말 느끼해 졌는걸. 그 남자를 닮아가는 건가.' 분명 처음에는 더 이상 나쁜 첫인상은 없을 거라고 말할 만한 최악의 만남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 번, 세 번이 되면서 우연을 넘어선 운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기록서에 써 있는 제왕과 제왕의 보물이라는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철썩…철썩…. 라디는 블랙 버드호의 날렵한 수선에 와 부딪치는 바닷물을 보며 남자의 푸른 눈을 생각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푸름을 머금은 하얀 구름은 남자의 결 좋은 푸른 은발.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솟아있는 희망봉은 남자의 쭉 뻗은 콧날을. 닮아 있었다. '어떻게 폭탄이 섬 하나를 폭파할 정도로 많았지?' '어차피 보물을 얻으면 다른 사람은 얻지 못하도록 폭파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배 밑 화물실의 짐을 온통 화약과 폭탄으로 실었지. 그래서 우리 배는 다른 여타 물품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보물을 얻지 않았어.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그래.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했는지.' '그러게. 참으로 아까운 짓을 했어.' 남자는 라디의 비꾜는 말에 조금 웃는 듯 했다. 뒤돌려진 그의 얼굴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 참으로 아깝지.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 보물은 아무래도 내 손에 있는 보물, 이거 하나면 충분한 듯 싶으니까.' '…….' 라디는 사장을 걸으며 남자와 했던 얘기들을 되내이며 웃고 있었다. 볼에 다가와 스쳐가는 바람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남자가 깨어나면 이름부터 지어주어야겠다. 스네이크를 비롯해 그래도 사람 이름인데 뱀이나 새는 너무한 것 같으니까. 뭐. 그래도 저 음침한 남자에게는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하지만. 사락…. 바람은 온전한 서풍으로 힘차게 돛을 밀며 검은 새 블랙 버드호를 둥지로 보내주고 있었다. 고양이 다리와도 같은 서풍 캣츠 포우. 더할 나위 없이 그만인. 순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