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左栢)] 야광충(夜光蟲) 제 1 부 제 1 권 겨 울 편 서장 1408년 1월 5일, 대막(大漠) "흡혈귀(吸血鬼)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 "이제 네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싫습니다." 사부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 시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영영 햇빛을 볼 수 없는데도 말이 냐?" 아까보다 훨씬 긴 침묵이 이어졌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해를 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 다." 사부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인들 인간을 버리고 싶으랴. 그러나 해를 볼 수 없는 인간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낮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생의 절반……, 그 이상을 포기한다 는 것인데…….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제자를 보았다. "나는 복건성(福建省) 장락현(長樂縣) 바다에 연한 작은 마을 에서 자랐다." "……!" "날 좋은 날은 멀리 파도 너머로 마조도(馬祖島)가 보이고, 밤에는 달라에 반짝이는 물결이 아름답던…… 그런 평화로운 마 을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에게도 어린 시절은 별처럼 라나는 것 으로 기억되는 것이었다. "찰랑이는 그 물결에 두 발을 담그고, 한 움큼 물을 쥐면 손 안에서 물은 또 그렇게 반짝이고 했으니……." 그것을 고향의 촌노들은 '야광충(夜光蟲)'이라 불렀다. 바닷물을 반짝이게 하는, 낮이면 보이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만 빛으로 드러나는 그것을……. 그는 먼나먼 기억의 반추(反芻)에서 깨어나기가 두렵다는 둣 조용히 물었다. "그런 벌레가 되고 싶으냐?" 제자는 사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밤에만 빛나는 벌레의 삶, 낮에는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를 반쪽의 삶을 권하고 싶지 않은 사부의 마음을……. '그러나…….' 긴 침묵을 거두며 그가 대답했다. "저는 이제부터 야광충입니다." 제1장 1409년 1월 5일 귀주성(貴州省) 귀주성은 동쪽에 호광(湖廣), 서쪽으로는 운남(雲南),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광서(廣西)와 사천(四川)에 연하고 있는 땅이다. 지형상 사시사철 따뜻하고, 겨울에도 눈을 볼 수가 없다. 인종적으로는 묘족(苗族)이라 통칭되는 소수민족들이 절반 이 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한인(漢人)들의 지배가 느슨 한 곳이다. 성도(省都)는 귀양부(貴陽府). 하지만 귀양부 역시 비교적 개화된 묘족들과 운남까지 연결된 명나라 군사방어진지에서 쏟아져 나온 병졸들, 그리고 느슨한 중앙통제를 틈타 부랑자들과 범죄자, 흑은 국외탈출을 노리는 망명자들이 우글거리는 혼란한 도시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라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여름날씨로 착각할 정도로 따 듯한 귀주성 귀양부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겨울에 이렇게 장대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 문 것이었다. 그것도 오늘처럼 예고도 없이 먹구름이 몰려드는 가 싶더니 그냥 퍼붓둣이 쏟아져 내리는 경우는 더욱 그랬다. 뿌연 우막(雨幕) 사이로는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가며 진흙탕 을 튀기고, 흑은 길가로 고개를 내민 처마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중 유생으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사십대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였다. 머리에는 유건(儒巾), 몸에는 남색 장삼(長衫)을 걸친 것으로 보아 낙방수재(落榜秀才)이거나 혹은 어느 대갓집의 글방선생일 것이다. 어느쪽이든 상당한 수양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우장(雨裝)을 준비하지 않아 낭패했을 텐데 도 전혀 당황스런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다리를 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편안하고 한가로운 얼굴이었다. 처마라지만 비를 완전히 가릴 정도로 넓은 곳은 아니었다. 그 아래에 선 유생의 유건과 남색 장삼은 들이치는 비에 이미 반쫌 젖어 있었다. 그는 손을 올려 얼굴에 직접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리며 고개 를 들었다. 방금까지 맑던 하늘, 밝은 해는 어디로 사라지고, 검은 먹구 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 저 빗속에 뛰어들었다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비였다. "장하게도 오시는군!" 그는 감탄사를 발하고 눈을 가늘게 떠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 았다. 지저분한 거리가 진창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나마 조금 전까지 둥허리를 휘감던 끈적한 느 낌이 비 때문에 약간이나마 가시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르릉--! 멀리 정강산(定岡山)쪽으로부터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빗줄기 는 점점 거세져만 가고, 번개까지 치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은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유생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처마 아래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변변한 우장이 없었으니 그렇겠지만, 설사 있다 해도 풀로 엮 은 어설픈 우립(雨笠)이나 우의(雨衣)는 이런 거센 비에는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유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비오는 거리쪽으로 시선을 돌 렸다. 문득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누군가 를 불렀다. "어이, 통인(通人)! 이리 오너라!" 시끄러운 빗소리 속에서도 왠지 또렷이 들렸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막 나왔는지 기름먹인 종이로 만든 우의(雨衣)를 완벽 하게 차려 입고 바쁘게 걸어가던 삼십줄의 사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유생은 손짓으로 그를 부르며 물었다. "자네, 왕노관사(王老官使)아래에 있는 통인 아닌가? 맞다면 날 알 텐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춤주춤 다가왔다. "제, 제가…… 황노관사(黃老官使) 댁에 있는 통인이 맞긴 맞 는뎁쇼…… 어떻게 아시는지……?" 중국어에서 '왕(王)' 과 '황(黃)' 은 발음이 비슷하다. 게다가 유생이 의식직인지 무의식적인지 발음을 흘렸기 때문에 사내는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황노관사 댁에 놀러가서 몇 번 보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고 서야 자넬 어떻게 알아? 그나저나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 됐군." 유생의 눈은 사내의 손목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내의 손목에 묶인 황색 천을 보고 있는 것 이다. 손목이 아프겠다 싶을 정도로 졸라맨 황색 천에는 '급(急)' 이 라는 글귀가 언뜻 보였다. 이것이 사내가 통인, 즉 관부(官府) 와 관부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심부름꾼이라는 증거였다. 소위 '급행표(急行票)'라 불리는 것이 그것인데, 급한 문서를 전달하는 통인이 중도에 다른 짓을 못 하도록 아플 정도로 졸라 매는 것이었다. 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야 비로소 풀어 주는 그것에는 봉인이 되어 있어 마음대로 풀었다가는 심한 경우, 사형(死刑)까지 당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부(知府)에 가는 길이겠지? 나도 거기 가는 길인데 갑자기 비를 만나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네. 이건 내가 빌렸다가 거기 서 돌려주지." 유생은 일변 말하며, 일변 사내가 입고 있는 우의를 벗겻다. 사내는 유생의 행동에 당황해 하며 몸을 뒤틀었다. "어, 어…… 저는 그럼 어쩌라고?" 우연의 일치인지 유생의 소매 끝이 사내의 팔목 어림을 스치 고 지나갔다. 황노관사는 오늘 사내의 급행표를 너무 꽉 조였던 모양이었 다. 아니면 너무 많이 사용하여 낡았던 것일 터였다. 사내의 팔에 묶여 있던 황색 천이 중간으로부터 끊어져 떨어 진 것이다.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생도 말을 잊고 땅바닥에 떨어진 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마원(馬元) 입니다." "마원이라……." 유생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딴전을 피웠다. "작은 일은 아니군. 그만 가 보게!" 마원은 어이없다는 라으로 유생을 바라보았다. "그, 그냥 보내시면 어쩝니까? 저는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요." 유생은 자리를 피하려는 눈치였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 물을 손으로 흩트리며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다. "안됐군그래……." 그러나 유생은 갈 수가 없었다. 마원이 그의 소맷자라을 움켜 쥐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도와 주십쇼!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요." 그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천 이 끊어지면 그도 죽은 몸인 것이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호되게 당한 후 쫓겨날 것이요, 그것은 그에게는 죽음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유생은 인상을 쓰며 손을 뿌리치려 하다가 할 수 없다는 둣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바쁘고, 바쁘지 않다 해도 이렇게 번거로운 일은 취미 가 아니나…… 하는 수 없군. 목숨 하나 살리는 것이 탑(塔)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으니……." 그는 마원의 우의를 벗겨 자신이 입고, 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게!" 마원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 무얼 말씀입니까요?" 유생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부에 전달해야 하는 물건 말일세. 마침 내가 가는 길이니 자네 대신 가져다 주고, 사정도 설명해 주겠다 이걸세. 싫으면 말고." 그는 황색 천을 마원에게 돌려주려 했다. 마원은 크게 고개를 저으며 소맷자락에 손을 넣었다. "아니, 아닙니다요. 사정을 설명해 주신다면 맡겨야겠습죠. 예!" 소맷자락 속에서 주머니 하나가 나왔다. 그러나 그는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선뜻 건네주지는 않고 있었다. 유생이 그 주머니를 뺏어 들었다. "자넨 집에 가서 내가 물건을 대신 전달한다고…… 아! 나는 양주(揚州)의 설선생(薛先生)일세." 그는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더니 성큼성큼 걸어 거리 저편으 로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런 일에 넋이 나가 서 있던 마원이 비를 맞더라도 같이 따라가서 물건을 전달하는 것을 확인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집에 돌아갈 용기를 잃어버렸다. 나중에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단지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비오는 이층누각의 창가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는 재미는 적 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맛있는 안주와 술까지 곁들이면 재미는 몇 배를 더한다. 그래서 유생, 자칭 설선생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처럼 사소하게라도 사기(詐欺)를 쳐서 이익을 본 날은 더 욱 술맛이 좋아지는 것이다.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도 역시 아니다. 말을 잘해서 되는 일도 아니요, 인상이 좋아서 쉽게 속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대상(對象)의 심리상 태를 파악하고 의도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총체적인 과정인 것 이다. 한 순간이라도 그 과정이 틈을 보인다면, 혹은 일관된 흐름에 단절이 생긴다면 일은 실패한다. 아까만 해도 손목에 묶은 황색 천 하나만 보고 그의 신분을 짐작한 것 아닌가? 관부의 심부름을 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의 상전은 노관사(老 官師)라 불릴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애들도 관직 하나만 꿰어 차면 성 뒤에 '늙을 노(老)'자를 붙이니 말이다. 왕(王)이라는 성씨는 가능성만 보고 그냥 불러 본 것에 지나 지 않았다…….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상관없었다. 바로 돌려 말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럴 때 애매하게 발음하는 것은 사기(詐欺)에 있어서 또 하 나의 요령에 속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익숙한 이 름으로 듣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마원에게도 설선생이 노관사를 안다는 것이 중요했지, 그 노 관사의 성이 황이든 왕이든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힘을 사용하는 다른 일과는 또 달라서 쉽고 어려운 기준도 여러 가지로 달랐다. 많이 배웠다 해서 속이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무림의 고수라 해서 속이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런 자들은 오히려 어린아이보다도 속이기 쉬웠다. 아까의 마원이라는 자도 그렇게 어려운 대상은 아니었지만, 작년에 그에게 속아 일만금(一萬金)을 거덜낸 통천방주(通天幇 主)인 금도홍안호(金刀紅顔虎) 가괴자(可愧子)보다는 오히려 어 려운 상대였다. '가괴자……!' 그는 정말 '부끄러워해 마땅하다.'는 이름 그대로 부끄러워 죽어야 할 작자였다. 강남을 쥐고 흔드는 거대방파의 패주(覇主)가 가짜 지도(地 圖) 한 장에 몸이 달아 두고두고 강호에 웃음거리가 될 바보짓 을 하다니……! 그 일로 결국 여기 중원의 끝, 귀주까지 도망쳐 오기는 했지 만 생각할 때마다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일이었다. 상대의 지위 여하에 관계없이, 또 그 한 건의 사기행위로 얻 어지는 이득의 다소에 관계없이 남을 속인다는 것은 즐거운 일 이고 보람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실과 거짓이라는 것이 딱부러지게 나누어져 있 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마 그에게 속은 자들은 지금쯤 조금은 영리해졌을 것이다. 적어도 남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 하나는 얻었을 테 니까! 설선생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겉면에 황색 실로 '귀양지부대인친전(貴陽知府大人親前)' 이라 고 수(繡)놓아져 있는 붉은 비단주머니였다. 설선생은 다른 주객들이 보지 않게 소매로 가리고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평범한 서신 한 통, 그리고 다시 황색 주머니였다, 황색 주머니에는 '하례(下禮)'라고 수놓아져 있고, 속에는 금 원보(金元寶)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설선생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부대인에게 보내는 선물치고는 너무 작지 않은가……?' 지부대인이라면 일개 부현(府縣)의 수장(首長)이다. 그런 인 물에게 예의를 표하는 선물이 열 냥짜리 금원보 하나라면 이건 선물이 아니라 모욕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선물이라면 직접 찾아가 주지 통인을 시키지는 않을 텐데……?' 설선생은 문득 무엇을 깨달았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설이다. 설에는 선물이 돌기 마련이고, 관리들은 특히 이런 선물 챙기 는 일에는 늙은 호랑이처럼 노련한 인물들이다. 거기에 자기들 의 목이 붙어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 금원보는 통인과 관련 있는 인물, 통인부(通人府) 의 통사(通使)쫌에게 가는 것인 모양이었다. 설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금원보를 소매에 집어 넣었다. 이건 의외의 부수입이라 해야 했다……. 원래 이 주머니를 노리고 마원의 정신을 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의 하나가 필요했는데 마원이 마침 지나간 것뿐이었다. 비가 그치면 버려질 우의 하나만 필요했던 것이다. 설선생은 그가 우의 하나를 원했던 것 때문에 마원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설선생이 앉아 있는 열래객잔(悅來客棧)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은 장관이었다. 크고 작은 집들과 거리로 쏟아져 내리는 비는 작은 냇물을 이 루어 흐르고, 후덥지근했던 기온에 늘어져 있던 나무들이 굵은 빗방울에 시달리면서도 한층 싱싱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고, 철 없는 아이들은 빨래하는 어려움도 모르고 거리로 나와 진창에서 뒹굴며 놀고 있었다. 멀리 성밖의 산들은 구름인지 우연(偶然)인지, 피어오르는 안개 위로 산봉우리만 보이고 있었다. "운간동령천중출(雲間東嶺千重出;동쪽 산봉우리는 구름 위로 첩첩이 솟아 있고)……." 한가로이 시를 음던 설선생의 입이 다물어졌다. 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군사들의 행진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빗속에서 저렇게 줄을 맞춰 걸어오는 사 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더 다가와서야 설선생은 확실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행진이었다. 단지 군사들이 아니라 장례행렬이었다. 높이 상투를 튼 라마승이 웃통은 반만 걸친 가사(袈裟)차림으 로 거의 벗은 채 붉은 바지를 입고, 손에는 해골을 엮은 염주를 들고 앞장서서 걸어왔다. 그 뒤로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가 따랐는데, 거기에는 피 처럼 붉은 칠을 한 거대한 관(棺)이 실려 있었다. 거대한 사각형의 관과 원통형의 뚜껑에는 부적들이 붙어 있 고, 수레에 관을 고정시킨 동아줄에도 부적들이 있었다. 수레의 옆을 따르는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형형색색의 분장을 한 묘족들이었다. 그러나 행렬의 제일 뒤에 선 사람들은 묘족이 아니라 한인(漢 人)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장례행렬은 한없이 느리게 빗속의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순식간에 비오는 한낮의 거리가 음산한 공기로 뒤덮인 것 같 았다. 길에서 놀던 아이들도 그런 기운을 느꼈는지 처음에는 재미있 게 구경하더니 이제는 어디로 숨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를 한층 음산하게 하는 것은 선두에서 걸어오는 라마승 의 염불 소리였다. 그저 의미없이 웅얼거리는 소리 같았지만 설선생은 그것이 서 장(西藏)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라마승도 얼굴과 온몸에 붉은 칠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라마승은 저렇게 온통 칠을 하지는 않는데……?" 그러나 야만인들이 무슨 짓은 못할 것인가? 설선생은 귀주성에서 볼 수 있는 묘족의 풍습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고개릎 돌렸다. 다음 순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행렬을 바라보았다.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저 행련에는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풍겼다. "묘족들이 이 빗속에 중화식(中華式)의 관을 나른다……. 게 다가 성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들어와? 재미있군!" 묘족들이 중화식의 관을 사용한 것도 이상하고, 자기 부락의 주 변에 묻지 않고 성을 관통해서 어딘가로 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물론 물어 본다면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대겠지만, 그런 것 은 귀기울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설선생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정교하게 꽉 짜 맞춘 듯한 핑계를 대도 핑계는 결국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가장 단순한 몇 가지 이유로 해명이 되지 않는 일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장례행렬은 열래객잔 앞에 와 섰다. 장례행렬은 밤이 오기 전에 여기서 쉬어 가기로 작정한 모양 이었다. 묘족은 밤에는 절대 다니지 않는다. 더구나 오늘처럼 비 내리 는 날에는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을 것이다. 객잔의 주인과 장방(帳房)이 입구로 뛔어나가고 있었다. '반가워서 뛰어가는 것은 아니겠지.' 어느 객잔의 주인이 관(棺)이 손님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기겠 는가? 게다가 묘족들의 장례행렬을……! '그러나 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장례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객잔의 옆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객잔 후원의 독채에 들이는 것이리라. 설선생은 그렇게 타협을 본 시간이 생각보다 짧게 걸렸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런 일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하는 방법은 그가 생각 하기에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황금, 아니면 폭력이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황금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싱글벙글거리며 들어오는 장방과 주인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대로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면 그들이 그가 생각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설선생은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느긋하게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발짝소리가 났다. 설선생은 아래층으로 난 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루에 누군가가 들어오면 일단은 시선이 모이는 법이니 설선 생이 쳐다본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계단 위로 세 개의 머리가 보이더니 이윽고 세 사람이 올라왔다. 그 중 하나는 점소이의 것이고, 나머지 둘은 묘족들의 장례행 렬을 따라온 한인들 중 둘이었다. 노인과 청년. 부자지간(父子之間)처럼 보이지만 부자지간은 절대 아니라는 것에 설선생은 황금 만 냥이라도 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모종 의 분위기로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모종의 일을 같이 하는 동료의 분위기이지 결 코 부자지간의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그들이 뭔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녹록한 인물들은 아니군!' 설선생은 순간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노인은 육십대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나 설선생은 그 얼굴이 사실은 훨씬 나이가 덜 들어 보이 는 얼굴이라고 보았다. 유현(幽玄)한 빛을 담고 있는 깊은 눈, 굵은 주름살로 가려진 얼굴 이면에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세월의 무게가 감추어져 있었다. 육십 인생 이상의 세월이 그 얼굴에는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보기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일 수도……!' 또 다른 한 명은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구였지만 그것이 허약함의 표시는 아니 었다. 각진 얼굴에 긴 칼자국이 대각선을 그리며 가로질러 만들어진 굵은 흉터가 설선생의 인상에 박혀 들었다. 가늘게 뜬 눈과 그 눈밑의 주름은 내면에 잠재된 강철 같은 의지와 필요하면 충분히 잔인해질 수도 있다는 잔인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드러나는 손과 목의 흉터들은 아마도 허름한 옷 가지 속에 꿈틀거리는 근육에까지 이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설선생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은 뭔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대체 로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그것이 한편으로 그의 추측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그들의 몸 전체에서 쫓기고 있다는, 혹은 주위 의 이목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젊은 쪽이 더했다. 단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데서 나오는 태도 이상의 어 떤 것이 그의 태도에는 있었다. 설선생은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금세 깨달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어색함. 청년은 이 주루와 음식, 혹은 이 땅 자체와 맞지 않는 분위기 를 지니고 있었다.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딘 여행자처럼……! 그것이 또 설선생의 추측을 확신시키는 증거가 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구석자리에 앉더니 술과 안주를 시켰다. 주문한 음식이 올 때까지 아무 말도 않더니, 술과 안주가 오 자 또 아무 말 없이 먹고 마시기만 했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들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쉴새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설선생 은 예리하게 파악했다. 더 망설이거나 잴 이유가 없었다. 설선생은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인상이 달라졌다. 그의 눈이 가늘게 감겨졌 다. 그리고 쉴새없이 이쪽저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침착하고 여유있는 유생이 아니라 세상사에 닳 고닳은 협잡꾼처럼 보였다. 단지 눈의 표정 하나가 달라진 것으로 놀라운 변신을 한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탁자 옆으로 걸어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같습니다만?" 청년의 오른팔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을 설선생은 알아차렸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실웃음을 흘렸다. 설선생을 쳐다보고 대꾸를 한 것은 노인이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만?" 노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다 보면 사람을 잘못 볼 수도 있지요, 라는 표정이었다. 설선생도 미소를 지었다. 잘못 본 것이 절대 아니라는, 속일 필요 없습니다, 하는 음흉 한 표정이었다. "노인장이 묘족을 시켜 관을 들고 온 사람 중 하나라면 도움 이 필요한 사람이 맞겠지요!"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적으로 청년의 소매가 떨리는 것 갈았다. 그러나 설선생은 태연했다. 노인이 손을 들어 청년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소매의 떨림 이 멎었다. 노인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를 낮게 깔아서 질 문할 뿐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혹은 당신 일행이 찾는 사람이죠!" "뭘 할 수 있소?" "뭐든지."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눈은 설선생을 정면으로 응 시하고 있었다. 설선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앉아도 되겠군요!" 그는 두 사람과 직각을 이루는 자리에 의자를 끌어다가 조심 스럽게 앉았다. 두 사람으로부터 공히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자리, 그리고 엉덩 이 끝만 걸쳐 언제라도 물러설 수 있는 자세였다. 그러나 고수가 본다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런 자세였다. 노인이 술잔을 내밀었다. "한 잔 하시겠소?" "주신다면!" 노인이 눈짓을 하자 청년이 설선생의 잔에 술을 따랐다. 못마땅할 텐데도 청년의 표정에서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에게 우리가 부탁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겠군!" 설선생은 술을 비우고 한 손으로 부드러운 수염을 훔쳤다. "신분(身分)을 증명할 물건이겠죠?" "열두 명!" "아까 본 묘족들까지?" "그 중 진짜 묘족은 하나요. 그리고 하나는 서장의 라마승, 나머지는 한인이지만 그 중 하나는 여자요.' "다채롭군요." "언제까지 되겠소?" "오늘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주문내용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준비했겠지요?" 노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사람이군!" 청년이 소맷자락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일행의 나이와 성별, 그리고 기타의 사항일 것이다. 물론 가짜임이 분명했다. 설선생이 그것을 집었다. 그 위에 노인의 손이 얹혔다. 설선생은 짐짓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덮은 노인 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의 손은 정말 컸다. 그리고 갈퀴처럼 거칠고 굵은 손 마 디는 강하고 힘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보통사람의 두 배는 될 듯한 솥뚜껑만한 손등에 동전 크기만한 흉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것으로 보아 송곳에 뚫리면 생기는 자국같이 보이는데 그 정도 굵기라면 아마도 오리알 굵기 정도는 되는 송곳이었을 것이다. 노인이 미소지었다. "이런 일은 신뢰(信賴)로 처리하는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우린 사귈 시간이 너무 없구려. 실례가 안 된다면 존함(尊啣)을 알 수 있겠소?" 설선생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 소개를 안했군요. 춘명방(春明坊)에 사는 진(晋)씨 수재 (秀才)라면 오르는 사람이 드물지요." 노인은 그의 눈을 찬찬히 살피고는 손을 놓아 주었다. "그래……, 진수재(晋秀才)…….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름이 란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또 이름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법이죠. 기다리겠소." 설선생은 노인이 잡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누런 금덩이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노인이 그의 손을 누를 때 건넨 것이리라. 의외의 횡재일 수도 있었지만 그 금덩이를 보는 설선생의 눈 에는 기쁨보다는 은근한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빨리 금덩이와 종이를 집어 넣고 있었다. "믿어 보시지요 춘명방 진수재는 확실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요……." 설선생은 주루를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구름도 물러가고 있었다. 문득 그는 하늘을 보았다. 그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돈은 꽤 많은 것 같군! 좋은 일이지." 일을 쉽게 하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원래 그리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번거로운 준비는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노인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은 변했다. 청년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인은 호락호 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을 속이려면 상당한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그런 정성을 기울여도 될 만한 일이라는 예 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거물(巨物)을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재미도 있고, 성공한 뒤의 보람도 커지는 것이다. 준비는 금방 되었다. 귀주성이 아무리 중원의 변두리, 깡촌이라 해도 사람사는 동 네요, 귀양부는 그 중심지였다. 그 나머지는 약간의 재주와 시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재주는 넘칠 정도였고, 시간도 충분했다. 설선생, 흑은 진수재라 자칭한 유생은 길가에 있는 한 찻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진흙탕 위로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유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상대의 중심을 흐트 러트렸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그렇게 되도록 하는 데에 힘을 보 태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진흙탕 위에 고꾸라진 사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설가야, 내 주머니……!" 사내는 소리를 지르기 전에 얼굴부터 닦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진홅에 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목 에 흙덩이라도 넘어갔는지 말을 못 잇고 켁켁거리기만 하고 있 었다. 사내는 바로 마원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를 찾아 헤매었던 모양이었다. 설선생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는 순간에 한 가지 좋은 생 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손을 내밀어 마원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반갑다는 듯 소리쳤다. "잘 만났네. 그렇잖아도 자넬 찾던 중이었어. 아니, 그래 여 태 어디 있었던 거야? 난 자네가 얼빠지게 집에라도 돌아간 줄 알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지 뭔가?" 마원은 얼떨떨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사기꾼이 무 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신상에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만 이 느껴졌다. 설선생은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더니 길 한편으로 끌고 가서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큰일났다는 듯한 어조였다. "주머니는 내가 가져다 줬네만……." 마원이 반색했다. "가져다 주셨습니까요?" 설선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내가 그걸 어디다 쓴단 말인가?" "아니, 아닙니다요. 그저 다행스러워서…… 전 선생님이 사기 꾼인 줄만 알고…… 흡!" 마원은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제풀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 고 침을 뱉었다. 손에 묻었던 진흙이 입에 또 들어갔던 것이다. 설선생은 사기꾼이라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행한 일이 아니라네. 자네 이 길로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 야겠어." "도망이요? 제가 왜 도망을 갑니까?"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통인이 표식도 잃어버리고, 물건 도 남에게 줘서 대신 전달하도록 쌨으니까 죽을 죄라고 통사(通 使)가 펄펄 뛰더군." 마원이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진홅이 묻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얼굴도 홅빛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 그거야 선생님이 억지로 그렇게 하자고 해서……." "글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말해 줬으니 이젠 자네가 알 아서 하게. 내가 자네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가겠네 만……!" 설선생은 이젠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태도로 돌아섰다. "아이고, 선생님 그냥 가시면 전 어쩝니까?" 마원이 진흙탕에 다시 엎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그 스스로 엎 드린 것이라는 점이 아까와는 달랐다. 그는 진홅탕에 무릎을 꿇고는 설선생의 바지를 잡고 매달린 것이다. "제가 고향을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요? 처자식은 어쩌고요?" "그걸 낸들 어찌 아누……?" 설선생은 마원의 손에서 발을 빼려 했다. 그러나 마원은 더욱 힘껏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의 흙투성이 얼굴에 두 줄기 고랑이 패었다. 눈물자국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흑! 혹!" 설선생은 난처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니 마원을 잡아 일으켰다. "하는 수 없군! 줘은 뜻에서 한 일이 이렇게 번거롭게 될 줄 이야! 일단 관여한 일이니 결말을 지어 주지 않을 수가 없군." 마원은 눈물젖은 눈에 기대를 담아 설선생을 바라보았다. 설선생은 잠시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었다. "이건 원래 큰 이득이 있는 일인데…… 이렇게 그냥 내주기는 너무나 아깝구나……!" 마원은 다시 엎드리려는 기세를 보이며 애걸했다. "이번 일만 해결해 주시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은을 하겠습 니다. 제발……." 설선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자네가 살 길은 공을 세워 죄를 갚는 길밖에 없네. 내가 시 키는 대로 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은 물론이고 상까지 받게 될 것이네." 그는 마원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일러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며 탄식했다. "아--! 이래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것이 아니요, 그저 남의 일에는 상관을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인데…… 아깝다, 아까 워!" 마원이 알 둣 모를 둣한 표정으로 멍하니 섰다가 그 뒤에 대 고 깊이 허리를 구부려 절을 했다. 그는 살아났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희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연신 아깝다고 혀를 차며 돌아선 설선생도 미소를 짓 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한 번쫌은 더 의심해 보았을 것이다. 제2장 그날밤, 열래객잔(悅來客棧) 밤이었다. 대체로 주운 곳일수록 담장이 높고, 더운 지방일수록 그 반대 로 가는 법이다. 그래서 여기 녈래객잔의 후원 담도 그리 높지는 않았다. 불쑥 그림자 하나가 담을 뛰어넘었다. 한 길 높이의 담장을 바로 뛰어넘은 것을 보면 제법 무공을 지닌 자였다. 그러나 강호의 고수들이 보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쿵--!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고서야 가까스로 뛰어넘 는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후원의 한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주위의 동정을 살 폈다. 아무도 그가 넘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바위 위로 슬쩍 고개를 빼고 후원 독채를 살펴보았다. 달빛 속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설선생이었다. '이상하군! 일부러 소리가 나게 넘어왔는데……?' 수준 이하의 무공을 지닌 인물로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소리 까지 내가며 잠입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면 좋아해야 할 일은 아 니었다. 그러나 설선생은 곧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물체가 어느새 그의 목젖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보아 날카로운 물체, 아마도 칼날일 것이다. 언제 그들이 그의 뒤에 붙었는지 몰랐다. 게다가 둘씩이나 되 리라고는……! 설선생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쳐 나오는 독채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쪽으로 팔이 잡혀 뒤로 인 상태, 게다가 목밑에는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만도(彎刀) 두 자루가 붙어 있는 것이다. 문이 열렸다. 설선생은 문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입이라도 크게 벌렸다가는 목에 구멍치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 때문에……!" 방은 넓었다. 그러나 방을 밝히는 등불은 하나뿐이었고, 그나마 희미한 것 이었기 때문에 매우 어두웠다. 그 희미한 불빛 속에도 방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방 중앙에는 둥근 탁자가 있고,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등불 이 그 중앙에 있어서 식기와 수저위 숫자까지 셀 수가 있었다. '열두 벌!' 설선생은 숫자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낮에 노인이 신분증을 부탁한 숫자와 맞는 것이다. 방안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식탁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설선생은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식탁의 저편, 방문으로부터 정면에 침상 둘을 모아 단(壇)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거대한 관이 놓여 있었다. 낮에 본 그 붉은 관이었다.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은 없었다. 대신 관 옆에 두 명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웃통을 거의 드러낸 라마승, 또 다른 하나는 한인의 복색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열 명 내외의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나같 이 등불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서 있어서 흐릿한 형체만 보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서 불 빛 속으로 들어왔다. 아까 주루에서 본 노인이었다. 그는 말은 않고 손을 묘하게 움직였다. 설선생의 팔이 풀려났다. 설선생은 노인의 손짓이 모종의 수신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이 물었다. "한번 볼 수 있겠소?" 설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이었다. 누군가가 방금까지 목에 칼날이 닿아 있었는데 두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나무로 깎아 만든 사람이거나 칼날을 두려워 않는 사람일 것이다……. 거리의 협잡꾼은 당연히 그 둘 중 어느것도 아니고, 아니어야 만 했다. 설선생은 더듬더듬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노인의 눈이 그 손을 따라오고 있었다. 설선생은 손을 떨어가며 종이 몇 장을 꺼내고 있었다. 의도적 인 지연동작이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노인 일행의 정체와 수(數), 그리고 잠재된 힘을 파악해야 했다. 사람을 속이고 희롱한다는 것은 이럴 때 생명을 건 결투보다 도 더욱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한 가지라도 더 아는 것이 일의 성패(成敗)와 극히 밀접한 연 관을 갖는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실패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 에서 이런 일은 매미의 더듬이같이 민감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 단순히 외형적 변화만이 아니라 심리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 어야 하는 것이다. 설선생은 이런 재미 때문에 이런 일을 좋아했다. 그것은 단순 한 사기행위가 아니라 고차원적인 심리전(心理戰)인 것이다. '위험한 자들이다.' 설선생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방에는 그가 생전 처음 느끼는 듯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봤더라……?'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지만 온몸을 압박해 오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운은 한두 명에게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방안에 있는 오든 사람이 동시에 만들어 내는 그런 기운이었다. '진식(陳式)! 그래, 마치 하나의 진법(陳法)을 펼치고 있는 것 같군!' 분명 그들은 진법을 펼치고 있지는 않았다. 방안에서 그가 느낄 수 있는 가장 노골적인 적의(敵意)는 지 금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서 홀러 나오는 회미한 경계 심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 전체에게서는 진법을 펼치고 있는 듯한 통일된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법의 중심은 바 로 관이었다. '관 속에 있는 시체가 생전(生前)에 이들의 주인이었던가?' 설선생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는 짧은 순간에도 상당 부분 핵심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그가 지금 느끼는 그 분위기는 오랫동안 연마한 진법에서 홀 러 나올 수 있는 그런 통일된 분위기였다. 흑은 오랫동안 같이 싸워 온 동지들 사이에서 자연히 흐르는 교감 같은 것이었다. '강적(强敵)들이다.' 설선생은 다시 한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노 인을 보면서 느끼기 시작했던 희미한 위협은 점차 모습을 갖주 고 있었다. 그것은 후회였다. 자신이 이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후회가 이 순간 그를 압 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 느낌만으로도 분명 그가 생각한 이상의 인물들이었다. 아주 사소한 착오였지만 이런 심리전에서는 아무리 작은 착오 라도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적으로 돌리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들 중 하나를 속이려면 전체를 다 속여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이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한 명을 속이기는 쉽다. 그리 고 다수를 속이기는 더 쉽다. 전자(前者)는 한 명의 심리에 집중을 할 수 있어서 유리하고, 후자(後者)는 전체를 속이지 않더라도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하 나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속된 다수를 속이기는 정말로 어렵다. 그들 중 단 하나라도 속지 않으면 흐름은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설선생은 종이를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 순간 그는, 무사히 여기서 나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결 정했다. 제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가 일부러 만든 허점이 들키지만 않 는다면 그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벽에 기대어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그의 손에서 종이를 받으려 했다. 설선생은 재빨리 손을 거두어 종이를 잡지 못하도록 했다. 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선생은 교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아직 가격을 정하지 않았더군요." "이미 지불하지 않았던가?" 종이를 잡으려던 사람은 아까 노인과 함께 있던 칼자국의 사 내였다. "금 열 냥은…… 이런 일에는 선금으로 여기는 것이죠." 설선생은 흥정을 하려는 것이었다. 아무리 위험한 자리라 해도 이런 일에 흥정을 않는다면, 즉 터무니없는 억지일지라도 돈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의 심을 살 것이다. 노인이 물었다. "얼마를 원하는 것인가?" 칼자국의 사내가 끼여들었다. "물건을 보여 주지도 않고 흥정부터 하려는 것인가?" 칼자국 사내의 가면 같은 얼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에서는 흐릿한 불쾌감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저마다 다른 개성 열둘을 동시에 속이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문득 설선생은 마음 깊은 곳에서 투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느 꼈다. '한번 속여 봐?'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좀더 상대를 파악한 후에, 그리고 좀더 그럴 듯한 준비가 갖 추어진 뒤에야 시도해 볼 일이었다. 설선생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헤픈 웃음을 흘렸다. "대개의 경우에 선금(先金)은 총액의 십분의 일이죠." 그는 지금 황금 백 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이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 이었다. 그것을 설선생은 노리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욕심에 대한 비웃음, 바로 그것이 이 순간 필요했 다. 그럼으로써 그는 일개 협잡꾼의 인상을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게 누구야! 음양산인(陰陽散人) 진운(晋雲) 아닌가?" 설선생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것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누군가 이 일행 속에 그를 아는 자가 있는 것이다. '탈줄을……!' 하나, 이미 늦었다. 그의 등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한걸음 물러섰다는 것이 느껴 졌다. 그것은 그들이 그에게 기습할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 고, 그들이 제대로 싸울 줄 안다는 의미였다. 설선생은 마치 목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가볍게 흔들 었다. 어쩔 수 없을 경우 싸움도 불사(不辭)하겠다는 표시였다. "여기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얼굴이나 볼까?" 한 순간에 그의 인상이 변했다. 그는 이미 일개 십잡꾼이 아니었다. 당당한 무림의 절정고수, 음양산인 진운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직도 그 모양을 하고 돌아다니나? 아니, 아직도 살아 있었 느냐고 묻는 것이 옳겠군!" 묘족의 울긋불긋한 화장을 해서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사내였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눈 하나의 위로는 긴 칼자국이 나 있고, 위아래 눈꺼풀 이 붙어 있는 것이다. 진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애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가에 가벼운 놀라움이 스쳤다. "독목야차(獨目夜叉) 방각(龐覺)?" "알아보는군. 이미 삼십 년이 지났으니 잊을 만도 했을 텐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과거 십여 년을 흑도의 방파, 금도강(金刀岡)에서 당 주(堂主)와 부당주(副堂主)로 지내다가 헤어졌었으니……. 전성시절인 삼십대에서 사십대까지의 십 년을 같이 지냈던 것 이다. 더욱 그를 못 잊는 이유는 진운, 당시 당주였던 그 때문에 부 당주였던 방각, 그까지 쫓겨다녀야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후로 진운이 두고두고 무림에 악명(惡名)을 날리게 된 그 사건 때문에……! 진운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상관에게 대접이 이 모양인가?" 방각의 왼쪽 눈을 지나간 칼자국이 꿈틀 움직였다. '웃는 것인가? 흑은 분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방각은 과거에도 그랬다. 그의 칼자국이 꿈틀거리면 누군가가 죽거나, 정반대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무공은 그보다 아래였지만 야차라는 별호가 말해 주듯이 싸움 을 시작하면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싸웠던 방각이었다. 비무(比武)가 아닌 생명을 건 결투에서 약간의 실력차이는 무 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방각은 강했다. 게다가 방각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의 무공보다도 두려운 것이었다. 염라대왕과 원수가 되는 것은 어쩌면 참을 수도 있었겠지만, 고지식한 사람과 원수가 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가 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는 방각이 자신의 적이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했었 던 것이다. 방각의 표정이 분노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저 진운에게 손을 내밀어 그가 만들어온 가짜 신분증을 가 져갈 뿐이었다. "원래 기대도 않았지만……, 자네가 만들었다는 걸 알고 나니 더욱 기대가 되지 않는군." 그는 그것들을 보지도 않고 등잔불에 가져다 대었다. 종이는 금세 불타올랐다. 방안이 잠깐 환해졌다. 진운은 그 순간에 방안에 있는 사람의 수를 셀 수가 있었다. '관 옆의 둘, 내 뒤에 둘, 방각과 노인, 세모눈의 사내, 그리 고 둘!' 아홉 명이었다. '나머지 셋은?' 최악의 경우 이 자리를 탈출한다고 했을 때, 그 세 명이 변수 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들이 누구며,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서야 피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일이 안 끝났나요?" 순간 묘한 기류가 방안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방문이 열리고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이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 흑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어도 상 당한 주의력이 방문과 여인에게 향했다. 진운은 그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두뇌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회전했다. 방안에는 원래 아흡 명이 있었다. 이제 방문 안, 흑은 문을 연 상태에서 밖에 한 여인이 들어서 고 있다. 방안에 원래 있던 사람들의 주의력은 상당 부분 그녀에게 향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영향은 지금 자신의 뒤에 버티고 선 두 명에게 더 클 것 이다. 사람은 정면에 있는 상대보다 등뒤로 다가온 상대에게 더 주 의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뭔가 암기(暗器)나 물건을 던질 수 있는 경우를 뺀다면 그에게 직접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앞에 다가와 있는 방각밖에 없다. 다행히 방각은 그와 한때 친했다면 친했던 사람, 손을 쓰는데 주저함이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암기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암기술(暗器術) 이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른 사람일 텐데, 이 방안에 그런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극히 적고, 흑시 있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자신이 그 동안 숨겨 왔던 실력을 십이 할(十二割) 발휘한다 면 말이다. 관 옆에 앉아 있는 라마승과 또 하나는 주의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실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적에게 가까이 있 는 사람이 있는데 경계선 외곽에 있는 그들까지 반웅을 보여야 겠다고 생각하기에는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즉, 그가 탈출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들 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그 자신에게 있었다. 뒤로 몸을 빼서 등뒤의 두 사람과 방으로 들어서고 있는 여인 을 지나쳐 밖으로 빠져 나간다는, 짧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은 동작을 순간적으로 할 수 있을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등뒤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또, 그래야 할 필요는 있는 것일까? 제대로 된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냥 걸어서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제대로 된 신분증이라면 종이로 된 여행증(旅行證)과, 나무로 만든 호패(戶牌)를 말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것도 한두 시진 사이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교묘한 재주로도 꼬박 이틀은 걸려야 하는 일인 것이다. 게다가 개개인의 특성까지 감안해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가 제대로만 해 준다면 이들은 천금(千金)을 들여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방각은 그런 사실을 알아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두고도 도주해야 하는가? 진운은 도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모르는 그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탈출 능력에 대한 신 뢰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의 둥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미세하게, 그러나 율동적인 흐름으로 엉덩이에 전달되고, 다시 다리로 전 달되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움직인 것처럼 보엿다. 그것도 앞으로 뛰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고도의 기만술(欺瞞術)이라 해야 했다. 실제로는 미동도 않고 단지 눈빛만으로 앞으로 뛰어나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행위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방각의 눈빛이 형형하게 불타올랐다. 방금까지 모호하던 감정이 하나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적의(敵意)였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가 다시 진운에게 모였다. 그리고 진운의 진행방향으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노골적인 살기가 그를 향해 발산되었다. 진운이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아무런 움직임은 없었지 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전원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그의 전진을 막는 쪽으로 집중되었 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실제 앞으로 뛰어나갔다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크 게 다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운이 가려고 하는 방향은 뒤였다. 그는 그렇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그의 정면으로 모 아 놓고, 사실은 뒤로 뛰쳐나가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근육은 달리기 직전의 말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채로 굳 어 있었다. 최고의 경공술(輕功術)을 발휘하기 위해 끌어모았던 내공진기(內功眞氣)는 헛되이 단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둥에 예리한 두 줄기 기세가 닿아 있는 것이다. 그의 계산과는 달리 등뒤에 있는 두 사람의 주의력은 여인의 등장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진운의 기억 속에 아까 노인이 수신호를 보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의 뒤에 있는 사내들에게 왜 말로 않고 수신호를 보냈을까? 바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그의 결정적인 실수가 있 었다. 그의 등뒤에 있는 두 사람, 그의 탈출을 불가능하게 한 두 사 람은 귀머거리였던 것이리라. 귀머거리가 여인의 목소리를 들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순간의 계산 착오를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 이었다. 찰나지간에 있었던 변화였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미동도 없었던, 그러나 심리와 기세 의 흐름에 있어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은 격렬한 변 화였다. 일순 멈춘 것 같았던 시간이 다시 제 속도를 찾았고, 사람들 도 다시 움직임을 보였다. 방각이 진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 그냥 시작하지." 한 여인이, 아마도 방금 방문을 들어선 그 여인이 진운의 뒤 로부터 탁자를 향하여 걸어갔다. 훤칠한 키의 여인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범했지만 웬만한 사내들보다도 큰 키에 버 들잎처럼 호리호리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전신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느 낌이 전해졌다. 방심한 듯한, 흑은 나른한 둣한 느낌! 그렇게 걷다가 한 순간 아지랑이처럼 꺼져 버릴 것 같다는 인 상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진운은 문득 저 여인의 얼굴도 뒷모습에서 픗기는 느낌과 일 치할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대개의 경우, 뒤에서 본 인상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느끼는 인상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진운은 방금 들어온 이 여인은 설흑 아름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라 고 확신했다.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인이 뒤돌아 섰다. 이미 방 저편에 도착해서 붉은 관에 한 손을 대고 선 자세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진운은 자신을 잊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잊었다. 이 순간,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비스듬히 그를 향해 서 있는 여인의 신비한 분위기와 가슴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 는 심장의 움직임뿐이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묘한 아름다움은 단지 아름다움이라는 말 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아지랑이 같은, 달빛에 비친 은방울꽃 같은, 아니 그 무엇에 도 비교할 수 없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종류의 아름다움……! 진운의 칠십 평생에 이런 느낌을 주는 여인은 단연코 처음이 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았다. 방각이 어이없다는 둣 한마디 뱉었다. "저 고질병은 아직도 못 고쳤군." 넋나간 둣 여인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진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고질병?" 여인이 되물었다. 진운의 가슴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잊는다는 것은 이미 늦어 버린 일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짧은 말 한마디, 고운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어딘지 쉰 둣한 목소리가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감미롭게, 그리고 감동 적으로 가슴을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방각이 설명했다. 음양산인 진운은 겉보기에는 사십대의 청수한 유생이지만 사 실은 칠십이 넘은 강호의 노마두(老魔頭)였다. 당금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사사(四邪) 중의 하나, 희대의 사 기꾼이요, 색마(色魔)인 사유(邪儒)라고 불리는 인물이 그였다. 악명에 비해 무공은 대단하지 않으나 교활, 악랄한 심계(心 計)와 지모는 어떤 사공(邪功), 마공(魔功)보다 위험하다고 알 려져 있다. 그의 악명의 대부분은 그 뛰어난 지모를 바탕으로 한 사기행 각과 또 한 가지, 준수한 외모에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 점을 이용한 엽색행각(獵色行脚)에서 얻어졌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스스로 안겨 오지 않는 여인은 안지 않 는다는 것! 폭력이나 약물을 사용해 여인의 정절(貞節)을 유린하는 여타 의 색마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스스로의 항변이었다. 자신이 같이 잔 여인들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진운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색마라 불리는 것은 억울하다는 것인데, 그에 게 딸이나 아내, 심지어 어머니까지 빼앗겼던 무림인들에 대해 전혀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자가 예전에 금도강에서 쫓겨난 이유도 대당가(大當家;우 두머리)의 아내와 첩, 금지옥엽 외동딸까지 한꺼번에 희롱했기 때문이었지. 본인은 스스로 안겨 온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그런 변명이 먹혀들 리가 없었지." 진운이 갑자기 한마디 짧게 말했다. "육십구!" "응?" "나는 아직 칠십이 넘지 않았어. 올해 육십구 세밖에 안 됐어." "재미있네……!" 여인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진운은 다시 넋이 나갔다. 벽에 기대어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묘족의 복장을 한 청년이었다. 그는 허리줌에 손을 올리며 건들건들 걸어서 진운에게 다가갔다. 길거리의 건달 같은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그의 걸음에는 어딘지 모르게 살기가 배어 있었다. 엉덩이 뒤로 슬쩍 보이는 용이 새겨진 칼자루가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는 흉노(兇奴)들이 사용한다는 달처럼 굽어진 반월도(半月 刀)를 엉덩이 뒤에 가로로 눕혀서 차고 있는 것이다. "사기꾼에 색마라……? 직업에 맞는 대우를 해드려야겠군." 진운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건달처럼 걸어오고 있지만 절대 녹록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잘 갈무리된 기세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응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러려면 여인에게서 눈을 떼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 었던 것이다. "방명(芳名)이……?" 반월도의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저 소저의 방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청년은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건 정말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좋겠구나, 월몽영(月夢影)! 추종자가 하나 늘었네?" "월…… 몽…… 영……!" 진운은 한자 한자 따라서 중얼거렸다. "달빛 꿈속의 그림자……?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그때, 작은 소리가 났다. 나무 문이 빡빡한 문틀에 끌리며 열리는 듯한 소리였다. 진운은 갑자기 달라진 방안의 분위기에 놀랐다. 모든 사람들이 아연 긴장해서 소리가 난 곳을 보고 있었다. 소리가 난 것은 단 위에 있는 붉은 관이었다. 그 관뚜껑이 약 간 움직였던 것이다. 월몽영이 그 관뚜껑을 잡았다. 여태 잠든 것처럼 앉아 있던 라마승이 일어나 반대편을 잡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관뚜껑을 들어 옆으로 내려놓았다. 붉은 관 안에는 검은 칠을 한 또 다른 관이 있었고, 그 관의 뚜껑도 반쯤 들어올려져 있었다. 검은 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뚜껑을 들어올렸고, 그것이 붉 은 관의 뚜껑까지 움직였다는 설명이 가능했다. 진운은 이들이 무슨 요사스런 짓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방각(龐覺)이 방술(方術)을 배웠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러나 지금 이들이 하는 짓은 방술을 부릴 때 하는 모습 그 대로가 아닌가?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앞 으로 걸어나와 탁자 주변에 모여 섰다. 반월도의 사내는 진운과 대각을 이루는 자리에 서 있었다. 진운은 다시 한번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가 선 위치는 지금 진운의 뒤에 선 둘과 함께 그를 견제하 는 위치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가장 좋은 자리! 그렇게 허술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관은 완전히 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진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강시( 屍)인가?' 강시는 시체를 약물로 처리하고, 요사스런 술법을 걸어 움직 이게 만돈 괴물이다. 진운은 오십여 년의 파란만장한 강호생활 중 적지 않은 강시 를 보았다. 그러나 맹세코 이런 강시는 본 적이 없었다. 강시라기에는 너무 잘생긴 것이다. '염시(艶屍)?' 염시는 강시에 다시 주술을 부려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키도록 만든 괴물, 대개의 경우 미남자나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관에서 나온 자는 염시도 아니었다. 강시든 염시든 이미 죽은 시체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자는 분명 시체는 아니었다. 시체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힘이 그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보는 자를 압도하는 강한 힘, 그것은 위엄(威嚴)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사이(邪異)한 기운을 풍기는 묘한 매력이었다. 회미한 불빛이 미처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 사내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막힐 듯한 정적만이 방안을 감돌았다. 진운은 오늘 이상한 일을 많이 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생소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뭔가 아주 오랫동안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어둠 속에서 파란 불빛이 켜졌다. 그것이 관에서 나온 사내의 눈빛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사내가 지금 감았던 눈을 뜬 것이라는 것 도……! 그 파란 불빛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사내가 방안을 한바 퀴 둘러보고 있는 것이다. 그 눈빛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진운은 비로소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깨달았다. 공포(恐怖)!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진운이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나왔다. "배가 고프군."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방 안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일시에 근심과 긴장이 풀린 듯한 표정으로 합창하듯 말했다. "쾌차(快差)하심을 축하드립니다." '병에 걸렸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배가 고프다는 말은 오랜 병석에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 하 는 말로는 괜찮은 말일 것이다. 월몽영이라는 여인이 파란 눈빛의 사내의 팔을 잡아당겼다. "생일도 축하해." "생일이라……?" 사내가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오늘이었던가?" 불빛 속으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눈이 부실 정도의 은빛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 외에는 일체가 검은색인 사내! 몸에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 검은 피풍(避風;바람막이)에 검 은 가죽신, 손에는 검은 장갑까지…… 온통 검은 복색을 갖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밤은 점점 더 깊어갔다. 진운은 은발(銀髮)에 흑의(黑衣)의 사내가 탁자에 차려진 음 식을 거의 반 시진에 걸쳐서 먹고, 차를 한 잔 다 마실 때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현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 유일한 위 안거리였다. 우선 이들은 명나라 국경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 다. 신분증을 필요로 하는 것과,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의 중원 말이 어쩐지 어색하게 들린다는 정도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둘째로는, 이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십대로 보이는 은 발사내가 이 일행의 우두머리 같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 예를 들어 방각 같은 노마두도 그에게 존대를 하 는 것을 보면 그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평어(平語)로 그에게 말을 거는 월몽영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일행에서 월몽영의 위치는 매우 독특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은발사내에겐 말을 놓지만 방각에게는 존대를 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반월도의 사내는 방각과 은발사내에게 는 존대를 하지만 월몽영에게는 말을 놓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월몽영의 위치에서 비롯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명확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진운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생각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월몽영의 신분이 어떻든, 적어도 은발사내와는 극히 친밀한 사이일 것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운은 가슴에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 고통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은발사내에게 느끼는 질투였다. 그는 월몽영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반했다. 물론 여태까지 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여인을 알고, 그녀들을 사랑해 왔다. 그러나 월몽영처럼 한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은…… 생 각해 보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대개의 경우 사랑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아직 그렇게 반했던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이 일행을 반드시 속여 보겠다. 그리고 월몽영을 자신의 여인 으로 만들다고……! 은발사내가 물었다. "몇 명이 더 죽었나?" 방각이 무겁게 대답했다. "셋입니다. 담호변색(談虎變色) 양소(梁小), 산령왕(山靈王) 엄발(嚴跋), 그리고 노소포(老笑疱;주책바가지)……!" "노소포도……!" 은발사내는 잠시 침음했다. 방안의 분위기가 무건게 가라앉았다. 은발사내는 문득 고개를 들어 진운을 보았다. "저 사람은?" 방각이 묘한 표정으로 진운을 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둣했다. 반월도의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사기꾼이고, 우리를 속이려 했죠!" 월몽영이 입술을 약간 찌그러뜨려 비웃는 둣한 표정을 했다_ "내게 반했대!" 은발사내는 짧게 명령했다. "죽여!" 방안에 살기가 짙어졌다. 진운은 어깨를 으쏙했다. "간단하고도 확실한 명령이군. 하지만 누가 그걸 집행하지!" 그는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상황이 명백해지면 할 일도 명백해지는 법인 것이다. 그는 아직 죽기가 싫었다. 그렇다면 힘이 모자라 죽을 때까지 는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방각이 위협하둣 말했다. "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이 방안에 적어도 다섯은 있지." "너도 그 중 하난가?" 방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죽음을 각오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한 다섯은 널 삼 수(三手)안에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지. 전혀 손 해보지 않고……!" 방각은 과장이 없는 사람이다. 거짓은 더욱 없었다. 진운은 그러나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 었다. 그래도 강호 백대고수의 하나이며, 강호사사(江湖四邪)의 일 인(一人)인 사유 음양산인 진운이었다. 그를 삼 수 안에, 그것도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죽일 수 있 는 사람은 천하가 넓다 해도 열손가락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보지 않는 동안에 허풍이 늘었군, 방각!" 반월도의 사내가 건들거리며 다가섰다. 그는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방각에게 물었다. "그 다섯 중에 저도 있겠죠, 방노인(龐老人)? "있다면?" "방노인이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죠." 진운은 자신을 도마 위의 고기처럼 생각하는 그들을 비웃어 주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방안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마치 방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군사들이 객잔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은발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진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원을 통해 깔아 놓은 포석(布石)이 이제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깔아 놓은 포석은 아니었다. 그가 거액을 갈취해서 사라지면, 조금 후 군사들이 와서 그들 을 포위한다는 각본이었다. 완전히 속았다는 자각(自覺)을 하게 함으로써 철저한 절망감 을 심어 주려는 것이었는데 이떻게 그의 목숨을 구하는 기회로 작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럴 때 약간의 희롱을 않는다면 진운이 아닐 것이다. "조금 번거롭게 되었지?" 은발사내의 눈이 그를 향했다. "너냐?" 진운은 조금 위축되었지만 여유를 부려 대답했다. "나 아니면 누굴까?" 은발사내가 그를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순간, 그는 이미 진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는 극쾌(極快)의 신법이었다. 그저 그가 원래 서 있던 곳과 지금 서 있는 곳 사이의 공간이 한 순간에 없어졌다고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손!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그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왔다. 공격방향과 변화가 눈에 빤히 보이는 극히 단순한 수법이었다. 하나, 진운은 빤히 눈에 보이게 다가오는 그 손을 어렇게 막 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단순해서 방어와 공격을 동 시에 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효과적인 수법이 동시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중 가장 단순한 수법을 사용해 막아 갔다. 왼손을 내밀어 사내의 손을 잡아 비틀고, 오른손으로 목을 노 린다는 수법이었다.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인 법이다. 팍--! 사내의 손목이 진운에게 잡혔다. 진운은 자신의 손에 잡힌 사내의 손목을 안쪽으로 비틀었다. 완맥(脘脈)올 잡힌 상태에서는 사내가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순간, 진운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진운 은 왜 그의 눈앞에서 방바닥이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펑--!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 경황에도 번쩍 고개를 들자, 은발사내의 파란 눈빛이 보였 다. 마치 푸른 보석이 불빛을 받아 빛나는 둣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발사내에게 완전히 제압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방바닥에 넙죽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왼팔은 은발사내의 손에 잡혀 둥뒤로 꺾여 있고, 등에는 사내의 검은 가죽장화가 올려져 있었다. 터무니없이 평범하고 단순한 수법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 벽한 형태로 제압당해 있는 것이다. 등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은발사내가 발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왼팔 팔꿈치에 뭔가가 닿았다. 그리고 까무러칠 것 같은 고 통……! 으드득--! 진운의 왼팔이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되기 불가능한 각 도로 뒤로 휘었다. 부러져 나간 것 같았다. 팔꿈치에서 폭발하듯 시작된 고통이 바로 심장을 찔렀다. 진운은 입을 딱 벌렸지만 비명도 지를 수가 없었다. 전신의 신경이 고통을 느끼고, 그 여운을 즐기는 데로만 모이 고 있었다. 은발사내는 그에게 즉석에서 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주려 고 작정한 것 같았다. 그것도 극히 단순하고, 효과직인 방법으로……! 그는 진운의 왼쪽 어깻죽지를 밟고 다시 왼팔을 위로 당겼다. 으드드득--! 진운의 왼손은 이제 등뒤로 꺾여, 고통에 못 이겨 본능적으로 바닥을 긁고 있는 오른쪽 팔꿈치에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운은 오른팔이 다시 무엇인가에 잡혀 들어올려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절마다 꺾여지는 엄청난 고통 속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지만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겪은 고통보다 더욱 공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잠까--안--!" 그는 절규했다. 차라리 그냥 죽여 주기를 원했다. 이 은발사내는 그를, 아이가 파리나 잠자리를 생각하는 정도 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리를 하나씩 떼고 날개를 한 장씩 떼어 버린 뒤 발로 밟아 뭉게 죽이는 잠자리처럼 그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래서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는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은, 사내의 손길에 전혀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분노의 욕설도 없이 그저 기계적 인 정확성을 가지고, 단호하게 그를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설흑 그 파괴의 결과로 그가 죽어도 그건 우연의 일치일 뿐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파괴행위가 끝난 후 그는 죽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절규가 효과가 있었는지 사내의 손이 잠시 늦추어졌다. 진운은 사력을 다해 머리를 짜 내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를 중지시킬 수 있는가? 어떤 이익을 제시 해야 차라리 쉽게 죽여 줄 것인가?' "난, 나는 여러모로 당신들에게 쓸모가 있을 것이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은발사내의 무감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실패한 사기꾼 따위는 필요없다." 오른팔 팔꿈치에 힘이 가해졌다. 으드드득--! 고통! 고통이 불꽃처럼 터져 올라가고 있었다. 진운의 눈앞이 밝아졌다. 폭죽처럼 비산(飛散)하는 눈부신 고통이었다. 진운은 차라리 흔절(昏絶)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는 이 순간 그것을 간절히 원했다. 이 순간,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 동안 모아 둔 재물 전 부를 바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소리쳤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반드시 당신을 속여 보겠소." 그는 눈물을 홀렸다. 전신을 적셔 오는 축축한 느낌은 피인가, 아니면 땀? 혹은 눈물일지도 몰랐다. 진운의 칠십 평생에 이런 참담한 실패는 처음이었으니, 그것 도 이렇게 재미삼아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비참한 결과로 귀결 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울어도 좋았다. 실패에 비하면 눈물은 수치가 아니었다. 진운의 말도 안 되는 애원이 효과를 본 것인가, 은발사내는 더 이상 그의 관절을 부수지 않았다. 그는 한 발을 진운의 등에 올려놓은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었 다.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진운을……! 여태 구경만 하던 방각이 나섰다.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방각을 쳐다보았다. 이유를 요구하는 눈 빛이었다. 방각은 간단히 말했다. "꽤 능력있는 사기꾼입니다." 사내는 말없이 서 있었다. 진운은 소리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방각의 말이 효과 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명이 이 무지막지한 인물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을 그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 방각은 사내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짧은 말과 함께 등에서부터 느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기대해 보지." 사내는 방을 나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방각이 진운을 들었다. 진운은 계속 울고 있었고, 그 눈물은 그들 일행이 귀양부 군사 들의 포위를 간단히 뚫고 성을 빠져 나갈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실패의 수치가 범벅이 된 위에 뼛속 깊 이 스며드는 원한으로 양념한 눈물이었다. 그들은 정강산 기슭에 서 있었다. 멀리 아래편에 산을 돌아 지나가는 한 줄기의 관도(官道)가 보였다. 한쪽 끝은 그들이 방금 떠나온 귀양부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귀정현(貴定縣)으로 가는 길이었다. 귀정현을 지나면 또 다른 마을이 있고, 또 다른 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중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왔지?" 방각은 뒤돌아보았다. 진운이 부러진 양팔에 나뭇가지를 대어 묶은 채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제 일행은 진운까지 합쳐 열셋이었다. 방각은 간단히 대답했다. "대막(大漠)!" 제3장 1408년 3월 13일, 대막(大漠) 고비사막, 일명 대막(大漠)은 달단( ) 영하(寧夏), 감숙 (甘肅), 신강(新疆)에 걸쳐 있는 몽고고원(蒙古高原) 중앙에 위 치한 사막이다. '고비'란 몽고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땅'이라는 뜻, 알타이 [阿 泰]산맥 동단에서 흥안령(興安嶺)산맥 서록(西麓)에 걸친 동서 800리(里;명나라 때의 척도로 1리는 2Km), 남북 500리의 황무지를 가리킨다. 사막이라 부르지만 그 이름에도 나타나 있듯이 전부 '모래땅' 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상당 지역이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한서(漢書)>에는, 이 지역에 서역삼십육국(西域三十六國)이 있었고, 곳곳에 상당한 문명을 가진 성(城)이 있었다고 했다. 이제 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중 많은 성들이 버려진 고성 (古城)으로 남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버려진 고성들 중 하나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곳을 지옥성(地獄城)이라 불렀다. "이레무쑤?" 총옥주(總獄主)가 말했다. 몽고어(蒙古語)였다. 그러나 예충(芮衷)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 지옥성(地獄城)의 인원 중 거의 팔 할이 몽고족(蒙古族) 이었기 때문에 몽고어는 평상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올 수 있을까?" 야유신(夜遊神) 예충은 문득 고개를 돌려 총옥주를 보았다. 종옥주는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추천한 사람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추천한 자 신도 믿지 않는다는 증거였으므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 이었지만 화낼 필요는 없었다. 분노로 누군가를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로 이해시킬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만이 무엇보다 웅변적으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귀찮군!' 예충은 내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말할 뿐이었다. 그는 어떤 일에도 언성을 높이거나 어조를 빠르게 한 적이 없 었다. 대개의 경우 그런 말은 해결에는 도움도 되지 않고 단지 일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리야투 아바 타타브 우게씨, 지가쑤 지가시라무이 하루순 모도. 빌류하이 아바 아루가투 흑수말 쑤무. 우게이 루오?(짇승 은 올가미로, 고기는 낚시로 잡습니다. 새는 활을 쏘아 잡지요. 그러나 용(龍)은?)" "……?" "루오[龍]는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루오는 인간의 이해능력 을 넘어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중에 루오 같은 존 재가 있다면, 소위 인중룡(人中龍)이 있다면……." 예충은 말을 잠시 끊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총옥주는 예충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예충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자신의 말에 힘을 보태며 단정 적으로 말했다. "그가 바로 루오입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탁자 위에 놓인 모래시계의 알이 거의 다 홀러내리고 있었다. 금빛이 번쩍이는 모래 알갱이……. 방안의 두 사람은 말없이 그 금모래가 흘러내리는 모습만 보 고 있었다. 문득, 총옥주가 입을 열었다. "예옥주(芮獄主)는 제자에게 대단한 신뢰를 갖고 있군!" 예충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결코 자만하는 것은 아닌, 그러나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있 는…… 여유있는 미소였다. "제자를 자랑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지만, 그 애가 가능하 지 않다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 것입니다." '사실은 없다고 봐야겠지……!' 예충은 그런 내심(內心)은 입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말로는 무엇 하나 믿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을 믿게 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감주어 두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똑! 모래시계의 마지막 알이 떨어졌다. 총옥주가 길고 검은 손을 내밀어 시계를 뒤집어 놓았다. 스르르--! 모래는 다시 반대편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결과를 보면 알겠지." 뚜우--! 지옥성의 밤하늘 아래로 뿔고동 소리가 퍼져 나갔다. 신호였다. 이 순간 지옥성의 일천 옥졸(獄卒)들이 눈을 빛냈다. 여덟 겹의 방어막, 서른두 곳의 매복에서 전지옥성의 무사들 은 신경을 칼같이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총옥주의 명령은 단 하나였다. 이 시간 이후로 한 시진(一時辰;2시간) 동안 살아 있는 것이 면 그 무엇도 관문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어떤 유형의 일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온다. 총옥주가 있는 지옥전(地獄殿)을 향해 누군가가 오고 있다. 그 누군가를, 설사 그것이 진짜 지옥의 사신(死神)이라 하더 라도 반드시 막아야 했다. 명령은 단순명료했고 그들이 할 일 또한 그러했다. 앞으로 한 시진, 다시 뿔고동이 울리기 전에는 설사 총옥주 본인이라 하더라도 관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 * * 道日規始於一 一而不生 故分爲陰陽 陰陽合和而萬物生 故日一 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道)의 운행은 하나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하나로써는 낳지 못하기 때문에 나뉘어 음양(陰陽)이 된다. 음양이 화합하여 만 물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陰陽者 天地之道 萬物之綱紀 變化之父母 生殺之本始 神明之府 也. 음양(陰陽)은 우주만물의 보편적 법칙이고 만물의 강령이며 변화의 근원이다. 삶과 죽음의 근본이며 신명(神明)의 집이다. 北方陰極而生寒 寒生水 南方陽極而生熱 熱生火 東方陽動以散 而生風 風生木 南方陰止以收而生燥 燥生金 中央陰陽交而生濕 濕 生土 土者 陰陽沖氣之所生也. 북쪽에서는 음이 극하여 추위를 낳고, 주위는 수(水)를 낳으 며, 남쪽에서는 양이 극하여 더위를 낳고, 더위는 화(火)를 낳 으며, 동쪽에서는 양이 움직여 흩어지면서 바람을 낳고, 바람은 목(木)을 낳으며, 서쪽에서는 음이 멈춰 모이면서 건조함을 낳 고, 건조함은 금(金)을 낳으며, 쭝앙에서는 음과 양이 서로 만 나 습함을 낳고, 습함은 토(土)를 낳는데, 토는 음양의 충기(沖 氣)에 의해 생겨난다. 陰陽五行者 在於 相生相克 生克制化. 음양오행(陰陽五行)은 상생상극(相生相克)하고, 낳고 이기며 제어하고 변화시키는 생극제화(生克制化)의 총체적 관계 속에 있다. 故, 百病成於氣也 怒則氣上 喜則氣緩 悲則氣下 恐則氣下 寒則 氣收 昊則氣泄 驚則氣亂 勞則氣耗 思則氣結. 그러므로, 모든 병은 기에서 생긴다. 화를 내면 기가 올라가 고, 기뻐하면 기가 완만해지고, 슬퍼하면 기가 소모되어 약해지 고, 두려워하면 기가 내려가며, 추우면 기가 수심하고, 더우면 기가 밖으로 배설되고, 놀라면 기가 어지러워지며, 과로하면 기 가 소모되어 흩어지고, 생각을 많이 하면 기가 맺힌다. 陰氣太盛 卽陽氣不能榮也 古日關 陽氣太盛 卽陰氣不能榮也 故 日格 陰陽俱盛 不得相榮 故日關格 關格者 不得盡期而死也……. 음기가 지나치게 많으면 양기가 번영하지 못하니 이를 관(關) 이라 한다. 양기가 지나치게 많으면 음기가 번영하지 못하니 이 를 격(格)이라고 한다. 음양이 모두 성하여 서로가 번영하지 못 하면 이를 관격(關格)이라고 한다. 관격이란 수명을 다하지 못 하고 죽는 것이다……. 스르르--! 문이 열렸다. 희미한 빛과 함께 한 사람이 들어왔다. "출발할 시간입니다, 소주(少主)!" 방안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한 점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어둠, 그 속에 그는 앉아 있었다. 방금 열려진 문으로 희미하게 비쳐드는 불라이 아니라면 누구 도 그 방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책을 읽고 있었으리라고는……!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열려진 문으로 비쳐드는 불라이 방안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는 책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의학서(醫學書)인 <황제내경(皇帝內輕)>에서부터 반고(班固) 의 <백호통(白虎通)>, 도사(道士) 성현영(成玄英)의 <운급칠첨 (雲 七籤)>, <논형(論衡)>, <역수구은도(易數鉤隱圖)>, <산정역 도(刪定易圖)>, <기양명(奇陽明)> 등둥의…….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널린 책들은 하나같이 역학(易學)의 이 론을 밝힌 것이거나 의학(醫學)에 관한 책들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방안에 들어온 사람은 장작개비처럼 깡마른 삼십대 사내였다. 그는 방안의 고요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변명하듯 조심스 럽게 말했다. "이미 일 각(一刻;15분)이 지났습니다만……!" 어지러이 널린 책 저편, 복도에서 흘러들어오는 불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방 한구석에 갑자기 두 개의 불빛이 나타났다. 눈동자! 마치 고양이의 눈과도 같이 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다만 바라볼 뿐 일체의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은 눈동자였다. 소리없이 두 개의 눈동자, 두 개의 불빛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둠 속의 인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불을……!" 눈동자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방문 밖으로부터 홀러들어오던 불빛이 한 순간 밝아지 는 둣하더니 꺼져 버렸다. 방안은 다시 완벽한 어둠으로 덮여 버렸다. 그 어둠 속에 두 개의 파란 불빛만 반짝이고. 그 아래에서 차 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한 시진은 너무 길다." "……!" 장작개비 같은 사내, 종리매(從 魅) 팽거(彭鉅)는 일순 말문 이 막혔다. 파란 불빛 아래에서 나온 목소리는 위압적이거나 흉포한 살기 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거칠거나 새되거나 하지도 않 은, 원래는 듣기 좋았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순간척으로 등골이 서늘 해지는 둣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가 저마다의 색을 띠고 있다면 분명 방금 들은 목소리 는 무색(無色)일 것이다.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무색의 말을 듣는 둣한 비현실감이 그를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종리매 팽거가 그 비현실적인 감정에서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 을 때, 파란 불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한 시진이 너무 길다고……? 허허 참……!" 그가 알기로 여기에서 지옥전까지 한 시진 안에 간다는 것은, 그것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침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소주인(少主人)은 그 시간이 길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종리매 팽거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소주(少主)에게는 정말 지루한 시간일 수도 있지." 지금은 밤이고, 밤은 그의 소주인의 것이니 말이다. * * * 매복(埋伏) 의 제일 원칙은 위치선정이다. 자신의 위치는 감추고, 감시방향으로 다가오는 일체의 것들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매복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정숙(靜肅)이었다. 죽은 둣 엎드려 있는 것이다. 적을 발견하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작은 것도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승게 발견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것도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 을 동안은 발견하기가 승지 않다. 그것은 시력(視力)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력(注意力)의 문제인 것이다. 배경 속에 녹아 있을 것! 그것이 매복의 마지막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매복할 위치가 좋지 않아 길 위에 서 있어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길과 동화되어 전혀 이물(異物)의 분위기만 내지 않는다면, 그곳은 나무 뒤나 바위 뒤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은폐장소가 되는 것이다. 음명귀(陰冥鬼) 가오륙(賈五六)은 그 원칙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경계무사 생활을 해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잘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경계망을 뚫어 본 적이 많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중원에서 만 리나 떨어진 이역(異域), 대막의 밤하늘 아래로 오기 전에 그는 청부살수(請負殺手)였다. 철통 같은 경계와 감시를 피해 목표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그의 생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뒤집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침 투자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이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임무를 고맙게 받아들여야 했고, 누구보다도 잘해야 했다. 몽고족이 우글거리는 이 황량한 대막에서 한인(漢人)이 살아 남으려면 몽고족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는 것을 보일 수밖에 없 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이 임무에도 잘 어울렸다. 어떻게 매복해야 침투자를 적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자 신이 어떤 매복을 뚫고 들어가기가 가장 힘들었던가 하는 경험 에서부터 거꾸로 추론(推論)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인 대규지옥(大叫地獄) 소속 음명대(陰冥隊) 의 마흔아흡 대원들은 그래서 오늘의 일에 가장 적격인 자들이 라고 할 수 있었다. 달빛 아래 검게 웅크린 지옥성의 바위집들 사이로 정적만이 흘렀다. '누구도 이곳은 뚫을 수 없다.' 가오륙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흑시 누가 침투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일 것이었다. 지옥성 제이 방어막의 다른 세 군데는 몰라도 적어도 그들이 지키고 있는 이곳만은 절대 아니어야 했다. 그는 야유신 예충이 제자를 믿고 있는 만큼이나 그 자신과 부 하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지옥전 외부경계의 마지막 매복, 등활지옥(等活地獄) 소속 요 풍대(夭風隊)의 대주(隊主) 요풍귀(夭風鬼) 요륵(夭勒)은 음명 귀 가오륙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뚫리지 않는 경계망은 없다.' 천 명이 도적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중원제일의 독행도(獨行盜)로 자부하던 그 자신, 마음을 먹어 서 아직 침투해 보지 못한 곳이 없는 처지였다. 물론 오늘의 경계를 뚫는다는 것은 그에게도 어려운 것이었다. 지옥성의 초입(初入), 나지막한 바위집들에서부터 그가 지금 엎드려 있는 지옥전 지붕에서 내려다보이는 입구까지 네 겹의 방어막을 통과한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옥전 안으로 들어가면 총옥주의 처소(處所)까지 다 시 네 겹의 방어막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상당 부분은 기관(機關)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관은 사람만큼 정교한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기관은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제약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다면 간단한 장치에도 상당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총옥주가 있는 방 전체를 철갑(鐵甲)으로 둘러싸 놓는다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올 때는 상당히 귀찮아지겠지만……. 어쨌든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대개의 경우 무식할수록 효과 가 컸다. 그러나 오늘의 침입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그가 드러나 있 다는 것이었다.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총옥주다. 혹은 총옥주가 있는 지옥전이다. 허용 된 시간은 한 시진에 불과했고, 그나마 사분의 일이 지났다. 결정적으로 그는 반드시 침입을 시도할 것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칩입자는 충분히, 넘칠 정도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정말 총옥주를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요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보름이 가까워 오는가, 달은 둥근 모양을 만들어 가며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전혀 없었지만 이런 밤이면 달은 정말 소리내어 신 음하는 것 같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아래로……. 항상 그랬지만 이 복도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지옥성의 정예인 지옥삼십육귀(地獄三十六鬼)의 하나인 그에 게도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복도 전체에 도배하듯 그려 놓은 지옥도(地獄圖)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말이다. 이런 기분나쁜 그림은 잘 그리면 잘 그려 놓았을수록 더욱 기 분나쁜 법이다. 더구나 오늘처럼 그 그림 속의 하나로 숨어 있 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 불평스런 기분이 되었다 해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벌써 반 각째 온몸에 붉은 칠을 하고 입을 딱 벌려 소리지르 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침입자를 잡아내기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색명귀(索命鬼) 하석(賀晳)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십오 장(十五丈) 길이의 복도를 빽빽히 메우혀 그림이 되어 버린 그의 마흔아흡 색명대원(索命隊員)들과 함께……. 역시 지옥삼십육귀의 하나인 무상귀(無相鬼) 파적(巴 )은 색 명귀 하석에 비하면 한결 쾌적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그래도 그는 사방이 뚫린 광장에 가까운 넓은 대청에 서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그는 광장에 즐비하게 서 있는 석상의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 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꼿꼿이 서서 며칠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으며 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의 장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한 시진이라는 시간은 정말 짧은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도 거기까지 오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그가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 * * 모래시계는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한 시진의 시간이 이제 모래 몇 알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종옥주는 그 몇 알의 모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은 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중이 자신의 제자에게 경계망의 구성을 미리 알려 줄 위인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사에 대비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성질이 여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몇 번이나 되었 던가! 그래서 이번에도 여덟 겹의 방어막 이후에 또 하나가 있다는 말은 예충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여덟 방어막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강력한 방어막이 있다는 것을……. 금모래가 떨어지고 있었다. 셋…… 둘…… 하나! 내기는 끝났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긴 것 같군, 예옥주!" 그는 약간의 경멸과 질책의 빛이 담긴 눈으로 예충을 보고 있 었다. 매사에 정확하던 예충이 오늘은 실수한 것이 분명했다. '유리처럼 투명하던 그의 지각(知覺)도 제자에 대한 사랑 앞 에서는 흐려지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예충은 태연히 고개를 젖고, 손을 들어 방 한쪽을 가 리켰다. "아니오, 소관(小官)이 이겼습니다. 이미 일 다경(一茶更;차 한 잔 마실 시간, 대략 5분 정도) 전에 말입니다. 지옥성 십팔지옥(十八地獄)을 총괄하는 총옥주 검은 표범[黑 豹] 쌍고르마는 안색이 변해 버렸다. 예충이 가리킨 방 한쪽 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들어온 것도 몰랐고, 언제부터 그렇게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마치 벽에 드리운 엷은 그림자처럼, 흑은 원래 그렇게 기대어 세워진 조각처럼 무표정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가죽읏, 검은 피풍(披風;바람막이)에 검 은 가죽신, 손에는 검은 장갑까지…… 온통 검은 복색을 갖춘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림자처럼 검은 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청년의 머리위로는 은빛 광채가 홀렀다. 온통 검은빛 속에서 머리카락만은 빛나는 은발(銀髮)인 것이다. 은빛 보관(寶冠)을 쓴 것처럼 눈부신 은발 아래로 보이는 창 백한 얼굴……. 긴 속눈썹에 깊은 눈동자, 소녀의 그것처럼 도톰하고 작은 입 술은 여자로 착각할 만큼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머리를 제외한 전부를 어둠처럼 검은색으로 휘감아 더욱 하얀 청년의 갸름한 얼굴은 밝은 등불 아래 너무도 파리해 오히려 귀 기(鬼氣)가 흐를 정도였다. 쌍고르마는 다시 한번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저렇게 특이한 복색, 특이한 용모의 인물이 방안에 있었는데 몰랐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저런 인물이 방안의 단조로운 배경 속에 자신을 감출 수 있었 다는 말인가? 그보다도 안에서 열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 한 자 두께의 강철 문을 그 청년은 언제 통과한 것일까? 쌍고르마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언성은 높고 말투는 거칠었지만 분노했다기 보다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不信)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한동안 침묵이 홀렀다. 예충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검은 표범 쌍고르마에게 그가 모르는 한 수가 더 있을 거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흑도(黑道)의 생리였다. '최후(最後)' 라고 말하고 적이 안심했을 때, 비로소 뽑아드는 비장의 한 수가 혹도인(黑道人)에게는 반드시 찔요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아직 완벽한 흑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설마 이런 한 수가 쌍고르마에게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의 눈과 귀까지 완벽하게 속이고 천장에 숨어 있는 비장의 한 수가 말이다. 예충은 짧은 순간 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내심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같지.' 쌍고르마의 한 수는 그의 눈은 피했을지는 몰라도 제자의 그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장 위에 있던 그 누구, 흑은 누구들도 예충의 의견에 동의 하는 듯했다. 한참 후에야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던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쌍고르마는 심중의 격동을 애써 눌러야 했다. '모른다? 그들이 모른다?' 검은 표범 쌍고르마의 팔십여 평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십 년 전 당시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元)제국의 비밀감 찰조직인 다루가치부(達魯花赤府)의 수장(首長)을 맡아하며 온 갖 묘한 일을 경험했던 그였다. 그때도, 드넓은 중원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에게서도 이런 놀라움은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제 여기 대막의 궁벽한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방안 곳곳에 숨은 다섯 사내들이 그가 여태 거느렸던 수하들 중 최고의 다섯이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예충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세 가닥 긴 수염을 기른 칭수한 인상의 중년 문사. 그가 왕년에 강남북을 주름잡은 흑도의 대도(大盜), 야유신 예충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강서(江西), 사천(四川) 인근에서는 경공(輕功)과 투도술(偸 盜術)로 유명한, 전통있는 혹도의 문파인 귀영문(鬼影門)의 당 대문주 야맹상(夜孟嘗)이라고도 말이다. 쌍고르마는 은발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옥의 칠살(七煞)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움직이는 인물 이 있을 줄은 몰랐군!" '지옥칠살(地獄七煞)!' 예충은 내심 큰 숨을 들이켜야 했다. 종옥주의 명령만을 듣는 칠 인의 고수(高手)! 총옥주와 그들 자신 외에는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어 둠 속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지옥성의 말단 옥졸일 수도 있고, 예충과 마찬가지로 한 개 지옥을 맡고 있는 옥주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차를 나르 는 시녀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나서서 가눙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칠살의 눈을 제자가 피했다는 것이다. 제자의 능력이 그 정도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보다……. '너무 일찍, 너무 일찍 재주를 드러내었어!' 쌍고르마는 손을 저었다. "너무 놀랄 것 없소. 평상시에도 내 신변보호를 위해 칠살 중 둘은 항상 주변에 있으니까! 일곱이 다 있었다면 예옥주의 제자 아니라 귀신이라도 못 들어왔겠지." 예충은 총옥주의 눈을 마주보았다. 예상대로였다. 상처입은 자존심을 그런 말로 달래고는 있지만 총옥주의 눈빛 은 감탄이나 찬사라기 보다는 은밀한 두려움과 경계의 빛을 띠 고 있는 것이다. 예충은 총옥주가 자신과 제자를 경계하기 시작헛다는 것을 예 리하게 포착했다. 시작은 사소할지 몰라도 일단 경계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그런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생사의 위협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그것 또한 흑도의 생리이니 말이다. 예충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직 그것뿐이지요.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이는 것에 하라가 이의 밥줄이 걸려 있으니 말입니다." '하라가이'는 몽고어로 도둑이다. 약탈은 사내다운 일이라고 인정해도 몰래 훔치는 것은 최고의 모욕으로 생각하는 몽고인이었다. 그들에게 도둑이라는 말은 인간 이하의 존재를 의미하는 최고 의 욕인 것이다. "도둑이라…… 단지 그렇게만 부르기에는 아까운 인재군!" "저회 문중(門中)의 자랑거리라야 그것이 고작이니……!" 은근한 겸손과 자기비하(自己卑下)의 어조가 쌍고르마의 심기 를 달래 준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은 부드러워진 눈길로 은발청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 자랑거리가 이번 일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 예충은 얼른 은발청년을 손짓해 불렀다. "이레이(이리 오라)! 어서 이리 와서 총옥주님을 뵈어라!" 은발청년은 고개를 들어 쌍고르마를 보았다. 깡마른 체구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팔, 그 팔을 길고 무성한 검은 털이 덮고 있는 인물! 검은 표범 쌍고르마는 표범이라기보다는 원숭이라 불러야 좋 을 인물이었다. 평범한 사내가 그런 용모를 가졌다면 아마도 조 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얼굴을 반이나 가린 무성한 구레나룻 사이로 번 뜩이는 눈동자는 그를 조롱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화등잔처럼 큰 눈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예리 한 안광을 서리서리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은발청년은 무례하게도 한참 동안이나 쌍고르마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까닥거려 보였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예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례한…… 제대로 예를 갖추어라!" 그러나 청년은 팔짱을 풀지 않았다. 다만 유리알처럼 표정없는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쌍고르마는 다시 한번 가슴 속으로 찬 바람이 스치는 둣한 느 낌을 받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특이한 용모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철저히 자신의 기세를 죽여 주위에 동화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일단 드러나자 이제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개를 까닥거리는 그 간단한 동작에도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 키는 묘한 매력이 그에게서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분명 같은 방안에 있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독 특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보석(寶石)이다.' 쌍고르마는 여태 이런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청년에게서 이렇게 강한 인상을 받은 것도 그로서 는 처음이었다. 그는 청년의 무례한 태도에 상관하지 않고 예충을 향해 물었다. "한인(漢人)인가?" 예충이 대답했다. "한인들의 시체 틈에서 주워온 아이이니……." "이름이……?" "야광충(夜光蟲)!" 예충은 낯선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반복해 말했다. "야광충입니다." 쌍고르마는 은발청년을 불렀다. "야광충!"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할 일이 있다." * * * "조만간 성내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야유신 예충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네가 여기 지옥성 밖의 세계를 경험해 보 기를 바라는 것이다. 야팡충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시킨 예충의 의도에 대해서는 궁금해 한 적도, 의 흑을 느낀 적도 없었다. 예충이 이유없이 일을 시킬 리는 없는 것이다. 단지 지옥성 내의 변화라는 것에 대해 예충이 민감하게 반응 하는 것이 조금 이상할 뿐이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와야겠군!' 그는 예충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자신이 거기 없는 것은 바 라지 않았다. 복도의 끝에 다가가자 철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 모퉁이 어둠 속에 감춰진 듯 서 있던 사내가 불신(不信)의 빛으로 그를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 복도를 지날 때에도 그런 시선들은 여기저기에서 느 껴졌다. 그들의 방어막을 이렇게 거침없이 통과한 침입자에 대한 놀라 움을 그렇게 표시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야광충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일반적인 침입자들은 그들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 로 그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그들은 어둠의 소리를 듣기에는 먼 것이다. 야광충을 정말 긴장시켰던 것은 따로 있었다. 오늘밤에 만난 최고의 방어막이 그것이었다. '지옥칠살(地獄七煞)이라 했던가?' 적어도 그 중 하나는 그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약간의 기를 일부러 흘리긴 했지만……. 조금 더 드러냈어야 그의 침입을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항상 자기 능력의 삼 푼(三分)을 감춘다는 흑도의 관행은 그 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흑도인의 제자, 누구보다도 더 혹도인 다운 혹도인인 것이다. '그리고 총옥주…….' 그 교활한 늙은 원숭이의 속이 빤히 보이는 연극은 정말 구역 질이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가 침투하는 것을 정말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 과장스러운 놀라움과 분노는 예충을 위협하는 의도로 꾸며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사부를 음해(陰害)하려 하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못난 인물로 꾸미려 한다는 것은 적을 기만하 기 위해 하는 행위이지 동지에게 하는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야광충은 문득 고개를 돌려 예충을 보았다. 예충은 굳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며 걷고 있다가 그를 돌아 보았다. "무슨 할말이 있느냐?" 주름 가득한 얼굴에 피곤한 표정의 예충이었다. 그러나 그 주름 속에 깊이 박힌 눈은 여전히 밝게 번뜩이고 있었다. 야광충은 자신의 느낌을 말하려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예충의 얼굴은 지쳐 보였지만 눈은 아직 지쳐 있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예충은 굳이 그의 도움이 없더라도 늙은 원숭이에게 당할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필요 이상의 참견은 사부에게 모욕일 뿐이다.' 야광충은 조용히 말했다. "빨리 돌아오겠습디다." 예충의 주름살이 더욱 많아졌다. 그는 눈가에 한껏 주름을 잡아가며 웃고 있었다. 한 순간, 예충의 모습은 손자를 바라보는 자애로운 촌노(村 老)의 그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이 사부가 흔자 남아 있는 것이 걱정되느냐?" 그 말을 듣자 야광충은 갑자기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형(師兄)이 옆에서 모실 테니……!" 그 말에 예충은 곰의 쏠개라도 핥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그 녀석은…… 차라리 없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을……!" 야광충의 표정에 밋밋한 변화가 왔다. 입술 한쪽 끝이 순간적으로 올라가 웃음기 비슷한 것을 떠올 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얼음조각 같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갔다. 예충도 순간적으로 눈가의 주름을 잡아 미소를 짓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약간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나는 오히려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 "네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네 성격을 걱정하는 것 이다." 야광충은 다시 예충을 바라보았다. 예충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충은 말을 정리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이 사부의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다만 그리 뛰어난 것도 아 님은 너도 알 것이다. 천하에 나보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비 일비재(非一非再)할 것이니 말이다. 당장 너만 해도 나보다 무 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 사부는 알고 있다." 야팡충이 그의 사부보다도 무공이 뛰어났던가? "천부의 재질(才質)에 특수한 체질(體質)……, 거기에 모종의 기연(奇緣)이 있었으니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야팡충의 눈라이 잠시 혼들렸다. 무언가에 크게 놀란 빛이었다. 예충은 그런 야광충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라 는 둣한 편한 미소였다. "괜찮다. 네가 이 사부 외의 사람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태 모른 척한 것은 그것이 네 게 나쁘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그릇에는 많은 것이 들어가는 법이니, 이 사부의 능력으로는 다 채워 줄 수가 없다 고 생각했느니……!" 야광충은 뭔가 말하려는 둣 입술을 달싹거렷다. 예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사실은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법이다. 솔직히 우리 사문의 전통으로 물려받은 직업 또한 그리 명예스러운 것이 아닌 일개 도둑에 불과하고, 무공도 그에 필요한 것만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 아니냐? 네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는 어디서 주운 내 공심법(內功心法) 하나와 경공술(輕功術), 그리고 투도술(偸盜 術)밖에 없지. 투도술이래야 사실 소매치기하는 방법일 뿐이다 만…… 그것밖에 아는 것이 없으니 달리 가르쳐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충은 그 셋이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것으로 손꼽히는 것 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주워 가르쳤다고 말하는 그 내공심법(內功心法)이 아 니면 야광충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었으리라는 것 도……. "그러나 이 사부에게 단 한 가지만은 쓸 만한 점이 있다고 한 다면…… 나는 그것을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구나. 사부가 명예스럽게도 옛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을 딴 별호를 갖 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니……!" 맹상군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명한 왕족, 그 인품을 흠모 하여 삼천 명의 식솔이 따랐다고 했던 사람이다. 야유신 예충의 또 다른 별호가 바로 야맹상(夜孟嘗)이다. 무공으로 친다면 흑도 백대고수의 말석(末席)에나 오를 그가 과거 흑도십웅(黑道十雄), 흑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열 명 중의 하나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예충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무공은 이미 이 사부를 두 배 앞서 있음을 안다. 사부가 우둔하여 옛 선조의 진전(眞傳)을 반도 익히지 못한 데 반해 너 는 십이할을 연성했기 때문이고, 네 특이한 체질 덕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려면, 특히 지금처럼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 나가려면 무공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인 간이라 보는구나." 그것이 예충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인간(人間)……, 나는 네가 이 인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목숨을 지키려면 인간을 믿으면 안 된 다. 그러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 된 다. 모순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는 것 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예충은 강조하듯 굳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라!" 끼-- 익--, 쿵--! 그들의 앞에서 육중한 철문이 다시 하나 열렸다. 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검게 침묵하는 바위집들 위로 밤하늘 이 보였다. 문 저쪽, 지옥전 입구에 떨떠름한 표정을 한 사내가 엉거주춤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광충과 예충이 그를 지나쳐 가려 할 때, 그가 불렀다. "예(芮)어른, 한 가지만 묻고 싶소!" 예충이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요륵?" 요풍귀 요륵은 예충에게 말을 했지만 눈은 야광층에게서 떠나 지 않았다. "그 손님이…… 어느 길을 통해 지옥전에 침입했는지 궁금하 군요!" 은근한 기대의 눈빛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이 지키고 있던 이 길을 통해 누군가가 침입했 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싸워서 졌다면 모르지만 애초에 눈치도 못 채었다는 것은 죽 고 싶을 정도의 충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침입자의 눈은 얼음처럼 싸늘하게 그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무심히 내뱉었다. "이 길로!" "어, 어떻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어떤 대답보다 강렬하게 되돌 아왔다. 충격으로 확대된 그의 눈앞에서 은발청년은 순간적으로 사라 져 버린 것이다. 그저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법이 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둘러보았을 때, 은발청년은 이미 십 여 장 떨어진 한 바위집의 지붕 위에 조용히 서 있었다. 긴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였을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요륵의 어깨에 가벼운 충격이 왔다. 예충이 그의 어깨를 다독거린 것이다. "내가 지키고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녀석이니 너무 마음 상 해 하지 말게나!" 요륵이 더듬더듬 물었다. "도대체…… 누굽니까?" "내 제자일세!" 예충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 * * "스무살을 겨우 넘긴 애송이가 제 사부보다 무공이 높다……. 말이 되는 얘기일까?" 예충과 야광충이 나가고 한참이 지난 뒤 쌍고르마는 흘로 중 얼거리고 있었다. "중원에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었지. 청출어람(靑出於藍)이고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追前浪)이라고……. 또…… 영응은 젊 은이 중에서 나온다고도 했던가? 우리 몽고속담에도 그런 말은 있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 어떠냐, 혈 편복(血 )?" 마지막 말은 천장을 향해 나온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나무판이 마치 얼음이 녹아내릴 때처럼 윤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스르르--! 천장의 붉은 그림자가 부풀어올랐다. 거대한 물방울처럼 둥근 구체(球體)가 만들어지더니, 이윽고 들어가고 나온 부분들이 그 구체에 두드러졌다. 놀랍게도 붉은 그림자는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깊이 들어간 눈두덩에 충혈된 눈동자가 깊이 박혀 있고, 가늘 게 뻗어 나가다가 구부러진 코, 얇은 입술에 튀어나온 턱, 그 다음에는 가늘고 긴 목이었다 마치 지옥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려 애쓰는 듯한 귀신의 모 습이었다. 갈고리갈이 긴 손톱과 손가락이 다시 붉은 그림자에서 튀어나 와 천장 모서리를 잡았다. 뼈다귀만 남은 붉은 손가락이었다. 선혈을 뒤집어쓴 듯한 입술이 벌어져 붉게 물든 이빨이 보였다. 혈편복이라 불린 붉은 그림자는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가르 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소인이 보기에도…… 그 애송이는 예충보다…… 나아 보였습 니다."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 혈편복은 붉은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놀라울 정도로 길 고 뾰족한 혀였다. "예충이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이든가……. 예를 들어 본래의 실력을 감추고 있거나…… 애송이가 예충 이외의 인물에게…… 뭔가를 배웠거나……." 쌍고르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당연한 말을 들으려고 그를 불러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아는 게 그것뿐인가?" "큭--!" 혈편복은 천장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외로 꼬며 소리를 내었 다. 어찌 보면 웃음소리 같기도 한데 오히려 웃기 전보다 기괴 한 모습이었다. "전에…… 예충이 얼간이 제자말고 하나를 더 키우고 있다 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죠……." "조사해 봤겠지?" 이번 대답은 빨랐다. "괴물이더군요! 우리보다 더한 괴물…… 보통사람의 몇 배나 뛰어난 눙력을 가지고 있지만……." 혈펀복은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재미있어서 못 견디겠다 는 표정이었다. "쿠쿡--! 해를 보면 죽는다더군요. 벌겋게 타서…… 그대로 죽어 버린다더군요!" 쌍고르마는 입을 벌렸다. 천하에 기문괴사(奇聞怪事)가 많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들 어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야광충인가?" "밤에만…… 오직 밤에만 다닐 수 있는 반쪽 인생이니까 요……." 쌍고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공평한 것인가? 남들의 두 배 능력인 대신 반쪽의 삶 을 살아야 한다?" 그는 흐릿한 미소를 짓는 둣하더니, 문득 얼굴을 굳히고 혈편 복을 바라보았다. "감시를 붙이기로 하지." "어느쪽에……?" "물론 양쪽 모두에게다. 생각보다 예충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감이 드는군! 그…… 야팡충이라는 괴물도 그렇고……." 혈편복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말했다. "예충에게는…… 감시를 붙일 틈이 있겠지만…… 그…… 에게 는 힘들겠군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그 정도였던가?" "큭--!" 혈편복은 다시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갈아서……!" "재미있다……!" 쌍고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편복에게 재미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여태 그가 재미있어 해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 므로……. 그 심층까지 철저히 파헤쳐서 한 점의 의흑도, 더 이상 재미 있어 할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아야 눈길을 거두는 것이 그의 기 벽(奇癖)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상대가 죽은 뒤일 것이다. 혈편복은 시체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제4장 다음 날, 지옥성(地獄城) 대막의 서쪽 끝에 험준한 알타이 산맥이 있고, 칼날같이 날 카로운 몇 개의 능선과 산들 사이로 얼마를 더 가면 십여 장 높 이의 절벽을 만난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그냥 절벽이 아니라 벌집처럼 구멍 이 나 있는 바위집과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는데……! 지옥성은 바로 그것이었다. 남북으로 오백오십 장, 동서로 백이십 장의 직사각형 암석 전 체를 파고 뚫어 성을 구축한 것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뚫려 있 고, 길이 끝나는 곳에 쾅장과 거대한 사원지(寺院址)가 있다. 그곳에 지옥전이 서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옥성의 지하에는 거미줄같이 얽힌 지하통로가 있고, 그 안 에 만들어진 공간은 지상의 몇 배에 달했다. 뜨거운 대막의 열기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주민(先住 民)들의 지혜였을 것이다. 지금 그 중 한 통로의 끝, 정말 지옥의 끝처럼 생각되는 깊은 지하에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 화--악--!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불꽃이 타올락다. 어두운 석실 안이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침침해졌다. 작은 등잔 불빛이 만들어 내는 둥근 빛무리 속에 눈부신 은발 이 반짝이고, 그 아래 창백한 얼굴과 여자의 그것처럼 작고 붉 은 입술, 그리고 깊고 유현(幽玄)한 눈동자가 보였다. 야광충이었다. 그는 등잔을 움직여 앞에 놓인 작은 돌탁자 귀퉁이에 놓았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불빛은 상대적으로 밝게 느껴졌다. 등잔 불빛은 이제 탁자 위를 완전히 감싸고, 탁자 주위의 경 물들도 회미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는 몇 가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하나같이 칙칙한 검은 빛깔의 물건들이었지만, 적어도 그 중 몇 가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살인병기(殺人兵器)들이었다. 원통형의 물건 둘! 그것들은 세로로 두 조각이 나 있고, 각각의 조각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길고 넓적한 것을 무시한다면 반원형으로 쪼개 져 팔목에 채울 수 있는 팔찌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팔찌 하나! 불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그것은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투명했다. 검은색 허리띠 하나! 한 치 너비에 세 치 길이의 쇳조각 아홉 개를 엮어 만든 허리 띠였다. 비수 두 자루! 날의 길이가 세 치, 나머지가 두 치로 전체의 길이가 다섯 치 를 겨우 넘을 것 같은 비수 두 자루였다. 유선형으로 완만히 좁아지는 곡선을 그리고 있는 칼날과 손잡 이의 구분은 따로 없었다. 그저 날을 세우지 않고 둥글게 홈을 파 놓은 네모난 부분이 손잡이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갈을 뿐이 었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자루 비수였지만 눈이 좋은 사람 이라면, 그리고 전각(篆刻)을 읽을 정도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 면 손잡이에 서로 다른 이름이 새겨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에는 '염왕인(閻王刃)', 다른 하나에는 '귀왕자(鬼王刺)' 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탁자 위에 있는 물건 중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여태까지의 거무튀튀하고, 장식없이 초라해 보였던 물건들과 는 달리 흐릿한 불빛만으로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건, 무기라 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장식품이라기에는 어쩐지 살기(殺氣)가 비치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금룡(金龍)이 새겨진 금환(金環)과 눈부신 보광(寶光) 을 발산하는 둥근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두 가지를 가 느다란 은사(銀絲)가 연결하고 있었다. 자세히 본다면 금환은 아흡 마리의 용이 서로를 휘감아 만들 어진 것이고, 둥근 금속은 두 개의 둥글넓적한 금속판이 맞대어 져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사는 금환의 한 용의 입에서 나와 둥근 금속의 판과 판 사 이에 있는 연결점을 잇고 있었다. 눈부신 보광(寶光)은 둥근 금속의 측면에 박힌 보석들에서 쏟 아져 나오고 있었다. 윗판과 아래판에 각각 다섯 개의 금강석 (金剛石)이 박혀 있는 것이다. 마치 여인들의 장신구, 흑은 어린아이의 노리개 정도로 보이 는 물건이었다. 이런 물건들이 놓여 있는 탁자가 있고, 그 앞에 야광충은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검게 뚫린 눈과 하얀 얼굴이 슬퍼 보였다. 이제는 삭아 버려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 같은 누더기를 걸친 해골 한 구가 석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대부분의 물건의 주인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는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위로 늘어져 있는 쇠사슬과 쇠고리는 예전에는 그의 양쪽 어깨, 견정혈(肩井穴)을 뚫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노인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 었다. 쇠사슬은 노인이 무릎을 반쯤 구부리는 정도의 자유, 팔을 들 어 음습한 석벽을 기어다니는 독충들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는 자유만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야광층을 만나기 십 년 전부터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 년을 더 살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앉을 수 있었던 노인, 그는 해골의 오습으로 비로소 자유스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의 영흔은--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아 직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다는 약속의 대가로 받은 것이 돌 탁자 위의 물건들이고, 야광충은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양손의 손가락을 쫙 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 사이 호구(虎口)를 서로 마주대고 아플 정도로 눌렀다. 다음은 검지와 중지 사이였다. 그는 계속해서 중지와 무명지 사이, 마지막으로 무명지와 약 지 사이를 그렇게 서로 마주 눌렀다. 그는 이렇게 똑같은 동작을 세 번 반복하고서야 검은 장갑이 손에 완벽하게 밀착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것은 습관이었다. 먹처럼 검은 장갑 묵린수(墨燐手), '검은 불꽃' 이라는 이름의 그 장갑을 그는 십 년째 껴 왔다. 그는 장갑을 받은 이래 남들 앞에 나서면서 그 장갑을 끼지 않고 나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장갑 그 자체 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 검은 불꽃을 두 손에 단단히 끼고서야 오든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는 야광충이었다. 그는 두 손을 들어올려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가 다시 폈다. 장갑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빛에 비쳐 표면에 일렁이는 흐릿한 광택이 장갑 원래의 무 늬인 미세한 삼각형들을 드러나게 했다.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것이 아니라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 오는 은은한 팡택이었고 무늬였다. 사부가 그것을 선물할 때는 교룡(蛟龍)의 가죽이라고 했었다. 교룡을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도 어렸을 때는 그저 사부의 말 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이런 가죽을 가졌던 뱀이라면 그냥 뱀이 아니라 마땅히 교룡 이라 불러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렸을 때의 맹목적인 믿음 을 대신한 첫이다. 칼에도 잘리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다는 사소한 장점을 두 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묵린수의 통기성(通氣性)과 흡착력(吸 着力)이야말로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진정한 장점이라 해 야 했다. 묵린수는 마치 인간의 피부처럼 호흡을 하는 듯했다. 몇 날 며칠을 계속 끼고 있어도 피부에 아무런 자극을 주기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흡착력(吸着力)!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 흡착력은 맨손으로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기분좋은 감각을 두 손에 주고 있었다. 자로 잰 듯 정확하고,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야광충의 성격에 이렇게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는 장갑은 다시 없었다. 그래서 그가 지니고 다니는 일곱 가지 물건, 연형칠장(鍊形七 裝)중 첫째가 묵린수였다. 야광충은 묵린수가 단단히 밀착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탁자 위의 물건들을 집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집어든 물건은 원통형의 물건 두 개였다. 팔목을 보호하기 위해 차는 두 개의 비구(臂 ;토시), 즉 팔 목보호대였다. 비구는 원래 전쟁터에서 전투를 할 때 팔목에 차서 소매를 묶 는 전복(戰服)의 일부였다. 간단하게는 천으로부터 물소가죽, 혹은 동(銅)이나 철(鐵), 심지어는 금(金)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애초에는 넓게 펄럭이는 소매를 묶어 자유롭게 팔을 움직이도 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중에는 칼과 화살로부터 팔 을 보호하는 갑옷의 일부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야팡층이 지금 들고 있는 그것은 특수하게 제련된 강철로 만 들어져 거무튀튀한 광택이 흐르고, 몸체에는 주작(朱雀) 두 마 리가 서로를 감싸며 날개를 펀 모습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 었다. 주작비(朱雀臂)였다. 연형칠장 중 세번째 것은 유리처럼 투명한 팔찌, 유리환검(琉 璃幻劍)이었다. 그 이름은 실제와 부합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팔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름대로 검(劍)이었고, 유리(琉 璃)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팔찌로 있을 때는 짧지만 검으로 바뀌면 다른 검보다 오히려 길었다. 유리처럼 약해 보이지만 질 좋은 정강(精剛)으로 만든 검만큼 단단하고, 주동(鑄銅)을 섞어 만든 연검처럼 낭창낭창하게 휘어 지기도 했다. 가장 큰 장점은 휴대하기 편하다는 것이었다. 팔찌처럼 차고 다니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귀왕인과 염왕자도 휴대에는 문제가 없었다. 야광충은 그 두 자루 비수를 가죽장화의 밑창에 손잡이부터 거꾸로 꽂아 넣었다. 원래 거기 자리가 있었는지 비수가 들어가 있다는 표시는 나지 않았다. 야팡충은 묵묵히 복장을 챙기고 있었다. 그의 동작에는 낭비가 없었다. 오랜 동안 해온 일처럼 순서대로 하나씩 몸에 착용하고 있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일상적인 행위와 다르게 지금의 행위는 어딘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야광충은 마치 중요한 의식의 집전을 맡은 제관(祭官)처럼 경 건하게, 그리고 확실한 손놀림으로 허리띠를 집어 허리에 찼다. 이 시대의 허리띠라는 것은 바지를 잡아 묶는 것이 아니라 장 식용으로 허리에 걸치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그런데 지금 야광충이 들고 있는 허리띠는 옥도 아니고 금도 아닌, 그저 검은 철로 장식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초라한 모습 뒤에는 마음만 먹는다면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병기가 숨어 있었다. 척혈구절대(剔血九節帶)! 별로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륜(輪)으로도, 흑은 검 (劍)으로도, 심지어 채찍으로까지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 면 정확한 이름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야광충은 옷을 입으려면 허리띠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 로, 그리고 이왕이면 그것이 질긴 것이면 좋을 것이라는 지극히 실용적인 생각으로 척혈구절대를 차고 다녔다. 이제 탁자에는 한 개의 물건만이 남아 있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무기처럼 보이지 않는 물건, 인명권(人 命捲)이었다. 야광충은 금룡이 새겨진 금환을 왼손 가운데손가락에 끼우고 둥근 금속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둥근 금속은 달걀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아 그의 손에 맞춤이라도 한 듯 잡혔다. 야광충은 손을 폈다. 눈부신 광망(光芒)이 그의 손안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취리리릿--! 팽이가 돌아가는 둣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인명권이 수직으 로 떨어져 내렸다. 야광충은 인명권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손을 슬쩍 들어올렸 다. 취리리리릿--! 다시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인명권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그의 손에 잡혔다. 인명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둥근 금속의 중심에 연결된 축이 회전하면서 은사를 감고 풀 고 하는 작용으로 격사하고 회수하는 일련의 동작이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것이다. 일종의 유성추(流星鎚)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도 다른 점은 격사되어 가는 중도에도 회수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은사의 조종법에 따라서는 공중에서 직각으로 꺾이기도 하고, 타원형의 운동도 할 수 있는 등 조화가 무궁무진 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회전하면서 내는 소리는 소리로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라마교(喇摩敎)의 음공(音功)을 응용한 것이어서 대전 중에 적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묘용이 있었다. 아래위로 다섯 개씩, 도합 열 개의 금강석이 박혀 있어 자연 히 발산되는 광채도 회전 중에는 더욱 강렬한 광망을 발산함으 로써 어느 방향에서 날아드는지 정확한 위치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앞에 있는 해골, 노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가 사 실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가장 화려하고 장난감 같은 무기, 그러나 가장 위력적인 무기 인명권이었다. 이로써 연형칠장은 완벽히 갖추어졌다. 옛 무사들은 대전(對戰)전에 사결(四結)의 의식을 했다고 한다. 양소매와 양바지가랑이를 끈으로 묶는 그 사결의 의식은 처음 에는 광수대구고(廣袖大口 ), 즉 넓은 소매와 통이 큰 바지를 묶음으로써 활동이 자유롭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대전에 앞서서 생사(生死)를 불사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식으로 발전이 된 것이다. 연형칠장을 착용하며 야광충이 갖는 생각이 그런 것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지옥성을 나가는 시점(時點)에 이렇게 묵린수 와 주작비로 시작되는 연형칠장을 몸에 착용하면서 결의를 다지 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잡다하고 기묘한, 심지어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 물 건들을 야광충은 좋아했다. 연형칠장 외에도 많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좋아하는 일종의 수집벽(收集癖)이 그에게는 있었다. 아마도 사부와 사형 외의 사람을 거의 만나 본 적이 없는 그 의 고독한 생활이 그런 수집벽의 원인일 것이다. 야광충은 스무살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옥성 지하의 이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다. 어른답지 않게, 혹은 사내답지 않게 자질구레한 물건에 신경 을 쓰고 있다고 누가 비난한다 해도 하는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달리 취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저 해골, 살아 있을 때의 노인 역시 기묘하고 잡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괴팍하다는 뜻도 되고, 한편으로는 좌도방문(左道傍 門)에 근접하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의 원래 출신을 생각하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중원구대문파의 하나, 당당한 오대검파의 일석을 차지한 천산 파(天山派)의 장로(長老) 중 하나가 그였으니 말이다. --기문환수(奇門幻獸) 엽장청(葉長靑)이 나다. 노인은 생전에 그렇게 말했었다. 야광충이야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만 원래는 기문환수가 아니라 기문환사(奇門幻師)가 그의 정식 별호였다. '사(師)' 자를 '수(獸)' 자로 바꾸어 자신을 짐승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괴팍하고 비틀려진 노인……, 그리고 불쌍한 노인…… 엽장 청! 그는 무슨 말을 하든 시비거는 어조로 퉁명스럽게 내뱉었었다. 그런 말투는 오랜 세월 굳어진 것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야 십여 년 만에 처음 본 사람, 그것도 자신의 한 을 풀어 줄 유일한 구원의 빛이 될지도 모를 야광층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었다. 야광층도 그런 면에서는 인내심이 강한 소년이 아니었다. 오히려 엽장청보다 더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는 그였다. 도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퉁명스러운 말을 들어가며 노 인을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야광충은 노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그냥 일어나 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다시 찾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오 년이나 노인을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심 심해서였다. 그리고 불쌍해서였다. 천산파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몽고에서 봐도 서쪽 끝 에 위치한 까닭에 전통적으로 중원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흑시 세력이 강하다 해도 드러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중원과 단절된 천산파는 상대적으로 교 류가 용이했던 인근 몽고, 서장, 신강의 영향을 받아 무공 또한 중원의 그것과 현격히 달랐다. 어쩌다 중원에 알려진 그들의 검술과 여타의 무공은 그래서 궤이편벽(詭異偏僻)하다는 평을 들었다. 일반 중원의 검술전통 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산파는 타파의 그것에 비해 검초에 파격(破格)이 심하고 검을 한번 꺼내면 반드시 생사를 가르고서야 검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원나라 때였다. 본산(本山)이 몽고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문하 에는 몽고족이 여럿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들은 남하하는 몽고족을 따라 중원으로 진줄 했고, 원나라 무림통치의 손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 소위 한간(漢奸)의 무리였다. 그래도 당시 천산파는 화산(華山), 점창(點蒼), 청성(靑城), 공동( )과 함께 천하오대검문(天下五大劍門)의 일문으로 행 세할 수 있었다. 그런 천산파의 최절정기에 배출된 오대고수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무림 십대고수의 반열에 들 정도의 고수들 이었다. 바로 그들이 천산의 다섯 장로, 즉 천산오조(天山五祖)였던 것이다. 대장로(大長老)인 천산노조(天山老祖) 로부 옹고트, 그는 몽 고인이었다. 그리고 엽장청을 여기 가둔 사람이 그였다. --그놈은 천산노수(天山老獸) 로부 옹고트였다. 엽장청은 그 이름을 말할 때는 항상 그랬었다. 두 눈은 원독 (怨毒)으로 충혈되고, 얼마 남지 않은 이를 갈아 소리를 내며 말하는 것이다. 로부 옹고트! 로부는 앵무새라는 뜻의 몽고어다. 옹고트는 신(神)! 해석하자면 앵무새의 신이라는 뜻인데……. --앵무새처럼 말만 잘하는 놈이었다. 그러나 로부 옹고트는 엽장청의 말처럼 말만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원나라 왕조의 왕족 중 하나라고 했다. 그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그것밖에 없었지만 중원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었다. 그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자리에 있 었다. 어떤 고강한 무공보다도 더 무서운 힘을 그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장로는 몰면목(沒面目) 호소양(胡少陽)이었다. 몰면목……, 얼굴이 없다! 쉽게 말해 안면몰수(顔面沒收), 몰염치(沒廉恥)라는 뜻의 이 름이었다. 한인이었지만 몽고족의 선두에 서서 가장 가흑하게 한인을 탄 압한 자가 그였던 것이다. --원래 몰면목은 남들이 그에게 한 욕이었지. 그런데 그놈은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별호를 그걸로 바꿨어! 그는 자신이 공(公)을 위해 사(私)를 버리는 사람이고, 얼굴 이 없다는 말은 그런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광충은 그때 처음으로 질문을 했었다. 그의 원래 별호는 뭐였냐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엽장청은 처음으로 나온 그의 반응에 즐겁게 대답해 주었었 다……. --'석두(石頭)' 였지! 호소양은 내가기공(內家氣功)의 고수였다. 그것은 천산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는데, 천산파에는 원래 이렇다 할 내가심법(內家心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산파의 제자들이 내공(內功)을 익히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 었다. 소림(少林)이나 전진교(全眞敎)처럼, 흑은 아예 마도(魔 道)의 문파인 마교(魔敎)처럼 특기할 만한 내공심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천산파는 내공의 차원에서는 겨우 몸을 강건(剛健)히 하고, 수명을 늘이며, 체력을 높이는 차원에서 약간 나은 정도의 내공 심법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호소양은 달랐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고, 세상의 복잡한 일에 머리를 썩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그의 스승이자 천산파의 전대 장문인인 황이자 (黃耳子) 단위(段威)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저 바보로 죽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는 황이자를 만났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황이자는 그의 소질을 알아보았다. 어쩌면 그는 호소양을 알 아준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황이자는 당시 이미 원제국(元帝國) 최고의 어용집단(御用集 團)인 천산파의 지위를 이용해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단사 (丹師)와 내공비급을 모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호소양에게 전해 주었다. 명령은 단 하나, 천산파만의 내공심법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는 성공했고, 강호최강의 내가고수가 되었다. 석두라는 별명에는 사실 그가 어리석다는 의미보다 그가 어떤 공격에도 끄떡 않는 사내라는 의미가 더 많았다. 석두 호소양은 내공을 익히는 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경지, 내 가강기(內家 氣)를 성취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능력으로 그는 천산파, 그보다 원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한 족 탄압의 선봉장이 되었고, 그것에 전심전력했다. 그는 그것이 애국(愛國)이요,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한족이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민족을 떠나 지금은 원나라의 백성이고, 원나라의 백성인 이 상은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몰면목이 되었다. 천산오조 중 셋째는 천산제일검(天山第一劍) 여문량(呂門亮) 이었다. --개중 제일 나았지만……, 그놈도 바보긴 마찬가지였어! 왜냐고 앵무새놈을 막을 능력이 있었는데도 그냥 뒀으니까! 엽장청의 퉁명스런 말과는 달리 여문량의 검은 종전까지 괴이 하고 편벽한 것으로만 알려졌던 천산파의 검술을 하나의 도(道) 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는 천산오조의 다른 네 명과 달리 원나라 조정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은 검에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검 나부랭이나 만지고 있겠지……. 나쁜놈! 엽장청은 욕설로 끝을 맺었다. --넷째는 귀조(鬼祖)야! 그에 대해서는 엽장청도 별로 말할 것이 없었다. 사실 무림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어떤 특기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철저히 그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놈에겐 별관심이 없었어! 엽장청은 그 자신의 일만 해도 바빴기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장로면서도 거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천산오조의 마지막이 그였다. 기문환사 엽장청! 그는 대장로 로부 옹고트에게 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갇혔다. 로부 옹고트는 그에게 모종의 일을 제의했고, 그는 거절했던 것이다. --한번 쫓겨났으면 그만이지, 무슨 중원수복이야? 나쁜놈! 로부 옹고트는 몽고의 중원수복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기 위 해 모종의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일생 자기만 알고 살아온 이기적이고 괴팍한 노인 엽장청이었 지만 그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건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행위야! 그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지옥성의 어두운 지하에 갇힌 지 이미 십 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이 모든 말을 듣는 데 야광충은 반 년이 걸렸다. 엽장청이 말을 않으려 해서가 아니었다. 야광충이 그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엽장청은 제멋대로인 노인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보다 더 제멋대로인 소년이었다. 듣고 싶으면 듣고, 가고 싶으면 그냥 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에게는 영원처럼 생각되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불쑥 찾아오고는 했던 것이다. 결국엔 엽창청이 야광층에게 길들여지고 말았다. 야광충의 눈치를 봐가며 조금씩 말해 준 이야기가 겨우 그 정 도였다. 더 말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고, 야광충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무공이라기보다 잔재주에 가까운 괴이하고 특이한 수법들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묘한 물건들을 넘겨 주었다. 기연(奇緣)이라면 기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것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엽장청이 그것들을 넘겨주는 대가로 로부 옹고트를 죽 여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야광충은 거절했다. --내가 왜? 이유가 없었다. 로부 옹고트가 누군지도 모르는 야광충이 왜 그를 죽여야 한 단 말인가? 엽장청은 분통이 터져 죽으려 했었다. --이 귀한 물건들을 넘겨주는 대가로 해달랬잖으냐? 겨우 진정한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당신이 죽으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내가 왜 귀찮은 일 을 하나? 야광충의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사실 야광층이 생각할 때 엽장청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진정 그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다면 죽이지 않고 가둬 두기만 했을까? 그것도 그가 자랑하는 물건들을 그대로 가 지고 있게 하면서! 결론은 하나였다. 로부 옹고트는 그에게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쫌 그가 엽장청을 여기 가뒀었다는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일련의 사실들은 엽장청이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기묘한 장난감들을 전부 사용해 봐야 그를 이길 가능싱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엽장청은 그런 지적을 받고 극도로 분노했었다. 그러나 한 달 후 다시 갔을 때는 그저 허탈한 표정만 짓고 있 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야광충의 말이 욺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었다. 그 물건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주겠다고……. 야광충은 별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엽장청은 곧 죽을 것이고, 그때는 그 물건들이 주인없는 물건 들이 될 것이니 미리 준다고 고마워할 이유가 없었다. 엽장청은 또 말했었다. --앵무새놈을 이기려면 나머지 넷 중의 적어도 둘 이상의 무 공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그와 귀조의 무공만 배워서는 소용이 없고, 여문량이 나 호소양의 무공 중 하나는 꼭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 둘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로부 옹고트를 능가하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엽장청의 물건들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내게 부탁했던 그 일……! 내가 거절했다고 포기했을 리가 없다! 그놈은 집요한 놈이니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하고 말 거야! 그때…… 그가 만든 그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은 내 물건들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엽장청은 얼마 후 죽었다. 지옥성에 갇힌 지 십오 년 만이고, 야광충을 만난 지는 오 년 만의 일이었다. 야광충은 끝끝내 그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행복하게 죽었을 것이다. --흐흐흐……! 너는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이다. 싫어도 말이다. 오 년에 걸쳐 극히 조금씩 드러난 야광충의 신세내력을 듣던 어느 날, 그가 음충궂은 웃음소리와 함께 내뱉은 말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지금 지옥성에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다른 신분으로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엽장청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야광층이 그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야광층은 그 근거없는 확신이 불쾌했지만 그는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는 그날 이후 단 한번도 로부 옹고트를 죽이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행복하게 죽었다. 야광충은 해골을 잠시 바라보고 돌아섰다. 야광충은 이 일에 대해서 사부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흔자만의 비밀이라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할 시간을 놓치고 나자 그 다음에는 어쩐지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물어 보지 않았으니 허답을 일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사부를 속인 것 같은 불유쾌한 기분이 해소되 지는 않았었다. 오늘, 사부가 그런 그의 행동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그의 그런 행동을 용서해 주는 의미의 말을 하자 야광충은 비로소 무 거운 짐을 벗어 버린 둣한 기분이 된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엽장청이 준 물건들을 휴대하고 다닐 기분이 된 것이다. 야광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석실을 떠났다.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엽장청이 누구였든, 그리고 로부 옹고트가 누구든 그와는 상 관없는 일이었다. 야캉충은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석실에 밝혀져 있던 둥잔불이 꺼졌다. 다시 무거운 어둠이 그의 주변을 감쌌다. 그 어둠 속을 그는 헤엄치둣 걸었다. 석실 안은 어두웠고, 밖도 어두웠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대낮처럼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그는 안력(眼力)을 강화하는 공부를 한 적이 있지만, 이 십 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특수한 무공을 연마하지 않 아도 이렇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군데군데 무너진 돌더미가 쌓여 있었고, 기울어진 벽, 심지어 는 막혀 버린 통로도 있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지옥성의 지하통로에 대해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가 없어도 아이는 아이이고, 아이는 돌아다니기를 좋아하 법이다. 하루 두 시진의 짧은 수면시간과, 사부에게 배우는 수련시간 외에는 지옥성의 암흑 속을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던 야광충인 것 이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이제 사람들이 드물게라도 다니는 통로로 다가가고 있었다. 사부인 예충이 옥주로 있는 곳,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영역이 었다. 문득 야광충은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앞, 작은 등불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구석에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잠시 후 그것이 사람의 모 습이라는 것을 알아본 뒤에도 잠시 동안 그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런 자세로 무얼하고 있는 것인가……? 야광충의 눈이 고양이의 눈처럼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눈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극도의 분노, 그리고 살기였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공기가 흔들렸다. 푸르게 타오르는 기름등잔의 불꽃이 꺼질 둣 꺼질 듯 흔들리 다 다시 살아났다. "허억……허억……." "흐으……흐……." 등잔 불빛이 닿지 않는 통로의 어둠 속에서 남자의 거친 숨소 리와 여인의 무엇에 눌린 듯한 신음이 들려 왔다. 삼 장에 하나씩 있는 이 흐린 둥불로 폭이 삼 보, 높이가 일 장여에 달하는 긴 통로를 밝힌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등불은 걸려 있는 자리 주위나 겨우 뿌옇게 밝힐 뿐, 등불과 둥불 사이의 대부분의 통로는 사람의 희미한 윤곽이나 볼 수 있 을 정도로 어두운 그대로였다. 그 어둠 속에 뿌연 사람의 윤곽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과 남자였다. 얼굴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에 희미한 두 개의 둥근 윤곽 이 있고 한참 내려와서는 엉덩이와 다리로 보이는 두 개의 살덩 이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친 호흡 소리, 단속적인 교성(嬌聲).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흐느낌 이었다. 얼마나 저러고 있었을까? 뿌연 불빛 속에서도 남녀의 드러난 피부가 땀에 젖어 번들거 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허리를 약간 숙이고 두 팔을 통로의 석벽에 구부려 기 대고 뒤에서 밀려오는 남자의 공격에 버티고 있었다. 그 여인의 뒤에 붙어서 왼손으로는 적인의 치마를 허리 위까 지 올려 붙들고 여인을 뒤에서부터 공략하는 남자의 바지도 요 대(腰帶)만 풀었는지 무릎 아래까지 내려진 채 율동에 맞춰 흔 들리고 있었다. 남자의 오른손은 여인의 가슴팍으로 들어가 한편 젖가슴을 떡주무르둣 만지다가, 한편 여인와 어깨를 잡고 힘을 주며 좌 충우돌하고 있었다. 격렬한 정사(情事)였다. 여인과 남자는 허리를 꼬고 엉덩이를 혼들며 벽을 긁고 머리 를 돌려 깊숙한 입맞춤을 주고받는 등 온갖 행위를 주고받았다. 끊임없이 자극을 찾아 꿈틀대던 여인이 두 손으로 벽을 한껏 밀며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려 남자의 몸을 받아들이고, 남자는 걷어올린 아래로 여인의 풍만한 엉덩이를 움켜헌 채 엉덩이를 격렬히 움직이는 자세로 고정되었다. 점차 남녀의 동작이 느리게, 그러나 강력해지다가 일순 멈주 었다. 경련이 일어났다.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는 모순된 감정의 표현처럼……! 여인의 엉덩이에 남자의 손가락이 깊숙이 자국을 남기고, 여 인은 고통 때문인가, 희열(喜悅)에 겨워서인가 입을 벌리며 석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숨막히는 한 순간이 지나고, 남녀는 축 늘어져 부둥켜안은 채 차가운 석벽에 이마를 대고 기대며 가쁜 숨을 골랐다. 남자가 야광충을 본 것은 이 순간이었다. 그는 그들의 뒤편 석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푸른 눈빛이 횃 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옥랑군(玉朗君) 금오(琴伍)는 얼어붙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전신세 흐르던 땀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렸다. 자기도 오르게 근육이 경켠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방금처럼 쾌락의 절정에서 일으렸던 경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일생일대의 실수다.' 이 장소는 평소에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었다. 금오는 몇 번인가 이곳에서 상대를 바꿔가며 밀회를 치렀다고 해서 긴장을 풀고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평소처럼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렇게 적이 둥뒤에 바짝 다가설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양쪽으로 뚫린 장소에서 몸을 숨길 곳조차 없 는데……. 오직 바랄 수 있는 것은 그냥 지나가다가 구경하는 놈이거나, 장난삼아 회롱하는 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쪽이든 상관없었다. '기회를 보아 죽여 없애는 것이 상책……!' 양물(陽物)은 이미 풀이 죽어 빠져 나와 있었다. 드러난 맨엉덩이에는 지하석굴의 찬 기온이 닿아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러나 적에게 맨엉덩이를 보여 준다고 해서 부끄럽다는 생각 은 없었다. 단지 일격에 적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애타게 바랄 뿐이었다. 가슴에 안긴 여인이 몸을 뒤틀었다. "빨리 비켜요!"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그녀도 야광충을 본 것이다. 그러나 금오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방비한 자세로 적을 맞이한 시점에서 어떻게 미동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상대는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지만 그 전신에서 풍기는 가 공할 살기는 이미 그의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금오는 조금이라도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으로 야광충에게 말울 걸었다. "방각(龐覺)의 졸개냐?" 이것이 실수였다. 야광충은 그 한마디로 여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_ 방각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독목야차(獨目夜叉) 방각! 제이 지옥인 흑승지옥(黑繩地獄)의 옥주가 바로 그였다. "방각……? 그렇군! 네가 안고 있는 그 암캐가 방각의 것이었 던가?" 여인은 방각의 둘째 첩인 금령(琴玲) 이었다. '아차! 이젠 없애는 것만이 최선이다.' 금오는 뒤늦게 실수를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젠 죽일 수밖에 없었다. "잘하는 짓이군요! 난 이제 어떻게 해요?" 금오에게 안겨 있던 금령이 금오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 렀다. 순간, 금령의 움직임으로 자세가 흐트러지는 틈을 타서 금오 는 상반신을 최대한 틀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일장(一掌) 을 뻗었다. 쉬--쉬익--! 퍼--엉! 석벽이 울리고, 돌가루가 날렸다. 그의 기습이 성공했다면, 그리고 야광충이 제대로 맞았다면 곤죽이 되어 버렸을 위력적인 장력(掌力)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금오는 자신의 기습이 성공하지 않았음을 알 뿐, 야광충이 어 디로 어떻게 피했는지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무리하게 몸을 틀어 기습을 가한 까닭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 고 있었던 것이다. 발을 쓰지 않고 몸을 돌리면 중심이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금오는 오른발을 왼발 앞으로 옮겨 중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발목에 걸려 있던 바지에 다리가 걸려 호되게 바닥에 넘어져 버 렸다. '끝이다.' 금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흘렀는데도 공격은 없었다. 금오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광충은 처음의 자리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석 벽에 기댄 그 자세 그대로……! 금오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바지를 까 내린 채 상대의 앞에 엎드린 꼴이 되어서는 어떤 반격도 가능할 수가 없었다. 야광충의 무표정한 표정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바지를 올려라!" 금오의 눈에 한 가닥 생기가 떠올랐다. '아직 기회는 있다.' 금오는 천천히 일어나 바지를 끌어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우리 인사나 하지, 이렇게 인연이 이어 지기도 힘든데 말야. 난 총옥주(總獄主) 좌하(座下}의 옥검령 (玉劍令) 제이 영주(第二令主), 옥랑군 금오라 하네. 요대를 끌어 매면서 금오가 한 말이었다.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검미, 어둠 속에서도 뽀얀 얼굴에 쭉 뻗 은 콧날의 준수한 용모를 가진 이십오륙 세 정도의 청년이었다. 얇은 입술과 치켜진 눈꼬리가 청년의 냉혹한 성려을 보여 주 고 있는 것만 제하면 옥랑군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인물. 금오의 말을 듣고 있던 야광충의 눈이 더욱 더 차가워졌다. 총옥주 좌하 옥검령 제이 영주! 총옥주 쌍고르마는 야광충의 사부 야유신 예충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팔대지옥주(八大地獄主)와는 격(格)이 다르다. 지옥성에는 등활(等活), 흑승(黑繩), 중합(衆合), 대규환(大 叫喚), 규환(叫喚), 염열(炎熱), 극열(極熱) 그리고 무간(無間) 이라는 이름의 팔대지옥이 있다. 각 지옥에는 옥주가 있고, 옥주의 아래에는 두 명의 대주(隊 主)를 거느린다. 각 대주는 다시 마흔아흡 명의 대원들을 수하 에 두고 있으니 일개 지옥에 소속된 총 인원은 백 명이 조금 넘 는 것이다. 이런 분류는 백인대(百人隊)니 천인대(千人隊)니 하는 몽고족 의 전통적인 편성방식에 라마교의 교리를 적용시켜 만들어진 것 이다. 이 팔대지옥을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총옥주 쌍고르마였다. 그의 수하에는 따로 대주가 없고, 대신 금검령(金劍令), 은검 령(銀劍令), 그리고 옥검령(玉劍令)의 삼령(三令)이라는 직속조 직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 삼령의 영주들은 총옥주의 명령만을 들을 뿐, 팔대지옥 주와는 직졉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제이 옥검령주라면 낮은 자리는 아니다. 금오의 말속에서는 그런 자신의 지위로 야광충을 위협하는 냄새가 풍겼다. 그것이 야광충의 신경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사부와 사형 외에는 인정하는 사람이 없는 야광충이었다. 그런 그에게 총옥주의 권위를 내세워 위협에 가까운 언사를 보이고 있는 금오가 못마땅한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금오는 자신이 약간 망신만 당하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복 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계속 주절거렸다. "자넨 여기 무간지옥의 옥졸 같지는 않군그래. 대단히 특이한 용모를 가졌는데 왜 내가 못 봤을까?" 의복을 추스리고 나자 금오는 한결 침착해졌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일격에 격살(擊殺)시키고, 적당한 구석 에 시체를 처박아 놓으면 누가 범인인지 알게 뭔가? 그런데 이 놈은 정말 누구지? 제법 그럴싸하게 생기지 않았나 말야. 죽이 긴 아까운 놈이군. 하지만 운이 나빴음을 탓해야지, 이 금오 어 르신네가 재미를 보는데 여길 지나갈 게 뭐람.' 금오가 야광충의 목숨이 제 손아귀에 달렸다고 여기고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야광충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아묘(亞猫)는 졸자(卒者)가 남의 여자를 마음대로 끼고 놀아 도 괜찮다고 가르치던가?" 금오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묘? 새끼 고양이란 말인데, 새끼 고양이가 누구냐? 그리고 내가 그 새끼 고양이의 졸자라고?' 금오는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버럭 화를 냈다. "건방진 풋내기! 감히 총옥주를 새끼 고양이라고 부르다니!" 야광충이 총옥주 검은 표범을 아묘라고 깎아 불렀던 것임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금오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야광충이 한 말은 자신의 구린 구석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옥검령주라고 해도 옥주의 마누라를 건드린 것 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게다가 마누라를 빼앗긴 옥주는 그 흉폭하고 고집불통인 영 감, 독목야차 방각 아닌가? 금오의 눈에서 살기가 짙어졌다. 더 기다릴 것 없이 이 자리에서 야광충을 죽여 입을 막다는 심산이었다. 차르--륵--! 금오의 오른손이 요대에 닿자 요대에서 한 자루 연검(軟劍)이 뽑아져 나왔다. 금오의 요대는 검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수없는 놈 그냥 못 본 척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 을……! 건방지게 어르신네 하는 일에 참견하다가 죽고 마는구 나! 오늘 내 은린검(銀鱗劍)에 죽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 하고 죽어라." 금오의 손에 들린 연검이 진기를 주입하자 빳빳하게 서며 검 광이 눈을 찌를 듯 격사되었다. 검끝이 바르르 떨리며 독사의 머리처럼 끄덕거리고 있었다. 연검은 숨기고 다니기에는 좋지만 어지간한 내공이 없으면 제 멋대로 휘어져서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였다. 그러나 연검에 진기를 불어넣어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면 격전 중에도 주인의 뜻대로 휘어져서, 상대가 상상도 못 하는 방법으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해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기이 기도 했다. 지금 금오가 보인 신위(神威)는 연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야팡충은 처음의 자세에서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만이 더욱 짙어졌다. 가공할 살기와 함께……! 금오는 어쩐지 위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재수없는 눈빛이군!' 그는 저런 눈빛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이렇게 전신을 거미줄처럼 감아오는 살기를……. 그러나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야광충을 향해 연검을 내밀고 왼손으로 검결(劍 )을 짚 어 전격세(前擊勢)를 취했다. 일반적으로 고수가 하수를 공격할 때 취하는 오만방자한 자 세, 단번에 베어 버리겠다는 자세였다. 야광충의 눈빛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에게는 얕잡아보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무간지옥의 영역, 외진 곳이지만 누가 갑자기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츠--파--앗--! 이런저런 걱정이 금오를 조급하게 했으리라. 금오는 상대의 응수(應手)를 보고 다음 공격을 준비할 심산으 로 연검을 떨쳐 야광충을 향해 찔러 갔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수는 아니었다. 움츠려 있던 독사가 뛰어 오르며 목을 노리 듯 쾌속하고, 순 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이었다. 게다가 연검은 불가사의하게 휘어 야광충의 상, 중, 하단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공격은 두 개가 허초(虛抄)이고 하나만이 실초(實抄)인 것이 상례(常例)였다. 단단한 검이 세 곳을 어떻게 동시에 찌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금오의 공격은 그렇지 않았다. 연검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세 곳을 거의 동시에 노리고 있기 때문에 실초가 허초가 따로 없는 것이다.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 봉황이 순간적으로 세 번 머리를 쪼아 버린다는 초식이었다. 이런 경우, 뒤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응수(應手)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수세(守勢)에 몰리게 되고 이어지는 공격 에 몸을 맡기는 결과가 된다. 야광충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금오의 검을 향해 왼쪽 주먹을 직선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금오의 눈이 번쩍 빛났다. '미친놈! 맨손으로 검을 막1다는 것인가?'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다. 야광충의 좌권(左拳)은 주저하는 기색없이 그의 검을 마주쳐 오고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끝나겠군!' 금오는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검을 쥔 오른손에 묘한 변화를 가미시켰다. 파--악--! 야광충의 주먹과 검이 맞부딪쳤다. 다음 순간, 금오의 은린검은 나뭇가지를 휘감고 올라가는 뱀 과 같이 영활하게 야광충의 팔목에 감겨 들었다. 이런 경우에 야광충의 팔은 잘렸어야 했다. 적어도 금오는 그 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야광충의 팔은 잘리지 않았다. 야광충의 팔목에는 주작비가 채워져 있었고, 금오의 검은 헛 되이 주작비 위를 긁을 뿐이었던 것이다. 금오는 이 의외의 사태에 놀랐으나 위험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검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야광충의 팔목을 공격할 수 있 었지만 야광충의 손은 그에게 닿기에는 아직 모자랐다. 그런 상태에서는 야광충의 주먹이 완전히 뻗는다 해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검을 쥔 그의 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축의 유가기공(瑜伽奇功;요가)을 익혀 팔이 길어지거나, 소 림사(少林寺)의 백보신권(百步神拳)이라도 익힌 자가 아닌 다음 에야……. 야광충의 손이 완전히 뻗었다. 그는 손을 펴며 손가락을 튕겨 내었다. 검은 장갑 안에서 눈 부신 광채가 격사되었다. 취리리릿--! 팽이가 돌아가는 둣한 소음이 통로를 메웠다. 일순,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너…… 너…… 네가……?" 금오는 믿을 수 없다는 둣 확대된 동공으로 야광충을 바라보 며 더듬더듬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그의 얼굴에는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금오는 자신이 졌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에누리없 는 죽음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 심장 부위에 뚫린 구멍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홀 러 나오고 있었다. 위이잉--! 소름끼치게도 그의 가슴 속에서는 팽이 돌아가는 소리가 아직 도 들려 오고 있었다. 야광충의 인명권은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 박힌 것으로 만족하 지 않고 계속 회전을 하며 심장을 갈기갈기 부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무표정했다. 그는 금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그의 가슴에 박힌 인 명권을 회수했다. 인명권은 피와 살점을 허공에 홑뿌리며 그의 손안에 돌아와 잡혔다. 금오의 가슴 상처로부터 분수처럼 피가 뿜어 나와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뿌려졌다. 금오는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은린검을 든 우수가 무엇을 베려는지 몇 번 움직였지만, 바닥 만을 두드릴 뿐이었다. 잠시 후, 금오의 몸짓이 느려지다 아주 멈춰 버리고 팔다리와 안면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금오는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이 모든 장면을 야광충은 냉정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야광충 일생 최초의 대결, 그리고 최초의 살인이었다. 금오가 완전히 죽자, 야광충은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격렬한 정사가 오갔던 그 자리에 독목야차 방각의 첩, 금령이 대충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금오가 간단히 야광충을 베어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줄 알았 던지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던 금령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수 만에 금오가 죽어 넘어질 줄이야……. 야광충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금령은 더욱 겁에 질렸다. "저…… 절 죽이실 건가요?" 여인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절색은 아니었지만 제법 단정한 용모, 농익은 여체의 요염함 이 은근히 픗기는 삼십 전후의 여인이었다. 야광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말을 나눠 본 상대도 열손가락으로 꼽는 야광충인 데 언제 여자와 말을 해보았겠는가? 할말이 없으니 안 할 수밖에 없었다. 금령은 야광충의 침묵을 살의(殺意)로 해석했다. 털썩--! 금령은 야광충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가죽신을 잡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전 오늘 처음 여기 왔어요. 그것도 윽랑군이 강제로 끌고 와 서 전 일방적으로 당하다시피 한 거예요. 목숨만 살려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어요." 금령은 모종의 결심을 했는지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더니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야광충은 사실 금령을 그냥 보내 주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첫 살인의 여운을 홀로 음미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첩을 다스리는 것은 남편이 할 일이지, 남이 대신 해 줘야 하 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덮어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종옥주 휘하의 영주가 하나 죽은 이상,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 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스승에게까지 귀찮은 일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금령을 돌려보내고 방각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 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참인데 금령이 제풀에 옷을 벗고 설치는 것 이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솟구쳐 올랐다. 최초의 외출을 앞두고 있는 날, 가슴 떨리는 첫 살인이 있은 기념할 만한 날을 더러운 계집이 망치고 있지 않은가? 야광충은 조용히 손을 뻗어 금령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다. 벌써 비갑(比甲;몽고족 여인의 복식.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내 려오는 긴 옷)을 벗어 던지고 맨가슴을 드러낸 데다가 이젠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유군( 裙;긴 치마) 의 끈을 풀고 있던 금 령이 깜짝 놀라 바둥거렸지만 야광충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발끝이 허공을 찼다. 얼굴이 붉게 충혈되며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동공이 확대되고 혓바닥이 목구멍을 기어올라 입 밖으로 빠져 나왔다. 잠시 후, 바둥거림이 멈추고 금령의 전신에서 힘이 사라졌다. 금령의 아랫도리를 감싼 통넓은 비단치마가 스르르 홀러내려 우윳빛 아랫배와 허벅지가 부끄럽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단치마는 나비처럼 사뿐히 금령의 발아래로 내려앉았다. 야광충은 이 모든 모습을 기묘한 열의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숨을 내쉬면 닿을 둣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금령의 눈빛이 경 악에서 공포로, 공포에서 다시 원한으로 진행되어 결국 허무로 귀결(歸結)되는 과정을 잊어버릴세라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야광충의 눈이 푸른 불길에 횝싸였다. 여태 그가 보여 주었던 푸른 안광과는 다른, 광기(狂氣)에 가 까운 감정이 그 속에 휘몰아치는 그런 눈빛이었다. 얼핏 보았을 때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게만 보이지만 사 실은 극도로 까다롭고, 세심하며 감정의 변화가 극에서 극을 달 컬 정도로 격심한 것이 야광충이었다. --황제내경(皇帝內輕) 음양응상태론(陰陽應象大論)에는 '음 은 고요하고 양은 급하다. 양은 나게 하며 음은 자라나게 한다. 양은 죽이고 음은 저장한다(陰靜陽燥, 陽生陰長, 陽殺陰藏).' 는 말이 잇다. 이것은 음양의 기운이 사람의 신체에서 어떻게 작용 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네가 냉정하고 고요하며, 남들에 비해 몇 배의 이 해력과 체력을 갖는 이유가 그 말로 설명이 된다. 예충은 그렇게 말했었다. 극단적으로 음기가 강한 야광충의 체질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 었다. --한편 한(漢)나라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中舒)가 저술 한 춘추번로(春秋繁露)에는 '양은 순함에 행하고 음은 거스름에 행한다(陽行干順 陰行干逆).' 라고 했고, 후한(後漢) 말(末)의 위서(緯書)에서는 '정(情)은 음에서 생겨나는데, 욕망은 때에 따라 생각난다. 본성은 양에서 생겨나는데, 그러므로 이치에 나 아간다. 양기는 인자하고 음기는 탐욕스럽다. 그러므로 정에는 이욕(利欲)이 있고, 본성에는 인(仁)이 있는 것이다(情生干陰 欲以時念也 性生干陽 以就理也 陽氣者仁 陰氣地貪 故情有利欲 性有仁也).'라고 했다. 이것은 성정(性情)의 문제에 있어서 음양의 기가 어떻게 작용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때 예충은 걱정스럽게 야광충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 었다. --성(性)은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요, 정(情)은 인간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의 인간은 성으로 정을 제어하고, 그 감정을 억누르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데 너는 그것 이 불가능하다. 양기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너는 극단적으로 나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 죽이듯 하고, 천만인이 욺게 생각하는 일을 너 홀로 반대로 생각하고, 장기적인 전망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순간적인 기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공산이 크다는 것인데……! 예충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었다. 이 사부는 너를 위해 걱정하는 바가 크다. 자칫 우리 같은 흑도인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희대(稀代)의 악인을 키우는 것 은 아닌지……. 흑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 들과 어울려 살기 힘들 정도로 괴팍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지……. 예충의 걱정은 맞아떨어졌다. 희대의 악인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괴팍하고, 극단적으로 감정이 변하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 이었다. 그런 그의 성질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눈빛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흥분되거나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있 을 때면 야광충의 눈은 푸르게 물들곤 했다. 심할 경우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일생 처음으로 살인을 하는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지금의 그를 봤다면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혹은 그 렇게까지는 아니라 해도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야수로 보았을 것이었다. 금령의 시신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야광충의 눈에 감돌던 광기도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태우던 푸른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유리 구슬 같은 차가움이 다시 그의 눈으로 돌아오자 야광충은 금령 의 시체를 금오의 옆에 던졌다. 더러운 물건을 버리듯 주저없는 태도였다. 그는 나타날 때처럼 조용히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시체를 처리할 사람은 누군가 따로 있을 것이다. 제5장 새벽이 올 때까지, 바위산 그들은 지옥성을 갓 벗어난 협곡의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려는 야광충의 앞을 막아 섬으로써 우 연히 거기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릴 알겠지?" 색명귀 하석이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가 바보로 만든 몇 사람 중의 둘이지!" 음명귀 가오륙이었다. '그런 이유였나?' 야광충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들이 앞을 막아 선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갈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두 개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협곡. 사막의 메마른 바람에 풍화(風化)되어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 질 것처럼 부슬부슬 일어난 암벽의 통로였다. 벽호공(壁虎功)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절벽. '죽이고 지나가야 하나?' 야광층은 그 절벽 위로 떠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잠시 갈 등했다. 이 밤 안에 백 리는 가야 했다. 길은 멀었고, 그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다가 해가 뜨기라도 하면 출발이 또 하루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왼손바닥에 쥐어진 인명권의 감촉을 음미하며 하석과 가 오륙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그들의 죽음과 삶이 쓰여 있는지 보기라도 하 는 둣이……!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하석이 시체처럼 푸른 얼굴을 작위적으로 찡그리며 야광충을 비웃었다. "겁먹었나? 쥐새끼처럼 숨어 들기나 잘하는 놈이 하긴 싸울 생각이나 있겠어? 그저 도망갈 궁리나 하는 것이 고작이지! 그러나 여기서 도망갈 생각은 행여 말아라. 네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이 웃음선을 건드렸던 것인지 가오륙이 입술을 일그러뜨 려 비웃는 태를 보이며 말을 보태었다. "애인지 늙은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지! 널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어. 총옥주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니 까 말이다. 그저 약간, 아주 약간 손을 봐줄 생각이다. 우릴 허 수아비로 만든 대가 치고는 아주 싼 것이지!"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푸른빛이 감돌았다. 심중의 분노가 용암처럼 비등(沸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왼손을 강하게 쥐었다. 인명권의 존재감이 아플 정도로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루에 둘을 죽이나 넷을 죽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총옥주의 직속수하인 금오도 죽였는데 하찮은 대수 나부랭이 라고 죽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문득 그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달라이 비스듬히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은 죽여야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야광충은 피식 웃었다. "관두지!"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지랑이처럼, 혹은 허깨비처럼 순간적으로 희미해지더니 말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야유신 필생의 절기, 이매십보( 魅十步)였다. 십 보 이내의 공간을 순간적으로 가로지르는 보법! 가공할 정도의 속도에 보는 사람의 시선을 흔란시키는 약간의 사전동작, 그리고 사각으로 움직이는 요령이 결합되어 만들어 내는 마술(魔術)과도 같은 보법이었다. 하석과 가오륙은 일순 멍청해졌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면전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들 앞에서, 비록 절정고수는 아 니라 해도 적어도 이십여 년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강호를 굴 러온 그들 앞에서 말이다. 다음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야광충은 그들의 십여 보 뒤, 협곡의 입구에 아무 일 없었다 는 둣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석은 이를 갈며 몸을 날리려 했다. 가오륙이 그의 옷깃을 잡아 말렸다. 저 정도의 가공할 신법을 보인 자라면 그들이 사력을 다해 쫓 아간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 순간적으로 스쳤던 것 이다. 다행히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것이 있지 않은가? 가오륙은 소리쳤다. "네 사형을 모른 척 할 수 있다면 그냥 가도 좋을 것이다!" 야광충은 멈주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와 가오륙의 중간쫌에 박혀 있는 바위 뒤에서 두 사람이 일 어섰다. 껑충하게 큰 키에 바짝 마른 몸매의 사내, 무상귀 파적과 그 의 손에 팔목을 꺾여 잡혀 있는 또 한 사내였다. 마흔쯤 되었을까? 하관(下觀)이 쭉 빠진 역삼각형 얼굴에 쭉 찢어진 새우눈, 코 밑에 드문드문 성기게 난 수염까지 영락없는 쥐상[鼠像]의 인물. 키 또한 작아, 섰는지 앉았는지 모를 오 척 단구(短軀)인데, 팔 척이 넘어 보이는 무상귀 파적의 옆에 서 있으니 더욱 작아 보였다. 이 인물이 바로 야유신 예충이 계승한 도둑의 문파, 귀영문 (鬼影門)의 장문제자(掌門弟子)요, 야광충의 사형인 옹중서(甕 中鼠) 주개(朱介)였다. * * * "도둑질하는 데에 뭐가 필요한지 아느냐?" 야광충의 스승 야유신 예충은 '투도(偸道)'니 어쩌니 도둑질 을 미화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은 사물을 가장 명확히 표현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 야 한다는 생각의 표현이며, 인정할 것은 액면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신념에 의거한 것이기도 했다. 도둑질에 '도(道)'자를 붙여 미화할 가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경공(輕功)입니다." 야광충과 나란히 앉아 있던 옹중서 주개가 대답했다. "왜?" 예충이 다그쳐 물었다. 주개는 대답을 잘못했나 싶어 찔끔 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 리로 대꾸했다. "들키면 신속하게 도주해야 하지 않젱습니까?" 예충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신속? 도주?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우셨을까? 우리 고명하신 장문제자(掌門弟子)님." 그의 말이 꼬여 나왔다. "말쏨 낮주십시오, 사부님." 주개가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사부님이 웬일로 농담을 다 하신담. 기분이 좋으신가?' '엎드려요, 사형.' 귓가에 울리는 야광충의 전음(傳音)을 들으며 주개는 자신의 말마따나 신속하게 엎드렸다. 탁--! 소리만 듣고도 알 수가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털을 스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혀 떨어지는 물 건은 분명 붓통일 것이다. 굵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 정통으로 맞으면 죽지는 않는다 해도 최소한 피를 보는 것은 면할 수 없다. '역시 신속이 최고지……!' 주개는 내심과는 달리 엎드리며 빌었다. "용서하십시요, 사부님." 사부가 노한 낌새를 알아채고 알아서 기는 것이다. "주개야, 주개! 네놈 별호가 뭐냐?" 예충이 탄식하며 물었다. "옹중서입니다." "옹중서! 그래서 너는 독안에 든 쥐밖에 안 되는 것이다. 천 하제일 귀영문의 경공이 네놈에게 가면 신속하게 도주하는 수단 밖에 안 된다는 것이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관둬라, 관둬. 불쌍해서 제자로 삼은 내가 실수지……. 그때 맞아 죽게 뒀어야 되는 건데" 그러면서 그는 주개의 뒤통수를 노려보더니 짜증스러운 빛으 로 호통을 쳤다. "냉큼 일어나지 못할까?" 주개가 슬그머니 스승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원래 야유신을 만나기 전부터 도둑질을 해 먹고 살던 하 오문(下五門)의 좀도둑이었다. 실력도 없고, 생김새와는 달리 약삭빠르지도 못한 그가 하루 는 야유신 예충의 장원(莊園) 담장을 넘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 격이고 강물이 용왕묘(龍王墓) 를 침범한 격이었다. 호원(護院) 무사(武士)들에게 쫓긴 그가 숨은 곳은 주방(廚 房), 옛 도척(盜 )의 고사를 생각하고 물항아리에 들어가 바가 지를 받쳐들고 있었다. "남의 집 담장만 넘으면 다 도척인 줄 아느냐? 원칙을 적용하 는 데에도 법칙이 있고, 응용이 필요한 법이다. 도척이 성공했 다고 너도 성공할 줄 알았단 말이지?" 호원 무사들에게 끌려 나와 효에 던져진 주개에게 야유신이 한 말이었다. 명색이 도둑의 조종(祖宗)인 야유신이 무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주개를 불쌍히 여기고, 옆에 두고 심부름이나 시키며 제대로 된 도둑질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주개는 뭘 가르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기본적인 운기조식법(運氣調息法)도, 초보 권법도 제대로 배 우지 못해 야유신이 포기할 즈음이었다. 재주가 없으면 도망가는 법 하나라도 가르치고 내보내야겠다 고 가르쳐 준 경공에 주개는 놀라운 소질을 보였다. 상승경공술(上乘輕工術)은 내공의 기초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주개는 이미 스물이 넘어서 내공연마를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 에 비해 뛰어난 자질이 있어도 상승내공을 이루기가 어려운 처 지였다. 그런 그가 일천(日賤)한 내공 수위만으로 상승경공을 구사하 는 것이었다. 다른 무공은 몰라도 귀영문의 경공은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매십보( 魅十步)와 귀영종(鬼影宗)이 그것인데, 일정 수위 에 오르면 귀신이 무색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행보를 보일 수 있 는 것이 이 이매십보와 귀영종이었다. 특히 귀영종은 서로 다른 용도의 다섯 가지 신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히 무림제일의 신법이었다. 사실 야유신은 이 두 경공과 소매치기를 하기 위해 연마한 제 맥금나술(制脈擒 術)인 조화십삼수(造化十三手) 외에는 달리 내세울 무공도 없었다. 주개는 조화십삼수는 흉내도 못 내었지만 경공에는 탁월한 조 예를 이루었던 것이다. 거기에 주개는 인성(人性) 이 좋았다. 중원에서 포쾌(捕快)들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혈로(血路)를 헤치며 이 머나먼 대막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지옥성에 합류 할 때까지 진심으로 야유신을 위해 희생하며 따른 사람은 주개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잡아먹을 둣 으르렁거려도 사실 더없이 주개를 아끼 는 야유신인데……. "경공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혜요, 지혜보다 더 필요한 것은 뻔뻔스러움이다." 야유신은 야광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사부는 밤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쳐 살그머니 나오는 치졸한 짓을 해본 적이 없다." 주개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다가 스승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려 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사부가 당년에 여양왕부(汝陽王府)에서 쿠빌라이(忽必烈) 때부터 전해 오던 묵궁(墨弓)을 들고 나을 때……." 여기까지 말하고 야유신은 탁자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한 모 금 마셨다. 제자들에게 감탄사를 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여양왕부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주개가 경악하며 되물었다. "물론이다. 사실 그 물건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 귀영문의 전통상 해본 일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생애에 서 한번은 구해서 조사동(祖師洞)에 보관하는 것이 전통이 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그런 물건에 탐을 낼 필요는 없었지." 야유신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탐스런 수염을 쓰다듬었다. 기 분이 흡족할 때 그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사실 주개와 야광층은 이 이야기를 수십 번 들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황량한 대막의 오지에서 야유신이 그나마 과거의 추억을 씹는 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야유신이 가장 자부하는 여양왕부 묵궁 탈취사건이 나 올 때마다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박자를 맞춰 주는 것이다, 그런 것도 야광충보다는 주개의 역할이었다. "나는 대낮에 여러 시종들을 거느리고 여양왕부로 갔었다. 한 족(漢族)의 부호(富豪) 행세를 하며 은자를 뿌렸더니 위사(衛 使) 놈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맞이하더구나. 교자(轎 子)에서 내려 여양왕 타반테무르(察罕特穆爾)의 이름을 부르면 서 내전(內殿)까지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 실은 그가 황궁으로 들어간 때를 노려 갔던 거지. 유유히 여양 왕의 서재에 들어가서 아흡 자[尺] 길이의 거궁[巨弓]을 감추지 도 않고 들고 나왔지. 하하하하하--!" 통쾌하다는 둣 웃는 것으로 야유신의 무용담(武勇談)은 끝이 났다. 야유신의 투도술(偸道術)은 그의 말대로 남다른 데가 있었다. 도둑질도 당당하게 하면 오히려 들키지 않는다는 것.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행동과 약간의 기술을 쓰면 훔치지 못 할 물건은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방대한 지식과 두툼한 배짱이다. 이게 야유신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야유신은 천문지리(天文地理), 기관매복(機關埋伏)에 서 의술(醫術)까지 모르는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방대한 지식이 그를 혹도십웅의 하나로 만들었고, 또 이 곳 지옥성에서도 받아들여져 꽤 높은 지위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말한다면 주개가 귀영문의 장문제자라는 것, 즉 예충이 은퇴하면 그가 귀영문의 장문인이 된다는 것은 어울 리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귀영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터무니없는 선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충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도둑질 하는 문파이니 장문인은 도둑질로 일생을 보 낼 너 같은 녀석이면 족하다. 네 사제는 한낱 도둑으로 인생을 마칠 사람이 아니니 아쉬운 대로 너라도 장문인이 될 수밖 에……!" 귀영문의 당대 문인은 장문인인 예충을 포함하여 그들 세 사 람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 었다. * * * 옹중서 주개! 예층, 엽장청과 함께 야광충의 단 세 명뿐인 친인 중 하나, 그리고 심정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상귀 파적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다. 주개는 야광충을 보더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하네, 사제! 여기서 사제를 기다리다가 그만……." 야광충은 묵묵히 주개를 바라보았다. 주개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통스럽다거나 생명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마음보다는 사제인 야광충의 행동에 제약(制約)이 되었다는 미안함을 먼저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항상 그랬다. 자기자신의 무능함을 과장되게 자각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일을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싱향이 그에게는 있 었다. 때로는 자기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조차 자 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천대를 받고 살아 온 인생이 그런 태도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야광충의 가슴 한 구석에서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야광충의 눈에 주개의 한 손에 들려 있는 주머니가 들어왔다. 파적에게 제압닿하지 않은 한 손이 주둥이 부분을 잡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땅에 끌릴 정도로 커다란 가죽주머니. 행여 놓쳐 버릴세라 끈으로 손목을 칭칭 감아 단단히 쥐고 있 는 그 주머니! 파적은 그 손마저 제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주머니가 주개의 손을 충분히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야광충이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주개는 더욱 부끄러 운 라을 띠었다. "무, 물과 양식…… 여행을 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먼 길을 떠나는 야광충의 행장(行裝)을 차 려 나오다가 협곡의 입구에서 야광충을 기다리고 있던 파적의 무리들에게 제압당한 것이리라! 야광충의 눈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주개나 예충을 건드리고 모욕하는 행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도 강하게 그의 살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을 것이고, 살려 해도 살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야팡충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소리없이 한걸음 내디뎠다. 지옥성을 나가는 입구와 반 대방향이었다. 제일 먼저 그것을 느낀 것은 가오륙이었다. 온몸을 거미줄처럼 휘어감는 압도적인 살기. 이것은 열심히 싸워서 상대를 죽이고 말겠다는 식의 살기가 아니었다. 이미 손아귀 안에 넣어 두고 손만 꽉 쥐면 터져 죽어 버릴 그 런 생명체를 보는 존재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살기였다. 구석에 몰린 새앙쥐를 보는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당장 죽 지도, 그렇다고 빠져 나갈 수도 없도록 지그시 누른 발밑의 벌레 에 대해서 발의 임자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유형(類型)의……! 아마도 그가 직업살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야광충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갖는 의미를 진정 으로 알 수 있는 자가 그 혼자만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겁이 났다. 무공의 고하(高下)는 문제가 아니었다. 싸움의 승패는 대개 싸우기도 전에 결정이 되어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엇다. 비무가 아니라 생사를 놓고 싸우는 결투--강호에서 벌어지는 싸움 대부분이 그런 것이지만--는 더욱 그렇다고 믿었다. 무공은 삼 할이요, 나머지는 경험과 기세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내공이나, 초식의 예리함과 정확성이 조금 떨어져도 어쩌다 이길 수는 잇지만 기세가 떨어지는 상대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 은 우연히라도 절대 있을 수가 없다. 지금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은발의 사내가 그런 경우였다. 그의 이십 년 청부살수 생활을 걸고 그것은 분명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이 사내에게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야광충이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오륙은 쿵--! 하는 큰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환청(幻聽)일 수도, 혹은 그의 귀가 만들어 낸 이명 (耳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의 겁먹은 심장이 울리 는 소리였다. 푸른 달빛에 푸르게 물든 사내의 창백한 얼굴과 그 가운데에 불타오르듯 빛나는 푸른 눈동자! 사내는 한 마리의 표범이었다. 그들은 지금 표범의 푸른 눈동자, 붉은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 밀고 있는 연약한 사슴에 불과했다. 가오륙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표범의 이빨에 씹혀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사내가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가오륙은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이질 것 이라는 압도적인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물론 자네나 자네 사형에게 별다른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닐 세! 우린 그저……." 야팡충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나 그 기세는 여전했다. "우린 그저 그렇게 철통 같은 경계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가 공할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지!" 가오륙은 지금 그의 말이 자신들의 체면도 살리면서 야광층의 분노도 잠재우는,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읍소(泣訴)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 었을 것이다. 생사(生死)의 여부에 관계없이 지금 그를 사로잡고 있는 전율 할 만한 공포(恐怖)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총옥주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일세! 설사 같은 펀이라고 할지라도 침입한 것은 사실이고, 우린 경계 의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 니까, 어떤 벌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형편이지!" 묘한 것은 하석과 파적이었다. 총옥주에게 불려가서 일생 다시 받아 보지 못할 정로의 온갖 모욕을 듣고, 앞으로 한 달간의 특별 경계라는 징계가 결정되었 을 때, 가장 분노한 것이 그들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야광충이 자신들이 지키고 있었던 영역을 통과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륵으로부터 그 침입자가 예충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분노가 폭발할 출구를 찾은 것처럼 날뛰었던 것이 또한 그들이 었다. 그런데 막상 가오륙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 려가며 옹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을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무 참견을 않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파란 불똥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그들 세 사람의 얼 굴을 훑어보았다. 떨고 있는 것은 가오륙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석과 파적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도 역시 공포였다. 심지어는 사형인 주개까지도 그를 보면서 이빨을 소리내어 마 주치고 있는 것이다. 야광층은 인명권을 헌 왼손을 단단히 감아쥐었다. 그것까지 사용하면 너무 쉽게 죽여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미 늦었다!" 말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늦었다'는 말이 들릴 때 이미 야광충의 주먹은 파적의 턱뼈 를 으스러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는 신속한 이동이고, 신속한 공격이었다. 쾅--! 파적은 천만 개의 바늘이 턱을 찔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날려갔다. 고통으로 쩍 벌어진 입으로 핏덩이와 이빨들이 튀어나오고 있 었다. 강호인의 본능으로 주개의 완맥을 움켜쥔 손은 풀지 않았지 만, 그것이 그에게는 더욱 큰 불행이 되었다. 야광충은 한 손으로 주개를 안아 낚아채며 발끝으로 파적의 팔목을 걷어찼다. 처음 파적의 턱을 부숴 버린 일격에 뒤이은 연속동작이었다. 기습에 뒤이어진 연속공격. 파적으로서는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의 공격 자체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팟--! 섬뜩한 음향이 들려 왔다. 파적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일련의 공격들을 바라보고 있던 가 오륙과 하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발끝으로 걷어차였을 뿐인데 손목이 잘린단 말인가! 파적의 얼빠진 표정으로 보아 본인이 느낄 겨를도 없이 일어 난 일임에 분명했다. 만약의 경우,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의 경우 걷어 차는 발끝의 무지막지한 힘에 팔목이 으스러지며 끊어진 것이라 면 저렇게 순간적으로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저렇게 뒤늦게 자신의 끊겨진 팔목을 보고, 또 거기서 분수처 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보고서야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 는 일이란……! 그러나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살기를 풍 기며 다가오는 은발의 사내, 야광충을 막는 일이 더욱 급했다. "어……, 어……!" 하석은 그를 향해 다가서는 야광충을 보며 주줌 물러섰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단호하게 행동을 하는 사람도 아직 본 적이 없 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반박자 늦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한 탓에, 그리고 본능보다 경 험에 의거한 동작으로 야캉충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어리 석은 행동 탓에……! 야광충은 그가 한걸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사이에 바짝 턱밑 으로 붙으며 오른쪽 주먹을 뻗어 왔던 것이다. 하석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급한 김에 무기를 잡 으려던 팔을 들어 그 주먹을 막았다. 그 다음은 야광충의 극히 단순한 동작과 하석의 본눙적인 동 작이 이어졌다. 왼쪽 주먹으로 거리를 재고, 오른쪽 주먹으로 강하게 두들기 는 단순한 동작을 야광충은 연거푸 반복했던 것이다. 쾅--! 팔목이 부러져 나갔다. 쾅--!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바로 심장으로 밀고 들어왔다. 쾅--1 턱뼈가 일그러졌다. 다행히도 미리 긴장하고 있다가 얼굴을 돌렸기 때문에 파적처 럼 이빨이 모조리 부러져 나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쾅--! 배가 뒤틀렸다. 내장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이건 권법(拳法)이 아니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그저 사람을 때린다는 가장 단순한 목 적에 충실하게 두들겨 패는 권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초식(招式)이라고 부를 만한 아무것도 그 안에는 없었다, 쾅--! 이건 그냥 맹목적인 구타였다. 야광충은 그를 구타하고 있고, 그는 지금 구타당하고 있는 것 이었다. 하석은 우선 아프고, 그 다음에는 억울해서 울었다. 강서(江西)지방을 떨어 울리던 색명귀라는 별호가 부끄러워 서, 삼십 년을 연마한 무공이 너무도 아까워서 그는 울었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가오륙은 칼을 빼들고 서 있었다. 그는 야광충이 두 사람을 회생불능(回生不能)의 상태로 만드 는 것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회생불능……! 그들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팔목이 잘려도 살 수는 있고, 턱뼈가 으스러져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정신이 꺾이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몸상태가 정상으로 회복되어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 상, 폐인(廢人)에 가까운 꼴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 가오륙의 판단이었다. 그는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고향에서 만 리나 떨어진 이 몽고족의 땅에서 정신마저 꺾인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할 수도 있었기 때 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말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지금 파적과 하석, 두 사람이 무참하게 꺾여 버렸지만 실상 무공으로 진 것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저 괴이(怪異)한 은발사내의 장기(長技)는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정도의 경공과 무지막지한 주먹, 그리고 발에, 아마도 가죽장화 끝에 숨겨진 모종의 무기밖에는 없었다. 빠르다고 해서 최강의 무공은 아니다. 강하다고 해서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무공에 두 사람이 변변히 저항도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평소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이기지 못 할 이유도 없고, 지더라도 저렇게 비참한 지경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무사답게 죽을 수는 있을 것이었다. "무사는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모욕을 달게 받지는 않는다고 했소! 지금 대협(大俠)의 행위는 시원스럽게 죽이는 것이 차라 리 나아 보일 정도로 악랄하구려!" 야광충은 혼절한 하석을 잡아 일으키려다가 그 말에 멈칫 동 작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가오륙을 향해 섰다. 가오륙은 그 순간 자신을 저주했다. 은발사내의 가장 큰 장점을 순간적으로 망각했다는 것을 깨달 았던 것이다. 기세, 그리고 살기였다. 앞에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가 공할 기세와 야수의 그것처럼 적나라한 살기가 두 사람을 아이 다루듯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을 이제야 명백하게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반항하고, 맞서 싸우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가오륙은 얼어붙어 있었다. 야꽝충은 서두르지 않았다. 뱀의 눈빛을 마주 대한 개구리는 더 쳐다보지 않아도 움직이 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개구리는 가오륙이고 야광충은 뱀인 것이다. 얼어붙은 가오륙의 눈앞에서 야광충은 손을 들어 얼굴을 닦고 있었다. 파리해 보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귀기가 흐르는 얼굴에 꽃잎처럼 붙은 붉은 핏방울! 야광충은 장갑낀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냄새를 맡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묘하게 마음을 들끓게 했다. 장갑은 핏방울을 흡수하지 않고 연잎에 튄 빗방울이 그렇듯이 둥글게 모아 두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핏방울의 유혹! 그는 무의식적으로 붉은 혀를 내밀어 그 유혹을 맛보고자 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예양(芮陽)!"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주개는 조금 전까지의 자신없고, 그저 사제에게 미안해 하기 만 하던 그 주개가 아니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부릅떠져 있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한마디에 야광충이 일순 모든 동작을 멈추고, 푸르게 빛 나던 눈빛마저 원래의 투명함을 찾았다고 해서도 아니었다. 지금 주개는 사제를 꾸짖는 사형의 모습, 그 위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큰 키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리 작은 것처럼 보이 지도 않았다. 적어도 야광충보다는 크고 당당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야광충은 꾸중을 들은 사제(師弟)에 불과했다. 야팡충은 고개를 돌려 주개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장갑, 묵린수에 묻은 피를 읏깃에 문질러 닦았다. "그 이름은 부르지 마세요!" 그의 나직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기에서는 주개밖 에 없었다. 예양! 야유신 예충이 자기 성(姓)을 따고, 이름으로라도 양기를 보 충하라는 의도에서 '양(陽)'자를 이름으로 붙여 주었었다. 이런 식의 이름은 흔히 지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사부의 말로는 그랬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의 이름은 주희(朱憙). '희(憙)'는 밝다는 뚱이다. 밝다는 의미를 지닌 한자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희는 매우 밝은 느낌을 주는 글자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강론하던 서재의 이름을 회암(晦庵)이라고 지었다. 밝다는 의미의 '희(憙)'자에 반대되는 '어두울 회(晦)' 자를 써서 너무 밝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름과 자(字), 또는 이름과 호(號)의 상보적인 관계를 통해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예는 그렇게 부지기수로 많았다. 예충은 그런 의미에서 야광충의 이름을 태양을 뜻하는 '양 (陽)'으로 지은 것이다. 해를 볼 수 없는 자의 이름이 '양'이라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사부의 애정 어린 배려가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양'은 이미 버린 이름, 다시는 듣기를 원하지 않았 던 이름이었다. 이미 오 년 전의 그날에……. 다시는 빛을 보리라는 마음을 갖지 않3다고 결심하던 그날 에……. 그런데 지금 주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다시 나온 것이다. 그 이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효과 가 있었다. 상처입은 야수처럼, 피에 굶주린 악귀(惡鬼)처럼 폭주하던 '살 의(殺意)를 일순간에 식혀 버린 것이다. 주개는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제가 야광충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야광충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눈빛 위로 가책(呵責)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스쳐갔다. 그는 주개가 무엇을 지적해 꾸짖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자신의 잘못임도 알고 있었다. 사형은 지금 그가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에 대한 굶주림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는 것이다. 단 한 방울이라도 피를 맛보면 다시는 그 유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경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문득 어제 사부가 했던 말이 야광충의 뇌리에 떠올랐다. --인간……, 나는 네가 이 인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생 각해 보기를 원한다. 목숨을 지키려면 인간을 믿으면 안 된다. 그러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모 순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는 것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사부는 굳은 얼굴로 '인간'을 강조했었다. --모든 것이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라! 그런데 단 하루 사이에 그 말을 잊었던 것인가? 야광충은 고개를 들어 중천으로 떠오르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 지옥성을 벗어나고, 아침이 오기 전에 는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잘못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바위 틈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는 파적과 하석을 집어 들어 길 한가운데로 옮겼다. 엉망이었다. 터지고 뭉개진 그들의 몰골은 사람의 것이라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문득 주개를 보았다. "물을 가져오셨죠?" 사막을 여행하는 행장에는 당연히 물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은 짐의 대부분이 물통이었다. 야광충은 양가죽 물통에 든 물의 대부분을 사용해 하석과 파 적의 상처 부위를 씻어 주었다. 그들의 터진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홀러 나오고 있었다. 특히 파적은 잘린 손목으로 다량의 피를 홀렸기 때문에 심각 한 상태였다. 원래 창백하던 피부색이 이제는 시체에 가까울 정도로 하얗게 변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야광충이 그들을 죽을 정도로 패지 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재빠르게 손을 놀려 그들의 요혈(要穴)들을 점혈(點 穴)해 피를 멈주게 했다. 그리고 부러진 팔다리를 맞주었다. 숙달된 의원(議員)들도 하기 힘들 정도로 신속하고 정교한 손 놀림이었다. 그가 갑자기 말했다. "나무와 묶을 것!" 가오륙은 이런 사태의 변화를 멍하니 서서 보고만 있었기 때 문에 일순, 그 말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야광충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도 강호를 돌아다니며 이런 식의 응급처치를 적지 않게 해보았기 때문에 바위투성이 산에서도 나무와 묶을 것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상귀 파직이 휘둘러 보지도 못했던 독문병기인 무상번 (無相幡)의 깃대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색명귀 하석의 허리춤에서 색명도(索命刀)를 뽑아 깃 대를 동강내었다. 순식간에 부목(副木)으로 쓸만한 나무가 몇 개 만들어졌다. 가오륙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하석의 칼집을 허리줌에서 풀어 몇 개로 쪼개었다. 흑시 부목이 모자랄지도 몰랐던 것이다. 묶을 것은 많이 있었다. 가오륙은 옷을 훌훌 벗더니 길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합치면 수십 자[尺]는 족히 될 끈들을 순식간에 만 들어 내었다. 야광충은 그것들을 잠깐 훌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하석과 파 적을 묶기 시작했다. "돌아가거든 무간지옥주를 찾아가라!" 하석과 파적이 온몸을 태우는 둣한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차 렸을 때, 그들은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 다음 귀에 들려온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부어오른 눈을 간신히 뜨고 말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내가 길바닥 에 누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뒤에서 비치는 달빛만으로도 밝게 빛나는 은발을 보면 그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부어오른 눈꺼풀 사이로 두려움이 흘렀다. 야광충은 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무간지옥주가 너희를 치료해 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돌아올 때쯤에는 정상에 가까운 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파적과 하석도 침묵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이 황당한 일을 이해하는 것이 더 급했 던 것이다. 야광충은 한마디를 더 던지고는 주개에게 다가갔다. "도전을 기다리겠다!" 그들의 눈에서 야광충이 벗어나고 있었다. 도전이라……! 보복이라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그러나 도전이든 보복이든 가능한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이다. 과연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에게 그들이 보복할 수 있을 것 인가? 파적과 하석은 자신들이 당한 상태를 조금씩 이해해 갈수록 암담한 기분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주개는 야광층과 함께 협곡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는 정말 이 나이 어린 사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인 예충이 사제를 주워들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이중삼중으로 빛을 가린 상 자 속에서 끄집어내어지는 것을 보았다. 죽을 때까지 그 상자를 품에 안고 죽은 중년의 무사도, 그 얼 굴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사제와 너무도 똑같이 생긴 그 얼굴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로는 그가 키웠다. 장장 십팔 년의 세월 동안 주개는 아버지처럼, 형처럼 야광층 을 키워 온 것이다. 야광충, 그때는 예양이라 불렸던 사제는 자라면서 점점 그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 이상한 체질이 그랬고, 학문과 무공에 있어서의 놀라운 성 취가 그랬다. 원래 둔한 옹중서는 둘째치고, 사부인 예충조차 그가 배우고 익히는 속도에 놀랄 정도였다. 이제 그는 따라가지도 못할 성취를 보이고 있는 사제, 어쩌면 사부의 능력을 뛰어넘는 조예를 익히고 있올지도 모를 그 사제 가 어쩐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게 되면, 사부는 아마 그를 보면 늘 그러 시듯이 소태 씹은 표정으로 내뱉으실 것이다. --너나 잘해! 주개는 정말 그런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목을 움츠렸다. '괜한 걱정이겠지!' 문득 앞서가던 야광충이 그룰 돌아보았다. "사형!" "음?" "사부님을 부탁합니다." "무슨……?" 주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야광충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일을 사형에게 설명할 방법 이 없었다. 그는 말을 돌렸다. "제오 통로(通路)에 시체 두 구가 있을 것입니다. 흑시 문제가 생기면 제가 돌아와 처리하겠습니다." 주개는 이 의외의 소리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들이 누군데……?" 그러나 야광충은 이미 그의 눈앞에 없었다 주개는 협곡을 나가 바위산을 돌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귓가의 바람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경이 둥글게 휘어지며 그의 뒤로 달려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예상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늦어졌다. 이 밤 안으로 바위산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생길 지도 몰랐다. 슈우욱--! 야광층은 눈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밟고 뛰어올랐다. 순간적으로 그의 검은 그림자가 달 속에 박히는 것처럼 보였다. 야광충은 두 팔을 펴서 피풍의 귀퉁이를 잡았다. 그는 바람을 타고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아래로 험준한 바위산과 헙곡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 었다. 길은 아직도 멀었다. 저주스러운 태양이 고개를 내밀기 전에 사막을, 아니면 적어 도 부드러운 땅을 찾아야 했다. 바위산에는 햇빛을 피할 만한 곳이 많지 않은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동굴을 찾느니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파고들어갈 땅 을 찾는 편이 나았다. 장장 이십여 장을 날아간 야광충의 몸이 서서히 땅으로 떨어 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칼끝처럼 날카로운 바위정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는 그렇게 쉬지 않고 두 시진을 달렸다. 창백한 얼굴에 회미하게 땀이 비치기 시작했다. 귀영종 오대신법(五大身法) 중에서 잔백유영(殘魄遊泳)은 공 기의 흐름을 최대한 이용하기 때문에 내공소모를 극도로 줄이는 신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공소모를 줄인다고 해도 지금처럼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력으로 두 시진이나 달리고서야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사막에서는 최대한 체력을 보전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지금처럼 달려서야 천하에 다시없는 내공의 소유자라도 탈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시간과 경주하고 있었다. 하늘의 달도 이미 사라지고, 밤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이 가장 어두워질 때는 새벽이 오기 전이다. 그리고 새벽이 오면 야광충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동녘이 밝아졌을 때 움직인다는 것은 야광충에게는 죽음을 의 미하는 것이다. '동굴을 찾아야 할까?' 아직도 눈앞에는 험준한 바위산만이 보이고 있었다. 야광충은 오늘 바위산을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쉴 곳을 찾 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작은 바위 끝을 걷어차며 허공을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을라갔다. 그리고 공중에 뜬 그대로 바람을 타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벼랑이 있고, 그 너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팔을 젖으며 벼랑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거기 쉴 곳이 있을 것이다. 동쪽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저 저주스런 태양을 피할 곳이 거 기에는 있을 것이다. 제6장 3월 17일부터, 모래언덕 대막의 밤은 차다. 파리한 달빛 아래 회색으로 침묵한 모래언덕(沙丘), 그 사이 를 푸르게 흐르는 밤의 기류(氣流)는 얼음으로 깎은 풍경 같다. 달빛을 받아 푸르게 물든 검신(劍身)도 차다. 비스듬히 땅을 향해 한 자루 검을 들고 선 노인과 그 뒤에 숨 은 둣 서 있는 청년. 그들의 손에 들린 칼날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을 포위한 십여 명의 기마혹의인들이 겨눠 든 장창의 날 처럼……! 또 그들을 장식처럼 둘러싼 시체돌, 모래 위에 여기저기 뒹굴 고 있는 그들, 목 없는 시체들이 그렇게 들고 있었을 주인 잃은 도검(刀劍)의 날들도 푸른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 아래 푸르게 물든 이 모든 풍경들이 이 밤을 더욱 차갑 게 얼리고 있는 것이다. 이 얼어붙은 풍경을 바라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조금 떨어진 모래언덕 위에 선 검은 인영. 야광충이었다. 휘유우--! 얼어붙은 풍경 위로 바람이 불었다. 야팡충의 머리위로 은빛 팡채가 홀렀다. 검은 띠로 정수리께에서 단정히 묶인 야광충의 은라 머리카락 만이 바람에 날려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 창백한 얼굴……, 그리고 깊고 유현한 눈은 달빛 아 래에서 귀기(鬼氣)를 흘려 내고 있는데……! 그 눈이 지금 약간의 감정을 담고 노인에게 맞추어져 움직이 지 않았다. 약간의 감정……, 바로 경이(驚異)였다. 고검(古劍)을 든 노인은 보기에 따라서는 예순, 혹은 일흔으 로도 보였다. 모래바람에 찌들어 원래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중원의 복 색(服色)임이 분명한 하얀 학창의(鶴敞衣)를 입고 머리에는 유 건(儒巾), 발에는 초혜(草鞋)를 신고 있었다. 가는 눈썹에 가늘게 찢어진 눈이 지혜로운 인물임을 짐작케 했지만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어 교활해 보이지는 않았다. 입술 위와 턱에 난 가늘고 긴 수염은 영락없이 유생(儒生)의 티를 내는데……, 손에 든 한 자루 고검(古劍)이 그와 묘하게 어울렸다. 노인의 뒤에 선 청년은 야광충과 비슷한 스물 전후의 나이였다. 역시 흙먼지에 찌든 화복(華服)을 입었고, 얼굴 또한 흙먼지 에 더러워져 있었지만 수려한 용모는 감출 수 없었다. 둥글게 휘어진 눈썹과 갸름한 콧대, 전반적으로 둥그스름한 얼굴형이 곱게 자란 귀공자를 연상케 했다. 특이한 것은 눈이었다. 그는 두려워 떨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뜨지 않 고 있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盲人)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야광충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무심(無心), 무감동한 태도였다. 피비린내 속에서도 그들만 흘로 초연히 서 있는 둣한 느낌이 었다. 두려움은 오히려 그들을 에워싼 혹의 기마대원들에게서 보였다. 그들을 에워싼 기마 혹의인은 오두 십육 명. 하나같이 흑의 경장에 흑색 피풍을 두르고, 모래먼지가 코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흑색 천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두 눈만 빠끔히 내놓은 그들의 흑 색 경장 가슴 부위에는 금색 실로 날아갈 둣한 용 한 마리가 수 놓아져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모양인 것으로 보아 한 방파(幇派)의 표기인 듯했다. 야광충은 그 모습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검은 옷에 금색 실로 수놓은 용! 바로 '흑룡사(黑龍社)'의 표기(表記)였다. 이들 흑의인들은 '대막의 검은 공포'로 불리는 약탈자 흑룡사 의 무사들인 흑룡기사(黑龍騎士)였던 것이다. 용문(龍門)에서 대막을 거쳐 천산 기슭을 따라 서장(西藏)으 로 이어지는 천산북로(天山北路)가 몽고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 던 시절, 다시 열렸던 때가 있었다. 이들 흑룡사는 그 천산북로를 지나는 대상단(隊商團)을 약탈 하던 사막의 도적단이었다. 중원(中原)이 명(明)의 천하가 되고 북원(北元)이 성립하여 대상단이 끊기자 유목민들과 대막 주변의 성까지 습격하는 등 더욱 횡포를 부리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이 밤도 어디론가 약탈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오양인데……, 여기서 일장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야팡충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었던 풍경이 다시 움 직이기 시작했다. 툭--, 투--욱---! 한방울 한방울 노인이 쥔 장검의 검날을 따라 홀러 떨어지는 선혈이 소리있이 모래에 스며들었다. 흑룡기사들의 손에 들린 일 장 칠 척에 달하는 장창(長槍)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노인의 검과 흑룡기사들의 창끝 사이로 대기가 압축되었다. 노인의 지그시 감은 눈과 흑룡기사들의 흉흉한 눈빛 사이로 긴장은 고조되었다. 대기가 터져 나갈 둣, 살갗이 스쳐 찢어질 둣 팽창된 긴장이 만드는 폭풍전야의 정적. 이 기묘한 정적은 흑룡기사 중 하나가 목에 건 뿔고동을 입으 로 가져가면서 깨어졌다. 뚜우--우웅--! 뿔고동 소리가 모래언덕 사이로 퍼져 나가며 밤공기를 혼들었다. 기마대열이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기마대의 공격에 갑작스러운 것은 없다. 층분히 거리를 두고 한걸음 한걸음 말을 움직인다. 달려가면서 점점 속도를 가하고 기수와 말이 함께 적에 대한 적개심을 키운다. 기수와 기수간의 호흡이 이때 하나로 동조(同 調)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폭픗처럼 질주하며 압도적인 위치에서 발휘 되는 기세로 적을 밟아 버리는 것이다. 흑룡기사들 역시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걸음이 점차 빨라져서 잠시 후에 는 모래먼지를 세차게 날리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여섯 흑롱기 사들. 그들은 오른손만으로 장창을 잡고 옆구리에 붙여 적을 겨누던 마상견적세(馬上見敵勢)에서, 오른손으로 장창의 뒷부분을 잡고 왼손으로 중간 부분을 잡으며 위에서부터 찍어갈 둣이 적올 노 리는 하격세(下擊勢)로 자세를 바꾸었다. 열여섯 기마대가 만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노인과 소년올 노 리고 중앙으로 조여드는 둣한 기세였다. 그 기세의 중앙으로 돋아나온 날카로운 창날은 언제라도 목표 의 몸을 갈가리 찢어발길 수 있는 야수의 이빨 같은 것이었다. 몽고(蒙古)가 천하를 정복한 것은 강궁(强弓)과 장창(長槍), 그리고 몽고마(蒙古馬)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몽고군이 자랑하는 장창은 길이가 일 장 칠 척에 달하는 긴 것으로 흑룡기사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들고 다니기에도 거추장스러울 듯한 이 창을 수족처럼 놀려 당년에 천하를 제패했으니 그 사용법에 독특한 점이 있음을 짐 작할 수 있다. 지금 흑룡기사들이 취한 자세와 공격전술이 그 중 일부인 것 이다. 뚜우--우--웅--! "하앗--! 핫--!" 다시 한번 뿔고동 소리가 길게 울리자 두 명의 흑룡기사가 대 열에서 비스듬히 빠져 나와 노인을 향해 덮쳐들었다. 곧추세워졌던 창이 일직선으로 찔러들었다. 그들이 대열에서 빠져 나온 것은 노인의 정면과 배면(背面)에 왔을 때인데 노인을 찔러가는 창끝은 좌우측방으로 이루어졌다. 원을 그리며 달리던 탄력이 이런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대로라면 노인은 두 자루 장창에 맞뚫린 산적(散 )신세가 될 순간이었다. 노인은 장끝이 몸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검을 늘어뜨린 채 움 직이지 않았다. "차--아--앗!" 혹룡기사들의 기성과 함께 창끝이 노인의 몸을 꿰뚫었다고 보 이는 순간, 노인은 어느새 한 발 앞으로 나서 간단히 두 개의 창을 피했다. 그는 몸을 회전시켰다. 늘어뜨리고 있던 검이 비스듬히 대각선을 그리며 좌상방(左上 方)으로 올려 그어졌다. 전혀 빨라 보이지 않는, 신묘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간단한 동작이었다. 힘없는 노입이 느릿느릿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양과 같다고나 할 그런 동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노인의 검이 가는 곳에 공간이 입을 벌렸다. 거울처럼 차가운 대기가 갈라졌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솟구쳤다. 노인 좌즉에서 덮쳐오던 흑룡기사는 허리가 두 동강으로 잘려 나갔다. 말은 허리아래 하반신만을 싣고 몇 걸음 가더니 멈추었다. 허공에 뜬 상체가 피와 내장을 쏟으며 허우적거리다가 모래 위로 떨어져 뒹굴었다. 우즉의 흑룡기사도 비슷한 신세였다. 노인의 검을 엇비스듬히 맞은 듯 혹룡기사는 말에 탄 채 몇 걸음 더 가더니 몸이 우측으로 기울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반신만이 우즉으로 기울며 내장을 주루룩 쏟 아 냈다. 허리가 반만 잘린 것이었다. 뚜! 뚜! 뚜--우--! 뿔고동이 다급한 신음처럼 연거푸 울렸다. 기마대는 전속력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발굽에 걸린 모래먼지가 맹렬히 튀어 올랐다. 혹룡기사들은 이제 하나하나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달빛 아래로 자욱한 모래먼지만이 회오리치며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핫--! 핫--!" 두두두두두--! 한 순간 수레바퀴가 깨졌다. 열네 명의 기마대는 종횡으로 엇갈리며 중앙을 가로질러 달리 고 있었다. 저마다의 손에 들린 장창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지럽게 보이지만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한 합격진(合擊陳)이 었다. 흑룡기사들은 그들 서로에게는 옷깃조차 스치지 않으며 오로 지 노인과 청년에게만 장창의 날을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치리릿--! 츄파--앗--! 열네 마리의 말, 열네 명의 흑룡기사, 열네 자루의 창과 그 만큼의 달빛이 부서져 흩어졌다가 어지러이 모였다. 노인과 청년의 몸은 그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였다. 다음 순간, 노인을 중심으로 하얀 원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 원은 이내 달빛 아래에 검게 물든 피보라로 변했다. 물 흐르둣 유연하고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한 움직임이었 지만 결과는 역동적(力動的)이고 화려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공격한 혹룡기사들의 목이 하늘높이 솟구치며 핏물이 사방으 로 뿌려졌다. 두두두두두--! 목 없는 주인들의 시체를 싣고 열네 필의 말들이 교차하며 지 나갔다. 모래먼지가 가라앉았다. 노인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 있고, 소년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에는 열네 개의 목이 뒹굴고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닌 열네 개의 목이었다. 야광충의 눈이 일생 처음 보는 장면에 대한 경이(驚異)로 부 릅뜨여졌다. 혹룡기사들의 공격은 쾌속했다. 절기(絶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힘이 있었고 정확쌨다, 그들은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병사들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방금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들이 지닌 실력의 십이 할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검올 움직이자, 흑룡기사들의 공격은 멈춘 것 처럼 보였다. 노인의 검 앞에서 시간은 잠시 숨을 죽였다가 검이 지나간 뒤 다시 제호흡을 한 것 같았다. 비스듬히 아래에서 위로 긋고 다시 수평으로 긋는 그 간단한 동작 앞에서, 적어도 수천 번의 훈련을 통해 정교한 톱니바퀴처 럼 맞물려 돌아가던 흑룡기사들의 합격술은 터무니엎이 어설픈 것이 되어 버렸다. 열네 개의 수급(首級)이 모래 위를 뒹굴고, 허공에 뿌려진 서 혈이 모래에 끼얹어질 때까지 야광충의 사고(思考)는 정지되어 있었다. 어느새 말들은 걸음을 멈추고, 주인의 시신에서 흐르는 피로 등을 적시고 있었다. 밤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고요였다. 긴장과 살기로 얼어붙었던 대기가 이제는 을씨년스런 죽음과 허무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노인은 허리춤에 찬 검집에 검을 집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두께가 있는 것에 두께가 없는 것을 밀어 넣으면 세상에 자 르지 못할 것이 없다," 말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노인은 다시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세상에 틈이 없는 자세는 없다. 그러므로 깨뜨릴 수 없는 자 세 또한 없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선 소년에게 무(武)의 도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英)아, 너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틈을 벨 수 있으리 라." 노인의 뒤에 서 있던 화의청년이 대답을 않고 다만 빙긋이 웃 었다 좌우로 구르고 있는 스무 구의 시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인가? 산중의 조용한 절간에서나 오갈 듯한 선문답(禪問答)을 주고 받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둣이 평안한 태도의 두 사람이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어진 사구(砂丘) 아 래로 걸어갔다. 화의청년이 뒤를 따랐다. 거기 세 마리의 낙타가 있었다. 두 마리는 안장 양쪽에 약간의 짐과 물통이 달려 있고 한 마 리는 안장없이 짐만 가득 실려 있었다. 노인과 화의청년을 태운 낙타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일 어나 사구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모래먼지가 일어나 스무 구의 시신들과 그들이 뿌린 핏자국, 사구 사이로 사라진 낙타의 발자취를 덮고 있었다. 야광충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그들이 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서 그가 떠올린 경이의 빛은 이제 그의 눈에서 사라지고, 어딘지 사이(邪異)한 얼굴에 무표정한 눈빛을 되찾은 상태였다. 지옥성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노인과 화의청년의 종적을 발견하고, 그 종적이 자신의 행로 (行路)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단지 우연이었다. 그들이 흑룡사의 무리들과 마주쳐 싸우게 되고, 그 광경을 야 광충이 보게 된 것 역시 누구의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한낱 우 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인의 일검(一劍)이 야광충의 눈에 띈 다음부터 그것 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일검은 흑룡기사들의 목과 함께 기존의 무공, 혹은 검법에 대해 '야광충이 지니고 있던 상식(常識)을 함께 베어 버리고 심 장에 깊이 꽂혀 버린 것이다. 야팡충은 그 일검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그 일검을 깨어 버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는……! 한낮이 되면 대막은 열기에 휩싸인다. 태양은 이제 거대한 화륜(火輪)이 되어 이글거린다. 그 무자비한 공세 앞에 굴복한 모래도 돌도 하얗게 달아오르 고, 이내 그 자체가 다시 열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태양이 남중(南中)하는 때, 즉 한낮에는 아무도 그 아래로 나 서지 않는다. 녹지(綠地)를 따라 대막을 유랑하는 유목민도, 지나가는 대상 (隊商)의 무리도, 심지어는 대막의 전갈마저도 사구가 만드는 그늘이나 바위 틈에 숨어 불타는 태양을 피하는 것이다. 태양이 점차 위력을 잃고, 서편 지평선에 걸려 핏빛으로 주위 를 물들이는 황혼이 오면 대막은 다시 숨을 쉰다. 그제서야 유목민도 대상도 전갈도 다시 길을 나서고 먹이를 찾는다. 노인과 청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래언덕 아래 천막을 치고 햇빛을 피하며 휴식을 취한 그들 이 다시 길을 나선 것은 황혼이 질 때였다. 방향 해가 지는 서쪽이었다. 길은 아직도 멀고도 멀었다. 그들은 이제 겨우 중원과 대막을 구획 짓는 하란산맥(賀蘭山 脈)을 넘어 대라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한다. 낙타와 배는 확실히 그 줄렁거림 의 정도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낙타 위에서 아까 먹은 음식을 도로 내놓 고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노인과 청년은 낙타를 다루는 솜씨가 서툴렀다. 게다가 복색조차도 사막여행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사막여행 경험이 일천함이 분명한데도 구토 같이 창피한 일은 아직 하지 않고 있었다. 낙타는 세 필. 선두에는 노인이, 중간에는 '영(英)'이라고 불리운 화의청년 이 타고 제일 뒤에는 짐을 실은 한 필이 끈으로 연결되어 따르 고 있었다. 선두에 가는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낙타의 움직임에 맞추 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가끔 생각난 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뒤에서 따라오는 화의청년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흔자말 같기도 한데 대답을 기대하는 말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 삼 경(三更)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화의청년이 얼굴에 이채(異彩)를 띠며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 려 하자 노인이 제지했다. "두어라. 이미 이 경 초부터 우릴 따라오고 있느니라." 낙타대열의 오십여 장 뒤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따르 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어젯밤의 그 은발청년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격전장에서부터 따라오고 있었던 것은 화의청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이 되기 조금 전 어딘가로 사라지기에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청년은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 가까이 따라오고 있는데 눈치를 못 채었던가?' 그는 진작에 그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귀를 속일 사람은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긴 이 모래지옥을 홀로 걷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 었다. 그러나 화의청년은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청년이 평범하지 않은 중에도 더욱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화의청년은 노인에게 뭔가 물어 보려다가 마음을 바꿨는지 입 을 다물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 뒤편 멀리에서 걸어오는 은발청년의 발걸 음 소리를 들으려 했다. 놀랍게도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조용히 움직여도 움직이는 이상에는 주위에 변화를 일 키기 마련이고, 그 변화는 소리의 형태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단지 그 소리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몸을 감추지도 않고 걸어오면서도 소리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이 지금 그의 뒤에 있었다. 청년은 전신의 감각을 동원해서 주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차가운 대막의 밤공기와 낙타들의 거친 숨소리, 낙타의 발길 에 밟히는 부드러운 모래들의 소리와 멀리 모래 틈에 숨은 작은 뱀이 기어다니는 소리, 그리고 약간 쉰 듯한 낙타의 숨결 냄새 와 사막의 마른 모래 냄새, 깊은 땅속에 흐르는 물줄기의 달콤 한 냄새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를 둘러싼 주위의 풍경을 그림처럼 보 여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뒤에……, 흐릿한 형체 하나가 잡혔다. '이것이다!' 화의청년은 머릿속에 만들어진 풍경에서 그 흐릿한 형체와 관 계없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의 뒤편에 걸어오는 은발청년과 관계없는 것은 하나 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은발청년도 함께 사라져 버 렸다. 화의청년은 소용없는 짓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뒤편을 보려 했다.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문(門)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道)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밖으로 멀리 나가면 갈수록 그가 아는 것은 적어질 것이니……!" 화의청년은 부끄러운 빛을 얼굴에 가득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노인, 그의 사부가 가르쳐 준 것들을 오늘 또 지키지 못한 것 이다. 눈으로 보려 하면 그의 지각은 눈에만 한정된다 귀로 들으려 하면 들리는 것에만 한정된다.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모르게 되는 것이다. 사부가 그에게 전수해 준 심시신청대법(心視神廳大法)은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소리를 듣는 정도의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뜨지 않고도 보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 주위의 모든 것과 대화를 하며 구름의 눈으로 풍경을 보고, 바 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또 하나의 지각(知覺)이었다. 방금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에 집중함으로써 전체를 놓치는 우(愚)를 범했던 것이다. 화의청년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잃었던 풍경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다시 은발청년이 있었다. 그는 문득 감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가 사부의 지도 아래 그렇게 노력해서 이루려 하는 것을 은 발청년은 이미 이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위의 풍경, 그를 둘러싼 모든 것과 동화(同化)되는 바로 그 경지였다. 인간은 산 위에 서면 낮선 침입자가 되고, 길 위에 서면 한낱 돌멩이만큼도 더 길에 동화되지 못한다. 같은 사람 속에 섞여도 진정으로 섞이지 못하고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기 마련이다. 주변과 동화한다는 것, 풍경 속에 녹아든다는 것은 이럴 때 불가능하리만치 어려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은발청년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정말 특이했다. 그는 전혀 경신술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발바닥 전체로 모래를 밟는데도 디디고 지나간 자리에는 미세한 혼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니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오십 장 밖에서 그가 걷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 다면 그는 무림제일의 청력을 가진 자일 것이다. 바로 옆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거리에서 들을 수 있 다면 거의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청력일 테니 말이다. 한 발 내딛고 다시 한 발 내딛는 발 사이의 보폭(步幅)은 두 자 두 치(二尺二寸), 넓지도 좁지도 않은 그 보폭은 시종 변함 도 없고 보조(步調)도 일정했다. 매걸음 신경을 쓰며 걷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보 조와 보폭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런 사람이 무공을 익 히고 있다면 그의 무공은 대단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무공에서는 호흡을 중시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호흡을 흩트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 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다는 것과 통한다. 그것은 고도의 정력(精力)이 요구되는 일이고, 남보다 정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남보다 목숨을 잃을 확률이 낮다는 얘기도 되 는 것이다. 야광충은 아직 남과 정식으로 무공을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금오를 죽이고 하석과 파적을 때려눕혔지만 그는 그것으로 자 신의 무공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금오를 죽인 것은 무기의 특성을 살린 것이고, 하석과 파적의 경우는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그는 일개 대주(隊主)와 비교되기 위해 무공을 배웠다고는 생 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가는 노인과 화의청년은 상당한 흥미를 갖게 만드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노인뿐이었다. 그의 일검은 야광충 자신이 그 세력권에 있었더라도 어떻게 피해야 좋았을지 알 수가 없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강한 것도 아니요, 빠른 것도 아니었다. 무슨 신묘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한 순간 공간이 갈라지고 노인을 향해 달려들던 열네 명의 목이 허공에 떴다. 야광충은 이렇게 걸어오면서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 일검을 생 각하고, 또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일검 을 완전히 피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푸른 검광(劍光)이 그를 베어 오는 것을 보곤 했다. 시간은 멈추고, 대기가 갈라졌다. 존재하는 것은 그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푸른빛 검광뿐이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에서 그는 두 눈을 뜨고 검 광을 노려보기만 했다. 목이 뜨거웠다. 아니 차가웠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반쪽, 혹은 나머지라고 불러야 옳았을 것이다. 그는 끊어진 자신의 목과 몸뚱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허공을 빙글빙글 느리게 돌아가며 떠오르고 있는 머리에 붙 은, 여전히 유리알처럼 투명한 두 눈으로 자신의 잘려진 목에서 피가 뿜어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속을 돌고 있는 피는 그럴 거라고 늘 상상해 왔던 것처럼 차갑고 푸른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야광충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밤 꾸었던 꿈을 생각하는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저만치 앞서가는 노인 일행을 보았다. 그들은 뒤돌아보고 있지 않았다. 여태까지처럼…….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잠깐 빛내고, 호흡을 지금까지보다 더욱 길고 가늘 게 조절했다. 그의 신체 전반이 그 호흡에 따라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잘 드러나지 않던 생기(生氣)가 한층 더 사그라들 며 그의 몸속 깊이로 숨겨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단지 인간이면, 아니 살아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드러내는 기 운을 한층 더 모호하게 만들고만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성공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던 당사자가 누구인지 도 드러났다. 바로 그때, 화의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그 얼굴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은 야광충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바라본 것이지만 화의칭년은 분명 맹인(盲人)이었다. 그렇게 보지도 못하는 맹인이 자신의 종적을 알아차렸다는 사 실이 정말 놀라웠던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러니 누구든 뒤를 돌아보았다면 금방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달랐다. 지금의 걸음걸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암흑 속 에서 살아오면서 저절로 몸에 익은 걸음걸이였다. 그래서 그가 몸을 감출 마음이 없다 해도 일부러 소리를 내며 걷지 않는 이상은 그의 발소리를 들을 사람이 드문 것이다. 그런데 저 화의청년은 그가 뒤를 따르는 것을 느낀 듯하지 않 은가? 문득 다시 그 느낌이 돌아왔다. 누군가의 눈이 그를 지켜보는 둣한 느낌! 야광충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관찰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그를 관찰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한층 더 자신의 기(氣)를 감추었다. 내딛는 발걸음이 이제는 의식적으로 조심스럽게 내디뎌졌다. 그는 그를 둘러싼 퐁경 속에 자신이 완전히 동화되려고 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를 그냥 통과해서 지나가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한 순간, 그 자신이 모래알 하나인 것처럼, 교교하게 흐르는 밤의 일부분인 것처럼 되려고 시도했다. 그와 화의청년은 하나는 숨으려 하고, 다른하나는 그런 그를 포착하려 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다. 이것은 승부(勝負)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도의 정신과 정신, 그들의 전신경이 동원된 고차원적인 승부였던 것이다. 밤의 검푸른 빛이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다시 새벽이 오고 있는 것이다. 야팡충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는 사구와 사구 사이의 가장 깊숙한 골짜기로 걸어 갔다. 그는 길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오른발을 축(軸)으로 삼고 왼발을 들어 오른쪽 발목 에 붙이며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즉--! 그가 회전함에 따라 그의 키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모래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가 그의 주위로 맹렬히 튀어 오르더니 회전을 따라 소용 돌이를 만들었다. 그는 무릎에서 허리까지, 다시 가슴을 걸쳐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끝까지 모래 속으로 파고들어 잠시 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모래는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소용돌이치며 돌다가 서서 히 멈추어 가라앉았다. 야광충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모래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이내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그 자리에 쌓였다. 잠시 후 그 주변은 다른 곳과 구분이 가지 않게 되어 버렸다. 배교(拜敎)의 술자(術子)들이나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이 사용한다는 지둔술(地遁術)이 여기 나타난 것이다. 야광충은 낮 동안에는 이런 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 이다. * * * 사막에 모래먼지가 높이 치솟았다. 족히 백여 기(騎)는 되어 보이는 기마대의 무리가 열사(熱沙) 의 대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선두에 앉아 있던 기수가 소리쳤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그의 바로 뒤로 말을 달리던 기수가 아래턱을 가린 천을 끌어 내리며 대답했다. "살아 돌아온 세 필의 말이 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이 길이 맞겠지!" "맞기를 바란다! 대두목(大頭目)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말 이다!" "흠!" 그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대열의 옆으로 조금 떨어져 달리는 기마를 보았다. 일반 몽고마들과는 달리 장대한 체구의 흑마(黑馬), 안장 옆 에는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긴 창이 걸려 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탄 흑의의 사나이……! 그는 그리 큰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검은 옷으로 감싸인 체구에 균형이 잡혀 있었고, 그 아래 팽팽이 긴장된 근육들의 힘이 느껴질 정도로 단단한 인상 이었다. 온몸을 감싼 흑의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회색으로 변해 있었지 만 가슴에 새겨진 붉은 용 한 마리는 또렷이 드러났다. 혹룡사의 표기. 그것도 다른 무리들과는 크기나 세공(細工) 면에서 큰 격차가 있는 표기였다. 그가 바로 신비에 가려진 흑룡사의 대두목, 혈문룡(血紋龍)이 었던 것이다. 모래먼지를 막기 위해 온통 검은 천으로 감싸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의 형형한 광채는 마주 대하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대막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혹룡사의 일단(一團)이 전멸을 당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막은 넓고, 넓은 만큼 온갖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기는 땅이었다. 약탈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불의의 사태를 만나 길이 막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수하들은 쉽 게 죽을 자들은 아니었다. 적어도 대막에서만은 혹룡사는 무적(無敵)인 것이다. 최상의 말(馬)과 최상의 사나이들, 거기에 최상의 단련이 그 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그들은 돌아왔다, 그러나 하나같이 주인을 태우지 않은 말들만이었다. 흑룡사의 대원들에게 말은 제이(第二)의 생명이었다. 그들이 말을 놓쳤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지금 그가 가는 것이다. 사막이 가흑한 곳이지만 흑룡사를 죽일 정도로 가흑하진 않다. 그들은 사막 이외의 원인으로 죽은 것이다. 그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찾았다--!" 그들은 막 거대한 사구 하나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구의 정상에 선 자가 소리치고 있었다. 혈문룡은 애마 흑룡(黑龍)의 배를 걷어찼다. 혹룡은 거대한 사구의 사면(斜面)을 단숨에 넘어가 그 아래의 풍경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모래에 덮인 시체들의 모습을……! 혈문룡이 거기 사구의 정상에 서 있은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두 필의 말이 그에게 다가왔다. 시체를 살펴보고 온 두 명의 부두목이 탄 말이었다. 그 중 마른 편의 사내, 사괘(斜掛) 조오(曺五가 입을 열었다. "검(劍)에 당한 상처입니다. 깨끗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하게 잘려 있더군요!" 혈문룡의 눈이 더욱 빛났다. 그 눈에서 나온 광채가 그의 앞에 선 두 사람을 꿰뚫고 지나 가는 둣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른 한 명, 성난 황소(怒牛) 빌라가가 덧붙였다. "중원인(中原人)입니다." 간단한 분석이었다. 중원인, 한족(漢族)이 아니고는 이 대막에서 검을 쓰는 사람 은 없었다. 혈문룡이 무겁게 물었다. "추적할 수 있겠지?"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명령이라는 사실은 조오와 빌라 가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모래뿐인 사막이지만 거기에도 길이 있었다. 녹지(綠地)와 녹지를 연결하는 한 줄기 선, 그 선을 벗어나면 죽음이 그를 멈추게 할 때까지 헤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추적은 너무나 쉬울 수밖에 없었다. 단지 얼마나 빨리 잡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일 뿐이었다. 모래먼지가 다시 피어 올랐다. 사구에 누워 있는 시체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대막에서 죽으면 모래에 장례를 맡기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 을 뿐이었다. 그들의 복수가 살아 남은 자들의 의무인 것처럼! * * * 뜨거운 낮과 차가운 밤이 두 번 더 지났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고 모래언덕 위로 다시 달이 떴다. 야광충이 지옥성을 떠날 때보다 많이 이지러진 달, 그러나 여 전히 차가운 라을 뿌리는 파리한 달이었다 야광충의 모습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모래바람에 시달리고, 지둔술로 모래 속을 파고드느라 긁히고 찢어져야 옳았을 의복은 먼지에 더럽혀진 것만 빼면 처음과 같 이 완전했다. 표정 또한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사기(邪氣)를 풍기며, 온몸이 먼지에 뒤덮여 있으면서도 얼굴과 머리만은 여전히 말끔했다. 그의 은발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에 두 자 두 치의 보폭도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지난 이틀 밤도 그는 화의청년과 숨바꼭질 같은 대결을 계속 했었다. 어떤 때는 그가 이기고, 다른 때는 상대가 이기기도 했다. 이틀 전에는 화의 청년의 감시망(?)에 거의 걸려들지 않았었다. 귀영종 중에서 유령미종(幽靈迷踪)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면서 신형을 흐리는 신법이었다. 과연 화의청년은 그가 분명 뒤를 따르고 있음에도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젯밤은 화의청년의 승리였다. 야광충은 그의 감시에서 두 시진이나 헤매야 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화의청년은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야광충은 화의청년과 같이 있는 노인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방법을 가르쳐 주었음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要)는 어떤 방법을 썼느냐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진정한 원인은 자기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의소년이 그를 포착할 수 있다면 노인도 그를 포착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누군가도 그를 포착할 수 있 을 것이다. 지옥전에서는 그가 일부러 기운을 드러내어 못난 척을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의 종적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지옥전 안에 없었을까? 화의청년이 그를 포착했고, 또 그 시선에서 쉽게 빠져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은 야광충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여태껏 자만(自慢)한 것은 아닐까? 뭔가 그의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부의 말대로 도둑으로 일생을 끝맺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낮 동안 땅속에서, 그리고 다시 밤 동안에도 내내 그 생 각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요란하고 기기묘묘한 신법은 이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를 자연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몸을 감주는 신법도, 기이한 위력을 가진 어떤 내공심 법으로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鄭)나라에 호자(壺子)라는 선인이 있어 열자(列子)가 그 제자였다. 그는 천지의 기(氣)를 그 자신의 것으로 하며, 천지 이전의 모습까지 그 자신 속에 구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미시출오종(未始出五宗)이다. 사부가 귀영종 오대신법 중 최고의 경지라는 미시출오종을 전 수하며 알려 준 일화였다. --미시출오종은 음양(陰陽)이 아직 싹트기 이전의 태초(太 初)의 공허(空虛)를 말한다. 이것을 호자는 스스로 마음을 텅 비워 사물의 변화에 그대로 따라서, 누가 누군지의 분별을 잊고 풀잎이 바람에 쓰러지둣 물결의 흐름인 듯 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구결도 없고, 어떻게 한다는 수련방법도 없이 사부는 그것이 다, 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물론 나도 펼칠 수가 없지. 그냥 먼 옛날부터 그렇게 전해 내려왔기 때문에 나도 안 전해 줄 수는 없었던 것뿐이다. 아마도……. 사부는 머리를 외로 꼬고 한껏 고심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한때 그 말 때문에 몇 년을 허송한 적이 있었다. 그 말속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너도 그렇게 될까봐 알려 주지 않으려 했다만, 그것말고는 더 이상 가르쳐 줄 것도 없고, 네가 그 비밀을 밝힐 유일한 인재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에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고 한참을 더 고민하더니 사부는 띄엄띄엄 말했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계기(契機)가 있어야 비로소 알 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한 점을 전해 주고 싶지만 경지에 오르지 못한 바에야 네게 장애만 될 것이니 관 두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계기는 억지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 니 만큼……! 물론 그 후로 야광충은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거기서 얻은 것들을 신법에 응용해 많은 발 전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도 그 정화(精華)를 얻지는 않았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스러기에 불과한 정도의 성취일 것이다. 지금 화의청년과의 대결에서 가장 완벽하게 이기려면 아직 깨 닫지 못한 그 나머지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부님…….' 여기까지 생각하던 야광충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노인과 화의청년의 자취를 따라 한 사구 뒤로 돌아서자 불빛 이 보였던 것이다. 모닥불……! 야광충이 찾던 노인과 화의청년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모래 언덕 아래에 모닥불을 피우고 불가에 앉아 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야광충은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겨우 삼 경, 평소의 여정으로 보아 한참 가고 있을 시간 이었다. 그런데 불을 피우고 앉아 있다는 것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야광충은 불가에 다가가 노인과 화의청년을 양쪽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불을 중심으로 세 사람이 삼각형을 그리는 자리 형태였다. 노인이 물통을 집어 야광충에게 던져 주었다. 야광충은 왼손을 내밀어 물통을 받았다. 문득 노인의 눈이 빛났다. 언뜻 보인 야광충의 왼손에 보석으로 장식된 노리개 같은 물 건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인명권이었다. 야광충은 인명권을 지옥성을 나온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이 어떤 눈빛을 하든 야광충은 시선을 그대로 한 채 뚜껑 을 열었다. 주르륵--!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야광충은 물을 오른손에 낀 장갑에 붓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다시 눈을 빛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마시기에도 모자랄 생명 갈은 물을 장갑에 붓더니 야광충은 그 장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다. 오랜 기간 물을 마시지 않아 잔뜩 기갈이 든 상황에서 갑자기 마시는 물은 독보다도 위험하다. 그래서 사막에서 사람을 구출해도 천에 물을 적셔 입술을 적 시는 정도로 갈증을 해소시킨 뒤 소량의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하 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야광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갑을 적신 물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조금씩 물을 흘려 넣던 야광충은 물통 뚜껑을 닫아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노인도 그런 인사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물통을 받더니 한마디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야광충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뜨거운 열망과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노인의 눈살이 잠시 찌푸려졌다. 그는 이런 눈빛을 수없이 보았었다. 검을 내밀고, 혹은 휘두르며 그를 향해 다가오던……. 많은 자들의 눈빛이 바로 이런 투지에 불타는 눈라이었다. 흑 은 예의를 차려서 정중하게, 흑은 길가 풀섶에 숨었다가 느닷없 이 기습을 가해 오기도 했던 그들의 눈빛이 이렇게 호기심이 가 득한 눈빛이었다. 결국은 그의 검에 베여 발앞에 쓰러지던 많은 도전자들의 눈 빛을 지금 이 은발청년에게서도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눈빛을 한 자들의 종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노인이 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손아래에서 살아간 적이 없는 것이다. 그의 검은 단지 호기심으로 구경하기에는 너무 대가가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눈빛은 나타날 때처럼 그렇게 순간적으로 사 라졌다. 그는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투지를 삼키고 담담히 대답하고 있었다. "당신들의 길이 내 길과 겹쳤을 뿐이오!" 노인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이 은발의 청년은 그가 여태 보았던 도배(徒輩)들과는 달랐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과 검을 마주 대었다는 이름을 얻고자 하는, 명예욕에 눈이 뒤집혀 자신의 능력을 생각해 보지 않는 무리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위험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말을 뱉었다. "엽장청과는 어떤 사이냐?" 화의청년은 일순 자신의 옆에 고슴도치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지금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청년이 뿜어내는 살기는 그렇게 삼 엄한 것이었다. 빽빽히 꽂아 놓은 바늘을 만지는 둣한, 온몸의 털을 한 올 한 올 꼿꼿이 세운 표범 한 마리가 살기에 젖어 옆에 웅크리고 있 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 정도의 살벌한 느낌! 화의청년과는 달리 노인은 그저 태연한 안색으로 앉아 있었다. 야광충이 어쩨게 행동하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야광충은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침착을 되찾았다. 그가 엽장청의 이름을 듣고도 이 정도 반응만을 보인다는 자 체도 놀라운 일이었다. 사부조차도 모르는 일을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노인이 알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왼손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어떻게 자신과 엽장청을 연결시켰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물었다. "당신은?" 노인은 그를 보고, 또 그의 손에 있는 인명권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여문량이라는 이름을 엽장청이 말해 주지 않더냐?" 천산제일검(天山第一劍) 여문량(呂門亮)! 엽장청도 낀 천산오조의 하나, 삼십 년 전 한 자루 검으로 천 하를 질타했던 그 여문량이 바로 이 초라한 노인이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천산오조는 삼섭 년 전, 그들이 무림 최고수의 하나로 군림하 고 있을 때 이미 육십 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적어도 구십 세를 넘은 나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노인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쳐줘도 육십 이상 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가 여문량이 아니라면 어떻게 엽장청의 유물을 알아볼 것인가? 그리고 그 놀라운 검술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야광충은 믿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엽장청과의 관계를 짧게 설명했다. "이 물건온 그의 유물(遺物)이오!" 여문량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물이라 했으니 당연히 엽장청은 죽었을 것이다. 만약 이 청년이 그의 제자라면 엽장청을 '그'라고 부르지 않 았을 것이니 제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던 유물을 받은 것으로 보아 보통 사이도 역시 아닐 것이다. "그는 어떻게 죽었느냐?" 야광충은 잠시 침묵하며 적절한 대답을 골랐다. "로부 옹고트!" 여문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설명은 필요없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않고 앉아만 있었다. 잠시 후 야광충이 일어났다.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잘 곳을 찾아야 쌨다. 화의청년이 갑자기 일어나 그에게 물통 하나를 주었다. "나는 화영(華英)이라 부른다." 야광충은 그를 마주보았다. 화의청년의 얼굴에는 사심(邪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야광충은 그 얼굴을 보고 문득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화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내에게서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화영은 앞은 못 보고 있지만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 태도였던 것이다. 야광충은 물통을 받지 않고 뒤돌아섰다. 화영은 일순 실망한 둣한 표정이었으나, 잠시 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야광충이 사라지기 전에 한마디 했던 것이다. "나는 야광충!" 여문량과 화영도 길을 떠났다. 앞서간 야광충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영이 갑자기 물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억문량이 무거운 어조로 천천히 대답했다. "내 짐작대로라면……. 그러나 나는 보고 싶지 않구나!" "그가…… 싫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여문량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이번 길에 그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것 같아서다!" 그는 입에도 담기 싫은 이름을 억지로 말하는 느낌이었다. "로부 옹고트!" 여문량의 기분과는 반대로, 그러나 화영의 은근한 기대에 부 응해서 야광충은 그 다음날 밤에도 나타났다. 분명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한 방향인 모양이었다. 제7장 3월 25일, 고란고성(皐蘭古城) 그간에게 희망이 있듯이 사막에는 녹지(綠地)가 있다. 삶이 단지 고통의 연속이라면 살아 남을 자가 그 누구인가? 그렇둣이 사막이 단지 모래와 돌뿐이라면 사막은 단지 지옥에 불과하고 사막과 초지(草地)의 경계는 인간의 한계를 긋는 선이 되고 말리라. 그러나 인간에겐 살아 있는 이상 희망이 있고, 그래서 여기 대막에도 녹지가 있었다. 야광충이 지옥성을 떠난 지 십이 일째가 되는 밤. 여문량 일행과 그는 드디어 녹지에 도착했다. 그날 밤 이후로 다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한 일행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원래 대막은 모래사막이 절반이요, 나머지는 돌과 바위산만이 있는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거대한 사막의 모래구릉 아래로 한 줄기 지하수맥이 흐르 고, 기적과도 같이 지하수맥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 샘이 생 겨, 혹은 연못을 이루고 혹은 우물이 된다. 주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동물이 자라며 사람들이 모여 시장이 서고 도시를 이루는 것이다. 큰 녹지 주위로는 당연히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데, 이상하게 도 지금 여문량과 화영, 야광충이 도착한 녹지에는 사람의 모습 은 찾아볼 수 없고 야생동물들만 뛰어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삼십 년 전 이곳을 지날 때만 해도 여기에는 애크베르족(額伯爾族)이라는 유목민들이 큰 부락을 이루고 있었 는데……." 여문량이 이상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 이 중얼거리더니 낙타를 끌고 무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며 걸어 갔다. 야광충이나 화영이나 이곳에 처음 온 것은 마찬가지, 아무 말 없이 여문량의 뒤를 따랐다. 달은 이미 이지러져 미인의 아미(蛾眉) 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어 달빛도 밝지 않은 데다, 사방에 선 나무 그림자가 그늘을 드리워 숲은 희미한 윤곽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야광충과 화영에게는 밝으나 안 밝으나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사막의 녹지답지 않게 무성한 수풀, 그리고 울창한 나무 들이 이곳 녹지에 자라 있다는 것. 이젓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유목민들은 양(羊)을 방목한다. 양은 소나 말이 먹지 못하는 질긴 풀과 심지어 나무껍질까지 뜯어먹는 가공할 식성(食性)의 소유자. 양떼가 머물다 간 지대에는 풀뿌리와 껍질 벗겨진 나무들밖에 는 안 남는다. 그래서 양들이 방목되는 장소는 엄격히 제한되며 그 지역의 식물들을 씨까지 말리기 전에 필히 장소를 옮겨 줘야 한다. 그리고 이듬해 풀이 다시 나서 어느 정도 자라기 전에는 그 장 소에 다시 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그것은 양을 방목하지 않 은 지 오래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무성한 풀섶을 소리도 없이 헤치며 걷던 야광충이 문득 화영 에게 물었다. "왜 여기 왔지?" 반말이었다. 애초에 사부와 사형 이외의 사람에게 존대를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야광충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말이지만 그 질문은 사실 심각한 의미 를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대답 여하에 따라서 여문량과 화영, 이 두 사람을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여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야광충 그 자신의 목적지도 바로 여기 고란고성이었던 것이다. 그의 임무와 관계가 없다면 모르지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관 계가 있다면……! 야광충은 여문량이나 화영에게 유감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누군가를 용서할 만큼 자비 롭지도 않았다. "사부님을 따라왔지!" 화영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야광충의 긴장된 내심과는 어울리지 않게 허탈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다. 야광충은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화영은 모르는가 보군! 그럼 관건은 여문량인가……?' 화영은 알고 있었다. 야광충을 놀린 것이 재미있다는 둣 미소를 지으며 바로 말을 이은 것이다. "사부님은 누군가를 만나러 오셨고……." "누구?" 야광층은 약간 놀라서 바로 쫓아 물었다. "오래 전에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더군." 더 이상은 아는 것이 없는지 화영은 그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 었다. 야광충도 생각에 잠겨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란고성으로 가라! 종옥주의 명령이었다. --그곳은 십 년 전부터 벤야시리의 병영(兵營)이었던 곳이 다. 그런데 최근 그곳과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벤야시리가 사람도 여럿 보내 봤다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의 부탁으로 우리도 몇몇을 보냈었고, 그 중에는 고수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요컨대 고란고성이 사지(死地)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종옥주는 그럼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 원인을 조사해 와라! 그것만은 아닌 둣한데? 과연…… 총옥주는 한층 목소리를 낮추어 명령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곳의 보고(寶庫)에서……. 벤야시리는 현재 몽고 최강의 세력자였다. 북원(北元)의 마지막 황제 토쿠스테무르 이후, 몽고는 원나라 성립 이전의 부족시대로 돌아갔었다. 광활한 지역에 제멋대로 퍼져 사는 숱한 부족들을 다스릴 만한 힘이 사라진 것이다. 몽고족들은 과거 정복에 의해 큰 제국을 건설해 놓고도 그 정 치는 유목생활에서 얻은 수렵자의 사고방식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들은 정복한 토지와 백성들을 모두 수렵에서 얻은 물건처럼 취급하였다. 즉, 정복자의 사유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몽고족들의 최고지배자인 칸[汗]은 유력족장들의 집회인 쿠릴 타이에서 추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제한규 정이 있었다. 위대한 정복자가 나타나면 새로운 칸은 반드시 그의 혈통 가 운데에서 선출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칭기즈칸은 위대한 정복자였기 때문에 그 후의 몽고족의 칸은 반드시 칭기즈칸의 혈통에서 선출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조 쿠빌라이가 원제국을 세운 후 제위계승 때마다 후계자 문제로 심한 내분이 있었으나, 결국 황제로 선출 된 후보자는 항상 세조의 혈통에서 나왔다. 이것은 세조의 대정복으로 원제국을 세웠으므로 원제국은 당 연히 세조의 사유물이라는 몽고족의 사고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었다. 이제 몽고가 칭기즈란 이전의 부족시대로 돌아간 상태에서 몽 고족들은 또 하나의 위대한 정복자의 도래를 맞고 있었다. 그가 바로 벤야시리였다. 그는 천재적인 교활함과 그에 못지않은 흉폭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몽고고원 북서쪽의 강국 사마르칸드의 왕 티무르에게서 군사를 빌려 달단부의 여러 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 정복한 부족들의 힘으로 다시 사마르칸드 군대를 몰아내었던 것이다. 원래 영토도 없고, 병력조차 제대로 없던 그는 이제 달단 최 고의 세력가가 되었다. 그 휘하의 세력 중 하나가 바로 고란고성의 애크베르족이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지옥성과 벤야시리가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옥성이 어쨌든 또 총옥주가 뭐라고 했든 그는 사부를 위해서 일하는 것뿐이었다. 그 외의 일은 그가 알 바가 아닌 것이다 화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문량이 정말 누군가를 만나러 왔 다면 이런 때를 고른 것이 불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고란고성이 사지로 변한 지금 갈은 때에……. "해골!" 야광충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화영이 방금 자신의 발에 걸려 소리를 낸 물건을 가리켜 보였다. '정말 앞을 못 보는 것일까?' 화영은 맹인이었지만 청각과 후각 같은 다른 감각에 있어서는 범인의 몇 배에 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거기에 신비한 또 하나의 감각 같은 것이 있어 눈이 보이는 사람보다 주위 경관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서 정말 맹인인지 야 광충이 미심쩍어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도 단지 발끝에 걸리는 감각과 소리만으로 그 물건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그 해골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말고도 많이 있어." 수풀 속으로 한걸음 들여놓자마자 그들이 본 것은 무수한 해 골의 밭이었다. 수풀 속에는 여기저기 사람의 뼈들이 뒹굴고 있 었던 것이다. 굳이 그 해골 하나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 일은 없는 것이다. 화영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작위(作爲)적인 것이 아니라 주위를 밝아지 게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밝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나도 알지만 이 해골은 조금 이상해서……!" 야광충은 발을 내밀어 그 해골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뭐가……?"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건드리는 순간에 그도 화영이 의 문스럽게 생각한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해골을 집어 들었다. 겉보기에는 다른 해골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화영이 조용히 말했다. "너무 무거워……, 습기가 찬 것일까?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데 그것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럼 체 액(體液)이 마르기도 전에 왜 해골이 된 것일까?" 사람이 죽어 해골이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다. 동물이 시신을 뜯어먹거나, 곤충들이 개입했다 해도 골수에 스며들어 있던 체액이 마르기도 전에 해골이 될 정도로 빠르지 는 않다. 화영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야광충이 그 와문점들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짐승이 먹지는 않았다. 이빨자국이 없어! 죽은 것은 최근이 다. 아마도 이삼 일(二三日) 이내……? 약간의 중독 흔적이 있 다. 해골이 변색했어. 그렇게 보면…… 죽은 원인은 증독(中毒) 이다. 그러나 육탈(肉脫;살이 썩어 뼈를 드러내는 것)이 빨리 진행된 것에는 다른 원인이 있다!" 야광충은 해골을 던져 버렸다. 그는 해골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잇엊다. 해골이 있던 곳에 버려 져 있는 금속조각 속에 지옥성의 영패(令牌)가 있었던 것이다. 금검제삼령(金劍弟三令)! 아마도 금검령의 제삼 영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야광충보다 먼저 보내졌던 지옥성의 사자(使者) 중 하나일 것 이다.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 그것에 이 고란고성의 비밀이 걸려 있 었다. 그러나 직접 보지 않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옷가지조차 남기지 않는 그 괴물의 정체를……! 야광충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화영이 그 뒤를 따랐다. 야광충과 화영이 수풀을 헤치고 나온 곳은 무너진 성터였다. 이 모래뿐인 사막 어디에서 저렇게 거대한 바위들을 구했을까? 제법 웅장했을 고성(古城)은 무너져 내린 성벽과 군데군데 기 둥만 솟은 자리가 있긴 했지만 아직 옛모습을 간직한 석전(石 殿)도 제법 남아 있었다. 여문량은 원래는 대전이었을 성싶은 석전의 기둥을 쓰다듬으 며 추억에 잠긴 모습이었다. 야광충과 화영이 다가가자 여문량은 상념에서 깨어나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수백 년 전 고란국(皐蘭國)이라는 소왕국이 있던 곳 이다. 내가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애크베르족이 억기서 살고 있 었지. 이곳을 지나는 대상과 나그네들도 이 고성 이곳저곳에 자 리를 잡고 쉬곤 했었다." "그 후에는 몽고군이 여기 주둔했죠!" 야광충이 무심하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도 수풀 속과 마찬가지로 억기저기 해골들이 널려 달빛 아래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마 십 년쯤……?" 여문량은 야광충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야광충이 짚이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당신이 만나려는 사람이 여기 살았소?" "아니다!" 여문량은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삼십 년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니 어쩌면 여기 살았을지도 모르겠군! 왜 그건 묻느냐?" 야광충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질문했다. "그도 천산오수(天山五獸)의 하나요?" "천산오……수?" 여문량의 눈살이 잠시 찌푸려졌다. 그러나 화는 내지 않고 이 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천산오수 천산의 다섯 마리 짐승 중 하나지! 엽 장청이 그러더냐?" 야광충은 역시 대답은 않고 질문만 했다. "몰면목? 귀조? 설마 로부 옹고트는 아니겠지요?" "왜 그는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여문량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야광충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치금 엽장청을 뺀 천산오조가 여기 다 모인다고 말하는 것이오?" 여문량이 손가락을 펴 그를 가리켰다. "엽장청 대신 네가 있지 않으냐?" 야광충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안색을 숨겼다. 그때, 화영이 고성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들은 화영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귀가 밝기로는 화영을 따를 사람이 없다. "가 보자!" 여문량이 몸을 날렸다. 야광충이 그 뒤를 따르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나는 다른 일로 왔소!" 여문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서도 여문량이 딛고 뛰는 돌들을 정확하게 따라 밟으며 따라오 고 있었다. "저 뒤에 숨은 사람도 그 일로 온 것일까?" 야광충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화영은 지금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언제부터지?" "널 만난 첫날부터 이상한 느낌은 있었지. 그러나 명확하게 보인 것은 조금 전부터야!" 야광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전에는 안 보이던 자가 그를 만나면서부터 보였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일까? 천산오조가 모이는 자리에 여문량과 관계가 있는 그가 오게 되 었다는 것, 그것도 시간을 맞춰서 오게 되었다는 것이 우연일까? 더 나아가서 마침 이때, 이 장소를 골라서 총옥주가 그를 보 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것인가? 하필 이 시기에 이곳이 사지(死地)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일이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 끼고 있었다. 고성의 무너진 성벽(城壁)이 보였다. 야광충은 거대한 사각형의 바위 모서리를 라고 뛰어올랐다. 단숨에 성벽을 넘어가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여문량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내려앉아라!"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귀에 들리지 않고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든 것으로 보 고도의 전음술(傳音術)을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야광층은 공중에 뜬 그 자세 그대로 한 바퀴 맴을 돌더니 비 스듬히 내려앉았다. 옷깃 휘날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쾌속한 신법이었다. 여문량이 돌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법이군! 소리를 내지도 않고!" 역시 전음술이었다. 야광충은 고개를 돌려 성밖을 바라보며 역시 전음술로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면 전음술을 사용할 리가 없으니까!" 여문량이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을 칭찬한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들이 숨은 성벽 저 너머에 펼쳐진 풍경이 응변적으로 그것 을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우--웅--! 귀가 아플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 그것은 커다란 공을 반으로 쪼개 놓은 것처럼 보였다. 높이가 이 장은 넘을 둣한 반구(半球)가 성벽 너머 푸른 초원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야광층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밤이라 단지 검게만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이 붉은색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수없이 많은 곤충들이 그렇게 둥글게 모여서 만든 공이라는 것도……. 그 곤중들은 맹렬히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야광충은 자기도 모르게 몽고어로 말했다. "이라가 쿠케 투루!" 여문량이 그를 힐끔 보았다. "그래, 몽고족은 그렇게 부르지 독파리, 정확하게는 견혼승 망(牽魂蠅 )이라고 하는 괴물이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화영이 전음으로 물었다. "저 파리들이 해골을 만든 원인일까요?" "아마도……!" 여문량은 침중한 낯빛을 하고 말했다. "저 괴물들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견혼승망!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리는 아니다. 원래는 가축에 붙어 피를 빠는 등에에 가까운 벌레들! 그러나 어느쪽이든 끔찍한 놈들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름 그대로, 물기만 하면 생존의 가능성이란 전혀 없는 극독 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쓰러진 시체에 독액(毒液)을 뿜어내어 뼈를 제외한 모 든 것을 녹여 버리고 그 녹은 진액을 빨아먹는 것이다. 야광충은 이해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둣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여문량이 그를 보았다. "뭐가 말이냐?" "숲에 야생동물들이 살아 남아 있다는 것!" 견혼승망이 지나가는 곳에는 살아 있는 동물은 남지를 않는다. 곤충이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녹여 버려 하이얀 백골만이 앙상하게 뒹구는 것이 보통인데……. 여문량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신음했다. "인간만 선택적으로 공격했단 말인가?" 화영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귀가 남달리 예민한 그는 견혼승망들이 내는 소리가 몹시 괴 로운 모양이었다. "저 시끄러운 소음 가운데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증거가 될 까요?" 야광충의 눈이 더 가늘고, 날카로워졌다. 그는 견혼승망들이 만든 붉은 공 같은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 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여태 공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도 되지!" 견혼승망들은 지금 그냥 뭉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만든 붉은 공의 중심에는 누군가가 공격을 받고 있 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여문량이 나직이 물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증거는?" 야광충이 대답했다. "죽었다면 벌써 백골만 남았지, 견혼승망이 이렇게 오래 끌 리가 없으니까!" 화영이 덧붙였다.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알아듣기 힘든데……, 아마도 염불 소리?" "염불?" 여문량은 터무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견흔승망들의 공격을 받는 속에 염불이라니? 그는 뭔가 말하 려는 둣 입을 벌렸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까르릉--! 취리리릿--! 바로 그때, 귀청이 터질 둣 우렁찬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잇달아 공기를 찢어발기는 괴성(怪聲),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달빛에 비친 무너진 성벽의 그림자 위로 교차되었다. * * * 그는 석전의 기둥 위, 대들보와 교차하는 지점에 엎드려 있었다. 지난 십이 일은 그야말로 고역의 행로였다. 열사(熱沙)의 사막을 지나오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미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야광충이라는 머리카락 하얀 녀석도 민감한 편이라 장장 백여 장을 사이에 두고 뒤를 따랐는데, 혹룡사를 도륙낸 노인과 청년 을 만난 후에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는 둣한 기분나쁜 느낌! 그 느낌은 그가 어디에 숨어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떤 은신술을 사용해도, 모래 속에 깊이 파고들어도 사라지 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는 주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흔적을 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지금 갈은 경우가 아니라 순수하게 누군가를 주적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면 그는 이 시점에서 실패를 자인(自認)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 최초의 실패를……! 다행히 최종목직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미행에는 실패했지만 결국은 그의 손안에 목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 여기까지 와야 했다. 그래서 지금 혈지주, 그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야광충이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조사대들은 모두 그가 지금 있는 곳까지도 와 보지 못 했던 것들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안에 들어오지 않았 는가? '견혼승망들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을 수 있었던 것이짓지…….' 그렇다고 해도 역시 운이 좋은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달짞;퓾에 비친 돌그림자인가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움직이자 그는 두 눈올 크게 떠야 했다. 고란고성, 이곳은 확실히 사지에 가까운 곳이었던 모양이다. '저런 거대한 괴물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다니……?' 게다가 그도 저렇게 가까이까지는 다가가 본 적이 없는 거리 를 들키지도 않고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재미있겠군!' 혈지주는 붉게 충혈된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길이가 일 장 반에 달하는 검은 표범이 야광충 일행의 뒤로 다가가는 모습을, 그리고 고슴도치의 털처럼 표범의 털이 꼿꼿 이 곤두서고, 하얗게 빛나는 이빨과 발톱이 하나하나 달빛을 받 아 번뜩이는 모습을……! * * * 야광충은 공중에 높이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서 인명권이 맹렬한 소음을 내며 튀어나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고, 소음까지 일으키면 견혼승망들의 직접적인 목표가 된다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여태까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강한 살기와 대 면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 위협감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거대한 검은 표범 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거대한 맹수와는 처음 대면하는 그로서는 놀라 움이 더할 뿐이었다. 더구나 그 표범이 바위를 찍고 뛰어오르며 인명권을 발길로 쳐낼 줄은……! 야광충은 최초의 장소에서 십여 장은 떨어진 바위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바로 그 자리에 표범이 발톱을 곤두세운 채 내려앉고 있었다. 취치릿--! 야광충의 왼손에서 보광(寶光)이 뻗쳐갔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다시 인명권을 날린 것이다. 검은 표범이 몸을 뒤틀었다. 팡--! 인명권은 표범의 어깨 부위를 스치고 바위에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부우--우--우! 야팡충은 공중에서 맴을 돌아 다른 바위 위로 내려앉으며 이 괴상한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홀낏 시선을 주었다. 그의 안색이 잠시 창백해졌다. 붉은 공이 깨어지고 있었다. 모여 있던 견혼승망들이 야광충의 존재를 알고 날아오르고 있 는 것이다. 카앙--! 눈앞이 검은 그림자로 가득 찼다. 그 검은 그림자의 중심에 있는 붉고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표범의 딱 벌어진 아가리와 파랗게 불타는 눈이었다. 어딘지 야광충의 눈과 비슷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 검은 표범은 두 앞발을 앞으로 하고 직선으로 그에게 덮쳐들 고 있었다. * * * --무공(武功)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부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나는 자연(自然)을 흉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에게만 특유한 것이다. 자연을 흉내낸 가장 대표적인 무공이 권법(拳法)이었다. 용의 조화무쌍함과 범의 강한 아가리, 뱀의 빠른 진퇴(進退) 와 학의 완벽한 수비자세(守備姿勢)를, 그리고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을 흉내내어 권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에게만 특유한 동작들이 권법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이 솔각( 角;씨름의 일종)과 금나(擒拿)였다. --우리 귀영문의 대표적인 무공인 조화십삼수(造化十三手)는 금나술이니 후자의 분류에 들어가는 무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느쪽이 더 좋다 나쁘다는 말하기 힘든 일이다. 대체로 전자가 강하고 빠르지만 단순한 반면에 후자는 변화가 많고 인간의 동작구조에 적합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 * * 야광충은 눈앞으로 닥쳐드는 표범의 검은 그림자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거대한 두 앞발, 다섯 치도 넘을 둣한 긴 발 톱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예를 들어 표범의 공격은 강하고 빠르다. 고양이가 물건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두 앞발은 타동물에 비 해서 자유롭게 좌우로 움직인다. 그 앞발로 후려치면 황소도 두 개골이 부서지고, 운좋게 피한다 해도 걸리는 대로 찢어지고 갈 라져 버린다. 야광충은 제자리에서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쐐액--! 표범의 앞발이 야광충의 얼굴과 가슴팍을 종잇장 하나 차이로 스쳐지나갔다. 아래위로 크게 벌려진 표범의 붉은 아가리가 야광충의 머리를 물어 왔다. 그러나 이미 야광충의 머리는 땅을 향해 있고, 발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문제는 표범의 공격이 단순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표범 은 앞발로 치고, 이빨로 물어뜯고, 마지막으로 뒷발로 할퀴는 세 가지의 공격을 반복할 뿐이다. 첫번째 공격이 빗나가면 마지 막까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퍼억--! 야광충의 발끝이 표범의 배에 박혀들었다. 순간 표범은 공중 으로 세 자는 더 튀어 올라갔다. 까르릉--! 표범의 거친 포효가 숲을 혼들었다. 야광충의 왼손이 표범을 향해 뻗었다. 치리릿--! 달라에 비친 보광이 공중에 뜬 표범의 목을 감았다. 야광충은 몸을 옆으로 크게 돌리며 인명권을 잡아당겻다. 놀랍게도 거대한 표범의 몸이 삼 장 너머로 날아가 숲 가장자 리에 선 나무에 부딪쳐 뒹굴었다. 부우우우--! 달빛이 어두워졌다. 표범과 싸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견혼승망들이 야광충의 머 리위로 모여 맴을 돌고 있었다. 마치 덮치기 전에 입맛을 다시 는 둣한 오습이었다. 공처럼 뭉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흩어져서 날기 시작하자 어 마어마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견혼승망들은 마치 구름처럼 퍼져서 야광충의 머리위를 덮고 있었다. 저 많은 견혼승망 중 단 한 마리에게라도, 그리고 단 한번이 라도 물리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야광층은 잠시 인상을 썼다. 어느새 화영이 그의 옆에 서서 장검을 꺼내들고 있었다. 화영은 편안한 안색을 유지한 채 계속 말을 했다. 화롯가에 앉아 옛날이야기라도 하는 둣 된안한 목소리였다. "검올 휘두르면 빗방울도 뚫지 못했다더군. 또 어떤 사람은 일부러 몸에 똥을 바르고 날아드는 파리들을 베어 버리는 연습 도 했다는 거야. 난 예전부터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지!" 야광충은 묵묵히 섰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고수들에게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화영은 미소를 지었다. "난 고수로 안 보이나?" 부우우웅--! 견혼승망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카--앙--! 검은 공이 튀어 오르둣 표범이 뛰어올랐다. 놈은 견혼승망의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견혼승망들의 구름을 뚫고 덮쳐들고 있는 것이다. 두 눈에서 는 귀화(鬼火)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푸른 불길을 내뿜으 며……! 제8장 같은 날, 같은 장소 끼--히히힝--! 말들이 요란스럽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었다. 모래먼지가 밤하늘 아래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 먼지를 뚫 고 두 필의 기마가 앞으로 나섰다. "웬 놈이냐?" 묻기는 사괘 조오가 물었지만 공격은 성난 황소 빌라가가 먼 저였다. 애초에 빌라가에게 문답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백 근(百斤)은 넘게 나갈 것 같은 청룡도(靑龍刀)를 휘두 르며 앞으로 말을 달렸다. 그들 혹룡사의 길을 막은 흑포(黑袍)의 사내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죽어랏--!" 겨울 267 서슬 시퍼런 청룡도가 사내를 향해 휘둘러졌다. 혹포의 사내,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삼십대의 사 내가 손을 들어 그 청룡도를 막아 갔다. 조오는 실소를 터뜨렸다. "미친놈!" '자기가 무슨 금강불괴(金剛不壞)라도 된단 말인가.'라는 말 은 채 나오지도 뭇하고 입속에서 맴돌았다. 사내의 손과 부딪친 청룡도가 반 토막으로 부러져 나가는 모 습을 두 눈으로 보고서는 무슨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빌라가는 직접 겪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일 단은 할 수 있는 공격은 다 해봐야 했다. 일단은 대적한 상대를 죽여야 방금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를 생각해 볼 시간이 있을 것이었다. 그는 남은 청룡도 반 토막으로 사내의 정수리를 베어 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내는 아직도 그저 손만 내민 채 움 직이지 않고 있었다. 까--앙--! 강철로 만들어진 청룡도의 자루가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빌라가는 그 진동으로 호구가 찢어졌으면서도 끝끝내 청룡도 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놓을 시간조차 없었는지 오른다. 사내의 반대편 손이 휘둘러져 말의 머리를 부수고, 그의 허리를 반 넘게 베어 버리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빌라가는 갈라진 배로 내장을 쏟으며 모래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조오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는 놈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그보다 사내의 터무니없는 강함이 그를 주눅들게 했다. 사내는 천천히 걸어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조오는 억지로 입을 벌려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사내의 대답은 그를 향해 일권을 내뻗는 것으로 대신되었다. 조오는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끼히히힝--! 말이 두 발로 일어나며 크게 울부짖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 2지만 덕분에 말은 살 수가 있었다. 사내의 주먹이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비켜라, 조오!" 조오의 머리위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조오는 본눙적으로 말고삐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말은 쓰러질 둣 뒤로 물러섰다. 까앙--! "저럴 수가!" 조오는 절로 경호성을 터뜨렸다. 사람의 팔과 칼이 부딪쳤는데 어떻게 저런 쇳소리가 난단 말 인가? 깡--! 깡--! 까앙--! 그러나 그런 소리는 연속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혈문룡이 반월처럼 휘어진 칼, 그의 독문병기인 반룡도(半龍 刀)를 휘둘러 사내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오가 알기로 반룡도는 쇠를 두부처럼 가르는 보도(寶刀)였다. 그들 혹룡사가 탈취한 물건들 중 대두목 혈문룡이 마음에 들 어해서 자기의 것으로 한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는데……! 놀랍게도 사내는 그런 보도에 연속으로 베이면서도 견디고 있 는 것이다. '저놈은 정말 금강불괴인가?' 그렇게 옆에서 보는 조오가 더 질릴 지경인데 혈문룡은 지친 기색도 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 사내가 반룡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 다. 혈문룡이 휘두를 때마다 미세하게나마 상처는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어진 살갗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이놈이 정말 괴물인가?' 혈문룡은 문득 뱃속에서부터 오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연속으로 세 번 칼을 휘둘러 사내를 베어 갔다. 파--파--팟--! 사내의 아랫배, 가슴, 목에 칼집이 생겼다. 사내는 비틀,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이 타격을 받아 서가 아니라 칼 휘두르는 힘에 밀린 것이라는 것을 혈문룡은 알 고 있었타.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혈문룡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러 오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뒤로 미끄러지둣 물러섰다. 사내가 그를 쫓아서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좋다, 제대로 죽여 주지!" 말과 함께 혈문룡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반룡도는 손잡이에는 용두상(龍頭像)이 새겨져 있고, 호 수구(護手俱)는 용의 앞발로, 그리고 칼등을 따라서는 용의 등 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칼등의 용 조각을 잡은 기묘한 자세로 사내를 베어 갔다. 이런 자세로는 제속도가 날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행 동이었다. 과연 사내가 마주 덮쳐들며 손을 내밀어 칼날을 잡아 갔다. 챵--! 순간 혈문룡이 몸을 크게 숙여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물론 반룡도를 잡은 채였다. 반룡도는 그의 동작을 따라 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칼날에 수직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칼날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단단한 나무를 자를 때 수직 방향으로 그냥 때리면 칼날이 망 가지지만 칼날 방향으로 밀면 쉽게 잘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칼이 사내의 손을 미끄러지면서 빠져 나가고, 손가락이 잘려져 나갔다. 혈문룡은 어느새 한 바퀴 돌아서 사내의 목에 칼날을 대고 있 었다. 혈문룡은 나직하게 말했다. "잘 가라, 괴물!" 혈문룡이 제자리에서 옆으로 한 바퀴 회전하고, 사내의 목이 허공에 떴다. 여전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조오가 희색을 지었다 "역시, 대두목님은……!" 그는 다시 한번 말을 맺지 못했다. 그들 앞에 펼쳐진 고란고성의 숲에서 아까의 사내와 똑같이 생긴 사내 네 명이 더 나오고 잇는 것이다. 혈문룡도 이때 그 모습을 뽀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산은 뻔했다. 그 자신 이외의 수하 누구도 저 괴물들을 이 길 수 없었다. '물러가야 할 것인가?' 그의 인생 최초로 후퇴를 할 것인가? 그것도 불가능했다. 멀리 그들의 뒤에서 먼지구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몽고군이다!" 과연 조금 후,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지평선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몽고군의 대군단(大軍團)이었다. 혈문룡은 이를 갈았다. 하필 이 시점에 여기에서 이런 괴물을 만나고, 뒤로는 몽고군 이 등장한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우선은 살고 봐야 했다. 그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성으로 돌입(突入)이다!" 살아서 숲으로 들어간 흑룡기사의 수는 처음의 절반에 조금 못미쳤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몽고군의 대군단이 멈추어 섰다. 여기저기 말과 사람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래밭 위로 열여섯 명의 장한이 드는 거대한 가마가 와서 섰다. 휘장이 열리고 손 하나가 나왔다. 말을 타고 가마를 따르던 몽고군의 장군 하나가 그 옆으로 붙 었다. "저걸 가져와라!" 손이 가리키는 것은 흑룡기사들의 시체 사이에 있는 괴물, 사 내의 시체였다. 몽고군 서넛이 달려가 시체조각들을 들고 왔다. 시체는 두 사람 분이었다. 혈문룡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 나를 더 죽였던 것이다. 휘장 안에 있는 사람은 잠시 그것들을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휘장이 다시 닫히고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역시 실험작이라 부족한 점이 많군!" 가마 안에는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 리가 그 말에 대답쌨다. "강도(强度)만이 아니라 속도와 동작의 원활함에 있어서도 이 것들은 진짜의 상대가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실험작이니까 말 쏨입니다. 하지만 실험작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당한 것을 보면 저놈도 보통은 아니군요!" "여기 데려온 것은?" "여기 부서진 것들 말고 실험작이 여덟, 제대로 된 것이 하 나, 저기 저 녀석입니다." 휘장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마차를 따르는 한 사내를 가리켰다. 역시 가면을 쓴 둣 무표정한 얼굴의 혹포사내였다. * * * 금광(金光)이 번뜩였다. 달도 지고, 이제는 어두운 암청색이던 하늘이 잠시 밝아졌다. 검을 휘둘러 견혼승망들을 막던 화영은 보지 못하니 상관이 없었지만, 일면 검은 표범을 경계하며 손을 휘둘러 그에게 날아 드는 견혼승망들을 잡아죽이던 야광충은 눈살을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것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무슨 일이지?" 주위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낀 화영이 물었다. 야광충은 금광이 퍼져 나온 곳에 시선을 주며 담담하게 대꾸 했다. "파리떼들의 원래 목표가 잠에서 깬 것 같군!" 거기 한 사람이 있었다. 온몸에서 금광을 내뿜는 라마승이었다. 그는 눈을 반쫌 뜨고 가부좌를 튼 자세로 바닥에서 일 장쫌 허공에 떠 있었다. 견혼승망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떠밀린 듯 라마승에 게서 다섯 자 이내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 버틸 수 있었나?" 야광충이 중얼거리며 왼손에 들고 있던 인명권으로 허공에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치리리잇--! 견혼승망들이 세 자쫌 그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들었다. 화영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까 전부터 신경에 거슬리더군!" 야광충은 인명권의 줄을 더욱 길게 잡고 아까보다 더 큰 원을 그려 화영까지 그 세력권에 넣었다. "듣기 싫어도 참는 수밖에, 벌레들도 싫어하는 모양이니까!" 아까 전부터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화영이,잠시 손을 식었다. "그럴까……?" 여문량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의 검술도 상승(上乘)경지에 있 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위 빗방울도 뚫지 못한다는 천막밀밀(天幕 密密)의 경지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야광충은 대답 대신 인명권으로 허공에 더욱 큰 원을 그렸다. 취리리리릿--! 귀청을 찢을 둣한 소음이 허공에 퍼지고 았었다. 금광을 뿜어내던 라마승이 눈을 완전히 떴다. 그는 두 손을 천천히 벌리더니 다시 천천히 마주쳤다. 쾅--! 그의 손 가운데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견혼승망들이 분분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화영이 소리쳤다. "잠깐! 차이가 있다!" 라마승이 다시 한번 손을 마주치려다가 멈추었다. 야광충이 화영을 보았다. 화영은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평소와 같이 느릿한 어조로 말 하고 있었다. "저 스님의 손뼉 소리에는 벌레들이 싫어서 날아갔지만, 네 장난감 소리는 벌레들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군!" 라마승이 다시 손바닥을 마주쳤다. 쾅--! 그들을 노리고 내려오던 견흔승망들이 다시 분분히 흩어졌다. 야광충이 인명권을 휘둘렀다. 취리리리리--! 화영이 미소지었다. "벌레들이 소리를 따라가는 것 같지 않아?" 사실이었다. 견흔승망들은 인명권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서 원을 그리고 있 었다. "하지만 이 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놈도 있군!" 검은 표범이 그에게 덮쳐오고 있었다. 인명권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바꾸더니 표범의 머 리를 내리쳐 갔다. 표범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인명전은 표범의 어깨를 후 려켰다. 피가 튀었다. 화영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 고양이는 내가 맡을 테니, 벌레들이나 어디로 데려가 줘!" 야광충이 인명권을 휘두르며 뛰어을랐다. "적당한 곳을 알고 있지!" 견혼승망들이 그의 뒤를 따라 구름처럼 몰려갔다. 혈지주는 한 줄기 붉은 그림자가 되어 허공에 치솟았다. "죽일놈!" 인명권이 그가 숨었던 기둥에 부딪쳐 오고 있었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인명권의 뒤를 따라 견흔승망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 이었다. 혈지주는 파리먹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허 공에서 몸을 뒤틀더니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견혼승망들이 맴돌았다. 그러나 혈지주가 파리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야광충의 눈 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취리리릿--! 인명권이 직선으로 뻗어 나가 바닥의 바위 하나를 때렸다. "두고 보자!" 인명권이 닿기 직전 바위에서 붉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석전으 로 뛰쳐들어갔다. 혈지주였다. 그 뒤로 견혼승망들이 몰려갔다. * * * 혈문룡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가장 분노했을 때 그런 미소를 보였다. 확실히 지금이 그가 분노해도 좋을 때라는 것은 분명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들을 밖에서 둘, 다시 숲으로 들어와 둘을 처치했을 때, 그에게 남은 수하는 서른이 겨우 넘었다. 나 머지는 그 괴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찢겨 죽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괴물 둘을 만난 것이다. 그는 둥뒤에 선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조오는 피투성이였다. 그나마 그가 하나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쉽게 죽일 수가 있 었던 것이다. "조오 내가 하날 죽일 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조오는 눈을 번뜩였다. "나머지 하나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혈문룡은 웃었다. "그래,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반룡도를 잡고 앞으로 뛰쳐나갔 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나를 처치하는 것이 수하들을 덜 죽이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조오는 혈문룡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앞서 네 개의 괴물들을 없앨 때 혈문룡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 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하나를 그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대두목의 목숨 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는 그들이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휘둘렀다. "공격!" 그의 뒤에서 혹룡기사 네 명이 창을 앞으로 하고 튀어나갔다. 괴물이 손을 젓자 그 중 두 명이 머리가 부서져 튀어나왔다. 조오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공격!" 다시 네 명의 흑룡기사들이 덮쳐갔다. 조오는 연달아 손을 혼들고 있었다. "공격, 공격!" 살아 남은 흑룡기사 전원이 괴물에게 엉겨붙었다. 괴물의 주 위로 살과 피가 튀었다, 마지막은 조오,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기인 사괘, 두 자루 굵은 송곳처럼 생긴 무기 를 들고 괴물의 머리위로 뛰어올라갔다. 괴물을 둘러싼 혹룡기사들을 뚫고 피에 젖은 손이 튀어나왔다. 조오는 뱃속 깊이에서부터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괴물의 손에 배를 꿰뚫린 채 두 자루 송곳을 치켜 들었다. 이대로 그냥 죽어서는 개죽음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괴물의 얼굴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다. 괴물은 그를 던져 버리려 하고 있었다. 조오는 흔신의 힘을 다해 두 자루의 사괘를 괴물의 귀에 찔러 넣었다. * * * "당신은?" 라마승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금광이 걷혔다. 아마도 금광은 그가 특수한 공력 을 운기했을 때만 뿜어지는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벌려 말했다. 그러나 화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응?" 라마승이 다시 말했다. 화영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때 야광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게나그라 라마, 즉 황룡라마(黃龍喇 ) 라고 말하고 있군! 서장어(西藏語)로……!" 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모르지! 난 서장어는 들어 본 적도 없어!" 야광충은 라마승을 보았다. 그는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살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큰 코에 깊이 들어간 눈, 그리고 눈동자의 색이 묘하게도 파 란색이었다. 그는 서장인도 아닌 것이다. 라마승이 다시 서장어로 뭐라 말했다. 야광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서장어로 말했다. 라마승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뒤에 있는 석전을 가리켰다.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마승은 석전을 향해 걸음을 을겼다. 화영은 그가 석전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 야광충에 게 물었다. "그가 누구지?" 야광충은 짧게 대답했다. "지옥삼룡(地獄三龍)중 하나!" 화영은 지옥삼룡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 았다. 야광층이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 문이었다. 사실은 야광충도 잘 몰랐다. 그도 사형 주개의 입을 통해서 지옥성에 떠도는 소문만 들었 을 뿐이었다. 총옥주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지옥성 최고의 고수들, 그들이 바로 지옥의 세 마리 용이었다. 신비에 가려진 인물인 지옥성주(地獄城主)의 직속부하라고만 알려졌는데, 개개인의 무공이 각 옥주는 물론 총옥주도 능가한 다는 소문이었다. 그 중 하나가 여기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야광충과 같은 임무를 띠고……! 그는 석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영이 그를 따랐다. 야광충이 문득 물었다. "표범은?" "도망갔어!" 잠시 후, 야광충이 다시 물었다. "어딜 가는 거냐?" "사부님을 찾아서!"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여문량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네 사부님은……?" "우리가 가는 곳!" 화영은 석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제1권 끝 > 제 1 부 제 2 권 봄 편 제9장 다음날 아침, 고란고성(皐蘭古城) 지하 사막에 지어진 집은, 왕궁이든 빈민의 집이든 지하(地下)가 유용하게 쓰인다. 지하는 지상과 달리 태양의 영향을 적게 받아 비교적 시원하 기 때문이다. 고란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광충은 그 고란고성의 지하통로를 걷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하는 어두웠다. 여기는 지옥성 무간지옥과는 달리 흐린 등불빛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야광충과 화영에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대낮에 거리를 걷는 것처럼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화영이 갑자기 말했다. '발짝소리가 들리는군!' 언제나 그렇둣이 야광충은 소리없이 걷고 있었다. 묘하게도 화영의 걸음걸이 역시 소리가 없었다. 아마도 귀에 감각의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화영으로서는 자 신이 내는 소리를 최대한 억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소리는 무엇일까? 화영이 말했다. "사부님은 아니야!" "그럼 적(敵)이군!" 야광충이 손에 쥔 인명권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화영은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냉정한 친구는 지나치게 살기가 짙은 면이 있지만, 그가 살아온 환경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기자신 이외의 모두가 적이거나, 적이 될 가능 성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발짝소리가 점점 커졌다. 누군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자가 발짝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그자는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걸을 때 내는 소리보다 오히려 큰 소리가 들려 오호 있는 것이다. '만약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이 아니라면 몸무게가 삼 백 근은 넘을 거야!' 직각으로 여진 복도 저편에서 나타난 사람은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삼백 근이 넘는 체구도 아 니었다. 그는 크다기보다는 오히려 호리호리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한 사내! 그는 횃불을 들고 걸어오다가 두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달려오며 주먹을 뻗었다. 쿵! 쿵! 쿵! 쿵! 발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기라 도 하는 것처럼……. 화영은 야광충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띠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다. 숨을 쉬지 않고 있어!" "게다가 우릴 죽이려 하고 있지!" 치리리릿--! 야광충의 손에서 인명권이 날았다. 팍--! 사내의 머리 한쪽이 인명권에 맞아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화영이 몸을 숙이며 그 옆으로 비스듬히 스쳐지나갔다. 불빛 속에 달무리 같은 광채가 번뜩이다가 사라졌다. 사내는 두 걸음을 더 걷고, 목과 몸이 분리되어 뒹굴었다. 화영은 어느새 뽑아 들었던 검을 검집에 다시 꽂고 있었다. 야광충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내의 머리를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좋은 솜씨군, 철골강시(鐵骨 屍)를 단칼에 자르다니!" 화영이 대답했다. "보검(寶劍)의 덕이지!" 야광충은 보검을 들었다고 아무나 철골강시를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강석(金剛石)이 박혀 있는 인명권으로도 머리를 박살내지 못할 정도로 단단한 철골강시라면 어지간한 보검으로는 홈집 하 나 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본 견지에서는 화영이 든 검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기는 해도 보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모자라는 검이었다. "이름은?" 화영이 대답했다. "청풍(淸風)!" 청풍검(淸風劍)! 설사 폐철(廢鐵)로 만들어진 검이면 어떨 것인가? 화영 같은 검객(劍客)이 사용하는 칼이면 나무로 만들어진 검 이라도 족히 보검이라 불려질 가치가 있었다. 야광충은 차츰 화영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천산제일검 여문량의 제자다운 솜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까 뭐라고?" "응?" "철골강시가 뭐지?" 야광충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말로만 들었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에, 그것이 철골강시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철골강 시가 분명하다면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을 것이다. --놈은 천강시(天 屍)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엽장청은 그렇게 말했었다. --철골강시라고 있지! 도검도 다치지 못하는 괴물, 분명 죽 은 시체인데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는…… 그런 괴물! 그러 나 천강시는 그것보다 백 배는 무서운 놈이다! 철골강시보다 백 배는 단단한 놈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로부 옹고트가 만들어 달라고 했던 일곱 가지 괴물, 천기칠사(天忌七邪)중 첫번째 것이었다. "괴물!" 야광충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 대단치는 않은 그런 하급 괴물이지!"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다. 야광충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남 못지않은 괴물이니까……!' * * * 몽고군의 거대한 가마는 무너진 석전(石殿)의 입구에 와 있었다. 허리줌에 긴 장도(長刀), 등에는 장궁(長弓)을 메고 전통(箭 筒)을 세 개나 찼으며, 한 손에는 철퇴(鐵槌)를 비껴 들어, 완 전무장한 군관(軍官)이 손을 들어 어두운 통로를 가리켰다. 횃불을 들고 만도(彎刀)를 비껴 든 벌거숭이 장한 여덟이 통 로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장창(長槍)을 잡은 병졸 여덟이 따르고, 다시 그 뒤 로 노궁(弩弓)을 든 병졸 여덟 명이 따랐다. 하나같이 한 손에 는 횃불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통로 안에 일 장 간격으로 벌려서자 군관이 가마 옆에 가서 섰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바얀!" 바얀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몽고족의 역사(歷史)에 몇 번 씩 나온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진 자는 하나같이 지혜로운 자 들이었다. 사실 그 이름은 현자(賢者)에게 붙여 주는 칭호였던 것이다. 가마의 휘장이 열렸다. 둥근 빵처럼 생긴 몽고모자, 와릉모(瓦楞帽)를 쓰고, 좁은 소 매에 오른쪽으로 옷깃을 만들고, 끈을 줄지어 연결한 붉은 착수 포(窄袖袍)를 입은 사십줄의 사내가 휘장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 었다. 몽고족으로는 드물게도 횐 얼굴에 가늘고 검은 수염을 세 줄 기로 기른 귀족풍의 인물이었다. 그가 손짓을 하자 무표정한 얼굴의 흑포사내가 앞으로 걸어나 왔다. 여태 가마 옆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사내였다. 가마 안의 중년사내가 군관을 향해 말했다. "너회들의 임무는 이자를 사람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다. 이자가 그들을 다 죽이면 다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줘라!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없으면 그때 데리고 나오 면 되는 것이다." 명령은 단순명료했지만 그 군관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가 지금 받은 명령에는 흑시 있을 수도 있는 변수(變數)를 하나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저 안에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이 무표정한 얼굴의 사내가 그들을 다 죽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만약 기습이라도 받으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몽 고 최강의 세력으로 부상하는 벤야시리 휘하의 촉망받는 군관, 항명(抗命)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가볍게 절하고 돌아섰다. "전진!" 한 명의 군관과 이십사 명의 병졸들이 석전의 어둠 속으로 사 라졌다. 무표정한 사내가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사내가 중얼거렸다. "과연 천강시 하나로 그들을 다 제거할 수 있올까요?" 휘장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 말에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중년사내가 그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목소리가 계속 홀러 나왔다. "천강시는 나의 경고일 뿐이다!" 중년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경고를 받고 살아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철골강시 중 살 아 남은 넷과 칠살 중 세 명도 저 안에 있는데……?" "네가 보낸 자들은 단 하나도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저…… 천강시를 포함해서!" "그런……!" "귀조와 여문량을 얕봐서는 안 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호소 양의 후계자와…… 엽장청의 후계자를 포함해서……." 중년사내는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항변하지는 않았다. 문득 그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황룡과…… 예충의 제자 말입니 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황룡은 절대 죽을 리가 없고, 예충의 제자도 온 지 일마 안 되었으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데……." "시간이 말해 주겠지! 그보다 빨리 다음단계를 준비해라!" "그…… 다음단계가 꼭 필요할까요?" 목소리의 주인은 거듭되는 질문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루타이!" 중년사내는 갑자기 두려운 빛을 띠며 공손히 대답했다. "예, 사부님!" "분명히 그들 중 몇은 살아 나온다. 그들은 천강시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 그리고 나는 그들을 죽이고 싶지도 않 다. 그들은 분명 내 사제(師弟), 사질(師姪)들이고, 우리 천산 파의 문인(門人)들이다! 나는 다만 그들에게 무공으로도 안 되 는 것이 있다는 것, 나, 천산노조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 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을 보여 줌으 로써 말이다!" "예, 사부님!" 그들이 탄 가마가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몽고군은 고란고성을 에워싸고 천막을 쳤다. 이내 수만의 병력이 야영할 수 있는 수천 개의 천막이 고란고 성 주위를 둘러쌌다. 낙타에 싣고 다니는 대형 궁노가 고성을 향해 설치되고, 기마대가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기적인 포위진형을 짜고 있는 것이다. * * * "느껴지나?" 화영의 전음(傳音)이었다. 야광충은 대답 대신 벽을 향해 인명권을 비스듬히 날렸다. 취리리리릿--! 좁은 통로에 귀가 아플 정도의 소음이 가득 찼다. 인명권은 좌측 석벽에 맞고 튀어나와 우측 석벽 아래로, 다시 야광충의 손짓에 따라 천장으로 쏘아졌다. 순간적으로 통로 안이 인명권이 튀겨 내는 불꽃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 불빛에 비쳐 붉은 그림자 하나가 통로 저편으로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화영이 혀를 찼다. "망설이는 법이 없군!" 야광충은 돌아온 인명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냄새가 났어!" 화영은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냄새가 좋지 않으므로 사람을 죽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확실히 방금 석벽 귀퉁이에 숨어 있던 자에게서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은 나무판자 아래에서 나는 음습한 냄새 같은 것이……!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인가?" "아니!" 야광충은 허리에 손을 가져 가며 고개를 저었다. "실력이 모자라 죽이지 못했어!" 촨--! 허리띠가 풀리더니 막대기처럼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그 끝 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척혈구절대의 첫번째 변형인 척혈구절검(剔血九節劍)이 야광 중의 손에 들린 것이다. "하지만 멀리 도망가지도 못했을 거야!" 화영은 바닥에 떨어진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 인명권이 내는 찢어지는 소음 속에서도 숨어 있 던 누군가의 몸에 인명권이 세 번 작열하는 소리 역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이 화영의 말에 가볍게 대꾸했다. "그렇군!" 통로의 정면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 횃불을 들고 누 군가가 서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거대한 곤충처럼 보였다. 키는 사 척이 겨우 넘을 듯한데, 한 팔은 비스듬히 아래로, 다른 팔은 위로 치켜 든 길이가 거의 통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 를 정도로 길었던 것이다. 그 긴 팔이 사실은 양손에 든 낫과 횃불 때문이라는 것은 조 금 더 다가가서야 확인한 일이었다. 야광충은 그의 어깨와 옆구리, 그리고 넓적다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고 그가 바로 숨어 있던 자, 방금 인명권에 맞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슴에 새겨진 '옥(獄)'자로 지옥성에 서 나온 자임도 알 수 있었다. "실수했군!"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정면으로 내밀고 앞으로 다가갔다. 불빛 속에 서 있는 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예충의 제자라면 그 검을 내려놓는 것이 옳을 텐데?" "너는?" "혈당랑(血螳螂)! 칠살의 일인이다! 네 상관뻘 되는 분이시란 말씀이지!" 야광충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아직 그와의 거리는 삼 장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정말 실수했군!" 불빛 속에서 혈당랑이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실수를 자인하는 걸 보니 용서받을 방법도 알겠군!" "물론!" 팍--! 단단한 물체를 무엇인가가 관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혈당랑이 잠시 부르르 떨었다. "너, 너……!" 야광충은 그제서야 척혈구절검을 아래로 떨구었다. "입을 막으면 모든 것이 쉬워지지! 그리고 죽는 마당에 해 주 는 말이다만, 내게는 상관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 혈당랑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선 채로 숨을 거둔 모양이었다. 야광충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불빛에 비친 사내의 얼굴은 피처럼 붉고, 한쪽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묘하게 음침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싱겁군!" 야광충은 뒤로 돌아서서 화영을 보았다. 팍--! 아래로 내려져 있던 척혈구절검의 두번째 토막이 바닥을 파고 들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통로바닥이 요동치며 들렸다. 야광충의 발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야광층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발에 목이 밟힌 사내를 내려 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혈당랑의 그림자로 바닥에 깔려 있던, 그러 나 사실은 혈당랑 본인이었다. 그의 미간에는 척혈검의 두번째 토막이 관통해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혈당랑은 거대한 못으로 땅바닥에 박힌 사마귀의 신세가 되어 바둥거리고 있었다. "이 검의 이름은 척혈구절검이다. 구절(九節), 아홉 토막으로 잘라진다는 뜻이지. 마지막 아흡번째 토막을 보기 전에는 안심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혈당랑은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검은 피가 쿨럭쿨럭 쏟아져 나왔다. "알 것 없어!" 야광충은 그의 이마에서 검편(劍片)을 뽑았다. 아마도 그가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것은 자신이 그림자로 위장 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이유를 알 만한 경험을 했었다. 야광충이 석벽에 숨은 그에게 인명권을 던졌을 때, 그는 그들 이 어떻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 알았어야 했다. 아니면 그런, 위장이 이 두 사람에게는 소용없다는 점만이라도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떻게 치졸한 책략을 쓰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광충과 화영이 가 버린 통로에는 혈당랑의 모습을 한 인형 (人形)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짜 시체만이 횃불 아래 남아 있었다. * * * 몽고군관 툰투구는 이십오 년 전, 사상 유례없는 대한파(大寒 波)가 몽고고원을 횝쓸 때 태어났다. 연일 몰아치는 폭설과 강풍에 파오들이 날려 가고, 수많은 사 람과 양들이 얼어 죽었다. 몽고족들을 더욱 절망에 빠뜨린 것은 이듬해 봄이 되어도 한 파는 걷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겨우내 저장해 두었던 가축들의 먹이가 떨어졌을 때, 그들은 몽고족도 같이 전멸당한다는 위기감에 빠졌었다. 올해 양들이 굶어 죽으면 다음 해에도 기를 양이 없어지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양들이 없으면 몽고족도 없는 것이다. 그때 그가 태어났다. 부모들은 연일 굶주린 때문인지 그의 이름을 '툰투구', 즉 '배부르다'로 지었다. 한파가 지나가고, 산 사람은 살고, 기적처럼 양들도 전멸하지 는 않았다. 그러나 툰투구는 배부르게 먹어 본 적이 드물었다. 툰투구가 진짜 배불리 먹게 된 것은 군관이 되면서부터였다. 그것도 그가 벤야시리의 휘하에 소속되면서부터였다. 수많은 부족들이 정벌되고, 몽고족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양 과 곡식을 바쳤다. 사실상 약탈당한 것이지만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중원을 되찾으려면 그들은 통일되어야 했다. 그리고 통일된 힘을 가지려면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툰투구는 사실 배불리 먹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 만, 몽고족의 미래라는 이상(理想)을 갖게 되자 더욱 못 할 일 이 없는 사내가 되었다. 이상을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고, 작은 희생은 희생도 아닌 것 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대열의 제일 앞에서 걸어가던 장한 두 명이 쓰러져 죽는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밀착! 반좌(半座)! 발사!" 선두의 장한들이 좌우로 밀착하고, 장창을 든 병졸들이 바닥 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다음에 노궁이 발사되는 것까 지 그들의 동작은 톱니바퀴처럼 맞아들어갔다. 횃불이 달지 않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들을 향해 화살을 발 사했던 무리들이 지르는 짧은 비명이 들려 왔다. "연속 발사!" 노궁은 기관장치로 여러 대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는 무기였다. 한번 쏘면 다시 장전(裝塡)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무거워 여 러 가지로 귀찮은 물건이지만 대신에 강하고 멀리 나간다. 게다가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는 쏘기만 하면 누군가가 맞는 것이다. 두 명이 일차로 발사하고, 다시 뒤에 서 있던 두 명이 나와 발사하는 식으로 여덟 명이 반복하자, 더 이상 발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 다음은 창칼로 밀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툰투구는 손을 휘둘렀다. "전진!" 장창을 든 병졸들이 이 열로 나란히 걸어 나갔다. 만도를 든 장한들이 그 좌우로 다시 일 열씩을 만들어 그들은 사 열로 통 로를 메우며 전진하게 되었다. 혈문룡은 어두운 통로의 중앙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좌우와 뒤에는 살아 남은 혹룡기사들이 서 있었다. 하나갚이 시체를 한 구씩 손에 들어 노궁의 방패로 삼으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나머지 한 손에는 칼 한 자루씩 들고 서 있는 것이다. 조오는 죽었다. 그리고 백 명을 헤아리던 그외 정예 흑룡기사들이 이제는 열 두 명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다섯은 시체로 변해 그들의 손에 서 방패역할을 하고 있었다. 혈문룡은 왜 그들이 이런 꼴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는가? 누군가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 그들 흑룡사를 함정에 빠뜨린 것인가?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처참하게 당할 리가 없었다. 그 음모를 꾸민 자가 누구든 간에, 그리고 여기 고란고성에 있는 자가 누 구든 간에 그는 반드시 죽여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지옥에 가서도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빌라가와 조오, 아흔 명이 넘는 그의 수하들을 볼 낯이 없을 것 이다.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빛에 비쳐 번뜩이는 칼과 창! 그들을 최대한 가까이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피 해로 섬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들고 있는 시체들이 석벽에 기대어 있는 것으로 봐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선두의 장창수(長槍手)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툰투구의 고함이 들려 왔다. "뭐냐?" 장창수는 횃불에 비친 시체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저렇게 고슴도치가 되고서는 시체가 아니기란 정말 어려울 것 이다. 그는 시체를 보고 건을 먹었다는 말은 듣기 싫었다. "옆으로 꺾이는 통로인 모양입니다! 적들은 시체를 버려 두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전진했다. 혈문룡은 마음속으로 수를 세었다. 그가 열을 세는 것과 공격하기 가장 적당한 시점은 아무 상관 이 없는 것이지만, 이런 때 그 관계를 냉정히 따지는 것도 우스 운 일이 될 것이다. '여덟……, 아홉……, 열!' 그는 들고 있던 시체를 앞으로 집어 던지고 소리없이 바닥을 굴러 전진했다. 오른손에 든 반룡도의 손잡이가 약간 미끄럽다는 느낌이 들었 지만 이 시점에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최대한 적을 살상해야 부하들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번뜩이는 창날이 그의 머리위로 스쳐지나갔다. 장창을 들고 이런 좁은 통로로 진입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이었다. 게다가 창끝을 아래로 겨누지 않고, 들판에서 적을 만 났을 때처럼 정면으로 치켜 들고 있다니……! '이놈들은 전투경험은 많을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는 초보군!' 혈문룡은 창칼 사이로 뛰어든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지러운 생각을 하며 바닥에 등을 대고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크아악--!" 반룡도에 발목이 잘린 첫번째 줄의 네 명이 일시에 비명을 질 렀다. 혈문룡은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음 줄의 아래로 굴러갔다. 뒷처리는 수하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들이 물러나 전열을 다시 갖추기 전에 궁노수(弓弩手)들을 죽여야 했다. 대열은 앞에서부터 무너졌다. 툰투구는 미친 듯 소리치며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그의 고 함은 통로를 가득 메운 비명 소리에 묻혀 버렸다. 이런 때는 앞에 있는 장창수, 도부수(刀夫手)들을 다 희생시 키더라도 궁노수들을 후퇴시켜 그들의 가장 큰 전력을 보존해야 했는데, 그는 아직 그 정도로 악랄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어리석은 탓일 것이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동안에 혼란은 궁노수들의 중심까 지 파고들어 있었다. 좁은 통로에 차비규환의 수라장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들이 들고 있던 횃불까지 하나씩 바닥에 나뒹굴어 점점 어두워 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쿵--! 무거운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렸다. 툰투구는 그 경황 중에도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응--!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거운 파공음과 함 께 주먹 하나가 그의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팍--! 작열하는 아픔, 그리고 자신의 머리가 바스러지는 통렬한 소 리였다. 그것이 툰투구가 지상에서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무뚜정한 얼굴의 흑포사내, 천강시는 일권에 툰투구의 머리를 박살내고 다시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그의 앞으로 혼란에 당황한 궁노수 둘이 뒷걸음질 쳐서 다가 오고 있었다. 천강시는 양손을 내밀어 두 궁노수의 목을 움켜쥐었다. "끄으윽--!" 궁노수들의 눈이 튀어나왔다. 천강시의 가공할 악력에 목이 비틀려 끊어지기 직전에 생긴 일이었다. 그들을 집어 던진 천강시는 다시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시작 했다. 그의 눈이 붉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통로의 혼란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다. 혈무룡은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반룡도를 등에 지 었다. 그리고 원을 그렸다. 파악--! 붉은 피가 튀었다. 다급한 김에 노궁을 들어 그를 치려던 궁노수가 반으로 갈라 지며 뿜어내는 핏줄기였다. 쉬익--! 귓가에 바람소리가 울렸다. '고수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평범한 사람과 고수가 일으키는 권풍(拳 風)은 그 소리에서부터 다른 법이다. 혈문룡은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반룡도로 자신의 몸을 감둣이 돌려 상대의 팔뚝을 잘라갔다. 그의 반룡도법(半龍刀法)은 이름에서도 짐작이 가둣이 공격과 방어가 원형으로 이루어졌다. 자연히 옆으로든 앞으로든 회전을 하며 공격하는 초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에 속도와 파괴력을 높이는 것이다. 한펀으로는 원형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은 상대가 공격의 방향 과 공격시점(攻擊時點)을 짐작할 수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런 모든 장점이 먹혀 들지 않았다. 그의 반룡도는 분명 적의 팔을 쳤는데, 마치 강철벽에라도 부 딪친 것처럼 튕겨 나왔던 것이다. "또냐?" 혈문룡은 이를 갈며 외쳤다. 그의 칼을 튕겨 낸 상대가 아까 보았던 그 괴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노만 삼키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 발을 축으로 해서 쓰러질 둣 원을 그리며 반룡도를 적의 목이라고 짐작되는 부분으로 날렸다. 슈왁--! 반룡도가 적의 목을 정확하게 베었다. 그러나 이 상대는 아까 의 괴물보다 훨씬 단단했다. 반룡도는 강철벽의 옆을 긁은 것처럼 미끄러지고, 괴물은 팔 을 막대기처럼 휘둘러 그를 후려쳤다. 팡--! 혈문룡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입읗 꽉 다물고 석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내장이 뒤틀려 입만 벌리면 피를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수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창피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쾅--! 온몸이 진동되었다. 폐부(肺腑)가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이 등을 통해 밀려드는데, 순간적으로 등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져 버렸다. 우르르--쾅--! 혈문룡이 부딪친 석벽이 무너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쌓였다. "대두목--!" 누군가의 절규가 통로를 메웠다. 천강시가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데 두 개의 창날이 목덜미 를 찔렀다. 천강시는 그 창을 잡아 그를 찌른 두 명의 혹룡기사에게 되밀 었다. 그들은 그 무지막지한 힘에 뒤로 나뒹굴었다. 천강시의 발이 치켜 들렸다가 다시 내려갔다. 팍--! 붉은 피와 뇌수가 천장까지 튀었다. 살아 남은 흑룡기사가 그를 향해 창을 던지고 통로 저편으로 도망갔다. 천강시는 그 뒤를 쫓아갔다. 어두운 통로 안에 일어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그는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몇 벌의 옷에서 찢어 낸 것이 분명한 천으로 온몸을 칭칭 동이고, 심지어는 눈도 내놓지 않고 얼굴을 감싸 버린 것이다. 두 손에도 헝겁을 감아 원래의 살에서 밖으로 드러낸 것은 아 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고도 그는 벽에 부딪치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통로를 지나가 버렸다. 그 이상한 복장의 괴인이 지나가고 난 통로 벽에 한 점의 붉 은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빛은 하나의 얼굴을 형성 했다. 혈지주였다. 그는 얇은 입술을 벌려 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놈이군!" 그의 맞은편 벽에 또 한 점의 붉은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것도 하나의 얼굴이 되었다. 새로 나타난 얼굴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입술을 묘하게 비틀어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게 제대로 숨은 거라고 숨은 거냐?" 혈지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에서 살기가 뻗켰다. "내 은신술에 불만있나, 지네야!" 지네라고 불린 얼굴 옆에 날카로운 세모꼴의 쇠붙이가 튀어나 왔다. 곧 그 쇠붙이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를 발라 놓은 것처럼 붉은 두 자루의 긴 송곳이었다. 지옥칠살 중의 하나, 그리고 오늘 고란고성에 온 마지막 하나 인 혈오공(血蜈蚣)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붉은 구멍에서 몸을 빼는 것처럼 발을 벽에서 빼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키를 가진 인물이었다. 거의 구 척에 달하는 긴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송곳을 들어 혈지주의 얼굴이 있는 벽을 가리켰다. "그건 뭐냐? 그런 흔적을 남겨 두고도 제대로 숨었다고 할 수 있겠어?" 혈지주는 목을 길게 빼더니 혈오공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마치 벽이 피를 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벽 한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혈지주는 원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혈오공을 보았다. "그놈, 예충의 제자라는 애송이놈을 반드시 산 채로 회쳐 먹 고 말 테다!" 봄 35 피를 흘리고 있던 벽이 둥글게 솟구쳤다. 혈지주의 어깨였다. 잘려진 어깨……! 야광충의 유도(誘導)로 그를 쫓던 견흔승망에게 물린 팔을 스 스로 잘라 버린 흔적이었던 것이다. 혈오공은 그래도 비웃는 인상이었다. "네 말대로 될까? 그리고 일개 옥주의 제자를 그렇게 네 맘대 로 죽여도 후환이 없을까?" 혈지주는 더 이상 그와 싸우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한 손을 품속에 넣어 몇 가지 기묘한 물건들 을 꺼내었다. "날 다치게 한 것만으로도 죽을 죄는 충분히 졌어! 그리고 나 흔자는 안 되지만 네가 도와 주면 반드시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는 검붉은 실타래 같은 것을 들더니 통로를 가로질러 이리 저리 연결했다. 혈오공은 코웃음을 쳤다. "그 잘난 혈지주망(血蜘蛛網)만으로?" 혈지주망은 뭉쳐 놓았을 때는 그렇게 검붉은 색으로 보이지만 한오라기씩 풀어 놓으면 너무 가늘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충격에는 끊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강하고, 가는 만큼 예리해서 멋모르고 발목이라도 걸렸다가는 무우 잘리 둣 잘리고 마는데……. 거기에 독까지 발라져 있는 악독한 물건이 혈지주망, 결코 누 군가를 죽이기에 부족한 물건은 아니었다. 혈지주는 바닥에서 한 자 정도 높이로 혈지주망을 얼기설기 연결해 놓은 다음, 호리병 하나를 들었다. 그 병 안에는 붉은 분말이 들어 있었다. 혈지주는 분말들을 혈지주망이 설치된 바로 뒤부터 일 장 정 도 너비로 바닥에 뿌렸다. 그 다음은 가시처럼 생긴 작은 물건이었다. 묘하게도 그것들은 바닥에 던지면 바닥에, 천장에 던지면 천 장에 그대로 달라붙었다. 혈오공은 그쯤 해서야 약간 질린 모양이었다. "분심화(焚心火)에 부풍독주(浮風毒蛛)라……,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기 밑천을 드러내는 걸 보니 말이야!" 분심화는 일종의 화약(火藥)이었다. 먼지처럼 바닥에 엷게 깔아 놓은 그것에 약간의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지옥의 겁화(劫火)가 일어나 흔백까지 태워 버리는 것 이다. 부풍독주는 가시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독거미였다. 바람을 타고 퍼져서 날아가다가 동물의 거죽에 붙으면 곧바로 심장까지 파고들어 마비시킨 뒤 먹이로 삼아 버리는 지독한 거 미였다. 이제 혈지주는 통로의 삼 장 너비를 죽음의 함정으로 바꿔 놓 은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지 혈오공을 보았다. "이제 너만 도와 주면 완벽한 함정이 될 거야!" "뭘? 어떻게?" 혈오공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혈지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 서 있는 거다!" 혈오공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미친 거냐,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냐? 내가 왜 나서야 하지?" 혈지주는 완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그놈은 더 크면 반드시 위험해질 놈이 다! 어렸을 때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좋아! 조금도 위험 하지 않은 일인데 설마 겁내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이 혈오공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그렇잖아도 붉은 얼굴을 이제는 검붉게 물들이고 혈지주를 노려보았다. "왜 네가 서 있지 않지?" "나는 얼굴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유인할 수가 없다!" "그들이 여기로 온다는 보장은?" "올 수밖에 없다!" "왜?" "귀조가 갇힌 곳으로 가려면 이 길밖에 없기 때문이지!" 혈오공은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좋아, 우리가 그 동안 같이 지내온 정리를 봐서 부탁을 들어 주지! 단 이번 한 번만이야!" 철골강시가 떼굴떼굴 굴러 석벽 구석에 처박혔다. "재미있군! 이 정도 강도에도 견딘단 말이지?" 야광충은 척혈구절대의 두번째 변형, 아홉 개의 철편으로 연 결된 채찍인 척혈구절편(剔血九節鞭)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야광충의 뒤에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지금 야광충의 앞에 나뒹구는 철골강시가 어떤 몰골일지 짐작이 갔다. 야광충은 강도를 달리해가며 철골강시를 벌써 십여 대나 후려 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지만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화영이 실제 철골강시의 몰골을 봤으면 그런 생각은 더욱 굳 어졌을 것이다. 강철 같던 피부도 척혈구절편에는 견딜 수 없었는지 이미 갈 기갈기 찢겨지고 터져 불그스름한 살 속으로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특히 목줄기는 반이 넘게 끊겨져 굵은 힘줄이 튀어나와 대롱거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철골강시는 다시 바둥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살갗이 질길 뿐 다른 장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강시가 어 디에 소용될까?" 촤악--! 야광충은 담담하게 물어보면서도 척혈구절펀을 휘둘러 다시 한번 철골강시를 후려쳤다. 어깻죽지의 근육이 터져 버렸는지 살점들이 덩어리로 튀었다. 화영은 급기야 인상을 썼다. "너 같은 사람에게야 소용이 없겠지만,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게도 위력을 발휘하는군! 너처럼 단번에 두 동강낼 수가 없어!" 철골강시는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목덜미를 야광충의 발이 밟아 눌렀다. 야광충은 척혈구절편을 던지고는 두 손으로 철골강시의 머리 를 잡아 돌렸다. 우드드득--! 철골강시의 머리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갔다. 그제서야 그것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야광충과 화영은 말없이 걸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야광충이 갑자기 물었다. "아까 검으로 철골강시를 단칼에 잘랐지?" "음!" "만약 철골강시보다 백 배쫌 단단한 놈이 있다면 아까처럼 자 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보검을 쓴다면?" "그래도 힘들걸?" "왜?" 화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둣 설명했다. "아까 그…… 괴물을 벨 수 있었던 것은 검의 속도 덕분이었 어. 검의 속도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나뭇가지를 들든, 보검 을 들든 비슷한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지." "그럼 더 빠르게 검을 쓴다면?"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빨라진다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속도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더 이상은 빨라지지 않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에는 그 벽에서 멈추지. 만약 이 이상의 경지에 오른다 면……." 화영은 미소를 지었다. "검강(劍 ) 이나 검기(劍氣)를 사용하는 단계이니 더 빨라지 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지!" 그렇다면 화영은 그단계에 올라 검강의 벽에 막혀 있는 상태 란 말인가? 야광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란고성 지하의 통로는 끝이 없는 것처럼 길었다. 야광충과 화영은 그 통로를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통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말을 않고 있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통로가 미미하게나마 아래로 향해 있다 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이 길의 끝에 그의 목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 었다. 그러나 여문량이 이미 거기 있을지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화영과 같이 걷는 것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동행할 뿐이 었다. 화영에게는 화영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걷고 있는 통로의 저편에 누군가가 서 있엇다. * * * 부와아아악--! 불꽃이 맹렬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혈문룡은 다리를 아래로 한 채 급속도로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나마 반룡도를 양손으로 잡고 혼신의 힘을 다 동원해 서 버티지 않았으면 속도는 몇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미끄러지고 있는 이 통로는 경사가 너무 급 했다. 반룡도가 긁고 있는 바닥은 불꽃만 길게 튀길 뿐, 전혀 걸리 는 곳이 없었다. 아까 괴물에게 맞아 석벽을 부수고 들어온 곳이 바로 이 통로 였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지하로 향해 있는 좁은 통로! 벌써 일 다경은 족히 미끄러져 내려왔을 것이다. 혈문룡은 이대로 미2러지다가는 껍질이 온통 벗겨져 버릴 거 라고 생각했다. 지금만 해도 팔꿈치와 무릎에 감각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까까지는 쓰라려 미칠 것만 같았던 그곳이……! 그보다 문제는 통로의 끝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만약 바윗덩어리라도 있는 날에는 그는 걸레조각처럼 홑어지 고 말 것이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혈문룡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괴물의 손에 찢겨져 죽어 가던 수하들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복수를 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니,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보고 죽어야 지 옥에서 만날 수하들에게 할말이 있을 것이다. 혈문룡은 바닥을 긁고 있던 반룡도를 들어 입에 물며 슬쩍 몸 을 뒤집었다. 파아아악--! 통로는 그가 겨우 몸을 돌릴 공간만 허용할 정도로 좁았다. 그래도 그나마의 공간이라도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혈문룡의 미끄러지는 속도가 몇 배로 빨라졌다. 엉덩이와 등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천으로 된 옷은 이미 다 닳아 버렸을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대었다. 다행히 찾던 것이 있었다. 그가 반룡도 다음으로 애용하는 병기, 여의색자창(如意索子 槍)이었다. 양쪽 끝으로 날이 달려 있고, 몸체는 아흡 부분으로 나누어져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총 열한 토막으로 접히는 조립식 창이 그것이었다. 펼치면 총 길이가 열한 자나 되기 때문에 지하 통로로 들어오 면서 접어서 허리춤에 달아놓았던 것인데 북새통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혈문룡은 등을 아래로 통로에 미끄러지면서도 손을 움직여 그 창의 양끝을 양손에 나누어 잡았다. 그리고 양손을 들었다가 힘차게 바닥에 꽂았다. 파아아아악--! 다시 불꽃이 튀었다. 갑작스런 제동에 양손아귀가 찢어질 둣 아파오고, 팔뚝이 부 들부들 떨렸다. 그의 미끄러지는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는 걸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팽 개쳐졌다. 통로가 끝난 것이다. 자기 몸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불쾌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펑--! 온몸이 으스러지는 고통! 혈문룡은 얼어붙을 듯한 한기와 무거운 중압감을 동시에 느끼 며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는 깊은 연못으로 잠겨 들고 있 었다. * * * "한 사람이 통로의 중앙을 막고 서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있는 일일까? 그것도 적이 될지도 모를 사람들이 오고 있는 통 로를 말이야!" 화영은 야광충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흘렸다. 음모(陰謀)는 그가 정통한 분야가 아니었다. 그런 일들은 이 냉정하고 머리 잘 돌아가는 친구가 더 잘 알 것이다. 야광충은 통로 저편에 버티고 선 구부정한 자세의 사나이, 혈 오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오공은 음충궂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네가 예옥주의 제자가 맞다면 우리는 적이 아니다!" "적이 아천데 왜 그렇게 서 있는 것인가?" "겁이 나나?" 혈오공은 천천히 옆으로 걸어가 석벽에 몸을 기대었다. "이렇게 비켜 주면 되나?" 야광충의 눈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았다. 혈오공의 조롱 하는 둣한 행동이 그의 살기를 격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태연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그는 간자기 멈춰 섰다. 그의 입가에 사이(邪異)한 미소가 흘렀다. "벌거벗고 누워 있는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니……, 나도 이 길은 무서워서 더 못 가겠군!" 그는 들었던 발을 다시 내려놓고 돌아섰다. 혈오공이 기대 있던 석벽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벌렸다. "너 이……!" 그는 목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 푸른 눈빛이 그의 정면에 다가와 있었 다. 야광충이 순간적으로 그의 옆에 다가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혈오공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되어서 물었다. "이……, 이건……?" 야광충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매십보!" 야광충은 손을 그의 목에서 살짝 뗐다. 혈오공은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송곳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 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촤악--! 야광충의 오른쪽 손목에 끼워져 있던 팔찌가 사라졌다. 그의 손은 움직이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혈오공 의 목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연형칠장 중의 또 하나, 유리환검이 선을 보인 것이다. 혈지주는 벽 속에 숨어 이 모든 일들을 보고 있었다. 야광충의 이매십보는 지옥성 입구, 협곡에서 이미 구경한 것 이니 놀라지 않았다. 지옥칠살의 하나인 혈오공이 너무도 쉽게, 어이없이 죽은 것 을 보고도 놀라지는 않았다. 혈오공의 멍청함을 생각해 보면 여 태 살아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화영이 건드리기만 해도 살이 두부처럼 베어져 나가는 혈지주 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걸어와도, 거위 깃털 하나만 떨어져 도 타오르는 분심화를 밟고도 불티 하나 보이지 않아도, 미세한 충격에도 광분하는 부풍독주들이 그들을 밟고 넘어가는 화영의 발길에도 죽은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충격은 받지 않았다. 오래 살다 보면 답설무혼(踏雪無痕)이니, 능공허도(凌空虛渡) 니 하는 초절정경공(超絶頂輕功)도 구경할 때가 있는 법이었으 니까! 그러나 야광충이 문득 이렇게 말할 때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함정치고는 너무 쉽지 않나?" 화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쉬운지 어려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손에서 순간적으로 청풍검이 뽑혀 나와 석벽의 한 지점 을 찍었다. "이게 진짜 함정이 아닐까 싶은데……?" 팍--! 그의 검끝에서 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순간 밝아졌다. 야광충은 눈을 찡그리고 화영의 검끝에서 열을 뿜어내고 있는 작은 거미를 보았다. "건드리면 불을 뿜는다……? 재미있는 거미군!"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겠는걸?" 거미를 찍은 청풍검의 끝은 어느새 하얗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야광충은 뒤를 돌아보며 화영의 말에 찬동했다. "과연 위험하기도 하군!" 그들의 뒤에는 붉은 가시같이 생긴 것들이 서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부풍독주들이었다. 화영이 찍은 불거미,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린남영(傷燐籃影) 이 내뿜는 열기를 느끼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광충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거미니까 아마 거미줄을 쳤겠지?" 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뿜는 줄일까?" "어쩌면……!" 그들의 뒤에서 날갯짓 소리가 거세지고 있었다. 야광충은 척혈구절편을 양손으로 잡아 둥글게 꺾었다. 철꾄과 철편 사이의 사슬이 철꾄 속으로 들어가고 철편끼리 둥글게 맞물렸다. 차칵--! 척혈구절편은 한 순간 둥근 원륜(圓輪)의 형태가 되었다. "일단 나가고 보자!" 파아앙--! 척혈구절륜(剔血九節輪)이 공기를 찢으며 앞으로 쏘아졌다. 파아--! 순간적으로 통로의 중앙에 파란 화염이 치솟았다. 야광충과 화영은 화염 속에 짧은 순간 뚫린 구멍을 놓치지 않 았다. 척혈구절편이 회전하며 거미줄을 뜅고 나가 생긴 좁은 활 로였다. 그들은 화살처럼 쏘아져 그 구멍을 지나갔다. 화영은 내려서자마자 앞으로 몸을 숙이며 청픗검을 휘둘렀다. 파파팟--! 검의 궤적을 따라 몇 점의 화광(火光)이 치솟았다. 숨어 있던 혈지주가 던진 상린남영이었다. 야광충은 통로 저만큼에 날아가던 척혈구절륜을 공중에서 잡 아 다시 던졌다. 파아앙--! 검은 륜이 날아가 석벽을 때리고, 야광충의 그림자가 쭈욱 늘 어나 그 검은 그림자를 따라 날았다. 그의 검은 손이 벽에 파고들었다. 크아악--! 혈지주가 요동을 치며 그 손에 목덜미를 잡혀 끌려 나왔다. 미처 다른 곳에 숨기도 전에 척혈구절륜이 날아오고, 그 뒤를 이어 야광충의 손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혈지주는 커다란 입을 벌려 소리쳤다. "잠까--안--!" 야광충은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혈지주를 든 채로 반 바퀴 회전하며 뒤로 집어 던져 버렸다. 혈지주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타오르는 화염 속에 횝싸였다. 푸른 불길이 치솟아 통로를 가득 메웠다. 제10장 그날 낮, 지하광장 우우우--웅--! '시끄럽군!' 혈문룡은 귓속으로 파고들어 머리까지 울리게 하는 소음에 눈 을 떴다. 눈앞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울혈(鬱血)에 의한 것인 줄 알았다. 온몸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면 맞지 않은 곳의 실핏줄 까지 가닥가닥 터져서 눈 안에까지 피가 들어간다. 그러면 지금 처럼 눈앞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눈앞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울혈에 의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그 괴물에게 한 대 맞은 것 말고는 이렇 다 하게 맞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붉게 보이지?' 눈은 점점 맑아지는데 여전히 그의 눈앞에는 붉은색만 가득 했다. 우우우--웅--! '이 소리는……? 귀 울림[耳鳴]인가?' 아니었다. 그의 눈앞을 가득 채운 붉은빛은 현실에 존재하는 붉은빛이었다. 그리고 귀에 들리는 소리 역시 그랬다. 그것들은 결코 환상이나 환청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앞을 가득 메우고 날아오르는 무수히 많은 파리들! 그도 이 공포스러운 벌레들을 알고 있었다. 견흔승망! 사람을 녹여서 죽처럼 만들어 마신다는 더러운 벌레들! 견혼승망들이 그의 머리위로 붉은 구름처럼 일어나 미친 둣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혈문룡은 최악의 상대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파리떼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들에 한 번만이라도 물리면 그는 꼼짝없이 파리떼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고란고성의 순으로 들어왔을 때 보았던, 사방에 널려 있던 백 골들의 사인(死因)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바닥을 밀며 옆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울퉁불퉁한 바닥이 아프게 느껴졌다. 혈문룡은 잉어꼬리처럼 두 발을 들어올려 바닥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타정(鯉魚拖艇)의 신법이었다 쾅--! 머리에 격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혈문룡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길게 누워 버렸다. 눈앞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혀를 깨물어 피를 내었다. 간신히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일어났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리 와라!' 견흔승망과 사람의 목소리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었다. 게다가 말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견혼승망들은 내려앉기는 벙지만 그에게로는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가 부딪힌 바위와 그 옆으로 서 있는 석벽에 시뻘 겋게 붙어 있었다. 그 견혼숭망들이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에게 위해(危害)를 끼 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못난 꼴을 보였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했다. 아직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이상은 기회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원 십 장은 될 둣한 넓은 광장이었다. 삼십여 장쯤 위에 울퉁불틔한 바위들이 연이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지하에 나 있는 공동(空洞) 정도의 장소일 것이다. 천장에 나 있는 구멍, 그리고 팡장 한편의 연못이 그가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빛은?' 횃불 같은 것은 아무 곳에도 없는데 광장 안은 이상하게 밝았다. 마치 벽 자체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석벽 아래, 혈문룡이 주저앉아 있는 광장의 맞은편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혈문룡은 다가가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 사람은 이상한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모래먼지에 찌든 넓은 소매의 옷, 이런 곳에서는 정말 보기 드 문 옷이었다. 도대체 저런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한단 말인가? 그는 문득 그 옷이 한족의 옷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방금 그를 부른 말이 한어(漢語)라는 것이 그제서야 기억났다. 결정적인 증거는 그 노인의 옆구리에 매달린 장검이었다. 가늘고,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장검! 한인만이 저런 비실용적인 무기를 쓴다. 저런 장검은 보기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찌르는 것 빼고는 쓸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창을 쓰면 더 좋을 것 아닌가? 혈문룡은 그 자신, 몽고땅에 살지만 한족의 혈통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한족의 옷을 입은 노인의 앞에는 또 다른 노인이 앉아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긴 수염이 온 얼굴을 가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백발과 횐 수염이 그의 나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벌거벗고 서 있었다. 애초에 벗은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서 읏이 삭 아 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혈문룡은 그보다 노인의 서 있는 자세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앉지도 서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 두 팔을 바닥에 늘어뜨 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원숭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이 손을 들어 그를 불렀을 때에야 그는 노인이 그렇게 서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노인의 어깨에서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노인은 양쪽 어깨를 쇠사슬에 뚫려서 석벽에 묶여져 있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게 만드는 어중간한 길이의 검은 사슬이 었다. "너는 누구의 후예냐?" 노인의 말은 혈문룡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었다. '지금 전대(前代)의 대두목을 묻는 것인가? 그걸 알아서 어쩌 겠다는 거야?' 그는 고까웠지만 대답하기로 했다. 석벽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견혼승망과 그 노인들이 무슨 관계 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예리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우선은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흑룡왕(黑龍王)" 벌거벗은 노인이 인상을 썼다. 깡마른 얼굴에 두 눈만 기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었는데, 지금 그 안광이 혈문룡을 찔러 오고 있는 것이다. "뭐?" 혈문룡은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 경우는 그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흑룡왕! 대막의 지배자 흑룡사의 열두번째 대두목, 흑룡왕 십이랑(十二郞)이 내 전대의 대두목이다!" '그리고 아버지이기도 하지…….' 혹룡왕 섭이랑, 혈문룡의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대막에 와서 혹룡사의 열두번째 대두목이 되었는지는 오른다. 어쩌면 대막의 후계전통이 대개 그렇둣 전대의 대두목을 죽이 고 그 자리를 차지한 여행자일 수도 있었다. 그는 몽고군과 싸우다 죽은 혹룡왕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아 버지인 그를 죽이지 않았어도 대두목이 될 수 있었지만……! 노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뭐?" 혈문롱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며 무기를 찾았다. 여의색자창은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반룡도는 있었다. 단지 있는 위치가 좋지 않았다. 그는 저런 괴물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왜 여태 알아차리지 못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앉은 키만 칠 척이 넘어 보이는 거대한 표범, 그것도 먹처럼 검은 표범이 붇은 혀를 내밀어 반룡도를 핥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큰 호랑이나 표범도 작은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움직인 다더니 여기서 확인한 셈이었다. 벌거벗은 노인이 다시 물었다. "넌 천산파의 아무와도 관계가 없단 말이지?" '천산파?' 혈문룡이 천산파와 관계가 있을 리 없다. 노인은 대답을 않는 혈문룡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에 살기가 번졌다. "죽여라!" 검은 표범이 일어났다. 놀라운 변화였다. 노인의 한마디에 방금까지 게으른 고양이처럼 누워 있던 검은 표범이 말 그대로 야수로 변했다. 푸르게 불타오르는 두 눈,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솟구친 검은 털들! 우우우--! 견혼승망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날아올랐다. 이 지하광장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노인의 한마디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눈을 빛냈다. '빌어먹을 늙은이…….' 그로서는 그 노인이 무슨 이야기를 쌨는지, 또 왜 그를 죽이 려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질이 고약한 늙은이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살고 보아야 했다. 검은 표범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단한 압박감이었다. 사막에서는 표범을 보기 힘들지만 그는 몇 번 본 적이 있기는 했다. 드물게나마 사막의 녹지에 한두 마리쯤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표범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압도적인 살기를 뿜어내는 표범도 처음이었다. 으르렁거리지도, 이빨을 드러내어 위협을 하지도 않지만 단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견혼승망들이 그의 머리위를 맴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표범보다는 그것들이 더 위협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혈문룡은 그것들보다 표범에게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여태까지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더 이 표범은 그의 승부 욕을 일깨우고 있었다. 꿈틀! 비단같이 매끄러운 검은 털들에 뒤덮인 근육들이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혈문룡은 표범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견혼승망들의 날갯짓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표범이 한 발을 더 내디뎠다. 혈문룡은 멍하니 바라만 보는 듯하더니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 로 구부리며 뛰어나갔다. 표범을 향해서였다. 크왕--! 검은 표범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어른의 머리통만큼 거대한 표범의 앞발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혈문룡이 노린 대로였다. 혈문룡은 바닥에 낮게 몸을 날리며 두 손으로 바닥을 잡아당 겼다. 한 순간, 그의 몸이 길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단숨에 오 장 가량을 건너뛰어 검은 표범의 아래로 파고 들었다. 슈왕--!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표범의 앞발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반룡도를 잡았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세 바퀴를 더 구른 다음 무릎을 땅에 대 고 몸을 일으켰다. 반룡도는 이제 그의 손에 있었다. 적어도 표범이든 혹은 노인이든 하나는 지옥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해 두지."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표범은 멈추지 않았다. 표범은 목표를 놓친 것이 분한 듯 푸르던 눈동자에 노기를 담 고 발톱으로 바닥을 긁고 있었다. 표범의 등이 활처럼 구부러지는 것을 혈문룡은 보았다. 단 일격일 것이다. 활처럼 쐬팽히 긴장된 상태에서 딴 한번의 도약이 이루어지 고, 두번째 도약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에게도, 표범에게도 그젓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룡도를 가슴앞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그만해 둬!" 엄한 목소리였다. 전혀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는 묘한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혈문룡도 표범도 멈추어 버렸다. 혈문룡은 자기도 오르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 았다. 한족의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문득 그는 그 옷이 말로만 듣던 유생의 옷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유생(儒生)! 몽고족은 유생을 천대시한다. 원나라 조정에서 분류한 열 가지 신분 중에서 아홉번째, 그러 니까 창녀의 아래요, 거지의 바로 위가 유생이었던 것이다. 몽고족 틈에서 자란 그도 시나 읊고 다니는 그런 책벌레들을 깔보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유생은 달랐다. 두 눈을 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서 살기를 앗 아가 버린 것이다. 벌거벗은 노인이 말했다. "저놈은 로부 옹고트의 첩자일 수도 있다! 아니라도 죽어야 한다! 천산의 제자가 아니다!" "천산의 제자라는 것이 자네는 좋은가?" 벌거벗은 노인이 움찔했다. "우리가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모양으로 돌아다니는 것 이 그 천산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 아니었던가?"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광장 안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한 사람이 서 있고 소리는 그에게서 났 다. "천산!" 광장 전세가 웅웅거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석두(石頭)는 반성하고 있다!" 견혼승망들이 바람에 횝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 들어온 사 람에게 몰려갔다. 삐익! 귀를 찢을 둣한 휘파람 소리가 벌거벗은 노인의 입에서 나왔다. 견혼승망들이 멈주었다. 그것들은 그 사람의 머리위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돌아와! 노인이 짧게 명령했다. 견혼승망들은 이 노인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짧은 명령 한마디에 간자기 얌전해지더니 분분히 날아와 석벽 에 내려앉는 것이다. 유생이 그를 바라보았다. "석두의 후예인가?" 그자는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복면도 아니고 단지 몇 벌의 옷을 껴입은 둣한 복장. 철저히 가려서 살갗도 드러내지 않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 분할 수 없었다. 얼굴을 싸맨 천 속에서 다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석두는 반성하고 있다!" * * * 그가 움직였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설흑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 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목이 떨어진 시체의 손가락이 움직이다니! 목이 떨어져 나갔어도 멀쩡한 사람보다 긴 시체, 혈오공의 시 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통로의 불은 이미 꺼졌다. 검게 그을은 통로 안에는 사람의 형체인지도 알아보기 힘든 혈지주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거기에서 이 장여 정도 떨어져 있는 통로의 중앙에 길게 누운 혈오공의 손가락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꿈틀거림은 팔로, 다시 어깨로 확산되었다. 스윽--! 혈오공의 양손이 바닥을 움켜잡았다. 그의 상반신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혈오공은 저만치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번쩍! 몸통을 잃어버린 혈오공의 머리, 검은 피가 말라붙은 그 머리 의 가운데 라힌 두 눈이 뜨여졌다. 혈오공의 손이 머리를 잡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두 손에 자신의 머리를 잡은 채였다. "흐흐흐?… 하하!" 어디에서 나오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두운 통로, 검게 침묵한 공기를 뒤흔들며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 * * "석두는 반성하고 있다!" 벌거벗은 노인이 눈을 빛냈다. 그가 지금 어이없어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 이상한 복장의 인간은 벌써 십여 마디째 똑같은 말만 반복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만해 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군." 벌거벗은 노인은 화풀이할 데를 찾았다는 듯 유생을 쏘아보았다. "사정은 무슨 사정! 석두놈이 꼭 자기 같은 놈을 보냈어!" 유생은 쓴미소를 지었다. 그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벙어리는 아닌데 똑같은 말만 반복 하다니……! 문득, 그는 몽고어로 물었다. "몽고는 할 줄 아나?" 아는 한어(漢語)가 그것밖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석두도 과거 몽고어밖에 몰랐었다는 것이 기억난 것이다. "석두는 반성하고 있다!" 애기가 안 되었다. 이상한 복장의 인간은 여전히 갈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유생은 하는 수 없다는 둣이 웃었다. 벌거벗은 노인이 투덜거렸다. "뭘 하라고 보냈는지 모르군." 문득 유생의 표정이 서글픈 빛을 띠었다. 석두가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이었나 보군. 노인도 그 말에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유생의 말대로라면 석두는 가장 정확한 전달자를 구한 것이다. 광장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혈문룡은 한쪽에 앉아서 이 이해 못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 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서 수하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생존자가 있 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문득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이상한 복장의 인간이 들어온 바로 그 통로로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소리쳤다. "괴물!" 광장 한쪽에 뚫어진 동굴 같은 통로로 철골강시 둘이 들어오 고 있었다. "저건 뭐냐?" 벌거벗은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생이 천천히 일어났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아니라는 것." 또 다른 목소리가 철골강시들의 뒤에서 나왔다. "예, 분명 인간은 아니죠!" 야광충이었다. 그리고 화영이었다. 그들이 철골강시의 뒤를 따라 광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혈문룡은 반룡도를 두 손으로 잡고 한걸음씩 철골강시들을 향 해 다가갔다. 이럴 때에 여의색자창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쉬욋다. 칼보다는 창이 힘을 쓰기에는 적당하다. 좁은 통로에서는 창을 사용할 공간이 없어 반룡도에 거의 전 적으로 의지했었다. 그런데 막상 공간이 넓어 반룡도보다는 여 의색자창을 사용하기에 적당한 상황인데 손안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 노인이 물었다. "내 제자 화영과 엽장청의 후예." 유생, 여문량이 대답했다. 야광충이 손을 저었다. "여노인이 잘못 말했군. 난 엽장청의 후예가 아니오."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는 게……." 화영이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철골강시들이 바로 뒤에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 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의 눈에 짜증스러운 빛이 스쳐갔다. "귀찮은 놈들이군." 순간적으로 야광충의 몸이 허공에 떴다. 쾅, 쾅, 쾅! 야광충은 철골강시의 면전에 바짝 붙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세 번 걷어찼다. 가슴, 목, 다시 가슴이었다. 철골강시 하나가 발이 땅에서 떨어져 뒤로 날려 갔다. "하나는 네가 맡어." 화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고 했어." 화영은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검을 뺐다. 달 그림자 같은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화영을 향해 다가들던 철골강시는 오른쪽 겨드랑이부터 왼쪽 목덜미까지 사선(斜線)으로 잘려져 나가 뒹굴었다. 야광충이 걷어찬 철골강시는 광장의 중앙으로 뒹굴고 있었다. 짐승몰이를 하듯이 야광충이 걷어차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쫌이면 됐겠지!" 야광충은 앞뒤 거리를 가늠하더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촹! 척혈구절대가 척혈구절검으로 변해 그의 손에 들렸다. 철골강시가 일어섰다.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늘어뜨리고 서서 철골강시가 다가오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광충의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여문량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야광충이 지금 화영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도 일검에 철골강시를 동강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잘 될까?'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철골강시가 한걸음을 더 다가오고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휘 둘러 철골강시의 허리를 잘라갔다. 펑! 철골강시가 뒤로 삼 장은 굴렀다. 그리고 바둥거리며 일어서는 그 철골강시의 허리는 절반 가량 부서져 있었다 여문량이 중얼거렸다. "무지막지하군." 야광충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여문량이 말했다. "검을 빨리만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정(精), 기 (氣) , 신(神)이 검과 그 검을 휘두르는 사람 속에 하나로 깃들 여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일검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이다." 야광충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는 허리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다가오는 철골강시를 밉살스 레 바라보며 뇌까렸다. "깨끗하게 자르는 방법은 그것말고도 많이 있지." 취리릿--! 그의 왼손에서 인명권이 날았다. 동시에 그의 몸이 철골강시를 둘러싼 큰 원을 따라 쏘아졌다. 철골강시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인명권으로 목을 감고 한 바퀴 회전하며 그 회전력으로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혈문룡은 반룡도를 든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신도 그 괴물들을 넷이나 제거했지만 저렇게 간단하게는 아니었다. 이들은 지금 장난치둣 괴물을 베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결과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절대 같을 수 가 없다. 적어도 이 둘은 혈문룡 그 자신보다 한단계 위의 무공을 가지 고 있다. 옆에서 놀라지도 않고 구경하는 두 노인도 아마 그럴 것이다. 야광충이 여문량을 힐끔 바라보았다. 여문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이게 뭔지 아는 것 같구나?" 화영이 대답했다. "철골강시라고 하더군요." 벌거벗은 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폭사되었다. "누가 그러더냐?" 화영이 그를 향해 포권했다. "사숙(師叔)을 뵙습니다." 노인은 그의 인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러더냐?" 같은 말을 되풀이해 묻는 것이다. "엽장청!" 야광충이 대답했다. 노인이 그를 쏘아보았다. "넌 누구냐?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엽장청은 어디 있느냐?" 야광충이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 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이의 눈에서 번뜩이던 신팡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건방진……, 내가 누군지 알고……?" 야광충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귀조겠지!" 노인이 입을 달싹거렸다.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야광충이 그를 알아보는 데에 놀란 모양 이었다. 그는 분노를 삭이며 다시 물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인지도 알겠나?" "로부 옹고트에게 당했겠지!" "어떻게 알지?" "엽장청과 같은 꼴이니까!" "크-- 하하하하--!" 귀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한(恨)이 배여 있는, 미친 듯한 웃음! 혈문룡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내공이 담긴 소리는 아닌데 이상하게 골수까지 파고드는 둣한 듣기 싫은 웃음소리였다. 견혼승망들이 분분히 날아오르고 혹표가 일어나 어슬렁거렸다. 쾅--! 석벽의 한 부분이 폭발하둣 터져 나갔다. 그 무너진 돌틈으로 철골강시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또야?" 혈문룡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도대체 이놈의 괴물들은 몇이나 되는 거야?' 막 들어온 철골강시가 팡장 안을 둘러보는 듯했다. 문득 혈문룡은 깨달았다. '바로 그놈이다!' 새로 들어온 놈은 철골강시가 아니었다. 그를 일격에 날려 버린 바로 그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철골강시라는 그 괴물보다 백 배는 단단한 놈인 것이다. '내가 끼여들 일이 아니군.' 그는 여기 다섯 명이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두고 보기 로 했다. 그들이 실패한 뒤에 자신이 나서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 자신까지 죽는다 하더라도 이 괴물은 반드시 없애야 했다. 그의 수하들을 적어도 열 명은 무참하게 죽여 버린 괴물인 것 이다. "뭔가 다르군." 역시 화영이 가장 빨랐다. 그는 지금 들어온 자가 아까의 철골강시와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고 느낀 것이다. "시험해 보면 알겠지." 야광충은 양손으로 척혈구절검을 잡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 들린 척혈구절검이 새로 들어온 괴물의 머리를 향 해 수직으로 내려쳐졌다. 깡--! 척혈구절검이 튕겨 나갔다. 야광충은 하마터면 검을 놓쳐 버리는 창피를 당할 뻔했다. 손바닥이 찢어질 둣 아파왔던 것이다. 괴물이 한걸음 나서며 주먹을 휘둘렀다.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야광충을 향해 휘두른 주먹이었다. 야광충은 그 주먹을 향해 발을 뻗었다. 화영이 한 줄기 그림자로 변해 괴물의 겨드랑이 사이로 스쳐 갔다. 촨--! 괴물의 겨드랑이 사이로 옷깃이 날렸다. 그 사이에 화영은 일검을 날렸던 것이지만 괴물의 옷깃을 베 는 정도로 그친 것이다. 야광충의 발이 괴물의 주먹과 부딪쳤다. 야광충은 뒤로 오 장 가량 날아갔다. '죽었군.' 혈문룡은 괴물의 막대한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광충이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광충은 마치 오뚜기가 서듯이 바닥에 꼿꼿이 내려앉 았다. 그는 발로 괴물의 주먹을 걷어찬 것이 아니라, 나오는 괴물의 주먹을 찌르며 그 반탄력으로 뒤로 피한 것이다. '약은 놈이군.' 바로 그때 화영이 괴물의 겨드랑이를 스쳐지나가며 받은 반탄 력으로 잠시 비틀하는 모습이 보였다. 괴물은 지나치게 단단했다. 화영의 검을 튕겨 내고 중심을 잃게 만들 정도였던 것이다. "천강시!" 야광충이 소리치며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인명권이 날았다. 천강시는 손을 들어올렸다. 촤앙! 인명권이 그 손에 맞아 튀어 나갔다. 화영이 다시 천강시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촤악! 이번에도 검 옷자락만을 베었다. 베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천강시의 살갗에는 단지 한 줄 기 붉은 흔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귀조가 여문량을 향해 말했다. "도와 주지 않아도 되나?" "애들끼리 하게 둡시다. 그리고 사실은……." 여문량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다지 자신이 없는걸." "말도 안 되는……!" 귀조는 믿을 수 없다는 라이었다. 여문량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장내에서는 야광충이 척혈구절검으로 천강시를 두들기고 있었다. 여문량이 보는 견지에서 제대로 된 검은 분명 아니었지만 손 이 빠른 것 하나만은 인정해야 했다. 한 자루 검이 마치 수십 자루로 변한 것처럼 천강시의 온몸을 때리고 베고 찌르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천강시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화영은 야광충이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했을 때만 잠깐 나서 서 주의를 돌려 줄 뿐 대체로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소용없는 공격을 계속 하기는 싫은 것이다. 그때 석두의 후예가 나섰다. 그는 삼 장 밖에서 한걸음을 내디디며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펑! 천강시가 뒤로 날려 갔다. 석두의 후예는 놀랍게도 권풍(拳風)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허공을 격하고 충격을 주는 방법이란 없었다. 보기 드문 경지의 무공이었지만 천강시에게 통하지 않기는 마 찬가지였다. 천강시는 전혀 충격을 받은 흔적이 없이 다시 일어서서 그들 에게 달려들었다. 석두의 후예가 천강시에게 마주 달려갔다. 천강시가 주먹을 뻗었다. 석두의 후예가 주먹을 마주 뻗었다. 이번에도 천강시가 날려 갔다. 그리고 다시 덤벼들었다. 석두의 후예는 두 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그 손에서 금광이 번쩍였다. 따다당! 천강시의 가슴팍 옷자락이 폭발하둣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가슴팍에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석두의 후예는 일종의 탄지신공(彈指神功)을 사용한 것이다. 야광충이 그 옆으로 떴다. 그의 손에 들린 척혈구절검이 천강시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천강시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화영이 천강시의 정면으로 다가서며 일검을 찔렀다. 여태 검신으로 베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검봉을 사용한 찌르기 를 한 것이다. 천강시의 목이 깊이 패였다, 천강시는 연속적인 세 번의 타격에 의한 충격으로 발이 허공 에 떠서 이 장 가량 날려 갔다. 화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래도 소용이 없군." 베는 것과 찌르는 것에는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할 정도로 위 력의 차이가 있다. 베어서 안 되는 것도 찔러서는 뚫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천강시에게는 역시 소용이 없었다. 야광충이 뒷짐을 지고 쓰러진 천강시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 었다. "충격을 주었다는 정도로 만족을 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겠지?" 화영이 물었다. "방법이 있을까?" "지금부터 생각해 보자." 화영이 석두의 후예를 돌아보았다. "당신에게는 흑시?" 석두의 후예가 대답했다. "석두는 반성하고 있다!" 화영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야광층이 말했다. "그에게는 물어도 소용이 없을걸. 적어도 한어로 물어서는!" "이 사람을 아는 것 갚은 말투군!" "어디서 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천강시가 일어서고 있었다. 야광충이 갑자기 석두의 후에를 돌아보며 이상한 말을 했다. 화영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야광충은 천강시를 향해 걸어갔다. "한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보자고." 그는 인명권을 뻗어 천강시의 목을 감았다. 천강시가 두 손으로 인명권에 연결된 줄을 잡았다. 야광충은 몸을 뒤로 빼며 인명권을 잡아당겼다. 그는 또다시 화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했다. 석두의 후예가 야광충의 옆으로 달려와서 야광충의 손을 잡고 함께 당겼다. 파바바박! 인명권이 거친 소리를 내며 회전하더니 천강시의 목을 긁으며 빠져 나왔다. 천강시는 제자리에서 서너 바퀴 회전했다. 마치 팽이에 줄을 감고 당겼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한번 더!" 야광충이 소리치며 인명권을 다시 날렸다. 천강시의 목에 인명권이 감겼다. 파바바박! 한번 더 천강시는 팽이신세가 되었다. 화영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강시의 옆을 스치며 검을 날렸다. 처음으로 피가 튀었다. 천강시의 목에 한 치 깊이의 상처가 난 것이 보였다. 인명권에 박힌 금강석이 긁은 자리를 화영의 검이 다시 베었 던 것이다. 그 상처에 손가락이 와서 박혔다. 석두의 후예였다. 야광충은 인명권으로 천강시의 두 팔을 얽었다. 화영이 처음으로 달갑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난 다리라도 잡아야 하나?" 그리고 실제로 다리를 잡았다. 드드득! 대단한 완력이었다. 석두의 후예 손안에서 천강시의 목이 뜯겨지고 있었다. 천강시는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힘으로 바둥거렸다. 야광층이 석두의 후예에게 척혈구절검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식두의 후예가 척혈구질검을 들어올리더니 수직으로 쩍었다. 적어도 내공(內功)의 측면에선 그가 가장 고수였던 모양이다. 여태까지 흠집도 못 내던 척혈구절검이 천강시의 목에 깊이 박혀 들어간 것이다. 천강시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바둥거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는 못했다. 석두의 후예가 그의 머리와 몸을 완전히 분리시켜서 손에 드 는 것으로 바둥거림은 끝났다. 야광충은 인명권을 풀며 물러섰다. 화영도 다리를 놓고 물러섰다. 귀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로부 옹고트의 회답인가?" 여문량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경고겠지." 혈문룡은 반룡도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이떻게 무식하게 싸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저런 고수들의 합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더 더욱 저런 고도(高度)의 무공에 의한 지극히 저질적인 합 공을 보는 것은 정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혈문룡이 보기에 극히 저질적인 합공을 했던 세 사람, 화영과 야광충, 그리고 석두의 후예라는 인물이 광장 중앙으로 걸어 들 어왔다. 귀조가 손을 들어 야광충을 불렀다. "이리 와봐!" 야광충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귀조에게로 가지 않았다. 그가 있는 반대방향, 연못쪽으로 그는 걸어갔다. 귀조의 눈빛이 다시 노기로 물들었다. "아묘(亞猫)!" 검은 표범은 야광충이 들어설 때부터 나직이 으르렁거리고 있 었다. 자세히 살펴본다면 표범의 아랫배에 난 상처자국을 볼 수 있 을 것이다. 바로 야광충이 만들어 준 상처였다. 마침 귀조가 부르자 검은 표범, 아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까 혈문룡을 상대할 때의 몇 배에 달하는 살기가 아묘의 검 은 털 위로 홀렀다. 야광충은 뒤로 돌아 검은 표범을 향해 섰다. 검은 표범의 두 눈에서 파란 광채가 불타올랐다. 살기에 가득 찬 맹수의 눈빛이었다. 어느새 야광충의 눈빛도 파랗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묘하게도 표범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눈밍이었다. 검은 표범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파란 광채와 야광충의 눈 빛이 마주쳐 불꽃이 튀는 둣했다. 살기는 점차 짙어지고 야광충의 전신 근육이 펑팽해졌다가 다 시 이완되었다. 자세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는데도 도약 직전의 맹수처럼 잔뜩 움츠린 느낌을 주었다. 야광충은 여기 광장에 들어올 때부터 왠지 기분이 나빴었다. 그것은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산파와 이상하게 연관된다는, 그리고 그 연관이 점점 강해져 간다는 느낌 때문이 었다. 귀조가 그를 마구 대하는 것도 불쾌했다. 그가 그를 그렇게 대할 하둥의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여태 사 부와 사형 이외의 그 누구도 윗사람이라고 인정해 본 적이 없었 던 것이다. 야광충은 어쩐지 불쾌해지는 기분을 배출할 곳을 찾고 있었다. 마침 이 덩치만 커다란 고양이가 그에게 발톱을 드러내다니……! 그는 이 고양이를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야광충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검은 표범의 살기는 점차 사그라 들었다. 야수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굴복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야광충은 그보다 강했다. 낮에도 표범은 야광충에게 다쳤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기세에 눌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 두는 게 좋겠군!" 여문량이 그들 둘의 중간에 서 있었다. "이미 자네가 이겼으니 굳이 피를 볼 이유는 없겠지?" 야광충은 표범에게서 눈을 떼고 여문량을 바라보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여문량에게서 야광충은 이상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결코 누르거나 위협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도 그와 마주 대하 면 기세가 꺾이는 힘이 여문량에게는 있었다. 그는 묵묵히 한걸음 물러나서 팔짱을 꼈다. 더 이상 그들의 일에는 상관을 않겠다는 의지가 완강하게 풍 겨졌다. 여문량은 고개를 저으며 검은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놈이 예전에 자네가 데리고 있던 그놈인가?" 귀조는 여전히 못마땅하게 야광충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가 어째서 자네에게 아묘까지 데리고 있게 하는 선심을 베 풀었지?" "굶어 죽지 말고 살아서 오래오래 고통을 받으라는 뜻이겠지!" "호오……, 그럼 아묘가 사제의 식사를 해결해 줬단 말인가?" "요리 솜씨는 없었지만!" 표범이 요리를 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짐승들을 잡아와 그에게 바쳤던 것인데, 그나마 그 날고 기라도 없었다면 귀조가 여태 살아 있었을 리가 없었다. "견혼승망들은?" "여기에서!" 그것은 귀조에게 하나의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 갇힌 지 몇 년이 홀렀는지 모를 어느 날, 그는 갈라진 석벽의 틈에 이 견혼승망들이 번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중독을 걱정하며 끊임없이 경계를 해야 했지만, 곧 그는 이 위험한 파리떼를 다루는 방법을 깨달았다. "소리!" "응?" "바로 휘파람 소리가 이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 었지!" 귀조는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그렇기도 할 것이다. 죽음의 위협을 그는 강력한 힘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여문량은 속으로 탄식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들 천산오조 중에서 무공은 약했지만 가장 박학다식 한 사람이 귀조였다. 그러나 그는 박학다식한 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했었다. 사형제들에 비해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것, 그리고 자신만 이 렇다 할 독문(獨門)의 장기가 없다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한 그는 어느 날부터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무공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천산파에서는 가장 취약한 권장지각(拳掌指脚)의 무공 이었다. 그는 각파의 권법, 지법, 장법, 그리고 금나술까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 늙어서 새로 시작한 무공연마가 제대로 진 행될 리가 없었다. 그는 실패만을 거듭했고, 진보도 없었다. 거듭된 실패가 그렇잖아도 괴팍하고, 고립된 그의 성미를 더 욱 외곬로 치닿게 했을 때, 그들 사형제는 이미 서로 멀어져 있 었다. 그나마 덜 싫어했던 그에게 어느 날 흥분해서 한 이야기를 여 문량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힘의 모임과 홑어짐, 방향과 속도를 읽는 데에, 그러니까 힘의 흐름을 읽는 데에 단서가 있었어! 그리고 삼십 년, 이 외로웠던 사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그 도 몰랐다. 로부 옹고트의 초청으로 온 이곳에 그가 이렇게 갇혀 있을 줄 은 진정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로부 옹고트가 얼굴도 대하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위 협을 하고 들 줄도……!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혈문룡이 일어섰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 흑룡사가 이렇게 당한 거냐?" 혈문룡은 절규(絶叫)하고 있었다. 그들 흑룡사가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목표였다. 이들을 죽이기 위해 괴물들이 동원되었고, 또 이들을 죽이기 위해 몽고군이 떼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 흑룡사는 무엇인가? 왜 그들이 죽어야 했던가? 혈문룡은 허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생애에 이렇게 참담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문득 그가 돌아섰다. "난 나가겠어!" 시종일관 차갑게 그를 보던 야광충이 한마디 내뱉었다. "나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해라!" 혈문룡은 나갔다. 귀조가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 "억울하게 당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당신들 천산파와 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그는 귀조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대단한 사형을 두었군. 그 대단한 사형이 당신들이 그냥 빠져 나가게 두었을 거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군." 여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지." 귀조가 소리쳤다. "넌 도대체 누구냐? 엽장청과 관계도 없는데 왜 그의 물건을 가지고 있지? 그러고도 천산파의 제자가 아니냐?" 야광충이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한꺼번에 질문하는 걸 좋아하는 늙은이군. 간단히 대답해 주 지. 난 야광충이고 이 물건은 주운 거야."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광장을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11장 밤, 사막 그들은 잠시 말을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야광충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군!" 그들의 앞에 사막의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모든 것 은 단지 몽고군의 진영뿐이었다. "그놈은 원래 치사한 놈이었어. 대단한 놈이 절대 아니지." 야광충의 뒤를 따라 나온 귀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여문량의 장포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가 어떻게 쇠사슬을 풀었는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도 엽장청이 묶여 있던 것과 같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면 그 쇠사슬을 푸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엽장청 이 그랬듯이……. 아마도 여문량의 검이 뭔가 조화를 부렸으리라. 그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는 총옥주가 시킨 일을 하면 끝나는 것이다. 몽고군과 싸우는 것은 그의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귀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오랫동안 쇠사슬에 어깨를 뚫려 있덧던 몸으로 휘청거리 며 몽고군의 대열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귀조의 걸음걸이에선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혹은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모래에 발을 빠져 가며 무건게 걷고 있는 귀조를 보면 구십 노인으로는 안 보겠지만, 무공을 익힌 고수로도 역시 볼 수 없 는 상태였다. 귀조가 소리쳤다. "로부 옹고트! 로부 옹고트를 불러라!" 몽고군 진영에서 일기(一騎)의 기마가 앞으로 나섰다. 완전무장한 군관이었다. 그의 손에는 긴 창이 들려 있었다. 귀조가 다시 소리쳤다. "로부 옹고트! 거기 있지! 숨지 말고 나와라!" "핫--!" 두두두두! 몽고기마가 긴 창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이 초라한 노인을 토끼잡둣 꿰어 버릴 심산인 것이다. 모래먼지가 자욱이 일어났다. 말이 발굽을 높이 들고 귀조를 밟아 버릴 듯 덮치고 있었다. 몽고군 군관의 창이 높이 들렸다가 내리찍어졌다. 귀조의 가슴을 향해서였다. 귀조는 서 있기조차 힘이 든 둣 허리를 구부리더니 말의 앞발 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끼히히히힝! 말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말은 허공에서 완전히 한 바퀴 회전했다. 그리고 모래바닥에 그 위에 탄 군관과 함께 처박혔다. 귀조는 놀랍게도 말의 발굽을 건드리는 것만으로 말과 사람을 동시에 뒤집어 버린 것이다. 몽고군 진영에서 경이에 가득 찬 탄성이 들려 왔다. 여문량은 고개를 저었다. "평생 저것만 연구하더니 결국 이루었군." 혈문룡이 더듬더듬 물었다. "저게 무슨 마술(魔術)이오?" 그는 일행 중 가장 먼저 나왔지만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몽고군의 군세에 기가 질려 서 있었던 것이다. 여문량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전륜나(轉輪拿)라고 하더군." 몽고군 진영에서 다시 두 필의 말이 달려 나왔다. 귀조는 그 전륜나를 사용해서 그들마저 뒤집어 버렸다. 다시 탄성이 울려퍼졌다. 처음의 군관은 말과 함께 모래바닥에 처박혀서 목이라도 부러 졌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번의 군관 두 명은 미리 대 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재빨리 모래에서 일어나 칼을 빼어 들고 귀조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랗게 뒤로 휘어진 만도(蠻刀)가 귀조의 목을 베어 갔다. 귀조는 손을 들어 만도의 옆면을 툭 건드렸다. 군관 두 명이 동시에 제자리에서 맴돌며 부딪쳤다. 야광충은 무너진 성벽 돌 위에 앉아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대군(大軍)에 둘러싸인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편한 자 세였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있던 혈문룡이 그를 힐끔 보았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야광충의 모습이 고까웠던 것이다. "몽고군이 여기를 치면 너만 무사할 것 같으냐?" 야광충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나완 상관없는 일이야." "왜?" "나는 살 수 있으니까." "어떻게?" "두고 보면 알게 돼.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걸 볼 때까지 네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혈문룡은 기가 막힌지 더 이상 말을 않았다. 이때 몽고근 진영에서는 십여 기의 기마가 더 나오고 있었다. 야광충이 중얼거렸다. "데리고 놀고 있군." "저게 데리고 놀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혈문룡이 보기에는 상황은 몽고군에게 망신스러운 쪽으로 가 고 있지, 결코 귀조가 당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몽고의 철기병(鐵騎兵)이 일개 노인에게 여지없이 당하고 있 는 것이다. "몽고군은 당하고 있을지 몰라도 로부 옹고트는 당하고 있지 않지." 혈문룡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야광충을 바라보았다. 야광충이 설명했다. "저 몽고군의 뒤에는 분명히 로부 옹고트가 있다. 그는 압도 적인 군세에는 어떤 고강한 무공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 같군." 몽고군 기병 십여 기는 이미 귀조의 손아래 반 이상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귀조는 '전륜나'라 불리는 그 이상한 기술 외에는 별다른 무공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변 말 위에서 창을 휘두르고 일변 오래 위에 내려서서 칼을 들 고 달려드는 몽고군의 군사들에게 근근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군." 여문량이 앞으로 나섰다. 몽고군의 기병들이 그에게도 달려들었다. 여문량은 모래 위를 천천히 걸으며 검을 빼어 들었다. 그믐날의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장검을 든 여문량이 모래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장검의 끝을 비스듬히 오른쪽 발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이십여 기의 군마들이 그를 밟아 버릴 둣이 달려왔다. 그 속에서 명상을 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여문량이 눈을 떴다. 깊은 우물처럼 고요히 가라앉은 여문량의 눈에 몽고군의 기병 들이 비치는 것 같았다. 여문량은 장검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그었다. 크아아악!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몽고기병 하나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모래 위로 굴렀다. 여문량은 검을 돌려서 휘두르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또 한 명의 기병이 말과 함께 모래 위로 처박혔다. 여문량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산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는 살기도 투지도 급박한 상황에서 당연히 느껴져야 할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자유롭게 손이 가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검끝에서 공간이 갈라지고 사람이 죽어갔지만 그것은 마치 희디흰 화선지에 그려지는 매화나무의 가지처럼 의미없어 보였다. 그 속에는 처절함도, 단말마의 비명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여문량은 검 자체였고, 그 검에 빠져 있는 정신의 집결체(集 結體)였다. 대막의 모래바람이, 그리고 말발굽에서 피어 오르는 모래먼지 가 한 순간 숨을 죽였다. 몇 천을 헤아리는 몽고군들이 한 순간에 벙어리가 된 듯이 침 묵하고 있었다. 이럴 때 여문량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멈추어지고 심지어 시 간마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야광충은 경이에 찬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바로 저것이다!' 얼마 전 그가 보았던 바로 그 검술. 여문량의 검끝에서 꾈쳐지던 상상할 수 없는 검(劍)의 예술 (藝術). 바로 그것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귀조의 전륜나는 신기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소위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 흑은 무형의 힘, 전륜나는 그런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움직일 새는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갖는다. 그 힘의 방향, 그리고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조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 은 것이다. 그러나 여문량의 검은 달랐다. 한 자루 검으로 수십 명의 적을 상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는 않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완벽하고 아름답게 검을 휘두르는 것은 단지 기술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져 있던 장내의 움직임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몽고군의 진영에서부터였다. 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던 몽고군의 진영 한가운데가 갈라지면 서 거대한 가마가 요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가마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야광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검은 천으로 만든 넓은 포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눈구멍 하나 뚫어 놓지 않은 검은 포대 였다. 그것이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그 속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반갑군, 사제들. 나는 오랫동안 여러분을 걱정해 왔네. 이제 여기 모인 걸 보니 우리 사형제들이 다시 함께 모여 살 때가 되 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군." "더러운 소리 하지 마라, 로부 옹고트!" 귀조가 넘어진 말들 틈에서 몸을 일으키며 절규했다. 아무리 전륜나가 자신의 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이한 무 공이라 하더라도 모래밭에서 십여 기의 군마와 군사들을 헤치며 싸운 뒤끝이라 극도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 틈으로 원한에 찬 눈빛을 번득이며 로부 옹고트, 가마 위의 검은 포대를 뒤집어쓴 사람에게 다가가 며 소리켰다. "우리가 이 꼴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그 따위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거냐?" "누구 때문이냐, 사제?" 로부 옹고트가 담담하게 물었다. "중원의 변방, 거칠고 황량한 천산 산맥의 모퉁이에서 찬바람 만 마시고 있던 천산파를 지금 중원의 난다긴다하는 명문세가들 과 어깨를 겨룰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냐? 천산, 그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 때 소위 정통무공의 수호자라고 일 컬어지는 오대검파(五大劍派)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한 것이 누구냐?" 그의 말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바로 나의 아버지, 황이자의 덕이고 천산의 대장로인 내 덕이 고, 내 제자 천산장문인 아루타이의 덕이 아니냐? 무엇보다도 그 렇게 되기까지 천산파를 밀어 준 우리 몽고족의 덕이 아니냐?" 여문량이 앞으로 나섰다. "사형, 사형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천산파 가 한족에게 한간(漢奸)으로 내몰리고, 몽고족에게는 이방인으 로 내몰리고, 중원의 명문세가들에게는 상궤(常軌)를 벗어난 편 벽지공(偏僻之功)으로 내몰리는 것이 누구의 잘못이오?" 로부 옹고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검은 포대의 윗부분이 움직인 것이다.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사형의 탓만은 아니오. 우리 모두가 어리석었던 탓이오. 나 도 반성하고 있소." 여태 말없이 서 있던 석두의 후예가 갑자기 소리쳤다. "석두는 반성하고 있다!" 여문량이 그를 힐끔 보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잘못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사형이 지 금 하려고 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이 될 것이오."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다는 건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사형이 지금 하려는 모든 일이 다 잘 못이오." "내가 몽고족의 힘을 다시 모아서 중원을 수복하려고 하는 것 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것이 왜 잘못인가?" "천산파는 비록 변경의 외진 곳, 몽고족의 땅 한쪽에 자리잡 고는 있지만 그 뿌리는 중원을 향해 뻗어 있소. 천산파는 결국 에는 중원인의 것이라는 뜻이오. 더 이상 중원인에게 폐가 되는 일을 할 수는 없소." "크하하하……!" 로부 옹고트는 웃었다. 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대막의 밤하늘 아래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천산파가 중원의 것이라고? 조사(祖師)는 그럴지 모른다. 중 원인일 수도 있겠지. 아니 분명 중원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 원을 사랑했을까? 설마 너도 입문자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천산 파의 조사는 천지(天池)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한 신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여문량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사는 중원에서 쫓겨난 자였다. 바로 동족(同族)들에게 내 몰려 변황의 끝, 천산에까지 개처럼 쫓겨온 것이다. 그가 몽고 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천산파를 세울 수 있었을까?" 사위는 조용하고 오직 로부 옹고트의 목소리만이 낭랑하게 퍼 져 나갔다. "모든 것을 다 제쳐 두고라도 내가 몽고족을 위해 충성을 바 치는 것이 왜 잘못이냐? 나는 몽고족이고 그것도 파란 이리 징 기스칸의 직계자손, 볼지깅족의 후손이다! 나도 중원을 사랑한 다. 그 맑은 물과 비옥한 토지, 수없이 많은 옛정신의 흔적들을 사랑한다. 오히려 너보다도 더 너는 검 한 자루만을 모든 것으 로 여기었지만……." 귀조가 비웃었다. "그래서 중원을 삼키겠다는 거냐?" "그렇다!" "말이 안 되는군." 귀조는 여문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앵무새 새끼와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온갖 감언이설 (甘言利說)로 사람을 미흑시켜려 하는군." 그는 다시 로부 옹고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내가 어린앤 줄 아나? 내가 아직도 네 감언이설에 속아넘어 갈 줄 알았나? 네 말대로 한족이니 몽고족이니는 집어치우고라 도 나와 엽장청에게 한 소행만으로도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런 참흑한 짓을 하고도 사형이라고 할 수 있느냐?" 로부 옹고트가 손을 들어올렸다. 포대가 움직였다. 그러나 귀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도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는 거냐?" "사형이니까!" 로부 옹고트가 거칠게 귀조의 말을 잘랐다. "사형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천산파의 장래를 위해서 너와 엽장청을 징계한 것이다. 사형이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너희들과 가장 가까운 사형이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징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조는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저런 가증스러운……!" 로부 옹고트는 계속 말했다. "명백한 오류를 보고도 고쳐 주지 않는다면 더 큰 잘못을 저 지르고야 말 것이다. 너희들은 분명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나 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여문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류는 사형이 범하고 있소. 우리 역시 사형의 오류를 그냥 은 두고 볼 수가 없소." "정도(正道)가 무엇인가? 몽고족을 따르는 것이다. 오류는 무 엇인가? 몽고족을 배반하는 것이다. 몽고의 터전에 자리잡고 있 으면서 몽고족을 배반하는 것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오류다. 너회들이 지금 하는 짓이 바로 그것이다." 여문량이 검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나는 말로는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있다고 사부에게 배웠었 소. 그러나 계속 믿지 않고 있었지요. 나는 사형의 말대로 한족 도 모르고 몽고족도 모르고, 또 알 바도 없다고 생각을 했었소. 내게는 이 검 한 자루만이 모든 것이었지요. 그러나 사형은 용 서할 수가 없소. 나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으로 이 검을 선택하겠소." 로부 옹고트가 가마 위에 놓인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해결은 너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산파 대장로의 권위로 너회들을 징계하는 젓이다. 해결은 내 손에 달린 것이 다. 네 말대로 너는 검을 들어라. 나는 너를 내 방법으로 징계 하는 바이다." 그가 가마 위의 의자에 앉자 가마가 천천히 뒤로 움직여 갔다. 동시에 몽고군의 진영이 전진챘다. 귀조가 절규했다. "끝까지 비겁한 놈! 네가 직접 나와라!" 그러나 더 이상 그에게서는 응답이 없었다. 대막의 지평선 위로 모래먼지가 치솟고 있었다. 일만에 달하는 대병식이 고란고성올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그 들의 정면에 있는 일천의 기병이 진군해 오고 있는 것이다. 여문량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 귀조의 옆에 섰다. 화영이 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석두의 후예가 그 뒤를 따랐다. 혈문룡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야광충을 보며 물었다. "왜 안 나가지?" 야광충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바보짓 하기 싫으니까!" "뭐가?" "제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다수에게는, 그것도 체계적으로 훈 련을 받은 병력에게는 당할 수가 없지. 나가서 뻔히 죽을 텐데 왜 나가겠어?" 혈문룡이 그를 밉살스레 보더니 앞으로 나섰다. "난 나가야겠어!" "어리석군." 야광충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몽고군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웃었다.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살아야 할 때 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그는 두 손을 턱에 괴고 훙미진진하다는 듯 장내의 변화를 바 라보았다. 고란고성 외곽, 대막의 모래밭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잠시 였다. 싸움은 야상충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일시직으로는 여문량과 화영의 검 앞에 다가들 수 있는 사람 이 없었다. 그들이 가는 곳에 길이 만들어지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말이 다가서면 말이, 사람이 다가서면 사람이 둘로 셋으로 갈 라 나갔다. 복잡한 변화도 없고 기이한 위력도 그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 었다. 단지 휘두르고 베고 찌르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이 상대의 동 작과 동작 사이로, 무기와 무기 사이로 미끄럽게 파고들어 목숨 을 끊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귀조는 대열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아수라장을 만드는 데 크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가 건드리는 것마다 넘어지고 고꾸라졌다. 그는 거대한 말도 강한 무기도 무력화시키는 힘을 손끝에 가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대면 사람도 말도 마치 무게가 없는 깃틸처럼 날려 져 버렸다. 혈문룡 역시 처음에는 굉장한 활약을 했다. 그는 이런 싸움에 지극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말을 뼛어 타고 창을 뺏어서 휘둘렀다. 그러다가 말이 넘어지면 달처럼 휘어진 반룡도를 휘둘러 말의 다리를 베어 넘겼다. 그는 피에 굶주린 아수라 같았다. 충혈된 눈, 산발한 머리로 반룡도를 움켜쥐고 달려드는 모습 은 지옥의 악귀(惡鬼)와도 같았다. 석두의 후예에게 가까이 다가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먹을 뻗고 손바닥을 내어 치는, 그리고 발을 뻗고 뛰어오르 는 동작마다 서너 명씩의 몽고군들이 모래 위로 뒹굴어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력과 지풍에 몽고군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 넘어졌다. 그러나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베어 넘길 수 있는 수에 도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림인들의 싸움은 소수와 소수의 싸움이지 다수 와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우선은 점차 지쳐 갔고, 다음으로는 난전(亂戰) 중에 엉겨 붙는 몽고군들의 무리들 때문에 제대로 공간을 확보할 수 가 없었다. 우선은 귀조가 쓰러졌다. 그는 이런 거친 싸움을 오래 지탱할 체력이 없었다. 십여 년간 어깨를 쇠사슬에 뚫린 채로 갇혀 있었던 그가 이 정도로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여문량이 귀조의 옆으로 다가갔다. 발치에 걸리는 것들은 모두 시체였다. 여문량은 그 시체들을 밟고 뛰어올랐다. 말에 올라타 창을 쓰는 상대들 앞에서 허공으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바보짓이었지만 귀조에게 빨리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가 없었다. 허공에 뜬 그를 향해 몇 자루의 창이 내밀어졌다. 그는 허공에서 그 중 한 자루를 찍어 내리며 그 반탄력으로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누군가가 그를 향해 쌍수도(雙手刀)를 휘둘렀다. 길이가 칠 척. 그 중 날의 길이만 삼 척에 달하는 날카로운 쌍수도였다. 여문량은 허공에서 맴을 돌며 한 바퀴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 둥근 핏자국이 생겼다. 쌍수도를 휘두르던 자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은 것이다. 여문량은 그가 타고 있던 말을 밟고 귀조의 옆으로 내려섰다. 귀조의 바로 효에서 창을 내리찍던 몽고의 군관이 여문량의 눈에 들어왔다. 여문량은 검을 내밀어 그 창대를 잘랐다. 그러나 이미 창끝은 귀조의 허벅지로 파고든 뒤였다. 여문량은 귀조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끼히히힝! 말 한 마리가 효발이 잘려 나가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위에 고 있던 몽고군이 넘어지는 와중에서도 거대한 참 마도(斬馬刀)를 그에게 찔러 왔다. 여문량은 검을 휘둘러 참마도를 튕겨 내었다. 이때 또 한 명의 몽고군이 쓰러져 있는 귀조를 향해 칼을 휘 두르고 있었다. 여문량은 참마도와 부딪친 반탄력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는 귀조의 몸위로 쓰러지며 검을 가슴앞에 모아 칼을 막아 내었다. 몇 자루의 창이 그를 동시에 찔러 왔다. 여문량은 허공을 보고 누운 채로 검을 둥글게 휘둘러 그 창끝 들을 튕겨 내었다. 몽고군관 한 명이 두 손으로 만도를 잡고 말 위에서 뛰어내리 며 수직으로 휘둘렀다. 여문량은 왼손으로 귀조를 잡고 옆으로 몸을 굴리며 검으로 허공을 그었다. 피가 튀어 그와 귀조에게 쏟아졌다. 창날이 그들에게 다시 모였다. 혈문룡은 모래 위에서 뒹굴었다. 눈앞으로 말의 단단한 발굽이 보였다. 그는 칼을 내밀어 두 다리를 동시에 잘라 버렸다. 말이 그의 몸위로 넘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모래 위 에서 뒹굴어 그 말을 피해야 했다. "죽어라!" 혈문룡의 머리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말과 그 말에 탄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거 대해 보였다. 마치 하늘 끝에서 벼락이 내리치둣이 날카로운 창끝이 그의 얼굴 정면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혈문룡은 반룡도로 자신의 몸위를 쓸 듯이 휘두르면서 간신히 그 창끝을 튕겨 내었다. 그러나 창은 그의 주변에 한 자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창이 그를 향해 내리꽂히고 아까 빗나갔던 그 창도 다시 그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높이 치켜 들며 몸을 뒤집었다. 칙! 그의 옆구리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창대를 잡았다. 또 한 자루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꽂힌 창을 옆으로 잡아당기며 반룡도를 휘둘렀다. 피가 튀고 창은 그의 뱃가죽을 길게 찢으며 옆구리에서 빠져 나갔다. 동시에 그 창을 잡고 있던 몽고군도 말에서 떨어져 뒹굴었다. 혈문룡은 몸을 뒤집으며 모래 위에 누운 채 반룡도로 옆에 뒹 구는 몽고군의 목을 쳐 버렸다. 죽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는 필사적인 몸짓이 었다. 두두두! 말 두 필이 쓰러진 혈문룡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혈문룡은 모래 위로 다시 뒹굴었다. 이번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말발굽에 튕겨 나간 것이다. 찢어진 옆구리 상처로 모래가 들어오는지 따끔따끔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저만치 나갔던 말 두 쐴이 다시 돌아서며 그를 향해 짓쳐 들 어오고 있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말들의 앞으로 화영이 버티고 섰다. 말이 크게 앞발을 들어올리며 화영올 밟으려 들었다. 그 위에 탓던 몽고군관들이 쌍수도를 휘둘러 화영을 쳐 왔다. 화영은 그들을 맞아 앞으로 한걸음 나아갔다. 그의 손에서 검이 번득였다. 슈악! 화영의 양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쌍수도가 그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말들이 화영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두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혈문룡이 옆구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사방에는 몽고군의 즐비한 시세와 다리가 잘려져 신음하는 말 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몽고기마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음뿐이다.' 혈문룡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따다당! 여문샹과 귀조를 향해 내리쳐지던 창들이 일시에 틥겨져 나갔다. 석두의 후예였다. 그가 무수한 몽고군들을 헤치고 그 옆에 다가와 있었다. "고맙군." 여문량이 귀조를 안고 일어섰다. 그 순간, 시퍼런 쌍수도의 칼날이 석두의 후예의 등을 베었다. 석두의 후예는 몸을 움찔하더니 돌아서며 일권을 날렸다. 말의 머리가 부서져 홑어졌다. 석두의 후예는 그대로 오른팔을 뻗어 허공을 쓸 듯이 휘둘렀 다. 그 팔에 걸린 몽고군이 몸을 반으로 꺾으며 뒤로 날려 갔다. 누군가 그의 등을 쳤다. 석두의 후예는 돌아서며 일권을 날리려다가 흠칫 멈추었다. 여문량이었다. "일단 물러서야……!" 여문량이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말해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기억났던 것이다. 그는 돌아서며 일검을 휘둘러 등뒤로 다가온 몽고군 한 명을 베어 넘겼다. "석두는……!" 석두의 후예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여문량이 그의 입을 막고 고란고성을 가리켰던 것이다. 석두의 후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지금의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모으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에서 금광이 번뜩였다. 퍼펑--!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몽고군이 말과 함께 뒤로 뒹굴었다. 여문량이 앞으로 나섰다. "따라……, 아니 관두지!" 그는 귀조를 안고 고란고성을 향해 뛰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적들을 베어 넘기면서……! 애초에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싸움이었다. 적들을 전멸시킨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고, 그렇다고 누군가 를 죽이기 위해 시작한 싸움도 아니었다. 설사 그들이 포위망을 뚫고--이것조차도 거의 불가능한 목표 였지만--로부 옹고트에게 다가간다고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 을 것이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몽고군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다 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위를 뚫기로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앞을 가로막는 자들만 베면 되는 것이다. 천하에 여문량의 앞을 가로막고도 무사할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여문량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영아!" 그들과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혈문룡을 보호하며 싸우고 있던 화영이 보였던 것이다. 여문량은 화영을 향해 혈로를 뚫으며 나아갔다. 석두의 후예가 배후를 맡아 그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화영과 합류할 수가 있었다. 화영도 별로 무사한 모습은 아니었다. 양 옆구리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난전 중에 여기저기 베이고 맞은 상처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둥글게 모여서 사방의 적을 막아 싸웠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숨돌릴 틈은 만들어졌다. 몽고군 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활을 쏴라!" 최악의 경우였다. 군사들과 싸울 때 맞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 대규모의 화살 공격 앞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여문량은 표정을 굳혔다. 아직은 몽고군들이 그들과 근접해 있어서 화살을 사용하지 않 고 있지만, 사이만 벌어지면 바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릴 것이다. 우선 얼마 동안은 막는다고 해도 결국은 화살을 모두 막거나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슬쩍 화영을 향해 속삭였다. "적과 사이를 두지 말고 바짝 붙어서 뛰어라!" 그는 고란고성을 향해 뛰어나갔다. 화영이 혈문룡을 안고 그 뒤를 따르고, 멍하니 싸우고 있던 석두의 후예가 마지막이었다. 야광충은 여전히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앉아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여문량 일행이 몽고군의 포위를 뚫고 달려오는 것을 보 며 중얼거렸다. "불똥이 여기까지 튀겠군!" 그는 여유 있게 일어나 전황을 살펴보았다. 수가 많다고 몽고군이 꼭 유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천 명이 있다고 천 명이 다 공격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활을 사용하거나, 진형을 짜서 차례로 상대 해야 했었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희생자로도 그들 다섯을 모두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문량 일행을 둘러싼 몽고군의 진형(陳型)이 갈라지고 있었다. 여문량 일행의 돌파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야광충은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군사 사이로 길을 내어주고, 그 길에 접어든 여문량 일행에게 화살을 퍼부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공격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방법을 좀더 진작에 사용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비가 이제 야광충이 서 있는 곳까지 미 치고 있었다. 그 다음은 몸에 한두 대씩의 화살이 꽂혀 있는 여문량 일행이 었다. 그들이 피를 홀리며 성벽을 넘어왔을 때, 야광층은 이미 화살 이 닿지 않는 석전에 들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혈문룡이 그를 죽일 둣이 쏘아보고 있었지만, 숨을 돌리고 상 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급했다. 화살비가 그쳤다. 몽고군은 아무도 성벽을 넘어 들어오지 않았다. 여문량이 성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안 쫓아오지?" 야광충이 되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무슨 소리냐?" "들어오면 죽을 걸 왜 들어오습니까?" 여문량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 있더니 한참 후에야 고 개를 끄덕였다. 넓은 지대에서 싸우면 다수가 유리하지만 좁은 곳에서는 소수가 유리할 수도 있다. 그것도 그들 같은 고수가 그렇다면 말이다. "애초에 나가서 싸운 것이 어리석었을지도……!" 제12장 그날 저녁, 지하광장 "무슨 말 좀 해봐!" 혈문룡은 벌써 세번째 갈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귀조의 상처만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이 여기 지하광장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야광충은 일행의 상처를 봐주고 있 는 것이다. 약(藥)이라고 할 것이 여기 지하광장에는 없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금나술쪽의 고수였다. 금나술을 알면 추궁과 혈(推宮過穴)이나 제맥(制脈), 해맥(解脈)을 사용해야 하는 주 나술(推拿術) 또한 정통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금나술이라는 것이 인체의 요혈과 기의 흐름에 정통해야 하는 분야이고, 추나술 역시 그렇기 때문이었다. 혈문룡은 야광충이 불러도 대답을 않자, 그냥 바닥에 벌렁 드 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격전과 격전을 거듭하는 중에 얼굴을 가렸던 검은 천이 풀어 진 그는 의외에도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길게 뻗은 눈썹이 위를 향해 치켜져 있고, 대막 최고의 도적 단 두목다운 날카로운 눈매가 가끔 번뜩이곤 했지만 청년이라기 보다는 소년에 더 가까울 정도인 동안(童顔)의 미남자. 그는 문득 자신의 꼴이 왜 이렇게 되었나를 생각했다. 백 명이 넘는 수하들을 다 잃고, 흘로 상처입은 개 꼬락서니 가 되어 뒹굴고 있다니……! 흑룡사의 본거지에는 아직 수하들이 남아 있지만 이 꼴로는 부러워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지!' 성밖에는 몽고군들이 에워싸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귀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야광충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놈은 뭔가 달랐다. 뭔가 믿는 것이라도 있는 듯이 전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어도 그만은 빠져 나갈 자신이 없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입을 안 여는 것이다. '혼자만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불현듯 혈문룡은 의심이 들었다. 아까도 모두가 나가서 싸우고 있을 때 흔자만 남아 있던 놈이 라면 혼자만 도망간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때 야광충이 일어섰다. "틀렸어." 여문량이 그를 바라보았다. "곧 죽을 거요." 그는 너무도 담담하게 귀조의 죽음을 알리고 돌아섰다 이때 누워 있던 귀조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이리 와 봐라." 야광충이 그를 힐끔 보았다. 귀조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에게 다가갔다. 귀조는 야광충의 손목을 잡았다. 야광충이 싫은 기색으로 그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귀조가 말했다. "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너만 의 술(醫術)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사실 귀조는 의술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의 (名醫)의 수준이었다. 자기자신이 죽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 었던 것이다. 그가 야광충의 손목을 잡은 것은 다른 의도였다. "나는 너처럼 이상한 체질을 가진 놈은 처음 본다. 그래서 너 를 한번 진맥(診脈)해 보고 싶은 것이야." 야광충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체질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었다. 세상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괴이한 체질. 그것을 굳이 이 자리에서 다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야광충은 귀조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귀조의 생명이 얼 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또 그 앙상한 손가락 마디마디를 보 고 잠시 더 참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야광충이 귀조의 죽음을 알리기까지 몇 번이고 그의 상세를 다시 보았둣이 귀조는 야광충의 죽음을 알리려는 둣이 지그시 눈을 감고 오랜 시간 진맥을 하고 있었다. "현음지맥(玄陰之脈)……?" 귀조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보고 있기라도 하는 둣이 경악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죽어 가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야광충은 자신이 현음지맥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부가 이전에 이미 얘기해 준 것이다. 현음지맥(玄陰之脈)! 여아(女兒)에게만, 그것도 극히 드물게만 나타난다는 희귀절 맥(稀貴節脈)을, 그 갈은 사내가 타고 태어난다는 이해할 수 없 는 일이 왜 생겨났던 것일까? 음양의 조화로 육신이 생기고 형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면 그와 같이 음기(陰氣)만으로 이루어진 육신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정말 괴물인 것인가? 야광충의 기억 속으로 사부의 말이 되살아났다. --원래 네가 타고난 현음지맥은 여아(女兒)들이 드물게나마 타고나곤 하는 것이다. 무림에 이름난 여협 중에는 현음지맥을 타고나서 절세의 음한지공(陰寒之功)을 익힐 수 있었다느니, 뛰 어난 재지로 무림의 위기를 구했느니 하는 얘기가 가끔 있곤 하 지. 하지만 이 사부의 경륜으로도 남자가 현음지맥을 타고나서 잘됐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야광충의 사부 야유신의 짐작으로는 모친이 자신을 잉태했을 때 주안과(朱顔果)나 빙천설지(氷泉雪芝), 흑은 빙설련(氷雪 蓮), 빙정(氷精) 등의 음한지물(陰寒之物)을 복용했으리라는 것 이다. 그 결과, 야광충은 햇빛을 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약간의 햇빛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고 심하게 는 생명을 위헙하는 살인광선으로 작용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햇빛을 싫어하고, 낮을 싫어했다. 어느 정도 자라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시험 삼아 밖에 잠깐 나가 본 적이 있었다. 햇빛을 직접 대하지 않으면 조금 낫지 않을까 해서 비오는 날 을 택해 해본 행동이었다.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불구덩이에서 뒹굴면 그런 화상을 입을까? 야광충은 전신에 잡힌 물집을 치료하는 데 반 년 가까이 고생 해야 했다. 그 이후로 그는 낮에 밖에 나서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좋은 점도 있긴 했다. 천성적으로 뛰어난 재지(才智)와 근력, 날카로운 도검에도 좀처 럼 상처를 입지 않는 강인(强靭)한 근골, 천부의 끈기와 정력 등 무공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자질을 야광충은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오랜 기간의 암흑생활로 고양이의 그것처럼, 아니 오 히려 고양이보다 뛰어난 안력을 가지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야광충은 대낮에 사물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사람들은 불빛 아래 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잘 보일 때를 대낮 같다고 말할 것이 다.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광충은 갓 스물의 어린 나이에도 이미 스승을 능가 하는 무공을 지니게 되었는데……, 무공이 높아질수록 성격은 점점 더 괴팍해졌다. 어둠 속에서 자라며 참아 와야 했던 오랜 고독이 사람과 섞이기 싫어하는 폐쇄성과 음침함을 그의 성격에 심어 주었던 것이다. --양기를 기르면 정상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물론 약간 음기가 과하다거나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선천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약을 잘못 먹어 그럴 수도 있다. 사부는 다시 그렇게 말했었다. 약으로는 야광충의 체질을 고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는 토납조석(吐納調息)으로 내공을 키우거나 약을 복용 해 음양조화를 이룰 수도 있지만, 너처럼 양기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너에겐 인간의 원정(元 精), 다시 말해 인간의 원양정기(元陽精氣)가 필요하다. 이것이 네가 낮에도 돌아다니려면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하는 이유다. 이미 오래 전에 거부했던 이야기였다. --또 내가 너에게 본문의 순양강기(純陽 氣)를 전수하지 않 고 우연히 얻은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전수한 이유도 그것이다. 현음진기는 너를 정상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네가 혈맥 의 응고로 죽는 것은 막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나마 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존하는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면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이기론적(理氣論的)으로 말해 양은 음을 이기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큰 불도 물에는 꺼지는 것과 같다. 물론 화재가 났 을 때 물 한 대접으로는 불길을 잡지 못하지. 그러나 동일한 정도의 기운에 있어서는 음기는 양기의 극성인 것이다. 마찬가 지로 작은 불로는 얼음을 녹일 수 없는 것이다. 네 음기와 비슷할 정도로 강력하면서 약이나 내공 같은 외부 의 것이 아닌 양기. 그런 양기가 아니면 네 음기와 상극하여 네 몸을 괴멸시킬 것 이다. 그런 것이 있을까? 사부는 있다고 했다. --명심해라! 천하에 너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사정(邪精)'밖 에 없다. 사정, 천인혈(千人血)! 그를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그것밖에 없다고 사부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서 얻는가? 무림오대극품기보(武林五大極品奇寶) 중 하나인 사정 천인혈 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그를 고쳐 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사부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부는 말끝을 흐리더니 두 눈에서 형형한 광채를 뿜으며 한 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었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도 살 수는 있다. 하지만 희망이 없으 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오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속을 찔러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제자에 대한 사랑과 격려였다. 그것이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가슴에 아직도 파고드는 것이다. "현음지맥……!" 야광충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귀조를 보았다. 귀조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음지맥……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현음옥령지맥(玄陰玉靈 之脈)이다! 증세는 같지만 원인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체질이지. 즉……." 귀조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야광충이 그의 입을 손으로 눌렀기 때문이었다. 여문량이 벌떡 일어섰다. "너……!" 귀조가 야광충에게 입이 막혀 있으면서도 손을 들었다. 야광충은 형형한 눈빛으로 귀조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다들 물러서시오! 나는 이 노인네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소!" 여문량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귀조는 다시 손을 들어 여문량에게 가라는 의사를 표 현했다. 여문량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그들의 반대편, 광장 구석으로 걸어갔다. 야광충이 다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가 주었으면 좋소." 여문량이 급기야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자네……!" 귀조가 다시 손짓했다. 역시 그렇게 하라는 뜻인 듯했다. 화영이 다가와 여문량의 옷깃을 잡았다. 여문량은 기가 막힌 듯했다. "너도냐? 허허…… 참!" 화영은 미소를 지으며 여문량의 옷깃을 끌었다. 야광충이 석두의 후예를 손짓해서 불렀다. 그리고 뭔가 말을 했다. 석두의 후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편에 누워 있는 혈문룡에 게 다가갔다. 혈문룡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날 들고 나가겠다는 거냐?" 석두의 후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 혈문룡을 들어올리려 할 뿐이었다. "놔 둬! 나 혼자 나갈 수 있어!" 모두가 나가고 남은 광장 안에 귀조와 야광충 둘만 남았다. 야광충이 귀조의 입을 막은 손을 떼었다. 그의 눈빛은 스산한 살기로 빛나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말해 주어야겠소, 영감!" 귀조는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짐작하는 듯한 웃음. 그리고 여유있는 웃음이었다. "먼저 네 얘기부터 해라! 그 다음 현음옥령지맥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귀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복잡하게 변해 가는 것을 귀조는 예리하게 관찰하 고 있었다. "날 죽일 생각인가?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울 이유가 뭐지? 너도 전혀 모르는 게 아니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귀조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귀조는 다시 웃었다. "나를 죽이면 그것은 당분간은 가려지지. 그러나 너는 언젠 가는 알게 될 것이고 혹시 모르고 끝난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까 지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왜 네가 햇빛을 볼 수 없는 몸이 되었는지 말이다!" 야광충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세하지만 영감, 허튼소리를 했다간 남아 있는 수명 일 각 이 억겁보다 긴 시간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어 주겠어!" 귀조는 그러나 한가한 표정으로 야광충에게 손을 저었다. "네 말대로 내게 남은 시간은 일 각뿐이다. 그게 아까우면 네 얘기를 해라."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야광충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여문량은 무거운 눈빛으로 귀조와 야광충의 말싸움을 보고 있 었다. 들어와도 좋다는 부름에 그들, 여문량과 화영 등이 들어온 지 도 다시 일 다경이었다. 그 동안 내내 야광충과 귀조는 다투고만 있었다. 그들이 없는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뭔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있 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까까지 반말로만 나오던 야광충이 귀조에게 말을 높이고 있 는 것이다. 귀조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내 전륜나로 안 된다는 거야?" 야광충은 차갑게 그를 보며 대답했다. "당신도 머리가 있으면 그 정도는 알 거요! 로부 옹고트에겐 세상의 어떤 무공보다 강한 것이 있소. 권력, 그리고 지혜!"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귀조의 소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어느 한 개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줄 수도 있 소. 물론 권력에는 틈이 있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소. 그러나 그에게는 그 권력의 빈틈을 메워 줄 지혜가 있소." 귀조는 아무 말 없이 야광충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도 수응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몰래 숨어 들어가 암살하는 방법도 있겠지. 그러나 불 행히도 그에게는 실력도 있을 거요. 아마 당신들 개개인을 능가 하는 엄청난 무공이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내가 대충 배운 전륜나로 그를 진정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귀조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허공을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넋두 리 하듯 조용히 말했다. "우린 무림인이야. 군대를 데리고 싸울 수도 있고 지혜로 겨 룰 수도 있겠지. 그것은 각자의 능력이니까! 그러나 결국 죽을 땐 칼 아래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귀조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침상에서 늙어 죽는다? 그게 그에게 어울릴 일이라고 생각하 느냐? 나는 죽어서도 결코 그렇게 죽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 로부 옹고토를 죽여 줘! 너만이 그걸 할 수 있다!" 야광충은 그의 눈을 외면했다. "전혀 근거없는 말이군. 내가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말 이오? 당신의 그 알량한 전륜나로? 또 내가 그와 싸울 이유가 도대체 뭐요?" 귀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이 야광충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에 일어난다는 회광반조(廻光返照) 현상인지는 알 수가 없 었다. "전륜나는 절대로 알량한 무공이 아니다!" "어떤 무공도 어설프게 배우면 알량한 무공인 것이오. 책을 보고 무공을 익힐 수는 없어!" "책을 보고 무공을 익힐 수는 없다. 그러나 원리를 이해할 수 는 있지! 난 네게 전륜나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초식도 없고 내공의 운기라는 것도 없다. 그러나 원리는 있지! 그 원리가 네 게 준 책 속에 있다. 물론 얼마나 성취하는가는 네게 달렸다. 그것이 로부 옹고트를 이길 수 있을지는 나는 모른다. 너는 무 조건 전륜나를 익혀야 하고 그를 죽여야 한다." "난 엽장청에게도 이미 대답한 적이 있지. 내가 왜? 도대체 내가 왜 그를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귀조는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나도 그럼 엽장청과 같은 얘기를 해줘야겠군." 그는 힘주어서 한마디 한마디 말했다. "너는 그와 싸우게 될 거다." 귀조는 죽었다. * * * "언제까지 이렇게 지키고 있을 겁니까?" 로부 옹고트는 와릉모를 쓴 중년인, 아루타이를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들어가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누가 들어가서 그들을 죽일 수 있겠나? 대군 앞에서는 별것 아니지만 지하의 좁은 통로에서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위세를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 그들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다." 로부 옹고트는 손을 들어 고란고성의 석전을 가리켰다. 바로 그 아래에 여문량 일행이 있을 것이다. 아루타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석전 한 귀퉁이에서 붉은 깃발이 세워졌다. "저게 뭡니까?" 아루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깃발은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곧이어 석전의 이곳저곳에서 붉은 깃발이 세워졌다. 그 깃발들의 위치는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석전 전체에 골고루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아루타이는 한참 동안 그 깃발들을 바라보더니 문득 무릎을 쳤다. "아! 바로 그……!" 로부 옹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그는 가마 밖으로 손을 내밀고 흔들었다. 가마의 옆에서 거대한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콰콰콰앙! 잠시 후, 폭음이 울리고 아침하늘 아래로 고란고성의 석전들 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 * * 광장이 흔들릴 때, 여문량 일행은 하나같이 조용히 눕거나 앉 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고, 바닥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문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진인가?" 야광충이 짧게 말챘다. "로부 옹고트가 지진까지 만들 수 있다면 이건 지진일 거요!" "그 말은?" "아마도 폭약을 사용했겠지!" 혈문룡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목적이 뭐야? 우릴 돌 아래 깔아 죽이려는 것인가?"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은 모양이군!" 혈문룡은 이를 갈았다. 처음 흑룡기사 스무 명의 시체를 발견한 때부터 여기 고란고 성에서 괴물을 만나고, 결국 이들과 합류하기까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만나고 있었다. 단 다섯 명을 죽이기 위해서 일만의 몽고군이 동원된 것도 그 렇고, 생전 들어 보지도 못했던 괴물들을 구경했고, 이제는 그 다섯 명을 죽이기 위해 고성 하나를 통째로 폭파시킨다는 기상 천외한 사태에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와중에 죽은 것은 결국 구십 노인 하나 요, 나머지 넷은 멀쩡하고 애꿎은 흑룡기사 백 명만 희생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면 치가 떨릴 노릇이었다. 그가 평소에 혈문룡답지 않게 감정의 변화를 비정상적으로 드 러내다고 챠서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하루 사이에 이런 일을 당하면 침착해질 수가 없을 테 니까! 쾅! 혈문룡의 바로 옆으로 거대한 바위 하나가 떨어졌다. 돌가루가 튀어 얼굴이 따끔거렸다. 혈문룡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부서지는 천장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닥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혈문룡은 문득 수치감을 느꼈다. 자기만 제외하고는 두려워서 천장을 쳐다본다거나 이리저리 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다들 광장의 바닥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여문량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기까지 했다. 그는 야광충을 보았다. 야광충도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 태연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이 와중에서도 살아 나갈 자신이 있는 것 같군!"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없다." "여기서 그냥 죽을 텐가?" "아니." 혈문룡은 무엇인가 말하려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때는 전정긍긍하든, 침착하게 있든 결 국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침착하다면 살아 나갈 기회는 더욱더 많을 것이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가 바보가 된 둣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들은 나와 차원이 다른 인물들인가?' 광장은 잠시 더 흔들렸지만 바위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폭발의 충격은 지나갔다. 광장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야광충이 일어섰다. 여태까지 미칠 듯이 조바심 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침묵하고 있던 혈문룡이 그를 보았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 을 꺼내지도 않고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 자신만이 다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을 꺼내기가 싫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광장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혈문룡이 그 뒤를 쫓아갔다. "어디로 가는 거냐?" 야광충에게 혈문룡이 물었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고 어두운 통로를 걸어갔다. 혈문룡도 더 묻지 않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까 밖에서 다친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것만 빼면 움직이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통로는 어두웠다. 작은 불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혈문룡은 횃불 같은 것을 준비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광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간다고 해도 횃불을 일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는 그저 짐작으로 야광충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발짝소리도 안 나는군.' 혈문룡은 문득 그것을 깨닫고 불안해졌다. 발짝소리도 안 난다……. 이 어두운 통로 안에서 야광충을 쫓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다. "거기 있나?" 대답은 없었다. 혈문룡은 미칠 것 같았다. 없어진 것은 아닐까? 아까부터 의심스럽긴 했었다. 모두가 침착하긴 했지만 그 중에도 이놈은 유달리 침착했었다. 살아 나갈 길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그렇게 침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따라왔던 것인데 놓쳐 버리고 말다니! '야! 이 비건한 자식아!' 혈문룡의 고함소리는 좁은 통로에 부딪쳐 웅응거리며 되돌아 왔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혈문룡은 어둠 속에 벽을 짚고서 터듬더듬 걸어가야 했다. 얼마나 왔을까? 또 지금쯤은 어디에 온 것일까? 영원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르고 그는 자신이 일마나 왔는지 거리감각조차 잃어버렸다. 광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지금 은 그 길조차 잃어버렸다. 눈앞도 보이지 딴는 이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약하 게 만드는가를 그는 오늘 처음 알았다. 밖에서는 밤이라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다. 약간의 빛은 있고 어둡지만 대충의 형체는 알아볼 수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이 지하는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것의 형체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 스스로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만 해도 혹룡사 대두목의 체면 과 권위를 지키려는 필사의 노력을 한 결과라고 봐야 했다. 슷--!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들려 왔다. 혈문룡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통로로 접어든 이후 처음으로 들려 온 소리였다. 그리고 살기가 담긴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번쩍였다. 목젖 바로 아랫부분에서 따가운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방금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간 암기는 분명히 그의 목숨을 노 리고 있었다. 명백한 위헙에 직면하고 혈문룡은 오히려 침착해지는 그 자신 을 느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만이 남겨지는 것이었지, 죽는 것 은 아니었다. 아 무런 대책없이 이 어두운 지하에 갇히는 것이 두려웠지, 누 군가와 싸워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책없는 절망을 두려워한 것이지,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적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아무리 소리없이 움직이는 놈이라도 움직일 때는 반드시 무슨 낌새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에 승리의 길이 있었다. 다시 영원(永遠)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손목을 움직였다. 반룡도가 한없이 천천히 그의 몸앞으로 들려지고 있었다. 한 가닥 공기의 흐름이라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바스락…….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혈문룡은 상반신을 틀며 자신의 옆으로 반룡도를 휘둘렀다. 소리가 들린 곳과 반대방향이었다. 칵! 손끝에 감각이 돌아왔다. 무엇인가가 적어도 돌벽은 아닌 그 무엇인가가 그의 반룡도에 맞은 것이다. "크으으……!" 어둠 속의 상대가 신음을 홀리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를 목표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 "그만해 둬." 혈문룡은 그 손을 향해 반룡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반룡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새로 나타난 누군가는 반룡도까지 움켜쥐고 있었다. "나다." 어둠 속이지만 혈문룡은 잔뜩 인상을 썼다. 바로 그놈이었다. 야광충! 어느새 그놈이 옆에 와 있는 것이다. "왜 날 암습했지?" 야광충이 한 암습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한번 트집을 잡아 보는 것이다. "흥!" 차가운 코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팍! 어둠 속에서 불꽃이 피어 올랐다. 혈문룡은 순간적으로 눈을 잠시 감았다 떠야 했다. 작은 불빛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익숙해진 은 순간적으로 불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혈문룡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불빛은 야광충의 손에 들린 장명등(長明燈)에서 나오고 있었다. 불빛 속으로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과 눈부신 은발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누가 날 암습했나?" 야광충은 말없이 혈문룡의 목앞을 가리켰다. 처음에 그것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야광충이 장명등을 가까이 대자 극히 가는 선 하나가 통 로의 중간 어림에 양쪽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혈문룡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한 암기가 바로 이것이 었던 것이다. 혈문룡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태가 명백해졌다. 누군가가 그, 혹은 그들을 노리고 통로에 이런 장난을 쳐 놓 은 것이다. 자칫하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장난을! 모르는 것은 단 하나, 그게 누구냐는 것이다. 야광충은 손을 내밀어 그 선을 두 손가락으로 잡았다. 선이 끊어져 나갔다. 야광충은 묵묵히 앞으로 걸아가고 있었다. 혈문룡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범인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마음대로 행동하는 놈이니 그것도 가능했 으리라. "누구지? 적?" 생각해 보면 멍청한 질문이었다. 적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위험한 장난을 해 놓았을 것인가? 야광충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곳곳에 묘한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건드리면 살이 베어져 나갈 정도로 날카로운 선이 곳곳에 드 리워져 있어서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바닥에 깔린 작은 쐐기꼴의 독침들. 통로의 일정 부분을 아예 독연(毒煙)으로 채워 놓은 곳도 있었다. 야광충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죽었을 텐데……." 그 말 한마디로 야광충이 그 범인을 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혈문룡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물어 본다고 대답해 주는 놈이 아니란 것을 이미 깨달은 것이다. 야광층은 통로의 석벽을 살괴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작은 라으로도 사물들을 명확히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런 류(類)의 암습법에도 조예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기관지학(機關之學)을 공부했을지도 모른다. 혈문룡으로서는 대낮에 보아도 잘 알아보기 힘든 장치와 함정 들을 야광충은 걸어가며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손쉽게 제거하 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 것인지 혈문룡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야광충은 한곳에서 잠시 멈추더니 약간 안으로 파여진 석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끼 리릭! 야광충이 무엇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석벽의 한 부분이 뒤로 들리며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야광충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혈문룡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바로 야광충의 손에 들린 장명등을 건네 받았다. 야광충이 그의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손에 쥐어 준 것이다. "이대로 계속 걸어!" 혈문룡의 귓속으로 야광충의 말이 직접 들려 왔다. 전음 소리였다. 혈문룡은 더 묻지 않고 또 최대한 평정상태를 유지하며 그대 로 걸어 나갔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중요한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어둠 속의 암습자를 처치하는 것. 혈오공은 자기도 모르는 곳에 통로가 생기고 그 속으로 불빛 이 사라지는 것을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그는 망설였다. 저기로 따라 들어가게 되면 그가 여태 조사하고 파악해 놓은 지리에서 전혀 모르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리(地理)의 유리함은 송두리새 앎게 된다. 그들이 다시 나오는 것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따라 들어가야 할 것인가? 망설일 시간은 많지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표적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 그는 생각하고 결정했다. 그는 석벽에 붙어서 조심스럽게 새로 뚫린 통로로 진입해 들 어갔다. 저만치에서 작은 불빛이 잠깐 깜박이다가 사라졌다. 어딘가 모퉁이로 돌았을 것이다. 아니면 아래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혈오공은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그 뒤를 쫓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와 그의 목을 잡았다. 야광충은 천천히 그의 손에 잡힌 혈오공을 훌어보았다. 분명히 아까 목을 잘라 버린 그놈이었다. 그의 손안에 잡힌 목에 빙 둘러가며 굵은 상처가 나 있는 것 은 바로 그 흔적인가? 그는 잘려진 목을 다시 붙이는 신묘한 비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믿기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아래에서 혈오공의 목이 다시 한번 떨어졌기 때문이다. 야광충의 손안에는 혈오공의 머리만이 들려 있었다. 몸뚱이는 머리는 내버려둔 채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반격을 가해 왔다. 혈오공의 두 손에 들린 빛나는 물건, 두 자루의 긴 송곳이 야 광충의 가슴을 향해 찔러들어왔다. 야광충은 자신의 눈앞에서 혈오공이 머리를 버려 두고 뒤로 도망간다는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집중력이 흔들려 있을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공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설사 이 공격에는 대응한다 할지라도……! 야광충은 들고 있던 혈오공의 머리로 자신에게 찔러오는 송곳 하나를 막았다. 송곳이 혈오공의 머리를 꿰뚫고 나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야광충의 자유로운 한 손에 잡혀 있었다. 놀라운 일이 바로 그 순간 벌어졌다. 파악! 혈오공의 가슴이 터지며 그 속에서 다시 두 개의 손이 튀어나 왔다. 날카롭게 번득이는 두 자루의 송곳과 함께! 혈오공의 몸속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손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격은,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야팡 충이 뒤로 눕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동시에 야광충의 발이 혈오공의 회음혈을 걷어찼다. 혈오공의 몸이 공중으로 떠서 야광충의 뒤로 날려갔다. 혈오공은 급히 바닥을 치고 그 반탄력으로 몸을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등뒤에는 이미 야광충의 발이 올려져 있었다. 야광충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혈오공을 차갑 게 내려다보았다. "한몸에 두 사람이라……, 어느쪽이 진짠가?" 그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혈오공의 몸 윗부분이 갈라지며 붉은 머리가 그 사이로 비집 고 나오고 있었다. 야광충의 다른 발이 그 머리를 찍어 눌렀다. "아무래도 네가 진짜인 모양이군. 이 머리마저 잘라 버리면 또 다른 목이 나올까?" 그 붉은 머리가 바둥거렸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다가는 넌 지옥성의 반도(叛徒)로 처벌받을 것 이다!" 야광충이 그 머리를 다시 눌렀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지." 야광충은 마치 벌레 한 마리를 보둣이 그를 보고 있었다. "누가 너를 보냈을까?" "크으으흐, 네 사부인 예충도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성주 (城主)의 분노를 사면 누구도……!" 야광충의 눈에 살기가 튀었다. 그는 발에 힘을 주어 눌렀다. 팍! 붉은 피가 통로바닥에 가득 깔렸다. 알고 보면 간단한 속임수였다. 사람과 비슷한 인형 속에 그보다 작은 또 한 사람이 숨어 조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인형이 아니라 실제 사람의 시체의 속을 들어내고 사 용했을지도 오른다. 아마도 그쪽이 더 가능성이 클 것이다. 혈문룡은 멈춰 서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세 개의 거대한 석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야광충이 그의 옆에 나타났다. "항상 그렇게 소리도 없이 나타나나?" 야광충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석문을 을려다보았다. 혈문룡은 그렇게 묻고도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것에 이미 적응 이 되었는지 야광충의 대답에는 상관없이 다시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이번에는 야광충이 대답했다. "벤야시리의 창고." 벤야시리! 혈문룡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현재 몽고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는 자가 벤야시리인 것이다. 그 벤야시리의 창고가 여기 있다니……! "극히 일부분이지만." 야광충은 석문을 두 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석문 하나가 천천히 열렸다. 혈문룡은 여전히 어리둥절해서 서 있었다. 창고라면 보물창고란 말인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지금, 밖으로 다시 나가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자체가 의문시 되는 지금 보물 따위가 중요하단 말 인가? "지금 그런 게 필요한가?" 야광충은 석문 안으로 들어서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 임무야!" 제13장 며칠 후, 같은 곳 "뭘 먹고 살았을까?" 화영이 그 말에 혈문룡을 돌아보았다. "저 늙은이는…… 도대체 뭘 먹고 살았길래 주변에 이리도 먹 을 것이 없지?" 혈문룡이 광장 구석에 놓여 있는 귀조의 시체를 가리키며 투 덜거렸다. 화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뭔가를 먹긴 먹었겠지." 혈문룡은 잠시 인상을 샨다가 혀를 차고 일어났다. 이 빌어먹을 장소에서는 시간의 흐름도 파악할 수 없다. 도대세 여기 들어와 있은 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건량과 물밖 에 없었다. 귀조라는 늙은이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반드시 뭔가를 먹었을 것이다. '설마 저 견혼승망들을 한 마리씩 먹지는 않았겠지!' 그는 석벽의 구석에서부터 차례차례 살피기 시작했다. 화영이 물었다. "뭘 하려고?" "그럼 이대로 굶을 텐가?" "물론 그러고 싶지는 않지." 화영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여문량을 향해 말했다.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광장의 한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 있 던 여문량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문량은 여기 들어온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준비해 온 얼마 안 되는 건량은 떨어진 지 한 참이나 되었다. 야광충은 무엇을 몰래 먹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먹지 않아도 사는지 그들에게 건량을 나눠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화영이 건네주는 건량을 사양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석두의 후예였다. 그가 무엇인가 먹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가 뭔가 먹으려고 했다면 얼굴을 싸맨 천을 풀 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천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배가 고프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굶어 죽더라도 얼굴 을 보이면 안 되는 사연이 있어서인지는 역시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가끔 광장 구석에 있는 연못에 가서 천을 뒤집어쓴 채로 연못에 얼굴을 담그곤 했다. 아마 물을 마셨다면 그때밖에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화영은 혈문룡이 석벽을 따라서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그가 무엇인가 찾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것이 먹을 것은 아닐 것이다. 화영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 광장 안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석에 응크리고 있는 검은 표범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혈문룡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빌어먹을 고양이라도 잡아먹을까?" 화영은 웃었다. "나야 그런 말 들어도 괜찮지만 아묘는 좋아하지 않을걸." 검은 표범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혈문룡을 쏘아본 모양이다 혈문룡이 검은 표범에게 사정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됐다! 됐어! 농담으로 한번 해봤다!" 혈문룡이 그에게 다가와 귀에다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놈이 더 굶으면 틀림없이 우리부터 잡아먹으려고 들 거야. 그 전에 우리가 선수치는 게 낫지 않을까?" 화영은 빙긋이 웃을 뿐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야광충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 른다고 화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혈문룡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 백발의 귀신을 찾아가는 거냐? 그놈은 왠지 재수가 없단 말이야." 묘한 일이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사람들이 한곳에 이렇게 모이는 것도 드문 일일 텐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별다툼없이 그런대로 잘 지내는 것은 더욱 묘한 일이었다. 대충 듣기에도 혈문룡은 사막의 도적단 두목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거칠고 흉폭한 사나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며칠 동안 갚이 좁은 장소에 갇혀 있으면서 얘기를 해보니 의외로 활 달하고 재미있는 구석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두목다운 과단성과 도적단다운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지닌, 밖에서 만났다면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 을 법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물론 화영으로서는 그의 생김새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 리와 느낌으로 짐작해 볼 때 적당한 체격에 절대 못나지는 않았 을 것이다. 혈문룡은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 백발귀(白髮鬼)! 정말 흔자 숨어서 딴짓하고 있는 거 아 냐? 어디다가 여자라도 숨겨 놨나? 그렇지 않고야 혼자 따로 있 을 이유가 없잖아?" 화영은 알고 있었다. 혈문롱의 머릿속에 방금 말한 대로 아주 그런 생각이 없다고 는 블 수 없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을……. 사실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야광충은 그들이 같이 지내 는 광장이 너무 밝아서 싫다고 했다. 자기에겐 어두운 곳이 편하다고……. 혈문룡으로서는 바로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광장이 밝은지는 그도 모른다. 광장의 석벽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그런 광석에 대해서는 그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저 빛이 너무 밝다고 느껴진다면, 그 정도로 빛 이 싫어 사람의 형체나 겨우 분간할 만한 그 정도의 빛이 밝다 고 느끼고 있다면, 그 백발귀 녀석은 낮에는 눈이 타서 죽을 것 이 아닌가? 물론 그가 흔자서 무엇인가를 먹올 정도로 치졸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그렇 게 나쁘게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혈문룡이 요즘 야광충을 보는 관점이었다. 사실 엄격히 따져 본다면 생명을 구해 준 은혜도 입은 적이 있는 것이다. 화영이팔 이 친구도 묘한 친구였다. 처음에 그가 맹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움직이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점점 더 그것은 믿올 수가 없는 일로 생각되엇다. 무슨 맹인이 눈 뜬 사람보다 사태를 더 잘 파악하는가?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야광층이 이 미로처럼 뚫린 지하통로 어느 구석에 있는 줄 알 고 찾아간단 말인가? 그러나 묘하게도 화영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둣이 거침없이 찾아갔고, 그가 가는 곳에는 매번 야광충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교감(交感)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 될 정도였다. 오늘도 야광충은 벤야시리의 보물창고에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그 안을 구경했을 때 혈문룡은 뛸 듯이 기뻐했었다. 막대한 양의 은괴(銀塊)가 창고 하나에 높이 쌓여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기뻐한 것도 잠시였다. 밖으로 나가지 뭇하는데 은괴가 무슨 소용인가? 차라리 영약(靈藥)이라든가, 먹으면 한 달쯤 배가 고프지 않 은 그런 벽곡단(壁穀丹)이라든가 하는 것이 들어 있다신 정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다음 두 개의 창고를 가 보고 산산이 깨 어졌다. 하나는 병장기가 가득 들어 있는 무기창고였고, 다른 하나는 곡식창고이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다 썩어 버렸다. 고란고성이 사지(死地)로 변한 지 삼 년이 되었으니 그 동안 관리를 않았다면 썩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과일도 건포(乾脯)도 모두 썩어 버렸다. 창고 안에는 웬만한 고양이보다 큰 쥐떼만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야광충은 바로 거기 있었다. 화영이 물었다. "뭘 하고 있지?" 혈문룡은 그 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화영만큼이 나 궁금했지만 물어 보지는 않았다. 어지간하면 야광충과는 대화를 딴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 었다. 물어서 제대로 대답을 해 주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창고 안 어두운 곳에서 감정이라곤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 로 야광충이 대답뻤다. "나갈 곳이 있나 하고……," 혈문룡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화영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 물었다. "찾았어?" 야광층이 짧게 대답했다. "아니." 혈문룡은 그 다음 말을 기타렸지만 야광충은 더 말하지 않았다. 혈문룡은 물었다. "그게 단가?" "그게 다야." 야광충이 그를 스쳐서 창고 밖으로 나갔다 "그럼 언제까지나 안 나가고 여기에서 살겠다는 건가?" 야광충이 갑자기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유리구슬같이 투명한 눈이 혈문룡의 가슴 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저 눈을 볼 때마다 괜히 위축되곤 하는 것이다. 대막 흑룡사의 대두목이……! 일개 개인에게 위압감을 느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있었다. 야광충은 다시 돌아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못 찾았다고 했지, 여기서 살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화영이 야광충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뭔가 먹어야 할 텐데?" 야광충이 우뚝 섰다. "먹을 게 없진 않지." 그는 창고를 가리키고 있었다. 혈문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창고 안에 식량이 남아 있었나?" "물론."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혈문룡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결국 이런 인물일 줄은 몰랐다. 먹올 게 분 명히 있는데도 혼자만이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같이 분노해야 할 화영은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에 안 먹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군, 먹어야 나갈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혈문룡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창고 안으로 다시 들어간 야광충이 순식간에 고양이만큼 큰 쥐 다섯 마리를 잡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혈문룡의 안색이 누렇게 변했다. "그걸 먹겠단 말이야?" 야광충이 차갑게 대답했다. "죽기 싫으면." 혈문룡이 중일거렸다. "대막 최고의 도적단 흑룡사의 대두목이 쥐새끼나 먹으면저 목숨을 부지해야 한단 말이야?" "죽기 싫으면." 화영이 야광충의 손에서 한 마리를 받아 들었다. "맛있을까?" 혈문룡이 기가 막힌 둣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정말 먹겠단 말이야?" "어떻게 하면 맛있을까? 요리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군." * * * "이대로 가는 겁니까?" 로부 옹고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할 괼요가 없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루타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사부, 로부 옹고트의 성격을…….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부는 도대체 저 성안에 있는 무리들을 제거하고 싶기는 한 것일까? 언뜻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것이 점점 더 그럴둣하게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사부의 이런 일련의 행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지금만 해도 단 천 명의 병력만을 거기에 지키도록 둔다는 것 은 아무리 그들이 확실히 지하통로를 폐쇄했다고 해도 역시 일 말의 불안감은 남는 조치였다. 그는 잡초를 뽑으면 뿌리까지 제거하지, 뭔가를 남겨 두는 성 미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의 사부 로부 옹고트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엇이 또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 속에 가마는 좌우의 몽고군들에게 경호를 받으면서 고란고성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 * * "아, 한심하군." 화영이 그렇게 투덜대는 혈문룡을 보고 물었다. "이젠 배도 부를 텐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계속 아무것도 안 먹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혈문룡은 그 아무것도 안 먹고 있는 사람, 석두의 후예를 힐 끔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친구도 이상한 사람이니까 내가 신경쓸 바가 아니지." "저 친구도?" 화영이 끝을 묘하게 올려 되물었다. "누가 또 이상하단 말인가?" "바로 자네! 그리고 저 녀석!" 그가 말하는 저 녀석이란 야광충일 것이다. 화영은 말만 듣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할 때 그 목소리 속에 절로 그 사 람에 대한 감정이 표현된다는 것을 보면 무척 재미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목소리만 듣고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혈문룡이 야광충을 지칭할 때도 말의 내용과 별로 관계 없는 그런 감정의 편린(片鱗)들이 그 속에 보이는 것이다. 혈문룡은 문득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연못으로 다가 갔다. 그는 망설임없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못은 짙은 녹청색(錄靑色)이었다. 깊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고여 있어서 그런 것인 지는 들어가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물이 있는 덕분에 그들이 며칠이나마 갈증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연못은 꽤나 깊은 모양이었다. 하번 뛰어들어간 혈문룡은 상당한 시간이 홀렀는데도 다시 모 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영이 중얼거렸다. "지하 수맥(水脈)으로 나갈 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대답한 것은 의외로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던 여문량이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사막의 지하수맥은 깊은 지하 암반 사이로 흐르는 것이야. 하루이틀 사이에 지상으로 나오지는 않지. 자칫 잘못하면 바다에 이를 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흘러갈지도 모른다." 쥐들을 잡아와 같이 요리해 먹은 이후 광장에 잠시 앉아 있었 던 야광충이 한마디 거들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어리석은 자 같지는 않군." "그렇게 봐 주니 고맙군." 혈문룡이었다. 그는 연못에서 머리만 내놓고 떠서 거친 긴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찾을 물건이 있어서." 그는 끈으로 연결된 철봉 억러 개를 들고 연못 밖으로 걸어나 왔다. 야광충이 그것을 힐끔 보자 그가 설명했다. "여의색자창!" 혈문룡이 그 칠봉의 한 토막을 잡고 허공에서 칠봉들을 돌렸다. 위이잉! 혈문룡의 손에는 어느새 끈으로 연결된 철봉들이 아니라 일 장에 달하는 장창이 들려 있었다. 질이 좋은 강철로 만든 것인지 창대에서 창끝까지가 예리한 팡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창끝은 양쪽으로 창날이 붙어 있는데, 며칠 동안 연못에 잠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른빛 섬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물(遺物)이지." 그는 갑자기 홍이 난 둣 여의색자창의 중심을 잡고 머리위로 돌리기 시작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창술(槍術)을 펼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창 그림자로 가려저 버렸다. 양쪽으로 창날이 달려서인지 보통의 창보다 두 배나 삼엄한 경기가 바늘을 거꾸로 꽂아 놓은 것처럼 폭사되고 있었다. 혈문룡은 그 창 그림자 속에서 한 마리 용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일 장에 달하는 긴 창이 그의 손안에서는 전혀 거추장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의색자창을 수족(手足)의 연장이기라도 한 것처럼 완 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쉬쉬쉬쉬……! 광장 안이 무거운 바람소리로 가득 찼다. 얼핏 듣기에도 대단히 무거운 물건이 움직이고 있다는 중압감 (重壓感)이 느껴졌다. 반 각 가량이나 이어지던 혈문룡의 장창무(長槍舞)가 끝나고 창을 비스듬히 옆으로 벌려 예를 표하는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여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창법이다. 동작과 가세가 상충(相沖)되지 않아 전 혀 무리가 없다. 엄밀하면서도 호쾌하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가 볍게 움직이는 극상(極上)의 창법이야." 화영이 물었다. "그 창법의 이름이 뭐지?" 혈문룡이 여문량의 칭찬을 듣고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이름붙일 수 없는 것도 세상에 는 많이 있다고……. 이 춤에는 이름이 없어." 여문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말이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화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정한 도(道)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말이 있지. 귀한 구경을 하게 해 주었으니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보여 주마." 화영이 검을 들어 여문량에게 내밀었다. 여문량은 오른손에는 자신의 장검을 들고 왼손에는 화영에게 서 받은 청풍검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예전에 장주(蔣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었는데, 훨훨 나는 것 이 분명 나비였으며, 스스로 뜻에 맞아 자기가 장주인 줄 알 수 가 없었다." 여문량은 마치 시를 읊듯 혹은 노래를 부르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어 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그렇다면 장주 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 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을 호접몽(蝴蝶夢)이라고 한다." 그는 장내를 잠깐 둘러보며 검을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댜. "나는 장자남화경(蔣子南華經)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문득 깨 달아 '호접몽(蝴蝶夢)'이라는 춤을 만들었다. 어디 한번 구경해 보려무나." 여문량이 천천히 양손에 든 검으로 쌍검(雙劍)을 삼아 검무 (劍舞)를 추었다. 왼발이 오른발 앞으로 둥글게 내디뎌지며, 쌍검은 오른쪽 위 로 둥글게 올라가서 좌측 아래로 둥글게 내려 반쫌 겹쳐진 두 개의 큰 원을 그렸다. 단전(丹田)어림에서 쌍검은 벌려져 머리위로 올라가고, 우검 (右劍)은 우측방에, 좌검(左劍)은 정면에 작은 원을 그리는 동 안 오른발이 왼발 효으로 힘있게 내디뎌졌다. 좌측 옆구리에 모인 쌍검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만 날 듯 스쳐가며 좌측방을 향해 아래위로 찔러지고, 왼발을 크게 내디뎌 허리로부터 쌍검에 힘을 보탠다. 여문량의 춤은 지루하고 느리게 시작되어 나중에는 사람은 없고 쌍검이 만드는 큰 원, 작은 원들만이 보일 정도로 빨라졌다. 쌍검은 면면부절(綿綿不絶) 끊이지 않고 원을 그리고, 원과 원은 서로 독립해 있으면서도 서로 고리처럼 이어져 사방이 원 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광장 중심으로 초록색 달이 떠을랐다. 달 안에서 나비들이 한마리 한마리 춤추듯 나오더니 초록색 달을 중심으로 춤을 추며 돌았다. 흐트러지는 듯 모이고, 제멋대로 나는 둣하면서도 큰 줄기가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검은 표범 아묘가 한발 두발 허공에 노 니는 나비를 향해 다가갔다. 야광충과 화영, 그러고 혈문룡과 석두의 후예도 멍하니 따라 일어섰다. 광장 안에서 호접몽을 보는 모두가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악--! 달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빛을 발하고, 춤추던 나비들이 그 빛을 따라 폭사되었다. 그리고 다시 광장은 제오습을 찾았다. 여문량은 쌍점을 들고 연못가에 서 있었다. 야광충과 화영, 그리고 혈문룡과 석두의 후예까지, 심지어는 아묘까지 그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풀밭에 나가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호접몽은 일종의 환상(幻想)이다. 억타의 환상과 다른 점은 호접몽 안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구별(區別), 즉 물아(物我)의 구별이 없고 허실(虛實)의 분별(分別)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먹 은 대로 현실이 환상이 되고, 환상이 현실이 된다. 내가 마지막 에 모두 환상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여문량이 일동을 둘러보며 설명했다. "환상이라면 보지 못하는 화영과 짐승인 아묘까지 끌어들일 수 없지 않은가요?" 야광충이 물었다. "현실은 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세 상이 전부는 아니지.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사실은 세상의 실 체인 것이다. 그것을 이름붙여 '기(氣)' 라고 하지만 사실은 기 이전의 어떤 것이다." 여문량은 화영을 보고 물었다. "영아는 아마 느낄 수 있으리라." 화영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호접몽을 이루는 기반이 그 힘을 다루는 것이다. 물(物)과 나[我] 조차도 구별이 없는데 하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별이 있으랴?" 그는 청풍검을 화영에게 돌려주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광장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야광충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방금 본 또 하나의 경지, 신묘한 검도의 세계에 절로 흥분된 것이다. 한참 후에 여문량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내 평생 탐구한 것이 검이었다. 도(道)에 이르려면 아직 멀 고도 멀었지만 심(心)과 환(幻)의 두 구결(口訣)은 체득했다 하 겠다." 그는 화영을, 그리고 야광충과 혈문룡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영아에겐 심검(心劍)을, 너희들에게는 환검(幻劍)을 전 수했으니 이후의 성취는 너회에게 달려 있거니와……." 그렇다면 방금의 그 검무가 소위 환검을 전수한 것이었던가? 여문량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사색 에 잠겨 들었다. 혈문룡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접몽을 본 지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생각해 보고 또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단지 한번 본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공을 전수할 때 수수께끼 문제를 내둣이 하는 사람이 있다 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그런 빌어먹을 경우를 자신이 당할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알려면 알고 말려면 마라는 식의 태도 아닌가!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그나 저나 억기에서는 언제나 나가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혈문룡은 사실 더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갈 수는 있을까……?' 암담한 기분이었다. 아까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벽에 기대서 있던 야광충이 벽에서 등을 몌며 그에게 대답했다. "지금!" 혈문룡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가 의아해 챘다. "뭐?" "지금 나간다!" 혈문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나가자고 했나?" 야광층은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석두의 후예를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 중 얼거렸다. 내내 광장 구석에 흘로 앉아 있던 석두의 후예가 천천히 일어 섰다. 야광충은 혈문룡들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저 옆으로 피해 있어." 혈문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도 설명 않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고까웠던 것이다. "이유나……?" 화영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혈문룡은 더 이상 투덜거리지 못하고 화영을 따라 야광충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야광충은 한쪽에 그대로 앉아 있는 여문량을 바라보았다. "여노인도 준비하시오!" 여문량이 감았던 눈을 떴다. "너희들이나 나가거라!" 야광충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 남겠다는 뜻이오?" 여문량은 대답도 않고, 눈도 다시 감아 버렸다. 그리고 더 이 상 뜨지 않았다. 야광충도 더 이상 그에게 권하지 않았다. 그의 기색에서 완강한 거부의 뜻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혈문룡이 화영을 살짝 건드렸다. "이대로 두고 갈 건가? 네 사부인데?" 화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부님의 뜻대로!" 혈문룡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 지 않았다. 그는 정말 이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 서 말해 봐야 그만 바보가 될 뿐이었다. 그는 그냥 화영을 따라 석벽에 기대어 섰다. 취리릿--! 야광충의 손에서 인명권이 번뜩였다. 우우웅! 견흔승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야광충과 싸웠을 때처럼 인명권 소리에 홍분하고 있 는 것이다. 야광충은 인명권을 머리위로 원을 그리며 돌렸다. 취리리리릿--! 인명권이 맹렬한 소음을 토해 내었다. 부우우웅--! 견혼승망들이 벌떼처럼 날아을랐다. 붉은 구름처럼, 한 줄기 회오리바람처럼 날아올라 야광충의 머리위로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인명권이 허공에 그리는 바로 그 원을 따라 날고 있 었다. 분명 인명권이 내는 소리에는 그것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되었지만 엽장청과 귀조가 사형제 관계라 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무슨 인과관계가 있을 법도 했다. 이제는 둘 다 죽었으니 물어 볼 곳도 없었지만……, 우연의 일 치든 아니든 대단히 편하게 되었다고 야광충은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좀더 머리를 썩혔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석두의 후예를 향해 말했다. "누작쌈비!" 서장어였다. 그의 사부 예충은 식견이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가 아는 많은 것들 중에는 서장어도 있었고, 야광충은 그것 올 배웠다. 서장어에서 '주먹으로 뭔가를 때리다.' , 말하자면 '쳐라!' 는 뜻의 말은 '누자람비'였다. 그리고 '누작쌈비'는 '주먹으로 난타(亂打)하라.' 는 뜻의 말 이었다. 야광충은 석두의 후예에게 '마구 때리라.'는 식의 말을 한 것 이다. 파파파파팡--! 석두의 후예는 야광충의 말을 충실히 들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연속으로 수십 권을 연달아 쏘아 내었다. 그의 주먹에서 쏟아진 경기(勁氣)는 오 장 밖에 있는 석벽에 집중되었다. 콰콰콰쾅--! 지하광장이 들썩거렸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고, 연못의 물이 출렁거렸다. 혈문룡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졌다.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 죽고 싶으냐?" 석두의 후예가 부수고 있는 식벽은 놀랍게도 견혼승망들의 집 이 있는 곳이었다. 벌집을 건드리면 벌들이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 견혼승망이라고 자기들 집을 부수는데 좋아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놈들은 벌보다도 몇 백, 몇 천 배나 지독한 놈들 아닌 가? 과연 견혼승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방금까지 인명권의 궤적을 따라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붉은 빛무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저 빛무리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면 광장 안에 있는 모 든 사람들은 삶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취--키리리릭! 순간, 인명권이 방금까지보다 몇 배로 강한 소리를 토해 내었다. 야광충이 몇 배의 속력으로 인명권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견혼승망들이 주춤 멈,추더니 인명권으로 향했다. 인명권의 소리가 내뿜는 유혹이 집이 부서진 분노보다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석두의 후예가 야광충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천으로 둘러싸여진 머리가 야광충을 향하고 그의 손이 멈준 것이다. 둔해 보이는 그였지만 견흔승망만은 꺼리고 있는 둣했다. 야광충이 다시 서장어로 외쳤다. 석두의 후예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한참 동안을 꼼짝 않고 그렇게 서 있는 석두의 후예를 보며 혈문룡은 그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석두의 후예가 딛고 선 석실 바닥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 곳에도 충격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의 발아래만 물결이 일 둣 진동하고 있었다. 석두의 후예를 두껍게 감싸고 있는 겹겹의 옷 위로 금빛이 새 어 나왔다. 이내 그의 몸은 금빛으로 둘러싸였다. 석두의 후예는 가슴앞에 모았던 두 손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고오오오……. 석실 안의 공기가 무건게 내려앉다가 한 순간, 한 방향으로 쏟아 나갔다. 석두의 후예에게서 비롯된 금빛이 석벽의 한 지점에 모였다. 콰콰콰콰……. 엄청난 소리가 났다. 엄청난 진동이 석벽의 한 지점에서 시작해서 광장 전체로 퍼 나갔다. 쿠쿠쿠콰콰콰콰……. 광장은 지진을 만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혈문룡과 화영이 귀를 막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니라 광장 안의 공기 자체를 압축시켰다 가 터뜨리면서 나는 소리였기 때문에 내공으로 단련된 그들조차 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떨림이 멎고 팡장을 뒤흔들던 공기의 여파(餘波)가 사그라 들 었을 때 혈문룡과 화영의 귀에 야광충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 졌다. "빨리!" 혈문룡은 석두의 후예가 가격했던 식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 큰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 뒤에는 어두운 구멍이었다. 화영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렇다! 지금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극도로 홍분한 견혼승망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석벽의 틈에 뛰 어들었다. 야광충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석두의 후예가 그들의 뒤를 쫓아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혈문룡이 물었다. "야광충은?" 야광층은 흔신의 힘을 다해 인명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인명권에서 연속적으로 폭음(暴音)에 가까운 소음이 터져 나 왔지만 극도로 홍분한 견혼승망들을 일순간에 다스리기에는 부 족했다.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엎엇다. 지금 이 방법만이 견혼승망들을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다. 견혼승망들이 서식하는 그 석벽에 모종의 통로가 있을 것이라 는 것은 여기에 갇히게 된 그날 바로 짐작한 사실이었다. 견혼승망 같은 벌레들은 단 하루도 굶고 있지를 못한다. 사람은 굶주림을 참을 수 있지만 야수는 참지 못하고, 벌레들 은 더욱 그랬다. 만약 그것들이 굶주렸다면 제일 먼저 공격할 대상은 그들이었 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통로가 폐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견혼승 망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굶주리고 있지 않 았던 것이다. 그는 며칠을 두고 견혼승망들을 관찰했다. 광장에 이미 나 있는 통로로는 단 한 마리도 나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루종일 석벽에 앉아 있거나 혹은 그 주변을 붕붕 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모든 견혼승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그 중의 반 이상이 어딘가로 움직이 고 있어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 뿐이다. 분명 견혼승망들은 어딘가로 나가고 있었고, 무엇인가를 먹이 로 삼고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대답은 하나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그곳에 통로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모험이었다. 통로가 있다고 해도 과연 사람이 다닐 정도의 통로가 확보되 어 있을 것인가? 혹시 견흔승망들만이 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아닐까? 그렇게 고심하는 중에 며칠이 다시 흘렀다. 결국 그는 결정했다. 이대로 있어도 어차피 죽는다. 그럴 바에야 단 한오라기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일행의 뒤를 따라 바로 나갈 수 없다는 것도 명백했다. 그마저 일행의 뒤를 따라서 통로로 진입하면 견혼승망들의 추 적을 막을 길은 전무해지는 것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 하나는 먼저 간 일행들이 제대로 된 통 로를 찾아서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위험한 벌레들을 잡고 있어 야 했다. 아직도 견혼승망들은 흥분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야광충은 인명권으로 더 큰 소리를 낼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 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야광충이 갑자기 인명권을 석벽을 향해 던졌다. 키리리릭 ! 빛살처럼 빠르게 인명권이 날아가며 과연 그냥 돌릴 때보다 강한 소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인명권은 금강석이 박힌 부분이 회전함으로써 소 리가 나는 것이지, 멈춰진 상태에서 허공으로 돌려서 소리가 크 게 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명권이 석벽에 부딪쳐 튀어나왔다. 야광충은 손을 저어서 그 인명권을 다시 반대펀 석벽으로 던 져 보냈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 또다시 반대편이었다. 끼이이이익! 광장 안이 인명권의 소리로 가득 찼다. 효과가 있었다. 견흔승망들은 석벽에 난 틈으로, 부서진 자기들의 집으로 돌 아가지 않고 광장 안으로 모여들었다. 야광충은 다시 인명권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견흔숭망들이 그 원을 따라 다시 춤을 추었다. 일단은 진정시킨 것이다. 혈문룡은 기가 막혔다. 기껏 광장을 빠져 나왔더니 다시 막힌 석실이었다. 앞에는 갈라진 동굴 같은 것이 아직까지 나 있기는 햇지만 사 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것은 아니었다. 한 자 가까운 틈이 석벽에 길게 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몸을 옆으로 돌리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것이 명백했다. 이렇게 들어가다가 중간에 끼이기라도 하면 오도가도 못할 것 이 아닌가? "어떡하지?"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혈문룡은 성질을 냈다. "대책도 없이 이렇게 뛰어들어오면 어떡해!" 화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혈문룡의 성질을 더욱 돋우웠다. 미소를 지을 때도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데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미소를 지어서야 누가 제 대로 된 사람이라 보겠는가 말이다. 화영이 말했다. "나는 야광층이 말하는 대로 한 것뿐이야." 혈문룡이 손을 저었다. 알고도 남았다. 이 녀석은 야광충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념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대책을 물어 본 자신이 잘못이었다. 그는 뒤로 돌아섰다. 화영이 그를 잡았다. "어디로 가나?" 혈문룡이 소리를 빽 질렀다.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보아야 할 것 아냐?" 혈문룡은 지금까지 나왔던 십여 장 길이의 동굴을 되돌아 걸 었다. 다행히 견혼승망들은 그들을 쫓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석벽의 틈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아까와 마찬가 풍경이였다. 야광충은 인명권이라는 그 장난감 같은 물건을 계속 돌리고 있고, 견혼승망들은 여전히 공중에서 줌만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한쪽 끝에서는 여문량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 들과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초연히 앉아 있는 것이다. 광장 구석에 검은 표범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별로 신경도 쓰 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앞이 막혔어!" 야광충이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말투 로 그에게 되물었다. "완전히?" "한 자 가량 틈이 있는데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어!" "뚫고 나가!" 야광충의 대답은 간단했다. 혈문룡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창백하던 야광충의 얼굴이 홍조를 띠고 이마에 땀 방울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말은 담담하게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혈문룡은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더 이상 그에게 할말이 없었다. 야광충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그래야 했다. 돌아온 그에게 화영이 물었다. "뭐라고 해?" 혈문룡이 반룡도를 뽑아 들었다. "뚫고 나가래." 그러나 혈문룡은 반룡도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 멀거니 서 있던 석두의 후예가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을 감싼 헝겊을 풀어헤치고 맨손을 드러내더니 맹렬히 벽 틈을 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 손끝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것을 혈문룡은 놓치지 않았다. '특수한 내공을 운기하는 것인가?' 특수한 내공이든 아니든 석두의 후예가 벽을 파들어가는 속도 놀라웠다. 벽을 잡으면 벽이 부스러져 나가고, 돌을 잡으면 돌이 떨어졌 다. 흙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석두의 후예는 순식간에 일 장여를 파들어갔다. 허리를 잔뜩 굽히고 두 손 두 발로 기어야 나갈 수 있을 정도 로 옹색한 굴이었지만 순식간에 그 정도를 파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화영은 어느새 허리를 구부리고 석두의 후예가 파 놓은 돌과 벽조각을 긁어 내고 있었다. 헐문룡이 멍하니 서 있던 자신을 탓하며 그 일에 동참했다. 야광충은 차츰 지쳐 가고 있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벌써 몇 시진 째 견혼승망들을 잡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명권을 사용하는 것은 언뜻 쉬워 보여도 여간한 집 중력과 기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충 돌리기나 하다가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곧 그의 체력도 바닥이 날 것이고, 그때 는 견혼승망들이 화영들의 뒤를 쫓아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 자신이 제일 먼저 죽으리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여문량이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도구는 도구에 따라 쓰는 법이 다른 법이다." 야광충은 언뜻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과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내가 인명권을 잘못 쓰고 있다는 것인가?' 여문량이 다시 말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법을 아느냐?"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뇌까리고 있지 않은가! 여문량은 그러나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옛적에 남곽자기(南郭子祁)가 계란을 던져 바위를 깨고자 했 다. 하나를 던졌더니 계란이 깨어졌다. 그러나 두번째 던졌을 때는 계란도 바위도 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세번째 던졌을 때 는 계란은 멀쩡했는데 바위가 박살났다. 도구를 쓰는 법이 이와 같다." 여문량의 말은 시작할 때처럼 조용히 끝났다. 그러나 야광충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바늘로 찌르는 둣한 긴장과, 온몸이 아파올 정도로 육박하는 피곤함 속에서 그의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고 있었다. 여문량의 말은 거울에 비치둣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하나도 이해되지가 않았다. '왜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가? 어떻게 계란으로 바위를 깼단 말인가?' 머릿속에서는 그런 의문들만이 소용돌이쳤다. 여문량은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나지막히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힘에 거역하려 하지 말고, 흐름에 순응하라. 기(器)에 종속 되지 말고, 네가 기를 억지로 움직이려고도 하지 마라. 모든 사 물에는 각자의 길이 있으니 그 길과 네 자신을 맞추어 가라. 문득 야광충은 그 말이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것과 동일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와 같더라?' 생각이 났다. 바로 그것이었다. 귀조가 억지로 갖다 맡긴 그 책, 전륜나의 이론을 설명해 놓 은 그 책에서 나온 글귀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이치를 말하고 있었다. 힘에 거역하려 하지 말고 흐름에 순응하라는 것은 전륜나의 제일 원칙이었다. '그것이 지금 이 상황에도 적용된단 말인가?' 이 상황의 어떤 것과 그것이 맞아들어가는지 야광충은 생각했다. '모든 사물에는 각자의 길이 있느니……!' 야광충은 깨달았다. 여문량은 지금 그가 인명권을 억지로 다루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인명권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명권 자체의 흐름, 그리고 그 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음을 꼬집은 말이었다. 야광충은 자신의 손끝에 매달려 있는 긴 줄과 그 줄 끝에 매 달려 있는 인명권 사이의 흐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석벽 틈으로 혈문룡이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길이 뚫렸어!" 야광충이 그를 향해 역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가라!" "너는?" "나는 너보다 열 배는 빠르니까!" "빌어먹을!" 혈문룡은 온통 땀에 젖고 돌에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그의 손은 거의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야광충은 원래의 창백한 안색과 침착한 태도를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분명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야광충이 체력소 모 면에서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광충이 그렇게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혈 문룡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석벽의 틈으로 난 동굴을 따라 달렸다. 저만큼에 그들이 만든 새로운 통로가 보였다. 화영과 석두의 후예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뒤에 따라온대!" 혈문룡은 통로로 뛰어들었다. 장장 십오 장이나 되는 긴 통로를 세 사람이 손으로만 파 낸 것이다. 물론 원래 틈이 있었고, 십오 장 밖에는 다행히도 또 다른 통 로가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이 성벽 바로 밖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그들이 만든 통로를 가로지른 원래의 통로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먼 옛날에 이 성에 살던 왕족들이 성이 함락되었을 때 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비상 탈출구였을 것이다. 그것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생명을 살리게 될 줄이야 누가 짐작했을까? 밖은 어두웠다. 이제 기울었다가 새로 채워지는 달이 성벽 위로 떠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성벽 아래 풀밭에 엎드려 몽고군의 움직임을 상펴보았다. "얼마나 남았을까?" 화영이 대답했다. "많이. 그러나 전날보단 횔씬 덜." 혈문룡은 이마를 찡그려 질렸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도대체 여기 이렇게 누워서 뭘 알아낸단 말인가? 그런데 이 화영이라는 맹인 녀석은 그가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것 이상을 알아내지 않는가? 그러고도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백여 명 정도인 것 같은데 그 주변에서 도 사람의 낌새가 느껴지는 걸로 보아 우리가 나가려 한다면 그 보다 많아질지도 모르군. 정확한 것은 직접 보고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어" 혈문룡이 풀밭을 기어서 저만치에 서 있는 높은 나무를 향해 다가가며 짧게 말했다. "그 정도 알아낸 것도 대단한 거야." 한참 후에 그는 다시 돌아왔다. 그가 본 바로는 몽고군은 성벽을 완전히 에워싸지는 못하고 있었다. 분명 병력이 대폭 감축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백 명이 모여 있는 몽고군 진영을 뚫어야 했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면 그 인근의 병력들이 모두 오여들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지?" 화영이 태연히 말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또 야광충이냐?" 혈문룡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내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머리가 좋은 놈인 것은 분명했다. 화영이 갑자기 일어섰다. "온다!" 쉬익--! 그들의 머리위로 검은 그림자가 날았다. "뛰어!" 야광충의 목소리였다. 혈문룡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 처럼 벌떡 일어나 야광충의 검은 그림자를 쫓아 뛰었다. 귓가로 견흔승망들의 날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견흔승망까지 몰고 나온 것이다. 어쩌면 견흔승망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왔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쪽이든 일단은 피해야 했다. 야광충은 저만치 앞에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방향은 바로 몽고군 진영쪽이었다. '어쩌려고 저러나?' 혈문룡은 야광충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문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행동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몽고군 보초가 그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진영에 대낮같이 불을 밝혀 두고 있는 참이었다. 무장(武裝)을 한 채 자고 있었는지 천막 안에서 군사들이 우 루루 뛰어나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처지였다. 야광충의 뒤를 따라온 견혼승망들이 몽고군 진영을 덮친 것이다. 삽시간에 몽고군의 진영은 견혼승망들의 날개 소리와 몽고군 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찬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혈문룡이 물었다. "어쩔 셈인가?" 야광충은 모래언덕 위에 서서 멀리 서쪽을 가리켰다. 그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왔다는 것이 그제서야 기억났다. 그는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화영은?' 화영은 반대편을 가리켰다. 바로 그들이 떠나온 곳, 고란고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부님을 모셔야 해." "말도 안돼! 거기에는 아직 몽고군이 있잖아!" "우리가 빠져 나간 이상 그들이 언제까지나 거기에 있지는 않 을 거야. 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돼." 여문량이 왜 거기에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화영도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어쨌든 화영이 스승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은 이 해가 갔다 "그럼 너는?" 혈문룡은 질문을 하고서 아차했다. 석두의 후예는 한마디밖에 할 줄 모르는 놈 아닌가? '또 그 말을 할까?' 석두의 후예는 이번에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사구(沙丘)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혈문룡은 웃었다. "며칠 사이에 제법 눈치가 생겼나 보군!" 모두들 갈 곳이 정해졌다. 그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수하들을 잃고 돌아갈 면목은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서 그들의 죽음을 알려야 했다. 그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문득 화영이 야광충의 소매를 잡았다. "아묘도 데려가." 아묘! 검은 표범이 어느 사이에 그들의 옆에 와 있었다. 언제 표범이 그들을 따라 나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두들 견혼승망과 몽고군을 신경쓰느라고 표범에게는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야광충이 눈에 보이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놈을 나더러 맡으라고? 호시탐탐 나를 죽이려는 놈을?" 화영이 표범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곧 알게 될 거야.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야광충은 고개를 돌렸다. 혈문룡은 그것이 무안한 얼굴을 가리려는 행동임을 알 수 있 었다. 이 얼음처럼 냉정한 놈의 가슴에도 피는 흐르고 있는 모양이 었다. 그도 그랬다. 우연하게 만나 그야말로 우연히 생사(生死)의 위기를 같이 넘 고 보니 묘한 친밀감이 그들 속에 싹튼 것이다. 흑룡사의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느껴지던 그런 동질감 이……. 야광충은 서쪽으로 갔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검은 표범이 이상하게도 군소리없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묘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혈문룡은 생각했다. "비슷한 놈들끼리라 그런지도 몰라." 검은 표범과 야광충은 소리없이 걷는 것에서부터 그 살기의 정도까지, 따지고 보면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석두의 후예도 갔다. 뭔가 말을 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혈문룡은 화영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 넓은 대막에서 다시 만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와 화영은 어차피 가는 길이 달랐다. 한참을 걷다가 혈문룡이 돌아보았을 때 화영은 아직도 사구 위에 서 있었다. 은은히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제14장 4월 13일, 지옥전(地獄殿) 탁자 위에는 세 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야광충이 고란고성에서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그는 벤야시리의 창고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지 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광장에 있는 동안 창고 구석구석을 세밀히 조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창고는 세 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또 다른 창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느 단체, 어느 집에서도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비밀공간이란 있기 마련이었다. 왕궁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었다. 식량창고와 병기창고에 그것이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명백 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밀창고를 만들어 두는 바보는 없 을 테니까. 의표(意表)를 찌른다고 그런 곳에 비밀창고를 만들어 두었다 간 오가는 사람 중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발각되기 마련이었다. 결국 그는 은괴창고의 벽 속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물건을 챙겨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쌍고르마가 지시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의 말로는 지촉성이 추진하는 극히 중요한 일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들이라 했는데, 막상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 었다.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투명한 병. 완벽히 뚜껑을 밀봉해 놓았는지 그 내용물을 짐작할 아무런 냄새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는다면 그 액체가 기이할 정도로 붉다는 것 정도였다. 조금도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완벽한 붉음, 은은 한 요기(妖氣)가 느껴질 정도로 붉은 액체였다. 두번째 물건은 고란고성의 지하광장에서 보았던 빛이 나는 돌 이었다. 특히 그가 가져온 상자 속에 든 돌은 광장의 석벽을 구성하고 있던 돌보다도 정순한 것인지, 그때의 그 석벽보다도 몇 배 밝 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치 푸른 불길이 탁자 위에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돌로 된 상자 안에 특별히 넣어져 있지 않았다면 들기도 힘들 었을 것이다. 야광충으로서는 이상하게 꺼려지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져오는 것이 임무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 을 물건. 지하광장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었다. '밝아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이런 느낌 때문이었다. 왠지 꺼려지고, 싫다는 느낌! 본능적으로 피하고 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불쾌한 느낌이 었다. 마지막 물건은 말라붙은 풀뿌리 하나였다. 검은색의 나무토막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이것에 대해서는 야광충도 별느낌이 없었다. 단지 무엇인가 의 약(藥)을 만드는 데 소용되는 것일 거라는 짐작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쌍고르마의 의도를 희미하게나마 추측할 수가 있었다. 이상하긴 하지만 아마도 이 세 가지는 모두 어떤 종류의 약물 (藥物)에 소용되는 물건들일 것이다. 돌이 그 약에 들어간다는 점으로 보면 연단(煙丹)일까? 돌은 약 속에는 안 들어가고 단지 화로에 소용되는 것일 수 도, 흑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용도에 사용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런 추측은 모두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확실한 것은 이 세 가지가 극히 중요한 일에 소용 되는 물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양의 은괴보다도 이 물건들을 더 중요 시 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쌍고르마는 그 물건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세심하게 바라보았다. 흡사 물건에 홈집이라도 있는지, 흑은 엉뚱한 것을 가져온 것 은 아닌지 의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긴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물건을 확인해 본 쌍고르마가 비로 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 미소가 가식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수고했다!" 쌍고르마가 말했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물건들이야. 완벽하다! 훌륭해!" 그는 과장되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만족스러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쌍고르마의 눈이 음침해졌다. "그곳에는 별일 없었느냐?" 야광충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귀찮은 둣이 대답챘다. "해골들이 많더군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쌍고르마는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래……? 사지(死地)니까!"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렇게 된 원인이 뭐로 보이더냐? 그러니까…… 사인(死因)이?" "벌레!" "벌레라고?" "이라가 쿠케 투루!" 쌍고르마의 눈에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그런……!" 그는 알았다는 둣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게 원인었군!"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야광충은 예리 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감추고 있다고 본인 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 였다. 사람을 속이려면 속이려는 자신이 먼저 속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다. 비밀을 지키려면 지키려는 그 자신이 먼저 잊어버려야 했다. 쌍고르마는 교활하고 노회하며, 그런 방면에 오랜 경륜(經綸) 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그런 경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것에도 천부적인 소질이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야광충이 바로 그랬다.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는 쌍고르마보다 고 수인 것이다. 쌍고르마가 다시 물었다. "혹시 그 부근에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느냐?" 야광충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알았다." 쌍고르마가 일어섰다. 훌륭하게 일을 해 주었다. 나는 몹시 흡족하다. 곧 상(賞)이 내릴 것이다. 예충이 겸손의 말을 했다. "보잘것없는 재주지만 유용하게 쓰였다니 다행입니다." "보잘것없는 재주가 전혀 아니군. 예옥주." 그는 흡족한 미소를 온 얼굴에 퍼뜨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총옥주가 일어났다는 것은 볼일이 끝났다는 뜻이고 축객령(逐 客令) 과 같은 뜻이다. 예충과 야광충은 총옥주의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 종윽주가 잊은 것이 있는 듯 탄성을 질렀다. 그들이 멈춰 섰다. 그들에게 총옥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예옥주의 제자도 그럴둣한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려면 지옥성의 율법상 지옥연무(地獄鍊武)를 거쳐야 하는 데……, 별문제는 없겠지요?" "지옥연무?" 예충이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지옥연무는 쌍고르마의 말대로 지옥성에 소속된 사람이면 누 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팔대관문을 만들고 지옥성의 팔대옥주들이 각 관문에 책임자가 되어 지옥성의 옥졸들을 단련시키는 과정이 바로 지옥연무였다. 지옥성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열 살이 넘어가면 무조건 지옥연 무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성취 정도에 따라 지위 가 달라졌다. 소질이 뛰어난 사람은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첫번째 관문을 간신히 끝내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절반 이상의 사람이 연무 도중에 시체로 변했다. 연무과정이 가흑해서이기도 했지만, 삼 개 관문 이상을 통과 하지 못해 시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밥만 축내는 밥벌레라 해서 지옥성 자체에서 처형(處 刑)시켜 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여덟 개 관문을 다 통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일곱 명뿐이었다. 바로 그들이 지옥칠살이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지옥연무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중도에 죽을 것을 염려한 예충의 배려였었다.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햇빛을 보지 못하는 체질이 야광충 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다. 지옥연무 중에는 밖에 나가서 해야 하는 과정도 있기 마련인 데 그 흔자만 열외(列外)가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총옥주의 묵인(默認)하에 억태 지옥연무에 참석하지 않 았었는데, 이제 바로 그 총옥주가 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건 일부러 걸고 넘어진 것이라 보아야 했다. 예충이 다급하게 말했다. "총옥주! 재고(再考)를……." "하겠습니다." 예충은 눈을 크게 뜨고 야광충을 보았다. 야광충이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지옥연무를 거치겠습니다." 쌍고르마의 눈에 잠시 의외라는 빛이 스쳤다. 설마 이렇게 선선히 응낙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아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야. 지옥연무 팔단계를 모두 통과하는 여덟번째 인재가 나올 수도 있겠군!" 예충 사도(使徒)가 방을 나가자, 쌍고르마는 방금까지 만면에 띠고 있던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 버리고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야광충의 말에 빈틈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더 이상했다. 그가 진정 절정(絶頂)의 경지에 달한 도둑이라고 치자. 그가 견혼승망들을 피해 고란고성에 잠입하고, 물건을 찾아서 지옥성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서…… 라는 조건을 달면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런 일에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運)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서 절묘하게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피쌨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은 모른다. 그러나 먼저 간 금룡과도, 나중에 보낸 혈지주와 혈당랑, 혈 오공까지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일만(一萬)에 달하는 몽고군이 성을 포위하고, 지하를 폐쇄시 키기 전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인데, 그렇게 운이 좋았다 고만 보아도 좋은 것일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과는 반대편 벽 앞에 섰다. 바닥의 몇 군데를 차례대로 밟자 그의 앞에서 벽은 문을 드러 내었다. 그는 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옥전 뒤에 감추어진 진정한 지옥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단을 밟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야광충은 두 가지 중의 하나였다. 운이 대단히 좋은 자거나, 거짓말쟁이! 어느쪽이건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분 명해 보였다. 지옥연무가 그 능력을 완전히 드러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 * * 쌍고르마의 방을 나서고도 예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야광충은 그것이 상의도 없이 지옥연무를 받다고 결정한 것 에 대한 꾸짖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변명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사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 일에는 사부에게조차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아니 사부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목적이 있었다. 묻는다 해도 대답할 수 없고, 대답한다 해도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경우였다. 어떤 말을 해도 사부를 기만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니 아예 말을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옥성으로 돌아온 이후, 그는 그래서 고란고성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사부도 묻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끝내 그가 말하지 않는다면 물어 볼지도 모르지만, 대답은 역 시 들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앞서가던 예충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야광충도 멈추어 섰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예충이었다. "무슨 생각이 있는 게냐?" "예!" 예충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다!" 야광충의 눈가로 희미한 그늘이 깔렸다. 예충은 다시 걸음을 옮기고, 그도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 지만 눈가에 깔린 그늘은 걷혀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이렇게 눈에 드러날 정도로 감정이 표시된 것은 여태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그 정도로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과연 사부에게도 그렇게 감추어야 할 일일까?' 야광충은 고란고성에서 보았던 일들과 지옥성에 관련된 의문 들을, 무엇보다 그 자신에 대한 의흑들을 예층에게 털어놓고 싶 은 강설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비밀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미리 의혹들을 해소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막을 수 도 있지 않은가? 그는 입을 벌려 사부를 부르려 했다. 사부를 향해 그가 마음속 깊이 담고 있던 의문점들과, 이제 그가 하려고 하는 일들을 털어놓으려 했다. 사부는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외혹의 그 림자들을 거두어 줄 것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사부에게 미리 말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 버렸다. * * * 쌍고르마의 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 아 안은 뭔가 비정상적으로 추운 곳인 모양이었다. 철문 앞에는 온통 붉은 옷에 붉은 복면의 사내가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팔 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 그의 손에 끼워져 있는 강철 손톱이 달린 붉은 장갑이 독특해 보였다. 지옥칠살 중 하나인 혈응(血鷹)이었다. 서열 이위! 쌍고르마가 그에게 물었다. "황룡은?" "여전합니다!" 쌍고르마는 쓸개라도 핥은 듯 인상을 썼다. "혈사(血蛇)의 최심술(催心術)도 그에겐 안 통한단 말인가? 홍교(紅敎) 최고의 술사(術士)가 펼치는 최심술이……?" 혈사 역시 지옥칠살의 하나였다. 서열 삼위였다. 홍교는 라마교(喇 敎) 의 양대종파(兩大宗派)중 하나로 원제 국 때에는 몽고족의 후원을 둥에 업고 라마교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력을 떨쳤었다. 라마교는 원래 천축으로부터 전래된 원시불교(原始佛敎)의 일 파였다. 그 도력과 수행기간에 따라 숭려를 부르는 명칭이 다른데, 가 장 최고위 승려를 지고지상(至高至上)의 존재, 즉 '상인(上人)' 이라는 뜻의 서장어, '라마'라고 부르기 때문에 '라마교'라고 불리워졌었다. 이른바 밀교(密敎)라고 불리는 종교가 바로 이 라마교이기도 했다. 원시 불교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전통을 따라 철저한 개인수행(個人修行)이 주인 종파였는데, 어느 때부 터인가 세속의 권력과 결탁하기 시작하면서 사도(邪道)에 기울 어지게 되었다. 그 주원인이 바로 홍교였다. 홍교는 닝마파, 즉 홍모파(紅帽派)라 불리는 라마교의 종파 였다. 각종 사술(邪術)과 방술(方術), 괴이한 율법(律法)을 지켜 라 마교의 명예를 떨어뜨린 종파가 바로 홍교였던 것이다. 서장에서 결혼할 처녀의 처녀성을 라마승이 먼저 빼았는다는, 이른바 초야권(初夜權)의 독점도 이들 홍교가 하는 일이었다. 여기 대항해서 나온 라마교의 정화운동이 바로 황교(黃敎)의 성립이었다. 황교는 달리 게룩파, 즉 황모파(黃帽派)라고도 했다. 기존에 흥교가 해 왔던 사특한 일들을 금지시키고, 라마교 본 연의 임무, 즉 구도(求道)와 중생제도(衆生濟度)에 주력한 종파 가 황교였던 것이다. 황룡은 바로 그 황교의 인물이었다. 그것도 그 지닌바 무공의 수위(修位)로 보아서는 굉장한 신분 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여기 지옥성에 오게 된 이유는 쌍고르마와 성주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은 쌍고르마도 자세히는 몰랐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다고 했었다. 그를 찾을 때까지 여기 지옥 성에 있겠다고 했었다. 왜 찾느냐는 질문에는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묻자 그저 중요한 물건이라고만 대답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쌍고르마가 볼 때 그는 조금 모자란 인물이었다. 만사에 그런 식으로 구름잡는 듯한 이야기만 했고, 사실은 그 자신도 그 외에는 잘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정체 역시 모호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만큼 쌍고르마는 순진하지 않았 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지옥성 최고신분의 하나인 지옥삼룡, 지옥의 세 마리 용에 넣어 준 것은 그의 무공 때문이었다. 가공할 무공!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공에 신기막 측한 기공(奇功)들을 단지 약간 의심스럽다는 점 때문에 이용하 지 않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던 것이다. 그에 반해 혈사는 훙교의 인물이었다. 황교는 몽고족의 권력에 조금 소원한 태도를 취했지만 홍교는 거의 전폭적인 협조를 해 왔다. 그런 홍교가 그들 지옥성에 보내 준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혈 사, 홍교에서도 가장 방술에 뛰어난 자였다. 지옥칠살이 팔대관문을 통과했다지만 사실은 서열 사위 이후 만 그렇고, 서열 일위에서 삼위까지의 인물들은 그저 형식적으 로 통과한 것일 뿐이었다. 하나같이 외부에서 데려온 인물들인 것이다. 그것은 지옥삼룡도 그량다. 지금 안에서 혈사의 최심술로 신문(訊問)을 받고 있는 황룡이 그러하둣이……! 쌍고르마는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혈응이 그 신호에 철문을 열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문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방안은 하얗게 얼어붙은 고드름 투성이었다. 이 한기의 원인은 방안 가운데에 있는 돌판이었다. 설산(雪山) 깊은 곳에서 캐온 만년빙(萬年氷)의 정화(精華), 바로 빙정(氷精)이라 불리는 돌이었다. 지금 그 돌 위에 얼음으로 뒤덮인 한 라마승이 앉아 있었다. 황룡이었다. 그리고 그 정면에 붉은 가사를 걸친 또 다른 라마승이 앉아 있었다, 그는 해골과 사람의 뼈대들, 그리고 기기묘묘한 몇몇 물건들 을 앞에 늘어놓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방안 가득 뿌연 연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빙백최심술(氷魄催心術)을 시전하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 인간을 처하게 한 뒤, 그 심리적 방어기제 (防禦機制)가 극한 상황과 투쟁하느라 느슨해진 틈을 타서 심혼 (心魂)에 침투하는 방술이었다. 빙정을 비롯해 사용하는 물건들과, 혈사의 법력(法力)으로 본 다면 이 이상의 최심술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단지 이 정도 한기 속에 사람을 넣어 둔다는 것만으로도 대부 분의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이 될 것이었다. 황룡은 그 한기 속에 이미 네 시진이나 갇혀 있었다. 그리고 한 시진 전부터는 혈사의 최심술이 시전되고 있는 것 이다. 혈사, 붉은 가사의 라마승은 잔뜩 고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에 반해 황룡은 얼음에 거의 덮여 있다시피 하면서도 태연 한 표정이었다.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은 흡사 좌선 중 의 고승과도 같았다. 쌍고르마가 나직이 물었다. "협조를 않고 있나?" 혈사가 주문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고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이마에는 굵은 땀까지 홀리고 있어서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가 신문을 받고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협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는 속하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고 있으니……." "그럼 뭐가 문젠가?" 혈사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다는 듯, 분해서 어쩔 줄 모르 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빙백최심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내공으로 저항하는 것인가?" 혈사는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만약 그 정도의 내공이 있다 면 족히 천하제일의 고수일 것입니다." "그럼 수행력?" "그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가 그 정도의 수행을 쌓았다면 아 마 활불(活佛)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혈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백치(白痴)!" 이번에는 쌍고르마가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 었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혈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바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백치 가 아니고서야 일점의 사심(邪心)도, 꺼리는 그 무엇도 없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제 최심술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보 멍청이가 무공은 어떻게 익힌단 말인가?" 혈사는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옆에 서 있던 혈응이 끼여들었다. "백치가 무공은 고강한 경우도 있지요. 오히려 백치라서 더 고강할 수도 있고……!" 쌍고르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입술올 지그시 깨물더니 혈사 에게 다짐이라도 받둣이 물었다. "백치라도 꺼리는 것이 있다면,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한다면 최심술에 걸리지 않을까?" "그럴 겁니다." "지금 황룡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 혈사가 히죽 웃었다. "백치는 거짓말을 하지도 못합니다." 쌍고르마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그는 황룡에게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그의 입가에 하얀 김이 서렸다. 어느새 수염에도 고드름이 엉켜 붙어 있었다. "황룡, 내 말이 들리나?" 황룡이 눈을 떴다. 그 눈에서 청광(靑光)이 번뜩였다. 그는 파란 눈의 색목인(色 目人)이었다. 쌍고르마가 물었다. "여러 번 물어 보았던 것이지만 다시 묻겠다. 괜찮겠지?" 황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쌍고르마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착한 아기를 보는 듯한 모습 이었다. 그러나 질문을 하고, 황룡은 서장어로 한 대답을 듣고 돌아설 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그의 표정은 빙정보다도 더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미 들었던 대답을 되풀이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고란고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늦었는가? --파리떼들에 둘러싸여 싸우며 며칠을 보내었기 때문이었다. --왜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간신히 파리떼를 뚫고 지하로 들어가 보니 물건들은 이미 없었다. --거기서 누군가 사람을 본 적이 없는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시체도? --시체는 있었다. 목이 잘려 죽은 시체, 가슴이 뚫린 인형, 머리가 부서진 시체, 상처가 많아서 죽은 시체……, 그리고 많 은 해골들이 있었다. --몽고군은 보지 못했나? --그들은 밖에 있었다. 안에는 없었다. --돌아오는 동안 본 사람은? --몽고군말고는 없었다. 모든 말이 야광충의 말과 일치했다. 이제 야광충의 말을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가서 쉬게 해라!" 황룡에 대한 신문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 * * 그녀는 잘해야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였다. 그러나 딱히 그렇게만은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그녀에 게는 있었다. 야광충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마치 백치 같다고나 할까? 그녀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그저 맑게만 빛나고 있 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 야광충은 그녀의 눈이 고양이의 눈처 럼 반짝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스쳐지나가는 그 동안에, 그리고 그가 바 라보는 그 동안에 그녀의 눈이 그렇게 변화한 것이다. 아니면 야광충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은 보기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의미를 담고 있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렇게 느꼈다. 약간 치켜진 눈썬 끝, 둥근 얼굴, 약간은 거만한 둣 내려진 입술꼬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맑은 눈빛 속에 검은 거울처럼 투명하던 눈동자에 바람이 불 었을 때의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웃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옆을 스쳐서 지나가려다가 멈추었다. 복도를 막 돌아선 모퉁이였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예충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야광충을 향해 있었다. 천진한 둣, 흑은 요염한 둣 갈피를 잡기 힘든 흐릿한 눈빛이 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야광충의 눈도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인에게서 풍기는 묘한 느낌이 그로 하여금 눈길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예충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인사에 답하고는 눈살을 찌푸리 며 야광충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가자!" 그러나 야광충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방심한 듯, 흑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보고 있었다. "부용(芙蓉)!" 처음에 야광층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곧 정신을 수습했지만 야광충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떠올라 있 었다.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순간 눈을 통해 그의 가슴을 파고든 묘한 기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이 이 여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단지 야광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의 위험도 흐트러뜨 리지 못하는 그의 집중력올 어떤 방법으로 이 여인이 흐트러 놓 았느냐 하는 것이다. 단지 입을 벌려 말하는 것만으로 그의 집중력을 흩어 놓을 수 있다면 무기 중에서도 가장 강식한 무기가 될 것이다. 여인은 다시 입술을 벌렸다. 작은 입은 아니었다. 소위 미인의 조건으로 일컬어지는 앵두 같은 입술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또렷한 윤곽을 지닌 붉은 입술이었다. 그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을 때, 그 안에서 뜨거운 붉은 혀가 움직일 때, 야광충은 다시 한번 정 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이름은 부용이에요. 연꽃이란 뜻이지요." 바로 그것이었다. 이 순간 야광충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갈았다.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가 이루어내는 조화와 그 속에 담겨진 묘한 힘. 그것이 그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묘한 힘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바로 유혹(誘惑)일 것이다. 겉보기에는 시골소녀와도 같이 청순해 보이는 이 여인의 내부 에는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담겨 있었다. 입을 벌릴 때 그 뜨거움이 새어 나와 야광충의 정신을 혼란하 게 만드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정신을 수습하고 차갑게 그녀를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묘한 억인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순박한 소녀 같기도 하고 표독스러운 고양이 같기도 하고 세상을 다 알아 버린 노인의 눈 같기도 했다. 눈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것을 전해 주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그 속에는 공존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방금 느꼈던 그것, 유혹일 것이다. 예충이 그녀를 소개했다. "총옥주 좌하 금검령주(金劍令主)이신 혈부용(血芙蓉) 여협이 시다. 인사드려라." 야광충은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혜지 않고 보일 둣 말 듯 고 개를 까닥거려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야광충!" 예충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찌푸린 눈살은 그녀가 그들의 곁을 스쳐 그들이 온 방 향으로 사라져 갈 때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예충은 야광충이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그쪽으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것을 보며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즐 거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순간에 이 여인이야말로 야광충의 상극(相剋) 임을 알아보았다. 혈부용은 놀랍게도 여인에게 있을 수 없는 체질, 태양지맥(太 陽之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내이면서 현음지맥을 지닌 야광충과 역으로 여인이면서 태 양지맥을 가지고 있는 혈부용이야말로 보는 순간부터 서로를 끌 어당기게 되어 있었다. 결국 그의 예상대로 둘은 서로에게 겉잡을 수 없이 빠져 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천생연분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극도의 상흉 지상(相兇之象), 즉 서로를 갉아먹는 유형의 결합이었다. 순음(純陰)과 순양(純陽)이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경우란 대단히 어렵고 위험했다. 주역(周易)에 따르면 남녀의 결합 중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함 괘(咸掛)였다. 아래가 간산(艮山)으로 소양(少陽), 위가 태택(兌澤)으로 소 음(少陰)의 두 괘(掛)가 합쳐져 함(咸)이라는 하나의 괘가 형성 된다. 평범한 남과 여가 합쳐져야 이상적이라는, 그것도 여자가 주 도적인 위치에 서야 이상적인 결합이라는 주역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순양과 순음의 결합은 그렇게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 다. 기본적으로 잘 섞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섞여도, 서로에 게 해가 된다. 그나마 여자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때에는 그런대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만간 남자가 성(盛)하게 될 때가 오 고야 만다. 그때의 괘는 부(否)!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경우로……! 야광충과 혈부용! 둘 중 어느쪽이 상대를 조정할 수 있을 것인가? 예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가 알아서 막아 줄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만나 버린 것이다. * * * 혈부용은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선 후, 석벽에 손을 대고 기 대어 섰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석벽에 이마를 대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던 뜨거운 열기가 석벽의 차가 운 기운에 약간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지금 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단 한번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반할 수 있는 것일까? 묘한 열기가 솟구쳐 온몸을 사로잡을 정도로? 단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말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창백한 얼굴과 눈부신 은발이 그녀의 눈속에 잔상(殘像)처럼 떠올랐다. "야광충이라고?" 그녀는 자신이 그를 다시 찾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옥칠살의 넷째, 혈부용이 일개 옥주의 제자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주님은 왜 이 시간에 여기를 지나가라고 한 것일까?' 제15장 그후 며칠, 지옥성(地獄城) 옹중서 주개는 영 편치 않은 기색이었다.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묘! 고양이라니……! 그의 별호가 쥐인데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뭔가 어색한 일 이 아닐까? 게다가 고양이도 보통 고양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장장 일 장 반에 달하는 고 양이는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었다. 검은 표범이라 해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놈을 길에서 주웠다니……!' 주개는 인상을 쓰다가 피식, 실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제다운 일 아닌가……!' 그는 야광충이 데리고 돌아온 검은 표범, 아묘에 대한 경계심 이 약간 풀리자 비로소 생쥐처럼 생긴 얼굴에 미소를 담뿍 담고 야광충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연무를 받는 동안은 내가 보살펴 주마. 안심 해라." 야광충은 사형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정(情)이 넘치는 사형이었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지옥성 내에서만, 그것도 극히 한정 된 몇 개의 공간에서만 지내던 그가 지옥성을 떠나갈 때 사형이 얼마나 걱정했을지를 그는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돌아온 그를 보고 마치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병사 를 바라보듯이 하는 주개의 눈빛이 야광충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주개가 물었다. "그 일은 그렇다고 치고, 지옥연무는 어떻게 받을 작정이냐?" 그도 이미 지옥연무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잘 알고 있 었다.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는 그 지옥 같은 과정을! 야광충이 통과하지 못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야 사부의 후광으로 간신히 삼관문까지 통과했지만 사제인 야광충이야……! 다만 무언가 음모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군가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는 냄새가 짙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지 않은가? 야광충은 그 이야기가 시작되자 평소의 싸늘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가 친숙하게 보아 왔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야광충은 약간은 비웃는 듯한 느낌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팔관돌파(八關突破)를 하겠습니다!" 주개는 최대한 인상을 썼다. 그의 쭈글쭈글 얼굴로 더 이상의 인상을 쓸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지금 느끼는 걱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부족 한 감이 있는 것이다. 팔관돌파는 지옥성 출신이 아닌 외부인물이 들어왔을 때 사용 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 나름대로 쟁쟁한 실력을 자랑하는 자들이 연무의 과정을 생략 하고 바로 관문을 돌파하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관주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통과하거나, 관주와 직접 겨루어 이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문제가 얽혀 있었다. 연무를 받은 수련자들이야 관주들도 사정을 봐줘 가며 통과를 시키지만, 외부에서 온 떠돌이들까지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순조롭게 관문을 통과하기라도 하면 관주의 체 면이 깎인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팔관돌파의 기준은 대개 일반관문보다 어렵기 마련이 었다. 더구나 관주와 겨루고 싶다고 한다면……. 최소한 병신이 되는 결과를 주개는 충분히 보아 왔던 것이다. 떠도는 말로는 그런 방식으로 팔관을 모두 통과한 사람은 이십 년간 단 세 명이고, 그들이 바로 지옥삼룡이라고 했는데……! 주개는 야광충이 그의 충고를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떠듬떠듬 만류의 의사를 표시했다. "어지간하면 그냥 연무를 받는 것이……?" 야광충은 역시 그의 층고를 듣지 않았다. "첫번째 관주가 아마 등활지옥주 노염군(老閻君) 위대봉(韋大 峯)이겠죠?" 그가 물었다. "응!" "첫번째 관문에서 배우는 내용은?" 기초체력과 내공! 말은 간단하지만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겪어야 했던 고 련(苦鍊)은 전혀 간단한 것이 아니었었다. "그가 그쪽에 조예가 있었던가요?" "염왕수(閻王手)라는 기문궤공(奇門詭功)의 고수지!" "본 적이 있습니까?" "한철(寒鐵)로 만들어진 판에 도깨비 머리를 세 치 깊이로 찍 더군 그 자리에선 파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세 치면 깊은 것인가요?" 주개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장력(掌力)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아니겠지?" 석판도 아니고 한철판에 세 치 깊이로 손자국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장력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도 모를 수 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야광충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전 장법(掌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야광충의 대답은 간단했다. 누구도 그에게 장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주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부님이 안 가르쳐 주셨나?" 그는 정말 몰랐다. 야광충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었기 때문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일이었다. 사부가 어련히 알아서 그런 것들도 가르쳐 주셨으려니 했는 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들 귀영문의 독문무공이 금나술과 경신술이라는 것은 주개 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귀영문의 장문제자이니 말이다. 그러나 사부가 다른 무공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무림에 이름을 날리는 절정무공은 아니라 해도 기본적인 장법 이나 권각지술, 그리고 병장기 다루는 법 둥둥은 웬만큼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문파도 독문의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강호의 이런저런 무공을 가르쳐 주는 법이니까. 그럼으로써 견문을 넓히고, 자파의 무공을 배울 기초가 형성 되는 것이다. 사부가 그에게도 가르쳐 준 적이 있으니 그건 확실했다. 물론 그가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더 필요할까요?" 주개는 말문이 막혔다, 강호에서 살아 나가는데 모든 것에 정통할 필요는 물론 없었 다. 한 가지라도 남보다 잘 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도 충분 할지도 모른다.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에는 필요할 거다!" 제일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장력으로 칭석판에 자국을 남 겨야 하는 것이다. 미세한 흔적이라도……! 팔대관문 중 가장 많은 사람이 탈락되어 죽는 곳이 바로 이 제일 관문이었다. 내공에 진보가 었으면 그는 무공에 전혀 소질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처형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연무를 받은 수련생들이야 자국 정도로도 통과되겠지 만 팔관돌파를 하려면 그 정도로도 안 될 것이다. "가장 깊은 자국을 낸 사람이 위대봉인가요?" 관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주개는 고개를 저었다. "다섯 치 두꺼의 청석판을 뚫어 버린 사람도 있지 아마 한철 판을 쳤어도 뚫어졌을 거라는 평가가 돌더구나." "그게 누굽니까?" "양인장(兩刃掌)이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양인장은 한인(漢人)이었다. 중원에서 뭔가 죄를 짓고 사천, 귀주를 거쳐 이곳까지 도망온 사람인데, 지옥연무를 받는 중에 그런 위업을 남겼었다. "지금 지위가?" "옥졸(獄卒)!" "예?" 그는 지금 어딘가의 옥졸로 구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양인장이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가 그것인데……." 양인장! 양쪽으로 날이 달린 장력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대막을 가로질러 오면서 어떤 라마를 구해 주고 배운 장 법이 바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 장법을 시전하기 전에는 그도 그 사실을 몰랐었다. 안다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장법이었지만 시전하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충격을 준다는 것이 문제였다. 청석판을 뚫은 대신 그의 오른팔도 곤죽으로 뭉개져 버린 것 이다.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모두 이 믿기 힘든 사실에 뒤집어졌다 는 소문인데……, 사정을 참작해 죽이진 않고 어느 구석자리의 옥졸로 삼았다고 한다. 야광충은 말을 돌렸다. "제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습니까?" "응? 아……! 별일이야 없었지!" 주개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제가 간 이후로 사부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개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별일없었다." 봄 223 주개는 야광충에게 손짓을 했다. "그보다 먼 길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가서 쉬어야지." 야광충은 주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저는 피곤하지 않으니 말쏨해 주세요." 주개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궁지에 몰리면 그랬었다. 어색한 표정을 제대로 감추지도 못하는 주개였다.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통로의 시체가……, 방각이 문제를 삼아서……." 그러더니 주개는 야광충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눈앞에서 흔 들었다. "아니, 사제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방각이 옥주라지만 사부 님의 체면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야. 중원에서의 이름도 사부님쪽이 위였고……." "방각이 어떻게 귀찮게 했읍니까?" 하는 수 없다는 둣 주개가 그 동안의 경과를 말해 주었다. 야광충이 지옥성을 떠난 후, 주개는 그의 말대로 통로에 가 봤었다. 처음에는 남몰래 시체를 치워 버리고 모른 척하면 끝날 일로 알았었다. 그러나 거기에 죽어 있는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주개는 당황 해 버렸다. 그냥 넘어갈 일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총옥주 휘하의 영주 중 하나가 죽어 있었다. 다른 하나도 바로 혹승지옥주 독목야차 방각의 첩 아닌가?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실종보고로 넘어갈 수 있는 인물은 아니 었다. 주개는 고민했었다. 그리고 결국은 사부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부는 당연히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정황(政況)은 분명했다. 종옥주의 휘하 영주 중 하나가 팔대옥쭈 중 하나의 첩과 무간 지옥의 영역 내에서 밀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곳을 지나던 야광충과 시비가 붙었으리라고 추측되 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죽었다. 이것이 예충이 한 보고의 요지였다. 두 사람이 밀통한 것이 분명한 이상, 총옥주는 할말이 없었다. 이런 경우 누가 잘못했든 간에 수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휘하 영주 중 하나가 옥주의 첩을 건드리다니! 실제로 총옥주가 불만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분 명했다. 문제는 독목야차 방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사람이 자기 외의 다른 누구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을 참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예충에게 사람을 보내어 살인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요구였다. 그 살인자, 야광충은 현재 지옥성에 없을 뿐만 아니라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타옥주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그 문제 때문에 방각과 예층의 사이가 소원 해졌고 덩달아 흑승지옥과 무간지옥의 사이에도 험악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사제가 돌아온 것을 알면 방각이 또 사람을 보낼지 도……. 그보다 연무 중에 심술을 부릴지도 모르겠고!" "오면 저에게 보내세요!" 야광충은 간단히 말했다. 생각한 것보다 사소한 문제였다. 그가 진정 걱정하던 문제는 아직 고개를 내밀지 않고 있었다. 주개가 아직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야광충은 주개의 방을 나갔다. 주개는 멍하니 앉아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원래 냉정하고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사제였 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성질이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게다가 알 수 없는 힘이 그 속에 덧붙여져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주개는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어딘가 분명히 다른데 그 부분을 정확히 꼬집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 후에야 주개는 탄성을 토했다. 알 수 없는 힘! 야광충의 태도에서 은근히 풍기는 그 느낌은 뭔가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외곬로 자기자신의 속으로만 파고들어 벼랑 위에 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위태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던 사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전히 냉정하고 여전히 귀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걱정스럽지가 않았다. 어떤 일이든 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직한 느낌이 그의 분위기에 덧붙여져 있었다. 단 한 달 사이에 사제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주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이 주개가 야광충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느꼈던 낯선 감정 의 원인이었다. "이제 정말 어른인가?" 주개는 감회에 찬 모습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 * * "예충의 제자가 돌아왔습니다." "……!" "사람을 보내 불렀는데, 팔을 부러뜨려서 돌려보냈습니다." 전광 같은 눈빛이 보고를 하는 흑승지옥의 대주, 대과조(大瓜 爪) 상음(常陰)에게 향해졌다. 그 눈빛은 한 사람에게서, 그리고 하나의 눈에서 쏘아지는 것 이었다. 독목야차 방각! 바로 그의 외눈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는 외눈이었다. 다른 하나에는 눈꺼풀 위아래로 길게 그은 칼자국이 있었다. 그 칼자국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상처가 그것이지만 사실 방각의 몸에는 그보다 더한 상처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들 중 누구의 어떤 무기에 당했는지 방각이 기 억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방각이 야차라 불리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는 싸울 때만은 극도로 흉폭한 사내가 된다. 그리고 그가 겪은 대부분의 싸움은 그런 성질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다. 마주보고 절하고, 점잖게 사양촤다가 몇 수 휘두른 다음 역시 점잖게 패배를 자인하고, 숭자는 패자를 격려하는 식의 싸움을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싸우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했고, 그 판정 은 둘 중 하나의 죽음으로 내려졌었다. 무의 극의(極義)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누가 한다면 그가 할 대답이란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적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는 잘 싸우려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개인 대 개인으로 싸우는 것을 그는 명예에 목 숨을 건 멍청한 짓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살기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자연히 그의 싸움은 단체 대 단체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다. 흑도의 문파에 속해서, 그 명에 따라 싸우는 경우가 그가 싸 운 대부분의 경우였던 것이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거의 그렇게 보냈다. 그런 만큼 자신의 몸에 난 상처도 거의 기억하는 경우가 없었다. 난전(亂戰) 중에서 악귀, 야차같이 날뛰고 나서 돌아와 피에 물 든 읏을 벗어 보면 몸에는 무수한 상처가 남아 있다는 식이었다. 그런 그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상처가 바로 그 칼자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내식에 대해서 방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거기에 대해 언급만 해도 그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건 이 세상에 그와 상음, 단 둘만이 알고 있는 내력이었다. 바로 상음, 그 자신이 만들어 준 상처였기에! 그래서 그는 방각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대주급의 인물이라지만 그와 다른 대주들과는 격이 달랐다. 지옥성이 규율상 옥주의 아래로 대주 두 명밖에 둘 수가 없 어서 그런 것이지 대과조 상음이 단지 대주의 실력인 것은 아 니었다. 또 중원 혹도에서 쌓은 명망으로 보더라도 거의 다른 옥주들 에 필적할 만한 인물인 것이다. 그가 혹승지옥의 대주를 맡고 있는 것은 그와 방각이 목숨을 서로 바칠 정도로 친하다는 의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서 인정하는 단 하나의 진정한 사나이가 바로 방 각이기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상음이었다 지금은 비록 늙었지만 방각의 성미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음은 그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방각이 이런 눈빛을 할 때는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는 허리줌에 매달린 세 개의 낫을 하나로 묶은 것처럼 보이 는 갈고리, 그의 성명병기인 대과조(大瓜爪) 두 자루를 툭 건드 리며 말했다. "제가 가서 끌고 오겠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그의 말에 반대했다. "제가 하지요!" 훤칠한 키에 가냘픈 몸매의 여인 하나가 방각과 상음의 효으 로 나섰다. 횐 착수대포(窄袖大袍)를 걸쳐 입은 아래로 역시 흰색의 표범 가죽바지를 입었다. 횐 표범은 몽고에서도 멀리 고산지역에서나 드물게 발견되는 동물이니 그 가죽 또한 희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래위로 횐색을 차려 입고, 가는 러리에는 마치 넓은 허리띠처럼 검은 가죽끈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훨씬 큰 키에 가냘픈 몸매, 거기에 가는 허리를 강조한 띠를 매고 있어 얼핏 보기에 버들잎처럼 휘청거 린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절세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미녀, 그녀가 바로 흑승지옥주의 딸이었다. 문제는 성격이 극도로 괴팍한데다가 무공이 또한 그 성격만큼 이나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녀 자신에게 있는 듯이 행동하고 말하 는 여인, 그리고 그 손끝이 극도로 악랄한 여인이었다. 방소접(龐少蝶)이라는 본명보다는 '월몽영(月夢影)' 이라는 별 명으로 더 잘 알려진 여인. 그녀가 안개 속을 걷듯 윤곽이 잡히지 않는 묘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다가왔다. "전부터 그에 관한 얘기를 들었어요." 어쩐지 듣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듯한 묘한 음색(音色)이 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음조리둣 말하고 있었다. "지옥성의 밤을 배회하는 유령이라던가? 사람들이 작게 소근 거리고 있었죠. 전 그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요. 이번에는 제 가 갈게요." "흠!" 상음은 그녀의 목소리에 잠겨 드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치려 헛 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는 대단히 건방지고, 난폭한 놈이다. 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셈이냐?" 촤악!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월몽영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 가죽채찍이 들려 있었다. 바로 그녀의 허리에 감겨져 있던 넓은 가죽띠가 이것이었다. 그녀의 애병(愛兵)인 대선룡(大旋龍)이 그것인데, 새끼손가락 굵기에 이 장이 넘는 긴 채찍을 그렇게 칭칭 감고 다녔던 것이다. 채찍은 장병(長兵)에 속하는 무기, 병기는 길면 길수록 유리하 지만 한편으로는 길면 길수록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채찍을 풀어 드는 솜씨, 그리고 지금 빳빳이 곤두서서 머리를 치켜 들고 있는 채찍의 끝으로 보아 월몽영은 채찍을 완 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목을 감아서 끌고 오지요." * * * 혈부용은 무감동하게 석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돌로 만들어진 석대 위에는 몇 개의 물건--정말 그렇 게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는 몇 개의 물건들--이 놓여 있 었다. 그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란고성에서 거두어 온 것이다." 쌍고르마였다. 그 말에 혈부용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쌍고르마와 혈응이 서 있었다. 혈응이 비통한 얼굴로 말챘다. "네 작은 오빠가 거기 있다." '작은 오빠? 이게?' 그녀는 다시 썩대 위를 보았다. 가슴이 뚫려진 인형 하나, 그것이 혈당랑의 것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혈당랑 본인! 머리에 큰 구멍이 나 있는 혈당랑의 시체였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 속에서도 부패가 진행되었는지 고약한 냄 새가 났다. 그리고 이중(二重)의 시체. 혈오공이 들어가 있던 보기 흉한 인형과 그 속에 있는 혈오공 본인의 시체였다. 누가 수거해 왔는지 몰라도 알뜰하게도 잘려진 혈오공의 인형 머리까지 석대 위에 있었다. 어쩌면 혈오공 본인의 머리 대신인지도 몰랐다. 혈오공의 몸에는 가죽만이 붙어 있을 뿐, 머리라고 할 만하 것은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지금 지옥칠살 중 두 명의 시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오빠는?'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혈응에게 물었다. "혈지주는 어디 있지요?" 그녀의 작은 오빠가 바로 혈지주였던 것이다. "그거다. 네가 보고 있는 바로 그것." 혈부용은 석대 위를 다시 천천히 훌어보았다. 혈당랑과 혈오공의 시체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더 있기는 있다. 시커멓게 타 버린 그 무엇인가 였다. 그녀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 "그래, 그것이다. 그게 네 작은 오빠 혈지주다." 그녀는 눈물을 홀리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타 버린 '그것'을 건드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한 점의 슬픔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섰다. "그렇군요. 작은 오빠가 죽었군요." 그녀는 쌍고르마와 그녀의 큰 오빠, 혈응의 사이를 지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누구죠?" 혈부용은 문 앞에 갔으나 나가지는 않았다. 혈응이, 뒤돌아 선 그녀는 볼 수 없겠지만, 그녀를 향해 고개 를 저었다. "모른다." 혈부용은 나가며 말했다. "알아내 주세요." * * * 등활지옥은 팔대지옥의 가장 위에 있었다.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등활지옥은 죄인이 서로 죽이며 고통을 받다가 찬바람이 불면 되살아나서 처음부터 다시 고통을 받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지옥성의 둥활지옥도 연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가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곳이었다. 노염군 위대봉이 실전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이곳의 옥졸들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등활지옥은 지옥성의 선봉대로 소위 팔대지옥 중 집단 전투에 가장 능한 곳이었다. 그 등활지옥의 한구석에 병기고(兵器庫)가 있다. 이가 빠지고 망가진 병장기를 고치는 대장간도 옆에 붙어 있 었는데 여기 조구(曺九)라는 외팔이가 언제부터인가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부러진 창이나 칼들을 모아서 들 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여러모로 어설퍼 보였고 일에 도움도 되 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도 한때는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지옥 연무 제일 과정에서 신화를 남긴 인물, '양인장'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었다. 그가 신기해서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양인장에 대한 호 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찾지 않았다. 양인장은 쓸모없는 무공임이 명백했다. 철판 하나를 뚫기 위해 팔 하나를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구는 조금 전부터 깨어 있었다. 방안에 감도는 원인 모를 냉기가 그를 깨운 것이다. '누군가 방안에 있다.' 조구는 알고 있었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런 깊은 밤중에 그를 찾는 사람이란 좋은 의도로 왔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보다는 귀찮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런 방문을 받은 것은 이미 일 년이 넘었다. '낮에 그냥 와도 가르쳐 줄 것을…….' "양인장?"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조구가 깨어 있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조구는 불현듯 몸을 떨었다. 저것이 사람의 목소리일까?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분명히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감정이었다. 아무 감정 없이 무색투명한 목소리가 그를 전율케 했다. '이자는 여태까지의 사람들과는 다를지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에 오시지 그러셨소?" 그 다음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침상 저편 방 한구석에 서 있는 방문객의 모습에 질려 버린 것이다. 불빛도 없는 방안에서 푸른 불빛 두 개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야수가 한 마리 서 있는 둣한 느낌이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는 것 같군!" 목소리는 파란 불빛과는 다른 곳에서 났다. 파란 불빛은 방문객의 눈빛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조구는 머리맡을 더듬거려 등불을 켰다. 불빛 속에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야수가 드러났다. 조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 장 반에 달하는 거대한 야수가 그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선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말해 봐." 그의 말대로 조구는 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날 이후 수없이 말해 왔던 것이었으니까, 이런 경우는 이번 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그는 더듬더듬 양인장의 구결을 알려 주고 말읗 맺었다. "어렵지 않지요? 나도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오만 하도 많이 말했더니 막히는 데도 없구려." 야광충은 침묵하고 있었다. 조구가 알려 준 구결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조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조구가 말한 것으로는 뭔 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가 말한 구결이 중간에 빠지거나 한 것이 아니 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조구는 자신이 사용했던 양인장의 구결 그대로를 말해 주었니까!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시도를 했었고 하나같 이 실패했었다. 물론 그들은 조구처럼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도대체가 무공의 기본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구결 대로 익힌 결과가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 을 테니까. 조구처럼 내공의 기본이라고는 전혀 몰랐던 하류무사가 아니 라면 말이다. '이 구결로는 아무리 익혀 보아도 내 꼴이 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조구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야광충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조구는 다시 한번 등골을 스치는 싸늘한 기운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해 온 비밀이 야광충의 유 리알 같은 눈에 그대로 비추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야광층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제대로 말해 봐!" 조구의 눈속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공포(恐怖)가 휘몰아쳤다. 오늘의 방문객은 이전에 그가 만났던 방문객들과는 달랐다. 이전의 자들은 그를 위협하고 고문하고 으르렁거렸지만, 적어 도 사람이었다. 무언가 그가 감춰 놓은 것이라도 있을 거라는 어림짐작 때문 에 그를 죽이기까지 할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자는 달랐다. 이자는 자신이 납득되지 않으면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가 실제로 숨긴 것이 있든 없든 말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살기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정드의 위헙에 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난 삼 년간의 고행이 너무도 아까웠다. 조구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그러나 실제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게 뭘 바라는 거요? 그, 그게 내가 배운 전부요. 다른 사람들도 당신처럼 내가 감춘 것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지만, 결 국은 포기했소! 내가 들은 구결은 그것이 다니까!" 그는 당당할 수 있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들은 양인장의 구결은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야광충의 등이 벽에서 떨어졌다. 그는 조구를 향해 소리없이 걸어가며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그러나 사실도 아니야. 말로 들은 것 외에 더 있다는 거겠지?" 조구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왼주먹을 움켜쥐며 침상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 어림짐작만으로 이렇게 사람을 죽이려 해도 되는 거요? 게 다가 그건……, 그런 것이 더 있다 해도 당신 것은 아니잖소?" 야광충이 다가오는 것을 멈추었다. 조구는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의 강도를 높 였다.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강호의 도의(道義)에는 어긋나는데, 다, 당신은 어림짐작만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거 요?" "강호도의라……!" 야광충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속에 뭔가 비웃음 같은 것이 깔려 있다는 것을 조구는 느 꼈다. 야광충이 그의 말에 전혀 영향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도……! "그런 건 사람끼리나 해!" 순간적인 일이었다. 야광층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구는 움켜쥐었던 왼쪽 주먹을 아무런 사전동작 없이 뻗었다. 뭔가가 보이지도 않았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야광충의 몸을 통과해 초라한 방안의 벽에 바 람구멍 하나를 만들었다. 파아아…….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구멍이었다. 다음 순간 조구는 경악에 질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분명 가슴이 관통당채 죽어 넘어졌어야 할 야광충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고개를 돌려 벽에 난 구멍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 려 조구의 주먹을 보았다. 조구의 주먹은 멀쩡했다 야광충이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과연 그렇군. 그것을 연성(鍊成)했군!" 콰아아! 다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야광충의 오른편 뒤쪽의 벽에 커다 란 구멍이 뚫렸다. 양인장이 아니고는 조구가 이런 위세를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야광충을 향해 연속으로 주먹을 날리고 있는 조구가 예 전 그대로의 하급무사라면 낡기는 했지만 옇전히 단단한 석벽에 허공을 격하고 구멍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양인장을 보완하지 않았다면 그러고도 주먹이 멀쩡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구는 이미 양인장을 완성했던 것이다. 야광충은 이매십보를 펼쳐 조구가 날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장력, 양인장을 피했다. 방금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피 했던 것이다. 조구가 주먹을 쥐는 순간부터 그가 제자리에 그냥 있었던 적 은 없었다. 계속해서 중심을 이동시켜 순간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준비를 했던 것인데…… 조구는 거기에 넘어갔다. 야광충의 가슴을 향해 조구의 팔이 뻗어 왔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창(槍), 양인장이 달려 있는 것과 마찬 가지였다. 뚫지 못하는 방패가 없는 극강(極强)의 창이었다. 게다가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무형의 창! 절정의 고수가 이런 공격을 가한다면 어느 누가 피할 수 있 는가? 게다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의 구분도 없으니, 단순히 손 만 뻗어도 상대는 영문도 오른 채 쓰러지고 말 것이다. 야광충은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조구의 손이 뻗어 오는 방향 에서 비켜섰다. 조구의 주먹이 손목에서부터 꺾여졌다가 다시 펴졌다. 야광충의 눈빛에 이채가 번졌다. 그는 오른손을 펴 조구의 주먹을 감싸 잡았다. 팍--! 둔탁한 소음이 조구의 주먹과 야광충의 묵린수 사이에저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권, 혹은 장력은 내공을 모았다가 터뜨리며 발출되 고, 그에 따라 팔을 끌어당겨 기를 끌어안는 동작을 필요로 하 는데 조구의 양인장은 달랐다. 짧은 동작만으로도 경력의 발출을 자유자재로 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직으로 야광충도 피할 길이 없어서 그 주먹을 감싸 안았 던 것인데 다행히 묵린수가 견뎌 주었다. 조구의 화후(火候)가 아직은 깊지 않는 덕일 것이다. 조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갔다. 경황중에 급히 발출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청석판도 뚫는 그의 양인장이 적의 손에 잡히다니……! 양인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야광층이 그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네 양인장에는 결정직인 약점이 있다." 그는 조구의 주먹을 풀어 주었다. 조구는 주줌 두 걸음 밀려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야쾅충이 그에게 손짓했다. "다시 덤벼봐!" 조구는 처음에는 어떨떨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분노로 정신 을 잃을 지경이었따. 제대로 연성한 후 처음 써 보는 양인장이 터무니없이 꺾인 것 만 해도 분한데 이렇게 사람을 모욕하다니! 그는 이를 악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언제까지나 하급무사일 수는 없었다. 사소한 도둑질 한번 한 죄로 포두(捕頭)들에게 개 쫓기둣 쫓 겨서 여기 몽고까지 도망온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도의 내노라하는 도둑놈들은 사람을 부지기수로 죽여도 까 딱없이 잘 살고만 있지 않은가? 여기서 물러 앉으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었다는 흔적만은 남겨야 했다. 최소한 저 머리 하얀 놈에게라도! 야광충은 그의 그런 심경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표정 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조구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비장한 기색을 띠 고 있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조구를 달리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평소 갈았으면 않았을 말을 했다. "기백이 가상하군. 덤벼 봐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순간, 조구의 양인장이 폭발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야광충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찔러 드는 양인장의 위력을……! 그러나 그는 처음의 자리에 없었다. 이매십보는 아니었다. 그는 조구에게 강호의 웬만한 고수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평범한 보법(步法)으로도 양인장을 피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조구의 팔은 다시 잡혔다. 야광층은 조구의 왼쪽 손목을 움켜쥐고 냉랭하게 말했다. "이게 네 약점이다." 조구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천하에 다시없는 기공(奇功)을 지녔어도, 다른 기본적인 무공 이 받쳐 주지 않아서야 요행히 한두 번은 이긴다 해도 절정고수 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야광충이 다시 짧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 퍽! 야광충의 발이 조구의 배에 꽂혔다. 조구는 아스라히 멀어져 가는 의식의 끈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불가눙했다. 바닥이 그에게 올라오고 있었다. 조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야광충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조구는 한동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허탈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움직였다. 천천히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까내렸다. 야광충은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구는 바지를 완전히 내런 후에 허벅지를 야광충쪽으로 내보 였다. 그의 허벅지에는 마치 오래 씻지 않아 때가 낀 것처럼 검은 반점이 있었다. 야광충은 그 반점 하나하나가 글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도 범어(梵語)였다. 야광충이 그것을 다 읽도록 조용히 기다리던 조구가 야광충이 시선을 돌리자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소." "왜 조건으로 내걸지 않나?" 조구는 피식 웃었다. "조건부로 무얼하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는 정확히 본 것이었다. 야광충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구가 말했다. "수하로 써 주시오." "네 약점을 보완할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 말이지?" 조구는 다시 웃었다. 이것은 도박이었지만, 걸어 볼 만한 도박이었고, 달리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확신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았 으면 그는 못 견뎠을 것이다. 조구가 사막에서 라마승을 구해 주고 들은 구결은 처음에 말 해 준 그것뿐이었다. 그는 확실히 그대로를 말했다. 자신의 팔을 잃게 만든 그 구결……! 그러나 그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은 책이었다. 그로서는 알아볼 수도 없는 서장어가 씌여져 있는 한 권의 책 이었다. 그가 서장어만 알았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인장을 사용하기 전에 익히는 단련법이 그 안에 설명되어 있 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양인장과 단련법이라는 것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둘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것 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잃어버린 한쪽 팔이었다. 그는 그날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자신의 비참한 몰골 을 만든 양인장에 매달렸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추호도 속이지 않고 알고 있는 구결을 말해 주었었다. 양인장은 어떤 장법 초식이 아니라, 기(氣)를 운용하는 방법뿐 이었기 때문에 구결만으로도 충분히 연성이 가능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완벽한 양인장을 익히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양인장을 익히는 것에 있어서는 그도 잘못하 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그는 이런 몰골이 되어야 했던가? 그 빌어먹을 라마가 그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을 가르쳐 주었던 것인가? 죽어 가는 자에게 물 한 모금 준 것이 그렇게도 나쁜 것이었던가? 일 년이 지나서야 그는 비로소 라마승이 그에게 남긴 것이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마승의 바랑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챙겨 둔 불경(佛經) 한 권이었다. 라마승이 죽어 가면서 게나그라…… 뭐에게 전해 주라고 한 것인데 그 동안 잊고 있었다.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글자가--자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은 범어(梵語)였따.--구불구불 씌어져 있어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이었다. 아직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저 겉장에 둘려진 금박만으로도 값이 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비싼 값에 팔아 넘기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양인장의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니, 오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고 봐야 했다. 이 불경에 양인장의 비밀이나, 보완방법이 들어 있기만 하다 면 그는 잃어버린 한쪽 팔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몇 곱절로……! 그런 가공할 위력을 가진 기공이라면 그 하나만으로도 무림의 일류고수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여기 지옥성의 평범한 옥졸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서장어, 실은 범어는 전혀 모르는데다가 누구에게 섣불리 물 어 볼 수도 없었다. 그가 이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려져도 모든 꿈은 사라 질 수도 있었다. 조구는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책의 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지옥성 안에는 범어를 아는 사람도 적었고, 그나마 글 중간 중간을 토막토막 잘라 맥락이 연결되지 않도록 물어 봐야 했다. 그렇게 한마디씩 물어서 겨우 알게 된 책의 제목은 <안우타라 바라 삼스카라>였다. '안우타라'가 지고의 경지를 뜻하는 '무상(無上)'이고, '바 라'는 더 이상 단련될 것이 없는 '금강(金剛)', '삼스카라'는 수행, 혹은 공부를 뜻하는 '행(行)'이라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안우타라 바라 삼스카야! '무상금강행(無上金剛行)'이었다. 그리고 양인장을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익혀야 할 단련방법이 었다. '무상금강행으로 손을 단련하고, 양인장으로 마귀(魔鬼)를 징 계한다.'가 책의 첫 문장이었던 것이다. 조구는 땅을 쳤다. 그리고 기뻐서 환호했다. 진작에 책부터 봤더라면 그는 팔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된 것이다. 이것을 완벽히 익히기만 한다면, 적어도 장력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드물 것이다. 그는 끈기있게 조금씩 글을 알아내고, 익히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양인장이 그랬던 것처럼 무상금강행도 무학의 이론에 관한 것 이고, 기의 운용에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인장을 비교적 쉽게 익혔던 것에 반해서 무상금강행 은 극도로 익히기 어려웠다. 말로 설명을 들은 것과 그냥 책에서 보고 짐작하는 것과의 차 이였다. 게다가 무상금강행은 불교의, 그것도 밀교(密敎)의 심오한 진 리와 연계되어 있어서 더욱 어려웠다. 번뇌를 끊고 또 끊어 마음을 금강처럼 단련한 뒤에야 손이 그 를 따른다는 말이 그 일례였다. 왜 손을 단련하는데 번뇌를 끊으라는 말이 나오는가 말이다. 마음을 갖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것은 무슨 소리고, 치려고 하지 말고 치라는 소리는 또 무슨 헛소리인가? 수없이 좌절했지만 조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씩 그 오의(奧義)를 깨달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양인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팔이 어느 정도의 충격까지는 견뎌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양인장은 기를 한점에 모아 폭발시킨다는 극히 간단한 원리의 기공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를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라마승이 말한 구결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구결이 어마어마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조 구가 몸으로 보여 준 대로였다. 양인장의 약점이 그것이었다. 발출한 기의 강함만큼이나 강한 반탄력이 시전자에게 돌아온 다는 것이었다. 그는 청석판을 쳤지만, 사실은 종잇장을 쳤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무딪치는 대상의 강함과 상관없이 동일한 반탄력이 돌아오는 괴상망측한 무공이 바로 양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약 청석판을 뚫는 그 강도로 아까 야광충을 공격했더 라면, 그리고 야광충이 역시 손으로 막았더라면 제아무리 묵린 수라 해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야광충이 일어섰다. 그는 자리에 누운 조구를 뒤로하고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조만간 다시 올 것이다." 제16장 5월 1일, 지옥연무장(地獄鍊武場) 야광충은 오월의 첫날, 지옥연무에 들어갔다. 연무를 받는 지옥연무장(地獄鍊武場)은 팔대지옥과는 조금 떨 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부와 함께 거기까지 가야 했다. 지옥성의 구조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중심에 총옥주와 성주가 거처하는 지옥전이 있다. 그리고 지옥전 바로 수직 아래로 지하로 파들어가면 등활지옥 (等活地獄)으로부터 시작되는 팔대지옥이 위치해 있었다. 팔대지옥은 마치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탑을 지하에 세 운 것처럼 나선형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지옥전 바로 아래 등활지옥, 거기서부터 좌측으로 약간 비껴 아래에 흑승지옥(黑繩地獄), 다시 거기서부터 좌측으로 비껴 아 래에 중합지옥(重合地獄), 호규지옥(呼叫地獄), 대규환지옥(大 叫喚地獄), 염열지옥(炎熱地獄), 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 그리 고 가장 아래의 무간지옥(無間地獄)까지 팔대지옥이 위치해 있 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서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게 된다. 각 지옥을 모두 거쳐 가거나, 바로 지상(地上)으로 나오는 통 로를 사용하는 것이다. 단, 후자의 경우에는 성밖으로 일단 나갔다가 다시 관문을 통 과해서 들어와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예를 들어 무간지옥에서 지옥전까지 가려면 위에 있는 나머지 지옥들을 차례로 거쳐서 올라가거나, 아니면 지상으로 비스듬히 나 있는 직접적인 통로를 따라 성밖으로 일단 벗어났다가 다시 관문들을 통과해서 지상에 있는 지옥전으로 가야 했다. 일전에 야광충이 지옥전에 침투한 것은 바로 두번째 길을 선 택한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찾아가고 있는 지옥연무장은 그곳과는 별개의 구 조로 되어 있는 듯했다. 예충을 따라간 곳은 지옥성 외곽에 있는 한 통로를 사용해 지 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여기는 무간지옥만큼이나 어두웠다. 그들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동굴을 걸어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느낌으로 이 동굴이 비스듬히 지하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옥연무장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온 통로의 바로 아래 부분에 있을 것이다. 그들의 앞에 붉은 철문이 나타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의 좁은 공간이었다. 예충이 앞으로 나서서 철문의 한곳을 두드렸다. 따땅……! 쇳소리가 동굴 안으로 퍼졌다. 철문의 한곳이 네모나게 뚫리며 그 한참 뒤에 빛나는 눈이 나타났다. 언뜻 보아 철문의 두께가 한 자는 넘는 것 같았다. 암호를 교환할 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그 눈은 예충의 얼굴만 확인하고 바로 다시 사라졌다. 끼끽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솟소리가 들려 왔다.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틈에 야광추은 철문의 두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장 세 자가 넘는 엄청나게 두꺼운 철문이었다. 저런 철문이라면 누군가가 부수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두께였다 철문의 뒤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들의 좌우 통로로 몇 명의 사람이, 정확하 게는 철문 좌우에 각각 두 명씩 네 명이 은신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삼십여 장을 더 가서 그들은 또 다른 철문 앞에 섰 다. 그 사이를 오는 동안 야광추은 여섯 명을 더 발견했다. 그들은 암호를 교환하는 대신 적어도 열 명의 사람이 출입자 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변장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변장이 란 그리 쉽지도 않았다. 열 명 이상의 사람이, 그것도 출입자를 잘 아는 열 명 이상의 사 람이 세밀히 관찰해서 허점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변장술을 가졌 다면 그의 능력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데도 발각되지 않는다 면 말이다. 그들이 비교적 넓은 지하광장에 나섰을 때는 세 개의 철문을 더 통과한 후였다. 야광충은 약간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하에는 뭔가 남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 일까? 단순히 훈련만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엄중한 경계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의문을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담아 두고 있었다. 첫번째 지하광장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삼십여 장은 될 듯한 넓은 공간에 여덟 개의 통로가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저곳을 통해서 팔대관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중 한 통로에 접어들자 예충이 갑자기 돌아섰다. "여기가 첫번째 관문이다. 앞으로 십여 장만 더 가면 도착하 는 곳이다. 나는 여기서 돌아가야 하겠다만……."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번 경우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러 나 난 너를 믿는다." 예충은 손을 내밀어 야광충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돌아 섰다. 야광충은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충이 돌아섰을 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도 돌아섰다. 그는 지옥연무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귓가로 사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지옥연무는 그 자체로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통로는 예충의 말대로 십여 장 정도였다. 그 중간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그 한 손에 검은 채찍이 흐 린 등불빛 아래로 번들거리고 있었따. 야광충은 그림자의 정면에 멈추어 섰다. 그림자는 분명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게 누구든 별상관은 없었다. 그에게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야광충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용납할 만큼 너그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좁은 곳에서 채찍이라……?' 통로의 천장은 일 장 가량이나 그런대로 여유가 있다고 할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옆으로는 세 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도저히 채찍을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야광충은 왼손에 움켜쥔 인명권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느낌이 왔다. 이전에 그가 고란고성에서 혈지주를 공격하던 바로 그 수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채찍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인명권과 같은 효과를 내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벽을 쳐서 그 반탄력을 이용해 공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쉬잇--, 촨--!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이 장이 넘는 검은 채찍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하게 휘어 지며 벽을 때리고 앞으로 쏘아져 왔다. 채찍이지만 마치 창처럼 사용하는 용법이었다. 인명권이 철퇴처럼 앞으로 던져지듯이 채찍의 끝에 달린 작은 마름모꼴의 쇠붙이가 창끝처럼 야광충의 가슴을 향해 찔러오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허깨비가 사라지듯이 제자리에서 사라져 통로의 벽 에 붙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채찍은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독사의 머리처럼 튀어 오르고, 구렁이의 몸처럼 벽을 때리며 한 가닥 채찍이 마치 수십수백 가닥이라도 된 것처럼 통로를 가 득 메우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설 방법이 없었다. 야광충은 연속해서 세 번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한 번에 일 장씩이었다. 이대로 통로가 갈라지는 곳까지 가면 채찍을 피할 여유공간이 생길지도 몰랐따. 반면에 그것은 마음대로 채찍을 사용할 여유공간이 생기는 것 이기도 했다. 상대는 채찍을 사용하기에 가장 불리한 공간 속에서 가장 유 리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채찍의 끝까지 내공을 불어넣어서 부드러우면서도 형태를 유 지하는 연한 나뭇가지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쉬잇, 쉿! 채찍의 공격이 변했다. 여전히 통로를 메우듯 벽을 때리면서도 채찍의 끝은 바늘 끝 처럼 야광충을 향해 찔러 오고 있었다. 야광충은 순간적으로 일 장을 더 물러섰다. 이매십보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공간을 가르는 신법이 기는 하짐나, 없는 공간을 가를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심리적 사각(死角)을 점하며 움직이기 때문이지, 공간 속에서 실제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시 채찍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걸음을 더 물러서면 통로의 입구고 그 지형은 그에게 유리 하게도, 불리하게도 작용할 수가 있었다. 단지 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야광충은 물러서고 싶지가 않았다. 이 정도로 물러선 것만 해도 거의 패배를 자인한 것이나 다름 이 없다는 기분이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승리의 길인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장소를 따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아 닌가? 쉬잇, 팟! 얼굴이 따끔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지고 그 선에서 이내 가는 핏방울이 흘렀다. 채찍에 얼굴이 스친 것이다. 야광충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올려 다시 그에게 날아드는 채찍의 끝을 휘 어 감으려 했다. 스팟! 묵린수에 채찍이 스쳤다. 그의 왼쪽 어깨자락이 예리하게 찢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손보다도 빠른 채찍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상대의 무공이 그렇게도 강한 것인가? 물론 강했다. 그러나 그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응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야광충은 오른손을 정면으로 내밀었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채찍의 끝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결국은 하나였다. 침착하게 그 끝을 보는 것이 중요했다. 눈에 보이기만 한다면 대응할 방법이 있는 것이다. 채찍이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앞에 수십 개의 바늘 끝이 쏘아져 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중에 단 하나만이 실제일 것이다. 스팟! 야광충의 오른손에서 빛무리가 일었다. 그 빛은 마치 방패처럼 펼쳐져 채찍의 끝을 막아 갔다. 타다닥! 채찍의 끝은 나뭇가지에 맞은 뱀처럼 튕겨졌다. 야광충의 손목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빛무리는 다시 흔적 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따.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검, 연혈칠장 중의 하나인 유리환검이었다. 평소에는 팔찌로 있다가 야광충이 사용할 때에는 검으로 펼쳐 지는 무기였다. 야광충은 그 유리환검을 손목 주위로 회전시킴으로써 일종의 방패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잠깐 주춤했던 채찍이 아까보다 배나 강하게 그에게 휘몰아 쳐 왔다. 방패가 있다면 그 방패마저 뚫어 버리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야광충의 손목에서 다시 빛무리가 일었다. 팍! 그 빛무리에 채찍의 끝이 걸려서 잠시 휘청거렸다. 촤아앙! 유리환검이 채찍에 걸려 채찍의 옆면을 긁으며 쏘아져 나갔다. 휘청이던 채찍의 끝이 다시 빳빳하게 고개를 세우고 야광충의 가슴을 찔러들어왔다. 상대는 분명 부드러운 채찍을 창처럼 세울 수 있는 고공한 무 공을 지닌 자였다. 파악!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멈추어졌다. 채찍의 끝은 야광충의 왼손에 인명권과 함께 쥐어졌다. 유리환검은 채찍의 중간쯤에 멈추어져 있었다. 채찍의 유리환검에 걸렸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 짧은 순간, 채 찍의 실체를 확인한 야광충의 손에 잡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채찍을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서 있게 되었다. 야광충은 채찍을 끌어당겼다. 의외로 상대가 힘없이 끌려 왔다. 끌려 온 것이 아니라 그의 힘을 이용해 덮쳐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채찍을 놓을 수도 없었다. 적에게 가장 유리한 무기를 돌려줄 수는 없었다. 야광충은 유리환검을 떨쳐 다가오는 그림자의 목을 찔렀다. 창--! 유리환검은 상대를 찌르지 못했다. 상대의 왼팔에 끼워져 있는 둥근 방패에 막힌 것이다. 야광충의 상태는 극히 전투(戰鬪)적인 자였다. 일반 무림인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패와 채찍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봐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전투적인 상대가 여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극히 갸날프게 보이는 몸매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비로소 마주쳤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유리구슬 같은 눈, 그 눈은 지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상대, 월몽영의 눈에는 약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재미있다는 듯한 반짝거림이었다. 야광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싸울 때에야 눈가에 드리운 모호한 안개를 걷어 내는 것이다. 그녀는 방패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은빛이 반짝이는 방패! 야광충은 그 상황에서도 아까는 왜 방패를 보지 못했을까 궁 금해 했다. 유리환검이 약간 뒤로 구부러졌다. 그리고 다시 퍼졌다. 야광충이 그녀를 튕겨 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월몽영이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아주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야광충에게 다가서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슈왕--! 통로의 무거운 공기가 그녀의 손끝에서 예리하게 갈라져 나갔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연검이 잡혀 있었다. 야광충의 왼손에 가해지던 인력(引力)이 사라졌다. 월몽영의 대선룡, 채찍 손잡이에는 연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고개를 숙이고 월몽영의 가슴을 향해 밀고들어갔다. 슈왁! 면도날처럼 날칼운 연검이 야광충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야광충의 은발이 몇 가닥 잘려서 흩어졌다. 팡! 월몽영의 방채가 야광충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야광충은 유리 환검을 든 오른손으로 방패를 쳐서 막았다. 쌔액! 월몽영의 연검이 휘둘러 간 반대편에서 야광충의 목을 향해 다시 그어지고 있었다. 야광충은 팔꿈치로 방패를 때리고, 오른쪽 팔뚝을 들어 연검 의 궤도를 가로 막았다. 촤악! 연검이 채찍처럼 야광충의 손목에 감겼다. 원래 손목이 잘려 나갔어야 정상이었을 텐데, 날카로운 마찰 음과 함께 불똥만 튈 뿐 야광충의 손목은 그대로였다. 연형칠장 중 주작비의 덕이었다. 이때, 야광충에게 기회가 생겼다. 월몽영의 양손이 다 야광충의 오른손에 막혀 있는 틈에 오른 쪽에 커다란 빈틈이 생긴 것이다. 야광충은 왼손을 뻗어 인명권을 던져내려했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야광충은 애초의 마음을 포기하고 주먹을 쥔 채 월몽영의 얼 굴을 후려쳤다. 쾅! 월몽영의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그나마 야광충이 사정을 두어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면 턱 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모두 뽑혀 버렸을 것이다. 얼굴을 맞으면, 그것도 관자놀이를 맞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정확한 동작을 할 수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월몽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왼팔에 매어 놓은 방패를 옆으로 눕혀 야광충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펑! 야광충의 무릅끝이 그녀의 명치에 꽃혔다. 그녀는 뒤로 붕 떠서 날려 가더니 통로바닥에 길게 누워 버렸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치를 그렇게 격타당하고는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한 정도인 것이다. 그녀는 통로바닥에 누운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벌레처 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야광충은 한 손 을 들어 뺨에 난 상처를 닦았다.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그는 그 피를 잠시 바라보았다. 붉은 피! '나에게도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가?' 야광충은 그 피를 옷자락에 문질러 닦고는 월몽영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퍽! 월몽영은 짧은 비명을 토하며 바닥을 굴러 뒤집어졌다. 야광충은 석벽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친 방법이기는 했지만 야광충은 숨통이 트이도록 해 준 것이다. 야광충은 이제 평소의 고요함을 되찾고 있었다. 통로 안에는 월몽영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 오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번째 행동은 웃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앉은 채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한참이나 그렇게 키득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렇게 키득거리던 그녀가 첫번째 내뱉은 말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야광충은 칭찬하고 있었다. "좋아! 통쾌한 싸움이었어!" 야광충은 시종일관 냉정하게 그녀를 보고 있다가 이때 처음으 로 한마디 했다. "아직 완전히 살아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나?" "왜? 날 죽일 거야" 그녀는 조롱하듯 그에게 말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 었다. 야광충은 냉랭했다. "이유에 따라서!" "무슨 이유?" "날 공격한 이유!" "죽이려고!"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녀는 다시 웃었다. 크게 소리내어 웃는 웃음이 아니라 장난기에 가득 찬 키득거 림이었다. 야광충이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얼굴 보지 마! 흉할 거야!"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몸을 뒤틀었다. 그럼 여태 고개를 들지 않은 것이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었던가? 그것도 달리 얼굴을 보이지 않을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보기 흉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야광충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린 손을 잡아당겼다. "안돼--?" 그녀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야광충이 냉랭하게 말했다. "기절시키고 보는 수도 있어!" "차라리 그렇게 해! 나 모르게 보는 게 나아!" 야광충은 다시 한번 실소를 흘렸다. 그는 그녀의 머리채를 풀어 주고 돌아섰다. 연무장을 향해서였다. 그의 뒤에서 그녀가 소리쳤다. "나중에 한번 더 싸워 보자! 곧 만나게 될 거야!" 야광충은 쓴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겨우 두 명째 여인과 얘기해 보았지만 여인이라는 동물 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 저런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옥연무제일관(地獄鍊武第一關)이라고 쓰여진 현판과, 그 아 래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야 그는 그녀가 왜 그를 공격 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두 명밖에 안 만났지만 여인은 그의 머리를 혼란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때에 그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란 있을 수가 없는 것 이다. "팔관돌파라고?" 안내를 받아 들어온 야광충의 말을 듣고 노염군 위대봉은 재 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야광충은 철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물론 그의 사부가 나름대로 가르치기는 했겠지만, 늙은 소매 치기가 무얼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얼마 전 지옥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즉 야광충이 지옥전 으로 침입했던 그 일만 해도 그가 예충의 제자였으니 가능한 일 이었다. 즉, 남몰래 숨어 드는 일이야 예충이 전문이니 그럴 수도 있 는 일이었다. 그러나 팔관돌파는 달랐다. 팔관돌파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위대붕 스스로도 썩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한 분야에 관한 무공이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다른 일곱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 었다. 장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경신술에 약하고 두 가지가 다 능 통하다 해도 병장기까지 능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팔대관문이 만들어진 지 이십 년이 지나도록 팔관돌파 자는 세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세 명이 근래에 모두 나왔다는 것이 그로서는 일종의 치욕 으로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 야광충, 늙은 소매치기의 제자가 전(全)부문에 걸친 경지를 요구하는 팔관돌파를 해낼 수 있을까? 그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나야 자네 사부와도 친하니 심 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관문들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을 것일 세. 특히……." 위대봉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야광충의 뺨에 생긴 상처와 어깻 죽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집애가 꽤나 심하게 다루었군……!' "방옥주와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서? 그는 생각보다 고지식한 사람이니, 아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집불통이니 자네 앞길 도 꽤나 험난할 걸세."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여긴 말만 잘하면 통과할 수 있는 곳이던가?" 위대봉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대충 소문은 들었지만 그야말로 건방의 극을 달리는 놈 아닌가? 감히 그의 앞에서 반말짓거리를 하다니! 그는 길게 자란 세 가닥 수염을 한 손으로 우아하게 거머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염군(閻君;염라대왕)인지 가르쳐 주지!' 그는 방문을 나서며 손짓했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연무장은 넓은 지하광장이었다. 그리고 관문은 연무장 한구석에 있었다. 이미 들어와서 연무를 받고 있던 삼십여 명의 수련생들이 연 무장에 나란히 도열한 채로 위대봉과 야광충을 주시하고 있었다. 관문은 두 개였다. 사방 삼 장은 될 듯한 청석판 하나, 그리고 그 옆에는 비석처 럼 생긴 시커면 철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이 한철판일 것이다. 위대봉이 엄숙하게 말했다. "일반적인 수련자는 왼편에 보이는 청석판이 이렇게 일 장의 거리를 두고 장력을 날려서 자국만 남기면 통과다. 그러나 팔관 돌파를 하려는 자는 한철판에 자국을 내야 한다." 그는 한 손을 치켜 들었다. 네 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커다란 항아리를 양쪽에 받쳐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펄펄 끓는 기름이 들어 있었다. 또 다른 두 사내는 각각 대초자곤(大肖子棍;쇠도리깨)과 참마 도를 치켜 들고 있었다. 위대봉은 기름가마가 설치되는 것을 보며 야광충에게 말했다. "이것은 관문돌파의 관례다. 너는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일 장을 격사하면 된다. 두번째 기회는 없다. 요행이 성공하면 당연히 통과겠지만 실패한다면 자네에겐 세 가지 선택권이 주어 진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끓어 넘치는 기름가마와 가시돋친 대초자곤, 참마도사 이에서 말하는 것이라 기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무감각하면 무감각할수록 더 위협적이라는 것은, 묘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위대봉은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위협적인 언사로 세 가지 선택 이라는 것을 하나씩 설명했다. "튀겨져서 죽든가, 대초자곤에 맞아 죽든가, 아니면 참마도에 목이 잘려 죽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참마도를 택하더군. 어 차피 죽을 바에는 남들이 안해본 경험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텐데 말이야." 야광충은 아무 대꾸 없이 그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것이 위대봉을 더 분노하게 했다. 위대봉은 혈색좋던 얼굴을 검게 물들이며 살기를 드러내었 다. 그는 분노를 간신히 눌러 참고 손짓했다. "시작해라." 야광충은 일 장을 사이에 두고 손을 뻗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한철판에는 세 치 깊이의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야광충이 돌아섰다. "됐나?" 사방은 고요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결과가 판명된 것이다. 위대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한철판으로 다가가 손자국 을 살폈다. 믿을 수 없었다. 한철판에는 다섯 개의 자국이 나 있었다. 네 개는 이전에 있던 것이고 그 중 하나는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가 더 생긴 것이다. 그는 손을 내밀어 자국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닿는 순간에 급히 뗐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 전해졌던 것이다. 야광충이 방금 남긴 손자국에는 극도의 한기가 감돌고 있었 다. 금새 이슬이 손자국 주변에 맺혀 얼어붙을 정도였다. "현천지기(玄天之氣) 계통의 기공을 연마했나? 아니, 정확히 게는 한음지공(寒陰之功)쪽이겠군." 대답은 없었다. 그는 이미 연무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위대봉이 손짓했다. 얼굴이 붉은 사내 하나가 그이 뒤로 다가섰다. 위대봉이 낮게 속삭였다. "관문돌파는 하루에 하나씩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해라. 그리 고 숙소를 내주고 감시를 붙여!" 붉은 얼굴의 사내 적안호(赤顔狐) 양수(楊秀)가 고개를 끄덕 이고 돌아섰다. 그의 옷깃을 위대봉이 잡았다. 명령은 더 있었다. "양인장 조구를 급히 잡아서 데리고 와라." * * *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팽거는 작은 방에 조구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조구가 별로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주인은?" "주인? 아, 소주를 말하는 거군." 팽거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해 주었다. "팔관돌파 중이네. 곧 나오신다니까 아무 소리 말고 기다리게." "팔관돌파라……." 조구는 잠시 망연한 빛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오신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렇겠죠! 곧 나오시 겠죠!" 팽거가 묘하다는 빛으로 그를 보았다. "자네, 소주를 대단히 믿고 있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 경우가 되어 보면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닐 거요." 조구는 방 한구석의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팽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그를 보았다. 누구 말마따나 그들이야 훔치는 것이 전문이니, 그 대상이 사 람이라고는 어려울 것은 없었다. 단지 이 멍청하기로 유명한 양인장 녀석을 훔쳐오라고 한 이 유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소주와 양인장 사이에는 뭔가 끈끈한 유대 같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소주가 하는 일이란……!" * * * "일관을 통과했다고?" 쌍고르마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렇다고 합니다." "사용한 장력은?" 쌍고르마는 그의 앞에 앉은 검은 복면의 사니이 로부 옹고트 를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잘 모르는 일을 뭐라고 보고한단 말인가? 그러나 성주는 계속해서 그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쌍고르마는 별수업싱 알고 있는 만큼이라도 대답할 수밖에 없 었다. "소리도 없고 장력이 발출되었는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고요했지만 위력만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양인장?" 쌍고르마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아닌 듯합니다." "……?" "우선 본인에게 전혀 타격이 없는 것 같았고, 둘째로는 손자 국에서 강렬한 한기가 느껴졌다고 합니다. 양인장으로는 그럴 수가 없을 듯……!" "바보 같은 소리! 그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양인장이라는 증거 로 보인다." 쌍고르마는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로부 옹고트를 보았다. 그러나 복면 뒤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 았다. 로부 옹고트는 문득 그 이유를 설명했다가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까지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눈구멍조차도 내놓지 않은 복면 뒤에서 그의 눈이 깊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시기가 된 것인가?' "쌍고르마!" 쌍고르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로부 옹고트의 목소리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것이다. "그 아이가 고란고성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나?" "제 조사로는 그렇습니다." 로부 옹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기서 그를 보지는 못했으니 그럴 가능성도 높다. 그 러나…… 그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쌍고르마의 눈빛도 점점 음침해지고 있었다. "그럼? 드디어……?" "그렇다. 때가 된 것이다." "기르던 고양이를 호랑이로 만들기 전에……." 로부 옹고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쌍고르마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작은 누구부터?" "예충!" "역시……!" 음모가 준비되고 있었다. * * * 위대봉은 오늘 바빴다. 등활지옥의 여러 수하들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총옥주가 직접 와서 야광충이 남긴 손자국을 보고 갔고, 각옥 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겉으로는 평상과 다름없이 손님을 맞아야 하는 한편, 그들은 사람까지 찾아야 했다. 누구도 그가 언제부터 없어졌는지 몰랐다. 당연히 누가 그를 데려갔는지도 몰랐다. 양인장 조구는 초라한 대장간 구석에 더러운 옷가지 몇몇만을 남겨 두고 그렇게 사려져 버렸던 것이다. 위대봉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분명히 양인장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닌 듯한 그런 정체불명 의 무공을 본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의혹은 가중되고 있었 던 것이다. 그 장력에 맞은 것은 한철판이 아니라 마치 그의 머리인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밤은 깊어가고 다시 새벽이 오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야광충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근래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지옥성의 기류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는 상황판 단에도 그의 고민이 있었다. 거기에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이 골칫동어리를 어떻게 다루어 야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계획된 와중에 변수(變數)의 출현은 상황을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변수를 예상가능한 자리에 올려 놓든가, 아니면 변수 자체를 없애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수를 불렀다. * * * 월몽여은 차가운 액체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형편없었다. 야광충에게 맞은 자리가 검게 피멍이 들어 그녀의 얼굴은 비 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사나운 강아지 콧잔등 성할 날 없다더니…… 언젠가는 그런 꼴이 될 줄 알았다." 나직하면서도 옥구슬이 구르는 것같이 밝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월몽영은 인상을 썼다. 그러나 화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기분좋게 키득거렸다. "사부님은 잘됐다는 투군요. 제가 어디가서 얻어 맞은 게 그 렇게 기분 좋은가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언젠가는 누군가 너를 다루어 주기 를 바라고 있던 참이다. 누군지 한번 봤으면 좋겠구나." 월몽영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곳에 그가 오려구요? 아마 사부님은 보기 힘들 거예 요." "후훗!" 월몽영의 사부는 기분좋은 코웃음소리를 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나는 곧 그를 보게 될 것 같구나." 월몽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사부를 보았다. 그러나 사부는 미소만 지을 뿐 설명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 내일 네 아버지와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마……!" 월몽영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 어렵지도 않을 거예요." * * * 제이 관문을 흑승지옥주 방각을 관문이었다. 야광충은 연무장 중앙에 서 있었다. 연무장 사방에는 흑승지옥에서 나온 교두(敎頭)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단단한 체구임을 짐작케 하는 검은 머리의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야광충은 그저 앉아만 있어도 위협감이 느껴지는 그의 기상과 한쪽 눈위로 가로지른 칼자국으로 그가 바로 독목야차 방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수척한 몸매의 노인, 대과조 상음과 또 한 명의 대 주인 구유신(九幽神) 방화(龐火)가 서 있었다. 구유신 방화는 방각의 친동생으로 구유혈차(九幽血叉)라는 삼 지창(三枝槍)을 무기로 하고 있었다. 방각은 야광충을 바라만 볼 뿐, 예상과는 달리 금령의 일을 거론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나서서 말한 사람은 상음이었다. "여기 이 관문은 병장기를 다루는 수법을 익히는 곳이오. 따 라서 관문돌파도 병장기를 겨루어 이기면 통과되는 것이오. 지 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야광충은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물었다. "누가 나와 싸울 건가?" 상음이 불쾌한 빛으로 나섰다. "원래 일반 수련자라면 교두 중 하나와 겨루어 삼백 초 이상 을 견디면 되는 것이지만 팔관돌파의 경우는 다르니 노부가 직 접 나서겠소! 날 이겨야 통과요!" "아니!" 옆에 서 있던 방화가 구유혈차를 들어 바닥을 찍었다. "저놈은 우리 집안과도 원한이 있으니 내가 나가겠소! 명색이 형수를 죽인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없지!" 상음이 인상을 섰다. 대주라지만 정말 삼류의 인물이 방화였다. 실력도 형편없는데다가 성미마자 고약하기 짝이 없어 형인 방 각을 욕되게 하는 자였는데, 이런 자리에까지 나서는 것이다. 그가 너서면 흑승지옥의 명예에 똥칠만 할 것이 너무나도 명 백했다. 그는 손을 저으며 방화를 만류했다. "지금은 사사로운 원한을 따질 때가 아니니 노부가 너서는 것 이 역시 옳겠소!" 정중했지만 거부의 의사는 확실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방화는 그것으로 더 기승이 살아 펄펄 뛰었다. "아니 저놈이 상대주(尙隊主)의 손에 죽으면 우리 집안의 원 한을 어쩌라는 거요? 역시 내가 나서서 목을 비틀어……!" "누가 너더러 그런 일을 하라더냐?" 방화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방각이 한마디 꾸짖은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손을 뻗쳤다. "그 계집은 우리집안 사람이 아니니 집안의 원한도 아니다! 설사 집안의 원한이라 해도 이런 자리에서 네가 나서도 좋은 것 이냐?" 방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형은 어지간하면 그에게 화를 내지 않지만, 일단 한번 냈다 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뭔가 처벌이 내려지는 것이다. 다행이 방각은 당장은 그냥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그를 꾸짖지 않고,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이 내미는 무 기를 받아 쥐었다. 금빛이 번뜩이는 둥근 방패, 그리고 도끼였다. 그의 성명병기인 금순대월(金盾大鉞) 이른바 금 방패와 큰 도끼였다. 방각은 왼팔을 방패 뒷면에 있는 고리 두 개에 끼우고, 대월 을 오른손으로 꼬나잡았다. 그의 외눈에서 형형한 광채가 내밀었다. 왼손바닥에 잡혀진 인명권이 불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야광충의 다른 한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촹! 척혈구절검이 그의 손에 들렸다. 야광충이 짧게 말했다. "이것말고도 몇 개 더 있지!" 방각의 외눈이 그것들을 쓸듯이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무기군!" 그는 천천히 야광충을 향해 다가섰다. < 제2권 끝 > 제 1 부 제 3 권 여 름 편 제17장 … 5월 2일 몽고고원 동남쪽 뭉흐하이로흥. 뭉흐하이로흥 지역은 몽고고원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여러 줄 기의 강이 흐르고, 산과 들 사이로 비옥한 초지가 형성되어 있 는 곳이었다. 예로부터 여기 터를 잡고 사는 부족은 벤야시리가 등장하기 전에는 몽고 최강의 부족이었던 케레이트 족이었다. 과거 원제국하에서 실권을 잡았던 부족, 그래서 몽고족 중에 서도 가장 문명화되었던 부족이었다. 몽고 말의 명 재상, 투투 의 출신 부족이 바로 이곳이기도 했다. 지금 뭉흐하이로훙의 초지, 이제 막 새싹이 돋아 나오고 있는 넓은 초원의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꽃향기 풍겨야 할 대지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깔려 있었다. 두두두두두! 몽고의 철기병들이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몽고족의 집단거주지와는 달리 파오보다는 제법 격 식을 차린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 건물들은 화마(火魔)에 횝싸여 있었다. 하--핫! 불타는 거리를 달려가며 철기병들은 혹시 불붙지 않은 건물에 는 횃불을 던져 넣고 있었다. 그대로 두어도 을겨 붙을 불을 굳이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다릴 틈이 없었다. 흑은 불길만큼이나 타오르는 그들의 파괴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꺄아아악--! 거리 한곳에서 애처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마상의 철기병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불붙은 옷자락을 어쩌지도 못하고 이십대의 여인 하나가 거리 에 뛰쳐나오고 있었다. 집안에 숨어 있다가 불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뛰쳐나온 모양 이었다. 철기병이 말고삐를 돌렸다. 두두두두두! 말이 거리를 따라 질주했다. 후끈한 열기와 충천하는 화광, 무엇보다도 거리에 짙게 깔린 살기 때문에 말도 적지 않게 홍분해 있었다. 여인은 지금에서야 불붙은 옷을 벗어 버리면 된다는 것을 깨 달았던 모양이었다. 옷자락을 끌어올리는데 철기병이 닥쳐 들었다.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려 고개를 드는 여인이었다. 그 순 간, 모든 것이 끝났다. 철썩! 철기병의 만도에 기름기 번지르르 흐르는 핏자국이 생겼다. 여인은 건먹은 눈을 한 채 거리에 뒹구는 두 토막의 시체로 변해 버렸다. 이런 일이 거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몽고족은 유목민족이고, 기본적으로 약탈민족이다. 그들이 어딘가를 정복한다고 해도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전멸 시키는 일은 드물다. 설혹 남자는 죽인다 해도 여자는 생포해서 노예로 쓰거나 첩 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들은 이 거리, 이 초지에 사는 부족들을 단 하나도 남겨 두 지 않을 작정인 것으로 보였다. 말 그대로 씨 하나 남겨 놓지 않겠다는 듯, 남자도 여자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도륙을 내고 있었다. 지난 삼 개월 간에 걸친 치열한 격전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 한 한풀이처럼 말이다. 그들 벤야시리 연합군은 지금 케레이트 족(族)을 전멸시키고 있었다. 그는 케레이트 족의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산언덕에 얄아 불타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이 있게끔 만든 장본인, 벤야시리의 최대 후원자이며 은 인이자 군사, 현몽고 최고의 현인으로 자부하는 그였다. 천산파 장문인 아루타이가 바로 그였다. 그는 푸른 하늘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눈길을 돌려 옆을 보았다. 그의 주군인 벤야시리가 거기 있었다. 그는 넋을 잃고 아래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살륙의 한판 춤을 보고 있었다. 그 뺨에 흐르는 개기름은 잘 먹어서만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고귀한 피, 푸른 이리로부터 내려오는 그 고귀한 혈통만 아니었 다면 아루타이는 그를 몽고의 패주로 끌어을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저 입가로 흐르는 엷은 침과 개기름, 그리고 충혈된 눈 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본눙적으로 살륙자였다. 자인하고 흉폭한 탐욕의 덩어리, 그가 바로 벤야시리였다. 어쩌면 푸른 이리 징기스칸의 혈통 자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 른다. 전대의 칸 토구스 테무르가 그랬듯이……! 아루타이는 약간 불쾌해지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후의 일에 대해 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케레이트 족은 정말 용감했다. 전투적이었다. 그들 벤야시리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맞아 최후의 용사 하나까지 싸웠다. 그렇지 않았으면 부족 하나를 섬멸하는 데 삼 개월이나 걸리 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끝났다. 저 검은 연기가 가라앉고 나면 케레이트 족이 지상에 존재했 다는 증거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타타르 전역을 통틀어 벤야시리의 이름만이 떨쳐 울리 게 된다. '그 다음은……!' 아루타이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그의 원대한 꿈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십 년 전 사부인 로부 옹고트와 함께 지옥성을 건설하면서 부터 꿈꾸어 오던, 아니 그 이전에 중원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꿈 꾸어오던 바로 그 꿈이었다. 사마르칸드까지 들어가 티무르를 온갖 방법으로 구워삶아 베 야시리를 데리고 나온 것이 십 년 전! 이제 십 년 만에 타타르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원!' 아루타이의 눈이 다시 한번 라났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 * 북해(北海)의 초입(初入). 몽고고원 서단(西端) 을 따라 길게 누운 알타이 산맥, 그 알타 이 산맥의 동쪽 경사로를 따라 유구히 흐르는 강을 이하( 河) 라 부른다. 동토(凍土)의 제국, 아라사에서부터 시작된 이하의 원류를 찾 아 북으로 거슬러 을라가면 알타이의 연봉들이 멀리 뒤로 사라 지고, 오월의 중반인데도 겨우 얼음이 풀리기 시작한 크고 작은 호수들이 보인다. 중원인들이 북해(北海)라 부르는 곳이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북해! 일 년의 절반 이상 얼어붙어 있는 호수들의 세계! 지금은 산과 들로는 푸른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엷은 얼음 장 아래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멀리 마록(馬鹿)들이 떼지어 달리고, 겨우내 굶주렸던 이리들 도 뿔뿔이 흩어져 짝을 찾는다. 그 북해의 한 호숫가에 세 필의 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나같이 입은 혹의, 안장 옆에는 긴 창이 걸려 있었다. 위에 탄 흑의의 사나이들……! 혹룡사의 인물들이었다. 그 중 몽고마 같지 않게 장대한 체구의 혹마에 올라탄 사내가 멀리 호숫가에 있는 통나무 집 한 채를 가리켰다. 크지는 않지만 단단한 체구, 가슴팍에 수놓인 붉은 용, 그리 고 엉덩이 뒤에 돌아가 있는 반룡도! 혈문룡이었다. 그가 수하 둘과 함께 멀리 이곳 북해에 나타난 것이다. "저기에 그가 산단 말인가?" 왼편에 있던 사내, 민심창(悶心槍) 조훼(曺卉)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도살(猿刀殺) 십일랑(十一郞)! 과거 흑룡사의 전전대 대두목이셨죠. 전대 대두목에게 자리를 물려주고는 여기 로 은거하셨습니다." "아직 살아 있을까?" 혈문룡의 전대 대두목은 흑룡왕 십이랑, 바로 혈문룡 십삼랑 의 아버지이자 사부였다. 그가 죽은 것이 삼 년 전, 흑룡사의 대두목이 된 지 십오 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원도살 십일랑이 은퇴한 것은 십팔 년 전인 것이다. 그때 이미 육십이 넘었으니 지금은 최소한 팔십은 되었을 것 이다. 아직 살아 있을까 의문시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답한 것은 혈문룡의 우측에 있던 사내였다. "삼 년 전 대두목의 승계를 알리러 왔을 때 뵈었으니, 그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얼굴 한쪽에 커다란 푸른 반점이 있는 사내였다. 청두사(靑頭獅) 복군무(卜君武)! 일전에 고란고성에서 죽은 사괘 조오, 성난 황소 빌라가, 그 리고 지금 옆에 있는 민심창 조훼와 더불어 흑룡사의 사대천왕 (四大天王)으로 불리던 자였다. 혈문룡은 고란고성에서 돌아온 후, 벤야시리 군(軍)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고란고성에서 그들이 전멸된 것이 그들의 탓이라고 본 것이다. 어쩨게 보면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이었다. 상대는 목하 몽고 전역을 지배하는 칸인 것이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일개 도적단이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 가 있을까? 누구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혈문룡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성공과 실패는 가눙성의 문제지만 복수는 의무다! 그가 본거지에 남아 있던 혹룡사의 잔류인원들을 앞에 두고 내지른 일갈이었다. --우리는 이제 벤야시리 군과 전쟁을 벌인다! 의기(義氣)는 드높았다. 사기가 충천했다. 백여 명 남은 그들 혹롱사의 무리들 중 뒤로 빼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최후의 일 인까지 벤야시리 군과 싸울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겨우 일백 명의 무리를 데리고 어떻게 수십만을 상대한단 말 인가? 그래서 민심창 조훼, 사괘 조오의 친형이기도 한 그가 내놓은 의견이 이것이었다. --원도살 십일랑을 부른다! 원도살 십일랑! 그의 원래 이름은 십일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혈문룡이 원래는 십삼랑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 다. 혹룡사의 초대 대두목 흑룡(黑龍)이 자칭 대랑(大郞), 큰 사 내, 진정한 사내라고 칭한 이후 그들의 전통은 그렇게 굳어졌다. 섭일랑은 그 흑룡사의 열한번째 대두목임을 나타내는 말이었 던 것이다. 그리고 혹룡사의 이백여 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살아서 은퇴 한 유일한 대두목의 이름이기도 했다. 강호에서는 그를 알려면 별호를 알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 준 것이니 그의 인간됨과는 상관없기가 쉽 지만 별호는 그를 보고 지어 준 것이니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대막에서는 더했다. 대라의 거친 환경에서 말을 달리는 사내들은 수식을 몰랐다. 그들이 싱난 황소라고 부르면 그는 성난 황소일 뿐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원도살도 그량다. 그는 원숭이처럼 지혜로웠다. 그가 대두목으로 있을 때 흑룡사는 단 한 건의 실패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여우라고도 불리 던 자가 그였다. 그러나 일단 나서면, 뭉툭한 칼 한 자루만 들면 사람이 변했 다. 그의 별호 중 마지막 글자가 살(殺)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칼 한 자루 들고 나서면 말 그대로 살인귀로 변신하는 것이 또한 그였던 것이다. "단지……!" 조훼가 말끝을 흐렸다. "뭐냐?" 혈문룡이 말의 배를 차려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전에도 말쏨드렸지만 그가 동참할 것인가가 의문스럽습니다.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명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은거했기 때 문에 지금은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소문이……!" "닥쳐라!" 혈문룡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명리를 잊었다고 형제의 의리까지 잊을 수 있는가? 만약 잊 었다면 그는 형제가 아니다! 난 그를 흑룡사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혈문룡은 엉덩이 뒤에 매달린 반룡도를 뽑아 들었다. "당연히 죽음뿐이지!" 챤--! 반룡도의 옆면이 흑마의 엉덩이를 때렸다. 끼히히힝--! 흑마가 발굽을 들고 울부짖었다. 다음 순간, 세 필의 말은 푸른 풀이 비단처럼 펼쳐진 언덕의 사면을 따라 호숫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지옥성 지옥연무장 제이 관문. 방각은 섬서성(陝西省) 건주현(乾州縣), 원나라 당시의 이름 으로는 섬서행성(陝西行城) 건주현 출신이다. 서북에서 동남으로 감곡수(甘谷水)가 흐르고, 그와 교차하여 무정수(武亭水)가 흐르는 사이로 분지가 만들어져 있다. 건주현은 그 분지 가운데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그러나 방각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그 아름다운 풍취보다는 지리적인 조건이었다. 건주현은 지금의 서안부(西安府), 원나라 때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원래의 이름인 장안부(長安府)로 불리웠던 고도(古都)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장안은 예로부터 북방무역의 중심지였다. 한나라 때 절정기를 이루었던 북방무역은 당, 송을 거치면서 막히더니, 원나라 때 와서 다시 재개되었다. 몽고족이 멀리 서방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방각이 북방무역을 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방각의 집은 극도로 빈곤해 장사할 처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무뚝뚝한 그의 성격으로는 무슨 장사든 망하기가 십상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북방무역을 하는 대상들을 터는 도적으로 활동했지 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는 굶주리다못해 어렸을 때 집을 뛰쳐나왔었다. 그 이후, 그는 장안부 뒷골목의 건달로 돌아다니며 지금 그가 사용하는 무공의 기초를 배웠다. 장안부는 북방무역의 출발지점, 자연히 북방에서 들어오는 길 의 종착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의 장안부에는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온 온갖 이상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 이미 장안에서는 혹인들을 볼 수 있 었다고도 했다. 그 중 대식국(大食國)에서 온 노예 하나, 그것도 투사(鬪士) 라 불리는 노예 하나를 만나게 된 것은 방각의 행운이었다고 해 야 할 것이다. 그는 중원과는 다른 싸움방식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로 방패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왼쪽 팔뚝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칼이나 도끼를 휘두 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한족이나 몽고족이 사용하는 큰 방패가 아 니라 중간크기로 상반신만을 가리는 둥근 방패였다. 방각은 그것을 사용하여 어지간한 무사 나부랭이들은 손쉽게 때려눕힐 수 있었다. 방패를 사용하는 무술은 병사들은 몰라도 일반 무사들로서는 대해 보기 힘든, 괴이한 것이었다. 게다가 중원의 검(劍)은 방패를 대적해 싸우기에는 지나치게 섬세하기도 했다. 물론 방각이 연전연승만을 기록했다는 것은 아니다. 무기의 유리함이나 무술의 특이함만으로는 하급무사들은 몰라 도 고수들까지 이기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적어도 열 번은 패배했고, 좌절하고, 또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험난한 강호에서 열 번을 졌다는 것은 적게 진 것은 아니다. 그것도 점잖은 비무가 아니라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결투에서는 더욱 그랬다. 칼 아래 피를 뿌리고 죽기에는 충분한 숫자의 패배인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지고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지고 난 뒤에는 더 욱 강해졌다. 그는 패배에서 뭔가를 배우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방패를 사용하는 기술은 더욱 막강해졌고, 또 정교해졌다. 이제는 금팔괘순(金八卦盾)이라는 그의 방패술이 방패를 사용 하는 무술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질 지경이었다. 거기에 큰 도끼, 대월이 더해졌다. 대월을 사용하는 그의 수법, 풍마월(風磨鉞)은 금괄괘순과 마 찬가지로 누군가의 이름없는 기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부파(羅浮派)의 뇌공부(雷公斧), 양주(楊州) 옥정산장(玉鼎山莊)의 유성쌍인부(流星雙刃斧), 산서(山西) 천 기맹(千騎盟)의 비마월(飛馬鉞), 그리고 사천(四川)에 웅거한 녹림도(綠林徒)인 산령왕(山靈王) 엄발(嚴跋)의 쾌령부(快靈斧) 와 더불어 도끼를 사용하는 무술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 도였다. 방각은 그런 식으로 무공을 배우고, 내공을 쌓고, 신법을 배 웠다. 그는 단 한번도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그의 무공을 약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생사를 건 격전을 통해서 무공을 익힌 사람이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그는 강했다. 방각은 대월을 풍차처럼 휘둘러 야광충을 공격하고 있었다. 우우웅--! 웬만한 사내의 가슴판만한 대월의 날이 바람을 가르며 연속으 로 야광충에게 떨어졌다. 대월은 날만 넓은 것이 아니라 도끼자루도 길었다. 그의 키에 삼분의 이쫌 나갈 정도였다. 방각은 그 긴 자루의 절반쫌을 잡고 휘두르고 있었다. 자루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고, 끝부분에 가서는 점점 넓어져 서 앞으로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었다. 그 끝에 예리한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얼핏 귀신 의 머리처럼 보였다. 이 자루의 끝부분에 대월의 묘용이 있었다. 철퇴처럼 난쪽 끝에만 무게가 몰려 있으면 위력은 강하지만 회수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한손으로 무게를 전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대월처럼 무게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으면 약간의 힘조정만으로도 대월은 영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또 다른 흉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앞날로 치고 난 뒤, 공격이 성공하든 않든 연속으로 귀신처럼 생긴 자루의 끝으로 적을 후려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힘으로 사용했을 경우, 일반적인 모양의 도끼 보다 서너 배는 더 신속한 공격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의 도끼 쓰는 법에 풍마부, 즉 '바람을 갈아 버리는 도 끼'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맷돌의 넓은 면으로 곡식을 갈 둣이 바람, 사실은 적을 가루 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기도 할 법한 것이 지금 야광충도 전혀 반격의 기회를 잡 지 뭇하고 있었다. 단지 이매십보로 맷돌처럼, 흑은 수레바퀴처럼 정신없이 밀려 드는 방각의 공격을 피하고만 있었다. 물론 아직은 방각의 공격에 당하지는 않았다. 그의 이매십보를 포착하고 타격을 가하기에는 도끼도, 방패도 너무 느렸다. 아니 야광충이 지나치게 빠른 것인지도 모른다. 슈왁! 도끼자루가 야광충의 허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야광충은 이미 그 자리에서 옆으로 삼 보 이동해 있었다. 그도 신법의 이름 그대로 허깨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도저 히 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방각은 이미 몇 십 차례나 헛손질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방각은 지치지 않고 공격하고 있었다. 언뚱 보기에는 야광충이 유리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잘 피하고 있다면 지지는 않겠지만 역시 이길 수도 없었다. 과연 방각의 명성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니었다. 계속 헛손질만 하는 것 같지만 꾸준히 야광충을 연무장 한구 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더 이상 옴싹달싹할 공간도 주지 않고 몰아서, 일격에 쓰러뜨 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대월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방각의 무지막지한 도끼질을 따라 바늘끝처럼 날카로운 바람 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야광충은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도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 의 경기(勁氣)가 닿고 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압박감이었다. 방각의 도끼는 정교하지는 않았다. 피부를 도려낼 것처럼 예 리하지도, 그렇다고 산을 쪼갤 것처럼 파괴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도끼에는 힘이 있었다. 야광충은 분명 그의 도끼에는 옷자락도 걸리지 않게 피하고 있었지만 반격할 수가 없었다. 얼토당토 않게 빗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도끼의 힘이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몰이에 몰린 토끼가 아무라 도망가 봐야 결국에는 올가미에 걸렸다는 것을 느끼듯 그렇게 야광충의 행동범위는 점점 좁아지 고 있었다. 마치 물레에서 실을 뽑아내듯 한가닥한가닥 가느다란 경기가 홀러 나오는 듯하더니 이내 야광충을 칭칭 감아 오고 있었다. 그것이 압박감의 정체였다. '이대로는……!'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옴싹달싹 못하다가 방각의 손 아래 쪼 개지고 말 것이었다. 쒸왁! 도끼의 날이 그의 얼굴을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빗나간 것인데도 마치 얼굴 껍질이 쓸린 것처럼 아꽈왔다. 야광충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달라졌다.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다는 인식이 그의 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보다 먼저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꼬여 있던 오기가 드러난 것 이다. 쐐액! 도끼가 그의 정수리로 떨어지고 있었다. 야광충은 여태 맥없이 들고만 있던 척혈구절검으로 몸 앞을 쓸 둣이 올리면서 그 도끼를 막아 갔다. 까앙--! 온몸이 저렸다. 야광충은 주춤 한걸음을 물러섰다. 도끼는 간신히 튕겨 내었지만 방각의 기세에 밀려난 것이다. 야광충의 눈빛이 더욱 푸르게 라났다. 그는 충격을 받고 있었다. 나이는 물론 그가 어리지만 천부의 체질과 현음기공 덕으로 사부인 예충보다도 오히려 내공이 정순(正純)한 그였다. 그런데 사부와 동급의 지위에 있는 방각 따위에게 밀리다 니……! 그것은 그 자신보다도 오히려 사부의 수치일 수 있었다. 우웅! 금빛 번뜩이는 방패, 금순(金盾)이 야광충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금순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손을 베일 것 갈은 날카로운 옆날 이 서 있고, 적의 공격을 막는 전면에는 역시 금빛이 번뜩이는 원뿔 여덟 개가 예리하게 솟구쳐 있었다. 그래서 방각의 금순은 적의 공격을 막는다는 기본적인 기능뿐 아니라 옆날로 치고, 전면으로 밀어붙이며, 심지어 상대의 무기 를 얽어서 낚아챌 수도 있었다. 지금 그 방패의 옆에 치솟은 뿔이 야광충의 가슴을 찔러 오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치켜 든 방각의 오른손에는 거대한 대월이 들려, 청광 을 뿌리며 내려 찍히고 있었다. '양인장!' 야광충은 속으로 부르짖으며 오른쪽 주먹을 방패를 향해 내질 렀다. 검은 묵린수가 금순에 마주쳐 갔다. 팡! 맨주먹과 방패가 부딪친다고는 믿기 어려운 소리가 연무장에 퍼졌다. 방각이 몸을 뒤틀었다. 야광충이 저릿저릿한 손을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양인장은 금순을 뚫지 못쌨다. 아직은 화후(火候)가 부족한 것이다. 그의 오성(悟性)이 아무 리 뛰어나다 해도 겨우 보름 남짓한 시간에 정수를 터득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좌우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누가 방각의 금순을 맨주먹으로 받아낸단 말인가? 비록 장갑은 꼈다지만 강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닐 텐데……! 이때, 방각의 다음 공격이 야광충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방각은 한껏 몸을 뒤틀며 대월을 위로 치켜 올렸다가 앞으로 내리찍고 있었다. 원래는 가슴팍을 드러내는 동작으로 무림에서 금기시하는 것 이었지만 지금은 유효적절한 공격이었다. 처음부터 금순의 공격과 함께 이어지는 연속공격인 데다가, 금순이 야광충의 주먹에 맞아 뒤로 튕겨지는 반탄력을 이용해 더욱 빠르고 강하게 내리찍는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좌중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그가 보여 주었던 놀라운 경공, 신묘한 보법이면 저 정 도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야광충은 피하지 않았다. 제이 관문은 병장기를 다루는 곳이지 경공을 수련하는 곳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피해다닌 것만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처지에 또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척혈구절검으로 맞받아 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방각의 도끼는 너무 강했고, 너무 빨랐다. 야광충은 왼쪽 팔뚝을 내밀어 도찌를 받았다. 동시에 오른손 으로 방각의 목덜미를 찍었다. 깡! 불똥이 튀었다. 놀랍게도 야광충의 팔뚝에 맞은 대월이 튕겨졌다. 주작비가 막아낸 것이다. 방각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지만, 또 그럴 틈도 없었다. 야광충의 손이 목덜미로 다가오고 잇었다. 소리도 없이 찍어 오는 것이지만 왠지 그 손에서 범상치 않은 살기가 느껴졌다. 방각은 도끼가 튕겨지는 반탄력으로 이번에는 금순을 끌어올 리며 앞으로 강하게 내밀었다. 그의 금순이 정말로 방패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빵--!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지는 둣한 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야광충은 손바닥으로부터 전해 오는 충격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묵린수를 끼고도 충격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왼팔도 마찬가지였다. 무지막지한 도끼질을 정면으로 받아 내어 팔 자체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공격을 멈추었다간 고통이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이다. 야광충은 왼손을 뻗어 인명권을 쏘아 보내었다. 한 순간, 눈부신 보광이 번뜩였다. 두 사람이 바로 붙어 있어서 인명권은 방각의 방쐐 외에는 칠 곳이 없었다. 팍! 금순에 인명권이 부딪쳤다. 그리고 튕겨 나가지도, 방패를 뚫지도 않고 인명권은 이리가 뼈를 갉아먹는 둣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방패의 사면을 따 라 올라갔다. 소리는 방각도 들었다. 방각은 그것이 보광을 뿜어내던 물건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은 힘으로나 기세로나 그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야광충이 팔뚝으로 도끼를 막았지만 반탄력은 강하지 않았다. 지금 방패에서 전해져 오는 힘도 마찬가지였다. 대개의 경우 두 개의 물체가 부딪치면 동일한 층격이 쌍방에 게 가해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쪽은 멈춰 있고 다른 쪽이 날아가 부덫친다면 이야 기는 달라진다. 권장(拳掌)의 원리가 그런 것이었다. 육장(肉掌)에 부딪쳐서 돌이 부서진다는 얼핏 불가능하게 보 이는 일이 가능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물체가 강한 것을 부수고 이기는 것은 힘의 방향과 빠르기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방각에게 유리한 것이다. 그는 압도적으로 무건고 강한 무기로 야광충을 후려쳤다. 빠르기도 지금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역으로 야광충의 입장에서는 빠르게 다가오는 강한 물체를 약 한 육장으로, 그것도 수세에서 막아낸 것이다. 표시는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는 두 손을 다 쓰기 힘들 정도 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때 방패로 밀어 버린다면? 날카로운 금팔괘순, 여덟 개의 뿔로 가슴팍을 뚫어 버린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방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방쐐를 끌어당겨 최대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 섰다. 치잉--! 방각의 판단은 옳았다. 그의 방패를 긁어대던 장난감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방패의 옆 면을 따라 다가오다가 힘을 잃고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야광층은 물러서는 방각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인명권의 새로운 사용법을 방각이 무산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오랜 싸움에서 얻은 본능적인 대처였을 것이다. 그것은 최근에 깨달은 것이었다. 인명핀이 가로막는 물체를 뚫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따라 긁 어 가다가 배후로 돌아간 뒤에야 격사되는 방법이었다. 비장의 절초로 사용했던 것인데 방각이 예리하게 느끼고 물러 서는 바람에 무산된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고 선 채 서로 공격하지 않았다. 기세를 다시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야광충에게 그것은 더욱 절실했다. 방각의 짐작대로 그의 양팔은 지금 저려서 제대로 움직여지지 도 않을 정도였다. 수세에 처한 것과 공세를 취하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육(皮肉)은 다치지 않았지만 자존심에 입은 상처는 컸다. '싸움의 경험이 적어서.'라고 위안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척혈구절검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왼손에 끼고 있던 인 명권을 빼 품에 집어 넣었다. 그 후에야 그는 다시 척혈구절검을 들었다. 그것도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아드는 자세였다.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가 된 것이다. 방각은 자신의 방패를 보고 있었다. 여태 수없는 싸움 중에도 크게 손상이 없던 그의 금팔괘순이 지금, 만들어진 이후 가장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놀람게도 금순에는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것도 대충 자국이 난 것이 아니라 진홅에 손바닥을 눌러찍 었을 때 나오는 모습처럼 그렇게 깊고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 자국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명확했다. 방금 야광충이 그의 방패를 막았을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서는 달리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일관문을 통과하며 위가(韋家)를 놀라 자빠지게 했다더니……!' 그러나 지금 경탄하고만 있을 때는 아니었다. 일찍이 그가 만나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살기가 그에게 닥쳐오 고 있었다. 방각은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살기는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두 손으로 시커먼 검을 움켜헌 채 다가오는 그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둣했다. 방각은 대월을 든 손을 들어을려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대월의 자루를 단단히 감아 쥐었다. 즐거웠다. 이건 싸움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이었다. 방각은 온몸을 휘감는 투지로 잔뜩 고양(高揚)되어 있었다. "하압--!"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치켜 들고 방각을 향해 달려들었다. 격식이니 뭐니가 없었다. 이렇다 할 검법의 형식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일격에는 베겠다는 결의만이 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한 살기와 투지가 그 안에 있었다. 무공을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길거리의 건달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것과 다름없는 마구잡이 몸놀림으로 보이겠지만 상관 없었다. 여태 방각에게 밀린 것도 방각의 도끼질이 정교한 초식을 따 라서가 아니었다. 그 기세에 밀렸던 탓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정교한 초식도 열 수 앞을 내다보는 계 산도 모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앗!" 방각이 도끼를 치켜 들고 마주 덮쳐왔다. 그에게서도 충만한 투지가 픗겨 오고 있었다. 이제 싸움은 투지와 투지의 맞대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야광충이 척혈구절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방각이 금순을 내밀어 검을 막으며, 한편으로는 도끼를 휘둘 렀다. 까앙--! 금순이 충격을 받아 뒤로 밀렸다. 방각의 몸이 약간 뒤틀렷 다. 그 바람에 도끼는 야광충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촨! 야광충의 어캐자락이 도끼 끝에 걸려 찢겨 나갔다. 야광충은 상처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검을 치켜 들어 연속적으로 방각을 후려쳤다. 베는 것도, 찌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끼처럼 찍고, 몽둥 이처럼 후려치는 단순한 공격이었다. 그나마 사선을 그리며 다음 공격의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은 고 란고성에서 여문량과 화영의 검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깡! 깡! 까앙! 이제 방각은 공격과 방어가 적절히 조합된 공격을 할 수가 없 었다. 연속적으로 밀어닥치는 야광충의 공격을 방패와 도끼 둘 다 사용해서 막아야 했다. 야광충은 마지 방패를 깨뜨려 버릴 것처럼 강하게 검을 후려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밟고 선 채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 막고 때리고 있었다. 보법이니 신법이니가 사용되지 않았고 사용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단 한걸음이라도 움직이면, 그래서 중심을 흐트리면 힘에서 밀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힘에서 밀린다는 것은 곧 패배였다. "저렇게 무식한 싸움을……!" 어딘지 나른한 둣한 여인의 목소리가 상음의 귀를 간지럽혔다. 상음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제 나이도 들 만큼 드셨건만 저렇게 싸움을 좋아하시니 큰 일이 아니랄 수가 없다……! 그보다 너는 어디 갔다가……!" 그제서야 돌아보던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라? 너 새 취미가 생겼느냐?" 효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두꺼운 면사(面紗)를 쓰고도 그의 휘둥그래진 눈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뒤에 다가와 섰던 월몽영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중얼 거렸다. "아버지가 야차라고 불려진 이유를 알겠어요." 상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옥주님의 싸움방식이야 원래 저러시다만……, 저놈이야말로 대단하구나! 가히 아수라의 경지라고 하겠다. 조금도 밀리지 않 게 무지막지하구나!" 야광충은 아수라라고 불려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단정히 묶었던 은발이 풀어져 산발이 되고, 두 눈에서는 푸른 불꽃이 튀는 둣했다. 도끼에 이곳저곳 걸려 찢겨진 옷 틈으로는 붉은 피가 튀어 오 르기도 했다. 그런 모습으로 그는 거무튀튀한 검을 휘둘러대고 있는 것이 다. 방각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금순을 내밀어 야광충을 압박해 가며 도끼를 팔방으로 휘둘러대었다. 초식 따위는 없었지만 굳이 비슷한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아 마 사람들은 두 사람 다 팔방풍우(八方風雨)를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할 것이다. 강호 하류배들이 쓰는 가장 기초적인 초식의 하나인 그 팔방 풍우를……! 싸움은 그렇게 금새라도 둘 중 하나가 피를 뿌리고 쓰러질 것 처럼 전개되어 가다가 한 순간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힘의 차이였다. 위에서 아래로 찍어내려오던 방각의 도끼가 아래에서 위로 후 려쳐가던 야광충의 척혈구절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따앙! 쇠붙이끼리, 그보다 먼저 힘과 힘이 충돌하는 격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각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 호구가 찢겨졌다. 야광충의 검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방패가 돌아갈 시간이 없었다. 방각은 도끼를 들어올려 검에 마주쳐 갔다. 따앙--! 다시 한번 힘과 힘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허공에 방각의 도끼 가 떠올랐다. 호구가 찢겨져 손바닥이 미끄러워지지 않았다면 싸움 도중에 무기를 놓쳐 버린다는 저런 창피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방각의 역사에 초유(初有)의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방각은 그런 명예의 문제를 따지고 하는 사람은 아니 었다. 도끼를 눙쳐 버렸다는 것은 싸움에서 무기를 잃었으니 조금 불리해졌다는 의미 이상은 없는 것이다. 대신 그는 금순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금순도 훌륭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날카로운 옆날과 예리한 여덟 개의 뿔로도 적을 죽이는데 모 자람은 없었다. 야광충만큼 강한 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야광충은 연속으로 검을 휘둘러 방패를 두들겼다. 어쩔 수 없었다. 방각은 야광충의 기세에 밀려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잔뜩 움츠 린 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졌네요?" 월몽영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형편없이 뒤로 물러서며 패색을 짙게 보이는 방각과 자 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둣한 어조였다. 상음은 눈을 라내었다. 그는 아직 방각의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아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의 방패, 금팔괘순에 이런 용법이 있다는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구경한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었다. 그들은 방각의 그 한 수를 보는 순간, 그것에 당해 죽어 갔던 것이다. 방각이 야광층의 검을 방패로 막고 그 힘에 뒤로 다시 한걸음 물러섰을 때, 그리고 야광충이 쒜기를 박는 일격을 가하려 다가 설 때, 그 비장의 한 수가 발휘되었다. 파--악--! 한 순간, 야광충워 눈앞에서 금빛이 휘황하게 빛났다. 야광충은 그것이 금빛을 띤 물체가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 었다. 방패의 전면에 솟아 있는 여덟 개의 뿔이 격사되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지근거리에서 그렇게 기관장치(機關裝置)에 의해 쏘아지 는 암기를 막을 수 있을까? 비겹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필요가 없었다. 생사가 갈리고 난 뒤에는 살아 남은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 이다. 방각은 단 한번도 명예를 걸고서 싸운 적이 없었고, 그러기에 그에게는 어떤 방법도 비겁하지 않은 것이다. 야광충은 금빛을 보는 즉시 뒤로 바람처럼 물러났다. 그것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뿔에 관통되는 시 간을 늦출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간발의 차이면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허공에 던졌다 놓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포착! 예충은 투도술의 기본을 그렇게 말해 주었었다. --누구도 정신을 집중하고 걷지는 않는다. 그 중에도 특별히 정신이 흐트러진 경우가 있다. 다른 어떤 것에 집중이 된 경우다. 그 순간을 포착하고, 필요하다면 그럴 기회를 네가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투도술에 있어서의 정신적 측면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기본은 빠른 손과 날카로운 눈이다! 기본조건이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상대가 자고 있어도 아무 짓 도 할 수 없지! 그래서 배운 것이 조화십삼수(造化十三手)였다.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삼십삼연타(三十三連打)를 가할 수 있 쾌속한 손! 그 짧은 순간에도 적의 주의를 돌리고 사각으로 다가가 요혈 을 점하는 열세 가지 방법! 눈에도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게 움직이는 어둠 속의 손 이 바로 조화십삼수였다. 야광충의 눈에는 금라 번쩍이는 예리한 뿔들이 하나하나 또렷 이 보였다. 그것들은 그의 눈에는 마치 깃털이 바람에 날려 다가오둣 한 없이 느리게 보였다. 그러나 보인다고 해서 맨손으로 잡을 수는 없었다. 묵린수를 꼈다고 해서 받아칠 수도 없었다. 기관을 통해 발사된 강력한 힘이라면 묵린수야 보물이니 찢어지 지도 뚫리지도 않는다 해도 그의 손바닥은 뚫리고 말 것이다. 묵린수 안에서 말이다. --힘의 방향, 흐름을 파악하라! 어디서 들은 말이었던가? 야광층의 눈이 광채를 발했다. 귀조가 준 책자! 전륜나의 구결이었다. 그것이 이 순간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금빛 뿔들은 그의 손에 거의 닿아 있었다. 야광충은 손가락으 로 그 뿔들의 첨단 바로 아래 부분을 찍기 시작했다. 한 순간, 그의 손은 수십 개로 변해 버렸다. 강하게 칠 필요는 없었다. 힘을 주어 억지로 방향을 틀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흐름을 파악하고, 그 흐름에 약간의 손길을 주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책에서 본 구절인데도 불구하고 귀조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 는 것 같았다. 금빛이 비산(飛散)했다. 산산이 흩어져 날아갔다. 야광충의 눈앞에서 금빛이 걷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방각의 부릅뜬 눈이 다가왔다. 야광층은 그를 향해 밀려오는 금빛 방패를 양손으로 찍었다. 꽝! 폭음이 귓가로 스쳤다. 방각은 줌주둣 뒤로 물러갔다. 아까 던진 척혈구절검이 이제 야광충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높이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놓는다는 기분으로 한 자 높이로 던졌던 그 검이 떨어지 는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야광충의 손이 검을 잡고, 그 검이 방각의 정수를 노리고 내 리쳐지는 그 시간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길게 느 껴질 정도였다. 싸움은 끝났다. 방각은 자신의 이마 바로 앞에 멈추어진 검을 잠시 보고는 담 담하게 말했다. "제이 관문 통과다!" 야광충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방각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 다. 생각보다 괜찮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서는 투사의 향기가 강하게 풍겼다. 천부적으로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내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냄새, 끓어오르는 피의 향기였다. 방각은 뜨겁게 싸우고 원하게 끝내는 통쾌한 결투를 할 줄 아는 사내였다. 그러나 야광충의 기분은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승리의 기쁨도 느껴지지가 딴았다. 오히려 그의 가슴속으로는 쓰린 패배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모든 것이 잘된 것은 아니었다. 이 일장의 결투로 그는 그 자신의 물건인 연형칠장조차도 제 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알고 있는 무공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 러난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무공조차도……! 시간이 없었다. 보통사람에게는 일 년의 의미가 있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실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어떤 계획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 이니 말이다. 그는 방각을 향해 말했다. "숙소는?" 얼마가 걸리든 가능한 최대한의 시간을 낼 수밖에 없다고 그 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안내해 주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야광충은 고개를 돌려 방금 말한 면사의 여인을 보았다. 횐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허리에 감겨진 검은 채찍! 야광충은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지옥연무장으로 오는 통로에서 그를 막았던 맹랑한 여인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면사를 쓴 것은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서일 것이다. 못나서 그런 것인지, 흑은 그에게 맞은 멍자국 때문인지는 모 르겠지만……! 그보다 그녀의 왼팔 팔뚝에 장치되어 있는 물건에 관심이 더 갔다. 얼핏 그것은 은으로 만들어진 자[尺]를 여러 개 포개어 팔뚝 을 따라 묶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길이는 두 자 가량……! 야광충은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야말로 전날 그의 유리환검을 막아내었던 은빛 방패의 원래 모습임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방패가 나타난 이유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방패는 그렇게 평소에는 접혀 있다가 장치를 조작하면 방 패의 형태를 띠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야광충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방각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녀와 방각의 방패 쓰는 법에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방각이 그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내 딸 소접(少蝶)이다. 따라가면 방을 안내해 줄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맺고 돌아섰다. "원하는 대로 있어도 좋다!" "월몽영!" 면사의 여인이 어느새 야광충의 곁에 와 있었다. 그녀는 야광충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난 월몽영이야!" 야광충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녀에게서 이른 새벽 골짜기의 안개 같은 풋풋한 향기가 났다. * * * 지옥성 지하 천기전(天忌殿). "어떤가?" 막연한 질문이었지만 쌍고르마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무언가 대답할 말을 고르기 위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 큼 지금 그가 느끼는 놀라움은 컸다. "저는 구십평생을 살아오면서 온갖 신기한 일들을 보았지만 지금처럼 이상한 경험을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상한 경험이라……! 후후후!" 로부 옹고트는 웃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형체를 짐작할 수 었도록 가린 장막 안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쌍고르마는 그런 그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아무리 웃음을 오르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웃고야 말 것이라고 그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작을 만들어 놓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손에 잡힌 힘의 실체를 보고서는 만족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쾰쳐진 적나라한 힘의 덩어리들을 보고서 는……! 그들의 았에는 천기칠사 중 완성된 네 종류의 괴물들이 서 있 었다. 가장 약한 천강시는 여덟 구나 있었다. 이 정도의 전력만으로도 무림 어느 방파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羅漢)과 맞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로부 옹고트는 자신하고 있었다 쌍고르마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소림십팔나한이 아무리 정통 소림공(少林功)에 달통한 무학의 천재들이라고 해도 보검으로도 흠집을 내지 못하는 이들 천강시 들을 이겨내기에는 힘이 모자란다고 해야 했다. 더구나 그 다음의 세 괴물, 천둔귀(天遁鬼)와 아수라이화귀 (阿修羅離火鬼), 독종독인(毒宗毒人)에 가서는 단 하나라도 상 대할 사람이 현무림에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쌍고르마는 잠시 그것들을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 렸다. 사람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놈들은 괴물들이고, 지금까지 인세에 알려져 왔던 어떤 괴 물들에게도 손색없는 괴물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괴물들 중 세 개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말쏨대로 천기칠사라면 일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 셋이라……! 크크크……!" 로부 옹고트는 다시 웃었다. 그 웃음은 지금까지의 득의에 찬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쌍고르마는 로부 옹고트의 웃음소리가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준비한 아이의 웃음처럼 들려 잠시 의아해 했다. '이 음침한 사람에게도 장난기가 있었던가?' 만약 로부 옹고트, 같은 사람이 준비한 장난이라면 끔찍할 것 이라는 생각이 불현둣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가 아는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두뇌와 능력, 그리고 무공과 그 모든 것을 합친 만큼 독랄한 심성을 지닌 자가 바로 지금 그 의 앞에 서 있는 자였다. 그런 그가 준비한 장난이라면 정말 장난이 아닐 것인데……! 한참이나 묘한 웃음을 홀리고 있던 로부 옹고트가 그에게 되 물었다. "나머지 셋도 물론 있지……! 그게 무언지 정말 알고 싶나?" 쌍고르마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만큼 그 나머지 셋에 대한 호기심은 컸다. 천기칠사 중 여기 천기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세 명, 혹은 세 개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가 관계하지 못하던 그 세 개……, 다른 네 개를 모두 합쳐 도 그 중 하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가공할 괴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러나 호기심보다는 구십평생을 쌓아 온 조심성이 더 강했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속하, 감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밀은, 특히 로부 옹고트 같은 사람의 비밀은 모르는 게 생 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기분좋은 웃음을 홀렸다. "과연…… 쌍고르마로군! 알아야 할 일과 몰라도 좋을 일을 잘 구분하고 있어! 하지만 자넬 위해 대충은 말해 주지!" 천기전의 구석에는 두 개의 관이 있었다. 하나는 타는 둣 붉은색, 다른 하나는 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 껴지는 깊고 푸른 색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그 관들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하나는 불사체(不死體) 다른 하나는 옥령체(玉靈體)가 들어 갈 자리지! 그 둘이 천기칠사의 둘이다. 나머지 하나는……!" 로부 옹고트는 돌아서서 쌍고르마를 보았다. 두꺼운 천 너머로 냉전 같은 시선이 쏘아져 나오는 것 같아 쌍고르마는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섯다. "셋이어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어떤 것이라고 해 두지!" 쌍고르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불사체? 죽지 않는 생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옥령체는 또 뭔가? 더구나 마지막의 셋과 하나라는 말은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전혀 요령부득(要領不得)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불사체는 이미 완성되었고……, 시간은 약간 더 걸리겠지만 옥령체마저 완성되고 나면…… 그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지! 내 삼십 년의 꿈이……" 그는 갑자기 쌍고르마를 향해 물었다. "천사교(天邪敎)를 추적하는 일은?" "석달 전의 마지막 보고 이후로는 아직!" "추적 중이라는 것이군……!" "중원에서 비밀리에 해야 하는 일이고, 또 천사교 자체가 제 국의 교체기에 지하로 숨어 버린 교파라……!" 로부 옹고트는 쌍고르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압았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사정 천인혈을 구할 수 있어!" "사정 천인혈이라면…… 이미 구하지 않았습니까?" 쌍고르마는 의아했다. 사정 천인혈이라면 바로 얼마 전에 야 광충이 고란고성에서 가져오지 않았던가! 중원의 비밀 교파인 천사교를 찾는 것이 바로 그 사정 천인혈 때문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그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둣 관 옆에 놓여 있 는 물건을 들어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말인가?" 야광충이 고란고성에서 가져온 투명한 병이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그러나 얼마 전에는 붉은 액체가 들 어 있던 그것이었다. 쌍고르마는 떠듬떠듬 물어 보았다. "그것 한 방울로도 천강시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는데……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불사체를 만드는 데 다 써 버렸다!" 로부 옹고트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뭐가 기분좋은지 한참이나 소리 죽여 웃었다. 옥령체를 완성시키려면 이만큼이 더 필요하다. 그게 천사교 를 찾는 이유다. 야광충이라는 녀석은 이게 뭔지도 모르고 가져 왔겠지? 크하하하하! 천기전의 흐린 불빛이 로부 옹고트의 웃음소리에 흔들리고 있 었다. * * * 북해, 한 자루 칼! 끝이 반월처럼 휘어진 한 자 루의 칼이 투박한 나무 탁자에 박 혀 있었다. 손잡이는 용의 머리, 두터운 칼등은 꿈틀거리는 용의 등으로 장식이 되어 흉기라기보다는 장식품처럼 보이는 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대막의 공포, 흑룡사의 주인인 혈문룡 십 삼랑의 애병, 반룡도인 것이다. 혈문룡은 탁자에 앉은 채 팔을 내밀어 반룡도의 손잡이를 거 꾸로 잡고 있었다. 온 얼굴을 천으로 감고, 빠끔히 내눙은 눈에서는 뇌전 같은 광망이 쏘아져 나갔다. 그의 정면 탁자 위에는 두 개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 갈퀴처럼 거칠고 큰 손! 보통사람의 두 배는 됩 둣한 손등에는 동전만한 굵기의 흉터 가 있었다. 그것도 양쪽 모두였타.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한 것으로 보아 뭔가 날카로운 물체에 뚫 린 듯한 자국이었다. 커다란 손의 임자, 유현(幽玄)한 빛을 담고 있는 깊은 눈, 굵 은 주름살로 가려진 얼굴을 가진 노인, 원도살 십일랑은 탁자 위에 꽂혀진 반룡도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시선을 돌려 혈문룡을 마주보았다. "그래서……, 이 칼로 뭘 하겠다는 거냐?" 혈문룡은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쳐 불똥이 튀는 듯했다. 이미 할말은 다 했다. 선택만이 남은 것이다. 그는 잡고 있던 반룡도를 탁자 위에 가로로 눕혔다. "나를 따르시오! 아니면 칼을 잡으시오!" 원도살의 눈이 가늘게 감겼다. 살기가 물씬 풍기는 차가운 시선이었다. "잡아서 널 치라는 것인가?" 혈문룡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원도살과 같은 자세, 같은 거리였다. "나보다 먼저 잡으면 그렇게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잡으면 내가 당신을 치겠소!" 노인의 횐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한 것인가? 아니면 분노? 방안의 공기는 삽시간에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무겁게 가라앉 았다. 혈문룡의 둥뒤에 서 있던 두 사람, 조훼와 복군무는 터질 듯 한 긴장감에 눈 하나 깜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혈문룡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말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그였다. 잡아서 베겠다면 베 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도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인물이었다. 원숭이처럼 지혜롭고 교활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포악한 인물이 없다. 그들은 원도살의 손에 난 상처를 잘 알고 있었다. 손에 난 것과 똑같은 상처가 발등에도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 었다. 그것은 이미 흑룡사의 전설이 되어 버린 이야기였다. 열사의 대막에 양손 양발을 대못에 꿰뚫려 매어달리고도 보름 을 견딘 자는 그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보름 동안 끈질기게 움직여 스스로 못을 뽑고, 탈 출한 자는……! 전에도 지혜로웠지만 그 이후 그는 더욱 지혜로워졌다고 했다. 그런 그가 혈문룡의 젊은 패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건방진 애송이의 무모한 용기라고 보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슷--! 원도살의 손이 움직였다. 동시에 혈문룡의 손도 반룡도를 향해 뻗었다. 누가 먼저인지 조훼들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누구의 손에 죽든 복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도살과 혈문룡은 그렇게 갑자기 움직였던 것처럼 또 갑자기 멈주었다. 원도살의 큰 손에 반룡도의 손잡이가 잡혀 있었다. 그가 이긴 것인가? 혈문룡의 손에는 칼끝이 잡혀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어진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원도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도 흑룡사의 형제다!" 혈문룡이 눈으로 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칼끝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원도살에게 양보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은 반룡도는 칼 끝을 잡고도 살초를 쏠 수 있었다. 어쨌든 원도살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원도살은 칼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같은 길을 가기로 결정한 후의 그의 첫마디는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벤야시리 군(軍)이 우리의 진정한 적은 아 니다!" * * * 지옥성 지하 밀실. "어떻던가?" 막연한 질문이었지만 방각은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 노염군 위대봉이 그에게 물을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괜찮더군!" 위대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각은 말이 적은 만큼, 그 말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짧은 말이었지만 의사는 충분히 표현된 것으로 봐야 했다. "그러면……, 역시 그렇게 해야 할까?"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고 난 생각해 왔어!" 이번에 대답한 것은 깡마른 노인이었다. 노랗게 물든 눈이 특이한 노인, 바로 지옥성 제오 관문인 대 규환지옥(大叫喚地獄)의 옥주, 소선건곤(小旋乾坤) 팽호(彭壺) 였다. "맹주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여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았나!" 위대봉이 약간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꽹옥주, 자넨 지금 누가 그를 끌어들이는데 반대했는지 잊은 것 같군!" "누가 반대해? 난 반대하지 않았어! 왜 반대해?" 팽호는 노랗게 물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기는 절대 아니 라는 시늉을 했다. 위대봉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누가 자네랬나?" "그럼 누구?" "팽옥주, 바로 나요!" 불빛이 비치지 않는 밀실의 구석에 앉아 여태 듣고만 있던 사 람이 말했다. 야유신 예충이었다. 팽호의 안색이 슬쩍 붉어졌다. 반대한 사람은 바로 맹주인 예충,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랬던가요? 늙을수록 건망증이 심해져서……!" 팽호는 변명하둣 말해 놓고는 아차하는 시늉으로 입을 막았다. 나이로 따지면 예충이 그보다는 이십 년이나 연상이었던 것이 다. 그 앞에서 늙은 티를 내다니……! 그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둣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니 왜 그러셨죠? 그렇게 훌륭한 제자를……!" 예충은 쓴 미소를 지었다. 팽호가 이러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분명 말했던 것을 또 말하게 하다니……! 그렇게 사람이 좀 주책을 부린다고 해서 소선건곤이라는 듣기 좋은 별호보다는 주책바가지라는 뜻의 노소포(老笑疱)라는 별명 으로 더 잘 알려진 팽호였다. 어쨌든 같은 말을 다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격에 좀 문제가 있어서……, 남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 어하는 기벽이 있어요!" 위대봉이 끼여들었다. "예전에는 그랬다고 해도 이제는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습니 까?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변수가 될 여지도 있으니……!" "그래야겠지……!" 어쩔 수 없다는 둣 수긍을 하면서도 예충은 무엇을 걱정하는 지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제18장 … 그후 한 달 지옥성 지옥연무장 제이 관문. 야광충은 책을 읽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수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문돌파를 시도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둘러싸고 지옥성에서는 묘한 소문들이 돌았다. 적어도 전관주들보다 무공이 고강해야만 가능하다는 팔관돌파 의 네번째 도전자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세 명과는 다르게 그는 정체가 비교적 알려져 있 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지옥성에서 자란, 순수 지옥성 출신! 관주 중 하나, 그것도 한족과 몽고족을 통틀어 가장 인망이 높은 예충의 제자로 팔관돌파를 시도한다는 것이 그의 주변에 묘한 후광을 드리우게 했다. 특히 한족들에게 그것은 더했다. 멀리 이역(異域)에 와서 수적으로 많은 몽고족에게 눌리는 기 분을 은근히 느끼고 있던 한족들에게 야광충의 행보는 초미(焦 眉)의 관심거리였다. 야광충 개인의 묘한 특징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누구의 입에서부터 새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그가 낮 의 해를 볼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밤에만 돌아다니는 그늘 속의 사내! 창백한 얼굴에 은발, 온몸을 검은 옷, 검은 장갑으로 감싼 사 내 야광충! 인세에 보기 드문 그런 특징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지옥 성에서 그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하석과 요륵을 은 것, 그리고 총옥주의 명으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한 것, 최근에 지옥연무의 일, 이관문을 통 과한 것들이 모두 그의 주변에 신비한 안개를 드리우게 했던 것 이다. 사람들은 그 이후, 팔관돌파 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움 이지 않고 있지만 다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뭔 가 전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야 광충을 둘러싼 시선들에는 담겨 있었다. 야광충은 보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책의 겉장에는 금박으로 <현문구검총요(玄門九劍總要)>라고 씌어 있었다. 유명한 무공비급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책이었다. 한 문파의 무공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누군가에게 알 려진 적도 없는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본다면 웬만한 무림인들은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흥분할 책이었다. 그 안에는 화산파(華山派)의 매화검(梅花劍), 육합검(六合 劍), 태을검(太乙劍), 공동파( 派)의 복마검(伏魔劍), 곤륜파 (崑崙派)의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 분광검(分光劍), 칠보유홍 분심검(七步流紅分心劍), 청성파(靑城派)의 청운적하검(靑雲赤 霞劍), 원나라 당시 최고의 세력을 떨쳤던 전진교(全眞敎)의 무 극검(無極劍)까지 주석(註釋)을 곁들인 도해(圖解)가 수록되어 있었다. 과거 원나라 지배하에서 감찰부가 수집한 무공이 바로 이것이 었다. 지옥성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책들이 상 당수 있었다. 그 중 현문도가(玄門道家)의 검법만을 모아 눙은 책을 지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책의 걸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애초에 책을 보고 뭔가를 익힐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 니었지만 막상 확인하고 보니 새삼스럽게 실망스러웠다. 그 검법들이 쓸모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아니, 당금 천하에서 그보다 뛰어난 검법들도 찾기 어려울 정 도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생명이 없었다. 책에는 동작도, 구결도 있었지만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보고 익혀 봤자 원숭이 흉내짓에 불과할 것이다. 웃음거리 가 되기에나 좋은 것이지, 뭔가를 배울 때 쓰는 것은 아니었다. 설흑 배울 수 있다 해도 역시 쓸모가 없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고 찾던 것은 무언가 좀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폭죽처럼 비산하던, 그리고 나비처럼 흩어져 내리던 눈부신 검기(劍氣)! 여문량의 환검호접몽(幻劍蝴蝶夢)이었다. 환상처럼 아름답던 검! 그러면서도 쏟아지는 달빛을 하나하나 갈라 버리던 그 파괴적 인 검기! 꿈처럼 아름답고, 달빛처럼 차갑던 그 검무(劍舞)를 그는 잊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다시 눈을 떠 <현문구검총요>를 바라보았다. 저 책 속세 나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접몽, 그리고 화영에게 전해 줬다는 그 심검(心劍)이 달빛 이라면 저 검술들은 반딧불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검은 살아 있지만, 글은 죽은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 즉 책을 통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도 그런지 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책을 통해 그런 경지에 갈 수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일은 아닌 것이다. 거기 매달리 는 것보다는 좀더 가능한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보름여의 시간 동안 그가 확인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더욱 그랬다. 야광충은 전에 없이 시간에 쫓긴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사부에게도 말할 수 가 없었다. 그 자신,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저 동물적인 직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아직은 사실의 편린(片鱗)들만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위험은, 그리고 그와 그의 사부를 둘러싼 음모는 분명히 존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음모가 그와 사부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은……! 해를 마주 대하지 못하는 그의 체질, 지옥성 지하에 갇혀 있 던 엽장청, 비슷한 방법으로 고란고성 지하에 갇혀 있던 귀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성주…… !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의 이름,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로부 옹고트였다. 천산오조가 모이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그가 가게 된 것도 그 의 안배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엽장청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 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가 엽장청을 만나게 된 것 자체가 로부 옹 고트의 안배는 아니었을까?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야광충은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추측이 그에게 귀일된다고 해도 문제가 남았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 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어떤 의문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었다. --너는 그와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다! 엽장청은 그렇게 말했었다. 귀조도 그렇게 말했다. 야광충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와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라 고…… 하지만 맙소사……!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이유도 없이 싸워야 한단 말인가? 야광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마음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지난 십오 일 간 무공방면에서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그 답답함의 원인이었다. 적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를 둘러싼 음모라는 것도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 엽장청이나 귀조나 정신나간 늙은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할 수 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로부 옹고트와 싸울 이유도 없었다. 한족이면 어떻고, 몽고족이면 어떤가? 전날 고란고성에서 로부 옹고트와 그들이 말싸움을 벌일 때 그는 뒤에서 웃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들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 가소 롭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치뤄야 하는 처 지에 조국은 무엇이고, 민족은 무엇인가? 충(忠) 이니 의(義)니 하는 고상한 가치들, 그 어느것도 생존 의 절박한 욕구 앞에서는 침묵하는 법이었다. 심지어 생존 그 자체마저 의미를 잃는 시점에서랴……! 여기 이관문에서는 지하 통로를 따라 걸으면 어떻게든 연무장 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한정된 지하공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구조였다. 거의 원형, 흑은 장방형에 가까운 공간의 대부분이 연무장으 로 만들어져 있고, 그 주변에 생활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득 야광충은 그런 모양이 방어에도 유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문으로 통하는 통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 라 들어오면 연무장 중앙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방에서 포위공격이 가해진다면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형편 이 된다. 이 지옥연무장의 팔대관문이 원형으로 벌려선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도 최근에 떠오른 것이었다. 지옥성 구석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통로, 통로가 방사형(放射形)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팔대관문 자체도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통로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지상의 고성 바로 아래에는 팔대지옥이 차례로 있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거기에 팔관문을 더한다면……? 야광충은 문득 묘한 생각을 하고 표정을 굳혔다. 지하의 구조를 알아낸다는 것은, 그것도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설린 좁은 통로를 돌아다니며 그 전체의 구조를 알아낸 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방금 그가 한 추측이 정확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이 지옥연무장에는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연무장에서는 삼십여 명의 수련자들이 상음의 지도하에 창술 을 연마하고 있었다. 수련자들은 모두 몽고족이었다. 며칠 동안 한가할 때마다 구경해 본 바에 의하면 여기에서는 십팔반 병기로 알려져 있는 각각의 병장기를 연마하고, 어느 정 도 기본이 잡히면 바로 대련으로 들어간다. 실전을 중시하는 방각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서의 대련이란 정말 실전을 방불케하는 것이라서 죽고 다치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지금 창술을 연마하는 몽고족들은 제법 기본이 잡힌 자들 같 았다.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이 잘 짜여진 창술을 보여 주고 있는 것 이다. 야광충은 그 창술을 보며 문득 고란고성에서 만났던 혈문룡을 생각했다. 지금 효에서 창술을 연마하는 자들에 비교해 보니 비로소 그 가 얼마나 뛰어난 창술을 지녔는지 알 수가 있었다. '뭘 하고 있을까?' 야광충은 그때 만났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여문량은 죽었을 것이다. 고란고싱을 떠나올 때 야광충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여문량은 그때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 다. 노쇠해서도 아니었다. 삶의 지표를 잃은 사랍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었다. 여문량은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둣했다. 그것이 생기를 잃는 것으로 결과되어진 것이다 '그럼 화영은?' 여문량이 죽고 나면 화영은 어디로 갈까? 아마 그도 여문량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야광충보다 그런 면에서는 훨씬 감이 빠른 화영이었으니까! '어쩌면 여문량이 죽기 전에 뭔가 시켰을 수도 있겠지! 중원 으로 갔을 수도……!' 야광충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화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 득 했다. '석두의 후예라……!' 그를 생각하면 야광충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체는 짐작하고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수께끼의 알 수 없는 자였다. '겐나그라.…… 라고 했던가?' 겐나그라……! 바로 황룡이었다. 고란고성에서 그는 스스로를 겐나그라 라마, 즉 황룡라마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그가 석두의 후예를 자청하고 나타났을 때, 야광충은 바로 그 를 알아보았다. 장공(掌功)을 쓸 때 금광(金光)을 발하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것을 확증시켜 준 것이 서장어였다. 한어는 못해도 서장어로는 의사가 통했던 것이다. 여기 지옥성에서 얻은 양인장이 그에게 갈 것이라는 것도 우 연이라면 묘한 우연이었다. 조구에게 모든 걸 전해 주고 죽었다는 라마승은 누구였을까? 설마 그가 석두는 아닐 것이다. '양인장……!' 야광충은 연무장 한구석에 앉아 아까 하던 생각의 끝을 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따질 것 없이 싸우게는 될 것 같았다. 안 싸우면 모르되 이왕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작게는 무공에서부터 지략(智略)에 이르기까지 준비를 해 둬 야 했다. 둘 중 어느것도 급성(急性)으로 되는 얼은 없었다. 충분한 준 비와 노력이 있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 거기에 양인장은 의외의 소득이라 할 것이다. 야광충은 숨겨 둔 무공이 없었다. 예충이 전수해 준 현음진기가 그의 내가기공의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일단은 충분했다. 남들이 몇 십 년을 갈고 닦아야 이루어지는 내공을 그는 체질 덕에 급속도로 이룰 수 있었다. 절정의 경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고수들과 상대해서 내 공이 모자라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절정의 고수를 만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내공은 이런 경우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 그것이니 모자라다고 한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초식이었다. 싸움에서 내공은 기본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에 승부의 기점은 몇 십 번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병장기에 대해서는 일단은 접어 두기로 하자. 그의 연형칠장은 경계를 않았던 상대에게 의외의 일격을 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을 믿을 수는 없었다. 요행수는 한 번도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둘밖에 없었다. 경공과 제맥금나술! 귀영종의 오대신법은 적어도 그의 목숨을 몇 번은 구해 줄 수 가 있었다. 정 안 되면 도망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가 마음먹고 도망갔을 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 것이다. 제맥금나술은……? 조화십삼수, 그리고 양인장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야광충은 귀조가 전수해 준 전륜나를 떠올렸다. 그가 배운 가장 뛰어난 무공이 하나같이 손에 관련되는 것들 이라는 점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기본도 없이 검을 쓰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 그대로 손에 익 은 무술을 보완하는 것이 훨씬 유망한 일일 것이다. 조화십삼수……! 열세 개의 초식으로 구성된 조화십삼수는 원래는 소매치기를 하기 위한 필요에서 오랜 세월 귀종문에서 갈고 닦인 것이었다. 적어도 누구든 이 초식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무림 최 고의 제맥금나술이었다. 양인장은 아직은 초보단계에 불과하지만 무상금강행의 수련이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면 이 일장에 견딜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전륜나는……? 야광충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에 써야 할지를 알 수가 없는 무공이었다. 내공도 거의 없는 귀조가 몽고기병들을 집어 던진 것을 보며 뭔가 대단한 무공이기는 한데 적을 제압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떨 지 몰랐다. 단지 집어 던지는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광충은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의 흐름! 힘의 방향! 힘의 조정! 야광충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뇌리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던 것이다. '어쩌면……!' 무립역사상 전무후무한 어떤 것이 그의 손으로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조화십삼수를 중심으로 양인장과 전륜나가 합쳐진다면……! 그가 그것을 완벽하게 익혀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 생각에 깊이 잠겨 들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작업이지만,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그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결정하고 있었다. * * * 지옥성 무간지옥. 무공의 세계에 친이 잠겨 있는 사람은 여기에도 하나 있었다. 양인장 조구였다. 그는 야광충에게서 배운 현음진기의 도입 구결을 암송하고 있 었다. 그도 사실은 약간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양인장을 익힌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 이다. 그러나 건강도인술(健康導引術)도 내공에 들어가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기예(技藝)를 파는 사내들이 몽둥이 몇 개를 부러 뜨리는 기합법(氣合法)도 내공이랄 수 있을까? 이십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강호를 이리저리 구르며 어깨 너 머로 배운 심법(心法)이요, 행공법(行功法)이었기에 이렇다 할 공력이랄 것도 없는 것이 여태까지의 조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히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 내공세 입문하면 어렸을 때만큼은 진전이 빠르지 않다. 기경팔맥(氣經八脈)이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이 내공 을 익힌다는 것이 어렵고 익힌다 해도 고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양인장이 있지 않은가? 어설픈 건강도인술로 쌓은 어줍잖은 내공으로도 청석판을 뚫 을 정도의 위력을 보였지 않은가? 모두 잘할 필요는 없고,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한 가지만 잘하고, 나머지는 대강 기본만 갖추면 그도 일류고 수로 행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류고수! 삼류무사에게 일류고수라는 것은 단순히 무공수준 이상의 의 미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민이 왕후장상을 바라보는 기분과도 흡사했다. 한 번 천민이면 거의 영원히 철민인 것처럼 한 번 삼류무사가 된 자가 일류고수로 올라갈 길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그 실낱 같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조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야광충이란 자가 좋아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강도짓을 당하고 강도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조구는 그가 적어도 위선자(僞善者)는 아니라고 봤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을 죽여서라도 구결을 빼앗으려 했었다. 또 그 의도를 조금도 감주려 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적으로 삼으면 위험한 사람이지만, 같은 편이 된다면 가장 믿 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유형의 사람일 것이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 조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잡념이 많았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구결을 암송하려다가 문득 인상을 썼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리는 둣했다. 운기행공 중에는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기 때문에 외계의 사 물을 민감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짐승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석실은 무간지옥에서도 극히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리고 그가 여기 있다는 것 을 아는 사람은 야광충과 여기 무간지옥의 대주 이상 수뇌급밖 에 없었다. 사람도 잘 찾지 않는 곳에 짐승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환청(幻聽)인가?' 조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내공을 쌓기 위한 초보단계에서 그런 일이 많다고 하는데……!' 조구는 이것이 혹시 말로만 듣던 심마(心魔)에 빠지는 초기증 상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심마는 외부의 방해로도 생기지만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만 들어 내는 것이라, 운기행공의 중요한 시기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나타났다. 최초 하단전(下丹田)에 기를 모으는 축기(蓄氣)단계에서 소주 천운기행공(小周天運氣行功)으로 넘어가는 단계, 그리고 소주천 에서 다시 대주천(大周天)으로 그 상위의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 등, 내공이 일보 진전할 때마다 나타나 시련을 주는 것이다. 심약해서 여기서 꺾이게 되면 처음부터 기를 다시 쌓아야 할 뿐 아니라 심한 경우 병신이 되거나, 죽는 경우도 있어서 극도 로 조심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럴 땐, 쉬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야광충이 심법을 알려 주고 주의시켜 준 말이었다. 쪼구는 숨을 크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긱고 그는 더 크게 눈을 떠야 했다. 그의 눈앞에 피에 물든 손 하나가 보였던 것이다. 마치 핏속에 푸욱 담궜다가 꺼낸 것처럼 아직도 붉은 피가 떨 어지고 있는 손이었다. 조구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과거 몇 년 동안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만났었던가!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다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래 서인지 하나같이 놀랄 만한 무엇인가는 준비해 왔던 것이다. 단지 여기도 안심할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몰래 양인장을 격사할 준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지옥성에 그걸 모르는 사람도 드물 텐데……!"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다, 당신이……?" 그 목에 피묻은 손이 와서 조였다. 조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순간에 마혈(魔血)이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야광충에게 말한 대로를 말한다면……." 피묻은 손의 주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 * * 지옥성 제이 관문. "술 마시러 갈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 줄은 알고 있 었다. 조금 전 그녀가 나타날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술은 별로 즐기지 않는 야광충이었지만 그녀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아니! 난 할 일이 있어!" 야광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월몽영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야광충은 그녀와 말할 때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최대한 명확하게 생각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수래야 정체를 확인하지 않은 것에 불과했지만, 야광충은 그것을 상당히 꺼림칙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실수지만 실수를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녀를 만날 때마다 왠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터욱 불쾌했다.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향하는 불쾌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스스로 싫었던 것이다. 월몽영은 더 조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몇 번 만났을 때마다 보여 주던 것과 같은 모호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야광충의 옆을 떠나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고개만 돌 리고 물었다. "일이 끝나면?" 야광충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밤에!" 월몽영은 다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 돌아섰다. "데리러 가지!" 야광충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약간은 후회스러운 감정 에 사로잡혔다. '왜 승낙챘지?'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귀찮고 번거로웠다. 어쨌든 이미 결정한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는 이관문을 나와 여덟 개, 사실은 지옥연무장의 입구에서 거기까지 통하는 통로까지 포함한다면 아흡 개의 통로가 모이는 지하광장으로 나완다. 정상적으로 여기를 나가려면 들어왔을 때의 그 통로를 이용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제오 관문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도 역시 세 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세 개 또다시 세 개였다. 제대로 된 길을 가지 않으면 그의 앞에는 이와 같이 끝없이 세 개의 통로만이 나올 것이다. 통로의 미로는 일종의 진식(陳式)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주 와 본 길처럼 야광충은 그 미로를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 었다. 어디쯤 왔을까? 누군가 그를 감시하는 인물이 있었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방 금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야광충이 통로 가운데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주격자가 야광충이 사라진 지점에 와서 자세히 살펴 본다면 통로의 한쪽 벽, 그늘진 곳이 손으로 한 뼘 정도 너비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어야 했을 것이다. 누가 가슴팍 두께만큼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야광충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사막의 돌 틈에 사는 도마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여 벽면에 스치는 것 같지도 않게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 귀영종 오대신법 중의 하나인 마형귀적(魔形鬼跡)이었다. 손바닥만한 틈만 있으면 연기처럼 빠져 나갈 수 있는 신법이 바로 이것, 생각해 보면 도둑에게 가장 필요한 신법이랄 수 있 었다. 그렇게 오 장여 움직여 갔을까? 야광충은 비교적 넓은 또 다른 통로에 몸을 내밀 수 있었다. 둥불 하나 없는 어두운 통로! 곳곳에 무너진 바위조각들이 쌓여 있는 버려진 통로였다. 야광충은 그 돌들에 걸리지도 않고 유유히 걸어갔다. 그는 처음부터 지옥연무장에 단 하나의 통로만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들어간, 그리고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들어간 그 길만으 로 귀찮아서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수련생들이야 자주 들어올 일이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교 두나 각 옥주들은? 백 보 양보해서 비밀 엄수를 위해 그 번거롭고 긴 길을 지나온 다고 해도 다른 통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전략적인 필요에 근거해서 추측한 것이었다. 여우도 굴을 팔 때 통로를 세 개는 뚫어 놓는다고 했다. 만약의 경우 지옥연무장이 공격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도망갈 구멍이 없는 것이다. 하나의 통로라는 것이 들어오는 적을 막는데는 효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린애나 할 소리였다. 공격하는 쪽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 좁은 굴로 기어들어 올 것인가! 막고 있기만 하면 나오는 적들을 하나씩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인데……!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그 통로의 존재였다. 지옥성은 지금 여기 있는 몽고족들이 만든 성이 아니라 과거 의 유물이었다. 그리고 고란고성의 예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어 느 고성이든 비밀 통로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여기 대막의 성들은 더욱 그랬다. 지상보다는 지하에 생활공간이 있는 경우, 거미줄 갈은 통로 가 없이는 불편해서 살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지옥성으로 변화하면서 새로 공사를 했다고 해도, 토목지학 (土木之學)의 기본상 그런 통로들을 버려 둘 리가 없었다. 최대한 있는 것은 활용하는 것이 기본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 중 누락된 것들, 필요가 없어서 입구만 봉쇄하고 버려진 통로들 중 하나를 지금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의 또 다른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무간지옥으로 가고 있었다. * * * 지옥성 무간지옥. 완벽한 어둠이었다. 마치 먹물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그런 막막함만이 눈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 오래 있으면 막상 밝은 곳에 가서도 사물을 볼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이란 애초에 어둠 속에서만 살도록 되 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완벽한 어둠이란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달랐다. 무간지옥의 미로 속, 폐허처럼 내버려진 통로의 한구석에는 도대체 빛이라고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 폐허 속 돌 틈에 음풍영(陰風影) 형사랑(邢四郞)은 누워 있었다. 야유신 예충의 밑에서 어둠 속에서 싸우는 법에 대해서는 이 골이 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지금 같은 경우 는 처음이었다. 오갛 중에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을 완벽하게 앗아가 버리 는 이런 환경 속에 그와 그의 마흔아흠 수하들은 던져져 있는 것이다. 상대는 하나였다. 그리고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가 바로 그였다. 야광충! 그들 음풍대의 대원들은 옥주의 제자 야광충을 상대로 오십 대 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훈련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실전보다도 더 위험하고, 더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진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소위 어둠 속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은 그들이 단 한 명에게 졌다는 공전절후의 치욕을 이름 앞에 달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형사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둠 속이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손상된 자존심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추한 몰골을 만들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와 그의 대원들은 야광충과의 대결에서 이미 다섯 번이나 졌던 것이다. 야광충이 지옥연무 제이 관문에서 쉬는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어둠을 집으로 삼아 살아온 옥주의 제자라지만 그들 도 허수아비는 아니다. 시각을 잃었을 때 사물을 느끼는 방법은 그들도 훈련받았고, 남못지 않게 경지에 달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기만 해도 그들 전원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눙에 가깝다. 자신의 종적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 울 것이다. 반수 이상이 야광충에게 제압당하더라도 반드시 그 전에는 그 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고야 말았어야 쌨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유일한 길이었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이 상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과 야광충의 인내심 대결이 될 수도 있었 다. 그 경우는 당연히 그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졌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연속해서 졌다. 형사랑은 야광충이 왜 이런 훈련을 시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광오(狂傲)하기까지 한 자신감이 불쾌해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그 자신이 너무 싫었다. '오늘만은……!' 형사랑은 모든 정신을 귀에 집중시키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조 차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이렇게 완벽한 고요함도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있기 힘들다. 들리는 것은 호흡을 조정해 평범한 사람의 열 배나 느리게 움 직이는 심장의 느린 고동 소리뿐이었다.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귓속에서 울림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런 고요함……. 그의 감각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전갈마저도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벽을 기어가는 움직임마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심장 소리 이외의 것이 그의 감각에 와 닿았다. 그것은 서늘함이었다. 그는 그의 목에 딸은 그 서늘함이 쇠붙이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장의 결투에서 그와 그의 수하들이 또 한번 졌다 는 것도……! "불을 켜도 좋다." 자부심도 기쁨도 담겨지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형사랑이 다 음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목덜미에서 서늘함이 사라졌다. 형사랑은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은 굴욕감을 억누르며 자리에 서 일어나 불을 켰다. 천리화통의 불빛에 비친 통로 벽을 기대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야광충이었다. 그 외에는 달리 없었다. "따라와라." 야광충을 따라서 걷고 있는 형사랑의 마음속에는 미로에 깔린 어두움만큼이나 무거운 앙금이 내려 앉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그 길목마다에 무간지옥의 자랑이었던 그의 정 예 음풍대원들이 숨어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의 모습에서도 적의 접근을 감지했다는 표정은 없었다. 하나같이 허수아비처럼 누워만 있었던 것이다. 오십 명이 단 한 사람에게 전멸당한 것이다. 음풍영 형사랑은 야광충이 마혈(麻穴)을 제압당해 누워 있는 그의 수하들을 깨우며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제압당했던 음풍대원들이 모두 일어나 그의 앞에 서자 비로소 야광층은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이기는 방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혹시 있 다고 하더라도 너회들이 여태 배우지 못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어떤 요령도 대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극도로 조용히 움직이고, 극도로 생기를 감추며, 극도로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려 주의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한다." 형사랑과 음풍대원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통로 속에 야광충의 말만이 감돌다 사라졌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나를 이길 때까지는 어떤 진 보도 가치가 없다. 끝내 승리할 때까지는 너희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기를 기대하겠다." 야광충은 어두운 통로를 걸어서 멀어져 갔다. 그 뒤를 형사랑이 따랐다. "조구는?" "하루 한 번 식사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꺾여진 통로를 돌아서자 야광충이 뒤돌아보았다. "내게 무슨 할말이라도?" 형사랑의 손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수하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야광충은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차 가운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책임을 지!다는 건가?" 형사랑은 손에 든 단검을 들어올렸다. "이런 경우 저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모릅니다." 야광충의 손이 들렸다. 짝! 형사랑은 그 손에 검을 빼앗기고 다음 순간 뒤로 나가떨어졌다. 뺨을 움켜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형사랑에게 야광충이 말했다. "너 따위의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단 거냐? 네 시체로 내게 뭘 하라는 뜻이냐?" 형사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와 네 대원들의 시체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제 대로 된 수하들을 원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너희들은 죽고 싶어도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너희들이 책임을 지는 유일하 방법이다." 야광충은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형사랑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침묵은 그들이 조구의 거처로 통하는 통로에 접어들 때까 지 지켜졌다. 그 다음은 달라졌다. 여전히 침묵은 유지되었지만 종류가 다른 침묵이었다. 형사랑은 방금까지 그를 지배하던 수치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야광충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광충은 허리를 굽히고 석벽과 통로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살펴보고 있었다. 무슨 핏자국인가? 아마도 통로 저 안쪽에서부터 시작했을 둣한 핏자국이 옆으로 꺾여진 통로의 갈림길에까지 혼적을 남기고 이어지고 있었던 것 이다. 통로의 안쪽에는 핏자국이 더욱 선명했다. 선혈이 낭자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로의 벽과 바닥에는 마치 피가 가득한 주머니를 양손으로 눌러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 피가 튀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 통로 안에 가득한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형사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야광충의 옆을 스쳐 뛰어나가려 했다. 이 통로의 한쪽에 있는 숨겨진 방,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조구 의 안위(安危)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야광충이 팔을 옆으로 들어 그를 막았다. 그는 석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야광충이 보는 곳을 봤지만 너무 어두워서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는 야광충처럼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사물을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 무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야광충은 뒷짐을 졌다. 그리고 말했다. "불을 켜라!" 불이 켜졌다. 야광충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이 정도의 피를 홀리고도 살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이 정도로 많은 피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물며 그렇게 피를 홀리고서야! "그러나 피를 흘린 '무엇'은 흔적을 남기면서 도망을 갔다." 그렇다. 옆 통로로 점점이 떨어진 피는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야광충은 석벽을 가리켰다. "저 흔적을 남긴 것!" 석벽에는 다섯 줄기의 날카로운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한 치 깊이의 날카로운 자국! 시작선과 끝이 일정하지 않고 중심으로 갈수록 긴 자국이었다. 형사랑은 더듬더듬 말했다. "발톱…… 자국? 맹수란 말입니까?" 무간지옥에 왜 맹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있었다. 야광충이 얼마 전에 데려왔다는 맹수 한 마리! 그렇다면 이 자국은 그것이 낸 것이란 말인가? 야광충은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통로를 걸어가며 말했다. "내게 표범이 한 마리 있었다. 그걸 여기 풀어놓았지. 누군가 를 지키기 위해서 였는데……, 지키던 것이 저런 흔적을 남겼으 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 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조구의 방안에 시체는 없었다. 단지 시체로 추정되는 것만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망치에 눌려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벽에 납작하 게 붙어 있는 사람의 가죽! 그 주위로는 온통 조각난 내장과 뼈, 그리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피였다. "우…… 욱!" 어지간히 처참한 일들을 많이 보고, 겪었다고 자부하는 형사 랑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입을 가리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19장 … 어느 날 밤 고란고성(皐蘭古城). 그는 사막의 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끝없이 광막한 대막의 한가운데에 그렇게 신기루(蜃氣樓)처럼 서 있었다. 조훼는 자신이 정말 신기루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의아했다. 달라 물든 모래언덕에 그림처럼 서 있는 사내! 그에게서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앗!" 짧은 외침을 발하고 복군무가 말을 달려 모래언덕을 달려 올 라갔다.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뤠는 자신이 왜 그 생각을 않았을까 의아해 했다. 다른 때에는 항상 그가 먼저 하던 일 아닌가! 오늘처럼 이렇게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을 때는 더 욱 그랬다. 어쩌면 달빛과, 모래언덕과, 그 아래 선 사내의 모습에 홀렸 을지도……! 그는 내심 자책하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나 이미 복군무는 모래언덕을 거의 다 올라간 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혈문룡이 빨랐다. 어느새 혈문룡이 거대한 체구의 흑마에 올라탄 채 모래언덕 위에 서 있었다. 조훼가 놀란 것은 혈문룡이 그 사내를 아는 둣하다는 것이었다. 혈문룡은 사내를 향해 반갑게 말했던 것이다. "오랜만이군!"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혈문룡의 말에 대답을 대신했다. 수려한 용모의 젊은 사내였다. 무엇보다 그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한 것은 보석처럼 빛나는 눈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볼 수 없는 고정된 눈이었다. 가까이 가 보고서야 조뤠는 그가 맹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 흐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정체도! 그것은 달관, 혹은 초연함이었다. 그는 오래언덕 위에 서 있었지만 마치 구름을 밟고 있는 둣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왼손에 든 장검 한 자루조차 현실의 물건같이 보이지가 않는 거리감이 사내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이 묻고 있었다. "여태 저기 있었나?" 그가 가리키는 것은 고란고성이었다. 지금 그와 흑룡사의 백여 혹룡기사들이 가고 있는 곳! 원도살은 거기 고란고성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할 것을 제시 했다. 혈문룡도 이미 알고 있듯이 벤야시리 군은 애초에 흑룡사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사태는 흑룡사가 억울하게도 천산파의 내부분쟁에 휘 말렸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특히 천산노조 로부 옹고트와 다른 네 장로들 사이의 분쟁이 었다. 그렇다면 복수의 칼날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로부 옹고트였다. 혈문룡이 애초에 벤야시리 군을 복수의 대상으로 잡은 이유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로부 옹고트가 지금 어디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날 대군을 몰고 온 것으로 보아 그는 벤야시리 군에서도 중 요한 지위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혈문룡의 추즉이었다. 그런 그를 치려면 당연히 벤야시리 군을 쳐야 했다. 설사 그들이 벤야시리 군을 건드리지 않으려 해도 벤야시리 군이 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원도살의 생각은 달랐다. 벤야시리 군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라면 그도 안다. 로부 옹고트가 아니라 아루타이였다. 로부 옹고트의 제자이자 현천산파의 장문인, 벤야시리의 오늘이 있게 해 준 장본인, 현몽고 제이(第二)의 세력자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로부 옹고트가 벤야시리 군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 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제자가 벤야시리 군에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도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일로만 미루어 짐작해도 능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벤야시리 군을 건드려서 그가 나올까? 그를 끌어내기도 전에 혹룡사가 전멸하는 것은 아닐까? 원도살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로부 옹고트를 찾아서 직접 쳐야 한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고란고성에서부터! 로부 옹고트를 제외한 천산파의 인물들, 여문량, 화영은 그가 현재 있는 곳을 알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아도 거기밖에는 단서가 없다. 그날 혈문룡들이 만났던 괴물들은 당연히 벤야시리의 정규군 은 아닐 것이다. 차마도 로부 옹고트가 만든 것은 아닐까? 혈문룡은 그때서야 그것을 긍정했다. 여문량 일행익 대화를 들은 것으로는 그 괴물들이 로부 옹고 트의 작품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그런 괴물들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벤야시리 군과 관련된 극히 비밀스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 이라면 벤야시리 군과 직접 싸우지 않아도 되고, 그것은 복수의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혈문룡은 그 분석에 동의했다. 그 결과가 지금 고란고성을 향해 혹룡사의 전인원이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니 여기서 화영을 만날 줄이야! 고란고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대막의 모래언덕 위에서 그를 만 난 것이다. 혈문룡은 물었다. "뭘 하고 있었나?" 화영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그냥?" "그냥 서 있었어!" "흑시……." 혈문룡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날 기다린 것인가?" "음!" 화영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콧소리를 내었다. 혈문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도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지금 보니 더 이상해진 것 아 닌가! 손을 내밀어 만져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함이 화영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비현실감……! 문득 혈문룡은 화영이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문량에게서 느껴지던 범접하기 어렵다는 느낌 이 지금 화영에게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스승을 따라잡은 것인가?' 그는 다시 물었다. "여노인은? 그러니까…… 네 사부!" 화영은 말없이 손을 들어 멀리를 가리켰다. 혈문룡이 그 손끝을 보았지만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천산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인가?" "그보다 멀리……!" 화영의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달! "달 속에?" 혈문룡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화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화영은 전혀 농담을 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죽었다는 말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혈문룡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 뭘 할 건가?" 그 말을 듣고서야 화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혈문룡은 그 순간에야 그가 예전에 보았던 그 화영이라는 느 낌이 들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 미소였다. 방금까지 그림 속의 인물과 얘기하다가 갑자기 현실의 세계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영은 말했다. "사부님이 그를 찾아가라고 하셨어!" "누구?" "야광충! 그리고……." 화영은 서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로부 옹고트!" 그 말이 흑룡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 * * 무간지옥 조구의 방. 그는 공중에 세 치 정도쫌 떠 있었다. 가부좌 튼 그의 엉덩이가 누가 손으로 떠받들기라도 한 둣이 그렇게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방안은 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빛이었다. 금빛을 쏟아내는 라마승, 황룡이었다. 황룡은 반쫌 뜬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이 공중에 뜬 그대로 한 바퀴 옆으로 회전했기 때문에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방안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전혀 화려하게 보이지 않 았다. 방안 가득한 핏빛이 금빛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쪽 벽에 늘어붙다시피 한 사람의 가죽! 그가 원래 입었을 회색 옷과 섞여 구분하기조차 힘든 가죽이 었다. 방안은 야광충과 형사랑이 방금 보고 칸 그대로 전혀 변함이 없었다. 황룡은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토하지 않았다. 눈 하나 꿈쩍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조구의 잔해(殘骸)를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철판 같은 것으로 조구를 벽에 밀어붙였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엄청난 힘으로……! 뼈대는 으스러졌는지 아니면 벽에 박혔는지 흔적도 없고, 가 죽만이 터진 채 그대로 벽에 붙어 있는 것이다. 살은……? 내장, 피와 함께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황룡의 눈이 조구의 온몸을 훌어 가다가 허벅지에서 멈주었다. 거기만 다른 곳과 달랐다. 다른 곳은 그대로 눌려서 터진 혼적이었지만 거기만은 예리한 물건으로 베어진 둣한 선이 보였다. 아마 손바닥 둘을 합친 정도의 너비……? 황룡은 그 흔적을 유심히 보다가 돌아섰다. 정확히 말해 그의 몸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아 문쪽을 향했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지금은 옅은 회색과 약간의 흥분까지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그가 찾던 것을 찾은 것이다. 양인장이 아니었다. 그게 그에게 들어왔어야 될 것이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아니었다. 황교사대금기지학(黃敎四大禁忌之學)중 가장 무서운 것, 천 강마벽(天 魔壁)이 사용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찾아서 회수해 오는 것이 그가 교단(敎團)으로부터 받 은 또 하나의 임무였다. 지옥성 안의 누군가가 그 가공할 살인지학(殺人之學)을 익첬다. 그를 찾아 제거하거나 교단인 황룡사(黃龍寺)로 데려가면 그 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누가 조구를 죽였는가? 그것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공중에 뜬 채로 천천히 유영하둣 날아 무간지옥 의 통로를 빠져 나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금팡이 통로 저편으로 사라지자 석벽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붉은 가사의 라마승! 지옥칠살 중의 한 명, 서열 삼위인 혈사였다. 그는 조구의 방을 보고, 다시 황룡이 사라진 방향을 보더니 한 손을 들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은 바닥에 눌러 붙은 핏자국 위로 녹아들 듯 이 사라져 버렸다. * * * 지옥성 야무방(也無妨). 고통은 사람이 가는 곳, 어디든지 따라간다. 고통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통을 덜어 주는 최고의 약이자 유일한 약은 오직 술이다. 만일 술이 없었다면 세상은 좀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사람이 가는 곳 어디든지 술 또한 따라간다. 여기, 지옥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고통받는 사람이 차고 넘쳐, 술 또한 그렇게 넘쳐 흘렀다. 성곽 북쪽 안벽을 따라 홅으로 쌓은 사각형의 집들이 사람 하 나 지나갈 공간만 두고 촘촘히 서로 기대어 서 있었다. 한낮에도 이곳은 안개 낀 둣 뿌옇게 죽어 있는 모습만을 보 여 준다. 침몰한 배가 보여 주는 음울함이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사람의 종적도, 밥을 짓는 연기도, 노는 아이들의 소리도 들 리지 않는 죽은 거리가 이곳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이 죽은 거리에 생기가 넘쳤다, 토옥(土屋)의 문 입구에 붉은 등이 걸리고, 안에서는 요염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술향기,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홀러 나왔다. 물론 술과 여인을 찾아 이곳을 찾은 사내들의 거친 웃음과 욕 설도 이곳의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은자만 있다면, 누구든 원하는 술을 마실 수 있 고, 원한다면 여자도 안을 수 있었다. 가장 인간을 자극하는 쾌락들을 누릴 수도 있었다. 이곳을 지옥성 사람들은 야무방(也無妨)이라고 불렀다. 그 중 환락굴(歡樂窟)은 야무방 최대의 주점이었다. 지상과 지하로 뚫린 넓은 팡장과도 같은 이곳에는 지금 사람 이 꽉 들어차 저마다 떠들고 있어서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지옥성에 있는 다른 주점과 갈이 환락굴도 물론 술만 팔지는 않았다.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기 환락굴에서도 할 수 있었다 여자와 도박이었다. 처음에 그 모습은 입구의 몇몇만 보았다. 그러나 이내 환락굴 일층 명실공한 주점에 자리잡고 앉아 술 을 기울이고 고기를 뜯던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다. 주점 안이 조용해졌다. 주점 안에 그야말로 특이한 용모, 특이한 분위기의 남녀가 들 어섰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의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방심한 것처럼 오호한 표정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묘한 매력으 로 사내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바로 월몽영이었다. 그녀와 같이 들어선 야광충 또한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번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부신 은발이 특이해 눈이 절로 향해졌지만 한 번 본 사람은 누구도 다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졸아드는 것 같은 위압감이 그 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포였다. 지옥성의 거친 사내들을 두렵게 만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곳에 처음 와 보는 사람처럼 들어와 잠시 어색하 게 서 있다가 그들을 보고 달려온 사십줄의 점소이의 안내를 받 아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처음에는 취객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근대다가 잠시 후에는 다 시 소란스럽게 떠들어대어 환락굴은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앉아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표현은 않았지만, 사실 이런 곳에 오게 된 것이 싫었다. 단지 낮에 월몽영과 약속했기 때문에 온 것일 뿐이었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마셔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월몽영이 부어 주니 받고, 마실 것을 권했기 때문에 마실 따 름이었다. 그녀도 사실 이런 곳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둘째치고, 술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겨우 한 모금도 넘기지 못 하고 기침부터 터뜨린 것이다. '이 여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나를 데려왔을까?' 야광충은 내심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자연히 밝혀질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월몽영은 한 잔을 입에 대 보고는 그 맛에 질렸는지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반쫌 찬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더니 갑자 기 물었다. "저 여자 알아?" 야광층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람들로 들어 차 소란스러운 주점 저편에 눈에 익은 여인이 보였다. 붉은 읏에 무표정한 모습! 어쩐지 도사린 암고양이 같다는 느낌을 주는 여인, 혈부용이 었다. "아까 전부터 당신만 보고 있던데?" 그녀도 남자와 같이 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 몽고족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시선은 청년보다는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 었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앉은 청년이 보통 정도의 자존심만 있어도 반드시 화를 내고야 말았을 만큼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월몽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수고양이를 기다리는 눈인걸. 그 수고양이가 누군지는 몰라 도……!" 그녀가 말을 하기 이전에 야광충도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었 다. 혈부몽은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월몽영이 그를 수고양이라고 빗대어 조롱했다는 것을 알 면서도 상대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말도 별로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월몽영이 다시 그의 귓전에 말올 던졌다. "당신을 데리고 온 건 만나게 할 사람이 있어서야!" 혈부용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앞에 앉은 청년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만 어디로 갔 다가 오려는 것일까? 혹은 그녀가 먼저 떠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꼭 만나 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야!" 혈부용은 출구가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야광충은 생각했다. "지금 가 볼까?" 혈부용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야광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후에!" 그는 월몽영은 바라보지도 않고 짧게 말한 후, 혈부용이 나간 문을 향해 걸었다. 그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월몽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둣한 표정!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술잔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돌리 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려다가 멈칫하더니, 짧은 한숨 을 쉬었다. "오백 번만 더 세자!" 그러나 그녀는 백 번만 더 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야광충과 그 전에 혈부용이 나갔던 문으로 다가갔다. 문 밖은 좁은 통로였다. 그리고 그 한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야광충은 문을 나서서 잠시 멈칫하다가 계단을 향해 걸었다. 계단의 입구에 붉은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연꽃이 새겨져 있는 붉은 손수건!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코에 대었다. 손수건에서는 향기가 났다. 그가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그는 손수건을 접어 품속에 넣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도박장이었다. 천장을 받친 돌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사이로 도박판들이 늘어서 있다. 그 도박판들을 중심으로 숱한 군상들이 돈과 승부에 탐닉해 악머구리떼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위층의 주점과 다른 것은 술을 마시는 자들이 긴장을 풀고 있 는데 반해 여기서는 오히려 극도로 긴장감을 쌓고 있다는 것 정 도, 각자의 세계에 열중해 있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야광충은 그 도박장 귀퉁이에 나 있는 빈 공간을 가로질러서 또 하나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 계단으로 내려가는 혈부용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걸음을 늦추어 그를 기다린 것일 게다. 이렇게 그녀를 따라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왜 그녀를 따라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은 그런 것은 생각 하기도 싫었다. 그저 이 순간은 그녀를 따라가는 것에만 전념하고 싶을 뿐이 었다. 그렇게 내려간 지하에는 개미집처럼 복도들이 뚫려 있고, 그 복도 양쪽우로 문도 없는 방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야광충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얇은 천 하나씩 드리워진 그 방안에서 픗기는 냄새와 소리들 로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바로 매음굴(賣淫窟)이었다. 저 많은 방 하나하나에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여인들이 하 나씩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도박장 구석에 이곳과 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 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생각이 나면 매음굴에 내려와 땀 을 홀리고……. 그럴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 놓은 곳이 바로 환락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매음굴의 복도 저편으로 붉은 옷자락 하나가 사라지는 것 이 보였다. 야광충은 걸음을 빨리 해 그 뒤를 따랐다. 복도를 돌아서자 붉은 옷자락은 한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단지 그리 두껍지 않은 휘장 하나로만 가려진 방이었다. 그러 나 안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밝혀진 등불에 비해 방안은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앞에서 야광충은 멈추어 섰다. 여태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리로 밀려들 어왔다 혈부용은 왜 여기 매음굴로, 그리고 이 방으로 온 것일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가? 아까 그를 본 그 눈빛이 그를 부르는 눈빛이 맞았을까? 혹시 아니라면……? 지금 그가 따라온 그 붉은 옷자락이 그녀의 옷자락이 맞을까? 혹시……? 그의 생각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휘장 사이로 하얀 손 하나가 나오더니 그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방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야광충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볼수가 있었다. 그 눈빛, 혈부용의 것임이 분명한 두 개의 눈빛은 그의 눈 바 로 앞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이렇게 키가 크지는 않을 텐데……?' 야광충은 자신이 직면하게 된 사태와 별로 관계가 없는 엉뚱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콧가에 향기가 풍겨졌다. 아까 주웠던 손수건에서 풍기던 바로 그 향기였다. 입술 위로 촉촉한 무엇인가가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그리고 달콤한 감촉이었다. 야광충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루만졌다. 손길은 그를 당기고 있었다. 톡,톡!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혈부용이 그를 안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야광충은 두 손을 내리고 빳빳하게 굳어서 그녀의 손길에 기 울어지둣 따라가고 있었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발소리로 보아 그녀는 발끝으로만 걷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빛이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발끝으로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녀의 팔에 안긴 채 푹신한 침상 위에 넘어지고 있었다. 조구의 시체가 갑자기 그의 눈알에 떠올랐다. 왜 이런 때에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일까? 혈부용은 그를 안고 침상에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야광충은 그녀의 몸 위로 깔아뭉개둣 누워 있었지만 역시 가 만히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 오고, 숨결이 입가를 간지럽히 고 있었다. '조구는?' 야광충은 필사적으로 생각쌨다. '누가, 왜 죽였을까?' 혈부용이 몸을 움찔 들어을리는 둣했는데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구를 죽일 이유를 가진 자는 많다. 너무 많아서 살인자를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지!' 혈부용의 손이 그의 허리띠, 척혈구절대를 풀고 있었다. 일반적인 허리띠라면 금방 풀었겠지만, 척혈구절대는 달랐다. 어디를 매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걸어 놓은 것도 아니 었다. 그녀의 손은 한참이나 만지고만 있을 뿐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아니 거의 없다 고 봐야겠군! 들어 보지도 못하던 살인방법이었다.' 차칵! 혈부용이 제대로 찾았다. 척혈구절대의 머리 부분에 돋아 나와 있는 장치를 누르면 풀 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손은 이제 야광충의 윗도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몽고의 옷6!는 읏고름이 없다. 있어도 거의 장식용이었다. 그저 허리띠를 풀고 위로 해서 벗는 것이다. '그 무공을 쓰는 자가 하나 더 있군! 양인장을 제대로 쓰는 자를 찾으면 그가 바로 범인일 것이다.' 그의 윗도리가 가슴 위까지 올라갔다. 그때, 야광충이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그는 혈부용의 양손목을 잡아 침상에 누르고, 상반신을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웠지만 그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발그레한 흥조를 띤 혈부용의 얼굴, 그러면서도 눈을 동그랗 게 뜨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을……! 야광충의 머릿속이 다시 텅 비어 버렸다. 그는 무너지듯 그녀의 위로 몸을 눕혔다. 그녀는 뜨거웠다. 검은 눈동자 깊숙이 숨은 유흑의 불길이 그랬고, 붉은 입술, 하얀 피부, 그의 손을 잡은 작고 부드러운 손이 역시 그렇게 뜨 거웠다. 그녀의 속살과, 한 손에 들어오는 작으면서도 단단한 젓가슴 과, 그의 허리를 감아 오는 하얗고 긴 다리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짧고 억눌린 듯한, 그러나 참을 수 없이 발해지는 탄 성을 귓가로 들으며……! 종리매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매음굴이란 곳이 원래 억인과 같이 들어와 서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는 더욱 아니엇다. 그는 차마 바로 보지는 못하고 곁눈으로 월몽영의 표정을 훔 쳐보았다. 평소처럼 오호할 뿐이었다. 단지 평소보다 약간은 반짝인다 싶게 보이는 눈빛은 휘장 너 머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그냥 통로 의 불빛에 반사되어서일까 몰랐다. 그는 속으로 약간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주인을 쫓아하는 것이 아니었나?' 만약 그렇다면 안에서 야광충과 혈부용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짐작하면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야광충을 좋아한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대체가 이런 소리를 남자와 같이 들으면서도 태연한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순진한 건지, 아니면 무감각한 건지……?' 종리매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휘장이 열리고 혈부용이 먼저 나왔다. 뺨이 약간 붉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 했다. 휘장의 바로 밖에 서 있는 그들을 보고도 그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리매와 월몽영을 무감동하게 바라보며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야광충은 한참이나 더 있어서야 나왔다. 그의 표정 역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휘장 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같이 그를 기다린 이유를 묻는 빛이었다. 월몽영이 말했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될 거야!" 그녀는 돌아서서 사라져 갔다. 야광충은 종리매를 바라보았다. "안내해 드리습니다." 종리매가 돌아서서 걸었다. 그들은 좁은 복도를 걸어서 계단을 올라 다시 도박장으로 들 어갔다. 여전히 열기가 넘치는 도박장이었다. 종리매쓴 그를 도박장 한구석에 있는 문으로 안내했다. 붉은색이 칠해진 철문이 그들의 효에서 열렸다. 십여 명의 장한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맞이하는 것처 럼 일어섰다. 중앙의 탁자에 마작패(麻雀牌)가 흐트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 마작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들이 마작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패들의 배열이 그랬다. 마작을 하는 척하느라 대충 모양만 늘어눙았다는 것이 확연했 다. 한 자리에서는 점수가 났는데도 쓸데없는 패를 끌어다 놓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자신일 것이다. 이 방안에 감도는 긴장감은 도박판에 있기 마련인 후끈한 열 기와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야광충의 등뒤에서 철문이 굳게 닫히고, 누군가가 쇠빗장을 가로질러 놓는 둣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이 났다. 야광충은 다가오는 장한들의 선두에 선 뗬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음명귀 가오륙, 그리고 이빨이 왕창 나가 버린 두 사람, 색명 귀와 요풍귀였다. 하번 부러져 나간 이빨을 다시 해 넣는 방법은 없으니 그들은 아마 살아 있는 동안은 영영 그렇게 합죽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걸어다니는 걸 보니 대충 나은 모양이군!' 야광충은 혈부용퍄익 혼동스러웠던 일어 한 생각을 뒤로 미 뤄 두고 눈앞의 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되찾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한 세 사람과 그 일당들을 앞에 두고도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희미한 적의(敵意)정도는 색명귀와 요풍귀에게서 느껴지긴 했지만……. 종리매와 그는 그들의 사이를 태연하게 뚫고 지나가 방 한구 석 모퉁이에 섰다. 바닥에 깔린 나무판을 들추자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내려갔다. 가오륙의 옆에 서 있던 삼십줄의 사내가 그들이 완전히 내려 간 후 혀를 찼다. "대단한 강심장이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들 사이를 지나가다니!" 가오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이미 말했잖은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인물 이라고……!" 또 한 사내가 색명귀와 요풍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자네들이 보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 그만 원념 을 푸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군!" 색명귀 하석이 노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도모하면 그도 편지만은 않을 것이오!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지 마시오!" 그 사내는 하석의 반응이 의외로 격렬한 데 놀랐는지 주춤 물 러서는 빛을 보였다. "너무 화내지 말게! 내 말은 그저…… 한패가 될지도 모르니 분기(憤氣)를 달래라는 뜻으로……!" 하석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니라는 것이 결정되면 나는 정말 목숨을 걸고 그를 해(害) 할 것이오!" 이때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시작하자!" 다른 누군가가 엄살부리둣 중얼거렸다. "난 요즘 몸도 안 좋으니 너무 세게 때리지 말게나들!" 조용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방안은 거친 욕설과 물건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방금까지 도란도갈 얘기를 나누던 그들이 갑자기 싸움을 벌이 기 시작한 것이다. 도박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고, 누군가를 불러 몰매를 주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색명귀들이 야광충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지옥 성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헙공을 했다 한들 의심을 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을 안 열어 준다고 해도 말이다. 종리매와 야광충이 내려간 지하는 다시 매음굴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까 그가 혈부용과 갔던 곳과는 달랐다. 어쩌면 같은 곳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싯이 다른 것은 알 수 있었다. 종리매는 구석에 있는 큰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은 제법 장식도 되어 있고, 문도 달려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방안에는 단지 침상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보통사람 열 명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둣한 침상에 속이 횐 히 비치는 망사의판 걸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도 별로 요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녀가 사 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대했기 때문이엇다. 홉사 코끼리가 한 마리 비스듬히 누워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종리매가 그녀를 가리켰다. "현현소녀(玄玄素女)! 이 환락굴의 여주인이십니다." 현현소녀라 불린 여인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 어른 의 허리만큼이나 굵은 팔을 들어올리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녀의 온몸에서 살집들이 출렁거렸다. 그것이 인사였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닥거려 보였다. 그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을 경계하라는 말이 강호에는 전해 온다. 이 여인은 남보다 몇 배로 특이하니 몇 배로 경계해야 할 여 인일지도 몰랐다. 종리매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올라가시죠!" 야광충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방안 어디에 을라갈 곳이 있는가? 그의 눈살은 종리매가 침상으로 을라가 현현소녀의 옆에 눕는 것을 보고 더욱 찌푸려졌다. 종리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사정은 나중에 알게 되실 테니 일단 을라오십시오!" 야광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져 물었다. "각오하고 하는 일이냐?" 종리매는 잠시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작에 그 정도는 생각해야 했었다. 야광충을 이 정도로 귀찮게 하고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는 것 이 밝혀지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전 설명도 하지 않았지 않은가!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2덕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각오도 없이 제가 소주를 모시고 왔겠습니까?" 야광층은 종리매의 옆에 누웠다. 현현소녀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침상의 한 부분을 누르자 침상이 한 바퀴 완전히 뒤집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침상 위에는 현현소녀 혼자뿐이었다. 야광충은 돌바닥 위로 소리도 없이 내려섰다. 옆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소리는 종리매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금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마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 석실의 천장은 완벽하게 막혀 있 었다. 누구도 저 위에 침상이 있고, 그 침상이 문이라는 것을 짐작 하지 못할 것이다. 한번 들어와 보기 전에는 말이다. 그보다도 야광충은 자신이 현현소녀를 잘못 보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침상이 한 바퀴 회전하는 동안 비록 미리 준비했다고 하더라 도 그 덩치가 침상바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는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화악--! 석실 한쪽에서 불이 밝혀졌다. 야광충은 석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그 불빛을 바라보며 섰다. 팽거의 안내로 왔지만 만사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불빛 속에는 네 명의 얼굴이 보였다. 야광충은 눈을 빛내었다. 그 중 두 명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붉은 얼굴에 무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위인, 노염군 위대봉과 한쪽 눈만 번뜩이고 있는 독목야차 방각이었다. 다른 두 명은 노인과 복면인이었다. 노인은 양쪽으로 축 늘어진 새우눈에 주독(酒毒)으로 붉게 달 아오른 주먹코를 하고 있는 초라한 시골 영감 같았다. 야광충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사 부에게서 익히 들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로 대규환지옥의 옥주인 소선건곤 팽호였다. 복면인은 복면이라기보다는 검은 휘장을 포대처럼 만들어 위 에서부터 아래까지 덮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위대봉이 말했다. "잘 왔네! 자네를 다시 보기를 기다렸다네!" 야광충은 오늘의 일이 정말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째달았다. 팔대지옥주 중 셋이 남의 눈을 피해 이런 매음굴의 지하에 있다 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날 부른 이유는?" 월몽영은 주루의 한쪽 구석에서 찾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빛내었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썼다. 혈부용은 아까의 술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옷깃에 끈이 달리고 소매가 좁은 착수포(窄袖袍)를 입 은 몽고 청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월몽영이 인상을 쓴 것은 그 몽고 청년과 혈부용의 모습이 지 나치게 다정스럽다는 것 때문이었다. 몽고 칭년의 한쪽 손은 혈부용의 어깨에 돌아가 있고, 다른 한쪽은 혈부용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아무리 남녀의 구별이 엄하지 않은 몽고 땅이라지만 그냥 아 는 사이로서는 조금 지나치다 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부족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몽고족은 축제 때 눈이 맞은 청춘남녀가 연애를 결정하고 사귀는 풍습이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마음껏 즐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관계에도 규칙은 있어서, 두 사람을 동시에 연애 상대로 삼을 수 없고, 결흔 후에는 더 이상 연애 상대를 만들 수 없다. 그 규칙을 어긴 사람은 부족으로부터 배척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챘다. 몽고의 가혹한 자연환경 속을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죽 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혈부용이 그 금기를 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두 사람은 거의 연애 상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야광충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문득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혈부용의 일은 야광충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녀가 신경쓸 일 이 아니었다. 연애상대인 척자가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치욕을 받든 말든 야광충의 문제이지 그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은 그를 그들과 만나게 한 것만으로 그녀의 일은 끝난 것 이다. 그녀는 환락굴의 문을 나섰다. * * * "벤야시리가 케레이트 족을 멸족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위대봉의 첫마디는 의외의 말로 시작됐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벤야시리는 현몽고 최고의 실력자다. 중원에서 쫓겨난 몽고족은 원조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가 죽자 황태자인 아유시리다라가 몽고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에 서 칸(大汗)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소종(昭宗)인데 그의 손으로 국력의 회복이 도모되었지 만 세력대립이 끊이지 않아, 그 뒤를 이은 토구스 테무르는 왕 족의 한 사람인 에스델에게 살해되었다. 이러한 북원(北元)의 정통을 잇는 부족을 타타르[ ]라고 한다. 이 무렵 몽고고원 서부에 신홍세력인 오이라트[瓦刺] 부(部) 가 대두했다. 그들은 수렵으로부터 막 목축으로 이행한 삼림민(森林民)들이 었지만 토구스 테무르의 세력을 패퇴시킨 에스델과 결합하여 급 속히 세력을 신장시킨 후, 동부의 타타르 부에게 대항했다. 몽 고 내부에는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대립항쟁이라는 정세가 출현 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대제국 사마르칸드를 건설한 티무르에게는 벤야 시리가 투항해 있었다. 그는 몽고황실의 정통인 토구스 테무르 의 손자였는데, 부장 아루타이의 옹립을 받아 사마르칸드로부터 돌아온 후, 칸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타타르 부 통일전쟁을 벌 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고족이 중원을 정복할 때부터 몽고 내부에는 권력투쟁이 있 었다.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이북쪽의 여러 한국(韓國)을 건설한 형 제들과 굳이 중원으로 내려와 원제국을 건설한 쿠빌라이 칸 사 이의 분쟁이었다. 물론 쿠빌라이 칸이 최후에 승리함으로써 형식상 모든 한국이 원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쿠빌라이 칸이 살아 있을 그 당시만이었다. 각 한국은 몽고의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인 체제가 되었고 원 제국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다. 원제국이 나중에 명에 망하고 몽고고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 이 지역에 있던 부족들이 그들을 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 었다. 북원의 빠른 패망에는 그런 배경 또한 있었던 것이다. 몽고의 전통을 고집하는 부족들을 몽고파(蒙古派)라 하고 한 족의 문화에 동화된 부족들을 한지파(漢地派)라 불었는데 케레 이트 족이 바로 한지파의 최강세력이었다. 그 케레이트 족이 열렬한 몽고파인 벤야시리에게 멸족되었다 는 것이다. 위대봉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반응을 보려는 둣 야광충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야광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벽에 기댄 채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겠나!" 노소포가 답답한지 다그치둣 물었다. 야광충은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우리? 누구를 가리켜 우리라 부르는가?" 노소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야광충이 처음부터 반말로 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말을 듣는 태도에 이르기 까지 전혀 마 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우리!"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기 코를 가리키더니, 다시 위대봉, 그 리고 방각과 야광충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지옥성에 있는 한족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야광충의 냉정한 눈을 보더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지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갔다. "이제 알겠느냐?" 위대봉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두게!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화부터 낼 건가?" 노소포는 그가 말리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말리지 말게! 내가 이 애송이에게 노인공경이 어떤 것인지부 터 가르쳐 줘야겠어!" 그렇게 그와 위대봉이 티격태격하는데 야광충이 나직하게 말 했다. "더 할말이 없나 보군!" 노소포와 위대봉이 말을 뚝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야광충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나갈지를 생각하는 둣한 모습이었다. 위대봉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을 너무 돌렸던 모양이군.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하지……!" "그러게 바로 본론을 애기하자니깐……!" 노소포가 꾸중 들은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자네, 지옥성이 벤야시리의 휘하세력이라는 걸 알고 있나?" 위대봉은 의외의 사실을 먼저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남들이 모르는 사실부터 던지둣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취미도 통하지 않았다. 야광충은 그 말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알고 있던 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표정에 나타내지 않는 것인지 짐 작할 수가 없었다. 위대봉은 내심 입맛을 다시며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핵심 을 내놓았다. "최근 삼 년 간 지옥연무를 통과하며 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졌네. 예전에는 참가인원의 반 이상이 쭉었고, 그 대부분이 몽 고족이었는데……, 이젠 아닐세!" 연무의 강도가 예전보다 약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 면……? "어디서 그런 인원들을 모아 오는지 몰라도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난 자들이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그들이 벤야시리 의 병영(兵營)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믿고 있네!" 애초에 지옥성이 만들어질 때부터 위대봉은 누군가의 도움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몽고에서 대단한 힘을 가진 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무사만 키우는데 어 디에서 자금이 나올 것인가? 처음에 그는 성주가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위협해서 세금을 받아 내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 배후에 있을 세력자와도 그저 헙 력관계 정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몇몇 정보에 의하면 여기 지옥성에서 연무를 마친 자들이 대 거 벤야시리 휘하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이 애초부터 그곳에서 왔다면 이야기는 맞아들어간다. 지옥성은 지금 벤야시리의 무력을 키워 주는 훈련장, 혹은 군 관양성소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이 처음으로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렴풋이 위대봉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그러나 위대봉은 결국 짐작했던 말을 했다. "이 몽고가 우리 한족이 살아가기에는 좋지 않은 곳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일세. "언제는 좋은 곳이었나?" 노소포가 끼여들어 한 말이었다. "전에도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더 좋지 않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일세.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 도로……." 몽고족이 볼 때에는 그들은 자기 땅에서 도망쳐 나온 도망자 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과거 몽고족의 나라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 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이 한지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에는 어느 정 도 인정을 받았지만 이제는 인정을 받기란 어럽게 되어 버린 것 이다. "어쩌면 벤야시리가 세력을 잡은 후의 첫 행동이 우리를 제거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위대봉은 침중한 안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석실 안세 잠시 무거운 공기가 홀렀다. 야광충은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나와 무슨 관계인가?" 노소포가 인상을 썼다. "무슨 관계냐고? 너도 한족인 이상,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가 잡아먹을 둣이 으르렁거렸지만 야광충은 눈 하나 까딱 않았다. "한족이든 몽고족이든 무슨 상관인가? 당신들은 중원이 싫다 고 도망쳐 나온 사람이야. 이제 몽고마저 싫다고 도망칠 셈인 가? 이번엔 어디로?" 노소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위대봉은 반대로 더욱 무겁게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 민족도, 나라도 버리고 온 사람이 우리지. 이제 와서 민족을 따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닐세." 그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생존! 지금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야." 노소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기 힘들어 중원을 도망쳐 나왔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위대봉과 노소포는 주거니받거니 하며 지옥성 내의 상황을 알 려 주고 있었다. 위대봉이 야광충에게 물었다. "수심결(首心結)이라고 들어 보았나?"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대봉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심결은 지옥성에 있는 한족들의 모임이었다. 권력이나 다른 어떤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몽고족에 의해 위협 받는 생존을 지키기 위한 모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를 따서 만들어 진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목단체였지.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 니 이제는 모여서 고향 얘기나 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네." "지옥성에 있는 총숫자는 자네도 알지만 무사가 일천, 그 딸린 식구와 그외 인물이 오백, 해서 모두 천오백을 헤아리네. 그 중 한족이 삼백 정도 되지. 우리 수심결에 가입한 사람은 백 여 명일세. 소염라(少閻羅), 정확한 숫자가 어떻게 되지?" 소염라는 노염군 위대봉의 별명이었던 모양이다. 위대봉은 별명을 불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기밀 사항 을 함부로 말한다고 그런 것인지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이왕 말한 것인데 어쩔 수 없었다. "백이십이 명이지." 지옥성의 무사들이 다 가족을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가족도 없는 혈혈단신이 대부분이었다. 극히 일 부만이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다. 무사를 제외한 오백여 명의 대부분은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자들이었다. 여기 환락굴의 여인들도 모두 그런 인원에 들어갔다. 피가 끓는 젊은 사내들의 정욕을 달래 주는 창녀들이었던 것 이다. 한족은 삼백여 명 거의 전원이 무사였다. 그 중 백이십이 명이 수심결에 가입했다고 위대봉은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도 여기 가입할 것을 권하는 바이네!" 그것이 위대봉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를 여기로 불러 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야광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으로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가입을 권하는 위대봉도. 여태까지 시끄럽게 나서던 노소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야광충이 생각하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있는 둣챘다. 분명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중원을 그리워하는 한족들의 단체에 가입한다는 단순 한 문제가 전혀 아닌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쌨을지 몰라도 이제는 분명 그것이 아니 었다. 수심결은 최악의 경우, 지옥성의 몽고족에 대항하는 한족의 결사조직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지옥성 자체에 대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단지 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원을 구경도 못 해 본 그 가 한족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야광층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족이니 몽고족이니의 문제는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명나라니 원나라니 하는 문제도 그에게는 역시 아무것도 아니 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이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민족을, 나라를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태어나서 살아오는 동안 민족도, 나라도 그가 이 황량한 땅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좋은 쪽으로 작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족이기 때문에 그가 여태 같이 살아온 몽고조 과 싸운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수심결을 만들었다는 이들도 비웃어 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민족이 있었던가? 그들은 원나라의 백성일지는 몰라도 명나라의 백성은 분명히 아니다. 명나라가 싫어 여기로 도망왔지 않은가? 여기서 태어난 야광충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지윽성의 한족 누구도 민족을 주장할 권리도, 나라를 주장할 권리도 없다. 그렇게 전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야광충이었지만 선뜻 반 대를 못하는 것은 상황이 묘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보는 그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의 핵심이 라고 할 수 있는 수심결의 존재와 숫자까지 털어놓았다. 그들이 그만큼 그를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믿는 것이 있다. 그가 가입하고야 말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세 명의 옥주라면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 셋이 협공하면 그도 상당히 곤 란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아무 비밀도 모르던 자에게 비밀을 알려 주고, 거절하 면 그 입을 막기 위해 죽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더 말할 것이 있지 않나?" 무언가 그가 더 끌릴 수 있는, 아니연 어쩔 수 없이 가입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대봉과 노소포가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뒤에 있는 복면인을 돌아보았다. 야광충은 그 순간, 이 결사(結社)의 진정한 지휘자는 그 복면 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추즉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복면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말하기로 하겠소!" 야광충은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서 버렸다. 익히 들어오던 목소리! 복면인은 바로 그의 사부인 예충이었던 것이다. "뭐라고?" 야광충은 돌아보았다. 현현소녀는 힘겹게 입을 벌렸다. 말을 한 번 하기 위해서 일곱 겹이나 되는 목 아래의 비곗살 까지 함께 움직이는 거창한 작업을 하는 것이니 힘겹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있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영롱한 것이었다. 그 리고 묘하게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야광충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라 버렸다. 누구에게도 표현해 본 적이 없는 마음의 조각이었다. 대답을 하고 보니 스스로가 그랬던가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좋아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녀와 정사(情事)를 벌인 것일 까?' 그는 혈부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현현소녀의 다음 말이 그를 더욱 놀라게 랬다. "그녀가 혈부용이 아니길 빈다." 야광충은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혈부용의 일에 대해서 이 돼지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액면 그대로 혈부용을 경계하느라 한 말일까? "미안하지만 그녀야!" 현현소녀가 커다란 머리를 들어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감기다시피 한 그녀의 실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야광층은 그 눈을 흔들림없이 마주 대하고 있었다. 현현소녀가 탄식하둣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되겐군! 그러나 너를 본 기념으로 한마디 만 해 주지." 야광충이 바로 대답했다. "하지 마!" 현현소녀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내 말을 짐작하고 있나?" 야광충은 침묵했다. 왜 그녀의 말을 듣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는지 그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었다. 현현소녀는 말에 무게를 실어 한마디씩 또렷이 말해 주었다. "네가 그녀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는 네게서 멀어질 거다!" 야광충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매음굴의 좁은 복도를 지나 사다리를 타고 가오륙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아직도 싸우는 척 소리를 내고 있 었다. 야광충은 문가로 다가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마작상(麻雀床) 을 바라보았다. 방안이 난장판인데도 용케도 상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그 위에 놓인 엉터리 마작패들도 그대로였다. 야광충은 발을 들어 상을 걷어차 부식 버렸다. "삼색동순(三色同順)인데 패를 더 끌어 모으고 있나?" 야광충은 내뱉둣 말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그의 앞에서 철문이 열렸다. 지상에 있는 주점으로 올라갔지만 그가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러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지하에서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혈부용이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원인 모를 쓰라림이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야광충은 걸음을 빨리해서 밖으로 나왔다. 환락굴의 밖은 한밤중이었다. 오월의 그믐달이 나지막한 바위집들 사이로 흐리게 빛나고 있 었다. 그 그믐달 아래를 야광충은 걸었다. 등뒤로는 높게 치솟은 바위 절벽, 앞에는 성벽이 높이 둘러쳐 져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협곡을 걷는 둣했다. 이곳 야무방에 있는 작은 주점들 안으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 오고, 나무문 사이로는 숨이 넘어갈 둣한 여인의 교성과 웃음소 리들이 퍼지고 있었다. 어둡고 음침한, 퇴폐적인 냄새가 가득 흐르는 거리를 걸으며 찾아봤지만 혈부용은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은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되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대화다운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은 느낌이었는데……, 그녀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는 문득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겨울이 끝나고 몽고의 짧은 봄이 지나가고 있는 와중에 그는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흔란스러웠다. 오늘 그가 뭘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들었는가? 지금 그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이 생겼다. 분명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한두 달 이내에 그가 몸담고 있는 지옥성은 대폭풍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막대한 유혈을 동반한 태풍일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휩쓸리기보다는 태풍의 중심에 서서 주도권을 잡는 것이 피를 덜 홀리는 길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하던 과정이었는데……, 혈부용은 의외 의 복병이었다. 그녀조차도 익도된 것이라면 적은 정말 강한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약점을 파악하고 힘으로 그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예정된 파멸의 길을 걷고 있음이 분명한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혈부용을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텅 비어 버리 는 머리를 그 스스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때 그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야무방을 막 벗어나는 거리의 끝이었다. 그녀는 얼핏 보기에 몽고족으로 보이는 한 청년의 팔목올 가 슴에 안다시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약간 어지 러워 보였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체중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일까? 그때 그녀도 그를 본 것 같았다. 그들은 그늘 속에서 잠깐 멈춰 서더니 팔짱을 풀고, 그러나 손은 아직도 놓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싱벽 그늘에 가려져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웃고 있는 것 갚았다. 야광충은 희미하긴 하지만 달빚 아래 서 있어서 완전히 드러 나 있었다. 귀기가 흐르는 창백한 얼굴은 무표정한 그대로였다. 혈부용과 몽고족 청년도 달라 아래에 드러났다. 야광충은 청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소매가 좁은 착수포, 목 옆으로 갈라진 옷깃은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는, 전통적인 몽고족의 복장이었다. "사촌 오빠야!" 혈부용이 청년을 가리켰다. 청년이 횐 이빨을 드러내고 워으며 이름을 말했다. "데게룬고이 토고쓰!" 데게룬고이 토고쓰는 개병공작(開屛孔雀), 즉 깃을 활짝 펼친 공작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에 부럽지 않을 만큼 화사한 용모를 지니고 있 었다. 야광충의 얼굴이 왠지 귀기를 띤 그늘진 인상이라면 그는 해 아래 활짝 핀 밝은 모습이랄까? 야광충은 그를 바라볼 뿐 인사도 않았다.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데게룬고이 토고쓰……! 제사 지옥인 호규지옥의 옥주가 아닌가! 이 젊은 사내가 육십이 넘는 여타 옥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 여 옥주를 맡고 있다는 것인가? 토고쓰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깐 집안 일로 말할 것이 있어서 데리고 나왔었소! 형장이 없어서 미리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용서하시길!" 나무랄 데 엎는 훌륭한 태도였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야광충은 그래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 할말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야광충의 심경이었 다. 토고쓰는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인사를 하고는 가 버렸다. 혈부용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야광충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그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여인네처럼 속좁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짜증이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그보다……. 토고쓰의 밝음 앞에 어쩐지 위축되는 둣한 느낌이 그를 더 화 나게 하고 있었다. "화났어?" 혈부용이 따라와 그의 팔을 잡았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후회했다. 화가 난 것이 불현둣 부러워진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를 감정에 솔직해지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 혈부용이 달라 아래에서 다시 배시시 웃었다.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홍조(紅潮)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어색함을 피하려는 둣 물었다. "몽고족이었나?" "몰랐어?" 혈부용은 의외라는 듯 되묻더니 다시 웃었다. 오늘 그녀는 유달리 자주 웃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토고쓰를 만났기 때문일까? 야광충은 불현둣 자신이 지금 혈부용을 의심하고, 어쩌면 토 고쓰를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는 극도로 불쾌해졌다. 그런 감정은 생각하는 그 자체로도 모욕이었다. 혈부용이 말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원래 카쿡투 키킥, 목부용(木芙蓉)이었어." 그녀가 토고쓰와 사촌지간인 것이 맞다면 당연히 몽고족일 것 이다. '혈'이라는 것은 칠살이면 누구나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일까? 그의 손에 죽은 셋이 그랬듯이? 그도 팔대관문을 다 통과하면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될 까? 야광충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이런저런 맥락없는 잡념 을 떠을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이미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를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군!" 그는 그런 말을 한 그 자신에게 놀라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뱉어 버린 말은 취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혈부용이 그의 팔을 놓고 그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야광충은 왠지 그녀의 눈을 마주보기가 싫었다. 사실은 어려 웠다. 혈부용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야광충은 그러길 바랬다. 자신이 더 이상 흐트러지기 전에……, 그녀로 인해서 더욱 중 요한 일들이 망쳐지기 전에……. 더 이상 그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 전에! 그녀와 혜어져야 했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혈부용의 눈 속에 희미한 빛이 지나갔다. 야광충은 문득 그것이 조롱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만족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런 말 다사는 하지 마!" 그리고 돌아서서 야무방의 어두운 거리 속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녀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럴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엇이 빠져 나간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그는 멍 하니 그 뒷모숩만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지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부서지는 바위집 위에 월몽영이 흘로 광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20장 … 6월 1일 아침 바위산. 몽고고원의 서쪽으로 굽이치며 내려온 알타이 산맥, 그 험준 한 바위산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차가운 바람이 흐르고, 바위산과 산이 겹쳐지고 부딪치며 만들어 낸 협곡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신음하고 있었다. 형사랑은 바위산에 올라 동녘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태양은 유난히도 붉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따스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경은 그가 선 산 봉의 공기가 차갑기 때문일까? 여름은 언제나처럼 시작되었지만 여기는 여전히 추웠다. 거기에는 저 멀리 산곡의 틈에 도사린 지옥성의 탓도 있을 거 라고 불현둣 그는 생각했다. 아니면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 온 떠돌이의 가슴은 항상 시리 기 때문인지도……! 그는 이미 사홀째 지옥성을 나와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야광충이 기르던 표범의 핏자국을 쫓고 있는 것이다. 표범이란 이렇게 생명력이 질긴 것일까? 그날 통로에 흘린 피만 해도 웬만한 사람 무게만큼은 될 것인 데도 벌써 사홀째 바위산을 타넘고 도망가고 있었다. 턱분에 그도 여기 바위산에 을라 찬바람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는 야광충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르던 표범이라고 정(情)이라도 들었다는 것인가? '그 얼음덩어리가?' 형사랑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야광충에게 정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필요'라거나 '의무'라는 단어는 몰라도……!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이지, 쫓아가 잡아오라 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전혀 쓸데없는 헛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험한 바위 산을 타넘는 고생스러움에 짜증까지 겹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범의 피도 그친 모양이었다. 하긴 사홀 내내 피를 흘렸다면 천하에 다시없이 질긴 생명이 라고 해도 살아 남을 수가 없을 것이다. 덕분에 그만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핏자국도 없고, 그저 야수의 행동을 추측해서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이러다가 사람 잘못 보고 덥치기라도 하면 그만 귀찮아지는 것이다. 형사랑은 만약의 경우 그런 일이 생기면 단지 귀찮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은 전혀 생 각지도 않고 있었다. 다행히 중원에 있을 때에는 그도 사냥을 여러 번 했었다. 덕분에 발자국을 쫓는 것도 처음 하는 일이 아니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맹수의 반격에 대비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자취를 놓치지도, 습격을 받지도 않았지만 추격은 점 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의 효에는 깎아지른 바위산만이 펼쳐져 있었다. 바위 위에 발자국이 남겠는가? 여태까지는 어찌어찌 쫓아왔지만, 아마도 오늘 내로 찾지 못 한다면 영영 포기해야 될 것이다. 짐승을 쫓을 때 가장 꺼리는 장소가 바로 바위산이니 말이다. 그는 다른 바위들 위로 솟아 있는 높은 바위 위로 뛰어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람의 방향도 생각해야 했고 짐승이 택했을 진로도 어느 정 도는 짐작을 해야 했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 형사랑의 눈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저 멀리 바위산과 산 사이로 난 좁은 길에 한 필의 기마(騎 馬)가 달려오고 있었다. 형사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기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어서 뚜렷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몽고의 철기병으로 보였다. 그는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철기병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보아 지옥성으로 가는 것 같았다. 아마 저 정도 속력이라면 반나절이 못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철기병이 지옥성엔 웬일로?' 그가 알기로는 몽고군이 그렇게 정식 복장을 하고 지옥성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문득 그의 눈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 몽고의 철기병이 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보니 그쪽에 있 는 바위산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본 것이다. "저놈!" 검은 표범이었다. 여태 그가 쫓고 있던 검은 표범이 바위산 중턱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그가 지나온 곳이었다. 그가 주격하는 길을 스쳐서 검은 표범이 지나갔다는 것인가? 아니면……? 형사랑은 의외의 사실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여태 그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 생각을 해보니 지옥성을 중심으 로 크게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멍청하게 표범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 형사랑은 분노챘다. "저 고양이 새끼를!" 그는 몸을 낮추고 검은 표범이 보인 바위산을 향해 달렸다. 요령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맹수야 눈보다는 코에 감각을 거의 의존하는 것이 지만 이렇게 시야가 트인 바위산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도 큰 작 용을 한다. 그는 음풍영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바위 그늘 아래로 숨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쫓아가기만 하면 야광충의 지시고 뭐고 잡 아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한참을 뛰던 그는 갑자기 검은 표범의 행동에 다른 의미가 있 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검은 표범이 그렇게 행동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표범의 머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흑시 검은 표범도 지윽성을, 아니 야광층을 멀리 떠나기가 싫 었던 것은 아닐까? 형사랑은 스스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 같아서 실소를 흘리 며 고개를 저었다. 검은 표범 따위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야광충에게서 인간다운 감정 따위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 럼……. * * * 지옥전. 지옥성에 손님이 왔다. 새벽의 야음(夜陰)을 뚫고 완전무장을 한 몽고의 철기병 하나 가 도착했던 것이다. 그는 별다른 절차도 없이 곧장 지옥전으로 안내되었다. 새벽갛이 쌍고르마가 나와 그를 접견했다. 오늘 온 철기병은 놀랍게도 벤야시리 휘하의 장군 중 하나였 던 것이다. 몽고군의 연락방법에는 가혹한 면이 있었다. 칸이 소집명령을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든 바로 출발해야 했 고, 중간에 쉬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말이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해서라도 최단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명예이기도 했다. 오늘 지옥성에 도착한 그도 그런 식이었다. 지옥성의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말이 쓰러져 죽은 것과, 쌀쌀 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에 절어 곤죽이 되다시피 한 철기병의 모습에서 그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쌍고르마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가 내민 봉서(封書)를 받 아 쥐었다. 철기병은 무릎을 굽혀 절을 하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이제 바로 말을 얻어 타고 그는 다시 벤야시리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쌍고르마는 봉서를 들고 방을 나갔다. 그가 뜯어 볼 물건이 아니었다. 아루타이에게서 성주에게로 바로 전해지는 전갈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하는 일은 그로서도 잘 모를 때가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그게 신상에 좋을 것도 같다고 생각하는 쌍고르마였다. 성주에게 전해 주면 그것으로 그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그 뒤는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성주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요 근래 성주는 천기전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 * * 야무방 환락굴. "그래, 알았으니 나가 봐라!" 늙은 창녀를 내보내고 나서 현현소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 겼다. 몸이 무거워 돌아다니기 어려운 그녀 대신 창녀들을 감독하는 늙은 창녀, 사실은 그녀의 기명제자(記名弟子)중 하나이기도 한 그녀가 가져온 정보에는 깊이 생각할 점이 있었다. --꽃방에 몽고손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꽃방, 매음굴에 몽고손님이 하나도 없다……? '이 새벽에?' 새벽에 새로 들어오는 손님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밤을 지새 우고 창녀의 품에 엎어져 자는 손님마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보 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몽고족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족은 있다는 것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었는데 오늘 갑자기 몽고족만 착실해진 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그녀는 갑자기 눈을 뜨고, 굵은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머리 위로 늘어져 있는 신호줄을 당겼다. 방곰 나갔던 늙은 창녀가 다시 들어왔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들어온 손님들의 수를 알아 와라!" 허리를 굽혀 절하고 나가려는 그녀를 현현소녀는 다시 불렀다. "몽고족과 한족을 분류하고, 평소의 손님 수와도 비교해 서……!" 현현소녀의 무거운 눈두덩 사이로 샛별 같은 빛이 흘렀다. 비대한 몸집과는 걸맞지 않게 지금 그녀의 두뇌는 맹렬한 속 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이십여 년 만에 가장 많이 움직이게 될지도……!' * * * 지옥연무장 제이 관문. 그는 천천히 웃을 차려 입고 있었다. 이제 휴식은 끝났다. 오늘부터는 다시 관문돌파를 해야 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무공에도 약간의 진전은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공이 진전된 것은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공력이 늘면 늘수록 이상해져 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여기서도 다시 체질이 문제였다. 내공의 진보에 비약(飛躍)이라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 다. 매일같이 꾸준히 연마한 성과가 조금씩조금씩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쌓이면 비로소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전에 이미 그 단계에 육라했던 것이 최후의 한 톨 덕분에 수 면에 드러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비약적으로 내공이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그도 오르는 어머니가 먹었으리라는 영과(靈果) 때문일까? 혹시 그가 익힌 현음진기가 마공(魔功)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공 부분에서는 별다른 진보가 없었다. 그저 내공이 올라갔으니 예전보다는 좀더 오래 달릴 수는 있 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경공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에 의존하는 무공인 것 같았다. 그가 처음 경공을 배웠을 때 가장 진보가 빨랐었다. 그때는 그게 재미있어서 쉬지 않고 연마를 했었다. 그 후에는……,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화영과 여문량의 뒤를 쫓던 그 대막의 날들에 그의 경공은 비 약직인 진보를 보았었다. 공기의 흐름을 이용해 내공의 소모를 최소화하며 장거리를 달 릴 수 있는 잔백유영(殘魄遊泳).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면서 신형을 흐리는 유령미종(幽靈迷踪). 손바닥만한 틈만 있으면 연기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마형귀적 (魔形鬼跡). 내공의 소모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낼 수 있는 최극(最 極)의 속도를 내는 탄섬비영(彈閃飛影). 그리고 귀영종 최후, 지고(至高)의 단계인 미시출오종(未始出 五宗). 귀영종의 오대비기 중 적어도 네 가지는 완벽하게 익혔고, 마 지막 단계인 미시출오종의 비결에도 발은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귀영종에는 속하지 않지만 십 보 이내에서는 어디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이매십보( 十步)도 싸 움에는 더할 수 없는 유용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최고의 소득은 역시 조화십삼수와 양인 장, 그리고 전륜나의 진보에 있었다. 아직은 조화십삼수를 제외하고는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하지도 못했고, 언젠가 생각한 그 세 가지의 결합은 시도하지도 못했지 만 어렴풋이 길은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설프게나마 조화십삼수에 양인장을 결합해 쓸 수도 있었고, 전륜나를 시도할 때 조화십삼수의 방식으로 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무공은 비약적인 진보를 보았던 것이다. 야광충은 손을 들어 가볍게 옷자락을 쓸었다. 검은 가죽옷이 묵린수에 닿는 감촉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형인 주개가 어제 가져다 준 새옷이었다. '사형……!' 그가 여기 들어온 이후 사형은 내내 그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고 했다. 그것도 천성일 것이다. 그런 감정을 야광충은 잘 표현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런 감정 자체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아주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야광충은 침상을 돌아보았다. 흐트러진 이불 밖으로 돌아누운 여인의 벗은 뒷등, 검은 머리 카락이 보였다. 혈부용이었다. 벌써 몇 일째, 그녀는 밤이 되면 그의 숙소를 찾아왔었다. 환락굴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지만 그녀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그와 반대였다. 그의 경우에는 남의 눈을 극도로 의식했다. 남이 이렇게 본다, 아니다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 에 띄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녀의 방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일 밤 기다리곤 했었다. 여체에 탐닉하는 젊은 성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혈부용을 사랑하고 있었다. 전에는 몰랐었다. 그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고, 그녀를 만난 뒤에는 거의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 들곤 했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간단한 행동, 생각없이 내뱉는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 을 예리하게 후비고, 깊은 우울감에 젖어 들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와 너무나 다르지만,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다. 냉정하게 보면 그가 싫어하는 면이 수도 없이 그녀에게서 발 견되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애초에 그녀를 대하고 냉정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 문이었다. 야광충은 침상으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혈부용은 편안히 자고 있었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감미롭게 들렸다. 이불 위로 하얀 젖가슴이 내비쳐 보였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그는 방을 나갔다. 이제 삼관문을 돌파할 때였다. 천장이 움직였다. 그것은 야광충이 나가고, 혈부용이 감았던 눈을 뜰 때와 동시 였다. 혈부용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기 흉칙한 붉은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언젠가 쌍고르마의 방에서 야광충을 주적하겠다고 말했던 그, 지옥칠살의 일인자인 혈괸복(血 )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야광충을 끈질기게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야광충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입을 벌려 말했다. 쇠를 긁는 둣한 기괴한 음향이 그의 입에서 울려 나왔다. "성주님이 너를 부른다!" 혈부용은 마치 전혀 잠을 자지 않았던 것처럼 또렷한 눈망울 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려 와!" 명령이 아니라 호소하는 둣한 감미로운 목소리! 천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나직한, 그리고 기괴한 목소리가 방안에 깔렸다. "어젯밤 그와 그렇게 즐기고도 아직 만족을 않는단 말이냐? 못된 계집애!" 혈부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한쪽 다리를 들어 이불을 걷어 버렸을 뿐이었다. 혈편복의 눈앞에 풍만한 여체가 가득 펼쳐졌다. 그는 침묵했다. 혈부용이 다시 손끝을 혼들었다. 내려오라는 시늉이었다. 천장이 피로 물든 듯 붉어졌다. 그 붉은라이 천천히 안개처럼 방안에 깔렸다. 붉은 사람의 형체가 혈부용을 안았다. 혈부용은 예민한 수초처럼 몸을 움츠렸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손길인 둣 그녀는 금새 달아오르고 있었다. 천장의 기괴한 얼굴이 바로 아래에 엉킨 두 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천기전. 로부 옹고트는 봉서를 받아 내용물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 고는 그 서한(書翰)을 쌍고르마에게 건네주었다. 서한은 초청장(招請帳)이었다. 삼십 년 만의 쿠릴타이 소집이었다. '쿠릴타이'는 이른바 대족장 회의! 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원제국의 성립 이후에도 황제의 계승은 이 쿠릴타이를 거쳐야 했던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다. 징기스란 이후로 쿠릴타이에서 피가 흐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전대의 칸이 치세(治世)하는 동안 누적되었던 불만과, 음지 (陰地)에서 자라고 키워 온 권력욕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 리는 날인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쿠릴타이는 다를 것이다. 징기스란 이후 가장 강력했던 존재인 사마르란드의 티무르는 이미 오 년 전에 사망했다. 어이없게도 기침을 하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하는데, 그의 일생에서 가장 야심찬 행동, 즉 중국원정 길을 가던 중이었다. 그 후사(後事)는 그의 손자인 필 무하마드가 이었지만 이미 사마르칸드는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벤야시리 이전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티무르는 숱하게 많았 던 강자들을 모조리 꺾어 놓고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벤야시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들을 미리 제거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제 벤야시리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오이라트 부의 무하마드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는 되지 않았다. 형식상 그에게도 초청장은 보냈지만 그가 올 리가 없었다. 그에게 타타르는 사지(死地)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지금 로부 옹고트가 고민하는 것은 그 초청장이 가진 또 하나 의 의미, 이면의 의미 때문이었다. 아루타이는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자신은 이미 준비가 되었음 을 알린 것이다. 사부인 그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루타이는 귀찮은 존재들인 한족을 제거하고 본격적으로 중 원정복올 준비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족들을 제거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미 몽고족 옥주들에게는 세부적인 지시가 하달되었다. 언제라도 그의 명령 한마디면 칼을 빼어 들 수 있도록 연 사 홀째 준비를 시켜 놓은 것이다. 문제는 야광충이었다. 그가 아루타이와 함께 이 지옥성을 만들면서 계획한 세 가지 일 중 두 가지는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나머지 하나! 그 하나의 완싱에 야광충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천기칠사 중 마지막 하나, 불사옥령체(不死玉靈體)의 완성을 위해 없어서는 안 둬 존재가 야광충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억지로로는 절대 안 되었다. 그는 여태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야광충을 다루어 왔던 것이다. 야광충의 주변에 일어난 일 중에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 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길이 닿는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몇 배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었다. 그것이 더 어려웠다. 솔직히 야광충이 엽장청을 만난 것, 고란고성에서 여문량을 만난 것, 그리고 몇몇 사람들을 만나고, 그가 예정했던 이상의 인물로 자란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 예상 외의 존재로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의 계획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의 존재감은 없었다. 이 마지막 단계를 거치면, 지금 그가 계획하 는 대로 진행해 간다면 그는 결국 불사옥령체를 위한 마지막 계단이 둬 수 있올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고개를 돌려 쌍고르마를 보았다. 두꺼운 천으로 가려진 복면 너머로 예리한 안광이 쏘아져 나 오고 있었다. 그가 짧게 명령했다. "시작한다!" * * * 지옥연무장 제삼 관문. 야광충은 제삼 관문에 와 있었다. 제삼 관문은 중합지옥(重合地獄), 경신술(輕身術)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광충은 단지 아침에 찾아와 옥주를 찾았을 뿐이었다. 옥주는 '히야 우루순', 몽고족이었다. 히야 우루순은 몽고어로 '쏘아진 화살'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깡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오십대의 사내였다. 원래 무뚝뚝한 성미인지, 아침부터 깨워서 귀찮으니 어쩌니 하는 말도 없이 그저 탐탁치 않은 기색으로 규칙을 설명했을 뿐 이었다. "먼저 잡는 사람이 이긴다!" 규칙은 그의 말처럼 간단했다. 방원 오 장여 정도의 연무장 안에서 서로를 쫓아가서 먼저 잡 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자신은 잡히지 않으면서 상대를 잡아야 했다. "싱겁군!" 히야 우루순은 날카로운 눈매를 찌푸리고 야광충을 보았다. "뭐라고?" 야광충은 히야 우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싱겁다고!" 야광충이 예충의 제자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예충이 다른 것은 몰라도 경공의 달인이라는 것 또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유리할 수도 있는 경공으로 승부를 가린 다는 것은 싱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 통과라고 하는 게 어떨까?" 야광충은 오늘 조금 심하게 말하고 있었다. 히야 우루순의 태도에는 뭔가 수상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충 통과시키려고 하는 둣한 태도가 보였다. 그것도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의 애초 의도와는 빗 나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여기에서 가능한한 큰 소란을 일으켜야 했다. 싱겁게 통과하고 나면 그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다. 히야 우루순의 깡마른 얼굴이 파랗게 물들어 갔다. 야광충의 말에 자극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개의 경우에 깡마른 사람이 성질이 급하다. 체질적으로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성미가 그렇게 드러나는 것 이다. 히야 우루순도 그런 체질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몽고족 자체가 포악하고 신경질적인 특성이 있었으니 말이 더 필요없었다. 히야 우루순은 비도(飛刀)가 장기였던 모양이었다. 가슴의 옷자락을 풀어헤치자 비도가 줄줄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중 두 개를 뽑았다. "건방진 애송이 녀석! 경신술은 네 스승만 잘하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그는 두 자루의 비도 중 하나를 야광충의 발치에 던졌다. "규칙을 바꾼다. 먼저 찌르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야광충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비도를 집어 들었다. 히야 우루순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이 채 못 되어서였다. 제21장 … 그날 낮 바위산. 형사랑은 바위 그늘 속에 응크리고 있었다. 세상일이 대개 그렇지만 완성이 가까워질 때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것이다. 짐승을 추적할 때도 그랬다. 짐숭을 구석에 몰아넣고, 포획하기 직전에 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은 이전까지보다 몇 배나 중요하다. 특히 맹수의 경우는 반격의 위험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때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 지금이 그랬다. 형사랑은 검은 표범을 완전히 구석에 몰아넣었다는 것을 느끼 고 있었다. 반나절이나 걸려 간신히 쫓아온 바위산에 검은 표범은 그때까 지 있었다. 누구에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더 쫓아갈 필요는 없어졌으니 일단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형사랑은 산을 몇 개나 넘어갈 시간을 투자해서 몇 개의 바위 를 넘어갔다. 검은 표범에게 포착되지 않고 최대한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야수고, 그것도 상처입은 야수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으러 갔다가 잡히는 수가 있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을 재야 했고 시야를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생포할 수 있을까는 그 뒤의 문제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막연한 일이었다. 그가 야광충의 명령으로 쫓아왔는지를 표범이 어떻게 안단 말 인가? 또 그는 어쩨게 그걸 설명할 수 잇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여 버리는 것이 빠를 거라고 그는 내심 결정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칼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바위가 있었다. 그는 두 손닥을 바위의 벽면에 붙이고 조금씩 기어올라갔다. 조금의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딴게 하는 조심스러운 움직 임이었다. 형사랑은 그렇게 바위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가서 그 너머로 머 리를 내밀었다. 있었다! 그 바위 바로 아래에 검은 표범이 웅크리고 있었다. 일 장 반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표범이었다. 말만 들었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형사랑이었다. 표범은 잔뜩 몸을 구부려 옆구리에 난 상처를 핥고 있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고 큰 상처였다. 도대체 저런 상처를 입고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신 기할 정도였다. 상처는 이미 화농(化膿)이 되어서 처참한 지경이었다. 어떻게 피는 그쳤지만, 그렇게 화농이 된 상처는 아마 표범에 게 더 심한 제약을 주고 있을 것이다. 형사랑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호의 싸움판에서도 상처가 난 뒤에 바로 치료하지 않아 저 렇게 화농이 되면 낫기도 힘들고, 운이 좋아 나아도 그 후유증 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형사랑은 자신감이 생겼다. 저런 지경이라면 잡아죽이는 것이 훨씬 쉬워진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심장을 찌르는 데 긴 칼은 필요없는 법이었다. 표범이 튀듯이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청광이 쏘아져 나왔다. 형사랑은 단검을 뒤로 감추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네 주인이 보내서 왔다. 알아듣겠냐?" 알아듣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돌아가서 할 만큼 했다고 말할 근거는 있어야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표범이 그의 말을 알아듣는 둣했다. 두 눈에서 청광이 사라지며 바위 위에 다시 주저앉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경계심을 풀지는 않은 둣했다. 표범의 두 눈은 여전히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형사랑이 오히려 당황했다. 이 표범은 지금 그의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형식상 해본 말에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네 주인이 보내서 왔다는 것을 믿는 거냐?" 묻고도 스스로 바보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형사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은 의심하지 않는데 사람이 믿지를 않는군. 이런 경우를 두고 사람보다 짐승이 낫다는 것인가?" 형사랑은 소스라치게 놀라 말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표범과 그로부터 삼 장여 떨어진 높은 바위 위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이나 나타나도록 눈치를 못 챈 것이다. 검은 표범이 청광을 발하며 뛰어 일어나다가 멈칫하더니 그들 에게 달려들었다. 한걸음에 삼 장이나 가로지르는 놀라운 도약력, 신속한 반응 이었다. 형사랑은 순간적으로 둥골이 서늘했다. 상처를 입어 죽어 가는 줄 알았는데 저런 반웅을 보이다니 섣 불리 죽이려 했다간 그가 당할 지경 아니었는가! 그들도 저런 공격에는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태는 형사랑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 행되었다. 표범은 그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반가워서 쫓아간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 검은 읏에 붉은 용을 가슴에 새긴 자가 검은 표범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날 알아본단 말이지? 과연 사람보다 낫군!" 그는 고개를 돌려 형사랑을 바라보았다. 형사랑은 움찔했다. 나이도 많이 들어보이지 않는 청년인데 보는 순간 기가 죽을 정도로 위엄이 흐르는 안광을 쏘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청년, 혈문룡이 물었다. "아묘는 나와도 잘 아는 사이지! 그런데……, 설마 이 상처를 네가 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청년, 화영이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가 야광충이 보내서 온 사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형사랑은 그제서야 그들이 검은 표범을 아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야광층을 아는 자들이라는 것도……! * * * 지옥연무장. 야광충은 지옥연무장의 지하통로를 미끄러지둣 지나가고 있었다. 정식 통로가 아니라 봉쇄해 버린 구(舊)통로였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와 본 것인지 망설이지 않고 통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약간의 소란을 감수하며 히야 우루순을 죽였던 것이다. 지옥성 전체의 눈을 한곳에 몰아 놓을 계기가 필요했다. 그것 이 히야 우루순의 죽음이었다. 그의 뇌리 속으로 그날, 야무방 지하에서 사부가 한 말이 떠 올랐다. --지옥이 몇 개인지 아느냐? 야유신 예충은 그렇게 의외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말을 시작했었다. --여기 지옥성에는 여덟 개의 지옥이 있다는 것은 너도 알거 니와, 원래 둥활지옥에서 무간지옥까지의 팔대지옥은 불문에서 흔히 팔열지옥(八熱地獄)이라고 부르는 곳이고, 이와 별도로 다 시 여덟 개의 지옥이 있는 바, 그것을 팔한지옥(八寒地獄)이라 고 부른다. <구사론(俱舍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이렇게 열여섯 개의 지옥을 헤아리고 있다. 또, <십팔지옥경>에서는 이것과 별도로 열여덟 개의 지옥을 헤아리고 있고 또 다른 책에서는 전체로 백스물여덟 개나 되는 지옥이 있다고도 하니 고정된 숫자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지. 문제는 여기 지옥성에 있는 지옥의 숫자다. 그때 예충은 침중한 낮빛으로 경악할 만한 이야기를 내뱉었었다. --우리 팔대지옥말고 여덟 개의 지옥, 즉 팔한지옥이 지옥성 내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컨대 표면적으로 나타난 팔대지옥말고 암중에 여덟 개의 지 옥이 더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전원 벤야시리 군에서 뽑혀진 정병들로, 즉 몽 고족으로만 이루어진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과거 지옥연무장을 통과했던 수련자들의 행방을 짐 작할 수 있었다. 방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었다. 만약 팔한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소위 팔열지옥의 옥주들인, 그것도 한족으로 옥주가 된 그들 네 명은 무엇인가? 소위 지옥성의 수뇌부라고 할 그들조차 모르는 이면(裏面)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 것인가? --우리 한족의 네 옥주들은 사실상 지옥연무장 때문에 존재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충을 비롯한 한족인 옥주들은 결국 지옥연무장에서 몽고족 들을 가르치고 쓸만한 무사로 만드는 데에만 소용이 되었던 것 이다. 그 결과가 팔한지옥의 성립으로 나타난 것인데……. 만약 팔한지옥이 팔열지옥만큼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어 떻게 되는 것일까? 더 이상 지옥연무장이 필요없게 된 것은 아닐까? 아직은 확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충의 추측으로는 벤야시리 군이 케레이트 족을 전멸 시켰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케레이트 족의 멸족으로 목하 몽고는, 적어도 타타르는 벤야 시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가 열성적인 몽고파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그보다 그의 부장인 아루타이가 그렇다는 것도 널리 알려 져 있다. 그들이 한족을 쯩오하기까지 한다는 소문이고 보면 자신들의 영향하에서 한족들이 돌아다니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 지옥성의 한족들은 필요가 있을 동안만 안전할 수 있었 다. 그러나 내일이라도 당장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다면……? --그것은 한족익 숙청을 불러올 것이다. 예충의 결론이었다. 그파다면 야광충이 할 일은? 팔한지옥의 확인이었다. 그들이 실제 지옥성 내에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의 세력인 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예충의 추측으로는 팔한지옥은 지옥연무장 내에, 적어도 그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야광충 역시 억기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주측했던 것처럼 지옥연무장의 팔대관문이 방사형으로 지하에 분포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 아래 수직으로 팔열지옥이 차례로 위치해 있다면……? 그럴 경우, 팔열지옥은 팔한지옥의 손에 목줄기를 잡힌 셈이 된다. 만약 그들, 팔한지옥이 팔열지옥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샛길을 봉쇄하고 무간지옥으로부터 둥활지옥까지 차례로 거치는 주 통 로만을 남겨 놓는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차례차례 굴 밖으로 고 개를 내미는 토끼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 이후, 야광충은 꾸준히 이 지하통로를 조사해 왔었다. 만약 팔한지옥이 있다면 이 지하통로의 어딘가에 길이 있을 것이다. 주 통로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샛길이 반드시 통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고성의 지하에 있는 거미줄 같은 통로를 그들이 완전히 제어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갖는 확신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팔대지옥의 지하에서 이미 경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주 통로도 샛길도 아닌 곳으로 누구의 눈에 도 띄지 않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야광충은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통로의 구석구석을 뒤지던 그가 공기의 움직임을 감지 함으로써 가능했다. 공기가 움직이고 있다! 어딘가 사람이 살기에 좀더 유리한 공간이 가까이 있다는 의 미였다. 지하통로의 정체된 공기는 때로는 곤충도 살기 힘들 정도의 독성을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곳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백이면 백, 이유도 모르고 죽어 넘어가기 마련이다. 사람이 거주하려면 공기의 순환이 반드시 필요했다. 팔대지옥에 주 통로말고도 직접 외부로 통하는 통로들이 여럿 있는 것도 그 이유였다. 사람이 다니기에 편한 것도 펀한 것이지만, 공기의 순환이라 는 문제도 있었다. 야광충은 그가 공기의 흐름을 감지챘던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 고, 세월이 홀러 무너져 내린 돌들이 쌓여 있는 틈에서 좁은 통 로를 발견했었다. 오늘 그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다. 밤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낮보다 오히려 위험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틈을 포착하는 것이 그가 사부에게 배운 요령이었다. 예충이 여양왕부에서 묵궁을 훔쳐 나올 때처럼 야광충은 낮을 선택했다. 그러나 단순히 낮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뭔가 사람들의 이목을 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를 죽였다. 그는 뒷일에 대해서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다. 팔관돌파가 통과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면 시험자의 목숨도 거는 것이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능력이 있다면 그를 죽이면 될 것이었다. 야광충은 저만치에 그가 찾은 통로가 있는 것을 보고 멈추었다. 어린아이가 겨우 기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통로였다. '사람도 못 다닐 통로가 왜 필요했던 것인가?' 야광충은 통로의 용도가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한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찾고 있을 것이다. 여기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 하지 않겠지만 너무 오래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다음 순간, 그는 연기처럽 회미해지더니 통로 속으로 스며들 어갔다. 마형귀적이 다시 발휘된 것이다. * * * 지옥연무장 제삼 관문. 쌍고르마는 어이가 없다는 라으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시점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그의 등뒤에 서 있던 몽고족 하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에 우선해서 그를 잡아죽여야 합니다! 제육 관문의 관주이자 염열지옥(炎熱地獄)의 옥주인 '멧돼지' 가하이릭이었다. 지금 쌍고르마의 옆에는 그말고도 제사 관문의 관주인 '개병 공작 데게룬고이 토고쓰와 제칠 관문의 관주인 '삵쾡이' 말하 르가 시립해 있었다. 몽고족 옥주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다. 쌍고르마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꽉 짜여진 계획에 갑자기 뛰어든 사태를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약간의 변동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르겠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그는 낯라을 엄숙하게 했다. "성주님에게서 이미 명령이 떨어졌었다. 한족의 척살이다!" 일순 윽주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쌍고르마는 미리 생각해 눙은 것처럼 거침없이 명령했다. 그는 '멧돼지' 가하이릭을 지적했다. "네가 일단 중합지옥의 지휘까지 맡아라! 그리고……." 그의 눈이 '삵쾡이' 말하르를 향했다. "너는 호규지옥까지 같이 지휘한다!" '삵쾡이' 말하르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호규지옥에는 토고쓰가 있지 않습니까?" "토고쓰는 야광충을 맡는다!" 데게룬고이 토고쓰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쌍고르마가 그런 그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숨길 필요는 없겠지……, 혈편복, 네가 지옥칠살 의 나머지를 데리고 그와 옥주들을 처치해라!" '멧돼지' 가하이릭과 '삵쾡이' 말하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혈편복? 그럼 토고쓰가……?" 데게룬고이 토고쓰가 바로 비밀에 가려진 지옥칠살의 우두머 리였다는 것인가? 쌍고르마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선 사람을 풀어 야광충을 찾아라! 그에게 제사 관문을 바 로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족 옥주들을 거기로 소집해라! 히야 우루순의 죽음을 알리고, 성주가 참관한다고 하면 아무 의 심 없이 참석할 것이다. 그때 토고쓰와 칠살은 그들을 척살한 다! 나머지 둘은 사개지옥의 몽고족들을 모두 모아 한족들을 보 이는 대로 제거하라!" 토고쓰가 반문했다. "우리 칠살의 힘으로 그들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이 가능하겠 습니까?" 쌍고르마가 의외라는 릿으로 그를 보았다. "걱정할 만한 대상이 있었던가?" "야광충." "그가?" "제가 알기로는 그는 저보다 아래가 아닙니다." 쌍고르마는 그의 말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칠살이라지만, 혈편복은 다른 칠살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미 죽은 혈지주, 혈당랑, 혈오공 따위는 셋이 같이 덤벼도 당하지 못할 고수인 것이다. 사실은 그 자신도 혈편복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 는 처지였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자신의 수하지만 사실은 성주의 직속부 하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금은옥(金銀玉)의 삼검령(三劍令)을 투입시키지!" 토고쓰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되지요." * * * 환락굴. "그게 무슨 뜻이지요?" 월몽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사부인 현현소녀를 바라 보았다. 현현소녀는 근래 보기 드물게도 일어나 앉아 있었다. 늙은 창녀 둘이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고 있었다. 사람 대여섯은 집어 넣을 수 있을 듯한 거대한 포대 같은 옷 이었다. 역시 평소와 달리 급한 어조로 현현소녀는 월몽영을 채근했다. "네가 들은 대로다. 몽고족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지. 아마도 한족의 숙청일 것이야. 어서 네 아버지에게 가서 알 리란 말이다." 월몽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몸을 날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둔해 보이지만 그녀의 사부가 지옥성의 누구보다도 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몽고족 옥졸들이 매음굴에 요 며칠 간 오지 않았 다는 것만으로 추측한 것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녀의 분석이 사 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달려가면서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바위처럼 무겁게, 그러나 움직일 때는 폭풍 노도(暴風怒濤)처럼 휘몰아치는 것이 승리의 길인 것이다. 삼십육계에 나오는 가치부전지계(假痴不癲之計)가 그런 것이 었다. --바보가 된 척하면서 상대가 방심하기를 노린 다음 일거에 때려부순다. 몽고족이 움직이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움직인 이상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쳐 올 것이라는 점 은 병법에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로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 었다. "사부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 빨라……." 그녀도 수심결의 요원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상당한 수뇌부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런만큼 그녀도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기로는 수심결은 적오도 한 달의 시간을 예 상하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빨리 몽고족의 공격이 시작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수심결은, 그리고 한족들은 자칫 잘못하면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괴멸될지도 몰랐다. 저만치에 지하로 들어가는, 팔대지옥으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그 통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붉은 옷에 붉은 복면을 쓴 자들. 그녀는 그들이 바로 수심결에서 우려하던 자들이라는 것을 순 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직감이었지만 그녀는 확 신할 수 있었다. 생각은 뒤에 할 일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먼저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허리에 감은 채찍을 풀어 쥐며 몸을 날렸다.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통로가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 * * 바위산. 혈문룡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나 본데?" 형사랑이 그의 곁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옥성을 내려다보 았다. 그들은 지금 지옥성을 아래로 굽어보는 바위산 위에 엎드려 있었다. "정말이군요. 뭔가 이상한데요." 그가 처음 보는 복장의 사람들이었다. 지옥성에서는 여자들말고는 붉은 옷을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먼 빛으로나마 머리까지 붉은 것을 보면 더욱 그랬다.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저들은 아마도 붉은색 복면을 착용한 것일 게다. "저 적의(赤衣) 복면인들이 모이는 곳이 어디냐?" 형사랑은 방금 말한 사랍을 돌아보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었다. 그가 대막에 전설을 만들었던 원도살 십일랑인 줄 형사랑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형사랑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원도살이 손을 뻗어 복면인들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면 그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일정한 몇 개의 장소에 모여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 거기가 어딘지 짐작이 가지 않느냐?"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바위집들에 가려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복면인들은 분 명히 몇 군데에 떼로 몰려 있었다. "저기가……!" 형사랑은 그곳이 어딘지 깨닫고 숨이 막힐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인데요!" "입구?" 원도살이 반문했다. 형사랑은 고개만 끄덕였다. 생전 처음 본 자들이 왜 입구쪽으로 몰려들어 있는 것인가? '설마 적이 침입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원도살이 급히 말했다. "지하에 뭐가 있나?" 형사랑이 잠깐 머뭇거렸다. "너는 네가 사는 곳이 어떤 구조인지도 모르냐?" 혈문룡이 그를 닦달했다. 형사랑은 급히 대답했다. "팔대지옥입니다." "팔대지옥……?" "지옥성은……." 형사랑은 지옥성의 구조와 체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천기전. 야광충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여태 이렇게 놀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머리털 난 이후 무엇인가를 두려워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충분히 놀랐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지 만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었다. 천강시! 고란고성에서 그와 화영, 황룡까지 셋이 힘을 합쳐서야 겨우 죽일 수 있었던 그 괴물이 여기 지하대전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구가 아니라 여덟 구씩이나! 게다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관 속에 누워 있는 다른 세 괴물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회색의 머리카락에 회색의 피부를 한 깡마른 사내 하나! 그와는 반대로 비대한 몸집에 푸르뎅뎅한 피부, 붉은 머리카 락의 사내가 또 하나! 마지막은 먹[墨]처럼 시커먼 여인이었다. 어느것 하나도 범상해 보이는 인간이 없었다. 인간? 아니 인간이라 보기가 어려웠다. 그것들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가공할 정도의 사기(邪氣)가 그 주변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 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더구나……! 야광충은 비대한 몸집의 괴인을 보며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 괴물에게서는 나쁜 냄새가 났다. 뭔가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극도로 혐오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돌!' 고란고성에서 가져온 그 돌에서 느껴지던 협오감, 이유도 없 이 싫기만 하던 그 느낌이 이 비대한 괴물에게서 극도로 증폭되 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여기 이 괴물을 만드는 데 썼나……?' 아마도 그런 모양이었다. 어딘지 이 괴물과 그 돌 사이에는 동질성(同質性)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었던 그 라나는 돌은 여기 사용되었던 모양이 었다. 역시 용도를 알 수 없는 이 괴물을 만드는 데에……! 야광층은 추한 것을 더는 보기 싫다는 둣한 태도로 고개를 돌 려 대전 안을 훑어보았다. 한쪽에 놓여져 있는 물건들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두 개의 관! 하나는 타는 둣한 붉은색, 다른 하나는 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지는 깊은 푸른색이엇다. 야광충은 그것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불쾌했다. 좁고 긴 통로를 거쳐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그는 불쾌감에 시 달려야 했다. 이 장소에는 뭔가 그의 기분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었다. 그것을 그는 대전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괴물들이 이 안에 있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원인은 지금 그가 다가가고 있는 두 개의 관 에 있는 것 같았다. 다가가면 갈수록 가슴속에서 불쾌감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 는 것이다. 이대로 돌아서서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 짓이었고, 야광충답지 않은 짓이었다. 보지도 않고 건부터 낼 수는 없었다. 들어온 이상, 그것이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 했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관을 향해 다가갔다. 어딘지 힘겨워 보이는 걸음이었다. 붉은 관은 보기에도 그랬지만 실제로도 뜨거웠다. 반대로 푸른 관에서는 뼈가 지릴 둣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서로 극성의 두 성질을 지닌 관 두 개가 왜 여기 나란히 있는 것일까? 야광충은 관을 열기 전에 먼저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식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뜨겁고 찬 두 개의 관이 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른바 온옥(溫玉)과 한옥(寒玉)이었다. 온옥과 한옥이 드물기는 하지만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큰 온옥과 한옥, 한 쌍을 구하려면 엄청난 노 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윽이라니 말이다. 그런 옥관(玉棺)이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가? 관의 뚜껑은 그냥 위로 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난 홈에 밀 어 넣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야광충은 잠시 망설였다. 왠지 열기가 두려웠다. 보면 안 되는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감정 때문에 지금 망설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힘껏 힘을 주어 푸른색 관의 뚜껑을 밀어 열었다. 관에서 차가운 한기가 올라와 하얀 김을 만들었다. 야광충은 어느새 뒤로 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무엇인가 암습이 있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다. 하얀 김은 곧 사라졌다. 야광충은 천천히 관으로 다가갔다. 관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기만이 가득 찬 빈 관이었다. 야광충은 왠지 모르게 안도가 되는 것을 느끼며 이번에는 붉 은 관의 뚜껑을 밀었다. 거기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거기도 역시 비어 있었다. 야광충은 하마터면 실소를 홀릴 뻔했다. 비어 있는 관 두 개에 그가 그토록 공포를 느꼈단 말인가? 그는 허탈한 간정을 느끼며 두 개의 관뚜껑을 다시 닫았다. '이 방은 도대체 뭘까?' 그는 다시 방 한쪽에 있는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저런 종류의 괴물들을 만들어 내는 곳? 그럼 이 두 개의 관 은?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 곳인가? 무엇을 만들기 위 한 준비? 아니면 이미 만들어 내고 남은 자리?' 야광충은 흔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억기 들어와서 이런 것을 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 에 느끼는 혼란스러움이었다. '팔한지옥을 찾으려 했는데 이런 곳을 보게 되다니……!' 문득 상당한 시간이 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쉬욋다. '저 괴물들이라도 좀 제거하고 가?' 그는 곧 그 생각을 포기했다. 아직 때가 아닌데 미리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사실 괴물들을 없앨 방법도 별달리 없지 않은가!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곳을 본 뒤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제자리에서 꺼지둣 사라져 버렸다.. 그는 최초에 그가 들어온 천장 귀퉁이의 작은 통로로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가 히야 우루순을 죽였다고?" 야광충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젠가 들어 본 목소리, 바로 로부 옹고토의 것이었다. 쌍고르마가 대답했다. "그래서 계획을 바로 발동시켰습니다." 야광충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방금 그는 분명히 한 사랍의 걸음 소리만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그는 쌍고르마의 발짝소리만을 미리 알아챘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부 옹고트는 그의 감각으로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경공의 고수인 것이다. 로부 옹고트가 다시 말하고 있었다. "그는?" "수하들을 풀어 그를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포착되지 않았 습니다." 지금 대화 중에 나오는 '그'가 바로 야광충 자신임을 야광충 은 알 수 있었다. "옥주들은?" "계획대로 사관문에 소집되었습니다." 로부 옹고트는 잠시 침묵챘다. "다 제거할 수 있겠나?" "칠살에 삼검령까지 합치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삼룡을 보내 주지!" "삼룡까지?" 쌍고르마는 로부 옹고트의 말에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들까지 동원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누가 그렇게 강합니까?" "야광충!" 쌍고르마는 잠시 말올 않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계십니까?" "그는 엽장청과 귀조의 진전을 얻었어!" 쌍고르마는 다시 말을 않았다. 혈편복의 보고니 틀림없는 말이다. "혈편복이?" "새삼 놀라는 척할 필요는 없다. 짐작하고 있는 줄 아니까." "저는 다만…… 분명히 그에게 야광충올 감시하라고 했는데 그 동안 아무 보고가 없기에 액면 그대로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 니다." "네 실수는 아니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에 대해서는 감출 필요가 있었을 뿐이야!" 정말 놀라는 사람은 쌍고르마가 아니라 야광충이었다. 로부 옹고트의 말에 의하면 혈편복이 계속해서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도록 그가 몰랐다는 것도 놀랍지만 화영이 알아차리지 못 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화영의 감각은 그도 인정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맹룡(猛龍)과 뇌룡(雷龍)에게 따로 임무를 맡겨라!" "무슨?" "기회를 봐서 먼저 황룡을 제거하라고." "황룡이라고 하셨습니까?" "몰면목의 제자다." "그가?" 쌍고르마가 모르는 것은 많이 있었다. 혈사가 분명히 황룡이 감추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았 던가? 혈사도, 그리고 그 자신도 황룡에게 그대로 속아넘어간 것이다. "백치가 아니었군요!" "당연한 얘기. 말을 전할 때 분명히 다짐을 받아 둬라. 기습 으로 그것도 두 사람이 반드시 합공으로 기습하라고." "황룡이 그렇게 강합니까?" "나도 모른다. 단지 그렇게 처치하지 않으면 그들 두 사람이 야광충을 제거하는데 힘을 합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분명하지." 쌍고르마는 다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물어 보기로 결정했던 모양이었다. "속하가 듣기로는 성주님은 야광충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잘못 본 것입니까?" "후후후." 로부 옹고트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결정했는지 입을 열헛다.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지. 나만큼 그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야광충의 귀에 들려 왔다. 무엇인가를 벗는 둣했다. 그는 로부 옹고트가 포대처럼 생긴 그 복면을 벗어 정체를 드 러내는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의 직속부하인 쌍고르마조차도 그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이 놀라 운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의 대화 내용으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아!" 쌍고르마의 탄성이 들려 왔다. 야광충은 눈을 빛내었다. 그에게도 로부 옹고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내 주변의 인물로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는 통로 밖으로 조금씩 움직여 머리를 내밀었다. 지하대전 안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쉽게도 로부 옹고트로 보이는 사람은 뒤로 돌아서 있었다. 야광충은 인상을 썼다. 뒷모습이 어쩐지 낯익었다. '설마!' 그는 다른 모든 것은 믿어도 이것만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로부 옹고트의 뒷모습이 사부인 예충과 극히 흡사했던 것이다. 심중의 격동이 그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흐트렸던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로부 옹고트가 팔을 들어올렸다. "쥐새끼!" 야광충은 숨이 막혔다. 로부 옹고트의 손에서 시작된 경기가 그에게 닿기도 전에 그 압도적인 기세부터 먼저 다가왔다. 야광충은 머리를 뒤로 빼며 손을 밖으로 뻗었다. 약간의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로부 옹고트의 얼굴을 확인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아마도 평생을 의흑 속에 살아가게 될지도 몰 랐다. 단순한 손동작에서 그것도 뒤로 돌아서 있는 상태에서 그런 막대한 경기가 흘러 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 이다. 로부 옹고트의 손짓은 그렇게 막강했다. 쾅! 대전 전체가 혼들렸다. 야광충은 마지막 순간에 그대로 버티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급 히 뒤로 물러섰다. 좁은 통로에 그의 몸이 꽉차듯 했지만 그는 연기처럼 물러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웅! 통로 안이 진동했다. 팔이 부러질 듯이 아파왔다. 로부 옹고트가 쏘아 낸 경기는 통로의 입구를 무너뜨리고도 힘이 남아 통로 안의 공기 자체를 혼들어 버렸다. "컥!" 야광충은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조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적 으로 들었다. 그는 저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로 통로의 바닥을 밀며 뒤로 물러났다. 최단 시간 내에 수심결의 옥주들을 만나야 했다. 특히 사부를……! 로부 옹고트는 무너진 통로의 잔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군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사 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그리고 여기 있을 이유가 있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기로는 단 한 명이었다. 그는 돌아선 채 쌍고르마에게 말했다. 예충의 목을 내걸어라. "예충의 목을?" 쌍고르마가 눈을 크게 떴다. * * * 바위산. "재미있군! 저 여자는 누구냐?" 원도살이 중얼거렸다. 형사랑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야 그가 누군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신화적인 인물 원도살인 것을 알고서도 그 앞에서 투덜 거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는 드물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로서는 보이지도 않는 것까지 질문하면 도 대체 어떻게 대답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원도살이 그제서야 형사랑의 안력으로는 지옥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실소를 홀렸다. "네 눈에도 저기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형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누가 싸우는지는 모르겠지만 횐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붉은 옷을 입은 자들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알 수 있 었다. 팔대지옥으로 통하는 한 통로의 입구에서였다. 원도살이 계속 설명했다. "저 횐 옷을 입은 사람이 여자다. 보통사람보다 키가 크고 호 리호리하며 무기는 길고 검은 채찍을 사용하고 있군. 누구냐?" "그녀가!" 형사랑은 그제서야 그녀가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싸우는 것일까? "월몽영, 제이 지옥주인 독목야차 방각의 딸입니다." 원도살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묻는 것보다 더 황당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왜 그들과 싸우는 것이냐?" 형사랑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참을 수 없어 투덜거렸다. "그녀와 싸우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제가 왜 싸우는 지를 어떻게 압니까?" 원도살이 그를 힐끔 보았다. 형사랑은 움찔 목을 집어 넣었다. 잠깐 쳐다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모르는걸……!' 원도살이 말했다.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형사랑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말 모르겠는데요." "네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해 봐라. 성이 방가면 한족이겠지? 지옥성 내에 분파가 있느냐? 있다면 그녀는 어느쪽에 속하느냐? 그녀의 아버지라는 방각은? 그녀가 최근에 죄를 지은 것은 없느냐? 그녀가 평소에 누구와 친하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느냐?" 콩 볶둣 쏟아지는 원도살의 질문에 형사랑은 그저 입만 벌리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대답을 안 했다가는 지레 죽어 버릴 것이다. 그는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한족이냐고요? 예, 한족이지요. 지옥성에 분파랄 것은 없습 니다. 죄지은 것도 모르겠는데요. 누구와 친하냐고요? 글 쎄……, 친한 것은 모르겠고 얼마 전에 소주와 다툰 적은 있습 니다." 원도살이 인상을 썼다. 형사랑은 다시 기가 죽어 시선을 돌려야 했다. "분파가 없다고? 사람 사는 곳에 다툼이 없는 법이 있더냐? 만 약 다툼이 없다면 저 떼거리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형사랑이 급히 말했다. "그런 분파라면 있습니다! 분파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몽 고족과 한족이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요!" 원도살은 또 인상을 썼다. 형사랑은 그것이 그의 말이 부족했기 때문인 줄 알고 급히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워들은 이런저런 소문들이 맥락없이 쏟아져 나왔다. 원도살은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혈문룡이 말했다. "대단한 여자군." 화영이 그에게 물었다. "뚫고 들어갔나?" 형사랑은 말하다 말고 화영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부터 느찌던 것이지만 이 사람이 정말 맹인이라는 것 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눈이 있는 그도 멀어서 잘못 보는 것을 어떻게 보지도 않고 알아차린단 말인가? 혈문룡의 맡을 듣고서야 먼 빛으로 월몽영이 복면인들을 뚫고 통로로 들어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그였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원도살이 중얼거렸다. "지하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고 복면인들은 그것을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지." "봉쇄라……." 혈문룡이 그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라 는 의미도 있겠죠?" 원도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더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혹룡기사들을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혹룡기사들이 그의 말에 따라 바위산 위로 일렬로 포진(布陣) 했다.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은 지옥성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쪽이 적인가만이 문제였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군." 원도살이 무슨 방법이냐는 둣 혈문룡을 보았다. 혈문룡이 형사랑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형사랑은 뭔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혈문룡이 말했다. "이 녀석을 집어 넣어 보면 알 수 있겠지!" 형사랑은 경악한 표정으로 말도 못하고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것도 한 방법이군. 저 복면인들이 이 녀석을 막으면 당 연히 적이겠지." 형사랑은 바위에 누운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억차하면 도망갈 심산이었지만 혈문룡이 그냥 두지 않았다. 혈문룡이 형사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형사랑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던지지는 않아. 그러나 쓸데없는 짓을 하면 이 자리에 서 죽여 주지!" 형사랑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 * * * 지하통로. 야광충은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통로 안은 좁고, 구부러진 곳이 많아서 제대로 달릴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 사이를 거침엎이 달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쫌 그의 행방에 의문을 가진 자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짐작을 할 사람은 없었지 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의혹은 깊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로 행동에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게 되 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문제를 떠나서 급히 가야 했다. 사부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로부 옹고트가 사부와 동일인일 수 있을까? 그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사부가 로부 옹고트와 동일인일 수는 없었다.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었다. 야광충의 소망이었을 뿐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로부 옹고트와 사부는 동일인일 혐의가 짙었다. 로부 옹고트의 말이 그랬고 그가 아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그 랬다. 고란고성에서 귀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음지맥……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현음옥령지맥(玄陰玉 靈之脈)이다! 증세는 같지만 원인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체질이 지. 야광충은 그때 사람들을 내보내고 흘로 귀조의 나머지 말을 들었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었던가! --현음지맥은 인세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희귀절맥(稀貴節 脈)이지만 천부(天賦)의 것이다. 즉, 자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 러나 현음옥령지맥은 그게 아니다! 그것은 자연히 생긴다는 것 이 불가능한 체질이다. 그리고 그는 야광충이 현음지맥이 아니라 현음옥령지맥이라고 단언했었다. 그 말의 의미는 컸다. 야광충은 그때까지 그의 체질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이라 고 생각해 왔었다. 저주스런 운명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그때 귀조의 말 한마디로 그것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지금의 체질로 바뀌어졌다는 이야기 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또 어떨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야광충은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의 체질 때 문에 무수히 많은 의학서를 봐 왔었다. 그 어느것에도 그의 체질에 대해서 얘기해 놓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그 체질을 고칠 길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그런 체질을 일부러 만드는 것도 불가 눙하다는 의미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렇게 믿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귀조의 말에 강렬한 관심을 보였었다. 누가 그런 체질을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을 알 수 있다면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여럿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 도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귀조는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타. --원제국 당시에 천하사대명의(天下四大名義)가 있었다. 통 현거사(通玄居士) 유완소(劉完素), 종정재인(從正載人) 장자화 (張子和), 유완소의 제자인 동원(東垣) 이과(李果), 그리고 단 계(丹溪) 주진형(朱震亨)의 네 사람. 이들은 모두 왕실의 어의 (御醫)였던 경력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협력해서 한 권의 의경 을 저술했다. 그 책에 현음옥령지맥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귀조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천산에 있올 때 그 책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의 가공스러움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정신나간 의원들이 집단으로 헛소리를 했다고 치부해 버렸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야광충이 그때 물었었다. --왜? 나를 봤기 때문에? 현음옥령지맥을 보니 믿을 수 있었 다는 것인가? --아니! 그 전부터! --언제? --천강시를 보았을 때부터! 야광충은 경악했었다. 귀조가 그 책이 가눙하다고 안 것은 야광충이 현음옥령지맥이 라는 것을 알기 조금 전, 천강시를 보고서였다. 그 책에는 천강시도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의 제목은 <천기금서(天忌禁書)>였다. 천기칠사의 제련법(製鍊法)을 기술한……! 사태는 명백했다. 야광충은 천기칠사의 하나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자신이 천기칠사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엽장청이 없애라고 한 바로 그 천기칠사의 하나……. 그렇다면 그도 로부 옹고트가 만든 작품인가? 왜? 왜 로부 옹고트는 그를 만들었을까? 그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심지어 그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니는 그 런 괴물을 만들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현음옥령지맥은 무슨 효능이 있는 것인가? --너처럼 된다. 보통사람의 몇 배의 오성(悟性)에 몇 배 강 한 체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는 체질이 되는 것이 지.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방금 말한 것은 현음옥령지 맥의 주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사옥령지체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이 주목적이다! 천기칠사는 일곱 개의 괴물이었다. 천강시, 천둔귀, 아수라이화귀, 독종독인, 불사체, 윽령체, 그리고 불사옥령체! 천강시는 이미 본 바대로 단단하다는 것을 빼면 별장점이 없 는 강시에 불과하다. 천둔귀는 천강시의 단단함에 섬전 같은 빠르기를 더한 반강시 (半 屍)의 괴물이다. 그것이 반강시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은 완전히 강시와는 달리 무공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일종의 초절정고수를 만들어 낸 셈이 된다. 시키는 대로 하는 초절정고수! 아수라이화귀는 그보다도 더 가공할 만한 괴물이었다. 불귀신이라고 할까? 그것은 그 자신의 몸에서 가공할 만한 열기를 뿜어내어 사방 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현음옥령지맥의 천적이었다. 독종독인은 전설로만 내려오던 독인을 현실화시킨 것이다. 독을 먹고 살며, 몸 그 자체가 독인 괴물. 그것과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중독이 되어 버릴 괴물이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다음의 세 가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 었다. 불사체는 말 그대로 죽지 않는 괴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태워 가루를 내 버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앞의 네 괴물보다 월등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불사체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죽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없었다. 반가사(半假死) 상태에서 시술자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인형 같은 괴물인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의식은 또렷이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인 약점, 즉 햇빛을 보면 타 버리는, 그래서 밤에만 다녀야 한다는 괴물이 옥령체였다. 이 두 가지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불사옥령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죽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완전체. 그것이 바로 불사옥령체다. 귀조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로부 옹고트는 불사옥령체를 바랬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되기를……! 그렇다면 사부의 이야기는 뭔가? 부서진 마차와 죽은 사람들, 그리고 그 틈에서 찾은 상자 속 의 아기 이야기는 거짓이었던가? 귀조는 고개를 저었었다. --아주 거짓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현음옥령지맥을 만들 려면 현음지맥을 지닌 아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야광충은 다시 충격을 받았다. 진실과 거짓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 뒤범벅이 되어 버 린 것이다. 그는 원래 현음지맥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서 현음옥령지맥으로 바뀌어 버렸다. 의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누가 그를 현음옥령지맥으로 바꾸어 놓았는가? 야광충은 그때 귀조의 추측을 부정했었다. 왜 엽장청이 그가 로부 옹고트와 싸우게 된다고 예언했는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부정했었다. 귀조도 엽장청도 그의 사부를 로부 옹고트로 보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것을 부정했다. 사부는 그를 구해 준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부는 현음지맥인 그를 구해 지옥성으로 왔던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로부 옹고트가 무슨 수작을 부렸음이 분명했다. 야광충은 그렇게 강변(强辯)했었다. 그 자신에게도 그렇게 그럴둣하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애써 주장하고, 믿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믿음이 결정적으로 흔들리는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애써 강변할 필요없이 사부가 로부 옹고트라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간단하게 해명되는 것이다. 야광층은 마지막 하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가 사부로 다시 변하기 전에 사부를 찾는다면 그 래서 확인한다면 사부는 로부 옹고트가 아니란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저만치에 제사 관문이 보였다. 그는 입구에서 제지하는 사관문의 옥졸을 밀쳐 버리고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제22장 … 같은 시각 제사 관문 연무장. "대단한 아이군!" 소선건곤 팽호는 제사 관문의 연무장에 서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웃을 일이 아니군." 위대봉이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웃을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관문 돌파자가 관주를 죽였다는 것은 설사 관문 돌파 중에 일 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예삿일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그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 주둣이 됴소에 보기 힘든 사람들이 연 무장에 모여 있었다. 우선 그와 팽호, 그리고 방각과 주개--주개라니!--가 나란 히 서 있었고, 그들의 반대편에는 삼검령주들이 서 있었다. 금검, 은검, 옥검의 삼령주였다. 그 중 옥검령주는 전 옥검이령주 옥랑군 금오가 야광충의 손 에 죽었기 때문에 원한이 있을 것이다. 위대봉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저들 삼검령주들도 그와 약간의 은원이 있군그 래! 그러나……' 그는 금검령주를 다시 한번 보았다. 금검령주……, 바로 혈부용이었다. 야광충과 그녀의 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위대봉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녀가 삼 일 연속으로 야광충의 숙소를 찾은 일은 알게 모르 게 이미 지옥성 전체에 소문이 나 있는 것이다. 그는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광충과 혈부용이 얽힌 소문에는 항상 또 다른 한 사람이 연 관이 되어 있었다. 바로 지금 연무장 중앙에 서 있는 한 사람이었다. 데게룬고이 토고쓰! '개병공작' 토고쓰가 바로 그 당사자였다. 그와 혈부용의 사이 또한 야광충과 그녀의 사이만큼이나 유명 한 이야깃거리였다. '아무리 몽고라지만……!' 아무리 그런 방면으로 문란한 몽고라지만 그들의 관계는 몽고 의 상식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거의 야광충 혼자였다. 부명 혈부용은 야광충을 연애상대로 잡아 놓고, 그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개병공작' 토고쓰와 밀회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그것도 야광층의 눈만을 피했을 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거 리낌없이 행동한 것이다. 말하자면 야광충을 여자도 지키지 못 하는 얼간이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지윽성 내에 야광층 흔자일 것이다. 위대봉 그 자신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할 위치가 아닌 것이다. 그가 새까만 후배의 여자문제까지 간여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는 내심 혀를 찼다. '그건 그렇고…… 저자는 왜?' 평소에 이런 자리에서 정말 보기 드문 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지옥성의 법사로 행세하는 홍교의 라마승이었다. 위대봉은 평소에 그를 보기만 해도 왠지 꺼려지곤 했었다. 피처럼 붉은 가사에 사람의 두개골을 축소한 것임이 분명한 해골들을 줄줄이 목에 걸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것 이 대개는 검은 뼈다귀, 하얀 다귀, 빨간 뼈다귀 따위이니 보 기 좋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풍겨지는 묘한 분위기, 사기(邪氣)가 위 대봉의 신경을 긁었다. 그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기라도 하면 어쩐지 마음속까 지 꿰뚫리는 둣한 느낌이 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 랄들이 아니라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온다던 성주도, 총옥주도 보이지 않았다. 사관문의 관주인 '개병공작' 토고쓰는 당연히 있어야 하니 예 외로 치더라도, 나머지 몽고족의 두 옥주, '멧돼지' 가하이릭과 '삵쾡이' 말하르는 왜 없는 것인가? '그리고 예충은?' 분명히 옥주들을 전부 소집했다고 들었는데 예충은 왜 없는 것일까? 대신 주개가 서 있기는 했다. 그는 사부를 아침부터 찾았지만 볼 수가 없어서 자신이 대신 왔다고 말했었다. 그는 '네 사부님은?'이라고 묻는 말에 '흑시 못 보셨어요?'라 고 반문해서 그의 속을 긁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위대봉의 신경을 아프게 자극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수심결과 연관된 조치는 아닐까?'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주책없는 노소포는 키득거리고만 있으니 열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방각은 애초에 그런 사람이니 기대조차도 않았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은 것이다. 지금도 방각은 그냥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야광충이 나타났다. 사부는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은 연무장 주변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주개의 앞으로 바짝 붙어 덤벼들 둣이 물었다. "사부님은?" 주개가 그의 기세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안 계시다고? 어디 가셨지요?" 주개는 뗬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몰라, 사제는 못 봤나?" "봤으면 물을 리가 없잖습니까!" 평소와 다른 그의 거친 대답에 주개는 기가 질린 듯 다시 걸음을 물러섰다. "무슨 일이라도……?" 야광충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 역시 주개로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 그의 사제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입을 벌려 뭔가 물어 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야광충이 먼저 질문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나는 주워 온 것이 분명합니까?" 주개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했다. 왜 지금 그런 질문이 나와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 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눈빛은 분명 장난은 아니었다. 얼음처럼, 유리구슬처럼 감정이 없던 눈에 살기 이외의 감정 이 떠오른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이었다. 오래 전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인 것이다. 그 감정이 이런 것이라니! 의혹과 분노, 그리고 그 이면에 깊이 드리워진 슬픔이었다. 주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여태 보기 힘들었던 진지한 태도였다. "이 말은 원래 사부님께서 직접 하셔야 될 얘기로 생각했었다 만 지금이 얘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는구나." 야광충은 그의 말을 한자 한자 새겨듣고 있엇다. 주개가 천천히 말했다. "사부님의 말쏨에는 한점의 거짓도 없다. 단지 애기하지 않은 것은 네 진짜 부모님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였다.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오르지만 그날 너를 주운 후 길을 떠나며 사람들 에게 들은 바로는 그 마차가 대도(大都:북경)에서 강남으로 낙향 하는 모(毛)씨 성을 가진 관리의 이삿짐 행렬이었다고……!"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처럼 조용했다. 그 고요함을 깬 사람은 라마승이었다. 그는 서장어로 뭔가 중얼거리더니 두 개의 뼈를 들어 맞부딪 쳤다. 딱!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둣한 기분나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장내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여기 왜 왔는지 잊은 것 같군! 애송이!" 야광충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어느새 푸른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라마승, 혈사는 그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홈칫 놀랐다. 심리적 위압감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것에 나름대로 조예 를 쌓은 그였지만 이런 눈빛은, 그리고 이런 노골적인 살기는 처음 대해 보는 것이었다. 야광충의 시선이 연무장 중앙을 향했다. 혈사는 그제서야 한 순간 그를 옭아매고 있던 위압감에서 벗 어날 수가 있었다. 그는 찬물을 들이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만 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 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야광충은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개병공작' 토고쓰는 한 손에 활 두 자루를 들고 서서 고요 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연무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그 혼자만은 아무 런 상관이 없다는 둣 그렇게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그 앞에 야광충이 와서 섰다. '개병공작' 토고신가 활을 들어 야광충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통과방법은……." 야광충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런 것이 필요없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토고쓰가 멈칫했다. 그는 야광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야광충의 말속에 숨은 의도를 얼굴을 통해 읽어 내려는 듯이……! 야광충이 두 손을 들어 토고쓰의 앞에 펴 보였다. 그의 검은 묵린수가 오늘따라 더욱 검어 보였다. 토고쓰의 눈에 그것은 마치 지옥의 입구에서 슬며시 뻗어 나 오는 검은 손짓처럼 보였다. 야광충의 전신에서 숨막힐 듯한 살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살기가 야광충의 동작 하나하나를 의미 짙은 것으로 만들 어 주고 있었다. 죽음의 손짓이었다. 토고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서히 두 개의 홰을 들어올렸다. 호규지옥은 궁술(弓術)을 수련하는 곳이다. 그리고 궁술은 몽고인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도 했 다. 몽고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나이는 지혜로운 자도 아니요, 세 력있는 자도 아니었다. 바로 홰을 잘 쏘는 사나이, 명궁(名弓)만이 진정으로 존경받 을 수 있는 것이다. 토고쓰가 바로 그런 사내였다. 그는 천천히 들어올린 두 개의 활 시위를 당겼다. 활이 극한의 각도로 굽어지다가 이윽고 두 동강이로 부러져 버렸다. 물소의 뿔로 만곡부(滿曲部)를 만들어 낸 강궁 두 자루가 그 의 손에서 폐물로 변한 것이다. 토고쓰는 활을 집어 던지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의 손에 붉은 가 죽이 쥐어 나왔다. 장갑이었다. 피처럼 붉은 장갑! 그는 양손에 장갑을 끼며 다정스런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이 입을 열었다. "알아낸 모양이군." 무엇을 알아냈다는 말일까? 야광충은 알고 있었다. 층분히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내 놓고 말하는 이 사내도 보통은 아니라 는 것을 동시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약간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위대봉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었다. "물론 알고 있지. 오늘이 한족이 지옥성을 행보할 수 있는 마 지막 날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위대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노소포가 부르짖둣이 말했다. "무슨 뜻이냐, 그말은?" 팡! 토고쓰가 장갑 낀 두 손을 부딪쳐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부딪쳤다가 떨어진 그의 두 손에는 어느새 괴병(怪兵) 두 개 가 들려 있었다. 넓은 날이 서 있고 원통형의 손잡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도끼처럼 보였는데, 묘하게도 박쥐의 날개처럼 얇고 뾰족뾰족한 모양이었다. 그가 괴병을 가볍게 혼들어 보이며 씹어 뱉둣이 대답했다. "들은 대로! 오늘 이후 지옥성에서는 한족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은검령주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은검이령주가 그 웃음소리를 받아 같이 웃었다. 은검삼령주가 그들을 따랐다. 장내가 그들을 뒤따라 웃는 몽고족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노소포의 얼굴이 검게 타들어갔다. 위대봉이 신음성을 발했다. "너무 빠르군!" 방각은 말보다 행동이 빠른 자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금라 방패와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야광충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금팔괘순, 그리고 대 월이었다. 촹! 은검령주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위대봉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쓰렸다. 오늘의 상황이 그를 견덜 수 없이 괴롭게 했다. 단순히 위기에 처했다거나 실패했대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믿고 있었을 삼백여 명의 한족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 하니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옥검령주가 그에게 다가섰다. 언뜻 보기에도 팔 척은 넘어 보이는 장신의 사내였다. 촤악! 그의 손가락 끝에 어느새 강철손톱이 튀어나와 있었다 옥검령주라는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지옥칠살 중의 혈응이 었다. 주개가 작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품속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혈부용을 향해 다가서며 한껏 소리를 질렀다. "죽을 때까지 한번 해보자!" 혈부용이 그를 힐끔 보았다. 주개는 한껏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으려 노력했지만 후들거리 는 다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혈부용은 그 무표정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외면해 버 렸다. 노소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주책을 떤다는 소리를 듣는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힘이 없는 것이다. 혈사가 금검령주 혈부용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늙은이는 우리 손까지 안 오는걸." 노소포가 불끈 성질을 내었다. "말라 비틀어진 개뼈다귀 같은 돌중 놈이 뭐라고 씨부렁거리 는 거냐? 너부터 나와라! 네놈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목을 비틀 어 죽여 주마! 나와!"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혈사보고 뼈다귀라고 욕했지만 걷어붙인 그의 팔이야말로 뼈 만 앙상했다. 그러나 그 앙상한 두 팔이 그에게 소선건곤, 하늘과 땅을 뒤 집어엎어 버린다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척 주었던 일둥공신이었 던 것이다. 혈사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다가섰다. 이제 지옥연무 제사 관문의 연무장에는 싸늘한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 * * 흑승지옥. 아무도 없었다. 혹승지옥에는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 한족과 몽고족의 시체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서로 싸웠다는 것이 분명한 흔적들을 남기고서! 그녀는 하마터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사부의 주즉은 너무도 정확하게, 그리고 너무도 신속하게 들 어맞아 버렸다. 사부가 미울 지경이었다. 사부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그런 감정만이 복받쳐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씹어 삼켰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는 동안은 아직 절망할 때는 아니었다. 그녀는 혹승지옥의 지하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여기까지 오느라 피로 물들어야 했던 검은 채찍, 대선룡이 길 게 늘어져 바닥에 끌렸다. 월몽영은 광장에 디구는 시체들을 하나씩 살피며 걸어갔다. 경악과 회의의 빛이 역력한 한족의 시체들, 그들은 대부분 흑 승지옥의 옥졸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단지 죽음의 공포만으로 굳어 버린 시체들은 몽 고족의 것이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몽고족들이 어떻게 기습을 가했으며, 그에 맞닥뜨린 한족들의 놀라움이 어떠했을 것인지! 월몽영은 자신이 익히 보아 왔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걸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가슴속에 새기는 것이 죽은 자에 대해 그녀가 표할 수 있는 마지막 경의일 것이다. 설사 그 시체의 얼굴이 그녀가 가장 잘 아는 모습으로 나타난 다 할지라도 말이다. 문득 그녀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펄쩍 뛰어 걸어온 길로 삼 장을 물러섰다. 그러고 다시 걸었다. 그녀가 본 것이 확실했다. 여기에 누워 있는 주검의 얼굴에는 분노와 항전의 결의는 있 었지만 놀라움은 더 이상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슘을 당해 죽어 가는 자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월몽영은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가 서 있는 광장을 살폈다. 그녀의 눈물로 흐려진 눈에 한 점의 빛이 번짝였다. 역시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광장에 누워 있는 시체들, 그들이 죽어 가며 남긴 흔적들이 그때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읽었다. 몽고족들은 주 통로를 통해서 기습해 온 것 같았다. 그것은 혹승지옥의 바로 위에 있는 등활지옥을 거쳐왔다는 것 을 의미했다. 몽고족들은 기습을 감행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등활지옥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등활지옥의 누군가, 혹은 누구들이 살아 남아 항전하면서 흑 승지옥까지 후퇴해 왔던 것이다. 아마도 등활지옥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얼마 없을지도 몰랐 다. 그들은 최초기습의 희생물이 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승지옥은 아니었다. 여기 광장에 뒹구는 주검들의 비율이 몽고족이 더 많다는 것 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신속하게 움직여 흔적을 살폈다. 그녀는 더 이상 낙심한 모습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조직적으로 항거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흑승지옥의 한족들은 누군가의 지휘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항 전하며 후퇴한 것이다. 흑승지옥 아래의 중합지옥으로 통하는 통로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몽고족의 시체가 알려 준 결론이었다 '저 아래에는 아직도 싸우고 있뉼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컸다. 그 외에 누가 이렇게 사람들을 지휘해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늘어져 끌리던 채찍을 팔뚝에 감아쥐고 중합지옥으로 통하는 통로로 달려들어갔다. 그녀의 왼쪽 팔뚝에 매어져 있던 은빛 방패가 빛을 뿌리고 있 2다. 싸울 준비가 된 것이다. * * * 제사 관문 연무장. 연무장에서는 피를 뿌리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슈왓! 박쥐모양의 괴병 두 개가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토고쓰의 손에서 날려진 것이었다. 하나는 곡선을 그리며 야광충의 뒤통수로, 다른 하나는 직선 으로 바로 얼굴 한복판을 향해서 파고들었다. 야광충의 손이 그것들을 향해 내밀어졌다. 그는 날아오는 괴병을 손으로 받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토고쓰가 양손을 기묘하게 흔들었다. 박쥐모양의 괴병 두 개가 그 손짓을 따라 공중에서 방향을 바 꾸었다. 야광충의 정면으로 향해 날아 들던 박쥐, 사실은 토고쓰가 혈 편복의 모습을 할 때의 애병인 비편복월(飛 鉞)이 아래로 툭, 떨어지며 발끝을 향하는 둣하더니 곡선을 그리며 다시 떠올 랐다. 뒤통수를 향해 날아 들던 비편복월은 바로 쳐 오는 것이 아니 라 공중에서 회전을 하며 야광충을 중심으로 한 바퀴 원을 그리 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박쥐들처럼 영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이다. 야광충이 순간 멈칫했다. 단순히 토고쓰가 날펀 괴병들의 움직임이 예측하기 어려운 것 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토고쓰의 손짓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설마 토고쓰가 허공을 격하고 기(氣)로 사물을 움작이는 경지 에 이른 것일까? 진정 그렇다면 차라리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를 향해 날아드는 박쥐모양의 무기들이 아무리 기묘하게 움 직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막으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그것은 팔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토고쓰의 팔과 별개로 움직이는 것이라 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때는 네 개의 손과 싸우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짧은 순간, 두 개의 비편복월은 하나는 아 래에서 품으로 파고들고, 다른 하나는 나선을 그리며 그의 목으 로 파들어오고 있었다. 야광충의 신형(身形)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 흐릿해지는 신형과 겁쳐서 하나의 새로운 신형이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 흐릿해졌다. 사람들이 본다면 잠시 눈에 착각을 일으켜 흔들려 보인다고 보앗을 것이다. 야광충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직각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선 모습이었다. 가슴 앞에 치켜든 두 손에는 비펀복월이 잡혀 있었다. 아니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극히 짧은 순간 동안이었다. 비된복월은 살아 있는 것처럼 가볍게 좌우로 움직이더니 미꾸 라지처럼 야광충의 손가락을 벗어나 토고쓰에게 되돌아가고 있 었다. 야광충의 눈이 잠깐 번뜩였다. 그저 옆으로 돌아선 것처럼만 보였지만 그 짬은 순간에 야광 층은 아흡 번 움직였었다. 비편복월의 진로에서 벗어나는데 세 번, 비편복윕 하나하나를 잡아채는 데 각각 세 번씩의 위치이동이 꾈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지 두 개의 신형이 겹 치는 것으로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잡아챈 괴병이 한 순간 누가 당기기라도 한 것 처럼 그의 손을 벗어나다니! 야광충의 신형이 다시 한번 흐릿해졌다. 이매십보!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두 개의 박쥐모양 괴병을 따라 토고쓰에게 육박해 갔다. 그리고 벽에라도 부딪친 듯이 멈춰 섰다가 뒤로 튕겨 물러섰다. 가슴을 찍어누르는 듯이 무건고,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두 가 닥 경기가 그의 진로상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평범한 안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야광충과 토고쓰는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주고받는 공방이 끝나자 그들 두 사람은 처음의 위치, 처음의 자세 그대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야광충의 짐작대로였다. 박쥐모양의 괴병을 날리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 지만 그것과 토고쓰의 양손은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그의 가슴을 찍어 온 경기가 그 증거였다. 손을 당기면서 동시에 내어 뻗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이다. 그런 것처럼 괴병을 회수하면서 동시에 기를 발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보다도 더 그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토고쓰가 그의 이매십 보를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십 보 이내의 거리에서는 움직이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그 이매십보를 토고쓰는 완전히 간파하고 정확하게 그 의 가슴을 찔러 왔었다. 이매십보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없으니 미리 진로를 예상하고 기다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의 움직임을 순간순간 파악하는 믿어지지 않을 정 도로 고도의 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움직임을 따라잡을 정도로 빠른 손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인가!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렇게 밖에는 달리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야광충은 살기를 일으키며 토고쓰를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는 이런 일보다는 훨씬 중요한 다른 일이 있는 것이다. 빨리 끝내고 사부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확인해야 했다. 그가 토고쓰를 향해 다가서는 그 순간, 토고쓰는 사라졌다. 그의 신형은 야광충과 홉사하게 한 순간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야광충과 다른 점이라면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붉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것뿐이었다. 위이잉! 박쥐모양의 괴병 두 개가 어느새 발출되었는지 야광충의 머리 위로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토고쓰가 사라지며 생겼던 붉은 연기는 연무장 바닥으로 깔리며 안개가 피어 오르는 것처럼 야광충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환술(幻術)?" 야광충은 자기도 모르게 짧게 중얼거렸다. 토고쓰가 사라진 것은 환술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환술에는 이루 다 세지 뭇할 정도의 방법과 현상들이 있었지 만 지금 토고쓰가 쓴 환술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에 속 하는 은신술이었다. 약간의 도구와 순간적인 기회포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도가 필요한 은신술. 그렇게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요령보다는 실력에 의존하는 환술인 것이다. 야광충은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상대를 포착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의 감각에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두 개의 괴병만이 들어올 뿐 토고쓰는 어디에도 잡히지 않았다. 야광충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이제야 그가 누구인지 그의 또 다른 신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부 옹고트와 쌍고르마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감시자 혈편 복이라는 인물이 아마도 그일 것이다. 이런 은신술을 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그가 여태 눈치를 못 챘다는 것은 불가눙할 것이니 말이다. 두 개의 괴병이 그를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유령미종, 귀영종 오대신법 중의 하나인 유령미종을 발휘한 것이다. 가볍게 제자리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지만 사실 은 한 순간에도 수십 번씩 위치를 이동하는 신법이었다. 비편복월이 연무장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그 안에서 야광충은 보이기는 했지만 실체가 없는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토고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붉은 연기만이 바닥에 깔려 일렁였다. 야광충과 토고쓰의 싸움은 그렇게 신법과 은신술을 겨루는 것 처럼 진행되었다. 방각은 은검령주와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은검령주가 누구인지는 방각도 몰랐다. 언제나 복면을 쓰고 다니고, 몽고족으로서는 보기 힘들게도 장검을 사용하고 있어서 방각은 그가 흑시 한족은 아닐까 생각 하기도 했었다. 그는 방각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방각에게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로서는 싸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평소의 그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직 독목야차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독목야차로서의 방각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는 흑승지옥주로서 남아 있는 수하들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잇! 은검령주의 장검 끝이 떨리더니 눈부신 광채를 발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검이 몇 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방각의 전신 을 찔러 왔다. 파파파악--! 방각은 금팔괘순을 들어올려 몸을 가렸지만 그 전에 이미 검 은 그의 어깨와 옆구리 머리가죽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찢겨지고, 피가 튀었다. 방각이 소리쳤다. "양이랑신검(楊二郞神劍)!" 은검령주가 그 소리에 주춤했다. 방각의 고함소리에 영향을 받은 것 갈았다. 방각이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양이랑(楊二郞)?" 양이랑은 원대(元代) 절정검객 중의 하나였다. 그가 유명한 것은 전통이 지배하는 중원무림에서 기존의 검법 과 류(流)가 다른 검법을 창안하고, 그것으로 일가를 세웠기 때 문이었다. 이른바 양이랑신검이라 불리는 검법이 그것이었다. 칭송받아 마땅할 일인데, 오히려 그는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도망다녀야 했다. 그것은 그가 그 검법을 창안하는 과정이 지극히 악랄하고 인 륜에 어긋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화산파 문하였었다. 그러다가 화산파의 기존 검법과 다른 형태의 검을 시도하다가 들켜서 파문되었다. 전통을 무시하는 행위로 지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계기로 완전히 중원의 정통검법에 등을 돌려 버 렸다. 그가 주구한 것은 '환(幻)'과 '쾌(快)'의 두 구결이었다. 환상적으로 변화가 다양하면서도 극쾌의 빠르기를 가진 검법!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검법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별문제가 아니라고로'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가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는 중원의 각종 검도 명가의 무공을 온갖 수단을 다해 훔쳐 배웠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보다 하수인 각파의 제자들을 납치해 고문으로 위협하며 배 운 것이다. 그는 각파의 기본적인 검법으로도 그 파의 핵이 되는 요결(要 訣)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자신이 배운 경험에 의거한 확신이었다. 자신이 배운 기초 매화검법에서도 그는 화산검법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매서운 기세를 충분히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파의 검법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종남파 검법의 변화무쌍함과 점창파의 한 순간에 폭발하 는 둣한 기세, 곤륜파의 부드럽고 유장한 기운과 해남파의 상식 의 허점을 찌르는 괴이함까지 간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검법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가 바라던 대로 절정의 검법은 아니었지만 족히 일가를 세 울 수 있을 정도의 것은 되었다. 게다가 묘하게도 정도의 전통 에 합치하고 있었다. 양이랑신검에는 사도의 음습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벌인 소행이 무림에 알려지게 되자 그는 일거에 공적이 되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납치했던 각파의 제자들을 살해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의탁한 곳이 원나라 조정이었다. 무림이 감히 건들 수 없는 곳으로 피했던 셈이었다. 그가 원나라가 주구(走狗)가 되어 벌인 악행들에는 강호의 흑 도 무리들도 이를 갈 정도뗬다. 과거의 원한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무림인들을 극도로 괴롭 혔던 것이다.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도 사라졌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방각은 대월을 고쳐 잡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에서 흉흉한 살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양이랑이 무림의 공적이니 아니니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 니었다. 그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과거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은 그에 의해 친우를 잃은 적이 있었던 그였다. 명예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친우는 중요했타. 그리고 지금 그가 그를 죽여야 살아 남을 것이라는 것은 더욱 중요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독목야차의 기세를 되찾고 있었다. 그는 양이랑의 검에 상처를 입는 것을 꺼리지 않고 강맹한 도 끼질을 퍼붓기 시작했다. 위대봉은 방각과 달리 처음부터 전의에 불타는 모습으로 처절 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상대는 옥검령주였다. 그는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옥검령주는 강철손톱을 세우고 달려든 장대한 사내, 바로 혈응이었다. 그는 혈응이 약간 벅찬 상대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열 개의 쇠손톱은 위대봉의 성명절기 염왕수에 전혀 지지 딴 고 맞서 오고 있었다. 바위를 바스러뜨릴 것처럼 강맹하게 뿌려지는 위대봉의 장식 은 그 손톱에 갈가리 찢겨 흩어지고 있었다. 염왕수는 원래 기문궤공의 일종이었다. 그것은 단련방법이 상궤를 벗어나 있다는 의미였지만 한편으 로는 연성하기만 하면 극히 위력적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그의 싶왕수가 혈응의 손톱 끝에 걸리자 맥을 못추고 있 는 것이다. 게다가 혈응은 신출귀몰했다. 한 순간도 한곳에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위대봉의 몸 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위대봉은 곧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부욱--! 다섯 줄기의 손톱 자국이 위대봉의 가슴에 더해졌다. 위대봉은 급히 물러서며 연속적으로 삼 장을 뿌렸지만 그것은 허공만 칠 뿐이었다. 슈왁! 혈응은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떠서 독수리가 양을 채둣이 손 톱을 내리꽂아왔다. 위대봉은 급히 머리 위로 주먹을 뽑아 을렸다. 염왕수가 아니라 승룡기우(昇龍祈雨),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 며 올라가는 용의 자세였다. 파악--! 손톱과 주먹이 마주쳤다. 기공을 끌어올리지 않은 위대봉의 주먹은 갈기갈기 찢겨져 뼈 를 드러내고 말았다. 위대봉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를 향해 혈응이 다시 내려꽂히고 있었다. 위대봉의 주먹과 마주친 그 반탄력으로 공중에서 회전한 뒤의 일이었다. 위대봉의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대로 밀리다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어넘어갈 것 이다. '그럴 바에는!' 그는 갈기갈기 찢겨진 주먹을 다시 뻗었다. 이번에도 염왕수가 아니었다. 혈응의 손톱이 거기 마주쳤다. 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혈응의 손톱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위대봉의 주먹이 뭉개지는 소리였다. 위대봉은 지금 양인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도 조구의 손님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한족의 세 옥주 중 가장 잘 싸우는 것은 의외에도 소선건곤 팽호, 노소포였다. 평소의 태도로는 그가 혈사의 미혼지술(迷魂之術)을 견딘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뼈다귀가 맞부딪치는 괴이한 소리와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싸 우면서도 쉬지 않고 내어지르는 괴성,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우러 져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신경까지도 흐트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혈사의 미혼지술이었다. 마주 싸우는 상대의 넋을 빼앗고 한 순간이라도 흐트러지는 기세가 보이면 그 틈을 파고들어 승부를 결정내는 것이 그의 싸 움방식이었다. 그런데 노소포는 그런 미혼지술에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애병인 두 자루의 판관필(判官筆)을 휘둘러대며 쉴새없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의 장기는 두 자루 판관필로 만들어 내는 묘필생화(妙筆生 花), 풍운변색(風雲變色), 건곤전도(乾坤顚倒)의 기기묘묘한 무 학경지가 아니라 누에실처럼 끊이지 않고 뽑혀져 나오는 악랄무 쌍한 욕설인 둣했다. 미혼지술을 펼치고 있는 혈사가 역으로 정신이 흐트러져 틈을 보일 지경이었다. 중국 사투리로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많은 욕설들을 알아들을 리야 없었지만 어조 속에 담겨 있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모멸 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욕설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행위 자체가 가공할 위력을 지 녔다고 해야 했다. 혈사는 짧은 순간에 몇 번씩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몽고족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혈부용은 아직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구경만하는 쪽이었다. 그녀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는지 아니면 상황을 보아가며 불리한 쪽을 돕겠다는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족으로 싸움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주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혈부용이 아까 그가 한 말에 반응해서 싸우자고 덤벼 들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운 처지였다. 그때 장내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막 제사 관문을 들어서는 세 사람과 그들이 든 하나의 물건 때문이었다. 붉은 옷과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 사이에 선 라마승, 황룡이 야유신 예충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 * * 환락굴. 그녀가 밖에 나온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나오기 위해 환란굴의 지하 이층, 매음굴 의 좁은 복도를 거의 대부분 부숴 버려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현소녀는 보통사람 다섯 배나 되는 큰 덩지를 흔들며 지옥성 의 바위집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양옆에서 부축하는 두 늙은 창녀--늙은 창녀래야 이제 삼십대 후반 정도의 두 여인이지만--들이 자칫 잘못 하다가는 그녀에게 깔려 짜부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이었다. 지옥성의 곳곳에는 붉은 복장의 사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 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녀를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우선은 놀라고 그 다음은 엄한 규율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 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것을 도대체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 적의복면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이다. 꼴같지 않게도 현현소녀가 입은 복장이라는 것이 분흥색 궁장 (宮裝)이었다. 원래는 꽉 조여진 넓은 요대(腰帶)에 날아갈 둣한 반비유군 (半臂 裙), 그 위에 걸친 배자(背子)와 선녀의 날개 옷에서 따 온 하피(霞 )가 아름다웠어야 할 복장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현현소녀가 입은 그 복장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넓은 천쪼가리로 얼기설기 감아 눙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가 굴러오는 것같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렵지 않게 팔대지옥으로 들어가는 통로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우스운 것이고 임무는 임무였다. 통로를 봉쇄하던 적의복면인들 중 지휘자로 보이는 인물이 그 녀를 막아섰다. 그 입에서 몽고어가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거냐? 돌아가서 처박혀……!" 그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현현소녀의 손끝에 장식처럼 들려 있던 얇은 비단끈이 그의 목을 감는가 하더니 어느새 그는 오 장이나 날아가 바위집 하나 에 피곤죽으로 붙어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현현소녀는 단지 손끝만을 움직였는데 한 사람의 생명이 곤죽 으로 바뀌어 버렸다. 웃음이 사라졌다. 사태의 진전을 구경하던 적의복면인들이 아직도 입가에 매달 린 웃음을 채 지우지도 못한 채 그녀를 향해 달려들어왔다. 그녀의 우둔해 보이는 눈이 꿈벅거렸다. 두꺼운 입술 사이로 갸냘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궁(宮)을 떠난 지 삼십 년에……." 만도를 움켜헌 대여섯 명의 적의 복면인들이 그녀를 향해 뛰 어올랐다. "두 번 다시 이 옷을 입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는데……." 그녀의 손에서 비단끈이 나풀거리며 허공으로 올라갔다. 적의 복면인들이 폭풍에 휘말린 듯 분분히 날아가 뒹굴었다. 중원의 무공에 달통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녀의 일 수를 보 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신비의 세력, 그리고 신비의 무공 이 현현소녀의 손에서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산(巫山) 신녀궁(神女宮)의 비전무예인 현녀십구대(玄女十 九帶)였다. "오늘 이런 일을 맞게 되다니……!" 그녀는 살포시 한걸음을 내디뎠다. 피비린내가 안개처럼 자욱이 깔렸다. * * * 바위산. "어떻게 해야 할까?" 혈문룡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경우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혈문룡은 원도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물었다. "이대로 여기서 구경만 할 거요?" 원도살은 잠시 대답을 않고 혈문룡의 타오르는 둣한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겠군." 그들이 지금 지옥성의 뛰어들어서 좋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사태의 전개를 지켜보다가 가장 유리한 순간에 나서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지옥성 내에는 뭔가 분란이 일어난 것이 분명쌨다. 적과 동지가 구별이 되지 않는 그런 상황에 그들 흑룡사가 끼 여들 필요란 정말 없는 것이다. 혈문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옥성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이는 체구를 지닌 여인이 혈풍을 일 으키고 있었다. 단지 그녀 혼자였다. 그녀는 줌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돼지도 줌을 출 수 있다면 말이다. 그녀의 곁에 대동하고 있던 두 여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그녀들도 무공이 그리 약해 보이지 않았지만 해일처럼 꾸역꾸 역 몰려드는 복면인들의 수에는 당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저 비대한 여인만이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가공할 무공으로 승게 통로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적은 통로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면인들이 통로 안에서도 꾸역꾸역 말려나왔던 것이다. 그녀의 분흥색끈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통로로 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에게 덤벼드는 붉은 이리떼의 모 습을 보는 것 갈았다. 혈문룡이 다시 원도살을 향해 말했다. "지금 뛰어드는 것이 줘지 않을까?" 원도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그럴둣한 이유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혈문룡은 알 수 있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원도살의 행동강령이었다. "둘 중 한 세력이 전멸하면 나머지 한 세력도 지칠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피로한 그 세력을 친다는 것은 지금의 경우에는 맞지 않아 보이는군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그들 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경우에 오히려 남은 한 세력이 더 강해지 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신경이 분산되지 않을 데니까!" 혈문룡이 지옥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공격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을 것이오!" 원도살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얼핏 논리정연하고 타당한 근거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쩐 지 억지로 짜맞춘 둣한 느낌이 드는 이야기였다.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 기습해도 되고 그때도 안 된다면 모레 기습해도 되는 것이다. 그들이 서두를 이유란 없었다. 어쩌면 혈문룡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오늘이 다시 오기 힙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혈문룡이 그것까지 계산하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허어들어 피를 보고 싶어 젊은 혈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싫었다. 단지 혈문룡의 말이 전혀 근거없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노골 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좀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혈문룡은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는 화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말이 어떻다고 생각해?"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화영은 이미 바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혼자라도 저 싸움터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혈문룡의 눈이 번들거렸다. 참기 힘든 혈기와 투쟁심이 끓어오르고 있는 징표였다. "저놈답군." 그는 고개를 내밀어 화영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바위의 사면을 살펴보았다. 급경사이기는 했지만 미끄러져 내려갈 만하기는 했다. 혈문룡은 반룡도를 뽑아 들며 일어섰다. "가능성은 반반! 결정은 내려졌다. 돌입이다!" 혈문룡은 몸을 날려 바위 사면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원도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도 이미 바위의 경사를 따라 미끄러 지는 중이었다. 그 뒤를 흑룡사의 일백 흑룡기사들이 따랐다. 형사랑이 그 중에 꼈다. 어차피 돌아가기는 돌아가야 할 곳이었으니까! * * * 대규환지옥. 싸움은 대규환지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월몽영은 중합지옥과 호규지옥을 거침없이 거쳐 대규환지옥 에 당도하고서야 비로소 아수라장이 된 싸움터를 목도할 수 있 었다. 보이는 것은 거의 몽고족이었다. 몽고족이 옥주로 있는 사개지옥의 옥졸들이 모두 동원된 듯 했다. 한족들은 대규환지옥의 끄트머리 염열지옥으로 통하는 통로 주변에 모여서 밀리는 듯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는 누가 몽고족이고 누가 한족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 로 엉망이 된 격전지였다. 월몽영은 자신이 찾는 모습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세 개의 낫을 하나로 묶은 듯한 갈고리라는 독특한 무기를 휘 둘러 사방에 피를 튀기고 있는 대과조 상음! 바로 그였다. 그는 거의 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손을 휘 두르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몽고족과 맞서 싸우는 한족의 지휘를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월몽영은 아버지인 방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몽고족을 향해 몸을을 날렸다. 그녀의 손에서 대선룡이 한 마리 흑룡처럼 꿈틀거리며 뻗어나 갔다. 현녀십구대를 채찍으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 * * 통로 밖. "정신없군!" 혈문룡은 그가 불현둣 내뱉은 말처럼 정말 정신이 없었다. 멀리 바위산 위에서 볼 때에는 많다고 해도 실제로 느낌이 오 지 않았었다. 넓은 지옥성 안에 이리저리 홑어져 있는 개미몌로 보였을 뿐 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막상 그 개미떼들 사이에 뛰어들고 나니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었다. 혼자 그 개미떼들 사이에서 싸우고 있었던 비대한 여인이 얼 마나 고수였는지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버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그런 생각들을 어지럽게 하면서도 혈문룡의 손은 쉬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반룡도를 집어 넣고 나누어서 가지고 있던 여의 색자창을 결합해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열을 이루어 선 혹롱기사들 역시 긴 창들을 휘 두르고 있었다. 이런 난전상태에서는 마구 찌르고 때려부수는 창들이 효과적 이었다. 그리고 그들 흑룡기사들은 창을 다루는 무공에 있어서만은 숙 달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보완하며 전진해 나가고 있 는 것이다. 피가 튀었다. 혈문룡의 오른쪽에서 창을 휘두르던 민심창 조훼가 한 사내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비대한 여인의 배후를 공격하고 있던 복면인 하나였다. 그들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있는 것이다. 비대한 여인, 현현소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옷 틈으로 피를 흘 려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더 싸울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체구를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그 녀는 두 명의 복면인을 끈으로 감아 던져 버리고 조훼를 향해 머리 부분으로 보이는 비계 덩어리를 움직여 보였다. 아마도 도와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 '대단한 여인이군.' 혈문룡은 여의색자창을 픗차처럼 휘둘러 복면 두 개를 잘라 버리고 생각했다. '화영은? 그리고 원도살은?' 그 둘은 같이 있었다. 그들 흑룡사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등을 맞대고 복면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혀 정반대의 무공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화영은 언제나 그렇둣이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흘로 고요했다.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진 검끝이 위로 치켜지고 옆으로 그어질 때마다 풀잎처럼 복면인들이 쓰러져 갔다. 거기에 질린 복면인들이 뒤로 물러서면 화영은 다시 검끝을 늘어뜨리고 공격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과거 고란고성에서 보였던 여문량의 신위를 거의 재현하 고 있었다. 그의 검끝에서 적들은 길을 비켰고 쓰러져 갔다. 원도살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는 한 자루 뭉툭한 칼을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끝 부분이 네모 넙적하고 어른의 손바닥 너비만큼이나 넓은 칼이었다. 마치 보통 만도보다 두 배쯤 긴 칼이 절반으로 부러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한 마리의 살인귀였다. 광란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바위산 위에서 신중을 주장하던 원도살과 지금 피에 굶주린 원도살을 누가 같은 사람이라고 볼 것인가? 그는 다가오는 적은 살려 두지 않았고 물러서는 적도 쫓아가 서 죽여 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배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화영의 덕 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영은 보지 않고서도 그리고 별반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 도 않았는데도 원도살의 배후를 철저히 지켜 주고 있었다. 하나는 광폭하고 하나는 거울처럼 고요한 극히 이질적인 두 사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소모전만이 될 뿐이다!" 혈문룡은 싸움에서 잠시 손을 떼고 전황을 살펴보았다.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흑룡사의 고수들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섯 명 내외일 것이다. 나머지는 오랜 전투 경험으로 싸우는 것이지 무공으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희생이 컸다. 좀더 유리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소수로 다수와 맞서 싸우기 좋은 장소! 애초에 그들이 목표로 했던 그곳밖에 없었다. 그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의들과 맞서 싸우는 또 하나의 세력과 접촉해야 했다. 그는 창을 쳐들어 앞쪽의 통로를 가리켰다. 그의 입에서 주위를 뒤흔드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입(突入)!" * * * 제사 관문. 머리! 잘려진 사람의 머리였다. 그것도 그들의 스승 야유신 예충의 머리였다.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싸움에서 손을 떼고 그 문제를 따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주개였다. 주개는 황룡의 손에 들린 예충의 머리를 보는 순간, 눈이 뒤 집혀 버렸다. 순간적으로 그는 황룡의 앞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의 유일한 장기인 귀영종의 신법이 이 순간 발휘된 것이다. "사부님--!" 그의 입에서 처쩔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황룡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든 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자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주개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황룡 대신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왼된에 있던 붉은 옷을 입 은 장한이었다. 장대처럼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묘하게도 머리카락과 눈썹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가 주개를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푸른 섬팡이 번뜩였다. 꽝! 허공에 주개가 떠서 삼 장을 날아갔다. 그 궤적을 따라 피무지개가 그려졌다. 텅! 주개는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 떨어져 튀어올랐다가 다시 떨어 지며 뒹굴었다.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터져 나왔다. 가슴에서는 검게 탄 옷자락 사이로 노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때린 일 장에는 무언가 기이한 힘이 있었음이 분 명했다. 채 닿지도 않았는데 옷자락을 태우고 살갗을 구워 버리며 심 장까지 멈추게 만들었다. 주개는 단 일 장에 절명(絶命)해 버렸다. 야광충이 멈추어 섰다. 흔들리던 그의 신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예충의 머리와 그 앞에 그려진 피무지개, 그리고 삼 장 밖에 나뒹구는 주개의 벌어진 동공을 따라 움직였다. 팍! 그의 목덜미에서 피가 튀었다. 멈추어선 그를 향해 두 개의 괴병이 날아든 것이다.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괴병의 뒤를 따라서 또 하나의 괴병 이 그의 옆구리를 스쳐지나갔다. 야광충은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순간 그는 외계의 모든 것과 차단되어 버린 둣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모든 감각과 사고는 그의 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바라보는 것에만 향해 있었다. 피유우우! 그를 스치고지나갔던 괴병들이 다시 그를 향해 선회하며 돌아 오고 있었다. 야광충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한 순간에 그는 연무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 다. 신음 소리로만 들리는 괴성이었다. 그의 옆구리를 향해 바늘끝 같은 경기가 찔러들어왔다. 그의 진로와 묘하게 겹치는 방향에서 였다. 멈춘다면 모르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옆구리가 관통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욱 빠르게 앞으로 뛰쳐나갔다. 스팟! 그의 허리어림의 옷자락이 뜯겨져 나가고 피가 튀었다. 바늘끝 같은 경기는 그렇게 스쳐지나갔다. 야광충은 황룡의 면전에 바짝 붙어 있었다. 황룡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영문을 모르는 파란 눈! 그 순간,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황룡이 이 의외의 사태에 영문을 몰라하고 있는 그 순간에, 그의 신경이 바로 앞에 닥쳐 든 야광충에게 집중되어 있는 그 순간에 양 옆에 선 두 사내, 흑의와 적의의 두 사내가 황룡의 옆구리로 손을 찔러 넣었다. 팡! 황룡의 몸이 혼들렸다. 그는 불신의 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두 미소 위로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들었다. 칼날은 검은 가죽 장화의 끝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화는 야광충이 신은 것이었다. 애초에 야광충은 황룡을 노리고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 세 사람을 보는 순간에 그는 지하대전에서 로부 옹고트 와 쌍고르마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기억해 낸 것이다. 적의 사내, 아마도 뇌룡과 혹의 사내, 아마도 맹룡이라는 두 사내에게 황룡의 암살을 지시하지 않았던가? 그는 황룡에게 덮쳐 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장화속의 감 춰 둔 연형칠장 중의 두 가지, 귀왕인과 염왕자를 사용한 것이다. 뇌룡과 맹룡이 순간적으로 뒤로 뛰쳐나갔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미 그들의 팔은 강철족쇄 같은 손에 잡혀 있었다. 황룡이었다. 그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두 사람은 경악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황룡은 입을 벌려 피 한 모금을 토해내고는 다시 멀쩡한 안색 로 돌아왔다. 그는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두 사람의 장력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야광충이 뛰쳐들어오면서 내뱉은 신음성은 사실은 서장 어였다.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황룡과 또 하나, 혈사뿐 이었다. 그러나 혈사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노소포의 욕설을 듣기에도 귀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파악! 뇌룡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그는 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다해 허리를 뒤로 굽혔고 그 결과가 그것이었다. 야광충의 귀왕인에 얼굴 반쪽을 찢겨 버린 것이다. 맹룡은 야광충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게도 황룡에게 잡힌 자신의 왼팔을 오른손으 로 잡아 뜯어 버리고 뒤로 굴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팔을 뜯어 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황룡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른손의 힘을 합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손보다도 황룡의 힘이 강했다. 처음에는 뼈가 빠지고 근육이 끊어지더니 마침내 피부가 뜯겨 져 나갔다. 그는 원하던 대로 야광충의 염왕자를 피해 뒤로 물러설 수가 있었지만 더 이상 왼손은 없었다. 황룡이 양팔을 흔들었다. 금빛이 번득였다. 뇌룡의 오른팔이 꺽여져 버렸다. 그는 황룡의 손에 잡힌 채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의 선택도 하나였다. 그는 연속적으로 날아오는 야광충의 귀왕인 앞에 부러진 오르 팔을 가져다 대었다. 간단하게 팔이 잘려 나갔다. 그는 그제서야 황룡에게서도 야 광충에게서도 벗어나 물러설 수가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피가 홀렀다. 왼쪽 얼굴 전체가 그 피에 물들어 갔다. 그는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황룡과 야광충을 향해 덮쳐들 어갔다. 황룡의 다른 팔은 뒤로 물러난 맹룡을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파앙--! 청석판들이 깨어져 흩어졌다. 황룡이 뻗은 장력을 맹룡은 삼 장을 더 굴러 겨우 피할 수 있 었다. 그는 폭풍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구르다가 튀어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한 줄기 검은 선이 되어 황룡을 향해 쏘아져 갔다. 야광충은 서 있었다. 그에게는 뇌룡도 맹룡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목쬡는 단 하나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땅바닥 위로 구 르고 있었다. 사부의 목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사부의 목을 잡아 갔다. "멈춰!" 여인의 짧은 경호성이 그 귓가를 때렸다. 혈부용이 낸 소리였다. 그녀는 야광충을 향해 쏘아지둣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토고쓰가 어느새 야광충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파악!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뇌룡이 야광충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섬광을 금빛 광채가 막았다. 황룡이 손을 뻗어 뇌룡의 공격에 마주쳐 갔던 것이다. 파아앙! 엄청난 진동이 제사 관문의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뇌룡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평소에도 그는 황룡에게 내공면에서는 약간 밀렸다. 그런데 이제 상처까지 입고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뇌룡이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그 순간에 검은 공 같은 것이 황 룡의 품을 파고들었다. 맹룡이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하고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돌진 해 들어갔다. 그의 어깨에는 옷 속으로부터 날카로운 뿔과 같은 것이 튀어 나와 있었다. 황룡이 그 어깨를 한 손으로 후려쳤다. 파앙! 그의 손이 튕겨져 나갔다. 맹룡은 팔이 잘린데다 황룡의 일 장에 다시 충격을 받고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쾅! 그의 어깨가 황룡의 명치에 박혀 들었다. 황룡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그는 맹룡의 어깨에 실린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맹룡의 발 아래에서 청석판들이 우수수 바스러지고 있었다. 토고쓰와 혈부용 중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적어도 야광충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결과였다. 그는 그의 옆구리에 파고든 혈부용의 손을 보며 의문에 찬 눈 빛을 하고 있었다. "왜……?" 그녀는 토고쓰의 공격을 막는 것처럼 다가와 무방비 상태였던 그의 옆구리에 그렇게 손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대답은 토고쓰가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토고쓰는 혈부용의 목에 반이나 파고든 두 개의 비편복월을 뽑아 들어 옷자락에 닦고 있었다. 야광충을 공격하는 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혈부용이 다가가는 것을 제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혈부용이었던 것이다. 야광충의 의문에 찬 시선이 혈부용의 얼굴을 향했다. 웃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반이나 잘려져 대롱거리는 목에서 피를 흘려대고 있었 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반짝이는 이유는 무엇이 었을가? 그 눈빛이 웃음을 머금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혈부용이 약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덩어리진 피뿐이었다. 아직도 기능을 하고 있는 그녀의 심장은 열심히 피를 뽑아 올 려 그녀의 목과 입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뜨거웠다. 그녀의 손이 파고든 옆구리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심 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야광충은 그 열기가 싫지 않았다. 죽어야 한다면 그녀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현실에서 혼란스럽게 끝난 이야기는 저세상에서는 어떻게 매 듭지어질 것인가?' 단지 미완의 이야기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정말은 누구였는지, 그의 사부인 예충이 정말 로 죽은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혈부용 이 그를 정말 사랑하지 않았는지였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남겨 두면 그뿐일까?' 뜨거운 열기가 얼굴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때 토고쓰의 손길이 닿았다. 그는 야광충의 심장 부근의 요혈 몇 개를 점하고, 손바닥을 벌렸다. 붉은 환약 한 알이 그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혈부용의 손에는 독이 있지. 단장부심열독(斷腸腐心熱毒)이 라는 것인네, 그녀는 부용단장화(芙蓉斷腸火)라고 부르더군 다 행히 내게.해약이 있네!" 야광충은 붉은 환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용단장화라고? 이름대로 된 것 아닌가! 부용이 내 창자를 끊어 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해약을 먹어야 하지?' 그러나 이미 그의 목으로 환약은 넘어가고 있었다. 토고쓰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의 친인들이 오늘 전부 죽어 버렸으니 심정은 이해하겠 네. 그러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할 것이 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한족들이 죽어 가고 있어!" 야광충이 그를 노려보았다. 열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차가운 현실이 그의 앞에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넌 누구냐?" 토고쓰가 빙글빙글 웃었다. "'개병공작' 데게룬고이 토고쓰는 오 년 전에 죽었네! 혈편복 도 물론 같이 죽었지. 둘은 동일인물이었으니까! 나는 자네와 같은 한족이야. 그것도 중원에서 온 한족! 금의위(錦衣衛) 부영 반, 등평(鄧坪)이라 부르게." 금의위 부영반! 명황실 직속기관인 금의위의 부영반이 여기 몽고족의 중심에 있는 지옥성에 나타난 것이다. "황상(皇上)께서는 진작부터 여기 지윽성과 로부 옹고트를 주 시하고 계셨네!" 로부 옹고트라는 단어가 야광층을 일깨웠다. 그는 한결 싸늘해진 눈으로 등평을 보며 되물었다. "황상?" "그렇네! 영락제(永樂帝) 폐하!" 둥평은 그 대답을 끝으로 돌아섰다. 그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룡과 맹룡은 내공을 겨루는 것처럼 서로 버티고 서 있었다. 자세는 맹룡이 유리쌨다. 그는 어깨에 솟아난 긴 뿔--사실은 옷 속에 입은 갑옷에 달 린 뿔이었다--을 황룡의 배에 찔러 넣고 밀어대고 있었다. 황룡은 배의 힘으로만 맹룡의 힘에 저항해야 챘다. 그것도 발이 땅에서 떨어져 한참을 말려가다가 담장에 등을 기대고서야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맹룡의 뿔은 길었지만 황룡의 배를 관통하지는 않았다. 황룡의 내공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는 배근육의 힘으로 맹룡의 뿔과 밀어붙이는 힘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불리했다. 맹룡의 뿔이 조금씩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내장에까지 닿게 되면 그때는 아무러한 황룡으로서도 견딜 수 가 없게 될 판이었다. 황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라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를 보낸 황교의 본거지 격인 황룡사(黃龍寺)에는 황교사대 금기지학(黃敎四大禁忌之學) 말고도 삼대호교지학(三大護敎之學) 이라는 것이 있었다. 황룡은 그 중 삼대호교지학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을 행공(行功) 하면 온몸에서 금빛이 발해지는 보리무상강 기(菩提無上 氣)와 용의 움직임을 본따서 만든 황룡금강행(黃 龍金剛行)이라는 권법, 그리고 양인장이었다. 그 삼대호교지학과 사대금기지학에 하나같이 석두의 손길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황교 내에서만 아는 비밀이었다. 내가기공에 관한 석두의 방대한 지식이 라마교에 전수되는 무 공들과 합쳐져 그 가공할 무공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중 너무나 악랄해 황교의 자비심에 위배되는 것들이 사대 금기지학이 되고, 나머지가 삼대호교지학이 되었다는 것이 그 일곱 가지 무공의 유래였다. 그런데 사대금기지학이 외부로 유출된 것이다. 그 원인을 조사하고 회수하도록 보내진 몇몇 호교법사(護敎法 師)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양인장의 구결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황룡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의 신분은 황룡사 내에서도 특이한 것이었다. 야광충들은 그가 석두의 후예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 대였다. 그가 바로 석두의 머리를 깎아 준 스승, 황룡사의 창건자 중 하 나이며 최고호법승이자 석두와 함께 칠대지학을 만든 최고수였다. 올해 세수(世壽)가 이미 백이십 세로 서장인근, 심지어 황룡 사 내에서조차 이미 해탈한 것으로 알려진 황룡활불(黃龍活佛) 이었던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눈부신 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제23장 … 밤 염열지옥(炎熱地獄), 그들은 거기까지 밀려가 있었다. 월몽영의 추측은 정확했다. 몽고족들은 등활지옥을 치는 것에서부터 한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노염군 위대봉을 위시해서 한족의 옥주들이 오두 지옥연무장 으로 소집되어 간 후였기 때문에 간단한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두머리가 없이는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 이었다. 그 계산은 등활지윽에서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기습공격을 당한, 게다가 옥주마저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된 등홰지옥의 한족들은 거의 괴멸되다시피 랬다. 그러나 그 중에도 살아 남은 자가 있어서 흑승지옥으로 도피 해 들어왔다. 그리고 흑승지옥에는 지휘력의 측면에서는 방각보다 오히려 뛰어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대과조 상음이 바로 그였다. 그의 지휘 아래, 흑승지옥과 전갈을 받은 여타의 한족들은 결 사의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세는 불리했다. 애초에 무공은 한족들이 평균적으로 높았다. 멀리 중원에서부터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자들이라 이런 종류 의 싸움 경험도 몽고족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역시 수적으로 밀렸고, 의외의 일이라 준비가 없었다. 게다가 고수가 적었다. 옥주들은 지옥연무장에 가 있는 것이다. 뒤늦게 뛰어든 월몽영과 상음 정도가 절정고수의 수준에 들어 갈까, 나머지 대주급 이상들도 절정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는 달랐다. 두 명의 옥주들이 있었고, 금은옥의 삼검령에서 이령주와 삼 령주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현저히 그들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한족 옥졸들을 상대 로 살수를 펴고 있었다. 원래 삼백여 명에 달하는 한족 중 상당수가 죽고 지금은 일백 을 겨우 넘어가는 수였는데 그나마 계속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방어막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압도적인 다수에 밀려 한족들이 만들고 있는 방어막의 한귀퉁 이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나간다면 흔들림은 무너짐으로 변해 버리고 방어막이 무너진다는 것은 궤멸(潰滅)을 의미했다. 월몽영은 대선룡을 휘둘러 다가드는 한 사내의 목을 휘어감았다. 사내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 검게 변해 버렸다. 월몽영은 대선룡을 낚아챘다. 사내의 목이 대선룡에 마찰되어 꾼어졌다. 머리통 하나가 공중에 떠서 날려갔다. 그녀는 상음에게 소리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상음이 마주 소리켰다. 그의 대과조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자는 거냐?" 아침 나절에 시작된 싸움이 이미 여덟 시진을 경과하고 있었다. 몽고족이나 한족이나 하나같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피에 굶주린 악귀들처럼 서로를 죽이고 죽고 있는 것이다. 이 처참한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인가? 대과조는 천근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올려 정신없이 휘둘러대 며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결론은 뻔했다. 둘 중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는 곤죽이 되건 범벅이 되건 싸움 은 계속될 것이다. 월몽영에게 무슨 좋은 수가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월몽영이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후퇴해요!" "일단? 언제까지?" 이 싸움에 일단은 없다. 죽음이 그들을 쉬게 할 때까지 계속될 싸움이었다. '어쨌든 일단은 물러서야겠군.' 그도 '일단'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다. '일단은 아래의 대초열지옥으로 물러나고 그 다음은…….' 내려갈 곳이 한군데는 더 있었다. 무간지옥. 그러나 그 다음은? '진짜 지옥으로?' 피곤했던 탓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맥락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막상 명령을 내 리지는 않고 있었다. 월몽영이 대신 소리쳤다. "아래로!" 그들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월몽영에게도 낯익은 얼굴을 선두로 하고 처음 보는 무리들이 몽고족의 배후에 나타났다. '사부님!' 통로를 가득 메우고 나타난 무리들의 뒤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둣한 한 사람, 바로 그녀의 사부인 현현소녀가 나타났 던 것이다. 그 옆에서 온통 피로 칠갑을 한 사내가 반월처럼 휘어진 칼을 들고 몽고족들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는 소리켰다. "야광충! 거기 있나?" 월몽영은 갑자기 멍해지는 둣했다. '야광충을 아는 자들인가?'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무지막지한 자들이었다. 삼섭여 명 되는 그 무리가 순식간에 몽고족들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그 선두는 소리쳐 야광충을 찾았던 자였다. 그의 좌우에 선 자들도 대단했다. 피가 튀는 격전의 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평온한 신색을 하고 있는 청년 하나와 그와 정반대로 흉신악살(兇神惡殺)처럼 광분하고 있는 노인 하나였다. 월몽영은 '삵쾡이' 말하르가 청년의 검에 간단하게 쪼개지는 것을 보고 정말로 멍해졌다. '그렇게 간단하게……!' 칼을 든 사내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야광충은?" "몰라." 사내, 혈문룡은 인상을 쓰며 전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손을 저었다. "빨리 후퇴 안 하고 뭐해!" 그들이 뒤에서 돌입하는 기세에 밀려 몽고족이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것이다. 애초에 수가 너무 차이났다. 정비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현현소녀가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말대로 해라!" 그때서야 상음이 소리쳤다. "아래로!" * * * 제사 관문. 야광충은 땅바닥에 뒹구는 예충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는 진귀한 보물이라도 감상하듯이 찬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예리한 칼로 단숨에 베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강한 힘에 의해서 짓이겨지둣 잘려진 흔적이었다. 피가 모두 빠져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예충의 머리는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파랗게 죽어 있 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관심은 잘려진 흔적에도, 푸르도록 창백해진 피부색에도 있지 않았다. 그는 손올 내밀어 사부의 얼굴을 만졌다. 차가웠다. 그는 다시 얼굴 전체를 손으로 쓸어 내렸다. 파랗게 죽은 얼굴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야광충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예충의 뺨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뜯어내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우아악--!" 야광충은 사부의 머리를 들어올리며 짐숭의 울부짖음 같은 괴 성을 질렀다. 제사 관문이 한 순간 그의 울부--짖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 리지 않게 되었다.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장내에는 몇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혈부용과 주개, 그리고 네 구의 시체가 더 있었다. 혈응은 가슴이 뚫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위대봉의 손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위대봉도 그 옆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양손은 어깨에서부터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깊이 패어진 가슴은 죽어 가던 혈응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 다. 그리고 위대봉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이기도 했다. 혈사도 시체가 되어 있었지만 노소포의 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등평의 손에 간단히 죽어넘어갔다. 노소포는 자신이 죽일 수 잇었다고 펄펄 뛰었지만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말올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 상처투성이가 되어 허덕거리고 있는 주제에 누구를 죽인단 말인가? 방각은 노소포와는 달리 자신의 상대를 처리할 수 있었다. 은검령주 양이랑도 그의 무지막지한 도끼질에는, 그보다 소름 이 찌칠 정도의 투지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환'이든 '쾌'든 그 가열한 투지로 휘둘러대는 대월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물론 방각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상처는 그의 인생에, 그리고 길고 많았던 싸움의 역사에는 비일비재한 것이었다. 가장 치열했던 싸움들에 비하면 오늘의 싸움은 시시할 정도였다. 검법에서는 일가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싸움에서는 방각 에 비하면 한참 하수였던 양이랑이었다. 뇌룡과 맹룡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반죽음에 가까운 부상을 입고 도망가 버렸다. 황룡이 그들을 완전히 죽일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 비심이 발동해서 보내 준 것인지는 아무도 오르는 일이었다. 황룡은 그저 상처입은 배를 천으로 감고 있을 뿐이었다. 등평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는 야광충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미소짓지 않아도 밝은 모습 그대로인 등 평의 오습이 야광충의 음울한 모습과 묘하게 대비되었다. 한참의 시간을 그는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일을 두고 있는데 사소한 일 때문에 못하고 있다는 표정 이었다. 사실 급한 일이라면 이보다 급한 일은 평생에 보기 드물 것이 었다. 한족을 구하는 것이 그의 임무는 아니었다. 더구나 한번 한간이었던 한족들을 구하는 것은 그의 임무가 될 수도 없고, 그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단지 필요에 의한 오늘의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지옥성이 세워진 후 아마도 최대의 위기로 기록될 이날에, 그 위 기를 증폭시켜 최대한의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 그의 각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는 사라졌다가 중원에서 다시 나타나면 되는 것이다, 아직은 더 흔란이 필요했다. 그의 의도대로 칠살은 전멸했다. 지옥삼룡이 서로 상잔(相殘)하는 것을 원했었지만 기대에는 약간 못 미쳔다.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두 명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것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여기 있는 이상, 한족들이 제 실력을 다 발휘 해 몽고족과 싸울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마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전멸했을 수도!' 오늘의 일이 그가 꾸며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시작되고 전개되었던 관계로 아무런 준비도 해 놓지 못했던 것이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는 처지였다. 지옥연무장에서 어떻게 나가는가? 입구는 봉쇄되었을 것이다. 멋모르고 나갔다가는 옥석(玉石)이 가려지지 않고 함께 태워 질지도 모른다.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고 하더라도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남는다. 팔대지옥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 지옥성에 새까맣게 깔려 있을 팔한지옥의 무리들과 싸운다는 것이 끔찍했다. 천하에 다시 없는 고수도 기백 명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야광충에게 다가갔다. '일단 이 녀석부터 달래 놓고…….' 야광충의 고함은 이미 멎었다. 그는 조각처럽 서서 자신의 손에 들린 예충의 머리를 바라보 고 있었다. 등평이 입을 벌렸다. "이제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해야지." 야광충이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등평은 흠칫했다. 야광충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그의 심혼(心魂)을 흔들어 놓았 던 것이다. 말문을 막아 버리는 공포스런 눈빛이었다. '건방진 녀석이……!' 그는 스스로 자존심이 상해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야광충의 눈아에 순간적이나마 공포를 느꼈던 것이 분했다. 야광충은 더 이상 그를 상관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는 주개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제사 관문을 나가고 있었다. 노소포가 그 등뒤에 대고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야광충이 잠깐 멈주어 섰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가 짧게 말했다. "무간지옥." * * * 대초열지옥. 한족 최후의 저지선은 대초열지옥이었다. 그들 지옥성의 한족들과 살아 남은 혹룡사의 이십여 명 무리들 은 무간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에 마지막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몽고족의 공격이 그쳤다. 여기 대초열지옥으호 들어와 싸우기 시작한 지 한 시진 만의 일이었다. 이유와 상관없이 한족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생존자를 화인하고 진용(陣容)올 정비할 수 있었다. 비참했다. 삼백여 명을 쎄아리던 한족은 이제 겨우 팔십여 명이었다. 사 개 지옥의 여덟 명의 대주들 중에 살아 남은 자는 대과조 상음을 제외하고는 세 명뿐이었다. 아니, 나중에 들어온 형사랑을 포함하면 네 명이라고 해야 했다. 음명귀 가오륙과 종리매 팽거, 그리고 이빨이 왕창 나가 버린 색명귀 하석이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월몽영과 현현소녀, 그리고 흑룡사의 대두목 혈문룡 십상랑과 원도살 십일랑이 같이 모였다. 혹룡사에서도 피해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팔십여 명의 사망자를 지옥성 초입에서부터 여기까지의 길가 에 뿌려 두고 와 있는 것이다. 화영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흘로 서 있었다. 월몽영이 그를 가리키며 혈문룡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저 정도의 고수가 흑룡사에서 별다른 위치에 있지 않을 리가 없는데 왜 회의에 참석시키지 않느냐는 의미의 질문이었다. 혈문룡이 손을 저었다.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내버려 둬!" '같이 있어도 소용이 없기가 쉽지.' 원도살이 말을 잘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옥성을 빠져나가는가 하는 것이 다." 혈문룡이 벌떡 일어났다. "애초의 목표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랬다. 애초의 목표는 복수지, 탈출이 아닌 것이다. 원도살이 찝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게 알고 보면 혈문룡 때문 아닌가! 기회를 봤더라면 어땠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왕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그런 것들을 따져 봐야 소용이 없었다. 어쩌면 지옥성의 세력이 이 정도임을 모르는 처지에서 기회를 본다고 했다가는 정말 아무런 일도 못 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대단한 상대야. 지금으로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군." 현현소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탈출을 하거나 이대로 싸우다 죽는 것이지."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요." 그는 현현소녀를 알지는 못했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겉에 보이는 것과 실상은 대개의 경우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 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길말고 다른 길은?" 상음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없을 거요." 지옥전에서부터 연결되는 주 통로는 당연히 막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몽고족과 싸우며 내려온 길이 바로 그것이니 말이다. 샛길도 막혔으리라는 것은 월몽영과 그외 사람들이 들어을 때 의 과정을 생각하면 뻔한 일이었다. 그런 길을 남겨 두었을 리가 없었다. 혈문룡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으나 사나 뚫고 나갈 수밖에 없는가?" "그건 아닌 것 같군."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방금 말한 화영을 바라보았다. 월몽영은 자신이 뭔가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말의 내용으로는 혈문룡의 말에 토를 다는 것 같은데 사실은 아닌 것이 아닐까? '자그마치 오 장여나 떨어져 있는데 말을 들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내용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그들이 말하던 것과 정 반대의 이야기 아닌가? 혈문룡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화영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방금 우리보고 한 얘긴가?" 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음이 물었다. "뚫고 나가는 것말고 무슨 다른 길이 있단 말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알 것인가?' 화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들어 무간지윽으로 통하는 통로를 가리킬 뿐이었다. 상음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거기로 가더라도 마찬가지요! 거기에도 다른 길은 없을 테 니까!"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통로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화영이 가리킨 곳에서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었어야 할 무간지옥에서! 그들의 눈은 놀라움에서 이내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눈에 익은, 그리고 기다려 마지 않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야광충과 방각이었다. 혈문룡이 물었다. "어떻게 왔지? 다른 곳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야광충이 짧게 대답했다. "길이 있었지." 길은 분명히 있었다. 지옥연무장에서 팔대지옥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바로 지옥연무장의 구통로에 길이 있었던 것이다. 혈문룡이 반갑게 소리쳤다. "그럼 나갈 길도 있겠군!"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때 부르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이다!" 몽고족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의 공격 방식은 아까와는 달랐다. 선두에 여덟 명의 혹의인을 앞세우고 천천히 전진해 오고 있 었다. 혈문롱의 얼굴이 하얗게 바래졌다.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뱉어졌다. "천강시!" 몽고족들은 천강시를 앞세우고 공격해 온 것이다. * * * 제사 관문. 쌍고르마는 거기 있었다. 야광충 일행이 사라지고 시체만이 뒹굴고 있던 그곳에 그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있었다. 둘 다 피처럼 붉은 적의를 입고, 억시 붉은색의 복면을 뒤집 어 쓰고 있었다. 하나는 여인이었다. 왜소한 몸매로 보나, 조금 솟아나와 있는 가슴어림을 보나 분 명히 여인인 그 적의 복면인은 철퇴(鐵槌)를 들고 있었다. 철퇴 자체야 강호에서도, 여기 몽고에서도 많이 쓰는 무기이 니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여인이 그것을 쓰고 있으니 이상한 것이다. 웬만한 사람 머리통만큼이나 큰 쇠뭉치에 두 치 길이의 쇠못 이 빽빽히 박혀 있는 철퇴! 육중해 보일 뿐 아니라 무지막지하기까지 한 철퇴를 무기로 삼는 여인이란 어떻게 생긴 여인일까? 그녀, 적의 복면인의 가슴에는 '사(四)'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도 이상했다. 묘하게도 '사'자가 거꾸로 뒤집혀 새겨져 있었다. 거꾸로 선 '사'자를 새긴 여인, 바로 팔한지옥의 제사 지옥주 가 그녀였다. 이제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복면인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그의 가슴에는 '오(五)'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팔한지옥 제오 옥주! 쌍고르마가 억태 보고 있던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들고 따라오라! 극도로 조심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머묵거리던 그가 엷은 미소를 떠을 리며 말을 이었다. "독이 아예 떨어지면 나중에 손에 들고 다녀야 될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까!" 나름대로 재기(才氣)가 넘치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뒤에 시립한 두 복면인에게서는 전혀 반응이 없 었다. 쌍고르마는 내심 웃으며 그것을 다시 바라보았다. 목이' 반이 넘게 끊어진 혈부용의 시체! 한 말은 넘게 피롤 쏟아 내어 푸르뎅뎅하게 변한 시체였다.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런 시체가 다시 살아날 것인가 말이다. '그것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면 다시는 죽지 않는다고?' 쌍고르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로부 옹고트, 성주는 더 이상 놀랄 일이란 없을 것 같았던 그 를 최근 연속적으로 놀라게 하고 있었다. 혈부용이 바로 불사체라는 것도, 야광충이 옥령체라는 것도, 그리고 성주의 진짜 정체도……! 그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도……!' 성주도 한 가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으로는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닌데도 그 사실이 왠지 기분이 좋았다. 혈편복의 배반이었타. '그래 봤자 곧 죽을 테지만……!' 사태의 진행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성주의 안배는 그도 질릴 정도로 지독한 것이니 말이다. 오늘 지옥성에서 살아 나갈 지는 몽고족을 제외하면 단 하나 였다. 야광충! 성주가 준비해 놓은 이 거대한 무대에서 살아서 나가는 것으 로 예정된 배역은 그 하나뿐인 것이다. '그런데……!' 쌍고르마는 배역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곧 불쾌한 보고를 떠을 려야 했다. 예정되지 않는 배역들이 무대로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해 낸것 이다. '혹룡사라고? 나참!' 별로 신경 쓸 것도 못 되는 조무라기들이었지만 조금 보기좋 지 않은 모양이 연출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예정보다 시간이 더 걸릴지도……!' 그는 천기전으로 향쌨다. 뒤에서 두 명의 옥주가 혈부용의 시체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제오 옥주가 물었다. "이 통로는 봉쇄하지 않으십니까?" 아까부터 궁금해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통로를 봉쇄하면서 막상 지옥연무장과 팔대지옥으로 통하 는 비밀통로, 그것도 적들이 이미 알아내어 사용하고 있는 통로 를 내버려 둔다는 것이 이상했으리라! "그들이 이쪽으로 오면……." 쌍고르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타했다. "진짜 지옥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제3권 끝 > 제 2 부 제 1 권 차 가 운 여 름 편 1부의 등장인물 야광충(夜光蟲) 주인공. 야유신 예충이 몽고로 망명하면서 주운 아이로 그의 제자가 되어 지옥성 에서 자란다. 해를 보지 못하는 체질을 운명의 저주처럼 짊어지고 사는데, 지옥성에 서 한족의 대숙청이 벌어지는 시점에서야 사실은 로부 옹고트에 의해 옥령체(玉靈 體)로 만들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부에게서 귀영종(鬼影宗)과 이매십보( 十步), 조화십삼수(造化十三手)를, 엽 장청에게서 연형칠장(鍊形七裝), 귀조에게서 전륜나(轉輪拏), 여문량에게서 환검호접 몽(幻劍蝴蝶夢)을 전수받고, 조구에게서 양인장(兩刃掌)을 탈취해 익혔다. 혈부용(血芙蓉) 여주인공. 몽고족으로 본명은 카쿡투 키킥. 지옥칠살을 한 사람이지만 사실은 천 기칠사의 하나인 불사체로 키워짐. 야광충과 연애를 하지만 심심찮게 바람도 피우는 매력적인 여인. 죽은 줄 알았는데, 안 죽고 불사체가 된다. 화영(華英) 여문량의 제자. 날 때부터의 맹인이지만 천부의 감각과 심시신청대법(心視神廳大 法)의 습득으로 눈뜬 사람보다 주위 상황을 잘 파악한다. 고란고성으로 가는 길에 야 광충을 만나 친해졌다. 여문향의 사후(死後) 유언에 따라 지옥성으로 간다. 여문량에게서 심검(心劍)을 전수받는다. 검을 들면 적수가 없다. 황룡(黃龍) 청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백이십 세의 노라마. 본명은 겐나그라 라마로 황교(黃 敎)의 본산인 황룡사(黃龍寺)의 최고수. 천산오조의 하나인 석두의 머리를 깎아 준 사부로, 그와 함께 만든 황교사대금기지학(黃敎四大禁忌之學)이 유출되자 그것을 회 수하기 위해 지옥성으로 잠입해 지옥삼룡의 하나가 된다. 고란고성에서 야광충, 화영 을 만나고, 나중에 지옥성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황교사대금기지학과 삼대호교지학(三大護敎之學)을 석두와 함께 창안했다. 공력을 끌어올리면 몸에서 금광을 발산한다. 아마도 천하제일고수? 혈문룡(血紋龍) 십삼랑(十三郞) 대막의 도적단 흑룡사(黑龍社)의 대두목. 수하들을 죽인 여문량을 추적하다가 고 란고성 싸움에 휘말린 재수없는 사내. 복수를 위해 전전대 대두목이었던 원도살 십일 랑을 초빙해 지옥성을 공략하려다가 다시 지옥성의 내분에 말려드는데……. 반룡도(半龍刀)와 여의색자창(如意索子槍)이 주무기. 월몽영(月夢影) 방소접(龐少蝶) 독목야차 방각의 딸. 무산(巫山) 신녀궁(神女宮) 출신의 현현소녀(玄玄素女)의 제 자. 야광충이 계모를 죽인 사건으로 충돌하면서 알게 된다. 지옥성 내 한족의 비밀결 사체인 수심결(首心結)의 요원. 지옥성 한족의 선두에 서서 몽고족과 싸운다. 원도살(猿刀殺) 십일랑(十一郞) 흑룡사의 전전대(前前代) 대두목. 대막의 전설적인 도적, 흑룡사의 원한을 갚기 위 해 지옥성으로 갔다가 싸움에 휘말린다. 손등에 난 상처와 뭉툭한 칼이 특징. 등평(鄧坪) '개병공작(開屛孔雀)' 데게룬고이 토고쓰, 혈편복(血 )의 등의 신분으로 나오지 만 사실은 영락제의 명을 받고 지옥성에 침투한 금의의(錦衣衛) 부영반(副令班). 비편복월(飛 鉞)이라는 박쥐처럼 생긴 도끼를 무기로 쓰지만 실력은 아직 완 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야유신(夜遊神) 예충(芮衷) 야광충의 사부. 흑도의 문파인 귀영문(鬼影門)의 문주로 야맹상(夜孟嘗)이라고도 불린다. 포쾌들의 추적을 피해 대막으로 도망와서 지옥성 팔대옥주의 하나가 된다. 지옥성 숙청의 날, 머리만의 시체로 던져지는데……. 독목야차(獨目夜叉) 방각(龐覺) 흑승지옥(黑繩地獄)의 옥주. 금팔괘순(金八卦盾) 비마월(飛磨鉞)을 사용하는 무 공이 장기. 지옥성주 로부 옹고트 천산파의 대장로 지윽성주. 몽고 최고의 실력자 벤야시리의 후원자. 현천산파 장 문인 아루타이의 사부. 모든 음모의 주모자. 그 능력은 미지수. 아루타이 벤야시리의 후원자이자 군사(軍師). 현천산파 장문인. 로부 옹고트의 제자. 지옥성 총옥주 쌍고르마 일명 검은 표범. 로부 옹고트의 심복. 1부에는 얼굴만 비졌지만 2부에 본격적으로 나오는 인물들 음양산인(陰陽散人) 진운(晋雲) 사십대 정도의 잘생긴 유생(儒生). 사실은 칠십이 넘은 강호의 노마두(老魔頭), 강 호사사(江湖四邪) 중의 하나, 희대의 사기꾼, 색마(色魔)로 사유(邪儒)라고도 불린다. 야광충 일행에게 사기를 치려다가 꽐이 부러지는 봉변을 당한다. 마원(馬元) 진운에게 속아넘어간 통인(通人). 십자유성검(十字流星劍) 백리극(百里克) 삼십대 초반의 청년. 얼굴에 칼 자국. 원도살과 합께 진운을 만났던 인물. 자세히 말하면 재미가 없음. 도신 도귀(刀神刀鬼) 1부 2장에 나왔던 두 사람의 귀머거리.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만도를 들어 진운을 제압했던 인물들. 기타 조연등--대부분 죽었음. 노염군(老閻君) 위대봉(韋大峯), 소선건곤(小旋乾坤) 팽호(彭壺), 현현소녀(玄玄素 女), 천산오조(天山五祖), 지옥칠살(地獄七殺), 지옥삼릉(地獄三龍), 대과조(大瓜爪) 상음(常陰), 종리매(從 魅) 팽거(彭鉅). 음풍영(陰風影) 형사랑(邢四郞), 음명귀(陰冥 鬼) 가오륙(賈五六), 요풍귀(夭風鬼) 요륵(夭勒). 색명귀(索命鬼) 하석(賀晳), 무상귀 (無相鬼) 파적(巴 ). 윽랑군(玉朗君) 금오(琴伍), 금령(琴玲). 사괘(斜掛) 조오(曺五) 성난 황소[怒牛] 빌라가, 민심창(悶心槍) 조훼(曺卉). 청두사(靑頭獅) 복군무(卜君武) 벤야시리, 아루타이, '멧돼지' 가하이릭, '살쾡이' 말하르 '쏘아진 화살' 히야 우루순, 몽고군관 툰투구 등등……. 제24장 1409년 6월 2일 새벽 제25장 1408년 6월 2일 새벽 제26장 아침 제27장 그후 반 년 1 제28장 그후 반 년 2 제29장 그후 반 년 3 제30장 1409년 7월 1일 오전 제31장 낮 제32장 저녁 제24장 1409년 6월 2일 새벽 양주부(揚州府), 대홍교(大虹橋). "그런 지옥에서 어떻게 나왔지?" 방각(龐覺)은 진운(晋雲)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 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흐린 달은 이미 지고, 미명(未明)의 하늘은 검푸르게 잠겨 들고 있었다. 그 검푸른 하늘,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바람이 높이 소리치며 홀렀다. 난간에 기대어 아까 전부터 뭔가를 씹고 있던 혈문룡(血紋龍) 이 입 속의 것을 뱉어 내고는 투덜거렸다. "꼭 그때처럼 더러운 날씨군." 방각은 혈문룡이 뱉어 낸 물건을 가만히 굽어보았다. 건량(乾粮)조각. 물자 사정이 좋은 이곳 강남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양고기조 각이었다. 몽고에서 중원까지 근 반 년의 여정 동안 그들 일챙은 내리 그것만 먹었었다. 이제는 보는 것조차 지겨운 것이 그것인데, 유독 혈문룡은 싫증도 내지 않고 입이 쉴 때마다 그 바짝 마른 양고기를 씹어대었다. 오래 씹으면 감칠맛이 나는 것이긴 하지만 맛 때문에 씹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방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날의 고통과 분노, 그 모든 것이 응어리진 원한을 잊 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되었다. --로부 옹고트! 무얼 씹느냐는 말에 혈문룡이 대답했던 말이었다. "어떻게 나왔냐니까?" 방각은 고개를 돌려 진운을 바라보았다. 진운도 그를 마주 바 라보았다. 그는 귀주성에서 여기 양주로 올 동안, 그리고 양주성에서 어 설프게나마 자리를 잡은 이 반 년 동안 단편적으로 들은 지옥성 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방각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생각하기도 싫 었다. 그는 혈문룡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날의 바람처럼 차갑지는 않군." 지옥성을 나오던 그날의 바람은 정말 살갗을 엘 듯 차가웠었다. 여름이 늦게 오는 몽고의 고원이라서, 아니 산곡(山谷)을 돌 아 흐르는 바람이라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방각은 그 모든 이유보다는 수백의 시신(屍身)을 뒤로 하고 나와야 했었기 때문이라는 한 가지 이유가 더욱 그럴듯하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여기 양주성, 네모진 성곽(城廓)을 감싸고 흐르 는 운하(運河)위로 불어와서 버드나무 가지를 혼드는 바람은 아무리 거칠어도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칙--!" 혈문룡은 표정을 묘하게 뒤틀더니 바닥에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품속에 손을 넣더니 다시 양고기조각을 꺼내었다. 돌처 럼 딱딱한 양고기조각, 그는 그것을 이빨로 뜯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그도 방각만큼이나 그때의 일을 생각하기 싫어했다. 백 명이 들어가 단 두 명, 그와 원도살(猿刀殺)만이 살아 나 온 지옥의 싸움터를, 거기 남은 아흔여덟 명을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싫어 하면서도 잊지 않으려는 행동은 뭔가? 방각은 혈문룡의 뒤틀린 표정과 그가 씹는 고기조각의 상관관 계를 생각하며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방각이 딴전을 부리거나 말거나 진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다. 방각의 정면으로 다가 와 얼굴을 바짝 대고 한 자씩 끊어서 물었다. "어.떻.게.나.왔.냐.고!" 방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둣한 기세였다. "왔군!" 혈문룡이 짧게 말했다. 다리 저편에 검은 그심자 십여 개가 나타났다. 아마도 오늘밤 만나기로 약속한, 그리고 죽여야 할 대상들이리라. "가능한 한 잔인하게, 라고 했지?" 혈문룡이 야광충에게서 들은 명령을 되풀이하며 건들건들 다 리 중간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은 이미 엉덩이에 매달린 반룡도 를 잡고 있었다. --가능한 한 잔인하게, 양주성이 공포에 질리도록! 야광충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진운이 권한 계획이기도 했다. 그들에겐 최단시간 내에 그들의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공포로 채색된 이름을……! 방각이 진운을 밀치더니 다리 난간에 기대어 두었던 도끼를 들어올렸다. 그는 진운의 곁을 스쳐 가며 내뱉둣 말했다. "한 사람이 홉혈귀(吸血鬼)가 됐지. 덕분에 우린 지옥을 나 왔고." 진운이 그 말에 숨은 의미를 생각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그에게 방각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흡혈귀? 무슨 소리야, 그게?" 혈문룡은 이미 다리 중앙에 가서 다리 저편에서 오는 사내들 과 말을 건네고 있었다. "장락방(長樂幇)?" 혈문룡이 짧게 물었다. 사내들의 중앙에서 걸어오던 제법 화려한 옷을 입은 중늙은이 가 되물었다. "그렇다. 너희들이……?" "그럼 됐어!" 혈문룡은 몹시 살기가 동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상대들이 그가 기다리던 자들임이 분명해지자 다짜고짜 반룡도를 뽑으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어, 어……!" 사내들은 무공을 배우지 않은 평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수도 아니었다. 그들은 혈문룡의 기세에 놀라 움찔하면서도 피할 생각들을 못 하고 있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었다. 건달들이 싸움을 해도 우선 상견례(相見禮)를 하고, 시비(是 非)를 가리며, 어깨를 재는 것이 암묵적으로 약속된 혹도의 법 도(法道) 아닌가! '이런 싸움의 기본도 모르는 것들이……!' 중늙은이의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혈문룡의 칼은 칼끝을 뒤로하고 뽑히더니, 반원을 그리며 돌 아 칼끝을 앞으로 한 모습으로 바로 잡혔다. 그 짧고 작은 동작에 크게 휘두르는 혈문룡의 팔동작이 합쳐져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에 세 개의 목이 걸렸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소리도 없이 흐르는 칼날, 그 하얀 날에 스쳐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세 개의 목은 감동을 받기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려진 단면들의 하얗게 질린 살덩이 사이로 붉은 자 국이 번지고, 이내 분수처럼 솟구쳐서 흩뿌려지는 액체는 어둠 속에서도 강렬한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비현실이라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느낌들……! "어, 어, 어……!" 중늙은이는 코끝에 끼치는 짙은 비린내와 얼굴에 흩뿌려진 끈 적한 덩어리들이 선혈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전신경을 경주 해야 했다. 오늘 그는 이상했다. 눈으로 들어온 것들이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것이 반응으로 되돌아 나오는 데에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렸다. 대신 감 각만은 평소의 몇 배나 예리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견하기에도 고수임에 분명한 혈문룡의 동 작이 하나하나 눈에 새겨지듯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것도 달조 차 져 버린 이 어두운 밤에 말이다. 혈문룡이 다시 한걸음 내디디면서 반월처럼 생긴 칼을 아래에 서부터 위로 사선으로 휘둘러 또 한 사내의 사타구니에서 오른 쪽 어깨우물을 잇는 선으로 그어 버리는 모습을 그는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 칼의 둥에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기는 모 습이 조각되어 있는 것까지도, 심지어는 그 용의 비늘까지 구 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예리한 칼날이 지나갔다. 그 다음엔 옷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그리 비싼 옷은 아니었다. 그가 속한 장락방의 하급무사가 좋은 옷을 입을 수는 없었다. 그저 속에는 뭘 입든 겉에라도 대충 가리고나 다니라고 그도 평 소에 말하곤 했으니 말이다. 거친 베로 짠 그 옷이 비스듬히 찢어져 ,살이 보이나, 하는 순 간에 모든 것이 붉은색으로 가려졌다. 비스듬한 일(一) 자로 쏟아져 나오는 핏물, 그 다음엔 뭔가가 덩어리져 튀어나왔다. 그 사내도--분명 그의 수하인데도 그는 마치 나무토막이 잘 려 나가는 것을 보듯 무감동하게 볼 수가 있었다.--뭔가 반응 을 보이려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느려 보였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손을 들어올리려 하는 것 같았지만 칼날이 이미 지나간 후였 다. 몸을 돌리려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칼을 든 사내가 이미 그의 목을 날린 후였다. 모두가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움직이는데 다만 혈문룡이라는 사 내와 그의 칼만이 생기있게 움직였다. 혹은 그렇게 느껴졌다. 그들은 마치 호젓한 산길에서 호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굳은 동작으로, 그러나 압도적인 죽음의 예감 앞에서 바늘끝처럼 일 어서는 예리한 감각으로 혈문룡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부수(屠夫手)의 춤처럼 어울리지 않게 생기 넘치는 혈문룡 의 동작을, 그 동작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피의 꽃을……. 중늙은이가 눈도 깜짝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또렷이 지켜보는 가운데 느릿느릿 돌아가던 생각이 뒤늦게 입에 다다랐다. "너……, 넌 뭐냐!" 그때 이미 그의 수하들은 마지막 하나가 땅바닥에 길게 드러눕 는 중이었고, 그의 앞에는 거대한 도끼를 든 노인이 서 있었다. 중늙은이의 입이 다시 한번 물어 보려 움직이는 순간에 도끼 의 뒷등이 다가들었다. 퍽! 붉은 피가 가득 퍼졌다. 방각은 그 피를 피할 생각도 않는 둣 꼿꼿이 서서 주위를 둘 러보았다. 다리 위는 온통 질퍽한 액체로 덮여 있었다. 지금은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밝아지면 아마도 붉은색 일색일 것이다. 혈문룡이 십여 구의 시체들 틈에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살기에 굶주린 듯 시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혹 여 덜 죽은 자가 있다면 확실하게 매듭을 짓겠다는 둣한 모습이 었다. 방각은 도끼를 허리춤에 끼우며 중얼거렸다. "잔인한 건 이 피만으로 충분하지." 혈문룡에게 들려주려 하는 이야기였다. 더 이상 잔인할 필요 는 없었다. 열 명의 죽음, 열 구의 시체와 다리 위에 가득 흘려 진 피만으로도 오늘밤은 충분히 잔인한 밤이었다. 설혹 그것이 아무리 대단치 않은 인물들의 죽음이었다 하더 라도……. 그와 혈문룡이 다가가자 그때에야 진운이 일어났다.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진운이 진지한 모습으로 속삭여 왔다. 방각은 다시 한번 눈살 을 찌푸렸다. '지겨운 놈!' "흡혈귀라는 게……, 그러니까 저……." 혈문룡이 말을 꾼었다. "당주(堂主)!" "당주?" "우리에게 달리 당주가 있었나?" 진운이 알겠다는 둣,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랬다는 듯 입 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직접 물어 보고!" 진운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가 아무리 집요하다 해도 감히 당주에게 그런 것을 물어 볼 만큼 집요하진 않았다. 그 당주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야광충일 경우 더욱 그런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어둠 속을 걸어 대홍교를 떠났다. 서호(西湖)를 거쳐 흐르는 운하는 성의 서쪽 성팍을 따라 북 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성곽이 끝나는 지점에서 크게 만곡(彎曲) 하여 작은 호수를 만든다. 거기서부터 운하는 둘로 갈라져 한 줄기는 그냥 남으로, 다른 한 줄기는 남쪽 성곽을 따라 동으로 흐른다. 그들 세 사람은 그렇게 *!여 흐르는 지점에 가서 성곽의 아래 로 붙었다. 운하의 한 줄기가 그 지점에서 성곽의 아래를 통과 하억 성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운하는 성밖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큰 흐름 사이사이 로 갈라진 물줄기가 성안을 바둑판처럼 나누며 흐르고 있어서 양주성 안에서는 작은 배만 타고도 어디든 갈 수가 있을 정도였 던 것이다. 거기 작은 오봉선(烏蓬船--지붕이 덮여 있는 배) 한 척이 세워져 있었다. 그들 세 사람이 올라타자 배 이물에 앉아 있던 사공이 삿대를 운하의 바닥에 깊이 찔러 넣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방각은 오봉선의 지붕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조용히 중 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였군!" 진운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방각은 그 시선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배는 이미 양주성 안으로 들어와 지저분한 운하의 한 귀퉁이 로 흘러가고 있었다. 운하의 옆에 늘어선 초라한 목재건물들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양주에서 가장 초라한 거 리인 구(舊)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멀리 발해만(渤海灣)의 누런 바닷물로부터 솟아오른 이글거리 는 불덩이가 내뿜는 열기도 오늘 새벽에는 푸르게 바래 버려 싸 늘한 냉기만을 전할 뿐이었다. 그 푸른빛의 끄트머리에 건물들의 검은 지붕자락이 걸리고, 지붕들 틈으로 보이는 새털구름의 가늘게 찢겨진 가장자리부터 금라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바로 거기에서 피곤한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새벽이었다. 제25장 1408년 6월 2일 새벽 대초열지옥.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지하팡장에 길게 울리다가 사라졌다. 혈문룡은 소리가 난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 속에 천강시(天 屍)의 손에 두 조각으로 길게 찢겨진 시체 한 구가 들어왔다. 시체에는 원래는 옷이었을 검은 천조각이 걸려 있었다. 검은 옷은 흑룡사(黑龍社)에서도, 여기 지옥성의 한족들도 입 었다. 혈문룡은 그 시체가 그 둘 중 어느 패거리의 것인지 창황 중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비명 소리는 그의 것이었 다. 그리고 그는 '우리 편'이었다. 혈문룡은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분노의 신음성을 토해 냈다. 천강시들은 마치 양 몌 속에 뛰어든 이리와도 같이 거칠 것 없는 살육을 벌이고 있었다. 그 손이 거치는 곳마다 검은 옷, 붉은 살들이 뜯어지고, 찢어지는 것이다. "비켜--!" 목이 쉬었는가, 아니 극도의 분노가 목을 막아 버린 탓일 것 이다. 혈문룡의 긴 호통 소리는 끝이 갈라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라 천강시를 향해 날고 있었 다. 손에 들린 반룡도가 광채를 뿜어내었다. "죽기 싫으면 비켜!" 혈문룡은 다시 외쳤다. 그는 그의 가슴속으로 격류(激流)를 이루며 흐르는 분노만큼 은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반룡도의 광채도 공중에 헛 되이 뿌려지고만 있었다. 천강시는 여덟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것에도 다가가기가 승지 않았다. 그와 천강시의 사이에는 한족들이 겁먹은 양 떼처럼 이 리저리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강시에게 뗬지어 덤비는 것도,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도 아 닌 무의미한 손짓과 움직임들……! 단지 그들이 느낀 공포만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그 무의미한 반응들이 그들의 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나마 천강시들을 상 대할 수 있는 혈문룡과 같은 고수가 효과적으로 움직일 공간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이 다시 뛰었다. 죽는 것보다는 다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겁먹은 한족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공중에 떠서 목표를 정했다. "죽어--!" 혈문룡이 다시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반룡도가 그의 양손에 잡혀 허공으로 치켜 들렸다가 직선으로 내리쳐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오직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한 공 격이었다. 깡--! 혈문룡의 온몸이 떨렸다. 반룡도의 두꺼운 도신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그러나 거기 맞은 천강시의 머리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저 잠시 주춤거렸을 뿐……. 그 잠시 동안의 시간에 혈문룡은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열 손가락 모두가 반룡도의 손잡이에 눌어붙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신히 피를 통하게 하고 다시 반룡도를 움켜잡았을 때 천강 시의 손이 눈앞에 다가왔다. 피와 살점--아마 그 자신의 것은 아닐 것이다.--이 지저분하게 묻은 손이었다. 혈문룡은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그 손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형편없이 느린 손짓이었다. 천강시의 손은 어설픈 몇몇을 잡 을 수는 있어도 혈문룡은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천강시의 손짓을 가볍게 피하고 반룡도를 우측 아래로부 터 비스듬히 치켜 올리며 오른손을 떼서 용이 새겨진 반룡도의 뒷등을 잡았다. 칵! 반룡도가 천강시의 왼쪽 갈비뼈 어림에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혈문룡은 허리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은 칼의 뒷등을 최대한 으로 누르고 있었다. 왼손이 반룡도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슈왁! 칼라이 반달그림자를 그렸다. 천강시가 주줌 옆으로 밀려갔다. 혈문룡이 거기 따라붙었다. 그의 눈은 방금 반룡도가 베고 지 나간 자국을 보고 있었다. 붉은 줄 하나! 그게 끝이었다. 강철도 베어 버릴 그의 반룡도가, 있기만 하다면 용의 목이라 도 잘라 버릴 반룡도법이 천강시에게는 붉은 줄 하나만을 남긴 것이다. 풀잎에 스친 상처 정도밖에 안되는 한 줄기 혼적만을……. 전문적으로 접근을 위주로 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각(死 角)으로부터 공격을 한다는 반룡도법의 묘용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보통의 도검으로 베어 버리지 못할 것도 베 어 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그의 반룡도법에는 있었다. 칼날의 선에 직각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선을 따라 그어 버리는 것 이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뼈를 위에서 내려치면 끊기 힘들지만 칼을 대고 옆에 서부터 밀며 자르면 의외로 승게 잘린다는 원리였다. 그러나 천강시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부웅! 천강시의 팔이 혈문룡의 머리를 옆으로부터 후려쳤다.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끝난 것을 보고 잠시 망연해 있던 혈문룡이 본능 적으로 칼을 들어올려 막았다. 팡--! 혈문룡의 몸이 들썩 들리더니 옆으로 다섯 걸음이 넘게 밀려 갔다.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천강시의 힘만은 일류고수를 휠씬 넘어서 있는 것이다. 거기에 가공할 정도의 단단함이라니! 비척비척 물러서면서 혈문룡은 아픔보다 먼저 절망감을 느꼈다. '누가 이 괴물들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늦으면 소용이 없었다. 어찌어찌 없앤다 해도 만약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땐 살아 남 은 소수도 몽고족들의 손에 죽고 말 것이다. 그 자신 집단전(集團戰)의 경험으로 다수와 소수의 싸움에서 는 무공이 그리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고수도 백 명, 이백 명을 흘로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망가려 해도 갈 곳도 없었다. 이렇게 사방이 막힌 곳에서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 철골강시들에게 백 명의 수하 전 부를 잃던 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오늘도 그렇게 될 것인가?' 그는 강한 반항심을 느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저항감! 그것은 단순히 죽기 싫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 선 어떤 것, 바로 지기 싫다는 오기였다. 죽을 수는 있어도 지 기는 싫다는 정신이었다. 처강시는 그가 밀려가자 손 닿는 굿에 있는 먹이를 찾고 있었다. 집이 부서진 개미 세거리처럼 도망가는 그의 수하들, 그리고 이제는 '우리 편'이 되어 버린 한족들을 노리고 잇는 것이다. 그는 손을 돌려 반룡도를 도갑(刀匣)에 꽂았다. 그 손에 십여 개의 철봉이 새로 잡혔다. 쇠사슬로 연결된 철봉!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나누어 잡았다. 촤라락! 쇠사슬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철봉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그의 손에 일 장이 넘는 긴 창이 들려졌다. 여의색자창(如意索 子槍)이었다. 반룡도와 더불어 그의 양대 절기 증 하나인 창술을 발휘하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다. 참을 쓰려신 보통 의 몇 배나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반룡도조차도 사람들이 걸려 제대로 사용하지 못챘는데 하물 며 창이야! "비켜라, 제발--!"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족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팡장의 한편으로 몰리고 있었다. 좁은 웅덩이에 가득 몰린 미꾸라지처럼 부글거리는 것이 지금 그들 흑룡사와 한족들 의 모습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혈문룡은 장내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들 흑룡사만이라면 전멸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비참한, 저항조차 한번 제대로 못하는 꼴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흑룡사도, 지옥성의 한족들도 흔란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흔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 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혈문룡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야광충은 냉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통하는 입구였고 그곳에는 다가오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 약간 올라간 바위 턱이 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 지옥성의 어느 지옥이나 마찬가지 구조로 되어 있지만, 여기 대초열지옥도 반경 삼십억 장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광장을 중심으로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이 끝이 막힌 통로로 주거지로 쓰이는 곳이라는 것은 적들도 알고 그들도 알 았다. 누구도 그 방향으로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것은 목전(目前) 의 공포를 피하려 뒤통수에 붙어 있는 절망을 선택하는 일이었 으므로, '적' --언제부터 그들이 적이 된 것일까!--은 천강시 여덟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들 스스로도 천강시 의 파괴적인 힘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적어도 여덟 천강시만으로도 그들 한족들을 괴멸 상태에 몰아 넣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전일 고란고성에서도 그와 화영 거 기에 황룡까지 힘을 모아서야 하나를 제거하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양인장으로 천강시를 깰 수 있을까? 그와 화영, 황룡은 그런대로 하나나 둘씩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천강시를 하나라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있을까? 하나라도 자유롭게 놓아준다면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 이었다. 지금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그 모습처럼……. 유리구슬처럼 차가운 눈에 비치는 저 흥건한 선혈의 광장, 울 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야광충은 강시 같은 괴물들의 장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일반 무림고수는 아무리 강해도 인간인 만큼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괴물들은 지치는 일 없이 무한정 싸우고, 살육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괴물들은 상대할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면, 예를 들어 천 강시의 단단한 가죽을 뚫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면 그냥 당하고 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죽을 것인가?' 야광충은 긴 숨을 토하며 한 천강시의 가슴팍에 작렬하는 금 라 섬광(閃光)을 바라보았다. 천강시의 발이 허공에 떴다. 그의 가슴팍이 뒤로 홱 밀려 마 치 고개를 앞으로 뻗은 것처럼 보였다. 가슴팍 옷자락은 그렇게 뒤로 날려 가 몇 바퀴나 디구는 도중 에야 터졌다. 옷자락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도 그때였다. 방금 작렬한 금빛 광채의 잔상(殘像)이 아직도 그의 가슴팍에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천강시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인세(人世)에 보 기 드문 기공(奇功)에 정면으로 격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강 시는 옷자락을 조금 태운 것말고는 거의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천강시를 후려쳤던 황룡 역시 마찬가 지였다. 그는 무표정했다. 그의 얼굴에서는 전혀 실망이라든가 놀라움 이라든가 하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냉정하다고 부를 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강기( 氣)에 얻 어맞은 천강시와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이미 외계의 사물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황룡의 두 손이 다시 모였다. 손끝에서부터 금빛이 반짝이더 니 이내 두 손을 완전히 가리고, 곧 금광은 그의 온몸을 휘황하 게 감쌌다. 보리무상강기(菩提無上 氣)였다. 그가 혈문룡처럼 같은 편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고 비교적 자 유롭게 천강시와 싸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강기의 벽에 막혀서 한족들은 누구 도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얻어맞고 뒹군 천강시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룡은 허리를 구부리며 가슴 앞에 합장했던 두 손을 펴서 손 바닥을 위로 보게 한 채 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동자승(童子僧)이 부처에게 절하는 모습, 동자배불(童子拜佛) 이었다. 무공에 기본적인 지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보는 초 식, 하지만 그 누구도 진지하게 쓰지는 않는 초식이 그것이었 다. 상대에게 예를 표하는 동작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황룡의 동자배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을 감싸고 흐르던 금팡이 내민 두 손끝에서 용트림 하둣 눈부신 라을 발하더니, 한 순간 두 자루의 창이 되어 전면 을 향해 격사되었다. 무거운 격중음(擊中音), 비산(飛散)하는 금빛 광채가 한 순간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어떤 자세, 어떤 부위를 통해서도 무형의 기(氣)를 유형의 힘 으로 만들어 보낼 수 있는 보리무상강기의 위력에 놀랜 눈들이 었다. 천강시는 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한족들의 눈에, 실망이, 역으로 몽고족들의 눈에 찬탄과 희열 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눈들은 이내 반대로 변했다. 천강시의 동작이 어딘지 어색했다. 마치 관절이 제대로 움직 여지지 않는 둣한 모습. 당연한 일이었다. 가슴을 관통해 두 개의 구멍이 나며 뼈대를 으스러뜨려 놓았는데 아무리 아픔을 모르는 천강시라지만 정상 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오옴……!" 황룡이 묘한 소리를 내며 양손을 번갈아 내밀었다. 따다당! 천강시의 양쪽 어깨와 목에 다시 세 개의 선명한 손자국이 새 겨졌다. 처음 것은 보통의 손보다 크고, 두번째는 손바닥 크기 만하고, 마지막은 두번째 것의 반밖에 안되는 자국이었다. 어느것이나 한 치 이상의 깊이였지만 그 중 세번째 것은 세 치 깊이에 이르러 거의 목덜미를 반이나 파고들었다. 밀종아뇩다라삼먁삼보리(密宗阿 多羅三 三菩提), 일명 삼첩 인(三疊印)이라 부르는 기공이었다. 장인은 점점 작아지지만 위력은 오히려 베가(倍加)되는 기공. "오오옴……!" 황룡의 입은 분명히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소리는 그 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는 한 손은 반쫌 오므리며 뒤로 끌어당기고, 다른 손은 활 짝 펴서 앞으로 내미는 시늉을 했다. 삼첩인을 맞을 때까지 꼼짝 않고 서서 당하기만 하던 천강시 가 발은 뒤로 한 채 땅에 끌리고 상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앞으로 불쑥 내민 채 황룡을 향해서 주르륵 끌려왔다 그 얼굴에 황룡의 내민 손이 닿았다. 퍼억! 끌려오기는 했지만 분명 일 장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상태였 다. 그런데 마치 황룡의 손이 순간적으로 길어진 듯하더니 천강 시는 머리가 홱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보리반야인(菩提般若印)이었다. 유가밀공(瑜伽密功)의 일종인 대수인신공(大手印神功)과 같은 부류에 들어가는 기공이었다. 바바바방! 튕기둣 삼 장 밖으로 날려 간 천강시의 온몸에 다시 금빛 광 채가 작렬했다. 천수패엽장(千手貝葉掌). 황룡은 손이 천 개라도 되는 듯이 연속적으로 권장을 날려 그 와 천강시 사이를 금빛 손그림자로 채우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천강시는 도마 위의 북어처럼 으깨지고 있었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군!" 등평이 팔짱을 끼고 서서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싸움 구경을 하다가 문득 한마디했다. 야광충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급히 해야 할 일 이 있었다. 등평 따위의 말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황룡이 천강시 하나를 동작 불능 (動作不能)의 상태로 몰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작 불능이라니! 등평의 말대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무공으로도 고작 동작 불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천강시의 두려움을 새삼 일 깨워 주는 표본이었다. 다른 일곱은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한족은 이미 반으로 줄 어 있는데……! 야광충은 다시 긴 숨을 내뱉었다. 단전으로부터 극한(極寒)의 기운이 솟구쳐서 폐부(肺腑)를 식히고는 입을 통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내 그 차가운 기운의 뒤를 따라 솟구쳐 진기를 흔들 어 놓는 뜨거운 기운. 현음지맥(玄陰之脈)의 야광충에게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혈부용(血芙蓉)의 일격은 정확했고, 또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감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녀는 그의 가장 깊숙한 곳을 찔렀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며 이마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혈맥 이 소리내며 뒤틀렸다. 창자가 꼬이는 둣한 아픔이 가슴으로 바 로 밀고 들어왔다. 이 상태로는 움직일 수도 없다. 야광충은 길고 낮게 숨을 들이마셔 기혈(氣血)을 안정시키며 등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 친구도 대단하군!" 등평의 턱은 화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칵! 화영의 청풍검(靑風劍)은 분명히 천강시의 어깻죽지를 내려쳤 지만 쇠에 부딪친 것도 아니고, 나무에 부딪친 것도 아닌 둔탁 한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천강시의 팔에 남은 상처도 그렇게 잘 안 드는 칼로 후려친 것처럼 작은 반달 모양의 생채기뿐이었다. "역시 안되나……?" 화영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회수해 가슴 앞에 세웠다. 말은 아쉽다는 둣이 하지만 방금의 일검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화영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일검으로 천강시의 팔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월몽영을 구했던 것이다. 월몽영의 주무기는 대선룡(大旋龍), 길이가 이 장이 넘는 긴 채찍이었다. 혈문룡이 사람들 때문에 여의색자창을 휘두르지 못한다면 그 녀는 더욱 그러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반경 오 장여의 공간 은 이 대초열지옥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터였기 때문이었다. 화영과 그녀, 방각과 현현소녀에, 살아 남은 몇몇 대주들까지 여기 한데 섞여 천강시 다섯을 상대로 드잡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곳의 한족들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 봐야 갈 곳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자연 그들의 싸움은 필사적이었다. 현현소녀의 주 무기도 채찍과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채대(彩帶), 허리띠였다. 그러나 그녀는 월몽영과 달리 무기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비대한 몸을 거의 무게감 없이 움직이는 것도 신기할 정도 인데 거기에 채대로 천강시의 팔다리를 얽어 묶고, 걸어 넘기 며 제법 효과적으로 하나를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무산신녀궁 비전의 절기 중 그녀가 이어받은 단 하나, 현녀 십구대(玄女十九帶) 중의 하나인 포쇄결(捕鎖結)을 사용하고 있 는 것이다. 그녀에 비해 월몽영은 강했다. 용맹했다. 그녀는 채찍을 여러 겹으로 감아 오 척 정도의 길이로 짧게 모아 쥐고 그것으로 천강시를 후려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사부에 비해서 적을 잘 다루지는 못하 고 있었다. 천강시는 그녀의 공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들이면서 도 꿈쩍도 않는 것이다. 강하 것을 상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보다 강한 것으로 꺾어 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부드러움으 로 강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월몽영이 천강시보다 강하지 않은 바에야 그녀의 강함은 소용 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현소녀의 포쇄결이 천강시를 상대하는 데에는 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포쇄결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쇄결을 익힐 수 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부드러움이 강함을 꺾는다고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은 포쇄결의 중심이 되 는 부드러움이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서 그녀는 곧 천강시의 손에 잡혀 버렸다. 화영이 구해 주지 않 았다면 죽고 말았을 위험에 처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대주들에 비하면 나았다. 살아 남은 몇몇 대주들은 무공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계속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해 피하면 반드시 죽지만 두려움없이 죽음을 직 시(直視)하면 흑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약했고, 천강시는 너무 강했다.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종리매(從 魅) 팽거(彭鉅)였다. 그는 대과조(大瓜爪) 상음(常陰)을 제외하고는 대주들 중에서도 가장 고수 죽에 드는 자였지만 천강시의 손에서 버티기에는 부족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긴 허리가 꺾일 때,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그 허리가 구부러질 때, 그가 죽어 가며 내뱉는 마지막 숨소리가 꺾여진 허리를 홀러 입밖으로 토해질 때, 그때 에는 이미 그 과정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저 압도적인 무력 앞에 힘없이 꺾여지는 동료의 시신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풍영(陰風影) 형사랑(邢四郞)이 오랜 동료의 죽음을 보고 분노의 절규를 터뜨렸다_ "우와아아앗, 더러운 괴물……! 죽어랏!" 의미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절규가 끝나 갈 즈음에는 그는 팽거의 시체를 들고 있느라 드러난 천강시의 양 옆구리에 두 자 루 단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의 애병인 한 자 반짜리 쌍비단 검(雙飛短劍)이었다. "안……!" 상음은 형사랑의 무모한 공격을 저지하려 소리를 치다가 중도 에 말을 끊었다. 말로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 이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랬다. 천강시는 팽거의 시체를 떨어뜨렸다. 형사랑의 공격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좀더 싱싱한 먹이를 노리려니 자유로운 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상음은 형사랑의 두 자루 쌍비단검이 들어갈 때만큼이나 빠르 게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을 한눈으로 흘리며 바닥에 몸을 던졌다. 쉬왁, 컥! 천강시의 발 밑에서 바닥에 깐 배를 축으로 회전하는 상음. 그의 손에 들린 대과조, 그 낫처럼 구부러진 긴 날의 끝에 천 강시의 발목이 걸렸다. 그는 잉어가 물을 차고 튀어오르는 이 어번신(鯉魚飜身)의 신법으로 몸을 튕겨 일어나며 대과조를 끌 어당겼다. 형사랑은 단단한 철벽에 단검을 부딪친 것 같은 막막함을 느 끼며 한 발 물러서던 참이었다. 그에게 천강시의 두 손이 내밀어지고 있었다. 그때 천강시가 휘청 뒤로 기울어졌다. 쌔액! 색명귀(索冥鬼) 하석(賀晳)의 색명도(索冥刀)가 바람을 가르 고 천강시의 목에 틀어박혔다. 상음의 대과조가 천강시의 발목 을 당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형사랑은 천강시가 두 손은 자신을 향해 내민 채 뒤로 기우뚱 쓰 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죽엇!" 그는 쌍비단검을 양손에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몸을 위 로 뻗어 올리며 두 손으로 술잔을 권하는 쌍수경주(雙手敬酒)의 자세로 단검을 찔렀다. 하석이 내려친 칼날의 바로 아래, 만약 강시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면 천돌혈(泉突穴)이라 불러야 할 곳 이었다. 펑--! 천강시가 바닥에 뒤로 길게 누워 버렸다. 상음, 형사랑, 하석 의 무기들이 그 위로 쏟아져 내렸다. '피해야……!' 야광충의 구슬 같던 눈이 잠깐 흐려졌다. 그러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신색이 었지만 사실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 한마디라도 내뱉는다면 그는 한동안 정상으로 회복되기 힘들 것이었다. 그땐 한족들은 누구도 살아 남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참하겠군!" 둥평이 안됐다는 둣 중얼거렸다. 화영이 돌아섰다. 그는 장내가 아무리 소란해도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었 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 이 그림처럼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시신청대법(心視神聽大法). 눈이 아니라 마 음으로 보며, 듣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들을 수도 있는 거짓말 같은 경지, 신선들의 이야기에나 나올 것 같 은 그 경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이 그의 눈 대신이었 던 것이다. 지금 그의 뒤통수를 향해 뻗어 오는 천강시의 일권도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는 검을 겨드랑이 사이로 돌려 내뻗었다. 킥! 천강시의 주먹이 화영의 검끝에 멎었다. 가공할 만근지력(萬 斤之力)이 가느다란 검끝에 막혔던 것이다. 의식이 없는 천강시도 이 순간만은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 였다. 그리고 이내 다른 주먹을 뻗어 화영을 후려치려 했다. 화영은 어느새 몸을 돌려 천강시를 향해 서 있었다. 표정없는 보석 같은 눈이 이 순간 유난히 빛났다. 그는 지난 몇 달 간 고란고성에서 여문량의 지도를 받아 가며 연마했던 검의 새로운 경지를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천강시의 주먹이 다가오고 있었다. 화영은 증을 가슴 앞에 세우고 움직이지 않았다. 검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천강시의 주먹이 코끝에 닿을 둣이 다가들었다. 주먹보다 그 주먹이 일으키는 날카로운 경기가 먼저 피부를 찔렀다. 화영의 검, 보검은 절대 아니지만 질 좋은 강철로 벼려진 청 풍검의 끝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청풍검은 뱀의 혓바닥처럼 민 홰하게 떨리고 있었다. 칙! 짧은 소음이 발해졌고 모든 것이 멈추어졌다. 천강시의 주먹이 완전히 뻗었다. 방어를 생각지 않고 무지막 지하게 휘두른 주먹은 화영의 머리가 중간에 걸리는 큰 반원을 그렸다. 천강시의 상체는 내민 주먹을 따라 비틀어져 뒷등이 보 일 정도였다. 그는 그 자세로 멈추어 있었다. 화영은 처음의 그 자리에서 반 자 옆으로 비껴 서 있었다. 천 강시의 주먹을 비껴 홀릴 수 있을 정도의 위치, 그리고 청풍검 을 천강시의 목에 꽂아 넣을 정도의 위치였다. 천강시와 화영은 그렇게 서로 끌어안을 둣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우호적인 자세가 아님은 천강시의 목덜미 뒤쪽으로 튀어나온 청풍검의 끝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화영의 청풍검이 거기 빛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섬광과 함께 내밀어진 검끝은 천강시의 목을 두부처럼 꿰뚫고 거기 멈추어져 있는 것이다. 화영은 천강시의 목을 뚫었다. 그러나 천강시를 죽이지는……, 아니 파괴하지는 못했다. 천강시가 몸을 움직였다. 화영이 검을 뺐다. 어느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그 시짐에 청풍검을 빼지 않았다면 검은 부러지고 말았을 것 이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다행히 검도 부러지지 않았다. 천강시가 다시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뚫려진 구멍 하나는 분명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든 것은 조금 전과 변함이 없었다. 화영의 표정에도 변함은 없었다. 비록 검강(劍 )의 초기 단계가 기대한 것처럼 파괴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효과가 있음은 천강시의 목을 뚫음으로써 실증되었 다. 목을 뚫을 수가 있다면 다른 곳도 뚫을 수 있는 것이다. 검강을 검신을 따라 흐르게 함으로써 베는 것도 찌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좀더 수련이 필요하지만 아쉬 운 대로 일단 쓸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영은 발끝만으로 미끄러지둣 뒤로 움직여 자신의 앞 에 있는 천강시를 내버려두고, 상음의 가슴을 밟고 있는 천강시 를 향해 검을 찔러 갔다. 등평의 말대로 비참한 결과였다. 대주들의 협공에 의해 땅바닥에 누워 버린 천강시는 단지 중 심을 잃었던 것뿐이었다. 그 뒤에 쏟아져 내린 공격들이 그에게 타격을 입혔다면 얘기 는 달라졌Jt지만 불행히도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강시가 바닥에 누운 채 발을 들어 하석을 걷어찼을 때 대주들은 가슴이 멎는 듯한 충격과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하석의 가슴은 이미 멎어 버렸다. 천강시가 팔을 휘둘러 상음의 다리를 때리며, 다른 한 손으로 형사랑을 잡아갔을 때 그때 이미 그의 가슴은 소리 내어 터져 버렸다. 천강시의 일격이 만든 결과였다. 형사랑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천강시의 발에 걷어차인 하석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물러섰다. 피를 담아 놓은 가죽주머니를 누르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 습으로 피를 뿜으며 일 장이나 허공으로 들렸다가 다시 떨어지 는 하석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물러서고 있었다. 상음은 천강시의 손에 발목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천강시의 만근지력 앞에 그의 발목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그는 바닥에 손을 짚고 급히 되일어나려다가 쓰러져 버렸다. 발목에서부터 타는 둣한 아픔이 기어올라와 온몸이 마비될 정도 로 저렸던 것이다. 겨우 허리를 들고 힐끗 바라본 발목에 하얀 나뭇가지 같은 것 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예리한 각도로 부러져 나간 끝, 핏라 끈 같은 것이 이리저리 붙어 있는……. 그것이 정강이 살을 뚫고 튀어나온 자신의 다리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한참이 더 걸렸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시급한 일 이 있는 것이다. 상음은 몸을 굴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가슴팍에 육중한 무게가 실 렸다. 상음은 자신의 가슴을 밟고 있는 천강시를 절망적으로 보았다. 우두두둑! 갈비뼈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염라대왕의 망치소 리처럼 들려 쾅다. 통렬한 아픔! 상음의 꽉 다물어진 이빨들이 부러져 튀어나왔다. 고통에 못 이긴 그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화영의 검은 천강시의 무릎을 꿰뚫고 있었다 상음의 가슴을 으스러뜨린 그 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볼 수 있 는 무릎이었다. 이제는 꿰뚫어도 파괴해도 소용없는 무릎이었다. "상(常) 아저씨!" 화영의 귓가에 들려 온 월몽영의 절규는 이 발에 밟힌 사람, 그래서 죽어 버린 그 사람의 신분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여기 광장에 뒹구는 무수한 주검과 마찬 가지로 그가 생전에 지녔던 이름이 무엇이든 이제는 상관없게 된 것이다. 화영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약간의 분노 를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싸움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서도 그리 익숙한 감정은 아니 었다. 쉭! 청풍검의 검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검은 이미 천강시의 무릎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원 은 무릎 안쪽에서 그려졌다. 하얗고 조그만 둥근 것이 검의 회전을 따라 천강시의 무릎에 서 빠져 나왔다. 인체와 골격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슬개골(膝蓋 骨), 즉 무릎의 중앙에 있는 종지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슬개골을 잃어버린 그 천강시가 이제 적어도 두 발로 서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을 것이고……, 칙! 한쪽 무릎을 지탱해 주는 축을 잃고 기우뚱 쓰러져 버린 천강 시의 어깨에 청풍검이 다시 박혔다. 천강시는 바닥에서 일어나 려 버둥거렸다. 칙! 반대된 어깨. 칙! 목덜미였다. 화영의 검은 관절과 관절을 연결하는 부분만을 정확히 꿰뚫어 버리고 있었다. 천강시는 이제 벌레처럼 꿈틀거릴 뿐 누구에게도 위헙적인 존 재가 될 수 없었다. 위협적인 존재는 그의 등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천 강시였다. 화영은 뒤로 돌아서면서 검을 휘둘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 가 회심의 일격이라도 가한 것처럼 침착한, 달빛처럼 매끄러운 일검이었다. , 독목야차(獨目夜叉) 방각(龐覺)은 애초부터 강(强)일변도의 무공을 가진 사람.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 본 적이 없다. 천강시와 싸우고 있다고 해서 변할 이유갈 없었다. 그래서 가 장 먼저 쓰러진 사람이 그였다. 금빛 방패가 빙그르르 돌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 한쪽이 형편 없이 우그러져 있는 것을 사람들은 승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 다. 이 상황에서 자기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도 신경을 쓸 수 있 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월몽영은 물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월몽영이기 이전에 방소접(龐少蝶), 한 아버지 의 딸이었고 딸은 아버지의 안위에 무관심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한 순간, 방패가 떠오르자 사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버텨 오던 월몽영은 천강시보다는 아버지의 방패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땀과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아버지의 쪽으로 향했을 때, 방패는 포물선의 정점을 지나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고 방각은 도끼의 구부러진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천강시의 머리를 내 려치고 있었다. 그녀는 보았다. 붉게 물든 얼굴, 산발한 머리카락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 고, 두 눈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라이 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이 신념에 가득 찬 모습으로 단호하게 도 끼질을 하는 모습을.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와 변함이 없었다. 항상 강하고 꺾이 지 않는 용기를 가진 남자였다. 지금의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그런 용기와 단호함은 아버지에게는 변하지 않는 가치였다 비록 당신의 온몸이 이미 상처투성이였다고 해도, 반쫌 허공 에 뜬 당신의 배가 천강시의 손가락에 걸려 반쯤 찢겨지고 있다 고 해도……. 설흑 이것이 당신의 마지막 도끼질이라고 해도……. 세상엔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 그녀는 결과를 보기도 이전에 먼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 이전에 먼저 눈물부터 흘렸다. 그러나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방각의 거대한 도끼가 한 순간 일그러졌다고 할 정도로 강하 게 천강시의 머리를 때리고, 때린 그 힘보다 더 강하게 되튕겨 나가며, 방각의 몸 또한 그렇게 튕겨져 구르는 것을…… 한 줄기 선연한 핏자국이 아버지의 뒤로 장식처럼 그려지는 것을……. "아버지!" 월몽영의 부르짖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떨쳐지고, 여태 짧게 감겨 있던 대선룡이 주르르 그 긴 몸을 펼치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얘야!" 현현소녀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방각을 날려 버린 천강시만을 전심전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내에 가득한 신음 소리와 비명, 거친 숨소리들은 이미 그녀 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와 천강시 사이에 있는 숱하 군상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쐐액! 이 장에 달하는 대선룡이 검은 몸체를 꼿꼿이 세워 창처럼 찔 러 갔다. 머리의 세모꼴 금속이 독사의 그것처럼 곤두서서 흔들 리고 있었다. 천강시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검은 채찍의 머리가 잡혔다. 월몽영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찍의 끝이 자신을 움켜쥔 천강시의 팔뚝을 감았다. 마치 살 아 있는 뱀처럼…….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대선룡을 잡아당겼다. 채찍의 몸체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천강시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끌려왔다. 어쩌면 그가 그냥 다 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거리가 필요했다. 천강시를 자신의 영향력으로 다룰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현소녀의 눈빛이 다급해졌다. 월몽영이 지금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천강시를 부식 버 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한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 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도와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는 방금까지 제자가 맡고 있던 천강시까지 둘을 한꺼번에 상대 하고 있었다. 끽……! 끽……!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려 오고 있었다. 월몽영이 천강시의 목을 감아 당기고 있는 소리였다. 그녀도 결국 고란고성에서 야광충이 한 것과 같은 생각에 도 달했던 것이다. 그냥 자를 수 없다면 감아서 당겨 보면……, 이라는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목이라도 졸라 보자는 발악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 문에 현현소녀는 말리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 드러나는 것 이 그 결과였다. 천강시의 다른 손이 대선룡을 잡았다. 그리고 당겼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월몽영은 몸을 젖히고 버텼지만 주르륵 당겨 가고 말았다. 천강시의 두 손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밀어졌다. 월몽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손을, 그리고 눈을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 분명 그것은 인간의 눈은 아니었다. 달려오는 마차의 바퀴에 깔려 죽는 순간에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은 분명히 아닌, 의식이라곤 없는 물건 같은 것에 치여 죽는 기분이라는 것이……. 검은 두 손이 눈앞에 극도로 확대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저 두 손에 잡히면 그녀의 머리는 계란처럼 깨지고 말 것이었다. 문득 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천강시는 잠시 중심을 잃은 모습 이었다. 천강시의 목과 팔에 오색의 채대 하나가 걸려 있었다. 월몽영은 그것이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도……. 그녀는 대선룡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한 손으로 대선룡을 잡아당기면서 그녀는 천강시에게 덮쳐 갔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 들린 단검, 소용아(少龍牙)가 천강시의 눈에 파고들었다. 대선룡의 손잡이에 감추어져 있던 용의 이빨, 소용아였다. 천강시는 그녀보다는 현현소녀에게 더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 했던 모양이었다. 소용아가 눈을 후벼 파고 있는데도 천강시는 현현소녀의 채대를 당기고 있었다. 혀혀소녀는 비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손을 극도로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쇄결은 사량발천근(四兩拔千斤)과 같이 상대의 움직임과 힘 에 섬세하게 영향을 받는 무공이었다. 당기면 당겨 가며 밀고, 밀면 역으로 밀리면서 당긴다. 강하 면 강한 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거기에 알맞은 힘을 사용해야 하고, 한 치라도 힘의 방향이 틀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 는 것이었다. 처강시는 현현소녀에게 밀려 오히려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채대는 마치 꼭두각시라도 조종하듯 그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 었다. 월몽영은 그 사이에 천강시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눈 하나가 빠져 굴러 나왔다. 소용아는 다른 눈을 후비고 있었다. 애초에 현현소녀가 상대하던 두 천강시가 그 싸움에 붙었다. 혀현소녀의 등을 향해 발톱을 세운 것이다. 그 중 하나가 간자기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고개 를 돌렸다. 형사랑이 창 하나를 주워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그 처강시의 발목을 때려 현현소녀를 향해 다가가지 못하게 한 것이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천강시는 아무런 방해 없이 다가갔고, 현현소녀 의 넓은 등판에 손을 박아 넣을 수 있었다. 현현소녀는 등짝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월몽영이 매달린 천강시의 중 심을 잃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만 떨어져!" 월몽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사부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생각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천강시의 눈을 통해 소용 아를 머릿속 깊숙이 찔러 넣고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을 휘저어 놓아도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천강시는 한 손으로 현현소녀의 채대에 계속 저항하면서 다른 손을 돌려 월몽영의 어깨를 잡았다. 으스러지는 고통이 한 순간에 심장까지 밀고 들어왔다. 월몽 영은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모아 소용아를 한바퀴 돌렸다. 눈구멍에 긁힌 칼날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천강시가 다시 휘청거렸다. 현현소녀의 채대에 의한 결과였다. 거기 화영이 있었다. 그리고 달빛처럼 싸늘한 검기가 말려왔다. 화영은 순간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검끝은 천강시의 목에 매달린, 그러나 이제는 어깨를 잡혀 움 직이려야 움직실 수도 없게 된 월몽영의 목에 실낱 같은 차이로 멈추어져 있었다. 달빛이 달빛 그림자[月夢影]를 잘라 버릴 뻔했던 것이다. 현현소녀의 등짝은 완전히 터져 있었다. 갈가리 찢겨져 등골 이 보일 정도였다. 저편에서는 형사랑이 휘두르던 창이 천강시의 손에 수수깡처 럼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방각은 배가 터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지만 미약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월몽영의 어깨가 조금씩, 천천히 으스러지는 소리가 그의 귀 에 들려 왔다. 광장의 저편에서는 혈문룡과 원도살, 그리고 황룡이 각각 하 나씩의 천강시를 맡아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하나, 예전에는 석두의 후예라 불리던 황룡이 또 하나 의 천강시를 동작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지만 아직 천강시 는 여섯이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천강시는 황룡과 자신 외에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 람이 없었다. 화영은 찰나의 순간에 그런 정세를 파악했다.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힘이 닿으면 다행이고, 그렇 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냉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었다. 그는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귓전에 울리는 비명과 병장기 소 리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청풍검의 끝이 다시 라을 발하 기 시작했다, 천강시의 손이 팔꿈치까지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살이 쪘다고 해서, 설흑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이 쪘다고 하더라도, 뼈까지 같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현현소녀의 뼈대도 그래서 보기보다는 작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등뒤로부터 파고든 천강시의 손은 두터운 살덩어리를 한참이나 파고들어가서야 딱딱한 늑골에 부딪쳤고, 그것을 부러 뜨리고 허파를 갈가리 헤치더니 양쪽으로 넓게 퍼진 허파의 사 이에서 심장을 찾아내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딱 멈주었다. 두터운 피부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넓은 얼굴에 비해 작기 그지없는 입술이 벌어졌지만 말보다 피가 먼저 튀었다. 목구멍에서 쌔액, 쌔액 하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홀러나왔 다. 폐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사…… 부……!"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월몽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현소녀의 입술이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가 그리 두렵지도, 추하지도 않다 고 월몽영은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사부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머지않을 것이 다. 천강시의 손아귀에서 이대로 빠져 나가지 못한다면, 그녀도 결국은 사부와 같은 모습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이 다소나마 사부에게 덜 미안한 이유가 되었다. '사부님……, 아버지……!' 어깨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이 점점 세력권을 확대시키고 있 었다. 현현소녀의 죽음으로 자유로워진 천강시의 다른 한 팔이 눈앞 으로 다가왔다. '이제 곧……!' 월몽영은 죽음을 각오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죽음이 차라리 달콤한 휴식의 손길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변화는 소리없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앞에 빛이 번뜩였다.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던 천강시의 주먹이 강한 벽에라도 부딪 친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천강시가 그 반동으로 기우뚱하는 가 했더니 월몽영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천강시의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어깨에 난 구멍이 아마도 그녀의 자유를 되찾아 준 주원인일 것이다. 천강시의 힘없이 늘어진 팔이 중거였다. 그 다음은 목이었다. 빛, 화영의 청픗검이 만들어 내는 검광은 천강시의 목을 수없 이 왕복했다. 그때마다 목은 조금씩 바람구멍을 만들었고, 결국 몇 줄기 가죽에 매달려 어깨 위로 처져 흔들리게 되었다. 머릿속이 뒤집어지고도 움직이던 천강시가 그 상태에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아무리 천강시라도 그냥 장식 으로 달려 있는 머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화영의 발이 가볍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의 얼굴 옆을 스쳐 갔다. 그는 현현소녀를 죽인 또 다른 천강시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왔다. 월몽영은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 상태에서도 무슨 소리일까, 하고 의아해 했다. 화영이 다시 소리쳐 불렀다. "야광충!" 월몽영은 머리를 천천히 움직여 야광충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간지옥의 입구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싸움 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취하고 있던 그 자세였다. 그러나 월몽영은 문득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 싸움을 해결하려면 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여태 안 나선 거지?' 검을 쓰는 이 사내와 저기 혈문룡이라는 사내는 사실 야광충 때문에 여기 온 것 같았다. 그들 한족들의 입장에서도 옥주가 모두 쓰러진 상태에서는 지 휘할 사람이라고는 야광충밖에 남지 않았다. 수심결의 일원으로 서, 그리고 회주의 제자로서……. 양쪽 모두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는 것이다. 월몽영은 야광충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까 맣게 잊고 여태 그가 나서면 유리하다는 생각을 않았던 것이 신 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는 다른 통로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야광충이 팔짱을 푸는 것이 보였다. "갈라라!" "음?" 둥평은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야광충을 보았다. 야 광충이 하는 말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갈라놓으라는 그 말과 손 가락으로 광장의 절반을 가르는 시늉을 하는 야광충의 동작을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상황을 분석해 보아도 그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으 니 말이다. '일단 천강시와 한족들을 갈라놓자는 이야기겠지? 혼전 상태 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그러나 왜 그 말을 그에게 하는가? 등평은 팔짱을 풀고 양쪽으로 손을 벌려 보였다. "내가 왜?" 야광충이 그를 싸늘한 눈으로 보더니 손을 뻗쳤다. "죽기 싫으면!" 등평은 피식 웃었다. 그는 구경만 하다가 거미줄 같은 지하통 로로 다시 도망가 숨으면 되는 것이다. 망명자, 한간들을 위해 손을 빌려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의 신형이 흐려졌다. 붉은 안개는 피어오르지 않았지만 예 의 은신술을 발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라져 버리면……!" 원래는 '어쩔 셈이냐!'고 조롱 조로 물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 야 광충의 그것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화십삼수가 발휘된 것이다. 등평의 눈이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졌다. 그 얼룩의 대부분은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감정이었다. 연막은 없었지만 은신술의 위력이 크게 감소되는 것은 아니었 다. 도구보다는 본신의 신법에 의지하는 것이 그의 은신술이었 던 것이다. 그런데 왜? 어젯밤에는 통했는데 지금은 왜 통하지 않는 것인가? 야광충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둥평은 달리 제압된 곳 이 없는데도 그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야광충이 그의 눈 에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하자는 대로 않으면……, 장담하지! 넌 반드시 죽을 것이 다." 그는 등평의 목덜미를 놓고 돌아섰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 었다. 그에게는 한번 더 등평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는 준비했고 등평은 준비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등평이 욀요했다. 아니, 등평 정도의 무공을 지닌 협조자가 한 사람 있는 것은 이 시점에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 간신히 움직일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는 아직 정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대강이라도 회복된 지금 첫 공격의 목표를 등평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등평은 돌아선 야광충의 등을 묘한 라을 띠고 바라보았다. 그 는 야광충을 돌려 세워서 한번 더 잡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가 망설여졌다. 한번 더 그의 손에 제압당하면 그는 심령상 중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타격으로 그는 영영 야광충이라는 이 사내에게 위 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팔 할 이상의 성공 률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는 도박은 하지 않는 것이 욺다고 생각 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야광충이 돌아서기 직전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의 죽음을 예고하지 않았던가!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가?'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지하통로에 다른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흑은 단순한 위협?' 그럴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역시…… 도박은 할 수 없었다. 등평이 야광충의 뒤를 스치듯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갈라놓으면 되는 것인가?"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형사랑을 향해 몸을 날렸 *. 그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어 한족들 사이를 스쳤다. 등 평의 모습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변화는 순간적으로 시작되었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끝이 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야광충의 목표는 애초부터 천강시의 제거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단지 천강시를 한족들로부터 분리시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륜나라는 것이 있음으로 해서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는 화영의 도움 아래 겨우 죽음을 면하고 있던 형사랑의 옆 에 내려섰다. 화영은 그의 등장을 예민하게 느끼고 천강시 하나에게서 손을 뗐다. 그 천강시가 야광충에게 달려들었다. 야광층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천강시의 주먹과 그의 손이 스치둣 지나가는 그 순간, 야광충의 손이 천강시의 소맷자락을 잡고 발은 무릎을 건드렸다. 천강시가 순간적으로 허공에 떴다. 야광충에게 소맷자락을 잡 힌 그대로였다. 야광충의 양손이 원을 그렸다. 천강시는 수레바퀴 돌 듯이 회 전하며 일 장 밖에 나가떨어졌다. 고란고성에서 귀조가 기마대를 던져 버리던 바로 그 수법 전 륜나였다. 야광충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처음 사용하는 수법이지만 대강의 묘리를 습득했다는 것이 명 확해졌다. 야광충은 이제 조금 더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 다면 이제 망성일 것이 없었다. 그는 천강시가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는 곳으로 미끄러지둣 다가갔다. 겨우 일어난 천강시가 그의 손 아래 다시 한번 날려 갔다. "껍질만 단단하지 정말 쓸데없는 것들!" 야광충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의 눈은 새로운 먹 이를 찾고 있었다. 화영의 상대는 이제 하나였다. 혼자서도 여유있게 상대할 수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야광충이 끼여들었다. 또 하나의 천강시가 나가떨어졌다. 화영의 검에 맞부딪쳐 주 춤 물러서는 천강시의 목덜미를 나꿔채 던져 버린 것이다. 화영의 검이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도 이제는 애써서 부수려고 하지 않았다. 야광충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그는 한걸음씩 전진하며 일단 멀리 던져진 천강시들이 다시 다가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야광충이 멍하니 서 있는 형사랑과 한족들을 돌아보며 짧게 명령했다. "생존자!" 비교적 그와 오래 지냈던 형사랑이 그 뜻을 재빨리 짐작했다. 그 는 천강시의 마수에서 벗어난 한족들을 지휘해 생존자를 찾았다. 월몽영은 방각의 곁에 얄아 있었다. 방각은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는 있었다. 그 외에는 거의 산 사람이 없었다. 형사랑은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조금은 침착해졌다. 그리 고 그제서야 생존자를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그것은 이후의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문제였다. 그가 소리쳤다. "어디로 옮깁니까?" 천강시 둘을 화영에게 맡기고 황룡이 싸우는 곳을 향해 가던 야광충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무간지옥!" 등평은 야광충보다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는 천강시보다 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우성치는 한족들을 집어 던졌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긴 했지만 천강시보다는 다루기 쉬운 존재 들이었다. 여기에는 천강시가 셋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를 황룡, 혈문룡, 그리고 원도살과 민심창 조훼가 맡고 있었다. 흑룡사의 사대천왕 중 또 한 명, 청두사 복군무는 이미 비참하게 죽은 후 였다. 그리고 그들은 화영보다 눈치가 덜 빨랐다. 황룡은 그렇다 치 고, 혈문룡과 원도살은 등평 덕분에 장내가 약간 정리되는 기미 가 보이자 잘됐다는 듯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혈문룡이 본격적으로 여의색자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동 안 쌓였던 분노를 한꺼번에 털어 버리려는 둣 광풍노도(狂風怒 濤)와도 같이 매서운 기세였다. 원도살도 살기에 있어서는 그에게 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 렇게도 냉철하던 그가 한번 피를 보더니 광분의 경지를 보여 주 고 있었다. 거기에 야광충이 이상한 고함을 치며 끼여들었다. 서장어로 황룡에게 말한 것이다. 황룡이 문득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뒤집어 연달아 삼십여 장 을 내갈겼다. 천강시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밀려갔다. 야광충은 혈문룡과 천강시 사이에 파고들었다. 여의색자창의 날카로운 끝이 바람을 끊으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야광충이 그 에게 소리쳤다. "수하들을 살릴 생각을 해!" 혈문룡을 향해 달려들던 천강시가 그의 손끝에서 한바퀴 맴을 돌더니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챙! 여의색자창이 멈추었다. 야광충의 왼쪽 팔목에 감겨진 비구에 막혀서였다. 혈문룡의 충혈된 눈이 야광충을 꿰뚫어 버릴 듯 노려보고 있 었다. 그의 숨소리가 분노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퍼퍼펑! 나가떨어졌던 천강시가 일어서더니 중풍 걸린 노인처럼 몸을 떨며 물러서고 있었다. 황룡이 그에게도 삼십여 장을 선물했던 것이다. 황룡은 제자리에 다리를 벌리고 선 채 두 천강시를 각각 한 손씩만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어렵지가 않았다. 그저 다가오면 밀어서 제자리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혈문룡이 먼저 눈을 깔았다.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 왔다. "수하를 살리는 게 먼저라……! 옳은 말이다." 그는 여의색자창을 거두더니 원도살과 천강시 사이로 찔러 넣 었다. 원도살이 주춤 물러섰다. 야광충이 그 천강시의 앞에 바짝 붙더니 손을 내밀었다. 천강 시가 양손을 들어 그를 후려쳐 왔다. 야광충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꺼지더니 천강시의 뒤에 다시 나 타났다. 그의 손이 천강시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천강시는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야광충의 두 손이 원을 그렸다. 그의 발이 천강시의 하체를 가볍게 차는 것과 동시였다. 천강시는 공중에 솟구치더니 격렬 히 회전하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원도살이 여의색자창을 비켜 천강시를 향해 다시 덮쳐 들려 했다. 혈문룡이 소리쳤다. "냉정을 찾으세요! 대열을 정비해야 합니다!" 원도살은 뭉툭한 도를 여의색자창에 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이빨 가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더니 이내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처럼 변했다. "으…… 으……, 으아악!" 원도살이 칼을 들어 여의색자창의 강철창대를 세 번이나 두드 렸다. 혈문룡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원도살의 눈이 굳게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그의 검게 죽어 들었던 안색이 순식간에 제 색을 찾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좋아, 물러서자!" * * * 지하통로. 그 느낌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봄바람이 가늘게 불어 뺨을 간질이고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가볍게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나면 경험하는, 방금 바람이 불었 는지도 의심스러운 그런 느낌. 너무도 가벼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착각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느낌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종의 움직임이 확실히 있었으며, 그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런 식으로 가벼운 존재감은 단 하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천둔귀(天遁鬼)! 숨고자 하면 누구도 찾을 수 없으며, 움직이면 그 형체를 알 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천둔귀였다. 그가 만들어 낸 작품 중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앞길을 터 준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칠흑 같은 지하통로의 어둠 속에서 이빨을 드 러내고 웃었다. 누군가 이 어둠을 뚫고 사물을 환히 볼 수 있다 면 로부 옹고트의 모습에 경악했을 것이다. 온통 피로 물든 옷, 피로 물든 얼굴 가운떼에 하얗게 드러난 이빨을 보고 말이다. 그는 마치 방금까지 핏물에 절이고 있다가 꺼내어진 고깃덩이 처럼 유혈에 정어 있었다. 그것이 그 자신이 흘려 낸 피는 아닌 모양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피를 흘리고 살아서 움직이기는 불가능하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오 히려 극도로 유쾌한지 줌추듯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물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시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만 남은 시체였다. 그는 목에서부터 끊겨진 한 개의 머리통을 들고 무간지옥에서 지옥연무장으로 통하는 지하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통로는 길고 좁았다. 그리고 어두웠다. 지옥성의 어디에도 횃불을 밝힐 수 있지만 여기는 불가(不可) 했다. 그것이 쌍고르마에게 내린 명령이었었다. 이십여 년 전 에……! 로부 옹고트는 다시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이 지하통로의 존재를 내가 알면서도 그냥 둔 것을 알까?' 지옥성이 그의 것이 된 지 이미 이십년이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이나 자기 영역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두고도 편히 자기 에는 지나치게 섬세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하통로는 단지 필요에 의해 덮어두었을 뿐이었다. 알면서도 그냥 덮어둬야 할 일이 세상을 살다 보면 부지기수로 있다. 그 렇게 덮어두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늘처럼……! "알 수도 있겠지!" 그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야광충이 그 사실을 알 수도 있었다. 시간이 가면 반드시 일 게 될 것이다. 문제는 야광충이 언제 그것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를 보면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으리라! 나는 네가 되도록 큰 그릇이기를 바라 마지않 으니……!" 로부 옹고트는 마치 야광충이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앞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색 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한때 그는 그를 진정으로 걱정하 고 아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야광충을 가까운 곳에 서 지켜보는 동안에 스스로의 모순된 심경을 깨닫고 놀란 적이 적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 아직은 그를 죽일 때가 아니 니……!" 이번에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로부 옹고트의 앞에는 어느새 비대한 몸집의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에게 말한 것이다. 분명 사람인데 사람 같지가 않아 보였다. 거대한 항아리를 연 상시킬 정도로 비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로부 옹고트의 앞에 선 사내의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비오는 밤 무덤가를 나르는 귀화(鬼 火)의 빛과도 같은 푸르스름한 기운이었다. 천기칠사(天忌七邪) 중 또 하나인 아수라이화귀(阿修羅 鬼)가 통로 가운데에 석상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따라오라!" 아수라이화귀는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비대한 덩치가 미끄러지듯 뒤로 반 바퀴 돌아갔다. 그는 마치 무엇에 의해 떠밀리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움직여 로부 옹고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몸에서 은은히 뿜어지는 푸른빛에 의지해서 자세히 살펴 본다면 그의 발이 바닥에서 반 치 가량 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를 더 가자 또 한 사람이 통로의 중앙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수라이화귀의 몸에서 발산되는 푸르스름한 광채가 아니었다 면 역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조용히 서 있는 그림자.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그 사람은 멍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절색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예쁜 얼굴형을 가지고 있는 그녀 가, 마치 넋나간 둣 광채없는 그 눈과 멍한 표정의 그녀가 지금 지옥성에서 가장 위험한 일곱 명 중 하나라는 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독종독인(毒宗毒人), 손을 뻗치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한줌 핏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의 괴물이었던 것 이다. 로부 옹고트도 그 앞에서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쳐 갔다. 마치 입이라도 벌리년 중독될 것을 염려하는 듯이……! 한참 그렇게 걷던 로부 옹고트가 문득 중얼거렸다. "조금 과한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그가 정말 저것들에게 당 하면……? 내가 이십 년을 꿈꿔 오던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 지 않을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리 소심해졌는가? 만약 이런 것들에게 당할 정도 면 내게도 필요가 없으리니……!" 그는 멈춰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통로는 어둠 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 사람이라도 서 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보 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고, 말에 앞서 한숨이 나왔다. 그 뒤에는 중얼거 림이었다. "이제 돌이키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으니……, 나를 믿고 또 그를 믿는 수밖에……!" 제26장 아침 무간지옥. 무간지옥은 다른 지옥과 달리 광장이 없고 어두운 지하통로만 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전원이 모일 수 있도록 넓은 곳이 있긴 했다. 그곳이 연무청(練武廳)이었다. 야광충은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혹룡사와 지옥성 출신들 이 구분되어 모여 있었다. 그런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야광층은 그 수를 대충 세어 보았다. 이십삼 명이었다. 야광충은 다시 무간지옥의 입구에서 적들을 경계하고 있는 황 룡과 화영, 그리고 무간지옥 출신의 옥졸들을 계산했다. 사부가 옥졸들을 잘 단련시켜 놓은 것인지, 아니면 눈치가 빨 라 잘 도망다닌 것인지 그래도 전한족들을 통틀어서 무간지옥 옥졸들이 가장 많이 살아 남아서 열다섯 명이었다. 그래도 사십 명, 연무청의 또 다른 구석에 눕혀 놓은 중상자 들을 합쳐도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비참했다. 지옥성의 한인들은 원래 삼백 명을 혜아렸었다. 거기에 혈문 룡의 혹룡사가 백여 명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백 명이 넘는 인원인데 이제 겨우 오십 명이 남은 것이다. 그나마 중상자는 없느니만 못했다. 싸우는 데 지장만 될 뿐인 것이다. 중상자들이 누워 있는 곳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혈 문룡과 월몽영이었다. 월몽영은 천으로 한쪽 팔을 동여맨 상태였다. 창백한 안색으 로 보아 제 상태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나온 것이다. "열 명이야!" 혈문룡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중상자의 수였다. 야광충은 잠시 침묵했다가 월몽영을 보고 물었다. "방옥주와 팽옥주는?" 방옥주, 방각과 팽옥주, 노소포 됐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소포는 몸을 돌보지 않고 나서다가 초장에 한 대 얻어맞고 편 히 누워 버렸던 것이다. "두 분 다 정신을 차리셨어!" "활동할 수 있나?" "팽옥주는 조금 쉬시기만 하면 그런대로 움직일 수 있겠고……." "방옥주는?" 월몽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업어 모실 거야!" 야광충은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말아 버렸다. 혈문룡이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건가? 이왕 도망갈 거면 빨리 가지 않고?" 야광충이 말했던 통로로 피하자는 말이었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몽고족들이 몰려 있을 위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통로는 하나밖에 없다!" 혈문룡이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먼저 나선 것은 한쪽에 서 있던 등평이었다. "우리가 온 그 통로는?" "죽고 싶다면 거기로 가면 되겠지!" "죽고 싶다면?" 등평은 흥분한 듯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그러나 야광충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가 거기는 그냥 둘 사람이었나?" 등평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야광충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중분히 타당성이 있는 야광충의 예측이지만 이대로 포기하기 에는 비밀통로의 유혹이 너무 컸다. "우리가 여기 합류하게 둔 이유는?" 야광충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이 계속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릴 모아 두고 죽이고 싶었던 모양이지!" 등평이 다시 말하려다가 말아 버렸다. 원도살이 조금 떨어진 굿에 서서 말을 듣다가 다가왔다. "그래서 자네 의견은?" 야광충은 오늘 너무 많이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들어 다 시 한번 위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원도살이 그 손끝을 보며 중얼거렸다. "뚫고 나간다……,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아직도 많고, 위에 는 어떤 것이 기다릴지 모르는데?" 야광충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길은 그것 하나다!"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결행 시기는?" "조금 더 쉰 뒤에!" 그 말에 혈문룡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피곤한가? 네가?"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도살이 야광충의 옆구리를 가리키고는 혈문룡을 당겼다. 검 은 옷이라 표시는 나지 않지만 거기에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야광충은 실제 피곤하지는 않았다. 단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 니었을 뿐이었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는 지상을 다시 보기 힘들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요행히 포위망을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아침, 태양이 떠올라 있는 것이다. * * * 지옥전. 지옥전 앞은 고요했다. 전날 낮에 벌어진 일장의 격돌이 남긴 흔적은 아직도 낭자한 쑈자국으로 남아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나마 그것마저 없었다면 누구도 지금의 지옥성이 낮의 지옥 성과 같은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이 도열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 일천에 달하는 기마병(騎馬兵)들, 팔한지옥의 무리들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말에, 혹은 마차에 올라탄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 는 듯했다. 쌍고르마는 그들이 내려다보이는 지옥전의 높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그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그가 서 있는 지옥전을, 그리고 지옥성의 구석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십 년이었다. 중원에서 쫓겨와 떠돌다가 여기 지옥성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 한 것이 이미 이십 년 전이었다. 그 후로 오랜 세월 동안 여기에서 모든 일이 계획되고, 준비 되었었다. 그 결과가 이것, 그의 앞에 도열한 일천 명의 무사였 다. 몽고인만으로 구성된 무사 집단.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무 림 일류무사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업(偉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몽고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것은 위대한 출발로 기록될 것이다. 지옥성은 그 위업이 가능하게 한 터전이었다. 이제는 필요없 게 된……!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저 지옥전의 어둠 속에서 올라올 한 사람을, 그리고 그 순간 부터 새로이 시작될 중원을 향한 발걸음을……! * * * 무간지옥 입구. 화영은 검을 뽑아 비스듬히 땅을 향해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그의 오 장여 앞에는 수백 명의 몽고족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런 대치 상태는 이미 두 시진 전, 그러니까 야광충이 한족 들을 무간지옥으로 대피시키고 그와 지금 옆에 서 있는 황룡만 을 남긴 이후꾸터 계속 유지된 것이었다. 몽고족들은 천강시가 소용없게 된 것이 확실해지자 데리고 돌 아가 버렸다. 적아(敵我)를 구분 못하는 괴물을 풀어놓으면 그 들도 공격을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온 공격대가 궁수들이었다. 일상의 활에다가 거대한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노궁(弩弓)까지 동원한 그들이었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몰라도 황룡과 화영, 단 두 사람을 상대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간지옥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는 활로 공격하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 황룡의 보리무상강기는 어떤 화살도 뚫을 수 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황룡의 발 앞에 수천 발의 화살을 수북 하게 쌓고, 노궁은 강기에 얻어맞아 몽땅 못 쓰게 된 뒤에야 그 공격마저도 포기했다. 마지막이 사람이었다. '멧돼지' 가하이릭은 단 두 사람에게 막혀 추격을 못하게 되 자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래서 나선 것이 금검삼령주, 은검이 령주의 두 사람이었다. 몽고족의 고수로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뒤에 서 있는 가하이릭 과 금검이령주뿐이었다. 나머지는 혼전 중에 모두 죽은 것이다. 화영이 앞으로 나서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너무나 간단하게 끝나서 몽고족들은 기가 죽어 버렸다. 화영 은 단 이 검(二劍)으로 그 둘의 목을 날려 버렸던 것이다. 혼전 중이라면 몰라도 단독으로 싸워서 그를 이길 사람은 여 기 몽고족 중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다시 덤빌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혼자 나가 화영을 이길 만 큼 무공에 자신있는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지어 덤볐다. '비록 입구가 좁아 다수가 행동하기에는 불편하다고 해도 화 영이나 황룡도 결국엔 인간, 지칠 때가 있을 것이다. 무한정 버 티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라는 것이 가하이릭의 생각 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먼저 지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화영에게는 적이 하나가 덤비건, 떼로 덤비건 상관이 없었다. 그의 검은 앞에 걸리는 적이 몇이든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다수라고 해도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공격 의 방위에는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네 명이 한계였다. 벌 떼처럼 덤벼들어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어도 매순간마다에 는 전후좌우의 네 방향에서 한번씩밖에는 공격이 있을 수 없다 는 것이다. 만약 그 하나하나를 포착한다면 수백 명의 협공을 받고 있더 라도 실제로 상대하는 것은 매경우 네 명씩밖에는 안된다는 것 도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화영은 그래서 그렇게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다가 다가드는 적을 한번에 두 명, 세 명씩 베어 넘겼다. 두 번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의 검은 매경우 하나씩 의 허점을 파고뜰어 정확하게 숨통을 끊어 놓고는 언제 검을 휘 둘렀냐는 듯이 원래의 자세 그대로를 되찾고 있었다. 심검(心劍)! 천산제일검 여문량의 심검이 오늘 화영의 검끝에 서 완벽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삼사십 명이 죽어 넘어가자 아무러한 가하이릭도 공격 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간지옥의 입구를 중심으로 둥글게 뒹굴고 있는 시체의 산, 그 속에 서 있는 화영의 모습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있다.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그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 고, 망설임이나 숱한 인간을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의 빛도 한 오 라기 보이지 않았다. 화영은 황룡과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부동심의 경지에 서서 흔들림 없이 검을 펼치고 있었다. 그것이 주위를 공포에 젖어 들게 하고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어떻게 뚫고 들어갈 약점이라고는 보이지 않 는 화영의 검은 하나의 거대한 벽과 같이 그들의 앞에 버티고 있었다. 누구도 이 믿어지지 않는 무위(武威) 앞에서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가하이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여태 구경한 중에서도 최악의 괴 물을 보는 듯 화영을 보고 있었다. 천강시가 괴물이라지만 저 검을 든 괴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 이었다. 금검이령주가 그 침묵을 깨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눈에 독랄한 빛이 흘렀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귓속말을 통해 가하이릭에게 전달되었다. 가하이릭이 처음에는 놀란 듯이 금검이령주를 쳐다보았다. 금 검이령주가 확신을 주려는 듯, 그것밖에 없다고 말하려는 듯 고 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가하이릭은 그래도 주저하는 빛으로 앞에 모여 있는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금검이령주의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몽고족들이 술렁거렸다. 가하이릭의 매서운 질책이 뒤를 따랐다. 몽고족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꾸물꾸물 움직였다. 이윽고 그 들의 대열이 짜억지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마지못해 걷는 것이었지만 곧 묘한 광기와 확신에 횝싸인 단호 한 걸음이 되었다. 그들은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밀착한 가로줄을 만들어 전진하고 있었다. 한 줄의 뒤에는 또 다른 한 줄이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한 줄이 있었다. 어깨에 와 닿는 감족과 전후좌우에서 일정하게 울리는 웅장한 발걸음 소리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했고, 그것 이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화영과 황룡을 목표로 하는 결사적인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황룡이 앞으로 나섰다.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기상천외한 공격전술에 직면해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무덤덤하던 화 영의 얼굴에도 곤혹스런 빛이 잠시 스쳤다.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무간지옥. 야광충의 얼굴이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원래 창백한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은 핏기가 완전히 가셔 버려 푸른 기가 도는 싸늘한 잿라에 가까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월몽영은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극심한 충격을 받으면 흔히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녀가 아는 야 광충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냉혈한이?' 보기 싫으니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잘 모르 기도 했거니와 뭔가 중요한 것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는 분위 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도살 역시 사정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물어 보기보다는 차라리 추측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아까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생긴 일을 차근차근 더듬어 생각해 보았다. 야광충은 옥주의 집무실이었다는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안색 이 변하기 시작했었다. 그것은 방에 들어서면 바로 알 수 있는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야광충의 시선이 방 중앙의 탁자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아 마도 거기 있었던 무엇인가가 없어졌다는 의미일까? 그는 탁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 핏자국이 있었다. '시체!' 탁자 위에는 누군가의 시체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혹은 부 상자? 원도살은 부상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상자가 누워 있었다고 보기에는 피가 너무 적었다. 그리고 그의 오랜 경험으 로 미루어 보건데 탁자 위에 남아 있는 혈흔(血痕)은 죽은 자의 굳은 피가 떨어진 것이지 새로 홀린 피는 아니었다. '저건?' 혈흔 옆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자국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그와 비슷한 것을 보지 않았던가? '수급(首級)이군!' 탁자 위에 남아 있는 자국은 잘려진 머리가 남기는 독특한 흔 적임에 틀림없었다. 이 탁자 위에는 한 구의 시체와 한 개의 수 급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시체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조용히 물었다. "누구들의 시신인가?" 야광충이 굼뜬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방 한구석 에 서 있던 준수한 사내, 등평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는 것을 원도살은 느꼈다. 그것으로 그는 새로운 것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인생 구십을 헛살지는 않았다. 한번 보면 성격이라는 것 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것은 나이가 들수록 적 중률이 높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야광충은 평생 그가 처음 만나 본다 할 정도로 독특한 자였 다. 걸으로 어뻬게 행동하든 그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차가워도 대충이 아니라 속까지 완벽하게 차가운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그의 삶과 결정적인 끈이 연결되어 있는 무엇인가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면 불가능 한 일이었다. 등평의 눈빛은 두 가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나는 그가 이런저런 사실을 추즉으로 알아내었다는 것을 예 민하게 느낄 정도로 영민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적어도 그는 여기 있던 시체가 누군지, 그리고 야광 충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도살은 등횡을 마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 었다. 그러나 등평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눈을 피했다, 대신 그 는 야광충에게 묻고 있었다. "누가 자네 사형과 사부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으로 그는 원도살의 질문에도 교묘하게 대답한 셈이 되었 다. 한편으로 그것은 야광충의 정신을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야광충이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로부 옹고트!" 둥횡은 다시 웃었다. 놀리는 듯한 미소였다 "자넨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모두 로부 옹고트라는 말로 설명할 셈인가? 그가 우리 뒤를 따라와서 시신들을 가져갔 다고 말하고 싶은 겐가? 왜? 그에게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차 라리 시체가 일어나 걸어갔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야광충의 눈이 싸늘함을 되찾고 있었다. "시체가 일어나 걸어갔다 해도 로부 옹고트다. 이유는 나도……!" 그는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방안에 한 순간 회오리 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옷자락이 날 리고, 종이조각들이 흩어져 올라갔다. 평소와 같이 안개가 스러 지둣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풍을 일으키며 뛰쳐나간 것이다. 그 틈에 등평이 야광충의 뒤로 바짝 붙어 사라지는 것은 아무 도 보지 못했다. 그저 방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 보았을 때는 야광충도 등틥도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혈문룡이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노닥거리고 있을 땐가, 적이 코앞에 들이닥쳤는데!" * * * 무간지옥 입구. 몽고족들은 십여 장 길이의 통로 중간까지 진입하고 있었다. 화영은 물러서 있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살생의 피비린내 에 질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따닥따닥 붙어서 죽여 달라고 다 가오는 데에 칼질을 할 수는 없었다. 황룡이 통로의 끝에서 그들을 막고 있었지만 그는 화영보다 더했다. 그는 명실공히 불제자였던 것이다. 사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살생은 하지만 그 역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살생을 아무렇지 않게 할 사람은 못되었다. 그는 연속적으로 장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가들면 밀고, 애꿎은 통로의 벽과 바닥 을 때려 돌가루나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몽고족들이 조금씩 전진해 오고 있었다. 한족들은 그들의 뒤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몽고족들이 무간지옥으로 진입해 들어오면 그때는 다시 혼전 (混戰)이다. 혼전 상태에서는 수가 적은 편이 당연히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3러나 당장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런 방침도, 탈출구도 결 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원도살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차피 두 사람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거나 다쳐서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밀리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상자들을 챙겨서 물러나라!" 원도살은 결연한 빛으로 명령했다. "전원 싸울 준비를 한다!" 싸움판은 무간지옥으로 옮겨 오고 있었다. * * * 지하통로. 야광충은 바람같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주위에 무엇이 걸리든 산산이 부숴 버리고 지나갈 사나운 돌풍이었다. 그는 그 자신의 말속에 숨은 의미에 스스로도 놀랐다. 목만 남아 있는 시체가 걸어갔을 리는 절대로 없다. 그렇다면 사형이 일어나 걸어갔단 말인가? 그건 말이 된다. 그러나 그래선 더욱 안된다. 머리 위에서 등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여기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설마 그가 흔자 도망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가 무죄를 증명하려고 죽는 경우는 흔히 있지. 죽은 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떨까?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버젓이 살아간다면?" 죽은 것으로 남에게 인식을 시키면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의심을 사지 않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등평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거기 의심을 품고 시체를 조사한다면? 게다가 그 사람이 우악스럽기 짝이 없어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 라면 사부의 유해라도 손상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그 시체라면 관뚜껑을 열고 나와서라도 도망가겠지!" 야광충이 사부의 수급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의 살을 뜯어낸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사정을 등평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 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야광충의 심기를 긁어 타격을 주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살을 뜯어 보아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걸 모르고 말이 야! 후후!" 야광충의 꼼이 달리던 반대방향으로 튀어나갔다. 순간적인 방 향 전환, 그것도 역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천천 히 달리다가도 하기 힘든 동작을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순간적으 로 해낸 것이다. 콰앙! 석벽의 한곳에 폭발이 일어났다. 야광충의 일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동시에 그의 몸은 반대방향으로 날았다. 컥! 등평은 오늘 두번째로 야광충의 손에 목을 맡기게 되었다. 달리던 반대방향으로 뛰고, 등평이 있었던, 그러나 이미 위치 를 이동해 지금은 없는 곳에 일장을 갈기면서 몸은 반대로 날아 등횡의 이동을 따라가며 목을 틀어쥐는 일련의 동작이 순간적으 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두번째의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이었다. 등평의 눈이 암담하게 죽어 가는데 야광충의 관심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애초에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방금 등 평이 한 말이 또 다른 충격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해 명하고 싶었다. "피부에는 의심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수급은 분명히 사부의 것이었다. 역용(易容)을 했다면 그렇게 흔적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그로서 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이 수급은 완벽했다. 야광충은 사부의 수급을 생각하자 다시 가슴이 쓰려 오는 것 을 느꼈다. 절절한 아픔이 창자를 뒤틀리게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등평이 천천히 말했다. "'개병공작' 데게룬고이 토고쓰는 몽고 귀족 출신이지. 자연 아는 사람도 많은 편이야." 그는 묘한 미소를 흘리며 덧붙여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로 변장하고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야광충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등평의 얼굴에 는 조금의 부자연스런 구석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 얼굴이 가짜란 말인가? "역용?" 등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난 그 광경을 본 적이 있지. 금의위의 의생(醫生) 셋 이 검시(檢屍)를 하고 진짜라고 판정을 했는데 그가 나타나 얼 굴을 씻기니 다른 얼굴로 바뀐 것을……!" "그?" "환마(幻魔) 서문정(西門鼎)!" "환마?" 등평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 얼굴을 만들어 준 사람이지. 무림사사(武林四邪)의 일인!" 무림사사가 누군지, 환마 서문정이 누군지 야광층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 되었다. 겨우 하나의 가능성을 제쳐 놓았는데 다시 의혹이 생긴 것이다. 사부, 흑은 사형이 로부 옹고트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여부 와 관계없이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황 이었다. 적어도 야광충에게 있어서만은 그랬다. 그것이 사실이 라면……,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간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끈이 그것이니……! 그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쫓아온 것이다. 문득 등평의 눈이 번뜩였다. "암습!" 야광충은 이미 그의 목을 놓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발 밑 으로 면도날 같은 경기(勁氣)가 스쳤다. 잠시만 머뭇거렸으면 허리가 잘려져 나갔을 정도로 날카로운 암습! 등평의 몸이 석벽으로 녹아 들고 있었다 그 위로 그어지는 경기! 쥬아악! 석벽에 한 줄기 날카로운 자국이 그어졌다. 잠시 후에 그 자국 을 따라서 핏물이 번졌다. 등횡은 완전히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파팍! 석벽을 따라 세 개의 구멍이 뚫렸다. 야광충이 쏘아 보낸 양 인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에 격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야광충은 그의 눈에도 띄지 않게 움직이는 인영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양인장의 가공할 속도까지 피해 내다니! 경기! 야광충은 좁은 통로의 공간 속에서 연속으로 열여덟 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다. 츠팟! 쉿! 야광충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가슴에는 날카로운 자국 세 개가 새겨져 있고, 엷은 끝 가 흘러나왔다. 분명 피했는데 당한 상처였다. 쉬쉿--! 적은 보이지 않고 예리한 경기만 연속적으로 그어져 왔다. 느 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느꼈을 때는 이미 상처를 남기고 지 나간 후였다. 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자였다. 츠파앗! 석벽에 다시 몇 줄기의 자국이 그어졌다. 비명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등평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은 그 흔자로 당대 최고에 육박하는 경공의 고수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다. 야광충의 형태가 희미해졌다. 유령미종보! 신법에 신법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야광충의 오기였다. 상대의 신형을 포착하기 어렵다면 그도 그렇게 해주겠다는 생각되었다. 쉬이잇! 예리한 소음이 귓가로 연속해서 퍼져 나왔다. 야광충의 옷자 락이 몇 번이고 그어졌다. 적은 그의 신형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뭔가 예리한 물 건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베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더욱 속도를 내었다. 그의 희미한 신형이 통로 안에 꽉차 버렸다. 어디에도 있는 것 같지만 어디에도 없는 야광충이 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면도날 같은 경기, 통로를 가득 메운 허깨 비 같은 신형. 둘의 싸움은 움직임과 속도의 경쟁이었다. 야광충은 천천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검은 물체 가 움직이고 있었다. 적이었다. 아까까지 보이지 않던 적이 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야광충이 그의 신형을 따라 같이 달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도 그의 신형을 포착한 모양이었다. 등뒤에 붙은 야광충을 몌어 내려고 이리저리 몸을 뒤집어 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 나 야광층은 그의 등에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악마의 손길 같은 검은 손이 검은 물체를 향해 더욱 다가갔 다. 검은 물체는 석벽에 등을 문대고,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그러나 야광충을 뗬어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러는 동안 속 도만 더욱 늦추어지고. 손은 더욱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파앗! 한 순간 검은 물체의 몸에서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양팔에 단, 종잇장처럼 얇은 칼날 두 개가 야광충의 손을 잘라 오는 것 이다. 야광충은 피하지 않았다. 팡! 칼날이 비구에 부딪쳐 종잇장처럼 찢겨졌다. 야광충의 손이 검은 물체의 목에 틀어박혔다. 검은 물체와 야광충은 엄청난 속도의 격돌로 한덩이가 되어 빙글빙글 돌았다. 그들의 몸에 부딪쳐 석벽의 돌덩이들이 터져 나왔다. 쾅! 야광충의 손이 검은 물체의 목을 잡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때에야 그들의 움직임은 멈춰졌다. 모호한 모습이었다. 검은 물체는 마치 복면을 쓰고 온몸에는 짝 달라붙는 검은 옷 을 입은 것처럼 온통 검은색이었다. 얼굴이 특히 이상했던 것이 복면 같지만 전혀 복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눈과 코는 자리만 있고, 입은 아예 없거나 입술이 없이 구멍만 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야광충은 그가 천기칠사의 또 하나, 아마도 천둔귀일 것이라 는 것을 알아차렸다. 살려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야광충의 손이 천둔쉬의 목에 힘껏 눌러지려는 순간, 야광중 은 충격을 받고 바닥에 뒹굴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의 등에 충격을 가한 것이다. 용팡로에서 쏟아져 나온 쇳물처럼 뜨거운 기운이었다. 야광충은 입으로 열기를 토해 내며 그에게 일격을 가한 적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통로의 저편에서 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먼빛으 로도 적이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적의 손이 들렸다. 컥! 다시 충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가슴팍이었다. 야광충은 자신의 가슴팍 옷과 살점들이 역한 냄새와 함께 녹 아 가는 것을 경이에 차서 바라보았다. 독이었다. 직은 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약물이나 암 기를 사용하지 않고 기(氣)를 통해 독을 전달하는 독공(毒功)을 쓰고 있었다. 살이 녹아 가는 것은 둘째 치고 냄새만으로도 어지러워 눈앞 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독I "독종독인!" 야광충의 짧은 고함이 퍼지는 동안 그녀, 독종독인을 중심으 로 한 석벽이 전체적으로 녹아 흘렀다. "크윽!" 석벽의 한 귀퉁이에서 등평이 입을 가리고 튀어나왔다. 그도 이미 당했는지 옷은 군데군데 녹아 있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는 그를 향해 독종독인 의 손이 다시 내밀어지고 있었다. 슈우욱! 격타음은 나지 않았다. 단지 지독한 극독에 살점이 녹아 내리 는 소리만 나직하게 날 뿐이었다. 등평이 아니라 야광충의 가슴팍이었다. 야광충이 그 순간 등 평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야광충은 자신의 가슴쏵을 내려다보았다. 가죽옷은 이미 복부 까지 녹아 있지만 놀랍게도 가슴팍에는 손자국 모양의 검게 탄 자국, 그 가장자리만 약간 녹아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야광충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아까 처음 당했을 때 이미 이상한 것을 느꼈다. 독공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석벽이 녹아 내리는 독에 정면으로 당하고도 숨을 쉰다는 것이, 심장까 지 녹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스스로도 이상했던 것이다. "결국 나도 괴물이군!"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천강시나 천둔귀, 지 금 그를 상대하는 독종독인처럼 그도 괴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할 방법은 있다. 그는 독종독인을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우린 어쩌면……!" 독종독인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흠칫 멈춰 섰다. 보이지 않는 충격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움직였다. "형제, 흑은 오누이인지도 모르지!" 독종독인의 공격. 야광충은 멈칫하고는 다시 걸었다. "한곳에서 끄집어내어진……!" 공격.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나는……!" 다시 공격! "꼭두각시란 말이다!" 야광충의 절규와 함께 두 손이 내밀어졌다. 퍼엉! 독종독인이 회오리바람에 말린 듯 뒤로 날려졌다. 그 위로 야 팡충의 손이 번갈아 내밀어졌다. 슈칵, 칵! 독종독인의 가슴과 배에 연속적으로 구멍이 뚫렸다. 양인장이 었다. "죽어랏!" 야광충은 척혈구절검을 꺼내 잡고 바닥에 뒹구는 독종독인을 향해 달렸다. 삐익! 그때 통로 안에 귀를 찢을 듯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순간 야광충의 옆으로 바람이 스쳤다. 촤악! 옆구리에서 붉은 선혈이 튀었다. 뒤에 쓰러져 있던 천둔귀가 정신을 차리고 반 토막의 칼로 그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야광충이 옆구리에서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통로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잇지 않았다. 야광충은 점을 잡고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있던 등평이 어느새 기어와 그의 다리를 잡았던 것이다. "놔라!" 야광충이 이성을 잃은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등평이 힘 겹게 입을 벌렸다, "내, 냄새! 뒤로……!" 야광충의 안색이 잠깐 변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 유황(硫 黃)의 독특한 냄새였다. "초연(硝煙)!" 화약 연기,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였다. 야광충은 등평을 들어올리고 쏜살같이 뒤로 물러나 전속력으 로 달렸다. 콰아앙! 둔중한 폭음이 뒤로부터 울리고, 불길이 그들의 뒤를 따라 쫓 아왔다. 무간지옥. 무간지옥의 싸움에서 가장 눈부시게 싸운 사람들은 고수가 아 니었다. 암흑 속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은 무간지옥의 옥졸들과 그들의 지휘자인 형사랑이었다. 원도살은 연무장에서 좁은 통로로 후퇴해 싸울 것을 지시했 고, 후퇴하는 최후방을 맡은 것이 그들이었다.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지형들과 횃불로도 제대로 걷혀지 지 않는 암흑이 그들의 무기였다. 그들은 석벽 속에서, 혹은 바닥에서 갑자기 나타나 일격을 가 하고 다시 그 속으로 사라졌다. 수십 명이 그들의 칼날에 목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열 명, 상대는 수백이었다. 곧 그들은 하나하 나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한족들은 좁은 통로에 다시 몰렸다. 화영과 황룡이 다시 최전방에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거기에 야광충과 등평이 나타났다. 처참한 몰골의 그들. 등평 은 야광충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가누고, 야광충도 군데군 데 찢겨지고 타서 산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싸움의 형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선은 지형에 의지 해 버티지만 이대로 나가다가는 끝내 당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퇴로는 이미 막혀 버렸다. 야광충의 안색이 한층 창백해졌다. 표정없는 그 얼굴에 묘하 게 비감 어린 우수(憂愁)가 홀렀다. 죽은 자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잿빛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로 드리운 듯한 느낌에 그 를 보고 있넌 원도살은 문득 몸을 떨어야 했다. 그때 야광충이 황룡을 향해 서장어로 무언가 소리쳤다. 대답 은 즉시 돌아왔다. 가장 선두에 잇던 몽고족 한 명이 활룡의 기 공에 이끌려 밭에서 무가 뽑히듯이 쑥 당겨 오더니, 야광충을 향해 던져졌다. 야광충이 그를 받아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거의 목 에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쥐어졌다. 몽고족 사내는 청년이었다. 스물두셋 정도? 중국인과는 어딘지 다른 생김새지만 어른이라기에는 아직 애 띤 구석이 있는, 그러면서도 햇살에 검게 탄 피부가 건강을 대 변해 주고 있었다. 여기 지옥성에 와서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몽고의 대 초원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말을 달리고 풀밭에 뒹굴고 있 었을지도 모를 청년. 지금 그는 야광충의 손아귀에 잡혀 목줄기 혈관은 굵게 불거 져 나오고, 두 눈은 공포에 젖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얼굴에 생긴 생채기는 격렬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얕은 것밖에 없어 유달리 운이 좋았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최악 의 운명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야광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그가 왜 그 러고 있나, 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한 일을 보면 진저리를 치겠지?' 야광충은 눈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고 차라리 감아 버렸다. 그 눈 속에 사부의 영상이 떠올랐다. "흡혈귀(吸血鬼)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 "이제 네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싫습니다." 사부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 시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영영 햇빛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냐?" 아까보다 훨씬 긴 침묵이 이어졌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해를 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사부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든 인간을 버리고 싶으랴. 그러나 해를 볼 수 없는 인간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낮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생의 절반 그 이상을 포기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때 그는 말했었다. "저는 이제부터 야광충입니다." '그랬었다!' 야광충은 다시 눈을 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몽 고 사내는 두려움에 떨며, 황룡은 여전히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로부 옹고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야광충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 눈라은 곧 파랗게 불타올 랐다. '이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저주의 시작이며, 로부 옹고트에게 는 파멸의 전조(前兆)가 될 것이다!'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몽고 사내의 목줄기, 불거진 혈관이 타오르듯 뜨겁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물어뜯었다. 불길 처럼 뜨거운 그 무엇이 입안에 가득 담겨졌다. 머릿속에서 종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현란한 빛깔 들이 눈꺼풀 안쪽에서 어지러이 번쩍거렸다. 목구멍을 타고 내 려가는 불길, 그 불길이 뱃속으로부터 다시 가슴으로 치밀어 올 랐다. 야광충은 한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렸다. * * * 꿈, 혹은 환상. 밀랍처럼 창백하던 안색의 변화. 타오르둣 뜨거운 얼굴, 그리 고 손. 창백한 은발의 솟구침, 충혈된 눈동자, 야수의 그것 같 은…… 그리고 짐숭의 울부짖음. 무차별의 살상. 폭발하는 손, 터져 나간 시체들, 동굴 안은 피와 살점이 날고……. 발목이 잠길 정도로 넘쳐 흐르는 선혈. 온통 붉은 피, 피들. 최후의 최후까지 쫓아가 죽인 뒤에야 가라앉은 광기. 그리고 태양……! * * * 지옥전 앞. 야광충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것이었다.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무언가 끔 찍하게 싫은 느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 을 외면하고 싶었다.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태양! 빛의 홍수였다. 여태 그가 알고 있던 무채색외 조화가 아닌, 눈 이 아플 정도로 현란한 색깔들이 쏘아져 들어왔다. 햇볕에 반사된 황금빛과 햇볕을 피해 숨은 암갈색, 사방에 흩뿌려진 선연한 핏빛 에 이르기까지 야광충에게 익숙한 색깔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글거리는 저 햇빛 아래에서는 바위 그늘마저도 열기를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머릿속을 뒤집어 놓을 듯이 역겨운 빛이었 다. 미열에 들뜬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오고 겉잡을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몇 번이고 침을 삼켜 구토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한참 그러고 나니 속은 여전히 울렁거리고, 머리는 두 쪽으로 갈라져 따로 노는 것 같았지만 구토는 사그라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벌려 그 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은 시체로 가득했다. 바람과 햇빛에 튼 것처럼 살껍 질을 드러내고 있는 돌집의 바위벽들 위로 뿌려진 핏물, 그 아 래 뒹구는 바장을 드러낸 시체들……. 문득 야광충은 그것이 어딘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해연히 놀라 버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것이다.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들어진 탑, 지옥전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뒹굴고 있는 지옥전, 그리고 지 옥성의 넓은 광장. 대낮의 햇살 아래에서 바라보는 지옥성은 야광충에게는 낯설 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야광충은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돌아보았다. 혈문룡이 어딘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단한 무공이었어!" "무공?" "그래, 그……!" 손을 묘하게 꼬는 시늉을 하던 혈문룡이 문득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나나?" 야광충은 확실히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혈문룡의 손짓으로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쓴 것이다. 혈문룡의 손짓은 조화십삼수의 한 동작 같기는 하지만 분명히 달랐다. 단편적인 손짓이었지만 그 안에는 전륜나의 원리가 적 용된 동작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 야광충이 지난 반 달 동안 전력을 기울였던 바로 그것, 양인 장과 조화십삼수, 그리고 전륜나, 이 세 무공의 조합이 아니고 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무공은 없었다. 경황중에도 그 위력이 궁금했다. "괜찮던가?" "괜찮더냐고?" 혈문룡의 목소리가 어딘지 떨리는 둣했다. 야광충의 안색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는 장내에 널린 시체 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한 짓인가?" "대부분은!" 혈문룡의 말이 마지못해 하는 듯 딱딱 부러졌다. 야광충은 손가락 사이의 가늘게 뜬 눈으로 시체들을 보았다. 온전한 시체가 없었다. 마치 흉폭한 야수가 찢어발긴 듯 갈가 리 찢겨진 시체들, 어떤 것은 폭약에라도 당한 듯 터져 버린 것 들도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혈문룡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해 아래 다시 있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모습들이었다. 야광충은 다시 구토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고 숨을 멈주었 다. 시체가 끔찍해서가 아니었다. 끔찍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낮을 얻었지만 대신 인간을 버렸던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홀렀다. 야광충은 넋을 잃은 것처럼 그냥 서 있고, 혈문룡도 더 말을 걸 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야광충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귓 가에서 태양이 소리 내어 울고 있는 것 같이 윙윙 소리가 났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야광충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인간을 버리는 그 순간부터 어떤 결과든 감수하기로 결심하 지 않았던가?' 그는 햇살 아래 얼굴을 드러내고, 더 이상 피하려 하지 않았다. '저주의 시작, 그리고 파멸의 전조!' 로부 옹고트에 대한 원한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다시 솟아 올랐다. '아직은 할 일이 있다!' 그는 혈문룡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탈진한 듯 앉아 있 는 한족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동료'가 된 이십여 명의 생존 자들이었다. 화영과 황룡, 원도살과 등횡, 월몽영과 그녀의 등에 업힌 방 각, 노소포, 그리고 민심창 조훼를 필두로 흑룡사의 인원 다섯, 형사랑을 필두로 하는 지옥성의 한족들이 나머지였다. 그나마 그 중 대여섯은 중상자였다. 이제 그들을 데리고 싸워야 했다. 초라한 세력이지만 없는 것 보단 나았다. 그들에겐 로부 옹고트를 상대로 싸울 충분한 이유 가 있다. 그 적개심은 이 상황에서는 어떤 무공보다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밖에서 기다리던 무리들은?" 차가워진 야광층의 말투에 혈문룡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 았다. "없더군!" 그들이 가하이릭의 무리를 돼지 몰 듯 몰고 나왔을 때 지옥성 은 텅 비어 있었다. 지하통로를 봉쇄하고 있던 무리들은 어디에 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하이릭이 한족들을 섬실할 수 있다고 믿고 다른 볼 일을 보러 간 것일까? 혹은 별도의 목적 때문에 가하이릭조차도 버린 것일까? 야광층은 그것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없는지 다른 이 야기를 했다. "여기 올 때 말을 타고 왔겠지?" "음." 흑룡사와 말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존재, 당연히 말은 지옥성 에 오기 전 숨겨 두었는데……. 야광충은 성문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거기로 가지!" 혈문룡은 잠시 멍하니 섰다가 야광충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디로 갈 건가?" 야광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일단 여기를 떠나는 거야." "그 다음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지!" 혈문룡은 말을 잊고 서 버렸다. 그러나 곧 뒤를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은 지옥성을 떠나 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뒤를 살아 남은 한족들이 따랐다. 중원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처음에는 별다른 계획없이, 심지 어는 중원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시작되었다. 제27장 그후 반 년 1 증원으로 가는 길. 지옥성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야광충은 그 후 여러모로 원인을 생각해 보 았었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로 제시된 것이 쿠릴타이였다. 그들이 지옥성에서 싸우고 난 며칠 후 타타르의 대도(大都)인 합라화림(哈喇和林)에서는 대족장 회의, 쿠릴타이가 열렸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예상대로 오이라트의 무하마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도 사지 (死地)에 기어들기는 싫었을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참석 여부와 관계없이 쿠릴타이는 열렸고 순조롭 게, 그리고 계훠대로 벤야시리가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것으로 그는 몽고, 적어도 타타르에서는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나. 목하 타타르는 벤야시리의 천하가 되었다. 그것은 야광충에게는 이중의 의미로 중요한 일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그 시점에 어디로 갔었던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일임과 동시에 이제는 타타르 어디에서도 로부 옹고트의 영향력 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선고가 된 것이다. 벤야시리의 막후 조력자가 바로 아루타이요, 그보다 로부 옹고 트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광충과 등평은 알고 있었다. 그의 우려대로 로부 옹고트의 손길은 곧 그들에게 뻗쳐 왔다. 그것은 지옥성을 떠난 지 반 달이 지났을 때였고, 데려온 부 상자 중 반은 회복하고 나머지 반은 목숨을 거두어 그들 일챈이 열여덟으로 줄었을 때였다. 그때 그들은 타타르 동북방의 오리아역합(烏里雅亦合) 인근에 있는 흑룡사의 근거지에 숨어 있었다. 오리아역합은 몽고족 중에도 용맹하기로 소문이 난 오랑하이 족의 영역, 로부 옹고트의 첫 공격은 그들 오랑하이족의 기습으 로 시작되었다. 흑룡사가 거기 터전을 잡은 이백여 년 동안 단 한번도 침략한 적이 없던 오랑하이족이었다. 주변의 세력은 건드리지 않고 멀리 약탈을 나가는 것이 흑룡 사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자연 오랑하이족과 흑룡사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은밀한 협력 관계까지 맺고 있었는데 기습은 정말 뜻밖이었다. 혈문룡과 원도살은 분노로 이를 갈았지만 분노보다는 피신이 우선이었다. 그들 일행은 거기 다시 두 명의 동료를 떨구어 놓고 간신히 탈줄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행로는 피로 만들어진 길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벤 야시리의 땅이 된 타타르에서 그의 명에 거역하고 흑룡사에 협 조할 부족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몽고족은 평소에는 단결이라는 것을 모르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자가 나타나고, 그 아래 복속을 하고 나면 그들만큼 철저하게 충성하는 무리도 드물었다. 징기스칸이 통일 을 이루기까지는 어려웠지만 그 이후의 정복사업은 손쉽기 그지 없게 이룰 수 있었던 것이 그 이유에서였다. 야광충 일행은 오리아역합에서 탈출한 후, 찰포한하(擦布汗 河)를 따라 북상하다가 합석오사호(哈 烏斯湖) 인근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적은 있었다. 합석오사호를 근거지로 하는 과포다(科布多)족이 그들이었다. 그들을 뚫고 험준한 알타이 산맥으로 진입했을 때 그들은 다 시 세 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다. 그 중 한 명이 형사랑이었던 것이 야광충을 분노하게 했다. 게다가 거기서 그들은 알타이 산맥의 산간족인 아륵태(阿勒泰) 족의 공격을 받아 분노를 삭히기도 전에 도주부터 해야 했다. 사태는 명백했다. 로부 옹고트가 아무리 천재적인 직관력을 가졌다고 한들 그들 이 숨어 드는 곳을 미리 알고 기다렸을 수는 없었다. 사실은 타 타르 전역에 그들에 대한 추살령(追殺令)이 내려져 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합당했다. 그들은 이제 열세 명, 그 중 방각은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 였고 노소포도 아직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여름이라 쫓겨 다니면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 라고나 할까, 혹한의 겨울이었다면 그들의 도피행각은 더욱 어 려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알타이 산맥, 그 이름 모를 산봉우리의 눈 덮인 정상에 서서 개미 뗬처럼 기어올라오는 몽고족들을 바라보며 야광층은 반격 을 결정했다. 끊임없는 도피행각, 연이은 기습에 죽고 다친 동료들 때문에 지금 상황은 최악을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 니었다. 애초부터 이질적인 두 집단의 모임이었다. 거기에 화영, 황 룡--, 등평 같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 끼여들었으니 분위 기는 더욱 묘했다. 잘되어 가는 집단에도 갈등과 분란의 소지는 있는 법인데 하 물며 어쩌다가 모인 패거리에야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달아 가고 있어서 갈등은 이제 표면으로 뚫고 나 오려 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가슴을 채우고 있었던 젓이다. 이때 야광충은 개인적인 고통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피에 대 한 유혹이 그것이었다. 지옥성을 나오던 그날 이후로 그는 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러 나 피에 대한 그리움은 꾼임없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상상도 못할 고통! 차라리 죽음을 원할 정도의 고통이 간단(間斷)없이 이어져 가 는 지옥, 진정한 무간지옥의 고통이 지금 야광충을 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때에서야 로부 옹고트가 그에게 내린 저주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부인 예충이 말한 사정(邪精) 천인혈(千人血)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목마른 자에게 한 방울의 물이 주어진다면, 그가 그것을 사양 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면……, 그때 그는 차라리 이전보다 더한 기갈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지금 야광충이 그랬다. 잃어버린 시간들과 기억, 그 후에 남은 갈가리 찢겨진 시신들 의 잔해가 그에게 준 충격의 이상으로 피는 그를 자극했다. 끊 임없이 그를 유혹했다. 그의 됫속에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유혹 같은 간지러움이 흐르 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살인에의 욕구로, 어떤 때는 파 괴의 본능으로, 또 다른 때에는 여체(女體)에의 굶주림으로 나 타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에는 하나의 열망으로 귀결되는 것 이다. 피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견딜 수 없이 쌓여 가는 피의 유혹은 생사와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절박했다. 이전에 그의 피는 싸늘한 얼음물 같았다. 그는 차가워지면 차 가워질수록 더욱 침착하고 편안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전날 마신 피의 뜨거움이 가시기 시작 하면서, 신체의 말단(末端)으로부터 솟구쳐 오는 싸늘한 냉기가 그의 몸을 정복하면 할수록 그는 죽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알았다. 맛을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입을 댄 이상 그는 끊임없이 피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피의 열기가 그를 덥혀 주지 않으면 그는 결국엔 차가운 얼음덩이로 굳어 버리고 말 것 이라는 것을……. 이젠 그에게도 그의 일행에게도 물러날 수 없는 시점이었다. 그들 집단은 생존을,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의 통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 그는 피를 원했다. 그는, 그들 모두는 복수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선택을 강요했다. 흡혈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저주를, 인간을 버리고 야 수와 동류가 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을, 하늘과 땅과 시대 (時代)와 친구, 적들이 그에게 원하고 강요하는 그것을 그는 받 아들여야만 할 것인가? 그렇게 피맛에 끌려 폭주하다가 끝내 이성도, 감정도 없는 괴 물로 변해 버리지는 않을까? 로부 옹고트는 이것을 바라고 있었던가? 그는 그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그와 동시에 아륵태족의 밤은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밤은 산을 흔드는 야수의 포효와 더불어 시작되어 산하가 붉 게 물들도록 자욱한 피비린내를 남기고서야 물러갔다. 자고 나 면 한 마을이 무덤으로 변하고, 또 자고 나면 한집에 한 사람씩 목없는 시체로 변해 있기도 했다. 아륵태족의 역사에, 몽고의 역사에 이런 밤들은 처음이었다. 인간이 야수이기를 그만둔 이래 누구나 그러하듯이 몽고족들도 밤을 두려워했다. 아니 그들은 밤을 두려워하고 외경했다. 그 밤을 활동 시간으로 삼는 인간들이 있다니……! 이제 그들은 한족들을 추격해 섬멸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짧은 낮의 평안을 즐기며 한편으로는 다가올 밤의 공포를 대비하기에도 바빴다. 평안한 휴식의 밤을 알려 주던 일몰(日沒)이 이제는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곁눈으로 바라보면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가 붉게 물든 노을을 휘감고, 이내 땅거미가 산자락에 스밀 때면 어김없이 산을 흔드 는 포효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건먹은 아녀자들이 양털가죽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차라 리 망각의 잠을 청할 때, 처음에는 화톳불을 피우고 창을 움켜 잡았던 사내들도 이제는 그 옆에 기어들어가 사신(死神)이 지나 가기만을, 황금빛 태양이 다시 그들의 머리를 비추기만을 기다 리게 되었던 것이다. 야수의 포효 소리는 검은 표범 아묘의 소리였다. 뱃속의 창자가 흘러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수의 끈질긴 생존력으로 아묘는 이때 거의 정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광충의 반격 작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아묘의 진정한 공헌은 며칠 후에 이루어졌다. 아륵태족이 겪고 있는 밤의 공포가 험준한 알타이 산맥의 능 선을 타고 평원으로 퍼져 나가자 진정한 적들이 나타났다. 벤야 시리의 친위군단이었다, 일천의 기병과 백여 명의 무사들이 야광충의 흔적을 찾아 알 타이 산맥으로 들어왔다. 그 무사들은 지옥성에서 사라졌던 팔 한지옥의 무리들이었고, 지휘자는 놀랍게도 쌍고르마였다. 그들은 산간에서 만도를 휘두르고, 나무활을 쏘아 사냥을 하 던 아륵태족과는 달랐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자들인 것 이다. 또한 그들은 밤의 어두움과 귀신의 출몰을 동일시하는 야만에 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무리들이었다. 야광충 일행들의 행보는 당장 좁혀 들었다. 적들은 밤에는 횃 불을 밝혀 기습을 경계하고, 낮에는 차근차근 포위망을 좁혀 들 었다. 그들은 사냥꾼들이 아니라 무사요, 군사들인 것이다. 정면으 로 싸우면 기분은 통쾌할지 모르나 결국엔 괴멸만을 초래할 것 이다. 로부 옹고트를 마주 대하기도 전에……! 해결책은 하나였다. 퇴각! 그것도 중원으로의 퇴각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중원에 욕심을 내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마주 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시간이 흘러 그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 해져 갈 때 그를 찾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야광충은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혼자만의 할 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야수의 포효가 다시 알타이 산맥에 울려되졌 다. 산곡을 흔들고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퍼져 흐르고, 솟구쳐 오르는 야수의 음산한 울음소리는 몽고군의 귀를 송곳처럼 찔렀 다. 이 사홀 동안 누구도 잘 수가 없었다. 쌍고르마는 바늘처럼 날카로워지는 신경을 간신히 추스르며 수하들을 다독거렸다. 분산된 채 마주쳐 봤자 대량 살상의 위기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 은 지옥성의 말로를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한발 한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나홀째 아침 일찍 시작된 추격은 그날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야광충 일행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좁은 협곡 모틔이로 몰린 검은 표범 한 마리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표범이긴 했지만 그들이 원한 것이 사냥이 아니었을진데, 허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왜 야광충 일행들이 표범과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가? 왜 그들이 살기 위해 포범 한 마리쫌 희생시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가? 쌍고르마는 야수의 포효에 너무 신경을 빼앗겼다는 후회를 했 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들이 표범 한 마리를 쫓아오는 이 나 흘 동안 야광충 일행은 이미 수백 리는 멀리 떠나 버렸을 것이다. 이젠 다시 그들의 소문이 들려 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 다. 쌍고르마는 창에 찔린 표범의 마지막 울부짖음을 등뒤로 하 고 허탈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쌍고르마는 의외의 선물을 받았다. 알타이 지방에서는 겨울을 대비해서 땅을 둥글게 파고, 격자 모양으로 잘라 낸 지토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마이한(;천막)을 덮어 유르트(;천막집)를 만들었다. 쌍고르마가 잤던 유르트도 그런 구조였다. 여름에도 차가운 산간의 기온 때문에 그들 몽고군들도 군사 행동 후에는 그런 식 의 주거를 만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낮에 겪었던 허탈함의 영향 때문에, 또 지난 사흘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한꺼번에 풀린 긴장 때문에도 그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들 극도로 긴장하고 있 었다고 하더라도 그날의 일을 막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날의 생각을 하면 쌍고르마는 식은땀으로 뒷등을 적시곤 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난 그의 머리맡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리고 거기에는 전날 죽인 검은 표범, 아묘의 목이 놓여 있었다. 해이해졌다고는 하지만 누가 일천 몽고병의 경계를 뚫고 그의 침소에까지 침투해 들어올 수 있었던가? 숨겨진 감시병들도 모르게……. 쌍고르마는 다른 증거가 없었어도 이미 누구 짓일지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보고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거 기에는 누구인차의 피로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필반(必返)! 필반!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돌아올 자 누구인가? 반드시 돌아오겠노라 그에게 피로 맹세하며 떠나갈 자 누구인가? 쌍고르마는 야광충 이외의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반나절이나 주저앉아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 습해 수하들을 모았다. 로부 옹고트를 향해 전령이 뜨고, 철수의 명령은 취소되었다. 야광충이 죽지 않으면 그가 죽는다. 그들의 꿈이 무너진다. 쌍고르마는 피할 수 없는 신탁(神託) 같은 신념을 가지고 야 광충을 쫓기 시작했다. 로부 옹고트가 다른 일은 몰라도 이번만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야광충을 지옥성에서 나오도록 내버려두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쌍고르마를 놀라게 한 야광충은 다음날 밤에야 일행을 따라잡 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 덮인 알타이의 산정에 서서 이후의 행 로를 계획했다. 그들의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알타이 산맥을 따라 내려가 야올적석하(也兀的石河)를 건너 청해(靑海)로 빠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냥 알타이 산맥을 넘어 오이라트로 들어서서 개상박(蓋桑泊) 호수를 돌아 신강(新 ) 의 대초원(大草原)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쪽 길이든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이 있었다. 청해로 들어가면 중원은 잠시였다. 그러나 그 길은 오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그 여정이 끊임없는 싸움의 길이 될 것이 라는 당연한 예상이 가능했다. 그 길은 타타르의 영역을 가로지 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신강으로 빠지면 그들은 몇 천 리 야만의 땅으로 돌아 가야 했다. 그러나 직어도 타타르의 위협은 없었다. 타타르와 이빨을 드러 내고 싸울 준비를 하는 오이라트를 지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후자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그들 일행은 한 달 후 푸르른 개상박의 호숫가를 따라 신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상대로 적들은 없었다. 적어도 타타르의 추격은 피할 수 있 었다. 그들의 소문이 오이라트에는 전해지지 않았는지 만나는 몽고 족들은 그들에게 크게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대적 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손님의 예로 그들을 맞이하고 또 보내 주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 적다운 적을 만난 것은 신강에 접어들면서부터 였다. 그 적의 이름은 대초원이었다. 대초원의 칠팔 월은 우기(雨期), 그고을 지나가는 반 달 동안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초원은 습지로 변하고 독충과 웅덩이가 곳곳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이 습지를 가로질러 가려면 이곳 지리에 밝은 몽고족들을 아 내로 삼아 그들만이 알고 있는 미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들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우기에 습지로 기어들지 는 않는 것이다. 여기서 두 명의 동료가 풀숲에 쓰러져 늪 속으로 잠겨 버렸 다. 반격을 결정한 이후 최초의 희생자였다. 풀잎 위로 걷다가 발이 빠지면 어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머 리꼭대기까지 잠겨 들었다. 옆에서 당겨 건져 내도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웅덩이에 사는 독충들이 까맣게 붙어 있는 것 이다.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들은 몽고부족에게서 약탈한 육포 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습기에 젖어 곰팡이가 핀 것들을 긁어 가며 먹어야 했다. 비 자체도 괴로운 적이었다. 물 먹은 가죽옷에서는 냄새가 나고, 썩어 들어갔다. 비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은신할 나무도 없었다. 밤이 되면 작은 관목 아래 에 모여들었지만 역시 비를 피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대초원을 지나 산악 지대에 들어섰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자족(蠻子族)과 신강의 서번족 (西番族)이 지배하는 미개지가 그것이었다. 자기 동족이 아니면, 심지어는 동족도 습격해 잡아먹어 버리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이 그들은 만도를 휘두 르며 공격을 해왔고, 백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도망쳐 갔다. 그들은 야만스러욋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 정면으로 싸워서는 당할 상대가 아님을 알자 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전법을 바꾸었다.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야광충 일행이 울창한 삼림과 밀림을 지나고 십여 개의 하천 을 건너는 동안 인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다가 나 온 인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축(家畜), 가금 (家禽), 곡식과 심지어는 가재도구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근 보름간의 여정 동안 야광충 일행은 거의 무인지경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야생의 것 이외의 양식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라도 고이 통과시켜 주었다면 다행이었 을 것이다. 서번족들은 무성한 관목숲에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침입자들을 기습했다. 만자족은 산에 올라가서 야광충 일행이 좁고 가파른 협곡-- 때로는 한 명이나 두 명씩밖에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경우 도 있었다.--을 한 줄로 늘어서서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대 한 바윗덩어리를 굴렸다.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끊임없는 공격은 적 잖이 그들을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보름 후 그들이 멀리 사천 성 변경의 송번위(松藩衛)를 바라볼 때에는 사지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신강으로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 있었고, 야광충은 두 번 더 변신해야 했었다. 이젠 피를 마시는 것이 역겹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망설 여졌다. 마시면 마실수록 강렬해지는 유혹, 그리고 일단 피를 마시고 난 뒤에 나타나는 맹목적인 살욕(殺慾)이 그 망설임의 원인이었다. 그는 점차 흡혈귀가 승고 난 후의 광란 상태를 어렴풋이라도 기억하게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살기로 광란하는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얼마 전에 그는 일행과 떨어져 흘로 피를 구하러 나갔었다. 횹혈귀의 모습을 다시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황혼이 되 어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된 일행들이 찾으러 왔을 때, 그는 이백여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는 가운데에 흘로 주저앉아 있었 다. 그 이후로 그가 피를 구하러 갈 때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그리고 야광충은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죽어도 피를 마 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송번위에 들어갈 때, 그들 일행은 열한 명이었다. 야광충과 화영, 황룡을 비롯해서 혈문룡, 원도살, 조훼의 흑 룡사 최후의 생존자들, 이제는 제법 건강을 회복한 방각과 노소 포, 월몽영, 그리고 등평과 무간지옥의 옥졸 한 명이었다. 살아 남은 옥졸 한 명은 이통천(李通天)이라고 했는데 여러모 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강호 삼류무사의 실력으로 여기까지 죽 지 않고 쫓아온 것이 그랬고, 통천(通天)이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달(李達)이었다. 그러나 워낙 아는 게 많 아 하늘의 이치를 꿰었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통천이라 불렀다 고 했다. 그가 하늘의 이치를 꿸 정도로 많이 알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은 분명했다. 무슨 일이든 나서서 한마디라도 아는 척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그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는 것도 많았지만 결정적인 것 하나는 꼭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일이었다. 그들이 만자족과 서번족의 영역을 통과할 때 식량이 떨어졌 다. 야생동물도 보이지 않고, 그것들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그때 이통천은 인간이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식 물에 대해 말했었다. 한없이 이어질 듯하던 그의 말을 노소포가 자르고 그럼 그런 것들을 찾아보라고 하자 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름만 알지, 직접 보고는 알 수가 없군요. 식물의 이름과 실제를 연결 지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경황중에도 웃게 해줬으니 도움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비웃음거리가 된 이통천이 얼굴을 붉히며 "식물의 분포, 즉 식생(植生)은 지역과 기후에 따라 다르며, 나는 중원에서 자랐 으니 신강의 것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중원에 들어가서는 찾 아 보여 주겠다."고 말했지만 다들 더 이상 그의 말을 믿지 않 았다. 통천이라는 별호는 그의 허픗을 풍자한 말로 인정되어 버 린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웃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통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이 좀 앞서기는 하지만 그가 알고 있다고 말한 것 중에 거 짓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통천은 무간지옥의 옥 졸이었으니, 예충도 야광충도 그를 알고는 있었다. 한때 예충은 그를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런 말 을 했었다. --알기만 할 뿐 자기 코앞의 문제도 해결을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그가 이통천이었다. 하늘에 닿을 견식을 가진 자가 바람피우 는 마누라를 처벌하는 방법이 겨우 야밤에 식칼로 찔러 죽이고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생각하면 졸렬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이통천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넓은 견문과 지식은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도 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부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人間)……. 나는 네가 이 인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목숨을 지키려면 인간을 믿으면 안된 다. 그러나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모순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양극단을 조화시키는 것에 모 든 것이 걸려 있다. 그렇게 사부는 강조해 말했었다. --모든 것이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라! 야광충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었 다. 이제는 그것만이 로부 옹고트를 꺾을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제28장 그후 반 년 2 사천, 송번위(松藩衛). 가을이 시작되는 구월에 그들은 사천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천성은 지세가 험악한 천연의 요충지라고만 알려졌지만 사 실은 중국 최고의 곡창 지대이기도 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사천분지의 광활한 토지에는 중국 인구의 절반은 먹여 살릴 만 한 쌀이 수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북 지방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져서 보이는 것은 온통 럼한 산과 독충이 우글대는 오지(奧地)였다. 특히 송번위 에서 설산(雪山)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가로놓여진 구채구(九寨 溝) 지역은 초원과 늪지대로 악명이 높았다. 야광충 일행은 원래 송번위의 장족(狀族) 거주지를 돌아 사천 분지로 빠지려 했었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 방향으로 가려 했던 계획은 포기되었다. 처음 그들은 숲속의 불빛으로 나타났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수림으로 가득한 구채구의 숲속,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의 숲속에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아 있었다. 밤의 불빛, 그것도 숲속에 흘로 반짝이는 불빛은 하늘의 별을 연상케 한다. 그것도 경계상으로는 명나라의 영역에 들어와 처 음으로 발견한 불빛이니 야광충 일행에게는 묘한 매력을 주는 것이다. 장족이나 묘족(苗族)은 밤에 불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다. 귀신을 불러오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신강과 명나라 접경의 국경을 지키는 송번위의 군사라고도 생 각하기 어려웠다. 매복을 해도 있을 장소가 따로 있고, 감시초막이 있어도 있을 장소가 따로 있는 법이다. 누가 숲 한가운데에 불을 밝혀 두고 국경을 지키겠노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등됴이 일단 몰래 다가가 정찰을 했다. 잠시 후 돌아 온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닥불을 밝혀 두고 네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있다는 것이다. 장족도 아니고, 군사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체가 모호하다는 것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 였다. 노소포가 간단한 해답을 제시했다. "일단 가서 이야기해 보면 될 것 아닌가?"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해답, 일행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모 닥불을 향해 걸어갔다. 불가어t 앉아 있던 장대한 처t구익 시생 하나가 그들을 보고 씨 익 웃으며 일어섰다. 모닥불빛에 그의 얼굴을 뒤덮은 고슴도치 수염이 드러났다. 무성한 수염 사이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그가 말했다. "또 하나 걸렸군!" 그의 말끝에 걸린 묘한 느낌에 야광충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 리는데, 그의 손끝에서는 하얀빛이 번뜩였다. 체구에 어울리게 도 장정의 가슴팍 넓이 만한 도끼 한 자루가 그의 손에 들렸다. 고슴도치 수염이 그 도끼를 가볍게 흔들면서 말했다. "사천성 송번위의 산령왕(山靈王) 엄발(嚴跋)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바로 나다!" 방각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방각과 어깨를 겨루는 천하 오대 도끼고수 중 하나가 바로 녹 림대도(i햐*Jt뾰) 산령왕 엄발 아닌가! 그의 쾌령부(快靈斧)는 족히 무림일절로 손꼽힐 만한 것이라는 소문은 방각도 익히 듣 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않았는지 엄발은 약간 실망한 빛을 보이더니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깊은 숲속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니 짐보따리를 놓고 가면 팔다리는 온전하게 들고 가게 해주겠다." 혈문룡이 피식 웃었다. 그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을 밝혀 두고 손님을 기다린다? 신선한 영업 방법이군!" 이제 보니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불을 보고 찾아오는 자를 턴다는 신기한 영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강도들이었다. "엥?" 엄발은 그 말에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보다는 야 광충 일행의 태연한 반응이 그로서는 놀라웠다. 산령왕 엄발의 이름을 듣고도 태연한 자가 있다니! 송번위를 거쳐 신강, 몽고와 밀무역을 하는 자치고 그의 이름 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엄발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혈문룡과 비슷한 표정으 로 피식 웃고는 도끼를 흔들며 한걸음 나섰다. "초보자로구나! 알아서 .기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지금 좀 가르쳐 줘야 너희들도 오래 사는 데 지장이 없겠다!" 혈문룡이 유쾌한 표정으로 마주 나서려는데 먼저 나서는 자가 있었다. 방각이었다. "쾌령부의 이름은 익히 들었지!" 방각의 왼쪽 팔뚝에 방패가 끼워지고, 오른손에 대월이 잡혔 다. 바늘끝처럼 날카롭고,4맹수처럼 사나운 기운이 그의 몸을 감쌌다. 엄발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디선가, 그리고 언젠가 들어 본 듯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 당신 흑시……!" 방노선배라는 말은 미처 나오지 않았다. 다짜고짜 날아오는 방각의 도끼를 막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내 숲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금속성을 내며 싸움을 벌였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칠십을 바라보는 방각이지만 투지는 오십대의 엄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엄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각의 도끼가 힘과 기세로 밀고 들 어왔지만 날카로움에 있어서는 그도 전혀 지지 않았다. 그의 거 대한 도끼는 마치 짧고 가는 비수를 움직이듯이 민첩하게 움직 였다. 싸움을 하지 않아도 승패가 나뉘는 경우가 있다. 기세의 강약에 의한 판정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세력의 다소 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방각과 엄발의 싸움은 누가 밀리지도 않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진짜 싸움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야광충 일행은 누구도 방각의 결투를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겪어 온 생사의 격전장을 생각한다면 두 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들 일행은 저마다 한 가닥씩은 하는데 다가 지옥을 같이 지나온 것이다. 아마도 같은 수로, 즉 소수 대 소수로 싸워서 그들 일행을 이길 세력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원도살은 상대, 즉 모닥불 가에 앉은 나머지 세 명도 별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들에게서도 엄발을 걱정하는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언가 초연한 빛이 그들에겐 있었다. 원도살은 그 모습에서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엄발 이 나섰을 때만 해도 나머지는 그의 수하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기색으로 보아서는 엄발은 그들 일행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고수군요!" 원도살은 고개를 돌려 방금 말한 화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때 이미 화영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누구보다도 더 화영의 눈을 인정하고 있다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는 천부의 예민한 감각 으로 이미 화영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인간의 경 지에서 어느만큼 떠난 그의 가치를 외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그가 고수라고 인정하는 자가 있다! 원도살은 우선은 놀라고, 다음으로는 믿기가 싫었다. 야광충, 황룡, 화영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위에 올려놓기 싫어하는 그가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각 정도의 고수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 이라면 그보다 고수이거나 눈이 없는 자들일 것이다. 상대도 그와 마찬가지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 다. 모닥불가에 앉아 있던 두 명이 일어나고, 그 두 명의 뒤로 다 른 한 명이 일어났다. 그것으로 그들의 위계를 알 수가 있었다. '처음의 두 명보다는 나중에 일어난 한 명이 진짜이리라!' 고수는 나중에 나오는 법이니 말이다. 원도살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먼저 일어난 두 명이 허리춤에 서 칼을 뽑았다. 그리고 바로 원도살의 목을 노리고 날이들었다. 처음 그 둘의 칼 뽑는 소리가 하나처럼 들렸을 때 그는 그들 이 보통이 아님을 알았어야 벙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영이 검을 뽑아 두 개의 칼날을 튕겨 낸 뒤에야 그 두 개의 칼날이 그의 목을 자르고 지나가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두 개의 칼날! 다짜고짜 원도살의 목을 노렸던 그 두 개의 칼날은 둥근 달처 럼 휘어진 만도의 칼날이었고, 그 만도는 삼십은 넘어 보이고, 사십은 채 안된 것 같은 두 사내가 휘두르고 있었다. 원도살은 그들이 자신의 목을 노렸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해 칼을 뽑으려 했지만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 먼저였다. 그를 구해 준 화영이 이미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칼은 빠르고 신속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협공이 완벽 하게 맞아들어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기세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공기를 찢는 파공음도 없고, 살갗을 찌르는 예기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화영의 검법과도 비슷해 보였다. 시간도 공간도 무시한 듯한 비현실감이 그 도법에는 있었다. 달라처럼 매끄럽게 공간을 가르며 적을 베어 가는 것이다. 화영도 그것이 신기했던 오양이었다. 그의 심검과 류가 같은 도법, 이를 테면 심도(心刀)라고나 할 도법을 상대로 싸우는 것 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정을 봐주며 싸우는 것 같았다. 청풍검을 휘둘러 그들 의 공격에 방어만 하고 변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방각과 엄발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살기도 삼엄한 투지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싸움이었다. 두 개의 칼과 한 자루의 검은 현갈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서로 부딪치지는 않고 있었다. 원도살은 그것이 부딪치지 않고도 고하를 가름하는 경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힘으로 겨루는 것이 아닐 바에야 굳이 무기 를 부딪칠 필요란 없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원도살은 화영에게 별위험이 없어 보이자 남은 한 명에게 관 심을 돌렸다. 그는 모닥불가 나무에 기대어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숲속,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친 그의 모습은 흡사 무덤가에 선 석상처럼 우뚝하고, 외로워 보였다. 삼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체구가 호리호리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라 보이지는 않는 것은 어깨에서 허리를 거쳐 다리까지 내려오는 선이 전체적으로 균형 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한 자루 잘 닦은 검(劍)은 쇠가 아니라 얼음조각으로 만들어 진 것처럼 투명한 예기(銳氣)를 발한다. 지금 그가 그랬다. 대각선으로 칼자국이 난 각진 얼굴에 굳게 다문 입술, 깊이 눌러쓴 넓은 챙모짜 아래로 번뜩이는 눈이 강철처럼 단단하면서 도 둔하지 않고 투명한……, 그는 마치 한 자루 잘 닦은 검처럼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낡아서 아래가 너덜너덜해진 장포를 걸치고도 전혀 초라해 보 이지 않는 것은 그가 뿜어내는 예기가 장식처럼 빛나고 있기 때 문일 것이다. 그의 무기일 둣한 검은 나무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장군검 ! 나무에 기대어 세워진 검은 일견하기에도 무려 다섯 자 길이 가 넘어 보이는 장검이었다. 보통의 검이 혼히 세 자 두 푼이요, 장검이라 해도 네 자를 넘지 않는 것이 상례임을 생각할 때 그의 검은 기형적으로 길었 다. 적을 베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군사를 지휘하며 호령 하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 바로 장군검이었다. 원도살의 날카로운 눈은 모닥불빛에 비친 검자루에 '유성(流 星)' 이라는 글자가 전각(篆刻)으로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그 검의 이름일 것이다. 원도살은 그가 장군검을 쓴다는 것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그 의 기상이 헌앙한 것에 감탄했다. 결정적으로는 그 전체적인 인 상이 그의 마음에 꼭 들어 스스로에게도 놀라고 말았다.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의 경우일 것이다. 믿을 수는 있지만 어쩐지 정이 안 가는 야광충이나, 특이함과 신비합의 집결체인 듯한 황룡과 화영에게서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심지어는 같은 식구라 할 수 있는 혈문룡에게서도 이 렇게 강한 끌림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내에게는 어쩐지 꼴리는 매력이 있었다. 그가, 낡은 장포의 사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나무에 기대어 놓은 검자루를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서서히 검을 빼기 시작했다. 원도살은 갑자기 숨이 콱 막혀 오는 듯한 강한 압력을 느꼈 다.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며 스르릉--하고 나는 작은 소리가 마치 천둥 소리처럼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고수!' 원도살은 그때에서야 화영이 말했던 고수가 바로 이 사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기세에 있어서는 정말 야광충이나 화영, 황룡 에 못지않은 자임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선제공격이 최선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원도살이 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정상보다 훨씬 긴 저 검을 뽑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이 뽑히면 바로 공 격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확실히 알고 있으 면서도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원도살의 이마로 땀방울이 흘렀다. 눈도 짬빡할 수 없는 가공 할 기세가 그를 덮고 있었다. 저 검이 다 뽑히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뱀 앞에 선 개구리의 기분이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문득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그것이 그를 구했다. "백리 장군(百里將軍)!" 사내의 동작이 딱 멈췄다. 그의 눈에서 화등잔 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소리는 둥평이 낸 것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백리 장군이 맞군요! 유성검을 보고서도 한참이나 눈을 의심했습니다." 유성검(流星劍)! 검집에서 반쫌 뽑힌 유성검의 속살은 먹처럼 검은색이었다. 그 검이 사내의 손 안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검자루를 잡은 손이 그렇게 떨리는 것일 게다. 원도살은 지금에서야 한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 그의 이마에 는 온통 땀이었다. 뱀의 아가리에 거의 들어갔다가 빠져 나온 기분이었다. 그는 외경스런 감정을 담아 백리 장군이라 불린 사내를 쳐다 보았다. 백리 장군! 이름이 장군(將軍)일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백리 성을 가진 장군이란 말인가? 군부(軍部)의 장군? 그런 인물이 숲속에서 도적질을 한다? 사내의 손이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그에 맞추어 심중의 격동 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스르릉! 그의 검이 완전히 뽑혔다. 굵은 몽둥이라고나 할까? 손가락 세 개 굵기의 시커먼 검신은 길고 두터울 뿐 아니라 투박하기까지 했다. 검날이 서 있지 않은 것이다. 저런 검으로 는 무엇 하나 자를 수 없을 것이다. 사내는 그런 검을 땅에 거꾸로 세우고, 손잡이 끝에 두 손을 올려 누르듯 기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날 아는 자 누군가?" 나직하지만 묘하게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등평이 위축된 듯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오 년 전에 한번 뵈었죠. 금의위의 등 평입니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등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찌르는 둣 섬뜩해서 둥평은 절로 손을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내, 백리 장군이 말했다. "등평은 안다. 그러나 당신은 아니다." 등평은 그제야 자신이 역용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변명했다. "사정이 있어서 변장을 했습니다. 본얼굴을 보시면 기억하시 겠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은 보여 드릴 수가 없군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역용술이 라……." 원래의 모습을 찾는 것은 금의위로 돌아간 뒤에나 가능했다. 환마 서문정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만이 억용을 시 킬 수도, 그것을 풀고 원래의 모습을 찾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 이었다. 백리 장군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찌를 듯한 눈으로 그를 응시 하다가 싸우고 있는 두 패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방각과 엄발의 싸움은 아직 누가 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호 각을 이루며 진행되다가 막 전기가 이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쾌속함에 있어서나 날카로움, 세밀한 변화에 있어서 위인 엄 발의 쾌령부에 방각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힘과 기세는 역시 그가 위인 듯 방각은 한발 한발 엄 발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풀과 나뭇가지 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그들의 파괴적인 기세에 뽑히고, 부러 져 나간 나뭇가지였다. 쩡! 방각의 대월이 한아름 굵기의 나무를 찍었다. 엄발은 대월의 기세가 주춤해진 틈에 공격을 해야 하는데 오 히려 뒤로 물러섰다. 일반적으로 무기가 이물에 걸리면 기세가 약화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방각의 경우는 반대임을 이미 알아 차렸던 것이다. 방각의 풍마부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부수고 때리며 점점 기 세가 강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속도도, 정확도도 방각의 특기는 아니었다. 공격을 거 듕할수록 점점 드세져 가는 살기와 거친 기상이 그의 주무기였 던 것이다. 캉! 캉! 엄발의 쾌령부가 발악하둣 휘둘러졌지만 방각의 금순에 맞아 튀었다. 그는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화영과 두 사내의 싸움은 일방적인 것임을 이제 확연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두 사내의 칼은 점점 빨라지고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반대로 화영의 검은 더욱 무건고 느려져서 이제는 검을 들고 있기에도 힘겨워 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언뚱 화영이 밀리는 둣했지만 사실은 그가 우위를 점하고 있 었다. 그는 태연한 신색으로 천천히 검을 움직여 가고 있지만 두 사내는 수없이 칼을 휘둘러서야 검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땀범벅이 되어 허덕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는 것은 이제는 전적으로 화영의 마음에 달려 있 는 것이다. 백리 장군이 다시 둥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수했군. 장사꾼들이 아니었어."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 이곳에 출몰하는 자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짐작했어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 이미 시작한 싸움이니!" 시커먼 몽둥이처럼 생긴 그의 검이 중단으로 들렸다. 그는 그 뭉툭한 검봉(劒鋒)으로 등평을 가리켰다. 등평은 그의 말에 놀라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 겼다. 한 순간 산악 같은 기세가 백리 장군의 검으로부터 퍼져 나와 입도 열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 장군의 입에서 짧은 경고가 발해졌다. "간다!" 슈왁! 파아앙! 순간적인 일이었다. 광명정대한 성품인 듯 백리 장군은 경고 를 하고야 검을 뻗었다. 등평은 그 기세에 맞설 수는 없다고 생 각하고 몸을 뽑아 올려 피하려 챘다. 그러나 이미 그의 팔다리는 묵직한 몽둥이에 맞은 듯 뻐근해 졌다. 등평은 비틀거리며 물러섯다. 내려다본 옷자락은 날카로운 칼 에라도 베인 듯 세 군데나 찢겨져 있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대초열지옥에서 야광충에게 당한 후 또 한번 좌절을 겪은 것이다. 문득 그의 뇌리에 대명군부(大明軍部) 최고의 고수는 정무장 군(征武將軍) 백리극(百里克)일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소문이 떠 올랐다. 백만의 군사를 지휘하는 것에는 그보다 나을 자가 있을지 몰 라도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아마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거라 는……, 그런 소문이었다. 정무 장군 백리극! 성(姓)은 복성(復姓) 으로 백리(百里) , 명(名)은 극(克), 자 (字)는 자허(子虛)! 올해 나이, 아마도 서른둘. 강소성(江蘇省) 균현(均縣) 출신으로 원나라 치하에서는 조금 주줌했지만 명나라 때에는 다시 옛 영화를 되찾은, 예로부터 내 려오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자손. 육 년 전 정난지변(靖難之變)에 가담할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멸 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때 같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그가 여기 사천성의 오지에 나타났다. 백리극이 등평과 아직 나서지 않은 일행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번 건 경고였다. 다시 가네만……, 함께 덤벼도 좋다." 파아앙!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져 나가는 듯한 강렬한 파공음이 숲속 에 퍼져 나갔다. 언뜻 보기에도 수십 근이 넘어 보이는 장검이 무지막지한 힘과 속도로 둥평을 찔렀다. 등평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검을 보며 피할 생각도 없는 지 우뚝 서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인에게는 군인의 길이 있다.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살인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흉악한 무리가 군인이라고 소동파(蘇東坡)는 말했지만 조국애(祖國愛)를 기본으로 그 길만을 묵묵히 걷는 자 도 있는 것이다. 백리극의 눈에 이채가 돌더니 검끝이 약간 휘어졌다. 꽈앙! 검은 등평의 옆구리 옷자락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는 뒤에 선 원도살을 향해 뻗었다. 그 검을 향해 금빛이 격사되었다. 과과광! 금라이 비산하고, 유성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숲속이 잠시 밝아졌다. 왕조(王朝)에 충성(忠誠)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도 있고, 신의(信義)를 코 푼 종이처럼 여기는 자도 있다. 그러나 충(忠)과 효(孝)를 지고지상(至高至上)의 가치로 여기 고, 신(信)과 의(義)를 지키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는 자도 있는 것이아. 백리극은 손아귀가 찢겨질 정도로 흔들리는 유성검을 굳게 움 켜쥐고 방금 그런 결과를 만든 황룡의 다섯 자나 길어진 손을 노려보았다. 그 손에는 아직도 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밀종? 재미있군!" 콰앙! 유성검에서 벼락치는 둣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검은 황룡의 머 리를 향해 거대한 나무둥치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휘둘러졌다. 파아! 황룡의 양손이 한 순간 수십, 수백 개가 되어 검을 향해 마주 쏘아졌다. 눈부신 금광이 시커먼 검을 덮어 버렸다. 두두두둥! 황룡이 비스듬히 한걸음 물러섰다. 백리극은 반대편으로 세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촤악! 검은 채찍이 꿈틀거리며 백리극의 목을 감아 왔다. 그런 자를 고지식하다고 할 수도 있다. 답답하다고 비웃을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를 삶의 지표로 삼으며 존경하고 본받으려 하 는 자도 있다. 등평이 백리극을 보는 눈이 그것이었다. 원도살은 눈을 크게 뜨고 황룡을 바라보았다. 분명 천수패엽장(千手貝葉掌)이 유성검을 막아 튕겨 내는 것 으로 보았는데, 어느 사이에 검은 황룡의 가사 가슴팍에 굵은 자국을 남겨 놓았다. 목 바로 아래로부터 배꼽까지, 그리고 명치를 중심으로 가로 지르는 또 한 줄이었다. 잘려진 황룡의 가사 옷자락으로부터 희 황한 금광이 퍼져 나왔다. 황룡은 다행히 별타격을 입지는 않았는지 다시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양손이 주욱 길어져 막 월몽영의 채찍을 튕겨 내 고 목을 가르려 하는 유성검을 향해 뻗었다. 보리반야인이었다. 본령에서 벗어난 일을 하긴 하지만 금의위는 군대, 금의위의 위 사도 당연히 군인이었다. 등평도 그래서 한 사람의 군인이었다. 그의 이상형은 백리극이었다. 그의 영원한 우상, 백리극! 황룡의 양손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유성검은 애초부터 월 몽영의 목을 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노린 것은 황룡, 본인이었다. 카캉! 황룡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가슴팍 옷자락에 다시 두 개 의 칼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그의 금빛 피부에 검은 자국 두 개 가 생겼다. 기공(氣功)과 장공(掌功)에 있어서는 천하무적이라 할 그도 못 당하는 무공이 있었던가? 황룡의 열 손가락이 한 순간 펼쳐졌다. 백리극은 이때 원도살을 베어 가고 있었다. 가공할 기세였다. 빠르고 강한, 복잡한 변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이 그저 열십자 로 휘두르는 것이 고작인 그의 검에서는 쉴새없이 우렛소리가 터져 나왔다. 따당! 원도살의 뭉툭한 칼이 튕겨지고 가슴팍이 열렸다. 이런 경우 칼을 놓고 물러서서 후속공격에서 벗어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도살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잡았 다. 칼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요동치고 있었다. 싸우다가 칼을 놓치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 할 뿐, 그는 가 슴팍에 밀어닥치는 시커먼 검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원도살 은 목숨보다는 명예를 택했던 것이다. 검은 채찍 대선룡이 백리극의 손목을 후려쳐 왔다. 노소포의 두 자루 판관필이 옆구리를 찔렀다. 콰앙! 유성검은 원도살의 어깻죽지에서 검은 채찍 대선룡의 허리를 거쳐 노소포의 판관필을 잡은 두 손목까지 이어지는 대각선을 그리며 사선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폭음과도 같은 우렛소리가 세 사람의 귀를 때렸다. 백리극이 당년 정난(靖難)의 해에 영락제--그때는 연왕(燕 王) 주체(朱 )였던--에게 협조하지 않고 기병(起兵)을 거부했 을 때, 등평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왕은 당시 섬서(陝西) 응양위(鷹揚衛)의 위장(衛將)이었던 그의 직속상관이었지만 그가 내린 명령은 그보다 위, 당시의 황 제였던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 )을 겨누는 것이었다. 백리극은 칼날이 분주히 날아다니던 그 흔란 상태에서 명령보 다는 충성을 택했던 것이다. 등평은 이해할 수 있었다. 따다당! 금빛 선 열 줄기가 유성검의 시커먼 검신을 때렸다. 번갯불 같은 푸른 불꽃이 검신을 따라 튀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백리극의 검은 황룡의 수미지인(須彌指引)에 맞아 휘청 한 자 나 구부러졌다. 그러면서도 검은 여전히 사선을 그렸다. 원도살은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피를 뿜었다. 유성검에 단지 스치기만 한 것인데도 그의 가슴팍에는 검게 탄 상처 자국이 생겼다. 월몽영이 휘청휘청 앞으로 당겨 왔다. 한 순간 유성검에 스친 대선룡이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요동을 쳤던 것이다. 노소포의 손은 더 이상 판관필을 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찢 어진 호구에서 피를 홀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나마 황룡의 개입이 아니었으면 팔목부터 날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백리극의 손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룡의 힘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호구도 유성 검의 꿈틀거림에 따라 찢겨진 것이다. 그는 왼손을 오른손 뒤에 붙였다. 그렇게 두 손에 손잡이를 잡힌 유성검이 다시 큰 원을 그렸다. 꽈르릉! 검신이 바람을 끊고, 용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도살과 월몽영, 노소포의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황룡이 금 라 번뜩이는 손을 뻗고 있었다. 화영과 두 사내, 방각과 엄발의 싸움은 이미 중단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싸움에 끼지 않고 구경만 하던 혈문룡은 이제는 끼 여들 틈도 없이 계속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가 백리극의 검이 그리는 강철의 무지개 같은 큰 원 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화영의 눈까지 거기 에 따라 움직일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였다. 등평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강소백리가(江蘇百里家)!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게는 두 부류의 공신집단이 있 었다. 이십사인동향무인집단(二十四人同鄕武人集團), 즉 홍무제 의 고향인 안휘성(安徽省) 호주(濠州;명대의 봉양현)에서부터 그를 따랐던 서달(徐達) , 이선장(李先長) 등을 중심으로 하는 무장집단과 강남칠십이가문(江南七十二家門)이었다. 강남칠십이가문은 강남의 지주집단으로 건국 초기 명나라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초기 행정관료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그것은 그들이 남송(南宋)의 전통을 계승해, 보다 오래 원의 지배를 받았던 강북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유식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몰라도 나라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힘만 으로는 안되는 것임은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강남 칠십이가문의 중심 세력이었던 강소 백리가가 결국은 그때 멸문당했다. 그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백리극이 황 제에 등극한 연왕 주체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들린 며칠 후의 일이었다, 백리극이 자객에게? 그를 아는 모두가 코웃음을 쳤지만 등평은 그럴 수 있다고 생 각했다. 바뀌어 버린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기 싫었던 백리극이 자객의 칼을 빌려 죽음을 택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다운 죽음이었다. 저항(抵抗)의 한 형식으로써의 자결은 진정한 저항이 아니었 #. 저항해야 하지만 그렇게도 할 수 없는 하늘의 손에 최후를 맞는 것이 차라리 진정한 저항이었다. 말술을 퍼마시며 등평은 눈물을 삼켰었다. 금의위의 교위(校尉)로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있었던 그였기 에 그는 오든 것을 보고 있었다. 끝내 그만은 살리려 했던 영락제에게 끝끝내 주살을 주청했던 무리들을……, 그를 최대의 경쟁자로 생각했던 당시 몽고좌우위 (蒙古左右衛)의 위장 구복(丘福)이 어떻게 응양위까지 통괄하고 결국은 후군도독(後軍都督)의 지위에까지 올라갔던가 하는 것도. 강소백리가의 여인들이 전통에 따라 뿔뿔이 나뉘어져 노비로, 첩으로, 흑은 창기(娼妓)로 팔려 가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본 것 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나타났다. 여기 사천의 깊은 밀림 속에 그가 나타났다. 강철의 무지개는 정지되어 버렸다. 유성검의 시커먼 검신은 비스듬히 위를 향한 채 멈추어져 떨 고 있었다. 그대로 무지개가 그려졌으면 피를 뿜었을 세 사람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룡의 금빛 손은 뻗어지다가 멈추어 허공에 들려 있었고, 화 영은 검을 거두어 넣고 있었다. 모자의 챙 아래로 깊이 박힌 백리극의 눈은 타오를 둣 형형한 안광을 뿜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장갑에 잡힌 그의 유성검, 그 장갑 틈으로 흐르는 붉은 피 온통 검은 복장에 눈부신 은발과 그 은발보다 창백한 얼굴 을 가진 한 사내. 사내는 무슨 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입술은 걀라터져 았고, 눈 은 충혈되어 기광(奇光)을 뿜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한편으로 는 푸르스름한 잿빛이 감돌아 죽기 직전의 병자처럼도 보였다. 야광충이었다. 그가 백리극의 뇌정검법(雷霆劍法)을 막아내었던 것이다. 다 른 무기도 아니고 단지 장갑 낀 손으로. 야광충은 장갑 틈으로 새어 나와 손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 를 보고 있었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야광충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 조화십삼수에 양인장, 전륜나까지 합쳐진 그 무공, '혈염수(血染手)'로도 손바닥이 찢길 정도의 타 격을 받은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힘을 홀려 버렸는데도 말이다. 피로 물든 손, 그의 혈염수가 처음으로 그 자신의 피로 물들 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잡고 있던 유성검을 놓으며 말했다. "아까 했던 말에 흥미가 있다." 메마른 목소리였다. 단순히 건조한 목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가슴속까지 메말라 있다는 느낌을 주는 목소리. 백리극은 유성검을 보았다. 적의 손에 잡혔다가 풀려난 검, 여전 히 허공에 치켜 들려 있지만 아무것도 베어 버릴 수 없는 그 검. 과거에는 천자의 위광이 거기 감돌았었다. 백만대군은 아니더 라도 대명의 정병(精兵)들을 부릴 수 있는 위엄과 권리가 그 검 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두운 숲속에서 행인의 짐이나 약탈하는 데 쓰이고 있다. 그가 비참해진 몇 배 이상 검도 비참해져 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유성검을 뒤로 집어 던졌다. 보지도 않고 던졌는데 검은 검집에 정확히 꽂혔다. 화영과 싸웠던 두 사내가 그의 등뒤로 와서 섰다. 흘러내린 땀은 멎지 않았는데, 그 눈만은 형형히 빛나 백리극에게 위협이 되는 무엇이든 몸으로 막겠다는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송번위에 넓게 줄몰 하고 있었다." 백리극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강호의 무사들로 보였다. 그것이 이상했다. 강호무림 의 인물들이 이 오지로 올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도 수백이 넘는 무리가. 더 이상한 것은……. "송번위의 군사들이 거기 합세해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라졌다. 엄발과 두 사내를 데리 고 백리극은 모닥불가에서 사라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 렸다. 누구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등평도 그랬다. 그는 그저 고뇌 에 가득 찬 눈빚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아었다. 다음날 낮부터 그들은 다시 공격에 사달렸다. 놀랍게도 지옥 성의 무리들로부터 받는 공격이었다. 그들이 명나라의 국경 안 에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 몽고족들이 송번위 군사들의 협조를 받아 가며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광충의 침묵은 깊고 길게 이어졌다. 그는 이 이해할 수 없 는 사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동안 그들은 지옥성 의 무리들과 싸워 가며, 한편으로는 송번위 군사들을 피하며 구 채구의 늪지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사홀이 지나고, 그들은 백리극을 처음 만난 그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은 지옥성의 무리만이 아니고, 군 사들만도 아니었다. 대자연도 그들의 적이었던 것이다. 그때, 백리극이 다시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야광충 일행이 그들에게 화가 된 것일까? 그들도 같은 무리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지리를 잘 알 아 큰 싸움 없이 피해다닐 수는 있었지만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었다. "알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이 누군지, 왜 당신들을 쫓는지 알 아야겠어!" 엄발의 질문이었다. "몽고인들이다!" 원도살의 대답. "웃기는 소리! 송번위가 왜 몽고인을 돕는가?" 엄발의 비웃음. "그리고 몽고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중원인 같아?" 또 한번의 비웃음. 그 순간 야광충은 깨달았다. 지옥성이 왜 필요했던가, 왜 중원인을 받아들여 옥주까지 시 켰던가, 지옥연무를 마친 몽고인들이 어디로 사라졌던가, 왜 팔 한지옥의 무리들이 지옥성의 그날 그들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들은 중원에 들어와 있었다." 야광충이 감탄하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중원인으로 행세하기 위해서 지옥연무의 한족 옥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무림세력으로 위장해서!" 노소포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둣 눈을 껌벅거렸다. "송번위는 그들에게 매수된 것일까?" 월몽영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물었다. "더 위에서부터 매수되었을 수도 있지!" 등평이 처음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에게 쏠리는 시선을 의식 하며 등평은 천천히 말했다. 그것이 백리극의 안광을 번뜩이게 했다. "구복이 후군도독인 이상." 후군도독부의 관할 범위가 바로 사천, 섬서의 양 지역인 것이다. "구복!" 백리극이 신음하듯 말했다. "지금 구복이 몽고족에게 매수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등평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능성일 뿐이오." 한참의 시간이 홀렀다. 원도살이 그들 일행이 만들어진 과정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만 그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원도살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들은 엄복이 육 년 전부터 그들과 같이 행동해 왔다는 것, 칼을 쓰는 두 사내가 사실은 귀머거리에 벙어리로 백리극의 휘하 막장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객의 칼에 몸을 맡기고 혼절 했던 백리극을 업고 도망쳐 나온 것도 그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두 사람, 도신(刀神) 도귀(刀鬼)라고 불리는 그 두 사람은 그렇게 백리극을 구해 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그에 게 가한 셈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그들은 여기 사천의 오지에서 밀무역꾼들을 털어 가 며 살아왔었다. 야광충이 일어났다. "가자." 일행이 그를 쫓아 걸었다. 원도살은 아쉬운 빛을 감추지도 않고 백리극을 보았지만 그는 눈을 내리 감은 채 꼼짝도 않았다. 그들이 숲 사이로 사라지려 할 때,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야광충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건가?"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던 것이다. 백리극이 엄발을 향해 턱을 들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원으로 들어가려면……!" 엄발이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땅에 그림을 그렸다. 제29장 그후 반 년 3 사천에서 귀주까지. 그들이 택한 경로는 사천성 북서쪽의 무공(懋功) 지방을 거쳐 대설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신강과 명의 접경지를 아슬 아슬하게 걸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로만 걷는 길이었다. 그 안내자는 엄발이었다. 이유를 대지 않고 백리극의 일행도 그들을 따랐다. 백리극의 일행에는 앞서 보았던 네 명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 다. 예전부터 엄발의 밑에서 산적 생활을 해왔던 담호변색(談虎 變色) 양소(梁少)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름은 적을 '소(少)'자를 썼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작다면 세상에 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 장 십 척에 달하는 장대한 체구의 대장부가 그였던 것이다. 장대한 체구와 호랑이를 만나도 겁을 먹지 않을 간덩이가 그 의 자랑이었다. 원래 임발과 그는 다른 몇 명을 데리고 여기 송번위에서 밀수 꾼들을 털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리극과 두 귀머거리 형제를 만났다. 사소한 시비가 큰 싸움이 되고, 수호지의 양산박(梁山泊) 시 절부터 정해진 녹림의 공식대로 그들은 한 패가 되었다. 그 후 이런 고생,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수하들이 하나하나 죽어 가고 떠나고 해서 이제는 그렇게 다섯 명만이 남았다. 이제 다시 그들에게 새로운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야광충 일행 과의 동행이 그것이었다. 때는 구월을 넘어 시월의 초순, 산 위에는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들은 대고산(大鼓山) , 몽필산(夢筆山)을 거쳐 공래산 ( 徠山)을 타넘고 사천성의 삼서쪽 끝을 향했다. 적은 다시 인간에서 자연으로 바뀌었다. 이통천과 양소를 제외하고는 다들 고수급의 인물들이라 대설 산의 높은 산봉과 만년설(萬年雪),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는 고통은 괴롭긴 해도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려웠던 것은 허리까지 빠지는 진홅구덩이로 이루어진 포동강( 銅崗)이었다. 대설산을 넘어 사천을 바라보는 중간에 포동강이 있었다. 눈 보라 몰아치는 대설산의 산정과는 달리 여기서는 찌는 듯한 더 위가 그들을 괴롭혔다. 낮이 되면 가열된 습기에 섞여 매캐한 독기가 십여 장 높이로 치솟고, 땅에는 독충과 독사들이 우글거렸다. 허리까지 빠지는 진흙 속에는 두터운 가죽옷도 꿰뚫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뱀이 살고 있었다. 이통천은 죽을 것같이 허 덕거리면서도 그것이 묘강금사주망 (苗 金絲珠 ) 이며, 독은 없지만 짐승이나 인간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어 안에서부터 먹어 치우는 놈들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별도움은 안되었지만 그 말로부터 한 가지만은 콱실해졌다. 그들이 사천의 남서쪽으로부터 귀주, 그 아래의 남만(南蠻)에 이르기까지를 대충 일컬어 부르는 지명, 묘강(苗疆)에 들어왔다 는 것이었다. 이동은 그래서 밤에만 이루어졌다. 낮의 열기가 식으면 대설 산으로부터 불어온 싸늘한 공기가 독충과 독사들을 물러서게 했 다. 십 장까지 치솟던 독장(毒漿)도 지면에 다섯 자 높이로 낮 게 깔렸다. 그들은 가죽으로 얼굴을 제외한 온몸의 피부를 가리고 극도로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다섯 자면 웬만한 사람의 가슴까지 차 올라올 정도의 높이였다. 흑시라도 공기를 혼들어 놓으면 독장 이 일렁거려 호흡기까지 닿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황룡이 앞장을 섰다. 그는 가죽을 감지 않고도 독장 속을 지 나갈 수가 있었다. 온몸에 은은히 빛나는 금빛, 보리무상강기가 독을 막아 주었던 것이다. 그는 독충이나, 독사나, 진흙탕 속의 묘강금사주망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마 혼자였다면 이런 곳은 아무렇지도 않 게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묘하게도 얼마 전부터 그의 몸에서는 일부러 공력을 운기하지 않아도 금빛이 나기 시작했다. 보리무상강기가 완성을 향해 나 아가는 증거라고 말하긴 했는데, 노소포는 저러다가 정말 금불 상(金佛像)이 되는 게 아니냐고 놀리곤 했었다. 황룡은 실제로 보리무상강기가 십 성에 이르면 평상시에도 온 몸에서 금빛이 휘황하게 날 것이라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 다. 그리고 그 금라은 십이 성,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황룡의 뒤에는 엄발이 따랐다. 망막한 벌판이 온통 진흙탕처럼 보이긴 하지만 거기에도 길이 있다는 것이 엄발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행 중에는 그만이 대충이라도 그 길을 알고 있었다. 가장 효에 황룡이 선 이유가 그것이었다. 혹시 엄발이 길을 잘못 안내해 빠지게 되더라도 별타격을 받지 않고 다시 기어나 올 수 있는 사람은 황룡뿐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일행들이 줄줄이 따랐다. 자기 발로 걷지 않은 사람 도 있었는데, 이통천과 노소포였다. 이통천은 대설산의 중턱에서부터 이미 곤죽이 되어 황룡과 혈 문룡에게 업혀 오다시피 했고, 노소포는 키가 다섯 자를 겨우 넘어 끈적한 안개 같은 독장이 입술 아래로 찰랑거렸기 때문이 었다. 결국 그도 샹소에게 업혀서 지나가야 했다. 황룡이 진흙탕에 몇 번 머리까지 빠졌다가 다시 솟아올랐고, 일행 전부가 오던 길로 뒷걸음질 쳐 되돌아 나왔다가 다시 길을 찾아가야 하기도 했지만 별사고는 없었다. 그들은 이틀 만에 포 동강을 통과하고 사천성 남서부에 진입했다. 사천성 남서부는 호전적인 묘족(苗族)들인 백(白)로로족과 흑 (黑)로로족의 경계였다. 로로족은 기나긴 중국의 역사상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중국 인들에게 정복된 적도, 동화된 적도 없었으며 수백 년 동안 신 강의 동쪽에서 큰 호(弧)를 그리고 있는 사천성 돌출부의 밀림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팔한지옥의 추격이 없었다. 그들은 예로부터 그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어떤 이민족도 용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광층 일챈은 단 한번의 싸움도 거치지 않 고 그곳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황룡의 덕분이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그들도 라마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 문에 라마승인 황룡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보통 라마도 아니고 몸에서 금빛이 나는 라마승 아닌가! 전래의 미신과 결합된 그들의 종교 관념에 황롱은 신처럼 보였 다. 아무도 그들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극진한 화대를 해주며 한족과의 경계인 안순장(岸順漿)까지 안내했다. 거기에서 그들 일행은 하나가 늘고, 하나가 줄었다. 황룡의 시중을 들기 위해 혹로로족에서 한 사내를 딸려 보낸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이통천을 거기 남겨야 챘다. 이통천은 한동안 안정을 취하지 않고는 도저히 움직일 수 있 는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의 앞에는 다시 험난한 격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야광충은 이대로 쉽사리 중원으로 진입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부 옹고트는 그렇게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송번위에서 사라졌다고 죽었거니 생각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추적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도 약간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설마 험한 곳이라고 추적을 보내지 않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고생하도록 내버려뒀다 가 오지의 출구에서 기다린다는 것뿐이었다. 반드시 공격이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이통천을 남겨 두고, 몸이 낫거든 그때는 중원으로 그들을 찾아오라고 시켰다. 그가 나을 때쯤에는 적들도 더 이상 그들을 찾지 않을 것이다. 설혹 찾는다고 해도 이통천 정도의 인물에게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나아서 중원으로 오라고 그는 말했다. 중원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이통천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물 2t다. 야광충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불쑥 '양주(揚州)'라고 말했다. 그가 왜 그곳을 지목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이제 그들이 가야 할 곳은 명확해진 셈이었다. 이통천은 이래서 묘족의 부락에 반 년을 더 있게 되었다. 그리 고 다시 몇 개월이 더 지난 후에야 일행을 다시 만나게 된다. 흑로로족이 딸려 보낸 자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야광충은 처 음 그들이 그를 데려왔을 때, 그냥 한번 힐끗 보기만 하고 고개 를 끄덕여 동행을 허락했다. 팔 척이 넘는 키에 온몸에는 문신(文身)을 한 묘족의 사내, 그의 이름은 흑웅(黑熊)이었다. 나이는 그가 대충 기억하는 대로라면 열여덟에서 아흄 사이였다. 묘족은 복장의 빛깔에 따라 흑묘(黑苗), 백묘(白苗), 화묘(花 苗). 홍묘(紅苗), 청묘(靑苗)로 구분한다. 백로로족은 백묘, 흑 로로족은 흑묘에 속하는 부족이었으니 흑웅도 흑묘족에 속한다 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소포는 복장이 아니라 피부색으로 흑묘, 백묘를 구 분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혹웅은 정말 문신한 부분과 치 아를 빼고는 완벽하게 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는 원래 사냥꾼이었다. 묘족의 남성이면 전부 사냥꾼이지만 그는 특별히 사냥꾼이라 부를 만한 사냥꾼이었다. 산과 들에 짐 승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의 때에도 그만은 잡아 올 수 있을 정 도의 사내였던 것이다. 또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그의 손에 절리면 잡혀서 껍질이 벗 겨지고 말았다. 그것이 변변한 무기도 아니고, 단지 굵은 나뭇가지를 불에 구 워서 굽히고, 덩굴을 가늘게 꼰 시위를 걸어 놓은 엉성한 활 하 나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려서 저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마을의 제일가는 사냥꾼이었는데 어느 날, 곰에게 쫓겨 절벽에서 구른 후로 누워 있기만 했죠. 마을 사람들이 잡 은 것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많이는 아니지만 먹을 수는 있었 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굶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죠. 그 동안 난 활 친는 연습을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이 먹을 걸 주지는 않을 거고, 배불리 먹고 싶기도 했거든요. 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칼로 사냥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을 택했죠. 달이 몇 번 없어졌다가 생긴 후에 처음으로 토끼를 잡았고, 그 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먹을 걸 나눠 주지 않았습니다. 난 어른 이 될 나이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어른으로 대접해 준 거예요. 그 이후 난 많은 것을 잡았죠. 항상 배가 고팠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그것들 을'만났습니다. 흑웅의 말에는 시간 개념(時間槪念)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어른이 될 나이가 아니라는 말로 추측한다면 처음 사냥 한 것은 그가 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묘족은 열 살이 넘으면 자기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 기 먹을 것을 구할 나이의 묘족은 이미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것들 을 만났을 때가 몇 살 때인지도 역시 명확하지는 않 았다. 단지 열세 살 이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고 흑웅의 손가락 꼽는 수를 헤아려 보던 원도살이 짐작했다. 사시사철 여름처럼 덥기만 한 이런 곳에서는 해가 바뀌는 것 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다. 흑웅은 멀리 대설산 방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해 나는 산 몇 개를 넘고, 절벽 옆으로 가야 닿는 어두 운 골짜기를 찾아갔습니다. 거긴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이었죠. 마을의 무사(巫師;묘족의 무당)가 거기 가면 아버지를 일어나게 할 약을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만 사자(死者)의 골짜기에 내다 버리라고 했지만 그러기는 싫었죠. 주운 곳이었어요.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뭔가는 가지고 가 야 했쬡. 아버지는 아주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밤이 되었죠. 바람을 덜 받는 바위 틈에 등을 기대고 잤는데, 너무 주워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다시 보일 때까지 제 자리에서 걸을 수밖에 없었죠. 잠을 못 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추운 곳에서 잠이 들면 그것으로 죽는다. 어쩨게 그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고 극한의 대설산에 올라갈 생각을 했느냐고 노소포가 괸잔을 줬지만 흑웅 은 헤벌쭉 웃기만 했다. 더운 곳에서만 산 그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밤새 걷는데 저쪽 산봉우리가 갑자기 랒을 내는 것 을 보았습니다. 처음엔 산불이 난 줄 알았죠 하지만 곧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 산봉우리는 물이 얼어 서 된 것인데 불이 날 수가 없죠 흑웅은 자기가 사는 곳의 산은 흙으로 되었지만 대설산은 물 로 되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얼음만 보았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이통천이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건 얼음으로 된 것이 아니 라 산봉우리에 얼음이 덮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흑웅은 아 래는 흙으로 되었을지 몰라도 산봉우리 꼭대기는 분명히 얼음이 라고 우겼다. 시험 삼아 파 봤는데 계속 얼음이더라는 것이다. 야광충이 말을 끊고 이야기나 계속하라고 신호했다. 그는 보 기 드물게도 흑웅의 말에 홍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흑웅은 물론 묘족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묘족의 언 어는 단어가 그리 다양하지가 않다. 그러나 말재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그리 둔하지 않 은 것인지 그는 적은 단어로도 제법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얘기가 너무도 황당해서 사람들은 입을 벌 리고 혹웅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겁이 났지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보고 싶었습니다. 가까이 가지 않고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할 생각이었죠. 한발 한발 걷다 보니까 어느새 저는 산봉우리 뒤, 절벽가로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것들'을 보았죠. 밝은 빛은 말 한 마리가 내고 있었습니다. 요만한…… 말이었 는데 불길에 횝싸인 것처럼 밝은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혹응은 손을 벌려 한 자 정도 길이를 표시하며 말했다. 한 자 크기의 말, 그것도 산봉우리가 밝아질 정도의 빛을 몸 에서 뿜어내는 말을 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리저리 뛰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 다. 그러기도 할 것이 두 마리의 괴물이 그 말을 노리고 있었거 든요 한 마리는 이만한 길이의 호랑이였숩니다. 그런데……. 혹웅은 다시 양팔을 벌려 보였다. 키가 크기도 할 뿐더러 괄 은 키에 비교해 봐도 어쩐지 기형적으로 길다 할 정도로 그의 팔은 길었다. 손가락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가 눈짐작으로는 대 층 십 척 일 장여가 되어 보이는 것이다, 검은 곰, 흑웅이 아니라 검은 원숭이, 흑원 정도로 부르는 것 이 나아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일 장 정도 길이의 호랑이라면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 다. 야광충이 데리고 다니던 검은 표범, 아묘만 해도 일 장 반 이 아니었던가! --검은 호랑이였습니다. 이마 가운데에 긴 뿔이 난……. 그 호랑이가 입을 벌리니까 파란 불길이 솟구치더군요. 다른 괴물 을 향해 뿜어내는 불길이었습니다. 그놈도 뿔이 난 괴물이었는데 입에서 하얀 안개를 뿜어내는 뱀이었습니다. 다리가 네 개 달려서 걸어다니고, 껍질이 얇아서 인지 뱃속이 환히 비쳐 보이는 뱀이요. 길이는 이만큼에 이만 큼, 이만큼 더……. 그러면서 흑응은 양팔을 세 번이나 펼쳐 보이고, 그것도 모자 라서 손바닥만큼을 더 보이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마에 뿔이 나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 검은 호랑이와 껍질이 투명하고 입에서 하얀 안개를 뿜어내는 용을 봤다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두 마리는 아마도 불길을 뿜는 작은 말을 잡아먹기 위해 서 로 싸우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 그의 다음 이야기였다. --두 마리가 곧 서로의 몸을 휘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커다란 얼음이 튀고, 산이 흔들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호랑이가 뿜어내는 불이 안개에 닿으면 바로 꺼 지곤 하는 거였죠. 호랑이도 굉장했습니다. 뱀이 발에 달린 발 톱으로 할퀴는데도 가죽이 두터운지 끄떡도 않고 있었죠. 저렇게 두 마리가 정신없이 싸우면 그 사이에 말이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은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더군요. 그래서 그 바보스런 말이 불쌍해졌습니다. 먹어 봤자 배부를 것 같지도 않은 작은 말을 괴물들이 노린다는 것에 화도 났고요. 그래서 괴물들 몰래 다가가 말을 잡았습니다. 다른 곳에 던져 버릴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자마자 말이 없어져 버 렸습니다. 대신 붉은빛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것이 손에 남더군요. 입을 헤벌리고 있으니까 내 입 속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 무 맛도 없더군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호랑이와 뱀이 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난 안 먹었다고 손을 저었지만 믿어 주질 않았어요. 호랑이가 날 죽 이려고 덮쳐 왔지요. 괴물이긴 했지만 다른 호랑이들 하고 공격 방법은 똑같았습니다. 직선이죠. 쉽게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뱀의 꼬리에 걸려 버렸어요. 온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습 니다. 뱀은 굉장히 차가웠어요. 그때 호랑이가 뱀꼬리에 감겨 꼼짝도 못하는 날 덮쳤지요. 뱀 은 자길 공격한다고 오해했나 봅니다. 날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 리 물어뜯고 난리가 났지요. 난 뱀꼬리에서는 풀려 났는데 추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 다. 허리가 한번 감겼을 뿐인데 손가락까지 얼어 버리더군요. 뭔가 뜨거운 물 같은 것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그건 또 너무 뜨거워서 얼굴이 타 버리는 것 같더군요. 대신 목 까지 움직일 수가 있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까 뱀이 호랑이 목을 물어뜯고 있는데 그 상처로 피가 흘러 얼굴에 떨어진 거였죠. 그 피를 받아 마셨습니다. 금세 뱃속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 워지더군요.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어요. 대신 이번에는 뜨 거워서 죽을 것 같았죠. 그래서 뱀을 부둥켜안았습니다. 시원하더군요. 추워지면 호랑이 목을 붙들고 피를 빨고, 더워 지면 뱀을 안았죠. 지금 생각하면 겁이 나서라도 그렇게 못할 것을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이 지나니까 호랑이가 힘을 잃고 죽어 버리더군요. 그때 겁이 덜컥 났습니다. 뱀이 이젠 날 죽이려 할 것 같아서죠. 정말 그랬습니다. 뱀이 날 휘감았죠. 아까처럼 그렇게 줍진 않았습니다. 그냥 시원해서 더 감아줬으면 할 정도였죠. 안개를 뿜는데 그것도 그냥 시원한 정도였습니다. 호랑이 피를 너무 마 셨었나봐요. 뱃속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습니다. 창자가 모두 구워지는 것 같았죠. 그럴수록 뱀에게 더 가까이 붙었는데 나중에는 뱀이 뿜는 안 개를 들이마셨어요. 한결 시원해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뱀은 날 떨쳐 버리려고 했지만 내가 놔 주지 않았습니다. 놓아 주면 날 물어뜯을 테니까요. 그때 안개 속에서 뭔가 단단한 것이 튀어나왔습니다. 그걸 먹 었죠. 먹고 싶지 딴았어도 하는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목구멍 으로 넘어가 버린 걺니다. 뱀이 더 미쳐 날뛰더군요. 내가 그 뱀에 날개도 있더라는 얘길 했나요? 노소포가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들은 모 두 흑웅의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날개가 있었죠. 그래서 뱀이 날아올랐습니다. 내 몸이 따 라서 떴죠. 힘도 세구나, 했는데 그 동안 싸우느라 지쳤던 모양이었습니 다. 다시 떨어지는데 하필이면 절벽으로 떨어지더군요. 같이 떨 어졌습니다. t 얼마 후 정신을 차렸습니다. 얼음으로 덮인 연못가였죠. 얼음 위라도 그냥 떨어졌으면 분명 죽었을 텐데……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전 살아 있었죠. 옆에는 뱀이 죽어 있었습니다. 절벽 사이로 며칠을 헤매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마을로 돌아 왔는데 한 달이나 지나 있었어요. 분명 삼 일 정도밖에 나가 있 지 않았는데요. 아버지는 죽어 있었죠. 사람들이 날 못 알아보더군요. 물에 비춰 보고 처음엔 나도 날 못 알아봤어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죠. 키도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그 후로 힘도 세지고, 추운 걸 모 르게 됐죠. 요즘은 윗통을 벗고도 산에 올라갑니다. 흑웅의 이야기는 끝났다. 모두들 한참이나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말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본인은 그게 사 실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짓을 모르게 생긴 그의 순진한 눈빛만 봐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정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황룡이 확인시켜 주었다. 황룡은 야광충이 번역해 준 혹웅의 말을 다 듣고는 손을 내밀 어 혹웅을 밀었다. 처음에는 혹웅이 맥없이 밀려갔다. 그러나 황룡이 밀리지 말고 버텨 보라고 했다는 것을 알려 주 자 그는 더 이상 밀려가지 않았다. 적어도 황룡이 금라을 휘황 하게 뿌리며 보리무상강기를 쓰기 전에는 말이다. 근육이 산처럼 꿈틀거리고, 뼈마디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결국 뒤로 밀려갔다. 혹응은 검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씨근덕거렸지 만, 그것은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황룡을 존경의 염에 가득 찬 눈으로 보 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는 밀렸다지만 저 힘에 밀리지 않을 사람은 여기에도 드물었다. 내공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흑웅이 황룡의 내공에 훌 륭히 저항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통천이 아마도 흑웅이 먹었던 것은 흑면독각호(黑面獨角虎) 의 정혈(精血)과 쌍익빙룡(雙翊氷龍)의 내단(內丹), 그리고 천 년지마(千年芝馬)일 것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흑면독각호는 전설의 영수(靈獸)인 기린(麒麟)의 아류(亞流) 이며, 극양(極陽)의 성질을 가진 영물이었다. 단지 그 핏속에 가득한 화기가 지나쳐서 극음(極陰)의 성질을 가진 영물을 더불 어 복용하지 않으면 속에서부터 타서 죽게 된다. 쌍익빙룡은 이무기와 용의 중간쯤 되는 영물, 막 용의 경지에 다다른 이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살갗이 투명하다 했으 니 갓 탈바꿈을 한 용이요, 깊은 연못에서 자라 극음의 성질을 가진 용일 것이다. 흑웅으로서는 인세에 보기 드문 기연을 만난 셈인데, 여기에 다시 하나가 더해지지 않았으면 역시 죽어 버렸을 것이다. 천년 지마였다. 천년지마는 말의 모습을 했다지만 사실은 영지초(靈芝草)의 일종이었다. 천년을 살면 영(靈)이 발(發)하여 말의 모습을 띠 게 된다. 먹었을 경우의 효능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먹어 본 사람이 없 기 때문이다. 이통천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극양과 극음을 조화 시키는 작용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흑웅이 양 극단의 영물을 먹고도 살아 남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 황당한 말을 듣고도 노소포는 그를 놀리지 않았다. 검게 죽어 가는 얼굴에 퀭하니 들어간 두 눈을 보면 곧 죽을 것이 분 명해 보여 차마 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한마디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눈물을 그렁 거리며 그들을 보내는 이통천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일행에게 이 렇게 말했다. 그가 볼 땐 흑웅이 뭔가 먹기는 먹었다. 천년지마가 아니라 환각을 일으키는 독초(毒草)를, 흑면독각호가 아니라 그냥 호랑 이 피를 빨아 양기가 넘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연못가에 돌아다 니는 도마뱀이라도 먹고 정신을 차렸겠지. 정신을 차리긴 차렸는데 환각중에 본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된 것일 게다. 아니면 약간 정신이 이상해졌거나라는 것이었다. 노소포가 구시렁대며 내 린 해석이었다. 한어로 말했기 때문에 흑웅은 무슨 소린지 몰라 그저 싱글거 리고 혈문룡이 피식 웃으며 그럼 그 신력(神力)은 어떻게 설명 하느냐고 묻자 노소포는 세상에는 날 때부터 힘센 사람도 있으 니까, 라며 간단하게 대답해 버렸다. 그들은 안순장에서 장강의 상류 중 하나인 대도하(大度河)를 건너야 했다. 그 뒤는 운남을 거쳐 귀주였다. 적은 여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 양안(兩岸)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물살은 거센데, 맞은 펴 기슭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넓기까지 했다. 게다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낮인데도 검은 복면을 한 이백여 명의 무리들이었 다. 그들만이 아니라 송번위에서처럼 변경 수비대의 군사들이 같이 있었다. 사천 남서부를 지키는 부군위(府軍衛)의 군사들이 었다. 백리극의 이맛살이 깊이 패였다. 설마설마 하며 믿지 않았던 가정이 더욱 그럴듯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송번위의 군사들만이 움직였다면 몽고족들에게 매수된 자는 그 정도 선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이제 부군위도 움직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송번위와 부군위를 함께 통제할 수 있는 자가 매수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이 경우 후군도독부였다. 두 군영이 각각 매수되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그들이 위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군부의 생리에 정통한 백 리극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올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 한마디도 않고 생각 에 잠겨 있던 그였는데, 이제 더욱 깊은 생각에 잠겨 버렸다. 일행에게도 그것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팔한지옥의 이백은 때려죽이든 태워 죽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군사 몇 명에게 없던 동정심이 생겨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하버 군사들을 죽이게 되면 부군위를 적으로 삼는 것이 되기 때 문이었다. 군사들은 이미 그들을 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오해와 모략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군사들을 죽이면 그때부터는 진짜 적이 되는 것이다. 그때 돌이킬 여지가 없게 된다. 부군위를 적으로 돌린다는 것 으 대명군부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라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광충 일행은 다시 방향을 돌렸다. 명나라의 영내로 들어가 지 않고 강안을 따라 돌아가는 것이다. 운남과 귀주는 후군도독부의 영역 밖이다. 그곳까지 로부 옹 고트에게 매수당했다면 그땐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은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는 협로는 때로는 수리(뽀)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수 면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지기도 했다. 그들은 때로는 허리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가로지르고, 굴곡이 심한 협곡을 통과했다. 적들이 있으면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확한 일이 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팔한지옥의 무리들은 몰라도 적어도 군사들은 국경을 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들은 과연 팔한지옥의 무리들뿐이었다. 그들이 이백이 되었든 삼백이 되었든 길을 막고 서서 싸움을 걸었다면 야광충 일행으로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당장은 힘들 더라도 깨끗이 해결해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길목마다 매복해서 그들 을 괴롭히는 것에 주력했다. 외지고 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함정이 있었다. 암기일 때도 있 고, 기관일 때도 있었다. 걸려서 죽는 사람은 없었지만 적지 않 게 귀찮은 일이었다. 때로는 직접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기습공격이었고, 나오는 족족 죽어 갔다. 야광충, 화영, 황룡, 백리극에 등평과 같은 초절정고수들을 기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도 한계가 있었다. 지치지 않고 움직이는 철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행 군을 거듭하느라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지쳐 갔다. 끝이 없는 내공을 지닌 것 같던 황룡도 문득문득 피로한 기색을 보일 정도 였다. 야광충은 중요한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 한 고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야광충은 이제 곧 다가올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자신을 통제 할 수 있는 단계를 성취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홉혈귀가 되는 것이 싫은 것은 피를 마신다는 행위가 역겨워 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보다 역겨운 일도 얼마든지 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역겨운 행위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가책 때문도 아니었다. 무 고한 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무고하지 않은 자는 또 세상에 어디 있는가?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살고 죽는다. 억울하게 죽은 자 변명 해 보라 한다면 세상의 모든 무덤이 한꺼번에 입을 벌려 노래할 것이다. 피를 마신 뒤 그는 원인 모를 힘이 몸 속에 뛰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처가 잘 생기지도 않았지만 혹시 있어도 금세 나 아 버리곤 했다. 독에도 별영향을 받지 않았다. 평소 잘 연결되 지 않던 혈염수의 높은 단계도 피를 마셨을 때는 완벽하게 발휘 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 대신에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때의 그는 야광충이 아 니라 일개 괴물에 불과한 것이다. 야광충은 그것이 싫었다. 자기통제를 잃어버린 상태가 싫었기 때문에 피를 마시려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곧 가능해진다. 길은 험하고, 적들의 공격은 빗발치는 이 시점에 그런 고비를 맞는다는 것이 불안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가한 때에 여유있게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오 히려 어려울 때가 있다. 성취는 고통을 통해 얻어진다. 더 큰 성취는 더 큰 고통을 요 구하며, 최고의 성취는 최악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으며 일 챙을 이끌고 운남을 향해 걸었다. 시월의 전부가 길고 지루한 싸움으로 지새워졌다. 그 기간 동안 그들 일행 속에 동지애적인 감정이 싹트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거듭되는 기습과 고난 속에서 무성하게 자라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꽃의 모습은 하나의 조직이었다. 야광충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의 조직, 흑수당(黑手堂)의 출현 이었다. 몽고에서 중원으로 향하는 도상에서 여태 보기 드물었 던 조직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강령(綱領)은 생존, 그리고 복수. 당주(堂主)는 야광충……. 여타의 인원은 전원 동일한 위치로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흑수당의 일대 제자는 그래서 황룡, 원도살 십일랑, 독목야차 방각, 노소포, 소선건곤 팽호, 산령왕 엄발, 도신, 도귀, 양소, 이통천, 백리극, 등평, 화영, 혈문룡 십삼랑, 흑웅, 그리고 월 몽영 방소접이었다. 다들 개성이 독특한 자들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과거부터의 인 연에 따라, 또 다른 사람은 절박한 현실의 필요에 따라 결정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백리극 일행이 동참할 의사를 밝힌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들은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도 없었고, 더 더욱 야광충 과 앞으로의 행동을 같이 할 이유도 없었다. 지옥성의 한족들, 흑풍사, 심지어는 등평까지도 로부 옹고트와는 원한이 있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유를 묻는 야광충에게 백리극은 짧게 대답했다. --송번위와 부군위의 행동에 홍미가 있다. 사천성의 군사들이 움직인 배후를 밝혀 보고 싶다는 뜻이겠다 고 원도살은 이해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처음 만났을 때 야광 중이 그에게 했던 말과 묘하게 닮아 있어서 재미있었다. 어쨌든 호감을 느끼고 있던 인물인 만큼 동참을 환영하고픈 심정이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등평의 동참이었다. 그도 백리극만큼이나 그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금의위의 부영반이 왜 매국노들과 힘을 합친다는 것인가? 그는 단지 한마디 '생존!'이라고 먈했지만 어쩐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원도살은 그의 태도가 백리극을 만났을 때부터 달 라진 점에 주목하고, 지금 그의 결정도 그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고만 짐작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 일단은 환영할 일이었다. 야광충이 정 상이 아닌 상태에서, 그리고 점점 더 정상이 아닌 쪽으로 진행 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묶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유리했다. 원도살은 문득, 잿빛으로 죽어 가는 듯한 야광충의 얼굴을 보 면서 그가 조직 결성을 서두른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 이후를 대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원도살은 고개를 흔들어 부질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팔한지옥의 적들과 마지막으로, 그리고 지옥성 이후 가장 크 게 싸운 것은 십일월의 초입, 양자강 상류의 여강(麗江)을 건너 운남성으로 진입할 때였다. 그곳에서는 군사들의 도움이란 없었다. 대신 적들은 한 명의 여인을 앞에 내세웠다. 혈부용이었다. 운남성의 거친 산악 지대를 통과하는 양자강은 거대한 협곡과 곳곳에 십 리를 넘도록 늘어서 있는 높은 봉우리들 사이를 깊고 빠르게 흐르면서, 양편에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암벽을 만 들고 있었다. 적은 이미 그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백을 헤아리는 무사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한 명의 여인. 야광충은 심장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다. 안팎으로 닥 쳐오는 고통에 시달리던 그에게 혈부용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타 격을 가했다, 목이 반이나 잘려 쓰러지던 그 창백한 모습을 야광충은 잊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다니! 야광충의 모습이 한 순간 사라졌다가 혈부용의 앞에 다시 나 타났다. 그는 그녀가 자신이 아는 바로 그녀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야광충의 손이 천천히 내밀어져서 혈부용의 뺨에 닿았다. 떨리는 손길에 닿는 따스한 온기. 손끝이 녹아드는 듯한 부드러움과 끈적함. 피식 혈부용의 입꼬리가 움직이자 한 줄기 향기가 코끝에 감 돌고,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머리 끝으로 치달렸다. 야광충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그 속에 혈부용의 모습이 빙그 르르 돌다가 멈추었다. 붉게 물든 손을 머리 위로 자랑하듯 높이 쳐드는 그녀의 모습 을 야광충은 다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그 손을, 그리고 그녀를. 거친 호통 소리가 뒤에서 들려 오고, 이백의 무사들이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야광충은 알지 못했다. 혈부용의 작고 아름다 운 발이 천천쳐 들렸다가 방금 자기가 뚫어 놓은 그의 가슴팍을 내려치고, 또 내려치는 것도……. 다시 야광충이 눈을 떴을 때는 옆에 다른 몇몇도 누워 있었고, 월몽영이 천에 물을 적셔 그의 얼굴에 대어 주려 하고 있었다. 운남이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다친 사람은 전부였다. 그리고 곧 몇은 죽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머지는 살 것이다. 적들도 많이 죽었다. 몇몇은 살아서 도망갔다. 다시 그들의 앞에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라고 월몽영은 말하고 불사체 (不死體)가 뭐냐고 물었다. 야광충이 그건 왜 묻느냐고 하자 그녀는 그가 혼수 상태에서 계속 그 소리만 되뇌었다고 대답했다. 야광충은 다시 말하지 않고 불사체를 생각했다. 혈부용은 불 사체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녀에 대해 물어 보려 했지만 월몽영은 이미 등을 돌리고 노소 포와 엄발, 그리고 심하게 다친 양소의 상처를 닦아 주고 있었다. 등평의 미끈한, 그래서인지 어쩐지 정이 안 가는 얼굴이 나타 나 혈부용의 두번째 죽음을 알렸다. 혈부용은 다시 죽었다. 야광충의 목을 밟으려는 두번째 발길 질을 막고 다시 휘두른 화영의 검에 그녀의 목은 삼 장을 날아 가 풀숲에 떨어졌다. 다시 살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녀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 신했다. 그러자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아 잠이 들어 버렸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십이월이었고, 귀주성의 외곽 한 마을이 었다. 그리고 그는 큰 관에 들어가 있었다. 귀주성에 진입하면 서 그들은 그를 관에 넣어 운반해 왔던 것이다. 죽은 자는 아직 없었다. 다친 자들은 이제는 나은 자와 죽어 가는 자로 나뉘어 있었다. 운남성은 그런대로 평이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운남 성의 묘족(苗族)과 산족(山族) 몇 백 명만 죽이고 말이다. 월몽영은 백리극이 싸움을 아주 잘하더라고 말했다. 산에서, 골짜기에서, 강에서도……. 백리극은 모르는 전술이 없고, 생각 하지 못하는 싸움법이 없더라고, 그의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 두 '십자(十字)'의 상처를 남기고 쓰러지더라고, 그래서 원도살 이 그에게 '십자유성검(十字流星劍)'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고 말했다. 야광충은 그 말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후 그는 열홀에 한번 정도 깨어났고, 깨어날 때마다 점차 죽어 가는 자들의 편에서 나아가는 무리들의 편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노소포와 산령왕 엄발, 그리고 양소는 그와는 반대편으로 이 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야광충이 세번째 깨어나기 전에, 귀주성 귀양부(貴陽府)에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여강 기 슭에서 벌어진 지옥성과의 마지막 격전에서 입은 상처가 화가 되어 생사를 가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다시 완전한 야광충으로 돌아왔다. 아니, 피 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었으니 전보다 더욱 완전한 야광충이라 해야 할 것이다. 화가 복이 되었다 해야 할까? 지옥의 언저리까지 다가갔던 그 부상에서 회복되면서, 그는 피 를 마시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한계를 극복해 버렸다. 이제는 피 를 마셔도 전처럼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반 쪽짜리지만 그는 좀더 인간답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 명의 동료를 정강산 기슭에 묻고. 새로 한 동료를 얻어 중원으로 향했다. 해가 바뀐 다음의 일이었다. 1408년, 영락육년(榮樂六年)의 그 해에 몽고의 대초원에서 일어난 일을 역사는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벤야시리(本雅失里), 타타르[ ] 통일(統一). 제30장 1409년 7월 1일 오전 양주성. 양주성의 아침은 안개 속에서 시작된다. 꿈처럼 피어오르는 새벽 안개 가득한 수로(水路)에 미끄러지 는 작은 배 한 척. 수로 바닥에 삿대 찔러 넣는 소리가 물을 치 고, 운하의 둑은 안개 속을 기는 검은 뱀처럼 배 옆으로 달렸다. 강가의 버드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가지 흔들리는 소리는 들 릴 것 같은 성하(盛夏)의 양주성. 그는 뱃머리에 고요히 좌정하 고 앉아 양주를 느끼려고 애쓰고 있다. 물 소리 고요히 들리고, 비릿한 물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배 를 띄운 황색의 물이 뿌옇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 도 느낄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가 는 다시 갈라지는 양주의 운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이 운하를 만들고, 동쪽의 고구려(高句麗) 를 정벌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이 원인이 되어 나라를 잃었다. 그가 여기 양주에서 살해되어 묻혔다는 것은 역사가 그의 인과 응보를 대신 집행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양주는 그를 죽이고, 대신 그의 안식처를 내준 것이다. 운하의 덕으로 양주는 당대(唐代)에 이미 국내 최대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후주(後周) 현덕 5년(顯德 5년;985년)에는 성이 너무 커 수비하기 어려워서 따로 소성(小城)을 건축하였다 고도 한다. 송(宋) 이종(理宗) 보우 3년(寶佑 3년;1255년)에는 금(金) 나 라 군사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구성(舊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새로 보우성(寶佑城)을 축조하고, 또 그 남쪽에 별도로 큰 성을 건축하였다. 두 성의 연결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수서호( 西 湖) 일대에 따로 내성(內城)을 쌓았는데, 송과 금의 전란으로 도시 전체가 크게 파괴되었다가 원대(元代)에 대성(大城)의 일 부분을 중점적으로 복구시켜 명대(明代)의 양주성을 이루었다. 동쪽에 해령(海寧), 서쪽에 통사(通泗), 남쪽에 안강(安江), 북쪽에 진회(鎭淮)의 대문이 있었고, 따로 소동문(少東門)이 있 어 일천칠백칠십오 장(1775丈) 오 척(5尺) 둘레의 성곽에 다섯 개의 성문이 있는 셈이었다. 또한 그것과는 따로 남, 북에 각각 두 개씩의 수문이 있어 운하로 통하는 배가 왕래했다. 양주는 강남의 식량과 비단의 집중지로서 양주를 거쳐 대운하 를 경과해 북방으로 공급되는 것들의 통치 중심지였다. 명대에 들어서는 또 강회(江淮) 지방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집중지가 되 어 염운사(鹽運使)가 설치되는 등 중요도가 더해 가고 있었다. 명대에는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고, 운하가 성의 동쪽으로 흘러 이 일대는 이미 상업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종 수공업은 그 직종에 따라 집중되어 단자가(緞子街)의 양 편에는 단자포(緞子鋪;포목점)가 많았고, 취화가(翠花街)에는 구슬, 비취 및 장식품 가게들이 집중해 있었다. 운하가 성의 동쪽과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 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소동문, 초관( 關), 동관가(東 關街), 하하가(河下街) 일대는 가장 번영해서 부두, 창고, 객 점, 주루 등이 집중해 있었다. 대상인들과 유지들도 이곳에 주 로 거주했기 때문에 호화로운 저택과 정원이 많았다. 배는 지금 고운하(古運河)를 따라 통양교(通揚橋)를 통과하 고 고강교( 江橋)아래로 해서 양주성에 진입한 뒤, 유항경자 가(柳巷梗子街)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유항경자가를 중심으로 왼쪽을 구성(舊城), 오른쪽을 신성 (新城) 이라고 부르는데, 신성 지역에는 상업이 발달해 상가와 객점, 부두, 창고, 대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구성 지역에는 이 와 달라서 수공업을 하는 공방(工房)이 주로 이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신성 지역에는 부자들이, 구성 지역에는 빈민들이 주로 살았다는 것인데, 이 두 지역을 나누는 거리가 유항경자의 거리, 즉 매춘을 전문으로 하는 창기(娼妓)들의 거리라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식(食)과 색(色)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뜻일까? 아니면 거기서부터 빈부귀천은 이미 나뉜다는 것일까? 배는 말없이 안개 속을 흘러 여의교(如意橋)를 지나고, 보이 지는 않지만 저만치에 소홍교(小虹橋)를 앞두고 있었다. 거기서 왼쪽 물굽이로 꺾어 들어가면 양주성 지부공관(知府公館)이 나 오는 것이다. 배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삿대를 잡고 있던 늙은 사공, 당노구(唐老狗)는 뱃머리에 앉 아 있는 사내를 힐끗 훔쳐보았다. 그는 관리(官吏)였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칼처럼 날카롭게 뻗어 내려온 콧날이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위아래가 하나로 이어진 청색의 보복(補服)을 입고, 하얗게 라나는 은대(銀帶)를 허리에 느슨하게 둘렀다. 머리에는 오사모 (烏絲帽)를 썼고, 가슴과 배를 덮은 보자(補子)에는 원앙(鴛鴦) 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하는 표지(!E%t) 였 다. 육품(六品) 벼슬의 문관(文官)이라는 표지인 것이다. 이 시간에 지부공관에 가는 것은 등청(登廳;출근)하는 것일까? 그럼 왜 새벽같이 배를 빌려서 양주성을 한바퀴 돈 뒤에야 그 곳을 향하는 것인가? 당노구는 얼마 전 양주부의 사법을 담당하는 주관(ftt't) 이 대 흥교 혈사(血事)로부터 시작된 양주부의 일련의 혈사들, 속칭 '공포의 밤' 사건을 밝혀 내지 못한 죄로 좌천된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 자리는 육품의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처럼 밑바닥 인생들이 관부가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뭐하겠 을까만 사실 또 그들만큼 그런 것에 정통한 사람들도 없는 법이 었다. 오가는 관리들이 뱃전에 흘린 이야기만으로도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는 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노구는 그의 배를 탄 이 젊은 사내가 효으로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지……! 주관이라면 한 부현(府顯)의 형방사법(刑房司法)을 맡은 관 리, 양주부의 포두(捕頭), 포쾌(捕快), 순쾌(巡快), 마쾌(馬快) 들이 모두 그의 휘하에 있게 되는 서슬 퍼런 자리였다. 그들 같 은 서민에게는 지부보다는 그가 더 현실적인 힘에 가까운 인물 로 느껴지는 것이다. 당노구, 늙은 개[老狗] 당가(唐家)는 주름살투성이의 손에 잡 은 삿대를 운하 바닥에 깊이 찔러 넣었다. 양주에서 산 팔십 평 생 밥 먹는 동작만큼이나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관복의 사내, 신임 추관이 문득 손을 들어 운하 저편 기슭을 가리켰다. "사공, 저쪽으로 돌려라!" 당노구가 그 말에 피곤한 눈을 들어 저편 기슭, 정확하게 말 해 기슭을 따라 홀러오는 물체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재수없이!" 칙! 그는 그 방향을 향해 액땜하듯 세 번 침을 뱉고는 관리를 향 해 머리를 조아렸다. "저런 걸 아침부터 보시면 재수가 없으니 그냥 가시는 것이 어떨지……?" "돌려라!" 당노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관리의 눈에서 빛나는 정광(精光)이 그의 눈을 찔 러 왔던 것이다. 금빛에 찌든, 뇌물에 혼탁해진 관리들과는 무언가 다른 빛이 었다. 거절할 수 없는 힘이 깃든 눈빛. '너도 여기 오랜 못 있겠구나!' 그는 말없이 삿대를 들었다가 운하 바닥에 깊이 찔러 넣었다. 다섯 간 길이의 삿대가 운하의 바닥에 두텁게 깔린 진흙을 뚫고 단단한 바닥에 닿았다. 배 고물이 물을 부수며 왼쪽으로 밀렸다. 뱃머리는 고개를 돌 려 관리가 손짓한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처음엔 물에 떠내려 오는 나무둥치처럼 보였다. 검게 부패된 그 모습이 나무의 암갈색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절대 나무 둥치는 아니었다. 나무둥치가 이렇게 굵어서야 제대로 뜨기나 했을 것인가? 관리는 뱃전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 물체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남녀를 알아볼 수 없는 부패한 시체, 부어 올라 이목구비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마 평소의 두 배는 커졌으리라. 정말 거대한 몸집이었다. 체격이 커서가 아니라 부어 올라 커진 모습. 뱃속에 부패한 공 기가 차지 않았3.면, 그래서 이렇게 커지지 않았으면 운하 바닥 에서 그냥 뒹굴고만 있었을 시체. 관리는 그 부어 오른 정도에서 대충 죽은 지 사흘에서 육 일 정도 된 시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건져라!" 당노구는 이제는 정말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안되겠는뎁쇼!" 관리의 시선이 다시 당노구를 찔렀다. 그러나 당노구도 이번에는 호락호락 그의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 "저건 이미 게게 풀려 버렸다굽쇼. 겉으로 보기엔 그냥 부은 것 같지만 건들면 부스러진다굽쇼." 그는 건드리기만 해도 완전히 분해되어 버릴 듯 손을 이리저 리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건져!" 관리가 차갑게 말했다. 당노구는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시체를 밑으로 확 밀었다. 시체는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며 뒤집혀졌다. 눈이 없어지고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초록색의 얼굴이 그들을 멍하 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살려 달라는 마지막 외침 같았다. 삿대에 걸렸던 옆구리 살이 뭉텅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 자 리에서 살이 풀어져 뜯어진 틈으로 허연 창자가 물을 따라 홀러 나왔다. 고약한 냄새가 안개를 타고 퍼졌다. 당노구는 삿대를 물에 넣고 휘저어 거기 묻은 살을 씻어 내며 엷은 미소를 홀렸다. 논어 맹자나 읊조리던 책상물림이 이런 흉 악한 광경을 어디서 봤을 것인가? '작년에 먹은 월병(月餠)까지 토해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나 관리는 토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체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흘러가지 않도록 잡고나 있어라!" 물에 불은 시체는 그냥 썩은 시체보다도 몇 배로 냄새가 지독 했다. 그렇게 창자가 뒤집어질 정도로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 는 시체의 바로 위로 몸을 내밀고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관리를 당노구는 놀랍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불은, 아니 당노구의 말대로 게게 풀려 버린 시체에서 사인(死因)을 짐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눈만이 아니라 코와 손가락조차도 물고기에게 뜯어 먹힌 시체는 남녀를 구별할 수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그 중에도 몇 가지를 알아내었다. 썩어서 흐물 거리긴 하지만 위에는 맨살이요, 아래에는 대충 옷의 흔적이 있 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단고(短 )를 입었던 흔 적이었다. 그것으로 관리는 죽은 자가 사내요,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하층 천민의 하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평상복장이 이것, 윗통은 벗고 그저 무릎을 겨우 가리는 반바지나 입고 돌 아다니는 것이다. 관리는 다시 품속에서 은젓가락을 꺼내었다. 그는 그것으로 시체의 배를 찔러 보았다. 젓가락은 마치 두부에 찔러 넣듯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들어갔다. 다시 뺀 젓가락에는 썩은 살점만이 묻어 나왔을 뿐 아무런 변 화가 없었다. 관리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독에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 실해졌지만 그것으로는 단서가 되지 않는다. 시체가 된 이 사내 는 맞아 죽었을 수도 있고, 칼에 찔려 죽었을 수도, 심지어는 자연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진 것도 사람에 의해 당한 것인지, 아 니면 물고기 밥이 된 것인지 확증이 없다. 그래도 아쉬운 기색으로 시체의 여기저기를 찔러 보던 관리는 한숨을 쉬고 물러앉았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대신 사공을 향해 물었다. "이런 시체를 자주 보나 보군." 당노구는 그의 조사가 끝났다는 것을 알고 시체와 반대펀으로 배를 밀었다. "이런 일을 하며 몇 십 년을 살면 놀랄 일이란 별로 없습죠. 그의 심드렁한 말을 듣던 관리의 눈이 문득 번뜩였다. 배가 물러서며 일으킨 물살에 시체가 뒤집혀졌던 것이다. 그리 고……. "잠깐, 멈춰!" 그것은 분명 손자국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손 모양으로 새 긴 작은 문신이었다. 뒤집히면서 언뜻 보인 시체의 허벅지에는 검은 손자국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여러 부류의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새기지만 남들 에게 잘 보이지 않는 허벅지에 새기는 경우는 단 두 가지밖에 없다. 사랑의 맹세로 연인들끼리 새기는 문신, 연비(煙臂)거나 비밀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표지였다. 검은 손자국을 사랑의 징표 로 삼는 연인이란 없을 것이다. '검은 손자국으로 표시되는 비밀단체라……!' 관리는 이제는 정말 물러나 앉았다. "가자!" 당노구가 삿대를 찔러 넣고, 배는 다시 물살을 갈랐다. 관리 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허벅지에 검은 손자국이 있는 시체를 또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요!" 당노구가 대답했다. 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오늘 말고는 없습죠……." * * * 유항경자가(柳巷梗子街), 경연루(輕煙樓). 언제나처럼 아침은 나른한 숙취와 그에 따르는 두통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 갈증……. 혈문룡은 눈을 감은 채 팔을 올려 머리맡을 더듬었다. 거기 여덟 모 난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주전자, 그 안에는 갈증을 해결할 찻물이 있다. 그는 손끝에 걸리는 찻잔은 밀어서 떨어뜨려 버리고 주전자 주둥이를 잡았다.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고 기울이는데 눈은 필 요 없었다. 찻물은 미지근했지만 그의 목구멍에는 달고 시원하게 느껴졌 다. 혀끝에 남은 쓴맛마저도 새벽까지 마신 술의 역한 향기를 씻어 주는 것 같아 좋았다. "크아!" 혈문룡은 만족스런 소리를 내며 주전자를 입에서 떼고 손으로 입을 문질렀다. 바짝 말랐던 입술이 이제야 조금 나아졌다. "으음……." 가슴에 올려 두었던 주전자가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옆에 누운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혈문룡은 눈을 비비며 소리가 난 그의 옆자리를 보았다. 베개 위로 가득 퍼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여인의 얼굴이 보 였다. 그때에서야 코끝을 스치는 지분(脂粉) 내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여인의 얼굴은 낯설다. 혈문룡은 눈 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다음 그녀, 아마도 지난 밤을 같이 보냈을 그 여인을 자세히 보았다. 종이창문을 뚫고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침상 가에 드리운 휘장에 넘실거리다가 한두 줄기 여인의 얼굴에도 비추었다. 십육칠 세밖에 안되었을 어린 여인의 얼굴, 그러나 감은 두 눈가에 드리운 희미한 그늘은 세파에 시달린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혈문룡은 그녀를 기억해 내었다. 벌써 연사흘째 그는 이 여 인, 경연루 일급창기(一級娼妓) 려화(麗花)의 침상에 기어들지 않았던가! 그러나 볼 때마다 그녀는 새롭다. 멀리서 본 얼굴과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본 얼굴, 붉은 촛불 불빛 아래에서 본 얼굴과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본 얼굴이 달랐다. 짙게 분칠한 얼굴에 검게 그린 눈썹의 그녀는 백합처럼 화사 했지만 이렇게 화장을 지운 얼굴의 그녀는 들꽃처럼 풋풋하다. 바람을 탄 들꽃이긴 하지만. 방금 뒤척인 탓일까, 여인의 가슴은 얇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린 나이를 말해 주듯 그저 작은 접시만하게 봉긋 솟 아오른 젖가슴, 그 중심 아래쪽에 파묻힌 젖꼭지. 혈문룡은 손을 내밀어 젖꼭지를 살짝 눌렀다, 그것은 힘없이 누른 만큼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다시 눌렀다가, 또다시. 럿 꼭지가 아까 전보다는 단단해지고 솟아오른 것 같다. 혈문룡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손가락 둘을 내밀어 그 젖꼭지를 간질였다. 햇라에 비쳐 분홍색으로 밝은 첨단과 점차 짙어지는 붉은색의 젖꼭지, 그 주변으로 둥글게 그려진 작은 원. "으음……!" 려화는 어슴푸레 잠에서 깬 모양어었다. 얕은 신음 소리를 내 며 돌아누웠다. 혈문룡의 눈에 둥글고 횐 어깨와 희미한 굴곡을 그린 등이 들 어왔다. 그 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약간 휘어진 허리와 급 격하게 솟아오른 엉덩이의 곡선. 그 곡선은 이불에 가려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 곡선을 따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아무 런 반응이 없었지만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가느다란 떨림 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분명 깨어 있었다. 혈문룡의 손이 엉덩이의 곡선을 따라 이불을 걷어 내었다. 그를 향해 도발적으로 튀어 나온 엉덩이, 그 사이의 깊은 금, 어느 곳에서도 직선은 찾아볼 수 없는 완만한 곡선의 덩어리.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여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 여인이 약간은 놀란 신음성을 토하며 바로 누웠다. 그는 상체 를 들어 그녀의 위로 덮치듯 올라갔다. "살살……!" 억인의 건먹은 눈동자가 그의 눈에 마주쳤지만 그는 신경 쓰 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 목소리는 귓가로 스치고, 그는 그런 것을 비웃듯이 더욱 거칠게 행동했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젖가 슴이 삐져 나올 듯했다. 다른 한 손은 이미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제발……!" 애원하는 듯 애처로운 여인의 목소리. 혈문룡의 손은 이미 그 녀의 비경(秘境)으로 침투해 문을 열고, 힘껏 엉덩이를 찍어 내 렸다. "아악!: 여인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혈문룡의 등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힘껏 껴안았다. 그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다리가 이불을 완전히 걷어 버렸다. 지금 시간이면 방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주 없지도 않으련만 그 녀의 비명은 억제되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 살 부딪치는 소리가 여인의 비명에 혀여 홀렀 다. 혈문룡은 전력질주를 하는 수말처럼 거칠게 그녀를 공격했 *. 이윽고 절정의 순간에 다다르자 그는 그녀를 공중으로 집어 올겼다가 다시 받아 안는 듯이 움직였다. 거칠게, 더욱 거칠게, 그리고 한 순간 모든 동작이 멎고. 혈 문룡은 그녀에게서 몸을 세고 옆에 드러누워 버렸다. 거친 숨소리가 그의 벌린 입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고 그는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여인의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칠월 초하루예요." 차가운 여롬 2!1 가볍게 떨리는 목소리. 혈문룡은 그것이 쾌락에 젖어 그런 것 인지, 아니면 고통에 시달려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 고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 여인은 그런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잘해 주면 그것으 로 그만, 나머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면 매이게 된다. 혈문룡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기색에서 신경을 끊으며 눈을 감 아 버렸다. '초하루……, 당주가 돌아올 때가 됐군!' 졸음이 다시 밀려왔다. 당주가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 내일 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밤에나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진 하루 반나절의 시간이 통째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곧 낮게 코를 골았다. 나른한 아침, 분홍빛 향기 조용히 흔들리는 기루의 아침이었다. * * * 지부공관(知府公館). "이곳은 골치 아픈 곳이지!" 지부(知府)는 벌써 세 번이나 골치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침 조례를 마치고 그가 지부대인의 집무실에 들어와 부임 인 사를 한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었다. 지부가 계속 말했다. "허리에 십만 금의 전대를 두르고 양주성문에 들어서면 학을 타고 속세에 내리는 신선의 기분이 든다……. 운운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사내, 양주부 신임 추관 모충국(毛忠國)은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이며 대답했다. "예!" 명(名)은 결(潔), 자(字)는 충국(忠國), 올해 나이 서른둘. 원래 북경 태생으로 지금은 이웃 남경(南京)으로 거처를 옮긴 전직 대관(大官) 모의기(毛義基)의 독자(獨子)였다. 어려서는 남경에서 자랐으니 이곳 강남의 사정에도 밝았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양주부 추관으로 임용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겠지. 사실 나도 그럴 사정이 되면 양주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우리 같은 관직의 사람들 에겐 양주는 지옥이야. 정말 지윽이 따로 없다는 걸 여기 와서 야 알았네!" 양주지부 왕백곡(王伯穀)은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실제 그들 같은 관리에겐 놀기 좋은 양주라는 것은 그림의 떡 일지도 모른다. 양주가 왜 놀기 좋은가?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술은 다른 곳에도 있고, 경치는 이웃 고을에 비해 오히려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도 놀기 좋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기(娼妓)들 때문 이었다. 성안 이곳저곳 가로지른 운하, 그 위로 놓인 이십사 개소의 다리와 사통팔달(四通八達), 바둑판처럼 뚫린 거리마다에 보이 는 것이 객잔, 주점이고 다루(茶樓)에 주루(酒樓)였다. 그리고 그곳마다에 지분을 짙게 바르고 날아갈 듯 가볍게 옷을 입은 여 인들이 나긋한 몸매를 자랑하듯 흔들며 다녔다. 양주는 난봉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향락 도시인 것 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위로는 지부대인으로부터 아래로는 아문 (衙門)의 말단까지, 관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관리가 창기 를 끼고 노닥거리는 것은 나라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공창(公娼), 사창(私娼)팀에 최하급 창사(娼舍)인 요자(搖子)까 지도 보호해 줘야 하면서 손도 대보지 못하는 것이 관리의 일이 었다. "체다가 이 좁은 곳에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아나? 물경 백만 에 육박하네. 경사(京師;북경과 남경)를 제외하고는 성도(省都; 각 성의 수도)라도 이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 드물지." 상업이 그렇고, 수운업(水運業)이 그렇고, 특히 수공업이 그 랬다. 어느것도 '사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도 대량의 사람이……. "사람이 많으면 사건도 많은 것이지. 성상의 은총을 입어 여 기 부임한 지 이제 겨우 이 년인데 단 하루라도 크고 작은 사건 이 그친 적이 쇱었네. 난 요 이 년 동안 거의 이십 년이나 늙어 버린 것 같네." 왕백곡은 오사모 사이로 삐져 나온 잿빛 머리카락을 과시하기 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중국은 아무런 말도 않고 꼿꼿이 서서 지부의 말을 듣고 있 2!다. 지부는 그가 어디까지 믿어 주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 는 것일까? 그가 갓 관직에 나온 솜털이 뽀송뽀송한 병아리인 줄 아는 것일까? 일이 많으면 생기는 것도 많은 것이 관직이었다. 아직 국초 (國初)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았을 때라서 그런 일은 없지만, 원나라 때만 해도 이곳 양주성에 부임해 오기 위해서 백만금을 뿌려 가며 청탁을 하고 다니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천만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백만금을 뿌릴 이유가 없는 것이 관의 생리요, 인간의 생리. 양주성은 관리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신선이 학을 탁고 내려오는 기분올 주는 곳이었다. 그는 문득 남경에서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제형안찰사사는 강소성의 사법을 담당하는 총책임자. --왕백곡이가 어떤 인물이냐고? 그저 그런 인물일세. 그렇게 극악한 인물은 아니지만 또 그렇게 청렴하지도 않은……, 그저 자리나 지키며 생기는 것들을 주워 먹는 걸로 만족하는 인물이 지. 호락호락하지는 않정지만 자네가 강하게 나오면 막지는 않 을 인물일세. 사람을 평하는 말치고는 애매한 말이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물에 물 탄 둣한 인물이 이 년이나 양주지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고 의아해 했던 것이다. 지금 만나본 인상 역시 그렇게 애매해서 쉽게 부류를 나눌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경계해야 할 인물인지도……!' 그의 표정이 무덤덤하자 지부는 계속 엄살을 부릴 홍미를 잃 은 모양이었다. 김샌 듯한 표정을 언뜻 보이더니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도 전임 추관의 밑에서 여러 포두와 포쾌들이 수고를 해 준 덕분에 큰 일은 없었던 이 년이었는데 ……. 요즘 들어 심상 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네." 이제 겨우 본론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지부의 목소리가 낮 아지고 있었다. "양주부 내의 무림세력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정보가 있네." 모충국의 눈이 가늘게 감겨졌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군소 문파들과 비밀조직들이 혹은 사라지고 혹 은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일세."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한 세력이 이전까지의 세력들을 꺾고 가장 강한 세력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이 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여타 세력들을 전부 제거하거나 흡수한다는 것이 가능 할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모충국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세력의 명칭이 뭡니까?" "모르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지부를 보았다. 그러나 지부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성내의 무림세력 이름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자기 말대로 라면 성내에 유일한 무림세력인데?' "언제 그 움직임을 포착하셨습니까?" 지부는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손을 흔들어 나가라는 뜻을 표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이 모충국 에게 충격을 주었다. "처음 드러난 것은 보름 전이지만 한 달 전부터 활동을 시작 한 것 같다고 하더군. 자세한 것은 형방에 가서 물어 보게." 한 달. 단 한 달만에 인구 백만의 대도시 양주의 무림세력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름도 드러내지 않고서……. 모충국은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 * * 하하가(河下街), 부두. 진운은 연락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떠나 일 각이 채 지나기 전 에 부두에 도착했다. 요즘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 어나 전날 밤에 생긴 일들을 챙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새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빨리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장선 사내, 황구(黃九)의 뒤를 쫓아 들어선 부둣가 작은 창 고에는 고약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진운은 한 순간, 되돌아 나갈까 망설이다가 애써 태연한 기색 으로 냄새를 픗기는 물건에 다가갔다. 창고 안에는 한 명만이 코를 잡고 서 있었다. 그것은 거친 베로 짠 천에 담겨 있었다.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려 고 애를 썼지만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 파손된 상태의 시체였다. 진운은 다시 한번 구역질을 삼키고 물었다. "그가……?" 코를 잡고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열홀 전 실종되었던 홍십육(洪十六)입니다. 형제들이 확인해 주었습니다." "형제들……?" "예, 당(堂)의……." "그들은? 그리고 최초 발견자는?" "칠단계(七段階)와 팔단계(八段階) 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자리 를 비키도록 했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사공 황칠(荒七)로 유항경 자가의 수로를 따라 홀러오는 것을 발견해서 건져 올렸습니다. "음……!" 역한 냄새 가운데에서도 진운은 만족한 빛을 보였다. 처음에 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았던 그들 체계가 생각보다 훨씬 잘 먹혀 들고 있는 것이다, 당주가 유일한 천(天)자 항렬을 쓰고, 진운을 비롯한 사람들 은 지(地)자에서 시작해 천자문(千字文)의 항렬대로 암호명을 쓰는 것이 그들 흑수당의 체계였다. 타 방파처럼 타주(舵主)도 향주(香主)도 없고, 하부 조직도 없다. 모두 형제로 호칭하고, 원칙적으로 그들은 모두 평등하 다. 단지 아래 항렬의 형제들은 위 항렬의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때론 그 명령이 아래 항렬 누군가의 지시에 따르라는 명령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전문성을 존중한 결과였다. 들어온 순서 대로 항렬을 메기는 그들 흑수당에 그런 일은 불가피한 것이다. 한편으로 각 항렬의 인물들은 자신보다 두 단계 아래의 인물, 그것도 자신이 입당시킨 인물만 알 수 있다. 한 명이 잡히거나 했을 때 아래 선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위에서 아래를 아는 것보다 아래에서 위를 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컸다. 지금도 그래서 칠단계, 팔단계의 형제들이 사단계의 황구는 볼 수 있어도 이단계인 진운은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밀고한다든가 하는 일을 방 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체계의 조직은 직졉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일반 강호방 파처럼 일사불란한 행동은 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다. 다른 일은 팽개치고 싸움만을 업으로 하는 타방파와 달리 그 들 흑수당의 형제들은 모두 따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 굴이 드러나서는 안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런 비밀 유지가 세력의 확대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가 하 는 것은 한 달 만에 양주를 그들의 천하로 만든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언젠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큰 힘을 낼 수 있는 체계였다. 진운은 잠시 생각을 하고 눈을 번뜩였다. 결국 시체로 발견된 홍십육의 실종이 가진 의미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 는 이득이 한 순간 머릿속에 환하게 드러낫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체에서 물러서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황구와 창고에 있던 사내, 황삼십칠(黃三十七)이 그에게 다가 왔다. * * * 양주부 형방(刑房). --운하의 교통과 선박 통제권을 잡고있는 능파당(凌波堂), 당주(堂主)는 호연 형제(胡連兄弟)로 알려진 세 명. 현재 활동 없음. --소금밀매 조직인 대도회(大刀會). 6월 16일 회주가 시체로 발견됨. --주루 및 색주가(色酒街)의 이권을 잡은 장락방(長樂幇). 6월 2일 대홍교 사건, 당일 밤 유항경자가 사건, 이틀 후 2차 유항경자가 사건으로 멸문. --상가(商街) 순찰을 해주고 보호비를 받는 순의방(巡衣幇). 최근 상인들의 자체 순찰로 바뀌어 일을 잃었음. --무술도장(武術道場)인 무쌍파(無雙派). 6월 17일 이웃 진강(鎭江)으로 이주. --군소 정파인 형의문(形意門). 6월 l8일 봉문(封門). "거기까지!" 양주부 포두, 양주일섬(揚州一閃) 조남성(趙南星)은 여태 읽 어 내려가던 사건 기록에서 눈을 몌 신임 추관을 바라보았다. "암중 세력이 정파도 건드렸다고 말하는 건가?" 조남성은 눈을 끔벅거렸다. 번개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우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이은 그의 대답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최근 한 달 간 관내에서 있었던 무림 관련 사건들을 말쏨드리고 있을 뿐이 지요. 거기에 어떤 연관성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나으리의 주즉 일 뿐 제가 보고드리려는 핵심은 아니올시다. 저는 아직 어떤 추측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모충국은 말을 잊고 그를 쳐다보았다. 조남성은 대담해서 아 무 앞에서나 할말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조남성을 찌르둣 노려보았다. 조남성은 표정의 변화없이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사십대의 넓적한 얼굴이었다. 미세하게 파진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하고, 오른쪽 광대뼈 옆의 하얀 자국은 칼자국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고집스러운 인상이었다. 모충국은 피식 웃었다. "번개라는 별호처럼 빠를 것 같지는 않은데?" 조남성은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실제 별로 빠르지 않습니다." 모충국은 말을 돌렸다. "그래서……, 방금 보고한 일련의 사건들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인정하는 것이지?" "……!" 조남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사이에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 연관성이 없을 수 가 없겠지요." 모충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도의 무리들이 세력 다툼을 할 땐 백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례 아닌가?" 능파당, 대도회, 장락방, 그리고 순의방까지는 양주부 밤거리 의 이권을 둘러싼 흑도의 다툼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류라고는 하나 백도의 무쌍파와 형의문을 건 드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무쌍파는 소금 거래에 연관이 있었고, 형의문은 순의방과 약 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도라고 해도 양주부의 이권에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두 문파를 쓰러뜨린 사람은 알려져 있습니다." 모충국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쭈먹으로 턱을 괴고 조남성의 말에 집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쌍파와 형의문은 전통적인 방법에 당했다 고 할 수 있다, 6월 17일 아침나절에 한 사내가 무쌍파의 정문을 부쉈다. 그 는 뛰쳐나온 무쌍파 제자들의 효에 도장의 현판을 던지고 장문 인을 찾았다. '한 수 배우러 왔노라.'가 그의 말이었다. 말과는 달리 그는 한 수, 아니 서너 수 가르쳐 주러 왔던 것 이 분명했다. 곤법(棍法)이 주특기인 무쌍파의 일, 이, 삼 대 제자들을 나무몽둥이 하나로 모두 때려눕히고, 급기야 팔십 근 짜리 철곤을 휘두르고 나온 무쌍파의 장문인 천기곤(天機棍) 순 우혁(淳于赫)을 세 수 만에 때려눕혔다. 그는 무쌍파의 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천기곤이 들고 나온 철곤을 둥글게 구부려 목에 걸어 주며 '소림곤(少林棍)이 이것 밖에 안되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림곤?" "순우혁은 소림사(少林寺)의 속가 제자입니다." "계속해 보게!" 그날 밤 순우혁은 식솔을 챙겨서 이웃으로 이주해 버렸다, 주 인이 쓰러진 도장에 남아 있을 제자는 없다. 순우혁의 뒤를 따 른 무쌍파의 제자는 다섯이 채 안됐다고 했다. "양주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파는 세 파입니다. 양주성에 가장 가까이 있는 모산파(茅山派), 이젠 무너진 무쌍파와 성밖 의 철불사(鐵佛寺)를 매개로 하는 소림사, 그리고 지금 말쏨드 리려 하는 형의문의 본산인 무당파(武當派) 입니다." "무당파?" "최근 세력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올라가는 문파입니다. 성상 께서 삼 년 전에 무당산에 도관을 지어 주고 전답을 하사하신 이야기는 유명한데…… 모르셨습니까?" "그건 알고 있었지만 형의문과 무당파가 무슨 관계인가?" "형의문의 문주 형의검(形意劍) 장용계(張龍溪)는 과거 납탑 도인( 道人) 장삼봉(張三峯)이 중원을 떠돌 때, 우연히 만나 한 수를 배웠다고 무당 기명 제자(記名弟子)를 자칭하고 있었습 니다. 무당파에서도 여기 근거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그걸 인정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의문이 봉문한 이유가 무쌍파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서 재미있었다. 무쌍파가 이주란 명목으로 사실상의 도주를 하고 난 다음날 중심가에 자리한 형의문의 정문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낡 은 화의에 검 한 자루를 든 사내였는데, 특이한 것은 맹인이라 는 것이다. 그 맹인 검사(盲人劍士)는 무쌍파를 때려부순 사내와는 달리 예의를 차려 도전했다. 그러나 형의문은 맹인을 도전자로 받아 줄 만큼 자존심이 없 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코방귀를 뀌며 맹인을 거지 내몰 듯 내몰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쌍파와 같아져 버렸다. 그의 일 검을 견디 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나중에야 뛰어나온 형의검 장용계도 예 외가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결과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외견상으로는 순우혁보다 더 비참했다. 맹인 검사의 검에 오른팔이 잘려 이젠 검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봉문이었다. "그 외에 양주와 관계 있는 무림세력 중에는 지방 토호 세력 인 천웅보(天雄堡)와 옥정산장(玉鼎山莊), 과거 무림고수였던 철권(鐵拳) 마종의(馬宗毅)가 은거한 피진장(避塵莊)이 정파에 속하는 세력입니다. 이들은 외견상 아직 별탈없이 지냅니다. 비 밀세력이 문제인데……." 효서 들었던 무림세력이 흑도든 백도든 표면적으로 보이는 세 력이라고 한다면 암중에 손을 뻗치고 있는 세력이 비밀세력, 그 런 것이 양주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앞서 말씀드린 세력 중 하나의 뒤에 배후로 버티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선 능파당의 배후에는 장강수로십팔 타(長江水路十八舵)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고, 장락방은 현 무림 흑도 최강 세력 중의 하나인 통천방(通天幇)의 양주분타(揚州分 舵)였다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특이한 세력도 있습니다," 조남성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 사람이라면 말해도 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흑도의 최고 살수들인 칠화회(七花會)의 무정칠화(無情七 花)가 양주에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무림 세력으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백리교(白里敎)라는 종교집단이 천민들 사이에 신봉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백리교는 원말 명초에 극성을 부리다가 사라진 마교(魔敎)의 잔류라는 의혹이 돌고 있는 종교집단이었다. 사실이라면 위험하 기 짝이 없는 집단. 그러나 모충국은 그보다는 무쌍파와 형의문을 무너뜨렸다는 두 사람에게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얼굴을 보였다니 어디 있는지도 알겠군." "그것이……." 제31장 낮 촉강(蜀岡), 청강원(淸江苑). 촉강은 양주부성 서북쪽으로 사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고개로 양주 일대에서 이름난 명승지였다. 지금은 퇴락해 무너 져 가는 셋 궁원(宮苑) 몇 채만이 드문드문 서 있지만 수(隋) 나 라 옛 왕성의 유적지가 있는 곳도 여기였다. 양주부 서쪽 의진현(儀眞顯)을 바라보고 고개를 오르면 연도 (沿道)는 온통 푸르름을 자랑하는 숲이요, 고갯마루 저만치로는 뱀처럼 누운 운하가 내려다보인다. 거기 양주부 최고의 기원(妓苑)인 청강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청강원은 세 가지로 유명했다. 픗광 좋은 촉강 마루턱에 드넓은 부지를 차지한 입지(立地)로 유명하고 주루, 객점, 다원에서 도박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향락 중 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놀 라운 규모가 유명했다. 그러나 먼 곳에서부터 풍류남아들을 불러모으는 결정적인 것 은 당금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를 다툰다는 양주쌍교(揚州雙 敎)중 하나, 문장원(文壯元) 동무미(董無美)가 여기 있다는 것 이었다. 문장원, 문과 시험에 장원급제감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이 그녀는 당대의 명유(名儒)에 못지않은 재기와 문장(文章)을 갖주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연꽃 가득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의 창가에 기대어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사천당문당엽(四川唐門唐燁) 여청강원동소저서(與淸江苑董小姐書). 운우아별(雲雨俄別) 봉양이향(封壤異鄕) 준저청산(春渚靑山) 재로연상(載勞延想) 추천백로(秋天白露) 기변광음(幾變光陰). 고인운(古人云)…… '별이회난(別易會難)' 불기연야(不其然也)? 백해휴금수(白解携檎袖) 일년(一年) 애연물홍(哀緣物興) 사인정감(事因精感). 사천당문의 당엽이 청강원 동소저께 삼가 글을 드립니다. 구름처럼 비처럼 어쩌다 헤어진 뒤 먼 타향에 갇혀서 사느라 봄에 푸른 물과 청산을 볼 때면 견딜 수가 없더니 이제 가을이라 백로(白露)가 내리면 세월은 그렇게 저무나 봅니다. '혜어지긴 쉬워도 만나긴 어럽다'는 옛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일까요? 소매를 끌며 헤어진 지 일 년 슬픔은 사물 따라 촉발(觸發) 되고 일이란 마,음에 따라 느끼는 법입니다. 종이는 절강성(浙江省) 특산(特産) 대전지(大箋紙). 연노란 바탕에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꽃무늬가 숨어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도 아마 편지지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멀리 사천땅에서 배로는 석 달, 빠른 말을 연달아 갈아타고서 도 한 달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서한이었다. 아마도 이 정도 상태로 그녀의 손에 닿게 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정성을 들이 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 동무미는 장부에 대충 갈겨 놓은 숫자라도 보는 것처럼 무심하게 서한에 박힌 글자를 읽어 가고 있었다. 치준협기(峙峻峽崎) 석경위(石徑危). 난심지사(亂心之事) 지비도(只非途) 위여지연(爲汝之戀). 산길은 가파르고 돌길은 위태롭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길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속되구나!" 동무미는 더 이상 글을 읽고 싶은 마 음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 이었다. 한마디 촌평(寸評)으로 값비싼 대전지를 아무렇게나 구 겨 버렸다.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차피 속된 일 아닐까?" 동무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들려 온 말을 비읏는 것도, 찬동하는 것도 아닌 묘한 미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달관한 미소였다. "운명이 기구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래서 이런저런 사랑을 해보면……."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 침상 가로 다가갔다. "여간 새로운 것이 아니면 감동하지 않게 되지." 침상 가에는 굵은 초가 두 자루 촛대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촛대가 놓인 작은 탁자의 아래 부분에 손을 대었다. "당엽이란 사람을 알아?" 방 다른 편에 기대어 서 있던 키가 큰 여인 월몽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였다. "전형적인 부잣집 공자야. 영준하고, 예의바르지. 문무겸전 (文武兼全), 어떤 규수도 바라는 낭군상(郞君像)이라고나 할까? 방금 읽은 그 편지도 그렇게 처지는 문장은 아니야. 아니 뛰어 나다고 해야 옳겠지." 탁자 아래 부분에 작은 서랍이 열렸다. 동무미는 거기서 부싯 돌과 화섭자를 꺼내었다. 월몽영은 문무겸전의 당엽이 보냈다는 그 서한을 바라보고 있 었다. 서한은 막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날려 탁자에서 떠오르 고 있었다. 그녀는 묘한 쬡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글방 선생이 대신 써 줬는지도 모르지만……." 동무미가 미소 지으며 불켜진 촛불을 들고 오다 그 모습을 보 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노란 나비 한 마리, 서한은 그것처럼 공중에 떠올라 창밖으 로 날아갔다. "잡아 줘!" 동무미가 황급히 소리지르며 창가로 달렸다. 그러나 서한은 이미 창에서 일 장이나 멀어져서 떠돌고 있었다. 월몽영은 서한 보다는 동무미의 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작 은 발로 아장거리며 뒤뚱거리는 모습. 그것은 뛴다기 보다는 애 교부리며 걷는다고 해야 더 어울릴 걸음걸이였다. 동무미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잡을 수 있는데도……!" 월몽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뭐 그리 남에게 보여서 안될 사연이 있다고 그렇게 안달이야?" 그녀들이 서 있는 누각은 사층이었다. 창문으로 날려간 편지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각의 아래에서 부는 바람에 실려 공중으로 빙글빙글 돌며 떠 오르고 있었다. 월몽영의 손이 허리로 갔다. 다음 순간 검은 선 한 쭐기가 서 한을 향해 뻗었다. 이 장 길이의 대선룡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대선룡의 혀가 서한을 나꿔채기 직전에 그것은 마치 보고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래로 뚝 떨어져 날아갔다. "저런!" 동무미가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월몽영은 혀를 찼다. '애초에 이걸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그녀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서한이 백랍 만발한 정원을 지나 연못가로 날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연못가에 앉아 있는 것도.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나직하게 입 속으로 중얼거 렸다. "잡아 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잡지 못하면 세상에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극히 드물긴 할 것이다. 동무미는 누각을 내려가는 동안 내내 안달이었다. "혹시 누가 주웠으면 어쩌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보면 어쩨겠어? 그냥 약간 창피할 뿐일 텐데." "그게 창피한 걸로 끝날 일이야? 그건……!" 동무미는 월몽영에게 따져 묻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멍청한 계집애는 싸움만 잘할 뿐 그런 방면으로는 정말 깜 깜한 것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남에게 연서(戀書)를 보여 주고 태연할 수 있는 여인이 어디 있단 말이냐? 혹시 청강원의 동무미가 당문의 공자와 연애 중이더라는 소문 이라도 나면 그땐 난감해진다. 소문이 사실이 될 수도 있어지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누군가의 애첩으로 들어앉고 싶은 생각은 없 었다. 그것이 설사 당엽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진작 잡을 수 있었으면서도……!' 월몽영이 모른 척 한 것이 다시 생각해도 분해 절로 숨이 차 오르는데 연못이 발 앞에 다가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연못에는 연잎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분홍색의 연꽃이 봉오리 져 있었다. 어두운 물밑에서 튀어올랐다가 다시 들어가는 잉어 의 물 튀기는 소리가 첨벙첨벙 들리는데……, 한 사내가 연못가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한 마리 노란 나비처럼 서한이 잡혀져 있었다. 월몽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달라고 해." 동무미는 샐쭉하니 눈을 뜨고 그녀를 홀겨 보았다. 그러나 사 내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노란 나비가 움직였다. 사내가 먼저 그녀에게 서한을 내밀었다. 동무미는 얼굴을 붉히고 그 나비를 나꿔채 구겨 버렸다. 월몽영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맹인이니까 보지 못했을 거야." 맹인. 동무미는 당사자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 는 월몽영에게 놀랐다. 진실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자극하는 말인 경우가 많다. 미남미녀에게 못생겼다고 욕을 해봐야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 한다. 추남추녀에게 그렇게 말해야 진정 욕으로 받아들이고 화 를 내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동무미는 그래서 맹인에게 맹인이라고 하는 월몽영의 행동에 자신이 오히려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맹인은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눈을 들어 맹인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 왜 맹인일까? 사내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일신에 걸친 낡은 화의가 안타까워 보일 정도로 환한 용모에 밝은 눈, 어깨 에는 한 자루 장검을 기대고 있는 사내, 화영이었다. 동무미도 그를 알고 있었다. 이미 보름 전부터 여기 청강원의 객방에 묵고 있는 사내가 그 였다. 맹인이라 특이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형의문 을 봉문시킨 그 맹인 검사라서 들은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월몽영이 그페게 물었다. "뭘 하고 있었지?" 동무미는 월몽영이 그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 스 스럼없는 질문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문득 처음부터 그 사실은 추측할 수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장락방을 제거하고 양주부 기원들의 새로운 보호자로 나선 이들과 형의문을 폐쇄시킨 이 사내가 아무 관계 없다고 생 각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 무쌍파를 무너뜨린 그도?' 그녀는 이들의 저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평가해야 하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화영은 월몽영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소리를 듣고 있었지." "무슨 소리?" "연꽃이 피는 소리." "연꽃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봉오리 안에서 피어오르는 소리. 그리고 또……." "또……?"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잉어의 지느러미가 깊은 물을 가르는 소리. 나무가 숨쉬는 소리, 땅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그 모든 소리……." 화영의 말은 시를 음조리는 듯이 감미롭게 동무미의 귀를 자 극했다. 듣고만 있어도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었다." "귀도 좋군." "조용히 있으면 어떤 소리든 들을 수 있지. 들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만 있으면……." 그러면서 화영은 눈을 감았다. 동무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서 눈을 감았다. 따스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잉어들이 뛰어오르는 물 소 리가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그의 말대로 그녀는 땅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어깨에 닿는 손길에 깜짝 놀 라 눈을 떴다. 월몽영의 안개 낀 듯 모호한 눈동자가 얼굴 바로 앞에 붙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가지?" 동무미는 월몽영의 무덤덤한 말이 오히려 그녀의 가슴을 꿰뚫 는 것 같아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누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서 돌아보았을 때 화영은 아직도 눈을 감고 나무 아래 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그를 감싸고, 나무는 솨솨 소리내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연못의 물은 고요히 침묵하고, 연꽃 피는 소리 요란한 여름 한낮의 정원에서 화영은 그렇게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유리된 둣한 느낌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여기 언제까지 있을까?" 동무미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가 놀라는데, 월몽영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어디로 가지 않을 것이다. "누굴?" "무당파!" * * * 호북(湖北), 무당산(武當山). "운학(雲鶴)아!" 무당 제사대 제자 운학은 사부 청운진인(靑雲眞人)의 목소리 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소옥허궁(紫 玉虛宮) 정문을 빠져 나와 해검지(解劍池)를 바라보며 오솔길을 걷는 그들의 뒤에 사부는 서 있었다. 아침에 이미 작별 인사를 드리고 온 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부는 다시 그의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운학은 허리를 숙이고 사부를 향해 섰다. "하교하실 말쏨이라도?" 먼 길 떠나는 그에게 흑시라도 빠뜨린 말씀이 계시나 보다 했 다. 아니면 어린 제자를 보내며 한두 마디 훈계를 더 하시고 싶 으신 게지. 그런데 칭운진인은 손짖을 해 그 혼자만 가까이 불렀다. "이리 오너라!" 운학은 사부의 손짓에 따라 다가가면서 잠깐 뒤돌아보았다 사숙인 청허진인(靑虛眞人)과 무당삼검(武當三劍)으로 일컬어 지는 운산(雲山), 운영(雲影), 운해(雲海)의 세 사형들이 입가 에 묘한 미소를 담고 그를 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늦받은 어린 제자에 대한 사부의 총애가 지나치다는 말이 있어 행동에 조심을 하던 그였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는 길에, 혼자도 아니고 여러 동문들과 함께인데 이렇게 길에 나와 불러세우면 또 한동안 놀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운학은 싫은 기색 없이 사부의 앞에 다가가 섰다. 사부는 그의 어깨를 잡아 길옆 나무 아래로 끌었다. 누가 보 아도 제자의 강호초행(江湖初行)을 염려하는 자애로운 사부의 행동이었다. 사부는 운학의 귀에만 들리게 낮게 물었다. "이번에 네 사숙을 보내는데 너를 배행(陪行)시키는 이유를 알겠느냐?" 운학이 잠시 멈칫하다가 급히 대답했다. "사숙님이 이번 양주 형의문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배우 라는 뜻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무얼 배워?" 바로 튀어나온 사부의 반문에 운학은 고개를 들었다. 사부의 자애로우면서도 엄한 눈빛이 그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운학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속세의 사람들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아니, 아니다. 너는 잘못 알고 있구나." 단호한 부정이었다 청운진인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 한 어조로 운학의 말을 부정했다. "널 이번에 내보내는 것은……, 싸움을 배우라는 뜻이다." 운학은 번쩍 고개를 들어 사부를 보았다. 상상도 못했던 말이 었다. 그러나 청운진인은 진담으로 한 말인 모양이었다. 한층 더 목 소리를 낮추어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싸움, 정확히 말해서는 대전(對戰)의 경험을 익히라 는 것이다. 구결과 동작을 익히는 것으로는 배워지지 않는 산 경험을 익히라는 것이다." 운학은 해연히 입을 벌리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청운진인이 그를 향해 물었다. "오검(五劍)의 성취는 어디까지냐?" 은밀한 눈빛, 낮은 목소리는 더욱 낮아져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했다. 운학의 목소리가 덩달아 낮아졌다. "제자가 부족하여 양의(兩義)의 팔 성까지밖에 오르지 못했습 니다." 청운진인의 눈빛이 밝게 라났다. 내가기공(內家奇功)과 검의 대행명가(大行名家)로 떠오르는 무당파였다. 그래서 기공과 검법의 종류도 많고, 어느것 하나 정묘하고 위력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갓 입문하면 배우는 삼재검(三才劍), 구궁신행검(九宮神行劍) 에서, 유운검(流雲劍), 소청검(少淸劍), 태청검(太淸劍), 대라 검(大羅劍)까지 익히면 강호무림에서 검가 고수로 행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고도 재질이 남고 연분이 있어 진정한 검의 경지에 다다 랐다고 볼 때에야 비로소 하나씩 익히는 오대검법인 구궁영(九 宮影), 사상류(四象流), 삼절황(三絶荒)과 양의문(兩義紋), 그 리고 최후의 경지인 태극혜(太極慧)가 있다. 방금 청운진인이 말한 오검이 이것을 말한 것이요, 운학이 말 하 양의는 바로 양의문검(兩義紋劍)을 의미한 것이다. 운학이 양의문검의 팔 성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것인데, 이들 의 말대로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재질의 위인이라면 소청검법을 배우면 그만이요, 조금 뛰어난 재질을 가진 자라도 태청검법을 넘어 대라검법까지 익히 면 이순(耳順)을 바라보며 희끗희끗해진 귀밑머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게다가 구궁영검부터는 무당파 내에서도 상당한 신분, 적어도 무당 육원(六院), 팔궁(八宮), 이십사암(二十四菴), 칠십이관 (七十二觀)의 주인급은 되어야 배울 자격이 되었다. 삼절황검과 양의문검은 한층 더 어려워 장로급의 인물만 접할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운학이 그 양의문검을 익혔다는 것은 적어도 그 전에 배워야 하는 구궁, 사상, 삼절을 익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태극혜검만 빼고서는 그가 모르는 무당 검법은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청운진인은 계통상으로는 현 무당장문인 옥양자(玉陽子)의 넷 째 제자로 장래를 기대해 볼 수도 있었지만 직책상 자소옥허궁 의 궁주에 불과해 전체 서열로 보아서는 이십위권에 간신히 드 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 제자인 운학은 더욱 보잘것없어서, 아무 직책도 없는 무당 사대 제자, 일개t청년 도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그가 장로들 이나 익히는 양의문검을 익히다니.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서 이야기할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이다. 운학의 무공 내력에는 확실히 신비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성품이 겸손해서 팔 성을 익혔다고 말할 정도면 거의 극성에 다 다르도록 익혔음을 아는 청운진인이었다. 그는 기꺼워하는 기색을 억지로 감주며 엄하게 말했다. "그 사실을 나와 장문진인(掌門眞人)외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겠지?" "예! 엄명받은 대로……." "이제 네게 두 가지 숙제를 주겠다. 장문진인의 명이니 반드 시 봉행하여야 할 것이며, 목숨이 위태로운 경지가 아니면 어겨 서는 안될 것이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겠습니다." 씬운진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네 목숨은 너의 것이 아니라 사 문의 것이 되었음을 잊었느냐?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의무보다 더 중요한 의무, 네 지상 과제이니." 운학은 움찔해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청운진인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려니와 나중에 모두 밝히 보이고, 이해할 날이 오리라. 네 숙제는 이 두 가지이니 첫째는 무림에 나가거든 싸울 기회가 있으면, 특히 검도 고수와 싸울 기회가 있으면 꼭 나서서 싸우라는 것이다. 승패는 상관없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은 소청검과 태청검만 사용하라는 것이다." "소…… 청검과 태씽검 말입니까?" "그렇다. 다른 어떤 검법도 아니 된다. 꼭 그 두 가지만 사용 하라." "명심 봉행하겠습니다." "둘째는……, 은밀히 태사부(太師父) 님을 찾으라!" "태사부…… 님!" 운학의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태사부라면 무당의 개파조사격인 장삼봉진인이었다. 도교 북 종(北宗)의 일파에 속하는 무당도(武當道)의 시초는 오랜 옛날 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의 무당은 장삼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했 다. 소림의 제자였다고 파문당한 장삼봉진인은 운수도사(雲水道 士)로 떠돌다가 도를 깨우쳐 여기 무당도에 내가기공과 검을 전 했다. 그것이 무당검파(武當劍派)의 시작이었다. 그는 다시 속세로 나가 운수도사로 떠돌고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이 남루한 누더기라 납탑도인( 道人), 즉 지저분한 도사라 는 별명도 얻었다고 한다. 영락제로부터 전답을 하사받고, 면세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도관까지 건립해 주는 특전을 누리게 된 원인도 그의 덕 이었으니, 오늘날의 무당파가 있게 된 것이 모두 장삼봉진인의 덕 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식이 끊어진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는데, 이제 그를 찾으라는 명령을 운학이 받게 된 것이다. 청운진인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네게 운이 있어 만나 뵙게 되거든……." 그는 목소리를 낮춘 채로 시 한 수를 톘조렸다. "삼업(三業)은 물과 함께 맑고, 일생은 구름과 더불어 한가롭 다! 이 뒤 구절이 어떻게 되느냐고 여쭈어 보거라." "삼업은……!" 운학이 시구를 되풀이하는데 청운진인이 입을 막았다. "태사부님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이 시구를 들려줘선 안된 다. 생각을 하더라도 속으로만 해야 할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청운진인은 다시 평소의 자애로운 눈빛으로 돌아와서 그를 보았다. "쉬이 만나뵙지는 못할 분이나, 복연(福緣)이 있으면 피해 다 녀도 마주치게 되는 것이 인세의 이치! 애써 찾으려 할 것은 없 다. 이제 그만 가거라!" 운학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물어 보고 싶은 일이 많았으나 청 운진인은 이미 진언(眞言)을 외우고 있었다. "천봉천봉(天蓬天蓬), 구원살동(九元殺童), 오정도사(五丁都 司), 고도북공(高刀北功), 칠정팔령(七政八靈)……." 길을 떠나는 제자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진언이었다. 운학은 그만 고개 숙여 절하고 자신도 진언을 외었다. "원시천존(元始天尊), 송아거래(送我去來)." 원시천존이시여, 저를 보내 갔다 오게 하소서. 길을 떠날 때 외우는 진언이었다. 운학이 청허진인의 뒤를 따라 산길을 내려가 <신주제일도가 (神州第一道家)>라는 간판이 걸린 산문을 통과할 때까지 청운진 인은 진언을 외우며 서 있었다. 호북성 균현(均縣), 이십칠 봉(峰), 삼십육 암(巖), 이십사 연(淵), 오 정(井), 오 대(臺), 삼 천(泉), 삼 담(潭)의 무당산 으로부터 다섯 명의 도사가 나와 양주로 향했다. 그 중에는 장 차의 무림제일검(武林第一劍)이 포함되어 있었다. * * * 지부공관. "무당과 소림이 가만히 있을까?" "아마도……, 그러지 딴겠지요?" 모충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남성에게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무당이 개파 이래 최초의 좌절을 참을 수 있을까? 소림은? 명이 건국된 지 삼십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무림 문파 들에게도 전기가 되는 시기였다. 구대문파가 왜 구대문파인가? 소수의 인정된 단체에만 국가가 문을 세워 주고, 전답을 하사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문파가 성립하는 것이다. 즉 국가의 공 인을 받은 무림 문파라야 명문대파인 것이다. 제아무리 무슨 문(門)이니 무슨 방(幇)이니 해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 불법 조직, 잘해야 비밀조직으로 국가의 눈으로 볼 때는 불량한 무리들이 도당(徒黨)을 이루고 불손한 일을 획책하고 있 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결국 본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혹도의 무리와 동류가 되고 마는 것인데……. 천산파가 그 일례였다. 원나라 때는 무림 구대문파의 당당한 일원으로 막강한 세력을 굳히고, 당시 원나라 조정의 웬만한 무 장은 저마다 천산문하(天山門下)임을 자랑했으나, 이젠 산산이 흩어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무당파가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구대문파 의 일석은 이미 그들이 차지한 지 오래이고…… 영락제의 칙령 (勅令)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경제적 토대가 마련된따는 것은 그들이 돈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속의 이권에 비교적 초연한 명 문정파의 위치를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사받 은 전답으로부터 나오는 소작세(小作稅)만으로도 검소한 도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이상의 부(富)가 축적되는 것이다. "대인께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지부의 서리(書吏)가 나와 그들을 불렀다. 모충국은 지부대인 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쪼남성이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지부의 집무실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지부가 일어나며 말했다. "바쁠 텐데 이렇게 다시 불러 미안하네. 소개해 줄 손님이 계 셔서."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로 보아서는 노인인 듯한데 얼굴에는 수 염 하나 없어 중년인으로도 보이는 사내였다. "안녕하시오?"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포권했다. 몇 번을 빨아 입었 는지,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군데군데 하얗게 바래, 성긴 천이 보일 정도의 청삼이 펄럭거렸다. 모충국은 사내의 정중하다기 보다는 상냥한 미소, 어쩐지 어 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그 미소를 보고 등허리로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딱딱하고도 천중하게 절을 하는 그의 새끼손 가락 손톱이 매처럼 휘어져 있는 것을 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모충국은 마지못한 듯 정중히 대답했다 "신임 추관 모충국입니다." 지부가 뒤늦게 그를 소개했다. 그리고 손을 돌려 사내를 가리 켰다. 소개를 하려는 듯했는데 그 사내가 자기 이름을 대는 것 이 빨랐다. "양유덕(楊有德)이오." "양가장(楊家莊)의 이장주(二莊主)이시네." 모충국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며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어보 였다. 머릿속으로는 양유덕이라는 어쩐지 익숙한 이 이름을 어 디서 들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부가 얼굴을 그에게 향하고 말했다. "차후 요청하시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협조해 드리게. 앞으로 자네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일세." 비밀을 간직한 듯한 은근한 어조였다. 모충국은 그것이 어쩐 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부는 이미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내를 향해 자리를 권하 고 있었다. 잠깐 일어서게 한 것이 크게 미안하기라도 한 것처 럼 생각하는 태도였다. 모충국에게는 일종의 축객령(逐客令)과 도 같은 태도. "소관(小官)은 그럼 이만……." 모충국은 가볍게 절하고 돌아섰다. "아니, 나도 그만 가야겠소. 일이 있어서……." 양유덕은 지부가 권하는 자리에 앉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나왔 다. 지부가 잠깐 얼굴을 붉히더니 황급히 배웅하는 시늉을 했다. 모충국은 문을 열고 옆에 비켜섰다. 그의 앞으로 양유덕이 고 개를 숙여 보이며 지나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피부는 어찌나 흰지 한번도 햇빛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모충국은 지부가 어째서 은근히 일종의 존경심 을 갖고 그를 대하는지 자못 궁금했다. 양유덕은 문을 나서서 다시 허리를 굽혀 우아하게 절을 하더 니 옷자락을 펄럭이며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 졌다. 두 사내가 그 등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모충국은 그 특이한 걸음걸이보다도 그가 방문을 나서자 바로 그의 뒤에 따라붙은 두 사내에게 더 관심이 끌렸다. 키가 훤칠한 중년의 문사 하나.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끝이 몇 번 꼬인 교룡(蛟龍)의 수염뿐이었다. 또 한 사람은 산발한 머리로 얼굴을 가렸고, 짐승의 털을 밖 으로 한 털옷을 입은 사내였다. 그 두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도가 놀라웠던 것 이다. 모충국은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서 있었다. "누군지 모르시Jt습니까?" 지부공관을 나오는 길에 조남성이 물었다. 모충국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듣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군." "부귀산장(富貴山莊)이라면 기억에 도움이 되시겠습니까?" "부귀산장!" 모충국이 걸음을 멈추었다. 길을 걷다가 멈출 정도의 놀라움 이 그 이름에는 있었다. "천하제일부(天下第一富) 양장자(楊長者)?" "그 양장자의 동생입니다." 당금 천하제일의 부자로 소문난 장자(長者) 양유행(楊有行), 과거 천하제일부자였던 석숭(石崇)도 그와 비교하면 가난뱅이에 불과하다는 고금제일부자 양유행의 친동생이자 양가장의 서열 이위권자가 방금 만난 어쩐지 기분 나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양주부 교외에 몇 백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작은 왕처럼 산다더니……!" "거기가 양가장, 바로 부귀산장입니다." 잠시 서 있던 모충국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부자건 말건 나와는 관계없지 않은가?" "관계가 없진 않을 겁니다. 여기 양주부에 사는 사람은 누구 도 그와 관계가 없을 수가 없죠." 모충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더 걷다가 그가 문득 말했다. "오늘 저녁 평복을 하고 나오게!" "어떤…… 평복 말입니까?" "기녀원에 놀러 갈 것이니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생각해 보게!" "기녀…… 원 말입니까?" * * * 북문 밖, 용광사(龍光寺).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 원력훙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便觀照) 양주부 성내에는 유명한 사찰이 많았다. 비교적 큰 것으로 팔 대사찰(八大寺刹)이 있고, 성밖에도 세 개가 있었다. 하나같이 유명하고, 오랜 연원을 가진 사찰이었다. 그 중 하나가 양주부 북문 밖, 서묘(西廟) 가에 서 있는 용팡사(龍光寺)였다. 성의 북문인 진회문(進淮門)으로 나가면 얕은 구릉이 있고 거기 왼쪽 넓은 부지에 서묘가 있다. 거기에서 바라보면 두 개 의 절이 보이는데 어느것도 서로에 비해서 작지 않았다. 철불사(鐵佛寺)와 용광사가 그것이었다. 철불사는 소림하원(少林下院)에 속하는 사찰 중 하나로 높이 칠 장에 달하는 거대한 철불상이 있어 유명했다. 용팡사에는 용 지(龍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거기 살던 뱀이 용 이 되어 승천했다고 했다. 오늘 용광사에서는 법회(法會)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 웅전의 억덟 칸 미닫이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백여 명의 승려들이 도열해서 요란한 범패(梵唄) 소리 사이로 염불을 외고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 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 薩)……. 노랗고 빨간 깃발이 즐비하게 늘어서고, 종이로 만든 코끼리 와 연꽃등들이 늘어서서 장방형의 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 선 뒤로는 더 이상 설 공간도 없이 대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연 신 합장하고 절을 하는 것이다. 남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아녀자들이었다. 바 로 이 용광사에 고정적으로 드나드는 신도들, 그리고 주변의 아 낙네들이었다. 그들 신도들의 모아진 손끝이 향하는 곳은 대웅전, 그 대웅전 중앙에 앉혀진 불상 한 채였다. 오늘은 용광사에 새로 모셔진 불상의 봉헌식(奉獻式)이었던 것이다. 대웅전 안이 환하도록 금광을 뿜어내는 금불상(金佛像) 하나. 검게 칠한 머리와 중국식으로 입혀 놓은 가사만 빼고는 싯누런 금으로 조성되었음이 분명한 금불상이었다. 반쯤 감은 눈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은은히 뿌려지는 것을 보면 눈동자도 보석으로 박아 놓은 모양이었다. 용모는 이십대 정도의 씬년 부처, 코가 오똑한 것으로 보아 불상 조성의 전통 에 따라 천축인 같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살아 있는 것같이 정 교하고 아름다웠다. 그 전체적인 용모와 신비스러울 정도로 휘황한 금빛이 신도들 의 불심을 몇 배로 자극하고 있었다. 장엄한 불사(佛事) 가운데 에서도 아녀자들 사이에서는 '어쩨게 저리 잘 생기셨누그래.', '보고만 있어도 영험이 느껴지네.' 어쩌구 하는 소리가 분주히 들려 오고 있었다.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音菩薩摩 薩)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南無如意輪菩薩摩 薩) 용광사의 방장(方丈)인 무애 대사(無碍大師)는 기분이 좋았 다. 입이 절로 벌어지고,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와 염불조차 중 간중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제는 건너편의 철불사에 그리 밑가지 않게 된 것이다. 마주보고 서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전부터 그는 철불사에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은 열등감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 는 것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천하에 유명한 소림사의 하원사찰 중 하나라는 무시 못할 배 경이 그랬고, 멀리서 봐도 눈에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철불상이 그랬다. 용이 승천한 연못이 유명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 하고, 혹시 만에 하나 사실이라도 지금은 용은 날아가고 자리만 남아 있지 않은가! 뭔가 인근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온 지 이미 수십 년이었는데, 말년에 이런 복덩어리가 굴러들어오 다니……! '부처님의 가호로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는 다시 한번 염불을 놓쳐 버렸다. 그 리고 그 김에 입만 달싹거릴 뿐 염불은 포기했다. 얼굴은 바로 한 채 눈만 돌려 보니 거기 그가 서 있었다. 깨끗이 빗어 속발(束髮)한 머리를 그대로 내놓고 있는 건장한 노인, 오늘의 법사가 있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수 십 년 원(願)을 풀어 준 은공이기도 했다. 등신대(等身大)의 금불상이라는 것이 한두 푼도 아니고, 게다 가 저렇게 정교해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의 수공 (手工)이라면 금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엄청난 값 이 나가는 것이다. 그런 보물을 시주하다니……! 얼굴을 뒤덮은 흉터와 강퍅한 인상만으로 흉악한 인물이라 단 정했던 자신의 선입관이 부끄러워지는 무애 대사였다. '삼생(三生)의 복을 빌어드리리다.' 무애 대사는 마음속으로 부처가 아니라 노인, 원도살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부처의 이름을 세 번 반복해 부르는 것으로 염불은 끝이 났 다. 범패 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오색 단장한 무승(舞僧)들이 바라춤을 추었다. 법사는 한참을 더 이어질 것 같았지만 지루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라이란 이상한 것이라 어디에 쓰이건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 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황흘하게 해 넋을 잃고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소리와 모습들을 뒤로 하고 험악한 인상의 늙은이 원도살 은 칼자국난 얼굴의 젊은이 백리극과 함께 사람들을 헤치고 용 광사를 나왔다. 기울어 가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법사는 계속될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멍하니 구경할 마음은 없었다. "괜찮을까요?" 그는 백리극을 돌아보았다. 백리극은 고개를 약간 움직여 뒤 를 가리켰다. 원도살은 그 시늉이 아니라도 방금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황룡의 신공(神功)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들은 방금 용광사에 안치된 불상, 황룡을 두고 말하고 있었 다. 금불상은 바로 황룡이었던 것이다. 중원에 도착한 후 황룡의 몸에서 발하는 금광은 더욱 짙어졌다. 사방이 밀폐된 방안이 아니면 밖으로 빛이 새어 나갈 정도였다. 보리무상강기가 급격히 완성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다는 증거 였다. 황룡 본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진운이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금광을 감주 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본인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겨울잠을 자려고 하는 동물처럼 이런저런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폐관수련(閉關修鍊), 아니 본인의 설명대로라면 가사 수련(假死修鍊)을 할 장소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동 료들은 뒤집어질 뻔했다. 일 년이 걸릴지 이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고, 중간에 의식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심지어는 무얼 먹어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 무공을 그 경지까지 익힌 사람이 그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 확실하다고 말한 것, 즉 장소는 건조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면 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번에는 진운이 뒤집어지려 고 했다. 간단한 조건인 것 같지만 막상 그렇게 맞추려면 얼마나 어려 울지 그는 알고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하면서 그런 조건에 맞는 장소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그래서 내놓은 의견이 바로 이것, 불상으로 변장시켜 절에 안 치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나뭇잎을 숲에 감춘다는 것이죠. 화상과 불상이 있어서 가장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장소는 절밖 에 더 있느냐는 것이다. '라마승이 어떻게 그냥 절에……?'라는 문제제기는 '라마든 화상이든 같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니까……!'라는 황룡의 대 답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래서 오늘의 법사가 있게 된 것이다. 설혹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별상관없다는 것이 야광 중의 뜻이었다. 모두들 그 말에 수긍했다. 황룡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 것인가? 원도살과 백리극은 유람하듯 천천히 걸어 북문으로 들어왔다. 처음부터 원도살은 백리극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백리극도 그 를 잘 대해 주었다. 황룡을 제외하면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이기 도 챘고, 성격상 그와 맞는 부분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귀주성의 주루에서 진운을 만날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까지 둘은 함께 행동하기를 즐겨했다. 그것은 백리극밖에 모르 던 도신 도귀, 두 귀머거리 형제가 묘하게 방각을 따르는 것과 도 궤를 같이하는 일이었다. 평소에 극도로 말이 없는 방각이 손짓으로 그들과 대화하는 모양은 어쩐지 어울려 보여서 재미있었다. 어쨌든 생애 단 한번도 중원에 들어와 보지 않은 원도살과 거 의 군문(軍門)에서만 생활한 백리극에게 양주성의 나날은 신기 한 일 투성이였다. 지금도 그들은 성문 안으로 접어들면서 펄쳐지는 거리 풍경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걷는 것이다. 문득 백리극이 한곳을 가리켰다. 원도살이 그곳을 잠시 바라 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들이 바라보는 거리 한편에는 깃발 하나가 꽂혀 있고, 그 아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루한 도복(道服)에 축 처진 팔자눈썹, 수염까지 아래로 쳐 진 두 가닥의 팔자수염인데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 럼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처량해 보이는 늙은 도사가 깃발을 내걸고 앉 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깃발에 씌어진 글씨가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좌관천리(座觀千里) 약립구만(約立九萬).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通)하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에 달(達)했다. 앉아서 천 리 서면 구만 리를 본다. "저런 건 자신감이 아니라 허풍이 대단하다고 하는 겁니다." 백리극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원도살의 반문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저런 길거리 점쟁이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백리극은 원도살이 농담을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시 더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물었다. "저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십니까?" "뭐 하는 사람인가?" 몽고에서 살았으니 점쟁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던 원도살이었다 백리극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도사에게 다가갔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얼만가?"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던 도사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질문에 따라서 값이 다르고, 대답에 따라서도 값이 다르네." "대답에 따라서?" "어려운 질문이면 비싸고, 쉬운 질문이면 싸다네. 신경 써서 대답하면 비싸고, 아무렇게나 대답하면 싸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오겠나?" "그런 질문이 비싼 걸세." "간단한 질문인데?" 258 il[쓩호 "그러니까 비싸지. 맞고 틀린 결과가 금방 나오거든. 운명을 점쳐 달라거나, 자식복이 어쩨게 되느냐 등등이 싸지. 얼렁뚱땅 대답해도 되거든." 백리극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건 지나치게 솔직한 점쟁이 아닌가!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 하고도 장사가 될까? "그래서 언제 오겠나?" 점쟁이 노도사는 그제서야 꾸물꾸물 산통(算筒)을 집더니 입 속으로 뭔가 중얼거렸다. "태서(泰筮)의 유상(有常)을 빌고자 합니다. 태서의 유상을 빌고자 합니다……." 그러더니 산가지 하나를 집었다, "곧 오겠네." 잠시 시간이 홀렀다. 도사는 울 것 같은 눈으로 백리극을 바라 보고 있었다. 너무 처량해 보여서 보는 사람이 슬퍼질 정도였다. 백리극이 물었다. "그게 단가?" "그게 달세." "그게 싼 대답?" "그렇네." "조금 비싼 걸로 대답하게." 도사는 아까 삔 산가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대답했다. "삼 일 안에 보게 될 걸세," "아주 비싼 대답은?" 도사는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하며 물 었다. "이건 정말 아주 비싼 건데 후회하지 않겠지?" "물론." "그럼 좋아." 도사는 눈을 부릅뜨고 백리극을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눈을 다시 감았다. 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백리극은 볼 수 있 었다. 도사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한참 동안 달리기라도 한 것처 럼 씨근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일 볼 수 있는데, 그가 오든지 아니면 자네가 가든지 할 걸세." 제법 자세해지기는 했지만 애매한 것은 별차이 없었다. "그 대답이 왜 비싼 건가?" 도사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도 가끔 점이 맞는 경우가 있는데, 하루에 한번이 고작이 지. 오늘 자네 질문에 대답하느라고 그 한번을 쓴 거야. 그러니 까 비싸네. 은 한 냥." 백리극은 갑자기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깎아 주게!" 도사의 눈이 다시 부릅뜨였다. 그 눈에 담긴 슬픔이 더욱 진 해졌다. 백리극은 그냥 한 냥 주려다가 참았다. 도사가 뭐라고 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결국 도사가 말했다. "그거라도 줘." 반 냥을 주고 돌아서는 백리극을 도사가 다시 불렀다. "자네가 복채를 깎는다는 몰상식한 짓을 했지만 난 넓은 마음 으로 원한을 품진 않겠네. 그냥 한마디 더 알려 주지." "뭔가?" "잘하면 보겠지만 잘못하면 못 볼 수도 있네." 백리극은 결국 웃고 말았다. 자리를 떠나며 원도살이 말했다. "예언하는 자였군." 예언, 점을 치는 사람은 몽고에도 있다. 단지 저 도사처럼 깃 발을 내걸고 영업하지는 않을 뿐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재미라……!" 원도살의 눈 깊숙한 곳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쳤다. "재미있긴 하지. 특히 마지막 말이!" 그 말에 담긴 묘한 감정에 백리극이 물어 보려 하는데 원도살 이 먼저였다. "당주에 관해 물어 본 것인가?" "오실 때가 됐는데 안 오니까요." "지루한가 보군, 며칠 아무 일도 없으니." "아무 일도 없진 않지만……, 당주가 돌아와야 본격적인 일이 시작될 테니까……." 결국 지루하다는 이야기였다. "진운이 하는 일이나 보러 갈까?" 진운이 하는 일……. 운하에서 건져 낸 시체와 관련된 일이었다. "아니오." 백리극은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일을 마쳐야겠습니다."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극의 사직인 일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알기만 할 뿐 도와 줄 수 없는 일, 도와 주기를 바라지 도 않고 아는 것도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는 창기(娼妓)로 팔려 갔다는 누이와 아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제32장 저녁 서문 밖, 요자가(搖子街). "타침(打針)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모충국은 고개를 저었다. "타침? 침(針)을 놓는다[打]는 뜻인가?" "글쎄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만……." 조남성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반 시진 이내에 벌이는 정사(情事), 그러니까 짧은 정사를 뜻 하는 거죠. 침 한 방 놓고 나와라, 뭐 대충 그런 뜻일 겁니다. 모충국은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력이 모자갈 사람을 뜻하는 건가? 반 시진이면 방사(房事) 하는 시간치고는 짧은 편은 아닌데?" "그게 아니라……, 요자(搖子)에서 벌이는 정사를 말하는 것 입니다. 저기 보이는 저것이지요."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막 어두워지는 골목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 서 있었다. 그것도 골목 벽에 얼굴을 대고 딱 붙어 있는 것이다. "저게 뭔가?" "요자! 저게 최하급 창기들의 영업 장소인 요자입니다." 그들은 사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흙으로 쌓은 초라한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골목이었 다. 그 홅벽에 사내들이 줄지어 서서 머리를 대고 있었다. 조남성이 빈 곳이 없나 둘러보더니 두 사내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엇!" "뭐야!" 그의 손에 당겨 온 두 사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조남성이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뒤로 까닥거렸다. 꺼지라는 표시였다. 두 사내는 철판처럼 딱딱한 그의 인상과 단단한 체격을 보더 니 기가 죽어 비실비실 비켜섰다. 조남성이 그들이 서 있던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구멍 이 뚫려 있었다. "보시겠습니까?" 모충국은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바로 뗐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건……!" 화난 둣 억눌린 목소리였다. 조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그것이 요자입니다." 모충국은 그 말에 포함된 의미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섰다가 다시 구멍에 눈을 대었다. 구멍 건너편은 방이었다. 붉은 등불이 밝혀진 방. 그 안에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니, 세 개의 살덩이였다. 위아래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인 셋이 묘하게 몸을 꼬고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름대로 요염한 자태를 취한다고 취한 모양이었는데, 그녀들 의 얼굴에 잔뜩 발라진 백색의 분과 더불어 모충국에게는 구역 질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의 좌우에 선 사내들 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야 이년들아! 나무토막이냐? 가무(歌舞)가 있어야 어르신네 들도 볼 맛이 날 것 아냐!" 세 여인 중 하나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소리가 난 곳을 보았 다. 그녀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돈도 없는 것들이 지랄육갑을 하고 자빠졌네! 벽에다가 물건 비벼서 더럽히지만 말고 고린 동전이라도 몇 닢 가져와 봐!" 말은 그렇게 흉악하게 하지만 가무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 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눈 같은 피부, 꽃다운 용모 풍만하나 남은 듯하며 치마 아래 활처럼 고운 곡선 작고 파리하여 한줌에도 안 들겠네. 노래와 함께 그녀의 양 옆에 앉은 두 여인이 일어나 춤을 주 었다. 혹은 손으로 몸을 쓸고, 혹은 다리를 꼬며 걷는데 엉덩이 를 유난히 실룩거리는 것이 춤이 아니라 단지 음란한 몸짓일 뿐 이었다. 모충국은 뒷골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상상하기 어려운 광 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그가 그런 처참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동안 다른 사른 사내들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구, 저걸!" "이년들아, 좀더 크게 걸어!" 노래가 바뀌었다. 시중에서 불려지는 잡가(雜歌) 중 하나였다. 여인네에게 다챈한 일이 두 가지 있네 못생긴 년이 다행히 발은 작아 널리 사람들에게 칭송을 싣네 창기년이 다엉히 발이 작아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네. 여인네에게 불행한 일이 여섯 가지 있네 우도 없이 북쪽에 태어나 해질 때까지 긴 치마만 입고……. 그때 방 한쪽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구경하던 사 내들 중 하나였다. 노래가 끊기고, 줌이 멈주었다. 여인들은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사내가 군침을 흘리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노래하던 여인이 옆에 있던 바구니를 들었다. "돈!" 들어올 때부터 들고 있던 것인지 사내가 동전 몇 개를 바구니 에 떨구었다. 그리곤 줌추던 여인 중 하나를 덥석 안고 방 다른 구석으로 갔다. 붉은 휘장, 그 너머의 침상이었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내들은 곧 조용해 졌다. 잠시 후 있을 무 언가를 기대하듯이……. 그리고 그들의 기대는 곧 이루어졌다. 방안에 기묘한 음향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충국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바람에 옆에서 벽에 머리를 박고 있던 사내와 어깨를 부딪 쳤다. 그는 힐끗 그를 보더니 다시 벽에 머리를 박았다. 모충국은 그 자리를 떠나 성문을 향해 걸었다. 조남성이 그를 따라왔다.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걸었다. 성문이 다와가서야 모충국이 물었다. "요자는 누가 경영하는가?" "천민들입니다." 모충국이 멈춰 섰다. 그의 입에서 분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같은 천민들끼리 저렇게 여인을 수탈한단 말인가?" "척인들은 거지였던 것들입니다. 그냥 뒀으면 어디서 굶어 죽 었을지도 오를……." 모충국의 말문이 막혔다. 생존은 어떤 것에도 우선한다. 그러 나…… 꼭 이렇게 서로의 살을 파먹고 살아야 하는가? 조남성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제가 알기로는 동전 일곱 닢이 공정가격입니다. 그걸 내면 아무나 하나 골라서 침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죠. 반 시진 동 안……. 그래서 타침입니다." "조금 더 나은 곳도 있겠지?" "구지가(九支街) 입니다." "거기로 가세!" 모충국이 앞장서서 걷다가 문득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멀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 만 저만치에는 붉은 등불 내걸린 요자가 있고, 벽에는 여전히 사 내들이 서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려다가 발을 멈추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는 죽었어. 잘못 본 것이겠지!" 어깨를 부딪치vf 언뜻 본 사내, 긴 칼자국이 얼굴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나 있던 그 사내가 설마 정무 장군 백리극은 아닐 것 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지 않았던가. * * * 북문. 진운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 던 인물을 본 것이다. 피해야겠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보여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어느새 같이 걷던 장한, 황구와 황삼십칠의 뒤로 돌아 가 있었다. 동물적인 반사동작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되지 않 는 행동이었다. 그는 경황중에도 생각에 앞서서 몸이 먼저 피했던 자신의 행 동이 만족스러웝다, 그리고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슬그머니 자 신이 본 것을 확인해 보았다. 터무니없는 말이 괴발개발 씌어진 깃발, 그 아래 앉아 있는 노도사, 어깨 위에 달린 그 재수없는 얼굴……. 틀림없었다. 그와 더불어 무림사사(武林四邪)로 일컬어지는 세 명 중 하 나, 생사복(生死卜) 구련자(求憐子)가 예의 처량한 모습으로 앉 아 있는 것이다. 다른 점괘는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지만 적어도 한 가 지 분야에 대해서만은 틀리지 않는 점쟁이가 그였다. 인간의 생 사에 관한 한 틀린 적이 없는 것이다. 진운은 그 점괘의 비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쭝 원무림의 누구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언제 죽는다고 하면 반드시 그때 죽는다. 혹시 안 죽을 것 같 으면 그 자신이 직접 수고해서 점괘에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림사사의 하나였다. 그보다 먼저……, 그리고 그것이 진운에게는 더 중요한데, 그는 혹도 제일세력, 그리고 진운이 크게 한탕 해먹은 통천방의 당주 증 하나였다. '그가 양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일까?' 진운은 이렇게 길에 멈춰 있는 것이 더 주목을 끈다고 판단했 다.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게. 이상한 눈치 보이지 말고." 생각해 보면 이상한 눈치는 이미 보인 터였다. 조는 척하지만 사람 찾는 것이 전문일 수도 있는 점쟁이가 그를 못 알아봤기를 기대하는 것은 위험했다. 진운은 일변 두 장한의 몸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으면서 일변 구련자가 자신을 알아보았을 경우에 대비한 계책을 짰다. 우선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북문통을 벗어나자 진운은 한편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까 전보다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만약 발견했다면 반응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찾으러 온 것인가? 그를 찾으러 왔다면 그가 억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를 찾으러 온 것이 아니면 여기에는 왜 나타났을까? 꾼임없이 의문잠이 늘어 갔다. 어느것도 확실하다고 단정 지 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진운은 가능성이 없는 것들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제거해 감으 로써 좀더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추려 보았다. 처음에는 흔란했 지만 곧 몇 가지 가능성으로 줄여 놓을 수 있었다. 진운은 황구에게 속삭였다. 그는 커다란 자루를 하나 걸머지 고 걷고 있었다. "그 주변에 사람을 배치시켰겠지?" "예." "그 중에 발 빠른 자가 있나?" "하나 있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그를 지삼야(地三爺)에게 보내라!" 지삼야, 방각을 말하는 것이다. "전갈할 내용은……?" "지육야(地六爺)와 지칠야(地七爺)를 보내 달라고. 아니면 지 구야(地九爺)를." 지육야와 지칠야는 도신과 도귀 형제, 지구야는 개병공작 등 평이었다. 그들의 앞에 구지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구지가(九支街). 강남의 밤은 강북보다 한 시진은 늦게 와서 한 시진은 빨리 가 버린다. 지금 강남의 짧은 밤이 시작되었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거리에는 등불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구지가에는 이미 초저녁부터 밝혀진 등불이 휘황하 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등불들…….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불빛들이었다. 구지가는 아홉 개의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구지가라 고 불렸다. 즉, 아흡 갈래의 거리라는 뜻이었다. 골목이 아흡 개이기 때문에 맴돌아서 난 길을 비롯해 모퉁이 길, 전후좌우로 뚫린 길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 좁은 입구와 꼬 불꼬불한 골목에 조그만 방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창기들은 그렇게 좁은 골목마다에 밝혀진 붉은 등불에 묻혀 있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모충국과 조남성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워지면 창기들이 향욕(香浴)을 하고 골목 밖으 로 나와 인근 찻집이나 주루 앞에서 배회하는데 이것을 참관(站 觀)이라고 합니다. '참관'……, '보초 선다'는 말이니 우습죠? 수작을 거는 사내가 있으면 골목으로 들어와 방으로 데려가는 거죠. 그런 창기들을 수마(瘦馬)라고 부릅니다. 수마는 '마른 말'이라는 뜻이니 타고 노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인가 봅니다." 모중국이 문득 미소를 지었다. "조포두(趙捕頭)는 이쪽 방면에 아는 게 많군!" "말꼬리가 묘하게 꼬이는 말인데, 쪼남성이 알아듣고 씁쓸한 웃음을 떠올렸다. "관할이라……. 알기 싫어도 알게 되더군요. 여길 뒤지면 잡 히는 자들도 많고,"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큰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나중에 잡고 보면 사창가에 숨어 있었더라는 경우가 많은 것은 무슨 이 유일까? 조남성 역시 사창가를 뒤져서 범죄자를 색출해 낸 경우가 많 았다. 자연 이런 곳의 생리에 정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소관은 오히려 추관어른이 이상합니다. 부임 첫날 이런 곳에 오실 필요가 있으셨는지……." 모충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나직하게 말 을 시작했다. "자네의 보고로는 양주부에 이상한 움직임이 드러난 것은 유 월 이일의 대홍교 사건부터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열 명의 죽음, 그리고 십 인분의 피. 대훙교를 붉게 물들인 그 피와 살들이 이후 보름 간 양주부에 몰아친 공포의 밤을 만들었다. 그날 밤에 유항경자가에서 오십여 명의 장락방 도당들이 하나 씩, 혹은 혜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이틀 후 같은 곳에서 삼 십여 명이 다시 죽음을 당했다. 이번에 발견된 시신에서는 장락방의 방주를 비롯한 수뇌인물 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것을 끝으로 장락방은 양주에서 사라 졌다. 살아 남은 장락방의 졸개들은 공포로 넋이 나가 말을 못했고, 어쩌다 하는 말에도 별로 쓸 말이 없었다. 많은 창기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하나같이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 후 운하에서는 하루에 대여섯 구의 시체가 꼬박꼬박 발견 되었다. 아무 연고자도 나서지 않는 시체라 신원도 알 수 없었 지만 그쪽에 발이 넓은 포쾌의 말로는 순의방, 대도회, 능파당 의 수하 조무래기들이라고 했다. 밤이면 돌아다니는 인적이 끊어지고, 초저녁부터 일찍 귀를 막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바로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다. 같은 달 십육일 대도회 회주가 몇 명의 수하들과 함께 시체로 발견되면서 공포의 밤은 끝났다. 대신 십칠일과 십팔일 무쌍파, 형의문이 문을 닫았다. 공포의 밤은 지나갔지만 움직임은 그치지 않은 것이다. 그 기간 내내 조남성을 위시한 부성의 포쾌들은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이리저리 뛰었는데……, 결과는 무소득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왜 장락방부터 시작했을까?" 모충국의 목소리가 조남성의 상념을 깨뜨렸다. "예?" "왜 장락방부터였을까? 순의방이나 대도회가 아니고?" 조남성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손이 닿는 대로 잡아죽인 것을……!' "그저 손이 달는 대로……!" "그거야!" 모중국은 조남성의 말을 끊었다. "손이 닿는 대로…… 죽였다. 그럼 왜 장락방에 제일 먼저 손 이 닿았을까? 가까이 있어서가 아닐까?" 조남성의 눈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흑도의 세력 싸움은 자기들의 본업(本業)에서부터 시작 한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구체적인 이득이 없으면 손을 쓰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니……!" "흉수는 장락방과 이권, 혹은 원한이 겹치는 어떤 곳에 있는 자들이 아닐까?" "합당한 추리이십니다." "그래서 창기들의 공간을 먼저 찾아본 것일세." 조남성이 연신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탄 성을 질렀다. "아하, 그러면 소관과 함께 오신 것은 실수입니다그려!" "응?" "아까부터 소관과 추관어른을 잡는 창기들이 하나도 없는 것 이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다. 골목이 미어 터질 정도로 유객(遊客)들이 오가고, 창기들은 집 앞에 서 있다가 눈만 마주치면 소매를 잡아 끌고 갔다. 뿐만 아니라 늙어서 더 이상 손님이 찾지 않는 퇴기들이나 열 서넛밖에 안된 아이녀석들도 골목 어귀, 잡 앞에 서 있다가 손 님과 홍정하고 창기들에게 인도했다. 골목으로 가서 '아가씨, 손님 오셨어.'라고 외치면 안에서 대 답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오고, 창기들이 황급히 뛰어나 와 하나씩 끌고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 는 것처럼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창기도, 아이도, 심지어는 유객들까지도 그들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모충국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런가?" 조남성이 쓰게 웃었다. "제 얼굴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포두라는 것을……." 일반 백성들에게도 관리, 특히 포쾌들은 무서운데 창기들과 그들을 찾는 유객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피하는 걸음이 늦 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인데 감히 누가 포쾌의 소매를 잡아 끌 것인가! 모충국은 그런 사정을 듣고는 쓰게 웃었다. "그런 걸 모르고……! 오늘은 얼굴만 알린 셈이 됐군!" 탐문 수사가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다음에 혼자 와도 포두와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경계할 것 아닌가 말이다. 모충국은 돌아서 버렸다. "오늘은 그냥 가세! 다른 방법으로 조사를 해봐야겠군." 조남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내일은 포쾌들을 풀어서 창기들을 족쳐 보겠……!" 조남성은 말을 맺지 못했다. 모충국이 갑자기 손을 돌려 그에 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고 아무런 기색 없이 걸으면서 모 충국이 신호를 보낸 이유를 찾았다. 뭔가 낌새를 알아차렸기 때 문이 아니면 달리 그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은밀히 수상한 자를 찾았지만 별반 보이지 않았다. 모충국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는 돌아서서 방금 그들을 지 나쳐서 저만치 가고 있는 사내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중년 문사 하나와 장한 두 명이었다. 그 중 하나는 무얼 넣었 는지 커다란 포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모충국은 그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조남성이 물었다.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라도 찾으셨습니까?"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냄새가 나." "냄새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아침에 맡았던 냄새……! 모충국의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모산(茅山), 귀왕곡(鬼王谷), 귀영동부(鬼影洞府). 그는 어두운 석실의 중앙에 서서 긴 서한(書翰)한 통을 읽고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되는 것인지 서한은 양피지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아직은 새것이었다.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내가 전에도 일렀으니, 욺지 않은 방식으로 구한 것은 더욱 그러하리라. 사부는 실제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배운 것이 그것이요, 대 대로 전해진 전통이라 어쩌지는 못했지만 사부는 도둑의 업(業) 이 사문의 전통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부귀와 영화는 봄동산에 꿈이요, 백년장수도 아침의 안개 에 불과하니……. 욺게 사는 것만 못하다. '여기서 이런 글을 다시 읽게 되다니……!' 야광충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서 야유신 예충이 사문의 근 원지(根源地)인 귀영동부(鬼影洞府), 장보고(藏寶庫)에 남겨 놓 은 서한을 읽고 있었다. 칠백 년, 십오대(十五代)를 내려오며 모았던 기진이보(奇珍異寶) 대신에 남겨진 한 장의 서한이었다. --여기 모였던 옳지 않은 재물은 합당한 방법으로 세상에 돌 려보내려니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억길 것이요, 새로이 쌓을 것은 후손의 몫이라. 서한의 맨 끝 귀퉁이에는 '귀영문 제십오대 장령(掌領), 야유 신 예충 서(書)'라고 씌여 있었다. 야광충은 서한을 조심스럽게 감아 원래 그것이 있던 자리인 석실 중앙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 넓고 통풍도 잘되 는 석실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황룡을 여기 데려다 놓을 걸 그랬군!' 그는 보물이 없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고 있 었다. 애초에 거기에는 관심도 없었다. 단지 사문의 근원을 찾아본다는 기분으로 온 길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올 때도 급한 생각 없이 낮에는 마차에 실린 관 속에 누워서 오고, 밤에는 머무는 곳 주변의 픗물도 구경하며 오느라 하루 거리를 사흘이나 걸려 왔다. 모산 경계에 들어와서는 귀왕곡을 찾느라 다시 이틀이 걸렸던 것이다. '대충 사나흘'이라며 온 여정이 그래서 벌써 오 일이나 지났 다. 돌아가야 할 때였다. 내일은 할 일도 있다. 그때 그의 눈에 석실 구석의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는 그곳 으로 가 보았다. 야광충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마치 오랫동안 만졌던 것처럼 극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활! 한 자루 활과 전통(箭筒)에 담겨진 십여 개의 화살이었다. 활은 시위가 메겨져 있지 않아 마치 쇠꼬챙이에 실 한 가닥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엿다. 검은 광채가 은은히 흐르는 쭉 뻗 은 쇠꼬챙이. 야광충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부가 당년에 여양왕부(汝陽王府)에서 쿠빌라이[忽必 烈] 때부터 전해 오던 묵궁(墨弓)을 들고 나올 때…… 사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랑하곤 했었다. --사실 그 물건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 귀영문의 전통상 해본 일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생애 한번은 구해 서 조사동(祖師洞)에 보관하는 것이 전통이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그런 물건에 탐을 낼 필요는 없었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흡족해 했었다. 수십 번 듣고, 수십 번 하신 그 이야기……. --나는 대낮에 여러 시종들을 거느리고 여양왕부로 갔었다. 한족(漢族)의 부호(富豪) 행세를 하며 은자를 뿌렸더니 위사(衛 使) 놈들이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맞이하더구나. 교자(轎 子) 에서 내려 여양왕 타반테무르(察罕特穆爾)의 이름을 부르면 서 내전(內殿)까지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 실 그가 황궁으로 들어간 때를 노려 갔던 거지. 유유히 여양왕 의 서재에 들어가서 아흡 자[尺] 길이의 거궁(巨弓)을 감주지도 않고 들고 나왔지. 하하하하하--! 사부는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는 항상 통쾌한 웃음을 터뜨 렸었다. 야광충은 활을 들어 보았다. 아흡 자 길이라는 것이 과장은 아니었다. 검게 라나는 그 쇠꼬챙이는 분명 아흡 자가 넘어 날 만 있었으면 장창(長槍)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장창……. 그는 그 쇠꼬챙이의 한 끝을 바닥에 대고, 다른 한 끝을 위에 서 아래로 잡아당겨 활을 구부리며 시위를 걸어 보려 했다. 지지직! 야광충의 표정이 희미하게 변했다. 쇠꼬챙이의 강도(强度)는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꿈쩍도 않더니 내공을 쓰자 이번에는 구부러지지는 않고 석실바닥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야광충은 방법을 고쳐 활을 들어올린 채 한펀 으로 시위를 당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눌렀다. 영 불편 한 자세였지만 심후한 내공으로 억지로 구부렸다. 시위도 강철 못지않게 단단한 오양이었다. 궁신(弓身)이 천천 히 휘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시위가 끝의 오목한 부분에 걸렸 다. 그제서야 활은 둥글게 휘어졌다. 그러나 궁신의 중간 부분, 줌통(;손으로 잡는 곳)은 양쪽 끝 과는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휘어졌다. 활은 전체적으로는 중심을 지나면서 앞으로 불룩 나왔다가 다시 뒤로 *!어지는 갈매기 모 양, 즉 복합궁(複合弓)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야광충은 그 시위의 절피(;화살 꽂는 곳) 부분을 잡고 당기다 가 눈살을 찌푸렸다. 활의 힘이 워낙 강해서 시위를 당기는 데 에도 내공을 운용해야 했던 것이다. 이래서야 누가 활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어지간한 고수는 시위도 당기지 못할 활을……! 그는 시위를 풀고 활을 다시 석실 구석에 두려다가 멈칫했다. 활을 쓰기에 직당한 사람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활이 있던 곳에 같이 있는 전통과 화살,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손가락 아래마디에 끼우는 각지(角指)까지 챙겨서 들었다. 석실은 이제 정말 서신 한 장만 남겨 두고 비어 버리는 것이 다. 다음대의 귀영문 후예가 이 석실을 다시 채우기 전에는……. 야광충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석실을 나섰다. 돌아갈 때였다. * * * 구지가. 구지가의 남쪽 끝, 구(舊)거리와 맞닿은 곳에 창고로 쓰이는 큼직한 목조 건물이 몇 채 있었다. 예전에 이 거리가 번창해서 훙청거릴 때에는 상인들이 물건을 쌓아 두는 곳으로 쓰였던 곳, 이제는 낡고 퇴락해 집없는 거지 들이 이슬을 피하기 위해 찾아 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 쓸 만한 한 채에 집도 절도 없이 배에 인생을 걸고 사는 선상민(船上民)들이 홅 냄새가 그시울 때면 찾아들어 술자리를 벌이는 곳이 있었다. 운하와 맞닿아 있어 배를 건물의 바로 앞에 정박해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된 곳이었다. 그 건물의 문이 지금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콰앙! 낡고 퇴락했어도 문만은 아직 튼튼했던 모양이었다. 두터운 나무문은 건물 주변에 뒹구는 기둥을 여럿이 들고 여러 차례 부 딪쳐서야 굉음을 울리며 떨어졌다. 슈슈승! 넘어지는 문짝 너머로 백색섬광 수십 줄기가 뻗어 나왔다. 기둥을 들었던 자들이 문짝이 넘어감과 동시에 기둥을 내던지 고 옆으로 구르지 않았으면, 그들에게 고스란히 격중되었을 빛 줄기들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창고 안에서도, 밖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쥐죽은듯 고요한 순간이 흐른 뒤에 창고의 입구, 떨어져 나간 문이 있던 자리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슴푸레 보이는 그림자 머리 부분에 높은 사각모자의 모습이 있고, 소매 그림자가 마당을 쓸 정도인 것으로 보아서 문사의 복장을 한 자였다. 그는 안에서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빛 줄기, 수십 자루의 비 수들이 두렵지도 않은지 문 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창고 안을 들 여다보았다. 불빛 한 점 없는 창고 안은 어두웠다. 문가에 서 있는 문사의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문사가 갑자기 말했다. "불!" 그 말과 동시에 문사의 좌우에서 횃불이 타올랐다. 한 순간 주위가 환해지고, 그 빛 속에 문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얀 얼굴, 가는 수염, 청수한 인상의 중년 문사, 바로 진운이 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두 손을 들어 포권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갑자기 찾아 들어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진운은 창고 안에 스며드는 불라으로 희미한 몇 개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는 맞잡은 두 손을 높이 쳐들 고 이리저리 절하며 계속 말했다. "소생 이번에 새로 문을 연 흑수당(黑手堂)의 심부름올 하는 '지사생(地四生)'이라 하오.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 는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늦게나마 이렇게 능파당의 여러분 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요……!" 대담하다고 할까, 아니면 유들유들하다고나 할까? 진운의 태 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불을 밝혀라!"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창고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벽을 따라서 십여 개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진운은 그제서야 자세히 안을 볼 수가 있었다. 창고 안에는 상상외로 사람이 많았다. 창고의 안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사람이 한 줄에 열 명은 되어 보이는데 양쪽으로 서 있으니 스무 명, 게다가 각각의 줄 이 삼 열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양쪽 옆으로 늘어서 있는 사람 만 예순 명인 것이다. 좁을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은 도열해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절도가 있어 선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기 때 문이었다. 그 양쪽 줄의 중앙 정면, 나갈히 놓여진 세 개의 의자 중 가 장 오른쪽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몸을 일으켜 진운을 향해 포권 했다. 역시 절도있는 동작이었다. '이미 알고 오셨는데 대접이 소흘해서 죄송스럽소. 능파당 제 삼당주(第三堂主) 호연각(胡連珏)연이 대표로 사과드리오." 진운이 빙글빙글 웃었다. 웃을 때가 전혀 아넌데 웃는 것이 다. 이런 경우 당연히 비웃음일 텐데, 묘하게도 비웃는다는 느 낌이 들지 않았다. "사과는 소생이 해야지요. 갑자기 찾아오느라 예물도 제대로 준비를 못했소. 대신……." 그는 옆으로 손을 들었다. 불라 속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는 큰 술 항아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간단하나마 술을 준비했으니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소."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큰 광주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먼저 나타난 사나이와 그가 천천히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 *. 제사 지낼 때 하둣이 팔을 꼿꼿이 펴서 두 손에 든 것을 내 민 자세였다. 암습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양쪽으로 도열한 사내들--하나같이 사공 복장이었다.--이 숲처럼 늘어선 그 가운데를 두려움없이 걸어가는 두 사내였다. 중간쯤 갔을 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순간, 열 중앙에서 두 사내가 한걸음씩 나와 칼을 휘둘렀다. 광주리와 항아리를 들고 가던 두 사내의 목이 그 자세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두 개의 둥근 물체가 허공에 떴다가 가라앉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바닥에 뿌려졌다. 두 사내의 몸은 그때까지 그대로 서 있다가 손에 든 물건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넘어갔다. 팍! 항아리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향긋한 술 향기가 창고 안에 가득 퍼졌다. 광주리가 구르고, 그 안에서 작은 술잔 수십 개가 굴러 나왔다. 그 위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저런!" 진운이 인상을 썼다. "물건도 제대로 못 들고 가서 넘어지다니……! 여벌을 준비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그의 옆에 다시 두 사내가 나타났다. 방금의 두 사람과 똑같 은 복장에 똑같은 물건을 들고 있었다. 진운이 포권했다. "실례를 했소이다. 다시 예물드릴 기회를……!" 두 사내가 아까의 두 사내와 똑같은 자세로 걸어나갔다. 그들 의 표정에도 두려움은 없었다. 기묘한 의식을 치르둣 걷는 두 사내, 그의 앞에 뿌려진 피와 창고에 감도는 술 향기. 이 모든 것이 창고 안을 이상하게 살풍 경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앞의 두 시체가 쓰러진 곳에 거의 다다 랐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다. 두 사내가 다시 나서고, 칼라이 번뜩였다. 그때. 다른 소리가 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만!" 칼을 든 두 사내가 번개처럼 칼을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창고 안에는 한 사람이 늘어났다. 그는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는 진운도 그가 없는 줄 알았 다. 그가 나타나자, 장내의 주의는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진운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계산대로 그가 나타난 것 이다. 정면의 세 사람 뒤쪽에서 걸어나온 그는 노인이었다. 그가 움직 일 때에야 진운은 그가 원래 벽에 기대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개 능파당의 우두머리 정도가 저렇게 고수라?' 진우은 찬바람을 들이마신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예상하고 준비해 왔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찬바람을 마신 사람은 진운만이 아니었다. 비스듬히 창고를 들여다보는 위치에 엎드려 있던 한 사람도 같은 시간에 그런 기 분을 느껴야 했다. 모충국이었다. 그는 새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경악성을 내뱉을 뻔했다. '당노구!' 그랬다. 노인은 바로 오늘 아침 그를 태워다 쭌 늙은 사공 당노구였 다. 모충국은 흑수당이라는 단체의 지사생이라는 자와 능파당의 당노구가 하나같이 녹록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더욱 놀랐다. 이건 도저히 양주부라는 일개 지역을 무대로 밥그릇을 다투는 조무래기들의 기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노구는 바닥에 뒹구는 목을 보며 나직하게 한탄했다. "죄를 졌구나! 이 노필부(老匹夫)가 아이들을 잘못 가르쳤어 이 아까운 술을 쏟게 하다니!" 진운이 손을 저었다. "술을 쏟은 것은 큰 죄이긴 하나 양자 모두의 잘못이니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려니와, 잔을 덜 준비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외다. 소생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졌군요." 호연각이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광주리의 잔을 세어 보았 *. 장한이 든 팡주리에는 분명 잔 예순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극도로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대당주(大堂主) 당노구를 제외하면 그들 능파당의 인원은 정 확하게 예순세 명이었던 것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오늘의 모임을?'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잔을 바닥에 눙고 채우자 더도 덜도 아 니고 정확히 예순세 개의 잔을 채우고는 항아리가 비었다는 것 이었다. 흑수당은 술의 양까지 맞춰 온 젓이다. 당노구가 고개를 저엇다. "이 노필부는 몸이 약해져 연전에 술을 끊었으니, 손님은 정 확하게 준비해 오신 것이오. 놀랍소, 놀라위." 놀라워.진운은 고개를 저었다. "대취옹(大醉翁) 당노선생(唐老先生)이 술을 끊으셨다면 삼척 동자도 웃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로해 주시는 뜻은 감사하오나 오늘의 자리는 제 소흘한 준비로 제대로 되기어려우니 차후 다시 준비해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그만 무색하게 물러갈까 합니다." 대취옹 당노선생. 당노구가 진정 그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각이나 진운보다도 반 세대 전의 인물로 올해 구십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흑도 십대고수 중 하나로 손꼽혔던 인물. 크게 취 해 휘두르는 낚싯대 앞에 적수가 드물었다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능파당의 대당주였던 것이다. 대취옹 당노선생이라 불린 노인의 주름살이 한 순간 더욱 깊 어졌다. 예순세 명을 세서 준비해 온 사람들이, 근 삼십여 년 양주부 의 사공으로 숨어 산 그의 별호까지 아는 자들이 숫자를 잘못 세었을까? 애초의 각본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밖에는 볼 수 가 없는 것이다. '이번 싸움은 생애 최악의 것이 되겠구나! 잔인하고 과감한 데다가 교활하기까지 한 적을 만났으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노필부의 얼굴에 똥칠은 말아 주시길, 이대로 돌아가시면 강호에 노필부가 늙어 꼬부라지더니 이젠 손님 대접 도 못한다고 소문이 나지 않겠소?" 그러나 진운은 이미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 있었다. 영락없 옷자락을 털고 돌아갈 기세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섰다. "큰일올 한 순간 소흘함으로 망쳤으니 이대로 돌아가서 당주 께 죄를 청하는 것이 제 의무, 하나 한 가지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을 드린다면……." 그는 바닥에 구르는 시체를 가리켰다. "술을 나르다가 넘어져서 기절한 멍청한 수하들을 챙겨 가서 교훈을 내려 주도록 허여(許輿)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분명히 목이 떨어져 뒹구는데도 기절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노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운이 다시 말했다. "실례를 거듭하는 보상으로 한 가지를 드리고 가지요." 황구가 불라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 짊어진 보따리가 강조되어 보였다. "오늘 강에서 주운 보잘것없는 것입니다만 싫다 말고 받아 주 시길……!" 보따리가 내려져 풀렸다. 그 안에서 기괴한 물건이 나왔다. 마치 너무 삶아 물러진 돼 지고기처럼 보이는 고깃덩어리. 아침에 모충국이 봤고, 당노구 가 봤으며 황칠이 봤다가 결국 진운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왔던 그 시신이 삶아져서 억기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당노선생의 눈이 감겨졌다 할 정도로 가늘게 뜨여졌다. 패배 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 눈가에 스쳤다. 그들은 철저할 정도로 적에게 간파당하고 있는 것이다. 열흘 전 그들이 죽여 던진 시 체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다니! 그는 무감동하게 중얼거렸다.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이다. 귀한 선물에 감사드리오. 일 간 귀 당주께 사례를 하고 싶소만?" 진운이 활짝 웃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기뻐해 주니 즐겁기 그지없다는 태도였다. "잘되었습니다. 그러잖아도 내일 밤 이 시간에 폐당주께서 찾 아뵈어도 좋을지를 여쭈어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당노선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감사한 일이지요, 감사한……!" * * * 모산(茅山), "이게…… 뭔가요?" 혹웅은 야광충이 내민 물건을 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화살과 전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활은 어디 가고 웬 철봉을 주는 것일까, 하는 표정이었다. 야광충은 그 철봉을 구부려 시위를 거는 시늉을 해 보이고 다 시 흑응에게 던져 주었다. 그것이 대답 대신이었다. 혹웅은 알았다는 표정이 되어 철봉을 구부려 보았다. 꿈쩍도 않는다. 그는 안색이 돌변해서 멍청히 철봉을 쳐다보더니 이번 에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구부렷다. 천생의 신력인지 영약의 기운인지는 몰라도 괴력을 지닌 그에게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활이 구부러지고, 시위가 걸렸다. 흑웅은 그 시위를 당겨 허 공을 향해 빈 활을 쏴 보더니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흡 자의 철봉은 활 모양을 갖추어도 일곱 자 길이를 유지하 고 있엇다. 보통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큰 대궁(大弓)이었다. 그러나 팔 척 장신의 흑응이 들자 그것은 그냥 적당한 크기였 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무게도 엄청나게 나갔는데 그는 공력 을 운기할 필요 없이 한 손에 들고 다루고 있었다. 야광충은 화살을 하나 빼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흑웅이 그것을 받아 시위에 걸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 무엇을 쏠까 망실이는 모양이었다. 때는 밤, 사위는 어둠에 둘러져 있고, 멀리서 들려 오는 승냥 이 울음소리 외에는 적막한 그대로의 밤이었다. 야광충이 손을 들어 건너편 산봉을 가리켰다. 거기 중턱쯤에 하얀 바위 하나가 희끗하게 드러나 있었다. 흑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출 수 없다는 것보다는 화살이 거기까지 날아갈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겨우 이백 장 정도인데 그것도 못 맞추면 어디다 쓰랴? 그냥 버려 버려라!" 야광층이 냉랭하게 말했다. 흑웅의 서툰 한어 실력으로는 그 말뜻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냉랭한 어조는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는 심각한 빛으로 고개 를 끄덕이고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무릎을 구부렸다. 활이 너무 커서 그냥 버티고 서서는 끝까지 당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위가 당겨졌다. 거대한 활이 천천히 휘어져 반타원을 그렸다. 쉬우우우! 여섯 자 길이의 화살이 활을 떠났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화살은 흔적도 없이 날고 있었다. 그러나 야광충도 혹웅도 그 궤적을 볼 수 있었다. 야광중은 화살의 실체를, 흑웅은 그 느낌을 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야광충이 말했다. "잘했다!" 혹웅이 홍분된 빛으로 고개를 Jl덕였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살은 목표물에 훌륭하게 격중되었던 것이다. "정……말, 좋은 활…… 입니다." 흑웅이 서툰 한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활이 그에게 어울리 는 만큼 그도 활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야광충은 마차에 올랐다. "그만 가자! 내일 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양주성에 있어야 한 다." 그러나 흑웅은 다른 할 일이 있었나 보다. 머리를 긁으며 더 듬거리더니 쿵쿵거리며 달려 숲으로 사라졌다. "저…… 자, 잠깐……." 야광충은 마차의 문가에 기대어 앉아 흑웅을 기다렸다. 어디 로 갔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제 양주로 돌아가서 할 일을 찬찬히 생각해 보고 있었다. 애초에 양주로 온 것은 왜였던가? 여기 양주 인근에 사문의 근원지가 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은……, 그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또 하나의 이유, 그것은 사형인 주개 의 말이었다. --사부님의 말씀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 단 한 가지 얘기 하지 않은 것은 네 진짜 부모님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 였다.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날 너를 주운 후 길을 떠나며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 마차가 대도(大都;북경) 에서 강남으로 낙향하는 모(毛)씨 성을 가진 관리의 이삿짐 행렬이었 다고……! 강남(江南)……! 막연한 말이었다. 말뜻 그대로라면 장강이남(長江以南)을 말하는 것이니 강소, 안휘, 사천의 아래 부분들과 그 이남의 호남, 복건, 절강, 강 서, 광동에 심지어 귀주와 운남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 강 남 지역이 된다. 그러나 흔히 일컫는 넓은 의미의 강남, 즉 진령(秦嶺)의 여맥 인 복우산(伏牛山) , 동백산(桐栢山), 대별산(大別山)과 남령산 맥(南嶺山脈) 사이의 이른바 화중 지역(華中地域)을 강남이라고 본다면 범위는 비교적 좁아진다. 호남, 강서, 절강의 전부, 안휘, 강소 두 개 성의 중남부, 하 남성의 남쪽 변두리 및 광동, 복건 두 개 성의 북부가 여기 포 함되는 것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의 강남이라는 말은 서쪽의 무릉산맥(武陵 山脈)으로부터 동쪽의 무이산맥(武夷山脈)까지인데 호남, 강서, 절강 전부와 강소성의 남쪽 부분이 그것이다. 그래도 적잖이 넓은 이 지역에서 모씨 성을 가진 전직 관리라 는 것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찾을 것인가? 그보다 더 고민스러운 것은 찾을 필요가 있기나 한 것인가 하 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지도 모를 사람들을, 이제는 죽은 줄 알고 새로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들을 찾아서 어쩔 것인가? 문득 야광충은 그들이 살아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피식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찾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혹웅이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화 살이 들려 있었다. 아까 쏘아 보냈던 그 화살이었다, '몇 대 더 만들어야 겠군!' 야광충은 상념을 잘라 버리고 마차에 올랐다. 길은 하루가 꼬박 걸릴 거리, 약속은 내일이었다. * * * 단자가(緞子街). 단자가는 비단천을 판매하는 단자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꽃처럼 화려하고, 금잉어처럼 알록달록한 비단천이 아 름다움을 자랑하는 상가의 뒤편에 천을 짜고, 염색하는 수공업 자들의 칙칙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단자포가 빛이라면 그곳은 어둠, 단자포가 밝은 태양 아래 드 러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음습한 그늘과 같은 곳이었다. 비단천을 만들려면 먼저 실을 뽑아야 한다. 그 공정(工程)이라는 것이 끓는 물위에 놓인 누에고치에서 비 단실을 뽑는 것이다. 증기를 쐬면 실이 부스러지지 않기 때문이 었다. 대부분의 일을 여자들이 하는데 거기 있는 여자들은 팔려 오 거나 때론 납치되어 오기도 했다 몇 년 동안 그 일을 하다 보면 손가락이 부어 오르다가 나중 에는 뭉개지고, 떨어져 나가 버린다. 쓸모없어져 주인이 그들을 내쫓으면 그녀들은 거지가 될 수밖 에 없었다. 그들은 다원이나 창가에서 써 주지도 않았다. 증기 가 가득한 탁한 방구석에서 몇 년 동안 일하느라고 얼굴이고 몸 이고 다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고 쇠사슬로 묶어 놓고 강제 로 한 방에서 먹고 자게 하기도 했다. 한번 채우면 쫓아낼 때 까지, 흑은 죽음이 그녀들을 해방시켜 줄 때까지 풀 수 없는 쇠 사슬이었다. 그런 어두운 공간 구석에 지금 몇몇 사내가 모여 있었다. 한 사내의 손이 불빛 아래 내밀어져 선을 그렸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확증할 수 없다. 지금 생각 하면 아까운 노릇이지만 그가 떠날 때까지는 그가 바로 흑수당 의 당주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단지 진강부를 거쳐서 남쪽으 로 갔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도 소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통천방의 외삼당주(外三堂主)께서는 그가 오산으로 갔다고 하시 지만……!" 그의 눈이 방구석에 흘로 앉은 노도사, 생사복 구련자를 힐끗 보았다. 비웃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불확실한 말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때 구련자가 코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사내는 신경 쓰 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남쪽에서 양주부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 즉 여 기 백강(伯江) 나루에서 그를 기다린다." 거친 목소리가 물었다. "몇이나 나갑니까?" 음침한 목소리가 말했다. "형제들이 다 나갈 필요는 없겠지요? 듣자니 단 둘이라는데." 비교적 젊은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고 말했다. "저 혼자 가서 끝내고 오겠습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까지 동원할 필요야……!" 차가운 목소리가 그 말을 끊었다. "다 나간다!" 한꺼번에 몇 가지 목소리가 반문했다. "예?"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잘라 말했다. "다 나간다!" 불만스러운 기색들이었지만 다른 목소리들은 반론을 내세우지 못했다. 처음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던 자가 말했다. "우선 그가 지금 양주부에서 가장 위험한 자라는 이유, 둘째로 장락방의 경우를 보았을 때 상당한 고수가 그의 곁에 있다는 이 유에서 그런 결정이 난 것이다. 그를 죽이고 나면 기우(杞憂)였 다고 웃어 줄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청부금의 액수를 생각할 때 조금의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회의는 끝났다. 하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생사복의 손가락이 바닥에 죽을 '사(死)' 자를 몇 번이고 쓰고 있었다. * * * 유항경자가. 밤이 깊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홍청거렸다. 춤추듯 흔들리는 붉은 등불들, 그 아래 서 있는 하얀 얼굴의 기녀들, 물결처럼 흘러가는 유객들……. 그 사이로 모충국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무슨 고민이 라도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남성이 말없이 따라오다가 물었다. "무얼 걱정하고 계십니까? 부임 첫날 범인의 윤곽을 잡았는데 말입니다." "윤곽? 자넨 내가 윤곽을 잡았다고 보는가?" "아닙니까? 이름도 알아내었지 않습니까?" "나는……." 모충국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도 없이 검푸른 밤하 늘에 검은 구름 한 조각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 한걸음을 내디뎠지만 벌써 걱정이 되네." 대취옹 당노선생이라면 무림에서 무시당할 위치의 인물은 아 니다. 그런 인물을 아이 데리고 놀 둣하는 지사생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굴까? 그보다 그가 방금 보았던 그들의 일 처리 방법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주원인이었다. 도대체 어떤 보상을 제시해야 수하로 하여금 눈도 꿈쩍 않고 죽음을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조남성이 입을 열었다. "내일 드디어 우두머리까지 한 손에 잡아 버릴 수 있겠군요! 전 포쾌들을 동원해서……!" "포쾌들이라……. 자네는 포쾌들로 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 이라고 평가했나?" 조남성이 주줌했다. "그럼 진강부(鎭江府)로 지원 요청을……?" "아니, 아니야!" 모충국은 생각에 잠겼다. "포쾌들은 말고 쓸 만한 인물들을 찾아보세나……!" 그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검은 구름이 점점 커지며 밤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 구름이 손처럼 뻗어 나가는 것 같아 그는 문 득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흑수당이라……! 검은 손? 그게 어디까지 뻗을지……!" < 제1권 끝 > 제 2 부 제 2 권 뜨 거 운 밤[夜] 편 제33장 7월 2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제34장 같은 날 오후 제35장 그날 밤 제36장 7월 3일 제37장 그날 밤 제38장 7월 제39장 7월 11일 제40장 7월 12일 제33장 7월 2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모산(茅山)에서 소모산(小茅山)까지. 마차는 새벽 동이 트자 출발했다. 험준한 산길을 밤중에 달린 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모산에서 양주부까지 가는 길은 정각령(丁角嶺), 백면령(白免 嶺)을 거쳐 소모산(小茅山)에 당도한 다음 산을 돌아서 다시 고 자령(高資嶺)을 넘는 험한 길이었다. 고자령을 넘어서야 평평한 관도가 나온다. 그 관도를 따라서 진강부(鎭江府)에 진입해아 한다. 진강부에서 백강(伯江)을 건너면 양주부 경내(境內), 아마 도 착하면 늦은 땅거미가 깔릴 즈음일 것이다. 그때부터는 다시 원 래의 일에 돌아가게 된다. '우선은 양주, 그 다음은 강남!' 야광충은 마차 안에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된 검은 관 안에서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양주에 터를 내리기까지의 세부적인 계획은 거의 진운이 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은 미리 의도된 것은 아니었다. 돈도 없었고, 달리 갈 곳도 없던, 게다가 누가 봐도 수상할 그들 일행이 숨기 편한 곳을 찾자니 유항경자가의 후미진 구석 에 근거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부랑자, 수배자들이 숨어 드 는 을씨년스러운 빈민가였다. 거기서 그를 만났다. 좌검자(左劍子). 유항경자가의 떠돌이 늑대, 좌검자였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양주에 터를 잡는 작업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 * * 유항경자가. 그것은 물결치듯 걸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 머리맡으 로 초록색 도마뱀 한 마리가 벽을 타고 기어올라가 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멈추어 섰다. 움직일 때는 잔물결처럼 찰랑거리며 걷더니 일단 서자 바위처 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놈은 그렇게 멈추어 서서 정면을 주시하더니--어쩌면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놈은 사팔이처럼 눈을 따로따로 굴리고 있었다.--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들어 파리 한 마리를 삼키고 말았다. 역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눈알을 굴린 것은 기만 전술이었을까? 파리를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 '봐. 난 지금 다른 곳을 보고 있잖아.'라고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하찮은 미물도 사기를 치다니!' 그는 문득 불쾌해졌다. 그러나 곧 기분을 풀었다. '먹고 살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 가, 더구나 미물이!'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해할 수 있겠다는 마 음이 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정말 보고 싶어서 본 것이 아니었다.--광경에서 심오한 삶의 문제를 고민 하고 나니 그는 어쩐지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이떻게 편히 쉬지도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앉아서 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대니 누워 있 던 것 못지않게 편해졌다. '진작 앉아서 쉴걸!' 답답할 것 같아서 그는 눈은 감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사흘 간 눈꺼풀 안쪽은 실컷 보았던 그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눈을 감고 지냈으니 말이다. 이제는 뭔가 다른 것이 보고 싶었다. 짜증을 유발하거나 신경을 써서 봐야 할 것 말고 다른 무언가를! 눈꺼풀 안쪽은 나중에도 또 볼 기회가 있을 테니까. 어두운 방 한구석에는 변함없이 탁자가 있고, 나무로 대충 혀 은 의자가 있고, 요강 대신 쓰는 항아리가 있다. 자주 비우면 귀찮으니까 큰 것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나마 이제는 넘쳐서 흐르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남이 볼 때는 요강에 오줌을 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바닥에 그냥 오줌을 누는 효과였다. 그도 도마뱀처럼 기만 전술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양심상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그렇게라도 눈속임을 않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 어야 하니 말이다. 자신이 들어온 방이 사실은 즉간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고 어느 손님이 좋아할 것인가! 보고 있는 중에 탁자 밑에서 두 치(寸)는 되어 보이는 남경충 (南京蟲;바퀴벌레) 세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벽틈으로 사라졌다. 양주는 남경과 가까운 탓인지 유난히 남경충이 많았다. 그러 나 그것들을 보고 그의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쐐가 고플 때, 흑은 심심할 때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어 쭈는 그것들이 방엔 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녀었다. 그는 단지 조 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못 보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만한 크기라면 진작에 먹어 치웠을 텐데!' 머리가 맑아졌다. 좁지만 그만의 영역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돌아다닌다는 위기감이 흐릿한 정신을 일깨워 준 것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남경층들이 사라진 벽틈을 노려보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조해 하지 않았다. 시간은 넘칠 정도로 많았 고, 그에게는 끈기가 있었다. 이곳 유항경자가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시 간에 쫓겨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그의 최대의 무기였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더듬이들이 벽틈에서 나왔다. 그 더듬이 끝에 눈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그래서 무엇을 보려는 것처럼 그것들은 이리저리 움직였다. 놈들은 무척 시력이 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침 상에 자신들을 노리는 한 마리 늑대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 았을 것이다. 천천히 한 마리씩 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침을 삼켰다. 제일 큰 놈은 분명 두 치 세 푼은 되어 보였고, 나머지 두 놈 도 두 치에서 약간밖에 안 모자란 놈들이었다. 그리고 세 마리 다 통통하게 살찐 놈들이었다. '음, 자세히 보니 낯익은 놈들이군!' 그는 그놈들이 달포 전에 보고선 너무 작아서 잡아먹지 않은 놈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남경충은 벌레 중에도 대단히 빠른 것들에 속한다. 게다가 대 단히 뛰어난 반사신경을 가지고 있다. 불이 밝혀지면 순간적으 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놈들이 무공을 배웠다면 아마 대단한 검도 고수들이 되 었을 것이다. 그는 그놈들과 자신이 묘하게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어둡고 음침하며, 습기 차고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것부터 필요없을 정 도의 반사신경에 끈질긴 생명력까지! '나도 이름을 남경충(南京蟲)으로 고쳐 볼까? 당주도 벌레인 데! 그래도 야광충보단 남경충이 나은 이름 아닌가!' 머리 한구석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놈들은 점점 더 방 중앙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한 순간 밝아졌다.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속도로, 그리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 은 적절한 거리! 힘은 필요없다!' 이제는 떠나 온 사문의 검법구결을 떠올리며 그의 몸이 번개 처럼 움직였다가 멈추었다. 원래의 자세 그대로 침상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 다른 것은 왼손 손가락 사이로 삐져 나와 꿈틀거리는 몇 개의 더듬이뿐이었다. 짧은 순간에 그의 몸은 침상을 내려가 남경충들을 낚아채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가고, 입이 벌어졌다. 손에 든 것들 이 곧 이빨에 씹히는 비릿한 맛, 그 다음엔 혀끝에 감도는 고소 한 맛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 그의 손이 멈추었다.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표 정이었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커지고, 그 소리는 방문 앞에서 멎었 다.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일(玄一) 형님 계십니까? 접니다, 황삼(黃三)!"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번도 찾아오는 사람을 반간게 맞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일까? 찾아온 사람도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에서 아 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서 있더니 벽을 짚고 더듬더듬 옆으로 걸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뭐하십니까? 불이라도 밝히시지 않고서!"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낮이 오면 지붕을 뚫 고 들어오는 빛이라도 있는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황삼녀석은 올 때마다 어둡다고 불평이었다. 눈을 떴을 때보다 감았을 때가 더 많은 사람이 불은 왜 밝힌 단 말이냐. 등불이 밝혀졌다. 비쩍 마른 체구의 황삼과, 그보다 더 마른 현일, 유항경자가 의 떠돌이 늑대 좌검자의 모습이 불빛 속에 드러났다. 깜박이는 등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누렇고 냉혹해 보였다. 주림과 질병으로 뺨이 움푹 패인 것처럼 눈 아래쪽은 온통 그림 자가 졌다. 횐자위에 시뻘건 쑈발이 선 그의 눈은 황삼을 향해 공허한 시 선을 던지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어두움이 그 눈과 머리 안에 자리 하고 있는 것 같아 황삼은 몸을 떨었다. 볼 때마다 가슴을 찌르 는 깊은 절망감의 정체를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기분 나쁜 감정을 떨쳐 버리려 급히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지삼야가 모셔 오라고 해서!" 좌검자는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러면서 그는 황삼이 보지 않게 손을 괴서 남경충들을 놓아 주고 있었다. 살려 두면 나중에라도 타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맛있 는 것은 혼자서 몰래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다. 혹시 같이 먹자 고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황삼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렇게 찌든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앉은 그의 벌거벗은 상 반신에는 갈비뼈가 앙상하게 튀어나와 눈으로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유쾌하지 않은 적막이 방안을 감돌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무것에도 부딪치지 않고 헛되이 공중에 흩어지는 둣한 허탈감. 황삼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모두 모여 있습니다. 회의가 있다고!" "당주는?" 높낮이가 없는 말을 들었올 때의 기분이 어떨까? 황삼이 지금 느끼는 기분이 그것이었다. 분명 사람과 말하지 만 그런 것 같지 않은 느낌. 그는 오래 전부터 좌검자를 알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매번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묘한 기분에 횝싸이게 되곤 했다. 머리를 저으며, 그는 대답했다. "못 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당주에 관해서는 추측이란 없다. 적어도 그 들 '황 자(化字)' 이하의 당원들에게는 그렇게 주지되어 있었다. 못 본 것은 못 본 것으로 끝나야지 섣부른 추측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좌검자가 느릿느릿 일어낫다. 일어나는 것도 싫고, 어딜 가는 것도 싫지만 하는 수 없이 간다는 태도였다. 황삼은 그렇게 그냥 문밖에 나서려는 좌검자를 불러 세욋다. "저, 이거!" 침상 아래 나뒹구는 낡은 웃옷이었다. 거친 베로 짜여졌고, 때가 묻어 꼬질꼬질한 데다가 오른쪽 소매는 중간쫌에서 묶여져 있다. 좌검자의 상의에는 적어도 오른쪽 손이 나올 구멍은 필요없었 다. 오른쪽 팔꿈치 바로 위에서부터는 둥구스름한 살뭉치였던 것이다. 외팔이. 좌검자는 외팔이였다. 그 하나 남은 왼쪽 손으로 검을 쓴다고 해서 좌검자인 것이다. 그 내력을 아는 자 아무도 없고, 그 본명을 아는 자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유항경자가에서 그를 모르는 자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자도 하나도 없엊다. 그것이 유항경자가의 떠돌이 늑대 좌검자였다. 좌검자는 아무 소리 없이 황삼이 건네주는 옷을 걸치고 다시 건네주는 장검 한 자루를 왼쪽 어깨 너머로 손잡이가 나오도록 메었다. 검집은 나무로 만들었고,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에 걸어 메기 편했다. 손잡이에는 아무 장식도 없이 그저 때에 절어 누리끼리한 천 만이 감겨 있었다. 길이는 세 자 두 치 정도. 길거리 대장간에 가면 동전 몇십 문으포 살 수 있는 싸구려 검임이 분명했다. 문이 열렸다. 좌검자는 사흘 만의 외출을 하고 있었다. "형제 셋이 죽었습니다." 황삼이 말했다. 내내 무심하게 걷고만 있던 좌검자가 그 말에 야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하나는 능파당 놈들의 손에 죽었고, 다른 둘도 역시 그렇습 니다만, 지사생 형님의 손에 죽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진배없다?" "무모한 명령을 내려서 반항도 못하고 그냥 칼을 받도록 만들 었습니다. "……?" 황삼은 어젯밤 구지가의 창고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했다. "그들은 당의 명령이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죽음을 받았습 니다. 그러나 그들이 꼭 죽어야 했습니까? 그냥 힘으로 밀어붙였 어도 될 일 아니었습니까? 지사생 형님은 그게 가장 적은 손실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었다고 했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황삼!" 황삼은 좌검자의 부르는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좌검자의 말 소리가 귓전에 스산하게 스쳤다. "형님의 말에 의흑을 품어 당을 깨자는 것이냐?'" 황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런! 소제는 전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그럼 다물어라! 다시 한번 그런 소리가 들리면 너부터 베겠다." 황삼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이 좌검자를 알고 있었다, 한번 말 해서 지키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 그것이 좌검자인 것이다. 거리는 대낮인데도 소란스러웠다. 운하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가고,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다원,과 주점들은 손님으로 북 적거렸다. 그런데도 좌검자와 황삼은 오가는 행인들과 어깨 한번 부딪치 지 않고 텅 빈 거리를 걷듯 걸어가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들의 앞으로는 행인들이 물살이 갈라지듯 비켜 서고 있었다. 짧은 바지에 허름한 상의는 노역꾼들의 일반적인 복장이니 이 상할 것이 없다고 해도, 좌검자는 분명히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차림새였다. 외팔이에 검을 멘 모습이 그렇고, 그의 몸을 감싸고 도는 이 상한 분위기가 그랬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어쩌다가 시선을 마주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곳을 보거나 딴전을 피웠다 그들은 무엇인가 를 두려워하는 둣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좌 검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골목을 돌아서 좌검자의 집이 있던 곳만큼이나 허름하고 지거분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 로 돌변했다. 햇살도 잘 들지 않는 음침한 골목, 며칠 전 내린 빗물이 아직 도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좁은 골목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아이 들이 뛰놀고. 간밤익 픽로가 풀리지 않은 창기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아이들이 먼저 보고 소리쳤다. "좌검자, 좌검자!" 겨우 걸음걸이를 하는 꼬맹이에서 제법 왈다리가 길어진 소년 들까지 좌검자에게 따라붙어 같이 걸었다. 좌검자의 초췌한 안색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을 지나쳐 걸었다. 창기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좌검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 는 아이들을 잡았다. "귀찮게 굴지 마, 바쁘신 분이야!" 좌검자는 그 들에게 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골목의 끝 으로 걸어갔다. 이 골목에서, 아니 유항경자가에서 좌검자라는 이름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멸문한 장락방의 행패가 극 (極)을 달릴 때에도 그가 나서면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다. 그래도 장락방이 다수인 데다가 그가 어지간한 일에는 참견을 않는 성격이라 서로 균형을 이루긴 했지만, 끝내 정신을 못차리 고 횡포를 부리던 그들이 결국 멸문을 당하게 하는 데에 그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장락방 대신 그들 흑수당이 여기 유항경자가의 창기들 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이 모두 좌검자의 영향력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도 당 연한 일이었다. 좌검자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문득 좌검자가 말했다. "내가 그에게 물어 보겠다." 여태 뚱한 표정이었던 황삼이 그 말에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씀드립니다만, 지사생 형님이 전횡(專 橫)을 않도록 못을 박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골목 끝에 선 초라한 목옥의 문을 열며 좌검자는 고개를 끄덕 였다. 황삼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만족한 얼 굴로 문밖에 주저앉았다. 이제 회의가 끝날 때까지 그는 거기 있을 것이다. 목옥 안에는 몇 명의 사내가 주사위를 굴리며 쌍륙(雙六)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좌검자가 들어와도 힐끗 쳐다만 볼 뿐 아 는 척도 않았다. 좌검자도 그들을 아는 척하지 않고 뒷문을 열었다. 좁은 마 당, 그 다음은 목옥, 사나이들, 뒷문, 다시 마당과 목옥이었다. 방안에는 이미 여덟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진운, 방각, 도신과 도귀, 백리극, 월몽영, 원도살과 중년의 사내였다. 그러나 좌검자는 방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또 한 사람이 있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등평이었다. 좌검자도 처음 흑수당에 가입할 때, 인사를 한 후 아직 한번 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중원에 들어온 이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실은 흑수당에 참여하기로 한 이후부터였다. 지옥성에서 자신이 했던 혈편복의 역할처럼 그는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정탐과 감시를 주임무로 삼고 있었다. 좌검자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진운이 손을 마주쳐 작은 소리 를 내었다. "이제 시작합시다." 그는 서론없이 바로 보고를 시작했다. "지난 보름간의 정리 작업을 통해서 우리 흑수당은 유항경자 가와 기루의 거의 전부를 장악했소. 유항경자가는 현일과 황삼 이, 그리고 고급기루는 지십이매(地十二妹)가 책임지고 있소." 그의 손이 좌검자와 지십이매라 불린 월몽영을 가리켰다. "또한 우리는 과거 순의방이 맡고 있던 영역을 대부분 장악했 소. 이 부분은 지삼야가 현이(玄二)의 도움을 받아서 관리하고 있소." 그의 손이 다시 지삼야, 방각과 현이라 불린 중년 사내를 가 리켰다. 순의방은 원래 상가의 보호를 맡고 있던 방파였다. 그러나 사실은 불량배나 도적들로부터 상가를 보호한다는 명 목으로 보호비를 갈취하고, 각 상가에서 일용직으로 쓰는 일꾼 들을 대 주고 소개료를 받아 챙기는 것이 순의방의 고유 영역이 었다. 그 일을 방각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이, 중년 사내의 도움이 없다면 순의방을 몰아내었다고 하 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이의 원래 이름은 정일(丁一), 원래 순의방의 영역 안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이었다. 운하를 타고 오가는 물품을 중간에서 거래해 주는 거간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의방의 횡포에 저항하다가 그 등살에 장사를 말아 먹고 거리에 나앉은 자였다. 장락방을 몰아내고 유항경자가를 장악한 흑수당에 순의방 축출을 제의한 장본인. 좌검자의 친구이기도 했다. 진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대도회는 지이옹(地二翁)께서 맡아 주고 계시오." 대도회는 소금 밀매자들의 조직, 군소 소금밀매자들을 규합해 서 대도회를 쓰러뜨리고 그 영역을 삼킨 사람은 지이옹이라 불 리는 원도살이었다. "이렇게 해서 양주부의 근간이 되는 세력 네 개 중 셋을 우리 가 관리하게 된 것이오. 거기에 수고해 주신 여러분의 노고에 당주를 대신해서 감사드리오." 양주부의 근간이 되는 세력이라는 것이 장락방, 순의방, 대도 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들이 여태 장악하고 있던 기원, 상가, 염상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들이 진정한 힘의 근원인 것이다. 그들 흑수당이 이 세 세력을 장악한 것은 단지 그들의 무력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들 혹수당의 독특한 체계에 있다고 해야 했다. 그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기 전에 먼저 그들 세력의 근저에 있 는 불만 세력, 이 경우 착취당하고 있는 계층을 먼저 혹수당의 당원으로 끌어들이고, 대신 이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급속히 세 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대도회가 중간에 갈취하던 막대한 이득들이 염상들 스스로에 게 돌아가고, 상가에서 폭리를 취하던 순의방이 없어졌다. 유항 경자가의 기원들도 이제는 장락방에게 보호비를 내지 않아도 되 었다. 흑수당은 애초에 열세 명에서 시작된 방파였고, 이득보다는 낯선 곳에서 자리잡기를 더 웡했던 인물들인 것이다. 야광충의 눈은 양주가 아니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 운하의 배들을 거머쥐고 있는 능파 당을 홉수하기만 하면 우리 흑수당은 양주부의 밤의 세력은 완 전히 장악한다고 볼 수 있소. 그게 오늘밤 이루어질 것이오. 진운은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완전히는 아니지." "응?" 진운이 금세 김샜다는 표정으로 좌검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가, 현일?" 좌검자가 귀찮다는 둣 짧게 말했다. "단자가, 양가장!" "……?" 진운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좌검자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정일이 설명챘다. "양주부의 가장 중요한 세력 두 개가 그것입니다. 단자가와 양가장이죠." 단자가는 포목을 거래하는 단자포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거기에는 염색을 하는 수공업자들도 포함이 되는데, 양주부의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양주부에서 최고의 소 득을 을리는 수공업은 염색업이었다. 그 단자포들의 배후에도 하나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 정일의 설명이었다. "단자가는 다른 어떤 방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 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세력을 무시해서는 곤란합니다. 장락 방 등의 삼류방파에 비해 오히려 월등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요. 그들을 갈취하는 혹도 세력이 없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양가장입니다." 양가장은 고금 제일부인 양유행의 부귀산장. 돈이면 저승사자도 움직인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해도 대부분 의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사실에 근접한 표현인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두 개의 힘 중 하나인 돈을 움켜쥔 그들 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진운이 약간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단자가는 자기들의 이득만 지킬 수 있으면 우리에게 위헙적 인 행동을 않을 자들이고, 양가장 역시 그렇기 때문에 계산에 넣지 않은 거요. 그리고 사실, 양가장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행위일 테니!" 진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양가장의 무게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양가장과는 될 수 있으면 충돌을 않는 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 한 나라와 싸울 수 는 없는 일이니까!" 양가장은 거의 한 나라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진운 의 분석이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원도살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가 말끝을 흐렸다. "아니, 관두지. 불확실한 일을 증거도 없이 말하고 싶진 않 군. 능파당 문제나 얘기해 보세!" 진운은 좌검자를 보았다. 좌검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흑은 아무 생각도 없는지 그저 공허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 었다. '저놈에 대해서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군! 저 정도 실력에 특치한 용모면 분명히 무림에 이름이 났을 텐데……?' 진운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요. 오늘의 만남은 원래 당주님이 가시기 전에 허락을 받아 놓은 것입니다만, 현재 전혀 연락이 되지 않으니 조금 문 제가 있소. 당주님이 안 오시면 대취옹과 책임있게 만날 사람이 없는지라!" 월몽영이 못마땅하다는 둣 툭 내뱉었다. "당주님이 없으면 그런 사소한 일 하나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인가? 대취옹이 당주님이 나서서 만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인 물인가?" "원래는!" 진운이 말했다. 그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진지해지는 것이 남자의 속성인 것이다. "당주님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오. 호연삼형제는 무명소졸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소. 대취옹, 대취옹 당노선생은 정말 의외 의 복병이었소. 그 사실을!" 그는 보이지 않는 등평이 거기 있기라도 한 듯이 천장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야께서 회합 직전에 파악해 주시는 덕분에 미리 알았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소. 거기 모인 자들의 숫자와 함께 말이오." 지구야, 등평은 원래 어제의 모임에는 관여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회합 직전에 진운이 보낸 지원 요청으로 달려 온 그가 능파당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술과 술잔은 그래서 그 자리에서 급히 구한 것이었다. 방각이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데, 어제의 지원 요청은 왜 한 것인 가?" "원래는 다른 일이 있었지만!" 진운은 구련자에 관한 일을 말해야 할까 잠깐 생각했다. 그리 고 말을 않기로 결정했다. "별일은 아니니 나중에 기회있을 때 말하기로 하지." 구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가괴자에게 한 사기 행각도 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어제의 일격은 큰 싸움 한판을 이긴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었소. 그 한판으로 그들은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오. 거기에 쐐기를 박아 완전히 우리 휘하에 들어오게 하려면 바로 당주가 계셔야 한다는 것이 소생의 소견이오. 대취옹을 죽이고 능파당을 부수는 것은 우리들만으로도 쉬운 일이지만 포셥한다 는 것은 당주가 나서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니 말이오. 원도살이 물었다. "그를 꼭 포섭해야 하나?" "꼭! 반드시! 그는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게 역이기( 其)가, 장비(張飛)에게 엄안(嚴安) 이 필요한 정도로 필요합니다." 월몽영이 물었다. "역이기? 엄안? 그게 무슨 소리?" 진운은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잘난 척을 했군요. 죄송하오. 역이기는 유방의 휘하 막 료(幕僚)였지요. 수레의 식(軾;앞턱 가로나무)에 기댄 채 세 치 의 혀를 휘둘러 제(齊)나라 칠십여 개의 성을 항복시켰다는 일 화로 유명하지요. 엄안은 유비가 파촉(巴蜀)을 정벌할 때, 장비 가 포섭한 파촉의 장수였소. 그가 효장서서 관문의 장수들을 항 복시켰기 때문에 장비가 아무 어려움 엎이 성도(成都)에 진격해 유비를 구해 내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죠." "그들과 대취옹이 무슨 관계?" 월몽영은 이상하게 진운을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직접 하기 않고 다른 곳을 보며 묻는 것이다. 직접 말을 하게 되면 나이로 보나 위치로 보나 존대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용상 분명히 진운에게 물은 것, 진운은 불쾌한 기색 없이 설명했다. "역이기와 엄안은 그들 자체로 중요했다기보다는 더 중요한 어떤 일을 성취하게 했기 때문에 중요한 자들이오. 역이기는 제 나라 칠십 개 성을, 엄안은 파촉을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지 요. 대취옹도 우리에게 그만한 것을 넘겨주게 될 것이오. 바로, 장강수로십팔타(長江水路十八舵)를! "장강수로십팔타?" "그렇소. 장강수로십팔타! 중원을 가로지르는 양자강 십팔만 리를 휘어잡고 있는 장강수로십괄타가 우리 손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대취옹은 역이기, 엄안의 역을 하게 될 것이오. 그가 우 리 흑수당에 넘어오는 그때부터 장강병탄(長江倂呑)의 대역사 (大役事)가 시작되는 것이죠!" 월몽영은 한동안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하여튼 여러모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게 우리 지금 세력으 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방각이 덧붙였다. "가능하다고 해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장강까지 집 어삼켜서 뭘 하겠어?" 진운이 눈을 껌벅거리며 그들을 보았다. 그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었다. "가능하냐고요? 물론 가능하죠. 당주, 황룡, 화영, 백리 장군 아니, 백리극, 혈문룡, 원도살, 좌검자 도신 도귀 등, 무림 역사 상 우리처럼 초절정고수들이 한 방파에 몰려 있는 경우가 있다 고 생각하시오? 아니, 있긴 있었죠. 과거 소림이 그랬고, 예전에 천산파와 마교(魔敎)가 그랬죠. 지금은 무당파와 우리가 그렇 고, 소림, 천산, 마교가 어땠습니까? 당시 천하에 그들의 이름을 듣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무당파는? 목하 무림의 중심이 되고 있소. 전무림이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단 말씀이오. 그럼 우리 흑수당은? 양주에만 있을 겁니까? 중 원 십팔만 리를 검은 손으로 움켜잡아 볼 생각은 없습니까?" 월몽영이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진운의 말이 더 빨랐다. 그는 손을 들어 월몽영의 말을 제지하고 열띤 어조 로 말했다. "흑도(黑道)의 본령(本領)이 뭡니까?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 하는 것? 약자를 돕고, 악한을 누르는 것? 무림인들을 모아서 친선도모를 위한 흑도백도(黑道白道) 연합무림대회(聯合武林大 會)라도 열까요?"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진운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는 좌검자의 표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보일 정도였다. "사람 사는 세상은 많은 생활권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오. 모종의 같은 테두리 안에서 사는 인간들은 그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며, 그 테두리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는 것이오. 그러니 다른 테두리에 사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고 으시대서도 안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못한다고 억울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오. 저마다 다른 삶의 방 법이 있으니 말이오." 월몽영이 입을 삐죽거렸다. 틀린 말 같지는 딴지만 어쩐지 궤 변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진운이 계속 말했다. "우리 흑도의 본령은 이득을 보는 것이오. 필요하다면 약탈을 하고, 살인을 하고, 위협을 해서라도 이득을 보아야 형제들을 먹여 살릴 것 아니오? 설마 무림인은 찬바람만 마시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이득을 보는 데 가장 합 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세력을 넓히는 것이오. 세력이 넓 어지면 사소한 약탈을 않아도 자연히 이득은 생기기 마련이니 말이외다." 원도살이 말을 막았다. "나도 도적단 두목이었네. 자네 말은 알겠으니 좀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 오늘 모임에 당주가 반드시 온다고 생각 은 하지만, 혹시 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서 준비를 하기로 하 지. 누가 나가면 되나?" "지이옹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현일, 또." 진운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백리극을 가리켰다. "지팔야(地八爺)께서도 수고해 주시겠소?" 백리극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못 가겠소." 진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중한 권고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지시나 다름없는 말이 었는데 거절을 당한 것이다. 그가 총사(總師)의 역할을 맡고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때 방안에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내가 대신 가지!" "아, 지구야! 그럼 됐소. 수하들도 몇몇 데려갈 텐데 우리가 많이 갈 필요는 없겠지요." 목소리의 임자는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등평이었다. "그럼 오늘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소!" 진운이 일어났다. 그때 좌검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 그의 공허한 눈이 진운을 향했다. 진운이 미소 지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뭔가 의문이라도?" 좌검자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둣 말했다. "꼭 필요한 일이었던가 묻고 싶소!" 진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는 이 좌검자라는 인물이 극도로 위험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바로는 좌검자의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광인(狂 人)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고집쟁이와 광인이었다. 고집쟁이는 잘못된 일이라도 끝까지 하려 하고, 광인은 무엇 이 잘못된 일인지 모른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들에게는 속임수 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운은 천천히 대답했다. "꼭 필요한 일이었네!" 좌검자의 초점없는 눈이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그 는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도 그런 일만 하기를 바라겠소." 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러도록 노력해 보지." 원도살은 백리극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주를 마중 나가려는 것인가? 예언자 말대로?"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러고 싶어져서!" 도신 도귀가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그를 따라가겠다는 뜻 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너희들은 지이옹을 수행해라! 이번에는 혼자 가겠다." 그는 돌아섰다. 그의 어깨를 원도살이 잡았다. "말을 주지. 몽고에서 타던 것만은 못하지만 요 부근에서는 그래도 가장 좋은 말일 걸세." 그는 백리극의 어깨를 놓고 중얼거렸다. "분명 그 예언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어. 그것이 예언이 맞 는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 * * 남양도상(南揚道上). 남경(南京)과 양주를 잇는 관도(官道)인 남양도상(南揚道上). 검은 마차, 온몸에 문신을 한 건장한 체구의 묘족 사내가 모 는 검은 마차는 관 하나를 싣고 정각령 고갯길을 넘어 백면령 (白免嶺), 다시 소모산(小茅山)을 돌아 고자령(高資嶺)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마차의 뒤로 두 필의 말이 나타나더니 자욱한 먼지를 일으 키며 따라붙고, 이내 추월해 버렸다. 말 위에는 관복을 입은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말에 채찍을 가하던 한 사내가 방금 지나쳐 온 마차를 힐끗 돌아보며 소리쳤다. "뭔가 수상한 마차인데요?" 그는 체격은 컸지만 이제 갓 소년을 벗어난 것처럼 솜털이 보 송보송한 동안(童顔)의 청년이었다. 옆에서 말을 달리던 사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어. 그냥 가세!" 한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도 매부리코에 깊이 들어간 눈, 가 늘게 찢어진 눈꼬리가 특이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남경의 총포 두(總捕頭), 신응(神鷹) 유소백(劉少栢)과 수하 포두인 철환(鐵 丸) 등적(鄧滴)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양주추관(揚州推官) 모충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왜 병력 요청은 않고 총포두님만 불렀을까요?" 등적이 다시 소리쳐 물었다. 유소백은 말 위에서 흔들리느라 흘러내려 온 바람막이를 다시 끌어올려 입가를 가리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가 보면 알겠지!" 등적이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두가 된 지 이제 갓 석 달인 그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총포두와 단 둘이 수사 지 원올 나간다는 비정상적인 일. 그러나 그는 그가 수행하는 유소백, 그리고 지원 요청을 한 모충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강남칠성(江南七城)의 총포두 신응 유소백이라면 북경(北京) 에 있는 강북육성(江北六城)의 총포두인 독호(毒虎) 금세기(金 世紀)와 더불어 천하 양대명포(兩大名捕) 중의 하나인 것이다. 명백한 사실에만 근거한 수사를 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잘못 잡는 경우는 없다는 명포두. 모충국은 직급상 위인 추관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유소백의 제자였다. 강장(强將) 아래 약졸(弱卒)이 없다는 말대로 사법을 맡은 관 리이면서도 수사쪽에 더 재능을 보였던 그였다. 그런 그가 사부의 힘을 요청했다. 등적은 일생 경험하기 힘든 경험을 이제 반나질 후면 도착할 양주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느끼며 홍분해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고자령, 거기만 넘으면 진강부였다. * * * 경연루. 술은 장미로(薔微露), 잔은 장식 하나 없이 투명한 유리잔이 었다. 혈문룡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 었다. 장미 이슬을 닮아 피처럼 붉은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달콤한 향기 코끝을 간지르고, 혀끝을 자극하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마치 입에서 식도까지 원통형으로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다. 입을 벌려 숨을 토하면 보이지 않는 불길이 솟구쳐 나오고, 코끝이 찡해질 정도 로 강한 술. 그는 그 강렬한 뒷맛을 완전히 즐기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술은 정말 이름 그대로 장미를 닮았다. 달콤한 향기, 아름다운 꽃잎, 그 이면(裏面)에 감추어진 날카 로운 가시. 장미는, 그리고 이 술은 사랑을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 각했다. 처음엔 아름다움에 취하고, 벅찰 정도의 달콤함, 그리고 뜨거 움. 그 이후에는 가슴을 상하게 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혈문룡은 지그시 눈을 떴다. 가슴이 아프면 어떤가, 죽을 것 같으면 또 어떤가? 장미와 이 술에는 그 오든 고통을 보상해 줄 정도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이 있지 않은가! '사랑도 그럴까?' 혈문룡은 아침부터 마신 술로 약간 몽롱해진 눈을 들어 여인 을 찾았다. 소녀, 며칠 동안 그가 데리고 잔 그 기녀는! 혈문룡은 문득 그 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려(麗) 뭐라고 했던가? 그 려씨 성을 가진 기녀는 창문 난간에 기대어 서서 창문에 드리운 휘장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옷이라고는 겉옷 하나를 걸치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무릎까지 내려온 비단 배자(背子;겉옷의 일종) 아래는 맨살이 었고, 길고 검은 머리채가 그 위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휘장 사이로 고개만 내민 그녀가 앞으로 몸을 더 기울이자 옷 이 올라가면서 양쪽 무릎 뒤쪽의 움푹 패여 들어간 부분과 허벅 지의 뽀얀 곡선이 드러났다. 혈문룡의 눈은 그 눈부시게 하얀 두 다리와 조그마한 맨살을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없이 일어서서 침상에서 내려 왔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장미 이슬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혈문룡은 잠시 비틀거 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소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바로 뒤로 소리없이 걸어가 어깨를 잡았다. 소녀 가 돌아서며 그를 보았다. 열려진 옷을 그녀가 채 여미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아담하고 볼록한 젖가슴과 장밋빛의 동그란 젖꼭지, 하얀 피부가 드러난 늘씬한 허리선 그리고 두 다리 사이의 거무스레한 부분까지도 보고 말았다. 그녀는 잠이 덜 깬 듯 약간 부운 눈으로 그를 차갑게 쏘아보 았다. '왜 이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혈문룡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돈을 냈고, 며칠 동안이지만 그녀를 샀다. 그러면 그녀 는 그에게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가 그런 눈으로 그를 바 라볼 이유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상관없어!' 혈문룡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 앞을 보게 한 뒤, 뒤에 서부터 옷을 걷어 올렸다. 그녀가 몸을 뒤틀었다. "싫어, 싫어요." '싫긴, 뭐가?' 기녀가 손님의 행위를 싫어해도 되는 걸까? 아마도 안될 것 이다. 그래서 혈문룡은 그녀의 말에 상관없이 하던 행동을 계 속했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려 창문 가의 벽에 밀어붙였다. 옷 은 이미 허리 위까지 들어올려져 있었다. 도발적으로 튀어나온 엉덩이를 그는 탐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더 이상 반항 하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혈문룡은 귀찮은 듯 문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그 자세 그대 로 멈춰 버렸다. 들어온 사람은 월몽영이었다. 월몽영은 그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잠시 바라보더 니 툭 던지듯 말했다. "지루해 할 줄 알았더니 재미있게 지내나 보군!" 혈문룡의 품에 안긴 소녀가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놓아주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월몽영의 앞 에 다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녀를 들어올려 안고는 말했다.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 하던 중이었지." 월몽영은 고개를 끄틱여 보이고는 다가와서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들어올려 냄새를 맡았다. "연락이 왔었어. 철불사를 감시하던 형제들에게서." 그녀는 술병을 들어 입에 대고 기울였다. 잠시 그녀의 인상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녀는 숨을 토해 내고 중얼거렸다. "좋은 술이네? 이름이 뭐야?" 그녀는 혈문룡이 '장미로'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모금을 삼켰다. 술병이 비자 그녀는 말했다. "그들이 왔어." "누구?" "기다리던 사람들!" 월몽영은 나갔다. 소녀는 혈문룡의 팔에서 풀려 났다. 혈문룡 은 벌거벗은 채 침상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침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먹거리고 있었다. 혈문룡이 물었다. "수치스러운 것인가?" 대답은 없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수치스러우냐고 물었다." 소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번들 거리고 있었다. "당, 당신은……." 그녀가 입을 벌려 말을 토해 내었다. 목소리까지 눈물에 젖은 듯했다. "저 여자를 사랑하는 거죠?" 혈문룡의 눈이 커졌다. 상상도 못했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당신은 나와 자면서도 저 여자 이름만 불렀어요!" 소녀는 밖으로 뛰쳐 나가고, 혈문룡은 입을 벌리고 침상에 앉 아 있었다. * * * 철불사(鐵佛寺). "용광사에 금불상이 생긴 후로 향객(香客)이 줄어서 요즘 조 금 한산합니다." 도연(道衍)은 속으로 웃었다. 벌써 세번째였다. 철불사의 주지인 정원선사(正願禪師)는 용 광사의 금불상 이야기를 의식직인지 무의식적인지 벌써 세번째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배분상 그의 사질(師姪)뻘이 되는 노승, 정원 을 그는 갑자기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없애 버릴까요?" "예?" "용광사에 가서 금불상을 훔쳐 오든지, 아니면 부순 다음 저 자에 가져 가서 녹여 버리면? 그래서 다른 모양으로 금불상을 조성해서 여기다 두면 어떨까요? 금불사(金佛寺)라고 이름도 고 치고 말입니다. 철불(鐵佛)보다야 금불(金佛)이 낫지 않겠어요? 색깔도 좋고!"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말하는 도연을 칠십 노승인 정원은 창 백해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노, 농담이시겠죠? 사숙. 불투도(不偸盜)는 오계(五戒) 중 하나인데! 게다가 부처님을 부수어서 녹여요?" 도연은 그의 눈을 빤하니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부처님이 아니죠. 그냥 불상, 금붙이로 만든 불상을 얘기하 는 겁니다." "그래도!" "생사(生死)가 구별없는데 네 것 내 것이 무슨 구별이 있습니 까! 네 것 내 것이 없는데 금불상이야 아무곳에나 있으면 어렇 습니까! 용광사에 있든 철불사에 있든 마찬가지 아닙저까? 수고 비만 조금 생각해 주시면 제가 사질들을 데리고 가서 감쪽같이 처리하겠습니다." "수고비라고요?" "뭐 별건 없고, 그냥 곡차(穀茶) 몇 항아리에 개다리나 열댓 짝 있으면 충분하죠. 저희들은 양이 작아서!" "개다리! 곡차!" 정원은 이젠 몸까지 부르르 떨어가며 되물었다. "어? 사질 풍기(風氣)가 있나요? 고행을 오래 하시다 보니 몸 이 허해지신 모양이군요. 일단 건강해야지 수도(修道)도 있고, 성불(成佛)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안되겠군요! 공양주(供養 主) 스님을 부르시죠. 개고기라도 좀 자셔야겠습니다 남는 게 있으면 저희도 조금 나눠 주시구요. 소승이 본산에 있으면서 약 왕당(藥王堂)에 들락거릴 때 배운 것입니다만 몸이 허한 데는 그저 개고기가 약이죠. 제가 싸움질하다 다쳤을 때도 밤에 몰래 나가서 한 마리 잡아먹으면 다음날은 거뜬히 일어나곤 했다니까 요. 약왕당주(藥王堂主) 스님이 저보고 천부의 근골(筋骨)이라 고 감탄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개고기를 드시면 됩니다라 고 말했다가 노스님 한 분 해탈시켜 드릴 뻔했죠. 무공은 높으 신 분이 담이 작으셔서. 근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 죠? 아, 개고기!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냄새를 맡으면 안될 테니 같이 산에라도 가서 먹어 볼까요?" 정신없이 주절거리다가 바라본 도연의 앞에 정원선사는 이미 없었다 소림사에서 온 이 나이 어린 사숙(師叔)을 그로서는 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도연은 피식 웃으며 멀리 용광사를 바라보았다. 불상이 나무면 어떻고 금이면 어떻단 말인가? 썩은 나무토막 하나 대응전에 앉혀 놓고 부처님이라고 절하면 그것이 부처인 것이다. 그는 문득 목이 마르다는 것을 느꼈다. 한참 되는 소리 안되 는 소리 주절거렸더니 그런 모양이었다. "정말 곡차에 개다리나 한짝 있었으면!" 그는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절도있는 발걸음 소리, 살기를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심장을 압박해 오는 기세! 소림사에서 같이 내려온 사질들임을 그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어딜 가든 표시를 낸다니까!' 그가 돌아보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말했다. "도연 사숙, 또 사질을 놀리셨다면서요?" 사각으로 각진 얼굴에 머리만 유난히 동그래서 항상 그가 '명 백히 현존(現存)하는 불균형'이라고 놀리는 중년 승려, 정각(正 覺)이었다. 그가 그렇게 놀리면 그는 정중하게 절하며 '반구제기(反求諸 己)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응답하곤 했다. 네 꼬라지부터 머 저 반성하라는 뜻이었다. 생긴 것 답지 않게 날카로운 면이 있는 소림십팔나한(少林十 八羅漢)의 수좌승(首座僧), 그가 정각이었다. '괘씸한 놈!' 도연은 그를 볼 때마다 '반구제기'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곤 했다. 덕분에 중답지 않게 험악한 자신의 인상을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뭔가 골려 줘?' 정각이 도연의 왕방울 눈이 뒤룩거리는 것을 보고 그 머릿속 을 금세 짐작했다. 그는 얼른 말을 붙였다. "그가 있는 곳을 알았습니다." "어딘데?" "그것이, 경연루라는 기원이랍니다." "경연, 기원? 여자가 있고 술이 있는 곳?" 도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번도 못 가 본 곳, 그러나 가 보고 싶던 곳이다!' 정각이 난처한 라으로 말했다. "저희들 가기에는 곤란한 곳이라! 사람을 시켜서 밖으로 부를 까요?" "왜 그래야 해?" 도연은 굵은 동곤(銅棍)을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 같은 화상이 누굴 심부름 보내고 해서 수고를 끼쳐서야 쓰나!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사문의 명이니 그냥 우리가 거기로 찾아가세!"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산문(山門)을 나갔 다. 쓴웃음을 지은 정각이 같이 산에서 내려온 소림십팔나한 중 둘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제34장 같은 날 오후 북문. "젠장!" 진운은 다시 한번 몸을 숨겨야 했다. 재수없는 얼굴이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생사복 구련자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흑시나 해서 얼굴도 대충 손질을 했고, 일행 도 많아 당황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서 죽여 버릴까?' 그것은 좀 심한 것 같았다. 아직은 적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사실은 통천방에 속해 있다는 것만 빼면 상당한 친분 관계를 쌓은 사이였다. 무림사사(武林四邪) 중 그나마 친한 편인 사람이 그와 구련자 였다. 환마 서문정은 어떤 놈이 진짜 그놈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 으니 모르고, 나머지 하나인 귀제갈(鬼諸葛) 허탁(虛託)과는 지 모(智謀) 면에서 은근히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사이인 것이다. '일단은 두고 보자.' 그렇! 지나차는 진운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옆에 같이 걷 고 있던 원도살이 그의 어깨를 잡아 세운 것이다. 의아해서 바라보는 그에게 원도살이 구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아는 사람이 있으니 가 보세!" 진운이 놀라서 물었다. "저놈을 아십니까?" "저놈? 자네가 그를 알고 있었나?" 두 사람은 서로 헷갈렸던 것이 분명했다. 원도살이 가리키는 사람은 구련자가 아니라 그에게 점을 보는 두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진운과 원도살은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군가?" "저 사람은 누굽니까?" 진운이 고개롤 설레설레 젓고는 먼저 설명했다. "구련자라고 아주 나쁜 놈입니다. 같이 사사로 일컬어지는 것 이 부끄러운!" 원도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내력이 있는 인물인 줄 알았네. 그리고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인데!" 진운이 말을 끊었다. "한 사람은 저도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인데요?" 구련자에게 점을 치는 사람은 두 사람, 하나는 혹로로족의 부 락에 남겨 놓고 온 이통천이고, 다른 하나는 귀주성에서 사기를 쳐 속여넘긴 마원이었다. "그래서!" 이통천이 물었다. "찾을 수 있다는 거요, 아니면 못 찾겠다는 거요?" 구련자가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러니까 내가 말한 대로일세! 인간사에 그렇게 딱딱 떨어지는 일이 그리 많겠는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고, 없으면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지. 내가 방금 만날 것이라 고 말했네만 자네가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결국 날 못 믿는다는 것인데, 난들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설흑 내 말대로 만난다면 자네는 내 점이 맞았다기보다는 그것과 상관없 이 만날 사람을 만났다고 말할 것일세! 혹시 안 만나게 된다면 자넨 당연히 그렇게 됐다고 말하겠지! 결국 자네가 믿지 않는 이상 내 점이 맞고 안 맞고 간에 항상 난 엉터리인 셈일세!" 마지막의 "난 엉터리인 셈일세." 라고 하는 부분에서 구련자가 어찌나 처량한 표정을 지었든지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콧등 이 시큰해질 지경이었다. 이통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도 하군요. 그러나 점이라는 것은 맞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대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소? 도장(道長;도사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도 옆에 이렇게 써 놓지 않았소?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해 있고, 아래로 는 땅의 이치에 달해 있다. 앉으면 천 리, 서면 구천 리를 본다 고 말이오." 구련자가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긴 하지만 흐릿하게 볼 수도 있고, 잘못 볼 수도 있는 것 이지." "뭐라구요?" "생각해 보게나, 청년! 청년 말대로라면 벌써 돈방석에 앉았지,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길거리에 앉아 있겠나? 나도 이런 흰소리 나 치며 살고 싶지는 않지만 사부님께 물려받은 유품이라고는 이 깃발과 산통, 그렇게 둘뿐인데 버릴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사부도 계셨소?" "신산파(神算派)의 제칠신일대 장문인 귀산자(鬼算子)어른이 바로 선사(先師)셨네." "신산파? 나도 모르는 문파가 중원에 있었나?" "선사의 말씀에 의하면 전국 시대의 귀곡자(鬼谷子)로부터 내 려온 문파이며, 손빈(孫賓), 제갈공명(諸葛公明)이 역대 장문인 중 하나이셨다고도 하는데 나도 믿고 있지 않으니 그냥 우스갯 소리로 듣게나." "그럼 도장께선 신산파의 칠십이대 장문인이시겠군요?" 구련자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이 내 사부라면 나 같은 사람에게 장문인 자리를 주겠 나? 당연히 난 아니네." "그럼?" "귀제갈 허탁이라고 내 사제가 맡고 있네!" 이통천의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사 중의 일인인 그 귀제갈 허탁입니까?" "그렇게 불리나 보네." 구련자의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이통천이 벌떡 일 어났다. "몰라뵈어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허대협의 사형 이신 저 신산 구련자 도장이셨군요!" 구련자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귀제갈 허탁이 사사 중의 하나인 것은 웬만한 무림인이면 다 알았다. 그러나 귀제갈의 사형이라는 말에서 그의 정체를 알아 내다니! 그와 귀제갈이 사형제지간인 것은 무림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아는 비밀인 것이다. 이통천이 황급히 절하고 돌아서려는데 구련자가 옷깃을 잡았다. 이통천은 질린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무, 무슨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점은 치고 가야지! 오랜만에 온 손님이 그냥 가면 어쩌나?" "이미 점괘가 나온 것 아닙니까? 만난다면서요?" "방금 더 확실한 점괘가 나왔네. 마저 듣고 가게!" "뭡니까?" "자네가 찾는 사람 열네 명 중에 쌍둥이 두 사람과 손등에 상 처 자국이 있는 노인이 있다고 했지?" "예! 노인과 쌍둥이 형제 맞습니다." 구련자가 손짓했다. "자네 뒤에 있네!" 그때 이통천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 원 도살이 있었다. 원도살과 함께 멀어져 가는 이통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련 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확실하고 신속하게 점괘가 맞아들어간 것은 거의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은데?" 고개를 외로 꼬며 중얼거리던 구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복채! 복채를 안 받았구나!" 조금 달려나가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황급히 자리 를 챙겼다 "장사 밑천을 두고 가면 안되지." 여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시골 사내, 마원이 그를 잡았다. "도장어른! 제 점도 봐 주셔야죠." 구련자가 귀찮은 듯 그를 밀쳐 내었다. "놓게! 지금 복채 받으러 가야 하는 거 안 보이나?" 그러나 마원은 밀쳐지지 않고 그의 깃발을 잡고 늘어졌다. "제 점도 봐 주고 가세요!" 구련자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마원을 세게 밀쳤다간 사문의 보물이자, 그보 독문병기이며, 단 두 개뿐인 장사밑천 중 하나 가 찢겨지게 생긴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구련자의 표정은 난감하면 난감해 할수록 울상 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기다리게!" 구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걷었던 돗자리를 다시 펴고 그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산통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뭘 점치고 싶은가?" "사람을 찾으려고요." "누군데?" 구련자는 산가지를 하나 뽑아 거기 나온 괘효사(掛爻辭)를 보 면서 묻다가 문득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마원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알겠군! 사기꾼을 찾는구나!" 마원이 반색을 했다. "사기꾼! 바로 그겁니다. 그 사기꾼을 찾아 주세요!" 구련자가 다시 자리를 걷었다. "그럼 진작에 말했어야지! 방금 저기 숨어 있었단 말이다." 마원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누가요?" "네가 찾던 사기꾼 말이다." "예?" 마원은 비명을 지를 듯 놀라더니, 구련자의 옷깃을 다시 잡았다. "그놈 어디 있습니까?" "따라오게! 만나게 해주지." 구련자는 원도살 일행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 다. 그 뒤에 마원이 따랐다. 원도살도, 진운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는 어디로 가면 그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거침없이 걸었다. 그러던 구련자가 갑자기 돌아서서 마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참! 자네도 아직 복채 안 냈지! 내놔!" * * * 관도(官道). 해는 뉘엿뉘엿 지고, 하늘은 어스름이 깔리기 직전의 보라색 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보라색이 점점 짙어져 암청색을 향해 가면 해는 지고, 밤이 오는 것이다. 양주부에서 백강 나루까지는 마차 다섯 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관도가 펼쳐져 있었다. 먼 산과 들, 하늘과 땅이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그 사 이로 관도가 달렸고, 그 관도에는 무수한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관도의 한쪽 끝, 양주 방향으로부터 백강 나루를 향해서 한 줄 기 뿌연 먼지가 그어졌다. 선두의 검은빛은 말의 색깔일 것이다. 분주히 비켜서는 행인들, 그 사이로 검은 말이 지나가고 그 뒤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홑날리는 낡은 장삼, 고!를 잡아야 할 손에는 비정상적으로 긴 장검이 쥐어져 있고, 얼굴을 때리는 숨막히는 바람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는 드높은 기상의 사내. 백리극은 백강 나루로 야광충을 맞이하러 달리고 있었다. 관도는 들판과 하늘이 만나는 선까지 끝없이 뻗어 잇고, 바쁘 게 오가는 행인들은 멀리서부터 그의 앞길을 비켜 쭈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속으로 음악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 백리극의 심장은 그 말발굽 소리와 함께 뛰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기분인가!' 그는 멀리 변경의 벌판을 달리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천의 군 마가 함께 달리던 그때, 그때는 그도 혼자가 아니었다. 수하가 있고, 동료가 있고, 명을 들어야 할 상관과, 충성할 조국이 있 었던 것이다. '이제는!' 전심전력 힘을 모아 생존과 이득을 추구하는 떼강도의 집단에 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백리극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일그러 뜨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집이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말은 더 욱 속력을 내어 한 줄기 검은 바람처럼 관도를 달렸다. 그때, 저만치 관도의 끝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 였다. 백리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오랜 경험으로 그는 그 흙먼지가 말발굽이 만들어 내는 것이 며, 그것도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달려오며 만들어 내는 것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흙먼지가 가까워졌다. 과연 그 홅먼지 속에서 나타난 것은 두 필의 말과 두 명의 사 람이었다. 뿌연 흙먼지가 내려앉은, 그러나 청색의 관복임은 분 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옷을 입은 두 사내였다. 그들의 허리춤 에 매달린 금빛 포승이 그들의 신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포쾌, 그것도 포두급의 인물들이었다. 백리극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먼지를 피하려는 것처 럼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검을 든 왼손이었다. 기형적으로 긴 장검, 유성검을 든 그 왼 손이었다. 백리극은 다급히 손을 내렷지만 이미 늦엇다. 횝범한 포두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상대 는, 그의 곁을 지나친 두 사람 중의 한 명은 한때 그의 사부였 던 신응 유소백인 것이다. 유소백이 외쳤다. "잠깐!" 끼히히히힝!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었다. 유소백은 안장에서 엉 덩이를 떼고 높이 일어서서 균형을 잡았다. 말이 다리를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백리극을 향해 말머리를 돌 린 다음이었다. 놀라운 기마술이었다. 등적은 그만큼 기마술이 뛰어나지 못했던 모양, 한참이나 더 가서야 속도를 줄이고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유소백의 곁에 와서 물었다. "왜 갑자기!" 유소백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 으로 저만치에 서 있는 말 탄 사내, 백리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극은 그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는 어쩌면 그냥 가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소백의 외 침 따윈 무시해 버리고 말에 채찍을 가해 달려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 서 버렸다. 유소백의 외침을 듣는 순간 마치 혈도라도 찔린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죄지은 사 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검을 잡은 손에는 힘줄이 솟아나왔다. 둥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 이 누군지는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개 를 돌릴 수 없었다. 말은 그의 앞으로 돌아와서 섰다. 고개 숙인 백리극의 눈에 말발굽이, 가는 다리가, 튼튼한 근 육질의 가슴이 들어왔다. "호패(戶牌;신분 증명서)! 로인(路人;여행 증명서)!" 등뒤에서 청년의 명령이 들려 왔다. 앞에 한 사람이 서고, 뒤에 또 한 사람이 서서 호패와 로인을 검사한다. 포쾌들의 기본적인 행동 요령이었다. 등뒤에 선 포쾌--아까 언뜻 본 바로는 그도 포두급의 복장이 었다.--는 아마도 지금 무기를 꺼내 그를 겨누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행인들도 그들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가!' 백리극의 손이 소매춤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 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개를 치켜 들었다. 손은 아직 소매에서 꺼내지 않은 채였다. 진운이 만든 가짜 호패와 로인을 잡은 그 손은! 매부리코에 살점 없는 강퍅한 일굴, 매의 눈이 백리극의 얼 굴에 와서 꽂혔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 뒷말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유소백은 한때 자기 아래에서 경신술을 배웠던 제자 백리극 을, 대역(大逆)의 죄를 짓고 자결했다던 그 제자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 * * 백강(伯江) 나루. 태양이 막 지평선을 님어가려는 참이었다. 순간순간 점점 더 가라앉는 거대한 원형의 태양이 강변의 산과 나무들을 비추자 그 경계선이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잠시 후 태양이 서산(西山)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졌으나 하 늘엔 아직 노을이 남아 강물의 은은한 갈색 물결 위에 붉은빛을 더하고 있었다. 그 갈색 물결, 붉은라 위로 배가 도착했다. 길이에 비해 좌우 폭이 넓어 짧은 거리로 화물과 승객을 운송 하기 좋은 조운선(漕運船)이었다. 승선했던 승객들이 내리고, 그 뒤에야 말과 마차, 그리고 수 레들이 내려졌다. 그 중에 검은 마차 한 대가 있었다. 검은 마 차는 장례(葬禮)나 죄인호송(罪人護送)과 같은 흉사(凶事)에 쓰 이는 것, 게다가 마부라고 앉은 것이 온몸에 문신을 한 묘족이 었으니 눈에 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도 곧 그 마차 를 발견했다.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마차는 천천히 나루를 벗어나 관도로 통하는 길로 굴러가고 있었다. 쇠사슬 소리가 짤랑거렸다. 가슴둘레가 키만큼이나 될 것 같은 비대한 사내가 길가 주점 에 앉았다가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머리통만큼이나 굵고,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유성추(流星鎚)가 들려 있었다. 쇠사슬 소리는 그 유성추에서 난 것이었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가 턱 밑을 긁더니 의자에 기대 놓았던 검은 몽둥이 하나를 들고 일어섰다. 몽둥이의 끝에는 가는 사슬로 연결된 작은 몽둥이가 또 하나 있었다. 이것을 강호에서는 대초자곤(大肖子棍;쇠도리깨)이라고 부른다. 세번째 사내가 일어섰다. 체격도 왜소하고, 키도 크지 않았다. 그도 무기를 들었다. 그의 평범한 체격과는 걸맞지 않게 거대 한 두 자루의 도끼, 개산대부(開山大斧)였다. 그들이 천천히 마차의 뒤를 따라 걷자 나루터에 오가던 사람 들이 건에 질린 표정으로 슬슬 물러났다. 마차가 멈주었다. 마차의 앞에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 들이 마차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묘족, 흑웅이 너무 커서 오히려 순해 보이는 방울눈을 굴리며 그들을 보았다. 한 사내는 커다란 기러기의 깃털을 거꾸로 든 것처럼 생긴 안 령도(雁翎刀)를 들고 있었다. 날끝에 부서지는 저녁노을이 눈부 신 날카로운 칼이었다. 또 한 사내는 길고 검은 채찍을 들었다. 흔히 교룡편(蛟龍鞭) 이라 부르는 가죽채찍이었다. 그러나 채찍의 끝 부분 두 자 가량에는 가시가 돋아 있고, 끝 에는 날카로운 삼각형의 납추를 달아 놓아 거기 걸리면 살점이 뜯겨져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한 자루 은창(銀槍) 을 들었다. 창날과 자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수놓은 붉은 천을 묶어 놓은 짧은 창이었다. 흑웅은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들이 왜 그렇게 마차를 가로막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마차를 둘러싼 그들에게서 좋지 않은 냄새가 풍긴다는 것이었 다. 쫓기던 맹수들에게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 모락모락 피 어오르는 적의(敵意)였다. 교룡편을 든 사내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칠화회의 일곱 송이 꽃이 네 주인을 찾아왔다!" 흑웅이 놀라서 눈을 둥글게 떴다. "어, 어떻게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나오지?"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하겠고, 그저 사내가 낸 얼음가루가 떨 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놀란 것이다. 채찍을 든 사내의 얼굴빛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칠화회를 언급했고, 마차 안의 사람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 것도 일곱 송이의 꽃 전부가! 그러면 당연히 놀라야 하는 것이다. 목소리가 아니라 그 내용 에 말이다. 현 무림 촤고의 살수 집단, 일곱 명으로 하나의 방회(幇會)를 이룬 칠인살수방(七人殺手幇)인 칠화회의 자객 전원이 찾아왔다 는데 고작 목소리에나 놀라고 있단 말인가! 흑웅은 그가 어쨌든 주인, 광충을 찾아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해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부르지 말 라는 명령을 들은 바 있지 않은가! 이렇게 손님들이 찾아온 경우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에 해 당이 되는 것일까? 흑웅은 해당이 된다고 판단했다. "우리 주인께서는 어떤 손님도 만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안색도 전염이 되는 것일까? 마차를 가로막고 있던 무정칠화의 안색이 교룡편을 든 사내, 편화(鞭花)의 안색처럼 푸르뎅뎅하게 변해 갔다. 흑응도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식의 적의나 살기에 대해서는 사냥꾼으로서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그는 어자석(馭子席;마부석) 에 기대 두었던 검은 쇠꼬챙이를 잡아 갔다. 시위를 푼 묵궁이었다. 급할 때는 몽둥이나 창 대신 으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안령도를 든 사내, 도화(刀花)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옆 에 선 여인을 보았다. 여인, 창화(槍花)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까지 빠끔히 문신을 한 묘족놈이 몽둥이 하나를 꼬나쥐 고 그들을 노려보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창화가 창을 겨누려는데 도화가 먼저였다. 그는 한걸음 다가 가며 말했다. "그래도 먼저 물어 보는 것이 예의 아니냐? 어서 알려라!" 혹웅도 예의라는 말은 알았다. 그래서인지 도화의 말에 고개 를 덕이며 예의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어자 석쪽으로 난 마차의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화의 눈에 악독한 빛이 흘렀다. 그는 갑자기 어자석 위로 뛰어올라가며 흑웅의 뒤통수에 안령 도를 꽂았다.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일격. 뒤통수에 칼이 꽂히면 아프긴 하지만 어리석게도 적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린 잘못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억 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나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다음 순간 벌어질 참상에 대해 짐작하고 지레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촤악! 실제로 그런 소리가 들렸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났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사람의 살이 아무리 질기다고 해도 저렇 게 천이 찢어지는 소리처럼 적나라하게 소리가 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소리가 났다고 생각했다. 흑웅이 턱으로 마차의 창문턱을 당겨 부수며 고개를 숙이고, 안령도가 그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마차 안으로 들이밀 어졌다. 다치긴 했지만, 그리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악스런 방법으로 피했지만 분명 혹웅은 칼을 피한 것이다. 소리는 그 다음에 났다. 이름 그대로 곰처럼 웅크린 혹웅의 겨드랑이 사이로 시커먼 물체가 뻗어 나왔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흑웅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도화의 몸이 그것을 가려 주 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사람들은 붉은 쇠꼬챙이는 볼 수가 있었다 천이 찢어지 는 듯한 소리를 내며 도화의 뱃가죽을 찢고 등으로 튀어나온 붉 은 쇠꼬챙이였다. 다시 말하지만 흑웅은 미련해 보이긴 해도 실제로 미련한 사 람은 아니었다. 그는 마차를 막은 자들이 적이고, 그것도 극히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적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덩치가 커서 둔해 보이긴 해도 절대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왜소하고, 민첩해 보이는 사람보다도 더 민첩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딴았다면 산악을 돌아다니며 맹수를 사 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힘만으로는 흑로로족 제일의 사냥꾼이 탄생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부러 틈을 보여 유인하 고 공격해 오는 적을 반격해 죽여 버린다는 것은 가장 편하고 확실한 사냥 방법 중의 하나였다. "너, 이……!" 도화는 안구가 튀어나을 정도로 부릅뜬 눈으로 흑웅을 내려다 보았다. 배가 뚫린 것이지 목을 다친 것은 아닌데도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워낙 황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마차 안으로 밀고 들어간 안령도를 당겨 다시 흑웅 을 내리치려 들었다. 그러나 그때 뱃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통렬한 아픔! 도화는 흑웅의 무지막지한 힘에 들려 마차의 지붕을 타넘고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흑웅이 그의 배에 꽂힌 묵궁을 들어 작 살에 꽂힌 물고기를 던져 버리듯 그를 던져 버렸던 것이다. 촨--! 편화의 검은 채찍, 교룡편이 한 마리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흑웅의 목을 감았다. 파앙! 은빛 광채가 번뜩였다. 붉은 옷에 은빛 창의 여인, 창화가 은섬탈혼(銀閃奪魂)이라는 초식으로 그의 가슴팍을 찔러 왔다. 혹웅이 본능적으로 묵궁을 들어 창을 막으려 들었다. 무공은 모르지만 힘은 무지막지한 그였다. 묵궁에서 엄청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편화는 그 힘과 맞부딪쳤다가는 창화가 당해 내기 어려울 것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흑웅의 목을 감은 채찍을 힘주어 당 겼다. 채찍에 목이 매어 당겨 오다가 손을 들면 팽이처럼 맴돌 것이고, 그때 은창이 꼬치처럼 그를 꿰어 버릴 것이라고 기대하 며 한 행동이었지만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별상관이 없었다. 채찍은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정도였지만 흑웅은 바위처럼 버틸 뿐 움직이지 않았다. 은창을 막아 가는 그의 팔도 그래서 아무 방해 없이 움직였다. 까앙! 은창이 수레바퀴에 밀어 넣은 나뭇가지처럼 튕겨져 나갔다. 창화는 그 든창을 따라 정신없이 물러섰다. 놓치지 않으려고 애 를 썼지만 창은 학질 걸린 사람처럼,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결국 창을 놓쳐 버렸다. 그러고도 손바닥이 찢겨질 것 같은 통증이 어깨까지 얼얼하게 만들었다. 편화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는 지금 목에 감긴 채찍을 잡고 당기는 흑웅의 힘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머리 위로 치켜 든 묵궁, 검붉은 쇠꼬챙이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 하면 내려쳐질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당겨 갈 수밖에 없었다. 흑웅이 멈칫했다. 그 틈에 편화는 채찍을 풀어 회수할 수 있 었다. 흑웅의 뒤에는 대초자곤을 든 사내, 곤화(棍花)가 득의양 양하게 서 있었다. 뒤에서부터 흑웅의 머리를 내려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낯빛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흑웅은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분노로 부릅뜨여 있고, 이빨 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혹 났잖아!" 육십 근짜리 쇠몽둥이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고도 혹이 났다 고 화를 내는 것이다. 깨져서 피를 본 것도 아니고 단지 흑이 났다는 것이다. "금, 금강불괴(金剛不壞)?" 곤화가 주줌 뒤로 물러서는데 흑웅의 손에 들린 묵궁이 소나 기처럼 그에게 퍼부어졌다. 곤화는 대초자곤을 가로로 들고 정신없이 휘둘러서 흑웅의 공 격을 막았다. 따다당!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흑웅이었지만 그 위력은 어느 일류고수 의 것에 못지않았다. 곤화는 그의 소나기 같은 공격을 하나하나 다 받아 내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걸음씩 물러서야 했다, '뭐, 이런 곰같이 힘만 센 놈이!' 곤화는 땀을 삐질삐질 홀리며 물러서다가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힘이라면 나도 남 못지않은 몸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 그는 수세에서 벗어나려 쇠도리깨를 있는 힘껏 휘둘러 흑웅의 묵궁에 마주쳐 갔다. 까앙! 두 개의 철봉이 맞부딪쳤다. 철봉은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르 고, 두 사람, 네 개의 팔뚝에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쇠도리깨와 묵궁을 한껏 밀어붙이고 있었 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이, 잎!" 곤화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힘이 차이가 날 수 있 을까? 그는 마치 근육이 터져 버릴 것처럼 고통을 느껴야 했다. 천 만 근의 무게로 혹웅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도 할 것이 황룡의 무지막지한 내공에도 버틴 흑웅이었 던 것이다. "크윽!" 곤화는 숨을 토하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손에 들렸던 대초 자곤은 저만치 날려가 버렸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곤화는 건에 질려 자신의 머리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흑웅의 일격을 바라보았다. 힘을 어 떻게나 썼는지 온몸이 굳어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흑응이 그의 몸을 밟고 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자연 묵궁 도 곤화의 머리 위 땅바닥을 치고 말았다. 흑웅은 손을 돌려 옆구리를 만졌다.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시 입은 칭색 옷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방금 뒤에서 무거운 물체를 던진 자 를 노려보았다. 상대도 그를 보고 있었다. 대신 분노에 찬 눈빛 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이었다. 추화(鎚花)는 흑응을 보고, 또 자신의 손에 들린 유성추를 보 았다. 한 대만 제대로 맞으면 피떡으로 변해 버릴 줄 알았는데 상대는 모기에라도 쏘인 것처럼 옆구리나 긁고 있지 않은가! '저놈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두꺼운 껍질을 쓰고 태어난 놈인 가?' 흑웅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잔뜩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는 숨 소리가 이 장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는 그 기세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유성추에 달 린 날카로운 못으로도 뚫지 못하는 놈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때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껍질만 단단하지 아무것도 아닌 놈을 못 이겨? 모두 덤벼서 해치워!" 한 노인이 소리친 것이다. 비단 옷을 걸친 부잣집 노인의 행색이었다. 주름살 가득한 얼 굴에 가는 눈이 유달리 반짝인다는 것만 빼면 특이할 것이 없는 노인. 그는 한 손에 황색 천으로 싼 길쭉한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한마디 말에 힘을 얻은 듯,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도화를 뺀 나머지 무정오화가 한꺼번에 흑웅에게 덤벼들었 다. 노인이 바로 그들의 대형(大兄)이자 칠화회의 회주인 검화 (劍花)였던 것이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흑웅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을 보았다. 창피한 노릇이었다. 소위 중원 최고의 살수 집단이라는 그들 칠화회가 묘족의 촌놈 하나를 못 이겨서 절절 맨다는 소문이라 도 나면 앞으로 누가 살인 씽부를 할 것인가! '어쩌면 너무 방심한 것일지도' 차라리 횡소 자주 쓰던 방법대로 암습을 했다면 손솰게 해치 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를 상대로 계략을 짜기도 귀찮고 해 서 그냥 정면으로 쳤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껍질만 단단한 게 아니고 힘도 세네?" 흑웅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다섯이 대들어 싸우는데도 무기 는 안 먹히고,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서 여전히 끌려다니는 형국 인 것이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변화와 빠르기로 공략하란 말이다. 너희들은 곰도 안 잡아 봤냐?" 곰을 안 잡아 봤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무정오화는 그 말에 뭔가 깨달은 듯 공격 방법을 달리해서 흑 웅을 치기 시작했다. 하나가 공격해서 흑웅이 맞받아치면 상대하지 않고 물러서고 다른 하나가 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혼란하게 해서 틈을 보아 공략하는 것이 이런 작전의 기본인데, 흑응은 그것도 제법 막아내고 있었다. 초식이나 무공을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가해 지는 위협을 느끼고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검화는 다시 혀를 찼다. "저놈, 동작도 빠르네?" 껍질도 단단하고, 힘도 센 데다가 빠르기까지 하다니! "절정고수라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진 딴았다. 고수라고 보기에는 동작에 너무 틈이 많았다. 무공을 모르는 자워 손짓이라고 밖에는! 그는 문득 눈을 번뜩였다. '무공을 모르는 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상대는 분명 무공을 모르는 자 였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흥--! 짧은 코웃음을 내며, 검화가 천천히 흑웅에게 접근했다. 그가 왼손을 휘젓자 황색 천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의 손에는 손가락 굵기의 남색광망(藍色光芒)이 번뜩이는 가늘고 긴 검이 들려졌다. 그의 독문병기인 용창연검(龍暢軟劍)이었다. 색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극독이 묻어 있는 연검. 그가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분명히 그는 혹웅과 이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한 줄기 남색광망은 이미 혹웅의 턱밑에 이르러 있었다. 목덜미에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 흑웅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 츠렸다. 치익--! 흑웅의 머리가죽을 스치며 용창연검이 지나갔다. 검화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마차를 쳐!" 쉬--익--! 남색광망이 돌을 만나 방향을 트는 뱀의 동체처럼 휘청 휘어 혹웅의 턱밑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놀랍게도 용창연검이 실제 로 휘어 목표를 따라간 것이었다. 쉬잇--! 용창연검이 흑웅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흑웅의 목에 붉은 선이 한 줄기 그어졌다. 그는 뒤로 털썩 눕더니 맹렬히 몸을 굴렸다. 달리 피할 방법 이 없었다. 바닥에서 뿌연 먼지가 솟아올랐다. 검화가 내뻗은 오른손을 뒤집으며 용창연검을 예리무비하게 떨쳤다. 쉭, 쉭, 쉬--익! 남색광망이 백여 개의 회초리를 일시에 휘두른 것처럼 무수한 갈래로 뻗어 바닥을 구르는 흑웅을 베어 갔다. 허초가 따로 없고, 실초가 따로 없었다. 흑웅의 몸이 잘근잘근 다져져 고기젓이 될 찰나였다. 흑웅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촤아악! 그의 몸에 무수한 검상이 그어졌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검 날을 그는 몸으로 받기로 한 것이다. 검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미련한 놈이! 껍질이 아무리 질겨도……!" 그는 말을 멈추었다. 고기젓이 될 줄 알았던 혹웅은 읏만 찢 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창연검을 맨몸으로 받아 낸 것 이다. 잠시 말을 잊었던 검화는 흑웅의 맨살에 그어진 붉은 자국을 보고 다시 웃었다. "이제 곧 독이 몸에 퍼지면 너는 지상에서 가장 괴로운 고통 을 맛보게 될 것이다. 껍질이야 질길 수 있어도 독에는 못 당할 것이다." 흑웅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않았다. 검 에 독이 있는 것은 그도 알았지만 실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는 독사에 물려도 끄떡없는 체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를 분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무공을 몰라 이 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그랬고, 모시는 주인을 제대로 지 키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지금 적들은 마차를 부수고 있지 않은가! "으드득!" 그는 이가 부러질 정도로 갈아붙이고는 검화를 향해 다가갔다. 검화가 조금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쓰러질 때가 되었는 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껍질이 두터워서 독이 퍼지는 것이 조금 늦는 모양이군! 제 대로 한번 더!" 검화는 용창연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려 왼손으로 검끝을 잡아 활처럼 휘어지게 잡아당겼다. 육십 평생 패배를 모르던 그의 검법. 용사팔형(龍蛇八形)의 세사식, 섬전비망(閃電飛莽)의 준비 자세였다. 펑! 단단하게 잠겨져 있던 마차의 문이 떨어져 나갔다. 대초자곤 으로 몇 번이나 후려치고, 그것도 모자라 도끼로 문틈을 찍어서 야 떨어져 나온 문이었다. "나와라!" 거대한 개산대부를 양손에 움켜쥔 사내, 부화(斧花)가 열려진 문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라, 흑수당주!" 마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나 오지 않았다. "겹이 나는가? 일파의 당주가 죽음이 두려워 문턱을 못 넘는 것이냐?"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편화와 부화가 눈짓을 교환했다. 편화가 손을 들어 마차지붕 을 가리켰다. 창화와 곤화가 지붕 위로 소리없이 뛰어올라갔다. 그들의 무 기가 아래를 겨누었다. 문으로 누군가가 나온다면 바로 암습할 수 있는 위치였다. 편화가 다시 손짓했다. 추화가 옆으로 몇 걸음을 걸어 마차의 문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위치에 섰다. 이제 마차 안에서 어떤 것이 튀어나와도 대응할 만반의 준비 가 갖추어진 것이다. 쌍도끼를 든 부화가 마차의 열려진 문 옆에 바짝 붙었다. 안에 서 암기라도 나올까 봐 대비하는 것이었다. 편화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불을 질러 버리겠다. 끝까지 얼굴을 안 보이고 불고기가 될 테냐, 아니면 나와서 당당하게 싸울 것 이냐? 선택해라!" 그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곧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조용랬다. 흑웅은 검화의 용창연검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큰 상처를 인지는 않았지만 흑응도 마차를 향해서는 오지 못 하고 있었다. 검화에게는 그것도 모욕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흑응으로서도 미칠 지경이었다. 부화가 마차의 벽에 붙은 채 조금씩 마차의 문을 향해 다가가 고 있었다. 창화와 곤화의 이마로 땀이 흘렀다. 그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 고 있었다. "둘!" 파앗! 셋은 아직 세지 않았는데 부화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져 문안 으로 날아들어갔다. 그 뒤로 부화가 도끼를 앞에 가린 채 뛰어 들었다. 그들은 애초에 셋을 셀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편화의 동작도 신속했다. 손에 든 채찍을 떨치며 부화의 뒤로 바짝 붙어 마차의 문으로 다가갔다. 부화의 몸을 방패로 삼아 이차 공격을 감행할 자세였다. 그러나 부화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갸우 뚱거리며 마차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태양은 이미 지고, 붉은 황혼도 사라져 버렸다. 아까 전부터 하나씩 둘씩 늘어나던 등불이 이제는 강을 따라서 휘황하게 밝 혀져 있었다. 아직은 완전히 어둡지는 않지만 대지는 이미 밤의 세력권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루터의 하늘은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가고, 마차 안은 사물의 형상을 겨우 분간할 정도의 침침한 어두움으로 메워져 있었다. 부화는 마차의 어두운 구석에 네모진 관 하나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다였다. 마차 안에 있는 물건은 관 하나뿐,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흑수당주라는 자가 시체란 말인가? 아니면 그들이 마차를 잘못 잡은 것인가? 그는 편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관 하나밖에 없는……!" 부화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이 너 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파앙! 편화도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은 느꼈다. 단지 피할 수가 없었 을 뿐이었다. 말이 달려오고,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허공으로 뛰어올랐 다. 말은 빨랐지만 거기 앉아 있던 사람은 더욱 빨랐다. 그는 말안장에서 떨어졌나 싶더니 어느새 편화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검푸른 저녁 하늘에 휘날리는 장삼자락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장삼자락의 위로부터 시커먼 바람 같은 것이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것을 그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바라 보아야 했다. 바라보기만 할 뿐 어쩌지도 못했다. 그렇게 편화는 죽었다. 허공으로부터 내리꽂히는 백리극의 유성검에 말 그대로 일도 양단(一刀兩斷)이 되어 죽어 버렸다. 곤화는 자신들이 서 있는 마차의 지붕 아래로부터 튀어올라오 는 핏줄기를 보면서도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은 창화도 마찬가 지였다. 그들도 편화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것이 다. 단지 편화는 죽고, 그들은 죽지 않았을 뿐이었다. 층격은 약간 떨어져 있었던 추화가 비교적 덜했다. 그래서 반 응도 가장 빨랐고, 죽음도 가장 먼저 맞이해야 했다. 그는 유성추를 휘둘러 막 편화를 두 조각내고 다음 먹이를 고 르고 있던 백리극의 등 한가운데를 찍어 갔다. 사전 동작을 극도로 줄여 버렸기 때문에, 사슬을 사용하는 연 형무기(軟形武器)였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직선을 그리는 공격 이었다.. 백리극은 귓가에 울리는 파공음으로 그 공격을 알아차리고 몸 을 돌렸다. 그의 손이, 그 전에 유성검이 정면으로 뻗어 유성주 에 닿았다. 빠앙! 폭음이 울렸다. 유성추의 둥근 쇳덩이가 쪼개져 나가며 추화 의 정수리에 장검이 박혔다. 퍽--! 수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선혈과 뇌수가 폭죽처럼 튀었다. 곤화와 창화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백리극을 공격하려 했 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추화의 머리를 부순 백리극의 기형적 으로 긴 장검(長劍)이 한바퀴 원을 그리며 그들을 향해 베어 오 고 있었던 것이다. 곤화가 본능적으로 검이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것을 느끼고 손에 든 대초자곤을 앞에 세워 검을 막으려 들었다. 파파팍--! 오리알 굵기의 대초자곤이 잘려져 나갔다. 쐐액! 백리극의 검이 토막난 대초자곤을 놓고 정신없이 한발을 물러 서던 곤화의 목을 날렸다. 피분수가 솟구치고 목이 공중에 떴다. 백리극은 그대로 몸을 돌리며 유성검을 중단으로부터 정면으 로 찔렀다. 러져 나오는 곤화의 피에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던 창화의 가슴팍에 백리극이 바짝 붙는 순간, 그녀의 등판으로 긴 검신이 튀어나왔다. 창화는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거지며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네…… 네가!" 무어라 말하려 하더니 입에서 선혈을 주루룩 흘리며 고개를 떨군다. 백리극은 발로 창화의 가슴을 걷어차며 검을 뽑았다. 바람이 불었다. 산발한 백리극의 머리카락 몇 올이 그 바람에 날렸다. 마차 위에 선 그의 옆에는 곤화와 창화의 시신이 뒹굴고, 마 차 아래에는 추화, 편화, 그리고 그가 죽이지는 않았지만 도화 의 시신들이 혹은 조각난 채, 혹은 그런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악명이 자자했던 살수칠인방, 칠화회의 살아 남은 한 사람은 손을 멈추고 망연히 서 있었다. 검화, 그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 이다. 수하야 다시 모으면 되기야 하겠지만 어디서 방금 죽은 육화처럼 손발이 맞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육화? 방금 죽은 사람의 수는 다섯이었다. '한 사람은?' 두 자루의 개산대부를 무기로 삼는 사내, 부화였다. 그는 마 차 안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부화는 마차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갈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알은 튀어나 와 뺨에서 대롱거리고, 혀는 길게 물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목이 졸려 죽은 것이 확실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지금 부화의 목을 틀어잡은 검은 장갑이었 다. 부화는, 아니 부화의 시체는 그 검은 장갑에 목이 잡힌 채 천천히 마차 밖으로 들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부화의 발이 땅에 닿고, 아직은 굳어지지 않은 무릎이 굽어져 바닥에 꿇려지는가 하더니 곧 길게 엎드려 버렸다.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그를 놓아 버린 것이다. 시체가 땅바닥에 던져진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가지 런히 묶은 은발에 창백한 안색, 검은 유삼(儒衫)이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는 사내, 야광충이었다. 백강 나루에 밤이 온 것이다. "당주!" 걸레쪽 같은 옷을 걸치고, 온몸에는 회초리로 맞은 것처럼 붉 은 상처 자국이 나 있는 흑웅이 반색을 하며 반겼다. 야광충은 그를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만치에 선 검 화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검화의 얼굴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아까처럼 분노에 몸을 떠 는 것이 아니었다. 육십 평생에 처음 만나 보는 낯선 감정에 절 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신비스러움? 위압감? 흑은 공포? 어느것이든 낯선 것이었다. 대부분의 삶을 죽음의 위협을 느 끼기보다는 주면서 살아왔던 그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마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흑수당주?" 굳이 확인을 하고 싶어서 물어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야광 충이 나타난 다음부터 온몸을 휘감아 오는 원인 모를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해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내, 야광충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않고 그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귀찮군, 그냥 오라!" 전혀 정제되지 않은 동작이었는데 검화를 휘감은 긴장감은 더 욱 강해질 뿐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용창연검을 마주 겨누었다. 짧은 순간 에 그의 몸에서는 정기가 흐르고, 그 기세가 대기를 팽팽하게 했 다. 나름대로 검에 일가를 이룬 성취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이 같잖다는 듯 그를 향해 아무렇게나 한 발을 내디뎠 다. 약점을 찾고 어쩌고 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위해 일부러 약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가 놓여지듯이 검화의 몸이 본능적으로 그 동작에 반응을 했다. 파아앙! 저 가냘픈 회초리 같은 용창연검이 이런 소리를 내리라고는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대기를 발기발기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용창연검은 수백 수천 마리 용이 되어, 야광충을 향해 달렸다. 용사팔형의 마지 막 초식, 천룡사황(千龍蛇荒)이 펄쳐진 것이다. 그를 향해 내민 야광충의 손이 쥐어져서 가볍게 흔들렸다. 그 손으로부터 서릿발 같은 기운이 한 줄기 뻗더니, 용창연검이 만 들어 낸 수백 수천의 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 검화의 머리 를 벼락치둣 관통해 버렸다. 파악! 검화의 머리가 박살이 나며, 붉은 피와 하얀 뇌수가 비처럼 뿌려졌다. 중원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양인장이었다. "지팔!" 그때까지 마차의 지붕에 서 있던 백리극이 야광충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야광충이 물었다. "어떻게 왔나?" 백리극이 대답했다. "그저 주변을 지나다가!" 마중을 왔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던 그였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예정대로, 지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군!" 야광충은 부서진 마차를 힐끔 보고는 다시 말했다. "뒤를 맡기겠다!" 말과 합께 그는 사라져 버렸다. 허깨비가 사라지듯 표연한 행 동이었다. 백리극은 부서잔 마차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살피 고 있는 흑웅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관을 꺼내라! 들고 가자!" '이목을 끌면 어떤가? 이미 알려저 버린 것을!' 그는 아까 만났던 유소백을 기억했다. 말없이 그를 보고는, 한참을 그렇게 보고만 있다가 그냥 가 버린 한때의 사부, 유소백을 그는 기억했다. 그는 어떤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은 줄 알았던 제자가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는! 대역죄인의 굴레를 쓰고 돌아온 그를 보고……! 법 앞에서는 처자도 돌보지 않는다는 철포두(鐵捕頭)가 왜 그 냥 그를 보내 준 것일까? 흑웅이 검은 관을 메고 그의 옆으로 왔다. 백리극은 낮게 탄 식하고는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보셨어요?" 작은 배였다. 강 한가운데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던 고깃 배, 그러나 어부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람선에 가까운 작고 깨끗한 배였다. 거기 앉아서 낚시보다는 강변에서 벌어진 싸움구경에 더 넋을 빼앗기고 있던 남장(男裝)의 여인이 물었던 것이다. 단정하지만 선이 가는 얼굴, 화장기는 없지만 분명 여인인데 남장을 한 모습이 특이한 매력을 풍겼다. 턱을 고인 손에는 검 은 장갑을 끼고 있어 더욱 특이한! 반대편에 앉은 노인이 혀를 찼다. "양주부에 심상찮은 바람이 불더니! 저렇게 괴이한 인물들이 나타났으니 풍파가 없을 수 없겠지!" "괴이하다!" 여인은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작 은 목소리. "멋있기만 한데요." "누가 말이냐?"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마 저 묘족 청년은 아니겠지?" "할아버지!" 여인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은 조손간이었던 것이다. "은발유생도 멋있고, 장검의 장한도 멋있잖아요. 묘족 청년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노인은 끝까지 장난이 치고 싶었던 모양, 손녀딸의 말에 끼여 들었다. "문신이 멋지지?" "훗!" 여인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하인을 하나 구해 드릴까요?" "하인이라!" 이번에는 노인의 눈이 진지해졌다. "저런 하인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하다 아니하지 못 하리라!" 그러더니 그는 낚싯대를 거두었다. "밤이슬이 차갑구나, 돌아가자! 아이구 이런! 미끼를 빼앗긴 줄도 모르고 있었군!" 제35장 그날 밤 양주부성. 야광충은 귀영종 오대신법 중 잔백유영을 시전해서 한 줄기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관도였 지만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관도의 옆에 심어 놓은 백양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그의 뒤로 달리고, 말과 수레들이 거꾸로 뛰는 것처럼 그의 뒤로 사 라져 갔다. 그렇게 한 시진을 달려서 야광충은 양주부성을 바라보게 되었 다. 백리극이 빠른 말로 네 시진이나 달려온 거리를 한 시진만 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야광충은 어둠 속에 검게 침묵한 양주부성 성벽을 한달음에 뛰어넘어 그늘로 숨어 들었다. 이제 밝은 불빛 아래 나서면 몸 을 숨겨 가며 가야 했다. 양주는 낮보다 밤이 더욱 양주답다. 굳이 기루나 주루가 아니더라도 오색 등불을 집집마다 내걸어 거리마다 휘황한 빛무리가 떠돌았다. 타지에서는 자시(子時;밤 11시)가 되면 통행이 금지되고 순포 (巡捕)들이 딱딱이를 울리며 돌아다녀, 집없는 고양이와 야행인 (夜行人)들의 천국이 되지만 여기는 자시가 넘으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낮과는 다른 양주성의 진면모,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그래서 지금 사람들로 끓어 넘치고 있었다. 기녀, 여 행객, 장사치들과 밤산책을 나온 양주부민(揚州府民)들이었다. 야광충은 그 사이로 걷고 있었다. 사람의 눈을 피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들이 보지 않 는 곳, 봐도 심상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곳으로 걸으면 되는 것 이다. 오늘처럼 구경을 나와 한 시진을 걸어도 집에 돌아가 생각해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극히 특이했던 한두 가지뿐일 때가 많은 것이다. 물론 야광충은 보면 잊지 않을 만큼 특이한 용모, 특이한 기 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요령을 부려야 했다. 기세를 숨기고 주변의 사물 속에 파묻히는 신법이었다. 그들 귀영종의 신법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사실 그것을 더 높 은 경지의 신법으로 보고 있었다. 야광충은 귀영종 최후의 신법인 미시출오종이란 이런 경지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닿는 극점(極點)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문득 야광충이 멈춰 섰다. 그의 손은 가슴에 을라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손 하나가 잡혀 있었다. 때가 꾀죄죄하게 묻은 작은 손. 야광충의 품속에 파고들다가 잡힌 손이었다. 야광충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때는 묻고, 작았지만 그 손 에는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전체적인 손의 크기에 비해 손가락이 길었다. 그리고 그 끝이 가늘고 부드러웠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안 썹었을 것 같은데 기묘하게도 손톱은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붉은 살이 보일 정도로 바짝 깎아 놓았다. 야광충은 이 손이 어떤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떤 일 을 하는 손인지 알 수 있었다. 전문적으로 행인의 품을 털기 위 해 단련된 손인 것이다. 소매치기의 손. 그 손에 붙은 가는 손목과 가는 팔뚝, 그리고 가녀린 어깨를 야광충은 무심하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다. 고생을 한, 사부의 말대로라면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 를 하는 사람의 팔로는 지 나치게 가늘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못 먹어서? 그리고 얼굴. 야광충의 눈이 번뜩였다. 손의 임자는 소년이었다. 어른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닌 소년. 삼각형으로 좁아지는 얼굴에 보송보송한 솜털, 작은 눈에 재빠르게 구르는 눈동자가 쥐새끼를 연상시키는 용모의 소 년이었다.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것인데도 묘하게도 건에 질린 눈은 아 닌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눈 때문에 야광충이 그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의 임자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똑같았다. 쥐새끼를 닮은 그 용모와 눈동자가 영낙없이 사형인 옹중서를 빼닮은 것이다. 사형이 늙은 시궁쥐를 닮았다면 이 소년은 새앙쥐를 닮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을 뿐이었다. 야광충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름은?" 소년은 그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변명부터 했다. "저 아무 짓도 않헷뎌요. 봐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면서 펴 보이는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집기 전에 야광충이 잡았는데 그 손에 뭐가 있을 것인가? 소년은 그래도 뻔뻔스럽게 중얼거렸다. "놔요. 저는 도둑 아니에요. 아무 짓도 않했다니까요?"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더욱 그가 도둑인 증거가 되었다. 야광 충은 아무런 추궁도 않는데 소년이 제풀에 털어 놓고 있는 셈이 었다. "이름은?" 야광충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름은 알아서 뭐해요? 손이나 놔줘요. 길 가는 사람 붙들고 왜 이래요?" 묘힌 소년이었!. 댜거간한 인물들도 눈을 마주치면 겁을 집 어먹는 야광충의 기서였댜. 그런데 이 소년은 전혀 두려쉬하거 나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되려 대들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소년의 손을 놓아주었다. 좀더 다그쳐 보고 싶었지 만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한마디 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소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다음에 나를 또 보면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년이 그제서야 찔끔하며 겁먹은 빛을 보였다. 그러나 야광 충이 돌아서고 몇 발자국 멀어지자 소년은 그의 뒷등에 대고 욕 을 퍼부었다. "야 이 재수없는 백발 귀신아! 다음에 날 보면 네가 도망가야 될 거다!" 야광충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걸었다. 아이와 싸워 봤자 자신만 우습게 되는 것이다. '저놈, 사형과 다른 게 하나는 있군!' 하나가 아니었다. 거친 말버릇과 뻔뻔스러움, 그리고 재능이 었다. 귀영종의 신법을 사용하며 가는 그를 표적으로 주목했다는 것 이 그렇고, 비록 그가 그냥 두고 본 면도 있지만 그의 품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것이 그랬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소년이 그 정도면 대단한 눈썰미에 빠른 손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그 생각을 하고 그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게 가능할까? 어지간한 고수들 에게도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는 뒤돌아보았지만 소년은 이미 사라진 후떴다. 야광충은 속으로 웃었다. 문득 소년과 사형이 닮은 점이 하나 생각났던 것이다. 무모한 짓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사형도 사부의 장원을 털려다가 잡혔다지 않는가! '다시 만나면……!' 야광충은 그때 진운을 보았다. "늦으면 곤란한데!" 진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원도살이 인상을 썼다. 똑같 은 소리를 벌써 두번째 듣는 것이다. 첫번째는 그냥 넘겼지만 이번에는 한마디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넨 당주에 대한 믿음이 없군! 온다고 했으면 반드시 올 것 이고, 흑시 못 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 각지 않나?" 옆에서 걷고 있던 이통천이 끼여들었다. "앞말하고 뒷말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뭐라고?" "온다고 해서 반드시 오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만한 이유가 있 어서 못 올 수도 있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도살의 표정에 한기(寒氣)가 홀렀다. 말대꾸한 사람이 이통천이고,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이라 넘어갔지 만약 진운이 그런 식으로 대답했으면 단 박에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말로 이해가 안될 사람은 하고도 많지. 자네도 그렇고, 총사도 그렇다. 온다고 해놓고 안 오면 변명 따윈 들을 필요도 없겠지. 그러나 당주는 다르다. 갑(甲)이 맞다고 하면 그게 맞 다. 다시 을(乙)이 맞다고 하면 그게 맞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까!" 진운이 놀라서 그를 보았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소생이 보기에는 지이옹께서 평소에는 당주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던데, 오늘 말씀은 다르십니다 그려?" "좋아하지 않는다!" 원도살이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를 믿는다. 그게 이해가 안 가나?" 진운이 감탄했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소생은 누군가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믿지는 않습니다. 그건 누구랴도 먀찬갸자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좋 아하지만 믿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제가 누굴 믿겠습니까?" 이통천이 물었다. "그럼 형장은 왜 당주님을 모시는 거요?" "두려워서!" 진운은 잠시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이통천에게는 그 것이 실제로 야광충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처 럼 보였다. "두려워는 해도 믿지는 않는다, 가 내 생각이오!" 이통천이 다시 좌검자를 보고 물었다. "형장도 그렇소?" 고개를 들 힘도 없는지 땅만 내려다보며 걷던 좌검자가 보지 도 않고 천천히 말했다. "난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어!" "그럼 좋아서?" "나는 나 자신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지." "그럼 믿는다는 거요?" 좌검자는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통천을 보았다. 그 퀭하니 들어간 눈을 보고 이통천은 세상에 두려운 것도, 좋아하 는 것도 없다는 좌검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은 야광충의 눈과는 다른 의미에서 무감동한 눈이었 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잿라의 눈. 차갑게 죽어 버린 잿빛의 눈이었다. "그냥!" "그냥?" "그냥, 그를 보면 재미있어서!" 말하는 좌검자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그 눈이 향 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거기 야광충이 서 있었다. 어둠 속에 문득 나타난, 하지만 원래 거기 오래 전부터 서 있 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야광충이 진운을 향해 물었다. "늦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맞나?" "예, 아직 늦지는 않았습니다." 진운이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햇다. 겁먹은 듯 짓눌린 목 소리! "지금 가도 충분합니다." "그럼 가지!"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구지가는 지척이었다. 야광충이 말쌨다. "대취옹이랬던가?" 진운이 대답했다. "예, 정보대로 대취옹이었습니다. 과거 장강십팔타의 종타주 (總舵主)였던!" "협조할까?" "물론입니다." 진운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긴장을 푼 듯했다. "대세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아는 사람입니다." "통천!" "예!" 근 반 년 만에, 그것도 천신만고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겨우 찾아온 자기를 아는 척도 않는다고 내심 섭섭해 하던 이통천이 급히 대답했다. "대취옹에 대해 아나?" "대취옹 당노선생 당노구 말입니까?" 별호만 듣고도 대뜸 이름을 댄다. 야광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시 눈알을 굴리던 이통천이 야광충의 질문에 아는 대로 설 명하기 시작했다. "올해 여든서넛쫌 되었을 건니다. 이십 년 전 장강십팔타 총 타주의 직위를 제자도 아니고, 친인(親人)도 아닌 번강룡(飜江 龍) 강금척(姜金尺)에게 넘겨 주고 무림에서 은퇴했을 때 나부 파(羅浮派) 장로(長老) 신풍출수(神風出袖)와 공동파( 派)의 복마제일검(伏魔第一劍) 우석(愚石) 도장(道長)이 벌인 말싸움 은 대단했죠. 그 중에 대취옹의 나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 석 도장은 대취옹이 예순넷이라고 하고 신풍출수는 대취옹의 생 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으니 예순셋이라고 했거든요." 엉뚱하게도 나이 이야기만 하는 이통천을 말릴 생각은 않고 다 들 그냥 듣고만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원도살이 물었다. "단지 나이 때문에 구대문파 중 두 파의 장로들이 말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이통천이 묘하게 입술을 실룩거렸다. 모르면 말을 말라는 듯 한 표정. "말씀 중에 틀린 게 세 가지나 있습니다. 첫째는 나이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고, 둘째는 공동파는 구대문파에 들어가지만 나 부파는 아니라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당시에는 신풍출수만 장로였고 우석 도장은 장로가 아니었으며 이제는 두 사람 다 자 파의 장문인이라는 것이죠. 어떻게 한마디 말로 세 가지나 틀릴 수 있으십니까? 대단하시군요." 원도살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난 촌놈이라 몰라서 그러네. 자네가 잘 설명해 보게." 이통천이 다시 설명했다. "나이 때문에 어른들이 그렇게 싸우겠습니까? 원래는 한참 활 동할 나이에 은퇴하는 이유가 뭐냐, 제자도 아닌 강금척에게 자 리를 물려주는 이유가 뭐냐는 것에 대한 주측이 서로 달랐기 때 문이었죠. 신풍출수는 대취옹의 제자인 음앙쌍교(陰陽雙敎)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심각하게 비방전(誹謗戰)을 벌였던 것에 실 망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우석 도장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느냐, 술에 중독돼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했죠. 대 취옹이라는 명호에서도 알 수 있지만 술이 좀 심했거든요. 원도살은 아무리 술에 중독될 지경이라도 그렇게 중요한 일을 술김에 결정했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그는 이통천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좌검자의 낯빛이 바뀌었다는 것을 간과해 버렸다. 원도살이 말했다. "아무래도 신풍출수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갈군!" 이통천이 다시 그를 고깝게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각파의 사람들은, 아! 이 싸움은 이십 년 전에 화산에서 열렸던 제사차(第四次) 화산논검 대회(華山論劍大會)때 있었던 일이라 각파의 사람들이 많이 옆 에 있었습니다. 각파의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오 년마다 한번 여 는 논검대회인 화산논검대회에 대해서는 아시죠?" 원도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알게 됐네. 자네 덕분에." 이통천은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말했다. "각파의 사람들은 우석 도장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 죠. 우석 도장이 논리적으로 자신의 추즉을 설명했거든요. 대취 옹의 성명절기가 뭐냐, 혼원주정신공(混元酒酊神功), 주전공(酒 箭功), 취우검(醉牛劍) 등, 술하고 연관이 없는 무공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느냐, 술로 이만한 경지에 오르려면 처음 무공을 배 울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마셔 댔겠느냐, 열 살 때부터 하루 에 술을 한 동이씩 마셔 댔다고 한다면 육십사 세인 올해까지 마신 술은 일년에 삼백육십 동이, 십 년이면 삼천육백에 오십사 년이면 일만 구천사백 동이, 거기에 윤년, 윤달을 포함하면 일 만 구천칠백열 동이가 아니냐, 한 동이보다 적게 마셨을 때도 있겠지만 무공이 높아질수록 그보다 더 마셨지 덜 마시지는 않 았을 테니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마셨을 것이다. 그러고도 제 정신이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니냐 대충 이런 요지의 말이었습니 다. 그때 신풍출수가 한마디했죠." 이통천은 쉴새없이 주절거리다가 잠깐 멈추고는 근엄한 표정 으로 말했다. 신풍출수의 흉내를 내는 모양이었다. "도장의 말은 엉터리요. 우선 대취옹의 나이부터 틀렸잖소. 대 취옹은 올해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아직 예순네 살이 아니오." 원도살과 진운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단 칼에 우석 도장을 보내 버렸군그래!" "보내진 것은 신풍출수였습니다. 우석 도장이 보내 버렸죠." 이통천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십삼과 육십사라는 두 숫자를 놓고 다투던 두 사람이 결국 검을 뽑아 들었죠. 나부파는 그때 이미 극도로 약해져 있었거든 요. 그저 과거 명문대파였던 체면을 보아 초대해 준 것인데 한 참 성가를 날리던 공동파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풍출수는 나부파 최고의 고수라고 불렸지만 우석 도장의 손에 무참하게, 단 세 수만에 꺾여 버렸죠. 그날 이후로 나부파는 봉문(封門)했 습니다. 지금까지요." 이통천의 말은 끝나고,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감탄한 것인지 그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야광충이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대취옹이 장강십팔타의 전 총타주였다는 것이지? 제 자도 아닌 번강룡에게 자리를 넘기고 이십 년 전에 은퇴했고? 성명절기는 취우검, 흔원주정공, 주전공?" 이통천이 해연히 입을 벌렸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신풍출수와 우석 도장의 싸움을 이야기한 것만 기억하지 그사이에 대취옹에 대한 이야기가 다 나왔다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둣했다. 원도살이 그의 어깨를 쳤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이제 다 왔으니 그만 하세!" 그들은 이미 구지가를 걷고 있었다. 저편에 낡은 창고 몇 채 가 보이고, 그 중 하나에서는 활짝 열린 문안으로부터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 * 구지가. "유총포두께서 늦으시는군요!" "남경에서 양주는 먼 거리다. 오실 때가 되면 오시겠지." 잠시 침묵, 그리고 조남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무래도 우리만으로는 무리 아니겠습니까?" "우리만이 아니면?" 모충국이 조용히 반문했다. "남경수비대(南京守備隊)의 군사라도 끌고 왔어야 한다는 건가?" "양주부 인근 현(縣)의 포쾌와 군사들만 모아도 삼백은 될 텐 데요?" "자넨 전쟁을 하고 싶은 건가? 난 범인을 잡고 싶을 뿐이네!" 침묵이 지켜졌다, 모충국이 다시 말했다. "관(官)이 나서서 힘을 행사하는 것에는 많은 군사가 필요없 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네. 관에 거역하는 것은 조정에게 저항하는 것이고, 반역이네. 반역은 수백 군사에게 저항하나 나 처럼 보잘것없는 추관 나부랭이에게 저항하나 마찬가지지. 난 그들의 의사를 알아보고 싶네." "그러다가 대역무도한 놈들에게 일이라도 당하시면?" "그래서 자네들을 데려오고, 유총포두를 부르지 않았나?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자네들은 신속히 도주해서 유총포두의 명에 따르면 되는 걸세!" "하지만!" "쉿! 왔어!" 창고 앞에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의 머리카 락이 은발인 것이 특이했다. 창고 안에서 몇 사람이 나와 문 옆에 도열했다. 새로 온 사람 들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대취옹은 낮게 중얼거렸다. 앞에 앉은 흑수당과 그들 능파당 의 인물들조차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 은 목소리였다. "요구가 뭐요?" "요구라기보다는 제의올시다. 그 두 단어 사이에는 작은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지요." 진운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 제의는?" "아시다시피 양주부의 사공들, 부두의 일꾼들, 물주(物主)인 상인들, 객점의 주인들이 이미 절반 이상 우리 흑수당의 형제가 되어 있소. 애초에 우리들은 세력 확장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능파당의 영역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소만 일이 그렇게 되어 버 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형제로 받아 달라는데 거절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을 하고 있는데도 대취옹은 아무 소리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으로 배석한 능파당의 인물들은 어깨를 들썩이 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진운의 어투가 더욱 은근해지고 정중해졌다. "같은 영역에 두 파가 있으면 반드시 되를 보게 되지요. 그래 서, 흑시 있을 수 있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 흑수당은 능 파당에 통합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어차피 사공들의 권익을 보 호하기 위한 단체이니 능파당과 혹수당은 목적이 같다고 할 수 있죠. 이 김에 형제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것뿐이오?" 대취옹이 물었다. 감정의 변화를 엿볼 수 없는 담담한 어조였다. "물론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대취옹의 담담함에 대해 진운은 호감 어린 미소를 돌려보내 었다. "당노선생을 예를 갖춰 우리 흑수당의 어른으로 모시고 싶습 니다." "어른으로 모신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당에는 가입하는 순서대로 항렬을 매기는 규칙이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능파당의 식구들은 모 두 한 항렬이 된다는 말쏨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노선생을 무 시하는 처사가 될 뿐 아니라 계통에 혼란을 주는 일이 될 것입 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재의 직위에 기준해서 항렬을 매긴다 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항렬이라!" 대취옹은 쪼용히 되뇌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살벌 해지고 있었다. 진운의 제안은 결국 능파당은 항복하고, 대취옹 은 수하로 들어오라는 얘기나 다름아닌 것이다. 전날과 같이 창고의 안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예순 명의 사 공들, 그리고 대취옹의 옆에 배석한 세 명의 중년인들에게서 살 기가 뭉클거리며 뿜어졌다. 능파당 일, 이, 삼 당주인 호연 형제(湖連兄弟)와 능파당에 속한 사공 전원이었다. 오늘 능파당은 전인원을 동원해 흑수당 을 맞은 것이다. 그들 전원의 소맷자락 속에 감추어진, 그러나 굳이 숨길 생각 은 없는지 끄트머리 뾰족한 부분은 일부러 내놓은 아미자(蛾眉 刺)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에 대해 흑수당은 단 일곱 명이었다. 아까 당주라고 소개한 은발의 사내와 도맡아 나서서 말하고 있는 지사생을 제외하면 아무도 소개를 않았지만, 대취옹은 그 중 한 명은 소개없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유항경자가의 떠돌이 늑대 좌검자였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정말 이 사내마저 혹수당에 가입했단 말인가?' 좌검자는 무시해도 좋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적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두려운 것은 그들에게 좌검자를 끌 어들일 정도의 흡인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취옹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진운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는 질문을 했다. "내 항렬은 그럼 어떻게 되오?" "현(玄) 자 의 삼(三)을 쓰게 됩니다." "현 자의 삼?" "우리 당에는 현 자 항렬은 둘밖에 없지요. 현일과 현이라는, 당노선생이 현삼이 되시는 거지요." '천(天) 자는 당주가 쓰겠고, 그심 지 (地) 자는 누군가?' "같이 오신 분들을 소개해 주시짓소?" '늙은 여우가!' 진운은 조금 짜증이 났다. 얘기가 잘 돼서 능파당이 그들의 일원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잘못하면 흑수당의 내부 사정만 알려 주고 마는 게 아닌가! '좋아, 네가 원한 것이라면!' 진운은 입가에 묘한 빛을 띠며 같이 온 일행을 한꺼번에 소개 해 버렸다. "진작에 소개드렸어야 하는 건데, 결례를 했군요. 여기는 지 자의 이(二)를 쓰시는 원도살, 지 자의 오(五)를 쓰는 이통천, 지 자의 육(六)과 칠(七)을 쓰는 도신과 도귀 형제, 그리고 현 일, 유항경자가의 좌검자입니다. 대취옹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좌검자 외에는 어차피 전부 처음 들어 본 이름이니 놀랄 것이 없지만 원래의 명호까지 댔다는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이놈이!' 그는 진운을 노려보았다. 능파당의 전수하 졸개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들이 비밀로 지켜 온 명호를 대었다는 것은 만약의 경우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죽이겠다는 위협이나 다름없었 기 때문이었다. 진운은 자기 소개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억기 소생은 지 자의 사(四)를 쓰고 있습니다만 원 래는!" "알고 있소!" 대취옹이 그의 말끝을 잘랐다. 진운이 약간 놀란 빛으로 그를 보았다. "무림에 대명이 자자하신 사사 중 일 인, 사유라 불리는 음양 산인 진운, 진선생 아니시오?" 진운의 침착이 무너졌다. 스스로 명호를 대는 것과 상대에게 간취당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생과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명호를 다 아시다니, 당노선 생의 견식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군요!" "노필부의 견식이야 보잘것없지만, 이번에는 알 만한 이유가 좀 있어서!" 대취옹의 그 말이 신호였던 것처럼 사람들의 뒤에서 한 사내 가 주줌주춤 걸어나왔다. 진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놈인데?' 구련자에게서 점을 보던 그 사내 아닌가! '그가 왜 여기 있지?' 진운은 마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능파당 제삼 당주 호연각이 진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나?" 사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 사기꾼!" 그는 이까지 갈아붙이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놈 때문에 통인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집안은 파산을 했습죠! 마누라는 도망가고, 딸년은 저 사기꾼을 찾기 위한 노잣돈 때문에 기루에 팔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원수놈을 당장……!"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렀다. 뒤에 선 능파당의 사내가 잡지 않았으면 달려들 기세였다. 진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내가 누군지 기억해 낸 것이다. '그 통인놈 아냐? 마…… 뭐랬던가?' 사기꾼이 피해자를 만나는 것보다 재수없는 일이갚 없다. 예 전에 입혔던 피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 기를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기꾼임을 알고서도 누가 그의 말을 믿어 쭐 것인가? '젠장!' 진운은 이런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를 보이기로 했 다. 어차피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중원은 이런 경우 정말 좁은 공간인 것이다. "어이, 그러고 보니 마형제, 그래 마형제 아닌가? 그 동안 어 렇게 지냈다고? 난 자네가 그날 돈 좀 벌었는 줄 알았지. 적도 들을 놓치긴 했지만 그거야 자네 잘못이 아니지 않았나!" "뭐, 뭐라고? 이 파렴치한!" 마원은 어찌나 기가 막힌지 거품을 물고 넘어갈 뻔했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저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줄이야! 진운은 자신의 태도가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 우에는 먼저 훙분하면 당하는 것이다. 통인놈이 조금만 더 훙분 하면 죽여 버려도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더 말하려 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눌렀다. 원도살이었다. 진운이 이유를 물으려 하자 원도살은 입을 막는 시늉을 쌨다. 그 눈이 심상치 않아 진운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도살이 말했다. "이 친구를 데리고 나온 이유가 뭐요?" 대취옹은 잠깐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평생 몇 개의 이름을 가졌었지. 이제 와서 또 하나의 이 름을 가진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는 마원을 가리켰다.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구려, 이런 일도 있고 보니!" 그는 다시 진운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는 신뢰가 전제되는 것이 아니겠소?" 손 하나가 탁자 위에 올려졌다. 대취옹은 이건 뭐냐는 듯이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이 얇은 탓인지 손가락과 손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귀하!" 손의 임자, 야광충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대취옹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감을 받았다. '이놈은 뭔가 다르다!' 야광충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권고였다." 대취옹이 물었다. "지금은?" "협박으로 바뀌었다." 야광충은 손바닥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살 텐가……." 그는 손을 돌려서 손등을 보였디. "아니면 죽을 텐가?" 대취옹이 조용히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선택은 그것뿐이오?" "그렇다! "어쩔 수가 없겠군요!" 대취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홀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 만, 때로는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지금 어떤 상황인가?" 유소백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의 음성이 모충국의 귀를 간 지럽혔다. "창고 안에서 모종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타 협하거나, 아니면 싸우겠죠." "후자가 맞는 모양이군!" 창고 안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질어나오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거절하겠다!" 대취옹은 쓰게 웃었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당해 본 것은 팔 십 평생에 처음이었다. "말이 필요없단 얘기요? 나도 늙었나 보군 어린애처럼 떼를 쓰려 들었다니 말이외다. 하나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알면서 도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요. 들어주고 안 들어주 고는 당주의 맘이네만 노필부는 부탁을 하는 수밖에 없겠소." 그는 자신을 따라 나온 육십삼 명의 능파당 식솔들을 둘러보 았다. "노필부와 이 세 아이는 어찌 되었건 귀당의 사람들과 싸우겠 소만, 나머지 아이들은 결과에 상관없이 살려 주는 것이 어떻 소? 그들은 우리가 없으면 어차피 귀당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으 니 말이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대취옹을 향해 까 닥거렸을 뿐이었다. 대취옹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땅 에 누워 버렸다. "취팔선보(醉八仙步)!" "취우검을 쓰려 하는군요!" 작은 대화가 오갔다. 대취옹의 몸은 눕고,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일어나고, 바닥에 뒹굴고, 비틀거리고, 다시 쓰러지듯 기대어 왔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지만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현란한 신법이었다. 그의 손에는 짧은 낚싯대가 들려 있었는데, 이 순간 그것은 날카로운 장검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경기를 일으키며 야광충과 그를 중심으로 한 방원 삼 장여의 공간을 물샐틈없이 휘감고 있 었다. 한오라기 한오라기가 가는 면도날로 만들어진 듯한 그물망이 야광충을 둘러싸고, 휘감아 흐르며, 소리 내어 울부짖다가 한 순간, 폭발적으로 좁혀졌다. 처음의 두 배로 길어진 낚싯대가 만월처럼 휘어지고, 어느새 풀려진 은빛 바싯줄은 공간을 몇십 토막으로 잘라 갔다. 그 줄 끝의 한 점 섬광은 낚싯바늘일 것이다. 야광충의 목덜미를 찢어 발길 낚싯바늘! 야광충은 그제서야 손을 내밀었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은라 섬광을 한 손으로 막아 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귀찮다는 듯 낚싯줄이 만든 그물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대취옹의 눈이 번뜩였다. '가소로운! 천잠사로 만든 줄을 잡으려 들어?' 낚싯줄이 더욱 날카롭게 당겨지고, 한 점 섬광은 살아 있는 파리처럼 묘하게 날아 야광층의 손을 비껴 목을 노렸다. 야광충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한 순간 빨라지는 듯싶었 다. 그리고 멈주었다. 천라지망이 갈갈이 찢겨졌다. 삼 장의 공간을 뒤덮은 섬광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한 손에는 낚싯줄이 감겨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대취 옹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단 한 수였다. 단 한 수만에 전대의 무림고수, 혹도 십대고수 중의 하나이자 장강십팔타의 전대 총타주가 목덜미를 잡혀 제압당한 것이다. 대취옹의 눈이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가 곧 절망감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는 체념한 듯 자신의 목을 잡은 그 팔과 야광충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야광충이 조용히 말했다. "보법이나 신법으로는 무리지." 귀영종의 신법, 보법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취팔선은 아니 었다. 대취옹은 야광충의 장점을 공격한 것이다. 대취옹이 중얼거렸다. "귀영종인가? 언젠가 그게 고수의 손에 들어가면 큰일을 저지 를 것이라고 봤었네!" 야광충이 눈을 빛내었다. "귀영종을 아는가?" "야유신 예충을 안다고 해야겠군." 야광충은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대취옹이 물러서며 고개 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의 제자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에게 자네 같은 제자 가 있을 리가 없는데? 기질이 전혀 달라." 야광충은 호연 형제들과 싸우는 도신 도귀, 그리고 원도살을 보며 짧게 대답했다. "제자를 잘못 두는 경우도 있지." 대취옹은 야광충의 시선을 따라 싸움터를 보더니 체념한 빛으 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노필부가 그 경우가 되었군!" 마원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창고 옆, 횃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저 사기꾼을 반드시 잡는 줄 알았는데 헛된 기대가 되 고 말았다. 고수라던 늙은이는 단번에 목덜미를 잡혀 버리고, 그 제자라는 중년인들도 목에 칼이 겨눠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 지 않은가? 쌍둥이 형제 도신 도귀와 험상궂게 생긴 노인 원도살의 손에 그들은 완전히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아직 사람들은 많았지만 마원이 보기에는 제대로 덤벼들어 이 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도 귀주성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덕에 그 정도 눈치는 볼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속담도 주워 들은 것이 있었다. '청산(靑山)이 있으면 땔나무 걱정은 없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복수는 가능할 것이다. 언젠가는 말이다! 그는 어둠 속에 들어가자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저런 엉 터리 집단에 도움을 청하라고 한 점쟁이를 찾아가 혼을 내 줄 산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야광충이 말했다. 대취옹이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 몸을 움직여 다시 체조를 해보란 말인가? 사양하겠네!" "그럼?" 대취옹은 대답 대신 돌아서서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도 봤겠지? 오늘부로 능파당은 해체다!" 그가 다시 돌아섰다. "이젠 됐나?" 야광충은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귀에는 대취옹말고 다른 사 람의 목소리도 들려 오고 있었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말했다. "나와라!" "들킨 걸까요?" "그런가 보군!"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니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세!" 유소백이 모충국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이미 들린 처지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가면 더 창피하지!" 보이지 않는 압력이 그들의 등에 가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미 그들의 뒤에서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운하의 옆으로는 십여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대부분이 능 파당의 사공들이 저어 온 것이지만 그 중에는 다른 것도 있었다. 구멍나고, 낡아서 버려진 배들이었다. 그 중 하나의 그늘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모충국, 유소백, 그리고 조남성이었다. 그들의 복장을 보고 진운의 낯빛이 변했다. "포쾌?" 유소백이 허리춤의 금라 포승을 들어 보였다 "본관(本官), 남칠성 총포두 유소백이다. 너희 불손한 무리를 '공포의 밤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한다. 반항은 곧 반역임을 알 면 순순히 포승을 받으라!" 원도살이 야광충의 옆에 와서 섰다. "죽여 버릴까요?"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었다. 남칠성 총포두든 뭐든 죽여서 묻어 버리면 한동안 찬바람은 불겠지만 귀찮음을 면할 수는 있 을 것이다. 야광충은 원도살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 하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유소백이 호통을 쳤다. "결국 반항할 셈인가? 이 주변 일대가 남경수비대 병사들로 천라지망(千羅地網)이 쳐져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때 몇 란 떨어진 곳에 있는 창고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유소백은 그쪽을 힐끗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연락원으로 남겨 두었던 등적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저 바보 같은 놈!' 속으로 욕을 하던 유소백은 등적의 팔을 꺾어 잡고 있는 그림 자를 보고서는 혀를 찼다. '이건 저 녀석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놈들의 준비성이 대단하 다고 볼 수밖에 없겠군!' 등적이 그들의 앞에 쓰러졌다. 그의 팔을 잡고 온 자가 밀어 버린 것이다. 분명 불빛 속에 서 있지만 어쩐지 모호한 그림자로만 보이는 자였다. 그 그림자, 둥평이 말했다. "주변에 있는 관부의 무리는 이자가 마지막입니다." "잘됐군!" 원도살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모충국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날카로운 콧대가 불빛에 두드 러져 보였다. 대취옹이 중얼거렸다. 야광충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신임 추관이군!" 그 말은 필요없었다. 모충국은 불빛 속에 나서더니 자기 소개 부터 했던 것이다. "양주부 신임 추관 모충국이다. 본관은 오늘 한 가지를 확인 하러 왔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무건게 말했다, "너희들이 도대체 여하한 마음으로 역모(逆謀)를 획책(劃策)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역모라!' 대취옹이 피식, 헛읏음을 터뜨렸다. "나으리, 그런 일은 좀더 고상한 분들이 하는 것입죠. 저희 같은 무지랭이들이 입에 올릴 일이 아닌뎁쇼?" "무지랭이는 아니지만!" 진운이 대취옹의 말에 토를 달앗다. "확실히 역모 같은 일은 좀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일임에 는 틀림없지. 당신네 관헌들은 아무에게나 역모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그걸로 끝이지. 어떤 일도 그때부터는 가능해지니까 말 이야!" "그게 아니라면!" 모층국은 강하게 끊어 말했다. "역모를 획책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근 양주부성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어라 변명할 텐가? 대낮에 칼부림을 부 려 수십 명을 도륙하고, 운하에는 연일 시체가 떠다니게 만들었 다. 급기야는 선량한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 않았는가!" 진운이 따져 물었다. "그게 역모란 말인가?" "그럼 아니란 말이냐?" "이것 보시게 추관나리! 트집을 잡으려거든 좀더 그럴둣한 것 으로 잡게나. 창기들 등쳐먹고, 소금 몰래 팔아먹는 건달들 몇 좀 손봐 줬기로서니 그게 어떻게 역모의 증거가 되는가?" "나라에는 국법이 있다. 너희들이 법을 집행하는 자가 아닐진 데 살인과 폭력을 임의로 자행하여 성내에 흉흉한 공기를 떠돌 게 하고, 백성들로하여 불안에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은 역모를 위한 전초공작이 아니었던가!" 대취옹이 다시 나섰다. "나으리, 본분을 행하셔도 한계가 있고, 고지식하셔도 분수가 있습죠. 저희 무림인들이 다툼이 있으면 법보다는 칼로 해결하 고, 관헌의 눈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나름대로 규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걸 역모로 몰 아붙이면 걸리지 않을 무림동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말이 길어지는군!" 야광충이 한걸음 나섰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주관?" 모충국이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위엄이 가득한 눈빛, 많은 사 람을 다스리는 관리의 힘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 시선을 맞받았다. 관리의 그것이 그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었는 것이다. 모충국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흑수당주인가?" "그렇다면?" "흑수당을 해체하고 순순히 나를 따라 관아로 따라오라!" "가면?" "법에 의거해 네 죄를 밝힐 것이다." "싫다면?" 땅바닥에 구르다가 일어난 등적이 소리쳤다. "체포 압송의 명에 거역하면 주살(誅殺)만이 합당한 보상이다!" "주살?" 원도살이 피식, 웃었다. "또 그런 말을 듣다니, 나도 말년에 재수가 없는 편이군!" 몽고에서 탈출하며 그들이 당한 상황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원도살의 눈릿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너회들은 해선 안둬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유소백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섰다. "무공은 무림인만이 하는 게 아니지! 우리 관리 나부랭이들도 손발 놀리는 것은 조금 배웠다네." 놀리둣 빈정거리둣 말하던 그가 돌연 안색을 굳히고 외쳤다. "무림인은 황토(皇土)에 살지 않느냐? 너희들은 충효의 법칙 에서 흘로 벗어난 종자들이냐? 나라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 누 구고 부모의 몸을 빌어 나오지 않은 자 누구냐? 있으면 나와 봐라!" 야광충의 눈에 불빛이 번뜩였다. 유소백의 말이 그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린 것이다. "나라? 부모? 그런 자가 있다면?" 그의 눈이 차츰 푸르게 불타올랐다. 야수의 눈빛과도 같은 가 공할 살기가 장내에 짙게 깔렸다. "오륜을 말했나? 그런 건 인간끼리나 지키라고 해!" 유소백은 그의 살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물 었다. "너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아직 몰랐나?" 야광충이 대답했다. "우린 그림자다!" 살기가 뻗쳤다. 유소백은 전신을 찌르는 그 살기에 예민하게 반응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별호인 신응은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창응십팔박(蒼鷹十八搏)은 공중에서 열억덟 번이나 몸을 회전시키며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무공 으로 그 방면에서는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불리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독수리는 채 날아오르기도 전에 날개를 꺾이고 말았다. 유소백이 공중으로 떠올라 막 두번째의 회전을 시작하려는 찰 나에 야광충은 이미 그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뻗쳐 오고 있었다. "컥!" 쿵! 유소백의 몸이 땅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야광충이 그의 목을 움켜잡아 그대로 찍어 내린 것이다. 그렇게 땅에 반쫌 몸을 굽히고 있는 그를 향해 나머지 세 사 람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유소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피융! 두 개의 철환이 야광충의 등을 향해 날았다. 등적이 쏘아 보 낸 것이었다. 그가 항상 손바닥에 넣고 굴리는 물건이었다. 조남성의 별호는 양주알섬, 본인은 그리 빠르지 않다고 하지 만 양주부 일대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지금 그 경공술 이 발휘가 되었다. 그는 낮게 바닥에 깔려서 달렸다. 그의 한 손이 야광충의 다 리를 치고, 다른 한 손은 유소백의 옷자락을 잡아채었다. 모중국의 손이 야광충을 향해 뻗었다. 처음에는 그저 맨손으 로 비스듬히 뻗어 장력을 격사하는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소맷자락 속으로부터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더니 그것은 한 자루 검이 되어 야광충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었다. 모충국의 무기는 야광충의 유리환검처럼 팔에 감고 다니는 환검(幻劍)이 었던 것이다. 세 가지 공격을 동시에 받는 야광충을 보고 대취옹이 짧은 경 호성을 내뱉었다. 날아오는 철환이나 조남성의 공격은 갑작스럽긴 했지만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충국의 공격은 갑작스러울 뿐더러 극도로 날카롭고 현기(玄氣)가 섞여 있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두 개 의 철환이 그의 묵린수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튕 겨 나갔다. 파팍! 조남성이 한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야광충에게도, 유소백에게도 닿지 않았다. 야광충이 튕겨 보낸 철환이 그의 양손을 뚫어 버렸던 것이다. 모충국의 검이 야광충의 비구에 부딪쳐 멈추었다. 야광충은 다른 한 손을 등적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 손이 주 먹을 쥐려는 순간, 그리고 양인장이 발출되려는 순간 그가 잠시 멈추었다. 끼리릭! 모충국의 검이 뱀이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듯 야광충의 팔을 휘감았다. 그의 검은 환검일 뿐만 아니라 휘고 꾀지는 것이 자 유로운 연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 가까이 다가온 등직의 손이 다시 펴졌다. 두 개의 철환 이 지척지간에서 발출되었다. 야광층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주먹을 펴고 다가오는 철환, 그 리고 그 뒤의 등직을 향해 뻗었다. 다른 한 손은 모층국의 검을 움켜쥐었다. 끼리릭! 모충국의 검이 중간 부분을 야광충의 손에 잡힌 채 멈추었다. 원래는 야광충의 팔을 난도질하고 지나가 심장에 꽂혔어야 했을 검이었다. 그런데 그의 검은 장갑, 묵린수에 잡혀 버린 것이다. 펑! 등적이 던진 철환이 야광충의 손에 맞아 비스듬히 튕겨졌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들은 그것이 정면으로 맞아 튕긴 것이 아니 라 비스듬히 아래 부분에 파고든 야광충의 손이 만들어 낸 작품 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야광충의 손은 등적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유소백의 위로 쑤셔 박았다. 미리 방어하던 등적의 손은 야광층의 간단한 손동작에 양쪽으로 벌어진 다음의 일이었다. 모충국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그는 야광충의 손에서 검을 빼려고 했지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에서 손을 떼려 해도 아교에 손이 달라붙은 것처럼 떼지지도 않았다. 야광충은 그제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반쫌 허 리를 구부린 자세에서 세 사람을 제압한 것이다. 야광충은 한 발로 유소백과 등적의 등을 포개어 밟고, 한 손 으로는 모충국의 검을 움켜증 채 조남성을 노려보았다. 조남성은 양손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채로, 겁먹은 눈으로 그 를 보고 있었다. 야광충이 모호한 그림자, 등평을 보았다. "왜지?" 조금 전 등적이 다가올 때 양인장을 쓰려고 했던 그였다. 그 런데 그 순간 등평이 전음을 발해 그를 말렸던 것이다. 그 바람 에 한 수씩을 더 써야 하지 않았던가! 야광충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 왔다. 등평의 음성이었다. "비밀로 해주시길, 친동생입니다." 야광충은 등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가?" 그는 다시 모충국을 보았다. "누구에게서 배웠나?" 모충국의 얼굴은 붉게 달라올라 있었다. "죽여라!" "아니! 난 네게 누구에게서 천산파의 검법을 배웠나를 묻고 있다." 모충국의 검법은 천산파의 검법이었던 것이다. 모충국이 고집스럽게 외쳤다. "알 필요 없다. 죽여라!" 그의 얼굴은 손상된 자존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야광충의 얼굴에 스산한 그늘이 스쳤다. "죽여 달라?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 야광충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으으윽!" 둥적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등평의 신형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나 야광충의 성격을 잘 아 는 그로서는 더 이상 용서를 빌 수는 없었다. 땅에 처박히는 충격으로 잠시 움직이지 못하던 유소백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단지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도 쉽사리 당할 줄이야!' 오늘의 일은 확실히 그들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사전에 마음의 준비라도 했다면 이렇게 쉽게 당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둥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차 강해졌다. 으드득! 자신의 몸 위에, 그리고 야광충의 발 아래 바로 깔려 있어서 충격을 더 직접 받고 있는 등적의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이렇게 죽는가? 이렇게 비참하게!' 그렇게는 안될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그때 나타나 말했다. "사정을 봐주십시오, 당주!" 장내에 백리극이 나타나 있었다.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야광충의 발과 손에서 세 사람이 풀려난 다음이었다. 백리극이 말했다. "제자가 역모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소백이 괴로운 빛을 떠올렸다. 누가 백리극이 역모를 꾀했 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를 역모로 몬 그 당사자들뿐일 것이다. 유소백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리고 그 사건의 이 면어! 어떤 내막이 있는지 백리극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 흑수당도 아닙니다." "우리 혹수당?" 백리극이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덕였다. "예, 우리 흑수당입니다." 유소백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대명군부 최고의 고수, 정무장군 백리극이 무림 흑도의 마두 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더 할 수가 없었다. 대취옹이 모충국에게 다가갔다. "노필부는 이곳 양주에서만 이십 년을 살았지요. 그래서 볼 것 안 볼 것을 여럿 봤습지요.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것이 좋겠군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소란도 더 없을 것이고, 양주의 밤은 이미 새 주인을 맞았으니까 말입죠." "새 주인이라!" 모충국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관이 이렇게 흑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삶들을 법을 집행하는 그가 용납하고 넘어가야 한단 말인가? 대취옹의 말이 그의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 "여태까지처럼. 그렇죠, 여태 네 개 파와 관부가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지내 왔던 것처럼 이제는 흑수당과 그렇게 지내면 되는 것이죠. 변한것은 얼굴뿐, 관계에 달라진 것은 없는 것이죠." '그랬던가? 그렇게 여태 지내 왔단 말이지!' 모충국은 관부, 아마도 사실은 지부대인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 관부가 기존의 흑도 네 개 파와 암묵적으로 거래를 했다는 것 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흑도를 토벌하려면 먼저 지부부터 족쳐야 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는 고개를 들어 야광충을 보며 물었다. "이제 돌아가서 토벌령이 내릴 것이 두렵지 않은가?" 대답은 대취옹이 했다. "우리 흑도인에게 그것은 항상 있는 일입죠. 바람이 불면 수 그리고, 지나가면 다시 서죠. 그게 흑도인이고 백성입니다. 하 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얼굴은 달라져도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는 것을!" 모충국과 유소백 일행은 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야광충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좌검자는?" 좌검자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이 진운을 보았다. 진운이 약간은 위축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 야광충은 좌검자가 누굴 쫓아갔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없어진 사람은 좌검자말고도 있었던 것이다. 마원이었다. 원도살이 말했다. "제가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로 안 좋은 냄새가 나서!" "그를 죽이라고 했나?" "아닙니다." 원도살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보낸 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누구?" "점쟁이입니다." 원도살은 구련자에 대해 설명했다. "몇 가지 사안이 그와 연결됩니다. 당주님에 대한 암살 시도 와, 지사를 향한 음모 등!" 야광충은 진운에게 물었다. "그와 통천방이 무슨 관계가 있지?" 진운이 놀란 빛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이통천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자는 통천방의 팔대당(八大堂) 당주 중 하나입니다. 통천 방의 팔대당은 내사당(內四堂)과 외사당(外四堂)으로 나뉘는 데……!" "그렇다면 짐작 가는 점이 있다!" 야광충은 이통천의 말을 끊고는 진운을 향해 명령했다. "그가 양주로 온 이후의 행적을 조사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진운이 대답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곳으로 달려왔다. 진운이 그를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나타난 사람은 월몽영이었다. 그녀는 진운은 쳐다보지도 않고 야광충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 려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들이 경연루에 왔어." "누구?" "소림사!" "그래서?" "혈문룡이 졌어!" * * * 남부동로(籃阜東路). 북문 가에 있는 구지가에서 남동쪽에 있는 단자가로 가는 길 은 유항경자가를 통하지 않고도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동문 가로 통하는 남부동로(籃阜東路)였다. 남부동로. 이 거리에 푸른 언덕[籃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이 양주부에서 가장 부호들만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약간 경사진 거리를 따라 높은 담과 붉은 대문만이 보이는 호 화로운 저택들이 있고, 그 저택.마다에는 중원에서도 유명한 양 주의 정원들이 있는 것이다. 멀리 성벽에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푸른 언덕과 연못이 이 거리의 이름이었다. 양주성의 다른 곳과 달리 주루나 객점은 보이지 않고, 성내의 부호들만 사는 곳이라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금 그 중 한 저택의 담 옆에서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원과 구련자였다. "도장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저만 큰일 났습니다요, 이제 그놈이 저만 보면 죽이려 들 텐데 어쩝니까요 전 이제 죽은 목 숨입니다요. 그냥 관가에 고변(告變)하고 말 것을!" 마원은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것 같은지 울상이었다. 그러나 구련자는 태연했다. "걱정 말게! 내가 보기에 자네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걸세." 마원이 금세 표정이 달라졌다. "그렇습니까요? 제가 그렇게 오래 산단 말씀입니까요?" 구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그럴 걸세. 뭐 어떤 사람은 나이 서른에 노망들어 벽에 똥칠한다고도 하네만 자넨 오래 살아서 그럴 걸세!" 마원이 재수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똥칠 얘기는 그만 하시고요,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도 않습니 다요. 저는 그저 그 사기꾼놈 목을 비틀어 버릴 때까지만 살면 됩니다요. 우선 이 위기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나 알려 주십 시오." "생과 사는 원래 하늘에 달린 거라 마음대로는 못하니, 자네 라고 별수 있겠나. 그 사기꾼놈인들 또 별수가 있으랴?" 구련자는 시 음듯 흥얼거리더니 문득 긴장해서 멈추었다. 골목 저편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반바지만 입은 깡마른 사내, 한쪽 소매는 바람에 휘날리는 것 으로 보아 외팔이임이 분명했다. 구련자가 마원을 홀겨보았다. "미행당했구나!" 골목에 나타난 사내는 좌검자였다. 마원이 급히 손을 저었다. "제가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요. 그리고 아무도 안 따라왔는뎁 쇼?" 구련자는 한숨을 쉬었다. 마원이 누가 따라오는지 어떻게 알았을 것인가? 이런 경우를 생각 못한 그의 잘못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 사내를 보낸 그, 진운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눈을 라내었다. "여보게, 자네에게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원이 벽에 기대어 물러서고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방법입니까요?" "오늘 봤던 사람들 기억하지? 그 중 하나에게 혹수당에 가입 시켜 달라고 부탁하게. 자네가 보기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으 로 말이야!" "예?" 마원은 혼비백산했다. "지금 저보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입니까? 거기 가면 그놈에게 죽을 텐데요" "지금 자세한 말을 할 여유가 없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자넨 목숨도 부지하고 원한도 갚을 수 있을 걸세.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은 자네도 알!지?" 좌검자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진운이 보냈느냐?" 좌검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걸어오는 속도를 늦추지 않 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구련자는 깃발을 움켜쥐며 말했다. "대답을 않아도 상관은 없지. 온 곳으로 돌려보내면 되니까." 좌검자는 여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기가 거미줄처럼 가닥가닥 뿜어져 나왔다. 구련자는 켕기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침 착하게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 보낸 것이지. 그러니 이제 하늘로 돌 아가면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겠지. 자네 돌아가거든 생사 복 구련자가 하늘의 뜻을 대신 이행하는 수고를 해줬다고 말 좀 전해 주게나." 좌검자는 여전히 다가서고, 거미줄은 점점 더 많아지고, 질겨 졌다. 구련자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단지 다가서기만 하는데도 온몸을 압박해 오는 이 살기와 기 세는 무명소졸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점을 쳐 보고 싶어졌다. "기다리게! 점괘나 한번 뽑아 보지." 구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산통을 흔들더니 산가지 하나 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우는 듯, 웃는 둣 묘한 표정. "내가 왜 생사복인 줄 아나?" 대답은 없었다. "다른 점괘는 몰라도 생사를 가르는 점괘는 완벽하게 맞추기 때문이지! 이제 점괘가 나왔네! 궁금하지 않나?" 좌검자는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자넨 생사의 문제에 관심이 없단 말인가?" 좌검자가 처음으로 대답했다. "없어!" 구련자는 인상을 썼다.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생과 사는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 나 초미(焦眉)의 관심사인데 왜 관심이 없어? 넌 죽음이 두렵지 도 않으냐?" 좌검자가 대답했다. "내겐 죽음이란 별의미가 없어. 삶이라는 것이 별가치가 없으 니까!" "좋아! 어쨌든 점을 켰으니까 결과를 가르쳐 주지. 확실한 죽 음이다!" 죽음이라는 말과 동시에 그는 좌검자를 향해 깃발, 사실은 그 의 독문병기인 생사번(生死幡)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누런 깃폭이 한 순간 좌검자의 사방을 점하고 덮어 버렸다, 좌검자가 왼손을 뻗쳐 어깨 위로 올라온 검자루를 잡았다_ 파앙! 검캉이 번뜩이고, 생사번의 깃폭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그 사이로 구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피 한 방울! 구련자는 이마에서 흐르는 피 한 방울을 느끼지 못하는지 다 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봐! 이렇게 죽잖아. 내 점괘는 생사에 관한 한 틀린 적이 없 어!" 그의 이마로부터 턱까지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 혈선은 피의 분수로 바뀌었다. 구련자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점괘는 자신 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좌검자의 눈이 마원에게로 향해졌다 마원이 갑자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도 흑수당에 받아 주십시오." 제36장 7월 3일 경연루. "이게 뭐하는 일이야?" 원도살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어 할 수밖에 없었다. 월몽영의 말을 듣고 급히 달 려온 경연루의 한 방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광경이 월몽영을 따 라온 원도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가 끼쳐 오고, 역겨운 토사물 의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혈문룡은 바닥에 모로 누워 있고, 기녀 하나가 그의 입에서 홀러나온 것이 분명한 토사물을 걸레로 훔치고 있었다. 방 한편에는 어색한 표정의 화상 셋이 서 있고, 그들의 뒤에 는 또 한 사람, 그것도 화상이 큰 대자로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는 몇 개의 항아리, 찢어진 붉은 딱지가 주둥이 에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술항아리임에 틀림없는 몇 개의 항아리 가 뒹굴고, 탁자 위에는 뜯어먹다 남은 돼지뼈다귀들이 수북했 다. 월몽영이 피식 웃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군!" 누구도 이 방이 격투의 장소라고는 생각을 않을 것이다. 방은 단지 한판 질펀한 잔치가 끝난 잔칫집 정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 었다. "여기서 싸웠다는 것이냐?" "싸우긴 싸웠죠, 단지." 월몽영이 모호한 미소를 떠올리며 원도살의 질문에 대답했다. "술로요." "술?" "술내기를 하더군요." 원도살은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월몽영 이 설명했다. "저 화상들이 찾아온 것이 초저녁 때였죠." 그들이 찾아왔을 때, 혈문룡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몽 고식으로 쟁반에 가득 삶은 고기를 쌓아 놓고 술을 마셔 가며 먹고 마시는 중이었다. 그때 그들이 방안으로 안내되어 왔다. 지금 미륵처럼 높이 솟은 배를 아무렇게나 내놓고 자는 험상 궂은 중, 도연은 방에 들어서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것이 혈 문룽을 보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술과 고기를 보고 그런 것인 지는 모른다. 월몽영이 보는 바로는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는 혈문룡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 소림사 도연이오. 그리고는 혈문룡의 앞 자리에 앉았다. 혈문룡이 그때 대답했다. --난 혈문룡이오. 식사나 갈이! 그 다음 말은 필요가 없었다. 소림사에서 왔다는 화상, 화상이 라기보다는 대머리 산도적이 더 잘 어울릴 이 도연이라는 화상은 혈문룡이 말하기도 전에 이미 고기를 잡고 뜯어먹고 있었다. 혈문룡은 그래도 한마디를 더 했다. --뭣 좀 마셔 가며 드시오_ 도연은 아무 소리 없이 만두가 담긴 그릇 하나를 비우더니 거 기에 술을 부어 마셨다. 그리고 그 잔에 술을 가득 채워 혈문룡 에게 내밀었다. --술은 같이 마셔야 맛있지. 이빨에 고깃점을 묻히고는 웃어 가며 그가 한 소리였다. 혈문룡이 그것을 받아 마시고 다시 도연에게, 도연이 받아 마 시고 다시 혈문룡에게, 그 다음은 그것의 반복이었다. "지금까지?" 월몽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혈문룡이 쓰러질 때까지요." "먼저 쓰러졌느냐?" "그러니까 졌죠." 원도살은 인상을 쓰며 혈문룡을 툭 걷어찼다. "바보 같은 놈, 싸움도 아니고 술내기에 지다니!" "싸움은 그럼 져도 된단 말인가요?" 원도살은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아니, 그는 뭐든 이겨야 한다. 특히 싸움은 져선 안되지. 흑 룡사의 주인이!" 마지막 말은 입속으로 웅얼거렸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월 몽영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 다. 이제는 단 둘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혈문룡은 혹룡사의 주인인 것이다. 원도살은 소림사의 화상들을 향해 포권했다. "인사가 늦었군! 나는 이 아이의 할애비뻘 되는 사람이오. 원 도살이라 부르오." 소림 화상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원도살이라는 명호는 처음 듣는 명호인 것이다. 얼굴은 넓적한데 머리는 또 몹시 둥글어서 묘하제 생긴 화상 이 한 손을 들어올려 소림사식으로 합장챘다. "소승들의 견식이 짧아 대명을 알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 오. 저희들은 소림 오대제자, 정각(正覺), 정혜(正慧), 정수(正 修)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취해 쓰러진 도연을 가리켰다. "저희 사숙님의 결례도 용서하시길!" "사숙이라!" 웡도살이 눈을 빛내었다. 도연은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기는 했 지만 마흔은 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같은 사십대 승 려들의 사숙이라는 것은 묘한 일이엇다. 뭔가 내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어쨌든 그건 남의 일, 원도살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오신 것은 무쌍파의 일 때문이겠지요?" 정각이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폐사(弊寺)에서는 속가제자인 순우곤이 좌절된 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쌍파가 여기 양주부의 흑도 세력인 대도회와 결탁해서 소 금을 밀매하고 있었다는 것늘 알고 오셨소?" 정각을 비롯한 소림화상들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건,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소승들은 다만 소림 산하 도장이 무너졌다는 말만 듣고서!" "복수를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오?" 소림 화상들은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 다. 소림사 산하 도장에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면 사문의 창 피, 자칫하면 상대의 잘못도 따져 보지 못하고 말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들이 소림의 명예가 손상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서 이 험상궂게 생긴 노인의 말 은 너무 직접적이었다. 거칠다 어떻다는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까발리고 핵심에 직접적으로 다가들고 있는 것이다. 강호에 나와서 이런 종류의 일을 처리한 경험이 제법 되는 정 각으로서도 대처하기 곤란할 정도였다. 어느 파에서도 그들 소 림사에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었다. 정각은 이것이 소림사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모욕인지 아니 면 단순히 성격이 그런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혀 꼬부라진 소리가 원도살의 말에 대답했다. "소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왔지요." 지붕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던 코고는 소리가 어느새 그쳤 다. 도연은 한 손으로 겨우 몸을 가누며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 었다. "소림의 명예! 명……어어어!" 그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나 했더니 뒤로 넘어갔다. 정각이 그 의 둥을 받쳤다. "예 말이외다. 근데 중놈이 무슨 명예래? 정각아, 정각 너는 아느냐? 우리가 여기 왜 왔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이 분명한데 정각은 무던하게도 사 숙의 주정을 참아 주고 있었다. 그는 도연의 어깨를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하신 말씀이 욺습니다만 오늘은 때가 좋지 않으니 돌아 가시지요." 도연은 몸을 일으키려 노력하면서 화난 기색을 보였다. "때? 무슨 때가 좋지 않단 말이냐?" "상대방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니 이럴 때는 그 심기를 더 어 지럽히지 않는 것이 불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심기가 불편해? 그럴 땐 술을 마시는 게 약인데?" "술은 이미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안주는 개다리가 좋아. 그래, 오늘 술을 마셔도 어째 훙이 안 난다 했더니 안주가 틀려 먹었구나. 안주는 역시 개다리가 좋거든!" "예, 예, 그만 가시죠." "네 이놈, 정각!" 도연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정각이 움찔했다. 도연은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말했다. "내가 취한 것 같으냐? 가자는 소릴 벌써 두 번이나 했지? 이 도연이 갈 때와 올 때도 구분을 못하는 줄 알아?" 그러더니 도연의 눈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의 몸이 그 눈을 따라 같이 넘어갔다. "나는 생전 취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두 명의 화상, 정혜와 정수가 그를 받쳤다. 정각이 원도살을 향해 다시 합장했다. "보시는 바와 같아서 오늘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가 없군요. 결례만 하고 그만 물러가야 함을 용서해 주시길." 도연이 두 화상에게 몸을 기댄 채 소리쳤다. "결례? 누가 결례를 했단 말이냐? 이 화상이? 오늘 이 화상이 훌륭하게 소림의 명예를 살리지 않았던가?" 정각이 눈짓을 했다. 두 화상이 도연을 부축해 뒤로 끌었다. 도연은 자기가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소림곤만이 명예가 아니지. 술이면 술, 고기면 고기! 소림은 위대하다. 뭐든 질 수가 없지!" 원도살이 정각을 향해 말했다. "결례라고 생각지 마시오. 다음을 기대하기로 하겠소." 정각이 쓰게 웃으며 물러섰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원도 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혈문룡을 걷어찼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강하게 찬 것이었다. "완전히 졌군!" 혈문룡은 나직하게 신음하며 돌아누웠다. * * * 운하, 배. 구지가에서 유항경자가를 향해 흐르는 운하에 몇 척의 배가 홀러가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노를 젓고 있는 늙은 사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장강병탄(長江倂呑)을 원하십니까?" 배의 이물쪽에 앉아 있던 검은 옷, 은발의 사내 야광충은 늙 은 사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니!" 늙은 사공, 대취옹 당노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저희 능파당을 흡수하셨습니까?" "분란의 소지를 없애고 싶었을 뿐이다." 대취옹은 머리를 설레설레 혼들었다. 백발이 그 고갯짓을 따 라 흔들렸다. "저희 능파당의 조무래기 사공들과 다투는 것은 작은 일입니 다. 그러나 장강수로십팔타와 힘을 겨루는 것은 큰 일입니다. 작은 분란을 막기 위해 더 큰 분란의 소지를 만든다는 생각은 않으셨습니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진운이 끼여들었다. "안방을 청소하는 것은 누구나 하고자 하는 일이오. 안방 청 소를 하고 있는데 옆집 사람이 참견하면 그건 참을 수 없는 일 이죠." 야광충이 손가락을 들어 진운의 말을 막았다. "양주를 터로 잡은 것은 이유가 따로 있고, 그 과정에 충돌이 생기는 것은 이미 각오한 것! 내 원칙은 간단하다. 필요하면 뭐 든 한다는 것!" 대취옹은 그 말에 할말을 잊고 노만 저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양주는 노른자위입니다. 장강을 뱀으로 비유할 때 뱀의 목과 같은 곳이죠. 노필부가 전대의 총타주였다는 명목으로 양주부성 내(內) 수로의 이권을 보호해 왔습니다만, 이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이상 그들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속으 로는 잘 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진운이 다시 끼여들었다. "전대 총타주의 말이 있어도 말이오?" 대취옹은 웃었다. "노필부의 안면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끈을 잘못 잡으신 거요. 강금척, 그놈이 어떤 놈인데 노필부 따위의 체면을 생각해 주겠 소? 필요하다면 처자도, 사문도 버릴 수 있는 놈이 그놈이오." "아니 그럼, 그런 자에게 왜 자리를 넘겨 주셨소?" "제자놈들에게 줬어도 어차피 빼앗겼을 테니까!" "예?" 진운은 상상도 못했던 대답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놈은 당시 이미 이인자였지. 교활하고 난폭한 데다가 통솔 력도 있어서 못난 제자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 네. 그래서 목숨이라도 부지케 하려고 그놈에게 자리를 넘겼지.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는 죽일 수 있어도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난 뒤에는 포용력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전대 채주의 제자를 함 부로 죽이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 장강수로십팔타를 위해서도 그놈이 못난 제자들보다는 나았 어. 그놈들이 뱀새끼라면 강금척, 그놈은 용이었으니까…… 한 마리 난폭한 용." 진운은 눈을 꿈벅거렸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 잘되면 대취옹을 앞세워 장강수로십 팔타를 삼키고, 못 돼도 양주부 수로의 이권을 보장받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어설픈 제안 때문에 장강수로십팔타의 공격 을 받을 처지에 몰리지 않았는가! 그는 야광충의 눈치를 살폈다. 야광충이 그때 입을 벌렸다. "번강룡이 어떤 인물이든 원칙은 그대로다. 나를 건드리면 그 것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대취옹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감탄의 몸짓이었다. '이건 오만한 건가, 아니면 자신감?'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말년에 재미있는 일이 생긴 셈 아닌가? 목숨에 대한 애착 따위는 버린 지 오래이니 말이다. "지팔공!" 지팔공, 백리극이었다. 저만치 다른 배에 타고 있던 백리극이 야광충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날려 진운이 탄 배로 건너왔다. 배가 뒤집어질 듯 출렁거렸다. 진운의 배를 젓고 있던 사공이 삿대로 배를 조정해 간신히 균 형을 잡았다. 그가 그만큼 노련한 사공이 아니었다면 배는 뒤집 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대취옹은 약간 의아한 빛으로 백리극을 보았다. 경공으로만 치면 중간 정도밖에 안되는 무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 자 항렬이라고? 게다가 이름 끝에 공(公)의 칭호 까지?' 문득 그는 아까 백리극이 유소백에게 사부라고 불렀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관부의 인물이었을까?' 그는 다시 한번 백리극을 관찰했다. 백리극은 자신의 경공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부끄러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표정하게 서서 야광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공이 부족함을 부끄러워 않는 인물이라!' 그것은 그냥 하수라는 증거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자신이 있 기 때문에 한 방면의 부족함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대취옹은 백리극이 하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번강룡은 어디에 있나?" 야광층이 물었다. 그는 백리극을 관찰하느라 대답을 한 순간 놓쳐 버렸다. 그때 누군가의 대답이 들려 왔다. "장강수로십콸타는 장강을 따라 웅거한 열억덟 개의 수채(水 寨)가 모척 만들어진 단체죠. 원래는 그보다 많겠습니다만 가장 강한 것이 열여덟, 나머지는 그 열여덟에 횡(橫)으로 종(縱)으 로 복속하고 있습니다. 수채가 모였는데 왜 십팔채(十八寨)가 아니고 십팔타(十八舵)냐라고도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건 무식한 소리죠. 물에서 활동하는 집단은 선창이나 부두를 지휘 부의 거점으로 삼고, 수상 선박을 위주로 하는 만큼 지휘부 명 칭은 무조건 '타(舵)' 라고 부르는 것이죠. 배를 움직이는 것은 타, 즉 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장강수로십팔타에 속한 수채들 은 각각을 부를 땐 무슨무슨 채라고 부르지만 장강수로십팔타의 하위 조직으로 챈세할 때는 무슨무슨 분타라고 합니다." 제법 아는구나라고 생각한 대취옹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 보았다. 그는 사십줄의 사내였다. 수염과 눈이 가는 것으로 보아 제법 지혜롭게 생겼지만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인상. 그가 계속 말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수채는 교수번타(巧手 打) 허연(許燕)이 타주로 있는 백파채(白波寨), 분강교(分江鮫) 양진(梁眞)이 타 주로 있는……!" "번강룡은?" 한참 신이 나서 떠들던 사내, 이통천이 야광충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야광충은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이통천은 얼굴을 붉히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확실하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총타주가 되면 자기 가 원래 맡고 있던 수채를 내놓고 총타에 가는데 그 총타가 어 디 있는지는 장강수로십팔타만의 비밀이라서!" "당노인은?" 야광충이 대취옹을 보았다.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이통천 을 보고 있던 대취옹이 찔끔했다. "그건!" 총타의 위치는 각분타의 향주급도 모르는 기밀사항이었다. 그 것을 말하려니 자기도 모르게 망설여졌던 것인데. 이통천이 급히 말했다. "여기 대취옹 당노선생께서 총타주를 하던 때부터 강호에 암 암리에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야광충과 대취옹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통천은 자신없게 말을 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말쏨을 드리는 것이 망설여졌던 것인데, 소문 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동정호의 한 섬에 비밀 수채가 있 다. 그 수채는 마치 백팔영응 이야기에 나오는 양산박(梁山泊) 처럼 거기 있는 사공들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는 곳에 위치한 천험의 요새인데, 그게 바로 장강수로십팔타의 종 타라는 것입니다." 야광충은 이통천의 말이 진행됨에 따라 대취옹의 안색이 점 차 변해 가는 것을 예리하게 간취했다. 그는 이통천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어디인 것 같나?" 이통천이 다시 머뭇거렸다. 그는 확실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박관념으로 굳어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야광충이 다시 채근했다. "추측을 말해 봐!" 이통천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동정호에는 악양루(岳陽樓)와 군산(君山)이 유명합니다만, 거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사산(想思山)에서 발 원한 신장하(新薔河)라는 강이 흘러드는 곳이 있습니다. 같은 동정호라도 이곳을 뇌호(雷湖)라고 따로 일컫는데, 그것은 그 주변 지형이 묘해서인지 항상 안개가 깔려 있고, 뇌우(雷雨)가 거의 매일 들이치기 때문입니다. 이곳 호반에는 녹각현(鹿角縣) 이라고 해서 그 광경을 구경하러 모이는 사람들 때문에 유명한 고장이 있는데, 소생은 그곳 주변이 의심스럽다고 감히 추즉합 니다." 야광충은 대취옹을 보았다. "어떤가?" 대취옹은 이미 포기한 것처럼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단한 견식이군요. 노필부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바로 그곳 에 제가 지은 총타가 위치해 있지요. 그러나!" 알아도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원래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의 뒷말은 듣지도 않고 이미 백리극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번강룡을 찾아가라!" "예!" "가서 전할 말은 이것이다." 야광충은 백리극이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염려하는 것처럼 한자 한자 똑똑히 말했다. "덤비면 죽는다." "알겠습니다." 천박할 정도로 직접적인 위협! 대취옹은 전하라는 말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런 말을 전하 러 가겠다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백리극에게도 놀랐다. 그는 급 히 입을 벌려 말했다. "번강룡에게 그런 말을 전했다가는……!" 대취옹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야광충과 백리극. 이들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젓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을 시키고, 또 하겠다 고 나서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 둘은 잘 모르지만 번강룡은 잘 알고 있었다. 장강의 폭군(暴君), 번강룡 강금척. 그는 그런 말을 듣고도 그냥 살려 보낼 정도로 자비로운 인물 이 절대 아닌 것이다. 야광충은 백리극에게 한 가지 덧붙여 지시하고 있었다. "오늘 안으로만 출발하면 된다." 백리극이 묘한 눈으로 야광충을 바라보았다. 야광충의 말속에 숨은 뜻을 눈에서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숙였다. "존명!" 백리극은 가고, 야광충은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지사생!" 지사생, 진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당주!" "총당(總堂)의 준비는?" 종당. 그들 흑수당의 본부격인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지시하신 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통천방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도 같이 조사하라!" 느닷없는 말이었지만 진운은 그의 명령을 재빨리 알아들었다. 아까 내린 구련자에 관해 조사 명령에 덧붙인 말일 것이다. "존명!" 야광충은 전응으로 한 사람을 불렀다. "지구야!" 지구야, 등평이었다. 수로의 어디에 있는지 등평의 목소리가 역시 전음을 통해 들 려 왔다. "예!" "경연루의 일에 대해서 말해 봐라!" 야광충은 원도살과 월몽영의 뒤에 등평을 딸려 보내었던 것이 6.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등평이 경연루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했다. "그리고!" 야광충은 보고를 다 들은 후에 다시 명령했다. "백리극을 뒤에서 도와라!" 장강십팔타에 가는 백리극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야광충은 그런 명령을 내려놓고 속으로 생각했다. '관부와의 지속적인 통로가 있어야겠군!' 탄압이 오면 수그렸다가 탄압의 바람이 약해지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 흑도의 생리라 하지만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 는 일이었다. 그는 대취옹을 보며 물었다. "아까 한 말 중에 관부와 이전에 있던 네 개 혹도 단체의 관계 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취옹이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관부와 흑도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이라고들 합니다만 그것 은 자잘한 도둑들이나 그렇지, 큰 흑도 단체에게는 해당이 안되 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관부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 으려고 하지요.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작은 도둑은 관부를 피하고, 큰 도둑은 관부를 등에 업고 영업을 한다고 할까요? 여 기 양주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부의 누구 말인가?" "전부입니다." 대취옹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보충했다. "아래에서 위까지 누구 예외랄 것 없이 전부입니다. 그 중에 도 지부가 수괴라고 할 수 있지요. 미관말직의 아전 나부랭이가 받은 돈, 거리를 순찰하는순쾌에게 건네지는 돈도 결국엔 지부 의 주머니까지 흘러가니까요." "지부는 어떤 인물인가?" "적당히 썩었고, 적당히 분수를 아는, 그저 평범하다는 횡이 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양주부의 지부쫌 되려면 횝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런 인물이 어디 튀어나온 곳이 없다 는 것이 오히려 뛰어난 증거라고 보는 거죠." 야광충은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다가 문득 말했다. "당노인은 관부를 맡아!" "예?" "지속적으로 동향을 파악하고, 지부를 특히 잘 관찰할 수 있 는, 그런 인맥을 만들어 봐." "예!" 대취옹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의문이 있었다. '급한 일은 그게 아닐 텐데?' 당장 장강십팔타를 상대할 생각은 않고 웬 관부란 말인가! 진운이 그 의문을 돌려서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 것인데 야광충은 의외로 선선이 대답해 주었다. "장강십팔타는 지팔공이 돌아올 때까지 두고 본다. 관부는 계 속 동향을 살핀다. 소림과 무당은 계속 혈문룡과 화영에게 맡긴 다. 그리고 손이 남는 전원은 단자가를 친다!" "예?" 마지막 말이 의외의 일격이었다. 진운과 대취옹은 눈이 휘둥 그래져서 야광충을 보았다. 애꿎은 단자가는 왜 친단 말인가? 야광충은 그들의 반웅에 아랑곳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검푸른 빛으로 짙게 물들은 하늘 한구석이 엷어지려 하고 있었다. "양주의 새벽은 빨리 오는군!" 그것은 그가 활동할 시간이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진운을 향해 말했다. "오늘밤 내가 들어가 보겠다. 공격 시기와 방법은 그 후에 결 정한다." * * * 경연루. 혈문룡은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얼떨떨해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여태 그를 보살피던 기녀 려화(麗花)가 차가운 산매탕(酸梅 湯)을 그의 입가에 대었다. 혈문룡은 이젠 그녀의 이름이 려화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 다. 어제 월몽영에게 정사 장면을 들킨 이후, 아니 그녀가 그에 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직후부터엿다. 밀봉된 통에 넣어 깊은 우물 바닥에 재워 두었다가 꺼낸 산매 탕은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하고, 녹아 버리는 둣 달콤하며, 술 마신 뒤의 칙칙한 기분을 상쾌하게 바꾸어 주었다. 그러나 혈문룡은 그 맛있는 산매탕을 절반 정도 마시더니 려 화의 옷자락에 뱉어 버렸다. 그리곤 침상에서 뛰듯이 일어나 대 충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려화는 옷자락에 뿌려진 산매탕을 훔치지도 않고 다급히 그 의 뒤를 쫓아 나갔지만 계단 내려가는 소리만 우당탕 퉁탕 들려 왔다. 그녀의 작은 발로는 혈문룡을 쫓아갈 수가 없다. 그녀는 그만 망연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데, 밖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황황히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혈문룡은 할아버지의 것이라는 검고 장대한 말에 뛰어오르고 있었다. 허리줌에는 어느새 챙겼는지 반달처럼 휘어진 칼을 차고, 한 손에는 보통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듯이 긴 창 한 자루를 꼬나 든 채였다. 말이 소리 높이 울부짖으며 발굽을 들어올렸다. 검은 몸에 검 은 갈기가 바람을 탄 나무처럼 휘날리고, 말은 승천하는 용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안장도 놓지 않은 그 말에 뛰어오른 혈문룡이 갈기를 움켜쥐 고 발을 굴렀다. 말은 다시 한번 용틀임하둣 앞발굽을 치켜 들 더니 기원의 담장을 뛰어넘어 버렸다. 포석(布石)이 깔린 거리를 달려내려가는 말발굽 소리가 그녀 의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갑자기 벌어진 소란에 내다보던 사 람들이 모두 사라진 그 후까지도 그 말발굽 소리는 그녀의 가슴 에서 울리고 있었다. * * * 양주부 관아(官衙), 공당(公堂). 관아의 공당은 공소(公訴)와 소원(訴願)을 처리하고, 추관의 책임하에 재판(裁判)을 하는 장소. 양주부의 법을 수호하는 곳 이다. 지금 낮의 분주한 일과가 끝나고 바어 있어야 할 공당에 몇 명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추관 모충국이 낮에 처리한 송사기록(訟事記 錄)들을 정리하느라 종이 뒤척이는 소리를 낼 뿐, 벌써 한 시진 째 단 한 사람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방안의 모두가 깊이 침묵 하고 있는 것이다. 등적은 그 무거운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전부터 뭔가 말해 침묵을 깨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그냥 입을 다 물곤 했다. 그는 공당 정면 중앙의 거대한 탁자에 앉아 문서에 코를 박고 있는 모충국, 그 뒤편 참관인 의자에 앉아 천장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는 유소백, 그리고 조남성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조남 성은 다리도 안 아픈지 문가에 한 시진째 서 있는 중이었다. 등적은 다시 한번 뭔가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했 다.그러나 결국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그는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거대한 돌이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2!다. 네 명이 단 하나를 못 이기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범행의 흉수를 눈앞에 두고도 잡지 못하다니! 포두가 된 지 겨우 석 달째인 그는 그렇다치고, 중원 양대 명 포 중의 하나이자 그의 우상인 신응 유소백이 범인에게 제압당 해 좌절하다니! 아니 이제는 늙어 버린 그는 둘째치고 앞날이 창창한 그가 벌 써 좌절되다니! 포두가 될 때는 그의 앞에는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없었다는 신화를 남기리라고 꿈꾸었었는데 겨우 석 달 만에, 단 석 달 만 에 그 꿈을 깨고야 말다니! 그는 눈을 감았다. 금의위에 들어가 비약적인 승진을 거듭했던 형의 모습이 머리 한구석에 떠올랐다. 벌써 오 년째 보지 못하고 있는 형이었다. 형은 뭐랬던가? 오 년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막중한 비밀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임무가 끝나면 대명 최초의 이십대 금의위 영반도 불 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말하고 떠난 형이었다. '형이 돌아오기 전에!' 그도 그럴듯한 자리에 올라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형에게 부끄 럽지 않을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유소백을 주시했다. 유소백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등적은 궁금해졌다. 천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무 엇일까? 어제 만난 그 사내, 칼자국의 사내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문득 그의 뇌리에 어제 그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자가 역모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등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의 말에는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단어, '역모'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단서도 있었다. 제자 라는 말이었다. 무림 문파의 고수들과는 달리 유소백과 같은 관부의 고수들은 사제지간의 끈이 엷다. 왕공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하고, 수하 포두, 포쾌들을 교육시키기도 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숱한 사 제의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 봤자 몇 백, 몇 천이나 될 것인가? 그가 가르쳤던 자들 중 용모에 부합하는 자를 찾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 거기서부터!' 등적은 새로운 희망에 불타을랐다. 아직은 범인을 놓친 것이 아니다. 잘하면 양주부 뒷골목의 흑도괴수 정도가 아니라 대역 모의 배후를 밝혀 낼지도 몰랐다. 게다가 거기에는 명망이 높은 관부의 유력자까지 관련되어 있 는 것이다. 최소한 대역죄인을 발견하고서도 잡으려 하지 않은 죄는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둥적은 모충국을 보며 생각했다. 칼자국의 사내뿐 아니라 또 하나의 사안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어제 분명 혹도괴수 중 하나가 양주부의 관부, 특히 지부가 혹도의 무리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의 얘기를 했었다. 그 부분 도 파고들어가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잘하면 대규모 비리의 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앞서 유소백의 일은 혼자 알아볼 수밖에 없지만 후자의 문제는 모충국과 협력해서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소백의 제자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능력도 있고, 강직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등적은 그 이야기를 언제 어떻게 드러내어 모충국의 협조를 구해 보나 궁리하기 시작했다. * * * 유항경자가 지하, 혹수당 총당. "그랬나?" 야광충은 그 한마디만을 던지고 침묵했다. 둥평의 보고는 간단했다. 백리극이 낮에 이미 출발했다는 것 이었다. 오늘 내로만 출발하라고 했던 것은 그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었는데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백리극은 단지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유소백을 만나 가족에 관해 물어 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던 것이다. 그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야광충도 그가 저녁 마다 창기들이 배회하는 곳을 돌아다닌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 다. 그는 누이와 처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본가가 있던 균현은 억기 양주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 지만 어쨌든 같은 강소성이었다. 만약 그녀들이 창기로 괄려졌다 면 여기 양주부, 아니면 남경 인근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을 회피하다니! 사람을 찾는 데 강남칠성 총포두인 유소백에게 물어 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야광충은 백리극이 그의 호의를 사양한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침음(沈吟)하고 있었다, 사정은 다르지만 가족 을 은근히 찾고 있다는 것은 그나 자기나 같은 처지인 것이다. '어쨌든 그건 그의 일!' 야팡층이 당주라고 해서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일은 내 일이겠지!' 그는 총당의 지하 석실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유일한 천(天) 자배의 그를 합쳐서 모두 열네 명. 지(地) 자배에서는 용광사의 황룡과 지금 떠났다는 백리극, 그리고 술을 깨자마자 어딘가로 나갔다는 혈문룡을 제외한 열 명 전원이 모였다. 현(玄) 자배는 세 명 모두 참석이었다. 현재 흑수당의 황(黃) 자배는 사십칠 명이었지 만 여기에는 침 석하지 않고 따로 대기하고 있었다. 단자가 공격에 대한 당주의 결정이 내려지는 대로 움직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먼저 현(玄) 자의 일호(一號)인 좌검자를 향해 물었다. "어제의 그가 한 말은?" 구련자가 혹시 무슨 말이라도 남기지 않았느냐는 이야기였다. 좌검자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듣지 않았습니다." 야광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약간은 아쉬욋다. 구련자의 배후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뭔가 냄새가 났었는데, 죽었 으니 그만이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地) 자의 사호(四號), 진운이 대답했다. "현재 계속 조사 중입니다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7월 1 일 양주부 입성(入城), 그 후 북문 안에서 점을 쳤다는 것뿐입 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며칠 동안 계속 단자가에서 생활 했다는 것입니다." 구련자가 단자가에서 생활했다는 것만으로 어떤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단자가 공격 의 사를 들은 시점에서 구련자가 단자가와 한 오라기의 연관이라도 있다는 것은 그저 우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운은 야광충의 눈치를 슬쩍 보코는 아무 반응이 없자 계속 말했다. "단자가의 소가단자포(蘇家緞子鋪) 부근에서 주로 목격되었다 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그건 그만두고!" 야광충이 말했다. "양주부로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7월 1일 이전의 행적을 역 추적해서 조사해 봐! 그리고." 그는 더 자세한 말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뭔가 의혹의 그림 자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것을 말하 기 싫었던 것이다. "무당파의 움직임은?" 역시 진운이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야광충은 잠시 생각하더니 지 자의 십일호(十一號)인 화영을 향해 물었다. "지낼 만한가?" 청강원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리라. 오랜만에 자리에 참석한 화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월몽영이 먼 저 말했다. "화 오라버니와 혈문룡은 둘 다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 같더 군. 걱정할 필요 없어." 방각이 슬쩍 인상을 썼다. 흑수당이 출범한 이후 가장 제멋대 로 행동하는 것이 월몽영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지 자의 십일호인 화영에게는 오라버니로 대접을 하면서 십호(十號)인 혈문룡에게는 평배를 하고, 게다가 당주에게도 예사로 반말을 하지 않는가!" 다른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칼같이 행동하는 야광충이 왜 킨 녀만 저렇게 풀어 주는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계집애란!' "어떻게 재미있게 지낸다는 것이지?" 야광충이 흥미있다는 듯 물었다. "여자가 생겼어." 월몽영이 대답했다. "화 오라버니는 청강원의 동무미와, 혈문룡은 려화라는 기녀 와 오손도손 잘 지내더군." "동무미라! 문장원 동무미?" 진운이 아는 척을 했다. 월몽영이 무언으로 긍정을 하자 그는 짐짓 감탄사를 홀렸다. "동무미라면 유명한 양주쌍교의 하나 아넙니까? 절색을 잡으 셨군요." 지 자의 오호(五號)인 이통천이 아는 척할 수 있는 일에 빠질 수가 없었다. 그는 얼른 나서서 말했다. "양주쌍교의 하나인 동무미요? 그녀는 양주쌍교 중의 다른 하 나인 무장원(武壯元) 마상란(馬相蘭)과 함께 문무쌍교(文武雙 橋)라 불리는 기녀 아닙니까? 그녀가 열한째와 관계가 있다니 반가운 일이군요. 마상란은 아시지만 여기 양주부 교외의 피 진장(避塵蔣)에 은거한 철권(鐵拳) 마종의(馬宗毅)의 손녀지요. 무슨 기연이 있었는지 과거 백도에서도 내로라 하던 고수인 그 녀의 할아버지보다 더 고수라더군요." 야광충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냥 두면 밤새도록 이라도 떠들 수 있는 것이 이통천인 것이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 조금 지루하더라도 무당에서 사람이 을 때까지는 그렇게 지내. 소림사쪽은 혈문룡이 알아서 잘 처리 하는 것 같으니까!" 월몽영이 물었다. "다 좋은데, 무당과 소림사를 상대하는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화영과 혈문룡이라면 그들 혹수당에서도 몇째 안 가는 고수, 중심 인물들이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소림과 무 당을 상대하는 일에 온전히 빠져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간단히 대답했다. "일이 틀어지면 귀찮으니까!" 양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무쌍파와 형의문은 같이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경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니 걱정이 되는 것이 현 정파의 최고 세력인 소림과 무당이었다. 그들과 말썽이 생기 면 자칫 혹수당의 존망마저 위험해지는 것이다. "싸우자면 안될 것은 없지만!" 진운이 덧붙였다. "그러면 주목을 끌게 되니까!" 흑도 세력이 세인의 주목을 끌어서 줘을 일이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들과 같은 신홍 세력이 밝은 곳에 드러나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취옹은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초에 소림, 무당을 건드린 것도 무모했는데 이제 단 두 사 람으로 그들을 막는다는 것인가?' 게다가 월몽영은 그 두 사람으로도 넘친다는 듯이 말하지 않 았는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들인가? 아니면 소림, 무당이 어떤지도 모르는 존놈들이라서 그런가?' 후자는 아마도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유 진운이 그것을 모를 리는 없는 것이다. '설마 두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것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화영이든 혈문룡이 든 혹수당과의 연관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기든 지든 그들의 선에서 끝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아마도 혈문룡이 먼저겠지!' 들은 바로는 그는 기녀와 세월을 보내느라 영 엉망인 상태라 고 하지 않았던가! "월몽영!" "예!" 월몽영이 창졸간에 대답하고는 야광충을 바라보았다. 존칭으 로 대답한 것이 약간 어색했는데, 야광충은 진지하게 그녀를 보 고 있어서 곧 그 생각은 잊어버렸다. 야광충이 말했다. "고급 기루들을 주시해야 한다. 너무 쉽게 넘어왔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월몽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었던 것이다. "예!" "단자가는 나와 도신 도귀가 간다." 방각이 무슨 소리냐는 둣 그를 보았다. "단지 세 명만?" 야광충은 긍정했다. "단 세 명. 새벽이 되면 인원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그때는 황 자배 아래의 형제를 보내면 된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진운을 보더니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시체를 치울 인원들이다." 방각이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야광충은 잠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인가를 하던 그가 입을 벌렸다. "방노인과 당노인, 정일, 혹웅, 진운, 이통천은 혹수당을 관 리한다. 방노인이 그 책임을 져!" 방각이 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둣 물었다. "나머지 사람은?" "백리극의 뒤를 따라서 동정호로 간다." 방안의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야광충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맺었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번강룡을 치고, 장강수로십팔타를 침묵시키는 거야." * * * 철불사. 정원선사는 몸져누워 있었다. 깡마른 몸매지만 그래도 오랜 수행과 정진(精進) 덕분인지, 아니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소림사 기초내공수련법인 참춘공 (站椿功) 덕분인지 크게 앓은 적이 없어 제법 강단(剛斷)이 있다 는 말을 듣곤 하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 칠십 평생, 육십여 년의 수행 기간 중 처음으로 저녁 예불을 빼먹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는 사미승이 들여 놓고 간 약사발을 건드리지도 않고 끙끙 대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정원은 살짝 눈을 떠 보고 그가 소림에서 온 정각임을 알자 돌아누워 버렸다. 정각에게는 죄가 없지만 그가 연상시키는 또 한 사람은 이가 갈릴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약도 드시지 않으시구요. 사형께서 자리보전하시니 저 희들 마음도 불편합니다. 힘 좀 내시지요." 정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정각을 노려보았다. 정각의 유 들유들한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처에게 바친 육 십 년의 세월을 기억했다. 단 한 순간의 성질을 못 이기면 육십 년 공덕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는 그냥 돌중이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누워 버렸다. "노납의 병은 냑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네!" "오호! 그럼 무슨 다른 일이라도? 혹시 누가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아닌지?" 정원은 절로 일그러지는 인상을 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 알면서 이놈이!' 그러나 말은 달랐다. "다 늙어 떠날 날만 기다리는 노납이 무슨 심기랄 게 있겠는 가 그저 나이가 드니 그냥 이곳저곳 아픈군!" 정각은 정원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그 속이 뻔한데 무슨 고승 행세란 말인가! 그는 짐짓 목소리를 깔아 말했다. "사숙 때문이라면 심려 놓으십시오!" 사숙, 도연이 거명되자 정원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는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호통을 쳤다. "사숙에 대해서 어떻게 심려를 않겠나!" 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벌써 대중들 사이에서는 어제오늘의 일들로 이야기 꽃을 피 웠는데!" 정원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은 바로 도연이었던 것이다. "대중들이 뭐라 그러는지 사제는 아는가?" 정각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그럽니까?" "소림사사상 최악의 돌중이 왔다고!" "금시초문이군요. 하지만 이해는 갑니다." "이해가 간다고? 사제는 오늘의 일도 이해가 간단 말인가?" 일의 발단은 어제부터였지만 오늘의 일이 쐐기를 박았다고 해 야 했다. 초저녁에 철불사 앞 대로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었다. 산문 앞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말을 타고 대웅전 요까지 밀 고 들어온 그 천하의 무뢰한(無賴漢)은 손에 들고 있던 장창으 로 화상들을 위협해서 도연의 거처를 물었다. 정말 무식하게 긴 창이었다. 게다가 양쪽으로 시퍼런 날이 달 려 있어서 보기만 해도 뱃속을 파고드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것이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못한 원인이었다. 물론 소림사에서 파견된 고수들에게는 그런 창 따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다. 향을 사르러 온 향객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소림사의 고수, 도연이 맨발로 뛰어나와 무뢰 한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무뢰한의 창을 꺾어서 쫓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기기 위해 나온 도연이었다. 그는 무식할 정도로 넓적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이렇게 말 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오니 반갑군! 어제는 자 네에게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빈승이 대접해야지. 뒷산으로 가 세. 먹음직한 개를 서너 마리 잡아 놓았네. 차라리 빈승이라는 말을 안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말도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와 주는 길이었을 것이다. 도연은 무뢰한을 안내하려는 듯 돌아섰다가 고개를 돌려 이렇 게 말한 것이다. --동네를 다 뒤져 가며 맛있게 보이는 것들로만 초빙해 온 개 들이니 수고가 적었다고는 않을 걸세. 그러니 술은 자네가 사게! 초빙? 개들을 초빙한다고 그것들이 그냥 왔을까? 누가 보아도 그 말은 개도둑질을 미화한 것에 불과했다. 정원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심장이 벌렁거려 자칫 멈춰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누워 버렸다. "그래서!" 정원은 힘없이 물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정각이 미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직 공양(供養) 중이신가 봅니다." "공양 중!" 정원이 벌떡 일어났다. "개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것을 공양이라 부른단 말인가!" 그가 쓰러질 것 같아 정각은 손을 내밀었다. 정원은 그 손을 뿌리첬다. "부탁이 있네!" "뭡니까? 저희 때문에 심려가 크신데 힘이 닿는 일이 있다면 심력을 다해 봉행하겠습니다." "제발 좀!" 정원이 목쉰 소리로 말했다. "소림사로 돌아가 주게!" 그는 그대로 이불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제37장 그날 밤 단자가. 쌍둥이로 태어난 도신과 도귀의 아버지는 원래 왜인(倭人)이 었다. 왜국(倭國)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로 태어난 그 는 가난을 벗어날 방법으로 칼을 잡았다. 도적질을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장에서는 유명하던 삭 정일도류(索情一刀流)의 도장에 하인으로 들어가 천신만고 끝에 정식 제자가 되어 도를 배웠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무사가 되었다. 도장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출세를 해보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연 가마쿠라[鎌食] 막부 (幕府)가 무너지고, 무사 출신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가 연 무로마치[室町] 막부가 일어나던 시대, 권력은 귀족에게 서 신흥 무사 계급에게 넘어오던 때였다. 청운의 꿈에 부푼 그도 그런 출세의 길을 타 보려 했던 것이 지만 시골 도장 출신의, 그것도 농부에서 하인으로, 거기에서 다시 무사로 올라온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뗬 번의 좌절을 거쳐 청춘의 힘은 찐이고, 가슴속에 품었던 웅지도 그와 함께 꺾여 눈앞에는 외로운 중년의 나날들만 남았 을 때, 그는 상처투성이의 왜구(倭寇)가 되어 있었다. 술과 약탈, 그리고 살육의 나날들을 보내다가 그들이 대개 그 렇게 가듯이 배신의 아픈 상처와 함께 바다에 던져진 그를 백리 극의 조부가 구했다. 그리고 새 삶이 시작되었다. 백리가의 가신으로 아내도 구해 살던 그에게 또 하나의 좌절 은 도신과 도귀, 두 형제의 탄생이었다. 젊은날의 방탕의 결과 인지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에 벙어리였던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지나치게 말을 늦게 배우고, 그의 손뼉이나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낫을 들고 아 이들을 산으로 데려갔다. 험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고생을 덜어 자는 뜻이었다. 그런 그를 백리극의 조부가 잡았디. --그런 아이를 얻은 것도 네 업보(業報), 한 사람의 구실을 하도록 키우는 것이 그 업보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그는 고뇌하다가 낫을 버렸다. 그리고 그 뒤부터 아이들에게 매달렸다. 귀 대신 다른 감각을 키우고, 말 대신 손짓을 가르쳤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쓸모있는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쓸모있는 인간은 두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되었 다. 랄 솜씨와 충성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손짓과 감각보다는 이쪽이 쉬웠다. 그래서 도신과 도귀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 그 도신과 도귀는 밤이 깔린 단자가를 걷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똑같은 모양의 칼을 똑같은 모습으로 들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이 그리 보기 좋은 인상이 아니요, 걸음겊 이는 박자라도 맞추둣 일정해 왠지 공포스러운 분위기까지 감돌 고 있었다. 낮의 단자가도 소란스럽지만 밤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색찬란한 비단천들을 거리에 내걸은 단자포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이로 비단잉어들처럼 떼지어 걷는 여인들이 있고, 부 드럽고 통통한 손으로 주판을 퉜기는 상인들의 은근한 유흑이 있다. 혹은 비단을 들고, 흑은 수레를 밀며 분주하게 오가는 점원 들. 그 사이로 먹을 것을 담은 담가(擔架)를 메고 손님을 부르 며 걷는 상인들. 비단 같은 섬섬옥수가 살며시 만져 보는 비단천들은 손가락에 삼겨 들 듯 부드럽게 흐르고, 새로운 무늬, 새로운 색깔의 비단 들을 보여 주는 상인들의 목소리 역시 그렇게 귓가에 감겨 들고 있었다. 그 틈을 헤치며 도신 도귀가 나타났다. 그들이 걷는 곳마다 거리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그 들의 몸에서 흐르는 싸늘한 냉기가 후덥지근한 양주의 억름 밤 거리의 열기를 순간적으로 식혀 버렸다. 그들을 중심으로 한 반경 삼 장여의 공간에는 마치 겨울의 삭 풍과도 같은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곱게 성장한 여인들과, 비단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부호들, 심 지어는 담가를 둘러맨 거리의 장사치들까지도 그 기세에 질려 분분히 길 옆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그들은 거리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천천히 걸어갔 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은 다시 반대편 끝을 향해 되걸어오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 똑같은 모양의 칼, 똑같은 자세, 똑같 은 걸음걸이. 박자는 변함 없었지만 발 소리는 더욱 커진 것 같았다. 한걸음 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더 강렬하게 귀를 돠고드는 발걸음 소리! 그들을 휘감고 몰아치는 찬바람은 이제 반경 오 장으로 범위 를 넓혔다. 그들을 향해 두 명의 사내가 다가갔다. 작은 청색 모자를 쓰고, 청의(靑衣)에 붉은색 배갑(背甲;겉옷 의 일종)을 입었다. 허리에는 청색 천으로 만들어진 띠, 청사직 대(靑絲織帶)를 매어 포쾌라는 신분을 과시하는 듯한 두 사내.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둣 도신 도귀를 아래위로 꼬나보며 다 가들던 그들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켕기는 듯한 기색 이 되었다. 그들의 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보폭도 좁아졌다. 그러나 도신 도귀의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이목구비를 명확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고, 그 눈빛 의 싸늘함을 느끼게 되고, 왼손에 움켜쥔 도갑(刀甲)의 투박함 이 그 속에 담긴 칼날의 !리함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급기야 서로의 콧김을 느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지자 포쾌들 은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한걸음씩 물러서서 길을 비켜 주었다. 도신 도귀는 표정의 변화없이 그들의 사이로 걸어갔다. 포쾌 들은 굳은 얼굴로 한걸음 이상은 도저히 더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결의를 보이는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살기를 보이지는 않는데도 가슴에 파고들었다가 등골을 흔들 고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 도신 도귀가 포쾌들의 세 걸음 뒤까지 지나갔을 때, 그들은 식은땀을 홀리며 이미 한걸음 더 물러서 있었다. 법의 집행자들인 포쾌들이 면목을 세우지 못하고 총총히 사라 !자 단자가의 손님들 중 절반이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누가 한가하게 비단을 고를 수 있단 말 인가! 도신 도귀는 그렇게 천천히 거리의 끝까지 걸었다. 그리고 다 시 또 돌아섰다. 찬바람은 다시 한번 단자가를 가로지르려 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밤새도록이라도 단자가를 오르내릴 것 같은 기세 의 그들, 그들의 앞에 몇 사람이 나타났다.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고 있는 점원 행색의 사내들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 는 다섯 명의 사내들. 그 중 하나가 미소를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좋은 비단을 찾고 계신 모양이군요. 보여 드릴까요?" 그의 손이 단자포와 단자포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다른 네 사내가 그 손과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진(陳)을 짜듯이 도신 도귀를 둘러싸고 있었다. 생문(生門)은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골목밖에 없는 그런 진이었다. 도신 도귀는 아무런 반항의 기색도 없이 그 손이 가리키는 방 향으로 걸었다. 처음의 사내가 앞장서고, 그 뒤로 도신 도귀, 다시 그 뒤로 네 명의 사내들이 단자포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을 가질 사람은 몇몇 관계자들을 빼고는 없을 것이 었다. 이런 일은 보지 않고도 그 원인과 결과를 짐작할 수 있는 것 이니 말이다. 그러나 가끔 세상에는 예외가 있고, 그런 예외가 있어 세상은 더욱 재미있 돌아가는 법이다. "재미있지 앉아?" 그녀는 그리 튀어 보이지 않는 모자에 면사를 드리워 얼굴을 반쯤 가린 모습이었다. 약간 긴 듯한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양손에 낀 검은 장갑만 아니라면 여기 단자가를 걷는 다른 여인 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러나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드러난 얼굴만으로 도 대단한 미녀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 선, 그래서 그녀가 물어 본 말에 대답할 위치를 가진 사람은 역시 비슷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비교적 간편한 옷 을 차려 입고, 등에는 손잡이에 진주를 박은 보검을 맨 소녀. 두 소녀 공히 간소한 복장이었지만 천은 최고급 비단을 사용 해 지은 것이라 적어도 이곳 단자가에서만은 최고급 손님으로 환영을 받을 만한 복장이었다. 그렇기도 한 것이 그녀들은 양주부에서 내노라 하는 부호들의 여식들이었던 것이다. 검은 장갑의 소녀는 마상란. 피진장주 철권 마종의 손녀이자 양주쌍교의 하나로 일컬어 지는 재녀(才女)였다. 다른 하나는 상관청조(上官菁潮). 유성쌍인부(流星雙刃斧)로 유명한 양주의 토착 무림 세력인 옥 정산장 장주 상관향(上官鄕)의 여식이었다. 도끼는 여인이 다룰 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멀리 사천에 위치한 아미파(峨嵋派) 에까지 가서 검술을 배우는 중에 집에 잠시 돌아온 소녀였다. 배경이 비슷하고, 가문끼리 친분이 있어 어려서부터 친했는데 오랜만에 만나 같이 단자가로 구경 겸 물건도 살까 해서 나온 참에 도신 도귀를 본 것이다. 그녀, 상관청조가 마상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신선한데! 상인들에게서 돈을 울거 낼 작정이었을까?" "글쎄?" 마상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거리를 몇 번 왕복하는 것만으로 돈을 긁어 낼 수 있다 면 펀한 장사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돈을 노리고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고수 같은걸?" 걷는 중에 기세를 드러내어 사람들을 위협한다는 것은 어지간 한 무공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생사를 건 격전을 앞두고나 발줄되는 기세인 것이다. 상관청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체다가 점원들도 보통 몸가짐은 아니었던 것 같아!" 도신 도귀의 기세에 눌려 말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선 포쾌들 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만한 기세 앞에 태연히 나서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상란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요즘 양주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어." "그 은발의 사내도 그렇고?" "우리가 이대로 두면." "양주의 두 악녀(惡女)가 아니지?" 두 소녀는 장난꾸러기의 그것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 더니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 * * 철불사 뒷산. 그는 정말 대단한 식욕을 가졌다. 네 마리의 개 중에서 한 마 리는 조금 작은 것이긴 했지만 혼자서 세 마리를 먹는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그러고도 지금 그는 아쉬운 듯이 다리뼈를 핥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한 마리를 오기로 겨우 다 먹고서는 나무에 기대앉 은 챠 단한 식성의 돌중, 도연을 존경익 빛을 가득 담고시 뱌 라보고 있었다. 도연이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수북히 쌓인 뼈다귀 중 하나를 건네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먹을 게 적잖이 남았으니 시주도 드시게 특히 뼈와 뼈가 만난 자리, 그리고 등골 같은 경우는 빠개서 그 속에 있는 걸 먹어야 하네. 그게 진짜거든! 고기의 참맛은 뼈대 속에 있는 법이네. 그래서 사물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정수 (精髓)라고 하지 않나! 골수(骨髓)와 비슷한 말이잖아 빈승은 비록 무식해도 골수가 뼈다귀에 있는 것인 줄은 안다네." 혈문룡은 손을 저었다. "나는 많이 먹었으니 화상이나 드시오." 도연은 눈을 뒤룩거리더니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술병 중에 하나를 들어 흔들어 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시 다른 하나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술병을 거꾸로 입에 물고 술을 들이켰다. "카! 이 맛이야!" 그는 술병을 입에서 떼고는 소맷자락으로 입술 가를 문질렀 다. 잿빛 승포자락이 기름기로 번지르르한 것이 모닥불에 비쳐 보였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 들어 보았나?" 그는 혈문룡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한 톨의 쌀에 농부의 땀이 일곱 근은 들어가 있다는 것일세. 훌륭한 통찰이지. 그래서 우리 중들은 밥을 먹고 난 뒤에 바러 를, 아 자네는 바리라고 하면 잘 모르겠군. 우리 같은 중들이 쓰는 그릇이라네. 그 바리를 어떻게 씻는 줄 아나? 밥을 다 먹 고, 거기에 물을 붓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음식 찌꺼기를 깨끗 이 닦아 내지.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마신다네. 그러면 식사가 끝나면서 동시에 설거지도 끝나는 것이지. 더럽나? 한 톨의 쌀 도 헛되이 버리지 않기 위해 조사(祖師)들이 짜 낸 지혜라네. 이 뼈다귀인들……!" 도연은 뼈다귀를 잡고 흔들었다. "또 술 한 방울인들 헛되이 버릴 수 있겠나? 개뼈다귀에 농부 의 땀은 안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개의 땀은 적잖이 들어가 있을 걸세. 이 험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이 개가 얼마나 노력했 겠나? 그걸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네." 혈문룡은 씁쓸하게 웃었다. 도연의 말은 어떤 땐 농담 같고, 또 어떤 땐 제법'이치에 닿는 말인 듯도 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화상은 불도를 닦고 있으니 그렇게 하시오. 난 내 마,음대로 굴러먹는 놈이라 먹기 싫으면 산해진미라도 안 먹고, 먹고 싶으 면 뺏어서라도 먹어야겠소." 바로 그 말을 받아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도연은 뼈다귀를 핥 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되었다. 한참 만 에야 그는 한숨을 내쉬고 뼈다귀를 던졌다. 그는 말했다. "불법(佛法)이라고도 할 수 없고, 불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 다더니! 굴레를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 바로 그 경지에 달하기 위해 그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그 모든 수행이 자 네 한마디보다도 못하군. 선연(善緣)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혈문룡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옆에 기대어 놓은 여 의색자창을 들고 일어섰다. 그의 눈빛이 정광을 발하고 있었다. "잔치는 끝났소. 이젠 서로의 임무를 해야 할 때 같지 않소?" 도연은 혈문룡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혈문룡은 창의 중간 약간 아래부분을 한 손으로 잡고, 창끝을 도연을 향해 벌려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대결 직전의 예를 표 하고 있는 것이다. 도연이 손을 저었다. "왜? 나와 싸우려고? 관두게. 빈승이 패배를 시인하지. 난 보 면 아네. 자넨 창술을 싸움터에서 배웠지? 사람을 하나씩 죽이 고, 자네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 때마다 창도 더욱 예리해진 것 아닌가?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지. 무공은 분명 형편없는데 싸 우면 이기는 사람." "소림의 명예를 지키러 온 것이 아니었소?" "객적은 소리 그만하게. 중놈이 무슨 명예라는 말인가? 그저 그 핑계로 절에서 도망친 것에 불과하다네. 하던 얘기나 계속 들어 보게." 도연은 혈문룡의 말을 간단히 일축하고는 말을 이었다. "분명 싸우면 싸울수록 요령이 생기긴 한다네. 그러나 그것이 정통으로 수련한 무공을 항상 이긴다는 것은 아니지. 싸움은 요 령만으로 하는 게 아니고, 또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으니까. 한 번이라도 요령이 통하지 않거나, 운이 나쁘면 그날로 그는 끝이 지. 실전 감각으로 싸우는 자에게 패배는 죽음이니까. 그런데도 끈질기게 살아 남고, 끝까지 이기기만 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혈문룡은 이젠 자세를 풀고 서 있었다. 도연의 말은 그냥 잡 담 갈기도 했지만 그 안에 무학의 이치를 품고 있는 듯도 했다. "난 그런 생각을 했지. 무공이 강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강 해서인 것은 아닐까, 라고 말야. 야수 같은 감각, 강인한 근골, 포기하지 않는 집념, 순간적인 재치와 무엇보다도 엄청난 투지! 그런 사람이라면 실전무예가 아니라 그냥 정통무공을 익혔어도 강했을 것이라고 말일세. 자넨 정통으로 수련한 적은 없지?" 혈문룡이 툭 던져 물었다. "정통이 뭐요?" "그래 그것도 말이 되네. 정통이 뭔가? 오랫동안 해오던 습 관이 정통입네 하고 행세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말일세, 왜 사람들은 그 방법을 오랫동안 써 왔을까? 정통이라 불릴 정도로 말일세. 그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도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를 세 마리나 삼킨 그의 가공할 만큼 나온 배가 천천히 움직이는데도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는 옆에 눕혀 둔 동곤을 집어 들었다. "자넨 곤조도사(棍祖刀師)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혈문룡은 고개를 저었다. 도연이 설명했다. "곤은 할아버지고, 도는 스승이라, 장병(長兵)은 곤으로부터, 단병(短兵)은 도로부터 수련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뜻일세. 자넨 곤은 수련하지 않고 바로 창부터 수련했지? 그게 정통에서 어긋 났다고 하는 것일세. 창은 찌르기가 주(主)가 되지. 곤은 때리 는 것이 주가 되네. 그러나 창에도 많은 때리기 기법이 있다네. 곤을 연마하지 않고 바로 창을 연마하면 아무래도 그런 때리기 기법을 소흘히 하게 되지. 창의 무궁무진한 효용 중에서 일부분 밖에 쓰지 못한다는 말일세. 하지만 곤부터 수련하면 곤, 즉 몽 둥이에서 파생된 모든 병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창을 비롯 해서 모(矛), 극(戟), 과(戈), 봉(棒), 장(杖), 간(竿) , 기(旗), 산( ), 저(杵), 심지어 독각동인(毒脚銅人)까지!" 도연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동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벽(劈)!" 큰 소리는 아닌데도 이상하게 가슴에 묵직하게 떨어지는 둣한 한소리 기합과 함께 어른의 팔뚝만큼이나 굵은 붉은색 동곤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하게 정면을 내리찍는 것 같은데 곤파(棍把;곤의 아래 끝)는 뒤로 휘둘러져 뒤에서 오는 공격에도 대비하는 동작이었 다. 발은 밟은 듯 밟지 않은 듯 내밀어져 무한한 변화가 그 속 에서 가능했다. "도(挑)!" 뒤로 돌아갔던 곤파가 앞을 향했다가 다시 옆으로 돌아가며 파랍을 끊었다. 발은 어느새 다섯 절음이나 움직여 있었다. 도연의 몸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착( )! 륜( )! 삽(揷)! 슬(膝)! 교(絞)!" 도연의 곤은 시종일관 절도있고 강맹하게 움직여 갔다. 바람 이 그 곤의 끝에서 끊어지고, 터져 나갔다. 얼굇 보기에도 대단 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연은 곤을 옆에 세워 들고는 숨도 헐떡이지 않고 느긋한 어 조 그대로 말했다. "이게 기본식일세. 제미곤(齊眉棍)이라 부르는데, 모든 곤의 기초지. 다음은 풍마곤(風磨棍)인데, 제미곤보다는 약간 보기가 나을 걸세." 그는 말을 맺기가 무섭게 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횡격(橫擊)! 하발(下撥)! 하소(下掃)! 삽보(揷步)! 개파(蓋 把)! 격파(擊把)! 륜벽( 劈)! 점곤(點棍)! 탈수(脫手)!"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아홉 개의 구결과 함께 동곤은 옆으 로 휘둘러지고, 아래에서 솟구치고, 아래를 쓸어가고, 위로 올 라가며 나선을 그리고, 정면을 찔러 휘젓고, 위아래로 큰 원을 그리며, 크게 휘둘러져 땅을 쳤다가 마지막에는 손에서 떠나 허 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콰콰쾅! 땅이 울리고 거목이 쓰러졌다. 하늘에는 잠시 먹구름이 밀려 와 덮은 둣 어두워졌다. "어때? 조금 낫지? 하지만 마지막은 이것보다도 조금 더 낫다 네. 쇄정곤(碎鼎棍)이라 부르는데 소림사의 것이네. 효의 것들 은 강호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지." 그는 다시 곤을 잡고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연의 신색은 앞의 때보다 더욱 신중해지고, 곤은 더 욱 빠르고 영활킁!, 마치 춤추듯 움직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소리없이 움직이는 동곤, 그 붉은 동곤이 사방에 꽉 차 아무 곳으로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것을 경이에 차서 바 라보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아 흐르는 전율은 무공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한 환희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한 무공의 깊이와 광대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를 그도 몰랐다. 도연은 보이지 않고 오직 곤과 그 곤의 끄트머리만이 눈앞에 꽉차 있는데, 혈문룡은 그 속에서 자신의 창이 넘지 못하던 벽 을 넘을 단서를 보고 있었다. "무(舞), 전(轉), 선(旋), 포(抱), 착( ), 척( ), 등(騰), 발(撥), 요(搖), 붕(崩), 벽(劈), 압(壓), 소(掃), 란(欄), 평 (平), 헐(歇), 앙(仰), 점(點)! 이상 열여덟 가지의 구결이 요체 일세. 어떤가?" 어느새 움직임을 그친 도연이 땀 한 방울 홀리지도 않고 그를 보고 있었다. 혈문룡은 뭔가 감탄사를 발하려 했다. 싸울 필요도 없이 완벽 하게 진 것이다. 그러나 도연의 말이 먼저였다. "멋있지 그럴듯해 보이지 하지만 내 무공은 자네 같은 전투 용이 아니라 시범용, 혹은 전시용이라네.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 지 몰라도 누구와 싸우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지. 말 그대로 그냥 줌이랄까?" "그게 춤이라면 천하에 춤이 아닌 무공은 없을 거요." 도연은 피식 웃으며 곤을 집어 던졌다. "그래, 옳은 말이야. 춤이야말로 무공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인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다시 배가 고프군. 괜히 멋을 부렸나?" 그는 다시 주저앉아 뼈다귀를 집어 들었다. 혈문룡은 그 앞에 멍청히 서 있었다. 도연이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 말대로 잔치는 끝났네. 그러니 그만 가게. 이대로 산에 서 자네와 둘이 밤을 세우면 정분 난 줄 알겠네. 술, 고기만으 로 부족해서 이제는 남색(男色)까지 ! 뭐, 그런 욕을 먹고 싶진 딴구먼. 잔치는 내일 계속하세." "내일?" "그래, 내일 또 놀러가겠네. 자네와 술이나 더 마시고 싶군 그래." 도연은 말을 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영 락없는 땡중이었지만 혈문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괴짜구나 했는데 이건 대단한 고수 아닌가! 게다가 뭔가 속으로 품은 뜻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림곤의 비결을 보여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눈치를 챘든지 도연이 미리 입을 벌렸다. "사실은……!" 그는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절에 돌아가면 무서운 사람이 있어서 난 되도록 돌아가기 싫 네. 체질상 절이 내겐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하는 수 있나? 승 복 입고 하루 몇 번 염불만 하면 그래도 재워 주고 먹여 주는 데는 절밖에 없는데. 그러니 이번 일은 두번 다시 오기 힘든 기 회지. 적을 알아야 한다 어쩌구 하면서 자네랑 이렇게 놀다가 나중에 자네와 내가 마주서서 점잖게 몇 마디 하는 거야. 이런 저런 멋있는 대화를 하면서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하다가 자 네가 한마디 하지, 소림곤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소, 라고. 그 러면 내가 그렇소? 그럼 됐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손발을 놀려가며 싸울 필요는 없지요, 운운 하면서 부처님의 지 비 어쩌고 하면 서로 멋도 있을 뿐 아니라 본산의 노땡초들도 트집을 잡진 못할 것일세. 어떤가?" 혈문룡은 묵묵히 서 있다가 한마디했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소! 오늘이 아니더라도." 도연은 의외라는 듯 눈을 껌벅이다가 피식 웃었다. "싸우더라도 될 수만 있으면 시간을 끄세. 자넨 나를 빨리 돌 려보내고 싶은가? 이기든 지든 싸우고 난 다음에는 가야 한단 말 일세. 이 화상을 불쌍히 여기거든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게나." 혈문룡은 돌아갔다. 화상은 뼈다귀를 든 채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혈문룡의 모 습이 완전히 산을 돌아가 사라지자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만 나오라." 그것이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뼈다귀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를 둘러싼 땅바닥이 천천히 들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덟 개의 인영이 나왔다. 청색 모;싸에 청 색의 상의, 바지와 신발도 청색 일색의 여덟 명이었다. 특이한 것은 하나같이 항아리처럼 뚱뚱하다는 것, 그리고 놀 랍게도 발이 땅에서 떨어져 둥둥 떠 있다는 것이었다. 도연이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의외의 일이 생긴 셈인데, 우리에게는 유리하게 돌아갈지 어 떨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군. 그걸 너희들이 조사해 줘야겠다." 그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백리극과 등평, 진운, 혹수당주, 단자가, 모충국과 유소백을 맡고, 나머지 셋은 여태 하던 대로 하라. 다음 모임은 사흘 후 여기다." 청색의 인형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렇게 뜬 채로 숲속 으로 사라졌다. 도연도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나도 슬슬 가 볼까? 정원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데!" * * * 단자가. 방은 어두웠다. 한 점 빛도 새어들어오지 않는 밀실 같은 방, 답답한 공기 속 에 그는 서 있었다. 코앞도 분간하기 힘든 지경이었지만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방안의 기물 하나하나,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을 밝게 분간 할 수가 있었다. 사방 열 자가 채 되지 않을 방에 빽빽히 드러누워, 낡은 이불 몇 개로 몸을 가리고 있는 이 여인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 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소리없이 움직여 방문을 향해 다가가며 여인들의 짓 무른 손과 아이보다 가는 팔목, 그리고 그 팔목에 감겨 있는 사 슬들을 보았다. 단자포의 빛과 어둠 중 어둠에 속하는 한 건물의 방안이었다. 단자포의 그림자, 음습한 그늘에서 양주부의 빈민들이 벌레처럼 살아가는 그 둥우리에 야광충이 와 있는 것이다. 방문 밖에는 또 다른 방이었다. 아까의 그것과는 달리 사방 오 장은 될 듯한 넓은 방. 방 곳 곳에는 화덕이 있고, 거기에는 채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깜박거 리고 있었다. 황덕 위에는 가마솥, 그 안에는 물이 끓고, 바구니마다에는 은 빛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누에고치일 것이다. 그리고 방차(紡車), 사람이 앉아 발로 돌리게 되어 있는 몇십 개의 물레들이 흑은 실이 반쯤 감긴 채로, 혹은 빈 채로 서 있 었다. 여기가 단자포의 오색 영롱한 비단실들을 뽑아 내는 곳인 것이다. 방의 사방에 난 문은 방금 보고 온 것과 같은 벌레들의 둥우 리,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고 먹는 곳일 것이었다. 야광충은 조용히 그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무언가 분노와 같은 것이 그의 뱃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생각 해 보면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일들인데 왜 그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잔인하다는 것을,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던 것인가? 사람이 비참해지면 얼만큼이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이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었다. 강하면 잔혹하고, 약하면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그 런 모습은 이전에도 신물이 나게 보아 왔던 그였다. 사람이 사 는 것은 몽고나 중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야광충이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자비롭고 동정심 많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태 그의 손에 죽은 자 들의 시체가 일제히 일어나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럼 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인가? 야광충은 한 방을 지나가면서 문득 깨달았다. 그와 여기 갇힌 이들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야광충 본인이 그렇게 운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물레를 돌리고 있는 신세는 아니었던가? 로부 옹고트가 만들어 놓은 그 사슬에 묶여 어딘가로, 그가 아니라 로부 옹고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은 아 닐까? 야광충은 사슬에 묶여 죽을 때까지, 아니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물레를 돌리고 증기를 쐬어 가며 실을 뽑아야 하 는 그들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몇 개의 방과, 그 두 배 수의 문을 통과해서야 작은 마당이 나왔다. 그러나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건물들이 다닥다 닥 붙어 있는 이곳, 단자가의 뒤편 거리에 그는 서 있었다. 야광충은 요 근래 보기 드물 만큼의 살기에 타올랐다. 원래 단자가6! 주목한 것은 칠화회의 본거지가 여기였다는 말 을 듣고서부터였다. 마차 안에 겁없이 뛰어들어온 부화를 족쳐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통천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던 것 이다. 통천방의 끈은 장락방을 마지막으로 끊어진 줄 알았던 그에게 그 이야기는 의외였다. 그리고 그들이 흑수당이라는 단체보다도 야광충 그 자신에게 직접 주목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외였다. 칠화회 따위로 그를 암살하겠다고 하는 것은 서툰 짓이었지만 제법 핵심을 찌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야음을 틈탄 암살 이 아니라 백주에 덤벼든 것은! 우연이라면 묘한 우연이고, 우연이 아니라면 중요한 점이었 다, 낮에는 그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배후에 있 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는 문득 강렬한 욕망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벌써 때가 되었나?' 오늘은 7월 3일, 아직 피를 마셔야 할 때는 되지 않았다. 평 소에는 보름에 한번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그의 몸 속에 있는 마성은 진정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주기와 관계없이 피에 대한 욕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오늘의 욕망은 강렬하게 인간의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야광충은 치밀어 오르는 욕망과 살기에 휩싸여 걸었다. 누군 가가 그 손에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충분한 수의 사람이 죽어 나갈 것 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도신 도귀도 야광충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장소를 지나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의 칼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처음 희생자는 작은 마당이 나오자 말도 건네지 않고 암습을 가했던 안내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의 호위들 네 명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돈 같은 것을 건네주고 도신 도귀를 돌려보낼 생각 같은 것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단자가의 이 음침한 골목, 어둠 속에서는 그들말고도 수없이 많은 시체가 나오고, 묻혀지 는데 두 구쯤 더 늘어난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랴 하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오늘 찾아온 자들, 도신 도귀도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 온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소란을 피워라! 야광충의 명령이었지만 말도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소란을 죄 울 수 있는가? 그들이 잘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살인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살인은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무공을 지닌 자가 덤비면 그게 몇 명이든 죽여 버려라. 도신 도귀는 오늘밤, 그 명령을 충실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일은 명령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의 사람 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서 있는 그 작은 마당이 시체로 덮여 피가 웅덩이를 이룰 때까지 적들은 나타나고, 죽고, 또 나타났다. 도신 도귀는 능숙한 도살자들이었다. 그들의 칼은 망설임없이 움직여 돼지고기와 뼈를 나누듯이, 고기에서 기름을 발라내듯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사내들의 목숨을 육체에서 발라내어 버렸다. 그렇게 족히 이십인 분을 처리했을 때, 공격이 멈추고 하수들 이 물러났다. 그 자리에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 * * 용광사. 도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밤새 마신 술이 이제야 올라오는지 쉬이 중심이 잡히지 않았 다. 그는 오른쪽으로 반 걸음, 다시 왼쪽 후방으로 비스듬히 한 걸음을 옮겨 놓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그제서 앞이 바로 보였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을 뜨 고 용광사 대응전에 선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웬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대웅전 앞에 내다 놓 았나 했다. 그 사내는 그렇게 던치갖 크고, 긱할 정도로 특이 한 모습의 사내였다. 온놈에 흰 무늬가 새겨진 검정 옷을 입고 있난 했는데 자세히 보니 벌거벗고 서 있는 것이 그랬고, 옷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 은 먹처럼 검은 몸에 새겨진 하얀 문신들이라는 것도 그랬다. 검은 몸의 사내는 그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띤고 마치 금 강역사상처럼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도연은 그가 바로 혹수당주의 뒤를 따라다니는 묘족의 사내 흑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 저런 모습으로 서 있더란 말인가? 부쩍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이 술기운을 눌렀다. 도연은 조용 히 흑웅에게 다가갔다. 혹웅은 누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연은 기회다 싶어서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동공이 움직이지 딴는다? 맹인은 아니라 고 들었는데?' 흑웅은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정면의 도연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도취 상태 아니면 운기조식 이렇게 괴이한 모양으로 운기 조식을 하는 무공도 있나?' 도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흑응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마 치 소림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의 한 동작 같기도 하고, 아 라한신권(阿羅漢神拳)의 한 동작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달마역근경(達磨易斤經)중의 근력호환(筋力互 煥)자세 같기도 하고, 아미파의 복마장(伏魔掌) 같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파의 어느 무공에도 없는 수련법이었다. 도연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끼고 두 손가락으 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문득 그의 머리가 맑아졌다. "유가신공(瑜伽神功)!" 그는 순간적그로 외쳐 놓고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중이 절을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다른 절의 중 아닌가! 게다가 속셈이 따로 있어서 찾아온 것이니! 오늘 도연은 용광사의 금불상을 훔치러 온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흑응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그의 그런 생각을 십 리 밖 으로 날려 버렸다. 더 재미있는 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애초에 불문의 무공들과 비슷해 보인 이유가 있군! 유가신공 이라면 말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신공이라면 지금 내공연마 중인가?' 유가신공은 중원의 그것과 많이 달라서 여러 가지 기괴한 수 련법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도연은 문득 소림사에도 비슷한 무공수련 방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행중선(行中 )'이 그것이었다. 원래는 먹고 마시고 자는 일상의 생활 중에도 깨우침이 있고, 선을 수련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좌선보다 옳은 것 이다, 라는 가르침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소림의 고승들은 그 것을 무공수련 방법으로 바꿔 놓았다. '돌중들 같으니!' 도연은 속으로 척를 차면서 생각했다. 행중선에 의거해 내공을 쌓으면 걸어가면서, 자면서, 심지어 용변을 보고 있는 중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방법보다 몇 배는 더 빨리, 강한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인데 지금은 아쉽게도 그 방법이 실전(失傳)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가신공이라면 그런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도연은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흑웅이 유가신공을 배웠다면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것, 그리고 왜 다른 장소는 다 놔두고 억기 용캉사의 대웅전 앞 뜰에서 이 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남이 보면 곤란한 일도 있을 텐데 그것 을 무릅쓰고 여기서 이러는 이유는? 문득 도연은 흑웅의 나신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엄청 크군!' 그때 혹웅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도여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술 먹은 모습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민활한 신법이었다. 그래도 흑웅의 눈동자보다는 빠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흑웅 은 누군가가 눈앞을 스쳐 간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모르겠다는 둣 포기했다. 그는 옆에 벗어 둔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는 대웅전 방향을 향해 깊게 절을 했다. 그 뒤에야 그는 용광사를 떠났다. 도연이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그의 승복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급한 김에 대웅전 마루 아래로 파고들어 숨었던 것이다. 그는 흑웅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흑웅이 방금 하고 간 동작과 비슷해 보 였다. '야만족이 하는 짓을 낸들 어떻게 알아? 또 이 부처님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다가 문득 오늘 여기 온 목적이 생각 났다. 십 리 밖으로 날아갔던 생각이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대응전을 향해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쇠사슬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 이중삼중으로 잠궈 놓은 모양이었다. 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절간에 뭐가 훔쳐 갈 것이 있다고 이렇게 문단속을 해! 돌중 들 같으니라고!" 그 자신이 오늘은 뭔가를 훔쳐 가려고 왔다는 것은 까맣게 잊 고서 하는 소리였다. "이 부처님에게 방법이 없지는 않지!" 도연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두 손을 문에 대고 그 자세 로 한참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철컹! 철그렁! 자물쇠 풀리는 소리, 그 다음엔 쇠사슬이 끌려 내려지는 소리 였다. 도연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두 번의 소리가 더 들렸다. 용팡사 대웅전 문은 삼중으로 잠겨 있었다. 그것을 도연은 내공으로 연 것이다. 대반야능력(大般若能力) 을 운기해서 격공금룡(隔空擒龍)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도연은 그렇게 풀어놓은 문을 잡아당겨 열며 깜빡 잊어버린 사실을 떠올렸다. 안에서 문을 걸어 놓았으면 용광사의 돌중들은 어떻게 들어가 는가, 하는 것이었다. 의문은 곧 풀렸다. 열려진 대웅전의 마루에는 십여 명의 돌 중, 승려들이 방편산(方便 )과 계도(械刀)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뭐든지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리를 떠는 듯 보이 는 것은 용광사만의 독문보법(獨門步法)일까? 중앙에 선 중년의 승려가 다리뿐 아니라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쳐, 쳐라! 귀, 귀신은 아니다!" 도연은 그대로 뒤로 몸을 던졌다. 용광사의 승려들이 대웅전 안에서 그들의 보물을 지키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 머리통만한 자물통이 혼자서 열리고 쇠사슬이 공 중에 떠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 것인가? 그대로 뒤로 굴러 대웅전 앞뜰로 빠져 나온 뒤 몸을 날려 담을 넘으면서 도연은 그 생각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홀렸다. '그런데 혹시 날 아는 사람은?' 철불사의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워서야 도연은 그 생각을 했지 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다음날 정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깨울 때까지! * * * 단자가. "이, 이건 당신이 실수하는 거요. 나중에 반드시 뼈저리게 후 회하게 될 거요." "후회한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할말은 그게 아니다. 누가 너희들의 뒤를 바주고 있는 지를 말해야 할 게 아니던가?" 그의 발에 신겨진 검은 가죽장화가 한 사람의 입을 툭툭 건드 렸다. 희멀건한 얼굴의 중년 사내, 소가단자포의 주인인 소대야 (蘇大爺)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죽장화와 그 주인인 은발의 사내를 올 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은발사내의 눈에는 이런 경우 생 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아서 오히려 두려 웠다. 무심히 그의 얼굴을 건드리고 있는 가죽장화가 지금 서슬 퍼 런 칼날보다도 몇 배 더 강칠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발길에 으깨진 개미처럼 그를 으깨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내의 무심한 눈빛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귀에 야광충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구련자와는 어떤 관계지? 칠화회는? 그들은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었지?'" 소대야의 눈빛이 묘하게 움직였다. 그는 이제야 이 은발사내, 흑수당의 당주가 그들 단자포의 주인들을 납치해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이었던가?' 아무것도 모르고 닥달을 당하고 있을 때는 어디까지 알고 있 을까 몰라 두려웠지만 이제 목적을 알고 보니 조금 안정이 되는 그였다. 바쁜 중에 잠시 쉬려고 내실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냥 잡혀 온 그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악 본 이 구석진 방안에는 그말고도 단자가의 내로랏 는 단자포 주인들이 거의 모두 끌려와 있었다. 거의가 그와 같 은 방식으로 끌려왔는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들이었던 것이다, '나를 제일 먼저 닥달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알긴 아는 것 같은데!' 그는 한번 더 은발사내를 떠 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누군데 내게 묻는……?" 그는 야광충의 발이 잠깐 들리는 것을 보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밀고 당겨 가며 말하는 대화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야광충의 발은 이미 그의 턱을 옆에서부 터 걷어차고 있었다. 팍! "으아아!" 소대야는 턱뼈가 박살나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움직임을 가죽장화가 다시 막았다. 그는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떨며 야광충을 올려다보았다. 야광충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발을 들어 그를 공 걷어차둣 찰 뿐이었다. 팍! "우와아아아!" 가죽장화의 끝이 오른쪽 가슴팍으로 박혀 들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을 것이다. 우드득! 손가락이 짓이겨졌다. 우드득! 발가락! 야광충은 그를 손가락부터 발가락으로, 거기에서 다시 위로 거 슬러 올라가며 그를 짓밟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죽지 딴는 고통! 가슴으로 직접 밀려오는 고통에 소대야는 눈을 까뒤집고 흔절 해 버렸다. 불행히도 그 혼절마저 길지 않았다. 끔찍한 고통에 떨며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혼절할 때 밟은 부분 바로 윗부분을 야광충은 밟고 있었다. 그는 존각의 휴식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타……타!" 소대야는 망가진 입으로 소리쳤다. 절규했다. 최대한 원래의 발음에 가깝게 말하려고 있는 노력을 다했다. 야광층의 발길은 그리 허벅지에서 멈추었다. 그 아래는 이미 너절너덜해진 상태였다. "타앙천아--앙!" 소대야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야광충이 확인했다. "통천방?" 소대야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흔절 직전이었다. "단자가는 통천방의 것인가?" 소대야는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야앙……가아……자앙" "양가장?" 소대야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아득한 나락이 그의 정 신을 삼켜 버렸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야광충은 문쪽을 보았다. 거기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끌려온 나머지 단자가 상인들의 눈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조 력자가 온 것이다. 그들은 셋이었고, 하나같이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검을 들고 있었다. 제일 좌측의 인물은 백색 옷에 백색의 검집, 거기 꽂힌 백색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중앙의 인물은 붉은 옷에 붉은 검집, 그리고 붉은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마지막 인물은 검은 옷, 검은 검집, 검은 손잡이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검이 유난히 볼이 좁은 검이라는 것, 즉 헙봉검 (狹鋒劍)이라는 것과 검날의 색깔마저 각자의 색깔과 같다는 것 은 검이 뽑히고, 그 검봉들이 야광충의 목을 찔러 들어올 때에 야 알아낸 일이었다. --칠화회가 중원 제일의 살수들이라고? 오늘 낮에 이통천에게 물었던 말이 야광충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이매십보를 써서 순간적으로 위치 이동을 했다. 희고, 붉고, 검은 세 개의 검봉이 그의 목옆으로 지나갔다. --그 일곱 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들만큼 유명한 인물들이 또 있습니다. 사천에서 유명한 삼색 검(三色劍)이 그들이죠. 이통천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희고, 검고, 붉은 세 명은 그들의 뒤로 야광충이 돌아가자 손 을 돌려 겨드랑이 사이로 검을 뽑아 내었다. 세 개의 검은 굴 속에서 튀어나오는 뱀처럼 순간적으로 휘어지더니 쏘아져 나완 다. 야광충의 둥을 향해서였다. --그들은 혈(血), 백(白), 흑(黑)의 세 가지 색으로 된 옷을 각각 입고 다니고 사용하는 검들도 그 색으로 통일해 들고 다닌 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호도 혈검(血劍), 백검(白劍), 묵검(默 劍)이죠. 야광충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등을 찔러 오던 검들 은 이제 그의 가슴팍을 향해 박혀 들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가 --살수라면 평소에는 정체를 감추는 것이 정상입니다. 숱하 원한을 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들은 벌써 이십 년째 그 복장으로 다닙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죠. 살아 있다는 것은 그들아 강하다는 증거로는 촤상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야광충은 문득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야광충의 손이 묘하게 원을 그렸다. 그를 향해 찔러 드는 세 개의 검봉을 감싸 안는 원이었다. 한 순간 검봉이 그 원의 중심을 향해서 휘어졌다. 그대로라면 야광층의 손에 잡힐 찰나, 검들은 서로에게 부딪치더니 그 힘으 로 원을 빠져 나갔다. 칙! 칙! 칙! 야광충의 양쪽 어깨와 목덜미에 붉은 상처 자국이 생겼다. 야 광충은 이때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가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보단 강하군!" 회고, 붉고, 검은 세 명의 사내가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쓰러졌다. 야광충은 그들의 시체 위에 손에 들고 있던 각자의 머리를 띨구어 주었다. 순간적인 접전 동안 그는 세 사람의 목을 잘라 손에 들고 있 었던 것이다. 조화십삼수가 만들어 낸 조화였다. 그는 단자포 주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사색이 되어 떨고 있었다. "이들도 통천방의 인물들인가?"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도 양가장의 대리인이고?" 다시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유는 양가장, 통천방은 청부를 받고 당신들을 보호해 준다 는 것인가?" 그떻다는 대답이었다. 야광충은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질 문이 아닌 말을 했다. "통천방은 이제 단자가를 보호할 수 없다. 그 자리를 흑수당 이 맡을 것이다." 그는 나갔다. 콰앙! 푸른 섬광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도신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며 칼을 휘둘렀다. 도신의 검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푸른 섬광을 향해 순간적으 로 열여덟 번이나 칼질을 했다. 삭정십팔참(索情十八斬)!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삭정일도류의 몇 안되는 절초 중 하나였다. 웬만한 장력이나 기공도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는 칼질이었는데, 이 푸른 섬광에는 소용이 없었다. 단지 그 기세 를 어느 정도 주춤하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도신은 입으로 붉은 피를 쏟으며 몇 걸음을 더 물러서야 했 다.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도귀는 이때, 푸른 섬광에 옆으로 비껴 달려가고 있었다. 도 신이 정면으로 상대하는 그 순간에 푸른 섬광와 근원지를 베어 버린 것이다. 칼끝에 닿는 둔탁한 느낌. '베었다?' 그냥 벤 것과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에 무거웠다가 어느 한 순간 가벼워지는 그 절단의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굵은 나무 둥치를 반쯤 파고들었다가 간신히 칼을 뺀 것 같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만이 손끝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살기 ! 도기는 순간적으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가 옆으로 세 바퀴 를 굴렀다. 팡! 방금 그가 섰던 자리에서 육중한 폭음과 함께 홅먼지가 피어 올랐다. 분명히 비켜 갔는데도 뜨거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 그가 혼자 나타났을 때 그들 형제는 약간 얕잡아 본 것 이 사실이었다. 혼자인 데다가, 외팔이. 게다가 얼굴에 반을 가 로질러 칼자국이 나 있고 그 칼자국 때문에 한 쪽 눈마저 사용 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쏘아 보내는 푸른빛 섬팡은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푸른 번개가 연속 적으로 쳐 오는 느낌이었다. 다시 푸른 번개가 그를 향해 쏘아졌다. 도기는 바닥에서 튀어 일어나며 칼을 휘둘렀다. 쨍! 푸른 불꽃이 튀었다. 칼이 부러져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다시 푸른 번개! 도귀의 눈 깊숙한 곳에 절망의 빛이 홀렀다. 그러나 이번 번개는 그에게서 빗나가 중도에서 방향을 틀었 다. 그 번개의 끝에 허공에 뜬 도신의 모습이 비춰졌다. 아까 물러났던 도신이 쌍둥이 동생 도귀의 위험을 보고 앞뒤 안 가리 고 달려든 것이다. 빠--앙! 도신이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르게 되튕겨 나갔다. 그의 손에 잡힌 칼도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있었다. 도귀가 뛰었다. 그의 손에 들린 반 토막 칼이 외팔이에 애꾸 사나이의 뒷목을 쳐 갔다. 사내가 뒤돌아 섰다. 그의 왼손이 뒤집어지며 도귀의 가슴팍 을 찍어 왔다. 그 손끝에 푸른 전광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도신은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날려 갔다. 그의 눈에 도귀의 공격을 맞아 돌아서는 외괄이 사내의 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허 공에 떴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의 칼. 그는 오뚝이처럼 회전해서 좁은 마당의 한쪽을 막고 있는 홅 벽을 찼다. 그의 몸이 직선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내장이 뒤틀 리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지만 죽는 것보다 는 나았다. 그리고 지는 것보다도 훨씬 나았다. 도신은 허공에 다시 뜨고, 떨어져 내리는 칼을 잡아 아래를 향해 찍어 내렸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도귀를 향해 내밀어진 손에서는 푸른색이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귀의 가슴팍에 틀어박히려 하던 그 손은 종잇장 같은 틈을 남기고 멈추어졌다. 외팔이 사내, 뇌룡은 온몸을 떨며 뒤돌아보려고 했다. 목에 박힌 칼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의 몸이 천천히 옆 으로 기울어 쓰러졌다. 그때 그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검은 옷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은발의 사내 야광충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야광충의 눈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뇌룡, 지옥성의 마지 막 싸움에서 그와 황룡와 협공에 그런 모습이 되었던 그 승룡은 그를 보는 순간 마지막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야광충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뇌룡의 비참한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중원에 들어온 지 칠 개월, 그 동안 끊임없이 잡으려 노력했 던 로부 옹고트에 대한 단서를 겨우 잡았다 싶은 순간, 다시 놓 쳐 버린 것이다. 아니, 아니었다. 여기에서 뇌룡을 발견했다는 것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의미 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로부 옹고트가 이 단자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는 그제야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도신 도귀를 바 라보았다. 괜찮은지 어떤지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자존 심을 상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대신 그는 마당 한구석 어두운 그늘을 향해 말했다. "나오지 않으면 끌어내겠다." 잠시 주춤거리는 기색이 있더니 두 명의 소녀가 마당 가운데 로 걸어나왔다. 마상란과 상관청조였다. 그녀들은 도신 도귀를 따라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야광충이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고 물었다. "단자가와의 관계는?" 마상란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챈다. "관계없다고 말하면 믿으실 건가요?" 야광충은 이 의외의 대답에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단자가와의 관계는?" 마상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녀는 피진장에 살죠. 한번 놀러와 보시면 여기 단자가와 저와의 관계는 그저 옷감을 팔고 사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야광충은 더 이상 물어 보지 않고 돌아섰다. 도신과 도귀가 그 뒤에 붙었다. "마상란을 찾으시면 돼요." 상관청조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제38장 7월 장강. 호북(湖北) 무당산(武當山)에서 양주로 가는 길은 뱃길로 이 천 리, 보름여에 걸친 긴 여행이었다. 운학은 무당산에서 가장 가까운 부성(府城)인 곡성부(谷城府) 까지 사숙, 사형제들과 함께 걸어가서 곡성부 나루에서 배를 탔 다. 그 다음부터 양주까지는 내리 뱃길이었다. 운학이 탄 배는 곡성을 지나 흐르는 한수(漢水)를 따라 삼국 시대 위(魏), 촉(蜀), 오(吳)의 격전장인 양양(襄陽)과 관우(關 羽)가 최후를 마친 것으로 유명한 번성(樊城)을 지나고, 멀리 융중산(隆中山)과 구대문파 중 하나인 형산파(衡山派)의 본산인 형산(衡山)을 바라보며 흘러가 칠월 칠석에는 무창(武昌)에 도 착했다. 무창은 사천에서부터 홀러들어오는 장강의 본류와 합류하는 곳, 그들은 여기에서 장강의 본류를 오가는 범선(帆船)으로 갈 아타야 했다. 이 배는 이제 강서성(江西省) 경계로 살짝 넘어가 파양호의 귀퉁이에 발을 담갔다가 그대로 빠져 나와 안휘성(安徽省)을 가 로지르고, 그 다음에는 강소성(江蘇省)으로 진입해 남경(南京), 양주(揚州) 를 거쳐 양자강이 바다로 진입하는 초입인 해문항(海 門港)까지 운항하는 것이다. 물론 운학 일행은 양주에서 하선할 예정이었다. 뱃길에 약간의 비를 만나고, 그저 배를 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풍랑도 만났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뱃길이었 다. 무창을 갓 벗어난 지점에서 백리극과 등평이라는 두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날 강변은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창은 번화한 곳이라 운학은 그곳 부두에 정박해서 여행객과 화물을 싣고 다시 떠날 때까지 줄창 뱃전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호젓한 산속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그런 광경은 신기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구경도 한때에 불과했다. 번잡한 부두의 광경과 소음은 가장 시끄러운 소리가 새소리에 불과했던 무당산에서 이 십여 년을 살아온 그를 금세 피곤하게 했다. 이제 무창을 떠나 강변의 푸르름이 다시 비치자 운학은 그 푸 르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벌써 한 시진째 뱃 전에 붙어서서 강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강변에는 고깃배 서너 척이 정박해 있고, 강심 (도) 으 로는 장사꾼의 배가 오가며 돛폭 그림자를 물위에 드리우고 있 었다. 그들을 본 것은 그때였다. 돛이 두 개 달린 중형 화물선 한 척이 운학이 타고 있는 범선 의 옆으로 지나갔다. 운학의 배는 장강의 본류를 오가는 범선으로 쌀 백 섬[石] 을 실을 수 있고 돛이 세 개나 있는 큰 배였다. 그런 만큼 속도도 그리 빠르지는 않은데, 방금 범선을 추월한 중형 화물선은 이것 에 비하신 돛의 수는 작았칭만 쐴씬 빨랐다. 흘수선(吃水線)이 그리 깊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물도 많이 싣지 않은 모양이었다. 화물선이란 올라갈 때는 올라갈 때대로, 내려올 때는 또 내려 올 때대로 화물을 싣고 운항하는 법인데 많이 싣지 않았다는 것 은 선주(船主)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 서 그 화물선도 돛 두 폭을 모두 활짝 펼쳐 다음 기항지로 가려 는 것일 게다. 그런 추측을 하며 화물선이 물살을 가르는 항적(航跡)을 보고 있던 운학의 눈에 묘한 광경이 잡혔다. 화물선 선미(船尾)의 흘 수선 부근, 수면 위로 노출된 용골龍骨() 벽에 이상한 물체가 붙어 있었다. 선미는 수면 위 일 장 남짓한 높이로 치솟아 지붕처럼 드리웠 고, 그 아래 홀수선과 배꼬리 부분에는 또 일 장 깊이의 으슥한 공간이 나 있어 무언가를 숨기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그냥 스쳐 지나갔으면 덤불이라도 걸려 따라가는구나 했을 운 학이었지만 그 덤불이 그와 시선을 마주친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물선의 선미, 키가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그 바로 윗 공간에 는 한 사람이 배의 목재에 랄을 박고 매달려 있었다. 그가 적지 않은 부상을 입고 있다는 것이 운학이 처음 느낀 놀라움이었다. 그의 옆구리께에서부터 물위로 불그스름한 자국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자루 장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 고 몸을 버티고 있었다. 바로 그 검이 운학의 시선을 끌었다. '장군검!' 군사를 지휘할 때나 쓸 듯한 기형적으로 긴 장검이 그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다. '형양(衡陽) 지방의 오룡문(烏龍門)이 저런 장검을 쓰고, 그 이름을 오초검(烏肖劍)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운학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고 있는 오초검은 색이 저 렇게 검지 않았다. 그리고 두께도 훨씬 얇았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분명 강호의 무사가 쓰는 검은 아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사내가 잡고 있던 검을 두고 범선 을 향해 헤엄쳐 왔다. 그는 범선의 선미, 판자의 도드라진 틈을 잡고는 기어올라 오려는 듯이 보였다. 운학은 그를 끌어올려 주려고 몸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 전에 사내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배를 반쫌 기어올라 오더니 손을 놓고 다시 물속에 잠겨 버렸다. 운학이 물로 뛰어들까 망설이는데 사내의 머리가 다시 물 밖 으로 나왔다. 그는 운학을 향해 잠깐 손을 흔드는 듯 보이더니 다시 화물선을 향해 헤엄쳐 갔다. 그가 다시 원래의 장소에 매달리고, 배는 홀러갔다. 그도 그 렇게 배를 따라 홀러갔다. 운학은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바라 보면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설마 뱃삯이 없어서 저렇게 배에 매달려 가지는 않을 것이 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배로 도망오려다가 포기한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니 도울 수는 없 는 일이고, 차라리 못 본 척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 각하는 운학이었다. 그런 사정이 일 각이 채 안 지나서 바뀌었다. 운학은 그때 갑판 아래의 선창(船艙)에 있는 이등객실에서 좌 정(호숨)을 하고 있었다. 그들 무당파의 사정으로 일등객실에 묵는다는 것이 사치는 아 니었지만 출가인의 도리로 근검절약하기 위해서 이등객실에서 묵고 있는 그들 무당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냥 넘어갈 일이었는데 그 소란스럽게 오가는 소음 속에 '수적(水賊)'이라는 단어가 섞여 있어 그의 눈을 뜨게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잡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운영이 들어왔다. 무당삼검이라 불리는 사 형들 중에서 가장 어려 항상 심부름만 하다가 그보다도 한참 어 린 운학이 같이 여행하게 되니 좋아서인지 유독 친근하게 대해 주던 사형이었다. 운영은 두 눈에 가득 장난기를 담고 운학의 소매를 끌었다.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다. 산에서는 못 보는 강호의 실상을 보여 주마." "수적입니까?" "그런가 보더라." 남의 일 얘기하듯 하는 운영의 말투에 운학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가 보다,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십니까?" "우리 앞에 가던 화물선이 세 척의 배에 둘러싸였는데, 아무 래도 그자들이 수적 같더라는 말이다." "사숙님은 어쩌신답니까?" "직접 물어 보려무나." 짐짓 진지하게 또박또박 대답해 주던 운영이 웃음을 터뜨리며 운학의 어깨를 쳤다. "직접 가서 보면 될 일을 그렇게 따져 묻느냐? 젊은 녀석이 그렇게 노인네같이 움직이기 싫어해서야 어디!" 그 출가인답지 않은 말투에 운학이 웃음기를 머금는데 갑판 두껑이 열리고 그들은 갑판에 머리를 내밀게 되었다, 운학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엄청나게 긴 노를 양옆으로 각각 열 개씩이나 단 쾌속전투함 세 척이 화물선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닻을 내렸는지 그 세 척의 전투함은 강물 위에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았고, 비조구(飛 爪鉤)라 불리는 사슬 달린 갈고리 수십 개로 전투함들과 연결된 화물선도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은 운영이 말한 대로였다. 단지 운학이 보고 놀란 것은 그 화물선이 거미 사내가 매달려 가던 그 화물선이라는 것이었다. 운학의 짐작대로라면 저 수적들은 그들을 찾으러 온 것이 분 명했다. 수적들! 화물선을 가로막은 세 척의 배는 누가 보더라도 수적들이 탄 것임이 분명했다. 엄청나게 긴 노를 양옆으로 각각 열 개씩이나 단 쾌속전투함 에, 탄 사람들은 하나같이 푸른색 비단 잠수복을 입고, 같은 색 의 모자를 눈 바로 위까지 뒤집어써서 얼굴만 간신히 내놓은 사 내들이었다. 그들이 흑은 배 위에 서서 궁노(弓弩)를 겨누고, 혹은 손에 갈고리[鉤], 도끼[斧], 철퇴[鎚] 등 흉기를 들고 화물선과 그들 의 배를 연결한 널판 위로 뛰어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배에는 북채를 잡은 고수(敲手)와 징을 든 동라수 (銅 手), 기로 신호를 교환하는 기수(旗手)를 대동하고 선장 격의 인물이 서 있고, 그를 호위해서 궁노수(弓弩手)와 도부수 (刀斧手)들이 정열해 있었다. 운학은 입을 딱 벌렸다. 얼핏 보기에도 엄청난 기상이 넘치 고, 동작 또한 일사불란해서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저는 수적들은 더러운 잠방이에 녹슨 칼이나 들고 배를 터는 자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이 정도 기상이면 우리 무당파의 검진에도 비견되겠는데요? "터무니없는 소리! 한낱 수적들의 그것이 어찌 우리 무당파의 검진에 비견되랴!" 운학의 뒤에는 어느새 청허진인이 와 있었다. 그는 일단 운학을 꾸짖어 놓고도 뭐가 마 음에 들지 않는지 인 상을 찌푸리며 수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곤 해도 확실히 보통 수적들은 아니구나. 아무래도 장 강수로십팔타의 인물들 같은데. 게다가 화물선 하나를 터는 데 세 척이나 모였다?" "장강수로십팔타입니까?" 운학도 장강수로십팔타라는 이름은 들었다. 수적의 대표격인 리들 아닌가! 그만한 자들이니 이런 기상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 런 인물들이 화물선 하나를 터는데 저런 법석을 떤다는 것인가? 화물선을 뒤지던 사내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정면을 가로막 은 전투함에 선 한 노인을 향해 외쳤다. "안에는 없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떨리는 것을 운학은 먼발치로도 알아볼 수 있 었다. 엄청나게 길어서 귀 밑까지 내려온 데다가 눈처럼 하얀 눈썹이었던 것이다. 그 노인이 호통을 쳤다. "샅샅이 뒤져 본 거냐? 분명 그 배에 매달려 가는 것을 본 사 람이 있단 말이다! 지금 아래에 없으니 배 안에밖에 더 갔을 것 인가?" "널빤지 하나하나까지 찔러 보고 뒤졌습니다요." 노인은 인상을 쓰더니 옆에 있던 중년 사내를 손짓해 불렀다. "배 밑창을 뒤져 보게!"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뱃전으로 다가가 물에 뛰어들 었다. 그의 뒤를 따라서 이삼십여 명의 사내가 물에 뛰어들었 다. 그들은 물속을 뒤져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때, 운학이 탄 배는 그 장소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노인이 소리쳤다. "멈춰라, 사공! 그 배도 뒤져 봐야겠어!" 그는 좌우를 향해 명령했다. "지금 이 자리에 저지선을 치고, 통과하는 배는 하나도 남김 없이 조사해라 반드시 잡고야 말 것이다." 화물선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세 척의 전투함이 흩어졌다. 그 중 한 척이 운학의 배 옆에 붙었다. "이런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래? 해지기 전에 서창(瑞昌)까지 가려 했더니 글러 버렸군!" 사공의 투덜대는 소리는 전투함에서 비조구가 날아와 뱃전에 박히자 끊어져 버렸다. 장강을 터전으로 하는 사공들 중에 누가 장강수로십팔타의 일에 이렇다저렇다 불평을 할 것인가? 운영이 청허진인을 불렀다. "사부님! 이대로 두는 건니까?" 청허진인의 낯밍이 무건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직은 행패가 심하지 않으니 좀더 두고 보가로 하자. 자신의 말이 도피성으로 들린 듯하자 청허진인은 얼른 보충해 서 말했다. "저 노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다. 장강수로십팔타의 이인자 격 인 백미어옹(白眉漁翁) 하호(河浩)라고 하는데,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지. 그가 저렇게 나올 땐 분명 그만한 일이 생긴 것 이다." 백미어옹 하호라는 이름은 운학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전대 의 총타주 때부터 그는 고수요, 장강수로십팔타의 실력자로 이 름이 난 인물인 것이다. 무공이 강할 수는 있지만, 그리고 한때 세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각각 성향이 다른 삼대의 총타주 아래에서 항상 그런 힘 을 유지했다는 것은 분명 작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 하호가 나서서 강을 막고 배를 뒤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 운학은 문득 오전에 보았던 인물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노부는 장강수로십팔타의 심부름을 하는 하호라 하오. 오늘 여 러 손님들의 발길을 묶어 놓게 되어 죄송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어느새 하호가 범선 뱃머리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말 로는 죄송스럽다고는 하지만 전혀 죄송스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었다. 흑시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양 옆에 늘어선 사 내들의 시퍼런 칼날, 무거운 도끼들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총타의 손님으로 오셨던 분이 이 부근에서 길을 잃고 헤 매고 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렇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으니 여러분은 해량(解諒)해 주시고, 최대한 협조해 주시기 바라오." 마치 써 놓은 글을 읽어 내려가듯이 고저없는 목소리로 얘기 하던 그가 손을 까닥였다. "뒤져라!" 그와 함께 범선에 올라온 이십여 명의 사내가 후다닥 선창으 로 내려가고, 혹은 승객과 사공들을 살펴보았다. 혹시 변장하고 섞여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빛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수하들이 하는 양을 보던 하호의 눈이 갑자기 번뜩였다. 청허진인을 그제서야 발견한 것이다. "대명이 자자한 무당 칭허진인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구려. 이거 실례했소이다, 실례했어." 청허진인이 담담히 포권하고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정정해 보이시니 반갑군요." "이젠 물러나 쉬어야 하는데 아직 이꼴이라 부끄럽구려. 말년 에 복이 없으면 늙어서도 발에 물집 사라질 날이 없지요." 제법 친근한 어조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운학은 신기하 다는 둣이 바라보았다. '사숙이 언제 녹림수채의 무리와도 안면이 있으셨나?' 그때 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찾았습니다!" 하호가 뱃전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아까 물 페 뛰어든 중년인이 물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서 있었다. 마 치 물속에서 발판이라도 딛고 있는 것처럼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가 범선 선미의 한곳을 가리켰다. 거기 붉은 자국이 흐릿하 게 남은 것을 운학도 볼 수 있었다. 조금 전 장군검의 사내가 남긴 것이었다. "배를 막는 것을 보고 이 배로 도망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세 척의 배 가 범선을 에워싸듯 움직였다. 거미줄처럼 밧줄이 걸리고 널빤지가 놓여졌다. 백여 명에 달 하는 잠수복의 사나이들이 범선으로 몰려왔다. 갑판 위는 금세 살벌한 공기로 감싸였다. 하호가 말했다.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없을 것이오만, 칼에는 눈 이 없는 것이니 부디 조심들 하기 바라오." 아까 했던 말에 비하면 훨씬 감정이 실려 있는 말이라고 운학 은 생각했다. 단지 위협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선창 아래로 더 많은 사람들이,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려갔 다. 이미 조사를 받았던 승객들이 다시 하나하나 조사를 받았다. 운학은 문득 그의 주위에 묘한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살펴보니 궁노를 든 사내들이 배 위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궁노의 끝은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허진인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이건 무슨 뜻?" 하호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하모는 실오라기만한 가능 성이라도 넘겨 버릴 수가 없구려. 그와 아무 상관이 없으면 궁 노는 고스란히 치워질 것이고, 하모는 정중히 사과할 것이오." 청허진인의 눈꺼풀이 더욱 크게 떨렸다. 그것이 극도의 분노 를 표시하는 것임을 운학은 알고 있었다. 무당산에서 수업을 받을 때도 청허진인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장내에 싸늘한 공기가 돌곤 했었다.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을 책 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들 무당파가 의심받고 있다는 상황에서 청허진인의 분 노가 격발된 것은 당연한 반응이지만 상대는 장강수로십팔타, 운 학은 사부의 지시를 봉행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갑판에 내려갔던 자들이 다시 나왔다. 이번에도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도 없습니다!" 하호는 깊이 인상을 썼다. 그의 백미가 곤두서고, 주름살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강 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막고 있던 화물선은 이제 강물을 따라 계속 흘러가고, 범선은 여기 막혀 있다. 작은 배들은 강심으로는 나오지 않고 강변에서만 맴돌고, 강심까지 나온 배들은 멀찌감치에서 흘러오 고 있었다. '저것들을 다 막고 뒤져야 한단 말인가?' 한숨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필요하다면 장강수로십팔채의 전인 원을 풀어서라도 그를 잡아야 했다. 번강룡의 성질을 그렇게 건드려 놓은 자를 그냥 보냈다간 하호 자신의 목을 대신 바쳐도 그 분노를 다 재울 수 없을 것이었다. '단신으로 총타를 그렇게 뒤집어 놓다니! 하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흑수당의 사자 지팔이 라는 자가 남겼다는 혈흔(血痕)을 다시 한번 보았다. 문득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손짓을 해 물위에 떠 있는 사 내를 불렀다. "낭리찬(浪裡鑽)!" 낭리찬, 파도를 뚫고 지나가는 송곳이라는 별호를 가진 사내가 잉어가 수면을 차고 튀어오르듯 하호의 옆으로 뛰어올라왔다. 촨! 낭리찬의 얼굴이 뒤로 홱 돌아갔다. 그는 그 얼굴을 따라 허 로 뱅그르르 돌아가 버렸다. 하호는 낭리찬의 뺨을 후려친 손으로 혈흔을 가리켰다. "모르겠느냐?" 낭리찬이 벌겋게 부어 오른 얼굴, 피가 흐르는 입으로 더듬더 듬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쾌한 격타음. 낭리찬은 한바퀴를 더 돌아갔다가 제자리에 섰다. 하호가 말했다. "아래에는 자국이 있는데, 막상 있어야 할 곳에는 왜 없느냐" 낭리찬이 번개를 맞은 듯 몸을 떨었다. 범선의 흘수선 조금 위에는 혈흔이 있는데 막상 뱃전으로 기 어올라가려면 반드시 몸을 비벼야 했을 측현(側舷)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었던 갓이다. "그럼!" 하호가 급히 전투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화물선이다!" 범선 위의 수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갈고리들이 풀려 나 가고 널빤지들이 치워졌다. 전투함들은 앞서 흘러간 화물선을 향해 전속력으로 운항하기 시작했다. 운영이 중얼거렸다. "기본적인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운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운학은 그때에야 사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속임수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부상을 입고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내의 행동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하호가 여기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불행 한 일일 것이다. '아주 속아넘어갔거나 좀더 시간을 끌었어야 했을 텐데!' 운학은 화물선을 거의 쫓아간 세 척의 전투함을 바라보았다. '곧 싸움이 벌어지겠군!' 싸움은 일방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운학의 배가 그 옆 으로 다시 다가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닻이 내려지고 범선이 멈춰섰다. 싸움터를 지나가기보다는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는 사공의 말이 운학에게는 반가웠다. 처음으로 구경해 보는 강호의 싸움, 그것도 처음 보는 순간부 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내의 싸움이었다. 그 거대한 장군검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도 운학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운학은 조금 먼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뱃전에 몸을 내밀고 싸 움을 보았다. 사내, 유성검을 비껴 든 백리극은 화물선 중앙 돛대에 기대어 피곤한 듯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그런 것 인지, 아니면 지금 싸우느라 다시 상처가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옆구리의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에서는 그가 흘린 피가 다른 피들과 섞이고 있었다. 십수 명의 수적들이 이미 시체로 변해 그를 중심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다. "끝났군!" 운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운학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운산이 나이 어린 사제의 이 건방진 태도에 인상을 썼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미 기력이 다했다는 증거인데 아 직 안 끝났다는 것이냐?" 물론 운학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이미 일 각 그 이전부터 그렇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이다. 최선의 상태가 아니면 최선의 무공은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손가락에 가시만 박혀도 제대로 된 검법은 나오지가 않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저만큼의 피를 홀리고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운학은 지금 백리극이 정말로 피곤해서 눈을 내리깔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정도로 눈이 밝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 운산 아니 라 사숙인 칭허진인이 그렇게 말했어도 반박했을 것이다. "아직은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리극익 손을 가리켰다. 백리극익 손은 보통의 장검보 다 두 배나 긴 손잡이를 아직 굳게 잡고 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동안은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운학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호가 손을 저었다. 여섯 명의 사내가 비조구를 한 손에 들 고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백리극의 뒤에도 같은 수의 수적들 이 역시 비조구를 들고 다가서고 있었다 "비조십이삭(飛爪十二索)이 발휘되려 하는군!" 청허진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백리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탈진한 둣 창백한 안색은 여전한 데, 눈만은 오연히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사슬을 들고 다른 한 손에 그 사슬에 연결된 갈고 리를 휘두르고 있는 열두 명의 사내를 무심히 훌어보고 말했다. "오라!"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한 사람 건너 하나씩 손에 든 갈 고리를 던졌다. 앞에서 셋, 뒤에서 셋 ! 여섯 개의 갈고리가 허공에 그물이라도 치듯이 백리극을 향해 뻗었다. 조금의 시차를 두고 나머지 여섯의 갈고리도 허공을 갈랐다. 천막밀밀(天幕密密)! 갈고리들은 허공에 빽빽한 그물을 만들어 백리극의 머리 위에 서부터 덮어씌워졌다. "한철로 만들어진 비조구라 시전되기 전이면 모르되, 일단 시 전되면 피할 사람이 없……!" 청허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리극의 손이 움직였다. 유성검이 거목이 들리듯 천천히 허공으로 치켜지고, 다음 순간 정면으로 다가오는 세 개의 갈고리를 쳐 갔다. 쾅! 청허진인익 입이 벌시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개 검이 휘 둘러지는 소리가 뇌성을 방불케 할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서 그것을 목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여지던 유성검이 한 순간 번개처럼 움직인다 했더니 뇌성과 함께 세 개의 갈고리들은 산 산이 부서져 튀어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로 따라오던 세 개의 갈고리들이 그 파편에 맞아 뒤로 튕겨졌다, 그러나 뒤에서 날아들던 여섯 개의 갈고리는 백리극익 뒷등을 후벼파고 있었다. 백리극은 휘청 기울어지는 듯하더니 몸을 돌려 유성검을 휘둘 렀다. 그의 등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나갔다. 콰앙! 상처를 입고, 힘을 잃었을 것이 분명한데 유성검에서 터져 나 오는 뇌성은 더욱 커졌다. 여섯 개의 갈고리 모두가 부서져 흩 어졌다. 자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에 걸리는 것은 뭐든지 부숴 버리고 바스러뜨리는 무식할 정도로 파괴적인 검법이었다. 벌어졌던 청허진인의 입이 처음 하려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단어들을 더듬거리며 토해 냈다. "뇌…… 정검법!"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유성검은 그대로 멈춰지지 않았다. 백 리극의 발이 무겁게 앞으로 한걸음 내디뎌지더니 유성검은 정면 을 향해 큰 원을 그렸다. 콰앙! 화물선의 뱃전 한쪽이 부서져 나갔다. 검이 채 닿지도 않았는 데 폭발이라도 하듯 터져 나간 것이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여섯 수적들이 나뭇조각과 함께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쳐라!" 하호의 절규와 함께 터져 나간 반대쪽 뱃전의 수적들이 벌떼 처럼 달려들었다. 백리극의 검이 다시 한번 원을 그렸다. 돌풍처럼 뻗쳐 나가는 가공할 기세! 콰앙! "으아악!" 대여섯 명의 수적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원을 그리고 뱃전을 넘어 강물로 떨어졌다. 허공에 뿌려진 피가 그제 서야 갑판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하호는 이를 갈고 백리극을 향해 덮쳤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작살같이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아미자 두 자루가 튀어나왔다. 낭리찬이 그 뒤를 따라 뛰었다. 그는 시커먼 철차(鐵叉)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백리극의 검이 휘둘러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약점을 찾아 틈을 찌르고 어쩌고 하는 검법이 아니라 적을 향 해 무조건 휘두르는 마구잡이 몽둥이질로밖에 보이지 는 일격 이었다. 앙! 다시 한번 폭음! 백리극의 마구잡이 몽둥이질에 공기는 잔뜩 압축되었다가 터 져 나가고 그 파괴력에 휘말린 하호와 낭리찬이 피를 토하고 물 러 났다. 잠시의 소강 상태. 하호는 가슴을 아프게 자극하고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기혈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의 손에 들렸던 아미자는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쿵! 하호는 옆을 보았다. 그악 함께 물러선 낭리찬이 갑판 위에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그의 등으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푸른 비단옷을 붉게 물들였다. 백리극의 일격을 그는 견디지 못한 것 이다. 하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백리극은 유성검을 갑판에 꽂고 그 손잡이에 기대어 서 있었 다. 만 근(萬斤)의 피로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듯이 백 리극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숙여진 고개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붉은 줄은 그의 입에서 홀러나오는 핏물은 아닐까? 하호의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도 이랬었다!' 저 지팔이라는 사내가 총타의 정문을 통과하고 피로 길을 뚫어 번강룡의 앞에 설 때에도,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가상하다는 둣이 바라보고 있던 번강룡을 '덤비면 죽는다!'라는 한마디 말로 광분시키고 다시 피로 길을 열어 총타를 빠져 나간 그때에도! 저 사내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끝끝내 쓰러지지 않 았고, 단 한번도 그 오연한 기상을 버리지 않았었다. 그는 정말 오려 해서 왔고 갈 때가 되어 간다는 듯한 태도였던 것이다. 하호는 구십 평생 처음으로 진정한 용기의 실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정한 두려움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뒤로 천천히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화물선의 양즉 현에 붙은 전투함들에서 궁노수들이 노궁(弩 弓)을 들었다. 백리극을 향한 백 개의 노궁! 하호의 손이 백리극을 향해 떨쳐졌다. "발사!" 백 개의 화살, 백 개의 별라이 백리극을 향해 모여들었다. 백 리극은 고개를 들지 않고, 화살의 산이 만들어지나 하는 순간, 푸른 그림자가 화살 앞으로 뛰어들었다. "운학!" "사제!"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 오는데, 푸른 그림자에서는 한 줄기 횐 빛이 뿜어져 나왔다. 따다당! 손가락 굵기의 강전(剛箭)들이 분분히 튕겨졌다. 노궁이란 사람의 힘으로 쏘는 활이 아니라 기관장치의 힘으로 하살을 닐리는 일종의 기관(機關)이었다. 일반적인 화살보다는 적어도 열 배는 강력한 것인데, 수전에서는 그렇게 멀리에서부 터 화살을 날려 초전(初戰)의 승부를 결하기 때문이었다. 그 노궁으로 발사된 강전들이 튕겨진 것이다. 지금 백리극의 앞을 가로막고 선 청삼의 청년 도사, 운학의 점이 일으킨 검기 에 가로막혀서였다. 운학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호에게, 사실은 청 허진인이 들으라는 둣이 말했다. "이 사람이 장강수로십팔타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빈도는 무당의 제자로서 다수가 빈사 지경의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소." 하호의 인상이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네, 네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 냐?" 그때 강 위로 검은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누구든 그것을 바람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바람이 그를 데 려갔다고밖에는!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백리극은 사라지고 없었다. 운학은 잠시 멍한 기색이었다. 그것은 하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경우란 어떤 것일까 "저기다!" 작은 쾌속선 한 척이 강 아래를 향해 급히 달려가는 것이 수 적의 눈에 띈 것이다. 하호가 황급히 소리쳤다. "쫓아라!" 그는 전투함으로 돌아가려다가 힐끗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냐, 애송이! 지금은 바빠서 그냥 가지만 오늘 일을 횝생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운학이 대답했다. "빈도 무당 제자 운학이오. 무당 제자는 위협 앞에 비굴하지 않음을 보여 줄 것이오." 하호는 피식 코웃음을 치더니 청허진인을 보며 말했다. "언제 무당파가 이렇게 컸지? 오늘 무당파가 우리 일을 방해 한 젓을 장강수로십팔타는 잊지 않을 것이다." 칭허진인은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서로 흠을 잡는 것밖에는 도리 가 없다. "장강수로십팔타가 활을 겨눈 것을 우리 무당파 역시 쉽게 잊 지는 않을 것이오." 하호가 내뱉었던 위협은 사흘 후 장강수로십팔타의 초대라는 형식으로 현실에 나타났다. 운학은 자신이 섣불리 나선 것은 아닌가 후회하고 있던 참이 었다. 백리극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나서서 도와 준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음에 걸려 하고 있는 것은 단지 사숙의 허락없이 나섰 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청허진인은 의외로 거기에 대해서 그를 책망하지는 않 았다. 그는 단지 한 가지 점만을 그에게 캐물었고, 그것은 운학 에게는 차라리 섣부른 행동에 대한 책망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 되었다. 백리극에게 쏘아지던 화살을 튕겨 낸 그 검기를 어떻게 연성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운학은 사부의 당부를 어기고 삼절황검법의 단계에서야 가능 한 검막(劍幕)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로서는 사숙에게 대답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삼절황을 사용한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연성했는지를 누설하 는 것이 더 엄중한 잘못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동배들 모르게 사부에게 이끌려 장문진인으로부터 직접 사사받았다는 것을 말 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청허진인과 그 사이에 감돌았고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무당삼검과의 사이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렇게 괴 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에 그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탄 범선이 파양호(播陽湖)를 지나 팽경현(彭涇縣) 소 고산(小孤山) 아래를 지날 때였다. 하루 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그의 방문을 운영이 두드렸 다 일어선 그를 향해 운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 걍다. 따라오라는 뜻일 것이댜. 운영의 뒤를 따라 갑판으로 나가자 거기 세 사람이 서 있고, 사숙과 사형들이 그들과 같이 있었다. 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들은 범선 옆에 대어져 있는 쾌속선에 옮겨 탔다. 쾌속선의 노를 젓는 노수(櫓手)들의 복장을 보고 운학은 그들 이 장강수로십팔타의 인물들임을 알았다. 하호의 위협이 이런 식으로 그 머리를 드러낸 것이다. 쾌속선은 강변에 멀리 보이는 소고산 남쪽 경사면으로 다가가 고 있었다. 푸른 산 아래 부분은 강물에 깎여 암벽과 홅을 드러내고 오 장여 가까이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운학은 먼 빛으로도 거기 전날 보았던 전투함들과 쾌속선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가 장강수로십괄타의 인물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곳인가?'' 운학은 이 소고산 부근에 장강수로십팔타 중 하나인 남호채 (南湖寨)가 있다는 말을 사숙으로부터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이대로 그냥 가시려는가?' 힐끗 바라본 청허진인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말을 붙이기가 겁날 정도였다. 운학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소고산 남쪽 경사면 십여 척의 배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더 있었고, 그 하나하나마다에 푸른 비단옷의 수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수백에 가까운 인원들 이었다. 운학은 수적들의 수보다도 그 일대를 감싸고 도는 막대한 살 기에 더욱 놀랐다. 게다가 그 모든 살기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거기에는 전날 보았던 장군검의 사내와 또 다른 한 사내가 작 은 배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극은 사홀 전보다도 더욱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 동안 계 속 쫓겼던 탓인지 제대로 감싸지도 않은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창백한 안색은 잿라으로 변해 시체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 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여전히 형형한 눈빛과 검을 의지하고 선 오연한 자세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한 사내는 이십대의 영준한 청년이었다. 얼굴에 말라 붙은 핏자국만 아니었다면 주위가 그로하여 밝아졌을 정도로 분 한 용모! 그 청년은 두 손에 박쥐처럼 생긴 괴병을 들고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장강수로십팔타의 수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낭 패했음이 분명한 상황인데도 그들 둘 다의 모습에서는 두려움의 빛이란 전혀 찾을 수 없어 오히려 기묘해 보였다. 운학이 탄 쾌속선은 한 전투함 뱃전에 접현(接舷)하고, 그들 을 전투함에 내려놓고는 다시 가 버렸다. 전투함에는 피로한 기 색이 역력한 하호가 그들을 맞아 나왔다. "무당이 비호하는 자들의 최후를 보여 주고자 초대했으니 같 이 즐겨 주시기 바라오." 내용상으로는 조롱과 적의가 가득한데 말투는 정중해서 오히 려 신경을 긁는 그의 말이었다. 칭허진인이 포위당한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며 대꾸했다. "애당초 우리가 나선 것은 무림도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을 뿐, 저들과 우리는 어떤 사이도 아니니 올 필요가 없었던 것을 그랬소." 운학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저들이 누군지는 운학도 모 른다. 그러나 청허진인의 말은 그들이 어떻게 죽든 전혀 상관 없다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싸울 기회가 생기면 꼭 나서서 싸우라고 했던 사부의 말이 아 니더라도 수백 대 이의 싸움이란, 무당 제자로서는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호는 청허진인의 말에 짐짓 감탄했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그러셨소? 허나 이왕 오신 길이니 우리 장강수로십팔 타를 모욕한 자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 다고 생각되는구려." 그는 돌아서서 기수에게 명령했다. "일단 배에서 끌어내려라!" 기수가 붉고 파란 깃발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흔들었다. 하호 의 말을 수기신호(手旗信號)로 바꾸어 내보내는 것이었다. 포위당한 두 사람, 백리극과 등평이 탄 작은 배 주위 물속에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운학은 안타깝게 바라보 았다. 누군가가 그 물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일들은 무인으로서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운학은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포위당한 두 사람을 돕고 싶지만 이번에도 사숙의 허락없이 나설 수는 없 는 일이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앞에 서 있는 이십대의 사내, 등평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백리극의 안위를 걱정하는 빛을 가 득 담고 있었다. 그때 백리극이 갈라터진 입을 열어 말했다. "너는 가라!" 자신을 버려 두고 도망가라는 말이었다. 등평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장군과 함께 싸우고, 장군과 함께 죽는 것은 제 어릴 적의 소망이었습니다." 백리극은 미소 지었다. "나는 장군이 아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살 기회가 있다." 등평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장군 때문에 흑수당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버리고 도망 간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과 함께 두 손에든 괴병, 비편복월(飛 鉞)을 뒤로 내던졌다. 취이잇! "크아악!" 백리극의 등뒤, 물속으로부터 솟아 올라오던 두 수적의 목이 비된복월에 잘려 나갔다. 씌평은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오는 비편복월을 잡는 것과 동시에 다시 내던졌다. 촤아악! 비편복월은 수면을 그어 하얀 자국을 만들었다. 그 궤적을 따 라 포말이 일고, 피가 번졌다. 다시 두 명의 수적이 시체가 되 어 떠올랐다. 등평이 소리쳤다. "너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주겠다." 그러나 그의 말은 허세에 그쳐질 것 같았다. 두 번의 도끼질에 당한 수적들은 이제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 밀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등횡은 배 위에 그린 듯 서 있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해 백리극을 한 손으로 안고 허 공으로 뛰어올랐다. 퍼엉!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그 포말 위에 산산조각난 배의 잔해가 얹혔다. 백리극과 등평이 탔던 배는 둔중한 폭발음과 함 께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궁노수들이 들고 있던 노궁을 허공을 향해 겨누었다. 등평이 백리극을 안고 물위로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노궁을 든 자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표적이었다. "아니, 아직 아니다!" 하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은 잔인성과 아쉬움이 뒤범 벅되어 야릇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학은 그 표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잔인성까지는 모르겠 지만 아쉬움이라니! 그에게 아쉬워할 그 무엇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더 이상 재미있는 추격전을 펼칠 수 없어 아쉬운 것일까? 등평과 백리극은 거대한 물기둥이 가라앉으며 만든 둥근 원 에 불룩 솟구짓다가 다시 아래로 꺼지는 강물의 몸부림 위로 떨어졌다. "지금이야!" 슈슈슈욱! 그제서야 그의 명령이 떨어지고, 노궁들이 물속에 가라앉은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수백의 화살이 물위로 떨어져 하얀 포말을 남기고 물속으로 파고들었다. 물의 저항력이란 대딘한 싯이라서 아무리 노궁으로 발사한 화 살이라 해도 그다지 깊이 파고들자는 못한다. 그런데 하호는 굳 이 등평이 물속으로 잠기고 난 뒤에야 화살을 날린 것이다. 포말들이 모두 떠오르고, 무거운 강전들은 그와 반대로 모두 가라앉은 뒤에야 수면 위로 방금 한 일제사격의 효과가 나타났 다. 한 줄기 붉은 핏물이 수면으로 떠오르더니 원을 이루어 물 결을 따라 일렁였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대체 누구의 피일 것인가? 핏물을 따라 무언가 검은 물체가 천천히 수면으로 부상했다. 수면 가까이 떠오를수록 그것은 확실한 형채를 이루어가기 시작 했다. 무거운 나무 둥치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는 떠올랐다. 하늘을 향해 누운 그의 얼굴에 그어진 긴 칼자국, 굳게 감은 눈은 뜨여 지지가 않고 역시 그렇게 굳게 다문 입 또한 벌어지지 않았다. 죽어 가면서도 그것은 그렇게 소중했던 것일까? 백리극은 투 박하리 만큼 길고 굵은 장검, 유성검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운학의 몸이 배 밖으로 떨어질 만큼 내밀어졌다. 하호의 눈이 일말의 기쁨과 그만큼의 애석함, 그리고 그것보다 몇 배의 의 혹을 담고 백리극의 시체로 향했다. 끝난 것일까?" 그의 말에는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원흉의 시체를 향 해 내뱉는 말치고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왔다. "건져라!" 하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몇 척의 쾌속정들이 백리극의 시체를 향해 모여들었다. 칭허진인이 그제서야 그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문득 하호의 눈이 백리극이 죽어 가면서도 놓지 않는 그 장검 을 향했다. 얼핏 보기에도 수십 근은 넘을 듯한 투박한 장군검!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이 큰 소리를 토해 내었다. "다가가지 마라! 그놈은……!" 그러나 이미 늦었다. 쾌속정들은 시체 옆에 거의 붙어 있었고 되돌리기에는 공간도, 시간도 부족했다. 백리극의 시체가 뒤집어지고 여태 그 아래 붙어 있던 등평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취리릿--! 그의 손에서 괴성과 함께 비편복월이 날았다. 찰나의 순간에 비편복월은 허공에 가득한 칼바람을 만들었고, 그 칼바람은 곧 선연한 핏방울들로 물들었다. 둥평이 쾌속정 하 나에 올라 백리극을 건져 올렸을 때에는, 쾌속정 위에 남아 있 는 사람 중에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런 교활한!" 하호가 이를 갈아붙였다.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수십 근이 넘어가는 장검을 가슴에 안고 있는 시체가 물위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그것도 죽은 지 며칠이 지나 부패한 시체도 아닌 데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남는 아쉬움 때문에 그들을 처단하는 시기를 스스로 늦 주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할 수도 또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장강수로십팔타의 이인자인 이상은 말이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고 다시 내렸다. "쏴라!" 제아무리 고수라도 연속적으로 쏘아지는 수백 발의 노궁 요에 서 무사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간단한 방법을 그는 여태 쓰지 않고 아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진작에 썼더라면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수십의 생명을 희생 시켜 가면서. "멈춰라!" 강물 위로 쩌렁쩌렁 울리는 한마디 호통 소리와 함께 하호의 마지막 선택은 기회를 잃었다. 궁노들은 당겨졌으나 놓아지지는 않았고, 그날은 다시 당겨 볼 기회조차도 없었다. 호통 소리는 어느새 그들의 옆으로 다가온 거대한 범선의 선 수(船首)에 선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그는 바로 번강 룡 강금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하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도 없었다. 두 눈에 명백히 들어오는 이 사실을 믿지 않고는 어 쩔 수가 없었다. 그는 번강룡을 보고, 또 그의 목에 겨누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고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적에게 제압당했다는 것은 확실 했다. 번강룡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 칼을 들어 번강룡씩 목덜미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을 한 것이 다. "위험한 물건 치우고, 우리 사람들이나 건져 내라고 하시게! 번강룡의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극도의 수치와 분노로 뒤 틀린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얼굴이었다. 정중함을 외피에 두르긴 했지만 적나라한 위협으로 이빨을 드 러낸 말 아니던가! 그가 언제 이런 식으로 위협을 당해 보았던가! 그러나 말은 부드럽지만 칼날은 날카롭다. 그는 목덜미를 두드긱는 칼날익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냉기가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화를 낼 여유라도 있지만 저 칼날이 목을 긋고 지나간 뒤에는 만사휴의(萬事休矣), 그는 죽어 미지의 세계로 날려가 버리는 것이다. 그는 아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떤 일이 든 돌이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시키는 대로 해!" * * * 백장령(白丈嶺), 통천방(通天幇) 총단(總壇). "음? 흑수당? 그게 뭔가?" 귀제갈 허탁은 자기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여태 그가 입 이 아프도록 말한 것은 귀가 아니라 콧구멍으로 들었단 말인가? 보고하라고 불러 놓고서는 다 듣고 나서 딴소리하는 것은 또 무슨 심통인가?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는 방주(幇主), 화를 내 봐야 아 랫사람인 그만 다칠 것이다. 허탁은 성질을 누르고 아까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만면에 가득 웃음기를 띠고서……! "그러니까 그 혹수당이라는 것이 양주에 근거한 신흥 방파로 ……, 우리 통천방의 양주지부였던 장락방을 괴멸시킨 것을 시작으로……, 양주가 그들의 손에 넘어가……, 장강수로십팔타 도 이미 그들의 방수(幇手) 로 변했다는 소문도……." 최대한 간략하게 보고하고, 허탁은 건의 하나를 하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저희 정보망에 나타난 지도 얼마 되지 않고 해서 불확실한 정보뿐입니다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위험한 세력으로 사 료되는 것입니다. 본방의 유력한 인물을 보내어 그 허실을 알아 보는 것이 어떨지……?" "장락방? 그건 전부터 치워 버릴까 하던 쓰레기고……, 또 뭐? 장강수로십팔타를 어쨌다고? 푸하하하하!" 통천방 방주, 금도홍안호(金刀紅顔虎) 가괴자(可愧子)는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지 말하다 말고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제갈 허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보고한 사람 면 전에서 이렇게 무안을 주다니……! 항상 당하는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다. "하하하……, 아니 장강수로십괄타가 옆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 이 금도홍안호가 하지 못한 일을 누가 했다고? 흑수당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황구지자(黃口之子;어린아이)들이 장강 수로십팔타를 복속시켰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자네 벌써 머리가 흐릿해졌나? 총사(總師) 자리를 내놓고 싶어?" 가괴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점점 분노하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허탁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더러운 것이 이것이었다. 그만둔다고 하면 배신당했다고 펄펄 뛰며 당장 그를 죽여 버릴 것이면서 마치 인생이 아까워 총사 자리 하나 준 것처럼 유세를 하는 것이다. '누가 이따위 자리에 연연할까 봐……!' 강호에 나가면 그도 당당한 무림사사의 일 인인 것이다. 어디 를 가도 칙사 대접을 받으며 콧김깨나 뀔 자리가 기다리고 있 고 굳이 단체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노후(老後)가 걱정될 정도 는 아니었다. 그런데 툭하면 자리를 가지고 사람을 위협하려 하 다니! 허탁이 두려운 것은 실직(失職)이 아니라 가괴자의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성미였을 뿐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정말 자신의 처지가 더럽다고 한탄을 하곤 했 었다. 어쩌다 주인을 잘못 만나 평생 두들겨 맞고 사는 개처럼 남들 으 고기를 뜯을 때, 어쩌다 던져 주는 뼈다귀 하나만 받아도 눈 물을 흘려 가며 감격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사실 가괴자는 무공이 강하다는 점,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점만 빼면 아무 볼품도 없는 자였다. 싱명병기인 금도(金刀)야 수하를 시켜 매일 닦으니 여전히 금 빛을 번뜩이지만 이제는 늙어 검버섯이 피었으니 홍안(紅顔)도 아니고, 잘 먹어서 비대해졌으니 돼지면 몰라도 호랑이[虎]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금도홍안호라는 촌티 무릭무릭 나는 다섯 글자 별호 를 꼬박꼬박 불러 가며 자신을 지칭하는 노골적인 속물근성(俗 物根性)! 방금 들은 말을 고개 한번 돌렸다가 돌아보면 잊어버리는 살 인적인 건망증(健忘症)! 한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이 변하는 가공할 변덕! 열 가지를 얘기하면 한 가지도 채 못 알아듣는 초인적인 멍 청함! 정말 저 머리로 천하제일을 다투는 고수가 되었다는 것이 불 가해(不可解)했다. "누굴 보내든 네 마음대로 하는데……, 다시는 이 문제로 날 귀찮게 하지 마!" 가괴자는 마지막까지 으르렁거리며 육중한 몸을 일으켜 내실 을 향해 걸었다. 허탁은 그 뒤뚱거리며 걷는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 가괴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더 생각해 내었다. 벌써 십 년 전부터 제대로 서지도 않는, 그나마 믿을 만한 소 문에 의하면 어린애 같은 양물을 지닌 주제에 어린 소녀들만 밝 히는 변태적인 호색취미(好色趣味)가 그것이었다. 지금도 여섯 달 전에 새로 맞아들인 혈부용이라는 애첩에게 가고 있는 것이 다. '혈부용……!' 허탁은 그녀를 생각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통상 한 달이 못 가 홍미를 잃고 첩을 갈아치우곤 하던 가괴자가 어언 육 개 월이라는 장구(長久)한 시간을 그녀의 품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묘한 색기(色氣)가 넘치기는 하지만 그렇게 절색도 아닌 데……. 그게 좋은 건가? 명기(名器)……?' 전날 힐끗 본 혈부용의 모습을 생각하며 묘한 미소를 흘리던 허탁은 문득 빠뜨리고 보고하지 않은 사항을 기억해 냈다. 그는 급히 취의청(聚議廳)을 빠져 나가 내실쪽으로 통하는 복 도를 바라보았다. 비대한 탓인지 다행히 가괴자는 아직 내실로 들어가지는 않은 참이었다. 그는 급히 가괴자를 불렀다. "추가로 보고할 사항이……." "뭔데?" 가괴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침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혈부용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모자랐던 참이었다. "사유 진운에 관한……!" 가괴자가 팽이처럼 돌아섰다. 여태까지의 뒤뚱거리던 걸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방금 그 가괴자가 이 가괴자가 맞는지 의심스 러울 정도로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의 턱 끝에 바짝 붙었다. "뭐라고? 누구라고 했나?" 허탁이 멱살을 잡힌 채 더듬거리며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가 괴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사유 진운, 그놈이…… 그 찢어 죽일 사기꾼 놈이 지금 어디 에 있지?" '이렇게 듣고 싶은 말에는 귀가 밝아서…….' 허탁은 속으로 그렇게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두려운 태를 꾸 미며 대답했다. "흑수당의 일을 하는 걸 누가 봤다고……!" 제39장 7월 11일 동정호, 장강수로십팔타 총타(總舵). "어리석군!" 번강룡은 이제 웃었다. 처음 혹수당이 지팔이라는 괴물 같은 놈을 보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전갈이랍시고 보내었을 때도 그는 웃었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부터 그는 웃음을 잃었다. 지팔이라는 그 이름도 웃긴 놈은 이름과는 다르게 무자막자한 고수였다. 그의 검은 정말 무지막지했다. 그가 겹겹이 싸인 포 위망을 뚫고 총타를 빠져 나갔을 때부터 번강룡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번강룡은 그때까지만 해도 지꽐의 손에 죽은 백여 명의 수하 들 보다는 그의 검세(劍勢)에 휘말려 부서진 대전(大殿)의 장식 들이 아까워 인상을 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사홀. 지팔은 잡히지 않고 수하들은 점점 더 많이 죽어 갔다. 동정호의 총타에서 시작된 수상추격전(水上追擊戰)은 홍호(洪 湖), 가어(嘉魚), 적벽(赤壁)을 지나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결국 물길로 천 리를 이어진 추격전이 무창을 넘어가고 있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호가 총타의 인원 중 반이나 끌고 나가 부실해진 경비를 뚫 고 그들이 나타났다. '지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강퍅한 인상의 노인과 오십여 명 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그 숫자만으로 번강룡을 제압했다. 장강수로십팔타의 머리를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한 사람이 그들의 시선을 끌고, 그사이에 뒤를 쳐서 우두머리 를 사로잡는다는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고도 무모한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 형편없는 책략에 걸려든 그와 장강수로십팔타는 무 엇인가? 번강룡은 너무나 어이없고 부끄러워 혀를 빼물고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번강룡은 추격을 그치게 만들고 난 후에 총타로 돌아가서 오히려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종타에는 몇 사람이 더 늘어 있었다. 엊그제까지 그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앉을 수 없었던 대전 중앙 의 태사의에는 은발의 사내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여기까지 그를 압송해 온 노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그를 웃긴 장본인이었디. 그는 혈도를 찍힌데다 굵은 삼밧줄로 꽁꽁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는 생각도 않는 것처럼 비웃듯이 말했다. "옆에 선 그 두 멍청이를 내 대신으로 내세우려 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너희들도 거기가 한계다. 나머지 타주들이 허수아비인 줄 알고 있었나? 장강수로십팔타가 종이호랑인 줄 알았단 말이 지? 우하하하하! 그는 기분좋게 웃고, 비웃음의 대상이 된 두 멍청이, 전대 총타 주인 대취옹의 두 제자이자 장강수로십팔타 쭝 두 개 타의 타주인 음양쌍교(陰陽雙敎)는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은발의 사내 야광충은 대전의 정면에 놓인 태사의에 버티고 앉아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물엇다. "수하 타주들의 충성심을 그렇게 믿고 있나?" "충성심? 푸하!" 번강룡은 갑자기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충성심이라……! 요즘 보기 드물게 재미있는 농담이군! 아직 도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나? 아니, 도적들에게서 그런 걸 찾 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웃기는군!" 그는 야광충을 바라보았다. 참기 힘든 웃음을 억지로 눌렀다 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처럼 그의 눈꼬리에는 눈물 방울까지 맺 혀 있었다. "이봐, 애송이! 우리 장강수로십팔타를 뭘로 보는 거야? 양산 박? 의적(義賊)? 흑시 명문대파들처럼 말만 번지르한 위선자들 의 무리로 보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제발 참아 주게나! 제 발 그런 무리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란 얘길세!" 야광충은 조용히 앉아 번강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늘게 뜨여진 그의 눈에서는 감정의 라을 찾아볼 수 없어서 무슨 생각 을 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홉사 그는 번강룡을 관찰하기라도 하는 듯했다. 번강룡은 그가 어떻게 보든 관계없이, 얼굴 가득 자란 무성한 수염에 침방울을 묻혀 대며 떠들어대었다. "우린 수적이야. 수적이 뭔지 알아? 돈을 목적으로 노략질, 그것도 물위에서 사람들이 승게 도망가지 못하는 것을 노려서 물컨을 터는 도적이지. 그런 도적놈 새끼들에게 뭘 기대한단 말 이야? 여기에 있는 나부터도 철저한 도적이야. 억기 없는 타주 들도 다들 도적이고……! 아마 내가 죽어 없어지면 그들이 제일 먼저 좋아라고 춤을 출걸? 자리가 탐이 나서 말이야!" 그는 충혈된 눈으로 야광충을 힐끗 바라보았다.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의외로 돈이 들어오는 자리거든! 흐흐흐." 야쾅충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번강룡을 바라보며 천천 히 말했다. "그럼 널 죽이고 아무나 총타주로 세워 놓아도 상관없단 말이 겠군!" "당연하지!: 번강룡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리고는 음양쌍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저놈들은 안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놈들은 절대 안 되지 ! 왠지 알아?"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번강룡도 대답은 기데하지 않았는 지 그냥 바로 말했다. "저놈들은 고자(庫子)거든! 사내가 아니란 말일세! 우하하하 하! 그게 없어……! 이히히히!" 그는 통쾌하다는 듯 웃어대었다. 음양쌍교의 안색은 이제 검게 죽어 들어갔다. 칼에 손을 대며 앞으로 나서려는 그들을 야광충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한참을 웃어 젖히던 번강룡이 다시 말했다. "우린 충성은 어려워서 모르고, 의리는 귀찮아서 못 지켜도 사내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저따위 것들에게 맡기기에는 우리 목숨이 너무 아깝단 말씀이지!" 야광충이 손을 들어 그의 옆에 꿇은 하호를 가리켰다. "저 노인은 그럼 괜찮겠군!" 번강룡은 눈을 둥글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노인? 그래, 괜찮지! 이 노인네라면 애들이 믿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본인이 거절할걸?" "그런가 볼까?" 야광충은 원도살을 바라보았다. 원도살이 하호의 앞으로 다가 섰다. 번뜩이는 칼이 하호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야광충이 말했디. "노인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야.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지!" 하호는 고개를 들어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역시 감정없는 눈빛뿐이었다. 히 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변변히 해놓은 일도 없이 구십 년을 살았지. 칼끝에 목을 맡 긴 사내에게 그건 너무 긴 삶이었어……! 이제 나는 죽으려네!" 그는 목을 길게 뺐다. 원도살이 칼을 들었다. 그리고 내려쳤다. 칵! 하호는 대전 바닥에 쓰러졌다. 피는 튀지 않았다. 목도 구르지 않았다. 원도살은 칼의 뒷등 으로 쳤고, 그는 단지 기절했을 뿐이었다. "충성이나 의리를 모르지는 않는데?" 원도살이 이죽거리듯 번강룡에게 말했다. 번강룡은 쓰러진 하호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노인네들은 머리가 굳어 버려서 다른 생각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야광충은 아무런 표정도 띄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열여섯 타주들도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여기……!" 그의 손가락이 음양쌍교를 가리켰다. "이 두 쓰레기를 빼면 말이다." 음양쌍교 중의 사형벌인 음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우린 사부님이 이미 흑수당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양교가 말했다. "우리도 충성을 모르지는 않지요. 단지 사람을 고를 뿐!" 음교가 급히 덧붙였다. "당주와 같으신 분을 기다렸습니다." 야광충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그보다 빨리 그의 손 이 내밀어져 음양쌍교의 목을 틀어쥐었다. 음교가 공포에 질려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하시는……?" 양교는 그보다는 눈치가 빨랐다. "협조한 우리를 이렇게 죽이면 다시는 당신에게 협조하는 사 람이 없을 거요!" 야광충이 중얼거렸다. "어설픈 헙조는 귀찮아!"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두둑!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음양쌍교의 눈알은 튀어나오고, 혀는 내어 물렸다. 잠시 후 두 개의 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야광층은 다시 태사의로 돌아와 앉아 번강룡을 보았다. 이제 제대로 얘기를 해볼까? 원도살이 손짓하자 번강룡과 하호의 몸을 제압했던 밧줄들이 풀려졌다. 그들에게 의자가 제공되었다. 번강룡은 의자에 앉으면서도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냐?" 야광충이 말했다. "네게 한번익 기회를 더 주는 것이다. 내 경고를 받아들일 기회……!" "덤비면 죽는다……?" "그것이다." "겨우 이 정도로 그런 경고를 할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나?" 야광충이 번강룡을 묶었던 밧줄을 가리키며 물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주길 원하지?" 번강룡은 밧줄을 힐끗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을 했다. "너! 계략은 인정하지만 계략은 어디까지나 계략, 나는 힘을 봐야 믿는다. 강하지 않은 적은 적도 아니다. 그런 적을 가졌다 는 것은 내 수치가 될 뿐이야!" 야광충은 앉아 있던 태사의에 몸을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 "수하들을 몇 백씩 끌고 와서 떼거지로 죽여 가며 싸운 뒤에 야 힘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장강을 피로 물들이고, 물고기 밥으로 몇 백을 공양한 뒤에야 만족할 셈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장강수로십꽐타는 몰라도 흑수당은, 그리고 나는 그러고 싶 지 않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서 이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미 나는 피응덩이를 헤치며 여기 왔고, 효으로도 얼마의 피를 더 흘려야 될지 모른다. 피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 는 사람이란 말이다." 번강룡은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에 비추인 야광충의 하얀 낯빛 을, 유리구슬 같던 그 눈에서 점차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눈도 돌리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는 무림에 이름도 없던 자, 족보도 없는 방파의 우두머리라 는 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인데도 한 가지 만은 믿어졌다. 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들 흑수당 인물들은 왠지 피 냄새를 짙게 뿌리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격동되는 심사를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 다. 그제서야 그의 눈에서 뿌려지던 푸른 불꽃들이 사그라 들었다. "그러니 힘은 이렇게 보여 주기로 하자.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갰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 뒤쪽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나왔다. 얼핏 보기에도 맹인임이 분명한 청년, 외팔이에 반바지의 말 라깽이 칭년, 온몸에 천을 감싼 것으로 보아서는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쌍둥이 사내들……. 마지막에는 칼을 묘하게 찬 건달 같은 걸음걸이의 칭년과 채찍을 든 여인이었는 데 그들보다는 그들 사이에 걸어나오는 인물들이 번강룡의 눈을 더 자극했다. "이, 이게……?" 번강룡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낯이 서니 분명히 흑수당 의 인물들일 자들 사이에 서서 굴비 엮이듯이 밧줄로 묶여 나오 는 자들은 장강수로십팔타의 타주들이었던 것이다. 여덟 명……! "시간이 없어서 나머지 여덟은 초대를 못했지. 원한다면 그들 도 불러올 수도 있겠고……!" 일챙의 끝에 선 건달이 이죽거렸다. 번강룡은 모르지만 그가 혈문룡이었다. "이제 다시 물어 보지. 내 경고를 받아들일 텐가? 덤비면……." 야광충은 짧게 말을 맺었다. "죽는다!" 밴강룡의 낯빛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사태의 과정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소위 장강수로십팔타의 총타인데 그 총타 를 뚫고 들어와 그를 제압한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이 적수라 할 자 없이 편하게 지내던 타주들을 납치하는 것이 어려울 것인가? 아까 그는 힘이 받쳐 주지 않는 계략은 실패한다고 했지만 사 실은 그 역이 성립했던 것이다. 신묘한 계략이 성공을 할 때는 반드시 힘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기묘한 계략일 수록 더욱 강한 힘이……! 번강룡은 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억지로 들고 외쳤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물어 보지! 이정도 힘이면 그냥 복속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왜 불가침(不可侵)으로 끝내는 것이지?" 사실이 그랬다.' 덤비면 죽는다는 경고는 어디까지나 경고일 뿐이었다. 확실하 기로야 장강수로십팔타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집어삼키는 것 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보여 준 능력만으 로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야광충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이유를 번강룡에게 말해도 좋은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그는 그 질문에 답해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싸워야 할 상대가 있어서!" 힘을 분산시키기 싫다는 뜻으로 번강룡은 들었다. 그가 그 대답을 듣고 놀란 것은 그들 장강수로십팔타보다도 중시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야광충 의 주위에 서 있는 흑수당의 인물들이 다들 놀라는 라을 보였다 는 것이었다. 그들도 모르는 일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절반은 궁금 해서, 나머지 절반은 왠지 모를 호기 때문에 그것을 캐물었다. "어디?" 야광충은 의외로 간단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이왕 알려진 김에 아예 드러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통천방!" 제40장 7월 12일 숲. 츠츠르--츠츳! 새벽의 여명 속을 한 그림자가 헤쳐 가고 있었다. 소리로 보아서는 작고 빠른 풀뱀 정도가 내는 소리였지만 눈 이 있어 그림자를 본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 다. 거대한 술단지같이 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가 불룩한, 원 통형의 물체가 수직으로 선 채 풀섶을 헤치며 달려가고 있는 것 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좁은 아래 부분이 두 개의 다리에 달린 두 개의 발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술단지처럼 생긴 이 사람은 지금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공중 에 약간 뜬 채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있었다. 작은 소리는 그 발 이 길게 자란 풀을 스치며 내는 소리. 직접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절정의 경 공이엇다. 그러나 그런 그도 누군가에게 쫓기는지 다급한 표정어! 머리적 얹은 작은 모자 아래로는 굵은 땀방울을 홀리고 있었다. 츠르르릇! 풀섶 헤치는 소리가 요란해지고, 풀잎이 우수수 뽑혀 공중에 홑어졌다. 그의 신형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 옆 으로 울창히 자갈 나무숲을 향해서였다. 거기에는 키가 오 장을 넘어서는 백양(白楊)나무들이 빽빽하 게 들어서 있었다. 술단지는 그 중 하나를 향해 부딪쳐 갔다. 금세라도 충돌할 순간, 그의 몸이 팽이처럼 나무의 밑둥치를 타고 돌아 나무 뒤로 쏘아져 갔다. 누군가가 그를 그대로 따라 붙었다면 나무에 부딪치지는 않는다고 해도 따라붙는 속도에는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술단지는 그의 가장 굵은 부분보다도 좁은 나무 사이를 신기 하게도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꺾이고, 돌며,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한바퀴를 돌아 온 곳으로 시 달려가기도 하 면서도 그의 속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숲의 가운데쯤까지 달려왔을 때, 머리 위 나뭇잎 사이로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아! 나뭇잎들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였다. 마치 폭픗에 휘말린 듯한 소리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불지 않던 바람이 갑자기 폭풍으로 바뀌 었을 리는 없었다. 그보다도 술단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던 '3' 가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도주는 실패한 것이다. 술단지는 더 이상 도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제자리 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팔을 벌렸다. 콰콰콰콰콰! 술단지의 온몸에서 사나운 경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무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나무의 하얀 속살이 뜯어져 날렸다. 끼기기기잉! 한 아름씩이나 되는 백양나무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반쯤 부러겨 쓰러져 갔다. 분분히 날리는 홅먼지와 나무껍질들은 술 단지의 회전을 둘러싸고 회오리바람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 "대와선류(大渦旋流)! 대막 비사도(飛沙島)의 무공 아닌가! 그걸 어떻게 할 줄 알지?" 급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더없이 한가로운 목소리였다. "대막 비사도는 원 왕조 중기까지 절정기를 구가하다가 사라 진 문파, 이제는 그 무공은 황궁에만 비밀리에 전해진다는 소문 을 들었지." 파파파앗! 회오리바람의 중심으로부터 허공을 향해 은빛 광채들이 터져 올라갔다. 목소리의 주인을 노리는 은빛 비수들의 폭풍이었다. "대와선류에 은투살비(銀透殺匕)라……! 은투살비는 전진교 비전이지? 제법 적절한 조화야.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허공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한 순간 은빛 광채가 그를 뚫고 지나가는 듯 보였을 때 그림 자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파아아앙!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음이 한 줄기 소음처럼 이어져 들렸다. 그의 발은 그렇게 빠르고 강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은 라 비수들이 그 발그림자에 맞아 하나씩 튕겨 나갔다. "너 황궁에서 나왔지?" 회오리바람이 갈가리 찢겨졌다. 술단지의 회전이 주춤 옆으로 경사를 이루며 기울어졌다. 발그림자는 이제 그의 상반신을 때 리고 있었다. 빠바바방! 가죽신 뒤꿈치가 어깨를 찍고, 앞꿈치가 목덜미를 쳤다. 그것 이 한 순간에 서른여덟 번이나 반복해 행해졌다. 그 정도 실력이면 발길질 한번으로도 술단지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연속적인 발길질. 발그림자의 주인은 술단지를 상대로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술단지의 회전은 멈추었다. 청색의 작은 모자에 온통 청색 비단옷을 감은 술단지처럼 둥 글게 생긴 사내. 그는 폐허가 된 숲속에 동그마니 누워 있게 되 었다. 그 위로 밝아 오는 태양라을 뒤로 하고 선 사내의 긴 그림자 가 드리워졌다. 술단지를 눕게 만든 그 가죽신이 술단지의 부풀어오른 뺨을 건드렸다. "수염이 없다? 내시란 얘긴가? 재미있군!" * * * 흑수당 총당(總堂). "아, 그래서 내가 말일세!" 진운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담뿍 담고 무용담을 풀어 놓고 있 었다. 그의 앞에는 이번에 확대, 보강되어 새로 꾸며진 총당의 소속원들이 일손을 놓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 취합(娶合)하고 기타 혹수당의 대소사를 챙기 는, 타방파와 마찬가지의 총당 역할을 하는 조직이 드디어 만들 어진 것이다. 바로 진운을 총사로 해서 말이다. '내가 이제는 허탁, 그놈보다 못할 게 없지?' 그는 가괴자 밑에서 총사랍시고 죽을 고생을 하는 귀제갈 허 탁을 떠올리곤 흐뭇하게 웃었다. '같은 괴물이지만 그래도 돼지보단 벌레가 낫지……?' 문득 그는 벌레보단 돼지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피를 빠는 벌레보다는 돼지가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 피를 빠는 것도 아니고……, 그 변덕보다는 이쪽 이 낫……나?' 그것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변덕스러운 주인 밑에 있는 것이 볼 때마다 공포스러워 움츠리게 만드는 주인 밑에 있는 것보단 나을까? 그는 변덕스러운 주인 밑에는 있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두 려운 주인 밑에는 지금 당장도 있는 처지이고, 그리 좋은 것만 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는 입맛이 약간 썼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서기 일을 맡아보는 유생 하나가 그를 재촉했다. 진운은 다시 웃음기를 띠고는 말을 시작했다. '내 얘기가 재미는 있지.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 하는 저 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방 한구석에는 흑웅도 앉아서 바보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묵궁인지 뭔지 하는 그 쇠꼬챙이를 든 채였다. "금도훙안호 가괴자라는 작자가 말이야. 꼴같잖게도 당금 천 하 삼대고수로 꼽히는 검도권(劍刀拳) 중에 도(刀) 아니겠나? 그러니까 검성(劍聖) , 납탑도인 장삼봉과 권요(拳妖), 환영권 (幻影拳) 신도불비(申屠不比)와 더불어 도마(刀魔)로 한몫 차지 한단 말이지. 그래서인지 보도(寶刀) 나 신도(神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이용했지." "어떻게요?" 이통천이 끼여들어 물었다. 그도 총당 소속이었다. '머리도 나쁜 것이 기억력은 좋아서……!' 어쩐지 생트집 같긴 했지만 횡상시 그를 볼 때마다 진운은 그 렇게 속으로 욕을 하곤 했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보다도 오히 려 아는 것이 많다는 것 때문인데,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통천은 그가 흑수당에서 가장 싫어하는 두 사람 중 의 하나였다. 오늘은 이통천도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 는 척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운은 기분좋게 대답해 주었다. "이제 막 그 이야기를 할 참이었네! 그러니까……!" 첫 단계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진운은 오랜 사기 행각으로 모아 둔 돈을 거의 털다시피 해서 북경(北京)에서 큰 토목공사를 벌였다. 물론 북경의 대부호로 신분을 위장하고 하는 일이었다. 소문이 날 정도로, 그리고 나중에 조사해 봐도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해야 했기 때문에 거액을 투자해서 실제로 거대한 장원을 짓는 초기 과정을 다해야 했었다. 제이 단계는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북경의 대부호가 대규모, 초호화판의 장원을 근교에 짓는다더 라, 라는 소문이 날 정도의 시일이 흐른 후, 그는 그 소문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고대 왕족의 왕릉(王陵)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춘주 시대 이전 하(夏), 은(殷), 주(周), 흑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 라가는 오랜 고대의 왕릉이 장원을 짓기 위해 산을 파헤치던 중 에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은 사 실이었다. 단지 그것이 진운이 일 년이나 전에 몰래 만든 것이 라는 점만 제승하면 말이다. 소문은 자기자신을 복제(複製)하고, 새로운 소문을 스스로 만 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도 처음보다 훨씬 확대된 소문을 말이다, 일단 소문이 나자 그 다음은 쉬욋다. 진운이 한 일이라고는 사실과 터무니없는 소문들 속에 그가 의도한 몇 가지를 덧붙이 는 것이었다. 얼마 후 강호무림에는 은밀히 귀에서 귀로 전파되는 소문 하 나가 돌았다. --북경에서 발견된 고대 왕릉에는 보물이 셀 수 없이 많다 더라. --신병이기(神兵利器)도 무진장이라던데. --고대 전설 속의 무림고수가 쓰던 무공비급과 병기도 있다 더라. --그 병기가 칼이라던데? --그런데 공사를 하던 주인이 왕릉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다시 막아 버려서 입구를 찾을 수가 없데. --잘못 건들면 몽땅 주저앉아서 보물이고 뭐고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기관장치가 되어 있더라지, 아마? 이 소문 중 칼에 관한 부분이 가괴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 부분이 진운이 특히 역점을 두고 끼워 넣은 것이며, 소문 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 같지만 사실은 가괴자의 귀라는 한 방향을 향해 흐르도록 의도된 것이라는 것은 진운만이 알았다. 결국 진운의 모든 공작은 가괴자가 어느 날 밤, 심복 몇 명만 데리고 북경의 대부호로 위장한 그를 찾아온 것으로 성공 단계 에 이르렀다. 가괴자는 신분을 밝히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문이 사실이냐? 진운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거의가 엉터리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게 뭐냐? --칼에 관한 부분이다. --어떤 칼인가? --고대의 무기이고, 삼천 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原形)을 보 존하고 있었다. 가괴자의 눈이 뒤집혔다. 삼천 년 동안 원형을 보존하면서 내려온 칼이라는 것이 세상 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도대체 얼마나 신령스러운 칼일 것인가? 보통 칼은 한 달을 두면 녹이 슬어 못 쓰게 되고 한철로 만 든 칼도 백 년만 넘으면 고철이 되는데 삼천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현세에 나타난 칼이라니! 가괴자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실이냐? --단 한 자도 틀림이 없다. 가괴자는 흔쾌히 만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진운 은 도주해 버렸다. 칼은 진운이 말한 대로 거기 있었다. 만금을 지불하고 산 지 도에 그려져 있는 대로 찾아간 곳에. 그리고 진운의 말 그대로의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 칼이었 다. 단 한 자도 틀림없이 그대로였다. "도대체 어떤 칼이었습니까?" 이통천이 궁금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채근해 물었다. 맞춰 보게! 진운은 빙글거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종당의 소속원들이 머리를 감아 쥐었다. 나름대로 다들 한다 하는 머리들인데 한참이 지나도록 그 칼의 정체를 맞추는 사람 이 없었다. 진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렸다. "그게 말이지……!" "돌칼!" "엥?" 사람들은 답을 맞춘 소리가 나온 곳의 의외성에 돌칼이 진운 이 말한 조건에 맞는 것인지 따져 보는 것도 잠시 잊었다. 대답한 사람은 방문 가에 기대어 서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원이었던 것이다. 좌검자가 입당을 시킨 관계로 분수에 맞지 않게 황(黃) 자배 의 사십칠(四十七)이라는 숫자를 암호로 받은 행운아. 언제 봐 도 촌무지랭이라서 그 번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였다. 실제 하고 있는 일도 황 자배면서 고작 총당 내에서 심부름이 나 하는 연락원(連絡員)이었다. 그러나 진운은 그를 보면 켕기는 것이 있었다. 좌검자가 입당 을 추천했으니 거절도 못하고 받아들였지만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기분 나쁜 일에 기분 나쁜 방식으로만 등장하다니! 진운은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고, 그보다는 그가 문제를 맞춘 것에 더욱 놀랐다. "언제 왔나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 맞췄나?" 마원은 피식 기분 나쁜 미소를 홀렸다. "통천방에서 전갈이 왔습죠. 그 속에 든 물건이……!" 진운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어쩌면 마원의 웃음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을 수도 있었지 만 이번은 그보다는 근원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그의 심기를 강하게 건드렸다. "통천방? 전갈? 웃기는 얘기군! 근데 물건이 뭐라는 거야?" "돌칼!" 장내의 여러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진운 의 안색은 붉어졌다가 천천히 창백해지더니 나중에는 파랗게 질 려 갔다. 마원은 그 낯빛의 변화를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는 자의 밉살스러운 눈이었다. 그는 그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마원이 말했다. "가괴자가 상자에 그 돌칼을 넣어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삼 천 년을 내려온 보도를 보내니 답례로는 머리 하나를 원하노 라.'라면서……!" "머리……?" 진운이 식은땀을 홀리며 되물었다. 마원이 그를 가리켰다. "당신 어깨 위에 달린 것!" 진운은 그 순간 얼굴이 하얗게 되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 았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웃고 있는 마원의 얼굴이 지금 그에게는 저승사자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는 갑자기 한 생각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도망가야 해!' 급할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 있어서의 상식이었다. 진운은 우선 자리에 앉은 채 웃었다. "재미있는 요구군! 어디 전리품을 확인하러 가 볼까?" 그는 한가로운 태도로 일어나서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가운데에는 마원이 서 있었다. 진운은 그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애물단지는 봬 여기 들어와서……!' 장난삼아 한 짓 때문에 이렇게 오래 귀찮음을 당하는 것도 그 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오늘 이것까지 죽여 버려……? 어차피 도망가는 터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마원의 어깨를 밀었다. "앞장서게! 같이 가 보세!" 문밖으로 한걸음을 나서던 진운이 갑자기 굳었다. 복도에는 그 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서 있는 것이다. 방각이었다. 그가 물었다. "어디 가나?" 진운이 짧게 대답했다_ "취의청!" "잘됐군! 나도 마침 거기 가던 길일세." 방각은 진운의 앞을 비켜 주었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진운은 웃었다. "그래, 잘됐군! 부르러 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일세!" 아마 그가 극도로 수양을 쌓아 자신의 내면을 감추는 데에 따 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통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의 인상은 흉 하게 일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방각이 취의청으로 가는데 이 앞을 지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 인가? 그를 의심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한 것에는 마원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 촌무지랭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진운은 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이 취의 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통천과 혹웅이 그 뒤를 따랐다. * * * 양가장(楊家莊). 그는 청어(靑魚)를 반쯤 익힌 자( ) 한 마리를 먹고, 반주 (飯酒)로는 독한 애주(愛酒)를 두 잔 마셨다. 늦은 점심식사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항상 중반(中飯), 즉 점심식사를 이렇게 물고기 한 마리 에 술 두 잔으로 마쳤다. 양이 많거나 값이 비싼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가 다 그가 좋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거의 항상 자신이 너무 사치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곤 했다. 좋아하는 것만을 하면 나중에 혹시 싫어도 하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오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쩌지 못하고 매점심마다 그렇게 차려 오는 것을 못 본 척 하는 것은 물고기는 오랫동안 못 먹어 보던 것이고, 술은 반대로 오랫동안 마셔 오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매일 느껴야 하는 그 가책에서 단지 하루뿐 일지라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좀더 중요한 어떤 것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후에 항상 마시는 녹차(綠茶)를 담은 찻잔을 두 손으 로 잡고 그 온기를 즐기면서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통천방이 드디어 나섰다고" 그의 앞에 앉은 사내, 양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 방금 가괴자로부터 천리파발(千里擺撥)을 통해 보 내어진 물건이 흑수당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돌칼이 든 그 상자 하나만……." "그들이 흑수당에 직접?" 양유덕은 자신의 보고가 부실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의 형 님, 양가장의 당대 주인인 양유락(楊有樂)은 대단히 세심해서 단 한 가지의 의흑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통천방의 정보도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에 비밀리에 세워진 흑수당 총당으로 물건을 바 로 보내었습너다. 전달은 통천방 강소분방(江蘇分幇)의 사자가 했습니다." "흐음……!" 양유락은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찻잔의 옆을 가 볍게 두드렸다. 양유덕은 그것이 뭔가 기분좋은 일을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뭘 생각하시는 걸까?' 양유락이 물었다. "너는 흑수당과 통천방이 결국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양유덕은 잠시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양가장 정도의 기업 을 지키려면 대충대충 넘기는 식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그는 지 금 자신이 가진 정보를 총동원해서 흑수당과 통천방의 관계정립 을 예즉해 보았다. "현재의, 상태로는 흑수당이 진운의 머리를 넘기고, 대충 예의 만 갖추면 당분간은 별일이 없으리라고 봅니다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괴자의 괴팍한 성미란 강호에 유명하고, 흑수당주의 속은 저 로서는 더욱 짐작 불가능해서 어떻다는 추측을 할 수가 없군요!" "내 예상으로는……." 양유락은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더니 어떻다는 평가 없이 바로 자신의 예상을 이야기했다. "한 달 안에 두 파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한 달입니까?" 양유덕은 놀란 빛이었다. "그래, 한 달! 혹수당이 진운의 목을 넘겨 주더라도 통천방이 먼저 도발할 것이야." "형님의 예상이 신기막측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날짜까지 그어 놓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네가 모르는 것은 그것말고도 많지!" 양유덕은 점점 식어 가는 녹차가 양유락의 손 안에서 찻잔과 함께 돌아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양유락의 머릿속 생각도 함께 돌아가 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양유락은 한참 만에야 양유덕을 다시 불렀다. "흑수당주를 오는 팔월 보름에 초대해라!" "팔월 보름입니까?" 팔월 보름이면 앞으로 한 달 남았다. 예상대로라면 그 안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는데 초대에 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신 것인가?' 통천방은 목하 중원 혹도 최강의 세력인 것이다. 그 비정상적 으로 강한 가괴자를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렇다. 팔월 보름!" 양유락은 다시 한번 확언했다. 그의 눈빛이 맑게 빛나고 있 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양유덕이 돌아보며 물었다. "불비(不比)인가? 어서 들어오게!" 누가 왔는지는 뻔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 특히 이 방의 문 을 두드리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한 것이다. 당금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으로 이름난 권요 신도불비가 바로 그였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키가 훤칠한 중년의 유생이 나타났다. 그의 코밑에 자란 두 가닥 교룡수염이 특이한 인상을 만들고 있 는 사내였다. "재미있는 침입자가 잡혔습니다. 양유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침입자?" "술단지처럼 생긴 청색 옷의 사내인데……!" 신도불비가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코 아래의 교룡수염이 꿈 틀거렸다. "환관이었습니다." * * * 피진장(避塵莊). "초대한다고 올 것 같으냐?" 노인, 피진장주 철권 마종의는 눈가에 주름을 가득 잡으며 손 녀딸을 바라보았다. 귀엽고 예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둣한 눈 빛이었다. 그의 귀여운 손녀, 마상란은 문제없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오지요. 흑도인이라고 초대하는 것을 저어하지만 않으 시면 꼭 온다고 소녀가 확언드리겠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검은 눈을 반짝였다. "소녀가 반드시 오도록 만들 테니까요!" 마종의는 그녀의 볼을 가볍게 건드렸다. "이미 오래 전에 강호에서 은퇴한 몸이 흑도인이면 어떻고 백 도인이면 어떠랴? 오래 전에 그런 구분은 잊었으니 초대하려무 나. 오면 반가이 맞아 주마." 두 조손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만 있는 중년 사내와 여 인, 바로 마상란의 부모들은 기묘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이라곤 들은 척도 않는 딸과 당신에게는 손녀가 되는 그 딸 의 이야기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늙은 할아버지, 마종의의 이야 기에는 그들 부부도 참견을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결정도 그래서 그들은 국외자일 수밖에 없었다. 흑수당의 당주라는 은발의 사내는 결국 그들 피진장의 중추절 만찬(晩餐)에 초대되고 말 것이었다. * * * 흑수당 총당. "양주면 당금 천하에서 몇 안 가는 대도(大都)인데 왜 장락방 따위의 하오문이 지부로 있었는 줄 아시오?" "왜 그러오?" "총단이 가까우니까 그리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지요." 진운은 어쩐지 심드렁한 대취옹의 반문에 대답하면서도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다. 중원 제일마 금도홍안호 가괴자가 머리를 내놓으라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자리에 같이 있으니 불편하지 앉 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기분을 떨치기 위해 아는 대로 주절거릴 수밖에 없 었다. "통천방은 백장령(白丈嶺) 아치산(牙稚山)에 있습니다. 여기 양주와는 빠른 말로 엿새 거리라고나 할까요? 통천방의 천 리 파발은 매나 독수리를 전서응(傳書鷹)으로 길들여 이용하는 것 이니 아마 이삼 일 전에 보낸 것일 겁니다." 돌칼을 말하는 것이었다. 방각이 물었다. "백장령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드넓은 중원에서 백장령이라고만 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 이다. 이통천이 기회다 싶은지 나섰다. 그로서는 지금 같은 때가 아 니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복건성(福建省)과 강서성(江西省)의 접경부에 위치해서 두 성을 나누는 무이산맥(武夷山脈)의 한 고개가 백장령입니다. 정 확하게는 복건성 건정현(建亭縣)과 강서성 광창현(廣昌縣)의 사 이에 있지요. 주변에는 흑심보(黑心堡) , 호구채(湖口寨), 안반 채(安返寨), 황공문(黃公門), 고성(古城), 석성(石城) 등의 군 소문파가 있습니다." 방각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제법 상세한 질문이었다. "고성과 석성도 무림 문파인가? 그리고 통천방 같은 거대 문 파 주위에 왜 그렇게 군소 문파가 많은가? 하나의 거대 문파가 나타나면 군소 문파들은 물이 상은 곳으로 흘러가둣 거대 문파 에 합쳐지는 것이 정상 아닌가?" "가괴자라는 작자가……!" 이통천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 다시 조용해지고, 진 운이 대답했다. 욕부터 나오는 대답이었다. "성격이 더럽기 짝이 없어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자랑스럽게 하고는 합니다." 역시 욕이었다. "고성이니 석성이니, 흑은 혹심보니 하는 데가 옛날부터 있어 왔던 군소 문파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지금은 통천방의 감시초소 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름만 그대로 붙여 두고서는 통천방은 각 문파의 독자성을 존중합네 어쩝네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방각이 말을 잘랐다. "나는 통천방의 사자가 바로 여기로 찾아온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네. 그것은 그들이 우리 흑수당의 사정에 정통하다는 의 미이고……!" "흑수당에 간자(間者)가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요." 정일이 던진 말이 방안에 싸늘한 공기를 몰고 왔다. 간자! 그들 흑수당의 형제 중에, 그것도 총당의 위치를 알 만한 핵 심인물 중에 통천방의 간자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간자 따위는 어디에든 있는 것이니 흔히 두 파가 싸울 때에 는 그 정도는 감안하고 계획을 짜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대응하냐는 것일세. 지금은 당주도 없고……!" 방각이 다시 말했다. 이통천이 눈을 반짝이며 끼여들었다.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있는데……!" 그는 진운을 보더니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방각이 이통천이 채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긴 하지." 진운의 눈이 커지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가득 담아 방각을 노려보았다. 해달라는 대로 한다면 그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보내자는 것 인데, 없는 자리라면 몰라도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농담이군." 방각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했을 뿐 이야. 가괴자는 괴팍하고, 무엇보다도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내일이라도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 진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와의 과거 교분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이 냐? 인정머리없는 놈……!'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방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 아보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말을 기다렸다. 대취옹.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다. 정일. 그냥 시선을 돌린다. 이통천. 저놈은 아예 처음부터 그런 의견을 생각한 놈이니 볼 것도 없었다. 흑웅 아무 생각도 없는 녀석이다. 눈만 뒤룩거리다가 진운이 바라보니 웃는 것이다. 그가 방금 이 방에서 논의된 말들을 알 아듣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진운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정말 도움되는 놈은 하나도 없군! "그러나……!" 방각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않으면?" 진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말이 나오는군!' 방각은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었다. "가괴자가 만족하지 않으면 그때는 누구의 목을 바칠 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방안은 조용한데 다만 방각의 말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당주라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 연히 거절이다. 그 거절의 대가가 통천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조 직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라도 그럴까? 그것도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 우리는 흑수당이고, 단 하나의 형제도 희생하기 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명을 지옥에 버려 두고 왔 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운다. 그것이 당주의 결론일 것이다." 진운이 감격에 겨워 그를 바라보았다. 대취옹 이통천의 눈에도 비슷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통천 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단 하나다. 싸울 준비를 하는 것 다. 형제들을 보호하고, 당주가 돌아올 때까지 맞서 싸울 준비 를……!" 방각은 말을 맺었다. 그것이 그날의 결론이었다. < 제2권 끝 > 제 2 부 제 3 권 창 백 한 하 루 편 제41장 7월 13일 새벽 제42장 같은 날 오전 제43장 같은 날 오후 제44장 7월 17일 밤과 18일 새벽 제45장 7월 22일 제46장 그날 이후 1 제47장 그날 이후 2 제48장 그날 이후 3 후기 제41장 7월 13일 새벽 장강수로십팔타, 총타. 호숫가의 새벽은 자욱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시작되었다. 백리극은 새벽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 다. 어느새 창문이 반쫌 열려져 있고, 그 창문 틈 사이로 안개 가 넘실거리며 방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 안개에 휘감기둣 서 있는 검은 유삼(儒衫)의 사내! 야광충 이었다. 백리극은 침상에 누운 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야광충은 중원에 들어오면서 예전부터 입던 가죽옷 대신 검은 유삼을 입었다. 그 모습이 야광충에게 묘하게 어울린다고 백리 극은 생각했다. 검은 유삼이라는 것이 원체 그리 평범한 것이 아니기도 했지 만, 야광충의 은발과 창백한 얼굴과 조화되면 사이(邪異)하고 유현(幽縣)한 분위기가 더욱 강조되어 보이는 것이다. 야광충은 그가 눈을 떴다는 것을 알 텐데도 그렇게 침상 옆에 서서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백리극도 굳이 말을 걸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홀렀다. 문득 백리극은 이 야광충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아는지 생각해 보았다. 사천의 그 밀림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여기 양주에 서의 두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이름과, 성장 배경--그나마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반쪽의 성장 배경--과, 무공 내력과……. 그런 둥등의 것을 아는 것이 한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 일까? 백리극은 묘한 은명으로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자신이 당 주로 모시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는 그렇게 잘 쏸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적의 소굴로 뛰어들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싸웠던 것일까? 군문(軍門)에 몸을 담고 있을 때의 버릇 때문은 아닐까? 상관이 누구든 그것이 상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만 하면 지 상의 명령으로 알고 봉행하던 시절의 타성이 여기 흑도의 마두 로 전락한 지금도 몸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보다 도대체 왜 그를 따라 흑수당에 동참한 것이었을까? 따로 할 일도 많지 않은가! 부모님은 돌아가셨다니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지만 아내 운 지(雲芝)와 딸 설아(雪兒)……! 설아……, 설아……! 백리극은 가슴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갓열 여섯이 되었을 딸 설아의 모습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을 둣한 영상으로 그의 눈에 비쳤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홀러도 설아는 항상 다섯 살 때의 모습으로 나 타났다.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홍안 소년의 몸으로 칼을 들고 전장(戰場)에 나아가, 이 후 변경에서 이족(異族)들과 싸우며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 가문의 대를 이으라는 부모의 명에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집에 돌아가 시키는 대로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을 빼 면 온전히 나라에 몸을 바친 시간이었다. 부모와 처자식마저 도 외시한 채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대가가 이것, 가문은 적몰(籍沒)당하고 처자식은 유리분산(遊離分散)되며 그 자신은 외로이 버려져 어둡고 더러 운 시궁창에서 헤매이고 있다.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연왕(燕王)이 보낸 자객에게 그때 죽었으면 지금 같은 고민은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주군을 잘못 만나 죽은 충신이 몇이고, 버려진 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자신 충신이라 자처한다는 것도 외람되지만, 버려졌다 해 서 이를 가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가치관에 있어서 그것 은 주하디주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번 선택한 길에 충성하고 매진하면 그뿐, 알아주지 않았다 해서 원망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현실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달랐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 해도 가슴 한구석에 남는 이 묵직한 원망……. 처자식을 생각만 해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고 통은……! 이성과 감정,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괴리(乖離)로 그는 고통받고 있었다. "백리극!"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백리극은 번쩍 눈을 떴다. 광충이 그 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의원의 말을 들어 보니 꽤 다쳤다는데 괜찮나?" 백리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자칫했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깊은 상처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둣한 말이었다.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야광충은 평소답지 않게 잠시 망설이더니 불쑥 물었다. "왜 우리에게 합류했나?" 백리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지금 고민하고 있던 것이 그것 아닌가! 야광충은 미리 생각해 둔 말이 있었는지 첫말을 꺼낸 뒤에 빠 르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나는 자네가 우리 흑수당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비롯해서 그 동안의 도움에는 감사하지만 이만 우리 와 혜어지는 것이 어떤가? 흑수당을 나가라는 얘기다." 백리극이 아연히 놀라 입을 벌렸다. 야광충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나는 자네가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합류했는지 안다. 그리 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백리극이 조용히 물었다. 나도 모르는 일을 당주가 어떻게 아십니까? "옆에서 보는 사람은 뻔히 아는 일을 막상 본인은 모르는 경 우도 있지. 지금이 그렇다." "제가 뭘 원하고 있습니까?" "가족을 찾는 것, 그리고 복수!" 백리극은 그 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건 아니라고 말하 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야광충의 말이 핵심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것을 백리극이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야광충이 계속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왜? 두렵기 때문이지. 아니면 부끄러 워서. 무엇이 두려운가? 백리극은 처자를 위해 명예도 버렸다는 세인(世人)의 비난이 두려운 것이다. 무엇이 부러운가? 사내 가 처자에 연연해 찾아 헤매고,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칼을 갈고 있다는 평판이 부끄러운 것이다." "이익!" 백리극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다시 누워 버렸 다. 야광충이 밀어 버린 것이다. "계속 들어라!" 백리극은 분노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나? 그게 등골을 파고든 갈고리보다도 더 아픈가? 생명보다도 명예가 귀중하다는 것인가?" 야광충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반대로 백리극의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야광충이 그의 어깨를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흑도인에게 그런 명예는 필요없다, 백리극.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백리극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뜻이 다르면 길도 다르고, 사람에 따라 하고 싶은 일도, 바라 고 원하는 가치도 다르다. 백리극에게 있어서 지고지상의 가치는 충과 효였다. 그리고 나라를 위한 헌신, 자기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삶이었다. 그것들을 추구하며 그는 행복했었다. 물론 그러한 캥동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부와 명예에 전혀 초 연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도 인간이고, 그런 것을 싫어하지 는 않는다. 하나 중요한 것은 그 부와 명예가 어떠한 경로로 얻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들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그의 손에서 사라겨 버렸다. 가장 아끼던 가치, 그것만이 옳다고 믿었던 그 가치가 무너지면서 다른 것들도 덩달아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하고 싶은……? 그런 일이 있나?" 백리극은 눈을 뜨고 야광충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흑수당에 남아 있는 것만을 원합니다." 야광충은 백리극을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그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가움을 되찾고 있었다. "백리극, 자네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다." 그는 물었다. "송번위가 왜 우리를 막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백리극의 눈빛이 빛났다. 그렇다. 애초에는 그것 때문에 중원에 들어왔었다. 그것이 중원에 들 어올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양주로 떠난다. 자네와 도신 도귀는 여기 남아 있다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러 떠나라! 시 간은 무제한이다." 야광충은 방안에서 사라졌다. 창문이 소리없이 닫혀 버렸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햇살을 담은 청색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두웠다. 그래서 야광충은 새벽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에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 자신이 그렇고, 백 리극이 또 그러하둣이……! 장강수로십팔타의 총타는 그래도 총타라고 제법 정원이며 건 물을 꾸며 놓았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속되다고 할지도 모 를 사치스런 흔적이 군데군데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빈관(迎賓館)이 그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주변 환경과의 조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크게만 지어 놓은 십삼층의 건물! 그래도 번강룡은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첫날 야광충이 여 기 묵기로 했을 때에도 은근히 찬사를 기다리고 있던 것켜다. 그 멋없이 크기만한 건물을 향해 다가가는 야광충의 귓가로 둥평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습니까? 자객을 보낸 사람이 연왕이 아 니라 구복이고, 그가 백리 장군의 처와 딸을 동시에 첩으로 삼 아 유린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예나 다름없이 오양은 비치지 않고 소리만으로 나타나는 그, 등 평이 하는 모양을 보면 마치 백리극이 당주이기나 한 것 갈았다. 야광충은 짧게 대답했다. "단칼에 해결이 되는 거지!" 등평은 조용히 있었다. 야광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 았다. 야광충은 다시 말했다. "원흉이 하나이니 단칼에 베어 버리면 된다. 그 마음을 얽어 맨 굴레와 함께……! 그 다음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백리극이 모른 척한다고 해서 그들까지 모른 척한 것은 아니 었다. 야광충과 등평은 이미 백리극도 모르게 유소백을 만나 내 막을 알아내었던 것이다. 당년에 백리극의 빠른 출세를 시기한 구복은 백리극을 주살하 자고 가장 강력하게 건의했었다. 그러나 연왕은 그 건의를 듣고도 주저했었다. 백리극의 인물 됨됨이를 아꼈던 탓이었다. 구복은 포기하지 않고 자객들을 보내고, 몇몇 무장들을 매수 해서 대업을 가로막는 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고 연명(連名)으 로 죄를 고했다. 아직은 그들의 힘이 필요했던 연왕은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 서 문책을 할 수는 없었다. 연왕은 내심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 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구복의 뜻대로였다. 백리극의 가문은 적몰당하고, 일가는 죽고, 홑어졌다. 남자들 은 죽이고 여인들은 공신의 것으로 하거나 관기(官妓)로 넘기는 것이 명의 법도(法道). 그 중 미모가 뛔어났던 백리극의 처, 하운지(何雲芝)를 구복 은 첩으로 삼았다. 당시 아홉 살밖에 안되던 백리극의 딸 백리 설(百里雪)과 함께였다. 그런 그가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첩의 딸이니 자신에게도 딸 이 된 설아가 나이가 들어 미모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첩으로 삼 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모녀 이대를 유린한 셈이었다. 야광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을 수놓던 숱한 별들은 이미 지고, 계명성(啓明星)만 외로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 곧 아침. 오늘은 번강룡과 아침 약속이 있다. 그러고 나면 떠나야 하 고, 그 다음엔 그 다음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오늘 백리극을 만난 젓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그들 흑수당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도 많고, 그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남아 있다는 것도 잘 알지만 백리극은 그 중에서 도 유별난 인물이었다. 어떤 이유로도 그의 아래에 있어서는 안되는 인물, 그것이 백 리극이었다 '구복을 만나게 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다.' 그때는 백리극이 정말 자신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야광 충은 기대하고 있었다. * * * 동점산(東店山). 아득히 먼 청해의 습지(濕地), 푸른 초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대에 작은 샘이 있다. 그곳 원주민인 위구르족의 전설에 그 샘은 신(神)이 탄생한 곳이다. 그러나 일 년에 한번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마을의 족장 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 위치를 모른다. 전설은 일견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확한 것인 22 [솬 지도 모른다. 이끼로 덮여, 봐도 잘 알 수 없는 그 샘으로부터 십팔만 리 중원을 가로질러 황해로 들어가는 장강의 여정이 시 작되는 것이다. 중원의 승줄, 장강! 칭해의 작은 시내가 중원을 가로지르고 바다에 닿으려 하는 즈음, 시내는 이미 대하(大河)가 되어 숱한 물줄기를 그 안에 포용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응천부(應天府) 외곽, 율수현(栗水縣) 경내로부 터 흘러나와 장강에 합류하는 연지하(煙脂河)였다. 근처에 사는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연지하는 인근에 있 는 동점산(東店山) 외진 계곡에 있는 한 동굴 깊숙한 샘에서부 터 흘러나온다고 하는데 별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동점 산은 그리 작지는 않지만 또 그리 크지도 않은, 별달리 유명할 것도 없는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촌로들은 그 산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 었다. 과거 원나라 말기에 극성기를 이루었던 마교의 한 부류인 천사교(天邪敎)가 이 동점산을 근거지로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그것조차도 이제는 관심 갖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 렸지만……. 언제나처럼 새벽은 밝아 왔다. 그러나 소년, 소구자(少狗子;개새끼)에게 오늘의 새벽은 다른 날의 새벽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 었다. 예전 같으면 새벽 찬이슬에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뒤 오줌을 누고 다시 누우면, 햇살이 이마에 직각으로 닿을 때까지 는 하늘이 무너져도 일어나지 않았을 소구자이었다. 그러나 지금 소구자는 어두운 석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생쥐 같이 작은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세로 앉아 있은 지 벌써 여덟 시진은 넘었을 것이다. 그는 이 미 어제 저녁부터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나, 둘……, 열하나, 열둘, 열셋……!'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도 어느새 그는 속으로 수를 세고 있었 다. 몇 번이나 세고, 다시 잊어버리고, 또다시 세는 것일까?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수를 센다는 것, 그 일이 닥칠 때를 안 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스물셋, 스물넷……!' 수를 세는 것은 시간을 헤아리는 일과도 같다는 것은 소구자 가 여기 와서 처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이전에는 수라는 것은 훔친 돈을 헤아릴 때에나 세었던 것이다. '서른다섯, 서른여섯……!' 시간이란 이전에는 숨쉴 공기, 마실 물과 더불어 그의 삼대 재산 중 하나에 속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별쓸모가 있어 보이지는 않던 것. 그런 그가 지금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 장가를 가기 위해 아껴 모은 동전을 헤아리둣 남은 시간을 헤아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 았던가! 세어도 세어도 모자라 보이는 그 때묻은 동전처럼 모자라는 시간이여……! 소구자는 잠시 후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일백일흔일곱, 일백일흔여덟……!' 백 단위를 넘어가면 세는 속도는 아무래도 늦어질 것이다. 그 것은 마치 단 단위보다는 십 단위의 숫자를 씰 때 속도가 늦어 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 단위의 숫자를 셀 때는 백 단위보다도 늦어지는 것일까? 한 숫자를 헤아리면서 더 많은 시간을 지나치는 것은 아닐까? 소구자는 그것을 굉장히 궁금하게 여겼지만 한번도 실험해 본 적은 없었다. 천 단위가 오기 전에 그는 세고 있던 숫자의 끈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여기 잡혀 오기 전에는 일백 단위 이상의 수를 셀 기회도 없었던 그였으니……! 딸깍, 딸깍!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구자는 심장이 멈춘 것 같은 표정 을 짓더니 수를 세는 것을 멈춰 버렸다. 저 소리였다. 어제도 저 소리가 나더니 한 소년이 끌려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도, 그끄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소구자 혼자만 남아 있는 이 석실을 향해 다시 소리는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셀 수 없는 먼 옛날부터 그렇게 새벽은 오고, 저 소리가 들리고, 소년들은 끌려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딸깍, 딸깍! 소구자는 저 소리를 내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위는 배 모양의 신발이고, 아래에 둥근 술잔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생긴 목혜(木鞋;나막신) . 옛 선진(先秦) 시대에는 외출용 신발로 귀족들이 신던 것이지만 지금은 의식(儀式)이나 제례(祭禮)용으로만 사용되는 신발이었다. 그들은 소구자를 어떤 의식에 참여시킬 작정인가? 목혜의 소리는 멈추었다.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좀더 문 에서 가까운 곳, 사실은 문에서 나는 소리. 철컥! 소구자의 방문에 가로질러진 빗장이 풀리는 소리였다. 소구자 의 작은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소구자의 눈은 급속히 초점을 잃었다. 그는 넋을 잃은 둣 입을 벌리고, 눈동자는 보는 곳 없이 공허하 게 열어 놓은 채 석실 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두 려움에 떨던, 그러나 또렷한 정신을 보이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 었다. 끼이익--! 두터운 나무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 다. 한 자 높이는 될 듯한 목혜를 신은 사람. 그는 붉은 포대 같은 옷에 붉은 두건을 써서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는 자였다. 그가 문에서 비켜서며 말했다. "따라오라!" 소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횃불이 군데군데 밝혀진 어두운 통로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 을 조금 손봐서 만들어진 것인지 이곳저곳 물방울비 떨어지고, 대부분의 벽은 그냥 바위벽이었다. 그 통로를 따라 목혜의 사람 과 소구자는 걸어갔다. 본 적은 없지만 강시처럼, 혹은 허깨비처럼 보이려고 애쓰며 소구자는 걸었다. 닷새 전,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비단옷의 늙은이를 따라 간 것이 실수였다. 언뜻 보기에도 부유한 태가 흐르던 그 늙은이에게서는 돈 냄 새가 물씬 픗겼었다. 어느 골목에서 낚아채나만을 열심히 생각 하던 그는 여기다 싶은 으슥한 골목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 오 히려 그 자신이 낚아채져 버렸다. 입을 가리던 두터운 손,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처음 이 석실 안에는 그말고도 네 명의 소년이 더 있었다. 그땐 다들 멀쩡했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나온 음식을 먹는 순간부터 변해 버렸다. 다들 말을 걸어도 응답도 않고 멍하니 헤픈 웃음만 흘리게 되어 버린 것이다. 소구자는 물론 멀쩡했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음식을 아무 의 심 없이 받아먹을 만큼 어수룩한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었다. 그는 또하 문밖에 소리가 들리면, 그래서 누군가가 들어오면 다른 아이들처럼 넋잃은 모습을 가장하고 있을 만큼은 영리했 다. 결정적인 기회가 올 그때까지는 주목을 끌지 않는 것이 중 요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챙인지 음식은 더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 한 동이씩의 물이 들어와서 목이나 축이게 해주는 것 이 고작이었는데 소구자는 그 물도 마시지 않았다. 혹시나 그 속에도 미혼약(迷魂藥)이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 대신 그는 석실의 벽에 흐르는 습기를 빨고, 동굴 벽에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들을 먹어 기운을 차렸다 배가 고팠지만 어렇게 죽는지도 모르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는 염라대왕 앞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도 대답을 못 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소구자는 통로의 끝에 거대한 석문이 있고, 그 석문이 열리자 귀가 아, 플 정도의 소음이 홀러나오는 그리 크지 는 않은 지하광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 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충 보기에는 일이백 정 도. 소음은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워낙 여럿이 말하는 것이고, 게다가 좁은 광장의 벽과 천장에 부딪쳐 튀어나오는 반향들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 만 대충 '만다라', '만트라', '무드라' 의 세 단어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소구자는 그것이 밀교(密敎)의 진언(眞言)인지는 몰랐지만 어 떤 류의 주문이라는 것은 분위기로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돌로 쌓아 올린 석단(石壇)이 있고, 그 석단 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엎드렸다 일어났다 하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도 하나같이 붉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목혜의 사람이 들어서자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것이 그를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구자를 보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목혜의 사람은 소구자를 데리고 석단을 향해 걸어갔다. 석단의 아래에서 위로는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자 목혜 의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두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포대에 복면을 쓴 것은 똑같지만 나머지 두 사 람보다도 높은 사람임은 알 수가 있었다. 목에는 윤기가 흐르는 검은 염주를 걸고, 머리에는 진주로 장식된 금관(金冠)을 썼기 때문이었다. 소구자는 그들보다도 석단의 모습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석단의 윗부분은 네모난 공터처럼 생겼는데 그 한쪽에는 태사 의(太師椅) 세 개가 놓여 있고, 중심에는 솥을 반쫌 파묻어 놓 은 것처럼 둥글게 패어져 있었다. 일부러 그런 칠을 해놓았는지 온통 검붉은 그 자국. 소구자는 그 둥근 웅덩이의 가장자리에 얼룩진 붉은 자국에 시선을 박고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칠을 했다면 저렇게 가장자리에 뭔가가 남도록 칠을 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소구자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주는 공포에 사로잡혀 버렸 다. 다행히 소구자는 곧 얼굴을 아래로 하고 엎드리게 되어 그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들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이 순간 소 구자에게 없었다. 그는 복면인들의 손에 팔목과 다리를 잡혀서 둥근 웅덩이 위에 가로 눕혀져 있는 것이다. 금관을 쓴 복면인이 소구자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색으로 번들거리는 예리한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귀가 멍멍거릴 정도로 높은 주문 소리 속에서 그의 발걸음 소 리가 이상하게 귀에 들어왔다. 스윽……, 딸깍! 스윽……, 딸깍! 목혜를 신어서일까? 금관의 복면인은 미세하게 발바닥을 끌고 있었다. 소구자는 바닥을,끄는 그 걸음걸이와 목혜의 긴 굽을, 그리고 붉은 칼날의 극도로 좁은 끝을 공포에 떨시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이들은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마도 환각에 젖어 있었어야 할 그가 공포를 알 정도로 정신 이 있다는 것에 당황했지만 의식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넘기 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그의 힘에는 제약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금관의 복면인은 웅덩이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소구자의 몸 이 옆으로 비스듬히 들렸다. 손목을 잡은 복면인이 한 손에 모 아 쥐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소구자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소구자의 목덜미가 드러나고 예리한 칼날이 거기 대어졌다. 소구자는 가엾은 사슴처럼 모로 들려 목덜미 동맥이 따인 채 피를 홀려야 할 운명이 된 것이다. 소구자는 오늘 그의 목에 닿았던 이 칼날의 차가운 느낌을 영 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차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에 댄 듯이 뜨거운 이 느낌. 살갗 에 닿은 것만으로도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고, 발끝에서 머 리 끝까지 마비시켜 버리는 가공할 위력의 칼끝을……! 그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금관의 복면인이 고개를 돌려 석단 아래 엎드린 자 들을 향해 외쳤다. "천사재림(天邪再臨)" 거대한 소음이 그 말을 받았다. "천사재림!" 복면인이 다시 외쳤다. "천인혈(千人血)이 이루어지는 날 천사(天邪)는 재림하리니 " "천인혈(千人血)이 이루어지는 날 천사(天邪)는 재림……" "그때부터 천년이 천사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이다!" "그때부터 천년이 천사의 지배 아래……" 미친 듯 열광한 듯 복면인의 말을 따라 하던 군중들의 소리가 이때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침입자!" "적이다!" 그 외침 사이로 비명이 섞여 나왔다. 금관의 복면인은 반쯤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입구를 바라보 았다. 입구에서부터 군중들이 갈라졌다. 이리의 습격을 받은 양 떼 처럼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로 나타나는 적의인(赤衣人)들! 붉은 복면에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석단 위의 복면인들과 같은데, 포대 같은 옷이 아니라 싸우기 된하도록 졸라맨 경장 (輕裝)이었다. 가슴에는 묘하게도 '사(四)'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석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오자마자 일대 살육을 자행하 고 있었다. 금관의 복면인이 보는 순간에도 군중 중 몇 명이 피 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는 것이다. 금관의 복면인은 그런 팡경을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군중의 대부분은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 그들 천사교의 몇 남 지 않은 신도들이었다. 그들이 적의인들의 칼 아래 쓰러지지 않 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가 의문스럽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들 적의인이 누구고, 어 떻게 이 장소를 알았느냐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우선은 그들을 격퇴시켜야 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란 뻔했고, 그것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천사교에는 양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금관의 복면 인은 손을 들고 외쳤다. "천사무적(天邪無敵)!" 그 한마디에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주히 도망가던 천사교도들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적의인들 을 향해 돌아섰다. 금관의 복면인이 다시 외쳤다. "천사무적!" "천사무적! 천사무적!" 천사교도들은.그 주문 같기도 하고 구호 같기도 한 것을 따라 외치면서 적의인들을 향해 역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의인들이 잠시 주춤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해 보는 것 같았다. 무공을 모르는 것이 분명한 자들이 건도 없이 매몸으로 다가들다니……! 적의인은 이십 명이었다. 그들이 엉거주춤 천사교도들을 바라 만 보고 있는데, 뒤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뭘 보고만 있어? 다 죽여 버려! 도망가지 않으니 잘됐잖아?" 목소리의 끝이 뾰족한 것으로 보아 여인의 음성인데 내용상으 로는 그렇게 생각되지 딴을 만큼 인정사정없었다. 그 말의 효과는 적의인들의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러기의 깃털처럼 앞이 넓어졌다가 뾰족하 게 끝을 맺은 안령도(雁翎刀)를 들고 있었는데, 그리 길지도 않 고 넓지도 않아 손에 꼭 맞게 잡힌 것이 극히 실용적이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그 안령도를 비껴 들고 적의인들이 앞으로 내달 았다. 순식간에 그들의 앞에 피보라가 퍼졌다. "으헉!" "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면서 천사교도들은 쓰러져 갔다. 무공 을 모르는 양민들을 상대로 휘둘러대는 것이라 그들의 칼날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금관의 복면인은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천사무적!" 천사교도들도 그 외침에 부응하여 전척 두려운 기색 없이 적 의인들에게 다가들었다. 그들의 눈에 붉은 광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적의인들에게 다가든 것은 그들 팡신자들만이 아니었 다. 붉게 물든 눈들 사이로 차가운 눈빛이 스치고, 그 눈라은 새하얀 검광이 되어 적의인들 사이를 헤집었다. "큭!" 피가 튀고, 복면을 쓴 머리통 하나가 공중에 솟았다가 떨어져 굴렀다. 천사교도들의 그것과는 다른 복면, 침입해 온 적의인 중 하나의 머리였다. "이 중에 무림인이 있다. 조심해!" 뾰족한 음성이 다시 경고했다. 석문의 입구에는 적의복면 여인 하나7! 서 있었고, 음성은 그 녀의 입에서 나온 젓이었다. 왜소한 몸매로 보나, 조금 솟아나와 있는 가슴 어림을 보나 분명히 여인인데 철퇴(鐵槌)를 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웬 만한 사람 머리통만큼이나 큰 쇠뭉치에 두 치 길이의 쇠못이 빽 빽히 박혀 있는 철퇴였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져 있는 거꾸로 뒤집힌 사(四) 자! 연전에 지옥성에서 쌍고르마를 수행했던 바로 그 복면 여인, 돨한지옥의 제사옥주였다. 그녀는 경고성을 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철퇴를 휘 두르며 군중 속에 뛰어들었다. 언뜻 보기에도 삼사십 근은 넘어 갈 듯한 무기를 들고서도 그녀의 신형은 제비처럼 날랬다. 파팍! 팍! 그녀의 발이 번갈아 내질러졌다.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던 천사교도 세 명이 허수아비처럼 꼬꾸 라져 입으로 피를 게워 냈다. 요혈(要穴)만 골라 정확하게 걷어 차인 것이다. 그녀의 발길질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정콱하고 위력적으로, 그래서 더욱 잔인하게 뻗어 나가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한 명씩 죽어 꼬꾸라졌다. 팍! 정면의 복면인의 목에 뾰족한 신발 끝이 틀어박혔다. 복면인의 입 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안에서부터 피가 뿜어진 것이리라. 그녀는 그의 목에 틀어박힌 발을 뽑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 리며 옆으로 다가오는 복면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 다음은 뒤였다. 공중에서 옆으로 반 바퀴 회전한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복면 이을 향해 몸을 뒤집으며 철퇴를 휘두른 것이다. 묘기라도 부리 는 듯한 동작이었다. 칵! 오른쪽 뺨 아래로부터 틀어박히는 철퇴에 뒤에서 달려들던 복 면인의 머리는 반쯤 부스러져 철퇴에 곤죽으로 묻어 버렸다. 챙강! 복면인의 손에서 두 자가 겨우 될 듯한 짧은 검이 떨어지는 것을 그녀는 회심의 라을 담고 지켜보았다. 교도들 사이에 숨어 서 기습을 하던 자들 중 하나를 없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그녀가 웃을 때는 아니었다. 그녀가 애써 하나 를 잡는 동안 그녀의 수하는 암중의 칼에 둘이나 희생된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없는 양민들을 마구 죽이는 적의인들의 소 행에 못지않게 천사교도들의 소행에도 잔혹한 면이 적지 않았다. 무공을 지닌 자들이 같은 교도들 틈에 숨어 기습을 가한다는 것은 그들을 방패로 삼는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 교도들의 눈에는 그런 것들은 들어오지도 않는지 피를 보자 더욱 팡기를 부리며 적의인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주변의 교도들을 무차별로 쳐죽이던 적의 여인의 동작도 이젠 조금은 주춤해졌다. 우선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움직이기가 힘들고, 언제 튀어나 올지 모르는 기습을 대비해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 않는 자들을 대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두려움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때 석문으로부터 시커먼 공 같은 것이 튀어 들어왔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곰이 발을 헛디뎌 언덕에서 굴러 내려오 듯한 모습이었다. 그 정도로 빠르고 거센 기세였던 것이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이 공에게는 의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었다. 공은 적의인들을 교묘하게 비켜서 천사교도들을 향해 무 서운 속도로 굴러갔다.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꿈지럭거리고 있던 교도 하나가 그대로 공에 부딪쳤다. 팡! 붉은 피가 공이 굴러온 반대방향으로 폭죽처럼 튀었다. 공의 위력과 속도를 말해 주는 광경이었다. 검은 공은 이제 붉은 공이 되어 천사교도들 사이로 파고들었 다. 광장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팔한지옥 제사옥주, 적의억인이 자신감을 되찾아 적의인들을 지휘했다. "맹룡(猛龍) 호법이 오셨으니 다들 정신차리고 대열을 정비해!" 적의인들이 다시 대열을 짰다. 그들의 발걸음이 다시 확고해 지고, 손에 든 안령도에 힘과 기세가 더해졌다. 그들의 일은 간단하고 쉬웠다. 검은 공, 맹룡이 헤집어 놓고 간 자리에 살아 남은 자들을 잡아죽이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의 방패는 그들이 모억 있을 때에나 위력이 있는 것이지 지금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을 때에는 아무런 위헙도, 방패도 되지 않았다. 이백여 명의 천사교도들은 하나하나 확실하게 죽어 가고 있 었다. 뱅룡은 광장 안을 한바퀴 돌고 이제는 석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천사무적!" 석단 위의 두 복면인이 주문을 외치며 그를 향해 칼을 휘둘 렀다. 칼끝에 이는 바람이나 아래위를 구분할 수도 없어 그냥 공처 럼만 보이는 맹룡의 요혈을 겨누는 눈썰미로 보아 그들도 하수 는 아니었다. 그러나 맹룡의 앞에서는 적수가 아니었다. 빠방--! 맹룡은 한 줄기 검은 바람처럼 휘몰아쳐서 두 복면인을 칼과 함께 날려 버렸다. 그리고……! 맹룡은 회전을 멈추고 석단 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날려가 저 편 석단 아래에 뒹굴고 있는 두 복면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 었다. 맹룡은 석단 위에 파인 웅덩이를 잠시 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일 장을 내리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석단이 흔들렸다. 웅덩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굵 게 금이 그어졌다. 맹룡은 고개를 숙여 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웅덩이는 다른 무엇을 묻어 놓았다거나 한 것아 아라 쟈연석을 그대로 깎아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석단은 놀랍게도 하나의 큰 암석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웅덩이 아래로 한 줄기 구멍 같은 것이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웅덩이에 고인 피는 그 구멍을 통해서 아래로 흘러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맹룡은 다시 일 장을 내리쳤다. 쾅! 틈은 더 굵고 길게 벌어졌지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제사옥주가 석단 위로 뛰어올라왔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맹룡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갈라진 금이 태사의 아래로 뻗어 간 것에 주목했다. 쾅! 타사의는 맹룡의 일장에 바닥과 함께 날려 갔다. 바로 거기였다. 중앙의 태사의가 날려 간 자리에 아래로 통하 는 동굴이 있고, 사다리가 보였던 것이다. 맹룡은 그 속으로 뛰 어들었다. 제사옥주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뒤로 돌아서서 신경 질적으로 명령했다. "동굴을 샅샅이 뒤져 물건을 찾아라! 혹시 살아 있는 자가 있 면 확인해서 죽여 버리고, 신호가 가면 이곳으로 다시 모여라!" 그녀는 그렇게 명령하고 난 후에야 맹룡이 뛰어내려간 동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맹룡의 기척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직이 중얼거렸다. "병신이 되더니 성질만 고약해져서……!" 황룡의 손에 왼손을 잃은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맹룡은 그 전에도 포악했지만 그 이후는 더욱 그래서 성주와 총옥주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제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어쨌든 그걸 찾아야 하는데……!" 총옥주, 쌍고르마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맹룡뿐 아니 라 그녀에게도 문책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꼴 보기 싫기는 하지만 맹룡이 '그것', 사정(邪精) 천인혈을 찾아오기를 바랬다. 처음 들어올 때 보았던 천사교의 대제사장(大祭司長)이 그것 을 가져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제42장 같은 날 오전 석단 안. 기묘한 장치였다. 소구자는 경사진 통로를 정신없이 굴러 떨어지면서도 그런 생 각을 했다. 그는 금관의 복면인이 광장 안의 싸움에 정신을 파는 틈을 타 서 태사의 아래에 난 동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도중이었다. 역시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 굴에서도 살아 나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부 할아범의 가르침도 헛되지 않았다. 무슨 귀영(鬼影) 어쩌고 하는 장문인이라고 헛소리를 할 때는 늙은이가 횐소리도 잘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위기에 처했을 때는 가르쳐 준 말들이 도움이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지금도 태사의가 비밀통로의 입구인 줄 몰라봤더라면 탈줄이 란 생각도 못할 일인 것이다. 쿵! 기울어진 통로는 끝나고, 소구자의 몸은 돌바닥에 떨어졌다. 소구자는 그대로 바닥에 디굴어 충격을 완화시켰다. 빠른 눈썰미와 겹을 모르는 부푼 간덩이, 그리고 생쥐처럼 재 빠른 동작은 귀영문에 딱 어울리는 재질이라고 예전에 사부 할 아범이 그랬었다. 제자 어쩌고 하며 가르치려고 하는 통에 도망쳐 나오긴 했지 만 생각해 보면 사부 할아범에게 배운 몇 가지 손재주와 발재주 도 적은 재산은 아니었다. 소구자는 그래서 오 장이 넘는 급경사를 내려와 바닥에 굴러 떨어졌어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처음 보는 기묘한 장치를 구경하느라고 그런 것이었다. 삼 장여 위의 돌천장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구멍이 뚫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여러 개의 쟁반이 받쳐져 있 었다. 그 쟁반이 대단히 기묘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듯 투명한 아흡 개의 쟁반이 층층이 쌓여 있 ,는데, 저마다가 다른 라깔을 띠고 있는 것이다. 쟁반과 쟁반의 사이에는 가는 막대 같은 것으로 다리가 놓여져 서로 닿지는 않 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쟁반과 쟁반 사이는 붉은 줄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위는 굵고 아래는 가는 붉은 줄! 소구자는 그것이 사실은 윗쟁반에 고인 붉은 액체가 쟁반의 밑바닥을 통과해서 아래의 쟁반에 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도 의문스러운 것이 여러 가지 떠올랐다. 유리 같은 쟁반이 액체를 통과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석단 위의 웅덩이에 묻은 자국으로 보면, 그리고 그의 경우로 보면 거기 피가 뿌려진 것은 적어도 어제일 텐데 그 피가 아직 도 응고되지 않고 저렇게 홀러내려올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렇게 거른--그것은 마치 기름을 거르는 과정처 럼 보였던 것이다.--피를 어디에 쓰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연구해 볼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 라는 생각이 소구자의 머리를 쳤다. 몰래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 좁은 석단 위에서 그가 없어진 것을 눈치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허용하는 동안 더 멀리 도망가야 했다. 소구자는 벌떡 일어나 한쪽에 보이는 동굴로 달려가려 하다가 멈춰 섰다. 가장 아래쪽 쟁반 아래에 작은 옥병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는 붉은 액체가 반쫌 차 있 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피를 받아야 저만큼이 만들어지 는 것일까? 소구자는 자신이 그 중 하나일 뻔했다는 생각을 하곤 옥병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져 버리려다가 멈추었다. 어디에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거른 피를 모아 둔 것 이라면 뭔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흑시 쓸모가 없더라도 그를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소구자가 왔다가 그냥 가면 손해 아닌가 말이다!" 소구자는 옥병 옆에 놓여 있던 마개를 들어 옥병을 막고 품에 넣었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동굴은 두 개였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고는 한쪽 신발을 벗어 오른쪽 동 굴의 가운데에 살며시 놓아두고 왼쪽 동굴로 들어갔다. 왼쪽 동굴에 몇 걸음 걸어 들어가자 옆으로 크게 꺾어지는 모 퉁이가 있었다. 소구자는 그곳에 일부러 몸을 부딪쳤다. 그리고 는 한참을 더 가 이번에는 다른 쪽 신발을 아무렇게나 홀려 두 었다. 소구자는 그러고 나서야 돌아서서 나와 오른쪽 동굴로 달렸 다. 그는 곧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같은 장소. 소구자가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은 지하에 그림자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횃불에 비쳐 번뜩이는 금관이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소위 천사교의 대제사장이라는 복면인이었다. 그도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 낙엽이 떨어지듯 바닥에 내려앉 더니 쟁반의 아래부터 살펴보았다. 역시 없었다. 그는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한 둣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오늘 같은 제사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천 회(一千回)를 거듭 했던 그였다.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근 십 년에 가까운 노력이 한 순간 수 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빨을 갈았다. "그 쥐새끼 같은 꼬마 자식이…!" 그는 소구자가 떨어졌던 바닥의 혼적 잠깐 살피더니 동굴 앞으로 갔다. 오른쪽 동굴에 떨어져 있는 신발은 곧 발견되었다. 그는 그 동굴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급히 도망가느라 떨어뜨린 신발이 이렇게 반듯이 놓여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중얼거리며 왼쪽 동굴로 가 보았다. 과연 거기 모퉁이에는 달리다가 부딪혀 생긴 홈집이 있었다, 이것은 방금의 신발과는 달리 극히 자연스러운 흔적인 것이다. 금관의 복면인은 고개릎 끄덕이고는 그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나머지 신발 한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득의해서 중얼거렸다. "꼬마놈이 이런 상황에도 제법 머리를 썼다만 역시 어쩔 수 없군!" 그는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 동굴로 달려나갔다. * * * 같은 장소. 우두두! 쿵! 이번에 떨어져 내린 자는 방금의 둘과는 달리 전혀 조심하지 않고 뛰어내렸다. 건장한 체구의 외팔이 사내, 맹룡이었다. 그는 쟁반들을 잠깐 보더니 바로 바닥의 흔적을 살폈다. 흔적 은 둘이었지만 그가 쫓는 것은 하나였다. 그 흔적은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왼쪽 동굴로 쏘야져 갔다_ * * * 같은 장소.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그 장소에 나타났다. 제사옥주와 적의인들이었다. 제사옥주는 맹룡과는 달리 바닥의 흔적을 꼼꼼히 살폈다. 그 리고 그 흔적만으로 대부분의 전개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왼쪽 동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머리는 장식품으로나 달고 다니는 것이……!" 어쨌든 맹룡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수하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 오른쪽 동굴로 달렸 다. 살아 남은 적의인들 중 둘은 왼쪽 동굴로, 나머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지하에는 이제야 비로소 정적이 찾아 들었다. * * * 장강수로십팔타, 총타. 번강룡은 잔뜩 못마땅한 빛으로 야광충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 확히 말하면 야광충이 식사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2는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어 물었다. "음식이 맛이 없나?" 식탁 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야광충이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인데도 창문마다 두꺼운 휘장을 쳐서 방안에는 초를 켜 야 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야광충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군!" 번강룡은 다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왜 안 먹고 있나. 내가 독(毒)이라도 탄 줄 아나?" 번강룡은 식도락가는 아니지만 먹는 것은 즐겁게, 그리고 통쾌 하게 먹고 마셔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야광 중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식사 방법과는 정반대로 먹고 있었다. 깨작거린다고나 해야 할까? 산팔진(山八珍), 수팔진(水八珍)은 아니더라도 거의 그와 버 금가게 차려 놓은 음식상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광충은 아까 전부터 먹는다는 것이 생선 한 토막, 그리 고 고기로 치지도 않지만 구색 때문에 올려 놓은 양고기 한 조각에 불과했다. 대접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 이야기를 해놓고 보니 정말 그것 때문에 안 먹는가 싶어서 그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당늙은이에게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성질이 더 럽다면 꽤 더러운 놈이야." 야광충이 심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이왕 독을 썼다고 의심을 받을 바에야 진짜로 독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하지도 않고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야광충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가 그 의 창백한 얼굴에 음영(陰影)을 드리웠다. 번강룡은 그 묘한 분 위기에 잠시 말을 잊었다. 방금까지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한 판 붙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그라 들고 있었다. 야광충이 천천히 말했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다. 내가 먹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야. 이 양고기 는 오랫동안 먹어 오던 것이라 익숙한 음식이라서, 그리고 이 생선은……!" 그는 생선을 가리켰다. "반대로 거의 먹어 보지 못하던 것이라 대단히 맛이 있군." 번강룡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창백한 얼굴에 묘한 분위기의 녀석은 정말로 생선을 신기해 하고 있는 둣한 느낌이 풍겼다. "그건 풍어(風魚)라는 것일세. 비늘도 제거하지 않고 내장만 뻐 생선을 종이에 싸서 말려 두었다가 반만 구워 내놓는……. 원한다면 평생 먹도록 때마다 보내 줄 수도 있지. 동정호에서 잡히는 생선은 다른 곳과는 맛이 다르니까." "고맙군!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내겐 할 일이 많거든." 번강룡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주전자를 잡아갔다. "술은 한잔 정도 해서 내 체면을 살려 줄 수 있겠지? 이것마 저 거절하면 나는 정말 화를 낼 걸세. 어떤 술을 좋아하나?" 야광충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에 한번 마셔 본 적이 있었는데……, 뭔가 냄새가 강한……!" 냄새가 강한 것은 술에서는 하품(下品)으로 치는 것인데? 죽 엽청(竹葉淸)? 황미주(黃米酒)? 애주(艾酒)?" "그거! 애주!" 번강룡은 정말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정말 술 마실 줄 모르는군! 그건 워낙 향기가 강해서 약으로나 먹는 것인데……?"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홍조가 스치는 듯했다. 워 낙 순간적이라 착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곧 뒤를 따른 야광 충의 변명 섞인 말이 그 말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양유주(羊乳酒)는 이것보다도 더 냄새가 강하지. 난 그것밖 에는 마셔 본 적이 없어." "양유주……? 그럼 자네 그곳에서……!" 야광충의 안색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대막!" 번강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고기가 주식, 생선은 거의 먹어 본 적이 없고, 게다가 양 유주라……! 그렇군! 대막이 아니면 그럴 곳이 없지. 어떻게 그 런 곳에 가게 되었지? 내가 보기엔 몽고족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을 하던 번강룡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관둬. 그런 건 말할 필요가 없지.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겠군!" "한간(漢奸;매국노)!" 야광충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간의 제자야. 그래서 대막에 있었지." "다행이군!" 번강룡은 크게 안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몽고놈이 아니라 다행일세. 난 몽고놈은 싫거든. 원왕조 때 크게 당했었지." 그는 호탕스럽게 웃더니 손에 든 술을 권했다. "양유주 냄새 나는 그런 술보단 이 산서분주(山西汾酒)가 훨씬 나을 걸세! 냄새는 없지만 양유주만큼 독하다는 걸 내가 보장하 지! 남자다운 술이야! 모름지기 혹도인은 이런 술을 마셔야 돼!" 그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야광충에게 던졌다. 이 장여는 될 듯한 식탁 위 허공을 가로질러 술잔이 날아갔다. 야광층이 그 술잔을 잡고 단숨에 들이켰다. 번강룡이 헤벌쭉 웃었다. "좋아, 그래야 사내답지! 주인의 도리로 난 세 잔을 마시겠네!" 번강룡이 막 두 잔째 술을 비우는데 바깥6!서 소리가 났다. 그는 김샌 빛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밖으로부터 조심스러운 대답이 들려 왔다. "금노인(金老人)이 왔습니다. 손님께서 주문하신 일로……! 기다리게 할까요?" 번강룡이 야광충을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손님 오늘 가시는데 언제 기다려? 일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그래!" 문이 열리고 주름투성이, 그보다는 화상으로 인한 흉터투성이 의 노인이 들어왔다. 장강수로십팔타의 무기제련(武器製鍊)을 책임지고 있는 대장장이, 금노인이었다. 당금 천하에 몇 안 가는 장인(匠人)이라는 소문을 들은 야광 충이 한 가지 일을 맡겼던 것이다. "무슨 일인데? 해왔겠지?" 버강룡의 성급한 채근에 금노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 었다. "손님께서 주문하신 일이 워낙 까다로워서 아직……!" "못한단 말인가?" 금노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번강룡이 가장 싫어 하는 말이 '못한다'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절대 그 런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장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번 강룡은 일단 때려죽여 놓고 나서 후회할 인물인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주문을 다시 확인하고 말미를 얻을까 해서 왔습지요.'" "뭘 시켰길래 그러나?" 번강룡이 그제야 야광충을 향해 물었다. 야광충이 대답했다. "검 두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 "검 두 자루? 그게 어려워? 그리고 우리 수채에 보검도 많은 데 그 중 두 자루를 고르면 될 것 아닌가?" "길이는 두 자 세 치(二尺八寸), 무게는 무거워도 좋고 가벼 워도 좋지만 두 자루가 정확히 똑같은 무게, 똑같은 길이에 같 은 모양이라야 해. 내가 준 재료를 사용해서." "그게 어렵단 말씀입니다." 금노인이 들고 온 보퉁이를 풀어헤쳤다. 거기에는 연형칠장 의 세 가지, 척혈구절대와 귀왕인, 염왕자가 있었다. 야광충은 그 세 가지를 녹억서 두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 달라 고 주문했던 것이다. 금노인은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세 가지는 한 종류의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 도 열여섯 종류의 금속을 섞어서 만든 것입니다. 대단한 작품들 이죠." 그는 진정 감탄하는 듯 혀를 찼다. "이것들을 녹이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걸립니다만 불가능하지 는 않지요. 그러나 다시 모양을 만드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 족합니다." 야광충이 물었다. "양이 적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 가지가 더 있지." 그는 양 팔목에 찬 주작비를 풀려고 했다. 금노인이 손을 저 었다. "검의 몸이 되는 재료라면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말쏨 드리는 것은 중화(中和)를 시킬 물건입니다." 그는 귀왕인을 들고 말했다. "아까도 말쏨드렸습니다만 이것은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열 여섯 가지의 금속을 섞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종류의 금속만으로 이룰 수 없는 단단함과 예리함을 성취했지요. 하지 만 그냥 불로 녹인다고 이것들이 녹았다가 다시 똑같은 질의 것 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화시킬 물건이 필요한 것 이지요." 번강룡이 철에 관한 것을 알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금 노인이 말하는 동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금노인은 계속 말챘다. "아마도 이것을 처음 만드신 분도 뭔가 중화시킬 물건을 사용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게 뭔가?" "저도 모릅니다." 금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옛적에는 머리카락, 숯, 피에 심지어는 사람의 몸까지 사용 했지요. 이름난 명검에는 그런 이야기가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굴 죽여서 화로에 섞으란 얘기냐? 네가 들어갈래?" 번강룡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화를 버럭 내 었다. 금노인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고개만 내저었다. 그가 이 런 모습을 보일 때는 번강룡의 억지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경 우였다. 안되는 일은 안되는 것이다. 야광충은 침묵하고 있었다, 기문환사라 불리던 엽장청이 만든 것이니 뭔가 달라도 다르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사실 두 자루 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 두 자루 검으로 혈염수와 함께 그 동안 그가 남몰래 준비해 오던 것을 펼쳐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호접몽(!18) 이었다. 천산검성 여문량이 보여 준 검의 새로운 경지를 그의 손으로 현실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뭔가가 생각났다. 그는 앞의 세 가지 외의 연형칠장을 하나씩 보여 주었다. 인명권, 주작비, 묵린수, 그리고 유리환검……! "이것 중에 없는가?" 엽장청이 만든 것이니 그 중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 주즉이 맞았다. 금노인은 그가 내민 물건들을 하나씩 감탄 어린 눈으로 살펴 보더니 유리환검을 보자 눈을 빛내었다. "바로 이겁니다. 쇄금옥정(碎金玉精)! 이걸 섞으면 만들 수 있지요!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셨죠? 천산(天山)의 오지에서 나 나온다는 극히 희귀한 것인데……!" "천산에서." "그렇겠군요. 노필부가 당연한 얘길 물었군요." 금노인은 흥분한 빛으로 뇌까리더니 다시 인상을 썼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짐작을 못하습니다. 이런 금 속은 만져 보는 게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두번째 문제입니 다만 두 자루 검의 무게가 어느 정도까지 같기를 원하십니까?" "가능한 만큼!" "기장히 애매한 대답이시군요. 하나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 는 감각이라는 것에도 한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금노인은 품속에서 두 덩이의 철괴(鐵塊;쇳덩이)를 꺼내었다. "저울로 재면 이 두 개는 서로 무게가 다릅니다만 그 차이라 는 것이 극히 미세해서 사람의 손으로는 알 수가 없지요. 그렇 다면 쓰는 데에도 역시 지장이 없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죠." 야광충이 금노인이 꺼내 든 철괴를 달라고 해서 양손에 들었 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든 것을 들어 보이면서 생각해 보는 기 색도 없이 바로 말했다. "이쪽이 반 수(半銖;수(銖)는 384분의 1근(斤)이고 1근은 50그램, 1수는 그래서 1.3그램 정도), 무겁군!" 금노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비교를 하느라고 일부러 무게를 달아 온 것이 아니라면 그도 손에 들어 보는 것만으로 그토록 정확하게 무게의 차이를 알아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해볼 만한 일 아넌가!' 검은 쓰는 사람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진다. 일천 냥짜리 보검 이 어울리는 자가 있고, 동전 열 문짜리 파쇠덩어리를 들어야 되는 자도 있는 것이다. 무게 차이를 구분하지도 못할 것이 똑같은 무게 어쩌고 한다 면 시건방을 떠는 것이겠지만 그런 엄밀(嚴密)함을 필요로 하는 자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또한 장인의 보람 아닌가! "한 가지만 여쭈어 본다면……!" 그는 야광충올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 검으로 뭘 하려고 하십니까?" 야광충이 대답했다. "검무(劍舞)를 추려 하네!" 금노인은 더 이상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보퉁 이를 챙겼다. "알습니다. 검은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야광충은 이날 낮에 배를 타고 동정호를 떠나 양주로 향했다. * * * 통천방 총단. 쾌락에 젖은 여인의 모습은 얼마나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는 것인지! 젖꼭지가 단단해지고,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근육은 긴장되어 퇘처럼 구부러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 소리가 들려 오고, 호 흡은 비명 소리처럼 거칠어지고,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여인의 온몸이 긴장되고, 얼굴은 고통 스러운 것처럼 일그러지고, 남자의 몸에 더욱 힘껏 매달리며 아 랫도리를 바짝 붙여 온다. 지금 가괴자의 가슴에 매달리는 억인이 그랬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끊임없이 무어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묘한 진동이 여인의 몸으로부터 전해 오면 그도 그 진 동에 맞추어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괴자는 혈부용을 안은 그 자세 그대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육십 평생 적지 않은 여인을 접해 보았고, 그 중에는 절색이 라 할 여인도 적지 딴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를 끌어당기고 매 흑시키는 여인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가괴자였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진정으로 쾌락을 즐기고, 그러므로써 남 자를 그녀 스스로가 느끼는 것과 같은 쾌락의 경지에 빠져 들게 하는 탓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내로 하여금 여인을 기쁘게 했다는 만족스런 충족감에 빠져 들게 만드는 그것은 다른 어떤 재능에도 비교할 바가 안되는 탁 월한 재능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괴자는 문득 혈부용의 하얀 목에 감겨 있는 넓은 금목걸이를 쓰다듬으며 옷은 거의 입을 틈이 없이 지내면서 이것은 왜 목에 서 떼어 놓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 몇 달 전부터 단 한번도 그것을 떼어 놓은 경우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물어 보려 입을 벌리는데 혈부용이 먼저 물었다 "흑수당 문제는 어떻게……?" 가괴자는 계집이 별것에 다 관심을 두는구나 싶어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하도록 해놓았지. 거기 관심이 있느냐?" 혈부용은 그의 질문에는 대답 않고 다시 물었다. "알아서 어떻게 하도록?" "내 말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는 이미 정해진 선례가 있느 니라. 바로 멸망이지!" "누가 그렇게 하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분방(分幇)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지. 이번 경우는 남경(南京) 분방에서 하겠구나. 그곳 방주로 있는 무지권자(拇指圈子) 포귀재(鮑貴財)는 그런 방면에는 꽤 조예가 있는 녀석이니 잘 처리할 게다." "직접 나가 보진 않아요?" "너 지금 내가 그런 사소한 일에 직접 나가 봐야 한다고 말하 는 거냐?" "사실은 양주 구경도 하고 싶고……!" 가괴자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당겼 다. 혈부용의 몸이 비스듬히 일으켜졌다. 그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교활한 계집이……! 솔직히 말해 봐라. 달리 꾸미는 것이 있 지? 죽여야 할 사람이라도 거기 있는 거냐? 아니면 누가 보석을 주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냐?" 베갯머리 송사라는 것은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 아니던가! 가괴자는 혈부용이 이상하게 흑수당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 그런 일이 연루되어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나쁜 일은 아니지. 진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들 통천방의 양 주 지부를 건드렸으니 어차피 흑수당은 그냥 둘 수 없는 것이야." 가괴자는 혈부용의 소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몇 달째 이곳 총단에서 떠나 보지도 않았군 " 가괴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혈부용은 신음하듯 말했다. "죽여야 할 사람? 있어요. 거기 있지요." 그 모습이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도 보여 가괴자는 눈살을 찌 푸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아랫배로부터 열기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다. 그는 혈부용의 묻어 나올 듯 뽀얀 육체를 탐욕스런게 바라보 다가 덥석 팔을 내밀어 안았다. 반쫌 몸을 일으키고 있던 혈부 용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뒤로 쓰러졌다. 무슨 향기일까? 홑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을 따라 묘한 향기가 풍겨져 가괴자의 정신을 한 순간 아득하게 했다. 가괴자는 혈부용의 가슴에 파묻 히면서 걸잡을 수 없는 욕정에 몸을 떨어야 했다. 혈부용의 가는 팔이 그의 목을 안고 당겼다. 여인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그 손길에 가괴 자는 혈부용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그젓은 사실 그가 바랬던 일인지도 몰랐다. '나 이러다가 색마(色魔)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가괴자는 혈부용의 몸 속으로 잠겨 들면서 히죽 미소를 지었 다.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은 상상이었다. 침상의 붉은 휘장은 묘한 신음 소리로 다시 흔들렸다. * * * 양주 단자가. 양주성외 성문을 통과하는 마차 안에서 이야기 소리가 홀러나 오고 있었다. "정말 그를 초대할 거야?" "응!" "흑도인인데? "그러면 어때?" "어떻다니. 그날은 백도의 명숙들도 꽤 올 텐데……!" "할아버님 허락도 이미 떨어진 일이야!" "너……, 혹시 그가 마음에 들어서?" 상관청조는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마상란은 의외로 쉽게, 화도 내지 않고 그 말을 긍정했다. "맞아!" 상관청조가 오히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 버렸다. "너……, 너……. 설마 진짜……?" 마상란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어때서?" 흑백이 분명한 눈, 그 까만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별빛이 반짝 이고 있었다. 상관청조는 그 눈이 지금 전혀 장난기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더욱 충격이었다. 상대가 그러니 그녀도 이젠 농담 섞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녀는 낯빛을 고쳐 엄숙하게 하고 말했다. "흑도의 사내를 지아비로 맞이하겠다는 말이니?" "그러면 안돼?" "안돼." "왜?" "그는 흑도고 너는 백도니까." "단지 그 이유로?" "그 이유만으로도 넘칠 만큼 충분하지." "아닌 것 같은데?" 마상란은 장난치듯 짧게짧게 대답하면서 상관청조의 엄숙한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다. 상관청조는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의 친구가 불행해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흑도와 백도는 단지 편의상 붙여 준 이름이 아니야. 단순하 게 말하자면 흑도는 밤이고, 백도는 낮이야. 밤이 오면 낮은 없 고, 낮이 오면 그때는 이미 밤이 아니야. 밤낮이 동시에 있는 경우란 없어." "하지만 하루는 밤낮이 교차하며 만들어지지." "흑도인은 단지 혹도 방파에 속해 있대서 흑도인이 아니야. 그들은 뱃속부터 그대로 흑도인인 거야. 흑도인답게 생각하고, 흑도인답게 행동하고, 꿈도 흑도인답게 꾸지. 그들이 늘 생각하 는 것은 어쩨게 이득을 볼까, 어쩨게 즐길까 하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백도인 중에는? 백도인은 이득 을 생각 않고 오로지 선행과 협의만을 생각한다는 거야?" 상관청조는 마상란이 무어라고 반론을 하든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했다. "너도 그날 밤 거기 쌓여 있던 시체를 봤지? 사람을 죽이는 그 흔들림없는 손과 시체들을 보던 차가운 눈을 봤지? 그걸 보 고 '아, 저 사람은 참 고수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겠 지?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마음속 에서부터 뱀처럼 차가운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거야. 어느 백도인도 그렇게 냉정한 살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 지. 그들은 양심을 알기 때문이야." "체면 때문일 수도 있겠지. 백도인이라는 허명(虛名) 때문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일 수도……!" 이쯤 되는 말을 듣고서는 상관청조도 더 이상 냉정을 지키지 는 못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 뜨고 마상란을 쏘아보 았. "나는 백도의 정종(正宗), 아미파의 제자야. 내 앞에서 그렇 게 말하지 마. 그리고 너는 백도인 아니니? 그렇게 말할 수 있 어? 너 정말 넋이 나갔구나!" "화났어?" 마상란은 미안한 듯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상관청조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마상란의 손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상관청조는 안색이 변해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상란은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거미줄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미안!" 마상란은 얼른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제야 상관청조는 손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얘의 무공이……!' 상관청조는 못 보는 동안 마상란의 무공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는 것을 그 한 수로 알 수가 있었다. 양주쌍교 중 무장원의 명 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상란이 말했다. "네 말꼬투리를 잡아서 미안해. 사실은 나도 잘하는 짓이라고. 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어서 그런 식으로 라도 변명을 해보고 싶었던 거야 이해하지?" 상관청조는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마상란 이 정말 고민중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해는 해. 하지만 생각해 봐. 여인의 일생은 어떤 지아비를 만나느냐에 걸려 있는 거야. 그건 우리 같은 무림인에게도 예승 는 아니야. 네가 과연 성장 배경이나 바라는 것이 전혀 다른 흑 도인과 혼인해서 잘 살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아니라고 봐. 물론 난 누군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네 지금 마음을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래, 그 럴 수도 있겠지.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을 사로잡았던 매력이 날이 갈수록 시들해지고, 애정마저 식어 버리면……. 그 땐 사람이야.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가로 사는 것이지. 익숙하지 않은 생각, 익숙하지 않은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보다는 네가 여태 태어나 자란 성장 배경과 유사한 성장 배경에서 산 사람이 나은 거야. 생각해 봐. 그때 가서 한가지 한가지가 다 다른 사 람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마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 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재미있을 수도 있지.' 어쨌든 상관청조의 신경을 더 건드려서 좋을 일은 없었다. 꽉 막히거나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라고는 그녀 외에는 없는 것이다. 상관청조도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마차가 멈추고, 어자석(御子席)과 통하는 작은 창 문이 열렸다. 피진장의 마부인 마노인(馬老人)이 창문으로 얼굴 을 보였다. "이상하게 거리가 막히는데요? 이제 마차론 더 못 가겠습니 다요." 마차에서 내리자 마노인의 말은 곧 이해가 되었다. 단자가 거 리가 온통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니었 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고, 거리 양편 가게들의 창문과 심지 어는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올라가 사람들이 둘러선 그 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들려 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구경거리라도 있나?" 마상란과 상관청조는 어디 파고들어갈 틈이 없나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차 다섯 대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단 자가의 거리를 양쪽으로 막고 선 구경꾼들을 도저히 파고들 수 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녀들은 규중 심처(閨中深處)의 요조 숙녀(窈窕淑女)들 아닌가! 문득 마상갈이 상관씽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상관청조가 마 상란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녀들은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 구경꾼들 안쪽에는 공터가 있고. 다시 한 꺼풀 사람들의 막이 쳐져 있었다. 상관청조가 중얼거렸다. "무림인?" 두번째 막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두 패거리였다. 그리고 하나같 이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럼인들이었던 것이다. 마상갈이 그녀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통천방의 표지(標識)를 달고 있어. "이렇게 백주대낮에 거리를 막고 야료를 부리고 있다니!" 상관청조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상란은 별일 아니라는 둣 심상하게 대꾸했다. "통천방이 하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어?" "정파는?" "너희 아미파 같으면 통천방과 원한을 맺고 싶겠니?" 상관청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목하 통천방은 강호 최대의 방파였다. 직접적인 원한이 아니 라면 아미파가 아무리 명문대파라 한들 그들과 다투고 싶을 리 가 없었다. 사실은 그런 원한이 있더라도 어지간하면 덮어 버리고 넘어가 고 싶을 정도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싸워 서 통천방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큰 세력은 소림이나 무당 외 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관부는 뭐하고 있는 거야?" 관부는 나라를 등에 업고 있으니 참견할 만도 하지 않은가! "지부대인이 뭘 먹었겠지!" 마상란이 역시 아무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일단락되면 그제서야 어슬렁어 슬렁 나타날 거야. 그리곤 죄없는 구경꾼들이나 몇몇 족치겠지." 상관청조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있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래서 흑도란 것들은……!" 마상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과 용기있게 싸우는 자들도 바로 그 흑도인 것 같은데?" 통천방의 인원들과 상대하는 다른 한편의 인원들은 제각기 다 른 복장들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 흑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녀들 은 모르지만 바로 흑수당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원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는 방각 과 한 괴인이었다. 사람 키만한 길이의 칭룡도(靑龍刀)를 휘둘러 방각의 도끼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괴인. 그는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추하게 생긴 자였다. 반쫌 벗겨진 대머리에 뒷머리는 또 길어서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노인. 결정적으로 괴이한 것은 목에 건 목걸이였다. 그는 검붉은 나 무토막 같은 것들을 금사슬로 엮은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자세 히 보니 놀랍게도 사람의 손가락들을 잘라 목에 걸고 다니는 것 이었다. 강호에 그런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마상란은 얼굴이 굳어서 중얼거렸다. "무지권자 포귀재!" 무지권자(拇指圈子)! 이름 그대로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라 목걸이 를 만들어 하고 다니는 자였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 목걸이에 손가락을 바칠 자격도 없고,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의 손가락만 취급한다고도 했다. 얼핏 세어 솨도 서른 개는 넘으니 그의 손에 죽은 고수들만 서른이 넘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마상란의 설명을 들은 상관청조가 질렸다는 표정을 하다가 문 득 물었다. "그런 자와 싸우는 저 노인은 그럼 누구야?" 방각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금빛 방패와 도끼로 무지권자를 상대하면서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한쪽 눈을 가로지른 긴 칼자국과 얼굴에 가득한 흉터들은 둘 째치고 라도 이곳저곳 일그러지고 상처가 난 방패가 그의 화려 한 싸움 경력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흑도 십대고수에 꼽히는 무지권자와 싸워서도 밀리지 않을 정 도의 고수, 게다가 저런 특이한 무공에 특이한 용모……! 그런데도 마상란은 그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녀의 의문은 다른 사람이 풀어 주었다. "독목야차 방각! 도끼를 사용하는 천하 오대고수 중 하나다." 상관청조는 의아한 라으로 마차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반색을 했다. 거기에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키다리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오소야(五少爺;다섯째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상관청조의 다섯째 아저씨, 옥정산장의 다섯 마리 용 중 하나 인 오소야 상관홍(上官鴻)이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의 키다리 사내. 그는 싸움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 "한참 되었다." "방각이라면 그 금팔괘순(金八卦盾)과 비마월(飛磨鉞)을 쓴다 는 그 사람이요?" "음!" 상관청조도 배우지는 않았지만 유성쌍인부로 유명한 옥정산장 의 후손이다. 방각이라는 이름 정도는 그녀도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안 보인다더니 어떻게 여기 있을까요?" "낸들 알느냐? 나도 처음 본다만 저런 모습으로 싸우는 사 람은 그 하나밖에 없지. 그런데……, 강하다 강하다 소문만 들 었는데 정말 강하구나! 무지권자와 저 정도로 맞서 싸우다니! 도끼와 방패가 가진 특성을 정말 최고도로 발휘하고 있구나!" 그가 연신 감탄하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지권자가 청룡도 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방각! 네가 여기 양주 구석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 금도 강에서 들으면 좋아하겠구나!" 금도강은 대막에 가기 전 방각이 소속되어 있던 방파, 한때는 그들에게 쫓겨 다녔지만 이제는 그저 군소 문파로 몰락해 가는 중이었다. 방각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네 일이나 해라. 포귀재!" "내 일이라? 좋아 그러지!" 무지권자는 돌바닥에 쇳덩이를 가는 둣 흉흉한 목소리로 위협 했다. "오늘은 인사차 들른 것이다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운 좋게 내일 버틴다면 모레가 또 있겠지! 너희 혹수당 무리가 끝까지 진운을 비호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방각이 도끼를 들어 그를 가리켰다. "그게 다냐? 더 있으면 일단 네 입을 쪼개 놓고 듣기로 하지." "흥!" 무지권자는 거세게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의 뒤를 통천방 인원들이 따랐다. 사람들이 홑어지고, 혹수당의 사람들도 골목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방노대협!" 방각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멈추어 섰다. 아름다운 여인 두 명과 키다리 사내가 골목까지 그를 따라와 있었다. "날 부른 것인가?" 검은 장갑을 낀 여인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소녀 피진장의 여식입니다. 귀(貴) 당주를 뵐 수 있을까요?" "피진장……, 철권 마종의 대협의……?" "바로 소녀의 조부이십니다." "피진장의 자손이 왜 우리 당주님을 찾으시는가?" 방각의 안색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마상란은 공손하게 응대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붉 은 첩지(帖紙) 한 장을 꺼내어 보였다. "내달 보름에 저회 장원에서 열릴 중추지연(中秋之宴)에 초대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러……!" 방각은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더니 불쑥 물었다. "누가?" 초대하는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소녀가 일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아면은 그녀가 있으니 당연히 초대하는 사람도 그녀일 것이다. 방각이 성큼 다가갔다. 키다리 오소야 상관홍이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그의 양손 이 허리춤에 가 닿았다. 방각의 행동에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방각은 그를 힐끔 보고 물었다. "유성쌍인부로군! 옥정산장?" 상관홍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 개의 양날도끼를 본 것이다. "다섯째인 상관홍이오." "선친을 뵌 적이 있지!" 방각은 그렇게만 응수하고 마상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지는 보장할 수 없네." 마상갈은 그에게 붉은 첩지, 초칭장을 넘겨주지 않고 머뭇거 렸다. "직접 전해 드릴 수는 없을까요?" "미안하네만 그럴 수 없네!" 그녀는 잠시 아쉬운 빛을 보이더니 초청장을 방각의 손에 넘 겨주었다. "언제 뵐 수는?" "아마도 없을 걸세!" 방각은 돌아섰댜. 마상란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꼭 오시도록 말씀을……!" 방각은 이미 골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 * 통천방 총단. 허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전 가운데에 서 있었다. 뭐 그다지 기분 나쁠 일은 없었지만 도대체가 여기로 불려와 서 좋을 일이란 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변덕을 부리려나?' 그는 문득 전날 흑수당이 장강수로십팔타를 방수로 만들었다 는 헛소문을 그대로 전한 것이 들통났나 불안해졌다. 그러려고 한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그리고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전한 것이 또한 사실 아닌가! 혹수당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끌어 틳인 말이기는 했 지만 말해 놓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자신도 참 터무니없는 말 을 했다고 후회하던 중이었다. 혹수당 따위가 어떻게 장강수로십팔타를 복속시킬 수 있단 말 인가! '그럼 그 어르신은 왜 흑수당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걸까?' 어르신, 그의 주인은 분명 흑수당이 장강수로십팔타를 복속시 킬 것이라고, 그것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좋은 일로 부르지 않은 것은 분명해.' 허탁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괴자를 기다렸다. 좋은 예감은 거의 맞는 법이 없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정확 하게 맞는 모양이었다. 가괴자가 나와서 그를 향해 던진 첫마디가 그의 안색을 탈색 시켜 버렸다. "양주로 가겠다." 허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 되물었다. "어, 언제……?" "오늘!" 과연 예감대로였다. 허탁은 그래도 가괴자가 다시 대전을 나갈 때까지는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곤 그 옷자락이 사라지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 았다. 가궈자가 움직이면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현 무림 최대 방파의 방주다운 행차가 준비되어야 하고, 수행이 따라붙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분쟁 중인 곳이니 그에 따르는 준비가 또 선행딕 어야 하는 것이다. 대통천방의 방주가 직접 나섰는데 아무런 일 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창피인가! 게다가 애첩들도 데리고 가려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차들에 수행원들이 늘어나고, 중도에 묵을 곳들도 섭외가 되어야 한다. 연도의 군소 방파들에서 선물이라도 들고 나오지 않으면 평생 에 썹지 못할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펄펄 뛸 텐데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이라도 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준비할 시간이라곤 이제 반나절밖에 남지 딴은 것이다. 오늘밤 안에 당장 출발하게 되지 않으면 저 성질 급한 돼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다. 허탁은 생각하면 할수록 태산 같은 부담감을 느끼고 신음했다. '차라리 지금 도주해 버려?' 그 일을 다 하느니 차라리 야반도주를 해버리는 것이 나을지 도 몰랐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디 간들 여기보다 대접을 덜 받을 것인가? 그때 대전 문으로 가괴자의 비대한 머리가 들이밀어졌다. 그 는 아직 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서 준비 안해?" "합니다, 해요!" 허탁은 순간적으로 대전에서 사라졌다. 통천방 총단은 근래 보기 드문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제43장 같은 날 오후 흑수당 총당. "황룡을 깨워야 해!" 진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것 외에 더 좋 은 의견이 있느냐는 단호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깨웁니까?" 이통천이 물었다. "황룡라마가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깨웁니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지금 흑수당의 정예는 거의 장강수로십팔타를 치러 나가 있 고, 양주에 남아 있는 현 자배 이상의 사람은 여기 있는 방각 대취옹, 진운, 흑응과 이통천, 그리고 정이뿐이었다. 방각, 대취옹, 진운을 제외하면 변변히 적과 맞서 싸울 사람 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황룡이 폐관에서 나와 힘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 상태에 들어가 있는 그를 어떻게 깨운단 말인가? "제게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흑웅이 느닷없이 끼여들어 시선을 모았다. "저 녀석 말이 많이 늘었네. 이젠 회의하는 데 끼여들기도 하고!" 진운은 흑웅을 보지도 않고 한마디 내뱉고는 다른 화제로 이 야기를 돌렸다.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오늘 온 초청장 이야기나 하지." 기특하다는 듯 말을 했지만 사실은 어이가 없어 화가 날 지경이 라는 감정의 표현이었다. 무지한 묘족이 같은 지 자배라는 것만으 로도 평소에 자못 불쾌하던 참인데 뭘 안다고 나선단 말인가! "원래 중추절(仲秋節)에는 손님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베푸는 것이 명문가의 전통이긴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런 초청이 올 곳이 아닌 곳에서 왔다는 것이지." 이통천이 말했다. "그렇죠. 피진장의 철권 마종의는 정도의 명숙으로 유명한 사 람인데 흑도 세력으로 치는 우리 당주님을 초청했다는 것은 정 말 이상합니다." 진운이 눈을 흘겼다. "지금 피진장 따위에서 온 초칭장은 논의할 대상도 아니야. 난 지금 양가장에서 온 것을 말하고 있는 거란 말이다 " "양가장요?" 이통천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천하제일부를 자랑하는 양가장 말입니까? 양가장은 원나라 때 부터 부를 자랑하던 곳이고, 명나라로 넘어오면서 태조 홍무제의 거사를 지원한 공으로 나중에 더욱 부유해진 곳이죠. 그런 양가 장에서 우리 당주님을 초청했단 말입니까?그런 영광이……!" 방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광이라고?" 이통천이 흥분한 빛으로 말했다. "부유한 것으로 치면 나라를 하나 살 정도요, 지닌 바 힘으로 도 이미 한 나라를 세울 정도의 양가장에 초대를 받았으면 영광 아닙니까? 매년 그곳의 주인인 양유락의 초대를 받는 사람은 극 히 소수, 초칭받았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인물로 인정받는 실정이잖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진운이 이통천의 말을 잘랐다. "잘 얘기해서 양기장의 도움을 얻으면 통천방과의 문제도 쉽 게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그건 안돼," 방각이 잘라 말했다. "그들이 어떤 저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당주도 안 계 신 상태에서 함부로 남의 도움을 받을 순 없다. 지금으로서는 우리 힘으로 버티는 데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결국……." 진운이 씁쓸하게 말했다. 방각이 일단 결정하면 어떤 말로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방금의 한마디로 양가장의 도움을 얻는다는 것은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된 것이다.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군. 어떻게 적을 상대하느냐 하 는……!" "제게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초청장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듣고만 있던 흑웅이 다시 끼여 들었다. 진운이 인상을 썼다. 한소리 하려는 찰나에 방각이 말했다.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게!" 혹웅이 그제서야 헤벌쭉 웃으며 말을 했다. "제가 그 동안 라마님과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거든요." "그런 말도 안되는!" 진운이 펄쩍 뛰었다. "가사 상태의 사람과 어떻게 말을 해? 그리고 너 서장어를 아 느냐? 황룡은 묘족어를 모르고, 너는 서장어를 모르지. 게다가 둘 다 한어(漢語)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대화를 해?" 진운의 말대로 황룡과 혹웅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흑웅은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라마님은 묘족 말을 하시던데요? 목소리가 안 들리고 그냥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전해 오시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시작한 혹웅의 말이 여러 사람을 황당하게 했다. 요컨대 흑응은 그 동안 황룡에게서 무공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시작은 그날, 야광충이 칠화회의 습격을 받은 날이었다. 그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혹웅은 무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지금까지 알고 잇던 싸움법은 맹수를 사냥하는 데에 나 효과가 있지 사람들과 싸우는 데에는 별소용이 없다고 판단 쌨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무공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룡을 찾아갔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황룡밖에 없었다. 원래 황룡의 시 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것 아니던가! 밤은 늦었고, 황룡이 불상처럼 앉아 있는 용광사 대웅전은 굳 게 닫혀 있었다. 흑응은 그 앞에 엎드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정 말 신명(神明)에게 빌 둣이 황룡을 향해 빌었던 것이다. 응답이 왔다. 그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타심통(他心通)이군!" 혹웅의 말을 듣던 이통천이 감탄하며 말했다. 진운이 기가 막 힌 듯 되물었다. "타심통?" 이통천은 진운이 몰라서 되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면 서도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할 기회를 눙치고 싶지 않았다. "불가에서 경지에 오르면 여러 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하지 않 습니까? 예컨대 천 리나 멀리 떨어진 장소의 일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천 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또 마 음에 직접 말을 걸 수 있는 이 타심통이오." 진운은 그가 어디까지 얘기하나 보자는 듯 그냥 두고 있었다. 이통천은 그것이 그의 박식함에 경탄해서라고 생각했는지 신 이 나서 말을 이었다. 사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군가가 말을 끊 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해도 떠들 수 있는 것이다. "타심통을 통하면 설사 상대편이 사용하는 언어를 몰라도 의 사를 소통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언어 가 달라도 같은 것이니까요. 흑웅에게 황룡라마가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타심통을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경탄한 듯 감 탄사를 발했다. "황룡라마는 정말 놀랍군요. 이제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진 모 양입니다." 진운이 말하기도 귀찮은지 손을 저었다. 흑웅에게 계속 말하 라는 표시였다. 흑웅이 말했다. 들어 본 적은 없지만 황룡의 목소리임에 분명하다고 흑웅은 생각했다. 가끔 알 수 없는 말을--사실은 서장어였다.--할 때 의 목소리와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혹웅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대답했다. "예!" "말로 않해도 된다." "예!" "말을 하지 마라. 사람들이 깰라." "예!" 흑웅도 바보는 아니라 실수는 세 번으로 끝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어서 의사를 표시했다. 진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도 이 바보에게는 당할 수가 없다 고 생각한 것이다. "문이 가로막혀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는 저어서 뭐하리?" 흑웅이 아니라고 말했다. "부처님이면 그 정도는 볼 수 있는 것이죠." 문을 뚫고 볼 수 있으면 고개를 젓지 않아도 그냥 마음속을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게 네가 지금 말하는 요점 아니냐고 반박 을 하려다가 진운은 그만둬 버렸다. 바보와 싸워 봤자 똑똑한 사람만 더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것 을 요 몇 달 동안 흑웅과 지내면서 충분히 느꼈던 것이다. 그냥 말이나 하라고 다시 한번 손짓. 황룡은 매일 밤 흑웅에게 용광사로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 것을 가르쳐 주었다. 보리무상강기였다. "뭐?" 진운이 인상을 썼다. 흑웅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보리무상강기요." "뭐?" 진운이 다시 한번 물었다. 혹응은 이번에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보리무상강기요." 진운이 혹웅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위 사람들을 둘 러보았다. "이놈이 이제 보니 상당히 재미있는 놈이군! 보리무상강기가 어떤 무공인데 네놈이 배운단 말이야?" 혹웅이 처음으로 심통이 난 둣한 표정이 되었다. "빨리 배운다고, 잘 한다고 하시던데요!" 진운이 호통을 쳤다. "보리무상강기면 강기무학의 최고봉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기초도 없는 네가 그걸 어떻게 배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부처가 되는 것에는 길이 따로 없다고, 거꾸로 배워도 괜찮 다던데요!" 진운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흑웅이 그렇게 어려운 말을 알 리가 없다. 그러면 그가 한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또 뭘 가르쳐 주던?" "황룡금강행(黃龍金剛行)이오." "뭐?" "황룡금강행!" 황룡금강행이라면 보리무상강기와 더불어 황교사대호교지학의 하나였다. 용의 움직임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권법. 흑응은 그것도 배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번 해봐라!"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러나 혹웅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이통천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실제 배웠다고 해도 십여 일밖에 못 배웠을 테니 보여 줄 것 이 있습니까? 그만두시죠." 야광충이 습격을 당했던 날이 칠월 일일, 오늘이 십삼일이니 실제 십이 일밖에 못 배웠을 것이다. 진운은 그래도 물었다. "얼마나 배웠어? 그건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 흑웅이 그게 되는지 안되는지 생각해 보는 눈치더니 대답했다. "거의 다 배웠다고 하셨어요." "이런 나쁜 놈!" 진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놈이 가만 듣자듣자 하니 어른을 놀리녜! 십이 일 동안 뭘 배웠다고? 흑웅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입 속으로만 말한다고 한 것인데 목소리가 워낙 커서 방안에 다 들렸다. "들으면 사람들이 부러워할 거라고 가르쳐 주지 말라시더 니……! 진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가 새파랗게 질렸다. 그 한마디 말 로 질투가 나서 이러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방각이 그때 끼여들었다. "어쨌든 좋아. 지금은 황룡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진운을 앉게 하고는 흑웅을 향해 물었다. "오늘밤도 거기 가겠지?" "예." "여기서 오간 말을 들었으니 뭐라고 해야 할지는 알겠구나. "말은 해보겠지만……." 흑웅은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나올 때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 * *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강소행성(江蘇行省). 그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새벽같이 달려와 접견(接 見)을 신청하고, 이제 해가 서산을 넘어갈 시간까지 하회(下回) 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짜증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제 형안찰사사는 행성(行省)의 전체 사법을 맡고 있는 귀하신 몸, 일개 포두(捕頭)가 그런 분을 만나 뵈려면 이 정도 기다리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긴장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다. 서류 뭉치를 든 서리 (書吏)가 그를 힐끗 보고는 반대편 출입구를 통해서 들어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앉았다. 이게 벌써 몇 번짼지 몰랐다. 이곳 행정을 보는 서리들이 그 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면 사적인 부탁을 하러 온 사람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제형안찰사사를 만나기만 하 면……, 그래서 가슴속에 담아 온 말을 다 전하기만 하면……. 그땐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을 쑥 들어가게 만들 수 있을 것 이다. 금의위사상 최연소 최고속의 승진가도를 달렸던 형 등평 의 아우다운 위치가 되는 것이다. 등적은 그런 생각을 하고 흘로 미소를 지었다. 문가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등적은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 났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았다. 강소행성 제형안찰사사 한사동(韓 嗣童)이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야 집무실로 돌아오고 있는 것 이다. 그는 관복을 입은 삼십대의 사내와 함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로 두 명의 무관이 경호 태세로 같이 걷고 있었다. 둥적은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어허! 한사동을 경호하던 무관이 둥적의 가슴을 밀어 다가오지 못하 게 했다. 등적이 외쳤다. "중요한 일입니다. 반드시 들으셔야 할 일입니다." 한사동이 피곤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임 포두 아닌가? 둥…… 뭐라고 했지. 유총포두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등적이 반갑게 대답했다. "등적입니다.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 "난 지금 무척 피곤한데 내일 하면 안되나?" 등적은 한사동에게 더욱 바싹 붙으며 말했다. "지금, 되도록 빨리 아셔야 할 일입니다." 그의 눈이 무척 진지한 것을 보고 한사동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따라오게." * * * 장강. 배는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배 뒤편 멀리 서쪽으로 지고 있 었다. 원도살과 혈문룡은 뱃전에 서서 멀리 강언덕이 붉은 하늘 아 래 검은 뱀처럼 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하늘은 점차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군청색으로 화 해 검은 뱀의 형체마저 삼켜 버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양주에는 언제나 도착할까요?" 원도살이 혈문룡을 힐끔 보고 무심히 대답쌨다. "사공에게 물어 봤더니 사오 일은 걸린다는군." "빨리 가야 할 텐데……." 혈문룡의 얼굴에 이상하게 그늘이 졌다. 원도살이 물었다. "그 기녀가 보고 싶은 거냐?" 혈문룡이 그를 노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내가 방탕해졌다고 보고 계십니까? 기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나는 네가 그래도 상관없다고, 아니 차라리 그러기를 바란다." 윈도살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더욱 그 랬다. "가망없는 사랑을 쫓아 월몽영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는 말이다." 혈문룡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윈도살에게서 이런 이야기 가 나올 줄은 짐작도 못했단 것이다. "그…… 그……." "숨길 필요 없다. 대막에서 올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니까." 혈문룡이 냉정을 되찾아 차갑게 말했다. "오래도 참으셨군요. 진작 드러내어 놀리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 그것이 아무리 어울리지 않고, 혹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 도……. 나는 여태 네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지금은?"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은 아무 말 없이 멀리 강언덕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윈도살이 계속 말했다. "월몽영의 마음은 네게 열려 있지 않아. 그녀의 마음은 오 직……!" "그만두세요." 혈문룡이 말을 잘랐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확인해 줬을 뿐이다." 원도살은 그것으로 말을 맺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홀 렀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처럼 혈문룡의 가슴속도 어두워졌다. 뻔 히 알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월몽잉의 일이 그랬다. 대막에서 말을 달리며 약탈을 할 때는 그런 일이란 있으리라 고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문득 대막의 모래바람이 생각났다. 아득히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천지를 메우고 몰 아치던 그 모래바람……! 그 모래 알갱이들을 씹어 가며 달릴 때는 그래도 사는 것 같 았었다. '대막에 돌아가고 싶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그 땅을 그리워하는 혈문룡이었다. 강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원도살을 향해 말했다. '이대로 번강룡을 남겨 두고 그냥 돌아가도 되는 걸까요? 그 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우리가 떠날 때 하는 말을 들으셨죠?" 번강룡은 떠나는 흑수당의 인원들을 보내며 그렇게 말했던 것 이다. --날 믿지 말게. 지금은 힘이 없어 참고 있지만 이길 자신만 붙으면 오늘의 보복은 반드시 하고 말 거야. '덤비면 죽는다!' 라는 말도 안되는 경고에 대한 대답이었을 까……? 송별사치고는 억시 말이 안되는 송별사였다. 원도살이 피식 웃었다. "당주의 대답도 들었잖은가?' 야광충은 번강룡에게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게나.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들어야 할까요? 원도살은 다시 피식 웃을 뿐, 말을 않았다. "그런데……." 혈문룡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잇는 곳에 서 있는 일행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재미있는 일행과 동행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재미있는 일행이라……." 혈문룡이 가리키는 일챈은 바로 무당파였다. 그들은 어찌어찌 동정호 장강수로십팔타까지 갔다가 이제야 양주로 가고 있는 것 이다. 그들 흑수당과 얽혀 있는 일을 생각하면 묘한 동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결판을 내고 무당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들을 위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혈문룡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주까지 데려갔다가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 불쌍하지 않습 니까?" "당주도 말이 없고 당사자도 모른 척하고 있으니 우리도 오른 척할 수밖에!" 당사자, 화영은 돛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비쳐 보이는 그의 윤곽이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언제 보아도 이 세상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묘한 분위기……." 혈문룡은 나직이 감탄사를 발했다. "어딜 보고 있는 걸까?" 화영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강물 위에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는 저녁의 첫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남경응천부, 강소행성. 하사동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등적의 말이 진행될수록 더욱 굳어졌다. 말이 끝나고 그는 물었다. "모충국이나 유소백에게 그 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나?" "모추관에게 말했었습니다." "뭐라던가?" "사안이 복잡하니 더 두고 보자고만……." "그런데 왜 그렇게 안하고 내게 보고하는가?" "모추관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사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적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자네가 한 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나?"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래야 될 걸세." 접견은 끝났다. 등적은 상기된 얼굴로 문을 나서고, 한사동은 같이 방에 들어온 관복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관복의 사내, 현 금의위 부영반 장화룡(張華龍)이 미소를 지 으며 대답했다. "그러! 내가 뭐랬나? 등평의 보고가 사실일 거라고 했지 않 은가?" 나이도 직급도 아래지만 금의위 부영반이 하대를 않을 정도로 높은 사람은 현재의 조정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사동도 예외 는 아니었다. 한사동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백리극에 관한 이야기는 누락되어 있지 않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백리극은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지. 그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야. 어쨌든 작은 일이라도 누락시킨 것은 누락시킨 것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지금 같은 시국에 이런 일이 겹쳤다는 것은 우연이라고는 보 이지 않는데 장부영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절대 우연은 아니지." 장화룡의 눈빛이 빛났다. "대명의 사신(使臣)을 죽일 정도로 벤야시리의 간이 부은 것 과 대막에 망명해 있던 한간들이 중원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절 대 우연의 일치는 아니지." 벤야시리가 사신을 죽였다! 한사동이 오늘 집무실로 늦게 돌아온 것이 그 이유 때문이었 . 두 달여 전에 타타르로 보냈던 사신 일행이 오늘 아침 잘려 진 머리들로만 되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지금까지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그들 두 사람이었는데 돌아오 자마자 또 거기 관련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실 거요?" 한사동이 물었다. 장화룡이 무언가 생각하는 빛을 보이더니 대답했다. "현재 양주의 일은 도연 선사가 다 맡고 있네. 물론 이 일로 가신 것은 아니지만 알려 주면 아마 도움이 될 거야. 우리 금의 위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그러시지요. 그보다 구복을 대장군으로 선임한 것은 문제가 있지 않소? 그에게도 혐의가 없지 않은데……."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봐야겠지." * * * 암흑 속의 대화. "미친놈!" "……." "내가 아루타이 그놈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늘……." "……." "이 시점에 명나라의 사신을 죽이면 어쩌겠다는 거야? 아직 여긴 준비가 안됐단 말이다. 이제 일 년만 아니 반 년만 기다러 면 퍼는 것을 그 기간을 못 참고……. 바보 같은 놈!" "아루타이의 잘못이라기보다 칸외 고집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 니다. 칸도 되셨겠다, 조공을 바치라는 사신을 대하니 울화가 치미셨겠지요. 성주님도 아시잖습니까? 칸의 성미가 어떤지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칸이 그래도 아루타이 그놈이 목 숨을 걸고 말렸어야 될 일 아닌가? 말리지 못한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 "명의 대응은 어떻게 된다던가? 그냥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영락제도 보통 성질은 아니니까." "구복을 대장군으로 삼아 섭만군을 보낸답니다." "정벌군?" "예!" "구복이 대장군이라고?" "예!." "불행중 다행이군." "구복은 우리가 몽고족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완전히 협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가 그 것을 알면 협조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상관없어. 그의 자질로 보아 우리에게 헙조를 하든 안하든 별위협이 안되는 인물이다, 영락제로 봐서는 최악의 인선을 한 셈이지." "……!"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모든 계획을 당기는 수밖에 없어. 천인혈은? "거의 구할 뻔했는데……." "거의 구할 뻔……?" "의외의 일이 생겨 현재 맹룡과 사옥주가 추적 중입니다." "목숨을 걸고 구해야 한다. 못 구하면 자기 목을 잘라 들고 돌아오라고 그래." "그래서 삼옥주를 추가로 보냈습니다. 곧 구하게 되실 겁니다." "팔월 보름이 오기 전에 구해야 한다. 그땐 그에게 먹여야 하 니까!" "팔월 보름……!" "그렇다. 그날 여태 미뤄 오던 일을 끝내는 것이다. 내 이십 여 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이지. 후후후……!" "……." "통천방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괴자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나?" "그렇게 보입니다." "그 전에 약간 정리를 해둬야겠군!" "정리라면?" "쥐새끼 몇 마리를 없애는 것이다. 돌아와 보면 야광충 그놈이 광분하지? 그땐 어쩔 수 없이 예정된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누구를 보낼까요?" "내가 가겠다." "그러실 필요까지……?" "딴 쥐새끼들은 몰라도 황룡을 상대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수행할까요?"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 * * 양주 용광사. 무애 대사는 요즘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하는 일 없이 대웅 전으로 자꾸 시선이 가는 버릇이 그것이었다. 선방에서 참선을 하거나 쉴 때에도 전과 달리 대웅전 방향으로 얼굴을 두어야 마 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막상 대웅전에 들어가면 불경은 보지 않고 금불상만 힐끗거려 사시(斜視)가 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자다가도 수십 번씩 깨고 약간만 큰 소리가 들려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이 해탈할 날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았다.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그날 밤 이후에 생긴 버릇이었다. '그 소림사의 똘중놈……!' 도연을 생각하기만 해도 육섭 년의 수행은 어디로 갔는지 이 마에는 핏대가 솟아오르고 눈가에는 살기가 흘렀다. '감히 우리 용광사의 보물을 훔쳐 가려 하다니. 재물에 욕심 을 부리지 말라는 고귀하신 가르침은 그놈 귓구멍으로는 들어가 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 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세상 일은 역시 인과응보(因果應報)라 나쁜 일이 있으면 좋 은 일도 있는가 보다……. 아니,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던가? 아 니면 사필귀정(事必歸正)?' 그가 알고 있는 옛말은 다 떠올리며 생각하는 모습은 바로 정 원 선사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도연이 침입하려다가 개 쫓기 듯 꼬리를 말고 쫓겨난--무애 대사는 그날의 일을 그렇게 기억 하고 있었다.--다음날 아침, 철불사에 쫓아가서 본 얼굴이었다. '육십 평생에 그렇게 통쾌한 날은 드물었었지.' 성질대로였으면 아예 절문을 닫게 만들고 싶었지만 같은 중이 라는 동질감 때문에 자비를 베푼 면이 없지 않았다. '내가 수행이 깊지 않았으면 절대 그렇게는 안 넘어갔을 것이 다. 제놈 정도의 수행이었으면 벌써 철불사는 문을 닫았지.' 그렇게 높은 수행으로도 참을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는가 보다. 지금 그가 대하고 있는 일이 그 중 하나였다. 초저녁부터 시커먼 묘족 하나가 와서 대웅전 효에 꿇어앉아 있더니 이제는 싸움까지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노인과였다. 처음에는 그 노인이 예불을 드리러 온 신도인 줄 알았다. 대 웅전 앞에 꿇어앉아 미관을 해치는 흉악한 묘족을 쫓아내려는 줄 알고 '아니, 저렇게 훌륭하고 용감한 노인이!'라며 감탄을 했었다. 노인이 손을 떨쳐 산만한 덩치의 묘족을 삼 장 밖으로 던져 버렀을 때까지만 해도 '용감한 데다가 힘까지 센 노인!'이라며 계속 감탄중이었다. 그러나 날려 갔던 묘족이 다치지도 않았는지 일어나 덤벼들 고, 그 묘족을 노인이 개 패듯 패기 시작했을 때에는 조금 심하 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묘족의 일당인 둣한 사내들 이 나타나고, 그 사내 몇몇을 노인이 단번에 죽여 버리자 무애 대사는 경악을 하고 말았다. 원래는 그때 관가에 고변할 일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 은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용광사의 승려들은 하나 같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행 깊은 그 자신조차 마루 밑에 숨어 있는 데야 다른 승려 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애 대사는 모두 이해해야 한다고, 지금 싸우는 저 사람들도 모두 부처님의 자비로 용서해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마 루 밑에 숨어 떨고 있는 것이다. 보리무상강기를 배웠다는 흑응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 이었다. 우우웅! 흑웅의 손에서 금빛 광채가 번뜩이더니 노인을 향해 뻗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노인을 향해 무공을 쓰고 싶지 도 않았고 더구나 보리무상강기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노인의 손에 황 자배와 흥 자배의 흑수당 형제들이 곤 죽이 되어 날려가 버리자 혹웅도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 그 냥 맞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쳤다. 한족의 말을 잘 모르는 혹응으로서도 그것이 비웃음이라는 것 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표정이라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비슷한 것이니 말이다. 노인이 혹웅이 날려보낸 금빛 광채를 향해서 손을 뻗쳤다. 펑! 흑응은 우선 노인의 손에서도 색깔은 다르지만 광채가 뻗어 나온 것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노인이 비웃을 만도 했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노인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붉은 광채가 그의 보리무상강기를 집어삼키고 그를 후려쳐 날려보내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꽝! 둥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붉은 광채 에 맞은 가슴팍이 그보다는 몇 십 배 몇 백 배로 아팠기 때문이 었다. 혹웅은 오 장이나 날아가 용광사의 석탑 하나를 부수며 그 돌 더미에 묻혀 버렸다. 노인, 로부 옹고트는 대웅전 문을 향해 한걸음 내딛다가 멈추 었다. "변장이 서툰 건가, 아니면 대담한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마당이나 쓸고 있다는 것인가?" 그는 마당 구석에 서 있는 중 하나를 보고 말하고 있는 것이 었다. 빗자루를 들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승려. 그 승려가 고개를 들었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무애 대사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 다. 상상도 못했던 얼굴이 보인 것이다. 소림사의 도연이었다. 도연이 들고 있던 빗자루로 가볍게 땅을 쳤다. 가는 싸리가지 로 만들어진 빗자루의 쓰는 부분이 흩어져 떨어지고 그의 손에 는 빗자루의 대만이 남았다. 가벼운 동작 한번으로 빗자루는 그의 주무기인 동곤이 된 것 이다. "사정은 모르지만 손속이 지나치게 맵군요, 시주." 로부 옹고트는 그 말에 응대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도연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는 알겠다는 둣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 니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소림사에 천재적인 중 한 명 이 나타나서 스물이 갓 넘어 그 무공이 이미 사부를 능가했고 나 중에는 몇몇 전대의 장로를 제외하면 소림사 내에서는 당할 자가 없게 되었다고. 그 중이 무공은 뛰어난데 챈동은 좀 괴상하기 그 지없더니 급기야 엉뚱한 일까지 참견하게 되었다고 말이야." 로부 옹고트는 뒷짐을 진 채 도연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 가며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또 이런 말도 들었지. 야심만만한 연왕 주변에 청년 중 하나 가 있는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른다고. 다만 무공이 극히 뛰어나고 지모가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 도라 연왕이 용상을 차지하는 데에 그 중이 없었으면 불가능했 을 거라는 이야기만 돌고 있다고 말이지. 나는 이야기에 나오는 그 두 중이 사실은 하나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데, 스님의 의견은 어떤가?" 로부 옹고트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도연의 안색이 점차 변해 갔다. 처음에는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나중에는 극히 침중 하게……!" 그는 곤을 들어 비스듬히 중단을 겨누며 말했다. "원래는 아니었소만 이제는 노인장이 두려워지는군요. 그런 사실을 알 만한 사람 중에 노인장 같은 사람은 없다는 걸 생각 하면 분명 노인장은 적일 것이오. 그것도 아주 강한." 로부 옹고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뒷짐 진 손을 풀었다. "한 가지 스님께 물어 볼 말이 있네." 도연이 든 동곤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극도의 진기가 그 곤의 끝에 모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르는 게 없어 보이는데 뭘 물어 보시겠다는 거요?" 로부 옹고트의 손이 배 어림에서 모였다. 그 손 사이에 푸른 불 꽃 같은 것이 번뜩이기 시작하는 것을 도연은 주시하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가 말했다. "요즘 환관들과 금의위의 무리들을 모아 뭔가 꾸미고 있다는 데 그게 뭔가? 무슨 조직이라도 만들고 있는가?" "동창(東廠)! 당신 같은 불순 세력을 색출해 내는 조직이오." 도연의 동곤이 순간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지는 듯했다. 다음 순간, 그와 로부 옹고트의 사이에는 붉은 곤 그림자만 가득 차 버렸다. 소리도 없이 로부 옹고트의 전신을 짓쳐 가는 매서운 기세! 바로 소림비전 쇄정곤이었다. "동창? 쓸데없는 짓이지. 곧 망할 나라에서 그런 조직이 왜 필요해?" 꽈앙! 붉은 곤 그림자 속에서 한 줄기 푸른 번개가 치는가 싶더니 붉은 그림자는 사라져 버리고 푸른 번개 한 줄기만 허공을 갈리 도연의 가슴에서 폭발해 버렸다. "커억!" 도연의 몸이 허공에 떴다. 동곤은 이미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바위에 짓이겨진 대나무처럼 산산조각 이 난 모습이었다. 쿵! 도연은 한참 만에야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의 가슴팍 옷 자락이 불에 탄 것처럼 그슬려 있었다.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홀러나오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쇄금수(碎金手)에 맞고도 즉사하지 않다니 과연 소림사 후기 지수 중 최고수답군 어쨌든 들을 말 못 들을 말을 많이 들었으 니 스님이 살면 내가 곤란해지겠네. 죽어 주게" 로부 옹고트의 손이 다시 한번 모이고 있었다. 쇄금수! 바로 황교사대금기지학의 하나였다. 뇌전이 내려꽂히는 듯한 가공할 속도와 파괴력. 거기 걸리는 자는 마치 폭발한 것처럼 흩어져 버린다고 해서 황룡이 만들어 놓고도 익히는 것을 금지시킨 무공이었다. 그 가공할 무공이 오 늘 로부 옹고트의 손에서 발휘된 것이다. 그 무공이 야광충의 혈염수와 비슷한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었 다. 비록 푸른 팡채가 나고 안 나고의 차이는 있지만 위력이나 격중된 후의 처참한 모습은 영락없이 같은 것이다. 황룡은 알면서도 다만 말을 않았을 뿐이었다. 도연이 그 쇄금수에 격중되고도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소림무 공을 경지에 이르도록 익힌 덕분이라고나 해야 했다. 로부 옹고트의 쇄금수가 다시 도연을 향해 뻗어 나가려는 찰 나, 용팡사의 산문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뛰쳐들어왔다. 로부 옹고트는 손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그의 눈에 재미있 다는 라이 흘렀다. 들어온 사람들은 바로 혹수당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그가 아는 두 명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방각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묘한 미소를 띠고 바라볼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늙은 사공의 모습 그대로인 대취옹이 절 안의 처참한 모습들 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노인네의 소행이오?" 이번에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방각이 도끼를 꺼내 들며 말했다. "대가를 지불하셔야겠소!" "후하하하!" 로부 옹고트는 허공을 보며 길게 웃었다. 방각이 묘한 표정으 로 그를 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웃음을 멈추고 그를 보시 말했다. "많이 컸군, 방각! 오랜만에 먹어 본 중원의 음식이 입에 맞 던가?" 방각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누군지 짐작하게 된 것이다. "설마……, 성주?" "왜 아니겠나?" 로부 옹고트의 손이 그를 향해 뻗었다. 방각이 방패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도주해라!" 도주! 방각의 육십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딴던 말이 튀 어나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빠앙! 방패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야광충의 손자국이 나고, 천강시의 손에 맞아 우그러졌지만 아직까지 건재하던 그 방패, 금팔괘순이 로부 옹고트의 단 일 장에 산산조각이 나서 홑어졌다. 방각은 변하지 않던 그 투지 높은 눈으로 로부 옹고트를 노려 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도끼가 마지막으로 찍은 것은 로부 옹고트가 아니 라 용광사의 정원 흙바닥이었다. 방각은 가슴이 반쯤 날아간 몸으로 천천히 쓰러져 누웠다. 그 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의 비명도 신음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사내답게 죽어간 것이다. 로부 옹고트가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투지 하나만은 너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지…… 잘 가 라, 방각!" "이럴…… 수가……!" 대취옹이 말을 잊고 그 광경을 보다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같은 고수는 들은 적이 없소. 이 노필부의 안계를 넓혀 주시겠소?" 로부 옹고트는 다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늘 본좌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하군. 하지만 당신 질 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을 수 없겠네. 당신은 본좌 같은 고수를 들은 적은 없어도 본 적은 있을 걸세. 그게 본좌일세." 그의 손이 천천히 뻗었다.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무형 의 강기가 그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대취옹은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뻗어 온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발은 취팔선의 보법을 밟 고, 손은 취우검의 형식으로 낚싯대를 휘둘렀다. 역시 소용없었다. 쾅! 로부 옹고트의 손에서 뻗은 강기는 시전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대취옹의 몸에 닿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소리를 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취옹은 제자리에서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더니 고스 란히 무너져 내렸다. 마치 가죽픗선에서 바람이 빠져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열려진 구멍으로 피와 물이 홀러나왔다. 외부에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고 내부를 진탕시켜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황교 사대금기자학 중 하나인 천룡혼원기(天龍混元氣)까지 나 타난 것이다. 이통천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그의 입에서 짐승의 비명 소리 같은 고함이 새어 나왔다. 그 러고 싶어서 내놓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동물적인 본능의 가 장 밑바닥에 숨은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통천인가? 명이 길었군!" 문 가까이까지 달려갔던 이통천이 그 자리에 퍽 꼬꾸라졌다. 로부 옹고르가 가볍게 손을 뻗은 결과였다. 조구를 위헙해 얻은 양인장의 일격으로 머리를 관통시킨 것 이다. "운이 좋군! 하나하나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로부 옹고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연을 향해 돌아섰다. 그 때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우우웅! 뭔가 강력한 기세가 나타나더니 그를 향해 번개처럼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소매를 들어 그 기세를 막아 갔다. 콰앙! 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로부 옹고트의 주위로 금가 루가 떠다니는 듯한 광경이 나타났다. 로부 옹고트는 세 걸음이나 물러서서야 소맷자락을 내렸다. 그러 충격을 받았는데도 그의 소맷자락은 찢어지지도, 뚫리지도 않았다. 로부 옹고트는 미소를 지었다. "나타나셨군!" 대웅전의 문이 열려 있고, 거기 황룡이 가부좌를 튼 자세 그 대로 허공에 떠서 로부 옹고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뻗쳐 나오는 금빛은 너무도 강렬해 그의 형체 자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금빛이 다시 한번 로부 옹고트를 향해 쏘아졌다. "보리무상강기를 완전히 연성하지는 못했군! 그럼 내가 이겼 다." 로부 옹고트는 태연히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콰앙! 다시 한번 비산하는 금빛! 이번에는 로부 옹고트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맷자락에서 일어 난 수수흡룡력(袖袖吸龍力), 황교 사쌔금기지학 중 세번째의 것 으로 보리무상강기를 온전히 막아낸 것이다. 황룡의 몸으로부터 수많은 손그림자가 뻗어 나왔다. 천수패엽장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춤추듯 소매를 휘둘렀다. 수많은 손그림자가 거기 걸렸다. 파파파파팡! 손그림자들은 단지 그림자로 그쳤다. 로부 옹고트는 여전히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거기 다시 세 개의 손그림자가 차례로 와서 찍혔다. 밀종야뇩댜랴삼삼보리, 일명 삼첩인! 빠바방! 로부 옹고트는 이번에는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소맷자락에 세 개의 손그림자가 겹쳐서 찍혀 있었다. 특히 마지막 것은 소맷자 락을 태워 구멍을 뚫어 놓았다. 황룡의 눈빛이 번뜩였다. 황교의 무공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 는데 오히려 옛날의 밀종 무학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로부 옹고트도 약간은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가? 한 사람이 만든 것이라 같은 종류의 무공에는 별효 과가 없단 말인가?" 자신의 수수흡룡력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보리무상강기에 대해 한 말이었다. 황교 삼대호교지학과 사대금기지학은 모두 황룡이 만들었다. 그때는 천산파의 석두가 제자로 입문하던 시기로 당시 이미 서장 최고의 고수로 알려진 황룡이 무공, 특히 강기무공에 관심 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중원기공무술의 제일인자가 제자로 들어 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룡은 제자와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서장 밀종 유가기공과 중원의 내가기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황룡은 밀종과 유가기공 에 정통했고, 석두는 불문, 현문(玄門), 심지어 마도와 사교의 그것까지 통달한 사람이니 막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일곱 가지 무학이 바로 보리무상강기, 양인 장, 황룡금강행, 쇄금수, 천룡흔원기, 수수흡룡력, 그리고 천강 마벽(天 魔壁)이었다. 그리고 시험해 본 각 무공의 위력은……! 두 사람은 대련으로 무공을 시험했고, 그 결칵는 석두가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황룡은 그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런 무공을 만든 자 신을 원망했다. 특히 뒤의 네 가지는 밀종과 마도의 기질이 농후해 차마 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위력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앞의 세 가지는 그런대로 불문의 도리어 맞는다고 생각쳐 남겨 두고. 나머지 네 가지를 사대금기지학으로 정해 비결을 깊이 묻어 두 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런데 그것이 유출된 것이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황룡사의 라마 중 하나가 한 짓이었다. 황룡은 그 무공들을 아예 없애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지만 이 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네 마공을 찾아 회 수하려고 중원으로 나와야 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것, 로부 옹고트가 말한 것이었다. 이 일곱 가지 무공이 서로에게는 별위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룡은 단 한 가지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그것, 석두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든 바로 그것이었다. 불문의 무공이면서 이름조차도 마(魔) 자가 들어간 바로 그 무공. 그것은 바로 마교의 살인마벽(殺人魔壁)이라는 무공에서 착상을 얻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부 옹고트가 지금 막 펼치려 하는 그 무공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양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펴는 듯한 우아한 동작. 그러나 그 전신에서는 살기가 뻗치고, 그가 딛고 선 땅에서는 흙먼지가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의 옷이 바람 들어간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땅 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흙먼지를 당겨 올리던 천강마벽의 기세가 이제는 작 은 돌, 그 다음에는 정원을 가로지른 소로에 박아 놓은 청석판 들까지 허공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로부 옹고트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황룡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 그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 무공을 제외한 어떤 공 격도 저 강기의 막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잊으려 애썼지만 끝끝내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는 저주의 무공 천강마 벽이 그것이었다. 계속 연성하지 않아서 저만한 위력은 없겠지만 지금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로부 옹고트가 허공에 들어올린 양팔을 그를 향해 모으고 있 었다. 황룡이 천천히 손을 뻗어 맞받아 쳤다. 그의 손에서 금빛 광 채가 번뜩였다. 그는 끝끝내 천강마벽을 쓰지 않고 보리무상강 기를 사용한 것이다. 우우우웅! 꽈앙--! 대웅전 건물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황 룡의 몸이 그 속에 묻혔다. 천강마벽과 맞부딪친 금광이 헛되이 사라진 후였다. 우우우웅! 로부 옹고트는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 며 손을 들었다. 그의 몸에서 다시 한번 천강마벽이 발휘되었다. 황룡을 덮은 기와와 기둥, 벽돌더미들이 분분히 허공으로 떠 올라 날려 갔다. 천강마벽이 무서운 점은 거기 격중되면 그냥 말려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부서지며 그렇게 된 다는 것이었다. 지금 날려 가는 벽돌들과 기와가 그렇게 부스러졌다. 홅더미에 반쫌 묻힌 황룡이 드러났다. 로부 옹고트는 살기를 번뜩이며 양손을 찍어내렸다. 둥! 황룡의 몸이 홅더미에서 튀어오르더니 다시 떨어졌다. 쇄금수에 그대로 격중당한 것이다. 거기 다시 무형의 강기가 날아갔다. 천룡혼원기! 황룡의 몸에서는 더 이상 금빛이 뿜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검게 죽어 가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로부 옹고트가 소리 치며 손을 뻗었다. 푸른 불똥이 그의 손 에서 튀어오르고 있었다. 수간 그는 끝까지 손을 뻗치지 않고 뒤로 돌렸다. 뒤에서 누 군가가 덮쳐 오는 낌새를 느꼈던 것이다. 흑웅! 뒤에서 로부 옹고트를 덮친 사람은 흑응이었다. 그는 한쪽 어 깨를 내밀어 로부 옹고트의 쇄금수를 맞받았다. 꽝! 튕겨 나가거나 폭발해 버릴 줄 알았던 흑웅은 놀랍게도 제자리 에서 뱅그르르 맴을 돌더니 로부 옹고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로부 옹고트는 그의 몸에서 아련하게 금빛이 빛나는 것을 보 고 소리쳤다. "보리무상강기?" 흑웅도 보리무상강기를 익혔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방 금 그의 옆을 스쳐가 황룡을 안고 달아나는 저 수법이 황룡금강 행 중 일초인 금룡회선(金龍回旋)이라는 것은 더 더욱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는 그였다. 그는 어느새 용팡사의 뒷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려는 혹워의 뒷 등을 향해 양인장을 날렸다. 격중되었다. 흑응은 황룡을 안은 채 담장 너머로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로부 옹고트가 번개처럼 달려갔다. 없었다. 담장 너머에는 아무도 없고, 단지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 었다. 그는 그 됫자국을 따라 달렸다. 핏자국은 산을 향하고 있었 다. 그리고 산속에서는 없어져 버렸다. 그는 또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흑응이 바로 사냥꾼 줄신 이라는 것이었다. 산에서 도주하고 추격하는 것에는 그만한 인 물도 드물 것이다. "후환을 남겼군!" 쓰게 웃던 로부 옹고트가 별안간 무릎을 치더니 뒤돌아 달렸다. 용광사에는 역시 없었다. 도연을 죽여 끝을 깨끗이 맺으려 했 는데 그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조금 귀찮아지겠군!" 단지 귀찮아질 뿐이었다. 황룡은 그가 알기론 빈사 상태, 시 커먼 묘족 녀석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도연은……?' 그의 정체를 모르는 자니 상관없었다. "다음에 보면 죽여 주면 되겠지." 그는 용팡사 경내를 슬쩍 보더니 눈을 빛냈다. 청소해야 할 대상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용광사의 승려들은 아직 도망갈 생 각도 못하고 죽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붉은 살기로 물들었다. 용광사는 그 다음날까지 타올랐다. 제44장 7월 17일 밤과 18일 새벽 장강. 동점산 아래의 가장 큰 시진(市鎭)인 율수부(栗水府)에서 양 주로 가려면 배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르다. 배를 타고 양자강 지류인 연지하를 따라 강을 내려오면 강정 현(江定縣) 방산(方山), 취보산(聚寶山) 아래로 해서 하루면 남 경(南京)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장강의 큰 물줄기를 따라 진강부, 그 다음은 양주 에 도착하는 것이다. 소구자는 대충 그와 비슷한 경로를 거쳐 남경으로 들어왔다. 대충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고 하는 것은 추격을 피하기 위해 다 른 길을 택해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 며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면 될 길을 나흘이나 걸려 왔지만 그것이 불만스 럽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그를 추격하는 자가 누군인지 궁금했다. 주격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추격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면 우 습게 들리겠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주격자는 두 패였다. 적어도 그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패는--패거리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한 명이었 고, 다른 한 패는 적어도 열 명을 넘는 패거리였다. 그리고 효 의 한 명이 억러 명보다도 더 위험했다. 그, 흑은 그녀는 아마도 금관의 복면인일 것이다. 그, 혹은 그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 자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따. 금관의 복면인은 살아 있다면 분명 그를 쫓아올 것이다. 무엇에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렵게 모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옥병 을 그가 횹쳐갔으니 쫓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만 보았으니 거리에 서 마주쳐도 알아볼 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한 명으로 구성된 그 패가 맞다면 놀라운 변장의 고수일 것이다. 어떤 때는 중년의 상인으로, 또 다른 때는 요염한 여인으로, 하루는 시골의 노인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그에게 거의 잡힐 뻔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던 소구자였다. 그는 그렇게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구자 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위험한 자였다. 그에 비하면 나중의 한 패는 위협 거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구자 자신을 목표로 쫓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모르는 금관의 복면인을 쫓기 위해 그가 쫓는 소구자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추격을 이용해서 금관의 복면인에게 잡힐 뻔한 순간을 모면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소구자의 얼굴도 잘 모르 고 있었다. 소구자는 그래서 몇 번의 변신을 하고, 또 몇 번의 위기를 켠 으면서 간신히 남경으로 숨어 들어왔다. 남경은 과연 황도(皇都;황제가 있는 도시. 명나라의 수도는 이때까지 남경이었음.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하는 것은 영락 19년, 서기 1421년의 일이다.)답게 크고, 사람도 많았다. 이런 곳이라면 사람들 틈에 숨어 들키지 않고 살 수 있지 않 을까? 소구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곧 떨쳐 버렸다. 금관의 복면인 때문이었다. 얼굴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그의 추격을 끝까지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소구자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자가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옥 병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자를 적으로 삼으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차 라리 지금 해결을 하는 것이 나앗다. 소구자는 그래서 양주로 가기로 했다. 그것도 뱃길로 가기로 결정했다. 배에서 추격자를 만나면 도망갈 곳도 없을 것이니 불리한 듯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뱃길을 택한 것이다. 금관의 복면 인을 알아내기에는 좁고, 한정된 사람만을 볼 수 있는 곳이 유 리하기 때문이었다. 남경의 포구에는 배가 많았고, 그 하나쫌 타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배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거기서 타지 않았다. 우선은 쫓겨 다니느라 돈을 벌지 못해 뱃삯이 없었고, 다음으 로는 황도답게 검문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호패도 없고, 로인도 없는 그가 배를 타겠다고 했다간 당장에 금부(禁府)로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소구자는 남경에서 약간 하류로 내려온 곳에 있는 작 은 만(灣)을 택해 밤중에 몰래 갔다.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만에는 어디든 배가 정박되어 있기 마 련이었고, 그런 배에는 감시도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배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실수한 것은 배가 있어도 탈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는 것이었다. 고깃배가 거의 다였는데 하나같이 갯벌에 올려져 있고, 노를 뽑아 들고 가 버려 저을 방법이 없었다. '일단 띄워나 볼까?'라 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불가눙해 보였다. 가장 작은 배도 소구자 혼자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조차 없을 만큼 무거워 보였던 것이다. '에이, 그래도!'라고 생각한 소구자가 배 하나를 밀었는데 묘 하게도 쉽게 움직였다. '바닥이 미끄러운가?' 소구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우선 강으로 나갈 수 있으면 그 다음은 물결의 흐름에 맡겨도 좋은 것이다. 소구자는 뱃전에 납작 붙어 한쪽 팔을 내밀었다. 손으로 물을 저어 볼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별로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배는 물결에 그냥 떠내려갈 뿐, 소구자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 지 않고 있었다. '에이, 관두자!' 소구자는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배는 물결을 따라 흔들리고, 어두운 하늘에는 별들만 반짝이 고 있었다. 그리고 달이 있었다. 밝은 달. 보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아직 둥글고, 밝았다. 소구자는 문득 그 달 속에 사부 할아범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눈을 비볐다. 물론 착각이었다.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 기억도 못하는 거지아이였던 소구자가 그를 만난 것은 열 살 가량 되었을 때였다. 잘 먹지 못해 지금도 왜소한 그가 그때는 더욱 그랬다. 그런 그 를 보고 측은히 여겨 같이 살자고 한 사람이 사부 할아범이었다. '자기도 다리가 없는 주제에……!' 사부 할아범이 그를 단지 가여워서 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귀영문이 어떻고, 자기는 제자에게 배신당했느니 어쩌니 이해 할 수 없는 소리를 자꾸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정신 나간 늙은이가 헛소리 하는 걸로 들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 자꾸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은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냥 거지로 자유롭게 살면 그만인 것을 뭘 자꾸 배운단 말 인가? 그래도 어렸을 때는 멋도 모르고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는 시 늉이라도 했었다. 하지만 열다섯이 되어서는……! 혼자 살아도 될 것 같자, 그는 미련없이 사부 할아범에게서 도망쳐 혼자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구자는 문득 일어나 남경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 부 할아범과 마지막으로 같이 살던 곳이 남경이었다.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때, 소구자는 물 소리를 들었다. 그는 생쥐 같은 얼굴을 바 짝 긴장시키고 귀를 세워 그 소리에 집중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배를 향 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그 금관의 복면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그 를 지배했다. 소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것은 없었고,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 다. 무공을 익힌 자를 어쩨게 당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배 위에서 마주치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애초 의 자신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대항할 방법도 없이 그렇게 되기 를 바란 것은 무리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피해야 했다. 소구자는 눈을 반짝이며 뱃전에 기대었다. 그의 몸무게에 배 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소리없이 해야 했다. 소구자는 한쪽 다리를 들어 뱃전 밖으로 내놓고, 그쪽으로 천 천히 중심을 이동했다. 배가 뒤집힐 듯 기울었지만 이 정도로 뒤집히지는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발이 물에 반쯤 들어가자 그는 상반신도 배 밖으로 내밀었다. 소구자는 소리없이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배가 중심을 찾을 때까지 뱃전을 잡고 있어야 했다. 그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면 일은 어 려워진다 잠시 후 소구자는 배를 떠나 강 중심으로 유영(遊泳)해 가고 있었다 헤엄을 치는 것, 특히 소리없이 그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끈기와 용기가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소구자는 물의 도시 강남 지방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헤엄에 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구자는 강 중심으로 거의 와 있었다 아무리 헤엄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장강은 너무 넓었다. 그는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강변으로 헤엄을 쳐 가야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지나가는 배라도……!' 하지만 이 밤중에 장강 한가운데에서 배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창백한 하루 !25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배가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도 말이다. 소구자는 운이 좋았다. 배가 지나갔던 것이다. 유선형으로 쭉 빠진 배의 형체와 물을 가르는 소리로 보아 쾌속선이었다. 숨어 있기에는 장사꾼들이 타는 화물선이나 여객선이 좋았다. 밥을 훔쳐 먹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쾌속선은 그런 배는 아닐 것이다. 그게 조금 아쉬 웠지만 급한데 찬밥 더운밥을 가릴 수는 없었다. 소구자는 뱃전에 붙었다가 조용히 기어올라갔다. 소구자가 배에 올라간 얼마 후, 또 하나의 그림자가 배에 붙 었다. 소구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소구자가 물에 들 어갈 때부터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그가 소구자를 물에서 낚아채지 딴은 이유는 단 하나, 사정 천인혈 때문이었다. 혹시 실수라도 해서 물에 빠뜨려 버리면, 아니면 두껑이 열려 물에 섞여 버리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잃어버리기 에는 섭 년의 세월이란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구자가 무사히 배에 올라가기를 오히려 가슴을 졸여 가면서 바라며 뒤를 따라왔던 것이다. 이제는 됐다. 배 안에서 찾기만 하면 그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었다. 그는 소리없이 배에 기어올라 선창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후, 선원의 복장을 한 사람 하나가 뱃전에 다시 나타났 다. 그는 시체 한 구를 끌고 있었다. 그가 입은 옷의 원주인이었던 시체는 그의 손에 의해 강물로 던져졌다. * * * 강서성(江西省), 건창부(建昌府). "그래서?" 가괴자는 수염을 꼬며 물었다. 허탁이 불안한 빛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연신 가괴자 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심기가 거슬릴지도 모를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양주로 가 봐야 흑수당은 이미 없다는 것이지요." 가괴자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굳이 귀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가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쏨입니다." "그러니까…?." 가괴자가 천천히 말했다. "양주의 혹수당은 누군가에게 이미 크게 당해서 반쫌 괴멸된 상태다. 무지권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이지?" "예." "그러니 본좌가 가서 손을 봐줄 필요가 없다, 이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무지권자의 힘만으로도 나머지 잔당들은 처 리가 될 것인데, 굳이 방주님의 힘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허탁!" "옛?" "너 흑수당의 첩자냐?" 허탁은 어쩐지 가괴자의 말이 부드럽게 나올 때부터 불안하던 참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정벌군을 끌고 나왔는데 적이 지레 괴멸 되다니, 그런 시시한 놈들을 두고 주목해야 한다고 했단 말이냐, 어쩌고 하며 그에게 화풀이를 해야 정상인 가괴자인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부드럽더라니 설마 이렇게 억울한 누명 을 씌울 줄이야 몰랐다. 허탁은 펄쩍 뛰며 가괴자의 말을 부정했다. "소관 방주님의 아래에 들어와 크신 은혜를 입은 지 어언 이 십 년입니다. 그 동안 능력도 없는데 총사의 귀한 자리를 주시 고, 호의호식시켜 주신 은혜를 잊으면 제가 금수의 새끼지 어찌 사람의 자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괴자같이 변덕이 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의 아래에서 버티 려면 이런 꼴은 드물지 않게 당하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허탁 에게는 변명을 하는 몇 가지 요령이 있었다. 우선 지금처럼 받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대개 누명을 쓴 경우는 자신이 그 동안 바친 충성을 들먹이는 데 그랬다간 하잘것없는 몇 가지 공으로 주군을 위협합네 어쩌 네 하며 분노를 사기 십상인 것이다. 과연 그 요령이 통했는지 가괴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래, 네가 은혜를 알긴 아는 놈이구나!'라 는 빛이었다. 허탁은 아니꼽고 더러운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다음 단계외 변명을 했다.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 있는가? 우선은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소관이 그런 큰 복락을 누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흑수당이라 는 보잘것없는 문파의 첩자질을 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 까? 재물이오? 지금도 넘칩니다. 명예입니까? 배신자가 무슨 명 예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첫번째 단계에서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나면 두번째 단 계에서는 이익과 명예 따위를 들먹여서 현실적으로 얻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효과가 있다 상대가 의심할 요소를 미리 꺼내 놓고 그건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 다. 그게 성공하면 문제는 거의 해결된 상태. 의심할 거리가 없으면 달리 어떻게 할 것인가? "소관 가슴을 갈라 속을 보여 줄 수도 없고, 억울하기 그지없 습니다. 옳은 판단 내려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요령은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다느니 어쩌 니 하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그러려 무나, 그러면 큰일 아닌가! 변명이 먹혀 들었다. 가괴자가 손을 저으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그냥 해본 소리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구나, 하긴 네게 적과 내통할 배짱이나 있으랴?" 허탁의 숙인 얼굴이 일그러졌다. 달랜다고 하는 말이 저 모양 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직 혹수당의 당주가 어찌 되었는지는 보고가 없지 않으냐. 그를 처단하지 못하고서야 흑 수당을 괴멸시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진운 그놈!" 가괴자가 눈에 불을 켰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도 저랬다. 진운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훙분하는 가괴자였다. "그놈을 잡아 간을 집어내지 못하면 아직 어떤 일도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놈에 관한 소식은 있느냐?" "아직 없습니다. 불타 버린 용광사에서 나온 시체 중에도 없 었고, 그날 이후로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놈을 찾는 데에 전력을 집중하도록!" "예!" 허탁이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 쳤다. "장강 이야기는?" 허탁은 멈춰 섰다. '올 것이 왔구나!'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전날에 나보고 장강수로십팔타가 흑수당의 방수가 되었니 어 쩌니 하지 않았느냐?" 허탁은 급히 말했다. 그날의 기억을 확실하게 해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런 소문이 확실히 있었고, 얼마 전 무창 인근에서 장강수 로십팔타의 배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습 니다만 아직 확실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확실한 소 식이 들어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데 다행히 가괴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허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나서자 허탁의 안색이 돌변했다. 경멸의 빛이 가득 깔 린 것이다. 총단을 나선 것이 벌써 나흘째인데 그들은 아직도 이백 리를 못 왔다. 평탄한 길만 골라서 가고, 지부가 있는 곳은 꼬박꼬박 들러서 진탕 퍼마신 뒤에야 길을 떠나니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이래서 야 흑수당을 치러 가,는 것인지, 유람을 나선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 린 것이다. 다음 목적지가 항주(抗州)이니 거기서 또 며칠 놀다 가자고 하면 대책이 없다. 되어 가는 대로 놔두는 수밖에……! "그래도 한때는 정말 호랑이라고 불렸는데……." 허탁은 혀를 찼다. 이러고도 통천방이 강호 제일세력의 자리 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 * 장강. 선실은 어두웠다. 코효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선실 이고, 밤이라지만 이렇게 어두울 줄은 몰랐다. 소구자는 벽을 짚고 더듬거리며 걸었다. '어딘가에 불이 있을 텐데……?' 설사 창고로 쓰는 곳이라 해도 횃불 꽂는 곳이라도 있을 것 아닌가! 탁--! 소구자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언가 각이 진 물체 에 무릎을 부딪친 것이다. 그는 숨을 죽이고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이 아파 서 눈물이 홀러나올 것 같았지만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소구자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방안은 고요해서 그 자신의 낮은 숨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 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보군!' 그렇다면 조금은 더 자유스럽게 행동해도 좋을 것이다. 소구자는 품속을 뒤져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기름종이로 만들어진 데다가 이중으로 입구를 싸매어 철저히 방수가 되는 주머니. 그는 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옥병은 그대로 있고……, 여기 어디……!' 화봉(火棒)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소구자는 기름을 먹인 가는 막대, 화봉을 꺼내 들었다. 오랫 동안 기름에 담가 두었다가 말린 것이라 불이 승게 붙고, 또 크 기에 비해 오래 타는 것이다. 탁!탁! 부싯돌이 부딪고, 작은 불똥이 튀었다. 화봉의 끝에 불길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불빛에 비친 모습……! "으헉!" 소구자는 비명을 지르며 화봉을 떨어뜨리고 뒤로 주저앉았다. 불빛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오들오들 떨면서 방금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화봉의 푸른 불꽃 속에 떠오른…… 창백한 얼굴, 횐 머리카 락. 허공에 목만 떠다니는 듯한 모습……. 그런 것이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득 소구자는 그것이 어디서 본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 었다. 양주의 시장 거리에서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백발귀……?' 소구자는 귀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어 눈을 떴다. 화븟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억전히 작은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불빛에 이번에는 바닥이 비추어졌다. 나무 바닥을 밟고 선 검은 가죽장화. 역시 그날 본 그 백발귀 였다. 저렇게 비싸 보이는 신발을 잊을 수가 있으랴. 소구자는 사람 의 얼굴보다는 복장을 더 잘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서 뭐해요?" 소구자의 목소리는 아직은 떨려 나왔지만 급속히 정상을 찾아 가고 있었다. 장화의 주인이 되물었다. "그게 내가 네게 묻고 싶은 말이다." 장화의 주인이 입은 검은 유삼 아랫자락이 불빛 속으로 들어 왔다. 어둠에 눈이 익어 가면서 작은 불라으로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리라. 소구자는 우선은 상대를 떠보기로 결정했다. "난 이 배의 손님이니 어디든 가도 되지만……." "손님이라……."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다. 소구자는 그 목소리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이 잘못 말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 다. 거짓말이야 노상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고, 들키든 안 들키 든, 통하든 안 통하든 별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였는 데 오늘은 어째 찝찝한 것이다. 백발귀는 다시 물었다. "이 배의 손님이란 말이냐? 나는 몰랐는데?" "오늘밤에 갑자기 타서 모를 수도 있었겠죠. 선주(船主)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탔거든요. 어쨌든 당신 방인 것 같으니까 난 그만 갈게요." 소구자는 이 방에서 빨리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화봉의 불은 바닥에 옮겨 붙고 있었다. 검은 가죽 장화가 그 것을 밟아 껐다. 방안은 다시 어둠으로 감싸졌다. "넌 이 배가 어떤 배인지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내가 누군지 도." 소구자는 자신이 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백발귀는 정체사 뭔지 몰라도 이 배와 상당히 깊은 관계에 있는 인물, 예컨대 선주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소구자는 천천히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주었다. 어둠 속이니 그의 행동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세와 위치를 이동시 켜 놓으면 만약의 경우에 유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오랜 경험 에서 나온 생활의 지혜였다. 그러면서 그는 입으로는 계속 떠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주의 를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서 뭐해요. 당신이 선주라도 되나 요? 좋아요. 사실을 말해야겠군요. 사실은 여기 선원 하나에게 돈을 주고 몰래 탄 거예요. 배를 급히 탈 필요가 있었거든요. 당신이 선주라면 그런 정도는 눈감아줘야 할 거예요. 선원들은 대개 가난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노부모와 처 자를 어떻게 먹여 살리!어요? 배는 크고, 나야 이렇게 생쥐처 럼 작으니 나 하나 더 탔다고 배가 기울진 않겠죠? 당신 같은 대선주가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면 엄하다는 소리보다는 째 째하다는 말만 들을 거예요." "나는 선주가 아니다." "선주도 아닌 주제에 그런 걸 묻고 그랬어요? 그럼 당신이 상 관할 일도 아니었잖아요. 입만 아팠네. 난 그만 나갈 거예요." "그 사람은 네가 발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만 일어나라." 소구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지금 그는 선실 바닥에 엎드려 천천히 옆으로 기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설마 날 봤단 말이야? 이 어둠 속에서? 어쩌면 내 목소리가 나는 곳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라. 더럽게 귀가 밝군!' 소구자는 이제 아무런 말도 않고 조금씩 기었다. 그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의 위치를 모를 터였다. 문득 그는 백발귀가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렇다면 그와 백발귀말고도 이 방안에는 다른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일까? 그때 소구자는 그를 만졌다. 뼈에 살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은 앙상한 다리였다. 거칠한 털이 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자. 소구자는 지금 어떤 사내의 맨다리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백발귀가 말했다. "불을 켜라!" 선실의 사방에서 불이 밝혀졌다. 소구자는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을 가리고 있 다가 잠시 후에 눈을 떴다. 눈앞에 앙상한 남자의 다리가 보였 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앙상한 다리였다. 조금 더 위로 올려다보자 거기 외팔이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구자는 그의 묘한 생김새에 놀라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경악 해 버렸다. '이렇게 많이!' 소리로 보아서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방안에는 여섯 명이나 있었다. 백발귀! 외팔이 사내, 노인과 준수한 청년, 키다리 여인, 맹 인까지 낀 다채로운 일행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단 하나 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제대로 얘기해 보자." 백발귀, 사실은 야광충이 말을 꺼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죠?" "네 이야기!" "내가 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야 하죠?" " 나는 이 배의 주인은 아니지만 양주에 도착할 때까지는 최고 책임자라고도 할 수 있지. 네 이야기를 뱃삯 대신 받는 것이라 고 하면 되나?" 준수한 청년, 혈문룡이 말을 거들었다. "싫다면 배에서 내리면 되지. 지금 당장."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렇게 되면 소구자로서는 큰일이다. 소구자는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며 잠 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죠 뭐. 별것도 없는데." '아무 이야기나 꾸미면 제놈들이 어떻게 알 것이냐!' "그 전에 말해 둘 것이 있다." 소구자는 야광충을 보고 물었다. "뭐죠?" 야광충이 천천히 말했다. "넌 나를 두번째 만나지만 그때마다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난 거짓말을 극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특히 거짓말인지 들통이 나게 하는 거짓말은 싫다. 네가 전혀 발각되지 않게 거짓말을 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방안에는 떠돌이 거지 소매치기 아이 하나쯤은 씹어 먹어 버 릴 수 있는 사람도 있어." 야광충의 말속에 담긴 위협감은 묘하게도 극히 사실적이었다. 소구자는 조금 위축되어 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나다." 읏음기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야광충의 눈을 보며 소구자는 조금 더 위축되어 버렸다.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는……!" 그는 그리고는 한동안 말을 못했다. 방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이 홀렀다. 소구자는 언변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다들 배고픈 줄도, 밤이 새는 줄도 오르고 듣게 할 수 있는 언변이 그의 것이었다. 슬픈 이야 기를 하면 철석간담(鐵石肝膽)의 냉혈한도 눈물을 짓고 말게 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안의 분위기는 그에게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만을 이 야기하도록 강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이라는 것이 힘들었다. '차라리 꾸며서 해버려……?' 소구자는 야광충을 보았다. 그리고 목을 움츠렸다. 그 유리구 슬 같은 눈이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위험한 자다.' 그도 사람 볼 줄은 안다. 아니, 극히 잘 본다고 해야 할 것이 다. 그의 경험과 지혜로 미루어 볼 때, 야광충에게는 거짓말로 상대하면 위험한 자였다. 소구자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진실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한참 만에야 소구자는 더듬더듬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일단 시작하자 뒤에는 쉬웠고, 별로 할 이 야기도 없었다. 오늘 여기 이 배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데 얼 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근 한 시진이나 지나 있었다. 야광충은 소구자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소구 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이 소년과 얽혀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손을 내밀었다. "옥병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소구자는 순순히 꺼내 주었다. 투명한 옥병에 든 붉은 액체! 소구자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그의 몸을 정상으로 돌려줄 수 있는 사정 천인혈일 것이다. 야광충은 옥병을 보며 입맛이 써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옥병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고란고성에서 가져온 그것 이 바로 이것과 같은 것 아닌가! 그때 그는 손 안에 쥐었던 기회를 기회인지 알지도 못한 채 놓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옥병을 소구자에게 던져 주었다. "내용물은 어텅게 했느냐?" 그렇게 쉽사리 돌려줄 줄은 몰랐던 소구자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무슨 내용물이요?" 야광충이 짧게 물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진짜 액체!" "마셔 버렸어요." 소구자는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가 없었다. 천사교에서 도망 친 그날 바로 호기심에 마셔 버렸던 것이다. 그 후에는 혹시 필 요할지도 몰라 짐승의 피를 넣어 둔 것인데, 야광충의 눈에 걸 린 것이다. 야광충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잡시 스쳤다. '이것으로 두번째 기회도 사라졌군!' 그는 그 실망감을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마시고 난 후에 몸이 달라졌다거나 하지는 않더냐!" "아무것도요." 야광충은 다시 생각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본인이 모를 뿐이 다. 좀더 관찰해 봐야 알겠지.'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널 주격한 사람이 변장을 그렇게 잘 한다고?" "예!" "그런데 넌 그쯤 어떻게 동일인인 줄 아느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을 텐데?" "그냥요." "그냥?" "그냥 그 사람일 것이라는 기분이 들어서 도망쳤어요." "확신도 없이? 결국 그가 정말 그인지 증거는 없단 말이지?"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증거는 없지만 그가 바로 그 사람이 에요." 야광충은 소구자의 눈을 주시했다. 눈자위 구석에 푸른 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른 이유에서? 아니면 사정을 마신 영향? 역시 좀더 관찰할 필요가 있군!' 그는 소구자를 곁에 둬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거기에는 다 른 이유도 있었다. "사부 할아범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느냐?" "야…… 뭐라고 했는데……? 들은 적이 하도 오래되어서……." 야광충의 눈에 조금씩 열기가 돌고 있었다. 뭔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야유신 예충?" 소구자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예, 맞아요! 야유신 예충! 야유신……." 그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들어 본 이름이긴 한데 사부 할아범의 이름은 그 게 아니었어요." 야광충의 눈에 깊은 실망감이 스쳤다. 사정 천인혈을 소구자가 먹어 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깊고 진한 실망감이었다. "야영귀(夜影鬼) 소숙(簫肅)! 맞아요, 야영귀 소숙이랬어요! 야유신 예충은 배신한 제자의 이름이었어요. 몽고놈이라고……!" 방안에 낮은 경탄성이 퍼졌다. 야광충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몽고에서부터 시작된 긴 의혹의 실마리는 이렇게 엉뚱한 곳에 서 엉뚱한 방법으로 잡힌 것이다. 야영귀 소숙은 야유신 예충의 사부, 광충에게는 사조뻘이 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제자인 예충에게 배신을 당해 다리가 잘려진 채 버려졌다. 예충은 무공이 있는데도 그에게 접근해 제자가 되었다. 무엇 을 노린 것인지는 자명했다. 귀영문의 장보고가 텅 비어 버린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그럼 그는 왜 야광충을 키웠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예충은 그 자신이 불사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혈부용처럼 불완전한 괴물이 아니라 불사옥령체라는 이름의 완벽한 괴물이 되려고……! 야광충은 불쑥 물었다. "그가 사는 곳은?" 소구자는 언뜻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예?" 월몽영이 보충해서 설명해 주었다. "야영귀 소숙이 사는 곳, 마지막에 네가 헤어졌던 그곳!" 소구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남경성 외곽에 작은 산이 있고, 거기 관제묘가 있는데……!" 야광충은 선실에서 사라졌다. 직접 만나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나간 야광충은 새벽에 돌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어깨 가 늘어진 것은 단시간에 먼 곳을 갔다왔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소구자는 선실에 그대로 있었다. 야광충은 들어오자마자 그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돛대에 매달아!" 소구자가 깜짝 놀라 쳐다봤지만 한번 내린 명령은 그대로 어 김없이 행해졌다. 소구자는 혈문룡이 싱글싱글 웃어 가며 허리 에 밧줄을 묶고 돛대의 가로목에 매다는 동안, 그리고 그렇게 매달려서 배의 움직임에 따라 그네처럼 왔다갔다 하는 동안 내 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매달린 채로 구역질 을 해대기 시작해서 잠시 후에는 완전히 탈진해 축 늘어져 버렸 다. 돛대에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뱃멀미가 몇 십 배로 심해지 는 것이다. 새벽 동이 터 오기 직전에야 야광충이 그 아래 나타났다. 소구자는 욕설을 꾀부었지만 입술은 갈라터지고, 목구멍이 메 슥메슥해서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갔을 때, 네 사부는 죽어 있었다. 쥐가 그 시체를 파먹 고 있더군! 죽은 지 한 달은 지났는지 파먹을 것도 별로 없어 보였지." 야광충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소구자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는 네 사부 할아범이 배신자라 욕하는 야유신 예충의 제자 로 현재의 귀영문 장령이다." 야광층의 말은 소구자로서는 놀랄 이야기였다. "흑도에 배신이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뭐라고 할 것도 못되지만 적어도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네게 귀영문의 장령 자리를 돌려주겠다." 야광충은 불그스름하게 밝아 오는 동편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햇살이 싫어서인지, 아니면 지금 그의 기분이 최악이 라서 그런지는 본인말고는 몰랐다.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오르지만 나는 장령의 신분으로 내 사 부인 야유신 예충을 파문한다. 그 제자인 나도 자연히 파문이 다. 귀영문의 역사는 십이대 장령인 야영귀 소숙의 제자인 너로 부터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소구자는 그런 자리는 줘도 안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야광충 의 신색이 너무 비장해 보여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내려 주기나 했으면……!' 야광충이 돌아서더니 소구자의 얼굴을 쥐고 정면으로 바라보 았다. 소구자는 그 손아귀의 힘에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야광충 의 눈라이 더욱 아프다고 생각했다. "귀영문에 있어서의 나와 사부의 존재는 부정되었지만 그래 도 내 책임마저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교육시키기로 했다. 귀영문의 장령으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질 때까지," 소구자는 잔 불만 서린 눈초리로 야광충을 쏘아보았다. '누구 맘대로?' 짜작! 야광충이 갑자기 그의 뺨을 왕복으로 두 대 때렸다. 소구자의 뺨은 금세 퉁퉁 부어 올랐다. 이빨이 하나 흔들거리 더니 빠져 버렸다. 야광충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때린 것이다. "이건 네가 내 앞에서 보낸 두 번의 실패에 대한 교훈이다. 훔치는 데 실패하고, 거짓말하는 걱 실패한 것에 대한……! 다 자랐으니 이빨이 다시 나지는 않겠지? 빠진 자국을 보며 횡생토 록 반성해라. 다시는 실패하지 말자고. 이것이 오늘의 교육이 다. 나머지는 내일 계속하겠다." 야광충은 돌아서면서 뱃전에 선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배에 있는 동안은 자네가 지켜 줘야겠어." "그러지." 화영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킨다지만 사실은 보 호하라는 뜻인 줄 아는 것이다. 돛대에 매달려 있으니 조금 괴롭긴 하겠지만 소구자는 오늘 더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 * * 양주부, 공당. 금의위에는 얼마 전부터 특수한 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바 로 조정에 위협이 될 듯한 불순 세력을 감시하고, 그래서 그들 의 준동을 방지하는 비밀감찰조직이었다.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동사집창(東事輯廠)이 정식 으로 출범하고, 동창(東廠)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영락 18년, 서기로는 1420년의 일이다.--소림의 승려이면서 영락제의 군사 (軍師) 역할을 하고 있던 도연의 주도하에 활동은 이미 시작되 었다. 그 첫번째 무대가 양주였다. 강남에는 지금 묘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암중에 관측되었 다. 그리고 그 진원지는 양주였다. 묘한 움직임. 조정이 주목하고 나설 정도의 묘한 움직임이라면 역모의 조짐 밖에 없다. 목하 양주의 어느 구석에선가 역모가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의 성립 초기부터 그런 움직임은 우려되고 있던 참이 었다. 앞에서도 말했둣이 주원장의 공신 진단은 두 패, 강북의 무장 과 강남의 지주들이다. 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무장들이 더 필요 했지만 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문신들의 힘이 강해지고, 그 주된 배출구였던 강남 지주들의 입김이 거세졌다. 그 자신 강북 사람이었던 주원장은 위협감을 느끼고 강남 세 력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강북 사람들을 과거를 거치지도 않 고 대거 등용하고, 나중에는 강남 출신은 중요직책에 앉지도 못 하게 했다. 자연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 불만 세력이 결집되고 있는 것이다. 강남의 부(富)라는 것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 아니었다 재물은 쌓아 놓기만 하면 그냥 냄새나는 금속덩어리지만 풀리 기 시작하면 막강한 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왔다. 도연과 팔무시(八武侍), 여덟 명의 내시(內侍)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양주 곳곳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제 강한 냄새 가 풍기는 곳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재물과 역모의 냄새말고도 또 하나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바로 몽고족의 냄새였다. 모충국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항아리처럼 생긴 청색 옷의 사내가 서서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 소위 팔무시의 하나였다. 이야기가 끝나고, 모충국은 물었다. "도연스님은 무사하십니까?" "모종의 장소에서 치료하고 계시오." "그날 당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소."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온 거요. 모주관이 여기 양주지부를 맡아 주어야 하오." * * * 양주부 북쪽, 촉강(燭崗). 촉강(燭崗)은 양주부에서 북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다. 초를 세워 놓은 것 같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둣 이 강남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험준한 산세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산곡의 한 지점, 바위 그늘 아래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동굴이 있었다. 흑응과 황룡은 그 동굴 안이 아니라 동굴에서 약간 옆 바위 틈을 안쪽으로 조금 파고들어가 숨어 있었다. 산을 수색하면 동굴이나 계곡이 가장 집중적으로 찾는 곳임을 혹웅은 알고 있는 것이다. 벌써 몇 번 사냥을 가장한 자들이 산 을 훌고 지나간 것을 흑웅은 알고 있었다. 하나 다른 곳에는 숨을 곳이 없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동굴 옆에 숨으면 동굴에만 주목하지 바로 옆에 있는 바위 틈 에는 그리 주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약간의 위장이 가해진 후의 일이었다. 흑웅은 밤에 몰래 나가 뜯어온 약초를 으깨어 어깨에 난 구멍 에 대었다. 그때 그 뿔난 호랑이의 피를 마신 이후로 이렇게 다 친 적은 처음이었다. 활에 맞지도 않았는데 살갗에 구멍이 나다니 말이다. 다행히 몸이 튼튼하고, 황룡이 가르쳐 준 보리무상강기 덕분에 구멍은 점점 작아져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므라 들었다. 그는 자기보다는 황룡이 더욱 걱정이 되었다. 황룡은 그날 이후 계속 같은 모양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발산되던 황금빛은 이제 보이지도 않고, 흙으 로 빚은 부처처럼, 혹은 썩은 나무 등걸처럼 거무튀튀하게 변해 앉아 있는 것기다. 묘하게도 황룡은 그날 구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부좌는 풀지 않고 있었다. 억지로 꾀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량다가는 더 악화될 것 같아 그냥 놔두고 있는 흑웅이었다. 그는 옆에 어깨가 닿도록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는 황룡의 가 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을 그렇게 귀기울이고 있으면 소리가 났다. 미약 하지만 분명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황룡의 심장은 거의 일 각에 한 번 정도의 빈도수로 뛰고 있 었다. 죽어 가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흑응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처음 구한 날부터 지금까지 황룡은 내내 그 상태였다. 나아지 는 라도 없었지만 분명 악화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흑웅은 황룡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천천히 밖 으로 나갔다.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제45장 7월 22일 낭산(朗山), 몽고우위(蒙古右衛). 새벽. 섬서성(陝西省) 영하(寧夏)의 서북쪽을 감싸고 달리는 낭산 (朗山)의 한 기슭에 고개를 드러낸 웅장한 성벽 위로 태양이 떠 오르고 있었다. 뒤로는 칼날 갈은 능선과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것 같 은 험준한 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한 줄기 긴 협로 가 눈아래 펼쳐져 있다. 그 협로가 끝나는 곳에서 광활한 몽고 의 대초원이 시작되는 것을 굽어보는 지점, 이른바 일인(一人) 으로 만인(萬人)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은 국경의 관 문이었다. 바로 이곳 섬서성에 자리잡은 여섯 개의 군영(軍營) 중 하나 로 명나라 몽고 경계의 최선봉인 몽고우위(蒙古右衛)의 雄자(雄 姿)였다. 새벽이 밝아 오는 중원의 북쪽 끝, 낭산 기슭 외로운 군영(軍 營)을 내려다보며 백리극은 서 있었다. 태양이 중천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질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 지 않았다. 군영의 새벽은 소란스러웠다. 긴 밤을 지새웠던 경계병이 교대되고, 여기저기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각부대별로 인원과 건강을 점검하는 등, 분 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몽고우위는 평소의 몇 십 배는 북적거리고 있었 다. 군영에 주둔하는 병력이 평소의 몇 십 배로 늘어 있었기 때 문이었다. 작년에 벤야시리가 타타르를 통일한 후, 최근까지 국경의 사 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몽고군의 동향은 명나라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였 다. 그런 차에 한 사람의 지배 아래로 몽고군이 모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명의 조정은 사자를 보내었다. 지금까지처럼 허용된 범 위 안에서 조공무역을 유지하면 벤야시리를 인정해 주겠다는 뜻 을 전한 것이다. 벤야시리의 대답은 사자 일행의 목으로 돌아왔다. 몇 십 년 만에 이룬 타타르 통일의 위업으로 인해 벤야시리의 간은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가 정벌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혹은 정벌한 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사 실은 명나라가 가만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먼저 침공할 뜻 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른 때의, 다른 황제였다면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상 몽고 지역으로 정벌군을 보낸 것은 한무제(漢武 帝)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의 전성기였고, 황제는 야심만만한 영락제였 다. 게다가 영락제는 궁궐에서 태어나 보호 속에서 자갈 연약한 왕족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인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까지 싸움터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 자신 황제가 되기 전에는 몽고쪽의 변경 방위를 맡 고 있었던 군사 지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반응은 성급해 보일 정도로 신속하고, 과감한 것이었다. 사자의 최후를 전해 듣자마자 후군도독 구복을 대장군(大將軍) 으로 삼아 십만병력(十萬兵力)을 지휘해 타타르를 정벌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조카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그로서는 백성들에게 위엄을 떨쳐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는 이것이었다. 영락제는 주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최단시간 내에 타타르로 줄병해서 벤야시리의 목을 들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후군도독부 관할하의 송번위, 부군위, 강음위(江陰衛), 몽고좌우위(蒙古左右衛), 부군후위(府軍後衛), 응양위(鷹揚衛), 흥무위(興武衛), 횡해위(橫海衛)에서 차출된 정예병 십만이 지금 몽고우위와 그 주변에 북적거리고 있는 것 이었다. 새벽, 새날을 시작하는 준비로 소란스러운 몽고우위의 바깥 픗경과는 반대로 지금 내성(內城) 깊은 곳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복도 과거에는 전장을 질타하며 천군을 호령하던 호탕스럽 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요즈음이야말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야 했다. 평생의 꿈이었던 대장군이 되어 휘하에 십만 군을 이끌고 호 호탕탕(浩浩蕩蕩) 원정길을 떠날 신분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그의 동공은 공포로 인해 확대되어 있었고, 벌거 벗은 몸은 사시나무 떨 둣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자객을 보내었으니 직 접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살아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가 들고 온 것이……! 확대된 동공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잘려진 목에서 흘렸을 피도 이제는 시커멓게 굳어 버린 채 지저분하게 달고 있는 두 개의 머리가 지금 구복의 앞에 뒹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신 사람, 백리극이 애첩과 자고 있는 그를 침상 에서 끌어내어 보억 준 물건이었다. 백리극이 나직하게 묻고 있었다. "누군 줄 알겠지?" 그의 음성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다. 경 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심지어 직급상으로도 위였던 구복을 위축시킬 정도의 힘이……. 지금도 그랬다. 구복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후군참모(後軍參謀)와 연락관(連絡官)……!" 백리극이 들고 온 두 개의 목은 구복의 심복이라고 할 후군도 독부의 후군참모와 연락관의 것이었다. "왜 죽은 줄 아나?" 구복은 고개를 저었다. 백리극은 구복을 가리켰다. "당신 때문이다." "왜 나 때문이라고……?" "수하의 잘못은 지휘관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몽고족 과 내통했다는 걸 알고 있나?" "그런……!" 구복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말할 수도 없었을 것 이다." 백리극은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신과 도 귀가 두루마리 두 개를 그 손에 얹었다. 백리극은 그 두루마리를 구복의 앞에 던졌다. "자술서(自述書)다. 그 안에 몽고족과 내통한 전말이 기록되 어 있다. 이걸 안찰사(按察使)에게 넘기면 어떻게 될까?" 구복의 안색이 다시 질렸다, 후군참모와 연락관은 높은 직위는 아니지만 후군도독부로 볼 때 그리 낮은 직위도 아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군무가 그들의 손을 통해 움직여졌던 것이다. 그들와 반역 사실을 구복이 모르고 있었다고 한들 변명이 될 리가 없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구복의 인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중도에 정지되고 그는 끝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백리 장군, 나는……." "장군이라 부르지 마라. 나는 장군이 아니다. 네가 더 잘 알 고 있지 않은가?" 백리극의 눈가에 노기가 스치는 것을 구복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형, 나는 정말 몰랐소. 그들이 내 눈을 속이고 그런 대 역무도한 짓을 할 줄이야……." 백리극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복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이 순간을 모면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백리극의 손 아래에서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때는 어떤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증거는 없애면 되고 백리극은 죽여 버 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한번 대역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 는 것이 이 시대의 법인 것이다. '그 일만 들키지 않으면…….' 그 일만 들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능했다. 백리극을 몰락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그였 고, 백리극의 가문을 적몰시키고 재산을 갈취한 것이 또한 그였 고, 결정적으로 백리극의 아내와 딸을 강제로 첩으로 취해 아내 는 자결하게 만들고 딸은 아직도 애첩으로 희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일을 모르게만 한다면 말이다." "다른 일이지만……." 백리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복은 불길한 예감이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왜 나를 죽이려 했나?" 구복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듯 엎드렸다. 최악의 순간이었 다. 그것만은 모르기를 빌었는데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극은 다시 물었다. "나와 내 가문을 그렇게 몰락시켜야 할 그런 이유가 어디 있 었나?" "죽여 주시오!" 구복은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리극 같은 사내에게는 변명이라는 것은 구차할 뿐이며 오히려 더욱 자극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쿵! 구복의 머리 옆에 유성검의 검극이 꽂혔다. 구복은 두려운 눈 으로 그 거무튀튀한 검신을 바라보았다. 백리극이 말했다. "그럴 생각으로 왔지. 그러나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말하라 왜 나를 죽이려 했나?"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구복도 두고두고 생각해 본 문제였다. 왜 백리극을 그 토록 미워했을까? 이유를 대자면 무수히 많은 이유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이유가 되 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는 왜 백리극을 미워했던 것일까? 구복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미웠소." "……?" "당신의 재능과 당신의 출세와 당신의 배경……, 그 모든 것 이 미웠소. 그뿐이오." 구복은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리극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구복은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사람 을 미워하는 데에는,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데에는 별다 른 이유란 없는 것이다. 그저 미울 뿐. 백리극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그런 꼴을 당해야만 했던가! 단지 밉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문득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고 재주가 뛰어나면 미 움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이었던가?' 아마도 그의 스승들 중에 누군가가 그의 재능을 염려해서 한 말이었던 것 갈았다. 결국 그 말대로 되지 않았는가. 백리극은 다시 물었다. "내 딸은?" 그의 처 운지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나 마 여기 와서 들은 이야기였다. 후군참모와 연락관이 실토한 것 은 몽고족과의 내통 관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딸 설아는? "내 딸 설아는 어디 있지?" 구복이 두려운 라으로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침상이 있고 침상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다. 그 비단 이불 로 몸을 가리고 웅크리고 앉은 여인. 밤새 시달린 탓인지 눈자위에는 검은 그늘이 져 있고 머리는 잔뜩 엉클어져 열여섯 살 소녀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여인. 백리극의 눈이 치켜 뜨여졌다. "설…… 아……?" 구복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백리극이 여인에게 물었타. "이름은?"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앞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 내용 도 또한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말을 않고 있었다. 단지 큰 눈에 원망의 빛을 가득 담고서 백리극을 노려보고 있 을 뿐이었다. 백리극이 다시 물었다. "설아냐?" "알아서 뭐 하실 건가요." 여인은 처음으로 대답했다. "제가 누구든 알아서 뭘 하실 거냐구요." 백리극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되든 궁금해 하지도 않던 분이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오신 거죠?" 여인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그 말속에 담은 내용 과 정반대로 잔잔한 목소리. 그 목소리 뒤에 깔려 있는 진한 원 망이 백리극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백리극은 유성검을 들어올렸다. 다른 모든 것은 용서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구복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반항할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반항 할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대명 군부 최고 의 고수인 백리극에게 반항할 수 있단 말인가? 백리극의 검이 구복의 목 위로 들려졌다. 내려치기만 하면, 단칼에 저 목을 베어 버리기만 하면…… 모든 원한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이때 여인, 설아가 말했다. "그만두세요." 백리극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그만두라구요." "이자는 네 아버지인 나를 모해하고 네 어머니를 유린해 죽게 했으며 너 또한 유린한 자다. 그런데 뭐라고?" 설아는 웃었다. 백리극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 모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가족 을 버려 두고 잘난 나라에 충성한다고 했던 당신. 그러다가 버 려지고 나니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건가 요? 그냥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내버려두고 가세요. 전 이 생활에 만족해요." 백리극의 눈이 찢어질 둣 커졌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 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신 도귀가 앞으로 나섰다.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입술의 모양으로 의미를 짐작하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도신이 칼을 들어 설아를 가리켰다. 자신이 대신 죽여 주겠다 고 나선 것이다. 도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원수요, 가문의 원수인 구복을 감싸고 도는 듯한 설 아의 말이 그들을 격동시킨 것이다. 백리극은 그들과 설아 를 보고 유성검 아래 목을 늘어뜨린 구 복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격동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유성검이 같이 떨렸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그리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이 뒤죽박죽 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흘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유성검을 치켜들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구복을 죽이면 일은 해결된다. 그때 그의 눈 속으로 벽에 걸린 부월(斧鉞)이 들어왔다. 붉은 수실을 단 금도끼 한 쌍.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또 어디 서 생긴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그것을 갖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던 때가 있었으니까. 황제의 명을 받아 원정을 떠나는 장수에게 내려지는 신물인 것 이다. 그것을 보면 곧 황제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신물. 백리극의 손을 떨렸다. 그리고 유성검이 바닥에 꽂혔다. 그는 구복을 죽일 수 없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모르지만, 지금 구복을 죽일 수 는 없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구복을 죽이면 그는 정말 반역자 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여태 최고의 가치로 여겨 오던 것 을 스스로 허무는 행위요, 그것은 또한 여태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 전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할 수는 있어도, 알면서 불충을 저지를 수 는 없었다. 백리극은 검을 다시 꽂으며 말했다. "네 잘잘못은 하늘이 대신 판결해 주리라." 그는 돌아섰다. 도신 도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결하지 않은 일이 많지 않은가? 백리극은 문을 나서고 있었다. 도신 도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거두고 그 뒤를 따랐다. 새벽이 밝아 오는 중원의 북쪽 끝, 낭산 기슭 외로운 군영(軍 營)을 내려다보며 그는 서 있었다. 태양이 중천으로 떠을랐다가 다시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질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대로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아침이 밝아 오자 그는 돌아섰다. "양주로 돌아가자. 도신 도귀가 그의 뒤를 따랐다. * * * 장강. 사공은 웃었다. '이게 어떤 배라고 감히……!' 설마 장강수로십팔타의 배를 털려고 하는 도적이 있을 줄은 몰 랐다. 그야말로 강물이 용왕묘(龍王廟)를 침범한 격이 아닌가! 처음 그 배가 앞을 가로막았을 때는 총타에서 급히 보낸 연락 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저놈 배 모는 것 좀 보게! 건방지게 누구 배를 가로 막아? 손 좀 봐 줘야겠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강수로십팔타의 사공 중에 감히 그의 배를 가로막아 세울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흑의에 복면을 뒤집어쓴 놈들이 줄줄이 건 너오더니 사람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는 화가 치밀었다. 손님이 탄 배가 이런 꼴을 당하면 장강수로십팔타는 장강의 기 강을 이렇게밖에 못 잡았는가, 라고 비웃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백미어옹 하호가 아니라 손님, 그것도 갸날픈 데 다가 키까지 커서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 같은 여인이 나서는 것 을 보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일은 당연히 장강수로십팔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일 이지, 손님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사공은 복면인들이 보통 도적들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 었다. 월몽영은 채찍을 반으로 꺾어 들고 적의 복면 여인, 팔한지옥 의 제사옥주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 복장인데, 내가 아는 곳에서 온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까?" 사옥주도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월몽영을 만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놀라는 낌새를 월몽영은 재빠르게 간취했다. "날 아는 모양이군! 그것으로 알았다. 지옥성!"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는 대선룡과 함께 나갔다. 지옥성에서 나온 자들임을 아는 순간, 그녀는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취리릭! 검은 채찍, 대선룡이 허공을 가르며 사옥주의 목으로 날아들 었다. 사옥주는 뱀처럼 꾸불거리며 날아드는 대선룡의 기세에 놀라 급히 철퇴를 들어 막아 갔다. 촨! 채찍은 철퇴의 목에 감겼다. 두 여인은 서로 자신을 향해 무 기를 끌어당겼다. 채쩍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옥주의 머릿속으포 주변 상황이 번개처럽 흘러갔다. 그들이 주격하던 소년의 흔적이 이 배를 향해 이어지고 있다 는 것만으로 습격을 결정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것 같았다. 배에 오르자마자 그들에게 보여진 반응이 비웃음이었다는 것 이 그 예감의 원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사공에게서마저도 일 반적인 수적을 만났을 때의 공포라든가 하는 감정들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힘겨루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배에 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은 속전속결로 끝을 맺어야 했다. 사옥주는 순간, 월몽영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 잔뜩 팽팽하게 당겨진 채찍이 힘을 잃고 구부러지고, 월몽영의 모습이 극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찰나였다. 하앗! 한소리 폭갈과 함께 사옥주의 발이 월몽영의 목덜미를 찍어 갔다. 월몽영은 사옥주의 발이 채찍을 따라 쏘아져 오자 입가에 냉 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의 월몽영은 지옥성을 나오던 그날의 그녀와는 달랐 다……. 고통과 시련이 그녀 또한 강해지게 했던 것이다. 강하기만 했던 그때의 월몽영은 더 이상 없었다. 사옥주와 월몽영의 사이에서 채찍은 원을 그렸다. 풀어진 그 만큼의 여유가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원 사이로 사옥주의 발이 송곳처럼 꽂혀 들어왔다. 사실은 사옥주의 발을 채찍의 방향을 틀어 감아 버리고 있다 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산지 못하던 현녀십구대의 포쇄결이 발휘된 것이다. 촨! 채찍이 올가미처럼 사옥주의 발을 얽어 매어 버렸다. 월몽영은 사옥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왼손에는 용의 이빨, 채찍 손잡이에서 뽑혀져 나온 비수인 소용아가 새하얀 광 망을 뿌리고 있었다. 사옥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한 탓일까? 이렇게 간단하게 얽어 매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발이 얽어 매어져 동작의 자유를 잃은 그녀의 앞으로 월몽영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새하얀 이빨과도 갈은 비수의 광망도 그렇 게 바짝 다가왔다. 목표는 저기 있었다. 그가 뒤에서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뒤돌아 서 있었다. 배의 이물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목표가 된 소년을 포함한 모두들 그 싸움에 참가하거나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 었다. 그는 싸움 구경을 않는 자는 이 배 위에 단 하나도 없을 것이 라고 확신했다. 장강수로십팔타에 속한 배로, 위로 선장부터 아 래로는 사공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무공을 할 줄 아는 자들이 니 싸움 구경을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아니, 사태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 싸움은 강호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여인 둘의 혈투였고, 의외 로 긴박하고 화끈해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 해도 다른 것, 사정 천인혈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 잡고 있지 않았다면 구경을 하고 싶었을 정도였다. 며칠 전부터 소년과 함께 행동하던 청년도 분명 그럴 것이었다. 이제 거리는 일 장 안쪽으로 좁혀져 있었다. 스윽!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피는 충분히 튀었다. 사옥주는 분수처럼 피를 흘리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채찍 에는 그녀의 다리 한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월몽영이 의외라는 빛으로 사옥주를 응시했다. 애초에 그녀가 노렸던 것은 다리 한쪽 같은 시시한 물건이 아 니라 생명이었다. 그러나 소용아의 새하얀 이빨이 사옥주의 목을 그으려 할 찰 나에 상대는 몸을 급속도로 돌려 다리 하나를 희생시키고 채찍 으로부터 풀려났던 것이다. 대단히 신속한 반응이 아니면, 그보 다 어지간히 잔혹한 심성이 아니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그래서 월몽영은 적이지만 그녀를 칭찬해 주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쳐라!" 사옥주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른 복면인 중 하나가 손을 젓자 삼 사십 명쯤 되어 보이는 적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도 그들을 맞아 나아가는 몇 개의 그림자가 있 었다. 제일 앞의 검은 그림자는 혈문룡일 것이다. 이런 자리에 는 가장 나서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쳐! 역시 그놈들이란 말이지?" 혈문룡은 씹고 있던 입 속의 물건, 육포를 뱉어 버렸다. 그의 앞으로 몇십 명의 복면인들이 달려들고, 그의 칼에 베어 져 쓰러지고 있었다. 이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지 옥성의 지하로 침입해 들어갈 때도 그들은 그렇게 달려들었었 다. 또 그렇게 쓰러져 갔었다. "좋아!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그는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가장 통쾌한 싸움을 하는 것 같다 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반룡도를 휘둘렀다. 자욱한 피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무언가 가슴 한가운데에 막혀 있던 체증이 뚫리는 듯한 기분 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중원의 소소한 무리들이 아니었다. 바로 이들, 지옥성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세력을 확대하고, 더 넓은 지역을 집어삼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따위의 일, 더 많은 이득 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 장강병탄 따위는 심심풀이 장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이다. 그들이 진정 하고 싶어했던 일은 바로 지금처럼 지옥성의 무 리들과 싸우는 것,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하나까지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혈문룡은 피바람 속에서 비로소 웃고 있었다. 이제 거리는 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싸움은 예정된 수순(手順)처럼 확대되었고, 이런 북새통에 그 가 무엇을 하든 주목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싸움은 항상 피를 끓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피가 끓으면 주 위 상황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돌아서서 싸움 구경에 넋을 잃은 소년에게는 이제 손만 내밀 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구자는 한 순간 심장이 격렬히 뛰며 귀에서 큰 소리가 울리 는 것 같았다. 전신경이 그의 귓가로 집중되었다. 스윽--자박! 발자국 소리! 그는 화영을 향해 소리쳤다. "그예요!" 화영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며 뒤돌아서고 있었다. 운학은 청허진인 멓 사형들과 함께 싸움터로 변해 버린 이물 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강호에 나와 서 보는 두번째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백리극과 장강수로십팔타의 싸움에는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 었다. 그것은 한 영웅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 고 싸우는 비장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구경하는 싸움에는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잔인하고, 흉흉한 살기만이 횡행할 따름이었다. 특히 저 두 사람, 용이 조각된 칼을 쓰는 청년과 짧고 뭉툭한 칼을 쓰는 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살기의 집약체 정도로 보였다. 혈문룡과 원도살을 그는 몰랐지만 그 솜씨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무공에는 살기만 있지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았다. 엉뚱하게도 싸움터가 아니라 구경꾼들 틈에서였다. 한 사공이 그쪽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가 거기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전혀 주의를 끌 만한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구경꾼들 틈에 또 하나가 끼여드는 것이 무슨 주목을 받을 일이던가! 그때 소년이 외쳤고, 그 옆에 서 있던 화의청년이 돌아섰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었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갈라진 것 같은 한 순간이었다. 사공으로 변장한 금관의 복면인은 소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 지만 끝끝내 닿지 않았다. 사정 천인혈은 그렇게 그의 손에는 닿지 않는 요물이었는지도 몰랐다. 내밀어진 손이 팔목으로부터 잘려져 나갔다. 손목이 그의 눈앞 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그가 선뚱 이해하기에는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그의 머리도 손목과 같이 허공으로 떠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무림사사 중의 또 다른 일 인인 환마 서문정은 그렇게 죽 었다. 화영은 검을 뽑은 흔적도 남기지 띤았다. 단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뒤로 돌아섰고, 마술처럼 서문정 의 팔목과 목이 끊어져 나가는 순간에는 이미 검에서 손을 떼고 소구자의 어깨를 만졌다. "이 사람이었나? 그가 적의가 있다는 것은 아까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소구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 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학의 눈도 소구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저게 뭔가……?" 그것은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경지였다. 당연히 본 적도 없었다. 검기? 검강? 어검술? 그 어떤 용어로도 방금 본 그것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것 들과는 유(類)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초식의 화려한 변화? 정교한 움직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 도로 빠른 칼놀림? 비슷해 보였지만 이것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더 있었다. 초식이 없는 변화와 빠르기에 연연하지 않는 빠름이라고나 할까? 운학은 옆에 선 사숙과 사형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피가 튀는 싸움터에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분명 그들의 눈에 도 그 모습은 비주어졌을 것인데 그것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단 말인가? 그 검의 새로운 경지에 충격을 받지 않았단 말인가? 문득 그는 또 하나의 모습을 보았다. 반바지와 허름한 상의만 걸친 사내의 모습이었다. 츈! 츈! 그에게는 이 검(二劍)은 필요없었다. 좌검자에게는 정말 그런 것은 필요없었다. 단 일 점에 적이 죽지 않으면 그가 죽는 것이다. 그가 배운 것은, 그리고 극에 달하도록 연마해 가고 있는 것 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번째 검이 필요없는 필살검(必殺劍)! 바로 그것이었다. 츈! 츈! 그의 앞에 쓰러지는 복면인들은 모두 정확하게 요혈이 베어져 있었다. 또 다른 한 칼이 더해질 필요가 없이 단 일 검에 절명 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좌검자는 그렇게 적들의 틈으로 걸어 들어가며 짧게 짧게 일 검씩을 안겨 살아 있는 적들의 수를 줄이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싸움의 흥분이나 사람을 죽이며 자연 스럽게 떠올리는 살기와 갈은 것이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우울한 얼굴로 산책하둣 걷고 있는 것 이다. 그의 주변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이는데……! "너……, 넌 누구냐?" 건장한 복면인 하나가 그의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다른 복면인들과는 복장이 약간 달랐고, 가슴에는 삼(三) 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래의 획이 짧고, 가장 위의 획은 가장 길어서 삼 자는 삼 자인데 거꾸로 선 삼 자였다. 좌검자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싸움터에 마주 선 이상, 죽거나 죽이면 되는 것이지 무슨 말 들이 그렇게 많을까?' 건장한 복면인, 사옥주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지옥성 팔한지 옥의 제삼옥주는 좌검자가 대답도 없이 다가오기만 하자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언뜻 보기에는 좌검자에게 두려움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그러 모습을 보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치밀한 계산을 한 동작이었다. 뒤로 물러서던 삼옥주가 그보다 몇 배나 빠르게 앞으로 되튀 어나왔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한광(寒光)이 격사되었다. 소맷자 락 속에 넣어 두었다가 발출하는 비수였다. 뒤로 물러서는 것은 단지 상대의 신경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이가 승패 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좌검자에게는 그의 모든 속임수와 심계(心界)들이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삼옥주가 그렇게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나서며 비 수를 날리지 않고 그냥 비수를 꺼내 던졌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이다. 그의 발걸음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는 그였으니 말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수의 날카로운 끝만을 주 시하고 있었다. 한 순간, 그의 몸이 낮아졌다가 삼옥주의 옆으 로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삼옥주는 그대로 목과 몸이 분리되어 쓰러졌다. 팡! 공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실제로 공 같은 물체가 배로 날아들어왔다. 검게 뭉쳐진 공 같은 물체, 맹룡이었다. 한 복면인익 목을 채찍으로 감아 당기고 있던 월몽영이 간발 의 차로 그 공의 진로에서 비켜났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허 공으로 쏠려 날릴 정도로 세찬 기세였는데 다행히 피한 것이다. 원도살의 짧은 도가 내밀어졌다. 그러나 혈문룡이 먼저였다. 그는 반룡도를 옆으로 비껴 세우 고 날아드는 맹룡의 기세를 맞아 갔다. 패앵--! 카카칵! 혈문룡의 발이 바닥에 대어진 채 뒤로 주루룩 밀렸다. 손아귀 에서 끝가 흘렀다. 어느새 호구가 찢겨진 것이다. 공중에 뜬 채로 혈문룡을 밀어붙이던 맹룡이 뒤로 되튕겨 나 갔다. 약간의 손해는 보았지만 과거 황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지 옥삼룡 중 일 인을 튕겨 보낸 혈문룡이었다. 그러나 두번째는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뒤로 튕겨 갔던 맹룡이 허공에서 자세를 가다듬는 둣하더니 다시 공처럼 뭉쳐지며 방금의 두 배는 세찬 기세로 회전하며 날아든 것이다 혈문룡이 반룡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죽든 살든 정면으로 맞서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준비는 필요가 없었다. 맹렬한 회전을 하며 날아드는 맹룡의 앞에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처럼 야광충이 나타 나 한 손으로 간단하게 쳐내어 버렸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야광충이 태양 아래 나타난 것이다. 맹룡은 이번에는 피와 살점들이 가득한 갑판을 굴러 뱃전을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뱃전을 한 손으로 잡고 회전 하며 다시 나타났다. "너, 야광충!" 그의 입에서 한소리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피가 튀 었다. 야광충의 일격에 내장이 진탕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그젓만으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패앵--! 한 줄기 검은 선이 야광충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었다. 그러나 야광충에게는 그것보다는 햇살이 더 위협적이고 신경 이 쓰이는 대상인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렸 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이 맹룡을 향해 뻗었다. 취리리릿! 오색의 보광이 번뜩였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인명권이 귀가 아플 정도로 예리한 음향을 내며 맹룡의 몸을 휘감았다. 야광충은 전륜나의 원리에 따라 몸을 회전시키며 인명권을 떨 쳤다. 위이이이잉--! 맹룡은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신이 원해서 하는 회전이 아니었다. 야 광충의 인명권이 마치 팽이에 가해지는 채찍처럼 그를 돌려 버 린 것이다. 그것도 금강석으로 몸을 긁어 찢어발기면서 한 행위 였다. 쿵! 맹룡이 갑판에 떨어져 뒹굴었다. 인명권이 야광충의 손 안으 로 다시 돌아왔다. "이, 익……!" 맹룡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헛된 시도였다, 그 의 하나밖에 안 남은 팔은 인명권에 반이나 뜯겨져 아무런 힘도 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야광충이 그를 살려 두고 무언가 물어 보려 하지 않았 다면 뜯겨져 나가는 것은 팔이 아니라 목이었을 것이다. "커억!" 맹룡의 입으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자신이 쏟은 피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둣 고개를 들고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네가 의기양양하지만…… 양양에 돌아가도 그럴지 두 고 볼까?" 그 말에 숨은 조소가 야광충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차갑게 물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맹룡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믿고 있던 황룡도 지금은……!" 그는 말을 멈추고 빙글빙글 웃었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된 그 의 얼굴은 흉신악살(兇神惡煞)과 홉사했다. "직접 가서 보려무나!" 야광충은 그를 향해 한걸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숨막힐 둣 한 살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고통을 자초하는군!" 맹룡의 얼굴은 점점 검게 죽어 가고 있엇다. 피로 물든 검은 얼굴에 묘한 빛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야광충은 주시하고 있었다. 맹룡이 말했다. "내게 고통을 준다고? 네겐 그럴 시간도 없을 것……!" 야광충의 눈에 이색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맹룡이 위험한 일 을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위험해, 모두 숙여!" 취리리릿! 폭갈과 함께 그의 손에서 인명권이 다시 날았다. 인명권은 맹 룡의 목을 휘감고 허공으로 날았다. 맹룡의 몸이 그 움직임을 따라 배 밖으로 날려갔다. 순간, 그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그의 피와 살점이 파편으로 화해 사방으로 쏘아져 갔다. 강물 에 높은 파도가 일고, 배가 기우뚱거렸다. 한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맹룡이 었다고 생각할 만한 흔적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취리릿! 그제서야 인명권이 야광충의 손으로 돌아왔다. 싸움은 이제 끝났다. 그들의 배로 건너왔던 복면인들 중 살아 남은 자들은 몇몇 되 지 않았고, 그나마 모두 죽어 가고 있었다. 원도살이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손속이 매웠나 보군!" 살려 두고 정보를 캐내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물어 봤자 캐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지옥성에서도 그가 하는 일을 알고 있은 자는 거의 없었어. 아니, 아무도 없 었을 것이다. 옥주 정도가 아니면……!" "그 여자!" 월몽영이 그때 경호성을 질렀다.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다리가 잘려 뒹굴던 사옥주였다……. 그녀는 이미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이 손을 저었다. "됐다. 일부러 보내 주었으니까!" "일부러?" "등평!" 월몽영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다물어 버렸다. 등평이라면 눈치채지 않게 그녀를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선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태양은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은 그였다. 그때, 무당파의 도사들이 다가왔다. * * *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가괴자는 여전히 콧수염을 꼬면서 묻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배를 타면 양주는 나흘이면 갑니다. 강안(江岸)의 풍 광이나 구경하시면서 가시면 위풍도 날리면서, 여정도 단축되는 이중의 이득이 있으실 것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배는 싫다!" 허탁은 이젠 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례하게 들리는 것도 상관 않고 되물었다. "왜요?" "뱃멀미 나거든!"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탁은 머리를 움켜허고 쥐어뜯었다. 굼벵이도 이런 굼벵이가 있을 수 없었다. 총타를 떠난 것이 언젠데 아직도 강서싱에서 헤매고 있단 말인가! 남창이야 강서 분방이 있는 곳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파양호변(播陽湖邊)을 돌아서 예주부(銳州府)에는 왜 가겠다는 것인가! 예주부 다음에는 휘주(徽州), 정국(亭國), 그 다음에는 남경 (南京)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양주에 도착이다. '아니 중간에 진강(鎭江)이 또 있지!'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강남에서는 배를 타고 강북에서 말을 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육로로 기어갈 이유가 뭐란 말이냐! 허탁은 머랏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해봤지만 결국은 가괴자가 미쳤다고밖에는 달리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팔월 보름 전에는 도착하겠군!' 허탁은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장강. 장강의 배에서는 새로운 대치 상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운학 과 화영이었다. 화영은 검을 뽑지 않고 단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만 있었 다. 언제나 취하는 그 자세였다. 운학은 이미 검을 뽑아 화영을 겨누고 있었다. 묘한 것은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감돈다는 것이었다. 분명 무당파의 제자면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송문검(松紋劍)에 불과 한데 보검에서나 뿜어지는 그런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청허진인은 놀라움에 가득 차서 운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확하게 말해서 운학의 검과, 그 자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운학의 검에 감도는 그 기운이 무형의 검기가 유형으로 화해 보여지는 것이라는 것과, 그것이 검강을 발출하기 바로 직 전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운학의 자세가 그는 말로만 들어 알 고 있은 자세로 짐작이 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오대검법 중의 하나인 양의문검의 기수식으로 보였던 것 이다. 청허진인 그 자신도 아직 장로가 되지 못해 삼절황과 양의문 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 꾸고 있는데 나이 어린 운학 이 연성했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운학의 성취보다도 그 연원에 의심을 품고 있은 청허진인이 었다. 운학이 그의 사부인 청운진인에게서 그것을 배웠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자소옥허궁의 궁주로 무당 전체서열상 이십위권에 간신히 드는 그가 어떻게 제자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언가 그가 모르는 내력이 그 안에는 있는 것이다. 운학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비무할 때에도, 아니 전날 백 리극의 위험을 해소시킬 때 잠깐 손을 쓴 것까지 포함해도 이렇 게 긴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소철검과 태청검을 제외한 어떤 검법도 사용하지 말라 는 사부의 엄명까지 거역하고 자기도 모르게 양의문 검법의 기 수식을 취한 그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아는 최고 경지의 검법을 동원해도 긴장 은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가중되고 있었다 물론 적당한 긴장은 그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검을 쥔 손에 가해지는 아픈 듯한 촉감, 귓가를 스치는 바람 의 숨결이 하나하나 느껴지고,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일 듯 다가오는……! 그런 긴장감은 비무에서는 항상 느끼던 것이고, 그것을 기분 좋게 느낄 정도의 경지는 되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분명 그와는 달랐다. 지금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선 화영은 아무런 기세도 발하고 있지 않은데 마치 태산 처럼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가 두려웠다. '차라리 아는 척하지 말았어야 옳았을까?' 저런 검공을 가진 자가 아마도 그들이 찾아가는 양주의 그 검 사일 것이라는 예감 같은 추측을 사숙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옳 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운산, 운해, 운영 세 사형들이 삼재검진을 펼쳐 화영을 공 격하다가 간단히 팔에 일 검씩 맞고 쓰러지고, 사숙인 청허진인 이 직졉 나서려 할 때, 그 앞을 막고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았어야 옳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운학은 전신의 공식을 검에 모았다.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앞으로 세 자나 뻗어 나갔다. 그의 검은 한 순간에 여섯 자가 넘는 장검이 된 듯했다. "검강!" 청허진인이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발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는 장강수로십팔타의 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안 언덕에 가까운 얕은 곳에 떠 있는 작은 배도 오늘 장강 을 오가는 배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거기 탄 노도사. 남루한 옷차림에 백발은 성성하지만 얼굴은 묘하게도 불그스름 하너 홍안이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노도사가 중얼거렸다. "멀었구나, 멀었어!"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검광은 번뜩였지만 휘둘러지지 않았고, 세자를 넘게 치솟은 검강도 피를 보지 않았다. 운학의 검은 점점 아래로 숙여지더니 급기야 검을 거두고 말 았다. 그는 화영에게 깊이 포런했다. "졌습니다." 노도사는 이제 배에서 시선을 거두고 누워 버렸다. "자신을 알고 남을 알아 물러설 줄 아니 된 녀석이군! 이제아 후계자 하나를 찾은 셈인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미소였다. 작은 배는 강물을 따라 흐르고, 어디선지 시구를 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봄빛의 영화로움을 알지 못하고 화의(華衣)의 부드러움을 애써 잊었노라. 검을 새겨 뜻을 짓고 얼음을 마셔 영(靈)을 기르니 아서라, 청준이여. 내 삶은 청천장공(靑天長空)에 걸었노라! * * * 어둠 속의 대화. "가괴자가 길을 돌아오는 것 같다고?" "예!" "이유는?" "허탁의 보고로는 그저 변덕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변덕이라고? 너는 그 말을 믿느냐?" "별로 믿지 않을 이유도 없고 해서……!" "바보 같은 놈!" "예?" "어떤 변덕이든 변덕을 부릴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그 이유 를 찾아봐!" "……!" 가괴자는 몰라도 일방의 패주라면 난 알고 있지. "무슨 뜻이신지……?" "일방의 패주 자리가 무공만 높다고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 제46장 그날 이후 1 7월 23일 아침, 어둠 속의 대화. "그가 돌아오고 있다고?" "예정대로라면 오늘 저녁에는 도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양주로 들어올 리가 없으니 아마 도주하지 않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기반이 사라진 이곳으로 와서 어쩌습니까?" "그는 그래도 올 것이다. 지기를 싫어하는 놈이니." "그럼 어떻게 대응할까요?" "마중을 나가야지. 보름날의 초대를 조금 앞당기기로 하자." "누굴 보냅니까?" "내가 직접 가겠다." "수행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모두 동원해라." "모두…… 입니까?" "모두! 옥주급 이상의 모두다." "천기칠사는?" "천강시만 데려간다." "독종독인은?" "통천방으로 보내라!" "통천방이요?" "가괴자가 행동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미연에 방지하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천인혈은 어떻게 됐나?" "그것이……, 아무 연락도 없습니다." "그게 없으면 안된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거야. 반드시 구해야 한다!" "샅샅이 뒤져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소환해라." "그녀라면……?" "혈부용!" * * * 같은 날, 파양호(播陽湖). 파양호는 강서성 북부에 위치한 대호수다. 옛 이름은 팽려(彭 黎)라고 하는데, 제법 넓고 호수 안에 작은 섬들이 많다. 한마디로 별로 특이한 점이 없는 호수였다. 경관이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고, 별달리 좋은 것도 없는 그 런 호수. "그런 호수에 볼 게 뭐가 딨다고 갑자기 배를 타느냔 말이다." 허탁은 거대한 화물선의 뱃전에 기대어 문득 소리쳤다. 하도 답답해서 흔자 해본 짓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양호반을 돌아 예주부로 간다더니 오늘 갑 자기 마음이 바뀌어 당장 배를 구하라고 한 가괴자였다. 그 가 괴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풀어놓은 것이다. "이젠 정말 나도 질렸다. 질렸어!"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허탁을 미쳤다고 했을 것이 다. 아무도 없는 호숫물에다 대고 소리를 치고 있으니 그렇게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누가 들을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소리치는 것 이었으니……!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가괴자는 파양호를 가로지르는 배를 탔다. 다시 마 음이 바뀌기 전에는 구강부(九江府)로 해서 장강에 진 입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양주까지는 뱃길로 오 일이었다. * * * 같은 날 오후, 장강. 배는 원래 오늘 저녁 무렵에는 양주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배는 진강부를 약간 지난 강심에 멈추어져 더 이상 앞 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사공들 사이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배의 실질적인 지휘자인 백미어옹 하호와 손님인 흑수당 사이 의 공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할 수가 있나?' 라고 누가 반론을 제기하면 사공들은 선실을 가리켰다. 거기 깊숙한 곳에서는 오전 내내 하호와 흑수당의 손님들이 모억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 큰 사내들이 아침부터 정담을 나누고 있을 리는 없으니 당 연히 심각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경우, 심각한 이야기의 끝 은 좋지 않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기도 했다. 그들의 주즉대로 과연 선실에서는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 었다. "지금의 양주는 보름 전 당주님이 떠나실 때의 양주가 아닙 니다." 좌중은 조용했다. 아니, 차라커 비장하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정도 였다. 방금 말한 호연각의 비참한 몰골이 그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거의 만신창이가 된 데다가 부상을 입고도 오랫동안 물 속에 있었는지 상처마다 불어터지고 썩어들어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에 비하면 덜 비참한 것 이었다. 사부를 잃고, 형제를 잃고, 이제 그 자신마저 죽어 가 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변해 버림 양주의 모습을 야광충에게 알리려는 일 념이 아니었다면 그런 몰골로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챘을 것이다. 혈문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황룡, 혹웅, 방각에 이통천까지……!" 대답은 필요없었다. 단지 아까 들은 말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 이었다. 그래서 호연각은 대답하지 않았다. 혈문룡이 또 물었다. "진운은?"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원독에 가득 찬 눈빛, 떨리는 목소 리로 나온 대답이었다. "그 작자……, 그자는 배신했습니다. 관부에 붙어서 고변을 하는 바람에 흑수당의 핵심인원 거의 전부가 뇌옥에 갇혀 버렸 습니다." * * * 같은 시간, 양주부 뇌옥(牢獄). 마원은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놈! 진작에 네가 이렇게 배신할 줄 알았다." 진운은 웃었다. 언제나처럼 보기 좋은 미소였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난 아무도 눈치를 못 채었다고 생각했 는데." 비웃는 말이었는데 마원은 말의 내용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번 배신한 놈은 반드시 다시 배신한다는 말은 나도 안다." "내가 누굴 배신했었다는 거냐?" 진운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사기를 치고 다닌 적은 있어도 이렇다 하게 배신을 한 적은 없지 않은가? 마원은 펄쩍 뛰었다. 그와 진운 사이에 굵은 나무 창살이 가 로 놓여 있지 않았다면 목을 졸라 죽였을 기세였다. "예전에 날 배신했지 않느냐? 벌써 잊었느냐, 이 파렴치한아! 자라새끼야! 아비는 셋이고, 어미는 둘인 이 천하의 호로자식아!" 진운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 전에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서 물었다. 분노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였다. "내가 널 언제 배신했다는 거냐?" "귀주에서 난 너를 믿었는데 너는 날 배신하지 않았느냐?" 진운은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과 이것이 어떻게 같으냐……? 아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너 참 똑똑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멈추었다. 사람을 속이는 것과 조직 을 배신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귀찮았 던 것이다. 알려 준다고 알아듣기나 할 것인가……! "그럼 다른 얘기인데, 아버지가 셋이라는 건 흔히 하는 욕이 니 그렇다치고 어머니가 어떻게 둘일 수 있느냐?" 마원은 진운을 말로나마 이긴다는 것이 기쁜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네 두 어미가 반씩 나아서 대충 꼬매어 합치지 않고서야 너 같은 자라새끼가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느냐?" 콱! "욱!" 마원은 나무 창살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네모진 틈으로 손을 넣은 진운이 그의 멱살을 잡아당긴 것이다. 진운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반드시 죽도록 해주겠다. 반 드시!" 마원의 눈동자가 돌아가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였다. 진운은 그 멱살을 풀어 주고 돌아섰다. "퉤!" 그때 진운의 뺨에 침이 날아와 붙었다. 그는 멈춰 섰다. 주먹이 움켜쥐어지고, 눈이 분노로 타올랐 다. 그가 이렇게 분노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더니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황삼 아닌가? 여기까지 침을 뱉을 수 있는 걸 보니 건강한가 보군그래." 침을 뱉은 사람은 황삼이었다. 그는 유들유들한 진운의 응대 에도 홍분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차가운 눈으로 진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할 뿐 이었다. "그래서 내가 전에 형님께 말했었다. 너를 조심해야 한다고." "안됐군! 말대로 조심하지 않아 이렇게 되어서 말이다." "상관없다. 언젠가 형님이 돌아오시면 그날이 너의 마지막 날 이 될 테니까!" 황삼은 천천히 창살에서 물러나 앉았다. 뇌옥의 흐린 불빛 속 에서 그는 웃고 있었다. 유쾌한 듯 웃는 그 모습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져 진운은 몸을 떨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분은 뇌옥을 나와 모충국의 진무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가시지 않았다. * * * 같은 시간, 어둠 속의 대화. "사옥주가 돌아왔습니다." "천인혈은?" "그것이……!" "말해 봐라!" "야광충의 손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 "천인혈을 훔친 아이가 그 배에 타고 있고, 화영이라는 자가 보호하고 있더라고 합니다." "하늘이 도왔군!" "예?" "길은 달랐어도 하늘은 뜻한 바를 이루는 것이지?" "예?" "알 것 없다. 일은 제대로 돼 가고 있다는 것만 알면 돼! 하 하하하하! * * * 같은 시간, 장강. "돌아가라." 하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로 가실지는 모르!지만 가시는 곳까지는 모셔다 드리고 싶소!" 야광충은 거절했다. "다 왔으니 그만 돌아가라는 것이다." "양주로 들어가실 작정이오?"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호는 잠시 우울한 빛으로 있더니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필요없다니 그럼 가겠소만……, 총타주께 전하실 말씀이라도?" "보고는 있는 그대로 하겠지?" "좋게 말씀드리도록 노력하겠지만 별달리 좋게 들릴 것 같지 가 않군요." "이 말이나 전해라." 야광충은 번강룡에게 전할 말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막힘없이 음었다. "혹수당은 괴멸 직전이지만 내가 있는 이상은 아직 괴멸된 것 이 아니다. 보복은 언제든지 받아 주겠다." 배는 떠나고, 야광충 일행은 강변에 남았다. 그때, 그들이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타 난 것이다. 화영! 야광충이 입 속으로 나지막이 불렀다. 화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는 표시였다. 아무 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렀어도 그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소구자를 부탁한다." 화영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구자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으로 야광충의 이후 대책은 끝이었다. 그는 좌우를 보았다. 월몽영. 그녀는 배 위에서 아버지인 방각의 죽음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울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 봐도 야광충은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 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일까? 그는 좌중을 볼 때는 그녀부터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 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하나의 의 미를 갖게 된 인지도 모른다. '이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 야광충은 그 다음으로 혈문룡을 보았다. 그는 여의색자창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근래 들어 무공이 발전 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얼마나 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도살은 조금씩 눈가에 살기를 띠고 있었다. 평소의 냉정한 그와 지금처럼, 그리고 곧 그가 보여 줄 모습처럼 팡분하는 모 습은 전혀 달라 보였지만 그것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평소에 냉정할 수 있었기에 싸움터에서는 오히려 광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대한 냉정하게 일을 꾸미고 난 후에야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과 화영, 그리고 그 자신은 몽고에서부터 지 금까지 내내 함께 싸워 왔었다. 오늘처럼, 혹시 살아 남는다면 앞으로도. 그리고 좌검자. 그것이 다였다. 이 자리에 있는 흑수당의 사람들 중 적과 싸울 수 있는 사람 은 아마도 그것이 다일 것이다. 황(黃) 자배 아래의 흑수당원들 로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여기 있는 사십여 명의 흑수당원들이 싸움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평소에 훈련을 시켜 둘 걸 그랬나?' 야광층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단련을 시킨다 해도 하 루아침에 하수를 고수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더 버티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그것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 생각을 끊고 입을 벌려 짧게 명령했다. "기회가 보이면 모두 도주하라!" 로부 옹고트, 예충의 오습으로 나타난 로부 옹고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많이 변했구나. 주변 사람들 생각을 다 해주다니!" 야광충은 말없이 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 틈으 로 인명권의 광채가 빛났다. 로부 옹고트가 다시 말했다. "그 두 마디로 사후대책(死後對策)은 끝난 것이냐?" 사후대책! 야광충이 죽고 난 후의 대비를 말하는 것일 게다. "복수라든가…… 하는 것은 부탁하지 않느냐?" 그제서야 야광충이 대답했다. "내가 지면 누가 당신을 이기겠나?" "당신이라……!" 로부 옹고트는 눈을 빛내었다. "내가 네 사부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부라……!" 야광충은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눈 깊은 곳에서 불길이 타오 르고 있었다. 지옥의 그것처럼 푸른 불꽃이었다. "내게 그런 것이 있었나?" 취리릿! 말과 함께 인명권이 날았다. 야광충은 사라지고, 로부 옹고트 의 주변에는 온통 오색의 보광뿐이었다. "멋있구나!" 로부 옹고트는 중얼거렸다. "하나 단지 멋만 있을 뿐이지." 로부 옹고트는 보광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느릿느릿 별다른 변화도 없코, 빠르지도 않은 것 같은 그 손에 인명권이 잡혔다. "진정 오묘한 것은 변화를 극(極)한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 았던가?" 인명권을 연결한 사슬의 다른 끝에서 야광충이 나타났다. "들은 것도 같군!" 그는 사슬을 잡아당겼다. 가가가각! 인명권이 로부 옹고트의 손아귀 안에서 맹렬히 회전했다. 아 무리 단단한 손아귀라도 금강석의 회전을 당할 수는 없었다. 로부 옹고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인명권을 놓아주었다. "잔재주를……!"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야광충의 주먹이 허공을 격하고 그에 게 몇 번이고 내밀어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경력이 가슴에 연속으로 날아와 틀어박혔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신색은 평온했다. "잔재주가 통할 때도 있지만 진정한 실력 앞에서는 무의미하지. 야광충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했다. 양인장에 연속으로 맞고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양인장은 내겐 별효과가 없지. 그러나 너에게는 어떨지 모르 겠구나." "큭! 큭!" 야광충이 짧게 신음을 토하며 물러섰다. 그의 양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판 통당한 것이다. 그것이 갖는 의미는 중요했다. 신법이 현저하게 떨어졌으니 도망가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조구를 죽인 자도 당신이었군!" "지금까지 그걸 몰랐느냐?" 로부 옹고트는 양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가공할 기세가 그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야광층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부스스……! 하얀 가루가 날리는 것이 보였다. 옷이 군데군데 부스러져 홑 날리고, 머리카락이 타서 가루처럼 날리고 있었다. 노출된 얼굴도 따갑게 아파 왔다. "이것이었나?" 조구가 당한 무공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석벽이 뒤에 있었으니 물러서지도 못하고 눌려서 터져 버린 것일 게다. 로부 옹고트가 가볍게 대답하며 손을 모았다. "천강마벽이라는 것인데, 여태 너를 따라다니던 황룡이 만든 무공이라는구나. 이것도 그것인데 한번 보려무나." 그의 손 안에서 푸른 번개가 튀어나왔다. 야광충의 손이 묘한 곡선을 그리며 그 손을 맞받아 쳤다. 꽈과광! 벽력 치는 소리가 강변에 울려퍼졌다. 푸른 번개와 붉은 번개 가 맞부딪치는 둣한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평온하던 로부 옹고트의 신색이 돌변했다. 그는 세 걸음을 물러났고, 어깨에는 번개라도 맞아 타 버린 듯 옷자락과 살덩이가 뭉쳐 있었다. 그의 쇄금수가 깨어진 것이다. 그것도 그와 비슷한 성질의 장 력에 의해서였다. "이건?" "혈염수!" 야광충은 로부 옹고트보다 더 처참한 몰골이었다. 언제나 깨 끗하던 흑의는 이제 갈가리 찢겨 걸레가 되어 있고, 태양 아래 처음으로 드러난 살갗에는 검게 탄 흔적들이 그어져 있었다. 그런 몸으로도 야팡층은 억전히 냉기를 뿌리며 손을 내밀었다. 파아앙!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연속으로 삼십팔 장을 내질렀다. 로부 옹고트는 싸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보법을 밟으며 소 맷자락을 휘둘렀다. 수수흡룡력으로 야광충의 혈염수를 막아 간 것이다. 칙! 칙! 마치 빨갛게 달군 쇳덩이를 기름에 집어 넣는 듯한 소리가 났다. 로부 옹고트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야광충의 손이 그로서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보이 면서 따라붙어 소맷자락을 쳐 온 것이다. 수수흡룡력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는 기이한 힘이 있어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꿔 가며 그 힘을 흘려야 했다. 혈염수의 장점은 기공적인 파괴력만이 아니었다. 로부 옹고트는 다시 한번 쇄금수를 때려 내면서 물었다. "조화십팔수를 섞은 것 같은데?" 야광충이 손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전륜나도 들어가 있지." 타타타탁! 그들의 손이 몇 번이고 교차하며 부딪쳤다. 그때마다 야광충 은 한걸음씩 물러서야 했다. 내공의 차이도 그렇지만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제대로 혈염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반적인 기공과 달라서 혈염수에는 전신의 자세와 움직임이 극히 중요했던 것이다. 아마도 전륜나의 영향을 받은 때문일 터였다. "전륜나라고?" "귀조가 만든!" 쾅! 쾅! 쾅! 연속으로 삼 장이 격돌했다. 얏광충은 휘칭거리며 뒤로 물러나 피를 토했다. 그냥 실력으 로 따져도 확실히 그가 아래였다. 로부 옹고트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사정을 봐 가며 싸우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로부 옹고트가 하늘을 힐끔 보고 웃었다. "태양 아래 선 느낌이 어떠냐? 타 죽지 않는 걸 보니 치료한 모양이지? 아니면 아직도 홉혈귀냐? 왜 흡혈귀로 변하지 않지?" 야광층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금 앞에 선 이 상대가 그가 알고 있던 그 사람, 예충이라면 이렇게 단번에 몇 가지를 묻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저의가 있다.' 무언가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극히 궁금해 서 평소의 태도를 잠시 망각할 정도의……, 그렇게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방금 한 질문들 속에 섞여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그런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다른 일행들이 싸우는 굿을 바라보았다. 적이 앞에 있는데도 취한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한가한 말. "홉혈귀가 된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 그가 바라보는 광경은 예상했던 대로 처참했다. 흑수당의 사식여 당원들은 이미 대부분 시체로 변해 뒹굴고 있 었다. 로부 옹고트가 대동한 이백여 명의 수하에 의해서였다. 아직도 싸우고 있는 사람은 화영과 좌검자, 그리고 피투성이 의 혈문룡뿐이었다. '원도살과 월몽영은?' 야광충은 그들이 죽은 것은 아닌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로부 옹고트가 이때 물었다. "수하들이 죽는 걸 보니 가슴이 아픈가? 제법 사람같이 느낄 줄도 알게 되었나?" 야광충은 이 순간 확신했다. 로부 옹고트는 역시 그것을 궁금 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사전 동작도 없이 갑자기 싸움터를 향해 달렸다. "……!" 로부 옹고트가 잠깐 얼떨떨해 하다가 그 뒤를 쫓았다. 이제 천강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여기 남아 있 던 네 구가 모두 동원되었지만 화영이 모두 토막을 내 버린 것 이다. 그러나 그 동안에 화영은 다른 적들은 전혀 상대할 수가 없었 다. 게다가 그의 뒤에는 보호해야 할 아이, 소구자가 있었다. 지금 그는 강적과 싸우고 있었다. 어쩌면 적들 중에서 로부 옹고트를 제외한 최강의 고수와 마주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로 권요 신도불비, 구슬이 박힌 검은 문사건에 남색의 긴 장 포, 코밑으로는 두 줄기 긴 교룡수염이 나 있는 중년 사내였다. 현 천하제일권과 마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신도불비가 권요라고 불리는 이유는 지금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으로 화영과 싸워 밀리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동작은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어서 발로는 수하들의 손에 든 무기들을 걷어차 화영에게 날려보내고, 손으로는 쉬지 않고 장력과 권풍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화영의 칼 아래로 파고들어 소구자를 위 협하는 것이다. 화영으로서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 다른 사람은 괄한지옥의 옥주들과 싸웠다. 혹은 하나, 혹은 둘과 싸웠지만 힘겨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세한 수를 무기로 삼아 밀린다 싶으면 두 명이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좌검자의 손에 둘이 죽고, 혈문룡의 손에 다시 하나가 죽었지 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하나씩 부상을 입고, 쓰러져 갔다. 야차처럼 날뛰던 원도살이 제일 먼저 등에 칼을 맞고 쓰러졌 고, 그 뒤를 월몽영이 따랐다. 혈문룡이 그 두 사람을 보호하며 여의색자창을 휘둘러 대었다. 죽은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설혹 죽었다고 하더라 도 그들 두 사람만은 아무도 손을 대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도 숱한 부상을 입어야 했다. 좌검자 또한 고수와 마주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털옷을 입고, 눈 에서는 야수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광채가 빛나는 사내. 그는 일반적인 검법의 자세와는 달리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상태에서 검을 중단으로 겨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치 한 자루 보검처럼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좌검자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야수도(野獸道), 혹은 감각도 (感覺道)임을 알았다. 모든 검법은 일정 경지에 가면 정신의 도야(陶冶)를 꾀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발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수도는 달랐다. 그것은 육체의 극한까지 발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검법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정신적인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것은 육체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마주치는 야수의 본능 을 끌어내어 감각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검법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금세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검법도 상궤를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격에 적과 자신 중 하나의 목숨을 끊는다는 필살검이 좌검자의 검이 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먼저 공격하지 못하고 대치하 고만 있었다. 누구든 틈을 보이면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야광충이 뛰어들었다. 쥬왁! 야수도의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정면에 대치하고 있는 좌검 자를 향해서가 아니라 감자기 뛰어든 야광충을 향해서였다. 야수도는 철저히 감각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위협이 되는 상대를 우선적으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능이었으니 말이다. 야광충을 향해 뻗은 그 검은 독사의 혀처럼 빠르고, 이리의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게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라으로부터 파고들었다. 야광충이 날아들자 바로 땅바닥에 디굴며 아래에서 부터 위로 찔러 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발을 교차시켜 그를 차 버리려다가 흠칫했다. 허벅 지에 입은 상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취리릿! 0!명권이 격사되었다. 야수도의 사내가 아니라 저만치에서 휘 두르는 혈문룡의 여의색자창을 향해서였다. 촤르륵! 인명권이 급속히 감겨졌다. 야광충은 공중에서 그대로 수평이 동했다. 칙! 뼈를 파고드는 아픔과 같은 것이 장딴지에 느껴졌다. 다음은 옆구리! 야수도의 사내가 야광충이 멈칫하는 그 순간에 길게 일검을 그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어깨의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따라붙은 로부 옹고트가 그의 어깨를 잡아 뜯은 것이다. 야광충은 피를 흘리면서도 혈문룡의 옆으로 날아갔다. 인명쩐 이 감기는 그 힘에 의지해서였다. 츈! 예리한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야수도의 사내는 검을 휘둘러 자신의 목을 벤 좌검자를 치려 했다. 그러나 검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그는 그 자리에 뻣뻣이 굳엇다. 좌검자의 검에는 두번째 칼질이 필요없었다. 촤아악! 야수도의 사내의 목에서 뿜어지는 핏소리가 귀를 자극하는 것 을 들으면서 좌검자는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일 따위는 정말 그의 취미에 맞 지 않았다. 설혹 그것이 그가 당주로 모시고 있는 야광충에 의한 것이라 고 하더라도……! 그때, 그의 귀에 야광충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혈문룡도 그 소리를 들었다. 여의색자창에 무게감이 느껴지는가 했더니 야광충이 스쳐 지 나가고, 귓가에 그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도망치라고 한다. 또다시 도망치라는 것이다. 몽고에서 여기까지 그렇게 왔는데 또 도망이라고? 혈문룡은 가슴이 터져 버릴 정도의 분노를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도살과 월몽영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를 버리고 개 죽음 당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신속하게 원도살과 월몽영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기 시작 했다. 야광충은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그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신법일 것이다, 온몸에서 뿜어지는 피가 그의 진기를 함께 가져가 버리 고 있었다. 인명권이 여의색자창에서 풀려져서 그의 손으로 돌아오고 있 었다. 야광충은 그것을 손에 받아 쥐지도 않고 회전력을 빌어 다시 날렸다. 취리리릭! 인명권이 돌아오다가 말고 다시 뻗어 갔다. 화영을 향해 막 권풍을 날리는 권요 신도불비를 향해서였다. 권요 신도불비가 인명권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오색 광채가 눈앞으로 닥쳐 들고 있을 때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눕혔다. 여태까지의 모든 동작을 한 순간에 멈추고 바닥에 납작 누워 버린 것이다. 패앵! 오색 광채가 그의 얼굴 바로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피한 것만으로 만족할 신도불비가 아니었다. 그의 등 이 바닥에서 약간 떨어져서 몸 중에서 유일하게 땅과 닿아 있는 발을 축으로 한바퀴 회전했다. 마치 바닥이 뾰족한 접시를 그리둣이 회전한 그의 몸이 세워 진 것은 야광충이 바닥에 거의 떨어져 갈 즈음이었다. 신도불비 의 주먹이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바바바바방! 야광충의 몸이 주먹에 맞을 때마다 덜컥거리며 공중으로 날려 갔다. 그 몸이 화영과 소구자의 옆으로 떨어진 것은 커다란 행 운이었다. 그는 땅바닥을 뒹굴며 속삭였다. "도망쳐!" 화영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 은 몰라도 화영은 도망갈 것이다. 절망한 목소리와 희망을 안에 품고 있은 목소리의 차이를 구 분할 정도는 되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소구자의 품속에 손이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로부 옹고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 의 힘만 있다면 그는 결국에는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눈앞으로 로부 옹고트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펼쳐졌다. "컥!" 그는 로부 옹고트의 손에서 발출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 이 무상혼원공임은 몰랐지만 그 기운에 내부가 파괴되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에게는 가장 친숙한 오랜 벗, 어둠이 찾아 들고 있었다. 제47장 그날 이후 2 7월 23일 밤, 어둠 속의 대화. "뒤져봐라! 아니, 내가 뒤지지." "……!" "있다! 과연 있군! 비었지? 봐라, 비어 있지 않으냐. 마신 거 야. 마시고 만 거야. 이젠 됐어! 혈부용만 도착하면 대법을 시 행할 수 있다. 후후후하하하하!" "……!" "근 이십 년, 아니 삼십 년이 넘게 준비하고 계획하던 일이 이제 며칠 후면 완성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래 계획하던 대업 이……! 기쁘지 않으냐, 쌍고르마?" "기쁘군요." "후후, 너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다. 내가 불사옥령체가 된다 고 해서 네가 기쁠 일이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러나 말이 다.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 몽고의 제국이 다시 선다 는 말과도 동일한 것이다. 지금의 힘에 그 힘까지 가세되면 무 서울 것이 무어란 말인가? 후후하하하하!" "저는 약간 걱정되는 것이……!" "뭐가 말이냐?" "혈부용이 없어지면 가괴자가 광분하지 않을까요?" "상관없다. 그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니까. 그보다 그녀는 언제 도착하느냐" "오전에 연락을 보내었으니 모레면 연락을 받고 출발할 것입니 다. 그 후에는 쾌속선으로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도착하겠지요." "좋아, 그때까지 이 녀석에게 약부터 먹여라. 최상의 상태라 야 대법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걸레쪽에 가까운데 나흘 만에 괜찮아질까요?" "옥령체를 무시하지 마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괴력을 발휘 하던 그가 이제 완전한 옥령체가 되었는데 뭐가 걱정이냐? 그냥 둬도 낫겠지만 노파심에 약을 먹이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 "청옥관(靑玉棺)에 넣어 두면 대법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리고 영영이지. 그 안에서 완전히…… 생명이 끝나고 말 테니까." "……!" "……."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신 것 같군요. 그를 희생시킨다는 것 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대업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가 있 다. 그렇게 살아온 한평생이니까." "……!" "혈부용이 도착하면 바로 혈옥관(血玉棺)에 집어 넣어라. 결 국은…… 같은 운명이 되겠지." "예!" * * * 7월 25일, 장강. 허탁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아침부터 방주의 선실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오백 명은 족히 탈 만한 거대한 화물선의 갑판 아래 한 구역 을 통째로 방주의 선실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동정이 방주 의 귀에 들어갈 염려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탁은 그렇게 선실 문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가 밝은 사람이라면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듣고 웃었을 것이다. "부를 때가 됐는데? 분명히 부를 때가 됐는데……!" 가괴자는 혈부용이라는 애첩을 새로 맞아들이면서부터 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멍만 파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심 지어는 암살당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질 정도로 그는 방 내외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거기에 유일한 예외가 허탁이었다. 가괴자는 말 그대로 밤낮없이 구멍만 파다가 문득 혈부용 이 외의 사람이 그리워지면 허탁을 부르는 듯했다. 그리곤 되는 소 리 안되는 소리 해가며 가지고 놀다가 다시 혈부용의 품으로 돌 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배를 타자 달라졌다. 배를 타며 잠깐 얼굴을 내비친 가괴자는 벌써 나홀이 지나도 록 한번도 허탁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허탁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허탁은 신세 한탄을 하듯 중얼거렸다. "평소에 불려서 갈 때면 끔찍하더니, 안 부르니까 이젠 부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마조마하군! 이게 사람 사는 거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냐 허탁아, 허탁. 너는 왜 진작 도망가지 않았느냐?" 끼익! 그때 선실의 문이 열렸다. 허탁은 제풀에 놀라 흠칫하더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시녀가 나오고 있었다. 손에 든 항아리 하며 인상을 쓰는 모습으로 보아 요강이라도 비우러 나오는 호양이었다. 허탁이 다가갔다. "방주님은 뭐 하시냐?" 시녀가 손에 든 것도 무거운데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틔 명스럽게 대답했다. "주무십니다." 허탁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열아흡째 부인과?" 열아흡째 부인, 혈부용을 말하는 것이다. "안 보이시던 걸요!" 허탁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했다. 죽은 사람처럼 푸르뎅뎅하게 죽어 가는 것이다. 방금까지의 처량하면서도 익살스럽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 금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시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내가 뵙잔다고 전해라!" 시녀가 손에 든 항아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것부터 우선……." 허탁은 그 항아리를 쳐서 날려 버렸다. 챙! "어머!" 항아리가 벽에 부딪쳐 박살났다. 구린내가 사방에 퍼졌다. 그러나 허탁은 얼굴도 찌푸리지 않고 시녀의 어깨를 선실로 밀어 넣었다. "어서 전해!" 시녀가 두려운 빛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 타났다. 욕이라도 먹었는지 뾰로퉁한 모습이었다. "귀찮게 굴지 말라는데요?" 허탁은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 속하 허탁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 무례를 범합니다!" 허탁은 성큼성큼 내실로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문을 세 개나 지나서야 내실 문이 보였다. 허탁은 그 문을 걷 어차 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속하 허탁입니다." 말에는 불손함이 가득하고 행동은 무례의 차원을 넘어 있었 다. 그러나 허탁의 표정은 딱해 보일 정도로 초조해 보였다. 내실은 넓고, 화려했다. 한쪽 면에는 붉은 휘장이 쳐져 있고 그 너머로 은은히 사람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무슨 일이냐? 지금은 불편하니 나중에 오너라!" 허탁의 얼굴은 혈색을 잃고 창백해졌다. 그는 휘장 앞으로 나아가 소매를 휘둘렀다. 촤악! 소매만 닿았는데도 휘장이 반으로 찢겨져 나갔다. 가괴자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반역 …… 이냐?" 떨리는 목소리와 뺨. 그것을 보는 허탁의 얼굴에는 당흑감이 가득했다. 결국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이 귀제갈 이 돼지새끼에게 짬쪽같이 속아 버렸구나!" "이제 알았나?" 허탁은 순간적으로 돌아서서 문가를 보았다. 거기 낯익은 모 습이 보였다. 통천방 팔대당주 중의 하나인 비각(飛脚) 이방화(李邦華)였 다. 원래 총단을 지키기로 되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 나타 난 것이다. 큭! 허탁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팍 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물든 손 한쌍이 그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쾌수(快手) 양일청(楊一淸), 너였구나!" "나 외에 또 누구겠나?" 허탁의 가슴을 꿰뚫은 손의 임자, 가괴자로 변장한 자가 말 했다. 허탁은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신은 음모에 넘어가는 척하면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나머 지 사람들은 그 틈에 다른 일을 꾸민다. 정말 좋은 계획이군" 양일칭이 다시 이죽거렸다. "요녀(妖女)를 보내 방주의 시선을 가리고, 그 틈에 외각 분 방에서부터 잠식해 들어간다. 최후의 일격은 자기들의 본거지로 끌어들여서 단숨에! 네 반란 음모만큼이나 좋지." 허탁과 로부 옹고트가 꾸민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탁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분방의 동조자들은 처단한 뒤겠지? 이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지? 설마 너희들은 아니겠지?" 통천방 각분방과 지부에서부터 조금씩 협력자들을 모아 어느 순간, 일시에 판을 뒤집어 버린다는 계획이었는데 이미 틀렸다 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탁은 가괴자가 그렇게 굼벵이처럼 느리게 이리저리 다닌 이 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비웃고 있는 동안 가괴자는 몰래 빠져 나와 분방들을 청 소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방화가 말했다. "방주님말고 누가 이런 신묘한 계획을 꾸미시겠느냐?" 양일청이 말했다. "너 따위가 무슨 제갈이냐? 방주께서는 처음부터 네 머리 위 에 올라가 계셨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지?" "이번 기회에 쓰레기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지." 이방화가 거들었다. "물이 고이면 썩어서 너 같은 벌레들이 생기거든." 양일청이 말을 맺었다. "통천방이 제이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너 같은 것들부터 청 소해 버리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탁의 입에서는 피가 덩어리져 나오고 있었다. 기도를 통해 가슴 속에 고인 피가 역류하는 것이다. "방주는?" "남경 분방을 청소하고 계실 것이다." 대답해 주는 것에도 지친 모양이었다. 이방화가 발을 들어 허 탁의 머리를 찼다. 팍! 귀제갈이라 불리며 강호에 악명을 날리던 허탁의 머리는 이제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같은 날, 장강. 장강수로십팔타로 돌아가던 백미어옹 하호는 중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했다. 전서구로 소식을 전해 듣고 양주로 향하던 번강 룡의 배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이란 역시 알 수 없는 거야. 안 그러냐, 하늙은이?" 하호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일개 지방의 군소 조직이 우리 장강수로십팔타를 방수로 두 는 그런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한 바로 며칠 후에 그렇게 밑천 마저 거덜낼 줄이야 누가 짐작을 했. 안 그러냐, 하늙은이?" 방수로 두었다기보다는 사실은 꺾은 것이지만 하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번강룡의 자존심을 긁어서 좋을 일이 없는 것 이다. "그러게요." "그가 실종되었다는 건 알고 있나, 하늙은이?" 하호는 놀란 빛이었다. "금시초문입니다." "양주 가까운 강변에서 수하들은 거의 전멸되고 몇몇만 살아 도망갔다는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잘되지 않았나, 하하하하!" 통쾌한 둣 웃는 번강룡을 보면서도 하호는 같이 웃을 수 없 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번강룡이 말은 저렇게 하며 즐거운 듯 웃 지만 사실은 극도로 기분이 나쁜 상태라는 것을. 그가 하늙은이 라는 호칭을 쓸 때면 어김없이 그랬던 것이다. "지금 양주로 가시는 뜻은……?" "혹시 살아 있으면 죽여 주려고." 번강룡의 딱 부러지는 대답에 하호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본심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본심일 수도 있었고, 사실 아주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번강룡이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는 듯 중얼거렸다. "덤비면 죽어? 건방진 자식. 누가 먼저 죽나 두고 보자." 하호는 문득 방안 탁자에 놓인 보퉁이에 시선이 쏠렸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뭔가가 바뀌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특히 기물 같은 것에 더욱 그래서 한 가지라도 달라지면 금방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저건 뭡니까?" 번강룡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고 하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색은 잠깐이었다. 번강룡은 그 보퉁이를 집어 방 한구석에 던졌다. "그냥……, 개인적인 물건이야. 하늙은이는 몰라도 돼!" 챙! 보퉁이가 떨어지며 들린 쇳소리에 하호는 관심을 두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역시 자존심은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 이다. 문이 열리고 수하가 들어왔다. "손님이 왔습니다." "여기로?" 하호가 놀라 중얼거렸다. 강물 위로 운항하는 배로 손님이 온 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번강룡이 물었다. "인근의 좀도적들이냐? 그러면 선물이나 놔두고 가라고 그래!" 수하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찾아온 손님은 세 사람, 백리극과 도신 도귀였다. * * * 같은 날, 남경 금의위(錦衣衛). 금의위는 원래 황제의 직속으로 남경을 방어하는 상십이위(上 十二衛) 중 하나였다. 상십이위는 오군도독부에 속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만을 듣는 심복부대로 그 중에서도 가장 심복하는 자들을 뽑아 근위부대를 구성한 것이 금의위였다. 그 지휘사(指揮士)인 영반(令班)은 장관(長官)급의 인물로 임 명했다. 명대 초기에는 군부의 장군을 영반으로 했고, 명나라 후기로 가면 동창의 영반인 사례태감(司禮太監)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승상격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영반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중간중간 의외의 인물들이 영반의 직책을 맡기도 했는데 당금의 영반이 그랬다. 금의위의 교위(校尉;장교)급 이상이 아 니면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금의위는 남경성의 중화문(中華門) 안에 있다. 중화문을 통과한 성내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문 안에 있다 는 뜻이었다. 중화문은 보통의 성문이 아니라 방어용의 작은 성과 같은 구 조로 되어 그 안에 삼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이다. 문은 사중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문에는 아래위로 열리는 보 조문이 딸려 있는데 이것을 천급갑(天急匣)이라 불렀다. 이래서 중화문은 총 열두 겹의 문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문들 사이에 금의위의 군영이 있었는데 원래는 수문군사들 을 숨기기 위한 곳으로 장병동(藏兵洞)이라 불렀다. 지금 등평은 감회 어린 얼굴로 그 장병동의 하나인 취응각(鷲 鷹閣)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취응각은 임무를 띠고 외부로 파견 나갔던 금의위의 위사가 돌아와 복명(復命)하는 곳, 오 년 만에 돌아온 등평도 부영반이 긴 하나 여기로 먼저 안내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서성거린 지 한 식경이나 되어서야 문 열리는 소 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문가에는 무관의 복장을 한 삼십대의 사내가 서 있었다. "본관은 현 금의위 부영반인 장화룡이라고 하오. 둥부영반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는 바요." 등평은 눈썹을 굼틀거렸다. 부영반의 직위는 오 년 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공석으로 남 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새 부영반을 본다 해서 기분 나 쁠 것은 없지만 어쩐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군!" 장화룡은 미소를 지었다. 용모로 보아서는 삼십대의 청년인데 묘하게도 얼굴이 깨끗하고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수려한 사내 였다. "등부영반이 떠난 후에 여기 부임했으니 알 리가 없지요. 당 시에는 내인청(內人廳)에 있었소." 내인청. 환관들의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환 관들에 의해서 일이 처리되는 곳. 그곳에서 일을 했다면 그는 환관이라는 뜻이 된다. 등평은 새삼스럽게 장화룡을 바라보았다.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일을 떳떳이 얘기하는 그가 특이해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다면 얘기가 통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말을 꺼내었다. "중요한 보고사항이 있소. 영반대인을 뵐 수 있겠소?" "로부 옹고트에 관한 이야기요?" 등평은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일부의 이야기를 보고했으니 로부 옹고트라는 이름은 알 수도 있을 것 이다. "그가 중원에 깔아 놓은 세력에 관한 이야기요." "양가장 말이오?" 등평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사옥주를 따라가 간신히 찾아낸 본거지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어떻게……?" "몇몇 희생이 있었지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등평은 더 캐묻지 않았다. 금의위에는 모르는 것이 아 는 것보다 좋은 일들이 많았다. "대책은?" "서 있긴 하오만……." 장화룡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지 않소" 등평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요?" "백리극!" 등평의 안색이 변했다. 결국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정했 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설프게 변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 적이고 간단한 법이다. "고의로 그 부분을 누락했음을 시인하오." 장화룡은 빙글빙글 웃었다. "고조(高祖;주원장)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을 싫어했다고 하는 데 혹시 아시오?" '이건 무슨 이야긴가?' 등평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먼저 말할 이야기였다. 과연 장화룡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말을 이었다. "의욕이 넘치는 자와 견식이 넓은 자요." "……?"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니 과연 탁월한 분이라고 할 만하지 요? 요컨대 그런 자들이야말로 황제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자라 는 것이오." 반역을 경계한다는 뜻이었다. "백리극이 그런 자였지요. 그래서 숙청되었던 것이고." 등평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분……, 백리극에게 무슨 일이라도?" 구복을 처단하러 간 백리극이 혹시 잡히기라도 하지 않았나 두려워진 것이다. 장화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양주로 오고 있는 중이오. 다행히 구복을 죽이지 는 않았소." 등평은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모르는 게 없군!" 희생의 대가요. 등부영반이 없는 동안 금의위에도 많은 발전 이 있었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장화룡은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걸었다. "고조황제께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긴 했지만 그때의 상황, 즉 황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상태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도 있는 일이오. 아까의 이야기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고." "지금은 다르단 말이오?" "물론 다르오. 황상께서는 의욕이 넘치는 자와 식견이 있는 자를 좋아하시오. 그 증거가 백리극이요. 죽은 것으로 되어 있 는 사람이 돌아다니는데도 그냥 두고 있지 않소?" "그 말은……?" "앞으로도 살 수 있다는 얘기요. 구복을 죽이려고만 않으면." "복수를 말라는 얘기요?" "구복은 불법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았소. 모든 원인을 찾아들 어가면 역시 당시의 상황 탓이긴 하지만 당금의 황상께 귀결되 지요. 자, 그럼 어쩌겠소? 황상께 복수하겠소?" "구복이 주모자이니……." "구복을 죽이는 것이 곧 황상께 칼을 돌리는 행위요." 장화룡은 결론적으로 말했고, 등평은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전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억울함은 누가 풀어 준단 말인가? 장화룡은 말했다. "잊고서 새출발을 해야지요. 언제까지나 옛 기억에 매여 살 수는 없지 않소? 다행히 그는 그렇게 결정한 모양이오만……. 본관은 그 얘기, 듣고 역시 백리 장군이라는 생각을 했소. 마 두들과 돌아다녀도 근본은 어쩔 수 없는 법인 모양이라고." 마두들이라는 얘기에 둥평은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 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있소?" "유감스럽게도 없소!" 등평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그도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들은 것이다. 혹수당의 괴멸과 수뇌들의 실종 및 죽음이라는 얘기였다. 둥평은 다시 안색을 가다듬었다. 이제 남은 것은 로부 옹고트 를 죽임으로써 그들의 혼령이라도 달래 주는 것뿐일 것이다. "영반대인을 뵙고 싶소." "양주에서 이미 뵙지 않았소?" "……?" "도연 대사가 바로 현임 영반이시오." 등평은 경악했다. 그 땡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영반일 줄은 몰랐다. "죽었다고 하던데……?" "흑수당의 사람이 구해 줬소. 그래서 혹수당은 명맥을 보존하 게 되었는 줄 아시오." "누가?" "진운!" "그가?" 등평은 오늘 여기서 네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이번이 가장 크 게 놀란 것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일 을 해낸 것이다. "그는 운 좋게도 용광사에 늦게 갔다더군요. 그리고 모든 광 경을 보았소. 로부 옹고트가 황룡과 혹웅을 쫓아갔을 때, 그는 도연 대사를 구해 내었소." 장화룡은 슬쩍 웃었다. "다른 저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큰 공을 세웠소. 아마도 흑수당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럴 거요." 등평은 한동안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 었다. "금의위에 아무리 발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금 의위가 해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돕는 세력이 있었을 거요." 장화룡은 선선히 시인했다. "당연히 있지요. 처음 영반대인께서 양주로 갔을 때는 그저 의혹의 수준이었지만 그곳에서 몇 가지 단서를 잡았소. 거기에 는 흑수당의 덕도 없다 하지 못할 것이오만, 더 도움이 된 사림 도 있었지요." "그게 누구요?" "양주부 추관 모충국, 강남 총포두 유소백, 등부영반의 동생 분도 사소한 도움은 되었고……, 무엇보다도 도움이 된 곳은 통 천방이오." "통천방?" "그렇소, 통천방! 로부 옹고트는 통천방도 집어삼키려 했던 모양이오. 가괴자는 영리한 자라 그 음모를 늦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 그래서 이번 토벌전도 그들과 함께요." "토벌전?" 장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용양위(龍揚衛), 용강위(龍江衛), 천책위(天策衛)가 양 주부 이동을 완료했소. 그들과 통천방이 함께 토벌전을 벌일 거 요. 등부영반도 함께 가지 않겠소? 빨리 가지 않으면 좋은 구경 을 못하는 수도 있으니 말이오." * * * 같은 날, 경양도상(京揚途上). 경양도상(京揚途上). 남경에서 양주로 가는 관도를 일컫는 말이다. 소구자는 그 경양도상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남경응천부의 여름 날씨는 지독하다. 특히 소나기가 내리기 저의 찌는 듯한 더위에는 나무 위에 앉은 새들조차도 구이가 되 어 떨어지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 날씨에는 그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이나 자는 게 최곤데……!" 소구자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정말 그랬다. 누가 이런 염천지하(炎天之夏)에 길을 간단 말인가? '길 옆에 이중삼중으로 심어진 백양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 이나 늘어지게 자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이루지 못할 소망이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예 저의 그였으면 이런 경우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처지가 달라 진 것이다. 그가 잡고 있는 막대의 다른 한 끝을 잡고 따라오는 사람 때 문에 그것은 이루지 못할 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맹인 아버지를 안내하는 효자 소년으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맹인 아버지는 화영이었다. 나흘 전, 강변의 싸움에서 도망친 이후 소구자는 내내 화영과 붙어다녀야 했다. '이 모든 게 다 그 백발귀신 때문이지 뭐야.' 야광충이 강변에서 화영에게 쓸데없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라 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야광충은 화영에게 '소구자를 부탁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이 꼴이었다. 도망가려고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화영이라는 이름의 이 맹인은 눈 있는 사람보다 눈이 더 밝아서 도대체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날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을 이 나흘 동안 다 찾아내어 모 은 것도 그였던 것이다.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소구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은 차라리 찾지 않는 편이 좋았다. 외팔이 병신 하나만 빼고는 다들 골골거리고 있지 않은가! 원도살이라는 인네는 저승 문턱에 반쯤 발을 걸쳐 놓았고, 월몽영이라는 계집애는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 리고 개중 제일 낫다고 하는 혈문룡이라는 사내녀석은 성질도 고약해서 제대로 낫지도 않은 주제에 로부 어쩌고를 찾겠다고. 툭하면 난동이었다. 한마디로 골치 아픈 짐덩이들을 자청해서 끌어안은 셈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남경까지 가서 약을 사 오는 형편이었다. '지난밤에 갈 때는 편했는데……!' 남경으로 갈 때는 화영이 그를 안고 달려서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대낮에 관도에서 그렇게 빨 리 달리다가는 곧바로 그들, 복면인들의 이목에 걸리고 말 것이 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올 때는 변장을 해서 이렇게 고생스럽게 올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덥고, 목도 말랐다. 길가의 나뭇가지들도 못 견디겠는지 축축 늘어져 버리고 새 들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지독한 낮이었다. 소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볼멘 소리를 터뜨렸다. "쉬었다 가요!" 언제나 그렇둣이 평온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거의 다 왔는데 그냥 가자." 화영은 언성을 높이는 적도 화를 내는 적도 없었다. 그가 흙 을 끼얹고 욕설을 퍼부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소구자를 더 못 견디게 만들었다. '반응이 있어야 뭘 해도 해볼 것인데……!' 이런 식의 무반응은 어떨 땐 때리고 괴롭히는 것보다 더 괴롭 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소구자로서는 화영이 밉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날 강변에서 상처를 입어 가면서도 그를 완벽하게 보호하 것이 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검술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귀찮았다. 그는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얼마를 더 갔을까? 길가에 십여 대의 수레가 세워져 있고, 나무 아래에는 몇 십 명의 장사치들이 제멋대로 드러누워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경으로부터 양주로 가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부러워! 일마나 시원할까?'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있는 나무 아래에는 녹색의 그늘이 드 리워져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은신처에 다 와 간다. 여기서 쉬자고 할 화영이 아닐 것이다. "쉬었다 가자꾸나, 얘야!" 소구자는 귀를 의심했다. "웬일로 쉬자는 말씀을 다 하세요?" 화영이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신비스러운 미소였다. "쉬기 싫으면 그냥 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소구자와 화영은 장사치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 아래에 앉았다. 소구자는 벌렁 드러누웠다. "아이고 좋네!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소구자는 아까 같아서는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 게도 누우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옆에 앉은 화영을 훔쳐 보았다. 화영은 눈을 감은 채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정말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장사치들이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아까 보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이 관도 저펀으로 사라지자 화영이 일어났다. "그만 가자!" 은신처는 양주성 인근의 야산에 세워진 작은 초막이었다. 이런 곳에 숨으면 곧 들키고 말 것이라고 소구자가 말했지만 화영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누가 적인지 구분이 안되는 상태에서는 되도록 사람의 접근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사 적들의 수색이 온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미리 그 접근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화영의 의견이었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몰래 오면 어쩨게 할 것이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소구자는 참아 버렸다. 화영 같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미리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초막에 들어섰을 때, 방안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좌검자는 구석에 앉아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는 그 멍한 눈을 뜨고 있었고, 월몽영은 누운 채 말이 없었다. 혈문룡만이 원도살의 옆에 앉아 무어라고 자꾸 말을 걸고 있 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혈문룡이 말했다. 그들이 아니라 왼도살에게 하는 말이었다. "힘을 내세요. 이제 약도 왔습니다." 원도살이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혈문룡도 그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고집을 부려도, 애원을 해도 안되는 일이 세상에는 잇는 법이 다. 이제 곧 원도살이 맞을 죽음이 그런 것 중 하나였다. 혈문룡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포기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사실을 사 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원이 있습니까?" 왼도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문룡이 다그쳐 물었다. "뭡니까? 뭐든지 들어드리죠." 원도살이 힘겹게 입을 벌렸다. 혈문룡은 그 입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언…… 젠가 갈 수 있게 되면, 북…… 해에 내 뼈를…… 묻 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원도살의 옷자락을 잡은 혈문룡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얼마 나 세게 쥐었는지 뼈마디가 튀어나오고 살갗이 하섀게 질려 버 릴 지경이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월몽영의 눈가로 투명한 이슬이 굴렀다. "내일 통천방과 관군들이 양가장을 친다." 화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더욱 놀라웠다. "양가장이 로부 옹고트의 소굴이기 때문이다." 혈문룡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화영에게 물었다. "확실한 이야긴가?" "통천방주가 지시하는 걸 들었네." "언제? 어디서?" "아까 여기로 오는 길가에서." 화영의 말에 의하면 아까 길가에서 쉬던 장사치들은 장사치가 아니라 통천방의 인물들이엇다. 특히 그 중 비대한 한 상인이 바로 통천방주 가괴자였다. 그들은 각자 변장하고 비밀리에 양가장 인근으로 모여드는 것 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의 일을 상의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구자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까 그 장사치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소리를 쳐도 우리에게 까지 들리지 않아요."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들었다." 소구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혈문룡과 좌검자는 믿는 듯했다. 혈문룡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호홉을 고르고, 좌검자는 등 에 맨 검을 뽑아 옷자락으로 닦기 시작한 것이다. * * * 같은 날, 촉강. 혹웅은 풀과 덩굴을 가져다가 바익 틈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 처럼 적당히 주변 환경과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라조차 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가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위장은 하는 듯 마는 듯, 무엇보다 주변 환경과의 자연 스러운 조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형 편이 아니었다, 빛 한 줄기라도 새어 나갈 빈틈이 생겼다간 바로 들켜 버리게 생긴 것이다. 틈이 완전히 가려졌다. 묘족은 밤에도 불빛이 안 보이게 불을 피우는 데에는 탁월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흑웅은 묘족이었고, 그 중에도 뛰어난 묘족이었으니 그런 것에도 남보다 뛰어났었다. 그는 그렇게 위장을 해놓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안에서 빛이 새어 나가지 않으려면 당연히 밖의 빛도 새어 들 커오지 않아야 한다. 그렇킥면 안은 어두워야 정상이었다. 그것 도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야 했다. 그러나 지금 흑웅은 자기의 코끝만이 야니라 읽을 수만 있다 면 글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황룡의 몸에서 뿜어지는 휘황한 금팡으로 바위 틈 안은 황금 궁전처럼 밝았던 것이다. 그는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황룡을 바라보았다. 여기 숨은 지 이제 보름째였다. 그 동안 황룡은 정신이 든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증거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흙빛으로 죽어 가던 황룡의 몸이 점점 정상을 되찾아 가더니 금빛이 돌아오고, 이제는 예전보다 더욱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황룡은 보리무상강기를 절정까지 연성하지 못했었다. 그 런 상황에서 로부 옹고트와 싸워 죽음 직전까지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억지로 폐관을 깨고 나오느라고 정상보다 오히 려 못한 상황이었었다. 내공수련 중에 외계의 방해를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 다. 밖에서 쳐죽이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괴멸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황룡이 거의 그런 상태였다. 아마도 대충 다쳤다면 그는 얼마 못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부 옹고트에게 당했다. 그것도 지독하게 당했 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보리무상강기는 후천지기(後天之氣)를 키워서 궁극적으로는 선천지기(先天之氣)를 끌어내는 내공심법이었다. 혹웅이 쉽게 그것을 연성했던 것은 영약을 먹어 선천지기가 이미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금빛으로 변하는 부작용도 없이 보리무상강 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후천지기를 극성으로 익혔다가 한번은 버 리고 선천지기를 새로 끌어올려야 했다. 혼탁하고 인위적인 힘을 버리고 천부의 기운으로 몸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황롱은 그 과정이 로부 옹고트에 의해서 이루어져 버렸다. 즉, 로부 옹고트에게 중상올 입고 내공을 잃음으로써 후천지기 가 버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위 틈에서 가사 상태로 지 내는 동안 선천지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황룡의 보리무상강기는 극한(極限)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 * * 같은 날 밤, 양가장. 양유락, 원래는 로부 옹고트라 불리는 그는 흘로 지하 석실에 와 있었다. 온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상태였다. 이곳은 그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곳, 그를 제외한 사 람은 어떤 일끼 있어도 들어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그의 앞에는 세 개의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왼쪽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짙푸른 청옥관, 오른쪽에는 타오 르는 둣 붉은 혈옥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양쪽의 관 과 아랫부분이 연결된 우읒라의 관이 있는 것이다. 그가 들어가야 하는 곳은 그 우읒라의 관, 바로 구합유정관 (九合乳精棺)이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 였던가! 찾아 헤매고 혜매었던 그것이 바로 귀영문의 장보고에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천지,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하나로 모아 혼돈의 상태로 섞었 다가 다시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내는 이 구합유정관은 비유하 자면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보물이 여태 약을 섞어 환약을 만들어 내는 약탕기의 역 할로나 여겨졌었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몰랐다. 오늘 이 구합유정관은 그 진정한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다. 그는 오늘밤 이 관에 들어가 누웠다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 오는 신생아와 같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 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진정 그가 바라던 소망이 잠시 후면, 정확히 다섯 시진 후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관뚜껑을 열었다. 구합유정관의 안에는 양옆으로 각각 두 개의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은 바로 옆에 있는 두 개의 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옆에 있는 두 개의 관을 그는 마저 열었다, 붉은 관 속에는 혈부용이 태어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푸른 관 속에는 야광충이 역시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세 개의 관을 구하고, 약물을 구하는 것은 막대한 시간과 노 력을 들여야 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있는 것이니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정말 힘들어 한 것은 하늘이 내리지 않으면 나올 수 없 는 이 두 사람이었다. 사내이면서도 현음지맥을 지니고, 여인이면서도 태양지맥을 지닌, 자연에 역행하는 체질을 가진 두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 인가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을 찾으면서 그의 고민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대도에 거주하던 전직 대관, 모원의의 아들이 그런 체질 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기뻐서 까무러칠 뻔했 던 것이다. 일단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그 다음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도적으로 변장시킨 수하들을 부려 고향으로 낙향하는 모원의 의 가족을 습격하고, 아이를 빼내어 대막으로 왔다. 그 와중에 아이의 숙부를 죽였지만, 전가족을 몰살시키지 않은 것만 해도 그의 자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약물을 먹이고, 현음진기를 가르쳐 완전한 현음옥 령지맥으로 바꾸었다. 일차 재료인 옥령체를 만들기 위한 전 단 계였다. 그런데 야광충이 커 가는 것을 보며 욕심이 생겼다. 불사옥령체의 질은 재료가 되는 두 사람의 질에 의해서 결정 된다. 불사체야 불사성(不死性)이라는 한 가지만 얻어 내면 되니 태 양지맥의 여아를 구해 천인혈로 불사체로 바꿔 버리면 더 신경 쓸 일이 없엇다. 그러나 옥령체는 달랐다. 불사체가 되면서 인성(人性)을 잃어버리는 약점을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옥령체는 그 옥령체가 뛰어나면 뛰어 날수록 그것을 재료로 한 불사옥령체의 질도 뛰어나게 되는 것 이다. 그는 이왕이면 청고익 수준을 성췬한 불사옥령체가 되기를 원 했고, 그것은 옥령체가 될 야광충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 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교육시켰다. 그 교육은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의 단련, 즉 신흔(練魂)의 단계까지 포함 해야 했다. 무수한 고통과 시련, 그리고 한계를 돌파하면서 하나의 인간 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야광충은 배반을 당해야 했고, 친인의 죽음을 보 아야 했고, 연인의 부정한 행위를 보아야 했던 것이다. 인간을 포기하고 흡혈귀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을 긍정하고 되 돌아오는 총체적인 과정이 그것을 위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 위대한 불사옥령체의 제왕이 될 그, 로부 옹고 트를 위해서 말이다. 로부 옹고트는 야광중의 품에서 찾아낸 옥병을 힐끔 보았다. 분명히 비어 있다. 어렇게든 그것을 구해서 야광충에게 먹이려 했었는데, 하늘이 도와 그에게 가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야광충은 이제 더 이상 야광충도 아니요, 홉혈귀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완벽한 옥령체인 것이다. 관 옆에는 두 개의 옥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구합유정관에 온갖 약초와 영물을 넣고 숙성시켜 만들어 낸 액체, 구합유정(九合乳情)이라고 부르는 액체였다. 로부 옹고트는 그 항아리들을 뜯어 혈옥관과 청옥관에 한 항 아리씩 부었다. 구합유정은 세 개의 관을 가득 채우기에는 모짜 라는 양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정량이었다. 이제 그가 구합유정관에 들어가 누우면 뚜껑까지 닿을 정도로 차오를 것이다. 그때, 야광충이 눈을 떴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로부 옹고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부님……!" 액체가 묻은 것인가? 아니면 길고 험했던 고통스런 기억이 무 의식 상태에서도 그를 괴롭혔던 것인가? 야광충의 눈가에 엷은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로부 옹고트는 보았다. 로부 웅고트의 눈가에 가는 갈둥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빛은 나타날 때처펌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곧 편안해질 게다. 조금만 있으면……!" 야광충과 혈부용의 관뚜껑이 덮였다. 다섯 시진만 지나면 그들, 야광충과 혈부용은 편안해질 것이 다.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 곳으로 둘이 함께 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못다 이룬 소망과 짐은 그가 대신 지고 가면 될 것이 었다. '내 방식으로 말이지!' 로부 옹고트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관에 들어갔다. 뚜껑이 스르르 소리도 없이 닫혔다. 이제 다섯 시진만 지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기나긴 노력의 결실이……! 제48장 그날 이후 3 7월 28일, 양주부. 영락 칠년 칠월 이십팔일, 양주부의 아침은 살벌한 정경으로 시작되었다. 여섯 개의 성문, 두 개의 수로 입구가 봉쇄되고, 통행이 전면 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렇게 성문을 봉쇄하고 통행을 금지시키는 주체(主題)가 순 쾌나 포쾌가 아니라 남경에서 온 군사들이라는 것이 또한 두려 움의 원인이 되었다. 양주부의 아침을 가장 살풍경하게 만든 것은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기병(騎兵)들 중 상당수가 금의위의 위사들이라는 것이 었다. 한 명만 나타나도 거리에 찬바람이 돈다는 금의위 위사들이 떼로 나타나 돌아다니니 살풍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민들은 저마다 문을 닫아걸고 문밖으로는 고개도 내밀지 않 았다. 유흥의 도시, 소비와 상업의 도시로 중원에 이름난 양주의 거 리에 오늘은 황량한 바람만 쓸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 찬바람이 지부공관에 폭픗을 몰고 왔다. "뭣들이냐? 왜 이러는 것들이야?" 양주지부 왕백곡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호통을 쳤다. 새벽같 이 들이닥친 금의위 위사들이 다짜고짜 그를 포박하고 꿇어앉힌 것이다. 빡! 왕백곡은 휘청 바닥에 쓰러졌다. 자꾸 시끄럽게 굴자 위사 하 나가 그의 머리를 단곤(短棍;방망이)으로 후려갈긴 것이다. 또 다른 위사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켯다. 겨우 고개를 든 왕백곡의 머리에서는 관이 벗겨지고, 피가 흐 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곤 한 방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거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와백곡은 피가 스며들어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앞을 보 았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모추관! 모추관 아닌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모증국은 그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다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읽었다. "양주기부 왕백곡! 몽고족과 결탁해 역모를 꾀한 죄로 압송 (押送), 구금(拘禁)한다. 가족과 친족들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 를 취한다!" 왕백곡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역모라니……? 그런 당치않은……!" "입 닥쳐라! 같이 역모를 꾀한 이십사 가(家)의 지주들에게 같은 조치가 취해지고 있고, 양가장에도 이미 토벌군이 출동했 음을 알고도 네가 계속 변명할 것이냐?" 왕백곡의 고개가 숙여졌다. 모든 일이 이미 끝났음을 알고 절 망해 버린 것이다. 모충국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다가온 위사에게 두루마리 를 넘겼다. "이 안에 그 동안 조사해 온 이자의 무리들이 적혀 있소이다." 위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루마리를 받아 품에 넣고, 군사 들을 향해 명령했다. "샅샅이 수색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끌어내라! 반항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살해도 좋다." 모충국은 고개를 젓고는 밖으로 나갔다. 양가장 토벌작전에 참가하러 가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여기 통천방의 새로운 양주지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단지 이곳에 포박된 자는 남경분방의 방주인 무지권자 포귀재 요, 그를 다그치는 자는 통천방의 당주인 쾌수와 비각인 것이 달랐다. 처리 방식도 관부와는 상당히 달랐다. 그들은 따로 판결을 기 다리지 않는 것이다. 쾌수 양일청이 명령했다. "쳐라!" 슈왁! 무지권자의 목은 몸뚱이와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효과적인 처리 방식이었다. 가족들에 대 해서는 가혹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니 그런 면에서는 관부보다 오히려 관대하다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양주지부의 곳곳에서 비명 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울려퍼지더 니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조용해졌다. 양일청이 말했다. "끝났군!" 이방화가 고개를 22덕이고는 말했다. "양가장으로나 가세. 늦으면 방주님께 한소리 들을 걸세!" "그런……!" 양일청이 두렴다는 둣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은 곧바로 양가 장을 향해서 출발했다. * * * 양가장. 양가장은 로부 옹고트가 기거하는 장원만이 아니라, 그 장원 을 둘러싸고 생활을 영위하는 인근 주민들을 포함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거기 거주하는 인구만 삼천이 넘는 하나의 거대한 부 락이었다. 지금 양가장 주변에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 고 있었다. 허공을 메우고 쇠뇌(釗磊)와 노전(弩箭)이 날고, 양가장 곳곳 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양가장의 정면에 용양위, 좌측에 용강위, 그리고 우측에는 천 책위의 군사들이 포진하고 일제히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후면에는 관부의 군사들이 아니라 평민들이 뒤를 막고 있었 다. 보통 평민이 아니라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자들, 바로 통천 방의 방도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동산 언덕배기에는 금의위가 진을 치 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앙에 선 두 사람이 격전장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 고 있었다. 강소행성 제형안찰사사인 한사동이 입을 벌렸다. "양주부 뇌옥에 갇혀 있던 흑수당의 적도(賊徒)들도 참가시키 셨다면서요?" 장화룡이 짧게 대답했다. "영반대인의 명이셨소." 그는 그것으로는 조금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보충해 말 했다.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말씀이셨지요." 한사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었다. "영반대인께서는 그들에게 호감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관부의 생리였다. 한사동은 그 말을 일단 참가시켜서 그 동안의 범법 행위를 용 서해 줄 근거를 만들자는 것으로 들었던 것이다. 장화룡도 빙긋 웃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요." "글쎄 이 상황에서 달리 도움이 필요할지……?"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는 양가장은 괴멸 직전이었다. 삼 개 위(衛)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현재 압도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무림인들이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 인가?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러하듯 한사동도 무림인들의 존재를 무 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화룡은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홀렸다. "글쎄……, 그럴까요?" * * * 양가장, 지하 석실. "이게 뭐야? 이게 뭐냔 말이다!" 양가장의 지하 석실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울려퍼졌다. "왜? 왜 실패한 거야?" 떨리는 손, 주름살투성이의 그 손! 로부 옹고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법을 마치고 구합유정관에서 나올 때 그가 기대했던 모습은 이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래서는 안되었다. 들어가기 전과 전혀 다름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불사옥령체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천기금서에서도 이 렇게는 말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오랫동안 연구하고 골백번을 반복해 읽어, 이 제는 통째로 외워 버린 천기금서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가 행한 과정 중에 혹시 잘못된 것은 없나 비교해 보 았다.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 책에 나온 그대로, 단 한 자도 어김없이 행했던 대법이었다. 그런데도 실패한 것이다. 책이 엉터리였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책이 엉터리라면 천강시, 천둔귀들 은 어떻게 만들어졌단 말인가? 불사옥령체를 제외한 나머지만 사실일 수가 있을 것인가? 로부 옹고트는 그럴 리가 엎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몰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기 위해 그 수많은 희생 을 해가며 준비했던 것인가? "우와아아아악!" 로부 옹고트는 짐승의 비명 소리 같은 고함을 지르며 청옥관 과 혈옥관의 뚜껑을 밀어젖혔다. 구합유정액에 반쫌 잠긴 야광충과 혈부용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허허허--후하하하하하!" 로부 옹고트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길게 내뱉었다. 그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는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석문이 앞에 나타났다. 쾅! 그의 일장에 석문은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져 내렸다. 로부 옹고트는 석문 밖,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웃음소리 가 그치지 않고 들려 오다가 스러졌다. 한참의 시간이 홀렀다. 관 속에 누운 혈부용의 가슴이 조금씩 움직였다. 잠시 후, 그 녀의 가.슴은 완연히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살아난 것 이다. 혈부용은 눈을 뜨고 일어나 관을 나왔다. 석벽에 밝혀진 횃불 이 그녀의 나신에 묘한 그립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초점없이 흐릿한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다가 야광충을 발견했다. 그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야광 충의 관으로 다가가 앉았다. 야광층이 깨어나서 처음 본 것은 혈부용의 흐릿한 눈이었다. 처음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둣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로부 옹고트의 대법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은 살아 있는 것 이다. 그가 천인혈을 마셨으리라고 생각한 로부 옹고트의 성급함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렬부용은 불사체였지만 그는 아직 완전한 옥령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용!" 혈부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 고 있을 뿐이었다. 야광충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예전에 그녀의 눈은 이렇지 않았었다. 깊은 눈동자 속에 사람 을 끌어당기는 강한 유혹이 숨어 있는……, 살아 있는 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은 눈인 것이다. 그 눈처럼 그녀도 살아 있 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는 관에서 나와 석실을 둘러보았다. 석실 한구석에 의복이 단정히 개어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펼쳐 보았다. 검정색 유삼, 소매가 넓은 유삼 이었다. 야광충의 눈 깊숙한 곳에서 다시 한번 아픔이 스켰다. 이런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이 누군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부인 예충이었다. 로부 옹고트! 그는 아마도 대법이 실패한 충격에 옷을 입을 생각도 않고 나 가 버린 모양이었다. 옷이 있는 주위에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야광충의 물건들 이 있었다. 기대하지 않던 행운이었다. 찾을 생각도 않았던 것인데 이렇 게 옆에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야광충은 유삼을 입고, 손에는 묵린수를 꼈다. 팔목에 주작비 를 차고, 인명권까지 끼자 예전의 모습이 되었다. 그는 머리까지 뒤로 묶고 나서야 비로소 혈부용의 나신을 보 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앉아 있는 그녀는 그대로 두면 언제 까지나 그렇게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야광충은 유삼의 겉저고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씌워 주었 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녀의 손에 두 번 죽을 뻔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죽었 다. 한 번은 등평의 손에, 다른 한 번은 화영의 검에 목이 잘려 서였다. 이제 다시 살아났지만, 그리고 다시 죽고, 또다시 살아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의 눈앞에서 두 번이나 죽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두 번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을 뻔했고, 두 번이나 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아야 했었다. 그것이 로부 옹고트가 원했던 것이라면 그는 진정 악랄한 방법으로 야광충을 고문한 셈이었다. "이제 다시는 남의 손에 죽게 하지 않겠다." 혈부용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의 차가운 눈에 아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무 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혈부용은 거의 완전히 백치로 변해 버렸 던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로부 옹고트!" 야광충은 일어나서 혈부용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석문을 나 섰다. 로부 옹고트를 찾아야 했다. * * * 양가장 후면, 통천방 진지. 가괴자가 물었다. "어떠냐?" 양일청이 대답했다. "보기 좋군요!" 가괴자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양일청의 얼굴이 울상이 되더니 헛기침을 했다. "험, 험! 방주…… 님! 보는 사람도 많은데……, 아이구!" 양일청은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가괴자가 던진 술 잔이 머리에 맞았던 것이다. "저 광경이 보기 좋다고? 그게 다냐? 내가 보기 좋은지 안 좋 은지를 물었느냐?" '어떠냐, 라고 물으면 뭘 물은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양일청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 았다. 가괴자는 다시 물었다. "전황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냔 말이다!" 이제 궁노(弓弩)에 의한 공격은 끝이 나고, 삼면의 군사들이 포위망을 압축해 가고 있었다. 소탕전(掃蕩戰)이 시작된 것이다. 양일청은 말했다. "전황은 둘째치고 우리도 합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 후면만 공격을 안하면 나중에 어떤 비난이 들려 올지 모 르는 것이다. 그러나 가괴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냐!" '그럼 언제야?' 양일청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기다리시는 거라도?" "음!" 가괴자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곧 진짜가 나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린 여기 있어도 돼. 조 무래기들 잡는 데는 우리보단 군사들이 낫지." 그때 옆에서 질문이 들어왔다. "진짜라는 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번강룡 강금척이었다. 그리고 그들 장강수로십팔타의 인원들 이었다. 그들이 양가장 토벌전에 참가한 것이다. 가괴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총타주는 이들과 관계없지 않은가?" "양가장과는 별관계가 없지만 이들과는 관계가 있어서요." 번강룡은 함께 온 세 사람을 가리켰다. 백리극과 도신 도귀였다. "그들은?" "흑수당원입니다." "흑수당!" 가괴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운, 그놈을 아나?" 백리극에게 물은 것이다. 백리극은 그를 힐끗 보고는 짧게 대 답했다. "내 형제요." "형제라고?" 가괴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따위 사기꾼을 형제라고?" 백리극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전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괴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양일청이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잘하면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겠구나!' "나 좀 보자!" 그때, 그는 번강룡이 그를 안됐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왜 저런 눈으로 보지 혹시…… 고수?' 가괴자가 뒤에서 채근했다. "너 뭐 하냐?" 양일청은 진퇴양난이 된 기분이었다. '에라, 그래도 방주보다야 이놈이 상대하기 수월하겠지?' 그가 막 백리극을 보고 꾸짖으려는 순간, 백리극이 눈을 번뜩 이며 싸움터로 달려나갔다. 양일청은 입을 벌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황에 변화가 온 것이다. 부락 중앙에 웅크린 장원의 문이 열리고 수백여 명이 달려나 와 군사들을 향해 덮쳐 가고 있는 것이다. 몸놀림으로 보아 무 림인들이었다. 가괴자가 벌떡 일어섰다. "우리 상대가 나왔다." 통천방도들이 드디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우즉으로 포 진해 있던 혹수당의 당원들도 전진하기 시작했다. 번강룡은 손을 저었다. "우리도 가자." 무림인들에게 군사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양가장에 서 나온 무리들은 하나같이 팔한지옥의 옥졸들로 강호의 일류는 아니더라도 최하 이류에는 들어가는 자들이었다. 용양, 용강, 천책위의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 백리극과 도신 도귀가 뛰어들고, 통천방과 혹수당, 그리 고 장강수로십팔타의 인원들이 보충되었다. 그제서야 전황은 균 형을 되찾았다. * * * 지하복도. 우두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어두운 지하복도에 소름 끼치게 울 렸다. 으스러지는 쪽은 천둔귀였고, 으스러뜨리는 쪽은 야광중 이었다. 로부 옹고트의 흔적을 쫓아가는 야광충의 앞에 천둔귀 가 나타났다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둥! 야광충이 잠깐 움찔했다. 그는 복도의 정면 어두운 곳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독은 내겐 소용없다니까!" 독종독인이 나타나 암습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옥성에서 나올 6, 이미 겪어 본 야광충에게 독공은 별타격이 되지 않았다. 지 금은 그때보다 몇 배는 강해져 있는 것이다. 취리리리릿! 인명권이 소름 끼치는 굉음을 내며 격사되었다. 독종독인이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다. 그러나 독공 외에는 별다른 장기랄 것이 없는 독종독인이었 다. 그 꿈뜬 동작을 놓칠 야광충이 아니었다. 촨! 독종독인의 목에 인명권이 감겼다. 야광충은 그대로 인명권을 잡아당겼다. 촤라랏! 인명권에 박힌 금강석이 맹렬히 회전하며 독종독인의 목을 그 었다. 독종독인의 목은 허공에 떴다가 가라앉았다. 그 피에도 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돌바닥이 연기를 내며 녹 아 들었다. 야광충은 그 자리를 넘어갔다. 혈부용을 안은 채였다. * * * 양가장 정면, 금의위 진지. "이럴 수가?" 한사동은 말로만 듣던 무림인끼리의 싸움을 넋을 잃고 바라보 았다. 거기에는 병력 대 병력의 싸움에서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 었다.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 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장화룡은 그런 그를 보며 비웃었다. 한사동은 무림인들이 가 진 잠재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고족들이 왜 지옥성을 세워 무림고수를 키우려 했는지, 또 왜 군부의 장군이 아니라 무림 세력인 통천방을 흡수하는 데 더 힘을 기울였는지 한사동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이번처럼 미리 음모를 밝혀 내지 않았다면 양가장은 커다란 위헙이 되었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밀리는군!" 장화룡은 뒤를 돌아보고 허리를 굽혀 읍(揖)했다. 뒤에 나타 난 사람은 도연 대사, 금의위의 대영반(大令班)이었다. 도여은 로부 옹고트에게 당한 상처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 지 들것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들것은 팔무시 중 넷이 들고 있었다. 신도불비에게 죽은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그 뒤 를 따르고 있었다. "수에 있어서는 밀릴 것이 없지만 전반적인 실력은 확실히 양 가장이 위로군!" 도연의 말대로였다. 통천방, 흑수당, 장강수로십팔타의 연합 세력보다는 양가장의 무리들, 팔한지옥의 옥쫄들이 평균적으로 실력이 위였다. 거기에 몇몇은 탁월한 실식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장화룡의 눈이 빛났다. "저건 권요 신도불비로군요!" 권요 신도불비가 금도홍안호 가괴자와 싸우고 있었다. 천하 무림의 삼대고수 중 두 사람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권요 신도불비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를 따라 금빛 광망이 솟구쳤다. 가괴자의 도강(7]뿡)이 신도불비를 두 조각으 로 내버릴 것처럼 뻗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앗!" 신도불비는 양팔을 벌리고 새처럼 허공에서 회전했다. 그의 몸은 무게가 없는 듯했다. 쥬왁! 가괴자의 도강이 신도불비의 옷자락을 스치고 빗나갔다. 신도불비는 어느새 옥졸 중 한 명의 어깨를 밟고 서 있었다. 그는 한 발로 옥졸의 팔을 딛고, 다른 한 발로는 그 손을 쳤다. 옥졸이 들고 있던 검이 허공에 떴다. 신도불비의 발이 검의 뒤를 찼다. 슈아앙! 검은 마치 어검술이라도 발휘한 것처럼 가괴자를 향해 날았다. 가괴자의 도강이 넓게 퍼지며 몸을 가렸다. 검은 거기 맞아 부스러지며 튕겨졌다. 그러나 그 순간에 신도불비는 땅에 내려서서 마보(馬步)를 취 하더니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치고는 권을 천천히 내밀고 있었 다. 마치 한 손을 받치고 있지 않으면 무거워서 팔을 못 움직이 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가괴자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는 그 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권요 신도불비의 위명을 확정지어 준 막강한 위력의 권법, 단 혈철권(丹血鐵拳)이었다. 가괴자는 두 손으로 도를 움켜쥐고 신도불비의 주먹을 향해 뻗었다. 팡망이 번뜩였다. 도강과 권력(拳力)이 마주치기도 전에 땅바닥의 홅이 일어나 날리고,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졌다. 콰앙! "대단한 위력이군요!" 장화룡이 감탄사를 발했다. "대단하긴 하지. 그러나 지금 자네가 생각할 것이 그것만이 아닐 텐데?" 도연의 말을 듣고는 장화룡이 얼굴을 붉혔다. "우리도 이제 뛰어들까요?" 도연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더 두고 보세. 변수가 생겼어!" 장내에 몇몇 사람이 새로 뛰어들었다. 화영과 혈문룡, 그리고 놀랍게도 흑웅과 황룡이었다. 가괴자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꺾었다. 그는 신도불비의 단혈철권을 이길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모르지만 지금은 그랬다. "젠장! 너무 편안하게 지냈군!" 후회해 봐도 이제는 늦은 것 같았다. 그의 머리를 향해 신도 불비의 발이 짓쳐 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괴자는 눈을 감아 버렸다. 콰앙! 신도불비는 뒤로 껑충 뛰어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헌원각 (軒轅脚)을 막아낸 사람을 보았다.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삼십대의 사내, 손에는 기형적으로 긴 장군검을 들고 있는 백리극이었다. 백리극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일체의 변화를 배제하고 단순 하게 찔러들어오는 검법이었다. 그러나 신도불비는 안색이 변해 급히 권을 휘둘러 막아 갔다. 꽈아앙! 뇌성을 방불케 하는 굉음이 울렸다. 신도불비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손이 시큰거리며 아파 왔다. '단혈철권을 막아내는 검법이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신도불비의 안색이 다시 한번 변했다. 놀랍 게도 백리극은 충격을 받지도 않았는지 다시 검을 휘둘러 그의 머리를 비스듬히 때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꽈앙! 신도불비는 옆으로 비스듬히 몇 걸음을 옮기고서야 간신히 중 심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라본 백리극은? 백리극은 그의 앞에 없었다. 우우우웅! 신도불비는 머리 위를 쳐다보고는 꽈랗게 질려 버렸다. 백리 극은 거기,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백리극은 한 순간 태양 속에 파묻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햇살! 태양에서 뻗어 나오는 한 줄기 햇살처럼 유성검이 뻗어 오고 있었다, 꽝! 신도불비는 더 이상 그를 알아볼 사람이 없는 형체로 변해 버 렸다. --안으로 가자! 화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던 것이다. --안으로 가서 그를 찾아야 한다. 화영은 깨달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직접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황룡이었다. 황룡이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그는 공중에 떠서 날아가고 있는 황룡의 뒤를 따라 달렸다. 콰앙! 철목(鐵木)으로 몇 겹을 대어 만든 양가장의 거대한 정문이 황룡의 일 장에 쪼개져서 열렸다. 그들은 그 안으로 사라졌다. * * * 지하복도. 그는 묘하게도 공중에 떠서 버티고 서 있었다. 아래위가 같아 보일 정도로 둥근 체구의 사내였다. 그의 뒤에는 석문이 보였다. 아마도 저 석문의 뒤에 로부 옹고 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괴물이 마지막 관문인 셈이었다. 야광충은 혈부용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복도에 기대어 섰다. "기다려. 곧 처치하고 올게." 그녀가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광충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야광충을 보더니 사내는 한 손을 치켜 들었다. 화악--! 갑자기 복도가 밝아졌다. 사내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복도 가 밝아진 것은 그 불빛 때문이었다. 야광충은 그 순간 그가 누군지, 아니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불의 괴물, 아수라이화귀였다. --아수라이화귀를 만나면 조심해라. 현음지맥인 너에게는 천 적이라 할 수 있지. 귀조가 예전에 한 경고였다. 야광충은 왠지 위축이 되는 것을 느꼈다. 아수라이화귀의 손 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는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그로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생소한 감정. 아수라이화귀의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점점 커지고 거세졌 다. 그의 반신(半身)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이윽고, 아수라이화 귀는 완전히 화염덩어리로 화해 공중에 떠 있었다. 야광충은 인명권을 손에 쥐었다. 멀리 떨어져서 이것으로 공 격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아수라이화귀의 손이 들렸다. 아니, 손 부분의 불길이 들렸 다. 그 손이 그를 향해 뻗었다. 놀랍게도 불길이 길게 뻗어 그의 목을 직접 노렸다. 취리리릿! 인명권이 허공을 가르고 그 불길을 잘랐다. 파아앙! 중간이 잘렸는데도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야광충은 순간적으 로 이매십보를 펼쳐 간신히 불길을 피했다. 불길은 바닥에 떨어져 타오르고 있었다. 돌까지 태워 버리는 가공할 위력의 불길이었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옆으로 스쳐간 것만으로도 그렇게 된 것 이다. 화악! 불길이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야광충은 혈염수를 날렸다. 퍼엉! 화염이 날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수라이화귀는 혈염수에 정통으 로 맞고도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야광충은 문득 아수라이화귀의 또 다른 위협을 깨달았다. 빗맞고 떨어진 화염들이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타오르 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자신도 모르게 화염 울타리의 한가운데 들어온 것처 럼 되어 버렸다. 그보다 우려되는 것은 혈부용도 그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었다. 혈부용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발 아래로 불길이 타 들어오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였다. 야광충의 표정이 변했다. 또다시 그의 앞에서 혈부용이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남의 손에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야광층은 혈부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 로 사라졌다가 혈부용의 앞에 나타났다. 극도로 빠른 신법으로 불길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아 수라이화귀의 불길은 무서웠다. 처음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옷이나 몸 어디에도 불이 붙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것이 착각임을 곧 깨달았다. 옷소매 한곳 에서 작은 불똥이 나타나더니 곧 불길로 변해 타올랐다. 야광충은 급히 옷을 벗어 던졌다. 파아아! 그를 향해 다시 화염덩어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피할 틈도 없 는 순간이었다. 슈팡! 금빛 물체가 그와 화염 사이를 막았다. 야광충은 반갑게 소리쳤다. "황룡!" 황룡이 날아들어와 화염을 몸으로 받은 것이다. 묘하게도 화 염은 그의 몸에는 옮겨 붙지 않았다. 황룡이 손을 치켜 들며 입 속으로는 주문을 외었다. "오옴!" 황룡의 몸 전체로부터 가공할 위력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천강마벽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복도가 흔들리고, 그의 몸 주변에서부터 순간적으로 화염이 꺼졌다. 그리고 그 기세는 계속 밀고 나아가 아수라이화귀를 석 문으로 밀어붙였다. 콰앙! 화염은 수많은 불꽃들로 변해서 꺼졌다. 아수라이화귀는 석문 의 그을은 자국으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끼이익! 석문이 열렸다. 넓은 석실이었다. 로부 옹고트는 석실 정면의 돌의자에 앉아 그들 세 사람을 바 라보고 잇었다. "왔느냐?" 로부 옹고트가 말했다. 그 목소리 어딘가에 광기(狂氣)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야광충은 생각했다. "물어 볼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야광충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왜 실패했느냐? 그리고 넌 어떻게 살아났느냐?" 야광충은 그가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살 아났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는데도 기다리 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딴는 말을 연속해서 한다는 것은 분명 그가 아는 사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순순히 대답했다. "난 천인혈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 로부 옹고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래, 그거구나! 분명히 내 실수는 아닌 뭔가가 있다고 생각 했다. 내 실수는 아니었어. 네가 실수한 거야. 왜 사정을 마시 지 않아 대업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느냐?" 역시 뭔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질문을 했다. "왜 내가 천인혈을 마셨다고 생각했습니까? 어떻게 그리 쉽게 믿었습니까?" "넌 인간이 되었으니까!" 로부 옹고트가 별이상한 것을 다 물어 본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천인혈을 마시지 않으면 넌 그냥 흡혈귀면 흡혈귀고, 야광충 이면 야광충이지. 하지만 넌 인간이 되었어. 그래서 마셨다고 생 각한 것이다. 어떻게 천인혈을 마시지 않고도 인간이 되었느냐?" "난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흡혈귀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넌 인간이야. 내 눈은 못 속인다. 뭘 어떻 게 했길래 인간이 되었느냐? 왜 천인혈도 마시지 않고 인간이 되어서 내 오랜 숙원을 깨 놓은 것이냐?" 로부 옹고트는 점점 더 홍분하고 있었다. 야광충은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는 완전히 광인이 된 것이다. 우우우웅! 로부 옹고트가 갑자기 팔을 벌려 그들을 공격해 왔다. 천강마 벽이었다. 황룡이 같이 팔을 벌렸다. 역시 같은 천강마벽이었다. 로부 옹고트의 것이 광폭하고, 음습하다면 황룡의 그것은 어딘지 서 하고, 광명정대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파아아앙! 석실의 중간 부분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주위 사람들이 날려가 버릴 듯한 강한 선풍(旋風)이었다. 화영의 몸이 날았다. 바람에 날려간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화영은 오히려 바람 속으 로 파고들어 로부 옹고트에게 접근해 갔다. 그의 검이 눈부신 광망을 번득이고 있었다. 야광충은 위로 떠올랐다. 취리리릿! 그의 손에서 인명권이 날았다. 로부 옹고트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한 순간에 황룡은 정면에서, 화영은 비스듬히 아래에서, 야광 충은 위에서 공격해 간 것이다. 절요한 조화였다. 로부 옹고트가 몸을 뒤틀었다. 화영의 검이 그의 아랫배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인명권 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미시출오종!" 귀영종 오대신법의 최고봉인 미시출오종이 방금 펄쳐진 것이다. 로부 옹고트는 공격을 피하자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다. 그 의 손에서 푸른 번개들이 터져 나왔다. 황룡이 손을 둥글게 모았다. "오옴!" 그의 손으로부터 둥근 금라 공이 생기는가 하더니 이내 거대 한 막이 되었다. 보리무상강기의 최고봉에 도달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성취였다. 파파파앗! 푸른 번개들이 금빛 막에 부딪쳐 사라져 갔다. 화영이 로부 옹고트의 좌측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의 검이 로 부 옹고트의 옆구리를 베었다. 야광충은 화영과 반대편으로 붙으며 손을 떨쳤다. 혈염수가 그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의 공격은 무위에 그쳤다. 로부 옹고트는 그 자리에 있는 둣 없는 둣 그들의 공격을 홀려 보내었던 것이다. 야광충의 눈빛이 파랗게 물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는 인명권을 왼쪽으로 쏘아 보내며 자신은 오른쪽으 로 달렸다. 취리리릿! 석실 안이 소음으로 가득 찼다. 화영이 그의 뜻을 이해하고 검을 정면으로 뻗었다. 검끝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더니 긴 빛이 되어 앞으로 뻗었다. 검강이었다. "오오옴!" 황룡이 순간적으로 무수히 많은 장영을 만들어 로부 옹고트에 게 날렸다. 그 장영이 로부 옹고트의 앞을 가득 메워 버렸다. 로부 옹고트는 손을 올려 천강마벽을 시전했다. 황룡이 만든 장영들이 맥없이 스러지고, 화영의 검강이 한 순간 휘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이미 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취리릿! 인명권이 그의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아까 왼쪽으로 쏘아 보 낸 그 인명권이 로부 옹고트를 돌아서 한바퀴 원을 그린 것이다. 야광충은 손을 내밀어 인명권을 받았다. 치이이잉! 인명권의 줄이 맹칠하게 줄어들었다. 로부 옹고트가 경악하며 손으로 목을 막았다. 그 위로 인명권 의 사슬이 감겨 들었다. 촤아앙! 인명권의 줄은 완전히 감겼다. 야광충은 로부 옹고트의 바로 뒷등에 매달려 인명권을 양손으 로 잡아당겼다. 로부 옹고트는 손으로 인명핀의 줄이 당겨지지 않도록 막으려 애썼다. 그의 온몸의 혈관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황룡이 양손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팍! 황룡의 양손은 로부 옹고트의 가슴에 완전히 박혀 들었다. 로 부 옹고트의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야광충은 전신의 공력을 양손에 모아 맹렬하게 줄을 잡아당겼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힘이 한 순간 사라졌다. 야광충의 얼굴로 피가 튀었다. 로부 옹고트의 머리는 저만치 에 뒹굴고 있었다. 잘려진 목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야광충의 얼굴로 뿜어지고 있었다. 화영은 조용히 서서 검을 거두어 넣었다. 황룡은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공중에 뜬 채 진언을 외우고 있었다. 야광충은 아직도 인명권을 양손으로 잡고 말없이 그 피 묻은 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방울이 떨어졌다. 사부의 피였다. 세상과 그를 연결하던 마 지막 줄이 끊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스스로 끊은 것이다. 그의 눈에는 절망의 잿빛 그림자만 남았다. 양가장은 완전 토벌되었고, 싸움은 끝났다. * * * 8월 15일, 흑수당 총당. "대막에는 왜 가려고 하나?" "죽기 위해서!" "왜 죽어?" "살 이유가 없으니까!" "혈부용은 왜 그렇게 데리고 다니지?" "죽이기 위해서. 이제는 다른 사람 손에 죽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이려고." "왜 지금 안 죽이고?" "지금은 죽일 방법을 몰라서. 언젠가 죽일 방법을 알게 되면 그때 죽이려고……." 영락 칠년(서기 1409년)에 있었던 구복의 막북정벌(漠北征 伐)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장군 구복 이하 십만군 전원 전멸이 라는 비참한 실패였다, 진노한 영락제는 다음해인 영락 팔년(서기 1410년)에 오십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전초대(前哨隊) 로 야광충과 혈부용이 떠났다. 야광충은 죽기 위해서, 그긱고 혈부용은 야광충이 죽이기 위 해서라는 우울한 이유 때문에 간 원정길이었다. 야광충은 양가장 싸움이 끝난 후 지금까지 내내 우울하게 지 냈다. 그의 말로는 인간세계와 그를 연결하던 마지막 끈이 끊어 졌다는 것이다. 화영은 그것을 부정했다. 로부 옹고트가 그를 인간이 되었다고 한 것은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야광충은 이미 인간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은 어쩔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야광충은 떠났다. 떠날 때 그가 가져간 것은 번강룡이 가져온 검 두 자루뿐이었 다. 그는 대막의 하늘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호접몽을 추어 보짓 다고 했다. 야광충 다음의 흑수당주는 나, 진운이 맡았다. 양가장 사건 때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에라기보다는 달리 하고 싶어하는 사 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칠십 평생 처음으로 세력을 맡은 기분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 울 정도로 묘하다. 게다가 야광충은 마원을 부당주로 임명해 놓 고 갔다. 그러면 내가 아주 나쁜 짓은 못할 거라는 것이다. 나 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말하니 그렇게 될 것 같은 기 분이 되었다. 야광충을 따라간 사람도 있다. "왜 그를 따라가려고 하지? 그는 혈부용만 좋아하는데?" "나는 그만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좋아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표시 나지 딴게 좋아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겠지." "그래, 나도 가겠어." "왜?" "원도살을 묻어 주기 위해서." 야광충이 떠나고 난 다음날, 월몽영과 혈문룡이 뒤를 따랐다. 월몽영은 야광충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혈문룡은 원도살을 북해에 묻어 주기 위해서라고는 말했지만 사실은 월몽영을 좋아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자네도 그를 따라가나?" "그래." "왜?" "예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곳이거든." "자네 두 사람도 당연히 따라가겠군." "……!" 백리극은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며 야광충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설마 그가 그런 방식으로 가기를 원했을 것인가! 아마도 백만대군을 이끌고 가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도신 도귀는 벙어리라 말없이 그냥 백리극의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넨 왜 가나?" "그를 따라가면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거든." "자넨 그럼 왜 안 따라가나? 자네만은 따라갈 줄 알았는데?" "나는 그를 중원에서 기다리겠네. 언젠가 돌아올 테니까." 그들 일곱 사람이 떠난 후 그 뒤를 쫓아간 사람은 의외에도 좌검자 하나였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또 하나의 의외는 화영이 그를 쫓아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중원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또 한 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무당파 운학의 도전장 을 받은 것이다. 운학은 화산논검대회를 대비해서 무당이 키운 고수였다고 했다.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있다. "저…… 라마님도 따라가십니까? 황룡이 뭐라고 애기했지만 못 알아들었다. 흑웅의 말에 의하 면 서장 황룡사로 돌아가는 거라고 했다. "그럼 너는 어디 가냐?" "라마님 따라서요." 이제 나는 혼자다. 아니, 나는 흑수당과 함께 남으니 혼자는 아니다. 하지만 쓸쓸하기는 하다. 가는 사람은 가고 남는 사람은 남는 법이다. < 大尾 > 후기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내겐 다른 어떤 요구보다도 절박한 요 구다. 이전에 쓴 것과는 단 한 가지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 설혹 그렇게 해서 전보다 못해졌다는 말을 듣더라도 전과 같다는 말 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글을 쓰는 것이 고통스럽기보다는 재미가 있다. 내게 글쓰기란 아직은 도락적(道樂的)인 성격이 강한 때문일 것이다. 누구를 재미있게 해주겠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 스스로가 재 미있어서 쓰는 초보자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일까? 만약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오 래 그런 기분을 간직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 단 한 가지라도 새로이 시도하고 변화하는 것이 없다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우선 재미가 없어서 견디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야광충(夜光蟲) 1부>를 내놓고 어떤 독자에게서 좌백이 쓴 책이 맞느냐는 질문을 들었다. 그분은 질책의 의미로 하신 말일지는 몰라도 나는 칭찬으로 들었다. 형편없어졌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전과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편으로는 겨우 두 작품 내놓고 벌써 '좌백은 이렇게 쓰는 사람이다.'라는 인상을 주었던가, 라고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나는 한 번 쓴 식으로 다시 쓰기는 싫다. 그것은 나보다 책 속의 주인공 스스로가 용납을 않는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면 이야기도, 분위기도, 심지어는 서술 방식까 지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하 한 번 썼던 성격의 인물을 다시 쓸 생각도 없다. 대도오도 흑저도 <대도오(大刀傲)>와 <생사박(生死搏)>에만 유일한 주인공이 될 것이다. 야광충 역시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세상은 넓고, 인간군상(人間群像)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 며 홀러간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과 끓어 넘치는 이야깃거리 속 에서 항상 같은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 옳을까? 아니, 가능하기 는 한 이야기일까? 내 책상 서랍 속에는 아직 자기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많은 주인공이 있고, 그들은 조금 더 매력적이고, 혹은 덜 매력 적이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다른 주인공과 같은 인물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요구하고 있고, 나는 그런 이야 기들이 준비되는 대로, 그리고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그들을 세 상에 내보이고 싶다. 어느 날 서랍을 열었더니 더 이상 기다리는 주인공이 없다면 그때는 또 다른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백리극을 주목해 보신 분이 있다면, 그리고 그분이 야설록 대표의 무협을 좋아하신 분이라면 쉽게 알 수 있 을 텐데, 백리극은 사실 필자가 독자 시절 대단히 좋아했던 <북 경야(北京夜)>의 '최세옥'이라는 주인공의 성격을 옮겨 온 것이 며, 그 이름과 무공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의 '백리자허'라는 이름과 그의 검법인 '벽력검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당도사 운학과 장삼봉이 주고받는 시구 역시 야설록 대표의 <도지산 검지림(刀之山劍之林)>에 나온 시구를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야설록 대표께 이 지면 을 빌어서 감사드리고, 그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내게 준 감동과 영향력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겸손하게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야광충>은 무협을 쓰겠다고 여기 야설록 프로에 들어올 때 구상해서 어느 정도 써 온 작품이다. 이제 끝을 맺고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나로서는 처음 출발점을 돌이켜본 둣해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 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미에서이다. 긴 이야기에는 질렸기 때문에 다음에는 짧고 쉬운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중인데 어떤 이야기가 될는지, 또 생각한 대로 될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조만간 다른 작품으로 여러분을 다시 찾아뵙게 되길 바란다. 항상 들어가는 말이지만 그때마다 진심으로 야설록 대표와 용 대운 선배께 감사를 드린다. 매작품마다 그분들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고생해 주신 증판사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특별히 통신으로 알게 된 이홍기(ID:ludra) 님에게 감사드리 는 것은 사무실 동료들과 대표를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야광충 을 읽고 격려를 해주신 것과 이 책 뒤에 실리는 도량형표(度量 衡表) 작성에 도움 주신 것에 대해서다. 겨울은 추워도 마음까지 얼어서는 안될 것이다. 독자 제위의 건승을 빈다. 左栢拜上 중국의 도량형(度量衡) 우리는 흔히 증국의 도량형을 1척(尺)은 30.3cm, 1장(丈)은 3.03m라는 식으로 알고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어느 날 문득 그 문제를 생각해 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게 그저 어림짐작.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그것도 현재가 아닌 옛 증국올 배경으로 글을 쓰면서 정확한 도량형도 모른다는 것이 창피해 그 자세한 사 항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맙소사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라도 웬 시대마다 그렇게 다 르고 지역마다 편차는 또 그리 많은가? 게다가 용도에 따라 또 다르다니!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지역마다 마지기의 평수가 서로 다르고 돼지고기와 상추의 한 근(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용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고 그냥 사용했다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전국 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도법(度法), 형석(衡石), 장척(丈尺)을 하나로 하고 수레는 바퀴 사이의 거리를 같게 하며, 문서에 쓰여지는 문자를 통일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칙(詔則)을 공포하고 표준기(標準器) 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반포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정한 1척(尺)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보면 23, 이 기준이 한나라 때까 지 내려왔다. <삼국지>에 나오는 팔 척 장신이니,구 척 거한이니 하는 사내들을 알고 보면 2m 40cm나 2m 70cm의 거인들이 아니라 1m 80cm와 2m의, 그냥 키가 큰 사람들인 것이다, 이 아담한 척도가 이후 점점 커져서 명나라 말에 오면 1척이 32cm 이상이라는 정도까지 증가하는데, 그 이유는 재미있게도 세금 때문이었다. 모 중국의 조세제도는 실물지조(實物地租), 즉 베나 쌀 같은 실물을 받는 것을 원 층으로 했다. 같은 베 10자[尺]를 세금으포 걷어도 23cm가 기준이면 230cm밖에 안 되지만 32cm가 기준이면 320cm를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게에 있어서도 마찬가 지였다. 즉, 곡물, 포목 등 현물을 증심으로 하는 납세제도하에서 봉건지배층은 도량형의 규격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의 이득을 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실은 척도의 분화라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경제활동에 사용되는 규격이야 권력자들의 이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천문관측에 사용되는 규격이나 토꼭사업에 관련된 규격은 승게 변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문척(天文尺)·영조척(營造尺)등 경제활동과 분톼된 청도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일레로 명나라 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천문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척도인 천문척(天文尺)은 진시황 이후로 크게 변함이 없어 24.5이지만 건축용 자인 영조 척(營造尺)은 32cm, 재봉용(裁縫用) 자, 즉 포목을 잴 때 쓰는 자인 재의척(裁衣尺) 은 34cm였다. 이런 기준에 근거해 글을 쓸 수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리 승지도 않을 것 같다. 예 릍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그 비석에서 동쪽으로 10척, 남쪽으포 다시 10척을 가면 거기 비급을 숭겨두 었다. 내가 죽거든 그걸 파내어 익혀서 복수를……, 으, 으, 으……!" 사부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 그렇게 유언하는데 제자가 죽어가는 사부의 어깨를 잡 고 흔든다. "사부님 그게 천문척에 근거한 거리입니까, 아니면 영조척? 10척이면 나증에 얼마나 차이 가 나는데 그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십니까? 가시려거든 정확히 가르쳐 주고나 가셔야죠!" 별로 재미도 없고 짜증나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몇몇 작가들끼리 의논을 했다. 우리들만이라도 기준을 정해 눙고 도량형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현대 중국의 도량형이다.즉, 1척을 33.3cm로 보는 도량형이다. 참고 삼아 말해 두지만 1척이 30.3cm라는 것은 우리나라 단위이다. 마침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하이텔 통신을 통해서 이홍기님의 화폐와 물가에 관 한 자료를 얻게 되어 이 두 가지를 같이 정하기로 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리 정롸한 척도를 끝요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층 기준을 잡아 놓았으니 보시면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올까 생각한다. 첫째로 각 단위의 상호관계는 다음과 같다. 길이의 단위는 분(分)·촌(寸)·척(尺)·장(丈)·인(引)으로 커진타. 뒤에 나온 것이 앞 단위의 열 배이다, 용적의 단위는 약·합(合)·승(升)·두(斗)·곡(斛)으로 커진다. 역시 뒤가 앞의 열 배. 무게의 단위는 조금 달라서 24수(銖)가 1냥( ), 16냥이 1근(斤), 30근이 1균(鈞), 4균이 1석(石)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무게의 단위 가 획일적인 체계화에 대해 가장 큰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사람의 키를 지칭하는 수식어인 오척단구, 칠척장신 등등의 표현온 그대로 사용한킥. 엄밀하게 길이를 재어서 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수식(修飾)이라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5척이 아니라 6척에 조금 옷 미치는 키면 어떤가. 그냥 키 가 작다는 뜻만 전해지면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 길이 1장(丈) : 3.33m 1척(尺) : 33.3cm--한 자[尺]라고 부를 때도 같다. 1촌(寸) : 3.33cm--한 치(寸)라고 부를 때도 같다. 1리(里) : 500m * 이것도 우리 나라와 달라서 흔동이 되겠지만 옛날에는 1리가 2km인 때도 있었으니, 그것 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무게 1근(斤) : 500g 시간 한 시진(時辰) : 2시간 일 각(刻) : 15분 한 식경(食頃) : 30분--밥 한끼 먹을 시간이라고도 한다. 일 다경(茶頃) : 15분--차 한잔 마실 시간. 무협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도량형을 대층이나마 이렇게 정한다. 여타의 단의는 다음올 기준으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중국의 화폐와 믈가 *1 무렵소설을 보면 은자 열 냥이 4인 가족의 한 달치 생활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 과연 옛날 중국의 물가는 어느 정도일까? 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내 생각엔 은자 열 냥이라신 일반농민의 일 년치 수입 이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고대 중국 준추전국(春秋戰國)에서 한초(漢初)까지는 일반 거래엔 동전이, 상업적 거래엔 황금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황금과 구리의 가치비율이 1:130 정도였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싼 값의 금이었다, 고대 중국에 황금이 어느 정도로 풍부했나를 알 수 있다. 동전은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제작되다가 진의 통일 이후 등근 모 양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반량전으로 그 형태가 통일된다. 이것은 오수전으로 불리 며 후대에까지 유통된다. 그러나 그토록 픗부하던 황금도 서역과의 교역이 시작되며 급격히 유출되어 후한 (後漢)으로 들어오면 거의 현물경제로 바휀다. 우리가 흔히 보는 0.1냥짜리 동전은 당나라의 개통원보가 시작이며 송나라 때에 급격히 보급된다. 송나라 일대에 보급된 동전만 약 2억 관, 즉 2000억 개의 동전이 보급된다. *2 당시의 물가 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당현종의 개원 년간에 쌀 1석 비단 1필이 동전 200개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번영을 나타내기 위해 들먹인 수치이고 또 송대에는 급격히 보급린 화폐로 인해 이보다는 횔씬 물가가 높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막대한 양 의 화폐가 민간에 보급되고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1 하이텔 무림동호회 게시판에서 발췌. 올린 이는 이홍기님(HITEL ID:Lrudla) *2 약간의 절2전믈 포함해도 1500억 개 이상온 화실히 생산되었으며 증국의 구리광산은 송대에 거의 고갈되었다. 원래 상업의 발달로 인해 화폐의 유통량이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송대에 한하여 말하자면 오히려 정부에 의해 강제로 보급된 막대한 양 의 화폐로 인해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발전이 일어나는 약간은 기이한 일이 일 어났다. 은이 본격적으로 화폐로 사용된 것은 송대 증반부터로 보이고 어음이 둥장한 것 도 이때포 보인다.원대에 들어와서는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지폐--교초--가 사용 되는데 지폐가 등장한 것은 금나라부터지만 이때의 지폐는 남발로 인해 가치가 없었 고 원대의 지폐는 통화가치를 지닌 지페로 널리 통용되었다. *3 원대에는 중통초와 지원초 두 가지 지폐가 사용되었고 중통초 5에 지원초 1의 가 치로 통용되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은과의 태환이 보증되지도 않는 지폐가 가치를 잃지 않고 통용되었냐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원대의 지폐 는 은과의 태환이 아닌 소금과의 태환이 보증되었다. 증국에서 소금이 국가의 전매품이었고 높은 세금이 매겨겨 있던 것올 생각하면 될 것이다. 증통초는 처음엔 태환지폐였지만 은의 부족으로 인해 불환지폐로 바뀌고 그 가치 가 급격히 떨어지자 지원초를 발1하여 이를 수습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며 이러한 지폐의 가치가 일거에 소멸하여 휴지가 되어 버리 자 중국에서는 자본의 총소멸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친상과 주원장의 개인 적인 신념으로 인해 명대 초기에는 현물이 화폐의 역할을 한다. *3 마르코 포로의 동방견문륵믈 보면 이에 대해 신기한 눈으로 보는 것이 보인다. 명대초기에는 은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동전도 한정적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증기에 와서는 은이 실질적인 화세로 사용되며 국가의 재정도 은으로 처리되었다. 당시의 물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강남의 조세 400만 석이 은 100만 냥으로 납부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픗년에는 은 1냥에 쌀 8, 9석 정도 했다고도 한다. 흔히 무렵지에 나오는 황금 100만 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인지 알만 할 것이다. 당시 국가의 1년 세입은 명초에는 은 2백만 냥올 조금 초과한데 불과했고--이것 으로도 흑자를 유지했다고 한다.--전쟁으로 인해 증과세가 부과되었을 때도 은 1천 만 냥을 넘기는 일이 없었으며 임진왜랄에 응원군을 보내는 데 소요된 몇 백만 냥 가량의 은이 명나라의 존폐를 흔들어 눙기도 했다. 욀씬 픗요해진 청나라에 와서도 국가의 1년 세입은 몇 천만 냥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황실의 사치나 관리들의 축재 액수 등을 보면 당시 민간의 상업활동이 국가 재 3에 비해 상당히 활기차고 픗요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기록에 담비의 모피로 만든 최고급 의복이 은 3냥이었다 하며 흥루몽에는 은 1냥의 월급을 받는 자리로 가 기 위한 암투가 보이고 있다. 인삼은 귀물이었으며 은과 같은 무게로 거래되었다 한다. 황금과 은의 롼율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20:1 이상으로 추측된다. *4 은과 동전의 환울은 공식적으로는 은 1냥에 동전 1관--1000문--이지만 민간에 유포된 은의 양에 따라 달라서 은 1냥의 가치가 동전 700개 정도에서 3000개 사이 를 왕복한 걸로 보인다. *5 *4 마르코 플로의 동방견문륵을 보면 6:1이니 8:1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것은 특수한 이야기로 보인다. *5 동전의 유통량이 막대했던 송대에는 4000개 이상으로 거쾌되었다는 기륵이 있다. 흥루몽에 보면 1냥의 가치가 동전 2000개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봐서 우리가 보는 무협이 거의 명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얼마나 평가절하된 화폐를 사용하는지 알 것이다. 결국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협에서의 화폐가치는 은 1냥이 동전 2000개 정도로 보고 황금과 은의 비울온 1:20 정도, 은 1냥에 쌀 2석에서 5석 정도 를 적절히 섞어서 사응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